여성 명창 박녹주 선생은 를 즐겨 불렀다. 하릴 없이 늙어가는 신세를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조선 후기 가사(歌辭)다. 1969년, 명동극장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 있던 조업 도망하고 맑은 총명 간 데 없어 / 묵묵무언 앉았으니 불도하는 노승인가 / 자식 보고 공갈하면 구석구석 웃음이요 / 오른 훈계 말대답이 대접하여 망령이라 / 어이 아니 한심하랴 청천백일(靑天白日) 빨리 가니 / 일거월석 지날수록 늙을 밖에 할 일 없다 …
◇운동선수, 은퇴시기가 빠른 직업
그렇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희대의 명창도 때가 되면 은퇴한다. 소설가 김유정이 ‘잠자는 나의 가슴에 장미 한 송이가 꽂힐 줄이야’라는 명문을 바쳤으며 정부까지 나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어도,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가창을 멈춰야 했다. 1979년 6월, 선생이 영면에 들었을 때도 여지없이 식장에서는 같은 노래가 은은히 흘렀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음악가에게 은퇴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상이다. 현실에서는, 꼭 쥔 주먹에서 힘을 풀고 가진 것을 놓아야 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
스포츠 선수에게 은퇴는 특히 더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직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언제 필드를 떠나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하고 남은 세월 동안의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언제가 그때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알아서 멈추는 것일 터.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은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를 은퇴 시기로 꼽는다. 움직이는 것에 민감해야 할 종목에서 동체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생각만큼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야말로 은퇴 시기라고 말하는 선수도 많다. 눈은 필드를 향해 있지만 종종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젊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면 은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은퇴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할 수 있을 법한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프로스포츠인 야구. 이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은 여간해서 은퇴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한때 리그를 호령했던 스타 선수들도 나이가 들고 성적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이 가라앉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구단으로부터 방출 선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종범 선수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양새가 가장 안쓰러웠던 경우. 그는 불세출의 스타였다. 부채꼴 그라운드에서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절정의 활약을 펼쳤다. 아쉽다면 일본 프로야구에까지 진출한 뒤의 성적이 부상 탓에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점.
◇자의반 타의반 떠나야 하는 이유
다행히 국내로 유턴해서는 다시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3년에는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을 옮긴 타이거즈에서 ‘20-20클럽’ 가입 선수가 되었다. 홈런 스무 개 이상, 도루 스무 개 이상의 다양한 활약을 서른셋의 나이로 기록한 것이다.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고령 기록이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을 맡아 WBC 클래식 국제야구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은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WBC 클래식 이후. 2006년 시즌 2할4푼2리, 2007년 1할7푼2리를 기록하며 “이종범도 끝났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두 시즌 모두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100게임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움은 더 컸다.
놀랍게도 이종범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2008년과 2009년 시즌에 100경기 이상 출장해 3할에 근접한 성적을 남긴 것이다. 소속팀은 2009년 시즌 대망의 포스트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쾌거에 이종범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점을 모르는 야구팬은 많지 않았다.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구단의 행보. 오랫동안 같은 팀에서 뛰며 미증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공공연히 은퇴 압력을 행사했다. 2011년 시즌 이종범의 성적은 97경기 출장, 타율 2할7푼7리, 출루율 3할3푼7리였다. 그 정도면 어떤 팀에서든 2번이나 6, 7번 정도 타순의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지표. 따라서 구단의 은퇴 압박을 단지 성적 문제로만 보기는 쉽지 않았다.
2012년, 끝내 이종범은 유니폼을 벗었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결정”임을 강조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국을 떠나며 말한 것처럼 ‘자의 반 타의 반’의 등 떠밀린 듯한 은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이종범의 은퇴를 바라보는 뒷맛은 더할 수 없이 씁쓸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베테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이 궁지에 몰렸을 때 더그아웃에 이종범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형님’이 ‘예전에도 이런 위기 많이 이겨내봤다’는 눈치로 떡 버티고 있으면, 그것이 젊은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칼자루 쥔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연봉 축내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할 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좀 다르다. 프로야구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리그인 만큼 이종범과 비교될 만한 에피소드가 종종 벌어진다. 올해에도 여지없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선수들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은 올해 마흔 한 살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선수와 내년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치로는 2016년 시즌을 보장받았고, 2017년 시즌에 계약하지 않으면 50만 달러(약 5억8000만 원)를 추가로 지급받게 된다.
다음 시즌 이치로의 연봉은 200만 달러(23억2300만 원). 여기에 각종 조건이 달려 있다. 250타석과 300타석에 도달하면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씩 추가 지불, 이후 50타석 추가 시마다 40만 달러(4억6000만 원)가 더 지급된다. 최대 600타석인 옵션을 모두 채우면 연봉은 300만 달러(약 34억8000만 원)까지 치솟는다.
이치로가 올해 거둔 성적을 놓고 보면 말린스 구단의 이런 계약은, 우리나라 구단들의 시각에서는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타율 2할2푼9리에 출루율 또한 3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자동 아웃’이라고 불릴 만큼의 성적으로 이종범의 은퇴 무렵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린스 구단의 데이비드 샘슨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치로는 팀의 소중한 전력”이라고. 그러므로 “팀이 제대로 구성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그와 함께 플레이한다는 것은 음악으로 치면 “비틀스와 함께 공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는 베테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떠한 팀 구성이 바람직한지 잘 알고 있다.
영화 에는 일흔 살의 벤(로버트 드니로)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 자도 모르면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저 “삶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싶다”던 한 노인이 첨단 업종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나아가 회사 전체를 바꾼다는 설정.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베테랑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발휘되는 법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구단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지난 8월 6일.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진갑용(41)이 19년 동안의 프로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업 포수로서 1,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법했지만 진갑용은 단호하게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결정에 구단의 압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적으로 선수 본인의 결정이다.
오히려 구단에서는 아쉬워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강팀인 만큼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게 분명하고, 그처럼 큰 경기에서 진갑용 같은 베테랑은 요긴한 힘이 될 테니까. 이후 진갑용은 전력 분석원으로 경력을 쌓은 뒤 야구 지도자로 성장하겠다고 꿈을 밝혔다.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준비한 만큼 선수 경력 못지않게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반면 역시 삼성 소속인 이승엽은 “은퇴 시기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뜻이다. 성적도 놀라울 만큼 빼어나다. 마흔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장면에서 탁월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400홈런 기록은 그 부산물.
구단에서도 “은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수 본인의 판단에 맡겨두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승엽 선수가 올해 성적이 보잘것없었다면 어땠을까? 삼성 구단이 그동안 보여 온 여러 가지 행적으로 미뤄볼 때 ‘그럼에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 점에서, 지금의 삼성 라이온즈는 이종범 시절의 기아 타이거즈보다 한 수 위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9월 13일. 33세인 이탈리아의 여자 테니스 선수 플라비아 페네타가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단식 결승에서 같은 나라의 로베르타 빈치를 2대 0으로 물리치고 프로 전향 16년 만에 메이저대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마흔아홉 번째 메이저대회 출전 만에 처음으로 차지한 정상이었다. 페네타는 우승 확정 뒤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기를 꿈꿔왔다. 매우 행복하다.”
모든 선수가 페네타처럼 은퇴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최선의 상황이 항상 벌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베테랑들은 해가 갈수록 성적 지표가 떨어지며 알게 모르게 은퇴 압박에 시달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페네타나 이승엽 같은 ‘최선의 상황’이 아니다. 이치로처럼 부진에 시달리는 베테랑 선수일수록 더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 그가 품고 있는 전력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무관심해왔다. 지나칠 정도였다. 이제 사회의 눈도 제법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진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지금보다 더 멀리 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갖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눈길이 좀 더 정확해지기를, 좀 더 두루두루 살피기를, 나이를 먹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경영 교육자,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등 신 고문의 삶은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 드문 경영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신홍순(申弘淳) CMG 고문은 1941년생, 올해로 74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그 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직업인 동시에 유희의 영역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까. 그는 음악과 미술은 기업에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셨던 고(故) 임원식의 친구였던 선친께서 미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컬렉션도 갖고 계셨지. 선친께서 나이 6~7세부터 연주회나 전시회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이후 대학에 와 재즈와 팝 등으로 영역을 넓혔어요. 아내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얻게 된 것도 그렇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서 전시회를 많이 다녀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돼요.”
신 고문의 선친은 동일방직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을 기업에서 구매하여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그의 선친도 그런 일을 했었고, 그 덕분에 화단에서도 그의 선친이 꽤 알려진 이름이어서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환경이 신 고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LG패션 대표이사 시절 갤러리 운영, 미술작품 전시, 재즈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패션마케팅’을 펼쳐왔다. “패션 자체가 색상과 디자인 등 예술적인 감각과 마인드가 필요한 분야인 데다 크게 보면 같은 문화산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패션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창작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죠.”
재즈파크, 한국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재즈마니아인 신 고문은 제 162회를 맞은 ‘재즈파크’ 콘서트를 1세대 정통재즈에서부터 라틴, 퓨전 재즈 등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신구를 아우르며 매회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유명공연으로 만들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입장료 1000원의 재즈파크 콘서트를 꾸준히 열어온 ‘공연기획자’다. 또한 ‘재즈파크빅밴드’라는 18인조 재즈 빅밴드를 구성, 활동하고 있는 예술단체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열의 재즈파크빅밴드 활동으로 재즈파크빅밴드가 국내 최고의 재즈빅밴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재즈공연을 후원해준 신 고문의 감회는 남다르다.
“재즈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의 토대를 마련한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1세대들이 설 변변찮은 무대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무대다운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듣고 재즈 1세대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척박한 한국 재즈 환경 속에서 재즈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이끌어온 ‘재즈파크’가 13살이 됐다. 이는 재즈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즈 공연을 진행해온 신 고문의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이다.
“수익을 남기는 공연이 아니라 재즈파크를 통해 재즈인들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생겼고, 대중에게는 재즈와 소통할 수 있는 가교가 마련됐다는 것이 의미였죠. 또한 재즈파크를 통해 선·후배 재즈 아티스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팀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침체된 재즈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어요.”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얻은 삶의 즐거움
신 고문이 최근에 공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의 조상, 그의 가계에 대한 연구였다.
“선친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셔서, 그 나머지 일의 뒷정리를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한국처럼 족벌이라는 걸 각 성씨들이 갖고 있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그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죠.”
신 고문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라는 문인을 꼽았다. 영·정조 시절을 살았던 신광수(1712~1775)는 ‘동방의 백낙천’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신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을 쓴 춘원 이광수의 본명은 이보경으로, 그가 필명을 이광수로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신광수의 작품들을 알게 되면서라고 할 정도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던 문인이었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온 극단이 하는 악극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석북 선생의 한시 창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조상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다
신광수라는 걸출한 조상의 발견은 조상의 활동을 시대별로 자료를 취합하여 평전을 만들고 번역을 싣는 작업의 결과였다. 신 고문은 조상의 업적을 정리하는 그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애착을 굉장히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작품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다가오죠. 그리고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그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서로 집안 행사 때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어느 집에서 자료를 가져 와서 ‘1450년대 자료를 보라. 너희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시도 읊고 쌀도 나누고 했다. 1500년대 이후의 교류는 이미 나왔는데 그 이전 건 처음이다’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쪽과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새로운 게 창조되는 기분을 느끼니 자꾸 빠지게 되더군요.”
그런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로 공연을 열다
“조상의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한문을 배우긴 배웠지만 깊이 있게 배운 적은 없어 한학자들이 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한학자가 250여 명 되는데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술대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신광수 선생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하자고.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알거든? 어? 그거 얘기가 되네. 돈만 있으면 그 다음 방법은 내가 갈 길을 아니까.”
신광수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고향에서 한양에 오긴 했지만 집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그게 하필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계동이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을 넘어서 명동, 당시에는 저동이라고 불렸던 곳을 다니곤 했다. 지금의 평화방송 빌딩에서부터 한옥마을 쪽으로 하여 회현동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조상의 기록들을 신 고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누비고 다녔던 동네가 그쪽이니, 공연 장소는 한국의 집 전통예술극장에서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악 공연을 하는 곳인데 200여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인 가곡 예능보유자 김영기 선생을 만났어요. 이런 것 좀 하려는데, 당신이 제일 적임자니 해주십사 부탁을 했죠. ‘당연히 해야죠’라며 얘기가 척척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지.”
자신의 조상의 업적을 발굴하여 그걸 현대에 살아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낸다. 신 고문이 말한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는 말을 납득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말로 시니어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가 젊었을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 아니던가.
“나도 젊었을 때는 조상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니 그 윗대에서 알아봐야 할 분들이 새로 생기고, 다른 집안과의 연관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집안의 기록들도 연구하게 됐어요.”
고향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시간
신 고문은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과 가까워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이다.
“우리 자식들은 고향에 관하여 기억하는 게 없어요. 가서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고 난리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선 다신 안 가더군(웃음).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고향 현지의 문화원과 교류하게 되고, 마침 문화원장 중에서 우리 집안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하는 데 도움도 주시고 날 초청도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니 군수도 알게 됐어요. 2013년이 서천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였죠. 그래서 60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는데 제게 총 준비위원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회의 진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넣고 그랬죠. 그중 금난새씨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게 있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300명의 청소년이 모이다 보니 행사하던 날 그 300명의 부모들이 모두 서천에 오더군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신 고문은 사람들이 두루 도우며 더불어 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계를 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향과 더욱 가까워진 신 고문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하는 사업 중에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고, 발레나 연극 같은 공연을 영상화하여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 클로스업해서 테크닉까지 보여주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문화적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거죠. 알아보니까 큰돈이 안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서 고향 문화원장에게 가서 내가 후원할 테니 해보고자 했어요. 회관 사용 허가가 떨어졌고 ‘호두까기 인형’을 가져갔죠. 군부대 사병들, 학생, 일반인들이 일과 끝나고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문화원장이 사람이 올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 영상이 한 시간 반 동안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군요. 다들 집중해서 보는 거지.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 보람이 깊었고.”
인생 후반전의 밝은 본보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멋지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신 고문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자신이 꾸준히 쌓아왔던 커리어에서부터 비롯된 것 외의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우선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좀 만들려고 할 때 일을 찾는 기본은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열정이죠. 그런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그 열정을 원하는 대로 행사하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서 유도해야 해요. 제 친구 중에 대학을 안 다녔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가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도 서예를 잘했고. 그 친구가 한문학에 자질이 있다는 걸 알았죠. 성격도 괜찮아서, 나하고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씩 목표가 주어지면서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리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내가 요즘 뭔 보람으로 살았을까.’”
신 고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신 고문은 그들을 알아보고 모아서 도화선으로서, 불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득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람을 느껴야 일이 돼요. 나이를 먹으니 그런 쪽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호기심, 열정 그리고 친구 많은 것이 그가 웰에이징 하며 사는 비결이었다.
톨스토이의 어록 중에 “불효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자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모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효에 관한 정서는 동·서양이 같다. 그렇다면 어쩌면 효야말로 전 세계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로 언론인 권혁승(權赫昇·83)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 발상의 원대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효 문화의 세계적 전파를 위해, 평창 동계 올림픽이 다가옴에 따라 더욱 분주해지고 있는 그의 발걸음 속에 담긴 효의 가치를 추적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한국의 효 사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중국의 유교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서 중국의 학계에서조차도 유교 문화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조사를 하게끔 만들었을 정도다. 그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효 사상 또한 한국에서 특히나 강렬하게 발현되었다.
‘그렇다면 한류로 대변되는 케이팝이나 김치로 대변되는 식문화처럼, 효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널리 전파될 수 있다.’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그리고 현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한 추진력을 달아 효 사상의 세계 전파를 위해 야심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어머니를 기리는 사모정 공원을 만들다
어머니를 향한 권 회장의 그리움과 감사의 표현은 어언 6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 출신인 그는 고향인 경포동 지변 저수지 아래 핸다리마을에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공원을 조성한다. 이름하여 ‘사모정(思母亭)’ 공원. 이곳은 권 회장이 사유지에 사비를 들여 만든 것으로,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그의 생가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한국 전통 문화의 근간인 효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세워졌다. 안에는 정자를 비롯해 3개의 시비(詩碑)와 강릉 출신 예술인 신봉승 시인, 권순형 도예가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냥 보통의 정자가 아니라 제대로 잘 만들어진 전통 문화재에 진배없는 정자를 짓고 싶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장을 지낸 김진무 씨와 2년 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제가 원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정자의 제작자를 만나 제작에 들어갔죠.”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사모정 공원은 자연스럽게 효에 대한 권 회장의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준공식 날 이 공원을 동네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강릉에 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강릉시에 기증했다.
사친문학의 본산, 백교문학회의 시작
그런데 사모정 공원을 만들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나니 그에게 문인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지역 규모의 공원을 만들어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것도 좋으나, 보다 큰 범주의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들이었다. 문인들에게서 나온 발상인 만큼 문학상을 활용하는 방법이 추천됐다. 그리하여 백교문학회가 설립되었다. 백교(白橋)는 ‘하얀 다리’라는 의미로 그의 고향인 ‘핸다리’가 바로 백교의 강릉 사투리다. 권 회장은 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백교문학상은 우리나라에 사친문학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사친(思親)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선조 때 문신 겸 시인인 박인로가 ‘사친’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지어 문집 에 실은 바가 있다.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백교문학상의 후보로 오를 글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시와 수필만이 가능하다. 철저하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권 회장 말마따나 사친문학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2010년 제정된 백교문학상은 2014년에 5회째를 맞이했다. 제5회 백교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자는 ‘항아리’를 쓴 정재돈 작가. 수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백교문학상이 강원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운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머니는 줄곧 항아리처럼
둥글고 잘 발효된 가정을 만드시길 원하셨다.
갓 빚은 항아리에 가정의 안위를 담그시고
오랜 기간 모정의 효소로
자식들을 맛깔나게 숙성시키셨다.
행여나 음지에서 부식되지는 않을까
뚜껑 열어 햇살이 드는 곳에 말리셨고
우설(雨雪)의 세례엔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으며
남몰래 스미는 한기를 떠안으셨다. (하략)
한국의 효 사상이 세계의 효 사상이 되어야
최근 권 회장의 행보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명희 강릉 시장이 어느 잡지에 수필을 쓴 걸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우리가 추구하는 길, 효 사상의 정서와 일치하는 내용이었어요.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고향이 바로 강릉 오죽헌이란 것을 설명하면서 강원도의 효 사상을 2018평창 동계올림픽 때 보다 널리 알리자, 그렇게 하여 강원도를 국제적인 효의 중심 도시로 만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제가 해야 할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 회장은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효 사상이 날로 꺼져가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 잃어가는 효심을 적극적으로 함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으로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화하여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워 한국의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시도를 해보자, 그러면 2018년 동계올림픽이 끝나도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남을 것 아니겠습니까?”
권 회장은 세계적 인류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것은 효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
“효의 기본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효가 전세계 도서관에 꽂힌다
권 회장은 문학계, 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청탁했다. 예상보다 험난했던, 제작 시간이 무려 3년 이상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작가들로부터 원고, 프로필, 사진을 받고, 원고 교정 교열을 하고 감수도 받고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야말로 책의 목적답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만들어졌다.
책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 ‘어머니의 눈물’을 비롯해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 최명희 강릉시장, 이희종 강원일보 사장 등 사회 각계지도층 저명인사 문인 63명의 작품 71편이 실렸다. 영문판으로도 만들어진 이 책은 국내 국립·대학도서관 190곳과 해외 60개국 국립·대학도서관 110곳에 기증됐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방문할 80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4명에게도 이 책을 줄 예정이다.
어머니, 신의 다른 이름
2남 2녀의 차남인 권 회장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죽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연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권 회장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던 20여 년 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가면 그래요, 대관령만 넘어서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사모정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 시를 읽어보게 되고….”
권 회장은 어머니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어머니는 신’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 ‘오 마이 갓’ 하고 죽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엄마야’ 하고 죽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신과 같은 거죠.”
어머니를 신과 같이 여긴다는 것, 권 회장이 품고 있는 효 사상이 일종의 신앙이자 율법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권 회장의 말에서 사모정 공원의 시비들 중 신봉승이 쓴 시 ‘어머니’의 한 구절이 보였다.
촛불이 심지를 태우듯
어둠을 밝혀 주시고
손 시린 겨울밤은 화로가 되시네.
아름다워라
형극의 가시만 골라서 지은
거친 옷, 새 옷처럼 입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
한복(韓服)
詩人 박목월
품이 낭낭해서 좋다.
바지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치면
그 푸근한 입성.
옷 안에 내가 푹 싸이는
그 안도감(安堵感)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 박목월의 시 한복(韓服)처럼 푸근함과, 안도감을 주는 우리의 옷 한복...
이혜미 한복디자이너가 설 명절을 맞아 아이에게 한복의 의미와 예법을 가르치고 있다.
한복디자이너 이혜미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박광훈의 이수자로, 숙명여대 의류학 박사이다.
㈜삼청각 유니폼 디자인 제작, KBS사극 ‘최강칠우’의 아트디렉터를 지냈으며,
2014년 문화관광부 주관 ‘新한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 ‘사임당 by 이혜미’의 대표이자 숭의여대 패션디자인과 외래교수이다.
한국관광공사는 '걷기 여행길'(www.koreatrails.or.kr) 웹사이트를 통해 4월 가볼 만한 전국 곳곳의 도보 여행지 10곳을 소개했다. 도보 여행지는 쉬운 코스와 보통 코스 등으로 구분이 돼 있다.
쉬운 코스는 경북 청송군의 주왕산 탐방로 주왕 계곡코스(2.2㎞)다. 대전사에서 출발, 자하교를 지나 용추폭포까지 이어지는 산책하기 좋은 평탄한 길이다.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을 볼 수 있다.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 슬로길 1코스(5.71㎞)는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유채꽃과 청보리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강원 강릉시 바우길 5구간 바다호숫길(16㎞)은 파도를 따라 해변을 걷다가 커피 거리에서 카페에 들릴 수 있는 코스다. 금강소나무 군락, 허균허난 생가, 죽도봉 공원 등을 거쳐간다.
보통 코스중 경남 하동군 '박경리 토지길' 2코스(13㎞)는 화개장터부터 십리 벚꽃길을 지나 불일폭포까지 닿는 구간이다. 4월 벚꽃 축제, 5월 야생차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꽃길로 알려져 있다.
전남 화순군 무등산 자락에 있는 무돌길 11길(3㎞)에서는 4월 벚꽃에 이어 5월에는 철쭉꽃밭이 펼쳐진다. 무등산 산행 일정에 포함해도 좋다.
전북 김제시의 순례길 6코스(25.9㎞)은 금산사와 모악산 자락을 잇는 코스. 4월 18∼20일에는 모악산축제가 열려 템플스테이나 무형문화재 공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수도권에서는 대부도 해솔길 1코스(11.3㎞)가 가볼 만하다. 해변을 따라 걷다가 북망산에 오르면 인천대교, 시화호 전경 등이 펼쳐진다.
서울에서는 북서울 꿈의 숲 나들길(4.7㎞)과 서울숲 남산 나들길(8.8㎞)이 가족 나들이 코스로 좋은 것으로 꼽혔다. 지하철이나 버스와 연결돼 이동이 편리하고, 숨겨져 있던 서울의 역사적 명소를 둘러보고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고령자 고용 확산을 위한 서울시 어르신 적합 직종 연구’
지난해 5월 서울시가 발표한 연구 보고서다. 기존의 어르신 일자리 연구와 정책으로는 변화한 고령자들의 특성과 욕구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새로운 고령자 적합 일자리 개발에 뛰어든 결과물이다. 여기에 현장 전문가와 일에 종사하고 있는 고령자 인터뷰를 거쳐 최종 76개의 직종을 개발ㆍ제안했다.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라는 슬로건에서 비롯된 정책 연구였던 것이다.
분야에 따른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하면 구직자들은 자신들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있다. 서울시에서 제안한 일자리는 조리사나 주방 보조원과 같은 음식 서비스 분야부터 동화구연사와 문화재 해설가, 복지주거환경코디네이터에 이르기까지 그 분야도 천차만별이다. 이 중에서도 예술 문화 분야의 한 일자리를 꿰차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벌인 직종이 있다. 바로 도슨트(Docent)라는 일자리다.
# 미술관의 소금, 도슨트(Docent)
도슨트.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직업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관람객들에게 작품에 대해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미술이나 전시품에 대한 설명을 담당하는 일종의 안내인 또는 가이드인 셈이다.
화창한 봄 햇살이 세상으로 나들이 나온 8일 서울 종로구의 탑골 미술관. 그곳에서 불화(佛畵)설명에 여념이 없는 실버 도슨트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러 간 서울노인복지센터 1층의 탑골미술관은 약 10여점의 불화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부터 취재진,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 중 왼쪽가슴에 반짝이는 명찰이 유난히 눈에 띄는 4명이 있었다. 명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실버 도슨트’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고 미소가 아름다운 두 여인과 말끔한 정장과 넉넉한 웃음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두 신사가 있다. ‘불화(佛畵), 전통으로 피어나다’라는 기획전이 열렸던 이 날. 이들은 어떤 것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임석환 불화장의 그림이고 어떤 것이 전수자들의 그림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 사람들은 과거에 무슨 일을 했을까’ 궁금증이 생길만도 하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거침없이 해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 중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없다. 다만 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이들을 도슨트에 세계로 인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거침없이 미술 해석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끊임없는 교육에 있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약 한달 간 이뤄진다. 또한 새로운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그 전시회의 성격에 맞는 전시 정보 숙지 교육도 치러진다. 현대미술사부터 서양미술사에 이르기까지 소양 교육과 도슨트 역할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 교육의 강도가 적잖이 세다. 이 과정을 거쳐 현재 탑골 미술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슨트만 해도 20명이나 된다.
# 은퇴 후 국화빵 장사에서 도슨트에 이르기까지
도슨트 송련(남ㆍ72)씨는 10년 전 은퇴했다. 송씨는 은퇴 후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했다. 국화빵 장사, 공인중개사 자격증 취득 후 복덕방, 상담가, 지하철 택배, 노인 학대 지킴이까지.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그저 넉넉한 웃음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도슨트가 되기 전까지 도슨트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그. 이제 도슨트는 그가 생각하는 다양한 경험의 종착점이다. 송씨에게 도슨트가 종착점이 된 이유를 물었다.
“관심 분야에서 일하니까요. 젊은 시절 취미가 그림이었고, 현재는 유화 그리기에요. 취미를 일로 하기가 쉬운게 아니죠. 그리고 정말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취미이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도슨트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힘이 닿는데까지 이 일을 하고 싶어요.”
# 음악선생님이 가르치는 미술관
탑골 미술관에서는 음악 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러니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도슨트 임순영(여ㆍ66)씨다. 은퇴 전 임씨의 직업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에서 성악가 그리고 비올리스트까지 음악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만한 젊은 날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악보가 아닌 그림이다. 그러나 전혀 거부감이 없는 그녀다. 예술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한 맥락이라고 보는 임씨다.
“음악만 40년 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전문적이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림은 악보 같은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도슨트 일에 임하고 있어요. 악보가 있으면 어느 곡이나 다 할 수가 있거든요. 전시회 전에 교육도 받고, 음악과 미술을 응용해서 생각하려 하니 이 일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녀의 말에서 행복감이 묻어났다. 인터뷰의 한 질문이 끝날 때마다 “너무 행복해요”를 연발했다. 그녀는 은퇴 후 인사동이나 미술관을 많이 찾아 다녔다. 미술관을 다니며 묘한 미술의 매력을 느꼈다. 미술로 인해 일상도 달라지자 이것을 소개하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그 때 발견한 것이 도슨트다.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임씨가 도슨트가 된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도슨트 일하는 것 외에도 짬나는 대로 미술관을 찾는다는 그녀. 이제는 도슨트가 직업병이 됐다. 미술관에서 도슨트나 큐레이터가 보이지 않을 때 학생들이나 관람객들에게 꼼꼼히 설명을 해준다는 그녀다. 못말리는 선생님 기질이다. 선생님에서 도슨트까지 가르치는 것을 위해 태어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8일 찾은 탑골 미술관 도슨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활기차 보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어디에서 뿜어 나오는지 모르는 아우라의 근원은 아마도 일에서 찾은 재미와 열정이 아닐까. 일자리가 복지다? 이들에게 복지를 운운하기엔 이들의 열정이 너무 젊게 느껴진다. 어쩌면 ‘일자리가 회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임석환 불화장(69)의 전통 불화 정신을 계승하다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탑골미술관(관장 희유)은 탑골미술관의 개관 1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부터 5월 21일(수)까지 기획전 ‘불화(佛畵), 전통으로 피어나다’를 연다.
불화(佛畵)란, 사찰전각에 걸려 있는 각종 탱화를 비롯하여 부처님의 일대기, 설법장면, 경전 내용, 사찰의 전설 등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번 전시는 오늘날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서 고유의 전통문화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기법을 이어받은 불화를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즉 불화(佛畵)가 불교 교리와 의미를 고도로 압축하여 표현한 종교적 색채를 띤 그림이지만, 넓게 본다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약 1800년 전부터 계승된 우리 고유의 미술이자 전통문화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화와 그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감각, 미술에 대한 전수에 대해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마련됐다.
단청장이면서 불화장
이번 불화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인 임석환 선생과 그 제자들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선에서 선으로 이어지고, 면으로 채워 또 선으로 마무리하는 섬세하고도 화려한 불화의 그 장엄함을 표현한 임석환 선생은 故혜각스님으로부터 단청을, 故혜암스님으로부터는 불화를 배운 장인이다. 임석환 선생은 2005년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받았으나, 그 내용과 기법의 단청과는 다르다고 판단되어 2006년에야 분리되어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이번 불화전은 특별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임석환 선생의 스승인 故혜암스님께서 1920년대 처음 기초 과정을 공부하시면서 그렸던 습화(習畵)와 그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초(草)가 함께 전시된다. 이 ‘습화’와 ‘초’는 전시로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미술과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료를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불화는 붓 손질 한번, 선 하나에도 정신과 혼을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의 자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불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를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기보다 수행의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그래서 시대의 문화재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열정과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임석환 선생의 말처럼 장엄하고도 혼이 담기는 불화가 그려지는 장면을 바로 눈 앞에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4월 9일(수)부터 4월 20일(일)까지는 다양하고 화려한 전통문양을 부채에 직접 그려보거나 자신의 띠에 맞는 십이지신을 액자에 그려볼 수 있는 체험도 진행된다.
임석환 선생의 불화장 시연은 4월 11일, 12일, 13일 오전(10시~12시)과 오후(2시~4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복지와 미술이 함께하는 탑골미술관을 운영하는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인 희유(希有)스님은 “불화를 그린다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혼을 담으려는 고집과 그 시대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혜안을 필요로 한다”며, “이번 전시에서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와 스승의 습화를 바탕으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온 현장을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17일, 대전에서 홍성으로 내려가는 길에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약 1시간 20분 정도 차를 몰고 가다 보니 도로변에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댕댕이장 보유자'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홍성군 광천읍 신진리 246-2번지. 바로 댕댕이장 보유자인 백길자(66)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글쎄… 열 세 살 때부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오니까 이렇게 문화재도 되고 그런거지 뭐, 특별한 재주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백씨의 얼굴에는 수줍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 시골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잠들어 있는 손자가 깰지도 모른다며 기자를 작은 작업실로 데리고 가는 모습도 영락없이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이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데 1948년에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어요. 당시 집에는 이모, 사촌 등 16명인가 18명이 들락날락하는 대식구여서 항상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죠. 그래도 가난하지만 화목했어요. 전 위로 오빠가 셋이라 맏딸 노릇을 했는데 낮에는 밭 매고 밤에는 모시 삼아 짜고 철마다 바느질해서 옷 만들고 했죠."
백씨가 댕댕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북창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 당시 그가 살던 마을 뒷산에는 댕댕이풀이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당시 마을어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댕댕이덩굴을 채취해 생활용구를 만들어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손재주가 좋았던 백씨의 아버지도 취미 삼아 댕댕이덩굴과 인동덩굴로 바구니를 만들었는데 백씨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짜다 남겨둔 댕댕이바구니를 엮어 올라가며 곧잘 따라 하곤 했다. 그후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를 도와 댕댕이덩굴과 인동덩굴을 끊어서 삶고 눈을 따서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당시 식구들이 열 명이 넘으니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죠. 40원짜리 플라스틱 바구니조차 사서 쓸 엄두가 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뒷산에 널려 있는 댕댕이덩굴을 잘라다가 바구니를 만들었죠. 그런데 웃긴 건 제대로 배우지 못해 결혼 전까지 바구니의 바닥부터 몸통까지는 짤 수 있었는데 마무리를 익히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시집 간 뒤 친정에 와 아버지에게 마무리 하는 방법을 배운 후 그때부터 혼자 댕댕이덩굴로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했죠."
백씨는 1973년 당시로는 조금 늦은 27살의 나이에 홍성군 우체국에서 집배원을 하던 김성환씨와 선을 봐 결혼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두번 만나고 결혼을 했는데 처음 만난 날 약혼을 하고 두번 만난 날 결혼을 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말이 안 되지. 두번 만나서 결혼을 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남편이 둘째였기 때문에 시집살이 하지 않고 단둘이 사니까 오붓하니 좋더라고(웃음). 결혼 후 이곳 광천으로 왔는데 광천에도 지천에 댕댕이덩굴이 자라고 있어서 심심풀이로 바구니를 짜기 시작했죠. 댕댕이덩굴로 바구니를 만들려 해도 농사일 하다 보면 1년에 한, 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니까 질리지가 않더라고."
백씨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댕댕이장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것은 당시 홍성의 한 동네에 살던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승제조장 최영준 보유자에게 지승공예를 배우면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백씨가 지승을 배우고 있을 때 최씨가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오면 항상 댕댕이장에 대해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최영준 선생님이 나를 많이 챙겨줬죠. 항상 댕댕이장을 어떻게든 문화재로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짚이나 풀로 만든 공예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조영준 선생님이 조사자이던 김삼대자씨에서 나를 소개해줬는데 그 결과 댕댕이 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제주도와 충청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졌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당시의 조사를 토대로 댕댕이덩굴을 사용해 공예품을 제작하는 기술은 육지에서는 백씨가 유일한데, 이것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정동벌립을 만드는 기술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씨가 바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 조사자이던 김삼대자씨는 1998년 처음 백씨의 작품을 보고 옛날 전통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던 것이다.
"그때는 무형문화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쓸 물건 만들려고 나이롱 끈을 넣고 했는데 그걸 보더니 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오직 댕댕이덩굴로만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후 2000년에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다시 심사를 받을 때 그 김삼대자씨가 조사위원으로 또 온 거예요. 그러면서 2년 동안 내가 작업한 것 들을 보더니 감탄을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돌아갈 때 내가 꼭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니 결국 그 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될 수 있었죠."
백씨는 지금도 그녀의 아버지가 만든 채반을 유품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의 채반을 보며 그것처럼 멋진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리에 앉아 댕댕이덩굴을 간추린 다음 채반이나 소쿠리, 시루밀과 같은 전통적인 생활용품 뿐 아니라 화병이나 삼합상자나 오합상자 같이 댕댕이로 만들지 않았던 다양한 작품까지 만들어보며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고 있다.
"52년 동안 댕댕이를 손에 놓지 않고 살아왔는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남편이 이수자가 됐을 뿐 댕댕이장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요즘 같은 시대에 댕댕이공예품보다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니까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댕댕이공예품에는 돈으로 값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취미라도 좋으니 댕댕이장을 배우러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 언제든지 기쁘게 반기며 함께 앉아 댕댕이덩굴을 엮을 수 있죠. 그런 날들이 앞으로 많았으면 좋겠네요(웃음)." 글·사진=최신웅 기자
홍성 댕댕이장이란
2000년 9월 20일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홍성 댕댕이장은 댕댕이 덩굴의 줄기를 이용해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능이다.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댕댕이 덩굴을 이용한 수저집·바구니·채반 등 생활기물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기능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전국을 대상으로 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짚·풀공예 조사에서 댕댕이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전국에서 제주와 홍성뿐이었다.
홍성에 거주하는 기능보유자 백길자씨는 댕댕이장 뿐만 아니라, 싸리·보리짚·밀대 등 풀공예 전반에 걸쳐 솜씨가 뛰어난 재주꾼으로 알려져 있다. 도움말=충남도청
▶댕댕이 덩굴
댕댕이 덩굴은 한자로 용린(龍鱗)·상춘등(常春藤)·목방기(木防己) 등으로 불리며 경남지방에서는 장데미 또는 장드레미, 제주지방에서는 정당·정등·정동 등으로 불린다. 그 줄기는 내구성이 강하고 탄력성이 매우 좋으며 축축한 상태에서는 잘 구부러지는 특징이 있다. 줄기 직경이 2㎜ 미만이기 때문에 공예품을 만들면 그 짜임새가 섬세하고 고운 질감을 준다. 길이가 3m에 달한다. 잎은 어긋나며 3~5개의 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줄기와 뿌리를 잘라서 햇볕에 말린 목방기(木防己)는 방기 대신 한약재로 해열·이뇨·신경통에 쓰고 있다. 항우도 댕댕이덩굴에 넘어진다"는 옛말은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깔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대전일보 최신웅 기자
매듭은 여러 가닥의 실을 꼬아서 끈을 만든 다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맺는 조형예술이다. 우리의 전통 매듭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한국 전통 매듭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경기도박물관(관장 이원복)은 20일부터 오는 4월 13일까지 테마전 ‘매듭, 과거와 현재를 잇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전통 매듭이 표현된 도박물관 소장 유물과 함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인 김희진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김혜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교수, 한국매듭연구회 회원들의 작품 130여 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옷과 함께하다’, ‘나를 표현하다’, ‘실용품에 예술을 담다’, ‘아주 오래된 매듭 이야기’, ‘아름다운 실내장식’, ‘전통 매듭의 재창조’ 모두 6가지 테마로 구성됐다.
테마전답게 꼭 챙겨봐야 할 작품들이 많다. 우선, 보물 제1298호로 지정된 조영석의 ‘조영복 초상’과 함께 조영복 초상에 나타난 세조대를 그대로 재현한 김혜순의 작품 ‘조영복 세조대’가 함께 전시돼 흥미를 끈다.
또 각 개인의 신상정보와 미적 취향 등을 표현하는 데 쓰인 매듭 작품들이 소개된다. 한국매듭연구회의 ‘무지개술삼작노리개’와 ‘선추’, 경기도박물관 소장의 ‘나비모양노리개’, ‘향갑노리개’, ‘산호노리개’, ‘니금사원형삼작노리개’, ‘대삼작노리개’, ‘호패’ 등이 전시된다.
이와 함께 ‘아주 오래된 매듭 이야기’ 코너에선 2008년 심익창의 부인인 성산이씨(1651~1671)의 묘에서 출토된 주머니와 노리개가 전시된다. 주머니는 모두 6점으로 손톱, 발톱을 넣은 ‘조낭’ 3점, 머리카락을 넣은 ‘두발낭’ 1점, 향 가루를 넣은 ‘향낭’ 1점, ‘진주낭’ 1점이 전시되며, 노리개는 2점으로 ‘가지노리개’와 ‘용머리장식노리개’가 특별히 공개된다. 이들 주머니와 노리개는 17세기의 매듭 양상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김희진, 김혜순과 한국매듭연구회 회원들이 만든 현대적인 장신구와 생활용품, 매듭 작품도 눈을 즐겁게 한다. 관람료 일반 및 대학생 4천원(경기도민 개인 관람객 25% 할인). 문의 (031)288-5400
경기일보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