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간이 기억하는 역사, 딜쿠샤 언덕에 오르다.
- 언덕을 오르면 무슨 일이 기다릴까. 종로구의 그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대한 고목이 중심을 잡고 있다. 권율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다. 여름이면 주변을 시원하게 할 만큼 초록이 울창하고 가을이면 온 동네에 노란 은행잎이 흩날린다는 이야기다. 오래전 살던 집을 찾기 위한 단서로 붉은 벽돌집과 바로 이 큰 나무가 있는 은행나무골 1번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딜쿠샤의 역사를 언덕 위의 은행나무는 지금껏 지키고 있었다. 거의 100년 전 개인의 공간이 당시와 거의 흡사하게 복원되었다. 딜쿠샤는 그 시절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있던 저택으로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 앨버트W.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L.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가 살던 집이다. 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이 우리의 오묘한 역사의 흔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깃든 딜쿠샤는 그 시절의 디테일한 분위기와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탈바꿈되어 공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탄광 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한국을 찾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메리를 만난다. 영국 출신 배우 메리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한양도성을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의 은행나무에 반한 메리가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다. 1923년에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만에 완성된 딜쿠샤(Dilkusha). 이국적인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희망, 이상향'을 뜻한다. 부부는 인도에서 딜쿠샤라는 궁전을 보고 그들의 스위트홈이 완성되면 딜쿠샤라 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정착해 살면서 창 밖으로 은행나무가 보이는 딜쿠샤에 살게 된 부부는 고통스럽고 혼란했던 시기의 한국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업인이자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고종의 장례식 취재를 의뢰받았던 테일러는 기사 내용에 3.1 운동을 추가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마침 아들 브루스가 태어난다. 메리는 출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통해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 왔던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서 도쿄에 가서 타전했고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3.1 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테일러에 의해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3.1일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각종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금광사업과 특파원으로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테일러 부부는 점차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위기가 찾아왔고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도 가택연금 상태가 되어 결국은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이 땅을 떠나게 된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테일러는 줄곧 한국행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한국을 사랑한 남편의 뜻에 따라 테일러의 유해를 가지고 그해 한국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딜쿠샤에도 들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이토록 다사다난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이들이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인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위험 속에서도 한국을 위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앨버트 테일러,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에서 잠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테일러와 메리 부부의 딜쿠샤가 잊혀 가던 중 아들 브루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을 찾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소유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지만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릴 만큼 방치되었던 집, 한국 전쟁 후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딜쿠샤의 공간을 쪼개서 살았다고 한다. 2006년 66년 만에 딜쿠샤를 찾은 부르스는 이것을 보고 그동안 어려운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어 감사해했다고 전한다. 이후 서울시는 딜쿠샤의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특히 메리는 다재다능해서 글과 그림이 뛰어나 남겨진 많은 그림과 기록이 전시되었고 그녀의 기록이 복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테일러 씨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는 딜쿠샤 관련 자료 1026건을 기증했다. 2018년부터 시작한 복원 작업 끝에 역사전시관으로 재탄생되어 2021 3월에 개관에 이르렀다. (2017년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 1층과 2층의 전시장은 그들이 살던 1920년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파티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1층은 거실 내부를 상세히 재현했다. 부부의 결혼과 입국, 한국생활을 보여준다. 메리의 그림이나 호박 목걸이 이야기도 전시되었다. 테일러가 메리에게 청혼할 때 준 호박 목걸이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살면서 한국에서 살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책의 제목이 '호박 목걸이'다. 그리고 금광 사진이나 금강산 여행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것들, 벽난로…. 모두 그들의 숨결이 깃든 추억들이다. 2층에는 테일러 부부가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다. 영상으로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시물 중에는 메리가 한국의 주변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가 인상적이었고 테일러의 언론활동 모습도 남겨져 있다. 한국의 병풍이나 고려청자, 램프나 테이블 등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집안이 전체적으로 아름답다. 수많은 시간들을 견뎌낸 널찍한 거실의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온다. 당시에는 언덕 꼭대기 집이어서 멀리 지나가는 기차가 보이고 남산과 한강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로 가로막혀있다. 다만 옆의 창문을 통해서 은행나무의 풍경은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딜쿠샤는 종로구 사직터널 오른쪽 축댓길로 오르면 언덕 위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이제는 복원되어 겉모습이 살짝 새것 느낌이 들긴 하지만 1923년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테일러와 메리 부부 가족이 살던 100년 전의 테일러가(家)이다. ◇ 가는 길: 서울의 서대문역이나 독립문역에서 나와, 김구(金九) 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京橋莊)을 거쳐 돈의 박물관을 지나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나타난다. 행촌 성곽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여유로운 산책길이다. 월암근린공원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홍파동 언덕배기의 홍난파 가옥을 지나면 저 앞으로 400년이 넘는 수령의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겨 집터를 선택한 메리의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발걸음을 하다 보면 “DILKUSHA 1923” 명판이 새겨진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맞아준다. ◇ 딜쿠샤 방문은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 예약 방법 :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검색 → 딜쿠샤 https://yeyak.seoul.go.kr/web/reservation/selectReservView.do?rsv_svc_id=S210226112026774583 - 문의 : 딜쿠샤 전시관(070-4126-8853)
- 2022-05-27 08:36
-
- 110만 명 찾는 광양 매화마을 홍쌍리 명인… "건강밥상 일념으로 광양매실 브랜드화"
- 봄이 오면 인기가 많아지는 ‘엄마’가 있다. “매화꽃아 니는 내 딸이제, 매실아 니는 내 아들이제”라고 말하는 홍쌍리(79) 명인이 그 주인공이다. 한 해 110만 명의 상춘객이 그녀가 있는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을 찾는다. 1966년 홍쌍리 명인이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현재의 매화마을이 됐다. 그녀는 지리산과 백운산을 수놓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손님들을 초대했다. “스물네 살에 산에서 일하다 외로운 산비탈에 홀로 핀 흰 백합꽃같이 살기 싫어서, 사람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매화꽃을 심었어요. 5년이면 꽃이 피겠지, 10년이면 소득이 있겠지, 20년이면 세상 사람 내 품에 다 오겠지,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홍쌍리 명인은 ‘음유시인’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단어, 문장 모두 시가 되고, 노래가 됐다. 홍쌍리 명인은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듯 이야기하면서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늘 사람이 그리워서 자연과 얘기한다는 그녀. 지금 그녀가 제일 그리워하는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 시아버지! 홍쌍리 명인은 1943년 밀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여의었고, ‘엄마 없는 가난’을 겪었다고 표현했다. 현재도 각종 방송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홍 명인.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고, 가수로 키우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딸을 광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을 부산 삼촌 집으로 보내버렸다. ‘못 배운 가난’까지 품게 된 홍쌍리 명인은 “친정아버지를 내가 제일로 미워했다”고 말했다. 삼촌은 건어물 장사를 했는데, 밤을 팔러 왔던 시아버지 율산 김오천 선생이 홍쌍리 명인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홍 명인을 며느리로 안 주면 밤을 안 주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경상도 여인은 전라도로 시집가게 됐다. 스물세 살이었는데, 홍쌍리 명인은 “1965년 당시에는 노처녀였다”고 말했다. 율산 김오천 선생도 유명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일본에서 밤나무는 식량 대용으로, 매화나무는 약용을 목적으로 들여왔다. 김오천 선생은 밤나무 사업에 주력했고, 그로 인해 광양의 특산물은 밤이 됐다. 그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집안에 시집갔으니 편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홍쌍리 명인은 시아버지와 밭일을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 무엇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광산 개발 사업에 투자했다가 망해 화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홍쌍리 명인은 무려 33년의 긴 시간 동안 남편 수발을 들었다. “남편은 빚쟁이가 올까봐 방바닥에 제대로 눕지를 못했어요. 숨을 못 쉬면 산소호흡기가 필요했는데, 당시에는 하동에 산소호흡기가 없으니 순천까지 가야 했죠. 병원 한 번 갔다 오면 반나절이 걸렸어요. 그때 저도 빚쟁이들한테 머리를 쥐어뜯기기 싫어서 머리를 다 잘라버렸어요. 그리고 수건을 벗지 못했죠. 밥 먹을 때 시아버지가 ‘아야, 밥 먹을 때는 수건 벗는 기다’ 하시는데, 그 소리에 눈물이 소낙비처럼 줄줄 흐르는 거예요. 시아버지가 수건을 벗겨보시고는 둘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홍쌍리 명인은 시집온 이듬해부터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의 반대를 꺾기 힘들었다.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밤나무를 베고 매실나무를 심겠다고 했기 때문. 시아버지는 홍 명인이 씻겨주고, 안마해주고,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다가도 ‘매화’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시아버지는 홍쌍리 명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더욱이 법정 스님이 찾아와 ‘꽃 천지를 만들라’는 말에 홍쌍리 명인은 더 많은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매실 사업을 시작한 지 6년이 됐을 때, 부산 대선소주에서 홍실주를 만들었다. 홍쌍리 명인의 매실로 만든 매실주다. 그때 번 돈은 137만 원. 홍쌍리 명인은 그 숫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더불어 이때 비로소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인정해줬다. 홍쌍리 명인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시아버지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자수성가했고, 명품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더불어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도 시아버지다. 홍 명인은 시아버지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연의 선물, 건강 먹거리 현재 홍쌍리 명인은 6만 평의 청매실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전통식품명인 제14호에 지정되면서 ‘매실 명인’이 됐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는 홍 명인은 매화와 매실이 진짜 아들이고 딸이라고 했다. “내 꽃딸하고 매실아들은 내가 뭘 입고 가든 맨발로 가든 언제든지 반겨줘요.” 광양에서는 1997년부터 매년 3월 매화축제가 열린다. 그 시작에는 그녀의 제안이 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3년간 축제를 열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홍쌍리 명인은 1991년 국무총리상을, 1998년 대통령상(가공식품 부문)을 각각 수상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유일한 집안이라고 자랑했다. 홍쌍리 명인은 시집오고 고된 일을 도맡아 하다 결국 탈이 나버렸다. 스물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생사를 오가는 큰 수술을 했다. 당시 의사는 ‘살면 천명이고, 죽으면 제 명’이라고 했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치고 퇴원할 때, 의사는 ‘맛없는 것을 연구해보라’고 조언했다. 입에는 맛없는 건강한 음식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이때부터 홍쌍리 명인은 ‘오미오색’(五味五色), 오장육부가 좋아하는 건강 음식 개발에 집중했다. 특히 홍 명인이 키우는 매실은 ‘동의보감’에도 ‘마음을 편하게 하며, 갈증과 설사를 멈추게 하고, 근육과 맥박이 활기를 찾게 한다’고 효능이 적혀 있다. 그녀는 3000개의 장독대를 활용해 매실을 숙성한 건강식품을 만들었다. 매실장아찌, 청매실 농축액, 청매실원, 청매실 고추장 등 30여 종에 달한다. 더불어 홍쌍리 명인은 2007년 광양매실 지리적표시 제36호 등록, 2008년 광양매실산업특구 지정, 2010년 광양매실 지리적표시 단체표장 등록 및 빛그린 상표 등록을 하면서 광양매실의 브랜드를 키웠다. “매실 많이 먹어서 죽는다 하면 나는 10번도 더 죽었지”라고 말하는 홍 명인은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잘 때까지 매실을 먹고 마신다. 덕분에 뱃속 설거지가 잘돼 지금처럼 건강한 것이란다. “농사는 작품, 밥상은 약상. 뱃속 설거지를 해서 미움, 증오, 욕심을 버리면 안 건강할 수가 없다”고 외쳤다. 이렇게 자연이 준 건강밥상의 효과를 직접 느낀 홍쌍리 명인은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집을 짓고 마음 아픈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당신들이 먹고 싶은 것을 심게 하고, 밥 먹을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빼먹게 하고 싶어요. 고기는 내가 시장에서 사다주고요. 내 몸은 내가 가꾸는 것이에요. 그러면 병이 없거들랑.” 밤에는 등단한 시인으로 홍쌍리 명인은 시인이기도 하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혼자 책을 보면서 글을 공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자연과 나눈 대화를 글로 썼고, 이는 시가 됐다. 2011년 종합문학지 ‘서울문학인’ 여름호에 ‘학처럼 날고 싶어라’ 등으로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인생은 파도가 쳐야 재밌제이’, ‘행복아 니는 누하고 살고 싶냐’ 시집도 냈다. “사람하고 같이 일하면 좋지만, 내 혼자 일해도 하나도 안 심심해요. 이 꽃이 이 소리 하고 저 꽃이 저 소리 하는 게 다 들려요. 꽃이 ‘마스크 부대가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마스크 부대가 입 한 번 안 맞춰주고 가네’라고 해요. 저는 ‘내 딸 장하다’고 안아주죠. 이렇게 농사꾼으로 사는 게 얼마나 재밌나요.” 홍쌍리 명인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자연한테 매일매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어떤 교수가, 박사가 이런 것을 가르쳐주느냐”면서 웃음 지었다. 배우 최불암도 그녀에게 “어떤 작가가 그렇게 말이 술술 나올 수 있겠냐. 겪지 않고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겠냐”고 말했다고. “저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사투리도 그대로 하고 욕도 그대로 해요. 제가 상사화를 보고 욕을 좀 많이 해요. 야 이 년아, 왕관같이 예뻐서 너를 심었는데 왜 니는 도도하게 서 있느냐. 사람이 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든가 화병에 갖다 꽂아야 시집을 가야 예쁘단 소리를 듣는데, 너는 미인하고 똑같이 도도하게 서 있느냐. 이렇게 글을 써놓고 저는 그 소리를 해요. 예쁜 것도 좋지만 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고 싶은 사람이 되면 인간 승리자라고 생각해요. 내가 돈이 많으면 무서워서 못 살아요. 그런데 사람 울타리 백만장자가 돼보니깐 높은 담장이 없어도 대문이 없어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더랍니다. 내가 돈이 많으면 진짜 무서워서 못 삽니다.” 홍쌍리 명인은 자신의 이름 앞에 ‘아름다운 농사꾼’이라는 수식어를 늘 붙인다. 처음에는 농사꾼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 바람이었고, 섬진강의 강물에 보탬이 됐다고 했다. 이제 그녀는 꽃 한 송이와도 대화가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매일매일이 행복이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행복을 어디다 표현하리. 이 은공을 내가 어떻게 다 갚으리. 참 재미 안 있습니까, 내 삶이? 그런데 인생의 파도를 50대 안에 안 넘으면 안 돼! 힘들어서 안 돼요.” 기댈 곳 없어 일에 기대고 흙에 의지하고 바삐 살아온 그대는 거울 앞에 고인 눈물이 막 해대네 타고난 팔자인걸 보호자도 없이 이 산 저 산 구멍 난 고무신에 발바닥이 아문 삶아 뭐가 그리 좋아 주름 사이 웃음꽃이 피더노 일이 있어 고맙고 흙에 의지할 수 있어 고마워서 웃음이 헤프네 -홍쌍리 -
- 2022-04-01 09:31
-
- 가수 설운도가 꿈꾸는 트로트는 “지금부터”
-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 2022-03-03 08:06
-
- "봄을 기다리며" 2월 문화 소식
- ●Exhibition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예술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출품작은 174점으로 박수근 전시 사상 최대 규모다. 전시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구성됐다. 유화 7점, 삽화 원화 12점도 최초로 공개된다. 특히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박수근 작품 33점 중 31점이 출품됐는데, 그중 ‘세 여인’, ‘마을풍경’, ‘산’ 등 3점은 최초 공개작이다. 미국 미술관에 소장됐던 ‘노인들의 대화’(1962년), ‘귀로’(1964년)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박수근의 은사인 오득영 유족이 소장해온 ‘초가’를 비롯해 개인 소장품 ‘웅크린 개’, ‘노상의 소녀’ 등도 첫 공개 작품이다. 2007년 5월 경매에서 45억 2000만 원에 낙찰된 이후 8년간 한국 미술 최고가 자리를 지킨 ‘빨래터’도 만날 수 있다. 박수근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로 데뷔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서구의 추상미술이 급격히 유입되어 화단을 풍미했지만, 박수근은 시종일관 서민의 일상생활을 단순한 구도와 거칠거칠한 질감으로 표현한 그림을 고수했다. ◇가야인, 바다에 살다 일정 2월 6일까지 장소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가야 유물 57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는 1부 ‘남해안의 자연환경’, 2부 ‘관문: 타고난 지리적 위치’, 3부 ‘교역, 가야 제일의 생업’으로 구성됐다. 관람객은 각종 유물을 통해 바다에 깃든 가야 문화의 다양성, 개방성,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은 특히 바다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가야인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했다. 또 옛 김해만의 자연경관 복원에 대한 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남해안 일대에 축적된 고고학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해상왕국’으로도 불리는 가야 문화의 특성을 관람객이 쉽고 재밌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Book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동양북스) 저자 에디 제이쿠는 1920년생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책은 그의 인생을 집약해놓은 회고록으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에디 제이쿠는 19세이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약 7년 동안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폴란드의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겼다. 부모를 가스실에서 잃고, 나치 간수가 되어 수용소를 관리 감독하는 대학 동기도 만나고,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며 민가에 도움을 청하다 다리에 총을 맞기도 했다. 특히 수용소 안에서 친구와 동료가 날마다 죽어나가고, 부모를 학살한 자들을 위해서 중노동을 해야 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면서 날마다 모멸감을 느꼈던 하루하루가 책 안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참혹한 일을 겪었지만 에디 제이쿠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운이 오더라도 자신의 삶을 사랑해보세요”라고 메시지를 전한다. ‘오늘 집에 가서 당신의 어머니를 꼭 안아주세요’,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등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얘기한다. 이 책은 그가 100세가 되던 해인 2020년에 출간된 후 호주 아마존 1위에 올랐고 미국, 영국 등에서도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면서 전 세계 37개국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2021 올해의 자서전상, 2021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유럽에서 대한민국만세(송일국·상상출판) 배우 송일국이 유럽에서 삼둥이 아들 대한·민국·만세를 직접 찍고 글로 쓴 유럽 여행 화보 에세이다. 1년간 생활한 프랑스부터 스위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아이슬란드까지 총 8개 나라의 여행기가 실렸다. ◇오십부터는 이기적으로 살아도 좋다(오츠카 히사시·한스미디어) “50대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고민한다.” 저자는 수십 년간 50대 1만 명의 이야기를 듣고 ‘후회하지 않고 50대를 사는 법’을 정리했다. 50대는 ‘인생의 디톡스 기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일, 업적, 인간관계를 결산하고 앞으로의 50년을 계획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스필버그의 말(스티븐 스필버그·마음산책)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74년부터 2021년까지 48년 동안 그의 인터뷰 스물한 편을 소개하는 책에는 ‘죠스’, ‘쉰들러 리스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유명 영화의 제작기도 포함돼 있다. 또한 그동안 공개된 적 없는 그의 개인적 삶까지 담았다. ●Stage ◇노트르담 드 파리 프렌치 오리지널 일정 2월 25일 ~ 3월 13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질 마으 출연 안젤로 델 베키오, 막시밀리엉 필립, 엘하이다 다니, 젬므 보노 등 프랑스 3대 뮤지컬 중 하나인 ‘노트르담 드 파리’가 대구, 부산 공연에 이어 서울 앙코르 공연을 펼친다. 지난해 세종문회회관 대극장에서 유료 점유율 99%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노트르담의 꼽추’가 원작이다. 추한 외모의 꼽추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대주교 프롤로, 근위대장 페뷔스의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그 안에서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시기의 사회상과 이교도들의 갈등, 부당한 형벌제도, 인간의 욕망, 삶과 죽음까지 다각도로 담아내며 시대를 뛰어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특히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뤄진 ‘성스루’(Sung-through) 작품의 백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뮤지컬로, 낭만적인 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안무, 30톤의 거대한 무대 세트가 감동을 전해준다. 1998년 프랑스 파리 초연 이후 전 세계 23개국, 1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만난 세기의 역작이다. ◇프리다 일정 3월 1일 ~ 5월 29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추정화 출연최정원, 김소향, 전수미, 리사, 임정희, 정영아 등 ‘프리다’는 EMK뮤지컬컴퍼니가 선보이는 첫 중소극장 작품이다. 제14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멕시코의 위대한 여성 화가이자 혁명가인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액자 형식으로 그린다.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살았지만, 자신의 지난한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에게 세리머니 같은 최고의 쇼를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추정화 극작가는 프리다의 마지막 생애를 쇼라는 독특한 콘셉트와 형식으로 풀어낸다. 또한 주인공 프리다 칼로 역에 배우 최정원, 김소향이 캐스팅돼 기대감을 높였다. ◇B클래스 일정 2월 25일 ~ 5월 15일 장소 브릭스씨어터 연출 오인하 출연 최정헌, 이지현, 지호림, 김찬종, 노태현, 류찬열, 한선천 등 2017년 초연 이후 매 시즌 관객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연극 ‘B클래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연극의 배경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만 갈 수 있는 예술인 양성학원 ‘사립 봉선예술학원’이다. B클래스에 속한 학생 네 명이 실력이 아닌 능력과 조건만으로 평가받는 봉선예술학원의 기준을 넘어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합동 졸업 공연’을 준비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는다. 청춘의 자화상이 큰 울림을 안겨줄 예정이다.
- 2022-02-10 08:33
-
- ‘노래하는 배우’ 문희경 “가수의 꿈, 25년 만에 이뤘죠”
- 배우 문희경(56)은 유난히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 그녀에게서는 나이를 잊은 사랑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당차고 열정적이다. 문희경의 에너지는 강철 추위도 꺾지 못할 정도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동백꽃이 떠올랐다. 문희경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이맘때쯤 활짝 피는 꽃. 지난해 ‘대세’로 떠오른 그녀는 올해도 기지개를 활짝 켰다. 문희경의 2021년은 찬란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 이어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이하 ‘쇼윈도’)에 출연했고, 티빙(TVING) 웹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도 특별출연했다. 연이은 화제작 출연으로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는 2월에는 앨범을 발매하며 가수로서 못 다 이룬 꿈도 이뤘다. 문희경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행복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재작년에도 바빴지만, 작년에도 정신없이 일들이 휘몰아쳤죠. 올해 더 많은 일을 할 것 같아요. 한마디로 2021년은 올해 더 열심히 하라고 준비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체력은 늘 유지하고 있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편이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받는 게 좋아요. 현장 체질인가 봐요. 집에 있는 것보다 편안해요.” ‘쇼윈도’로 새로운 배역의 갈증 해소 회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시청률도 상승 중인 드라마 ‘쇼윈도’. 문희경은 주요 역할로 출연 중이다. 그녀가 맡은 김강임은 패션 기업의 회장이다. 한선주(송윤아 분)의 엄마이기도 하다. 즉 문희경은 여성 회장이자 엄마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쇼윈도’와 김강임에 대해 “하고 싶었던 작품, 역할”이라고 강조하며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쇼윈도’ 제작진은 문희경의 캐스팅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녀가 송윤아의 엄마로 보일지 우려했다. 다행히도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제작사에서 제가 송윤아 엄마를 하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해서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과감히 전화했어요. ‘나 김강임 역할 하고 싶다, 나를 대체할 배우 없을 것이다’라고 어필했죠. 제작진분들이 저를 직접 만나본 후 고민을 떨치고 저를 과감히 캐스팅했죠. 연기를 해보니까 저하고 송윤아는 진짜 엄마하고 딸이 되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어필하는 편이에요.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처럼 문희경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는다. ‘쇼윈도’에 앞서 출연한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랬다. 석형(김대명 분)의 엄마로 출연한 문희경은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나왔다 하면 통통 튀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화려한 스타일링도 한몫했다. “모든 배우가 신원호 감독님, 이우정 작가님 작품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어느 날 작가님이 저를 원하신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진짜 소리 지를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덥석 물었죠.(웃음) 저나 김갑수 선배님, 김해숙 선배님은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좋은 배우들, 스태프들과 같이 작업하는 것을 즐거워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좋은 기억이고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문희경은 부유한 상류층 역할을 많이 맡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사모님이었고, ‘쇼윈도’에서는 회장님이었다. 그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모님이지만 아들만 바라보는 평범한 엄마였고, ‘쇼윈도’는 재벌 회장 역할이다”라고 차이점을 짚었다. 문희경은 그동안 사모님 역을 많이 맡은 것보다 ‘누군가의 엄마’에 그친 것에 아쉬움이 더 커 보였다. “늘 배우로서 갈증이 있었죠. 살림하고 누군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쇼윈도’의 김강임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룹 회장이고 여성 경연인이잖아요. 그동안 부잣집 사모님은 많이 연기했지만 경영인은 처음이었어요. 엄마보다는 일하는 여성이죠.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풀려요.” 사모님 역할을 주로 맡다 보니 캐릭터가 철부지거나 얄미운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인생작으로 꼽는 2010년 SBS 드라마 ‘자이언트’ 때부터 이어져온 이미지 같다. 극 중 계모 오남숙 역을 맡은 문희경은 악녀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다. 카카오TV 웹드라마 ‘며느라기’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평범한 시어머니로 분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더 얄미웠다. “사실 저도 착한 역할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못된 역할, 카리스마 있는 역할만 기억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며느라기’ 역할은 악역도 아니고 가정밖에 모르는 현실적인 시어머니죠. 착하고 좋은 것 같으면서도 며느리들에게 시킬 것은 다 시키니까 욕을 먹더라고요. 이게 욕 먹을 일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문희경은 “포스 있고, 예민할 것 같고, 못될 것 같다”는 오해를 받는다. 때문에 실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정반대 이미지에 깜짝 놀란다고. 귀엽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역할에 충실할 뿐이에요. 배우는 맡은 역할을 100% 해내야 하는 게 숙명이죠. 배우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요. 빨간색, 검은색 등 다양한 컬러를 입힐 수 있어야죠.” 출연작 드라마 SBS ‘자이언트’, KBS2 ‘감격시대’, JTBC ‘귀부인’, JTBC ‘품위있는 그녀’, MBC ‘슬플 때 사랑한다’, MBN ‘우아한 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카카오TV ‘며느라기’,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 등 영화 ‘좋지 아니한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간신’, ‘글로리데이’, ‘인어전설’, ‘어멍’ 등 가족, 그리고 제주 실제 엄마로서의 문희경은 어떨까. 그녀는 슬하에 작곡 공부를 하는 딸이 있다. 문희경에게 딸은 제일 친한 친구고, 둘도 없는 존재다. 딸 얘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 그녀. 그러다가 이내 언젠가 딸이 시집 갈 때를 떠올리고는 “어떻게 보내야 하나”며 울컥하기도 했다. “딸은 제 인생의 원동력이에요.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을 줘요. 엄마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더 느끼고 열심히 하려고 하죠. 딸을 낳은 것은 축복이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에요. 딸은 소통이 잘되고 친구 같아요. 걔가 더 언니 같아요. 저를 막 혼내요.(웃음) 결혼은 안 하겠대요. 친구들과 같이 실버타운 들어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너한테서 해방되고 싶다고 하고요. 그런데 막상 걔를 보내면 눈물 날 것 같아요.” 도시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고향은 제주도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문희경을 포함한 여덟 남매는 아옹다옹 살았다. 중산층이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다 보니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제주도는 남아 선호사상이 심했어요. 아들 두 명을 낳으려다 보니 딸 여섯 명을 낳게 된 거예요. 그래서 8남매가 됐죠. 저는 다섯째고요. 부모님은 과수원도 팔며 자식들을 공부시킨, 자식들을 위해 사신 분들이죠. 형제들이 공부는 잘했어요. 선생님, 대학교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공부를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 잘하면 시키고, 못하면 안 시킨다고 하셨거든요.” 문희경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남몰래 가수라는 꿈을 키웠기 때문. 어린 시절부터 친척들 앞에서 빼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소녀는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다. 나이 들면서 가수에 대한 꿈은 확고해졌고,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제주도를 벗어나 서울로 가야만 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님이 서울행을 반대하셨어요. 당시 집안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제주교대에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저는 서울에 가야만 했어요. 그래야 대학가요제든지 강변가요제든지 나갈 수 있으니까요. 서울 안 보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데모도 하고 그랬죠. 결국 대학에 합격하니까 보내주시더라고요.” 마침내 문희경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고,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렸다. 1986년 ‘제1회 샹송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쇼86’에 출연했다. 이어 1987년 ‘강변가요제’에서는 ‘그리움은 빗물처럼’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대학에 가고 상도 받으면서 제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 같았어요. TV에도 나오니까 부모님도 ‘어릴 때부터 노래 좋아하더니 하네, 가수 할 수 있으면 해라’라고 응원해주셨죠.” 그렇게 벗어난 제주도지만, 고향은 고향인가 보다. 문희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도, 애정도 커졌다.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인어전설’, ‘어멍’에 출연하기도. 배우로 제주를 찾아 해녀 연기를 하기까지, 감회가 남달랐을 듯싶다. “내 고향 제주는 정신적 지주죠. 내게 배우로서 가수로서 감성적인 부분을 줬다고 할까요.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기도 하죠. ‘내가 어떻게 고향을 떠나왔는데,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그런 마음이 강했어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그렇게 벗어나고만 싶었는데, 나이 들면서는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귀향 본능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에는 내려가서 살 거예요. 촬영이 있을 때만 서울로 올라오고, 귤 농사도 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25년 만에 다시 가수 앞서 얘기했듯이 문희경은 1987년 강변가요제 대상 출신이다. 가수가 되는 지름길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가수 인생은 잘 풀리지 못했다. 문희경은 1989년에 1집 ‘갈 곳 잃은 연정’, 1994년에 2집 ‘예전 같지 않은 너’를 발표하며 발라드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고 결국 뮤지컬 배우로 전향했다. 첫 작품은 1996년 ‘노트르담의 꼽추’ 에스메랄다 역으로 기록된다. “문희경이라는 사람도 점점 잊혀갔죠. 가수는 내 길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서 서울에 왔는데 아닌 길을 억지로 갈 수는 없잖아요. 과감히 포기하고 뮤지컬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는 뮤지컬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미래도 안 보이고, 암흑 같은 시기였죠. 하루하루 버티면서 그날그날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마침내 문희경은 2007년 어둠을 벗어나게 됐다. 연극 무대에 선 그녀를 보고 정윤철 감독이 러브콜을 보내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 출연했다. 문희경은 제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는 정윤철 감독을 ‘은인’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린 문희경. 오히려 가수의 꿈에 가까워지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2015년 문희경은 MBC ‘복면가왕’ 출연으로 노래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후 2016년에는 JTBC ‘힙합의 민족’에 출연했다. 딕션이 좋은 그녀는 놀라운 랩 실력을 보여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0년에는 MBN ‘보이스트롯’에 출연해 트로트 실력을 뽐냈다. 아름다운 음색으로 최종 5위를 거머쥐었다.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문희경은 결국 다시 가수가 됐다. 지난해 2월 트로트 정규 앨범 ‘금사빠 은사빠’를 발매한 것. 가수를 포기하고 배우가 된 지 꼭 25년 만이다. 그리고 지난 12월에는 ‘보령에 가자’, ‘서해랑길에서’, ‘대천에 가자’ 총 3곡을 발매했다. “제가 ‘보이스트롯’을 하면서 정의송 선생님 노래를 세 곡이나 했어요. 그 인연으로 선생님께서 고맙다고 곡을 선물로 주시면서 앨범을 내게 됐죠. 제가 다시 가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생각도 없었어요. 악착같이 가수를 열망할 때는 정말 안 됐잖아요. 다 내려놓고 노래를 즐기면서 했더니 가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 지금은 인사할 때 ‘배우 겸 가수 문희경’이라고 해요.” 정리해보면 문희경은 ‘가수→뮤지컬배우→배우→가수 겸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노래 부를 때보다 연기할 때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연기를 할수록 깊이와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노래 잘하는 배우’로 봐주기를 바랐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제주도 꼬마는 50여 년이 흐른 뒤, 자신이 배우 겸 가수가 될 줄 알았을까.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그녀의 메시지가 더욱 특별하게 와 닿는다. “결국 돌고 돌아 가수도 하고, 뿌듯하고 만족한 삶이죠.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람 일은 몰라요. 그러니까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지금은 백세인생 시대이기 때문에 나이가 있다고 망설이거나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꿈이 있다면, 꿈을 꾸라고 하고 싶어요.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잖아요.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면, 삶에 긴장감이 생기고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꿈을 꾸고, 도전하세요!”
- 2022-01-04 09:13
-
- '한가인 시아버지' 아닌 원로배우 연규진 누구?
- 배우 연규진이 KBS 2TV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를 통해 32년 만에 예능 나들이에 나서 화제다. 브라운관 출연도 지난 2014년 방송된 KBS 1TV '산 넘어 남촌에는2' 이후로 7년 만이다. 특히 연규진은 방송에서 아들 연정훈과 며느리 한가인을 언급해 더욱 화제를 모았다. 현재 연규진은 '연정훈 아버지', '한가인 시아버지'로 통하지만, 그도 유명한 배우였다. 원래는 연정훈이 '연규진 아들'로 불렸다. 그렇다면 연규진은 누구일까, 좀 더 자세히 알아봤다. 연규진은 1945년생으로 만 75세이며, 1969년 TBC 공채 8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5년 간의 무명 생활 끝에 1974년 TBC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1990년 MBC에서 방송된 드라마 '똠방각하'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김영애 등과 식품회사 오뚜기의 전속 모델이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잘나갔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 연규진은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코리아게이트', '남자 셋 여자 셋', 'LA 아리랑'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앞서 말했듯 '산너머 남촌에는 2' 이후로는 특별한 작품 활동이 없다. 연규진은 배우 활동 뿐만 아니라 스타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서울대 무용과 출신인 아내와 방송사에서 우연히 만나 1972년 결혼했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이 바로 연정훈이다. 연정훈은 KBS 1TV '노란 손수건'에서 한가인을 만나 지난 2005년 결혼했다. 연정훈과 한가인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또한 연규진의 재산 규모는 준재벌급 정도로 알려졌다. 동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업 수완이 남다르고, 원래 집안 자체도 좋다고 한다. 과거 TV조선 '호박씨'에서 "연규진 씨 부모님이 약사였다더라. 부모님이 모은 재산으로 연규진 씨가 연흥극장을 운영했고 그 재산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다고 전해진다"는 얘기가 나온 바 있다. 원래 연규진은 연정훈 한가인 부부와 판교에서 같이 살았다. 그곳은 250평 정도의 부지에 50평 정도의 2층 건물로 60억에 달하는 고급타운하우스로 알려졌다. 이후 2010년 연정훈 한가인 부부는 남산에 위치한 고급 빌라로 이사했다. 연규진은 지난 10일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서 극장 소유 루머에 대해서 "그건 소설을 써 놓은 거다. 족보 상의 먼 친척들이 운영할 뿐, 나와는 관계 없다"고 해명했다. 다만, 자신이 재테크를 잘 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와 함께 연규진은 '한가인이 재벌가라서 시집 갔다'라는 루머도 언급하며 "우리 며느리가 '뭐 때문에 저 집에 시집을 갔을까'부터 퀘스천이 된 거다. 나는 방송에서 본인 신상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앞서도 연규진은 연정훈과 한가인이 드라마에서 눈이 맞아 결혼했다고 강조했다. 연규진의 며느리 사랑 또한 유명하다. 그는 지난 방송에서도 "한가인이 아직도 그렇게 예쁘냐"는 질문에 "보고만 있어도 예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일 못해도 괜찮다. 내가 예쁜 여자한테 약하다"며 "손주는 두 명이다. 위에가 딸, 밑에가 아들. 6살, 3살이다"고 애정을 표했다.
- 2021-11-11 13:04
-
- 연예계 떠났다가… 제2의 직업으로 성공한 스타들
- 80, 90년대를 주름잡았지만, TV에서는 보이지 않아 근황이 궁금한 스타들이 있다. 특히 그들이 화려한 연예계를 떠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놀라움을 자아낸다. 젊은 시절 재능을 인정받으며 해오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그들이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제 2의 인생으로 성공한 추억의 스타들을 꼽아봤다. 임상아 : 가수 → 가방 디자이너 지난 1996년에 나온 노래 '뮤지컬'은 현재도 많은 이들의 노래방 애창곡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임상아. 이국적인 외모의 그는 당시 뜨거운 인기를 얻으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주목 받았다. 그러나 임상아는 돌연 데뷔 3년 만인 지난 1999년 연예계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연예계를 은퇴한 이유에 대해 "일의 노예가 된 느낌이었다. 이미지 때문에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게 답답했다"고 뒤늦게 털어놓은 바 있다. 임상아는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이에 그는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뒤, 지난 200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방을 론칭했다. 가방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대까지 호가하며,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특히 리한나, 앤 해서웨이, 비욘세, 브룩 쉴즈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의 가방을 찾는 주 고객으로, 현재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김민우 : 가수 → 자동차 영업 가수 김민우는 지난 1990년 '사랑일뿐이야'로 데뷔해 인기를 얻었다. 특히 '입영열차 안에서'는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다. 그는 SBS '불타는 청춘' 섭외 요청 1순위였던 그리운 가수였다. 지난 2019년 김민우는 제작진의 약 2년 간의 섭외에 응답, '불타는 청춘'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특히 그의 근황이 화제였다. 연예계를 떠난 그는 자동차 영업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수에 대한 꿈은 항상 갖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김민우는 '싱글대디'라는 사실을 밝혀 많은 응원을 받았다. 지난 2009년 6살 연하의 아내와 결혼했지만 8년 만에 사별했고, 슬하의 딸을 혼자 키우고 있는 것. 이후에도 김민우 부녀의 애틋한 모습이 방송을 통해 공개되면서 그는 많은 응원을 받았다. 최연제 : 가수 → 한의사 배우 선우용녀의 딸로 유명한 가수 최연제. 그는 지난 1993년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을 발표하며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연예계를 은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한의학에 매진하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미국 LA에서 불임 전문 한의사로 활동 중이다. 일과 함께 사랑도 찾았다. 최연제는 한 차례 아픔을 극복하고, 지난 2004년 미국 유명 은행의 부사장 케빈 고든과 재혼했다. 이후 남편, 아들과 미국의 대저택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공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정호근 : 배우 → 무속인 누군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인해 직업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배우 정호근은 지난 2014년 말 갑자기 무속인이 됐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사극 전문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며 명품 조연으로 통해왔다. 그런 그가 배우로서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무속인이 됐다니 놀랄 수 밖에. 그러나 정호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반응이다. 할머니도 무속인으로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는 그는 지난 2014년 11월 병을 앓은 후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이 됐다. 처음에 무속인인 정호근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현재 그는 인정받는 무속인으로 통하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정호근의 심야신당'은 많은 연예인의 출연으로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이지연 : 가수 → 셰프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바람아 멈추어 다오' 등을 히트시킨 '80년대 하이틴' 가수 이지연. 그 역시 돌연 연예계를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미국행을 택했다. 그러다 지난 2008년 이혼 소식과 함께 요리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근황을 알렸다. 미국 애틀란타 소재의 요리학교 '르 꼬동 블뢰'에 재학 중이었다. 이후 이지연은 미국 애틀란타 지역에서 바비큐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지난 2013년에는 애틀란타 지역, 2020년에는 조지아주 최고의 바비큐 레스토랑으로 각각 뽑히기도. 또한 동료 요리사인 8살 연하의 미국인 셰프와도 재혼해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미국에서 제2의 삶을 사는 그에게 많은 응원이 쏟아지고 있다.
- 2021-10-26 14:57
-
- [세대공감] 추석 명절, 손주부터 형님까지 가족 간 세대공감 소통법
- 60대 중년의 신동원 씨는 과거와 사뭇 달라진 명절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재롱을 부리며 장난치던 조카들이 20~30대가 되면서 어른들과의 대화를 피하는 분위기다. 젊은이들이 하도 ‘꼰대’라고 흉본다기에 그렇게 안 보이려고 나름 노력하며 다가가는데도 조카들 반응은 제법 서운하다. 나이 든 사람끼리 앉아 뻔한 대화를 나누기보다 다양한 세대와 어울리며 진솔하게 소통하고 싶은데, 가족인데도 참 어렵기만 하다. 사실 다른 세대와 소통한다는 건 매우 힘든 주제다. 2021년 3월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세대갈등 인식에 관한 질문에 세대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한 응답자가 전체 85%였다. 모든 연령대에서 최소 78% 이상의 응답자가 세대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세대갈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전 연령대에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세대갈등 극복 전망 역시 낙관적이지 않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세대갈등이 지금보다 심각해질 것이라는 응답은 44%, 지금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는 응답은 46%로, 10명 중 9명이 현재도 심각한 세대갈등이 앞으로도 비슷하게 유지되거나, 오히려 더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세대가 다르면 상대를 경쟁과 갈등의 대상으로 여긴다. 최근 언론에서는 세대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며 호들갑이다. 그런데 세대갈등은 어느 시대나 있었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어가는 과정에서 시대는 계속 발전하고 변한다. 같은 시대를 사는 것 같아도 각 연령대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상이 다르고 생각도 달라진다. 이를 독일의 미술사학자 핀터(W. Pinter)는 ‘동시대의 비동시대성’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문제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상이나 취향이 옳고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 영국의 유명 소설가 조지 오웰은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세대갈등은 이런 착각에서 시작된다. 소통하려면 ‘워딩’부터 달라야 유난히 다른 세대와의 소통이 어려워 답답해하는 시니어들이 있다. 다른 세대를 탓하기보다 시니어들이 무엇을 피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화법으로 살펴본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나 때는 말이야’는 유행어나 다름없다. 2030세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다음이 어떻게 될지 뻔해서다. 보통 ‘나 때는 말이야’ 하고 시작되면 상대를 위한 조언보다는 권위와 경험을 내세운 일방적 훈계에 그치기 쉽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과거 경험이 현재나 미래 사회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경험을 문제해결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며 부드럽게 얘기하는 게 좋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답정너’ 태도도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미 스스로 답을 정해놓고 질문하는 시니어들이 있다. 이는 질문의 형태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식을 뽐내는 화법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때는 편견 없이 상대의 대답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요) 상대가 궁금해하지 않는 주제에 대해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대화법은 듣는 이를 지치게 한다. 상대가 묻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듣는 이의 반응을 고려하며 잘 소통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말을 짧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다음으로 자신보다 어리고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권위주의적으로 말하는 대화법은 듣는 이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준다. 명령형 말이나 강압적인 말투, 일방적인 주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권위적인 어투’는 취업사이트 ‘사람인’에서 실시한 직장인 비호감 말투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상대와 동일한 인격체로서 대화를 나눌 때 원활한 소통이 이뤄진다. 마지막으로 성적, 연애, 연봉, 결혼과 같은 사적인 주제는 가족 사이에서도 조심해야 할 민감한 주제이므로 신중해야 한다. 친인척끼리 이런 얘기도 못 하나 싶은 시니어도 있겠지만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는 곧 소통 단절로 이어진다. 한국가정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가족소통 전문가로 활동했던 김대현 소장(현 중년행복연구소 소장)은 등산을 예로 들며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산을 오르는 등산객은 등산을 마치고 내려가는 하산객을 보고 묻는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하산객은 웃으며 거의 다 왔다고 답한다. 이후 한참을 올라도 정상이 보이지 않자 등산객은 거짓말한 하산객이 미워진다. 사실 하산객이 기억하는 등산 과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왜곡됐다. 하산객의 시간과 등산객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세대 간 소통이 바로 이와 같다. 한창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과 그 시기를 마치고 여유를 찾은 중년이 느끼는 세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불통이 발생하는 것이다. 김 소장은 세대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이청득심’(以聽得心)을 강조한다.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라는 말이다.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쓴소리는 얼마든지 밖에서 듣고 있다. 부모와 집안 어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휴식처가 되어주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기분 좋게 세대 간 소통법 다른 세대와 기분 좋게 소통하려면 우선 다른 세대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예의가 없어”, “산업화 세대는 고리타분해”와 같이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세대를 일반화하면 편견이 생긴다. 같은 세대여도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다. 일반화의 오류는 세대갈등을 조장할 수 있어 피해야 한다. 다음으로 누군가와 소통할 때는 연령대와 상관없이 타인을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 뻔한 이야기 같아도 이를 놓치고 마음대로 상대를 평가하며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서로의 생각과 취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선한 호기심으로 무례하지 않게 질문한다. 미국의 한 수필가는 “우주가 인류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인류 발전의 큰 원동력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에너지가 바로 사랑과 질문의 결합이라는 뜻이다. 이경랑 SP&S컨설팅 대표는 사랑이 결합된 호기심을 ‘선한 호기심’이라고 정의한다. 단순한 호기심은 무례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애정을 바탕으로 한 선한 호기심은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선한 호기심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전제로 한다.말하기 전에 이 질문이 상대에게 불쾌함이나 당혹감을 줄 수 있는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또 공감하며 경청한다. ‘공감적 경청’은 나의 사고체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준거를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공감적 경청의 자세는 나와 다른 세대와 대화를 나눌 때 굉장히 중요해지는데, 서로 생각이 달라 불통이 쉽게 일어나서다. 마지막으로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간결한 말만큼 전달력이 좋은 화법은 없다. 말이 길면 오히려 핵심을 잃기 쉽다. 짧고 굵게 내 생각을 전하는 게 좋다. 이렇게 다른 세대와 대화할 때 더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세대별로 경험한 세상과 생각·행동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 Z세대의 손주, 대학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고군분투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조카, 돈 아깝다며 외식을 한사코 거절하는 베이비붐 세대 어머니. 특정 세대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각 세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따라서 다른 세대와의 무심한 소통은 오해를 야기하고 불통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그런데 사실 이런 대화법은 세대를 뛰어넘어 대화 예절에 속한다. 최근 ‘웰에이징’(Well-aging)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오래 살기보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의미다. 웰에이징의 방법으로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을 흔히 얘기하지만 신체의 웰에이징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마음과 태도의 웰에이징이다. 나보다는 상대를 배려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웰에이징의 시작이다. ‘말’은 사람의 ‘성품’을 드러내는 만큼 상대를 배려하며 품격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 시니어의 모습은 진정한 웰에이징을 증명한다. 청년세대와 원활하게 소통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상대방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다. 그들은 나이와 지위를 가지고 상대를 아랫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누구나 동등한 입장으로 인정하고 상대와 눈높이를 맞춰 소통한다면 연령대와 관계없이 즐겁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난해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듯, 청년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겸허하고 진정성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올 추석 동년배끼리 뻔하고 지루한 대화를 나누기 싫다면, 다양한 세대와 공감하며 그들의 눈높이로 소통을 시도해보자. 시니어 빅3의 인플루언서 소통 노하우! 세대갈등의 중심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간의 갈등이 극심해진 현대사회에서 청년들과 원활히 소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들이 있다. 그들의 비결은 뭘까. 윤여정 ‘권위적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태도’ 70대 윤여정은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의 워너비다. MZ세대를 열광시킨 윤여정의 화법은 직설적이지만 권위적이지 않다. 70대 배우로 높은 위치에 올랐지만 상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또 젊은 세대에게 완성된 어른으로 보이길 원하지도 않아 솔직하고 자유롭다. “젊은 사람이 왜 재미없게 살아? 인생 길지 않아. 그냥 즐겨!” 70년 넘은 인생에서 얻은 자유분방한 태도를 유쾌하게 건넨다. 그의 이야기에는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장황한 잔소리도 없다. 그저 자유롭고 솔직한 자신의 생각, 짧고 명확한 전달력,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가 존재할 뿐이다. 밀라논나(장명숙) ‘닮고 싶은 멘토의 대화법’ 70대 유튜버 장명숙은 ‘밀라논나’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MZ세대와 소통한다. 밀라노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인 그는 패션에 대한 팁 또는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젊은이들의 고민에 조언을 던지며, 2030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인기 비결은 조곤조곤하게 전하는 ‘인생 상담’이다. 이 상담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동안 기성세대가 하던 조언과 차이가 있다. 첫째, 그는 70대의 나이에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청년들의 고민에도 진심 어린 공감을 전한다. 둘째, 그는 청년 시청자들에게 조언을 전할 때는 물론, 손주뻘의 연예인과 대화를 나눌 때도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한다. 셋째, 그는 사회의 기준보다 개인의 주체성을 존중한다. 예컨대 직장 상사의 괴롭힘으로 힘들어하는 청년에게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직장을 나오라”고 말하며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안 어려운 직장이 있냐”, “나약하게 굴지 마라”처럼 개인의 주체성보다 한국 사회 기준으로 조언하던 기성세대와 확연히 다르다. 백종원 ‘상대를 움직이는 소통법’ 요리연구자이자 외식사업가 백종원은 요식업계 최고의 위치에서 업계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조언한다. 자칫하면 ‘꼰대’라고 불릴 수 있는데 그는 MZ세대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소통 비법은 세 가지다. 첫째, 자신의 비책부터 말하기보다 상대의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관찰한다. 둘째, 관찰로 원인을 진단하고 이에 따른 처방을 원포인트로 내린다.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고 핵심을 짚어 솔루션을 제공한다. 셋째, 권위가 아닌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 진심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절대 특권의식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다. 예컨대 잘못된 고집을 꺾지 않는 상대와 소통할 때도 권위보다는 요리 대결로 자신의 솔루션을 몸소 입증한다.
- 2021-09-15 09:02
-
- [카드뉴스] 가사 분담을 위한 꿀팁
- 황혼 부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집안일. 집안일도 페어플레이가 필요한데, 효율적인 가사 분담을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실천해보자. 1. 집안일의 기준을 낮춘다 식사 준비, 빨래, 환기 등 실내 생활을 편하게 하는 모든 활동이 가사노동이다. 집안일이 처음이라면 당장 눈에 거슬리는 것부터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자. 2. 자녀와 집안일을 나눈다 집안일은 모두의 몫이다. 같이 사는 자녀에게도 일정 부분 분담한다. 그들이 직장 및 학교로 바쁘다면 분리수거, 장보기 등과 같이 비정기적인 일을 시키자. 3. 가사분담표를 만든다 ①, ②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이 모여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이를 표로 만든 다음 벽에 붙여둔다. 주기마다 결과를 점검하고, 벌칙을 만들어 강제성을 부여한다. 부부관계 자가진단 테스트 - 배우자가 내 의견을 존중해준다. - 배우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 배우자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준다. - 남편(아내)으로서 입장을 배려받는다. - 우리는 정서적인 친밀감이 느껴진다. - 부부 성관계나 스킨십에 만족한다. - 가사에 관한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진다. - 우리는 자기 성장과 자아실현을 서로 도와준다. - 우리는 싸우지 않고 대화를 오래 할 수 있다. - 우리는 가족으로서 공동 책임감을 느낀다. ※ 2개 문항 이상 ‘아니오’ 답변을 한 경우 부부관계 점검 요망 출처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 2021-08-20 08:00
-
- 서로에게 다가가는 중년 부부 소통법
- 중년의 부부 생활은 쉽지 않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아내, 머리가 굵어지면서 말을 듣지 않는 자녀들, 고부와 장서 간의 갈등. 이처럼 가족 내의 인간관계가 녹록지 않다. 특히 오랜 세월 함께한 배우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혼의 위기에 놓인 황혼 부부가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60대 이상의 시니어 이혼 상담 건수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여성의 경우 3.2배 증가했고, 남성의 경우 4.1배 증가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관계자는 “이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옅어졌고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고통스러운 부부 생활을 유지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위한 선택으로 이혼하는 시니어가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황혼이혼 사유의 1순위는 바로 ‘성격 차이’다. 첨엔 정반대 성격이라 끌렸지만, 부부 생활을 지속하면서 성격의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부 상담 전문가는 “부부 사이에 성격 차이가 있다면 서로 맞춰가려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신과 상대의 어떤 기대와 욕구가 좌절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부부 갈등의 씨앗 중 하나다. 고부 및 장서 갈등, 은퇴 후 가족의 외면, 배우자와의 불화 등 가족 간의 스트레스로 중년은 괴롭다. 실제로 한 논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혼의 중년 남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족 스트레스가 1순위로 꼽혔다. 설경옥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결혼 관계 내에서 개인 스트레스는 부부 공동의 스트레스로 전이되기 때문에 배우자의 스트레스에 부부가 함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거리를 좁히는 친밀감 자녀들은 결혼해서 분가했고, 얼마 전부터 남편이 은퇴해서 둘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경우가 많아졌다. 집안일을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사사건건 지적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고맙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계속된 비난과 명령조 말투에 지쳤다. 예전 같으면 자식들 때문에 참았겠지만, 이제는 참고 싶지 않다. 결국 부부 문제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얽히고 꼬여버린 관계의 매듭은 결자해지 자세로 당사자가 풀어야 한다. 논문 ‘부부 갈등이 결혼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갈등의 주제보다 갈등을 풀어내는 방식이 결혼 만족도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평소에 소통법을 미리 점검하고, 갈등을 막을 수 있는 의사소통 방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특히 친밀감, 열정, 존중, 이 세 가지 요소를 명심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다. 일단 정서적 친밀감이 중요하다. 일상 속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자. “귓가에 새치가 많네요”, “오늘 피곤해 보여요”처럼 사소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것도 좋다. 가벼운 스킨십도 괜찮다. 아침에 먼저 일어난 사람이 10초간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잘 잤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거나, 각자 일을 하러 가기 전에 10초간 포옹을 해보는 것이다. 연문희 성산효대학교대학원 가족상담학과 석좌교수는 “친밀감 형성을 위해서 부부간 언어적 소통도 좋지만, 중년 부부는 서로 잘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상대의 시선이나 음성, 표정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상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심리적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감에 비례한다”라며 “서로 간의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포옹이나 팔짱 같은 가벼운 접촉을 생활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다가가는 대화 은퇴 이후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중년 부부는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은퇴 후 상대적으로 시간은 많지만, TV 시청에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고 부부 사이에 아예 대화가 단절되기도 한다. 이때는 서로 감정이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결혼사진, 자녀들의 돌사진, 가족사진 등을 꺼내놓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과 감정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좋다. 반려견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똥 치우는 법, 사료 등 관련 주제를 얘기하면서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는 “중년 부부는 대화가 단절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서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라며 “중년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함께 먼 곳을 바라보는 관계다”라고 말했다. 중년에는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남편은 갈수록 여성화되고, 반대로 아내는 남성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갱년기를 같이 겪기 때문에 서로 예민하거나 다투는 일이 많다. 은퇴 후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집안일이나 자녀 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많다. 이때는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법이 필요하다. 남편의 경우엔 인정과 행동 변화가 필요하다. 잘못한 일을 사과할 때는 자신의 잘못된 점을 명확히 말해주고, 더불어 앞으로 개선할 방법에 관해 말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좋다. 반대로 아내의 경우엔 잘한 점이 있으면 “당신이 최고야”라며 남편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칭찬을 해줄 필요가 있다. 최성애 HD 행복연구소장은 “비난과 경멸은 원수가 되는 대화일 뿐이다. 대신 ‘정말 힘들었겠네’, ‘우리가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까?’처럼 경청하고 수용하는 자세와 더불어 ‘다가가는 대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 2021-08-09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