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투박하지만 솔직한 화법. 박동현(朴東炫·60) ‘더 클래식 500’ 대표의 말투가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순박한 인상 속에는 맡은 지 2년여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킨 수완 좋은 경영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신라호텔, 조선호텔 등을 거치며 호텔업계의 스페셜리스트로 활동하다가 만년을 맞이하여 시니어타운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몸담은 박 대표는 최근 전국노인주거복지시설협회의 회장으로도 취임했다.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한 그의 행보에는 시니어 주거공간의 필요성과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꿈꾸는 의지마저 담겨 있었다.
박동현 더 클래식 500 대표는 “시니어업계의 삼성전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시니어 사업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입장에 어울릴 법한 야심이라면 야심이다. 하지만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한 도심형 시니어타운 더 클래식 500의 성공적인 런칭과 운영을 보면 그의 말이 단순한 홍보용 문구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즐겁고 활기찬 노후를 보낼 수 있는 특별한 공간, 시니어타운의 적절한 입소 시기를 물었다. 나이가 많아 건강이 나빠진 후에 들어가려면 건강 문제로 입주가 허락되지 않아 요양원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데 골프연습장, 당구장, 헬스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서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도심형 시니어타운이라는 신세계
1990년대 시니어타운 초창기에는 전원 속 '나홀로 단지'의 성격이 강했지만 요즘은 도심형이 대세다. 도심형의 특징은 1차원적 주거공간이 아닌 호텔, 종합병원, 백화점 등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한 ‘복합형’이다. 건국대학교가 운영하는 도심형 노인주거복지시설인 더 클래식 500은 실버타운이 아닌 ‘시니어타운’으로 명칭지어져 있다. 실버라는 말보다는 시니어라는 말이 더 듣기가 좋더라는 박 대표의 생각 때문이다.
“지금까지 실버타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느낌이었거든요. 그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실버타운으로 각광받는 게 도시형입니다. 처음에 실버타운 개념이 나왔을 때 삼성도 뛰어들었었는데 결과적으론 실패했습니다. 아는 것, 깨닫는 것,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고 하죠. 아는 것만으로 실행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단순히 ‘자연 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함께 지낸다’는 게 시니어타운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신이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은둔된 실버타운으로 가면 고립된 느낌을 받게 되고 생활 면에서 안 좋을 수밖에 없어요.”
박 대표는 과거 실버타운들의 실패 사례를 토대로 더 클래식 500을 ‘액티브 시니어들이 사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콘셉트로 방향을 정했다. 그래서 광진구에 위치함으로써 가지게 된 교통, 쇼핑, 문화시설 등 주변의 인프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도시 생활과의 연계점들을 마련하여 사회와 동떨어진 느낌을 받지 않도록 고려했다. “외국은 시니어타운이 대학교 주변에 많아요.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게 시니어들의 멘탈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라 합니다. 우리도 그런 시도를 해서 다행스럽게 성공하고 있는 중이라고 봐요.”
그 무엇보다도 차별화를 추구한다
더 클래식 500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자면 하우스키핑, 컨시어지 서비스와 같은 생활 지원 서비스, 건국대학교 병원과 연계한 체계적인 의료 지원 서비스, 문화 및 여가 생활을 위한 커뮤니티 여가 지원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주거 단지 내 시니어들을 위한 모든 생활 편의 환경이 갖춰져 있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의 서비스가 이뤄져서 여성층의 만족도가 높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체력이 약한 시니어는 건국대학교 병원과 연계된 전문 메디컬 서비스를 받으며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 어려움이 없게끔 했다. 또한 29개의 동호회 및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서로 소통하며 배움의 열의를 갖게끔 설정했다. “그런 것들을 운영하지 않는다면 여타 실버타운과 다를 게 없죠.”라는 박 대표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90세가 넘으셨는데도 건강한 분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우리 직원들의 친절성과 정직도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저희는 핵심가치가 네 가지인데 합쳐서 ‘HEAD’라고 불러요. Honesty(정직), Excellence(탁월함), Accuracy(정확), Differences(차이)가 그것입니다. 병원도 호텔도 우리보다 나은 데들이 있는데 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니어 사업, 연륜의 힘이 필요하다
신라호텔과 조선호텔 등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며 호텔 산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박동현 대표는 시니어 사업의 CEO로 일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깨닫는 점이 많았다고 말한다. “제가 올해로 60인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옛날에 불효했던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시니어 사업의 CEO는 인생을 경험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봐요. 남자가 출산의 고통을 안다고 말해도 실은 몰라요. 여자가 아니고 겪어보질 못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연세 드신 분들과 함께하려면 아무리 유능하다 하더라도 젊은 경영자라면 해결하기 어려운 게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전국노인주거복지시설협회의 회장으로도 취임했다. 점차 늘어나고 있는 노인 주거복지시설의 운영에 있어 보다 안정적이고 발전적인 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설립된 전국노인주거복지시설협회는 약 50여 회원 기관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상호간 정보를 공유하고 발전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 클래식 500 취임 후 2년 여만에 사업을 흑자로 전환시키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한 것이야말로 그가 회장으로 뽑힌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 사회는 완전한 고령화 추세입니다. 우리 협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인식을 바꾸고 사회 제도를 바꾸는 일 말이죠. 최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는 중인데 현실을 너무 몰라요. 정책은 너무 획일화되어 있어요. 안타깝습니다.”
박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노인복지법에 노인 주거복지시설이 주거복지시설과 복지주택의 두 종류로 나뉘어 있다. 그렇게 분류되어 있는 이유는 노인복지법에 의한 노인복지시설은 요양보호사 등의 필요 법적인원이 있기 때문이다. 주거복지시설은 그런 필요 법적인원을 요구하는 반면 복지주택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거복지시설로 신청하여 사업을 시작했다가 주택복지로 바꿔서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사실상 둘은 같은 것인데, 법제가 이원화되어 불필요한 행정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현장에 있는 입장에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정책에 답답함 느껴
박 대표는 요우커(遊客) 유입에 따른 대기업들의 호텔 건축도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현재 호텔은 포화 상태예요. 재앙이 될 겁니다.” 흔히 관광업에서는 요우커의 증가 추세를 객실 수로 나누어 계산한다. 그러나 그것만 따지는 건 잘못된 것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었다. “요우커들은 하이 클래스에는 안 들어가요. 십만 원 안쪽 비즈니스 호텔에 주로 들어가죠. 그리고 그들은 일단 도착한 다음에는 쇼핑하느라 바빠요. 그러다보니 과거에는 호텔 점유율이 80% 이상이었으나 요즘은 50% 안팎밖에 안 됩니다. 많아야 60% 내외예요. 그런데 또 짓는다고 하니….”
박 대표는 직접 통계를 보이며 설명을 이었다. 2014년에 내한한 요우커는 약 613만 명이고 2015년에는 598만 명으로 20여만 명가량이 줄었다. 그런데 서울만 봤을 때 2012년도의 호텔 수는 151개에 객실 수가 2만 5710개였는데 2015년에는 295개 호텔에 4만 2444개의 객실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더군다나 이 통계에는 일반 숙박업인 모텔이나 여관, 게스트하우스 등의 시설들은 빠져 있다. 소비 대비 공급 과잉의 이러한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호텔을 이용하는 수치는 올라갈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고령화는 심각한 사회 문제, 위기감 느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서울시의 사업 수행 계획을 보면 호텔 184개를 추가함으로써 객실 수는 2만 8926개가 늘어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대로 하면 2019년에 서울에는 479개 호텔에 7만 1370개의 객실이 생기게 된다. 가히 ‘호텔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될 막대한 숫자다. “그러다 보니 가격 인하 정책을 남발하게 되고, 당일 ‘땡처리’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되는 거죠.”
지나친 호텔 포화 상태에 대한 대안으로 박 대표는 호텔 건축에 있어 객실을 150실 정도로 줄이고 시니어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 자체로 사회적 기여도 되고 새로운 수요도 창출할 수 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데 정치인들은 싸우고만 있어서…. 사람이 없으면 소비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고령화 문제는 국가 존립의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연결되는 문제인데, 답답합니다.”
박 대표는 전국노인주거복지시설협회 회장으로서 3년 임기동안 반드시 하고 싶은 4가지 일을 강조했다.
“첫째, 시니어 세대가 검증된 노인 주거복지시설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증제도를 도입하고자 합니다. 둘째, 현 시대의 흐름에 맞는 노인 주거복지시설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비효율적, 비현실적인 규제를 발굴하여 개선하겠습니다. 셋째, 한국의 첨단 IT기술과 접목한 노인 주거관리시스템 및 고령친화 IOT 개발에 발판을 마련하겠습니다. 넷째, 국내 노인 주거복지시설들의 해외 시장 교류 확대와 발전을 위해 주력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시니어 세대들의 주거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의 삶을 위해 전문기관 및 단체와 협력하여 초고령화 사회를 대비할 수 있는 복지 정책을 제시하고 실행하고자 주력하겠다고 한다. 또한 입주 100%·만족도 200%·재입주 94%를 달성한 더 클래식 500 시니어 타운에서 쌓아온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한 시니어 라이프 트렌드’를 리드하는 삶의 동반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라이프 케어를 넘어 체계적 라이프 사이클 서비스로
이처럼 고령화사회로 인한 문제 발생, 그리고 수요 발생에 대비하여 더 클래식 500은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희 나름대로의 비즈니스 벨트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요. 수평적으로는 부산, 인천, 대구, 울산, 대전 등등 일곱 군데 정도에 수평적 벨트를 구축하는 겁니다. 수직적으로는 여기 계신 분들이 몸이 더 안 좋아지시면 갈 수 있는 다음 장소를 마련하여 그야말로 라이프 사이클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으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박 대표는 ‘노년의 삶이 불행한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인식의 변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시니어타운 사업을 하면서 부족하거나 아쉬운 점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서비스는 항상 어제보다 나아지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항상 계속적으로 나아지는 서비스를 위해 아이디어 생산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는 관심과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지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동네의원에서 수액 주사를 맞았던 환자들에게 C형 간염이 집단 발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67명입니다. 주사기를 돌려쓴 것이 결정적 원인입니다. 원장과 원장부인도 감염됐고, 원장은 거동이 불편한 뇌병변장애인이란 소식도 들려옵니다. 면허갱신 등 의사 재교육 필요성이 대두되고 미필적 고의에 대한 형사처벌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장에 대한 정신감정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인격장애 수준의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비상식적인 의료행위를 수년 동안 버젓이 자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이 다수의 선량한 동네의원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당한 환자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입니다. 알다시피 C형 간염은 죽을 수 있는 병입니다. 치료제가 있다 하나 완치가 쉽지 않고 만성 간염과 간 병변, 간암으로 악화합니다.
불행한 소식은 갈수록 환자가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C형 간염 신규환자가 2002년 1927명에서 2010년 5630명으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B형 간염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2012년을 기점으로 C형 간염이 앞지르고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지역적 편차입니다. 2015년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 기모란 교수팀이 건강보험공단 유병률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적으로 광역단체로는 부산, 기초단체로는 전남 진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전국 평균보다 부산은 2배, 진도는 5배나 높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해마다 수천 명씩 누군가 몹시 황당하고 억울한 과정을 통해 C형 간염에 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고리는 단연 혈액입니다. C형 간염은 술잔이나 키스, 가벼운 성생활 등 일상적 접촉으론 거의 옮기지 않습니다. 타액이나 정액보다 혈액을 통해 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로든 다른 사람의 혈액이 나의 혈액과 섞이는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것은 에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사례별로 알아봅니다.
주사기 주사기는 그냥 한 번 찔리기만 해도 걸릴 수 있습니다. 감염자를 찌른 주사기에 의료인이 사고로 찔린 경우 대략 1~3%에서 감염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의 양입니다. 감염자의 혈액이 많이 들어갈수록 확률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바늘에 찔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처럼 수액을 통해 역류한 피가 섞여 들어갈 경우 확률이 수십 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경우는 예외지만 주사기는 대부분 병원 밖에서의 사용이 문제입니다. 마약 등 약물 중독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부산에서 C형 간염 환자가 많은 것도 국제 항구란 지역의 특성상 마약 사용자 비율이 높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사기는 일회용을 써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B형 간염 환자가 국민병이라 불릴 정도로 창궐했던 이유도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전염병 단체 접종을 하던 과정에서 지금처럼 일회용이 아닌 주사기로 수백 명을 찔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침과 문신 침을 맞거나 피어싱 혹은 문신을 새길 때 반드시 바늘 등 시술 도구가 제대로 소독된 것이지 확인해야 합니다. 까다롭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부분 일회용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른 사람을 찔렀던 도구를 나에게 찌르려 하는 경우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전남 진도에서 C형 간염이 전국 평균 5배나 많았다는 사실은 이들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허술하게 침과 문신 시술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문신의 경우 도구만 소독해선 안 됩니다. 바르는 문신용 염색약에 바이러스가 묻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바늘이나 침 등 도구를 일회용이나 소독된 것으로 사용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염색약도 일회용으로 조금씩 덜어서 사용하는 게 옳습니다. 이 부분은 보건당국이 좀 더 철저하게 감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면도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대부분 안전합니다. 그런데 간혹 실수로 피부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가 아주 위험합니다. 피부에 스며든 혈액이 면도날에 묻게 되는데 만일 이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고 다음 손님에게 면도하다 또 생채기가 나면 감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달아 실수로 생채기를 낸다는 게 확률적으로 드물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경우든 이발소의 면도기도 다른 손님에게 사용하기 전 철저하게 소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접촉 일상적 성접촉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는 배우자 중 한 명이 C형 간염이라도 다른 배우자가 콘돔을 써야 한다고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접촉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얌전한 성접촉은 괜찮습니다. 에이즈와 달리 정액이나 질액으로 옮길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그리고 다소 격렬한 성접촉 시 성기 점막의 상처를 통해 혈액이 묻어나올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실제 캐나다 보건성의 조사결과 20년 이상 부부생활을 할 경우 2.5%의 확률로 배우자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가능하면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섹스 파트너가 많다거나 항문성교 등 비전형적 성행위를 즐기는 경우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이 경우 콘돔 착용은 필수입니다. 특히 여성이 생리 중인 경우 성접촉은 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안전합니다.
칫솔과 손톱깎이 감염자가 사용하는 칫솔과 손톱깎이를 같이 사용하면 안됩니다. 특히 잇몸 질환으로 구강 출혈이 있는 경우라면 칫솔로 인한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손톱깎이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톱을 깎는 과정에서 생긴 피부의 상처를 통해 소량의 혈액이 묻어날 수 있습니다. C형 간염의 잠복기는 6주에서 9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개 C형 간염은 초기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에게 피로와 입맛 떨어짐, 구역과 구토, 근육통과 미열,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피부와 눈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긴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C형 간염 진단이 내려지면 나에게 6주에서 9주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져보기 바랍니다.
증세가 늦게 나타나 진단이 뒤늦게 내려질 수도 있으므로 수개월 전까지 기억을 더듬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주사기가 되었건 침이나 문신이 되었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다른 사람의 혈액이 섞여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배상 등 개인적 억울함을 풀 수 있고 무자격이든 비양심이든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C형 간염을 확산시키는 주범들을 색출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5년 을미년(乙未年)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올해에도 적지 않은 대중문화 스타들이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특히 신중년들의 젊은 시절을 수놓았고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중견 스타들이 활동 무대를 하늘나라로 옮겼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의 김광한입니다!”매력적인 저음으로 팝음악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를 한 뒤 다양한 팝 음악과 정보를 제공해 1980~1990년대 많은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던 스타 DJ 김광한이 지난 7월 9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향년 69세. 1980~1990년대 중고생 시절을 보내고 청춘을 꽃피웠던 40~60대 신중년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적신 스타 DJ 김광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죽는 순간까지 DJ로 살았던 김광한은 1966년 20세의 어린 나이에 라디오 DJ로 데뷔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79년 박원웅이 진행한 MBC 라디오 에 게스트로 나서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1980년 TBC 라디오 의 DJ로 전격 발탁돼 본격적인 DJ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KBS 2FM 을 12년간 진행하며 명쾌하고 풍부한 해설과 다양한 정보와 함께 팝 음악을 전달해 많은 팬을 확보했다. 2013년 5월부터 2014년 5월까지 CBS 표준FM 를 진행하며 DJ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KBS 라디오 을 이끈 김광한은 MBC 라디오 로 유명한 김기덕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80~1990년대 팝 음악 팬들을 양분했다.
김기덕은 “김광한씨는 라디오 DJ의 신화이자 전설이다.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해 청취자들에게 심도 있는 팝 음악 해설을 해줘 청취자들의 음악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했다.
생전에 몇 차례 가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광한은 “방송에서 팝 음악 프로그램이 많이 사라져 아쉽다. 대중음악의 발전은 다양한 음악을 수용해야 발전하는데 너무 획일적으로 가요 위주의 음악 프로그램이 집중적으로 편성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의 영원한 김 형사, 김상순도 우리 곁을 떠났다. 김상순은 지난 8월 25일 폐암으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며 52년간의 연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김상순은 지난 1963년 KBS 공채 탤런트 3기로 본격적인 연기자 생활에 접어들었고 1971년 시작해 1989년 끝난 드라마 에 최불암, 조경환 등과 함께 형사로 출연해 시청자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또한, 농촌 드라마 (1990)를 비롯해 (1992), (1995), (2001), (2003), (2004), (2005), (2007) 등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개성적이고 선 굵은 연기를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
에서 연기를 함께했던 최불암은 “김상순씨는 동료 연기자들을 편하게 해줬다. 수더분하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연기와 생활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사실적인 연기에 뛰어났다. 시절, ‘김상순은 현장에 지나가는 강아지들까지 다 알아보고, 챙겨주는 꼼꼼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세심한 편이었다. 밥 한번 먹자고 했는데 결국 못하고 세상을 떠나 너무 안타깝다”라고 애도했다.
김상순이 주연을 맡은 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 고현정은 “제가 연기를 시작한 에서 김상순 선생님이 제 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는데 자상하게 연기를 알려줘 매우 고마웠다”라고 회고했다.
, 등 드라마 촬영장에서, 그리고 사석에서 몇 번 만났던 김상순은 “배 기자, 연륜 있고 연기력이 뛰어난 장·노년 연기자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줘요. 드라마와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까지 장·노년 연기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큰 역할을 했어요”라고 당부하곤 했다.
에 출연했던 중견 연기자 또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김화란이다. 2년 전부터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서 귀촌 생활을 하던 김화란은 지난 9월 18일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발생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 향년 53세.
김화란은 1980년 MBC 공채 탤런트 12기로 데뷔한 뒤 에 여순경으로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전성기 때는 동시에 드라마 4개에 출연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2009년 영화 에 출연했다. 2년 전부터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서 귀촌 생활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지난 5월 방송된 MBC 휴먼다큐 에 출연해 행복한 귀촌 생활을 보여줬다. 남편 박상원씨가 거액의 사기를 당하고 위암까지 걸리자 김화란은 35년간의 연기자 생활을 접고 귀촌 생활을 시작했다. 김화란은 “제가 남편에게 그랬어요. 인생 공부 참 비싸게 했다고 생각하자.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건강하게만 살자. 그러고 여기 왔는데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즐거운 거예요. 신랑한테 ‘우리 2년만 빨리 내려올 걸 그랬어요’라고 했어요. 정말 왜 이런 생활을 몰랐을까 생각했죠”라고 말을 할 정도로 귀촌 생활에 만족했다. 그러던 김화란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숨을 거두자 그를 아끼던 팬들은 더욱 안타까워했다.
중견 배우 진도희 역시 올해 숨을 거둔 대중 스타 중 한 사람이다. 진도희는 지난 6월 26일 췌장암으로 66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등의 작품에 출연한 에로배우 진도희(본명 김은경)와 예명이 같아 오해를 많이 산 중견 배우 진도희(본명 김태야)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한 배우다.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난 진도희는 동국대 재학시절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1971년 MBC 공채 4기로 박영지 등과 함께 TV 드라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도희의 1년 후배 MBC 공채 5기 탤런트로는 고두심, 이계인, 박정수 등이 있다.
진도희는 TV를 떠나 1972년 영화 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면서 대중에게 영화배우로서 존재를 알린 뒤 이후 (1972), (1972), (1972), (1973), (1973), (1973), (1974) 등의 주연을 맡으며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이 당시 진도희와 함께 활약했던 여자 배우로는 나오미, 우연정, 최정민, 윤세희, 윤미라, 박지영, 오유경 등이 있었다. 특히 진도희는 1970년대 미남 스타인 신성일, 신영일, 신일룡 등과 연기 호흡을 맞춰 눈길을 끌었다. 서구적인 외모와 육체파 여배우로 남자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결혼과 함께 연기를 그만둔 진도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10월 2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2015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는 은관 문화훈장을 받는 원로 코미디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인 이영숙씨가 시상대에 올라 “감사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전한다. 남편이 훈장 수상 소식을 저승에서도 반가워할 것이다”며 눈물을 흘렸다. 바로 지난 8월 31일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원로 코미디언 남성남(본명 이백천)이다. 남성남은 악극무대에서 활동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MBC 에서 남철과 콤비를 이뤄 콤비 코미디언 시대를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이 춤 동작 하나하나를 똑같이 하며 추는 ‘왔다 갔다’춤은 어린이들에게까지 유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부조화 속에서 기막힌 웃음을 엮어내는 이기동과 권귀옥 콤비, 속사포 만담 달인 장소팔-고춘자 콤비와 차별화해 남성남-남철 콤비는 싱크로율이 높은 행동과 퍼포먼스로 큰 웃음을 줬다. 아픈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코미디언 행사와 무대에 올라 수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수십 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과 드라마, 영화, 코미디 프로그램 등을 통해 대중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김광한, 김상순, 김화란, 진도희, 남성남이 2015년 이 세상을 떠났다. 하늘나라에서 지상에서 못다 한 연기와 활동을 원 없이 펼치기를 기원해본다. 다시 한 번 명복을 빈다.
모든 병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 원인은 심각한 사고나 사소한 해프닝일 수도 있고, 최근의 일이거나 또는 꽤 오래전 벌어진 사건이 단초가 되기도 한다. 부산에서 만난 옥기찬(玉基燦·55)씨와 그를 치료한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의 허중보(許仲普·40) 교수의 이야기는 조금 특별했다. 이제 중년의 삶을 시작하는 환자를 위해 다른 치료법을 선택한 의사의 이야기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치아가 아플 때에는 모든 생활이 문제였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에까지 영향이 있었고, 여러 어려움 때문에 아내까지 힘들어했었습니다. 그중 가장 문제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으니까요.”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의 교정에서 만난 옥기찬씨는 치아로 인한 문제가 한창일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의 한 제지공장에서 근무하는 옥기찬씨는 평소에 등산과 낚시를 즐기는 활동가 타입의 중년으로, 잔병치레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건강했던 그가 치아에 문제를 겪게 된 것은 과거의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불의의 사고 때문. 1988년 당시 28세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친구와 함께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오토바이로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국도 위를 달리던 그는 이면도로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승용차를 발견하게 되고, 차량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작스럽게 틀어야 했다.
“어쩔 수 없었죠. 오토바이를 탄 상태로 자동차에 덤빌 순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겨우 피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친구도, 오토바이도 논바닥 위에 있었습니다. 입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요. 그래도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했습니다.”
아직은 얼지 않았던 부드러운 논의 흙이 그를 받쳐주는 안전망 역할을 해 심각한 사고는 간신히 면했다. 그래도 옥씨는 그 사고로 윗니의 대부분을 잃어야 했고, 겨우 남아 있는 3개 치아로 윗니 8개를 모두 지지하는 적지 않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삶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 부위의 고통은 조금씩 넓고, 깊어져 갔다. 여느 부산 사나이들처럼 그 역시 사소한 고통에는 의연하려 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옆에 남아 있던 치아들도 세월의 흐름 때문에 썩고 뽑히면서, 어금니가 해야 할 일들을 앞니가 대신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붓고 피가 나는 것은 기본이었죠. 먹고사는 문제가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습니다. 김치 같은 건 제대로 씹지 못해서 아내가 일일이 잘게 잘라주거나, 찌개로 푹 끓여야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밥도 많이 먹어야 반 공기가 못 되었죠. 체중도 빠져서 63~64㎏ 정도밖에 안 되었고, 제대로 먹질 못하니 늘 기운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기운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니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사라져갔습니다.”
다른 많은 환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도 참다 참다 치과를 찾았다. 동네 치과에서 어느 정도 치료를 받으면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답은 의외였다.
“치과에서 치료가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뼈가 별로 없다고. 그래서 좀 더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야겠다 싶어, 두 군데를 더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습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부산대학교치과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서야 심각한 상황을 깨닫게 된 옥기찬씨는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적지 않은 돈이 들 것이 분명하고, 많은 시간도 필요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임플란트를 하게 된다면 치료 후까지 계속 아플 것이라는 직장 동료들의 경험담도 그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어렵게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을 찾은 것이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이다. 남들은 연말이다 크리스마스다 들떠 있는 모습들뿐이었지만, 그의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일 리 만무했다.
처음 찾아온 옥씨의 모습을 허중보 교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단단하고 건강해 보이는 신체와 달리 입 주위만 나이가 몇 년은 더 먹은 듯한 모습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처음에 환자 상태를 봤을 때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앞니의 브리지로 연결된 의치는 흔들려 수명을 다한 상태였습니다. 기둥 역할을 했던 3개 치아 모두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때 가장 큰 고민은 보통의 치료를 하면 윗니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틀니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환자의 심정이었습니다. 틀니를 사용한다는 것은 노년이 됐다거나 혹은 젊음을 잃었다고 여겨 자포자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그를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이 남는 치아 하나 없이 틀니를 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암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슬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 여성들은 남편에게까지 숨기고픈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되기도 한다고.
그래서 허 교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부분틀니를 제거하고, 이를 받치고 있는 치아를 모두 뽑은 그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임플란트로 고정하는 임시 치아를 장착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심으려면 대체로 2개월 정도를 이가 없이 지내야 하는데, 치아가 없이 지낼 순 없기 때문에 임시로 만든 틀니를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임시 틀니라는 것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빠지기 일쑤이고, 상대와 대화하는 도중 달가닥거리기라도 하면 환자를 무척 난감하게 만드는 물건이기 때문에, 허 교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허 교수는 어렵고 복잡하지만 씹는 기능까지 할 수 있는 고정된 임시 치아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컴퓨터로 임플란트 8개가 심어질 자리와 각도, 깊이까지 모두 결정한 다음 그에 따라 장착될 임시 치아까지 모두 만들어 놓고 수술했습니다. 강도를 확보하기 위해 골이식도 해야 했고요. 수술 후 바로 임시 치아가 떨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부드러운 음식 정도는 바로 씹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3번에 나누어, 6개월 정도 걸려야 치료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의 수술로 해결하는 것이라 꽤 까다로웠습니다.”
자칫 간과할 수 있는 치아가 입안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화되는 기간과 잘 씹힐 수 있도록 조정되는 정도까지 모두 계산에 넣어야 했기 때문에 허 교수에게도 신중을 기하게 되는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올해 2월 25일, 수술을 끝낸 날 이후 옥기찬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수술이 끝나고 4시간이 지난 후부터 식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큼직한 김치를 마음껏 먹고 고기도, 야채도 실컷 씹을 수 있으니까 세상이 정말 달라져 보이더라고요.”
치료 이후 옥씨의 달라진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주말 농장이다. 그는 올 여름부터 주말농장을 찾아 이런저런 농작물들을 심기 시작했다. 상추며 고추, 당근, 고구마, 케일 등 죄다 아삭아삭 씹을 거리뿐이다.
“이제 아내도 두 아들 것과 다르지 않게 식사를 준비하게 되고, 식사량도 늘었습니다. 실제로 체중도 5㎏ 정도 불었고요. 얼마 전에 갔던 친구의 딸 결혼식에선 얼굴이 밝아졌다며 놀라는 친구들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삶이 변하니 자연스레 치과치료 홍보대사가 됐다.
임플란트는 무조건 아픈 것이라며 겁줬던 직장 동료들에게 제대로 치과치료를 받아보라며 되레 큰소리친 적도 있고, 주변에 아픈 치아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있으면, 겁먹지 말고 병원부터 찾으라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줄 정도가 됐다고.
과거의 옥씨와 마찬가지로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또 다른 환자를 향해 허중보 교수는 이렇게 조언한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겠지만, 치과치료 역시 시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악몽에도 비유할 만큼 두려워하면서, 남아 있는 치아가 견디지 못할 때까지 방치하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대수명도 훨씬 길어지는 만큼 관리나 조기치료가 무척이나 중요하니 너무 겁내지 말고 치과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
고령화 해결을 위해 노화질환에 한의학적 치료기술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다.
4일 경남 양산시에 있는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은 오는 19일 ‘건강노화 한의과학 연구센터(센터장 하기태 교수)’ 개소식을 연다고 밝혔다.
건강노화 한의과학 연구센터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는 올해 선도연구센터 지원사업 기초의과학분야(MRC)에 최근 지정돼 길게는 7년 동안 국비를 포함해 양산시 등으로부터 연구비 80억원을 지원 받는다.
이 연구센터는 기존 노화질환에 사용된 한의학적 치료기술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하며, 암·당뇨·중풍과 같은 노인성 질환에 대한 새 치료법을 제시하는 데도 중점을 둔다.
또 국내 최초의 국립 한의학 교육기관인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의 연구자 양성 프로그램과 협력, 연구역량을 갖춘 한의학자를 양성하다는 계획을 잡고 있다.
연구센터 관계자는 “부산대 한방병원, 국립한의약임상연구센터 등과 협력해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연구결과의 임상 적용 가능성을 높이고 효과적인 항노화 기술을 개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건강센서를 활용해 정보를 체크하고 응급상황 발생 시 병원에 곧바로 보고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이 연구되고 있다. 이를 통해 치매나 독거노인에 대한 안전망이 두터워 질 것으로 예상된다.
28일 KT는 부산대학교 본관 대회의실에서 부산광역시, 부산대병원과 지역 의료서비스 연구개발(R&D) 육성 추진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주요 협력 분야는 ▲소외계층의 건강 복지 개선을 위한 의료·보건 안전망 개발 ▲해양산업 종사자 대상 원격 건강 모니터링 플랫폼 개발 및 시범서비스 제공 등이다.
부산광역시가 협력체계 구축 총괄을 맡고 부산대병원이 프로젝트 기획·운영한다. KT는 의료 ICT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융합플랫폼 개발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구체적으로 KT는 웨어러블 센서 개발과 보급을 돕고 지역 내 치매·독거 노인 및 군 장병 대상 의료격차 해소 및 안전망 개발에 착수한다.
예를 들면 팔지 형태의 건강센서를 통해 서비스 이용자의 건강정보를 체크하고, 위급상황 발생 시 응급의료 기관에 자동으로 상황을 전달해 대응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또 연간 5만여 대의 선박이 이용하는 국내 최대 항구 부산항이 있는 지역적 특징을 고려해, 장기간 해양에 나가 있는 선박 승무원, 항만 종사자, 국군장병에게도 원격 건강모니터링을 통한 의료서비스를 지원할 계획이다.
KT는 진단·예방관리, 응급지원까지 이어지는 해양 원격 건강모니터링 플랫폼 개발과 선박 내 이동식 의료시설 설치 등에 협력키로 했다.
해양에서도 개인별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 제공과 건강정보에 대한 실시간 모니터링과 해상 응급상황 발생 시 119와 병원이 연계한 응급 출동도 가능해진다.
황창규 KT 회장은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단순한 R&D 협력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라며 “민·관·학 협업을 통한 융복합 모델 개발로 새로운 국가성장 동력을 창출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