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 덕분에 소 한 마리가 살았다는 광고 문구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 한 마리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맛을 약간의 조미료가 대신했다는 뜻이다. 조미료는 ‘MSG(Mono Sodium Glutamate)’라 하여 사탕수수나 타피오카와 같은 식물에서 미생물 발효로 뽑아낸 글루탐산을 나트륨과 결합한 성분이다. 인간의 혀는 짠맛, 단맛, 신맛, 쓴맛까지 감별하는 것으로 배웠는데 MSG 덕분에 ‘감칠맛’이란 것이 추가되었단다. 감칠맛이란 혀를 감싸는 묘한 맛을 말한다.
요즘은 어딜 가나 음식이 먹을 만하다. 조미료의 묘한 감칠맛 덕분일 테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삶을 회고할 때 조미료는 우리 식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유년 시절을 시골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더 없이 손자를 사랑해주셨지만, 밥 먹는 시간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유일하게 바다를 면하지 못한 충청도 내륙의 시골이었으므로 반찬은 언제나 산나물뿐이었다. 조미료도 안 쓰던 시절이라 할머니의 반찬은 어린아이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와 어머니 손에서 자라며 조미료를 처음 봤다. 가난하던 시절이니 음식 자체가 귀할 때인데 조미료까지 넣어 요리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당시 조미료는 투명한 막대 모양의 작은 입자들인데 그냥 손가락으로 콕 찍어 먹어도 묘한 맛이 났다. ‘미원’이라는 국산 조미료였는데 통칭으로 ‘아지노모도’라고도 불렀다.
그때만 해도 다른 집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지방에 내려가면 먹는 것이 문제였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점에 가도 가장 무난한 김치찌개만 주문했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출시된 라면이 그 당시 인기였던 이유도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새로운 맛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대에서 조미료의 기적을 경험했다. 군 훈련소에 입소하면 내무반에서 사복을 벗고 군 훈련복으로 갈아입는다. 사회에서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소지품도 싸서 집으로 보내준다. 그때 혹시나 해서 사복 주머니에 있던 조미료를 훈련복 주머니에 털어 넣었다. 구멍가게에서 작은 봉투에 조미료를 나눠 팔고 있던 것을 샀다. 요즘 순대 포장을 사면 작은 비닐봉지에 소금을 따로 넣어주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군대에서 첫 식사를 할 때 멀건 된장국이 나왔다. 첫 숟가락을 떠먹는 순간 속에서 역한 반응이 왔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런데 주머니 속 조미료를 집어넣자 국 맛이 확 달라졌다. 먹을 만했던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중에는 조미료 없이도 입맛이 적응해갔지만, 조미료의 위력을 실감한 일이었다.
맛집이라고 소문 난 식당에 가보면 조미료 덕을 본 곳들이 몇몇 있다. 한번은 설렁탕으로 유명한 맛집에 갔는데 뚝배기 언저리에 조미료 가루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시장 순댓국집에서는 주방 할머니가 뭔가 흰 가루를 한 숟갈 떠서 순댓국에 넣는 것을 보고 가서 확인해 보니 역시 조미료였다. 소금 한 숟갈과 함께 그만큼 조미료를 넣은 것이다. 청담동에 곱창을 주문하면 시골 청국장이라며 내 오는 음식점이 있었다. 집에서 직접 만든 시골 청국장이라 하여 조미료를 안 넣을 줄 알았다. 그래서 조미료 없이 청국장을 해보라고 했는데 도저히 그냥은 먹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조미료를 첨가해달라고 했다. 조미료는 어느새 그만큼 대중화된 맛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방송에서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은 음식점을 좋은 음식점으로 선정하고 조미료를 조금이라도 쓰는 음식점은 탈락시키는 프로그램도 방영한 적이 있다. 그런 풍조 속에 조미료는 확실치는 않지만,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미료가 좋다, 나쁘다는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스파이크 서브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인 장윤창(張允昌·59). 마치 돌고래가 수면 위를 튀어 오르듯 날아올라 상대 코트에 날카로운 서브를 꽂아 넣는 그의 ‘돌고래 스파이크 서브’는 수많은 배구 팬들을 매료시켰다. 15년간 국내 배구 코트를 지킨 장윤창 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옛날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거의 수만 마리는 받은 것 같아요. 또 팬레터의 80~90%는 ‘오빠랑 결혼할 거다’라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제가 답장을 못했어요.(웃음)”
1980~90년대의 한국 남자 배구는 지금까지 통틀어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그 중심에는 ‘왼손 거포’ 장윤창이 있었다. 수많은 배구 팬들이 그의 시원시원한 공격과 스파이크 서브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몰려와 전 좌석을 꽉꽉 채우곤 했다. 그는 아니라며 수줍게 부인했지만, 그가 받았다는 팬레터와 무수한 종이학이 그의 인기를 증명해줬다.
사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남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거머쥔 여자 배구팀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대표팀에는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를 비롯해 고등학교 2학년의 장윤창도 있었다.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장충체육관에서 공이 찌그러질 정도로 때리던 대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꼭 국가대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선배들과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나이에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한국 남자 배구팀은 세계선수권 4강 진출의 기세를 몰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으로 당시 베스트 멤버였던 강만수, 김호철, 이인 등 국가대표 주전들이 잇달아 해외로 진출했다. 웬일인지 ‘철벽 블로커’로 이름을 알린 장윤창은 국내에만 머물렀단 사실이 의아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3개월 동안 뛰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당시에 20만 달러면 강남에 있는 아파트 8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협회에서 저도 모르게 거절했더라고요. 국가대표 주축 선수들이 다 외국으로 나가 있으니깐 저까지 빠지면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 이때 분노의 스파이크 서브가 탄생했어요.(웃음)”
당시 실망감으로 가득 찬 그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홀로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다.
“원로 선배들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이래서 되겠냐’ 하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설득하셨죠. 결국 그분들의 말을 듣고 전지훈련에 합류했어요. 솔직히 연습도 하기 싫은데 스파이크 서브나 한번 해보자 해서 시도한 거죠. 근데 아무도 못 받더라고요. ‘아, 이거 조금만 다듬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파이크 서브’라는 무기까지 장착한 그는 1984년 처음 열린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 고려증권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 베스트6, 인기상까지 휩쓸었다.
15년간의 선수 생활
비교적 선수 생활이 짧은 배구 종목에서 그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코트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워낙 어린 나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5년이 지나도 제가 대학생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팀에서 최고참 선수가 됐고 리더 역할을 해야 했어요. 놀고 싶어도 못 놀고, 딴짓할 생각조차도 못했죠. 어릴 땐 죽어라 뛰었고 나이가 들어선 후배한테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연습했죠. 속에선 불이 나는데 안 나는 척,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괜찮은 척.(웃음) 항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좀 멍청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 생활 내내 몸에 나쁘다는 술과 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그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따로 있었냐는 물음에 “개인 연습을 더 하고 등산을 했다”는… 정말 배구만 바라봤던 ‘장윤창’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과 겨룬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배구를 일본한테 배우다 보니 일본팀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어요. 일본과 붙으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패배를 맛본 선배들은 일본과 맞붙는 걸 좀 두려워했어요. 반면 저나 김호철, 강두태 이렇게 세 명은 그런 상황을 몰랐으니까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그렇게 신구(新舊)의 조화가 잘 이뤄지다 보니 2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3대 2로 역전승을 거뒀어요. 일본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죠.”
네트를 사이에 두고 팀 간 신경전은 없었을까.
“대표적으로 득점에 성공하면 포효하는 방법이 있어요. 기를 확 눌러버리는 거죠.(웃음) 사실 신경전은 바깥이 아닌 코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공이 공중에 떴을 때 공격하는 사람과 블로킹을 하는 수비수 사이의 눈치싸움처럼요.”
배구선수로서 나름 명성과 내공을 쌓은 그가 왜 배구 지도자의 길이 아닌 교수의 길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제가 은퇴하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다 보니까 중압감이 컸어요. 팀이 이기면 ‘장윤창 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지면 ‘장윤창이 못해서’라고 하니 그 부담감 때문에 한 번도 마음 편히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은퇴 후에는 현장이 아니라 내가 못 해본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경기대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은 지도 어언 10여 년째.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교수와 면담한다고 하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제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은 편하게 와주는 것 같아 고마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웃음) 제가 학교에 발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그런 교수가 되고 싶어요.”
받은 사랑 베풀며 살고파
‘함께하는 사람들’은 1999년 장윤창이 창단한 봉사단체로 황영조, 전이경, 유남규, 현정화, 장재근 등 국민의 사랑을 받은 스포츠 스타들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매월 양로원, 보육원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간다.
“한 번은 비닐하우스 한 동에 70~80명이 사는 곳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가 한창 겨울이었는데 통풍이 안 돼서 그런지 옴진드기가 있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옷을 빨고 한쪽에서는 샤워를 시켜주고. 근데 옴이 옮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끝나고 샤워하러 가서 소금물로 씻고 또 씻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좀 죄스러워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그동안 잠시 쉬어왔던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답했다.
“일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한 3년간 황영조 선수에게 운영을 부탁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가려고요. 아내가 그 노력을 가정에도 좀 쏟으라고 잔소리하는데…(웃음) 그래도 이해해줘서 항상 고맙죠. 때론 힘들어서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했는데 이전에 봤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국민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지리산 중턱, 해발 800m, 계곡 물소리 쿵쾅거리는 산중이다. 한때 도류(道流)의 은둔 숲이었던 청학동 구역이다. 이젠 관광지로 변해 차들이 물방개처럼 활개 치며 드나들지만, 특유의 깊고 외진 풍색은 여전하다. 영화감독 김행수는 이 심원한 골을 일찍부터 자주 찾아들었더란다. 2년 전부터는 아예 집을 짓고 눌러 산다.
우레처럼 요란히 소쿠라지는 개울물을 건너고, 허리띠처럼 비좁은 비탈을 오르자 길 끝에 나타나는 외딴집 한 채. 김행수의 거처다. 마당에서 일하고 있던 그가 장승처럼 우뚝 멈춰 서서 객을 맞이한다. 얼마 전 미친 듯이 퍼부은 폭우로 무너진 돌담 귀를 보수하던 참이었다. 웃통을 벗어젖힌 바람에 드러난 몸피가 듬직하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살갗으로 내비치는 근골이 두루 짱짱하다. 산중 살림이란 노역(勞役)의 연속이기 십상이다. 해서, 몸이 단련되고, 그 와중에 마음도 덩달아 양양해지는 바가 있을 테지.
암자 터에 혼자 지은 흙집
김행수의 나이는 예순다섯. 흔히들 은퇴를 해 세상의 뒷전으로 물러날 걸 고려하는 나이다. 경치 좋은 시골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은 평온한 생을 꿈꿀 만한 시점이다. 모아둔 재물이나 연금을 쪼개 쓰며 만족과 안식이 있는 일상을 추구할 시기다. 그러나 김행수의 생각과 지향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 영화를 삶의 반려로 삼은 그에게 일단 은퇴란 없다. 수려하고도 으슥한 산속으로 귀촌을 했지만 자연을 완상하며 한가하게 노닥거리길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다. 손에 쥔 게 별반 없는 물적 현실은 빈 술잔처럼 따분하지만 기죽을 일 없는 깡으로 버틴다. 독특한 양상이다. 남다른 이색과 이채가 서려 있는 삶일 게다.
김행수의 집터엔 과거 한때 암자가 있었단다. 불자 이상의 수행자이기도 한 그가 우연찮게도 폐사지에 들어앉았으니 궁합이 맞는 터다. 그는 한동안 이 터전에 비닐하우스를 대충 짓고 대충 지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흙집 한 채를 지어 붙박이로 눌러 살기 시작했다. 그가 ‘토굴’이라 부르는 이 집은 작고 허술하나 창의(創意)의 산물이다. 꾸밈과 치레가 없이 투박하나 통뼈의 집적처럼 늠름하다. 지붕 한쪽은 그저 투명 비닐 한 장으로 마무리해 별이 뜨고 지는 걸 바라볼 수 있게 해두었다. 햐, 놀라워라. 이 기발한 흙집을 혼자 지었다는 게 아닌가.
“간신히 비바람이나 가릴 수 있는 비닐 움막도 딱히 나쁠 건 없었어요. 하지만 여기에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살려면 도로명 주소가 있어야 한다 하더라고. 그러자면 가건물이라도 지어야 했어요. 그래 혼자서 주변의 통나무와 흙을 모아다 근 1년에 걸친 공사로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이게 완전 실패한 집입니다.”
“실패? 어떤 점에서?”
“집 안의 습기나 냄새를 빨아들인다는 점에 흙집의 장점이 있다는 걸 실감하지만, 그 외 이 집에선 보잘 게 없으니 실패일 수밖에. 집짓기 경험도 식견도 없는 채로 엉성하게 지은 탓입니다. 흙에 볏짚이라도 버무려 벽을 쌓았다면 좋았을걸, 그리 하지 않았더니 벽이 마구 갈라집디다. 쩍쩍 벌어진 틈새로 지네 따위 별별 벌레들이 다 기어들어 와요. 바람이 숭숭 새들어오고 말이죠.”
“그건 적절하게 보완하면 되는 거 아네요? 이 후미진 산중에 손수 집 한 채를 지었다는 게 진기해요. 야생의 힘 같은 게 느껴져서.”
“뭐 골병만 들었습니다.(웃음) 그나마 자랑할 건 구들장을 제대로 놔 불을 때면 바닥이 절절 끓는다는 점이죠. 하지만 여름엔 온실처럼 덥고 겨울엔 냉장실처럼 차가워요. 벽채 단열 부실하지, 판자와 비닐로 지붕을 대충 얹었지, 이거 참 심란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었죠?”
“별로 돈 들어간 건 없어요. 철근이나 쇠파이프, 중고 창문, 구들장 정도를 구입하느라 돈을 좀 썼을 뿐이니까. 좀 더 작게 지었다면 지출을 더 줄일 수 있었겠지만 공사를 하다 보니 커지더라고.”
산방에 눌러앉아 쓴 소설, 올봄 출간
공사가 커졌다지만 자그마한 산방이다. 허세와 허영으로 뒤발한 건축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몸뚱이 하나 눕힐 공간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그런 생각으로 흙집을 지은 것 같다. 그런 소박한 태도로 이 난잡한 세속사회를 조용히 견뎌왔으며, 그런 허심한 인생관으로 애환의 연극무대인 삶을 줏대 있게 버텨온 것 같다. 그러하니 자신의 지향을 놓치지 않았다는 자족이 있겠으나, 상처 역시 은연중에 고여 일쑤 고독에 휩싸일 수도 있겠지. 훨훨 날아다니는 품새로 존재의 빛을 발하는 자에게만 눈이 쏠리는 게 세태이지 않던가.
김행수는 1985년 영화 ‘단(丹)’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이후 다수의 시나리오를 썼다. ‘신라승 김교각’, ‘재일동포, 아! 나는 누구인가’ 같은 로케이션 다큐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지난 20여 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건 정신의 지옥을 사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 괴로운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적막한 산방에 눌러앉아 소설 하나를 써 올봄에 출간했다. 불교 구도소설 ‘공유(空有)’가 바로 그것. 소설쓰기란 방울방울 혼신의 피를 뿜는 일. 그의 뚝심을 알아볼 만하다.
“오래전부터 불교영화를 하나 만들고자 나름 치열하게 노력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완성해 주머니에 품고 살며 근 20년간 영화화하기 위해 진력했죠. 하지만 제작투자자가 붙질 않더라고. 자본이 있어야 영화를 만들 텐데 길이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 시나리오를 소설로 바꿔 출간했어요. 제작비 마련의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였죠.”
“소설의 반응은?”
“신통치 않지만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제작자가 붙질 않는 이유, 뭐라 보시죠?”
“상업영화 시장은 대기업 중심의 자본논리로 돌아갑니다. 돈 될 영화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죠. 게다가 저처럼 나이 든 사람보다 말랑말랑한 신인을 선호해요. 나이 들었으니 고리타분할 것이다, 새롭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게 한심한 편견이죠. 나이 먹어 오히려 새로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충분히 신선하다면, 충분히 흥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나리오라면 덤벼들지 않을까?”
“불교영화? 그게 돈 되겠어? 그런 선입견이 팽배해 있어요. 비애를 느낍니다. 당신의 시나리오 품질에 혹은 연출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냔 얘기도 듣지만 진지한 감독이라면 누구나 최선을 다하기에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에요.”
“물심양면으로 불황이 깊은 세월이었겠어요. 결례되는 얘기이지만, 영화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자그마치 20년을 공들인 일에 활로가 찾아지지 않는다면 후다닥 바꾸는 게 상책일 수도 있지 싶어서.”
“영화가 아니면 무엇을 하나? 제작환경이 저열하고 열악하지만, 평생의 일이자 꿈인 영화를 포기하고서야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비슷한 처지의 감독들은 부업을 찾거나 아예 직업을 바꾸기도 하지만 제 경우는 그게 안 돼요. 내게 아직 운이 오질 않았어, 기다려보자, 그렇게 자위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영화를 생각하면 소년처럼 들뜨는 사람
영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을 자처하는 김행수의 행보엔 갈지자가 없다. 비바람 속 난항이지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결의는 날로 굳어진다. 운명의 여신은 거칠게 다룰수록 복종한다지? 우직한 열망, 김행수는 그 하나로 운명과 거칠게 겨루는 사람으로 보인다. 일테면 꾀를 쓰는 기회주의로 강자에게 빌붙는 방식 따위에 그는 관심도 요령도 없다. 자신의 적성과 실천은 불교적 수행에 부합한다는 게 아닌가. 실제로 그는 거의 승려처럼 산다.
그렇기에 김행수는 외롭고 적막하고 돈 없는 산방의 소탈한 살림살이에 자족한다. 가만히 바위처럼 눌러앉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지만, 물질에 시달리지 않을 무욕의 삶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도 산중 살림이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물신에게 절을 하며 산다. 가난을 원수로 여긴다. 김행수의 생각은 썩 다르다.
“소설 ‘공유’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풀어나간 작품입니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경지, 이게 진공묘유인데 본래의 성품인 참마음을 닦을 수 있는 이치를 알려주는 묘리죠. 마음이라는 거, 그거 하나를 잘 쓰면 무엇에 걸리거나 시달릴 게 없어요. 모두들 돈, 돈, 돈 하지만, 돈을 산처럼 모았다고 마음이 저절로 편해질까? 오히려 재산을 지키려고 더 불편하게들 살지 않던가요?”
“수행에도 예술에도 최소한의 물적 토대는 필요합니다. 돈에 목을 걸 일은 아니겠으나 지나친 궁색은 불편의 원천이기도 하죠.”
“돈의 노예로 사는 건 위험하다는 얘기입니다. 움켜쥔 손, 즉 욕망을 탁 놔버리는 그 순간이 부처의 자리이며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조짐이에요. 그런 사람이라면 물질에 시달릴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고.”
“욕망을 무슨 수로 탁 놓을 수 있을까? 욕망 중에서 좋은 욕망을 잘 가려 쓸 수만 있더라도 내공이겠죠. 무욕으로 포장된 말만의 청빈보다는, 때 묻을 수밖에 없는 돈벌이로 응분의 밥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더 떳떳한 수행이자 내공이겠고 말이죠.”
“가족보다 직장보다, 오롯이 나 자신의 시간을 나답게 쓰고 가는 게 더 소중해요. 나 아닌 남들에게 시간을 다 빼앗기고 나면 결국 나 자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두고 이기주의자라고도 하지만, 이건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김행수는 쉰 살이 넘어 결혼을 했다. 아내와 어린 딸은 현재 도시에 살고 있다. 영화 하나에 홀려 평생을 살아온 그는 용케도 가족부양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가족들이 그를 숫제 포기한 덕분이라지. 이토록 요상한 행운이라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행운은 언제 오려나. 자나 깨나 그가 기다리는 건 영화제작자의 출현이지만 아직은 진도가 더디다. 영화를 생각하면 그는 소년처럼 들뜬다. 세상의 외면에 분노의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짐승처럼 혈관을 달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산이 성큼성큼 가슴으로 걸어 들어와 위안의 밀어를 건네줄 테지.
“산중에 살며 점점 산을 닮아가는 걸 느껴요. 저의 몸이 영혼의 집이라는 걸 깨달아요. 남들은 무위도식하는 걸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영화 외의 모든 걸 다 놓고 사는 삶은 낭비가 없기에 분주하고, 지루할 게 없어서 생동해요. 물론 때로 오욕칠정에 휘둘리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자주 괴롭지만….”
번뇌도 보약이겠지. 괴롭고 슬퍼야 빛깔이 짙어지는 법이니까. 영화를 향한 간절한 열망, 그게 투명한 감옥일지언정 허공으로 비끼는 몽환일 리가. 해 저물어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김행수가 소박한 밥상을 차려낸다. 텃밭 부추를 밥에 넣고 비빈 부추비빔밥이다. 상큼한 부추향이 산방에 번진다.
김행수 감독이 주는 귀촌 준비 Tip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사는 삶은 한결 만족스러울 수 있다. 도시에서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모으려는 사람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질 경우엔 낙오자 취급을 받지 않던가. 그러나 산골에선 경쟁 대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닮게 마련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겠는가.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게 옳다. 귀촌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가지 덮밥
여름 제철 채소인 가지는 가격도 저렴하고 영양소도 풍부해 부담 없이 요리 재료로 사용하기 좋다. 특히 보랏빛을 띠게 하는 안토시아닌 색소는 체내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노화를 억제한다. 살짝 구운 가지와 매콤한 양념장을 이용해 가지 덮밥을 만들어보자.
재료
밥 2공기, 가지 2개, 식용유, 다진 돼지고기 150g, 홍고추 1개, 적양파 ½개, 대파 ½대, 마늘 2쪽, 생강 약간, 참기름 ½T(1T: 20㎖, 큰 숟가락 1스푼 정도 분량), 물 1C(1C: 200㎖, 종이컵 1컵 정도 분량)
돼지고기 밑간: 청주 1T, 녹말가루 1T, 다진 마늘 ½T, 소금과 후추 약간씩
덮밥 양념: 두반장 2T, 굴 소스 1T, 설탕 1T, 소금과 후추 약간씩
만드는 법
1 가지를 3~5mm두께로 어슷하게 썬다.
2 식용유를 조금 두른 팬이 달궈지면 가지를 올려 굽는다. 이때 소금과 후추를 뿌려 간한다.
3 돼지고기는 밑간 재료를 넣고 골고루 버무려 10분 이상 재운다.
4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채를 썬 홍고추, 대파, 마늘, 생강을 볶는다.
5 향이 올라오면 돼지고기를 넣어 익힌다. 여기에 덮밥 양념과 물 1C을 첨가해 살짝 졸인다.
6 밥 위에 가지를 돌려 담은 뒤 소스와 무순을 올려 완성한다.
가지 튀김&폰즈 소스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가지 튀김은 가지 특유의 식감을 잘 살린 요리다. 여기에 새콤한 폰즈 소스는 기름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기 때문에 가지 튀김과 잘 어울린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해 집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간식으로 추천한다.
재료
가지 2개, 소금과 후추 약간, 녹말가루, 튀김기름, 대파 ½대
폰즈 소스: 간장 6T, 미림 6T, 설탕 2½T, 식초 4T, 다진 대파 3T, 다진 마늘 1t(1t: 5㎖, 작은 숟가락 1스푼 정도 분량), 다진 생강 1t, 홍고추 1개
만드는 법
1 가지는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2 소금과 후추로 밑간한 가지에 녹말가루를 묻힌다. 이때 일회용 비닐봉지에 녹말가루와 가지를 넣고 흔들어주면 녹말가루가 흩날리는 걸 방지할 수 있다.
3 예열한 기름에 가지를 넣어 노릇노릇하게 튀겨낸다.
4 폰즈 소스는 분량대로 섞어 준비한다.
5 튀긴 가지에 폰즈 소스를 붓고 양념이 배어들게 둔 다음 대파 채를 얹어 완성한다.
#레시피 #가지 #가지튀김 #가지덮밥
짧은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됐다. 어린이집 등하교버스에서 미처 못 내린 아이가 뜨거운 열기에 숨을 거두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을 하던 체력 약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열에 숨지기도 했다. 강렬한 햇볕이나 뜨거운 열에 장시간 노출되면 열사병에 걸릴 수 있다. 열사병은 고온 환경에 체온조절중추신경이 마비되어 생기는 병으로 40℃ 이상의 고열, 두통, 어지러움, 메슥거림, 평형장애가 오다가 혼수상태나 환각상태로 빠지고 심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물놀이 중 익사 사고의 50% 이상이 보호자의 부주의나 자신의 수영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물놀이 전 충분한 준비운동을 하고 심장에서 먼 발, 다리, 얼굴, 가슴 순서로 몸을 적신 뒤 튜브와 구명조끼 등 물놀이용 안전용품을 착용하고 물에 들어가야 한다. 수영은 식후 30분이 지나 하는 것이 좋다. 바다 해수욕장의 기온이 상승하면 독성 해파리가 출현할 수 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개인 휴대폰으로 폭염주의보를 알려주고 있다. 폭염주의보가 내리면 낮 12시부터 5시까지 허약자라면 외출을 삼가야 한다. 외출 중에 너무 더우면 지자체에서 미리 선정해 둔 인근 건물 더위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를 권한다. 덥다고 탄산음료나, 알코올, 카페인이 들어있는 음료를 마시는 것보다는 물을 자주 마셔 체온조절을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 아울러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모자를 쓰는 습관을 갖는다.
전기는 담아갈 용기도 필요 없고 쓰고 나서 재처리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편리한 전기를 함부로 다루다가는 감전이나 화재 사고가 일어난다. 선풍기 회전날개에 아이가 손가락을 다치거나 콘센트에 호기심으로 젓가락을 꼽는 경우가 있다.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선풍기 보호망을 씌우고 콘센트용 안전커버를 해야 한다.
최근에는 전기를 사용하는 캠핑용품이 많이 제조되어 판매되고 있다. 정부로부터 형식승인을 받은 제품인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전원으로 차량의 전기를 이용하기도 하고 인근의 업소용 전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전기를 만지려면 전원 스위치를 반드시 내리고 손을 대야 한다. 여름철에는 몸이 땀에 젖어있고 얇은 옷을 입거나 벗은 상태도 많기 때문에 감전의 위험이 더 높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나 깨진 콘센트도 사람이 충전부에 접촉하면 감전사고를 당할 수 있다. 전기충격에 놀라 넘어지면서 상해를 입거나 다른 물건에 피해를 주는 2차 피해도 조심한다.
폭염으로 인해 바깥 기온이 30℃가 되면 자동차 실내는 온도상승이 최고 85℃까지 상승한다. 이런 고온으로 자동차 안에 둔 일회용 가스라이터, 휴대폰 배터리가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자동차 안에 이런 물건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전기자동차는 여름철 장거리 운행 중에 가끔 그늘에 주차해 배터리를 식히는 게 좋다.
건축 공사장에서도 주의를 해야 한다. 더우면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진다. 평소 같으면 알아차릴 위험 분위기도 주의력이 떨어져 모를 수가 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무리한 작업을 하다가 아차 한 번의 실수로 공사는 중단의 위기에 놓인다. 그렇게 공사 기간 단축을 하려고 한 일이 오히려 공사 기간을 더 늦추는 등 마감 일정에 발목 잡히기도 한다. 아주 무더운 날은 과감하게 공사를 중단하고 쉬어가는 여유를 갖는 것이, 길게 보면 더 빨리 공사를 완공할 수 있을 것이다.
가방 속에 늘 휴대용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다. 하루 외출하다 보면 차를 서너 잔은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라면 비싼 차도 마다하지 않지만 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지 냉·온수 정수기가 마련돼 필요할 때마다 준비해온 차를 마실 수 있어 편리하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부터 일회용품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업소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편리함 때문이라고 한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안 되는 일이지만, 업주 측에서는 시간과 인건비에 관련된 사항이라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고 한다. 요즘 매장에 갈 때마다 관찰해보니 아무 생각 없이 일회용 컵에 담아주는 것에 반론하는 사람 또한 흔치 않았다. 옆자리 손님에게 질문했더니 “‘이제는 아예 머그잔에 드릴까요?’라는 질문도 없으니 그냥 습관적으로 받아가기도 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매장에 앉아서 마실 수 없다”라며 반쯤 남은 커피를 들고 나간다.
업체마다 다르지만, 텀블러를 가지고 매장에 가면 일회용 컵 하나 값을 빼주는 곳이 있다. 앞으로는 유명 20여 개 커피전문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 개인 컵이나 텀블러를 소지한 고객에게 가격의 10%를 할인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선택은 고객의 몫이다. 사람들은 적은 금액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비율(%)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드사용 시 구매금액의 0.5% 내지 1%를 포인트로 적립해 주는 것을 감안하면 10% 할인이란 10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요즘은 여성이나 남성 대부분 손가방이나 백팩을 메고 다니기 때문에 개인 컵 하나쯤 넣고 다니는 일이 어렵지 않다. 더구나 일회용품을 덜 사용하면 지구와 자연을 살리며 절약까지 할 수 있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혹, 나 하나쯤 일회용 사용하지 않는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까 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지난해 환경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종이 컵, 플라스틱 컵을 61억 개 사용했으며 재활용률은 겨우 10% 미만이라고 한다. 일회용 컵 하나가 썩는데 20~100년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100년이 걸린다면, 최소 3세대가 지나야 하는 기간이다. 약간의 수고가 후세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심 곳곳에 놓여있는 일회용 용기 수거함에 넘쳐나는 음료 컵들을 보면 두렵다. 쓰레기 대란. 재활용이 10%밖에 안 된다니 쓰레기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며칠 전 갑자기 국지성 호우가 내린 날은 망가지지도 않은 일회용 비닐우산도 여러 개 꽂혀 있었다. 비가 그쳤으니 귀찮아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길에 버리지 않고 수거함에 넣은 것을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헛된 꿈일지 몰라도 한 사람이 시작한 행동이 언젠가는 전체가 될 수도 있는 생각을 해본다.
초보 도보여행자들이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 바로 배낭 짐 싸기다. 장거리 코스 생각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구 넣게 되는데, 이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독이 되고 만다. 오랜 기간 몸에서 떼지 않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배낭은 소중한 동반자와 마찬가지다. 어떤 동반자, 즉 어떻게 배낭을 꾸리느냐에 따라 도보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배낭을 고르는 방법부터 짐 꾸리기에 유용한 정보까지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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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 여행자를 위한 배낭 고르는 방법
1 가벼운 것이 좋다
배낭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즐거워진다. 배낭의 절대무게를 고려해 쓸데없는 짐은 덜고, 좌우 무게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이 길수록 배낭의 무게는 체력을 갉아먹는 ‘짐’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작은 무게라도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Tip 짐 꾸릴 때 가벼운 것은 아래로, 무거운 것은 위로!
2 안전은 필수
초보 여행자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손’을 조심하자. 이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배낭을 공격하고, 때로는 대담하게 배낭 지퍼에 손을 댄다. 반드시 배낭의 모든 출입구를 봉인해야 한다.
Tip 배낭을 살 때 자물쇠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는지, 또 튼튼한지 살필 것.
3 짐 꾸리기가 쉬워야 한다
초보 여행자의 아침은 늘 부산스럽다. 배낭에 쑤셔 넣은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찾고, 이동을 위해 짐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다.
Tip 배낭의 주 출입구가 넓게 벌어지면서, 하단 지퍼와 위아래 분리막이 있어 분리수납이 가능해야 짐을 싸고 푸는 시간이 줄어든다. 내용물을 넣어도 변형이 없도록 등판에 지지프레임이 있는 것으로 고르자.
4 내 몸에 딱 맞는 걸 골라라
배낭을 착용했을 때 불편하거나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깨, 등판, 허리벨트가 몸과 밀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배낭은 내 몸에 딱 맞는 배낭이다.
Tip 배낭을 사고 나서 한번 짐을 꾸려 직접 메어보는 게 좋다. 빈 배낭을 멜 때와 내용물이 들어갔을 때의 착용감은 천지 차이다.
5 지퍼가 튼튼해야 한다
예쁜 디자인, 유명 브랜드 다 좋지만 여행 중 배낭이 망가지면 낭패다!
Tip 배낭 고를 때 꼭 살펴야 할 것은 지퍼, 특히 맞물리는 이빨 부분이 튼튼한지, 봉제는 꼼꼼한지, 어깨끈과 몸체 연결은 견고한지 등을 챙겨야 한다. 눈으로 보고, 직접 당겨도 보자.
6 여행 기간보다는 짐의 양을 고려하라
기간이 길다고 꼭 짐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계절에 따른 옷의 부피나 세탁 편의성 등이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Tip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데도 굳이 가져가는 물건은 없는지 살필 것.
◇ 장기 도보여행, 배낭 짐 꾸리기 비법
돌돌 말아 구김 없이 가벼운 수납 팩을 활용해 옷은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넣자. 티셔츠나 팬츠는 여러 장을 겹쳐 말아 넣으면 구김이 덜 가고 부피도 줄어든다. 구겨지기 쉬운 셔츠나 재킷 등은 가방 맨 위에 넣자.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여행 짐은 무게에 따라 수납하는 것이 좋은데,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넣으면 가방을 들었을 때 안정감이 있고 좋다.
구석구석 빈틈엔 작은 소품 수납하기 옷을 넣고 남는 공간에 속옷 같은 작은 옷을 채우고, 선글라스나 카메라 등 충격에 약한 물건은 그 사이사이 남는 공간에 넣는다. 모자나 신발 안쪽에 양말, 화장품, 상비약 등을 비닐 팩에 싸서 넣으면 공간도 절약하고 모양 변형도 막을 수 있다.
용도별 지퍼백으로 냄새 없이 깔끔하게 파우치나 지퍼백은 넉넉히 챙기자. 화장품, 세면도구, 액세서리 등 작은 물품들을 용도별로 지퍼백에 담으면 뒤섞이지 않고, 찾을 때도 편리하다. 또 빨랫감이나 젖은 옷들은 오염될 수 있으므로 지퍼백에 담아서 넣는다. 냄새 걱정도 없고, 다른 짐들이 젖지 않아 좋다.
배낭여행 전용 제품 활용하기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려면 옷뿐만 아니라 수건, 세면도구, 화장품, 비상식량 등도 챙겨야 한다. 이때 가정에서 쓰는 제품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보다는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 실용적인 배낭여행 전용 제품들로 채우는 것이 더 유용하다.
# 도보여행 # 배낭싸기 #도보배낭
대전 유성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오후 늦게 장바구니 하나 들고 가볍게 집을 나섰다. 한 시간 후면 남편 퇴근시간과 얼추 맞아 떨어지니 만날 시간과 장소를 카톡으로 보냈다. 무엇을 살지 작정하진 않았지만 내 눈에 푸성귀 하나가 자꾸 들어왔다. 미나리다. 저녁엔 미나리 전과 막걸리를 식탁에 올려볼까 싶었다. 모처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린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 기특(?)했다. 나는 밭에서 자라는 손가락 한 뼘 길이의 향이 진한 돌미나리를 골랐다. 내 옆에서는 다른 손님이 무장아찌를 비닐에 대여섯 개 정도 담아 값을 흥정하는 중이었다.
“하나 더 줘요. 단골로 오는데.”
“큰 건 안돼, 쩌~기 째깐한 거 하나만 가져가.”
무장아찌를 놓고 두 사람의 오가는 얘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얼마나 맛있기에 장아찌를 저렇게 많이 살까싶어 손님한테 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요?”
“입맛 없을 때 괜찮지. 매운 고추 쫑쫑 썰어서 깨소금하구 참기름 살짝 둘러 먹으면 맛있어~.”
평소엔 보이지도 않던 무장아찌다. 나는 5천원을 내고 돌미나리 한 봉지와 손바닥만한 무장아찌 한 개를 받았다.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가 돌아서는 내게 당부하듯 말한다.
“장아찌 간이 삼삼한 께 짠기(짠맛)를 따로 빼지 말구, 한 번 씻어서 먹기만 하면 되야.”
미나리와 무장아찌라니. 두 가지 다 먹고 싶어 산 건 아니다. 사 놓고 보니 남편 식성에 맞춰 산 게 되었다. 파장 분위기가 되면서 여기저기 떨이로 내놓는 물건들 값이 반 이상으로 내려간다. 혹시나 무거운 짐을 들었을까 싶어 남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집으로 가면서 저녁엔 미나리전과 막걸리를 먹을 거라고 하니 남편은 그렇잖아도 장에서 미나리를 사고 싶었는데 마누라 번거롭게 할까봐 말을 안했단다.
미나리를 물에 담그니 점점 생기가 돈다. 부침개를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아 반은 데쳐서 새콤달콤 무치기로 한다. 지글지글 부친 미나리전과 막걸리로 입가심을 하는 남편의 입이 귀에 걸린다. 술은 딱 한모금만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나. 그 뒤에 오는 맛은 맛있게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라 술 한모금 뒤에는 물잔으로 술을 대신한다.
데친 미나리를 무치려고 다진 파와 찧은 마늘, 매실청을 넣었다. 주방에 서서 오른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씽크대 선반 문을 열었다. 소금, 설탕, 고춧가루 등 양념통들이 올망졸망 모인 칸에 깨소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보였다. 그 병을 꺼내려면 병 위에 올려놓은 또 다른 병을 치워야 했다. 그 순간 병 하나가 손쓸 새도 없이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치며 뚜껑이 열렸다. 아마 지난번에 뚜껑이 덜 닫힌 것 같았다. 병은 주방 씽크대와 남편이 앉아있는 식탁, 그리고 냉장고를 둥글게 구르며 깨소금이 몽땅 쏟아졌다. 남편이 안 됐다는 듯 말했다.
“병을 층층이 쌓으면 위험하다고 지난번에도 얘기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때도 치워야지 했다가 그만 잊어버리고 오늘 드디어 사단이 났다. 남편은 막걸리를 먹다 말고, 나는 미나리 초무침을 하다 말고 바닥에 깔린 깨를 쓸고 정리했다. 친정어머니가 국산 참깨 볶은 거라고 따로 챙겨준 건데, 그 깨를 쓰레기통에 넣는 마음이 쓰렸다. 미나리 초무침은 깨소금 없이 식탁에 올렸다.
무장아찌를 잘 씻어 채를 썰었다. 한 개 집어먹으니 오독오독 씹는 맛이 정말 괜찮다. 아주머니 말대로 짜지 않고 삼삼하다. 고추를 쫑쫑 썰어 참기름을 두르고 나니 깨 없는 아쉬움이 더 크다. 남편이 웃으면서 말했다.
“와, 당신 이런 거 별로잖아. 어찌 장아찌가 눈에 들어왔담?”
누가 ‘촌놈’아니랄까봐. 남편은 어릴 때 자주 먹던 장아찌라며 반색했다. 하긴 나도 이제 그 짭짜름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은근한 ‘촌맛’이 좋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막걸리와 미나리전, 거기에 무장아찌가 있는 식탁에서 기분이 업 되면 나오는 남편의 흥얼거림이 집 안으로 번진다. 덩달아 나도 상승되는 기분이다. 깨소금이 가 다 쏟아져 한 톨도 넣지 못했지만 또 다른 깨가 쏟아지는 저녁이었다.
문형!
독하게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도가 얼고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도 성장을 멈추어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이은 화재 참사도 한파 이상으로 춥게 합니다. 기후 온난화를 꽤 걱정했으나 올겨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춘 절기가 코 앞인데 추위는 물러갈 줄 모릅니다. 예전부터 입춘 추위가 있다 했으니 봄기운은 더 멀리 머물고 있나 봅니다. 이런 겨울이면 지리산 청학동 계곡 언덕배기 자그마한 마을 초가집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하여 문풍지를 달곤 했습니다. 요즘 같은 좋은 바람막이가 아닌 종이를 잘라 풀로 붙여 칠흑 같은 자정이면 고요를 타고 문풍지를 울리며 찬바람이 새어들기 마련이었습니다.
문형!
집 안에 도배해 본 경험이 있나요? 저는 도배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 요즘엔 도배 전문가에게 맡깁니다만, 예전엔 직접 했습니다. 저 같은 촌놈은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쉬울 것 같아도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은 정말 심심산골이었습니다. 반듯한 집이 아닌 허술한 초가집으로 요즈음 그림에 나오는 운치 있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곧 쓰러져 갈 것 같았고 기둥들이 곧지 못하여 방의 벽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황토벽돌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넣은 대나무 거푸집에 잘게 썬 지푸라기를 넣어 반죽한 황토를 채워 벽을 만들었습니다. 으레 벽면이 울퉁불퉁해서 도배는 쉽지 않았습니다. 칼바람이 윙윙대는 깊은 겨울 저녁이면 그런 시절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들어감은 추억을 되돌려보며 나름의 행복에 젖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초가집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정성껏 지었으나 설계도나 자재가 오늘날 같지 않아 방안이어도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기 예사였습니다. 외풍이라 했습니다. 차가운 공기는 내려앉고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과학이 외풍을 설명합니다. 외풍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도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인테리어 측면도 있으나 당시는 벽에서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막고 찬바람을 다소라도 줄이는 방편이었습니다. 도배한 방은 그렇지 못한 방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도배는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춰주기도 했습니다. 도배는 삶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도배라는 말에 정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문형!
저는 신혼 살림집의 도배와 페인트칠을 안사람과 함께 직접 했습니다. 그 버릇이 남아 어지간한 집안의 페인트칠은 직접 합니다. 전문 일꾼들에게 비할 수는 없어도 돈이 덜 들기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하찮고 옹색해 보이기도 했으나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지 싶습니다.
문형!
밤이 깊어 갑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총총합니다. 자연과 함께함이 좋아 전원에 작은 집을 짓고 삽니다. 이 마을에도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저런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론 잘못도 저지르고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내가 잘못하였다는 후회가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흔 살에 가까워지니 깨닫고 반성하고 그러면서 세월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인생살이란 생각이 더 들어갑니다. 젊은 시절의 나의 아집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니 이제 철드나 봅니다. 차가운 겨울날씨만큼이나 세상도 어려워 보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국민 대통합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정말 어려운 국면에 놓여있지 싶습니다. 한때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방법은 없을까요? 어떤 정치인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촛불에 대입하고 있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쪽에 섰던 사람들을 또다시 내모는 표현으로 들려서 그렇습니다. 통합의 의지가 아닌 배척의 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는 편이 갈릴 수 있으나 선택된 지도자는 양편을 다 끌어안아야 바른 지도자가 되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오늘날 새겨 보아야 할 금언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요? 상처를 받은 이웃들의 뚫린 마음에 몰아치는 찬 바람을 막아 줄 도배가 필요합니다. 비뚤어진 마음의 벽에도, 외풍이 심해 찬바람이 쌩쌩 이는 냉랭한 분위기의 방에도 따사한 기온이 감도는 여유로운 무늬의 도배지를 바르고 싶습니다.
문형!
지난번 만났을 때 얘기했듯이 올해엔 행복은 덧셈, 나이는 뺄셈, 재물은 곱셈, 기쁨은 나눗셈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끔 거닐던 산언저리에 쌓인 눈이 녹고 봄기운이 도는 춘삼월의 따뜻한 봄날을 택해 빈대떡에 소주 한잔 기울입시다. 그때까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이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세상과 싸우지 말고 자아실현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미끄러운 길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