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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도 마음도 파릇파릇 ‘우리 집 텃밭 레시피’
- 여름 더위를 이기는 방법 하나, 초록빛 생기를 머금은 자연과 만난다. 둘, 싱그러운 채소를 활용한 음식과 음료를 맛본다. 셋, 건강을 위해 적당한 육체 활동을 즐긴다. 이 모두를 누리려 애써 특별한 곳을 찾을 필요는 없다. 가장 가까운 ‘우리 집 텃밭’이 최적의 피서지가 되어줄 테니까. 사진 제공 및 도움말 야미가든 ‘참 쉬운 베란다 텃밭 가꾸기’ 저자 도심에서 한두 뙈기 땅을 가꾸며 도시농부의 일상을 즐기는 이가 늘었다. 그러나 무더위에 바깥에서 농사와 씨름하다 보면 비지땀을 흘리고 체력은 바닥나기 일쑤다. 그보다는 조금 더 손쉽게 농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농사 경험이 없는 초보자도 쉽게 작물을 재배하게끔 실내 텃밭 키트나 상자 텃밭 세트 등을 판매한다. 또 일반 화분이 아니더라도 비닐 화분, 봉투 화분 등을 이용하거나 물꽂이 재배 등 다양한 도구와 방법을 통해 집 안에 텃밭을 들일 수 있다. 우리 집 텃밭이 좋은 이유 ❶ 관리가 수월하다 주말농장이나 노지 텃밭에서 식물을 키우면 벌레뿐만 아니라 태풍, 폭우 등 자연재해를 입을 수 있다. 또 텃밭이 멀면 자주 나가 작물을 돌보기가 어렵다. 우리 집 텃밭은 날씨에 상관없이 매일 식물을 돌보고 키울 수 있다. ❷ 건강한 채소를 키워 맛보다 다양한 채소를 무농약, 무화학비료로 싱싱하게 키워 바로바로 수확해 먹을 수 있다. 익지 않은 작물을 미리 따 후숙하는 마트표 채소와 달리 직접 키운 작물들은 크기는 작지만 훨씬 맛과 풍미가 좋다. ❸ 감성 가득, 마음을 힐링하다 초록빛 가득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신비를 느끼면서 활기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더운 여름에도 싱그러운 이파리를 보면 마음이 산뜻해진다. 향긋한 허브를 키우면 아로마 테라피까지 가능하다. 여름 실내 텃밭 이모저모 ❶ 6월에 심으면 좋은 야채 6월에 파종할 수 있는 채소는 강낭콩, 쑥갓, 여름상추, 근대, 아욱, 열무 등이다. 다른 채소나 허브도 충분히 키울 수 있다.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고추, 가지 등은 6월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수확한다. ❷ 여름철 텃밭 가꾸기 주의할 점 여름에는 온도가 높아 너무 건조하거나 장마철 때문에 습해져(고온건조, 고온다습) 병충해가 잘 생기는 편이다. 실내 재배의 경우 항상 바람이 잘 통하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준다.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제충국(벌레 잡는 국화)이나 목초액 등 친환경 해충약을 5~7일에 한 번씩 오전 중에 샤워시키듯 뿌린다. ❸ 텃밭 초보 시니어가 키우기 좋은 식물 새싹채소나 밀싹의 경우,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금방 수확할 수 있어 키우기 편하고 좋다. 특히 새싹채소는 수경 재배도 가능하다.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집 안 어느 곳에 재배 화분을 두어도 괜찮다. 텃밭 레시피 #1 심기만 해도 쑥쑥 ‘밀싹’ 재배 Tip 파종시기 1년 내내 재배온도 20~28℃ 발아온도 25℃ 발아기간 2~3일 수확시기 파종 후 7~15일 노화방지, 해독작용, 면역력 증강 등의 효과로 인기가 높은 슈퍼푸드 밀싹은 집 안 어디서든 1년 내내 재배가 가능하다. 재배기간도 짧고 금방 수확할 수 있어 초보자에게 적극 추천한다. 밀싹은 단기간 재배하기 때문에 얕은 화분도 괜찮다. 물에 5~6시간 정도 불린 밀 씨앗을 촉촉한 흙 위에 골고루 뿌린 뒤 분무기로 물을 충분히 적신다. 수시로 물을 뿌려 마르지 않게 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키운다. 파종 후 2~3일이 지나면 흰 뿌리가 생기고, 그 뒤에 초록 싹이 올라온다. 밀싹이 15cm 정도 자라면 밑동을 4~5cm 정도 남기고 가위로 자른다. 남은 밑동에서 밀싹이 자라 한 번 더 수확할 수 있다. 밀싹주스 레시피 수확한 밀싹은 바로 즙을 낸다. 하루 섭취량은 30㎖ 정도가 적당한데, 밀싹즙이 써서 그대로 마시기 어렵다면 채소나 과일을 넣어 주스로 즐기면 좋다. 클렌징 디톡스 밀싹주스 밀싹즙 40㎖+레몬 1개+사과 1개+키위 2개+오이 1/2개+케일 잎 3장 에너지밤 밀싹주스 밀싹즙 40㎖+오렌지 2개+바나나 1개+파인애플슬라이스 4조각+생강슬라이스 2개 텃밭 레시피 #2 골라 키우는 재미가 쏙쏙 ‘상추’ 재배 Tip 파종시기 1년 내내 (한여름 제외) 재배온도 15~25℃ 발아온도 15~20℃ 발아기간 3~7일 수확시기 파종 후 50~60일 상추는 흔히 쌈으로 즐기는 꽃상추, 청상추 외에도 로메인상추, 버터상추, 흑치마상추, 라피드상추, 롤로상추 등 종류마다 맛과 식감이 달라 골라 키우는 재미가 있다. 상추 씨앗은 껍질이 두꺼워 1~2일 정도 물에 담갔다 심는다. 화분 1개에 씨앗 30개 이하가 적당하며, 햇빛을 받아야 하므로 너무 깊게 심지 않는다. 싹이 나기 전까지는 수시로 분무기로 물을 뿌려 흙이 마르지 않도록 한다. 빠르면 3~4일 만에 싹이 나는데, 본잎이 4~6장 나온 후에는 어린 상추를 중간중간 뿌리째 뽑아 간격을 넓혀준다. 1차 수확 시엔 바깥 잎부터 따고, 4~6장 정도 잎을 남긴다. 다음 수확을 위해 웃거름을 1~2주에 1회 정도 주고, 꽃대가 올라오기 전까지 수시로 잎을 따 먹는다. 팩 화분을 이용해 재배해도 편리하다. 상추 샐러드 & 마요 덮밥 레시피 상추는 종류마다 맛과 모양은 달라도 키우는 방법은 동일하다. 다양한 상추를 키워 쌈이나 샐러드로 즐겨보자. 간단한 한 끼 식사로 좋은 ‘상추 마요 덮밥’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상추 마요 덮밥 밥 위에 잘게 썬 로메인상추(4~5장), 스크램블(달걀 1개), 통조림 참치(3큰술)를 올린다. 기호에 맞게 야키소바 소스와 마요네즈를 뿌린 뒤 비벼 먹는다. 병아리콩 상추 샐러드 병아리콩(100g)은 반나절 물에 불려 끓는 물에 넣어 20분 정도 삶아 찬물에 헹군다. 상추(8~10장)와 방울토마토(5~7개)는 먹기 좋게 썰어 병아리콩과 볼에 담는다. 드레싱(올리브오일 2큰술, 레몬즙 1큰술, 꿀 1작은술, 후추·소금 약간)을 뿌려 완성한다. 텃밭 레시피 #3 보기만 해도 시원 상큼한 ‘애플민트’ 재배 Tip 파종시기 3~6월, 9~10월 재배온도 15~25℃ 발아온도 15~20℃ 발아기간 10~15일 수확시기 꽃피기 전 수시로 향긋한 사과 향이 나는 애플민트는 자라는 속도도 빠르고, 꺾꽂이(삽목), 물꽂이도 쉬워 화분으로 많이 늘릴 수 있다. 수확한 애플민트는 다양한 여름 음료에도 잘 어울려 활용만점이다. 씨앗 크기가 작아 작은 모종 포트를 이용해 파종하는 것이 좋다. 초반에는 새싹도 작고 느리게 자라지만 점점 성장이 빨라진다. 한여름 장마 전 가지치기를 반드시 하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화분을 둔다. 애플민트는 금세 가지가 풍성해져 수시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하는데, 이때 물꽂이를 하면 여름철 실내 인테리어 효과도 낼 수 있다. 튼튼한 가지를 잘라 물에 들어가는 부분의 잎은 뗀다. 유리병에 물을 붓고 가지를 넣어 해가 잘 드는 곳에 두고 물을 매일 갈아준다. 애플민트 모히토 레시피 초여름 무성해지는 애플민트로 시원한 모히토 음료를 만들어보자. 일반 모히토는 라임즙만 들어가지만 자몽즙을 더하면 쌉쌀한 맛과 애플민트의 향이 더해져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무알콜 자몽 모히토 유리잔에 얼음을 채우고 라임(3조각)을 넣어준다. 라임즙(30㎖)과 자몽즙(200㎖), 시럽을 약간 넣은 뒤 애플민트(2~3줄기)를 넣고 수저 등으로 살짝 으깬다. 칵테일처럼 즐기고 싶다면 화이트 럼주를 30~40㎖ 추가한다.
- 2019-05-2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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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鄕愁) 못이겨 경북 영주시 이산면 산골에 귀촌한 심원복 씨
- 향수(鄕愁)가 귀촌을 촉발했더란다. 영주시 이산면 산기슭에 사는 심원복(57) 씨의 얘기다. 어릴 때 경험한 시골 풍정이 일쑤 아릿한 그리움을 불러오더라는 거다. 일테면, 소 잔등에 쏟아지는 석양녘의 붉은 햇살처럼 목가적인 풍경들이. 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밥을 나눠주었던 도타운 인정이. 타향을 사는 자에게 향수란 근원을 향한 갈증 같은 것. 그렇다고 사무친 그리움은 아니라 굳이 억지로 누르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삶이란 어차피 부평초처럼 객지를 떠도는 일이지 않던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향수가 깊어졌던 모양.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질 즈음, 심 씨는 서울생활을 후다닥 접었다. “새가 제 둥지에 깃들여 살듯이!” 심원복 씨는 귀촌생활을 그리 비유한다. 도시에선 좀체 느끼기 어려웠던 안심과 평온을 비로소 누린다는 뜻일 테지. 물론 도시에서라고 불안이나 불만을 옆구리에 달고 살았던 건 아니었단다.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의 수레바퀴 속에서 적당히 착실하고 조신하게, 적당히 눈치보고 적당히 머리 굴리고 적당히 처세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소시민들의 절박하고도 쩨쩨한 현실. 그 역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발칙한 일탈 따위는 그의 종목이 아니었으며, 과한 출세욕이나 물욕에 허덕이며 살지도 않았을 게다. 심 씨의 유순해 보이는 인상에 이미 쓰여 있다. 별다른 폭풍과 이변과 무용담이 없었을 얌전한 인생 드라마의 표징이라는 게. 심 씨가 아늑하게 옴팡진 여기 산기슭에 집을 짓고 귀촌한 건 10년 전. 땅은 이미 그전에 사두었다. 소백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무심코 들른 산촌에서 만난 싼 매물이었다. 길도 없는 농지 1200평을 우발적으로 사들였던 것. 오우, 나중 여기에 허름한 흙집이라도 하나 짓고 살면 되겠는걸!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땅을 미리 잡아놓은 덕에 귀촌 행보는 빨랐다. 애초 생각했던 간소한 흙집 대신 번듯한 목조주택을 지었다. 바지런히 직장생활을 했기에, 좀 모아둔 게 있었기에, 귀촌해서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력은 됐다. 그렇게 사뿐한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시골에 가서 무슨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를 딱히 의도하거나 꿈꾸진 않았습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서 마음 편하게 살면 그만이지 싶었거든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인생사 희로애락이야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냥 순순히 적응하며 살면 될 거라 봤지요. 흔히들 귀촌 초기의 갖가지 고생담을 토로하는 것 같은데 저희 부부에겐 그런 게 거의 없었어요.” “낯설고 물설은 산골에 잠시 놀러온 것도 아니고, 아예 새 살림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전혀 곡절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도 아내는 초기에 이모저모 고생이 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직장을 정리하기까지 아내 먼저 이곳에 내려와 잠시 혼자 살았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외딴집이에요. 일단은 밤이 엄청 무서웠다 하더라고요. 근데, 외딴집의 장점도 많아요. 오붓하고 조용하고, 게다가 어느 정도 이웃들의 관심권 밖에 있으니까.” “귀촌 정착은 의자를 만드는 일이나 뒷산 꼭대기에 오르는 일과 달리 만만치 않은 공력을 쏟아야만 할 겁니다. 그래서들 미리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내려가라 하죠.” “제가 보기보다는 꽤나 태평한 사람입니다. 매사 준비나 계획 같은 걸 하고 살질 않았어요.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땐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여차하면 호통도 내질렀지만 타고난 천성은 느긋하고 무계획적이에요. 귀촌 준비, 그런 거 전혀 없이 내려왔어요.” “계획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하는 게 상책이라는? 흐르는 물처럼?” “사전 귀촌 계획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더라도 시골의 현실적 형편과 어긋나는 수가 많으니까. 제게 있었던 계획이라면 나를 내세우지 않겠다,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 정도였죠. 이건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착을 가능케 했습니다. 목에 힘을 빼고, 긴장할 것 없이, 예컨대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게 더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잊을 수 없는 귀촌 첫날의 별빛 소풍처럼! 지독한 게 삶이라 하지만 지독하게 애만 쓰다가 허무맹랑한 파장을 보기 쉬운 게 또한 인생이다. 그러하니 억지로 애쓰지 말자, 귀촌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자, 김밥 싸 들고 소풍 가듯이 가볍게 운신하자, 심 씨의 내심엔 그런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구체적인 구상이나 기어이 이루고 싶은 그 무슨 목표를 정하지 않은 채 산골살이를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 두고보자, 하는 투로. “산골 자연 경관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귀촌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은퇴한 분들에게 어서들 내려오십쇼,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권장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어요. 제가 낭만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나무와 달, 별을 즐기게 되었는데요, 그 순수한 자연 풍경들이 마음을 하염없이 평온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뭐니 뭐니 해도 마음 편히 사는 게 행복이지 않겠어요? 귀촌 첫날 밤, 침실 창밖 허공으로 쏟아지던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도 별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심드렁해지지 않던가요? 낭만주의자들의 음풍농월조차도 반복되면 싱거워지는 거라서.” “초반엔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딱히 할 일을 만들진 않았지만 텃밭 농사하랴, 산나물 뜯으러 다니랴, 산책하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으로 아내와 함께 즐겼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두 해가 지나자 슬슬 심심해지더라고요. 친구들의 방문도 서서히 줄어들다 끊어지고, 시간이 무료해지고. 그래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죠.” “어떤 작물들을?” “1000평 농토에 고추, 생강, 도라지, 호박 등 이 마을에서 흔히들 하는 작물을 재배했어요. 인건비를 아끼려고 모든 일을 아내와 둘이서 해냈지요. 양봉도 해봤고, 된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요. 한 해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어느 해엔 기상 악화로 망치기도 했어요. 농사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심 씨의 집 풍경을 볼까? 포옹처럼 터를 에워싼 야산 중턱에 들어앉은 남향집이니 밝고 따사롭다. 집도 마당도 널찍하다. 꼬끼오! 닭장에선 수탉이 관악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청을 돋워 산중 적막을 비틀어댄다. 집 모서리엔 한때 꿀을 얻었던 폐 벌통 스무 개쯤이 쌓여 있다. 뒤뜰 장독대엔 후덕하게 생긴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나무나 화초 가꾸기엔 별 취미가 없는지 이렇다 하게 공들여 운치 있게 꾸민 기색이 없다. 너른 발코니나 마당에 의자라거나 앉을 만한 자리 하나 마련해두지 않은 걸 보면 주로 서서 움직이는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모양이다. 집 둘레 곳곳에 널브러진 폐물들에서도 이 집에 사는 부부가 미화작업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근로에 시간을 아껴 쓴다는 걸 짐작할 만하다. 마당 한편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선 심 씨의 아내가 쇠스랑으로 텃밭을 고르고 있다. 어디 딴 데 눈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열심히, 혹은 고독하게. 이분은 한때 병을 얻어 고생을 했다. 그게 귀촌을 서두른 요인이기도 했다지. 산골의 어디에 사람의 몸을 고치는 미약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귀촌을 통해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는 걸 나는 간혹 봤다. 심 씨의 아내 역시 귀촌 이후 건강을 완연하게 회복했다는 게 아닌가. “저희 부부는 외식을 안 합니다. 농약 친 식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을 싫어해서죠. 직접 온갖 채소들을 깨끗하게 가꿔 찬을 만들어 먹기, 이 역시 산골에 사는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게 건강비결이라고 봐요. 요양을 위해서라면 가급적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농약을 엄청 뿌려대는 과수 단지나 유해 가스를 배출하는 축사 지구를 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곳은 도시보다 공기의 질이 더 나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서와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어쩌면 불운한 여건에 처한 부부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질도 중요하겠죠? 귀촌한 부부들이 대화단절이라거나, 도시에서보다 갈등을 더 겪는 경우도 드물지 않더군요. 부인은 산골생활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할 리가요. 여자에게 시골은 아무래도 불편이 많으니까요. 체념하고 사는 것 같아요. 부부싸움도 하지만 그때마다 화해를 하죠. 친구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삽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더라고. 뭐 그래도 밥은 얻어먹고 삽니다.(웃음) 다툼이 있더라도 그게 다 내 탓이거니, 그리 여기고요.” “‘내 탓’이라는 건 뭐죠?” “흠, 제 약점이랄까, 제가 느려터진 면이 있어요. 게으름과는 좀 다른 건데요, 옆에서 볼 땐 당치 않은 여유나 허세를 부린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릴 때부터의 천성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요. 좀 더 느린 숨결로 여유롭게 살자! 귀촌 때 그런 다짐도 했고요.” “마을 이장을 맡으셨죠? 주민들의 신임을 얻지 않고선 그거 어려운 거 아녜요?”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를 내세우지 않고 배운다는 자세로 어울렸어요. 술자리도 함께하고 오락 화투도 같이 치며 섞여들었어요. 시골에선 사생활이라는 게 어렵습니다. 뭐든 묻거든요. 답을 안 해주면 오해를 살 수 있고요. 그런 풍토를 긍정하고 잘 적응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정착할 수 있어요.” 마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사람의 마음은 새장에 달린 문과 같아서 활짝 열어젖힐 때 비상할 수 있다. 시골에 살며 아는 척, 잘난 척, 멋있는 척을 하다 보면 새장에 갇힌 신세를 자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세를 낮춘 갸륵한 선의마저 곧이곧대로 믿어주질 않는 경우가 많은 게 세상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게 인간이라는 종이다. 시골인들 혼선이 없으랴. “험한 꼴을 당한 적은 없으셨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상황이라든가.” “텃세라는 건 주로 집성촌에서 벌어집니다. 60여 명의 각성바지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 주민들은 다들 점잖아요. 귀촌하고서 집들이를 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오셨더라고요. 이 마을에 이주한 최초의 외지인이라며 반겨줬어요. 그 분위기를 죽 유지한 셈이죠.” 이장 일을 보면서부터 심 씨의 양상이 급변했다. 마을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굵직굵직한 마을 사업들을 펼쳐 성과를 거둬서다. 자칫 먹은 것 없이도 바가지로 욕먹을 수 있는 게 마을 사업 선도자다. 그는 공생 공영을 열심히 추구한 나머지 흠집 난 게 없는 것 같다.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아는 이의 활보라 할 수 있겠다. “귀촌하려는 분들에게 꼭 귀띔하고 싶어요. 재능과 역량을 마을에 쏟는다면 반드시 좋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요즘 정부나 지자체가 시행하는 마을지원사업의 규모나 종목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에 착안하시길 바랍니다. 마을의 공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개인의 이익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심 씨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큰 소리로 자주 웃어젖혔다. 우스울 게 없는 대목에서도 마구 웃으니 난 그게 우스워 덩달아 웃길 거듭했다. 적극적인 사교의 기술일 테지. 몸에 밴 겸양의 꽃으로 터져나온 홍소(哄笑)일 수도. 심원복 씨가 주는 귀촌·귀농 준비 Tip •최소한의 생활비(월 100만 원 정도)를 조달할 수 없는 재정 형편이라면 귀촌하지 않는 게 좋다. 비참해질 수 있으니까. •농사로 돈을 모으기는 정말 어렵다. 노동 강도도 세다. 섣불리 농토에 투자하지 말자. 일단 맨몸으로 들어와 빈집과 묵은 전답을 빌려 수련기를 갖는 게 좋다. •시골생활을 하다 보면 무료해진다. 변화가 없는 일상에 지칠 수 있다. 그럴 때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산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감성도 길러진다. 열렬한 취미 한두 가지를 가지고 내려온다면 한결 바람직하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5-0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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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만의 ‘장기’ 아지트 보라매공원에 가다
- 자전거를 타거나 혹은 트랙 위를 걷는 사람들. 작은 호수를 돌며 오순도순 얘기 나누는 모습이 정겨운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동의 보라매공원. 이들 사이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파고라가 보이는데 안에서는 큰 부대(?)를 이뤄 시니어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1년, 열두 달, 365일. 적게는 50명에서 많게는 100명이 넘게 모이는 곳. 장기판이 그럴싸하게 탁자 위에 놓여있고 밤에 불도 켜지면서 장기 성지로써의 모습을 갖췄다. 유유자적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바로 (사)대한장기연맹 경기운영부위원장이자 보라매공원 장기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는 오만성 씨. 그를 만나 시니어의 아지트가 된 보라매공원에 대해서 들어봤다. Q. 보라매공원에는 언제부터 장기를 두는 사람들이 많았나? A. 공군사관학교가 충청북도 청원군으로 이사하고 1986년 봄, 그 자리에 보라매공원이 생겼다. 현재 장기 두는 장소가 입구에서 비교적 가깝고 외져서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 공원이 들어서고 나서부터 장기판을 들고 한, 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벤치에서 매일 같이 장기를 두다보니 “여기에 오면 장기를 둘 수 있구나” 하면서 어쩌다가 형성됐다. 이곳에는 30년 전부터 나와서 장기 두는 고참이 10명 정도 있고 최하 10년 이상 된 분들이다. Q. 언제부터 지금처럼 장기 두기 좋은 장소로 변모했는가? A. 거의 30년 동안 파고라 안에 벤치 6개만 있었다. 그 자리가 좁으니 돗자리도 깔고 장기를 두는 처지였다. 나 혼자서 공원 관리사무실에 방문해 장기를 둘 수 있게 시설을 보강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처음에는 들어주지 않았다.(웃음) 그럼 의자가 너무 노후 됐으니 바꿔달라고 했다. 3년 전부터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해 작년 말, 완벽하게 파고라 안이 장기를 둘 수 있는 공간이 됐다. 탁자는 특수하게 기원처럼 높낮이를 맞춰서 설계하고 장기판을 고정했다. 장애인이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분들을 위해 한 곳은 의자를 놓아두지 않았다. 장기동호회도 만들었다. 조금씩 회비를 모아서 장기판과 알도 넉넉하게 구비해 두었다. 커피도 마시고 친교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Q. 장기는 전통놀이인가, 아니면 스포츠인가? A. 장기는 브레인 스포츠이다. 우리나라의 장기 역사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시니어들이 즐기는 전통놀이로만 알지 스포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니어들과 장애인들이 즐기기 좋은 브레인 스포츠가 장기 아닌가. 우리는 육체적으로 땀 흘리는 운동을 못 한다. 머리를 계속 쓰는 스포츠를 통해서 정신을 맑게 하고 치매도 예방하는 좋은 점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장기를 노인들의 놀이로만 생각한다. 장기 대회가 열리면 젊은 기사도 많고 여자 기사도 있다. 편견이 심한 것이 아쉽다. 2년 전 장기와 체스 전문 채널인 브레인TV가 채널 이용 인구조사를 했는데 당시 한 1천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장기에도 그만큼 팬이있다는 뜻이다. Q. 바람이 있다면? 보라매공원 안에 브레인스포츠센터 건립을 했으면 한다. 공원 측에서 지금도 부분을 신경 써주신다. 겨울철에는 장기를 두는 시니어를 위해서 파고라에 비닐 천막도 씌워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추운 겨울나기가 쉽지 않다. 멀리서 보면 양계장 같다는 사람도 있다.(웃음) 정말 매일 이곳에 사람들이 모인다. 갈 곳은 없고 취미가 장기인 시니어가 인천, 분당 등 멀리서도 온다. 천막을 치지 말고 접이식 창문으로 해달라며 관리사무실에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건물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라서 뚝딱하고 쉽게 진행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냥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꾸준히 찾아가서 얘기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세대를 위해 공원이 존재한다. 그것이 공원의 기능이다. 장기를 두는 우리들도 공원을 이용하는 시민이다. 반려견을 위한 공간을 포함해 체육시설이 12개 정도다. 30년 넘게 한자리에서 장기를 두는 시니어를 위해 시설을 좀 더 갖추면 좋지 않을까.
- 2019-04-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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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란 이름으로 기억은 조작된다, 연극 ‘51대49’
- ‘살다 보면 잊는다’란 말을 종종 하게 된다. 시간이 가고 나이 듦의 가치 중 하나가 ‘기억의 희석’일 게다. 무뎌지다 사라지기도 하고, 아련하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장된다. 그것이 좋았건 슬펐건 간에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매일 쌓이는 것이 인생. 그렇게 흘러가기만 하면 좋으련만 뜬금없이 연극처럼 플래시백(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을 경험할 때가 있다. 길에서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과거의 나에 대해 상세하게 기억한다. 상대는 전혀 알 수 없는 사건을 나열해 추억 소환에 애쓰지만 새까맣게 잊힌 사건들. 정황상 나일 수밖에 없기에 반갑게 이야기 해주는 상대방을 배려해 결국 동화(同化)의 과정에 빠져버린다. 함께 기억을 해내다 보면 잊었어야 했던 사건과 마주하기도 한다. 연극 ‘51대49(작·연출 오재균)’는 어린 시절의 사건 하나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 중반을 넘어선 남자 배영광(윤상호 분)과 천진한(서삼석 분)이 만나는 공간은 낙엽이 깔린 어스름한 새벽녘 공원 벤치. 술에 취해 벤치 위에 잠든 배영광 옆으로 천진한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등장하면서 막이 오른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이기지 못해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도 모자라 사생활 관리에 실패한 배영광은 팀원들과 마지막 회식을 하고 공원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세상 불쌍해 보이지만 이름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삶을 살던 잘나가는 여의도 증권맨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천진한은 과거 행적이 묘연하다. 남루한 옷차림의 천진한은 배영광의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친구인 척 대신 받는 돌발 행동을 한다. 배영광은 자신의 전화를 받은 것도 모자라 지갑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되자 천진한을 추궁하며 의심한다. 자신만의 확고함으로 상황을 재단하는 배영광에게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고 천진한이 정체를 밝히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로 접어든다. 쉽게 기억해내기 어려운 옛 이야기 꺼내는 천진한. 그 속에서 배영광은 자신을 발견하지만 세월 속에서 인식했던 나와 다른 자신을 만나면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제목처럼 51%와 49%의 거짓과 잊혔던 기억, 진실이 오가고, 각각 51%와 49%에 속하던 두 남자가 실제와 마주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 작품은 글을 쓰고 연출한 배우 겸 연출가인 오재균이 실제 겪은 일화로 시작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30년 만에 만난 어릴 적 친구와의 술자리가 이야기의 큰 틀이 됐다. “서삼석 배우처럼 생긴 친구였어요. 정말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나서는 제가 학교 다닐 때 선망의 대상이었다면서 기억에 없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러다 술을 한잔 먹고 났더니 행동이 과격해지고 뭐가 꾹 눌러왔던 것들을 말하더라고요. 그 속에는 저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 질투, 증오가 있었습니다. 연극의 중심 이야기는 허구로 꾸몄지만 헤어지고 난 뒤 생각했죠.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았을까’ 하고 말이죠.” 극단 놀터(대표 서삼석)의 여섯 번째 정기공연으로 오른 ‘51대49’는 작년 2월 초연 당시 ‘미투 사건’과 맞물리면서 짧은 공연 기간에도 불구하고 40대와 50대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다. 배영광을 연기한 윤상호도 이런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작년에 놀터공방이라는 곳에서 초연을 했어요. 처음에는 남자 관객들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남자들의 기억을 꺼내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남자의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여자로 인해 여성 관객들은 또 다른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당시 상황을 생각했지 싶습니다. 여성 관객들이 많이 울더라고요.” 가벼운 말장난처럼 이어지나 싶던 두 남자의 대화가 점점 짙어지고 처절하게 변하면서 관객들이 맞닥뜨리는 감정에도 적잖은 파문이 일어난다. 탄탄한 연기력으로 대학로를 대표하는 배우 윤상호와 서삼석의 호흡만으로도 볼만한 연극으로 회자된 작품 ‘51대49’. 연극이 끝나고 나면 그 고민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지 마시길. 나는 살면서 뭘 잘못했을까. 연극 ‘51대49’는 대학로 소극장 후암스테이지에서 4월 14일까지 공연된다.
- 2019-04-0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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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류’ 기인 예술가의 미치광이 같은 예술혼
- 간혹 그의 목소리는 흡사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거친 자욱을 남기며 내려오는 듯했다. 스스로 일류를 넘은 ‘특류’라고 말하는 국내 최고의 전각(篆刻) 작가 진공재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에 쏠린 감정을 타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 근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날선 도끼가 서려 있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과 부패하지 않는 태도로 평생을 살아오며 실력과 배짱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진짜 예술가, ‘58년 개띠’ 세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진공재(陳空齎)를 만나 그의 거친 예술가 삶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차고 넘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고독하고 단호하다. 국내 최고 전각 장인으로 평가받는 진공재 작가를 만나니 흔히 광기의 예술가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서편제’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방랑하던 소리꾼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원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죠. 열네 살까지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머니와 함께였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진공재 작가는 어머니가 사망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날이었다. “다른 집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 집은 내가 불을 피워야 연기가 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집을 떠나보자 하고 1974년에 자전거 팔아 3400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각박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시절이었던가. 1974년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하에서 파낸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밥벌이로 시작한 도장 파기 소년 진공재는 인쇄소, 중국집,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가 경기도 안양에서 도장을 파기 시작한 것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새기는 걸 좋아했죠. 학교에선 서기 일도 했었고. 그런데 길에서 도장을 파다 보니 밥벌이는 되는데, 밥만 먹어선 충족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서예를 배웠죠. 독학자습이었어요. 그렇게 서예를 하다 보니 그림이 나오더군요.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씨가 되듯이….”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와 화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시절이 1980년대였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부은, 군부독재 시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눈을 뜬 거죠.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20대 후반이었는데, 사실 대학생도 아니고 학생운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서 도장 파서 먹고사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데모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력만으로 오른 최고의 자리 아이는 198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 일도 안 됐는데 감기, 모세기관지염, 폐렴, 장염까지 온 거예요. 아이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하실에서 살았거든요. 의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짐 챙겨서 전라도로 내려갔죠.” 그는 서예 솜씨 덕분에 전북 도청 고용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병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예술가 기질, 방랑가 기질이 다시 돋았다. “공무원이 내가 갈 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따리 싸서 다시 도장을 파기로 했죠. 1990년에 전주를 떠나 인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서예학원을 개원했는데 3개월 하고 망했어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갔어요.” 처음 도장을 파기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91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 길에서 그는 전각과 서예, 동양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석도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다 썩었잖아요. 서예계도 마찬가지였죠. 문중끼리 다 해먹고….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게 최고상을 준 분이었어요. 성철 스님과 함께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셨죠. 201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제가 담배를 끊었어요.” 전각(篆刻)은 심각(心刻) 예술이다 당시 서예계의 부정부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그는 서예계 인사들이 비리로 구속되고 난리가 나자 소위 ‘혁명’을 하러 협회로 들어간다. 한국청년서예가협회 대표였던 그는 “다 나와라,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자” 하고 외쳤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렸죠. 전부 스승과 제자로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못된 거라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 마치고 나오려 했는데 어떤 분이 ‘네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 그대로 나오면 안 된다, 도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협회에 들어갔죠.” 이때가 그의 공적인 삶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는 중국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채근담’ 1만6600여 자를 새기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도 서예협회 경기도지부장, 서예협회본부 이사, 한국전각학회 감사를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화려한 간판들이 과연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성정이 짐작이 된다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003년 3월 29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먹은 빈 껍데기야. 그런데 벼슬하면 뭐 해먹었다고 똑같이 욕먹고…. ‘여기를 떠나자’ 싶어서 맡고 있던 직위들을 한날한시에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가기로 하고 보따리 싸서 지리산으로 갔죠.” 그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떠났다. 방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끝없는 방랑벽, 다시 떠나다 평생 39번을 이사했다. 지금도 그는 임대사무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정적으로 뭔가 쌓이는 것도 없고 붙잡는 사람도 없고 술맛도 떨어지면 떠나게 되는 거죠.” 어느 곳에서는 202호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본 건물주가 야반도주한 스님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마흔아홉 개인데 ‘202호 스님’도 그중 하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스님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지. 어차피 전기세 받을 때만 볼 테니.” 2005년에는 그의 방랑벽이 해외로도 뻗어나갈 기회가 왔다. 정부에서 독일을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그 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아 행사 일환으로 전각 시연을 보여주고 싶으니 그에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어디를 못 가겠냐, 대신 거기서 작품을 팔 수 있으면 가겠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인데 보름 동안 거기 가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받아주더군요.” 독일은 그에게 좋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작업물을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독일 녹색당 당수도 있었고, 독일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였다.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멋지게 산다 평생을 강렬하게 살아온 그도 이제 환갑이 됐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그가 느끼는 바가 궁금했다. “내 종교는 세 개예요.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까진 새옹지마교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다. 서른 살에서 예순 살까진 천지조화은혜교였죠. 천지가 사람을 절대 굶기지는 않더라. 밥은 주더라. 그리고 예순 살 이후는 안빈낙도교나 믿을까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나이 들어도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요.” 흔히 예순 살이 넘으면 사주팔자도 없다고 한다. 다시 한 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 열네 살까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 일흔네 살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봤다. “앞으로 14년은 황금기예요. 그 이후로는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자신으로 사는 거죠.” 그는 최근 딸 덕분에 아내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갔다 왔다. 거기서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봤다. 자연 속에서, 안나푸르나의 굽이진 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손녀인 하리다.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제부터 오직 전각만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는 인사동에서 자신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총정리해서 집대성하는 전시를 열 계획이다.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 그가 현재 머무르는 곳은 의왕시 청계산 자락. 작업실 이름은 비니루(扉泥陋)다. 사립문 비(扉), 진흙 니(泥), 더러울 루(陋) 자를 쓴다. 한자 음 그대로 비닐하우스로 된 공간이다. 2년여 전 경상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된 ‘심상서화각의향연’이라는 돌판새김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만들고 그동안 28% 이자를 내고 있었던 캐피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싹 갚고 나니 3000만 원이 남았다고 한다. 그 돈을 전부 이 작업실을 만드는 데 썼다. “나는 평생 석도필묵(石刀筆墨)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에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밥을 먹고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어요. 대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에 있었다고 봐요. 나는 삶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예요.”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로… 멀고도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온 그가 삶류 작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밥벌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류라지만 나는 특류다. 자만심 있는 삶류다”라고 말하는 그는 홀로 이뤄낸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그가 평생 안고 있는 석도륜 스승의 말씀이 있다.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눈을 사랑하기로 해놓고 따뜻하길 바란다면 눈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품고 있을 만큼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는 그대로 여겨지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섰기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공재 작가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진공재와 그의 작품들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다시 한 살이 된 그가 스스로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앞으로의 14년. 어떤 작품들로 자신을 말하게 될지 기대가 크다.
- 2019-03-0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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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 사진가들은 추운 겨울이면 성에가 낀 화훼농가 비닐하우스 또는 창틀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탐낸다. 이른 아침의 추위에도 상관하지 않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성에 너머로 은은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꽃이 한 폭의 수채화를 닮아서다. 나는 사진이나 사진처럼 보이지 않는 작품을 탐구한다. 성에가 낀 모습의 사진은 이른 아침 아니면 촬영하기가 쉽지 않다. 부지런한 사진가만이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꽃집이나 화훼농원의 주인이나 일하는 직원의 도움을 받기 위해 평소에 인간관계도 맺어놓는다. 성에는 그 자체로 다양한 문양이나 형상도 좋지만, 다른 피사체와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성에도 있고 그 뒤쪽으로 다양한 색깔을 가진 꽃이나 유사한 피사체가 있는 장소를 발견하기 어렵다. 또 해가 뜨거나 바깥 기온이 올라가면 성에가 녹아내리므로 일정 시간대, 즉 이른 아침에 촬영을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성에 사진은 들여다볼수록 매력이 있다. 내부의 따뜻한 기온과 외부의 차가운 기온 차이로 만들어지는 성에는 마치 애절한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 혹은 비닐 벽에 부딪혀 동동 발을 구르는 여인의 애잔한 마음처럼 보인다. 그 내면의 세계를 잔잔한 감동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사진가의 상상은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매크로렌즈를 사용하면 좋겠지만, 갖추지 못해 일반 렌즈로 촬영했다. 성에가 낀 유리창이나 비닐하우스 뒤쪽에 꽃이나 고운 빛깔의 화분을 놓아두고 바깥에서 바싹 붙어 촬영하면 그럴듯한 작품이 된다. 추운 바깥에서 촬영하는 게 싫다면 연출해서 찍는 방법도 있다. 색이 고운 그림이나 꽃(조화도 괜찮다)을 준비해놓고 유리 한 장을 구해 물을 뿌린 뒤 밤새 바깥에 둔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성에가 낀 유리를 실내로 가져와 준비해둔 그림이나 꽃을 뒤편에 두고 촬영하면 된다. 실내에선 성에가 금방 녹아내리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사진 작품도 다른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사실을 찍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메시지를 적극 담아낼 수 있다.
- 2019-02-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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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죽어가는 고래, 내 친구에게
- 잘 지내? 내 친구 고래에게 안부를 전해. 그 인사조차 전하기 미안해. 하루 중, 어둠이 따라 오는 저녁에, 사람이 불 밝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컴컴해지는 바다에 혼자 남은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사무쳐. 친구가 떠나버린 텅 빈, 이름만 거창한 ‘울산바다 고래바다’를 둘러보고 온 날 저녁에 더욱 그래. 친구가 ‘바다의 로또’라는 사행성 이름으로 사람의 그물에 생명을 잃어버린 뉴스가 보이면 더욱 그래. 미안해 정말. 절대 사람을 용서하지 마. 친구는 알고 있을 거야. 최근 일본이 IWC(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 국제포경위원회) 탈퇴를 선언했어. 그건 고래를 마구 살상하겠다는, 바다를 고래의 붉은 피로 다 적시겠다는 야만이야. 동해에 주소 두고 사는 친구의 생명이 더욱 위험해졌다는 이야기야. 일본이 동해 우리 고래까지 씨를 말리겠다는 속셈인 거야. 고래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여 지켜낸 바다 자원인 고래를 자기 밥상에 올리겠다는 ‘도둑질’이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어.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어. 일본은 바다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인 ‘고래와의 전쟁’을 오래전부터 계속하고 있었어. 친구도 알지?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징용 보상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듯이. 일본은 친구에게 전쟁 시작을 알렸어. 그건 고래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에게 ‘선전포고’를 한 거야. 이건 침략이야. 고래가 사는 바다를 자신의 ‘바다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거지. 집단학살이 예고됐어. 친구를 위해 세계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계의 많은 고래보호단체에서 일본을 규탄하고 바다에서 일본의 만행을 막을 거야. 울산에서 고래를 지키는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도 행동에 나설 거야. 오랫동안 친구에게 사랑과 위로 시를 보내온 나 역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친구를 겨누는 포경선의 포를 더욱 조심해. 일본이 ‘연구선’이란 미명의 포경선에 ‘히노마루(일장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거야. 아비를, 어미를, 아기를, 가족을 모두 죽일 거야. 그건 살생이야. 바다의 국경선을 모르고 사는 자유로운 고래가 일본의 바다에 들어서면, 고래 야만국 일본이 다이치에서 수천수만 마리 돌고래 떼를 학살하듯, 자신의 국기 색깔 같은 고래 피를 시뻘겋게 보여줄 거야. 친구는 참을 수 없는 소리로 항변하겠지. 우리 사이에 언제 평화로운 시절이 있었냐고. 그 말 맞아. 인류가 처음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다로 출항한 날부터 우리는 쫓고 쫓기는 사이가 되고 말았어. 하지만 뜻있는 사람이 많아져 무분별한 술래잡이를 용서하지 않은 지 오래됐어, 사람의 야만은 즉시 중단돼야 해. 사람은 바다의 주인이 고래라는 것을 알아야 해. 사람은 사람의 죄를 알아야 해. 바다를 향해 절하며 용서를 구해야 해. 지구는 바다 면적이 70%를 차지하는데, 30%의 면적을 받은 육지 사람은 너무 오만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다는 지구의 면적 70.8%를 차지한다지. 면적으로 보면 2.43배이고, 부피로 보면 13억7000만㎦에 해당하지. 이 넓은 곳에서 친구와 나는 참으로 미세한 존재야. 미세하지만 우리가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포유류’이기 때문이라 생각해. 서로 새끼 낳고 젖 먹여 키우는, 자식의 아비이고 어미이기 때문인 거지. 고래와 사람은 친구가 돼야 해. 그것이 바다에서 우리가 함께 사는 유일한 방법이야. 사실 멸종보호동물인 친구를 여전히 해양수산부가 관리하는 ‘생선대접’에 화가 나. 친구는 ‘환경부’가 지켜줘야 하는 ‘바다의 주인’이야. 귀한 생명이야. ‘고래도시’라는 내가 사는 울산을 봐도 짜증이 나. 여전히 고래는 ‘고래 고기’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울산에 고래잡이가 성행했던 때와 고래잡이가 중단되고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을 비교하면 고래 고기를 파는 식당이 200배 이상 늘어났어. 바다는 사람에게 소금을 비롯해 참으로 많은 선물을 주고 있어. 친구도 큰 선물이지. 고래는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할 친구인데 ‘먹거리’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돼. 70년을 살며, 10개월을 임신해서, 자식을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고래는 우리의 바다 자화상이야. 고래의 멸종은 인류 멸종의 예상 시나리오가 될 거야. 친구 고래. 친구는 여러 해 내가 울산광역시 고래목측조사에 참여한 것을 알 거야. 바다에서 눈으로 친구를 찾는 일이지. 내 소원은 울산에 멋진 ‘고래보호조사선’이 생기는 거야. 그리고 예술가들이 함께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찾는 거야. 고래를 만나는 즐거움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음악가에게는 고래의 노래를 들려주고, 춤꾼에게는 고래의 춤을 보여주고 싶어. 화가에는 고래의 역동적인 힘을, 아동문학가에는 고래의 동심을, 시인에게는 고래의 에스프리를 다 보여주고 싶어.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고래의 작품을 만들어 관객과 독자를 만난다면 너도나도 다투어 고래 친구가 되려고 할 거야. 그때 바다에서 만날 수 있겠지, 친구. 최근에 읽은 케이틀린 셰털리의 GMO(유전자조작식품) 위협에 대한 보고서 ‘슬픈 옥수수’에 이런 구절이 있어. “사실상 땅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바다를 오염하고 죽은 고래 뱃속에서 비닐이 무더기로 나오게 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말하고 싶어. “고래가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어!” 친구 고래.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 있어. 온전하게 일흔 해 천수를 살며 다시 만나길. 정일근 시인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외 다수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영랑문학상, 지훈문학상, 이육사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1992년부터 고래도시 울산에서 살며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 대표 시인’으로, 고래보호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경남대 석좌교수.
- 2019-02-0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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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고도 트레킹을 꿈꾸며
- ‘차마고도’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지만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다녀온 일행들이 랑탕, 무스탕에 이어 차마고도 얘기를 자주 꺼냈다. 히말라야의 엄청난 대자연 속에서 느낀 감동이 아직 지워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래전 KBS TV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마지막 마방’ 편과 ‘순례의 길’ 편을 감명 깊게 감상했다. ‘차마고도’는 말 그대로 ‘Tea-Road’, ‘茶馬古道’라 하여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다.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산악 무역로다.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길이었는데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차가 다니는 시대가 되자 ‘마지막 마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5000m 이상 되는 눈 덮인 설산의 아찔한 협곡을 잇는 길이다. 이 험준한 산길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냈다. 교역품은 주로 차와 말이었지만 중간 마을과 종착지인 윈난성의 여정에서는 소금, 약재, 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방’에서는 티베트의 송이버섯을 염장해 보관하고 있다가 중국 윈난성에 갖다 파는 여정을 그렸다. 말에 짐을 잔뜩 싣고 산 넘고 물 건너 고생을 한 대가가 1인당 100만 원 정도. 그 정도면 좋은 가격이란다. 말을 운송 수단으로 쓰는 것은 히말라야에서도 자주 보던 광경이다. 트레킹 도중 말이 나타나면 몸을 산 쪽으로 붙이라는 안전수칙을 가이드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절벽 쪽으로 비켜서다가 자칫 말에 밀리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시체도 못 찾는다고 했다. 차마고도에서도 이런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또 말에 실린 짐이 잘못되어 풀어지거나 말이 발을 헛딛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줄지어 오던 다음 행렬에도 타격을 준단다. 차마고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아내와 형제가 같이 살거나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고 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먼 길을 떠나야 하고 남아 있는 형제는 농사를 지어 그동안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형제공처의 풍습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였다. 두 번째 테마는 ‘순례의 길’. 쓰촨성에서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까지 2400km를 이마, 두 팔, 양 무릎을 땅에 대며 ‘오체투지’로 6개월간을 가는 순례를 소개했다. 3명의 오체투지 순례자와 이들의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사람 2명이 일행이다. 하루 6km 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순례의 길을 이어갔다. 가다가 죽으면 오히려 영광이라며 시체를 토막 내어 독수리 밥으로 내어 놓는다. 종교의 힘은 무섭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마에 멍이 들고 무릎 관절이 퉁퉁 부어도 길을 간다. 육포나 옥수수 말린 약간의 곡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노지에서 간단한 이불과 비닐포대를 덮고 잔다. 이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최종 목적지인 라싸의 조캉 사원에서는 10만 배 절을 한다. 우리나라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4박 5일 정도의 일정으로 떠나는 차마고도 트레킹 관광 여정을 요즘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 비용도 130만 원대로 욕심내볼 만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너무 힘들어 다시는 오지에는 가지 않겠다던 결심이 벌써 흔들린다. “히말라야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겠다.
- 2019-01-3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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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가 발생했을 때 전기스위치 내려야 할까?
- 소방청 통계자료에 의하면, 2018년도 화재는 4만2337건에 피해액만도 5500억에 달한다. 368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2223명에 달한다. 화재는 난방을 많이 하는 겨울철에 더 자주 발생한다. 어디서 화재가 주로 발생하는가를 살펴보면 아파트와 단독주택 같은 주거시설에서 1만1549건이 발생했고(주거 형태의 컨테이너나 비닐하우스는 제외), 산업시설인 공장에서도 2618건의 화재가 있었다. 음식점(2831건), 유흥주점 같은 위락시설(196건), 돈사나 우사 같은 축사(1490건)에서도 화재는 발생한다. 특히 자동차 화재도 해마다 4500건이나 발생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므로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내 주위에서 만약 불이 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나는 전기안전기술사다. 화재 현장에 출동해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현장에 있는 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화재 발생 시에 조치 사항으로 전기스위치를 먼저 내려야 한다고 상식처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음에 놀란다. 화재 발생 시 대응 요령에 전기와 가스를 우선 차단하라는 말을 무조건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이 났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전기스위치부터 내리면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암흑천지를 만들어 오히려 위험하다. 불이 났으면 일차적으로 인명구조가 먼저다. 지하나 대형 건물일 경우 대낮이라 해도 전기스위치를 끄는 순간 일순간 암흑천지가 된다. 갑자기 정전되어 캄캄해지면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감이 커져 당황하게 된다. 건물에 익숙지 않은 외부인이라면 더더욱 탈출구를 찾지 못해 대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기도 한다. 곳곳에 유도등이 소방법에 의거해 설치되어 있지만 밝기가 상용 전원에 비하면 턱도 없다. 어디까지나 비상시의 유도등일 뿐이다. 1. 전기스위치를 내려야 할 때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폭발성 가스가 있는 장소에서는 당연히 전기스위치를 내려야 한다. 그런 장소가 아니라면 사람들을 다 대피시키고 마지막으로 건물을 빠져나오는 사람이 전기를 꺼야 한다. 간혹 책임감이 강한 관리자가 전기분전함을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가 전기스위치를 내리고 정작 본인은 어둠속에서 대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대피가 급한 사항이라면 건물을 빠져나오는 게 우선이다. 2. 전기스위치를 내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화재가 나면 전선 피복이 열로 인해 녹는다. 결국 합선 현상으로 전기스파크가 발생한다. 그때 전기차단기가 내려가고 이어서 정전이 발생한다. 즉 전선은 벽이나 천장 속에 들어가 있고 전선관과 전선 피복이 보호하고 있어 화재가 나도 당장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이 시간을 이용해 대피해야 한다. 화재 현장을 빠져나온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이 났지만 전기가 나가지 않아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불이 났다고 금방 전선이 타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3. 전기 설비에는 사고를 대비한 보호 장치가 있다. 전기 설비의 누전차단기는 누전이나 합선 등 사고가 일어나면 이를 알아채서 전기 공급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안전장치다. 차단기 설치는 법제화되어 있다. 사람이 잠을 자는 시간에도 누전차단기 같은 전기 안전장치는 24시간 돌아간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장은 일어날 수 있다. 평소 고장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 확인 주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면 적당하다. 4. 화재 장소의 전기 설비는 재사용이 불가능하다. 불이 났을 때 전기스위치를 꺼도 전기 설비를 재사용할 수 없다. 스위치를 끄든 끄지 않든 화재의 여파를 당한 곳의 전기설비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화재 시 발생한 열에 의해 전선 피복이나 전기 접점이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 2019-01-2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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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발코니 쪽 창문에 에어비닐을 붙이면서 겨울이 옵니다. 여느 계절이 그러하듯 겨울도 순식간에 왔지요. 겨를도 없이 허전한 풍경이 펼쳐지고 싸늘해진 공기가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해도 에어비닐이 창을 다 가리지 않도록 풍경을 위해 가운데를 뚫어놓았고 어느 창은 비워놓기도 했습니다. 풍경 가운데 나무들이 가장 숙연하게 서 있습니다. 한때 열매와 그늘과 싱그러움을 주던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견딤이 있을 뿐 나무들에겐 정작 아무런 보상이 없지요. 그 보상은 인간의 몫인데 나무들만이 한사코 의연히 견딥니다. 겨울이 주는 사유로 사람들에게 내면이란 것이 조금 더 생겨났다면 나무들이 준 의미가 닿은 때문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게 건너갈 수 없는 시간의 표정이 겨울 안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씩 침잠하며 돌아보며 긴 시간의 여행에 듭니다. 추위와 더불어 당신이 왔습니다. 이제 당신은 여기 없는데 당신 그리움이 왔습니다. 그곳에서 발은 시리지 않나요? 따뜻한 물은 자주 드시나요? 이제 더 추워하지 않으셨음 해요. 당신을 처음 만나던 15여 년 전의 어느 날도 겨울이었습니다. 어느 문학행사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지요. 지면을 통해서 작품으로만 뵙던, 저보다 훨씬 선배이셨던 분을 만난 거지요. 따뜻하고 진솔한, 아주 시를 잘 쓰시던 분이라 단박에 기억했습니다. 시로써 만나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면 뭔가 통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우린 스치듯 서로 그런 느낌을 확인한 듯했습니다. 그런데 첫눈에도 당신은 추워보였습니다. 한겨울에 서늘함이 느껴지는 흰 와이셔츠에 재킷 하나만 걸친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웃는 표정도 겨울처럼 스산하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안부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태 뒤 당신은 신작 시집을 부쳐왔습니다. 시는 여전히 깊고 간절했습니다. 반갑고 감사했지요. 무어 그리 더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는데 곱게 사인한 시집을 보내시다니, 저는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서로 대구와 서울 떨어져 있는 터라 우선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드렸던 겁니다. 수줍은 듯 작게 웃으시더니 당신은 되레 고맙다 하셨습니다. 더듬거리며 어떤 시가 좋다는 몇 말씀을 하고 저는 서둘러 꽃 피는 날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 말하고 끊었습니다. 꽃 피는 날은 속절없이 여러 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다는 부음을 들었습니다. 향년 61세. 그것도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말의 빚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책으로 엎디었습니다.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저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겨울 당신이 초췌하게 보인 이유와 스산했던 바람 소리가 나던 표정이 오버랩되어 아프게 왔습니다. 하나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글을 쓴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지, 저는 아주 하찮은 사람이 되어 겨우내 더욱 추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을 위한 저의 자책을 시로 적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당신에게, 그리고 저처럼 때를 놓쳐 낭패한 일을 안고 사는 모든 당신에게 바치는 시이기도 했습니다.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꽃 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아,/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죄송해요/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 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전문 창이 커다란 집에 살면서 창을 가리게 된 이유도 많은 풍경을 다 들이기가 아팠던 탓입니다. 커다란 그리움을 다 담기 힘들었던 이유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겐가 턱없이 모자랐거나 상처를 주었다면 어떤 일로 되돌려야 할까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달리 가진 재주가 없어 저는 시로써 삶을 살피며 살기로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사물이나 대상, 무생물에게도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한다는 시인의 명분을 깊게 끌어안았습니다. 그건 당신이 가르쳐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당신,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진실. 겨울 풍경 앞에 오래 머무는 건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살아 이 풍경을 보며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저는 시를 쓰고 풍경을 나눌 것입니다. 제가 어느 창에는 에어비닐을 붙이지 않는다고 했지요, 풍경을 위한 동시에 당신을 위한 통로임을 고백하겠습니다. 창으로 드는 저 풍경 속 나무 한 그루가 이미 당신이지요. 그래도 종내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 다 못한 그리움으로 이젠 제가 당신에게 풍경이 되겠습니다. 안과 밖 사이, 냉기와 온기 사이, 삶과 죽음 사이, 모든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지라도 당신에게 저는 꽃 피는 봄날이 되겠습니다. 세상에는 비유가 필요 없는 순간이 있지요. 불가해의 일, 불가능의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홀연 떠나신 아쉬움 대신 당신의 침묵을 기억하겠어요. 그리고 뻔뻔하게도 저는 다시 당신께 말하겠습니다.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규리 시인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구미대학교 강사 역임. 질마재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있다.
- 2019-01-03 0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