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동호회에서 내 나이 또래의 하유수 선생(이하 하 선생)을 만났다. 첫인상이 웃는 얼굴상이어서 그런지 까다롭지 않고 마음씨 좋겠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다. 시니어라는 나이가 되면 직관력이 발달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척 보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알아차리는데 3초면 충분하다. 한발 더 나가서 내가 피해야 할 사람인지 다가가야 할 사람인지도 몇마다 말을 섞으면 느낌이 있다. 경륜이라는 시간 덕분이지만 신통하게도 대부분 적중한다.
하 선생은 전직이 고위소방공무원이었다. 문무를 겸비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기술자격인 ‘소방관리사’자격증을 갖고 있다. 소방관리사는 소방시설물을 점검하는 업체에서는 법적으로 의무고용을 해야 한다. 시험이 어려워 배출된 소방관리사가 많지 않아 희소가치가 높아 현재로서는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자격증이다. 평소 배우기를 좋아해서 자식들이 해외여행이나 다니시라고 권해도 공부가 좋다며 요즘도 다양한 교육장소를 찾아다닌다.
하 선생을 몇 번 만나다보니 이분이 한문에 관심이 많고 박식 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 번도 못 가본 서당을 두 번이나 다녔을 정도로 한문 기초가탄탄하다. 한시(漢詩)를 여러 편 줄줄 외운다. 이옥봉, 허난설헌의 작품을 줄줄 외운다. 특히 ‘황진이’를 좋아해서 황진이 관련 여러 자료들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황진이 평전 같은 책을 써보겠다고 야심만만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 선생이 과거 폐암에 걸렸는데 치료를 위해 명예퇴직을 했다는 아픈 과거사 최근에야 알았다. 등산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체력을 보강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 선생은 산행 중에 꼭 쓰레기를 줍는다. 처음에는 선행으로 쓰레기를 줍는지 알았는데 직업인처럼 산행 시 마다 쓰레기를 줍는다. 길거리에서도 쓰레기를 줍기는 귀찮은데 위험한 산비탈에서 곡예 하듯이 쓰레기 줍기는 아무나 할 수 없다. 무슨 사연이 있거나 굉장한 결심을 한 사람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기로 작심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코로나19 사태로 ‘방콕’시간이 길어지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봄의 꽃과 새싹들을 보기 위해 서울대학교 뒷산으로 잘 알려진 관악산에 하 선생과 등산을 가기로 했다. 역시 이번 산행에서도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다 줍는다. 전에는 쓰레기를 손으로 주어 등산 가방에 넣었는데 이번에는 검은 비닐봉지와 손 집게를 준비했다. ‘쓰레기 줍겠다고 집에서부터 작정하고 나왔군요.’ 하고 내가 말하자. 코로나 사태로 쓰레기를 직접 줍거나 가방에 그냥 넣기도 비위생적인 것 같아 집게로 집고 검은 비닐에 담아 집으로 갖고 가서 쓰레기봉투에 버린다고 말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나라 위생 개념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쓰레기를 줍는 하 선생에게 쓰레기를 줍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내가 계속 조르자 그는 슬픈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자신이 한때 폐암에 걸려 항암주사를 맞았는데 4번째 항암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차 안에서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너무 두렵고 아픕니다. 저를 고쳐주시면 남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습니다.’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성경 이사야 10장 10절의 말씀인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하는 성경 구절이 불현듯 생각나더란다. ‘아 나는 나을 수가 있겠구나!’하는 마음이 갑자기 솟구치고 스스로 감동의 전율이 몰려오더란다. 간절한 기도의 보람인지 항암주사의 효과인지 잘 모르지만 김 선생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암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에게 약속한 데로 무슨 봉사활동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찾았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쓰레기를 줍자는 생각이 들더란다. 쓰레기는 더럽기 때문에 자기가 버린 쓰레기도 자기가 줍기를 싫어한다. 혐오 물질인 쓰레기를 치우면 더럽던 곳이 깨끗해지고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 여러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보시(普施)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 이 일을 내가 해보자 하고 결심을 굳혔다.
행복이나 즐거움은 내 마음속에 있다.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하면 아무리 더러운 일을 해도 기쁜 마음이 우러난다. 내가 주운 쓰레기 덕택에 주위가 깨끗해지면 쓰레기 버리는 사람도 줄어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더 즐겁다고 한다.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행복 해한다. 스스로 인생이 즐겁다고 생각하니 만나는 사람에게도 좋은 말을 하게 된다. 덕택에, 덕분으로는 말을 자주 했더니 진짜로 자식들이 진급도 하고 아파트도 당첨되고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 손자 손녀들도 공부를 더 잘하는 것 같다고 웃는다. 하 선생의 웃음은 웃음 바이러스로 보는 사람에게도 전파되어 우리를 웃게 만든다.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투표일은 4월15일이지만 그날 시골에 다녀 올 일이 있어서 토요일인 11일 사전투표를 하기로 맘먹었다. 주소와 관계없이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만 있으면 전국의 모든 읍·면·동사무소와 투표소에서 사전투표가 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금요일인 10일 사전투표를 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올해 사전투표율은 코로나바이러스 영향 탓도 있지만 유권자의 26.69%인 11,742,677명이 투표한 것만 봐도 대단한 참여율이다.
내가 투표를 한다고 하니 아내도 따라나서 6시경 함께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투표자가 별로 없을지 알았는데 몇 사람이 이미 줄을 서있고 한 두 사람씩 계속 뒤 딸아 들어온다. 투표장은 3층인데 1층 입구에서부터 발열 체크를 하여 체온이 섭씨 37.5도 이상이거나 호흡기 증상이 있는 사람은 별도 설치된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다행히 적발된 사람은 없었다. 건강한 사람만이 손 소독을 하고 양손에 낄 1회용비닐장갑을 받아서 3층 투표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투표장에서는 주민등록지에 따라 관내, 관외 선거인을 구분한다. 주민등록이 여기가 아닌 사람도 이렇게 다른 지역에서 쉽게 투표를 하게 된 것은 완전히 인터넷 덕분이다. 예전에 부재자투표를 할 때와 판이하게 달라 격세지감을 느꼈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전투표가 아니라 부재자 투표라 하여 무슨 일로 타지방에 가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였는데 번거롭고 하기가 어려웠다. 추억을 더듬어 그때를 회상하면 우선 부재자투표를 하겠다고 해당사유를 밝혀 부재자 투표를 할 장소의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신고를 했다. 신고접수를 받은 동사무소에서 주소가 되어있는 동사무소에 연락을 취하면 주소지 동사무소에서 출마후보자의 선거유인물과 투표용지가 등기우편으로 집으로 배달해준다. 사전투표일에 지정된 투표장에 가서 투표용지가 든 봉투를 개봉하여 투표를 하고 투표지를 선거봉투에 넣어 밀봉을 한 후 투표함에 넣어야 했다. 투표봉투는 해당 주소지로 우편 배달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개표 일에 부재자투표함을 개봉하여 합산을 했다.
지금은 모두가 전산화되어있어 자신의 주소와 다른 곳일 경우에는 기표한 투표지를 회송용 봉투에 넣어 투표하는 것으로 끝난다. 회송용 봉투는 매일투표가 끝난 후 해당 구·시·군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우편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과거를 아는 사람은 놀라자빠질 정도로 편리하게 변화되었다.
선거인 명부가 없어진 것도 특이한 점이다. 전에는 신분증을 제시하면 선거관리인이 선거인 명부와 대조하여 확인한 후 투표를 했다는 표시로 선거인명부에 엄지손도장을 찍었다. 선거인명부에 이름이 없으면 투표가 불가능했다. 투표일전에 확인을 하라고 공고가 붙었던 시절이었다. 오늘 보니 신분증을 기계가 확인하여 투표용지를 출력해준다. 이렇게 전산화되어있으니 시시각각으로 투표율도 집계가 가능하고 매시간 투표율이 언론에 공개된다.
지역구 국회의원투표지와 비례대표 정당투표지 두 장을 받아 기표소에서 기표한 후 남이 못 보도록 접어서 투표함에 함께 넣는 것으로 투표는 끝났다. 투표를 마치고 입구와 다른 출구를 이용하여 밖으로 나오니 불과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투표는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기권할 것이 아니라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며 선거에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해야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될 것이다.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4·15 총선 사전투표가 오늘(10일)부터 이틀간 전국 3508개 사전투표소에서 진행된다. 주소와 관계없이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만 있으면 전국의 모든 읍·면·동사무소와 투표소에서 사전에 투표할 수 있다.
사전투표 시간은 10~11일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자신의 주소와 다른 곳일 경우에는 기표한 투표지를 회송용 봉투에 넣어 투표하면 된다. 회송용 봉투는 매일 투표가 끝난 후 해당 구·시·군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우편으로 보내진다.
자신의 선거구에서 사전투표를 할 경우에는 투표지만 투표함에 넣으면 된다. 이 투표함은 관할 구·시·군 선관위 청사 내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별도 장소에서 선거일 오후 6시까지 보관된다. 사전투표함은 선거일 당일 투표가 마감되면 일반투표함과 동시에 개표된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을 받아 생활치료센터에 격리된 유권자들은 센터 내에 마련된 8곳의 사전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다. 격리자를 위한 사전투표소는 서울 1곳, 경기 1곳, 대구 1곳, 경북 5곳에 설치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유권자들이 코로나19 감염 우려 없이 안전하게 투표할 수 있도록 모든 사전투표소에 철저한 방역작업을 할 계획”이라며 “투표소 입구에서 발열 체크를 하고 체온이 섭씨 37.5도 이상이거나 호흡기 증상이 있는 사람은 별도 설치된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하게 된다”고 밝혔다.
모든 유권자는 비치된 소독제로 손을 소독한 후 일회용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투표하게 된다. 중앙선관위는 △마스크 착용 △투표소 내부에서 대화 자제 △1m 이상 거리 두기 △투표 전 흐르는 물에 비누로 꼼꼼하게 30초 이상 손 씻기 등 ‘4·15총선 투표 참여 국민 행동수칙’ 준수를 당부했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얼굴에 주름이 늘고 거동도 불편해진다. 고급 실버타운 시설을 찾는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생활해온 주거공간에서 노후를 보내길 원하는 시니어들도 있다. 오랜 세월을 보낸 사회적 범위 안에서 생물학적으로 약해진 노부부의 선택은 인테리어를 활용한 ‘기존 주거공간의 변신’으로 향한다.
사진 므나디자인스튜디오 도움말 박경일 대표
집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다. 외부와 내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 특히 시니어를 위한 주거공간은 내부의 안전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시니어를 위해 새로 태어난 경기도 용인의 노부부 주거공간을 살펴봤다. 242㎡ 규모의 아파트. 안전뿐만 아니라 미적, 실용적 부분까지 챙긴 시니어 하우스다.
2018년 11월 준공된 이곳은 공간구조뿐만 아니라 거창석, 실크벽지, 벤자민무어페인트, 스타코, 애시탄화목, 강마루, 2tec2, 무늬목 등의 자재로 80대 노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일상생활이 제한된 할아버지를 위한 배려가 돋보였다. 이들 부부의 생활 패턴에 맞춰 주거공간을 새롭게 꾸민 박경일 므나디자인스튜디오 대표의 설명을 들어봤다.
◇한국적 아름다움을 품은 공간
이들 노부부의 경우 할머니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거동이 힘들어 휠체어를 이용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부부는 요양보호 시설에 가는 걸 원치 않았고 현재 사는 주거공간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걸 선택했다. 또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개인공간을 필요로 했으며 실내에서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구조를 기대했다. 안전성과 실용성이 녹아든 디자인을 기본적으로 원했다. 노부부의 요구를 반영한 인테리어에는 설계 1개월과 공사 2개월, 총 3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 비용은 가전제품을 포함해 약 2억 원이 들었다.
먼저 실내 콘셉트는 한국적인 분위기를 따랐다. 10년 후쯤 노부부의 딸이 지내야 할 집이었기에 양측의 취향을 모두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적인 분위기를 고수하는 노부부와 동양화를 전공한 딸. 의외로 콘셉트가 잘 맞아떨어졌다. 기존에 부부가 사용하던 고풍스런 가구를 최대한 살려 동양의 멋이 느껴지는 오리엔탈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동양화를 벽에 걸면 분위기가 한층 살아날 수 있도록 인테리어 감각도 더했다. 박 대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옛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통해 안정감을 느낀다”면서 “부부의 손때가 묻은 가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실내 이동거리는 최대한 짧게
할아버지를 위한 공간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할아버지는 평소 컴퓨터가 있는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서재에 늦은 시간까지 있다가 침실로 가는 동선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잠자리에 들려면 서재에서 나와 옆방인 침실로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서재와 침실 사이의 벽을 없애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불편한 다리로 힘들게 걷지 않아도 침대로 바로 갈 수 있도록 편의성을 살렸다. 동시에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겪던 불편함도 없앴다. 나이가 들면 화장실을 자주 이용하게 되는데, 침실에서 나와 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다. 하지만 벽을 없앤 후에는 서재 안에 있는 화장실로 바로 이동할 수 있어 이 문제가 자연스레 해소됐다. 화장실로 향하는 위치에는 밤에만 작동하는 센서등을 설치해 동선을 밝혔다. 눈이 부셔 잠이 깨지 않도록 3와트 이하의 등을 선택했다. 또 서재에 있는 텔레비전을 침실에서도 시청할 수 있게 되면서 만족감을 더했다.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했지만 천천히 걸어다는 정도의 운동을 하고 싶어 했다. 텔레비전이 있고 소파가 있는 거실의 용도는 그대로 살리고 할아버지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핸드레일을 이용해 동선 공간을 살려주고 발코니를 통해 외부와 공유하는 느낌을 받도록 했다. 박 대표는 “마치 밖에 나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특별한 공간으로 꾸미려고 신경 썼다”며 “어르신들은 새로운 동선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좁더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꾸미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구석까지 꼼꼼히 신경 쓴 배려
주거공간 벽면에 설치된 핸드레일이 시선을 끌었다. 사실 박 대표의 설명을 듣기 전까진 핸드레일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레일 안쪽에 간접등을 넣어 누가 봐도 조명처럼 보였다. 집 안에 핸드레일이 있으면 미관상의 단점이 있지만 오히려 화려함을 뽐냈다. 또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곳에는 촉감 좋은 애시탄화목으로 핸드레일을 만들어 노부부의 안전을 배려했다.
바닥의 단차를 없앤 부분도 눈길을 끌었다. 할아버지를 위한 배려였다. 턱이 있으면 휠체어로 이동하기도 쉽지 않고 행여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어 모두 제거했다. 현관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는 곳에는 턱을 없애는 대신 천장에 조명을 설치해 현관과 실내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편하게 앉아 신발을 신고 벗을 수 있도록 벤치를 준비했다.
다만 욕실에는 문턱을 설치하고 여닫이문을 달았다. 시니어 하우스의 경우 여닫이문보다는 미닫이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 대표는 “미닫이문은 소음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닫을 때 나는 소리를 줄이려면 문과 틀의 간격을 더 넓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방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부부라고 해도 화장실을 이용할 때 민망할 수 있다는 것. 또 청소를 하더라도 턱이 있기 때문에 물이 넘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문을 바깥쪽으로 열도록 해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문으로 떨어지거나 슬리퍼가 걸리는 문제도 없앴다. 이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는 통로를 넓히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화강암의 일종인 거창석(대중목욕탕 바닥재)을 사용한 것도 특별해 보였다. 욕실 주변으로도 핸드레일을 설치했고 욕조 대신 히노키탕을 매립해 언제든 피로를 풀 수 있도록 꾸몄다.
주방에는 거실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프레임을 놓고 이를 통해 거실과 마주하며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주방은 할머니에게 맞는 치수로 설계했으며 주방 바닥은 섬유의 질감을 살린 비닐바닥재를 사용했다. 또 위험한 가스레인지는 떼어내고 인덕션을 달았다. 조도를 더 확보하고 화재감지기까지 설치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품격을 담은 나만의 생활공간
할머니의 공간도 품격 있는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기존의 공간은 응접실과 파우더룸, 침실이 따로 있었으나 이곳을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침실에서 파우더룸을 지나 응접실로 향하는 구조로 재설계됐다. 우선 응접실은 나무로 된 평상 느낌의 마루를 설치해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주는 공간으로 바꿨다. 바깥 풍경이 자연스레 실내로 스며들어 외출을 하지 않아도 밖에 나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응접실은 작은 사랑방 같은 느낌으로 손님들과 앉아서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설계했지만 이후 할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때는 용도를 변경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요양보호사가 머무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침실에 문을 설치해 할머니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는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박 대표는 “이 주거공간의 특징은 가변성이다. 시간이 지나 몸이 더 불편해지면 언제든지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며 “이는 벽을 없앤 또 다른 이유인데, 벽을 터 넓어진 통로 한쪽에 경사로를 확보하면 몸이 불편해도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는 시니어 하우스가 있다. 이런 집은 모두를 위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미적인 부분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감각적인 홈 스타일링을 위해 신경 쓰고 있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집을 만들기 위해 더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니어 하우스 ‘三不’
미닫이문 미닫이문에는 문을 부드럽게 닫을 수 있는 댐핑기능이 적용된다. 문이 닫히는 시점에 마찰력을 더해 속도를 줄이는 기능인데, 손이 끼어 다치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문을 완전히 닫거나 열 때 힘이 많이 들어가는 단점이 있다. 문을 선택할 때도 기력이 부족한 어르신을 배려해야 한다.
너무 밝은 조명 조명은 최대한 광원을 안 보이게 하는 게 좋다. 매립등이나 간접등이 도움이 된다. 균일한 조도로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국부조명도 음영이 생기기 때문에 지양하는 편이 좋다. 또 거실의 화려한 샹들리에도 어르신에게는 눈에 피로감을 줄 수 있다.
대리석 자재 나이가 들면 아무리 안전한 공간이라 해도 넘어질 수 있고 크게 다칠 수 있다. 따라서 미끄럽고 단단한 대리석으로 품격을 살리기보다는 코르크 재질의 마루를 바닥재로 사용하는 게 좋다. 특히 무릎이 불편한 어르신이 있다면 6㎜ 두께의 장판이 적합하다. 집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집의 본질을 왜곡해선 안 된다.
☞박경일 므나디자인스튜디오 대표
동대문 위메프 오프라인 1호점, 청담동 마담주 – Premium Fruit Boutique, 가로수길 필그림 커피, 마두동 강촌마을 아파트, 하계동 장미아파트 외 수도권 아파트 다수 설계.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암 투병을 했다.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었다니 실로 격렬한 싸움이었을 게다. 음산한 죽음의 공기를 숨 쉬며 처절하게 견뎠을 게다. 알고 보면 하등에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게 죽음이라는 고상한 소식도 있지만,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본능이지 않은가. 한때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려했었다는 이윤경(56) 씨는 불굴의 의지로 결국은 10여 년 만에 암을 물리쳤다. 투병 후반의 귀농이 일종의 묘약이었다.
인생이란 미스터리. 암과 조우하게 될 줄을 어이 알았겠는가. 지독한 지뢰가 매설된 게 삶이라는 전선(戰線)임을 어이 짐작했겠는가. 고난이 깊고 길어 하늘도 땅도 어두웠겠지. 그러나 다 지나갔다. 투병을 통해 세상을 건너는 방법을 터득한 덕일까. 이윤경 씨의 귀농생활엔 별다른 결함이나 한숨이 없다. 공연스레 지지고 볶는 강박이 없으며, 불확실성을 명백한 특징으로 하는 농업을 여우처럼 노련하게 운영해온 결과 딱히 내세울 만한 실패 기록이 없다. 귀농의 보편적 실정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이미 다 안다. 그게 험악한 고행이라는 것을. 오직 그녀만이 예외라 쳐도 무방할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윤경 씨가 평택시 외곽의 시골로 귀농한 건 2013년, 암 투병 말엽. 방사선 치료 30회와 항암제 투약 등, 양방을 통해 해볼 건 다 해본 뒤의 귀농이었다. 항암에 좋다는 약초를 찾아 손수 재배해 먹는 자연요법으로 완치를 앞당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 하나를 품고서였다지. 사전 준비는 그지없이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유능한 약초를 찾아내기 위해 국내외 자료를 섭렵했고, 재배 현장을 견학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귀농지 물색에도 남달리 신중한 공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자그만 텃밭에다 갖가지 약용작물을 시험 재배, 생육의 양상을 관찰하며 재배 기술을 익혔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건 남편 최창학(59) 씨였다. 국어교사였던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사표를 던지고 충직한 신하처럼 충성을 다했다. 그러하니 이 부부의 노정기는 차라리 멜로드라마. 뒤돌아보면, 아마도 모든 게 사랑이지 않을까.
“긍정적인 생각을 놓지 않도록 남편이 저를 자주 세뇌했어요. 농사 근육이 없는 남자임에도 관절이 망가지도록 농사에 열성을 다했고요. 덕분에 좋은 결과가 왔지요.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으니까. 지금은 1년에 한 차례씩 추적 관찰을 위해 병원을 찾을 뿐이에요.”
“10여 년에 걸친 투병의 고통과 고독이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가혹한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어요. 온몸 열여덟 곳으로 전이가 돼 강도 높은 항암치료를 받아야만 했어요. 거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의 몰골로 지낸 시간이 길었지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연일 이어지는 불면증이 가장 괴로웠어요. 우울증도 심했고요.”
“애초 기대했던 자연 요법의 효과로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보시나요?”
“기대 이상의 효험을 봤다고 생각해요. 몸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운동 이상의 노동량을 감당하기 시작했는데, 그 역시 치유에 가속을 붙여줬던 것 같아요. 완치 판정을 받은 뒤로는 매사에 자신감이 생겼지요. 특히 약용작물 재배의 유익함, 즉 곤경에 처한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농사라는 것, 따라서 그게 유망한 농업일 거라는 판단을 했던 거예요.”
“부부 공히 농사 초심자였죠? 그럼에도 유망한 농업 장르라는 걸 대뜸 찾아냈군요.”
“소소한 시행착오가 없진 않았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했어요. 제가 약으로 먹기 위해 텃밭에 시험 재배했던 초기의 경험을 기반 삼아 본격적인 사업으로 확장해나갔어요. 남들이 흔히 하지 않는 새로운 트렌드의 작물들을 발굴해나간 게 적중했고요.”
연간 순소득 1억 원
창의(創意)라는 것. 기존에 없었던 기발한 고안의 힘이라는 것. 이윤경 씨 내외는 이 매력적인 기제를 농사에 도입했다. 강장(强壯)과 치병에 좋다는 약용작물을 집약적으로 재배할 경우 승산이 충분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썩 괜찮은 약용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장으로 입소문이 나며 성장세를 탈 수 있었다는 게 아닌가. ‘다믈농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농장의 규모는 약 4500평. 이 중 3분의 1쯤 되는 부지에 온갖 작물을 재배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산 첫 작목은 스테비아. 남미가 고향인 이 국화과 다년초는 설탕보다 200~300배 정도 달지만 혈당에 영향을 주지 않는 특성이 당뇨병 환자에게 효용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윤경 씨는 이 스테비아를 재배+ 생산해 독특한 성과를 거두었다. 몇몇 매체에 소개되면서 신생 농장의 존재가 단박에 부각됐던 것. 이후 너도나도 스테비아 농사에 뛰어드는 바람에 시장성이 악화됐지만 그녀에겐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이후 더욱 박차를 가해 다종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해나갔다. 뉴욕타임스가 20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선정한 히카마, ‘기적의 식물’이라는 모링가, ‘페루의 인삼’으로 통하는 마카, 샛노란 과일이 달리는 구아바, 삼채 등 똘똘한 외래종 약용식물을 비롯해 블루베리, 체리 같은 과수와 상추·고추·오이·작두콩·수세미 따위의 갖가지 채소류를 기르고 있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의 다작을 해왔다 하니 햐! 놀랍다.
“새롭고 뛰어난 작물을 발굴하기 위해 늘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어느덧 수백 종으로 작물 수효가 늘었죠. 대별하자면, 특용작물과 과수, 그리고 양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봉까지? 부부가 모든 일을 전담하는 거예요?”
“그렇죠. 인건비에 돈을 쓰지 않으려면 직접 해내는 수밖에 없으니까. 애환이 많았어요. 새 작물 재배에 실패하기도 했고, 종묘 업자에게 속기도 했어요. 예초기 사고로 남편의 시신경에 손상도 왔었고, 농기계를 다루다 뼈가 바스라지기도 했지요. 저는 벌에 쏘여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어요. 팔뚝이 몸뚱이보다 더 크게 퉁퉁 붓던걸요.(웃음)”
“농산물 가공 작업과 판로 확보 문제도 쉽지 않겠죠?”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지요. 가령, 하나의 새 작물을 선정했다 할 경우, 우선은 재배에 성공해 수확을 해야 합니다. 수확 뒤엔 생물로 팔 것인가, 가공 판매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죠. 가공엔 손이 많이 가는데, 건조 분쇄를 하고, 디자인과 스티커 작업을 통한 소포장을 마친 뒤 완제품검사 대행업체에 보내 품질검사를 의뢰해요. 거기서 합격성적서가 나오면 비로소 판매에 나서는 거죠. 결정적인 건 역시나 판로 문제이지요. 저희는 주로 SNS나 로컬푸드마켓,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고객들을 통해 거의 완판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연간 1억 원 정도의 순소득을 올리고 있지요.”
이런! 드문 고소득이다. 당연하게도 인근 농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음마야, 항상 요상한 것만 가져와 기른다!” 그렇게 눈총을 주던 이웃들이 이젠 덩달아 약용작물 재배에 나서기도 한다지. 이윤경 씨는 향후 농장을 본때 있는 사회적 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 당찬 여자의 외양은 여려 보인다. 그러나 내부에선 수학을 전공한 사람다운 기민한 두뇌와 긴 투병 과정에서 육화한 근기와 깡이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귀농 초기의 개척자적 근성을 지속한다는 건 만만한 내공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일에 대한 욕심, 성공에 대한 집념, 이 자체가 그녀의 재능일 테고. 감정의 소모와 분산을 허하지 않는 내성적 성격도 재주일 테고.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부지런한 근로와 연구로 농장의 생산성을 드높이는 남편은 그녀가 보유한 최적의 자산이겠지. 아내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몸 바쳐 이바지한다는 게 아닌가. 그녀 역시 남편을 사랑스러운 일꾼으로 부리기에 다시없는 재목으로 간주한다. 배우자란 흔히 암암리에 상대방의 행복을 앗아가는 음흉한 존재. 이 부부의 유대는 빛깔이 다르구나.
“낮잠을 자본 게 언제였지?”
“남편은 새벽부터 밭일을 시작합니다. 워낙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이에요. 반면 저는 ‘저녁형 인간’인지라 조용한 밤 시간에 가공 작업을 주로 맡아 해요. 어느 정도 분업화가 된 셈이죠. 그런데 우리 남편은 행운아예요. 제가 경제 문제를 알아서 다 관리해왔으니까요.(웃음)”
“부군께서 말하길, 아내가 너무도 알뜰한 나머지 구두쇠로 산다는 거, 그게 문제점이라 하더군요. 좀 누리며 사는 게 좋지 않나?(웃음)”
“일찍부터 몸에 밴 습성일지도요. 남편이나 저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정말 힘들게 살았거든요. 신혼살림도 단돈 200만 원으로 시작했어요.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셈이지만 검소한 생활을 포기할 순 없지요.”
“일벌레처럼 산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풍겨요. 저 너른 농장과 수많은 비닐하우스, 게다가 닭과 토끼까지 기르는데 때로 괴롭지 않아요? 도시에서의 안락한 생활이 그립진 않을까?”
“아마도 주부들의 90% 이상은 귀농에 결사반대할 거예요. 그럴 만한 충분한 고충들이 있는 게 사실이고요. 어휴, 내가 왜 이러고 살지? 일에 너무 시달리다 보면 저 역시 혼자 중얼거리며 회의를 느끼곤 해요. 하지만 그게 잠시잠깐이라는 거. 아마도 행복한 비명이라는 거. 농장이 여하튼 순탄하게 굴러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시골생활의 장점이 많더라고요. 주변에서 순환하는 자연 풍경, 다채로운 방문객들과의 상담, 돌연히 펼쳐지는 즐거운 일들. 이모저모 익사이팅하게 사는 거죠. 잠이 부족하다는 게 아쉽지만.”
“만약에 내일 하루, 완전한 자유시간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죠?”
“(한참 생각하다가)하루 종일 자고 싶어요. 낮잠을 자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거든요.”
누가 그러라고 삼엄한 명령을 내린 바 없으나 그녀는 주로 일에 묻혀 산다. 이게 시간을 선용하는 그녀의 방식이다. 밝은 쪽으로 인생을 이끌어준다는 믿음에서일 게다. 하기에 잡념이나 무슨 조바심이 끼어들 리도 없겠지. 천장의 쥐 따위에는 신경 꺼! 고양이가 알아서 잡아줄 테니까! 그런 투로 잡사는 거두고 사업에만 몰두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섭섭하게도 결여된 건 삶의 여흥. 이러다가 건조한 일상에 매몰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녀는 곰곰이 궁리하다가 축제 하나를 띄웠다. 작년에 이어 올여름 두 번째 ‘해바라기 축제’를 펼쳤던 것.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축제가 필요하다 싶어 만들었지요. 농장 밭에 모종을 심어 약 2만 송이의 꽃을 피웠지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꽃 풍경이었어요. 예상외로 많은 사람이 몰려오더라고요. 첫날부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어,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지?’ 둘째, 셋째 날엔 감당이 어려워 ‘아이고 죽겠다!’ 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어요. 유료 입장이었는데 축제 사흘간 5000여 명이 다녀갔지요. 인터넷 실검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고요. 기대치를 상회하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죠. 내년엔 소공연까지 곁들인 놀이판을 펼쳐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축제 뒤 해바라기 꽃은 어떻게 쓰였죠?”
“씨앗을 탈곡해 판매할 수도 있었지만 수익성이 낮아 포기했어요. 거름으로 활용하는 게 훨씬 나아 밭에다 그냥 갈아엎었죠.”
“세상의 트렌드에 민감하게 부응, 그에 따른 적절한 아이템을 개발해내는 머리로 농장을 성장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누구나 관심을 갖는 특용 건강식품의 생산에 주력한 게 안착을 가능케 했지요. 가장 보람찬 건 환자분들이 우리 농장 제품으로 좋은 효과를 봤다는 얘기를 들을 때입니다. 저의 투병 경험을 곁들인 상담시간도 소중해요. 어쩌면 그런 보람들 탓에 일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수렁처럼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
“좋은 삶이란 어떤 거라 보죠?”
“긍정과 낙관이 있는 삶이랄까. 주어진 삶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게 잘 사는 길이겠죠.”
투병 이후, 귀농 이후, 성향과 기질에 변화가 왔더란다.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하고 싶은 말조차 하질 못했으나 이젠 와일드해졌다는 것. 강인한 태도로 삶의 모든 걸 긍정하게 됐다는 것.
이윤경 씨가 주는 귀농 Tip
•생계를 다 놓고 자연인처럼 살 게 아니라면 가급적 도시 근교로 귀농하자. 그래야 생산물 판매에 유리하다. 너무 외진 시골로 귀농했다가는 차후 철수할 상황이 발생할 때 땅을 매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농사로 소득을 올리기 쉽지 않다. 특히나, 오자마자 수익이 발생할 확률은 0%라는 걸 유념하자.
•이웃 원주민들을 무조건 존중하라. 고집과 프라이드가 강한 게 농촌 어른들이다. 배울 점도 많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마늘·파·부추·달래·흥거 등 오신채를 넣지 않고 만든 요리를 ‘사찰음식’이라 한다. 자칫 맛이 덜하거나 심심할 것이라 오해하지만, 다양한 레시피와 플레이팅을 접목하면 얼마든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여기에 우리 몸에 좋은 식재료를 활용한다면 더욱 건강한 한 상이 완성된다. 슈퍼푸드를 가미한 퓨전 사찰음식 레시피를 소개한다.
레시피 및 도움말 디알앤코 R&D총괄 장대근 셰프 스타일리스트 곽영신
장소 협찬 키프레시(롯데월드타워점)
미국 허핑턴포스트는 녹차를 건강 식재료로 꼽으며 비만 방지, 심장 보호, 면역력 증진, 노화 억제, 당뇨 예방, 기억력 강화 등 여섯 가지 효능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이는 녹차에 함유된 폴리페놀과 카테킨 성분 덕분인데, 발암 물질과 암 세포 생성을 억제하고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중장년이라면 녹차를 꾸준히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 보통 음료나 따끈한 차로 즐기지만, 잎이나 가루녹차 등을 요리에 활용할 수도 있다.
◇ 녹차수제비
재료 녹차가루, 쑥가루, 밀가루, 감자, 애호박, 멸치, 다시마, 건새우, 청양고추, 소금, 간장
1. 밀가루 200g에 녹차가루 3큰술과 쑥가루 1큰술을 넣고, 물 140㎖ 부어가며 반죽한다. 반죽이 완성되면 그릇에 담아 랩핑해(또는 위생 비닐에 넣어) 냉장고에서 15~20분 정도 숙성시킨다.
2.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감자 1/2개와 애호박 1/2개를 깨끗이 씻어 2cm 정도 크기로 썰어 둔다.
3. 냄비에 물을 적당량 넣고 멸치 2개, 다시마 1개, 건새우 2개를 넣어 육수를 낸다. 이때 물은 조금 넉넉히 넣는 것이 좋다.
4. 육수가 우러나면 재료를 건져내고, 준비해둔 야채를 넣어 5분 정도 끓인다.
5. 불을 약하게 줄이고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는다. 반죽을 다 넣으면 다시 불을 세게 한 뒤 청양고추 1개를 어슷썰기해 곁들인다.
6. 소금 1/2큰술, 간장 1큰술을 넣어 간을 맞추고, 청양고추를 건져낸 후 그릇에 옮겨 담는다.
◇ 녹차설기
재료 녹차가루, 쌀가루, 흑설탕, 밤, 검은콩, 대추, 아몬드슬라이스
1. 쌀가루 2컵을 체에 걸러준 뒤 녹차가루 4작은술과 물 3큰술을 넣고 비벼준다.
2. 반죽 가루를 중간체에 한 번 더 걸러준 뒤 흑설탕 50g과 섞는다.
3. 찜기에 키친타월을 깔고 시루 틀을 올려 준비한 반죽 가루를 붓는다. 그 위에 밤, 검은콩, 대추, 아몬드슬라이스를 올려 20분간 쪄준다(시루 틀은 7분 뒤에 미리 뺀다).
4. 20분이 지나면 불을 끄고 5분 정도 뜸을 들여 마무리한다.
◇ 녹찻잎 무말랭이 무침
재료 말린 녹찻잎, 무말랭이, 찹쌀가루, 까나리액젓,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꿀, 깨
1. 무말랭이 100g을 세 번 정도 깨끗이 씻어 헹군 뒤 말린 녹찻잎 반 줌과 15분간 물에 불린다.
2. 재료를 불리는 동안 고춧가루 2½큰술, 까나리액젓 2큰술, 진간장 1큰술, 꿀 1/2큰술, 찹쌀가루 4작은술을 섞은 뒤 물 60㎖ 부어가며 양념찹쌀풀을 만든다.
3. 불린 재료의 물기를 짜주고 고춧가루 1큰술, 까나리액젓 1큰술, 꿀 1큰술을 넣어 버무린다.
4. 간이 밴 재료에 양념찹쌀풀을 넣고 무친다.
5. 무침에 참기름 1큰술과 깨를 뿌려 완성한다.
그는 자유 해방의 흰색 날개를 몸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하늘로 날아올라 들국화 만발한 넓은 들판을 밝은 눈으로 보게 되리라. 매년 가을 러시아의 거장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쯤은 만나봤을지 모를 기러기들을 보러 철원으로 떠난다는 90대 청년. 캠핑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고 우주를 품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진정한 캠핑 선구자 박상설(朴相卨·91) 씨를 만났다.
지하철 1호선 양주역에서 내려 또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리니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캠핑과 함께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박상설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서가에는 캠핑과 관련한 각종 서적들과 심리학 책 등이 보였다. 방 안에는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 입을 등산복들이 걸려 있었고, 강의할 때 사용하는 프로젝터와 각종 캠핑 도구들이 곳곳에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세월을 가늠케 하는 책처럼 90년 넘게 살아온 이 남자의 이력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칼럼니스트, 자연과 삶의 전문기자, 기계기술사 등 명함에는 다양한 직업이 적혀 있었다.
사색하는 아버지와 자연 속으로 여행하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캠핑 장소는 소양강변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박상설 씨는 법무사였던 아버지 덕에 불편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법원을 드나들다 보니 일본인 판검사들과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그들은 통역이 가능한 아버지를 자주 찾았어요. 그들과 관계를 하면서 일본의 캠핑 문화를 접하게 된 거죠.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섯 살 무렵에도 아버지와 함께 캠핑을 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쓰는 큰 타프 있잖아요? 해 가리개요. 그걸 강가에 친 뒤 그 아래 평상을 놓고 모기장을 쳤어요. 아버지는 낚시도 하고 책도 읽으시고요. 텐트 치고 여름을 즐기는 집은 당시 우리 집밖에 없었을 거예요. 캠핑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습관이 생기잖아요.”
인문학을 좋아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책이 즐비한 도서관이 아닌 대자연 속이었다. 그 뒤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출신인 박상설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육군 공병으로 입대했다.
“미군에서 지원해준 불도저나 글라이더 같은 중장비를 다루는 유일한 공병 중대였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총 들고 싸울 때 저는 대한민국의 길을 닦았어요. 텐트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동해 다녔고, 중대장이 된 뒤에는 미군용 CP텐트를 썼는데 꽤 컸어요. 난로와 침대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들은 천막생활을 모를 때였죠. 군대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텐트생활이 가장 좋았다고 말합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다. 집은 그에게 있어서 어두컴컴한 박쥐 둥지였다. 박쥐가 사는 곳은 아무리 좋아도 답답한 동굴 속이다.
“박쥐 둥지를 떠나게 해준 것이 텐트였죠. 그리고 책도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하이네, 루소의 책을 읽다 보니 캠핑의 의미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캠핑을 해서 그런지 집에서 사는 게 제일 싫었어요. 특히 기와집이요. 그래서 노마드 보헤미안이 되고 말았죠.(웃음) 풀벌레 소리와 빗소리가 저는 정말 좋습니다.”
인문학과 정서가 스며야 진정한 캠핑이다
캠핑 인구가 100명도 안 됐던 시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듯 조금씩 캠핑 문화를 만들어갔다. 한국에 오토캠프의 씨를 뿌린 사람도 박상설 씨였다. 하지만 캠핑이 이뤄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의 깨달음에도 집중한다고 했다.
“남이 하니까 부러워서 좇아다니는 것은 캠핑이 아니에요. 텐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를 품은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안에서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저는 텐트를 친다고 표현하지 않고 품는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의 스캔들이나 세상 떠도는 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그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의해 사는 거죠.”
박상설 씨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호텔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친척집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는 일이 생겨도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잔다.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라고 하지만 고사한다. 그는 건물 속에서 자는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인다고 했다.
“사막에는 꼭 가봐야 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수많은 별이 쏟아집니다. 알래스카 자작나무 밑에서도 자봐야 해요. 호수가 참 많은데 아침에 일어나서 모닥불 피우고 커피 한잔하고 있으면 사슴이 다가와 5분이고 10분이고 서서 먼 산을 쳐다봅니다. 그 정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캠핑 문화는 알프스 사람들의 목가적 생활에서 시작됐습니다. 알파인 문화라고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의 캠핑은 알파인 문화를 알고 정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따라 하면서 장비 자랑하러 다니는 것 같아요. 목가적인 여유를 즐겨야 하는데… 캠핑장도 너무 갑갑해 보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캠핑장 안 텐트의 간격이 너무 좁아요. 오토캠핑을 제가 소개했지만 이렇게 변형되어 참 안타깝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한 캠핑
군 생활 10년 동안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종전 후 밥벌이를 못하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누나와 여동생까지 공부시키고 시집보내야 했다.
“그때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군대 월급이
1만5000원밖에 안 될 때였습니다. 제가 벌어먹여야 하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열세 명이나 됐어요. 부업으로 학원 선생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 10만 원 받을 때 저는 50만 원 받는 실력 있는 강사였습니다.”
아무리 벌고 또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동안은 죽을 생각에 호주머니에 늘 나일론 끈을 넣고 다녔다.
“그때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고 자연에 대해 알게 됐어요. 죽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끈을 버렸어요.”
196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제대한 후에는 신흥건설종합설계회사에서 근무했다. 당시 부업으로 용산구 보광동 지역 토지를 외상으로 구입해 건설자재 후불 조건으로 15평짜리 집 10채를 지어 큰 수입이 생겼다.
“뭘 할까 고민하다 땅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평당
5원 하는 가평의 임야 30만 평을 매입했는데, 캠핑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주말농장 운영과 함께 인문학 강의도 하면서 지냈어요. 서른일곱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54년이 됐네요.”
‘캠프나비’라고 이름 지은 그의 농장은 현재 강원도 홍천에 있다. 2000평이나 되는 농장에는 들국화도 피고 각종 채소와 과일들이 자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열린다. 인문학 세미나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잘 지은 건물은 없다. 비닐하우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와 어른이 만나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잘 때는 농장 곳곳에 텐트를 친다. 틀에 짜인 도시형 캠핑은 거부한다. 참된 자유를 알고, 본성 찾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죽기로 했다
그는 지금도 가끔씩 캠핑을 즐긴다.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미루지 않는다. 91세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면 사람들은 그의 자식들에게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아갑니다. 혼자 산 지 33년 됐어요. 이제는 식구하고도 같이 못살죠. 제 자식들과 손주들도 캠핑을 좋아합니다. 대기업 다니는 손주는 결혼 비용을 아껴 주말농장을 샀어요. 우린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요. 아흔 살, 백 살이 되면 이렇게 살아야지요. 왜 내가 아들네 집, 딸네 집에 가서 살아야 하나요.”
박상설 씨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넘어갔다 왔다. 환갑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그의 건강을 다시 찾아준 것은 의술이 아닌 캠핑이었다.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펴졌다. 자신감이 되살아났고, 길 위에서 삶의 방향을 잡고 살아왔다.
“나이가 아흔하나면 세상 떠나는 날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모레가 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죽죠. 지금 내가 이렇게 떠들지만 오래 살아봐야 백 살이겠죠. 9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는 82세에 집을 나간 뒤 길을 걷다가 빈촌의 기차역장 집에서 폐렴으로 열흘 만에 생을 마감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해줬다.
“얼마나 멋진 죽음이야. 물론 톨스토이를 흉내 내려는 건 아니에요. 아들딸들도 내가 걷다가 죽기를 원할 거야. 충분히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여행할 때마다 시신기증등록증과 약간의 돈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죽으면 제 몸은 대학병원 해부학 교실로 들어가요. 그럼 영안실이 필요 없겠죠.”
주변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알리지 말고, 조의금도 받지 말고, 제사상도 차리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딸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하고 물었단다.
“제가 가을에 핀 들국화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길을 걷다가 야생 국화를 보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스쳐가듯 가끔씩 생각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캠핑은 인생에서 우러나와야만 제대로 발현되는 정서 운동입니다. 일평생 하고도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캠핑입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이빈섬 시인이 작고하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나는 휴대폰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지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던 곳은, 분재목(盆栽木)을 경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매화나무 몇 개를 찾아 비딩(bidding)해놓고 수시로 응찰하는 경쟁자들과 가격 경합을 벌이고 있었죠. 저녁답부터 시작했는데 자정 무렵까지 계속됐습니다. 막판엔 응찰 속도도 빨라져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죠. 문득 엉덩이 쪽이 배겨서 자세를 바꿔 앉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전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던 잔기침 소리가 멎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앉아 있었던 곳은 병상 옆 의자였고, 어느새 아버지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계셨지요. 어둑한 자리에서 희끄무레한 벽을 응시한 채 나무토막처럼 움직임이 없었죠. “아버지, 잠이 깨셨어요?” 막, 잘생긴 매화나무 한 그루가 내 것이 되기 직전이었는지라, 건성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나직이 대답했죠.
“혹시 화장실 가고 싶으셔요?” 링거 줄들이 어른거리는 쪽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는 그 얼굴을 흘깃 본 뒤, 내 눈은 급히 휴대폰 모니터로 향했고 나는 버들처럼 늘어지는 수양매화 한 그루를 낙찰받았습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건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아내와 교대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죠. 호흡곤란이 왔는데, 병원에서는 막힌 식도(食道)를 넓히려 넣은 스텐트(stent)가 뒤쪽 기도(氣道)를 압박해 숨 쉬는 통로가 좁아진 탓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음식이 들어가는 길과 공기가 드나드는 길이 하나의 벽을 두고 그렇게 뚫려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투명 주머니와 연결된 비닐 줄들을 달고 의식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더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며칠 지나면 호전될 거예요. 그 뒤엔 다시 병실로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러나 며칠 뒤 의사도 당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호흡기를 뗐는데 갑작스럽게 숨이 꺼져버리고 만 거죠. 인턴들이 미친 듯이 아버지의 가슴을 눌러댔지만 호흡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숨지다’라는 말이, 얼마나 사무치는 말인지,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의 어머니(아버지에 이어 몇 달 뒤 어머니도 돌아가셨죠)는 아버지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아이고, 우리 영감. 작은아들 때문에 이때껏 사는 건 줄 아쇼.” 그때 어머니 눈앞엔 8년 전의 일이 스쳐지나갔을 겁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식도암 판정을 받았다며, 서울의 큰 병원을 알아보라며 숨넘어갈 듯 내게 전화하신 어머니. ‘평생 웬수’라며 끌탕하던 평소와는 달리, 몹시 떨리는 음성이었죠. 그해 말 아동댁네(어머니의 택호(宅號)) 식구들이 동해안 포구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행여 아버지가 우리와 좋은 한때도 없이 훌쩍 가실까봐 걱정한 형의 제안으로 급조한 행사였지요.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당신이 암인 걸 모르셨기에,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모인 것이 그저 좋아서 연신 껄껄 웃으셨고… 아버지 웃음에 어머니는 슬쩍슬쩍 고개를 돌려 눈시울을 닦아내셨습니다. “천지를 모르는 영감 같으니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시면서요.
당신도 모르는 이별여행을 하고 온 뒤, 놀랍게도 아버지의 식도암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최신 기술이 좋았나봅니다. 엑스레이 치료로 암종(癌腫)을 태워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이죠. 서울에서 병원생활을 마치고 경주로 귀향한 아버지는 다시 게이트볼장으로 나가셨고, 날마다 막걸리에 불콰해진 얼굴로 귀가하시곤 했죠. 그렇게 6년 여 동안 평화로운 시절이 흘러갔습니다. 그 뒤의 상황은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니 그만 떠오르고 마네요. 어느 날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식도가 막혀 일주일가량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 때문이죠. 서울역에서 뼈만 남은 손을 쥐었습니다. 마른 하회탈 같은 얼굴로 아버지는 웃고 있었지만, 둔한 내 마음에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죠.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 아무리 씹고 꿀꺽여도 삼켜지지 않는 음식 한 숟가락을 식도 저 안쪽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아파트 복도를 몇 차례나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내려가지 않는 음식을 끝내 뱉어내며 미안해하시던 그 얼굴. 옆에 앉은 자식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습니다. 이후 실낱같은 희망과 대못 같은 절망이 교차한 뒤 경황도 없이 아버지를 보냈습니다.
그날 밤, 매화를 구하려 그토록 경매에 열중했던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외면하려, 꽃 피는 생명을 희구한 엉뚱한 입덧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때 사들인 매화는 그 겨울을 넘기고 해사한 흰 꽃을 피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찬란한 봄날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영천 국립묘지의 작은 분(盆)에 든 채, 생전의 속 좋은 그 웃음을 흩고 계셨지요. 매화는 다시 피지만 사람은 다시 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토록 아프게 깨달으라고…. 그날 나는 왜 실없는 해찰을 하며 어둠 속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더 살펴보지 못했을까요.
막 군대를 다녀온 막내아들이 어쩐지 버거운 느낌이 들 때, 내게 그토록 과묵하게 대했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며느리보다도 더 어색해했던 아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있었습니다. 뭐랄까, 우리는 어느 날부터 서로의 마음을 불러낼 화제(話題)의 실마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죠. 오래전 아버지의 인생 실패를 굳이 꺼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늘그막에 어머니에게 죄지은 사람으로 사죄하듯 사신 것도 압니다. 먹고사는 일보다 고통스러웠던 건, 주변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의 납덩이같은 무게였습니다.
얼마 전 벌초를 갔을 때, 주위를 떠나지 않던 호랑나비 한 마리를 생각합니다. 나비는 사람의 영혼을 품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날 어쩐지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이승의 모든 것 다 내려놓으셨을까요. 나비처럼 가벼이, 또 다른 시간의 허공을 나붓나붓 날고 계신 걸까요. 아닙니다. 아버진 아무래도 여기 계신 듯합니다. 내 안에 말입니다. 여기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나비보다 더한 아버지의 화현(化顯)이 아닐는지요. 내년 봄날 매화꽃 피는 날, 호랑나비로 다시 오셔도 좋습니다.
이빈섬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태생, 본명은 이상국이며, ‘이빈섬’이라는 필명으로 등단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자 시인, 스토리텔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옛사람들의 걷기’, ‘눈물이 빗물처럼’, ‘추사에 미치다’ 등이 있다.
47년 전통 ‘봉산찜갈비’
대구광역시청 인근 ‘동인동 찜갈비골목’은 지역민을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대표 먹자골목이다. 달달한 간장양념 갈비찜이 아닌, 매콤한 마늘양념 ‘찜갈비’를 맛볼 수 있다. 그중 터줏대감으로 알려진 가게가 바로 ‘봉산찜갈비’다. 원래는 인근 건설 노동자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던 국숫집이었는데, 고기를 찾는 손님들이 생기며 현재의 찜갈비가 탄생하게 됐다.
육체노동이 심한 이들의 몸보신을 위해 소갈비를 주재료로, 무더운 대구 날씨에 잃은 입맛을 찾아줄 매콤짭짤한 양념을 더했다. 여기에 다진 마늘도 듬뿍 넣는다. 별다른 고명이나 꾸밈새 없이 양푼냄비에 담아내는데, 과거 국수를 말아내던 그릇을 그대로 사용한다. 올록볼록 양푼냄비에 새겨진 세월의 주름만큼이나,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나눈 단골이 많다고. 창업주인 어머니 이순남 여사의 아들인 2대 주인장 최병열(50) 씨가 가업을 잇게 된 것도 바로 그 ‘추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학과 직장을 서울에서 다녔어요. 마흔이 되니 이제 내려와 가게를 물려받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하고 싶었지만, 외아들이라 의무감으로 일단 1년은 서울에서 오가며 손님을 맞이했는데 그러면서 마음이 달라졌죠. 우리 가게를 사랑하고, 추억을 안고 찾아오시는 분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봉산찜갈비가 사라진다면 그들의 추억도 사라진다 생각하니 책임감과 사명감이 움트더군요. 결국 이듬해에 대구로 내려와 일을 제대로 시작했죠.”
그때의 마음을 되새기며 최 씨는 ‘추억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가게의 명맥을 잇고자 한다. 더불어 ‘음식은 소통’이라는 생각으로 함께 오는 손님들 간 기분 좋은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요즘은 외식하러 와도 휴대폰만 보느라 서로 대화가 없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그나마 술자리에서 대화가 잘 오가기 때문에 저희는 어떤 술을 가져오시든 코르크 차지를 받지 않아요. 즐거운 추억을 만드셨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인생 성공의 척도는 ‘돈보다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최근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요즘 카페에서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을 하듯, 비오는 날 비닐 대신 바람으로 우산 물기를 제거하는 기계를 놓는 등 작은 실천을 해보고 있어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안 먹는 반찬을 돌려주는 손님에게 그만큼의 다른 보상을 드리는 등 새로운 방법도 계속 고민하고요. 지금의 환경은 미래 후손들에게 빌려 쓰는 거잖아요. 훗날 자녀들에게 봉산찜갈비와 함께 좋은 환경까지 물려주고 싶습니다.”
대구1호선 칠성시장역 3번 출구 도보 9분
주소 대구시 중구 동덕로36길 9-18
영업시간 10:00~22:00 (명절 휴무)
대표메뉴 찜갈비, 갈비살 찌개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