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당신이 파리를 다녀간 이후 내 마음이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착잡하군. 당신이 날 만나기 위해 파리에 머문 두 달 동안 내게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던 것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심란스럽고. 당신이 어떤 노력을 했든 간에 난 당신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당신이 내 집을 어찌어찌 알고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해도 난 안 열어주었을 거니까.
이봐요, 우린 이미 헤어진 사람들이라고. 깨진 접시를 붙인다고 붙여지나? 우리가 헤어진 지 올해로 꼭 10년째인데, 전해 듣기엔 일부러 그 시기에 맞춰서 나를 찾아왔다고? 당신은 나보다 에너지가 많고 집요하고 집착도 강한 성격이라 나와의 만남도 이벤트성으로 하고 싶었던 걸까? ‘이혼 10주년 기념 재회’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말이지. 그러면 내가 감동할 거라 여긴 건가? 아, 오해 마. 빈정대는 투로 들렸다면 그건 오해야. 당신이 갑자기 파리에 나타난 것이 그 정도로 뜬금없었다는 뜻이니까.
당신이 날 보러 오겠다고 미리 말했다간 내가 인근의 독일이나 스위스로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나? 그래서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건가? 이봐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 집으로 찾아왔다 해도 난 안 만났을 거야. 그러니 알리고 왔다 해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어. 내가 어디로 도망갈 일은 절대 없었을 거란 말이지.
물론 놀라긴 했어. 아침에 출근해서 막 하루 업무를 시작하려는 순간,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뜨길래 무심코 받았는데 당신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으니. 너무 놀라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순식간에 끊고 나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지. 여하간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니까. 게다가 지척에서 걸려왔으니. 난 서둘러 당신의 전화번호를 차단했어. 전부터 끊어뒀던 메일이나 SNS 잠금장치도 다시 점검하고. 당신의 한 점 목소리, 한 줄 문장이라도 새어 들어올세라….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참 적극적인 여자야. 나 같으면 절대 그렇게는 못 했을 것 같은데.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전혀 생소한 곳임에도 내가 다니는 회사와 아주 가까운 장소에 숙소를 정하고, 또 바뀐 전화번호는 어찌 알고 당돌하게 연락을 취해왔으니. 물론 당신도 내 전화번호를 누르기 전 적잖이 긴장을 했겠지만…. 여하간 당신은 원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야. 인정!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그래, 한국은 잘 돌아갔는지? 벌써 두 달 전 일이네. 날 못 만났다 해도 당신 성격에 시간을 헛되이, 멍하니 흘려보냈을 리는 없고, 알뜰살뜰 요모조모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구경했겠지. 옛날 프랑스에서 맛있게 먹던 음식도 먹고, 아마도 한국 지인들 선물까지 꼼꼼히 챙겼을걸. 원래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았으니 지난 10년간 대인관계는 또 얼마나 넓혔을지. 선물할 사람이 많을 테니 비싸지 않으면서도 요긴한 것을 찾기 위해 파리 기념품 숍을 최소 두세 번은 둘러보았을 거야. 명단을 작성하여 체크해가며. 어떤 상황에서도 할 일을 놓치지 않는 당신이니까. 20년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나는 당신의 그런 면을 따라갈 수 없었지. 난 원체 에너지가 부족하고 뒷심이 달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당신 없이 그 고생스러운 시간을 헤쳐 나온 게 스스로도 놀라워.
그런데 나를 버리고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꽁꽁 단속하던 마음과는 별개로 만나서 당신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보고도 싶었지만, 솔직히 난 당신을 만날 자신이 없었어. 당신은 어떤 각오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난 막상 당신을 대면했을 때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려웠어. 그래서 한사코 피했던 거야. 물론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당신은 능숙하게 대화를 리드해나갔을 테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아. 두려움보다 노여움이 더 컸으니까. 당신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이번 당신의 파리 출현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는 억울함도. 맞아, 난 억울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 인생이 이렇게 무너져야 했냐고!
모든 것을 잃은 마당에
당신이 떠난 후 내 인생은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렸지. 우선 퇴직 후 당신과 함께 차린 프랑스 식당이 망했고, 그 스트레스와 과로로 건강이 상했고, 가까스로 몸과 마음을 추스려 새로 시작한 숙박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고, 당신과 이혼 후 내가 걱정되어 한사코 한국을 떠나 파리로 오셔서 고생만 하시다 95세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을 고스란히 혼자 지켜야 했고, 그 와중에 먹고는 살아야 하니 청소일을 한 3년 했고…. 내 60 평생에 겪을 암흑과 폭풍을 이혼 후 10년 사이에 다 겪은 것 같아.
장모님은 우리 어머니보다 2년 앞서 돌아가셨으니 의지할 곳 없이 당신도 나름 고생을 했겠지만, 우리가 헤어진 후 쓰나미는 내게만 닥친 것 같은 느낌이야. 쓰나미는 말 그대로 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지. 난 완전히, 쫄딱, 돌이킬 수 없이 망했어. 그나마 3년 전부터 직장을 다니게 된 지금이 가장 안정된 상태야. 서서히 건강도 되찾아가고 있고.
아, 이참에 짚고 넘어가지. 이혼하면서 나중에 주기로 했던 재산 분할금을 한 푼도 못 준 건 사업이 망했기 때문이지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야. 그 점에선 당신도 날 원망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나의 무능으로 전 재산을 날린 것에 대해. 당신은 전업주부였지만 부부의 재산은 공동이니까. 그때 당신 명의의 카페라도 그냥 뒀더라면 이렇게 돈이 하나도 없진 않았을 텐데. 당신만이라도 좀 편히 살았을 테니까. 그때는 날 버린 당신이 너무 미워서 어떻게든 그 카페를 빼앗고 싶었어. 그런데 당신은 또 왜 그렇게 순순히 내어줬는지. 나로선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그냥 꺼내본 말이었는데, 당신 이름으로 된 가게를 왜 선뜻 내게 줬어? 내가 아무리 전체 사업체의 디렉터라 해도, 그래서 법적 처분권이 내게 있었다 해도, 당신이 기어코 안 내놓겠다면 내가 강제로야 했겠어? 내 추측이지만 나를 버리고 가는 마당에 날 배려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어. 내게서 돈이라도 축내지 않으려고. 당신은 원래 돈 욕심은 없는 사람이잖아.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건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내가 이렇게까지 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나? 당신 어떻게 생각해? 정말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야? 이번에 당신을 만났다면 그걸 따져보고는 싶었어. 내가 당신을 때린 게 이렇게까지 혹독한 대가를 치를 일인가 말이야. 당신과 20년을 같이 살면서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때린 건 사실이지만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이야? 사람들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사람이 화나면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에 안 맞고 사는 여자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아, 됐고, 다 지난 이야기 또 꺼내면 뭘 하겠어? 그러게 왜 찾아와서 날 다시 화나게 하냔 말이야.
당신, 내가 얼마나 자존심 상한 줄 알아? 내가 왜 이렇게 도피하다시피 살고 있는 줄 알아? 솔직히 내가 지금 사는 게 사는 건 줄 알아? 파리 교민 사회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우리가 왜 이혼했는지 소문이 다 나서 말이야. 차라리 대놓고 묻기라도 했다면 나도 뭐라고 해명,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당신의 행방조차 묻지 않으니. 생각해봐, 늘 붙어 다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어디 갔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안부도 안 묻는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지금까지 그런 맹탕 같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도 화가 나. 물론 지인들로선 묻는 자체가 민망했겠지. 자기들끼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날 배려하느라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그럼에도 나는 주변의 시선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어.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나는 숨이 막혀갔어. 불쾌했어. 모두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향해 한사코 침묵하는 그 무거운 압력이 두렵기도 했어. 모두 나를 왕따시키는 것 같았고, 경멸하는 것도 같았고, 동정하는 것도 같았고, 한심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어. 당신이 떠난 후 난 그렇게 기가 죽기 시작했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 당신이 원망스러운데도 하늘을 향해 그 원망을 퍼부을 수 없는 내 자신이 초라했어. 솔직히 겁이 났어.
어머니 돌아가신 후 교민 사회를 떠나 프랑스 본류 사회로 스며들었어. 지금은 프랑스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한국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는 곳이지. 아예 한국말을 잊어버릴 지경이라니까. 지금 나는 결코 행복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냥 편해. 나와 당신을 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당신 날 왜 만나려고 한 거야? 나와 다시 합치고 싶어서? 아님 날 용서해주려고 온 거야? 두 가지 모두 사양하겠어.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난 당신에게 용서받아야 할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고 애매한지 모르겠어. 차라리 당신이 날 마구 때려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아. 개운하게 뚫릴 것 같아.
어쩌면 머지않아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찾아갈지도 모르겠어.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숲속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볼 수 있는 곳, 완주 경천면 싱그랭이 요동마을로 떠난다. 자연이 일상의 휴식 공간이 되어주는 싱그랭이 마을, 산속 가득 서늘한 바람이 쉬어가는 고적한 절집 화암사와 자연 생태 환경의 싱그랭이 에코 정원, 그리고 마을 주변으로 너른 콩밭이 펼쳐진 완주 싱그랭이 요동마을에서 순한 힐링의 시간을 맞이한다.
마을 입구에 들자마자 오래된 노거수가 대뜸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듯하다. 500년 넘도록 마을의 수호신으로 든든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다. 나무 그늘 아래엔 마을 어르신들이 한낮 일손을 멈추고 휴식 중이다. 마침 마을에서 만난 홍성태 싱그랭이 영농조합 이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싱그랭이 요동(堯洞)마을은 그 옛날 전라도 지역에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때 잠시 쉬어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장승길 옆으로 서 있는 커다란 시무나무는 표시목으로 20리마다 심었는데 완주 고산현이라는 지점에서 딱 8km 지점입니다. 여기에 돌 하나 던져놓고 ‘발병 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면서 나그네가 잠시 쉬었다 떠나는 곳으로,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헤진 짚신 하나 고을 어귀 나무에 걸어놓고 가는 풍습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신거(新巨)렁이 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렸죠. 그런데 신거마을을 지역 방언 등의 이유로 편안하게 부르는 대로 쓸까 어쩔까 투표를 했어요. 15년 전이죠. 그때 마을 주민들이 정감 있고 부드러운 어감의 싱그랭이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싱그랭이 마을은 사방으로 콩밭이다. 홍성태 이사가 설명을 덧붙인다.
“저기 콩밭에서 새를 지키는 아주머니가 보이네요. 주변의 모든 밭이 콩밭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곳이 산골이잖아요. 천수답이나 관개시설이 안 되어 있어요. 옛날부터 콩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수매가 줄고 콩값이 반 토막이 되기도 했고 판로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작게나마 두부 공장을 해보자 의견을 모아 매일 두부 만들어내기에 이른 겁니다. 완주는 로컬 푸드가 유명한데 우리 영농조합의 두부를 많이 좋아하십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콩밭식당은 환경부 인증을 받은 친환경 제조법으로 재배한 두부 요리 전문점이다. 천연 간수를 사용해 조금 거친 듯 고소한 두부로 만든 들깨순두부와 두부전골 등의 두부 요리가 일품이다. 노포 맛집 느낌의 깊은 맛이 난다. 소박한 밥상인 듯하지만 반찬 하나하나까지 모두 손끝 여문 솜씨로 정갈하고 맛깔나다.
싱그랭이 에코 정원의 자연 생태
마을의 느티나무와 콩밭길을 지나 화암사로 가는 길의 ‘싱그랭이 에코 정원’에서 잠깐 멈췄다. 완주의 생태 활동은 이곳 요동마을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아늑한 산 아래 야생화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싱그랭이 에코 정원 앞마당엔 제철 맞은 꽃들이 지천이다.
마을의 자연 생태와 역사 문화 보존을 위해 마련된 곳, 또한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되는 싱그랭이 에코 정원은 지속 발전이 가능한 자연을 가꾸어나가기 위한 공간이다. 150여 종의 야생화와 복수초, 댑싸리 등이 자라고 있다. 요동마을이 있는 경천면은 완주의 북쪽 지역인데 복수초 군락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전문성을 지닌 에코 매니저의 친절한 설명과 안내에 따라 식물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자연과 생태에 관심 있다면 자연 소재를 이용한 석부작(石附作) 만들기 등의 생태 체험도 가능하다.
싱그랭이 에코 정원은 주변 들판과 언덕에서 자라는 야생화가 자연스럽다. 정원 양옆으로 자리 잡은 두 개의 온실은 천장까지 온통 유리로 둘러싸였다. 자그마한 다육이와 꽃을 피운 화분들, 그리고 풀인 듯 자연스러운 식물들과 다양한 모양의 석부작들이 가득하다. 다른 쪽 공간은 씨를 파종하여 키워내는 육묘장이다. 도심에서 자라는 식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마을 사랑을 실천하는 주민들과 싱그랭이 요동마을 생태활동가의 땀과 노력이 엿보인다. 산골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생명의 신비로움과 자연 사랑을 이곳에서 느껴본다.
“초반엔 여러 가지 종을 키웠는데 이제는 몇 가지로 압축해가려고 합니다. 지금은 다알리아가 꽃을 피웠는데, 서리 내릴 때까지 이어지는 데다 번식력도 좋아 구근을 키워서 심었어요. 또 허브는 수입 희귀종이 많은데, 사실 저쪽 산모퉁이만 돌아가도 많거든요. 하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재배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채취 가공하고 방향제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죠. 5년 전부터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차츰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잘 늙은 절집, 느린 발걸음으로 화암사
완주의 싱그랭이 마을에 간다면 가장 먼저 화암사 절집을 갈 생각에 설렌다. 싱그랭이 요동마을이 화암사가 있는 불명산 아래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마을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 화암사는 산속에 숨어 있다고 할 만큼 유난스러움 하나 없이 숲속 깊이 파묻혀 있다. 규모도 소박하다. 단청의 화려함 같은 것도 없다. 수수함에 먼저 마음이 당기는 절집이다.
불명산 화암사에는 신라 왕의 꿈속에서 부처님이 던져준 연꽃으로 딸 연화 공주의 병을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 연꽃이 한겨울 완주 깊은 산봉우리에 피어 있었다고 한다. 불심이 깊어진 왕이 연꽃이 있던 자리에 화암사(花岩寺)라는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절이다.
싱그랭이 에코 정원에서 마을길을 지나 산을 오르다 보면 가벼운 등산 코스처럼 이어진다. 주차장에서 입구의 연화 공주 정원 숲길은 1km 남짓으로 완만하다. 여기선 느린 발걸음이 어울린다. 산책하듯이 천천히 걷다 보면 불명산 숲길의 운치에 반하고 만다. 좁다란 숲길이 온통 풀섶이거나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해서 밀림인 듯 착각하게 하는 포인트가 간간이 나타난다. 물론 급경사의 험한 코스와 너덜길도 있지만 이럴 땐 수행하듯 조심히 걸으면 된다. 골짜기의 물소리와 절로 생겨난 작은 폭포를 지나 숲 사이로 화암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끼가 덮인 바위 절벽에 절집이 앉혀 있어서 우선 놀랄 수밖에. 그러나 천천히 돌아보니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절’이란 말이 떠오른다. 불명산 화암사라는 현판이 걸린 보물 제662호 누각 우화루 누마루에 걸린 목어의 나무 질이 한참 나이 먹어 잘 늙은 절과 제대로 어우러진다. 절 마당을 중심으로 자리한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가 기품 있다. 고적하기만 한 누마루 너머 틈으로 푸르른 신록을 내다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바랄 게 무언가 싶은 순간이다. 우리나라 단 하나뿐인 아앙식 구조 건물 극락전 뜰에 털썩 걸터앉아 숲에 파묻힌 화암사를 내다보니 “아, 좋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화암사, 내 사랑’이란 시에서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행 정보
싱그랭이 요동마을 전북 완주군 경천면 경가천길 377/ 지번 가천리 892
싱그랭이 에코 정원 전북 완주군 경천면 경가천길 474
불명산 화암사 전북 완주군 경천면 화암사길 271/ 지번 가천리 1078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다. 파크골프도 마찬가지다. 치솟는 인기만큼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무분별한 시설 확충, 환경 파괴, 공공 부지의 사유화, 일부 단체 및 동호인의 폐쇄성 등 온갖 문제 집합소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원인은 의외로 간단하다. 해결은 어떨까? 지금부터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번 봐보세요. 다 밀려 있잖아요? 한 홀에 한 팀씩 배정되면 딱 좋아요. 그러니까 72명이 정원인 거예요. 그런데 지금 120명 넘게 라운드하고 있어요. 인원이 오버돼도 너무 오버됐어요. 말 그대로 포화 상태예요.”
영등포구파크골프협회 ‘사랑클럽’ 회원 C씨가 가리키는 곳마다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는 회원으로 가득했다. 치는 팀, 벤치에 앉아 대기하는 팀, 그 뒤에 서 있는 팀. 골프채를 짚고 연신 땀을 훔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사람에 치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수도권 내 다른 파크골프장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최근 들어 더 심해지는 모양새다. ‘사랑클럽’ 회원들은 7월 들어 대기 시간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입을 모았다. “신규 회원이 엄청 늘었어요. 경쟁률이 4대1까지 된다고 합니다. 원래 신규 회원들은 기존 클럽으로 배정돼요. 그런데 기존 클럽도 회원이 넘쳐서 아예 신규 클럽을 개설했고, 그 클럽이 7월부터 배정됐어요. 오면 기본적으로 27홀, 최대 36홀까지 쳤는데, 이제 3시간 동안 겨우 18홀 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다. 최근 몇 년 사이 파크골프 회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한파크골프협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전년 대비 회원 증가율은 평균 42.7%에 달한다. 특히 2022년에는 전년 대비 66%의 회원이 신규 등록을 마쳤다. 그 속도에 파크골프장은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전국의 파크골프장은 2022년 9월 기준 361개로 250여 개 수준에 머물렀던 2020년 대비 100개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전년 대비 증가율로 보면 매년 10~20%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다.
이경호 대한파크골프협회 사무처장은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오고 있다”고 말한다. “수요가 공급보다 훨씬 많으니까 한 번 라운드하려면 전쟁이 나는 겁니다. 파크골퍼들이 최근처럼 늘기 전에는 원하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이젠 현실적으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자연스럽게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되고 있다. 이 사무처장은 “PC 사용을 어려워하는 분들은 아들, 딸 다 모여서 예약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고 했다. 멀리 갈 것 없다. 7월 초 영등포구시설관리공단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전 타임 예약 완료’가 일찌감치 떠 있었다.
예약 실패담 없는 회원은 없다. 회원 C씨는 “1분 이내에 다 나가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루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430여 명 됩니다. 그런데도 눈 깜짝할 새에 예약이 끝나요. 혹시 더 칠 수 있을까 해서 일반부 예약을 시도했는데 엄청나게 어려웠습니다. 빨리 눌러야 하는데 우린 순발력이 없잖아요!”
회원 A씨는 인터넷 예약제 회의론자가 됐다. “우리 세대는 인터넷 예약을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웃음) 실제로 신규 회원 교육 때 예약하는 법을 배워요. 하지만 실전에선 안 되는 걸 어떡합니까? 조금만 버벅대도 예약 끝입니다. 시간 되자마자 눌러야 하는데 그게 나이 들면 잘 안 돼요. 인터넷 시대니까 최적의 방법이라고 하겠지만, 우리한테는 여전히 장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날로그 방식도 답은 아니다. 여의도 한강공원 파크골프장은 당일 선착순으로 번호표를 나눠주고 있는데, ‘운동하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더 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마저도 2시간 기다려서 번호표를 받을 수 있을 때 이야기다. 타임별 정원(100명)이 초과되면 채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귀가해야 한다.
시설 관리 주체를 둘러싼 갈등은 그 연장선상의 문제다. 현재 파크골프장은 지역 협회나 동호회가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과 공단이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 양립하고 있다. 무질서한 사용을 막기 위해 제힘으로 돌보겠다는 게 파크골퍼들의 입장이다. 때마침 라운드를 마치고 ‘봉사’ 목걸이를 건 ‘사랑클럽’ 회원 A씨는 “자체적으로 하는 일”이라며 바람에 휘날리는 쓰레기를 휙 낚아챘다. “쓰레기 버리는 사람 주의 주는 일, 명찰 부착하도록 하는 일 등을 하며 원활한 진행을 돕고 있습니다. 누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해야지. 잔디 관리도 합니다. 호미나 낫이 다 구비돼 있습니다. 회원들은 파크골프장을 내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약은 일체 치지 않고, 쭈그려 앉아서 우리 손으로 잡초를 뽑습니다. 애정이 남달라요.”
남다른 애정 또는 일부 빗나간 애정은 공공체육시설 사유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럼 결국 공단이 관리를 맡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형평성을 고려해 온라인 예약, 선착순 대기표 발급 등 예약 시스템을 도입하면 다시 문제는 쳇바퀴를 돈다. 이때 공적 인력과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 문제는 덤이다.
이쯤 되면 답은 파크골프장 증설밖에 없어 보이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오히려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일부 지자체는 수요를 따라잡겠다며 행정 절차를 위반하고 시설을 건설하거나 확충한 것으로 드러났다. 환경부가 지난 5월 발표한 국가 하천 구역 내 파크골프장 전수조사 결과, 전체 88곳 중 56곳(64%)이 불법이었다. 불법 파크골프장 40곳은 환경당국에 하천점용 허가를 받지 않았고, 16곳은 불법으로 골프장을 넓힌 경우였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인근 주민, 환경단체와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영등포 파크골프장은 코스 정비까지 마쳤지만 환경청 허가가 나지 않아 추가 개장이 보류됐다. 경북 경산시의 남천둔치 파크골프장 9홀 추가 증설 계획은 시민 반대에 막혀 백지화됐다. 울산 울주군의 청량천 일대 파크골프장에선 시설 확대를 요구하는 일부 이용객과 전면 폐쇄를 요구하는 주민 의견이 충돌했다. 멸종 위기종인 수달과 삵, 맹꽁이를 비롯해 200여 종의 동식물이 사는 달성습지를 인근에 둔 대구 고령군 일대 파크골프장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시작해 논란을 낳고 있다. 이런 예를 더 나열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뾰족한 답은 없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은 2023년 5월 ‘스포츠 빅데이터 인사이트’ 제23호에서 “급속도로 증가하는 파크골프 참여자의 수요를 감당하기에 지역별로 편차는 있으나 현재의 시설 공급 수준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원인을 콕 짚으면서도 “파크골프의 성장세가 워낙 빠르다 보니 수요를 맞추기 위해 공급을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행위지만, 무분별한 시설 확충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에 보다 신중한 공급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해결책을 내놨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공급 정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고, 비도시 지역은 폐교 등 유휴부지를 활용해 공간 활용도도 높이고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는 권고도 구체성이 떨어진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실마리를 더듬어 찾는다’는 뜻의 ‘모색’이란 단어 자체가 그렇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이 있다. 어쩐지 ‘사랑클럽’ 회원 C씨의 말이 뼈 있게 들린다. “7월 한 달 동안 우리 클럽은 배정을 14번 받았습니다. 행사가 많았던 5, 6월과 비교하면 횟수는 늘었어요. 그럼 뭐해요? 안 돌아가는데? 배정 횟수를 줄이더라도 원활하게 돌아가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수년 전 실버 생활체육에 지각변동이 감지됐다. 곧이어 ‘파크골프가 인기’라는 말이 전국 곳곳에서 들려왔다. 반짝 흥행이 아니었다. 파크골프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단계적 일상 회복이 되면서 아예 실버 생활체육 주요 종목으로 부상했다. 인근 공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어서. 단지 그뿐일까? 현장에서 들은 파크골프의 진짜 인기 이유는 꽤 흥미롭다.
양평교 초입에 들어서며 걱정이 앞섰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성 장맛비가 예고돼 있었고,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먹구름과 대기를 감도는 꿉꿉함은 양평교 아래 오가는 이 하나 없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영등포 파크골프장’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줄 서서’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매일 영등포 파크골프장을 찾는 이는 500여 명. 영등포구파크골프협회 ‘사랑클럽’ 회원 A씨가 전한 인기는 그 이상이다. “파크골프가 정말 인기예요. 말도 못 해요. 체감상으로 매년 두 배씩 느는 것 같아요. 이거 봐요, 치려고 밀려 있는 거!”
영등포뿐만 아니다. 파크골프는 일대 붐을 맞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회원이 그 방증이다. 대한파크골프협회에 따르면 2020년 4만 5000여 명 수준이던 회원은 2022년 10만 명을 넘어섰다. 2023년 6월 기준으로는 12만 명을 돌파했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즐기는 동호인쪾비동호인까지 합하면 그 수는 대략 40만~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1983년 일본 홋카이도 마쿠베쓰 강가에서 시작된 파크골프는 도심 속 공원이나 유휴부지에서 즐기는 게임이라고 해서 ‘공원 골프’(PARK GOLF)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내에는 2000년 경남 진주에 위치한 노인복지시설 상락원에 6홀이 들어서며 처음 소개됐다. 실버 세대 생활체육 핵심 종목으로 부상한 건 수년 사이다. 2022년 9월 발표된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의 ‘스포츠 빅데이터 인사이트’ 제13호에 따르면 현재 실버 세대 생활체육 유행은 ‘게이트볼에서 파크골프로 전환’되고 있다.
현장은 클럽 한 개와 공 한 개, 그리고 티만 있으면 누구나 인근에서 즐길 수 있는 파크골프의 편의성과 접근성에 열광한다. 몇 천 원이면 즐길 수 있는 저렴한 비용도 현실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사랑클럽’ 회원 A씨는 “파크골프가 노인들에겐 최적의 운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운동 여러 가지 해봤지만, 이보다 좋은 운동은 없습니다. 접근하기 좋고, 이용료 저렴하고, 잔디 밟으면서 많이 걷고요.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어요? 고작해야 산책하는 건데, 산책은 지루해서 오래 못 해요. 근데 파크골프는 3시간이고 4시간이고 하죠!” 옆에서 듣고 있던 회원 B씨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장점이 정말 많아요. 마음이 젊어지는 것 같아요.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다는 게 삶의 활력이 돼요.”
파크골프가 사랑받는 주요 요인 중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종주국 일본의 파크골프협회는 파크골프가 퍼진 요인에 대해 “경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들 수 있다”고 할 정도다. 일반 골프장은 1번 홀에서 티업하면 다른 팀을 만날 수 없지만 파크골프는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에 교류가 이뤄지기 용이하다는 것이다. 실제 ‘사랑클럽’은 회원 60여 명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회원 C씨의 말이다. “하면 할수록 재밌어요. 파크골프를 접하고 사람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자주 보니까 빨리 친해졌지요. 한번 어울리면 아침에 만나서 저녁까지 있다 가기도 합니다. 그게 너무 재밌어요.”
여기에 ‘한국판’ 파크골프만의 매력이 더해졌다. 경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진화해온 것이다. 파크골프는 하프 9홀(파33) 1라운드 18홀(파66)로 진행된다. 파3 네 개, 파4 네 개, 파5 한 개로 기본 제원은 일본과 같다. 차이는 한 홀의 거리다. 위험 방지, 연령이나 남녀 차이에 의한 핸디캡 최소화 등을 위해 거리를 100m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일본과 국내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9홀까지 연장 길이가 500m지만, 국내는 790m까지 가능하다. 파5 홀의 경우 일본은 60~100m, 국내는 100~150m다. 현재 국내는 대개 최장 거리인 150m를 선택하는 추세다.
이경호 대한파크골프협회 사무처장은 “국내 파크골프를 즐기는 인구가 증가한 요소”로 이를 지목한다. “일본은 ‘놀이’이고 우리는 ‘생활 스포츠’, 나아가 ‘경기’에 가깝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80대 이상이 파크골퍼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우린 연장 길이가 기니까 보다 젊은 세대가 많이 유입됐습니다.”이 사무처장은 배우기 쉬운 점도 파크골프 인구 증가 원인으로 꼽았다. “파크골프는 6개월 정도 열심히 하면 3년, 5년 배운 사람과 대결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스포츠는 10년 이상 해야 우승할 수 있어요. 1~2년 바짝 해서는 대회 정상을 꿈꾸기 어렵지요. 그런데 파크골프는 노력 여하에 따라 6개월~1년 만에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지는 운동입니다. 전국 투어를 다니는 분들도 그 수가 상당합니다.”
파크골프는 ‘경기’로 자리 잡고 있다. 대회 규모로 확인된다. 국내 대회 상금이 3000만 원까지 오른 상황이다. 경제 효과는 현장에서 먼저 체감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산천어축제를 연이어 취소했던 강원도 화천군은 파크골프 대회를 유치해 특수를 누렸다. 약 한 달간 이어진 대회에 1500여 명의 선수단과 가족이 방문해 지역 음식점, 숙박업소는 물론 편의점과 카페까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이경호 사무처장은 “경제 효과는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말한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파크골프장에도 라이가 있어요?’입니다.(웃음) 당연히 있지요. 다 다르고 각각의 특색이 있습니다. 대회 당일 처음 가서는 성적을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연습하러 현장에 일주일 전이나 열흘 전에 가서 현지에 체류하며 꽤 많은 비용을 씁니다. 1억 원을 투자해서 대회를 치른다고 하면, 그 열 배 이상의 경제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대회에 나가는 선수만 해도 500~600명입니다. 그 지역에 머물면서 쓰는 돈은 엄청납니다. 지자체에서 계속 유치 신청이 들어오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파크골퍼들에게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클럽’ 회원들은 스포츠로 자리 잡은 파크골프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고는 못 삽니다. 대회 나가는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해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웃음)”
현장은 단기적 경제 효과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파크골프가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2007년에 이미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을 상회하는 장수 국가군으로 진입했다.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로 들어설 전망이다. 고령자의 진료비, 의료비는 당면한 문제다. 통계청이 2022년 9월 발표한 ‘2022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65세 이상 고령자의 1인당 진료비는 475만 9000원, 1인당 본인 부담 의료비는 110만 6000원에 달한다. 전체 인구 대비 각각 2.8배, 2.7배 수준이다. 반면 생활체육 참여자의 1인당 연관 의료비는 비참여자 대비 절반가량에 그친다. 생활체육 참여만으로 의료 비용 감소에 직접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은 파크골프가 현재 최일선에 있는 운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랑클럽’ 회원 A씨의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노인들이 집에만 있으면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근데 파크골프장에 나오면 운동하고, 여기서 만난 친구들끼리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고, 때론 반주하기도 하고, 내내 놀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는 피곤해서 바로 잡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합니다. 아프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할까 봐요.(웃음) 또 실제로도 아프면 못 합니다. 그러니까 파크골프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 건강을 잘 챙겨요. 본인 건강하지, 가정의 평화 가져오지, 종국에는 사회적 비용 안 들지. 파크골프는 삼박자를 다 갖춘 운동이라니까요!”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새 신랑’, 배우 심형탁(45). 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긍정 에너지가 결혼 후 한층 강화됐다. 그런 심형탁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호의적이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저는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솔직한 사람 같다”면서 “내 감정에 솔직하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 솔직할 뿐”이란다.
심형탁은 “좌우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상대를 계속해서 좋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어른이 되면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숨기는 사람이 많은데, 심형탁은 달랐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 덕후(마니아)라고 당당하게 공개했다. 현재는 아내 히라이 사야(이하 사야)에게 무한 애정을 쏟으며, “이렇게 예쁜 사람은 세상에 없다”면서 팔불출 같은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꾼이 아닐까.
“‘덕후’ 문화는 굉장히 중요해요. 덕후가 세상을 움직이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도라에몽 캐릭터를 좋아했어요. 당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기 전이라 ‘동짜몽’으로 불리던 해적판 만화만 있었습니다. 전 그걸 구해서 읽곤 했어요. 도라에몽은 미래에서 온 로봇으로 진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도라에몽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진구에게 저를 투영해서 도라에몽이 저를 도와줬으면 했던 거죠. 그런데 도라에몽이 진짜 저를 도와줬고, 그걸 넘어 선물을 줬어요. 대중적으로 제 이름 석 자를 알리게 해줬고, 이슬이(진구 여자친구)보다 더 예쁜 사야를 만날 수 있게 해줬죠. 도라에몽의 선물인 사야와 함께 잘 살아간다면 앞으로 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능형 배우로 성공하기까지
건장한 체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심형탁은 모델 출신이다. 1997년 ‘신원 SIEG 모델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모델로 데뷔한 그는 직접 에이전시를 뛰어다녀 일자리를 얻어냈고,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심형탁은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제가 초등학생, 중학생 때는 키가 정말 작았어요. 지금도 기억하는 게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50cm가 안 됐고, 1번이었어요. 그저 작다는 이유로 무시와 괴롭힘을 좀 많이 당했죠. 키가 확 큰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였어요. 그런데 덩치만 컸지 마음은 그대로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걸 극복한 건 일에 대한 의지 하나였습니다. 모델 활동을 하고 싶어서 운동을 했고,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고 성격도 많이 달라진 거죠.”
모델 활동을 하면서 연기에 관심이 생긴 심형탁은 수원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배우 전문 기획사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하게 됐다. 2001년 SBS ‘남과 여-우리 다이어트할까요?’가 그의 데뷔작이다. 벌써 23년 차 배우가 된 심형탁은 “배우로 이루고 싶은 것이 아직 많아서 늘 시작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출연작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tvN ‘식샤를 합시다’가 아닐까 싶어요. 처음으로 미니시리즈 주연을 맡아본 작품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저를 일일드라마 배우라고 인식했는데, 그 드라마 이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분을 느꼈어요. 그래서 제 배우 인생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KBS 2TV ‘브레인’의 완벽주의자 캐릭터, MBC ‘천 번의 입맞춤’에서 찌질한 남편 역할을 한 것도 좋았어요.”
심형탁은 예능 출연으로 더 유명해졌다. 2014년 KBS 2TV ‘안녕하세요’를 시작으로 MBC ‘무한도전’, ‘나 혼자 산다’에서 도라에몽을 비롯한 애니메이션과 피규어 등을 좋아하는 순수한 모습으로 대중적 호감을 얻었다. 그 스스로 “나의 배우 인생은 도라에몽 덕후를 밝히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하기도. 이러한 상황에서 ‘예능형 배우’로 통하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요즘 배우들은 드라마나 예능 중 한 가지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모두 가능한 ‘멀티 엔터테이너’(이하 멀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멀티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물론 배우에게 예능 활동은 장·단점이 따를 수밖에 없죠. 연기하는 제 모습을 본 사람들이 ‘도라에몽이 보인다’고 하기도 하고, 주로 코믹한 역할을 제안하시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장점도 있습니다. OCN ‘타임즈’(2021년 방영)에서 악역을 연기했는데, ‘심형탁이 저런 연기도 가능해?’ 하면서 많이 놀라시더라고요. 예능에서 보이는 것과 정반대 모습이 통한 거죠. 결국 제가 연기를 잘해야 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느끼고,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도라에몽의 선물, 아내 사야
심형탁이 아내 사야에 대해서 ‘도라에몽이 준 선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과 관련이 깊다. 심형탁은 촬영차 일본의 도라에몽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유명 완구회사 직원인 사야는 그날 현장 총괄책임자를 맡았다. 첫눈에 사야에게 반한 그는 운명의 짝임을 직감했다.
“사야가 원래 그날 선배하고 같이 나왔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혼자 일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만약 그날 선배가 나왔다면, 일본의 선후배 문화가 철저하기 때문에 저는 사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제가 도라에몽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도라에몽 박물관을 가지 않았다면, 사야의 선배가 그날 나왔다면, 우리는 연결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저와 사야는 정말 몇십만분의 1의 확률을 뚫고 만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형탁은 무려 8개월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야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다. 포기를 모르는 그를 보고 사야의 닫혔던 마음도 열렸다. 열여덟 살 연하의 미모의 아내를 얻은 비결이다. 심형탁과 사야는 4년의 연애 기간을 거쳤고, 7월 8일 일본에서 웨딩마치를 울렸다. 한국에서는 8월 20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혼인신고는 진작에 마친 부부는 한국에서 함께 살고 있다. 심형탁은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한국에 온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어른들이 ‘결혼하고 느끼는 행복은 다르다’고 하잖아요. 그 말의 의미를 체감하면서, 사야와 함께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도 사실 가끔씩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다가도 아내의 얼굴을 보면 화가 싹 풀리더라고요. 하하. 그뿐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잘 풀려고 노력하죠. 저희 부부의 시급한 목표는 2세를 갖는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많아서 마음이 좀 급합니다. 사야는 3명, 저는 2명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해요. 그리고 사야가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줄 생각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어서 그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결혼으로 여는 제3의 인생
심형탁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에 대한 생각이 크지 않았다. 그런 그가 40대 나이에, 그것도 일본인과 결혼할 줄 누가 알았을까. ‘결혼을 꼭 해야만 할까’라는 입장에서 ‘결혼전파자’가 됐다.
“제 나이대가 되면 결혼을 포기하시는 분도 많을 텐데, 그분들께 말하고 싶어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결혼 생각이 없었던 저도 사야를 보자마자 ‘저 사람하고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정한 사랑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 있을 수도 있죠.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혼을 안 할 수도 있지만, 할 의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늘 청년 같은 모습이지만 스스로 ‘중년’이라고 말하는 심형탁. 특히 사야를 만난 후 자신의 인생을 ‘제3의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제1의 인생은 배우가 되기 전까지, 제2의 인생은 사야를 만나기 전까지 배우로 활동한 시기라고 정의 내렸다. 새 신랑으로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중년으로서 새롭게 펼쳐질 ‘제3의 인생’. 심형탁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꿈꾼다. 기분 좋은 부담감이 설렘으로 전해져온다.
“예전에는 중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이 든 느낌이었잖아요. 지금은 그렇지 않죠. 몇 살부터 몇 살까지가 중년인지도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아요. 브래드 피트, 산드라 블록 등을 보면 중년인데도 멋진 삶을 살고 있잖아요. 삶의 방향을 잘 잡아서 살아나가면, 중년의 시기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중년이 되어도 남들이 봤을 때 ‘저 사람처럼 힘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활기찬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무엇보다 좋은 가장이 되어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세상 사람들, 이제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신다면 그 자체만으로 참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 후 몇 마디 조언을 해주신다면 더욱 감사할 것 같습니다. 만약 돌을 던지신다면 제 영혼 구원에는 더없이 소중할 테니 무엇보다 감사하겠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으로 핑계 대고 도망치려는 저를 붙잡아 바로 세워주시려는 거니까요.
저는 올해 95세 남자입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늙은이지요. 30년 전에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이후 30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진작 재혼할걸 하는 후회가 없지 않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처럼 지금에야 아무 소용 없는 소리지요.
아내 떠난 후 재혼을 하지 않으려던 건 아닌데, 솔직히 제가 가진 돈이 좀 있다 보니 그게 걸림돌이 되더라고요. 돈이 있으면 재혼에 좋은 조건 아닌가 하실 테지만 그게 꼭 그렇지가 않더란 거죠. 새사람이 들어와 평생 피땀 흘려 일군 재산 한 축이 허물어지는 건 아닌가, 나라는 사람을 보기 전에 내 돈을 먼저 보고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었더랬습니다. 돌이켜보면 재산을 지키느라 행복을 포기한 참으로 어리석은 노인네지요, 제가. 물론 지금도 ‘그깟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들고 보니 헛것을 붙잡고 허송세월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단 돈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긴 합니다만.
아내 사별 후 90세에 만난 여인
그런데 지금 제 곁에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5년 전에 만났습니다. 그 사이 마음이 달라졌냐고요? 아니요, 결혼한 사이는 아닙니다. 90세에 만난 사람과 법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돈이 작용했습니다. 돈이 많아서 재혼을 포기해야 했던 과거가 있었다면, 돈이 있기에 한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는 현재의 제 모습이라니….
그 사람은 50대 중반으로 저하고 나이 차는 무려 40년입니다. 이 대목에서 추하게 늙은 고약한 노인네라고 저를 비난하시겠지요. 비난하실 일은 비단 나이 차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남편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와 그 사람은 불륜 관계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남편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솔직히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고요. 나이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한 저는 나이 많음이 무슨 해방구라도 되는 양 느껴집니다. 죽으면 공소권이 없어지는 것처럼. 저는 나이가 너무 많아 곧 죽을 거니까요. 추잡한 늙은이가 이기적이기까지 하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동네 은행에서였습니다. 역시 돈과 연관이 있군요. 그 사람은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해당 창구로 안내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은행 출입을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날은 왠지 운동 삼아 가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를 만나려고 그랬던가 봅니다. 제가 워낙 고령이라 그랬을 테지만 유난히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주는 그 사람에게 업무에 충실한 것뿐이란 생각 이상을 품게 되었으니 역시나 늙은이의 주책이었지요.
그런 그 사람에게 저는 마치 자석처럼 끌렸습니다. 저의 은행 출입이 잦아졌지요. 혼자 살고 있으니 자식들 눈치 볼 것도 없었고, 자식들도 나 대신 은행 일을 봐주는 게 은근히 귀찮기도 했을 테니 이래저래 저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 여자가 혼자 사는 줄 알았습니다. 뻔한 수작 부리지 말라고요? 아니요, 정말입니다. 그 여자가 제게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럼 꽃뱀에게 걸려든 거냐고요?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 여자는 제게 돈을 요구한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 여자는 그저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 친절을 제 쪽에서 왜곡했던 것이지요. 달리 왜곡이 아니라 제가 금전적으로 좀 여유가 있다 보니 그 여자의 친절에 작은 답례를 하고 싶었던 거고, 그 여자도 그것을 굳이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가 아니면서 왜 혼자라고 했을까 싶지만, 그 정도로 나에 대해 그쪽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어떻게 말한다 한들 그 여자로선 무슨 상관이었겠냐는 거지요.
돈으로 맺어진 일방적 관계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습니다. ‘남녀 사이’가 된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더 이상 은행을 가지 않아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특별한 관계가 되었음을 암시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저를 먼저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제가 연락하면 집으로 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지요.
그 사람은 자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가 아픈 건지, 생활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르겠고요. 그 사람이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봐서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제 짐작이지요. 가정 형편과 무관하게 할 일이 있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지만. 제가 아는 것은 그 정도뿐입니다. 아니, 하나도 모른다고 해야겠군요. 솔직히 더 묻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묻지 않는데 답할 사람도 아니고요.
돈을 주기 때문에 나를 만나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5년 동안 먼저 연락해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나를 만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주지 않는데 만나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돈 때문에 나를 만나는 건 사실인데 돈에 얽매이진 않는 여자, 저로서는 파악이 안 되는 묘한 상대인 것 같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고요.
저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은 내게 무색무취의 존재인 것 같다는. 100세를 바라보는 늙은이를 행여 좋아할 리는 없고, 그렇다고 딱히 내 돈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나를 만나는지 세월이 지날수록 아리송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저를 향한 동정과 연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깊은 사이라니까요.
청천벽력 같은 이별 통보
그렇게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그러니까 석 달 전, 그 사람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묘하게 가슴이 설레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올 것이 왔다는 예감과 함께. 거동이 불편한 저로서는 그 사람이 먼저 만나자는 말에도 평소 그대로 집으로 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요.
나쁜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죠.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이제 그만 만나자는 말을 꺼냈습니다. 제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지요.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언제든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본인보다 40살이나 많은 늙은 남자에게 정이 떨어졌다는데야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관계를 5년이나 이어온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매달렸습니다.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내 만남에 응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저는 더욱 허둥댔습니다.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니 당연히 돈을 더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 사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게 돈뿐이라 비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라도 알자고, 헤어지고자 하는 이유를 말해달라고 졸랐습니다. 95세 남자가 50대 여자에게 말이지요.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는 상투성을 유일한 위안 삼아.
그런데 그 이유가 어이없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 와중에 저는 내심 기뻤습니다. 그렇다면 나와의 관계가 보다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기에.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자유로울 수는 있기에. 내친김에 둘이 합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돈 아까워서 어쩌냐고요? 그렇게 빈정대실 것까진 없지 않나요? 물으시니 답하자면 제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사람 이전에 돈을 저울질했던 30년 전, 사별 초기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우쳐준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지요. 돈을 지키려는 알량한 생각을 버리고 진작에 마음을 열었다면, 저는 지금 이런 추한 모습으로 40살이나 적은 여자에게 사랑 구걸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여하간 그 사람은 남편이 죽자 저와의 관계도 청산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이 세상을 곧 떠날 사람이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불륜남이었는데, 불륜 관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신분이 자유로워진 마당에 굳이 헤어지자고 하는 이유가 뭔지 저로서는 당혹스럽습니다. 물론 그 여자가 저를 사랑해서 만난 건 아니었지만, 여하간 제약이 없어졌다는 것은 반가운 일 아닌가요? 돈을 더 줄 수도 있다는 말을 넌지시, 아니 노골적으로 해보았으나 역시 돈도 소용없어진 마당에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의 일부를 옮겨 싣는다. 세 번째 주제는 선글라스다.
1 ‘인사동 대학생 어머님’. 백팩으로 포인트를 준 패션이 대학생 같아 ‘대학생 어머님’이라고 했다. 어머님의 핑크색 선글라스 속에 사진을 찍고 있는 내가 살짝 보이는 것이 재밌다.
2 ‘하늘색 티셔츠 아버님’.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티셔츠와 커다란 알의 선글라스로 젊은 패션 감각을 선보인 아버님.
3 ‘디올 어머님’. 브랜드 디올(Dior)을 사랑하는 어머님. 꽃무늬 옷도 고급스럽게 소화하셨다.
4 ‘루이비통 아버님’. KBS에서 동묘로 나의 작업 현장을 취재 나온 날이었다. 촬영 전 젊은이들이 입을 법한 루이비통×슈프림 재킷을 입은 아버님을 포착했다. 잠깐 뒷모습만 봤는데, 촬영이 시작된 후 아버님과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드리자 흔쾌히 촬영을 허락해주셨다. 나도 언젠가 아버님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5 ‘카우보이 아버님’. 청청 패션의 아버님을 보자 서울 동묘가 미국의 황무지로 바뀐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화룡점정은 역시 빈티지 선글라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산 풍경 푸르러 첫눈에 싱그럽다. 청명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마을이다. 한갓진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택들. 산야의 초록과 고택의 수묵색이 차분하게 어우러져 푸근하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군자마을이다. 원래 2km 정도 저 아래 ‘외내’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이 들어설 때 이곳으로 집단 이주했다. 수몰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택과 고택 사람들의 몸살이 자심했을 테다. 억지 춘향으로 밀려났으니까. 군자마을만이 아니라 안동의 많은 전통마을이 불운을 맞이했다. 일부 마을은 그대로 수몰됐으며, 군자마을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의 고택은 이건(移建)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안동의 유림에선 논의가 많았더란다. 결국 ‘문중을 지키는 소리(小利)보다 국가가 도모하는 대의(大義)에 승복하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고 한다.
군자마을은 ‘외내’에서 통째 옮겨온 고택 20여 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이후 어언 반백 년이 지났다. 상처를 씻어주는 건 언제나 세월이라는 약이다. 이건 과정에서 곁들인 새 단장으로 고택 마을 특유의 고졸한 맛은 덜 익었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흔해 생기가 감돈다. 답사객들, 또는 한옥 스테이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즐기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유구한 세거로 이어진 후손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지금은 소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을이 지닌 역사성과 고건축이 지닌 미감을 힘으로 삼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옛 마을의 생존 방식과 풍속이 이렇게 진화한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도 우람하게 자라 너른 그늘을 드리운다. 마을을 에워싼 숲과 전면으로 탁 트인 조망도 빼어나다. 풍경의 절반은 청산이요,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거나 구름이다. 군자마을은 이렇게 자연 안에 있다. 쉴 만한 곳이며, 눈요기할 만한 곳이고, 기억에 남길 만한 곳이다.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조선 초기부터 600여 년 동안 세거한 곳이다. 입향조는 농수 김효로(聾叟 金孝盧, 1454~1534)다. 그는 생원시(生員試)에 붙었으나 출세에 뜻이 없어 매양 초야에 묻혀 살았다. 퇴계가 김효로를 일컬어 ‘결백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 걸 보면 정치의 탁류에 발 담그기를 싫어한 인물이었음을 알 만하다. 김효로를 사표로 삼아 성장한 덕분인가? 그의 친손과 외손 중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이른바 ‘오천 7군자’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렇다.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 마을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탄복했다지. 이후 군자리라 부르게 됐다.
돌계단을 걸어 올라 후조당(後彫堂) 대종택으로 들어선다. 군자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며, 마을의 깊은 유서를 웅변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입향조 김효로의 장손인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1567년에 초창, 자신을 호를 따 ‘후조당’(後彫堂)이라 이름 붙였다. 후조당은 안채, 사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구성됐다. 대종택답게 규모로나 건축 미학으로나 빼어나다. 특히 후조당 별당의 가구(架構)와 구색이 흥미롭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건물로, 서편엔 6칸 대청을 설치했다. 대청 동편엔 2칸의 온돌방을 배치했고, 잇달아 마루 1칸과 가마 형태의 작은 온돌방 1칸을 덧붙여 위트가 실린 건물 형태를 연출했다. 천장 부위에 설치한 소슬 대공은 매우 희귀한 받침 형식인데, 여말선초의 기법이라 한다. 화각을 한 마루 대공의 화려함도 수작으로 평한다. 6칸 대청의 칸마다 단 사분합문(四分閤門)의 묘미는 또 어떻고? 모조리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단박에 외경이 안으로 들이친다. 햇살과 바람이 밀려든다. 사분합문은 이렇게 풍경을 변주한다. 아울러 공간을 확장하는 기능을 해 문중의 제례나 회합 같은 대형 행사를 너끈히 치를 수 있다.
선비가 쓴 요리책 ‘수운잡방’
후조당 별당에 걸린 현판은 퇴계가 썼다. 군자마을 선비들은 다들 퇴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김부필 역시 제자였다. 후조당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건을 위한 건물 해체 때 지붕 아래 합각에서 고서, 문집, 교지, 토지문서, 노비문서 등 희귀한 문화유산이 다수 발견돼 큰 화제가 되었던 것. 문중 선조들이 600여 년간 은밀하게 소장했던 고문서와 전적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기상천외한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겠다. 당시 발견된 수천 점의 유물 중 일부는 보물 제1018호와 제1019호로 지정됐다. 사람들은 대개 군자마을의 고택에 관심을 갖지만, 이곳 문중 사람들의 자긍심을 돋우는 건 바로 이 기록유산들이다.
그렇다면 군자마을의 군자들이 지닌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명민해 학문에 밝고 처신에 맑았다. 흔히 탈속한 풍모와 깨끗한 운신을 일삼아 세상의 농간과 꿍꿍이에 초연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도학자란 세속보다 산림에서의 은거와 공부로 오히려 삶의 진수를 건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지 않았던가. 군자마을 ‘7군자’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부필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둔했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스승 퇴계가 벼슬을 권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때 퇴계가 읊은 칠언절구가 있다. ‘후조당 주인은 소박하고 절개가 굳어/ 임금의 임명장이 내려와도 기뻐하지 않았다/ 매화와 마주 앉아 빙설 같은 향기를 맡으며/ 그저 도(道) 공부에만 매진하더라.’
이제 탁청정(濯淸亭)을 볼까. 입향조 김효로의 둘째 아들 김유(金綏, 1491~1555)가 1541년에 살림집을 지으면서 바로 옆에 함께 건립한 별당 정자다. 군자마을엔 두 개의 종가가 마을의 기풍과 질서를 주도해왔다. 항렬로 보아 큰집인 후조당 종가와 작은집인 탁청정 종가가 바로 그렇다. 탁청정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따왔으며,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한석봉은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기도 했는데, 서예가들에 따르면 탁청정 글씨가 도산서원의 것보다 빼어나다고 한다. 탁청정은 정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매우 아름답다. 허전한 구석 없이 당당하고 흠결 없이 수려해 당대 최고수 목수가 지은 집임을 짐작케 한다. 영남 지방의 개인 정자치고 탁청정처럼 웅장하고 우아한 정자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뜰에 있는 연못에선 여름이면 연꽃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올라 누각으로 스며든다.
이토록 경탄할 만한 정자를 지어놓고 김유는 무엇으로 소일했나? 그의 뇌에 세팅된 최고의 가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이지 않았을까.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무과엔 실패, 그 길로 벼슬을 포기하고 향촌에 살며 도학자로서의 영일(寧日)을 구가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유는 ‘어찌 명리(名利)를 좇으랴. 삶이란 즐거워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학덕은 드높았고 인격도 고매했다. 즐기는 방식에도 기품이 있었다. 부모 봉양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함)에 충실함으로써 선비의 본분을 다했다. 특히 접빈객에 공을 들였다. 그는 열 살 연하의 퇴계를 비롯해 당대의 시인 묵객들과 두터운 교유를 했다.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과 풍류가 화개(花開)처럼 번졌으리라. 이름난 이들만 접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걸인에게도 대접을 했다는 게 아닌가. 그의 집 주방에선 늘 술이 익어가고 음식이 요리됐다. 김유는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 보물 제2134호)을 저술하기도 했다. 남존여비의 비루한 관념이 엄연하던 시대에 선비가 요리책을?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아마도 김유는 삶이라는 여행을 경계 없이 넘나든 게 아니었을까. 수신(修身)이 깊지 않고선 가능치 않은 경지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으랴
‘안동학’이라는 게 있다. 안동 지역의 역사·문화·지리·민속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지역학이다. 이 흔치 않은 학문 장르의 존재를 통해 안동의 문화적 광량(廣量)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동 사람들은 흔히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는 물론 민속 문화까지 번성한 곳으로 안동을 능가할 지역이 없는 걸로 본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을 통해 안동의 문화와 안동문화원의 일에 대해 들었다.
“‘안동정신’의 핵심은 ‘의’(義)를 중시한다는 데 있다. 여기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일찍이 고려 건국 때 안동의 지도자 김선평·권행·장정필이 정의로운 편에 섰다. 일제강점기 때엔 전국 어느 곳보다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게 왜 그런가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안동 출신으로 성리학의 태두였던 퇴계 선생의 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게 그 배경이 됐다. 즉 의리를 본분으로 가르친 퇴계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얘기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고 있다. 이른바 ‘선비정신’이 여전히 살아남은 지역이라는 뜻을 담은 슬로건인가?
“현대의 다양화된 사회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지고 살 수야 있겠나. 그러나 유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게 유교니까. 다시 말해 선비정신을 어떻게든 이어가자는 게 안동의 바람이다. 사실 안동은 전통과 예절이 그나마 잘 지켜지고 있는 고장이다.”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요즘 세상에 유교가 가르치는 모럴이 지닌 폐단은 없을까?
“옳은 삶을 가르치는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을까? 다만 가르침을 시늉만 낼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얌체들은 이 지역에도 많다. 매사 조상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처신을 하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권 원장님은 전통 유가의 후예로 오랫동안 유림활동을 했다. 일상의 처신에서 중시하는 가치들이 있다면?
“기본적인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키고자 한다. 상경여빈(相敬如), 즉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이 하라는 가르침과, 입장 바꿔 생각하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시 현대사회에서도 요긴한 미덕이라 믿는다.”
얼마 전에 펼쳐진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는 시민 중심의 참여형 축제로 성황을 이뤄 호평을 받았더라.
“안동문화원이 주관한 축제로 성과가 컸다. 안동문화원이 부각되는 효과를 낳기도 해 보람을 느낀다. 향후 젊은 층을 축제에 적극 끌어들여 질적 성장을 도모할 참이다.”
안동의 문화답사 때 놓치지 않고 찾아보길 바라는 명소를 꼽아달라.
“도산서원을 찾아가 사당에서 절을 하는 걸로 퇴계 선생을 뵙고 그 정신을 담아오면 좋겠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월영교에서는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바라고. 이 둘만으로도 안동이 오래가는 기억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는 안동만의 먹거리를 추천하기도 했다. 500년 전통의 종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수운잡방 체험관’을 통해 음식의 낙원을 경험하라는 것.
●Exhibition
◇조명치 해양문화특별전
일정 8월 15일까지 장소 국립민속박물관
1인당 수산물 소비량 세계 1위의 한국. 그중에서도 조기·명태·멸치와 조명치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어류라고 할 수 있다. ‘조명치 해양문화특별전’은 조명치가 지닌 문화적·역사적 의미를 찾고, 바다에서의 조명치 잡기부터 가공과 유통·판매, 밥상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오랜 기간 해양문화를 조사 연구해온 김창일 학예연구사가 전시의 기획을 맡았으며, 170여 점의 전시품이 소개됐다. ‘규합총서’, ‘자산어보’ 등의 옛 문헌들, 그물 같은 어업 도구와 용품들, 어시장과 어물전, 위판과 파시 등을 만날 수 있다. 국내에서 최초 공개된 1940년대 촬영한 명태 관련 영상과 바다에서 들리는 조기의 울음소리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관객은 전시를 즐기다 보면 해양 생태계 문제와 어촌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민속박물관 관계자는 “정숙하고 우아한 전시가 아닌 생업 현장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비린내 가득한 전시로, 삼면이 바다인 해양민족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대해 관람객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
일정 8월 20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은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화가뿐 아니라 알프레드 히치콕, 마틴 스코세이지 등 영화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전시에서는 호퍼의 전 생애에 걸친 회화, 드로잉, 판화 등 160여 점의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 11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대표작은 호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밝힌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이 재임 기간 백악관 집무실에 걸어두었던 ‘벌리 콥의 집, 사우스 트루로’(1930~1933) 등이다.
●Stage
◇그날들
일정 7월 12일 ~ 9월 3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유준상, 이건명, 오만석, 엄기준, 오종혁, 지창욱, 김건우, 영재 등
가수 故 김광석의 명곡들로 구성된 주크박스 뮤지컬 ‘그날들’이 역사적인 10주년을 맞았다. 이야기는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하며, 20년의 세월을 넘나든다. 작품에 담긴 한국적 정서는 전 세대를 사로잡았으며, 누적 관객 55만 명을 돌파했다. 이번 10주년 공연에는 모든 시즌에 출연한 유준상을 비롯해 이전 시즌에서 명연기를 보여줬던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그날들’ 측은 “10년간 끊임없는 애정을 보여준 관객들에 대한 보답으로 최고의 창작진, 스태프, 배우들과 함께 역대 최고의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라스트 세션
일정 7월 8일 ~ 9월 10일
장소 대학로 TOM 1관
연출 오경택
출연 신구, 남명렬, 이상윤, 카이
2020년 초연된 연극 ‘라스트 세션’이 세 번째 시즌이자 마지막 공연으로 돌아온다. 초연과 재연 때 프로이트를 연기한 신구와 루이스 역의 이상윤이 이번에도 출연해 유종의 미를 거둔다. 이상윤은 “평소 신구 선생님을 존경했는데, 함께 무대에 서면서 존경을 넘어 사랑하게 됐다”고 전했다. ‘라스트 세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가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2인극이다.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한다.
◇3일간의 비
일정 7월 25일 ~ 10월 1일
장소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이해랑예술극장
연출 오만석
출연 김주헌, 박정복, 김바다, 이동하, 김찬호, 유현석, 류현경, 하니, 정인지
연극 ‘3일간의 비’가 6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3일간의 비’는 2003 토니상 수상자인 미국의 유명 극작가 리처드 그린버그가 집필한 서정적인 작품이다. 극은 유명 건축가인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일기장을 통해 과거 부모 세대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내용을 담는다. 배우들은 모두 1인 2역을 소화한다. 현재는 1995년이며, 1960년대 과거에서는 부모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다.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것은 물론, 2017년에 이어 배우 오만석이 연출을 맡아 기대를 모으고 있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저는 주인공이었던 적도, 멜로 연기를 한 적도 없어요.” 켜켜이 쌓은 필모그래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베테랑 배우 윤유선(54)의 고백이다. 주연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쉬움이나 후회를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일터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오랜 시간 변함없이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윤유선은 사실 그만의 ‘행복한 인생’ 속 주인공이다.
일곱 살 때 영화 ‘만나야 할 사람’으로 데뷔한 윤유선은 48년간 ‘배우’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 배우로서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가장 고민이 많았던 때는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보통의 배우들처럼 당시 윤유선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무엇인지, 어떤 연기를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20대 때 이런 일도 겪었다. 윤유선은 미니시리즈 주인공으로 발탁됐는데, 맡은 역할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런데 대본 리딩을 마친 후 다른 배우로 캐스팅이 교체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작진은 윤유선이 역할을 소화하기에 통통하다고 생각했고, 교체를 강행했다.
윤유선은 한동안 힘들었지만, 금세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돌렸다. “그 배우가 그 역할을 정말 잘 소화했고, 나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그리고 저도 혹독한 관리를 못 한 부분을 인정하기 때문에 후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더불어 48년의 롱런 비결에 대해 “욕심이 많지 않았던 게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다”고 겸손한 발언을 했다.
“물론 욕심을 내서 일을 더 열심히 했으면 지금보다 더 잘 됐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온 힘을 쏟지 않아서 지치지 않았고, 즐기면서 일한 덕분에 지금까지 배우로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하는 게 재밌어요. 일을 오래 하는데 재미를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이렇게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감사함을 많이 느껴요. 그리고 저는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완벽을 기대하면서 살면 너무 힘들죠. 여러분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웃으며 살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침에 날씨가 맑고 상쾌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하.”
흑백 영화에서 OTT까지
“제가 아역 배우였을 때는 영화 촬영을 지금처럼 필름이 아닌 테이프로 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연히 흑백 영화였고, 후시녹음(촬영이 끝나고 주로 성우가 대사를 녹음)을 했죠.” 예쁜 아이였던 윤유선은 이모의 권유로 연기를 시작했다. 아역 배우 시절의 촬영 환경을 묻자 과거의 추억을 신나서 쏟아놓는다. 거의 50년, 변화무쌍한 일터를 변함없이 지킨 베테랑 배우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윤유선은 특히 2000년대, 2010년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MBC ‘궁’,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SBS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꼽았다. 그는 자신만의 작품 선택 기준이 있었는데, 출연작을 돌아보니 저절로 이해가 된다.
“일단 개연성 없는 막장은 싫어해요. 그리고 어두운 범죄 스릴러 작품도 피하는 편이에요. 개인적인 성향상 잘 만든 작품이라 하더라도 너무 어둡고 잔인하면 시청 후 며칠은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저처럼 대중예술 작품에 영향을 받는 분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죠. 그래서 가능하면 밝고 스토리가 탄탄한 작품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사냥개들’은 그동안의 작품과 결이 조금 달라 보인다. ‘사냥개들’은 사채업의 세계에 휘말린 두 청년이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윤유선은 “범죄물이라기보다는 액션물에 가깝고, 주인공들의 서사가 순수한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배우 우도환과의 인연으로 ‘사냥개들’ 출연이 성사됐다. OCN ‘구해줘’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우도환은 ‘사냥개들’에서 엄마 역할을 꼭 윤유선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작진에게 요청했단다. 이렇게 해서 윤유선은 ‘사냥개들’로 OTT 드라마에 진출하게 됐다. 극 중 그가 연기한 김건우(우도환 역)의 어머니는 가난한 삶 속에 아들을 키운 인물로, 아들이 악의 무리와 싸우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사전 제작 드라마이고, 또 감독님께서 영화감독이셨기 때문에 촬영 당시 영화를 찍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감독님께서 특히 내추럴한 모습을 원하셔서 화장을 전혀 안 하기도 했어요. 가난한 역할을 이전에도 연기했지만, 이렇게까지 화장을 안 한 적은 처음이에요. 어쨌거나 저한테도 새로운 모습에 도전한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보다 도환이가 그 추운 겨울에 액션 신을 찍느라 고생을 정말 많이 했죠. 나이는 어리지만 친구 같기도 하고, 저보다 큰 어른 같기도 하고, 배울 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국민 엄마 그리고 진짜 남매 엄마
윤유선에게는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주연 제안이 안 들어오자 그는 하나의 돌파구로 엄마 연기를 맡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의 이른 나이부터였으니 엄마 연기 경력만 30년이 넘었다. 주지훈, 최우식, 이종석, 김고은 등이 아들과 딸로 그를 거쳐갔다. 열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이진욱과 모자(母子) 호흡을 펼친 적도 있다. 윤유선은 “결혼을 하고 진짜 엄마가 된 후 연기를 하면서 공감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JTBC ‘맏이’에서 엄마 연기를 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였는데,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죠. MBC ‘짝패’에서는 이기적이고 나쁜 엄마였는데, 공감되는 포인트가 있더라고요. 사실 엄마도 사람인데 좋을 때도 있지만 실수할 때도 있고, 화를 낼 때도 있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엄마 역할을 연기하면서 공감되는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윤유선은 실제로 어떤 엄마일까.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윤유선은 “애들이 벌써 성인이다. 육아를 거의 끝내놓고 보니 아이들한테 더 잘 해줄걸, 좀 더 시간을 보낼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많이 못 봐줬다”고 말했다. 오히려 자상한 성격의 남편이 아이들과 더 잘 놀아주고 육아를 열심히 해줬다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윤유선의 남편은 이성호 판사로, 두 사람은 2001년 결혼했다. 윤유선과 이성호 판사는 만난 지 100일이 안 돼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윤유선은 “남편이 계속 자기가 나와 결혼해준 거라고 말한다”면서 “까다로울 때도, 허당스러울 때도 있는 저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더라”라고 말했다.
“제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은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인내심이 많고 배려를 엄청 많이 해줘요. 직업을 생각하면 딱딱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굉장히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에요. 아이들한테도 엄청 좋은 아빠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남편과 아이들과 화목한 일상을 보낼 수 있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나이 듦 두려움 없어
윤유선은 2017년 11년 만에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 출연했고, 그때부터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다. 그는 연극의 매력에 대해 “아이들도 다 컸고, 무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대의 장점은 한 작품을 오래 연습하고 고민한다는 점인 것 같다. 매체 연기만 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으니까 다양한 연기를 해보는 거다. 한 장르만 고집하는 것은 편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윤유선은 2020년부터 연극 ‘친정 엄마와 2박 3일’로 무대를 해왔다. 엄마 역의 강부자가 직접 출연을 요청해 함께하고 있다. 1977년 TBC 드라마 ‘청실홍실’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인연을 이어온 케미스트리를 무대에서 자랑하고 있다. 사실 윤유선은 강부자 외에도 선배 배우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김영옥과도 각별한 사이다.
“강부자 선생님은 진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똑같은 대사인데 무대에 설 때마다 다 다른 느낌이 들어요. 선배님과 연기하는 모든 순간이 제게는 감동이에요. 김영옥 선생님은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에요. 일과 가정, 삶의 밸런스가 좋아서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또 매번 진심으로 애정을 담아 조언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느껴요.”
윤유선은 앞으로도 연기 생활을 이어가며 선배 배우들을 닮아가고 싶다. 그는 “예전에 ‘바람은 불어도’(1995년)라는 드라마를 할 때도 ‘지팡이 짚을 때까지 연기할 거야’라고 말했었다. 이제는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다. 연기가 더 재밌어졌으니까”라고 말했다. 아역에서 성인 배우, 중년 배우로 성장의 시간을 보낸 윤유선은 새롭게 시작될 미래도 기대하고 있다.
“가끔 동안이라고 봐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저는 열심히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우로서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나이에 맞는 역할과 연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50대 중반은 엄마로서, 여자로서, 성숙한 어른으로서 고민이 많은 시기 같아요. 그 나이의 고민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할 기회가 오면 좋겠죠. 그리고 연기 잘하는 배우를 넘어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선생님들한테 사랑받은 만큼 후배들한테 돌려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