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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규 “두 아들과 함께, 3대가 함께 걷는 배우의 길”
- 박준규(59)는 인터뷰 중 ‘구태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구태여는 ‘일부러 애써’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는 방송에서든 일상에서든 어떤 일에 대해 ‘구태여’ 거짓말하지 않고, ‘구태여’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중의 눈에 비친 박준규는 항상 당당하고 솔직하다. 자존감이 높다고도 느껴지는데, 그 힘의 원천은 가족이었다. ‘3대째 가업을 잇는 집안’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음식점을 운영하는 집안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박준규 집안의 이야기다. 박준규는 ‘1960년대 스타’ 고(故) 박노식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배우가 됐다. 박준규의 두 아들 박종찬과 박종혁도 아버지를 따라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박준규는 두 아들이 가업을 이어 배우가 된 것을 고마워하며, 배우 집안의 연대가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배우가 어떤 직업보다 좋다고 여기거든요. 아이들이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정말 좋았죠. 다만 ‘박준규의 아들’로서 받을 편견 어린 시선을 잘 알기 때문에 그걸 감수해내라고 얘기했을 뿐이죠. 아버지부터 두 아들까지, 박씨 가문이 적어도 100년은 연기자 생활을 하는 셈이에요. 가업이 계속 이어져서 10대까지도 배우 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박노식과 쌍칼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액션 영화 전성시대였다. 그 중심에는 박준규의 아버지 박노식이 있었다. 박노식은 영화 ‘용팔이’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버지의 성공과 인기 덕분에 박준규는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스스로 자신을 ‘금수저’라고 표현할 정도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가사도우미, 운전기사, 정원사까지 다 있었어요. ‘엄마 손맛이 그리워’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저는 어머니보다 가사도우미가 해준 밥을 더 많이 먹고 자랐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라요. 평생 여사님 대접을 받은 어머니는 지금도 천생 공주 같으세요. 그래서 더 잘 챙겨드리려고 합니다.” 박준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배우로 데뷔했다. 첫 작품은 박노식이 제작쪾감독쪾주연을 맡은 1971년 영화 ‘인간 사표를 써라’다. 이후에도 그는 아버지의 작품에 여러 번 출연했고, TV 광고도 찍었다. 박준규는 당시를 회상하며 “어린애가 배우가 뭔지나 알았겠나. 아버지를 따라 촬영장 다니는 게 그저 재밌었다”고 말했다. 박준규에게 박노식은 배우로서, 아버지로서 어떤 사람일까. 그는 “작품 속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아버지가 매우 엄한 줄 안다. 사실은 유쾌하고 친구 같은 아빠다. 배우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박준규는 1980년대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미국에서 졸업했고, 현지에서 일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2년간 운영한 주유소에서도 일했고, 일본 식품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떠나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배우로 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단다. 하지만 내재되어 있던 끼와 열정을 발견한 그는 귀국 후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한국 친구들과 있으면 늘 제가 제일 웃기더라고요. 사람들을 웃기는 데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죠. 그리고 비디오를 통해 한국 작품을 접하고는 했는데 ‘나도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배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요. 귀국 후 아버지에게 ‘배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제가 배우가 되기를 기다리셨던 것 같아요.” 배우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뭘 해도 대중은 그를 ‘박노식 아들’로 생각했다. 박준규는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쌍칼 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마침내 주목받았다. ‘박노식 아들’에서 벗어나 ‘박준규’라는 이름을 알리기까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했다. 박노식은 1995년 세상을 떠났고, 박준규는 아쉬움을 가슴에 품었다. “‘박노식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정말 부담이었어요. 다른 동료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비교당한 거죠. 다행히 쌍칼로 잘 되고 나서는 아무도 ‘박노식 아들’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지금 어린 친구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쌍칼은 알죠. 유튜브에서 ‘야인시대’를 접한 경우도 많고요. 어쨌거나 ‘야인시대’는 저의 인생작이에요.” 이후 박준규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기 굳히기에 돌입했다. 그는 “쌍칼이 아닌 내 이름 석 자를 알리는 데 예능 출연은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하며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출연했더니 계속 나를 찾아주더라. 일주일에 10개까지 녹화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예능에 출연하기 전에는 쌍칼 때문에 대중들이 저를 무섭게 봤는데 이후에는 편하게 생각해주시더라고요. 저는 구태여 예능에까지 나가서 연기하고 싶지 않았고, 일부러 웃기고 싶지도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리니 시청자들이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 제 최대 장점은 안티가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아들이 이어가는 배우 집안 박준규의 아내 진송아 역시 배우 출신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진송아는 촉망받는 신예였다. 박준규와 진송아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오디션장에서 처음 만났다. 박준규는 “1989년 1월 30일이었다”라고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다.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 아내가 저의 진면모를 보기 시작했죠. 연기 연습도 열심히 하고 착하니까 아내가 먼저 저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제 이상형이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이었거든요. 아내가 저를 좋아하는 게 느껴지니 어느새 아내가 좋아졌죠. 성격상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지 못하기도 하고요. ” 박준규와 진송아는 1991년 결혼해 부부가 됐다.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두 사람은 변치 않는 부부애를 과시한다. 진송아는 박준규의 표지 촬영 현장에도 동반 참석, 내조의 여왕다운 면모를 뽐냈다. 남편이 촬영을 잘할 수 있도록 옆에서 세심하게 챙겨줬다. 평소와는 다른 남편의 멋진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쏟기도 했다. 박준규는 “30년이 지났는데도 내가 그렇게 좋나?”라며 너스레로 화답했다. 박준규에게 아내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존재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이 말은 진송아가 시댁살이를 30년 넘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행히 고부 관계는 좋은 편이다. 박준규는 시댁살이보다 아내가 결혼 후 자신의 꿈을 접은 것에 대해 더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 “아버지가 ‘집안에 배우는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아내가 배우를 그만두고 저를 내조하게 됐죠. 아내가 요즘 다시 연기를 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 촬영은 현장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아내의 출연을 반대하고 있어요. 작은 역할을 맡아서 고생만 하는 것이 보기 싫은 거죠. 그런데 아내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주인공 역을 맡는다든지 연극 무대에 선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 있어요. 좋은 작품이 있다면 둘이 함께 출연할 수도 있겠죠.” 박준규의 두 아들은 부모의 끼를 그대로 물려받아 배우로 활동 중이다. 첫째 박종찬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진송아를 빼닮은 외모를 지녔고, 뮤지컬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박준규를 닮아 다재다능한 둘째 박종혁은 2017년 tvN 드라마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로 데뷔했다. ‘박노식의 아들’이었던 박준규는 두 아들이 겪는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애들이 어디 출연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박준규가 꽂아줬다’고 하더라. 요즘 시대에 꽂아주기 출연이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아들이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 “우리 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대학교에서도 연기를 전공했어요. 뮤지컬, 연극 등 오디션을 열심히 보러 다녀서 역할도 자신들이 따냈고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 애들인데 매번 제가 꽂아줬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너무 안타까운 거죠.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열심히 하는 만큼 좋은 배우가 될 거예요. 언젠가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준규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배우는 어떤 목표를 갖기보다 주어진 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배우한테 ‘연기 변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싫어한다”고 덧붙였다. 배우가 다양한 연기를 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연기 변신’은 맞지 않은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박준규는 “꼭 지키고 싶은 목표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웃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진송아는 박준규가 인터뷰하는 내내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어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코로나19에 경제까지 어려워지니 사람들이 ‘죽겠다’,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힘들죠. 안 힘든 사람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말이 씨가 되기 때문에 저는 부정적인 말을 싫어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반드시 좋은 일이 올 테니 ‘나는 잘될 거야’라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사세요!”
- 2023-03-0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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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급 화려한 대작 쏟아진다” 3월 문화소식
- ●Exhibition ◇WATSON, THE MAESTRO 일정 3월 30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알버트 왓슨은 패션 포트레이트 사진계의 거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0인의 사진작가’에 선정됐다. 왓슨은 스티브 잡스, 알프레드 히치콕, 데이비드 보위 등 동시대 아이콘과 작업했다. 1977년부터 2019년까지 100회 이상 패션잡지 ‘보그’ 표지 촬영을 담당했다. ‘킬 빌’, ‘게이샤의 추억’ 등 영화 포스터도 촬영했다. 이번 전시는 왓슨의 1960년대 초기작부터 외부에 최초로 공개하는 2022년 최신작까지 아우른다. 유명 인사의 인물 사진, 풍경과 정물이 있는 개인 작업, 실험적인 사진까지 주요 작품 125점을 만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왓슨이 촬영한 다양한 매거진의 전설적인 커버 이미지와 테스트 샷으로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 밀착 인화지 작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까지 함께 전시된다. 왓슨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었지만 카메라의 눈을 빌려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낸다.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사진을 접한 지 60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사진에 열정을 품고 있다”면서 “팔십을 넘어선 지금도 나는 카메라 중독자다”라고 말했다. ◇박기웅 : 48 VILLAINS 일정 4월 11일까지 장소 서울스카이 ‘빌런’(Villain)은 ‘악당’을 뜻한다. ‘48 VILLAINS’는 ‘악역 전문배우’로 이름을 알린 박기웅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한 전시다. 박기웅은 연기자의 삶을 통해 얻은 감정선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영화 속 빌런 48인을 그렸다. 화려한 색감은 배제하고 흑백 모노톤으로만 집약한 페인팅 작업이 독특하다.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관람객이 작품에 투영된 감정선에 더 깊이 따라갈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작은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그린 ‘히스 레저 애즈 조커’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를 표현한 ‘말콤 맥도웰 애즈 알렉스 디라지’ 등이다. ●Stage ◇레드북 일정 3월 14일 ~ 5월 28일 장소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박소영 출연 옥주현, 박진주, 민경아, 송원근, 신성민, 김성규 등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레드북’이 2년 만에 다시 개막한다. 이번 시즌은 역대급 배우 라인업으로 기대감이 높다. ‘레드북’은 19세기 런던,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숙녀보다는 그저 ‘나’로 살고 싶은 여자 ‘안나’와 오직 ‘신사’로 사는 법밖에 모르는 남자 ‘브라운’이 서로를 통해 이해와 존중의 가치를 배우는 과정을 담았다. 여성이 글을 쓰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에 비난과 편견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가는 안나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유쾌하게 펼쳐진다. ◇오페라의 유령 일정 3월 30일 ~ 6월 18일 장소 부산 드림씨어터 연출 라이너 프리드 출연 조승우, 김주택, 전동석, 손지수, 송은혜, 송원근, 황건하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13년 만에 한국어 공연으로 돌아온다. 더욱이 조승우, 김주택, 전동석 등 최정상 캐스트로 기대를 모은다. ‘오페라의 유령’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숨어 사는 천재 음악가 ‘오페라의 유령’과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귀족 청년 ‘라울’의 가면 속 감춰진 러브 스토리를 그린다.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3월 30일 막을 올리며, 7월에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한다. ◇파우스트 일정 3월 31일 ~ 4월 29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양정웅 출연 유인촌, 박해수, 박은석, 원진아 독일 문학의 거장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쓴 역작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한다. 연극에서는 선악이 공존하는 인물이 악마와 위험한 계약을 맺으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원한 진리와 욕망 사이에 고민하는 인간 ‘파우스트’와 순간의 쾌락을 주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대립이 지상과 천상을 넘나들며 그려진다. 유인촌은 파우스트, 박해수는 악마 메피스토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박은석은 ‘젊은 파우스트’ 역을 맡았다. 연극에 처음 도전하는 원진아는 젊은 파우스트와 사랑에 빠지는 ‘그레첸’을 연기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3-03-0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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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시간을 이야기하는 영화 3
-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중요하지만 바쁘게 사느라 놓치기 십상인 시간. 이번 주말에는 ‘타임 슬립’ (시간 여행) 영화를 감상하며 시간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어바웃타임(2013)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티빙, 시리즈온 시청 가능〉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남자가 첫눈에 반한 여자와의 완벽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감상 포인트 영화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등을 연출한 리차드 커티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결혼식 날 두 남녀가 웃으며 빗속을 뛰어가는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계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넷플릭스, 왓챠, 티빙, 웨이브 시청 가능〉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소년이 전학 간 예술 학교의 낡은 음악실에서 소녀를 만나며 벌어지는 신비로운 이야기. 감상 포인트 영화에는 쇼팽의 ‘흑건’과 ‘백건’ 편곡, ‘왕벌의 비행’을 모티브로 한 ‘두금삼’ 등 피아노 연주곡이 등장한다. 주연 배우이자 연출을 맡은 주걸륜이 직접 연주해 감탄을 자아낸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 〈넷플릭스, 왓챠, 티빙, 웨이브 시청 가능〉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알약을 얻게 된 남자. 남자는 과거의 자신과 만나 평생 후회하던 과거의 한 사건을 바꾸려고 한다. 감상 포인트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만난다는 독특한 설정이 눈에 띈다. 1980년대의 감성을 재현하는 의상과 음악 등은 영화의 별미.
- 2023-02-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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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독증이 키운 원태연의 시심(詩心)
-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등 말랑말랑한 구절로 199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은 원태연 시인. 다시 독자들을 만나고자 펜을 들었지만 시가 너무 써지지 않아 ‘별짓’ 다했다. 잠을 설치고, 스스로에게 욕을 내뱉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다 머리로 천장도 뚫었다. 20년 만의 새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는 고뇌의 시간만큼 솔직한 사랑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원태연 시인의 집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높고 좁은 계단이 있다. 뒤뚱뒤뚱 계단을 오르면 약 1m 높이의 어둑한 다락방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을 비집고 등장한 원 시인은 “천장이 낮아. 이거 타고 와요”라며 바퀴 달린 작은 의자를 데구루루 굴려 보낸다. 아, 예사롭지 않다. 날것의 미학 원태연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는 중학생 때부터 7년간 쓴 시를 엮은 것이다. 공부는 못했지만 매일 뭔가를 썼다. 오늘의 나는 볼품없지만, 시는 오늘 내가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출판사에서 매절계약(출판사가 저작자에게 일정 금액만 지급하고 향후 저작물 이용을 통해 얻는 수익은 모두 독점하는 계약)으로 출판했는데 베스트셀러가 됐다. 150만 부가 팔렸다지만 정작 그에게 들어온 인세는 없었다. 두 번째 시집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이후 낸 시집들은 출판사 대표의 야반도주 등으로 인세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의 저서는 총 600만 부 팔렸다고 추산할 뿐 정확히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른다. “시집을 많이 팔았대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고, 술자리를 같이하려 했지. 버스를 열 번 타면 한두 번 정도는 누가 옆에서 내 시집을 읽고 있었어요. 어릴 땐 천재였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교만했어요. 가진 걸 당연하게 여겼으니까요. ‘너에게 전화가 왔다’는 그랬던 과거의 나를 바닥까지 반성하면서 작업했어요.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자전거를 타다 체인이 빠졌음에도 멈출 수 없는 기분이었죠. 시한테 많이 혼났어.” 새 시집 속 ‘버퍼링’은 9개월 동안 70번 넘게 수정한 시다. 어떻게 적어봐도 도대체 매력을 살릴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퇴고한 원고를 모으면 버퍼링으로만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 정도란다. 그러다 우연히 자판을 잘못 눌러 ‘끊어진다/마음/이’라는 일곱 글자만 남았다. 안녕하세요, 난독증 겪는 시인입니다 그는 시인이자 작사가이자 영화감독이다. 1995년 가수 김현철의 ‘왜 그래’를 시작으로 드라마 ‘시크릿 가든’ OST ‘그 여자’와 ‘그 남자’, 개그맨 박명수의 청혼곡 ‘바보에게 바보가’, 허각 ‘나를 잊지 말아요’, 유미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등의 노랫말을 썼다. 권상우, 이보영 주연의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도 제작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사랑과 이별의 번민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난독 증세다. “40살이 넘어 난독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현재 한국난독증협회 홍보대사기도 해요. 난독증은 글자를 ‘아예 못 읽는’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증상은 제각기 달라요. 난 ‘잘못 보이는’ 거예요. 그래도 시도 쓰고 작사도 하고 다 해요. 오히려 난독증의 수혜자야. 사람들에게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남들에게 낯선 단어가 익숙하게 떠오를 때가 있죠. 덕분에 훨씬 표현에 자유로워요. 이번 시집, 후회할 확률 27% 미만. 10%라고 하려 했는데 건방져 보일까 봐.” 멋있는 작가와 독자 요즘은 원태연의 해석으로 다시 풀어쓴 ‘단어 사전’을 쓰고 있다. 가제는 ‘원태연의 오리지널’. 그의 눈에 비친 것들을 그대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겼다. ‘이방인’의 경우 국어사전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정의돼 있지만, ‘나를 위해 울어줄 이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이라 썼다. 언제쯤 책을 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잠깐 침묵하던 그는 “출판사에서 보내셨어?”라며 볼멘소리를 던졌다. “열다섯 살 때 장래희망 난에 ‘멋있는 남자’라고 썼었어요. ‘원태연이, 멋있는 남자가 직업이야? 뭐 먹고 살라고?’라는 담임선생님의 한마디에 우스운 놈으로 여겨진 일이 있었어요. 참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독자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줘요. 내 시를 칭찬하고, 공감해주죠. 책이 김밥천국 소고기김밥보다 비쌀텐데. 글이 아니라 내 마음을 읽은 기분도 들고요. 잠시 한눈팔았지만 돌아올 곳은 결국 ‘시’였을지도 몰라요.” 인터뷰가 끝나고 현관 밖까지 나와 “재밌었다”며 씩 웃는 그를 보곤 생각했다. ‘멋있는 남자’라는 꿈, 어쩌면 이루었을지도.
- 2023-02-2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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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삼각관계가 끝난 날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남편의 장례식에 그 여자가 왔다. 경황이 없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혹시 저 여자 아니냐?”며 귀엣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고사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소리 없이 조문을 하고는 그림자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으니. 나중에 부의금을 챙길 때도 그 여자 것은 없었다. 철저히 존재를 감춘다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지. 다녀간 걸 알고 나니 부의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짐작되면서, 꽁꽁 감춘다고 감춘 것이 티를 낸 꼴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 장례식에 그 여자의 등장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 할 게 뭔가.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여자의 심리적 줄다리기도 남편의 사망으로 맥없이 끝이 나버렸으니. 한쪽 줄은 남편과의 내연 관계인 그 여자가, 다른 쪽 줄은 아내인 내가 잡고 있던 줄다리기.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결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세상을 떠났다. 47세였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잦아 소화제로 버티다 못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은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는 하되 아울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요” 하는 말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다운 말이었다고 할지. 감정적 동요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이가 이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실감을 못 하는 건가?’ 하고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니면 본인이 진단받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의연함을 가장하는 건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남편의 암 진단 후에도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겠나. 현실은 더 힘들어졌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 같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을 결혼 후 아이 출산하고 산후조리 때 잠깐 쉬었을 뿐 20년 넘게 해오면서, 막말로 죽을 날 받아놓은 남편이건만 그때조차 옆에 있어 주질 못했으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만약 옆에 있어 주느라 생활비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나마 1년 투병도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간호사다.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해 경력 따라 연륜 따라 52세인 지금은 중간급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남편은 나의 환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로맨틱한 설정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부부가 된 경우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난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무난함을 지탱해준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내가 가지고 오는 일정한 수입이었고. 결혼 후 지금까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남편이 묵묵히 가사와 살림을 꾸려온 것도 우리 결혼의 무난함에 일조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녀의 전통적 역할을 바꾼, 바깥일하는 아내 집안일하는 남편 구도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남편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하나의 아내처럼 의지하며 지냈고, 나는 그런 두 사람 관계를 묵인한 채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 무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결코 무난할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이었음을 인정한다. 애초 우리의 결혼은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폐인 단짝이 내연녀로 그해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밤늦게 병원에 온 30대 후반의 남자. 그날 나는 야간 근무 중이었다. 미혼인 데다 뒤늦게 간호학을 전공한 나이 많은 새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명절마다 당직이나 야간 근무에 배정됐다. 가정을 가진 선배 간호사들을 대신해 당연한 양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명절이라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더욱. 오빠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은 이미 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신 지 2년,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라 명절에 간다고 해도 눈치나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오빠는 몰라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올케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 핑계를 대고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세상 아래 피붙이라곤 오빠와 나 남매뿐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모님이 떠나신 마당에 새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명절 근무는 갈 곳 없는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연휴에는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아주 없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환자 마음. 그해 추석 명절은 환자가 없는 편에 속했다. 밤 11시경 응급처치를 받은 그 남자, 미래의 내 남편은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정식으로 치료를 받고 며칠 입원하는 정도로 회복되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그와 나는 상당히 가까워져서 1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40을 넘긴 때였다. 내가 남편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5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 연인 중 한쪽이 결혼을 하자 둘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결혼하지 않은 여자 쪽이 내연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남편은 애인이 있는 남자,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결혼한 남자였던 것이다. 둘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의 무능력 탓이었다. 돈 벌 재주가 없었던 사람, 어쩌면 돈 벌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 두 사람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쪽에서도 돈 벌 능력이 없었을 테고. 두 사람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둘 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중에 어느 문학 단체에서 만났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 모두 글은 써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연민과 공감대가 깊어갔을 것이다. 고시폐인, 공시폐인 등 폐인증후군 중에서 이른바 ‘문학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경제력 있는 내가 남편 눈에 띄었고 남편은 운 좋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 여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을 뿐. 나는 병원 일로 정신없다 보니 남편의 정서적 빈자리는 풋풋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여자가 메워주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관계 정리 만약 남편이 자기 일이 있었다면,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었다면 결혼과 함께 그 여자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마흔 살이 넘으면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럴수록 그 여자와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여자로선 어차피 결혼 상대가 없을 바에야 남편만큼 편한 사람이 또 있으랴. 내가 번 돈이 그 여자한테로 쏠쏠이 넘어갔을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소설을 쓴답시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기 직전까지 둘이 속닥거리다가 미처 컴퓨터를 끄지 못한 상태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두 사람은 SNS나 전화로 늘 교류해왔던 것인데, 핑곗거리로도 얼마나 좋은가. 글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고. 자기들 스스로도 단지 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관계를 합리화했을 테고. 돌이켜보면 남편이 그 오랜 세월 묵묵히 살림을 맡아 꾸려준 것도 내가 출근한 사이에 가지는 그 여자와의 밀회 덕이었으리라. 내가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 그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도 정리에 대한 경고의 몸짓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것인가. 남편을 믿을 수밖에. 그러나 내 쪽에서 다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다. 그랬다. 나는 묵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안 후에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났는지, 아니면 관계를 정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이 떠난 지금 남편과의 추억을 그 여자와 나눠 가진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추억의 부피로나 깊이로나 나보다 그 여자의 것이 훨씬 두껍고 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쓰라리게 한다. 그의 아내는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이고 내 인생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흘러간 게 아닐까 하는 자학적 망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나게 됐으니….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3-02-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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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뚜기 ‘제3회 푸드 에세이’ 공모전 개최
- 오뚜기가 제3회 푸드 에세이 공모전 ‘음식과 함께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를 개최한다. 오뚜기 푸드 에세이 공모전은 음식과 함께하는 다양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통해 '스위트홈'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2021년부터 매년 실시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은 일반(1994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부문과 청소년·청년 부문(1995년생~2009년생)으로 나눠 운영된다. 총상금은 2000만 원, 수상 인원은 69명이다. 일반과 청소년·청년 부문을 합쳐 선정된 ‘오뚜기상(대상, 1명)’ 수상자에게는 500만 원, ‘으뜸상(최우수상, 부문별 각 1명)’에 각 300만 원, ‘화목상(우수상, 부문별 각 3명)’에 각 100만 원이 수여된다. 이 외에 ‘사랑상(장려상, 부문별 각 30명)’ 수상자에게는 오뚜기 자사몰인 ‘오뚜기몰’에서 사용 가능한 포인트 5만 점이 주어진다. 수상작은 주제 적합성, 작품 구성력, 독창성, 대중성 등의 심사 기준을 고려한 1, 2차 심사를 거쳐 5월 5일 금요일 공모전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된다. 시상식은 5월 18일(목) 오뚜기센터 풍림홀에서 진행된다. 최종 수상작들은 오뚜기의 브랜드 체험 공간인 ‘롤리폴리 꼬또’를 비롯해 다양한 팝업스토어에 전시될 예정이다. 음식에 관한 소소한 일상이나 특별한 순간,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했던 음식에 대한 추억, 음식으로 인해 바뀐 가족의 일상 등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된다. 응모 기간은 4월 3일 월요일 18시까지로, 공모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접수 또는 우편 접수를 통해 응모할 수 있다. 작품 서식 등 자세한 내용은 공모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오뚜기 관계자는 “음식에 얽힌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발굴, 공유함으로써 ‘스위트홈’의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 매년 푸드 에세이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며 “올해 시상 규모를 늘려 기회를 확대한 만큼 많은 분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 2023-02-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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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기다리며 문화생활 즐겨볼까” 2월 문화소식
- ●Exhibition ◇프리다 칼로 사진전 : 삶의 초상 일정 3월 26일까지 장소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멕시코의 국보’로 불리는 세계적인 화가 프리다 칼로의 오리지널 사진전이다. 프리다 칼로의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담은 20여 사진작가의 147점의 작품과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그동안 작품으로만 보았던 프리다 칼로의 삶 자체를 만날 수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가 1911년에 찍은 ‘4살의 프리다 칼로’와 니콜라스 머레이가 1939년에 찍은 붉은 레보소(Rebozo)를 걸친 ‘프리다 칼로’, 레오 마티즈가 1941년에 찍은 ‘태양 아래 프리다’ 시리즈가 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계 사진작가였다. 6살 때 척추성 소아마비와 사춘기 시절에 전차 교통사고로 생긴 장애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았던 프리다 칼로. 강렬한 색채로 담아낸 자화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날, 혜화문에서는 일정 3월 12일까지 장소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은 2017년부터 매년 도성의 여덟 성문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열어왔다. 올해는 여섯 번째 전시로 혜화문의 역할과 변화상을 소개한다. 전시는 ‘혜화문을 열다’와 ‘그날, 혜화문’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혜화문을 열다’에서는 홍화문으로 건설돼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와 도성 문으로서의 역할, 임진왜란 이후의 중건까지 조선시대 혜화문의 역사와 위상을 소개한다. 옛 혜화문의 모습을 묘사한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를 포함해 관련 유물도 볼 수 있다. ‘그날, 혜화문’에서는 18세기 기록에 등장하는 일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감상 가능하다. ●Stage ◇아마데우스 일정 2월 12일~4월 1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이지나 출연 김재범, 김종구, 차지연, 문유강, 전성우, 이재균, 최우혁 등 연극 ‘아마데우스’가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2018년 초연됐고, 2020년 재연 무대를 거쳤다. ‘아마데우스’는 18세기 비엔나를 배경으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를 질투한 살리에리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1984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져 큰 사랑을 받았다. 재연 당시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 김재범과 차지연이 다시 살리에리 역으로 무대에 오르며 김종구와 문유강이 새롭게 합류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역에는 전성우, 이재균, 최우혁이 캐스팅됐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 더 라스트 일정 3월 4일~5월 7일 장소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연출 추정화 출연 김찬호, 오종혁, 백인태, 이창민, 서동진 등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며, 2016년 초연 후 스테디셀러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북한 특수공작원 3인방이 남한 달동네에 잠입해 동네 바보, 가수 지망생, 고등학생으로 신분을 위장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북한 엘리트 요원 원류환 역에는 오종혁, 백인태, 김찬호가 출연하며,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아들 리해랑 역으로 서동진과 2AM의 이창민이 무대에 오른다. 최연소 남파 요원 리해진 역에는 그룹 빅톤의 임세준, DKZ의 민규, 조용휘, 차이도가 출연한다. ◇루쓰 일정 3월 5일~4월 2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김다현 출연 선예, 정지아, 김다현, 이지훈 등 원더걸스 출신 가수 선예의 첫 뮤지컬 도전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루쓰’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글로벌 진출을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창작 뮤지컬로,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구약 성경 ‘룻기’를 원작으로 한다. 극은 사랑을 통해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는 이방인 여자 루쓰의 일생을 조명한다. 특히 성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커플이라고 할 수 있는 루쓰와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이를 통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힐링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3-02-0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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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불안한 중년들… 취미에서 위안 찾는 키덜트
- 2023년 키덜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키덜트(Kidult)는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아이와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한다.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년의 키덜트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주류로 떠오른 중년 키덜트의 파급력과 그 이유를 짚어봤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네버랜드 신드롬’을 언급했다. 네버랜드는 피터팬과 친구들이 늙지 않고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사는 곳이다.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네버랜드 신드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리턴(Return) 유형이다. 배우 한소희가 착용해 3000원짜리 공주 세트가 돌풍을 일으킨 것, 포켓몬 빵 품절 대란 등을 이 유형의 예로 들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키덜트는 리턴 유형에 속한다. 네버랜드 신드롬의 두 번째 유형은 스테이(Stay)로, 나이 듦을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유형의 사람은 동안 외모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승진을 마다하면서까지 현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세 번째로는 아이들처럼 쉽고 재밌고 명랑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플레이(Play) 유형이 있다. 고령화 시대와 키덜트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키덜트 시장 규모는 2014년 5000억 원 수준에서 지난해 1조 6000억 원으로 확대됐다. 향후 최대 11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키덜트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주름잡은 주력 세력이다. 키덜트가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근본적인 이유는 전 세계가 빠르게 늙어간다는 데 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회가 유년화되고 있다. ‘이 나이 때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나이 개념이 흐려지고 있다. 키덜트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추억의 장난감, 만화책, 만화영화 등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소비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런 키덜트를 향한 시선은 몇 년 전만 해도 부정적이었다. 유치한 취향을 가진 철없는 어른으로 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어른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키덜트를 향한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른은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장막이 걷히자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시대가 됐다. 이로 인해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키덜트가 늘어났고, 소비 시장 또한 커졌다. 자녀와 함께 취미 생활을 즐기는 키덜트 부모도 많아졌다. 드론, 무선조종 자동차, 레고 등을 가족이 함께 즐기며 유대감을 쌓는다. 키덜트가 급증한 두 번째 원인으로 미래 불안감이 거론된다. 키덜트는 불안한 미래와 힘든 현실로 인해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에 젖으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내 활동이 증가하면서 장난감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장난감 회사 해즈브로는 2019년 47억 2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64억 2000만 달러로 순수입이 증가했다. 동기간 바비 인형 회사 마텔의 순매출은 45억 달러에서 54억 6000만 달러로 늘었다. 문화 발전과 중장년 키덜트의 성장 현재 시장을 주름잡는 키덜트의 중심에는 중장년층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스타워즈, 포켓몬 등을 보유한 장난감 회사 재즈웨어스의 제러미 파다워 최고브랜드책임자는 CNBC에서 “1970~80년대에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장난감이 크게 유행하면서 이 시기에 팬덤을 경험한 세대가 현재 30~40대에 접어들었다. 이 사람들이 키덜트의 시작이 됐다”라고 말했다. 현재 상영 중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가 흥행하는 것을 봐도 중장년층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2주 만에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새해 첫 100만 영화다. 1990년대 만화 ‘슬램덩크’를 즐겨 본 중장년층이 오래 간직한 팬심을 드러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유튜브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를 운영 중인 라이너는 게임에 주목해 말했다. 그는 “중장년층을 1980년대생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생은 게임에 익숙한 세대다. 게임을 하기 위한 용도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였다”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게임을 취미로 이어가는 것이다. 중장년층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게임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종합하면, 세상은 나이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젊어지고 있다. 나이보다 젊게 사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됐다. 앞으로 키덜트는 더욱 많아질 것이며, 개인과 사회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것이다. 개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로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창구가 된다. 시장 및 사회는 키덜트로 인해 활기와 역동성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덕사’ 교장 선생님, 라이너 “중장년 키덜트여,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유튜버 라이너는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을 맡고 있다. 오덕사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을 심도 있게 분석해 소개하는 채널이다. 채널의 주요 연령층은 30·40대다. “10·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오덕사 구독자분들의 연령층은 다양합니다. 그중 30·40대가 제일 많은데요. 중장년층은 아무래도 추억의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좋아하시더라고요. ‘기생수’, ‘에반게리온’을 소개했을 때 반응이 특히 뜨거웠죠.” 스스로 키덜트라고 말하는 라이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만든 채널이 바로 오덕사다. 라이너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다. 만화방, 비디오방을 전전하는 것을 넘어 해적판 비디오를 구하러 용산을 찾아가곤 했다고. “친구들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게임도 좋아했고, 영화와 소설도 굉장히 많이 봤어요.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죠.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문화의 힘이 되게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문화와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문화생활은 라이너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 중 그의 인생작은 무엇일까. 라이너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극장판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꼽았다. 마크로스는 거대한 우주선인데, 지구가 멸망하면서 마크로스에 탄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된다. 그들은 외계인 젠크라디와 싸움을 벌인다. “외계인 젠크라디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어요. 바로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류는 머리를 쓰죠. 마크로스 안에 당대의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가 있었는데, 우주 콘서트를 펼치죠. 음악을 듣고 젠크라디들은 붕괴됩니다. 거기서 ‘컬처 쇼크’(문화 충격)라는 말이 처음 나왔어요. 제 영화 유튜브 채널 이름도 ‘라이너의 컬쳐 쇼크’죠. 1980년대에 그런 스토리가 나왔다니,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덕사에서 다루는 콘텐츠 중 게임의 비중은 적지만, 라이너는 여전히 게임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는 수중에 돈이 없어서 게임을 즐기지 못했는데, 현재는 시간이 없어서 게임을 못 한다고.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커서 게임 패키지를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상상으로만 게임을 하고 진열장에 넣어두죠. 그렇게 쌓인 게임이 한가득이에요.” 라이너는 키덜트인 자신의 취미 활동에 대한 장점을 늘어놓았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특별한 장비 없이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취미 활동이다. 또 누구를 상처 입히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키덜트로 살 것이라는 라이너는 동년배 중장년층에게 자신처럼 ‘덕후’가 될 것을 추천했다. “중장년층에게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다고 해서,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나 하던 유치한 것을 즐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숨은 명작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취미 활동을 당당하게 즐기면서 ‘원더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 2023-02-0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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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듦에도 사라지지 않는 조급함… 당신의 화양연화를 위하여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찬란한 내 인생 좋은 꿈 꾸셨습니까? 마음 반창고 새해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 혹은 내가 제일 잘나갔던 순간, 그도 아니면 내가 가장 찬란해질 그 순간을 떠올리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을 춘하추동(春夏秋冬) 네 계절에 피는 꽃으로 비유해볼까요. 아직은 한참 먼 봄소식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산수유를 시작으로 봄철에는 매화, 목련,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복사꽃, 벚꽃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햇살이 더욱 눈부신 여름이 되면 무궁화부터 찔레꽃, 작약, 패랭이꽃, 장미가 형형색색 산천을 장식합니다. 코스모스, 국화, 과꽃, 나팔꽃, 도라지꽃은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동백꽃은 단연코 외로운 겨울을 홀로 지킵니다. 이처럼 꽃도 피우는 시기가 다 다릅니다. 차례대로 자기 순서에 맞춰 꽃을 피웁니다. 식물은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고 낮의 길이와 온도 같은 최적의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꽃을 피우는 정교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다른 시간에 찾아옵니다. 저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나다라 배우며 글꽃을 찾은 마음 오십 해가 넘도록 시장통에서 생선 비린내 맡으며 자식 키우고 살아낸 정백안(79세), 서경임(74세) 부부는 영암에서 목포까지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갑니다. 오가는 데 무려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오일장 서는 날을 빼고는 거르지 않습니다. 지난 11월에는 전남인재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한 평생교육수기 공모에서 경임 씨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열여섯에 처음 만난 내 이름, 일흔 넘어 활짝 핀 글자꽃’이란 제목으로 상도 받고, 이름 없이 사느라 아팠던 마음도 아름다운 글꽃으로 승화시킵니다. 세 살에 부모를 여의고 제때 배우지 못한 아픔을 늦깎이 학생이 되어 글로 녹여내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멍들었던 마음도 구석구석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온통 눈물과 서러움뿐이었던 삶이 배움을 통해 재밌는 살판으로 바뀌었다는 부부. 학교에 다니면서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당당하다는 경임 씨는 쓰는 글마다 큰 상을 받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둥지 속에 갇힌 새처럼 세상 밖 외면하고 일만 하던’ 경임 씨에게 배움의 기쁨은 기적처럼 찾아온 행운입니다. 호미자루 연필 삼고 밭고랑 공책 삼아 마음을 써내려가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 아닐까 미소 짓습니다. 쏜살같은 세월에 지지 않고, 해마다 먹는 나이에 꺾이지 않고 자기 때와 자기 사람을 기다린 이가 있습니다. 무려 72년을 기다린 주인공은 바로 강태공입니다. 3000년 전의 인물로 알려진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선조가 여(呂)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하여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립니다.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西伯)이 강태공을 초빙하며 선왕 태공이 간절히 바라던(望)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강태공이 버린 낚시 3600개 위수(渭水)에서 낚시 3600개를 버려가며 문왕을 기다렸던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극진(棘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잘 잡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늘이 있었지만 곧게 펴져 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물고기를 잡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운 것이 아니니까요. 강태공이 낚시터에서 기다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강태공은 ‘그 때’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72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兵學) 등 온갖 학문에 능통한 희대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통찰력 그리고 큰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는 강태공 대신 그 책임을 아내 마 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지친 아내는 날마다 남편을 닦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강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한 아내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그만 강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절머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강태공은 떠나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혼자서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던 강태공은 오십이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뒤로는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위수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 오랜 세월 끝에 문왕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의 치마폭에 싸여 폭정을 일삼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덕망이 있었던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치게 했습니다. “위수에서 사냥을 하면 장차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강태공 역시 자신의 뜻을 알아줄 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과 수양에 매진하며 그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강태공은 자신의 성공과 명예, 부귀영화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국강병의 술법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10년 동안 3600개의 낚시를 버리면서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강태공이 지쳐 포기했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자신의 때’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리고 준비했기에 ‘강태공’, ‘태공망’이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지요.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반면에 필자는 조급함, 성급함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외롭게 하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지 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2018년 12월 말에 첫 책 ‘혼자 술 마시는 여자’를 나이 오십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도망가다 만들어진 책인 데다 제 생애 모든 것 사랑, 열정, 가족까지 다 녹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청 기대가 컸습니다. 욕심도 너무 많았습니다. 책이 딱 나오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 작가가 되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초대되고, ‘인간극장’에 출연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상상과 현실은 참 달랐습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될 수 없는 건데,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책을 내고 보니 그건 다 잊어버린 채 금방 유명해질 줄 알고 커다란 꿈과 야망, 욕심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겁니다.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한테 더 실망하게 되고요. ‘나를 조금 더 챙겨주지.’ ‘왜 책을 안 사줄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왜 책을 안 알려줄까, 다른 사람 책은 홍보해주면서.’ 마음에 별의별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고요. 마치 고구마 줄기 걷어 올릴 때 한 넝쿨에 끝도 없이 흙 속에서 끌려나오는 것처럼요. 책을 구매하고 SNS에 소개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잠시뿐이고, 관심도 없고 구매도 홍보도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운해하면서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어느 하루. 필자 대학원 논문 심사위원이었던 주철환 교수님께 책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답장으로 주신 세 마디가 다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고, 대단한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 차근차근 가야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데 한 발짝 한 발짝 떼어야지. 차곡차곡 쌓아야지, 돌담을 쌓듯이. 크고 작은 자갈, 큰 돌, 작은 돌이 사이사이에 다 채워져야 탄탄한 울타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 교수님의 말은 필자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줍니다. 나만의 때와 사람을 기다리며 차츰차츰 나아갈 용기가 생깁니다. 시유기시 인유기인 아,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아,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아,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꼬일까?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基時 人有基人), ‘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도 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거나 앞으로 일을 펼칠 때 길잡이가 되고 안내가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타이밍이 안 맞아서 실패하거나 어긋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일이 거의 다 만들어지고 프로젝트가 왕성하게 되어 있는데, 꼭 ‘그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강태공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린 것처럼, 경임 씨가 글꽃을 피우며 만학도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처럼 필자도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다음 책을 준비하며 새로운 사람들, 시절인연 만날 설렘을 안고 강의실로 들어갑니다. 자기 걸음에 집중하면서 말입니다. 주변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속도와 방향에만 신경 쓰며 새해 새 사람, 새 때를 기다려볼까요. 당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 2023-01-3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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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째 한 남자가 가슴속에 있습니다”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나이를 한 살 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것이 내 경우는 50세 이후였던 것 같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도 법적으로 ‘만 나이’를 적용한다고 하니 한 살을 되돌린 느낌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 살이 어딘가. 그러니까 서양처럼 우리도 이제는 태어났을 때 0살로 시작하는 것이다. 토끼띠인 나는 올해 생일에 환갑을 맞는다.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났다고 쳐서 0살이라 우겨도 또래 친구들은 함께 웃어주며 공감하리라. 시집 못 간 노처녀가 한해 한해 더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듯이(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조하고 심란하기는 여전할 테지), 이혼 후 ‘돌싱’ 10년 차인 나도 이제는 막차를 탄 느낌이 확연하다. 60세, 재혼이든 그저 친구 사이든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올해 마지막으로 삼겠다는 뜻인데, 이미 너무 늦었나? 솔직히 50대가 끝나는 작년을 기점으로 했지만 나 스스로 1년 더 연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만 나이가 적용된다지 않나. 이렇게 연장, 연장하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달래는 걸 테지. 사랑에는 연령도, 국경도 없다지만 그건 그런 사랑을 성취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령에서 걸리고, 국경은 아예 넘어볼 생각도 못 한다. 그렇다고 이혼 후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빴고, 이미 성인이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에 두 아들을 심리적으로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혼을 하고 나니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집착까지는 아니라 해도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저 마음뿐이지만 그 마음뿐인 마음을 더 쏟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막연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만나면 좋고 못 만나면 하는 수 없고. 그런데 이런 말은 하나마나다. 만남을 위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로또에 당첨되려면 우선 매주 로또를 사야 할 게 아닌가. 내 나이 60,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나보다 두 살 많은 이혼 선배 언니는 기한을 정해놓고 남자 찾는 일에 열심이고 부지런했다. 주변에 소개를 부탁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적당한 사람이 없나 둘러보는 등 적극적이었다. 내가 올해까지만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한 것도 실은 그 언니의 말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언니는 만 60세까지 열심히 찾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고 한 것이다. 이혼한 지 30년 된 그 언니는 말했다. 혼자 밥 먹으면서 혼자 늙어가는 것, 너무 쓸쓸할 것 같다고. 결혼은 안 해도 함께 밥 먹고 편안한 차림으로 밤마실도 가고, 그러다 온기 비치는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구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싫은가? 혼자 사는 사람 백이면 백, 다 그런 사람을 원한다고 할 테지. 하지만 그 언니는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던가. 60세에 소개팅을 하기까지 했으니. 결과는 이번에는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지만. 그렇게 해서 그 언니는 본인이 말한 대로 결연히 ‘연애계’를 떠났고, 지금은 동성 친구들 속에서 다양한 취미생활로 삶의 활력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없이 올해 60세가 된 나는 포기하고 말고도 없다. 포기란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카드 중 하나니까.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노력했지만 실패하거나, 노력한 후에 포기하거나. 이런 세 가지 카드 말이다. 떠난 사랑에 10년째 가슴앓이하는 나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런 사설을 늘어놓으려던 건 아닌데. 실은 내게는 짝사랑 상대가 있다. 사랑 중에 가장 안전하고, 돈도 안 들고, 헤어질 염려가 없는 게 짝사랑이라고 하듯이 내 사랑도 그렇다. 엄밀히는 짝사랑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딱 3개월을 만난 사람.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부남을 만났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는 수 없다. 그러곤 10년을 가슴앓이 중이다. 아니 앞으로 30년을 가슴앓이할지도 모른다. 고작 3개월 만나고 30년 가슴을 앓는 사랑. 그 고통이면 유부남을 만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것 아닐까. 그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열두 살보다 더 많았다면 더 좋았을 만큼.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찾았으니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임에도 왠지 그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마냥 푸근하고 의지가 됐다. 물론 이혼한 직후라 쓰라린 상처를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가 유부남이란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끌렸던 것도 그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심리적·정서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아버지는 선비풍에 우울 기질이 있는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멜랑콜리함이 생활 전선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적성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금융 계통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고, 설상가상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표를 쓴 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정신과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욕실에서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 미처 손 써볼 겨를도 없었던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늘 그리웠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에 아예 없으면 부재만을 느꼈을 테지만, 다섯 살 무렵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이였다. 그렇게 형체 없는 그리움에 아버지 있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버무려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허한 속을 휘젓곤 했다. 이혼한 남편은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다. 때로는 조종을 했다. 사랑을 거래하고 조건을 걸면서 늘 나를 목마르게 했고, 안달나게 했고, 외롭게 했다. 결혼한 지 10년 지났을 무렵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 여자를 꾸준히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꿔가며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웠다. 부부랄 것도 없이 어느 새 우리는 남남이 되어 있었고, 작은애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각자의 길을 택해 떠났다. 그는 지금도 어느 여자의 치마폭에 감겨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상을 쫓는 사랑 나는 그렇게 늘 쓸쓸했다. 전 남편을 통해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붙잡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스러져버렸고, 그러고는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이 고픈 내게 사랑을 선물로 주러 온 사람 같았다. 이혼 후 내가 찾은 일은 출판 기획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 전까지 출판사 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 단절된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취직할 수 있었다. 규모도 꽤 되는 곳이었다. 언론 계통의 출판을 의뢰하러 온 그를 그렇게 만났다. 책이 나온 날 자축 겸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며 그가 식사 대접을 제안했고, 그 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날부터 3개월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언론사에 근무했던 터라 비교적 자유로이 시간을 낼 수 있는 그에 비해 나는 붙박이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더 자주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쪽은 처음엔 그였다. 만나는 동안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가 두어 차례 꺼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내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정확히 석 달 만에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다. 만나는 내내 그만 만나야지, 그만 멈춰 서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면서. 그가 멈추면 멈추는 것인가? 내가 멈추자고 했을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없는 듯이 질주하더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던 게 누구였던가. 결혼도 남자가 하자고 해야 성사된다더니, 만났다 헤어지는 주도권도 남자가 쥐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리지도 않았지만 매달려봤자라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알았다고 하고, 그러자고 하는 것으로 우리 관계는 끝났다. 그나마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추스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때부터 내 마음에서 짝사랑이란 형태로 10년째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10년간 끌어오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것을. 그는 나에게 상처 준 남편을 대신하고, 목마른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남자라는 것을. 올해 나는 그 남자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60세 이후 새로운 10년을 또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은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짝사랑이나마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때로는 행복하기조차 할 텐데 왜 굳이 지우려 하냐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여자인가. 아니면 그의 아내가 죽기를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옆자리가 비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건 환상도 아니고 망상일 테지만. ※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3-01-27 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