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조회사가 늘어나면서 소비자는 혼란스럽다. 비슷한 서비스와 가격에 회사명도 엇비슷하다. 소비자의 이런 고민을 반영하듯 최근 상조회사 사이에선 차별화된 서비스로 고객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수많은 상조상품 중 특별해 보이는 아이디어 상품은 없는지 들여다보자.
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상조 서비스 중가장 빨리 일반화한 것 중 하나로 ‘부고 알림’을 꼽는다. SNS를 통한 청첩 전달이 일반화되면서 SNS를 이용한 부고도 자연스러운 문화가 됐다. 과거에는 고령층을 염두에 둔 문자메시지 활용이 일반적이었지만,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카카오톡 등 SNS를 통한 서비스도 제공한다. 부고에 관한 메시지와 함께 장례식장의 위치 정보도 알려준다.
스마트폰 사용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문상·조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상조회사를 통하지 않고도 주변에 쉽게 알릴 수 있다. 이런 애플리케이션은 메시지 전송뿐만 아니라 장례식장 방문이 어려운 조문객을 위한 온라인 조문이나 조의금 보내기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조문도 스마트폰으로 쉽고 편하게
온라인 조문과 유사한 형태 중 하나로 많은 상조회사와 추모공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이버 추모관이 있다. 사이버 추모관에서는 고인의 생전 모습이나 장례 과정 등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유족이 고인을 보고 싶을 때 언제 어디서든 이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일부 유족들은 고인에게 전할 수 없는 메시지를 작성해 사이버 추모관을 편지함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장례식 도중 경황이 없는 유족을 위한 사진, 영상 앨범 서비스도 최근 선호하는 항목 중 하나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해 DVD 형태로 제공하는 곳도 있고, 아예 앨범 형태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일반적인 영정사진이 아닌 LED 영정액자도 점차 일반화하는 추세다. LED 모니터를 활용한 영정액자는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 효과도 있지만, 여러 장의 사진을 게재할 수 있다.
상조회사에서 운영하는 쇼핑몰에서 사용 가능한 상품권을 제공한다든가, 상조회사와 연계된 추모공원이나 추모관 분양 혜택을 제공하는 것도 증가 추세에 있는 서비스 중 하나다.
업계 관계자는 “형식보다는 편리함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려는 노력이 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고가의 가전제품 제공 등 서비스로 포장된 상품 판매는 소비자 입장에서 오히려 손해일 수 있어 상조 서비스에 가입할 때 잘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본에선 세분화한 서비스 늘어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를 먼저 맞이해 각종 장례 서비스 개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은 보다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변화 중 하나는 자유장(自由葬)의 등장이다. 과거 일본의 장례는 회사나 단체의 주관으로 치르는 단체장이나 가족 중심의 가족장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에 장례를 간소화하려는 이들이 화장식만 치르는 직장(直葬)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고인을 추모하는 형식의 자유장을 선보이고 있다. 꽃으로 만든 재단을 없애고 영정사진만 놓는 경우도 있고, 마치 파티처럼 음식을 놓고 문상객들끼리 고인에 관한 추억을 나누는 형태로도 진행된다. 흥겨운 음악을 틀어놓는 장례도 있다 하는데 음악장이라 불린다. 상조회사에 따라 오리지널장(葬)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영정사진도 독특하다. 차려입고 촬영한 영정사진을 선호하는 국내와 달리 고인의 직업이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사진들을 모니터를 통해 순차적으로 상영하는 서비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장례 이후의 서비스도 국내와는 차별화한 부분이 있다. 추모공원이나 수목장 외에 바다에 유골을 뿌리길 원하는 가족을 위해 선박을 준비해 해상에서 일종의 영결식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유품정리회사와의 연계를 통한 고인의 유품정리 서비스와 상속에 대한 법률자문 서비스도 눈길을 끈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유족의 슬픔 관리 ‘애도’를 위한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다. 유족의 치유와 건강 유지를 위해 전문 상담가들이 배치된 상조회사들도 적지 않다. 이밖에 반려동물을 위한 보험이나 장례 상품에 대한 서비스도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평사원 때였다. 직속상관으로는 주임, 계장, 과장, 지점장이 있었다. 체력단련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야유회를 갔던 날, 족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는 부서별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친목을 도모하는 윤활유 역할도 하지만 지나치면 싸움판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삼삼오오 나뉘어 술을 먹다가 다른 곳에서 온 행락객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누군가 뛰어와서 과장에게 필자가 싸우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멀리서 필자와 비슷한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급히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당시 간부급 술자리에는 계장, 과장급이 여럿 있었고 최고 책임자인 지사장도 있었다. 필자가 싸움의 주동자였다면 소속 과장으로서 지사장 보기에도 면목이 없고 동료 과장들한테 얼굴 들기도 난처한 상황이 된다. 보고를 받은 과장은 “아니야, 그 친구는 절대 말썽 부릴 친구가 아니야. 다시 알아봐” 하고는 보고자를 돌려보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나중에 과장과 함께 있었던 선배 동료로부터 들었다. 선배는 “야! 과장님이 아주 널 잘 보고 있더라! 대번에 그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던데!”라고 말했다. 여러 명의 부하 직원 중 한 사람일 뿐인 필자를 과장이 그렇게 생각해줬다는 것이 우선 고마웠다.
다음 해에 필자는 서울의 한 야간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회사 대표의 동의서를 요구했다. 근무지가 수원이어서 서울로 학교를 다니려면 퇴근시간 전에 회사를 나와야 했기에 동료들 눈치도 보였고 무엇보다 사장의 허락이 떨어질지도 의문이었다. 혼자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과장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각서까지 쓰고 사장 추천서를 받아다 줘서 무사히 편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학교 다닌답시고 일찍 퇴근하는 것을 직원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사시(斜視) 눈들이 하이에나처럼 여기저기서 필자를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새벽같이 출근해 사무실 청소도 하고 남들이 남기고 간 일들도 깔끔히 처리했다. 주말에는 용무가 생긴 사람의 숙직을 대신 서주는 등 처신을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필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감싸주며 배려를 해준 과장이 있어 든든했다.
더욱 감동적이었던 일은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회사에서 직계에게는 상조규정이 있었지만 3촌(三寸) 이상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달랑 본인의 휴가만 하루 인정해주는 정도였다. 그때 아무도 문상을 오지 않았는데 과장이 휴가를 내서 일부러 장지까지 찾아와줘서 깜짝 놀랐다. 장지는 주소도 불명확하고 교통도 불편하다. 지리를 모르면 큰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찾아와준 과장을 보는 순간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범벅이 되었다.
요즘은 연로하셔서 함께 술을 먹거나 나들이를 못한다. 설날이 되면 찾아뵙고 세배를 하고 전화 안부만 가끔씩 하지만 마음속의 끈끈한 정은 여전하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급훈을 ‘엄마가 보고 있다’로 바꾸자 아이들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남자는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이 있다. 그 시절 과장이 믿어줬기에 필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바른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종활(終活, 슈카쓰)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준비 활동을 뜻하는 일본 사회의 신조어다. 보통 일본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공채 시기에 맞춰 취직활동(就職活動)에 노력하는 것을 슈카쓰(就活)라고 줄여 부르는 것에 빗댄 것. 발음까지 같다. 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기업 면접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처럼 죽음이 머지않은 시니어도 그만큼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종활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일본에서 종활이란 단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유명 매체인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서 이에 관한 연재가 진행되면서 일본인들 입에서 종활이란 단어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유력 출판사가 선정하는 ‘신조어·유행어 대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대중화가 됐다.
일본에서의 종활은 단순한 장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미리 내 삶을 정리하는 대표적 아이콘인 ‘엔딩노트’의 작성에서부터, 이달 국내에서도 시범사업이 마무리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도 연관이 있는 연명의료 혹은 존엄사에 대한 논의도 포함된다.
일본 사회에서 종활은 다양한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묻힐 묘지 동기들과 온천여행을 통해 친분을 쌓는 서비스 등 고령화 사회를 등에 업고 이와 관련된 사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장례식 찾아줄 지인 없어”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종활을 준비하는 일본인들에게 걱정 중 하나는 비용이다. 일본은 절에 고인을 모시고 친척이나 직장동료, 지인 등 손님을 맞이하는 장례 형태가 일반적인데, 이럴 경우 우리 돈으로 2000만~3000만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물론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이다. 일본도 우리처럼 조의금 문화가 있는데, 보통 1만 엔(10만 원) 전후의 금액을 전달한다.
문제는 장례식을 찾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고인의 사망 시점에는 직장과 같은 인적 교류가 이미 단절된 상태인 경우가 많기 때문. 부를 사람도 많지 않고, 부르고 싶어도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실적으로 찾아줄 사람이 없다면 장례비용이 유족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 또 상조회사의 높은 상품가격에 대한 불만도 장례에 대한 시선 변화에 불을 지폈다.
이로 인해 가족들끼리만 장례를 치르는 ‘가족장’ 등 소규모 장례식을 선택하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화장만 하면 우리 돈으로 200만 원 내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장례식은 500만 원 이하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런 소규모, 저비용 상품을 내놓는 상조회사가 늘면서 가격이 점점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죽기 전 지인들과 이별하는 ‘생전장’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의 생전장(生前葬)도 종활의 새로운 방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사실 일본 사회에서 생전장은 최근에 생긴 문화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만담가나 군인이, 현대에는 연예인 등이 죽기 전 지인을 만나는 마지막 기회로 활용하는 행사를 가져왔는데 이를 생전장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활동의 종료를 알리는 수단인 셈이다. 죽은 자가 없는 장례식인 만큼 자서전 출판기념회나 파티 등의 형태를 띤다.
지난해 10월 21일에는 프로레슬러 김일과의 대결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전직 프로레슬러이자 사업가인 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猪木)가 자신이 선수로 활약했던 료고쿠 경기장(両国国技館)에서 생전장을 치렀다.
이런 행사는 ‘유명인’의 행사로만 인식됐지만 종활이 대중화되면서 생전장의 대상도 일반인들에게 확대되고 있다. 지인들을 불러놓고 사진이나 기록 등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그간의 신세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식이다. 선물을 전달하기도 하고, 노래방 기계를 놓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생전장의 장점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행사의 형식을 정할 수 있고, 본인의 뜻과 전언을 직접 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형식이 자유롭다 보니 비용면에서도 유리하다. 다만 일본 내에서도 완전히 대중화된 문화는 아니어서 낯설어하는 지인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주장, 애완동물 종활 서비스도 등장
최근 종활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서비스 중 하나는 바로 우주장(宇宙葬) 서비스다. 미국과 일본 회사가 준비하고 있는 일종의 상조상품으로 상업용 로켓을 이용해 고인을 화장한 골분을 대기권 밖까지 이동시켜주는 방식이다.
화장한 유해 모두를 하늘 위로 올리는 것은 아니다. 가로·세로·높이가 모두 1cm 정도의 작은 캡슐에 유골의 일부를 담는다. 무게로 따지면 1g 남짓 된다. 다른 신청자들과 함께 로켓에 실려 발사된 후 대기권 밖에 도달하면, 위성궤도에 캡슐이 뿌려진다. 캡슐은 궤도를 따라 지구 주변을 돌게 되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중력에 이끌려 대기권으로 추락해 재로 변한다. 우주 쓰레기처럼 대기권 밖을 떠돌거나 위성 등 다른 시설에 방해가 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비록 유골의 형태이지만 삶의 마지막에 우주와 지구 전체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는 로맨틱한 내용이 마케팅 포인트다. 이런 우주장 서비스를 받으려면 1인당 28만5000엔, 우리 돈으로 약 300만 원 정도 비용을 내야 한다.
애완동물을 위한 종활 서비스도 있다. 이동식 화장 차량을 통해 애완동물을 화장할 수 있고, 장례 서비스도 지원된다. 사람 장례식 못지않다.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납골당도 준비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인의 이러한 종활 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종활 따위 그만두세요(終活なんておやめなさい)’의 저자이자 불교 학자인 히로 사치야(ひろさちや)가 대표적이다. 60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하며 일본 불교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종활은 사후를 위한 불필요한 준비에 불과하며 지금 즐거운 인생을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하면서 “상속 등 사후에 벌어질 일들 역시 남아 있는 유족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근대사 속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영정사진이다. 부산의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옆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나,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든 이상호 의원의 사진은 그 장면만으로 아직까지도 상징성을 인정받고 회자된다. 영정사진은 고인이 누구였는가 설명하는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을 꺼려하고 좀 더 뒤로 미뤄놓고 싶어 한다. ‘장수사진’이라는 선의가 느껴지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정사진이 언제부터 우리의 장례 문화에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자면 1934년 11월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의례준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준칙 전문 중 기제(忌祭)의 서(序) 첫 번째 항목에 ‘제주지방(祭主紙榜) 또는 사진(寫眞)을 제위(祭位)에 봉안(奉安)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전까지 영정(초상화)은 지금의 용도와는 조금 달랐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례나 상례 때 등장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신주나 지방 대신 사용했다. 사당을 이전에 영당(影堂)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영정사진 탄생
실제로 일본에서는 훨씬 더 이전에 영정사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개항을 통해 사진이란 문물이 수입된 이후 일본에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 또 세이난전쟁(1877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때의 사진을 일본의 최초 영정사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전통은 청일전쟁(1894년)에도 이어졌다.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3년. 한성순보에 촬영국이라는 사진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황철이란 사람이 세운 사설 사진관이다. 이후 지운영은 1884년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물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전해지나 남은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정사진 자료 역시 찾기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고종 황제나 순종 황제 장례식에도 영정사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의 매일신보 부고 기사에는 그의 초상사진이 쓰였지만, 경성일보에 게재된 그의 장례식 보도사진 속 제위에도 영정사진의 모습은 없다.
광복 후인 1945년 7월 5일 당시 주한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영상자료에는 백범의 영정사진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은 운구행렬과 효창공원까지 함께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과거 국내에선 장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해 영정사진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발견되는 오래된 사진도 대부분 1960년대 이후의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제의 의례준칙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례 때 영정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1982년을 기준으로 영정사진의 대중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식 장례 상품을 그대로 들여온 상조회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정사진 문화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에서 영정사진이 장례식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의견이 있다.
인식 바뀌어 웃는 사진 쓰기도
불과 얼마 전까지 영정사진 제작은 남겨진 자녀나 가족의 몫이었다. 따로 영정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가족이 사망했을 때 준비되는 영정사진은 증명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인화한 조악한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 준비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 사진 장비와 기술 보급으로 사진관이 많아지고, 영정사진 촬영을 일종의 봉사활동 수단으로 삼는 사진가들이 늘면서 사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한 동호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정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이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영정사진이 장수사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진찍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촬영해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동네 노인정 등을 통해 영정사진을 파일 형태로 공동 보관하는 문화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그렇다면 영정사진은 어디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제일 만만한 곳은 역시 사진관이다.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영정사진까지 함께 찍어두는 사람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인물사진 전문의 흑백사진관도 서울 북촌이나 연남동 등 일부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사진 크기는 28×36㎝다.
현직 사진사들은 아직까지도 본인이 직접 와서 찍는 영정사진보다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합성해 만드는 게 많다고 말한다. 물론 요즘은 자신의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솜사탕 사진관 고용주 실장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치아가 보이게 웃거나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측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만약 의상이 문제라면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뒤 한복이나 양복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고 비용도 6~7만원 선으로 장례식장에서 만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금년은 유래 없는 10일간의 추석 명절 휴일로 국민들은 긴 휴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낸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명절을 중시하는 어른들에게는 괘씸한 젊은이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명절만 되면 매년 두 번씩 반복되는 교통체증을 겪으면서도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명절이 끝난 후에는 부작용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통계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즐거운 명절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명절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계승과 소멸을 되풀이하면서 전통은 우리 앞에 서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문화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전통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례는 단발령을 계기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혼례는 서양식으로 대부분 진행되고, 상례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를 설치해 상조회사에서 대신 치루고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제사인데 그 역시 원형이 변형되고 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낼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성묘의 풍습은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장례 방식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면서 묘지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진행되면 성묘를 가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고, 한 세대만 지나면 성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70~80세가 넘은 어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일 텐데, 그 후손들은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심지어 손자 세대로 가게 된다면 이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연스런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 변화하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성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제사를 언제 지낼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집안도 많다. 과거에는 늦은 밤 시간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지만 요즘에는 직장 문제로 늦은 시간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불편해서 제사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날 결근을 하거나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후손으로서의 의무감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제사 절차나 상차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다른 종교 시설에 모시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묘의 방법을 바꾼 가족이나 문중도 많다.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상들의 산소를 한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성묘나 제사가 사라지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전통을 버리자니 불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구나 진퇴양난의 고민을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예학자였던 신의경 선생은 개장(改葬)을 논의하면서 “옛날의 개장은 분묘가 어떤 이유에서 붕괴되어 시신이나 관이 없어질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가 없이도 천장(遷葬, 천묘)을 하는데,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장(移葬)이나 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훼손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조상의 묘를 함부로 이전하거나 개장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한곳에 모시고 성묘를 하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일지 모른다.
과거 매장하던 풍습에서 화장하는 풍습으로 바뀐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70% 정도의 국민이 화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그릇에 담아 봉안당(奉安堂)에 모시는 가족이 늘고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정책으로 화장을 권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봉안당이나 수목장이 관심을 받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필자가 평소에 노인을 많이 상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은 자신들의 책무이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후손들이 잘 해내기도 어렵고 선산에 묻혀도 수시로 돌볼 자녀도 많지 많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미래에 대해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불편한 진실도 아니고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 혹은 문중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은 행복한 명절이 되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면 좋겠다.
내가 묻힐 곳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의 취향이나 선호 방식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찾아올 자녀들도 고려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고민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 전통적인 매장묘 형태로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묘지 부족을 생각하면 봉안당(납골당)이 답이지만 빽빽한 아파트 같은 장소를 마뜩찮아 하는 이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 가까운 수목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목장은 말 그대로 별도의 봉분이나 시설 대신 나무 밑에 골분을 뿌리거나 함에 넣어 묻는 방식을 말한다. 수목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업계에선 1993년 스위스의 우엘리 자우터(Ueli Sauter)란 사람이 유언에 따라 친구의 골분을 나무 밑에 뿌린 것을 시초로 꼽는다. 이후 자연을 해치지 않는 ‘녹색장묘’의 개념으로 확산되다, 2004년 故 김장수 교수의 수목장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국내 보급이 시작됐다.
서양에선 자연친화적 가치 중요시
국내에서 수목장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자연장’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다. 이후 국내에 자리 잡은 수목장의 개념은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목장을 시작한 스위스나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경우 골분을 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묘비나 봉분 등의 인공시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 영국에서는 골분함을 사용하더라도 생분해성 재질의 제품을 써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하고 있고, 스위스는 유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나무에 페인트로 표시하는 것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국내의 문화는 다소 다르다. 아무래도 고인을 모시는 것은 자손의 도리로 여기는 문화가 남아 있고 제사나 차례와 같은 풍습이 유지되는 만큼, 묘소는 고인을 모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운영되는 추모공원의 수목장을 보면 나무 밑에 오래 보관이 가능한 분골함으로 하거나 작은 비석을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예 소규모의 봉안당을 갖추는 경우도 있다.
기존 숲 활용, 국내에선 많지 않아
수목장은 기존 숲을 활용한 자연수목 활용 방식과 공원묘지 조성을 위해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는 식재형으로 나뉜다. 시설에 따라서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는 곳도 있다. 자연수목을 활용할 경우 숲을 자연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관리가 어렵고 제반 시설을 갖추기가 만만치 않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선 산림청에서 조성한 경기도 양평군의 하늘숲추모공원이 대표적이다. 인천가족공원에서는 자연수목을 활용한 것과 임의로 식재한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쓰인다. 이외에 공설이나 사설 수목장 시설은 대부분 식재형이라고 보면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 달리 대부분의 수목장은 울창한 숲을 활용하는 모습보다는 인공적으로 갖춰진 정원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수목장의 증가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에서도 보건복지부가 중심이 되어 묘지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수목장 같은 자연장지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문중의 자연장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는 등의 제도개선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산림조합중앙회도 지난해 자체 상조회사인 ‘SJ산림조합상조’를 설립하고, 수목장을 위한 자연장지를 계속 늘려나갈 계획에 있다.
비싼 가격도 걸림돌
수목장의 단점 중 하나는 비싼 가격이다. 애초 취지대로라면 자연에서 온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린다는 개념이라 돈이 들 이유가 적지만, 국내에서는 수목장이 인공적으로 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나무 값’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안장되는 공동목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 봉안당(납골당) 시설보다 비싸다.
공설 시설의 경우 계약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50만~200만원 내외의 분양비용이 필요하고, 별도의 관리비가 청구되기도 한다. 사설은 훨씬 비싸 함께 사용하는 공동목은 300만~400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고, 부부목은 1000만원 정도가 든다. 일가(一家)가 사용할 수 있는 가족목은 서울과 가까운 사설 공원묘지의 경우 5000만원이 넘기도 한다.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까?’에 대한 고민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내가 기르고 있는 애완동물이나 유품의 정리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무작정 버리기에는 아까울 물건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필요한 물건들이니 미리 정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맡아줄 누군가가 있다 해도 미안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를 먼저 맞이한 일본은 유품정리에 대한 문제의식도 빨랐다. 일본의 경우 유품정리가 이슈가 된 것은 고독사하는 사망자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장례를 처리하고 상속할 자녀가 없는 경우 본인의 유품을 처리하기가 곤란한 것도 문제가 됐다. 실제로 일본 정부에서는 2030년 초고령화로 인해 50세 남성
3명 중 1명은 미혼인 상태에서 사망하게 되며, 전체 노인 중 절반은 고독사하게 될 것이라는 자료를 발표했을 정도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유품정리사다. 일본 유품정리사인정협회(遺品整理士認定協会)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일본 내에서 유품정리사로 활동 중인 인원은 약 1만6000명에 달하며, 등록법인도 900여 개나 된다.
버리는 것만이 능사 아냐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품정리사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한 편. 국내에서 활동 중인 유품정리 업체 중 상당수는 고독사하거나 살해당한 시신을 수습하는 ‘특수청소업체’다. 아직까지는 고인이나 고인의 유품을 직접 처리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유족이 있거나 고인이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에는 주로 폐기물업자나 재활용업자가 유품을 처리한다. 고인이 사용하던 집기를 헐값에 사들여 사용 가능한 제품은 중고물품 업체에 판매하고 나머지 유품들은 폐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유족에게 직접 의뢰를 받기도 하지만 상조업체나 장례식장 등을 통해 일을 맡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고인 유품에 대한 이러한 처리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대표적 유품정리회사인 키퍼스의 한국법인 키퍼스코리아의 김석중 대표는 이렇게 조언한다.
“국내에선 고인의 유품을 버리고 처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유족들도 유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나 유품정리의 기본은 판매를 통해 환급 가능한 유품을 골라내고, 사회적·문화적 자산에 대한 온당한 가치를 매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버리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입니다. 또 상속 등 법률적 절차에 대한 고려도 필요합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세상을 뜨기 전에 직접 자신의 유품정리를 부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대부분 다급하게 유족에 의해 의뢰를 받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 고인이 미리 부탁할 때엔 사망 후 자녀나 지인을 통해 연락이 오기도 하지만, 요양병원이나 상조회사 등을 통해 영면 소식을 알게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적극적인 사전정리가 필요
전문가들은 죽음을 앞두고 운신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 허둥지둥 정리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조금씩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두길 조언한다.
예를 들어 사진이나 서신과 같은 개인적인 추억의 물건을 기록물로 보고 남길 것인지, 아니면 미리 파기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본인 입장에선 자산이라 보기 어려운 것들도 물건에 따라 기증 등을 통해 활용방안을 찾을 수도 있다.
또 유품을 정리하는 사람이 힘들지 않도록 미리 조금씩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품을 정리할 사람을 미리 정해놓거나, 사전에 유품정리 부탁을 할 만한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놓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사후의 유품 정리는 본인이 결코 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기르던 반려동물의 처리는?
고인이 기르던 반려동물도 문제다. 반려동물의 양육이 더 이상 어려워질 때 지인들에게 분양하거나, 관련 기관에 분양을 부탁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유기견이나 유기묘로 내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 맡기는 것도 미덥지 않을 때가 있다. 비용과 함께 양육을 부탁한다 하더라도 사후에 그 약속이 잘 지켜지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관련 신탁 상품도 등장했다. 지난해 KB국민은행은 업계 최초로 KB펫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고객이 은행에 자금을 맡기고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를 지정하면, 은행이 고객이 사망한 후 반료동물의 보호나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반려동물 부양자에게 일시·분할해서 지급하는 신탁상품의 일종이다. 처음 출시됐을 땐 반려견만 해당됐지만, 최근에는 반려묘까지 그 대상을 확대했다. 가입 문턱도 높지 않다. 일시금을 맡길 경우엔 200만원 이상, 월 적립식일 경우엔 1만원 이상이면 가입이 가능하다.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면 무엇보다 음식 자체의 맛이 좋아야 하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오순도순 재미있는 담소를 나누는 기분 좋은 상태에서 먹어야 한다. 더 바란다면 주위 분위기가 아름답고 잔잔한 음악소리가 바닥에 깔린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음식 먹을 때마다 매번 그런 장소에서 좋은 사람들과 먹기는 황제가 아닌 이상 힘들다.
필자는 어떤 장소이건 아무음식이나 잘 먹지만 불결할 것 같은 음식점이나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 곳에서의 식사는 극도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이제 나이 들어 이것저것 가리는 것도 주책이고 어른스럽지 못해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싫어하는 곳 첫 번째가 초상집 음식이다. 초상집에서 통곡소리 들으며 흰 소복 입은 여자들이 날라다주는 음식에는 죽은 사람의 귀신이 붙어 있을 것 같다는 선입견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들어오던 옛날이야기에 의하면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기가 약한 사람에게 옮겨와 병들게 하거나 저승길에 동행하자고 속삭인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아내도 필자가 초상집에 다녀오는 날은 현관문을 들어서기 전에 뒤로 돌아서게 하고 소금을 한 주먹씩 뿌린다. 귀신을 쫓는 의식이란다. 귀신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우리세대는 귀신과 죽은 사람을 동일선상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초상집음식을 제대로 먹으려면 귀신의 존재를 의식에서 없애야 한다.
요즘은 장례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흰 소복 입은 여인네를 보기도 어렵거니와 더더욱 통곡소리를 들어본지는 까마득하다. 심지어 예전에는 금기시되던 웃음소리도 초상집에서 들을 정도로 망자에 대한 애틋함이 사라졌다. 핵가족화 되어 어르신들과 떨어져있는 기간이 길어졌고 환경과 의료시설의 발달로 무의미한 삶을 너무 오래 살다보니 그나마 남아있던 애잔한 정도 요양원 생활을 거치면서 얕아져 버렸다.
음식서빙은 일가친척의 여인네들이 도와주던 시대에서 군복 같은 제복을 입은 전문 상조회사의 잘 훈련된 직원들이 도맡아하고 있다. 음식도 식당에서 위생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한결 좋아졌다. 예전의 초상집과는 다르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머리에 돼내며 초상집 음식 먹기에 점점 노력하고 있다. 살고 죽는 것이 다 한편의 인생사 드라마로 인식한다.
두 번째가 시장바닥에 좌판을 깔고 파는 음식들이다. 방송에서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시장투어를 하면서 값싸고 다양한 음식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면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자만 아직은 시장통로의 좌판음식은 비위생적인 이유로 기피한다. 좁은 시장 통이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부딪치는 것도 짜증나지만 시장의 좌판에는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무엇을 제대로 씻기가 어렵다. 식기세척이 어려우니 접시에 비닐을 씌우고 그 위에 뜨거운 음식을 담아내고 다 먹고 나서 비닐만 걷어서 버리고 새로 비닐을 씌우는 것으로 설거지가 필요 없다. 간편한 방법이지만 뜨거운 음식을 담아내는 비닐에서 나오는 환경호르몬이 걱정된다. 물이 귀하니 음식재료를 제대로 세척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음식원가를 낮추려고 저가의 재료에다가 맛을 내게 하는 조미료를 과다하게 살포하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주차시설이 부족한 것도 불편하다.
하지만 요즘 시장은 지자체의 재래시장 살리기의 정책에 힘입어 깨끗하게 변모되고 있다. 가벼운 주머니로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어보기 좋은 곳이 시장이다. 손님이 찾아와야 시장상인이 살고 상인이 살아야 시장도 발전하고 더욱 위생적이고 깨끗해 질 것이다. 잘못된 시장음식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자주 찾아가도록 노력한다면 분명 달라질 것이다.
장례에 대한 걱정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장례비용을 아끼기 위한 방법으로 꽃 장식 하나 없는 작은 장례식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한편에선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부하겠다는 신청자가 26만 명을 넘었다. 국내에서도 이 같은 장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상조 관련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상품 구매가 안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은 삶의 평화로운 마지막을 위해 장례 상품을 구매할 때는 계약 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내 상조시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일반 보험회사에서 운용하는 상조보험과 상조회사에 판매하는 상조상품이다. 이 두 시장은 엇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 상조보험은 금융상품의 일종으로 보험업법의 규제를 받고 금융감독원이 감독한다. 이에 반해 상조회사의 상조상품은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의 규제를 받는 선불식 할부거래로 공정거래위원회가 관리한다.
상품의 특성도 당연히 다르다. 상조보험은 계약에 따른 심사가 있고, 가입 거절이나 보장의 일부 제한이 있고, 자살과 같은 고의적 사망은 보장을 받을 수 없다. 대신 가입자가 사망하면 미납입 보험료 납입 의무가 없다. 이에 반해 상조상품은 가입에 대한 제약이 없는 대신, 사망 후에도 납입 의무가 사라지지 않는다.
보험사 개점휴업, 상조회사는 성장 중
현재는 소비자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게 됐다. 보험업계에서 운용하던 상조보험을 대부분 철수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재무건전성 등을 이유로 보험회사를 선택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험업계에서는 동부화재, 한화손해보험, MG손해보험이 2015년을 마지막으로 상조보험 판매를 중단했고, 그나마 끝까지 남아 있던 KB손해보험도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판매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화재의 경우 상품 판매를 중단한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가입 권유도 하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에서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바탕으로 한 상조회사의 성장으로 인해 판매가 저조해지면서 손해율이 높아진 것이 판매 중단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몇몇 보험회사는 다른 보험상품의 특약 형태로 서비스를 전환한 상태다. 조만간 상조보험이라는 단어는 사라질 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상조회사의 상조상품 가입자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하반기 상조업체 주요 정보 공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9월 현재 가입자 수는 약 438만 명으로 6개월 만에 19만 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규모가 큰 상위 업체에 몰려 있는데, 전체 가입자의 77.6%가 가입자 수 5만 명 이상인 21개 업체에 가입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입자 수가 자본력과 안정성으로 직결되는 상조업계의 특성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100억원 이상의 선수금을 보유한 55개 업체의 선수금은 전체 선수금의 95.2%에 달한다.
가입자가 크게 늘면서 건전성이 확보될 토대는 마련됐지만, 서비스의 질은 아직이라는 평가가 많다. 지난해 10월까지의 1372소비자상담센터 상조 관련 상담건수를 보면 7503건으로 2015년 상담건수(1만1779건)에 비해 감소 추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적은 숫자는 아니다.
가입자 울리는 다양한 꼼수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국내에서 활동 중인 상조회사는 195개사에 달한다. 이 중에서 옥석을 가릴 방법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찬찬히 살펴보면 안정적인 회사를 구분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조언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정거래위원회 홈페이지(www.ftc.go.kr)에서 가입을 고려하는 회사의 정보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정보공개 메뉴에서 선불식할부거래사업자를 선택하면 회사 정보를 상세히 볼 수 있다. 이외 검색할 수 있는 정보도 꽤 많다. 기본적인 정보는 물론이고 자산과 부채, 자본금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주의 깊게 봐야 할 내용은 선수금 보존비율과 보전계약 체결기관, 그리고 총 선수금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가입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선수금 보전기관에 존재하는지, 납부한 회비 누계액이 정확한지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이름이 보전기관에 기록돼 있어야 폐업 등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때 보상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안마의자와 여행상품 등을 끼워서 파는 상품이 많아져 이에 대한 주의도 요구된다. 결합상품의 경우 상품별 판매 대금을 정확히 확인하고, 계약서를 구분해서 작성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또 여행상품은 판매 주체가 상조업체라 해도 할부거래법의 ‘장례 또는 혼례’에 준하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런 결합상품들은 계약 금액도 크고, 계약기간도 길어 문제가 발생하면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상조업체의 영업을 대행하는 모집인(상조 계약 중계자)들로 인한 횡포도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상당수 모집인들은 상조회사 소속 직원이 아닌 대리점 형태의 개인사업자인 경우가 많은데 소비자 입장에선 이들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계약 과정에서 모집인의 설명에만 의존하지 말고, 계약서나 약관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청약 철회는 계약서를 받은 날부터 14일 이내에 가능하다.
이밖에 상조상품을 판매하면서 실제 계약은 수의(壽衣) 판매계약으로 체결해 소비자를 기만하거나, 일시불 계약으로 유도해 할부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도록 꼼수를 쓰는 경우도 있으므로 대금을 2개월 이상의 기간에 걸쳐 2회 이상 나누어 지급하고 서비스를 받는 거래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만약 일시납으로 대금을 내거나 계약금을 우선 지불한 뒤 장례 서비스를 받은 후 잔금을 내는 형태로 계약을 하면 법 적용을 받을 수 없어 해약할 경우 환급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윤문상(59) 전 교육방송공사(EBS) 부사장은 대한민국의 숨 가쁜 교육현장을 유아교육에서부터 초·중·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담아온 현장 PD 출신이다. 그는 2016년 2월 교육방송 부사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인생 2막 계획은 6개월씩 타국에서 생활인으로 살아보기다. 이를 통해 “인생 리타이어가 아닌 리셋을 해보겠다”는 계획이다. 2016년 하반기는 대만에서 생활했고(4~10월), 2017년 상반기는 베트남에서 한국어와 언론학을 강의하며 거주할 예정이다. 마침 방학을 틈타 잠깐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퇴직 후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세우는 계획이지요. 관광이 아닌 6개월씩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식 ‘생활 거주’는 흔치 않습니다.
“6개월씩 타국에서 살아보기 프로젝트는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강제적 공간 이동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됐어요. 단지 타이어를 바꿔 끼는 리타이어가 아니라 처음부터 새롭게 리셋하고 싶었어요. 의식을 바꾸기 위해선 본인의 자발적 노력뿐 아니라 공간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요. 타국 거주의 강제적(?) 환경 설정으로 리셋한 것이지요.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안에선 자세히 볼 수 있지만 바깥 풍경은 자세히 보지 못합니다. 달리는 버스 밖에서 보면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 보기가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퇴직 후 인생 2막 하면 기존에 하던 것의 연장선으로 강도-속도만 늦추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연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30, 40년 이상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기에 ‘새로운 시작은 새 무대’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익숙한 서울의 아파트 방에 앉아서 머리로만 생각을 하는 것과 말 설고 사람 설고 풍경 낯선 외국에서 생각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한국에선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반면 외국에 갔을 때는 친한 사람도 없고, 언어와 문화 등 많이 불편하지만 원점에서 시작해 나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되지요. 외국에서 생활인으로서 살아보니 단지 출장이나 관광으로 접하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보게 되더군요.”
리타이어와 리셋은 어떻게 다른가요?
“리셋은 한마디로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적극적, 원초적 환골탈태라고나 할까요. 리타이어가 같은 트랙에서 속도만 늦추는 소극적 의미라면 리셋은 속도와 방향, 관점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합쳐 객관적으로 보자는 의미예요. 그러기 위해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요. 한국이라는 익숙한 환경에선 내가 잘 아는 사람, 나를 잘 아는 사람만 만나게 돼 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요.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조직 브랜드, 계급장을 떼고 자연인으로서 자신만의 정체성,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리셋은 의식과 환경을 함께 바꾸는 것이군요. 월화수목금금 열정적으로 일한 분들일수록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시던데요.
“하하. 군대 속담에 ‘졸병보다 제대병이 더 마른다’는 말이 있는데요. 퇴직자들에게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면 자율적 관리를 하지 못해요. 제 경우엔 마인드 세팅을 이렇게 했어요. ‘브랜드 없는 사무실에서 봉급 받지 않고 일할 뿐이다. 초조해하지도 말고, 시간에 끌려가지도 말고 시간을 자유자재로 끌었다 놓았다 하는 여유’를 갖자고요.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에 나를 맞췄지만, 이제 나에게 시간을 맞추자고요. 여기에 환경 리셋 작업으로 ‘6개월 낯선 국가에서 살아보기ʼ를 더한 것이고요.”
‘살아보기’ 리셋 경험 국가로 베트남과 대만 등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한국어, 언론학을 강의하며 생활인으로서 거주 환경이 마련될 수 있는 곳을 골랐지요. 엄밀히 말해선 자기성찰뿐 아니라 세상 관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 2막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심층답사라고나 할까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는데 한 템포, 아니 반 템포라도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힘은 두 배가 들면서 성과는 반 토막이기 쉽습니다. 아시아에서 사업을 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호치민이라는 도시가 이런 발전 단계에 있는데 미래에는 어떻게 바뀔까, 무슨 씨앗을 뿌리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에 안테나를 세우고 관찰하고 통찰해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기회와 잠재력의 나라인 탄자니아나 가나 등 아프리카 대륙으로도 가보고 싶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막상 타국에서 사실 때 생각과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도 같습니다만…
“외국에 살아보니 일단 퇴직했다는 사실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낯설고 어색한 환경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만에선 대학에서 언론학과 특강을 하는 한편 6개월간 랭귀지센터에서 중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과 학생 역할을 동시에 한 셈이지요. 큰 사무실, 비서와 기사 딸린 임원생활을 하다가 작은 책상에서 중국어 기초부터 배우고, 북적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내와 함께 해내야 했지요. 불편하기도 했지만 신선하다는 느낌이 더 컸어요.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대만을 가이드 없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소득 아닙니까. 성장과 발전이라는 불편함을 통해 익숙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아내와 동지애로 끈끈하게 뭉치게 된 것입니다. 이역만리에서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네이티브 한국인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의논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더군요(웃음).”
윤 부사장의 지인들은 그의 성공력을 넘어 성장력의 원천으로 독서를 꼽는다. 동기들 중 차장, 부장 승진은 가장 늦었지만, 임원 승진은 제일 빨랐던 역전의 힘은 바로 독서력에서 나왔다. 낯선 것을 이질감보다는 호기심으로 수용했고 그 기저에는 책이 자리한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월급의 10%는 무조건 책 사는 데 쓰셨다면서요.
“네. 솔직히 말하면 직장생활 초년병 시절 10년간은 불평쟁이였어요. 늘 사표 던질 타이밍만 재며 불만이 가득한 채로 보냈어요. 그러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변화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는데 책이 계기가 됐어요. 당시 월급이 40만원 정도였는데 4만~5만원은 꼭 책 사는 데 썼지요. 독서에 빠지다 보니 현재의 불만을 한 걸음 뒤에서 보고, 또 한 치 더 깊이 보게 되더군요. 사고력, 판단력을 넘어 힐링의 치유력을 줬다고나 할까요. 상계동 집에서 서초동 직장까지 두 시간 이상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매일매일 정거장 숫자나 세면서 가는 것이 참 지루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지하철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독서삼매에 빠져 지하철역을 몇 정거장 후딱 넘길 때의 기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친 , , 등 수백 권은 20년 동안 모두 지하철에서 읽은 책들이랍니다. 나중엔 누군가 집에 와서 다양한 책들을 보더니 ‘교수 같긴 한데 전공을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웃음).”
독서삼매에 빠졌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PD란 직업의 숙명 같아요.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상 필요에 의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갈 때 그 사람과 관련한 책을 미리 읽는 것이 기본 예의란 생각을 한 게 독서의 직접적 동기였습니다. 라는 책은 과학 관련 내용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용어나 이론이 나올 때마다 그 부분을 쉽게 풀어쓴 책들을 다시 사서 읽으면서 진도를 나갔지요. 1년 뒤에 보니 관련 서적 50권 정도를 읽었더라고요. 극구 언론을 기피해 30분 내에 인터뷰를 끝내는 조건으로 겨우 인터뷰를 했던 어느 교육 전문가와 서로 좋아하는 책 관련 대화를 하다가 친해져 6시간 정도 대화를 했던 일도 있습니다. 책은 사교력뿐 아니라 판단력, 자신감도 키워주지요. 위로 올라갈수록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예측력과 큰 그림에 대한 파악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윤 부사장은 ‘독서력은 퇴직 이후에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직자들의 공통 트라우마는 ‘할 일이 사라졌다’는 목표 상실이다. 거기서 스트레스가 생긴다. 이럴 때 관심 주제를 정하고 2주 내에 관련 책 몇 권 읽기 등으로 목표 설정을 해놓으면 성취감뿐 아니라 정신건강과 목표관리에도 좋다”며 책은 시간 관리, 스트레스 관리의 해결책이자 좋은 친구라고 덧붙였다.
최근 1년 새 부모상을 잇달아 치렀다는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와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삶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해봄으로써 남아 있는 현실을 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란 어떤 의미인가요?
“‘죽음’ 하면 먼 일이라 생각하기 쉬워요. 그리고 ‘임종의 사전 준비’ 하면 상조회사, 묘자리 예약 등을 퍼뜩 떠올리는데요. 진정한 죽음의 준비는 세대 간 대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할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떤 고민을 해왔으며, 이렇게 살아왔다’를 책이든 뭐든 다양한 형식을 통해 들려주고 공유하는 것이지요. 어느 학교, 어느 직장 어느 직급까지 올라갔다는 이력서 상의 궤적을 넘어 한 인간 고유의 고민, 즉 삶의 흔적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에 대한 파악부터가 필요해요. 후손이든 누구든 대화를 나누려면 스스로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기억을 되살리고 기록을 남기는 것, 생을 마무리하는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노인 하나가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긴 것은 그만큼 지혜의 기록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의 반증이라고 봅니다.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객관적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우리나라가 현재의 부강한 국가가 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대, 다른 국가에게 이 무형의 자산을 무형의 기억이 아니라 유형의 기억으로 알려야 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기성세대는 충분히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 18년 동안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사헌부 기록만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자신을 정확히 알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 때문이었다”며 “일부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은 ‘잔소리만 많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은 원인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인생 2막의 기준을 속도보다는 방향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하하. 네, 맞습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진짜 의미가 있고 재미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돌아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것은 시설이 잘된 회의실에서 하는 대규모 회의도, 큰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도 아니더군요. 의견이 맞는 사람들과 가치 있는 성과를 하나하나 이뤄간 것이었습니다. 인생 2막은 일의 규모나 외형보다는 삶의 질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진정한 삶의 성과는 ‘어디까지 올라갔나’보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는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점심에 만나 시작된 인터뷰가 끝났을 때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는 저녁시간이었다. 귀갓길, 저 멀리 있는 입간판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고, 코앞의 버스정류장 노선안내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면서 읽히지 않았다. 요즘 부쩍 심해진 원시(遠視)의 증상이었다. 예전이라면 ‘노안(老眼)’의 시그널로 심란했을 텐데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이듦이란 가까이 보기보다 멀리 보기의 장점, 이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는 한 발짝 떨어져 거리두기, 멀리 보기를 할 때 보다 더 잘 보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