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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여행 소환, 프라하와 체스키크룸로프
- 발은 거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지만 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TV 화면 속 할배들과 동행하여 체코 프라하의 추억을 반추해 본다. 한국에서 동유럽 여행 코스는 대부분 독일에서 시작하여 체코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를 경유하여 비엔나로 향한다. 프라하는 체코 공화국의 수도이며 프라하 구시가지에는 체코의 상징물인 프라하성이 있다.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지대근처에는 아름다운 체스키크룸로프성과 중세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체코 공화국은 지역적으로 10세기 이전부터 세계사를 끊임없이 움직인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우리나라 못지않게 역사의 부침이 심했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이었지만 직접 전쟁에 가담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유적만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다. 약 10세기를 전후해 이전 신성로마제국 영토 일부에 건설된 보헤미아 왕국이 체코공화국의 전신이다. 보헤미아는 프라하의 옛 명칭이기도 하다. 14세기 세계적인 유적지 프라하 블타바강의 카를대교를 건설하고 유럽 최초의 대학인 프라하대학을 세운 카를 4세는 보헤미아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16세기 체코는 바로 옆 나라이면서 유럽의 최강국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속해 지배를 받다가 1918년 체코와 슬라브족의 슬로바키아를 합병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독립한다. 하지만 다시 독일의 나치정권하에 속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부터는 독립하지만 동유럽 공산국가로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고 그 후 끊임없이 공산당과 비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민주정권 수립을 갈망하던 중 개혁파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이런 노력의 변화를 세계사에서는 ‘1968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프라하의 봄’ 자유화 운동은 실패하여 다시 긴 겨울이 찾아오게 되지만 1989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체코의 민주 시민 시위가 성공한다. 1993년 비공산주의자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취임 후 바츨라프 광장에서 평화적인 무혈혁명을 연설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벨벳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분리됐다. 이후 체코 프라하는 세계인의 관광 여행 주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프라하성은 9세기 보헤미아 왕국 시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고딕,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900년에 걸쳐 개축됐다. 그야말로 건축 역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세계인은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프라하성에는 스테인드글라스창이 유명한 비투스 대성당과 대통령궁, 박물관, 유명한 야경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역시 보헤미아왕국에 의해 13세기 고딕형식으로 건축되었던 체스키크룸로프성은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이 되어 르네상스풍의 둥근 지붕이 특징이다. 체스키크룸로프성 인근에는 중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 미로 같은 뒷골목과 상점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을 자랑한다. 관광객들은 활기찬 골목 쇼핑과 사진 찍기에 정신이 쏠려 언제 공산주의가 이곳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겨를도 없다. 체스키크룸로프 마을은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지구’라 불리며,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체코의 음악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안토닌 드보르작이 있고, 교향시 ‘나의 조국’의 작곡자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있다.
- 2018-08-3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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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의 암살자’ 우수(憂愁)와 비정(非情) 사이
- 완벽한 미모로 인해 연기력이나 지성이 과소평가되는 배우가 있다. 알랭 들롱과 마릴린 먼로가 대표적이다. 요즘에는 신도 질투할 미모와 아우라를 갖춘 완벽한, 배우다운 배우가 없어 스크린 앞에 앉을 때마다 불평하게 된다. “저 정도 용모와 연기력으로 감히 나의 귀한 시간과 체력을 소모케 하다니.” 정말 놀라운 건 요즘 젊은이, 심지어 영화 좀 본다는 이들도 알랭 들롱과 마릴린 먼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름도 모른다고 답한다는 것. 물론 세계 각국 고전을 챙겨보는 게 어렵지 않은 요즘. 지금 한국의 젊은이, 영화학도는 고전을 찾아볼 의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여름이면 생각나는 배우 알랭 들롱. 아마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몰래 간 영등포 모 극장에서 ‘태양을 가득히’를 보고 온 다음 날, 1교시에 들어온 영어 선생님을 보고 경악했다. 넓적한 얼굴이 늘 술 마신 것처럼 불콰해서 ‘음주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선생님. 그날따라 어찌나 못생겨 보이던지. 칠판 꼭대기 판서가 불가능한 작은 키, 어벙한 양복 차림에 오버랩 되던 알랭 들롱의 푸른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세련된 양복 차림. 선생님이 조금만 잘 생겼더라면 영어를 작파하기로 결심하진 않았을 텐데. 1988년 프랑스를 여행하며, 거리 청소부도 알랭 들롱처럼 잘 생겼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내 마음속 알랭 들롱은 여전해서, 그가 세상을 떠나면 ‘제라르 필립-장 가방-이브 몽탕- 알랭 들롱’으로 이어진 프랑스 남성 스타 계보는 사라질 테니, 무슨 재미로 프랑스 영화를 보나 싶다. 그런저런 사연으로 15년 전이던가, 한국영상자료원에 비디오테이프를 수백 점 기증할 때, 큰돈 주고 어렵게 구한 귀한 한국 영화는 기꺼이 내주었어도, 알랭 들롱 출연작은 단 한 편도 내주지 않았다. 알랭 들롱을 향한 시시콜콜 연모를 드러낸 것은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다시 본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 ‘한밤의 암살자’(Le Samourai, 1967) 때문이다. 알랭 들롱 주연의 범죄 영화는 과묵하고 대부분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한밤의 암살자’는 그 절정, 궁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 제프(알랭 들롱)는 말이 없고 주도면밀한 암살 전문가다. 자신을 사랑하는 고급 매춘부 제인(나탈리 들롱)과 알리바이를 약속한 후, 나이트클럽 사장 살해 지령을 수행한다. 수많은 용의자 중 제프를 의심하는 수사반장(프랑소와즈 페리에르). 그러나 유일한 목격자인 나이트클럽 피아니스트(캐시 로지에르)의 거짓 증언으로 풀려난다. 불안한 암살 고용주는 또 다른 암살 전문가를 보내 제프를 죽이려 한다. 제프는 경찰과 킬러에게 쫓기며 고용주를 알아내려 한다. 정면에 창문이 보이긴 하지만, 어두운 방 벽을 배경으로 크레디트만 떠올라, 침대에 누운 제프가 내뿜는, 희미한 푸른색이 감도는 하얀 담배 연기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흑백영화인가 할 정도다. 도입부에서 마지막까지, 영화는 프렌치 누아르 고전 수작답게 흑백 분위기로 일관한다. 마침내 일어선 제프가 거울 앞에서 연갈색 더블 코트에 같은 색 모자를 쓰고 모자 끝을 매만져 단장을 끝낸 후 방을 나선다. 알랭 들롱 미모에 누를 끼쳐선 안 되니, 옷차림에 신경 쓰는 건 당연하다. 더블 코트, 혹은 양복과 모자, 구두 디자인과 색감까지 신경 쓴 완벽한 남성 패션을 자랑한다. 집 앞 골목에 세워진 자동차를 훔칠 때, 주머니에서 꺼내는 열쇠꾸러미는 마치 대갓집 마나님이 속곳에서 꺼내는 열쇠처럼 묵직하다. 철사로 꿴, 최소한 100개는 돼 보이는 열쇠를 하나하나 끌러 시동을 걸어본다. 아, 아날로그 범죄의 침착하고 여유 있는 행동이라니! 훔친 차를 몰고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는, 자잘한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을 달려, 셔터 올린 창고로 단번에 들어간다. 감독 멜빌은 제프가 훔친 차를 몰고 좁은 골목을 달려 곧바로 창고로 들어가는 장면을 “자르지 않고 어찌 찍을까?” 걱정했는데, 알랭 들롱은 이를 한 번에 해냈다고 한다. 자동차 정비공이 차 번호판을 바꾸어주고 총을 주고 서류와 돈을 주고받을 때까지, 정비공과 제프는 눈빛으로만 소통한다. 제인의 아파트 방 앞. 인기척도 없건만 직감적으로 일어난 제인이 “제프?”라고 묻기까지, 9분 58초. 음악도 없다. 경제적인, 절제된, 영화 본질은 말이 아닌 행동 심리라는 걸 웅변하는 잊을 수 없는 도입부요 스릴이다. 모름지기 ‘싸나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는, 필름 누아르는, 알랭 들롱 영화는 이래야 한다. 완벽한 미남 스타 알랭 들롱이 거처하기엔 누추하고 초라한 단칸방. 변변한 가구도 부엌 도구도 없는 방 한복판에 새장 속 새 한 마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일한 생명체인 새가 얼마나 영리하게(새의 변화를 알아보는 예민한 관찰력의 제프, 암살자가 대단한 거지만) 정보를 주는지. 인간은 머리를 굴리며 배신하지만, 새는 스스로 기진해 죽어가면서 먹이를 준 고독한 암살자에게 충정을 바친다. 살림살이랄 것도 없는 집이라 식사는 어찌 해결하는지. 알랭 들롱은 특히 범죄 영화에서 밥 먹는 걸 보여준 기억이 없다. 잘 생겼으니, 식사 따위 일상은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담배 하나면 되니까. 멜빌 감독이 알랭 들롱에게 스크립트를 건네자, 알랭 들롱은 제목을 뭐로 할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멜빌은 ‘사무라이’라고 답했다. (국내에선 ‘한밤의 암살자’, ‘사무라이’, ‘고독’ 등으로 소개되었다) 알랭 들롱이 멜빌을 따라 그의 침실로 들어가자, 거기엔 오직 가죽 소파와 벽에 걸린 사무라이 칼이 있을 뿐이었다. 멜빌의 미니멀한 취향이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게 하는 일화다. 멜빌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왜 제프는 암살자가 되었을까?, 이런 물음 따위는 거두절미 성가실 따름이다. 불친절한 영화라 이야기에 구멍이 많다는 불평을 하고픈 관객이라면, 멜빌 영화를 볼 이유가 없다. 주인공의 설명 없는 행동, 목숨 건 결단에 빠져들면 된다. 제인 역시 제프에게 일방의 복종과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신뢰를 바치며, 왜냐고 토를 달지 않으며 명령에 다름 아닌 부탁을 수행한다. 멜빌 영화 주인공은 비록 범죄자라 할지라도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거나, 마치 죽음을 유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한밤의 암살자’의 마지막, 제프는 피아니스트를 겨누지만, 형사들이 들이닥쳐 그의 등에 총을 쏘아댄다. 제프의 총에는 총알이 없는데. 물론 제프는 자신을 쫓는 경찰이 들이닥칠 것을 알면서도 손님 많은 클럽에 당당히 들어왔다. 오프닝 시퀀스에 격언을 새겨 넣길 즐긴 멜빌은 ‘한밤의 사무라이’에서도 출처를 니토베 이나조의 명저 ‘무사도’라고 밝힌 글을 올렸다. ‘무사도’는 일본인에게 수치와 명예를 알린 책으로도 유명하다. “There is no solitude greater than a samurai's, unless perhaps it is that of a tiger in the jungle.”(정글의 호랑이가 아닌 이상, 사무라이보다 더 고독한 존재는 없다) 도입부 인용문은 멜빌의 창작이라 한다. 유명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런 작은 불만에도 에버트는 자신의 ‘Great Movies’ 목록에 ‘한밤의 암살자’를 올렸다. 평론가 스티븐 스나이더도 저서 ‘죽기 전에 봐야 할 1001편의 영화’에 영화 ‘한밤의 암살자’를 수록했다. ‘한밤의 암살자’는 장 피에르 멜빌 영화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5가지 특징이 다 적용된다. 범죄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알랭 들롱과 같은 프랑스 유명 스타를 캐스팅했다. 오랫동안 대사가 없는 장면이 많다. 주인공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매무새를 살핀다. 나가기 전 방을 둘러본다. 1930년대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와 하드보일드 영화를 좋아했던 멜빌이지만, 그의 프렌치 누아르는 역으로 많은 현대 감독에게 영향을 미쳤다. 짐 자무쉬 감독은 ‘한밤의 암살자’를 리메이크한 ‘고스트독-사무라이의 길’을 발표했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이 ‘한밤의 암살자’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도 마찬가지다. 오우삼 감독도 편애하는 영화로 꼽았는데, 주윤발 주연 홍콩 누아르 중 ‘첩혈쌍웅’의 주인공 이름이 제프일 정도다. 우수와 비정 분위기로 프렌치 누아르에 한 획을 그은 멜빌 감독은 ‘Jean-Pierre Grumbach’가 본명이지만,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을 존경해 장 피에르 멜빌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1973년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14편을 연출했을 뿐이다.
- 2018-08-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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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 내려놔야 최고의 서비스 가능해”…시니어 호텔리어 한상도 씨
- “평창올림픽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외국인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호텔 접객에 대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알아보게 됐어요.” 호텔플렉스 서울드래곤시티에서 만난 한상도(韓相度·60) 씨는 두 번째 인생의 일터로 호텔을 선택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씨는 원래 공대를 나온 엔지니어 출신. 일본계 회사에서 기계장비용 벨트 생산과 관련한 일을 했다. 그러다 본사가 철수하면서 재건축 지역에서 시행 사업에 손을 댔다. 실적이 꽤 좋아 경제적으로 안정은 됐지만, 나이를 먹어서도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호텔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호텔 업무는 마음에 들었지만 쉽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나이만 보고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러던 중 지인에게서 야놀자에서 진행하는 교육 이야기를 들었어요. 5월 교육에 신청하려고 봤더니 경쟁률이 높더라고요. 그래서 미리 교육장 방문도 해보고, 적극적으로 움직였죠.” 배움에 대한 열망이 큰 만큼 교육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반장을 맡아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 씨는 말한다. “보름간의 교육 중 대부분이 실습이었어요. 생각하는 것과 달리 방을 치우고 정돈하는 룸메이드 일이 쉽지 않았죠. 다양한 손님들이 오니까요. 더러워진 방을 치우는 교육을 받으면서 내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했어요. 지금까지도 그 각오는 유효해요.” 그렇게 작은 호텔에서 교육을 받다 프랑스 아코르 계열의 세계적인 대형 호텔 체인이자 국내 최초의 호텔플렉스로 손꼽히는 서울드래곤시티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 소감은 어땠을까. 그는 “처음 일하러 갔을 때 완전히 딴 세상을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고객과의 불필요한 접점을 피하기 위한 근무자들만의 통로와 업무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규모가 엄청나요. 고객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위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죠. 이 호텔에서 일하면서 투숙객을 위해 얼마나 엄격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지 알게 됐고, 덕분에 자부심도 생겼어요.” 그가 호텔에서 맡은 업무는 딥클리닝. 일반 룸메이드가 해결하지 못하는 특수 청소다. 카펫에 흘린 오물 자국이나 아이가 소파 가죽에 한 낙서를 지우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다. 처음엔 고됐지만 지금은 9가지 정도 되는 특수약품을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게 됐다. “첫날 일하고 들어갔더니 손톱 밑에 까만 때가 껴 있더라고요. 아내가 뭘 하다 왔길래 그러냐면서 잔소리를 하더라고요. 이실직고했다가 그만두란 소리만 들었어요. 설득하는 데 애먹었죠.” 매일 아침 갈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맡은 일만 다 하면 퇴근시간이 정확합니다. 치워진 깨끗한 방에서 만족해할 고객을 생각하면 보람도 꽤 큰 직업입니다. 나중에 내 호텔을 가져보는 꿈도 꿔봅니다. 다른 시니어에게도 호텔 일을 해보라 권하고 싶어요.”
- 2018-08-1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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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암살’의 전지현 집, 백인제가옥 야간 개방
- 여름철 폭염으로 낮 시간대 활동이 어려워지자 저녁에 외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편안한 마음으로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여름날 낭만을 즐기며 더위를 쫓을 수 있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바로 ‘백인제가옥 야간 개방’이다. 서울시는 인제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백인제가옥을 매입해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백인제가옥은 북촌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한옥으로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안옥윤 역)의 집으로 나와 더 유명해진 북촌의 대표 한옥이기도 하다. 8월 말까지 주말 야간 개장을 한다. 근대 상류층 한옥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행사로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백인제가옥은 2460㎡ 대지 위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개인이 살았다고 생각하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했던 주택의 특징을 해설사를 따라가며 눈으로 확인했다. 백인제가옥은 무료관람이라 아무나 와서 볼 수 있지만, 해설프로그램을 예약한 사람에 한해서 해설사와 함께 실내로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내부까지 둘러보려면 서울시공공예약시스템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연결해 이동이 자유롭게 했다. 또한 창호지 대신 유리창을 많이 사용하고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둔 것은 건축 당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안채의 일부가 당시 우리나라 한옥에선 볼 수 없던 2층으로 지어졌는데, 온돌을 사용할 수 없는 2층 방에서는 정치적 목적의 모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화 '암살'과 오버랩 되면서 갖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가장 좋았던 건 별당채다. 해설사와 함께 누각 마루에 앉으니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북촌의 까만 지붕 위로 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탁 트인 마루는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시원한 마루에 앉아 동네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북촌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까지 둘러보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안방, 건넌방은 물론 다락에도 올라가 보고 좁은 일본식 복도를 걸어보며 사랑채에 놓여있는 백인제 가족의 사진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지니 한옥은 더욱 고풍스러웠다. 조명이 켜진 한옥은 카메라를 들지 않곤 배길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한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마당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살’에 나왔던 사랑채 마루 소파는 인증샷 장소로 가장 인기였다. 여름날 백인제가옥을 보려면 야간을 추천한다. 정해진 경로 없이 한옥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 2018-08-1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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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이들처럼 SNS에서 핫한 숙소에서 하룻밤
- 1박 2일 짧은 일정의 후쿠오카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놀이였다. SNS를 통해 ‘북앤베드’라는 호스텔을 처음 보았을 때 어릴 때 내가 꿈꾸던 다락방 같아 마음이 끌렸다. 서가로 둘러싸인 침대 공간은 책을 좋아하는 나의 로망이다. 궁금한데 한번 가볼까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북앤베드'에서의 하룻밤이 여행 목적이었다. 프로모션으로 저렴한 가격에 항공권을 샀다. 초저가 여행의 좋은 점은 본전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저렴한 항공권을 사면 관광을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다. 특색있는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기만 해도 즐겁고 맛있는 밥을 먹으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떤 경우든 여행이 만족스럽다. 여행의 기름기를 쫙 빼고 이웃 도시 놀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도 없고 따뜻한 깃털 이불도 없다. 잠자기에 편한 환경은 없지만, 독서를 하다가 잠드는 행복한 ‘자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북앤베드 홈페이지에 쓰여 있었다. 잠자는 서점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마음에 드는 콘셉트인지 보자마자 1박에 4300엔짜리 혼성 도미토리룸을 예약했다. 알고 보니 SNS에선 이미 뜨거운 곳이었다. 도쿄에서 첫선을 보인 후 교토에 문을 열었고 세 번째로 후쿠오카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2층 침대는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 방음이 제대로 안 돼 소곤거리는 말소리까지 다 들린다, 너무 좁다 등의 후기를 보고 특별한 경험을 위해서 1박만 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1박 2일이다. 하룻밤이니 사다리로 2층을 오르내리거나 방음이 제대로 안 된다거나 하는 불편함은 즐겁게 감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책장 속에 독립된 공간이 있다. 2층 침대가 배정되어서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커튼으로 문을 닫으니 그야말로 다락방처럼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그 속에서 책을 읽다가 잠들 수 있다. 침실에 커튼이 쳐져 있으면 그곳에 사람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보인다.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있으면 그 안에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다. 아무렇게나 벗어진 슬리퍼가 사람이 있다는 표시다. 또 사람이 있으면 커튼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커튼을 열어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다. 이 호스텔엔 일본사람과 한국 사람이 반반인 것 같다. 하기야 서양사람이 이렇게 작은 숙소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소파에서 책을 읽었다. 인테리어 잡지나 만화 에세이 같은 책들이 책장을 가득 채웠는데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로 된 책도 보였다.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와 '하루키 레시피'를 집어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책으로 한껏 멋을 낸 세련된 실내에는 적당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잠자리를 둘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층에 4개 위층에 네 개 총 8개의 침대가 있다. 이건 내가 보는 쪽만 생각할 때 그렇다. 반대편에도 똑같이 있으니 모두 16개다. 그리고 2인용 침대도 있으니 20개가 넘는 침대가 있다는 건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다.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투숙하고 있는데 도서관처럼 아주 조용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사람들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곳이지만 누군가 있음은 소리로 감지된다. 발소리에 이어 부스럭거리는 쇼핑봉투 소리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소리까지 정겹게 들린다. 침대로 들어가 '라오스엔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마저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어폰을 깬 채 잠이 들었는 데도 불편한 지 모를 만큼 달게 잤다. ‘북앤베드’에 있는 동안 나이 든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특별한 경험을 선호하는 여행자들이 모였을 뿐이니까. 시니어도 젊은이들처럼 SNS에서 인기 있는 힙한 장소를 찾아다닐 수 있다.
- 2018-07-2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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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 우리 집은 딸과 아들이 애를 둘씩 낳아 손주가 넷이다. 식구가 늘다 보니 가족들과의 소통을 위해 단톡방을 개설하기로 했다. 필요한 소식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사소한 집안일이나 유익한 생활정보까지도 올려놓는다. 그런데 한 달 전 딸애가 사진으로 찍어 올린 톡 내용은 매우 황당하기도 했고, 애들이 어른들에게 한 방 펀치를 날리는 충격을 주었다. 사연은 이렇다. 올해 초등학교에 간 지 2개월밖에 안된 셋째 손녀가 학교숙제를 집에 와서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숙제의 교육내용은 ‘식구들이 같이 돈을 모았다면 가족여행을 가는 것도 좋지만, 이 돈을 어려운 불우이웃을 돕는 데 쓰면 더 좋다’는 취지였다. 이런 설명을 한 후에 애들에게 질문을 통해 선한 행동으로 유도하려는 학습 내용이었다. “만약 여러분의 가족이 함께 모은 돈이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나요?” “집을 살 거예요!” “그와 같이 생각한 까닭을 써보세요.“ “엄마가 자꾸 부동산에 가서….” 실은 딸애가 몇 달 전부터 학군이 좋은 강남 쪽으로 이사해볼까 해서 전셋집을 물어보러 복덕방에 다니고 인터넷에서 자주 부동산을 검색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어린 애들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 본 대로 들은 대로 배우고 어른들을 따라서 행동을 한다.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어이가 없고 황당해하는 딸에게 무슨 답을 할까 하다가 나는 이렇게 카톡에 올렸다. “애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란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자란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어린애들에 그치지 않으며 성장을 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누구든지 부모들은 자기의 애들이 핸드폰에 무어라고 입력해두었을까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다. 의외로 엄마, 아빠라고 그대로 찍혀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난해 송년회 모임에서 외교관 출신 정부 고위관료였던 국장이 실토한 실제 이야기다. 모처럼 일요일 집에 있는데 갑자기 고2에 다니는 딸애가 학원을 가려고 나서던 차 핸드폰이 안 보인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혹시 집 어디엔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때 그가 파자마 차림으로 앉자 있던 소파 밑에서 전화가 ‘삐르르’하고 울렸다. 평소 딸애한테 아빠로서 최선을 다해주었다고 생각해왔던 그는 딸이 핸드폰에 무어라고 입력해놨을까 궁금하던 차에 이를 확인해볼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어 흘깃 바탕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왕 짜증!’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지중지 키우며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고, 인생을 헛되이 살아온 박탈감까지 일 다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도저히 그 마음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어서 마음을 달래려고 집을 나와 평소 다니던 절로 달려가 스님을 찾아갔다. 그러나 스님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만 던졌다. “다 업보입니다. 그 답은 오직 거사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때 TV프로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본 기억이 났다. 아이가 문제라고 생각하던 부모들이 CCTV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단지 부모를 따라 할 뿐이라는 걸 깨닫고 비로소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이 생각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보았다. 한참 지난 뒤에야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임을 깨달았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등교해서, 학교로 학원으로 하루 16시간을 공부에 지쳐 녹초가 돼 들어온다. 현관문에 들어서는 딸을 보고, '얼마나 힘들었냐' 위로는 고사하고 ‘빨리 씻고 공부 좀 더 하다 자라’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또 한 달 내내 죽도록 고생하고 시험 봐서 성적표 받아오면 수고했다는 격려는 못 할망정 ‘너는 아빠 닮아서 머리는 좋은 데 노력을 안 해서 이렇다’라는 둥 몰아붙이기만 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왕짜증 맞다! 그 뒤로 개과천선이라고나 할까. 예전과는 완전히 달리 딸애의 입장에 서서 친구 같은 눈높이에 맞게 화법 먼저 바꾸었다. 무조건 잘 해주고 베풀기보다 딸애가 원하는 쪽으로 하나씩 다가갔다. 처음에는 서로 너무 어색했지만, 서서히 딸애의 태도와 행동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2년 뒤 대학에 들어간 딸이 아버지의 생일이라면서 일찍 집에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따라 설레는 맘으로 딸이 무슨 말을 할까 너무도 궁금했다. 빨간 장미꽃 몇 송이와 함께 딸애가 준 최고의 선물은 스마트폰에 찍힌 왕짜증이 이렇게 바뀐 문구였다. ‘대한민국 최고 울 아빠!’
- 2018-07-0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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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밴드를 이용한 근력 운동
- 탄성이 있는 고무밴드(예: 세라밴드)를 이용하여 근력 강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세라밴드는 색깔에 따라 탄성이 센 정도가 다른데, 여성은 대개 빨간색이나 초록색, 남성은 초록색이나 파란색이 적당하다. 같은 색의 세라밴드라 해도 길이를 짧게 묶으면 탄성 강도를 높일 수 있다. 자료 제공 및 도움 중앙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범재원 교수 일러스트 정명희 작가 고관절 신전근(엉덩관절 폄근) 강화 운동 골반과 대퇴골을 잇는 고관절은 체중을 지탱하고 걷기 같은 다리 운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근육이 약해질 경우 걸을 때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져 허리 통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 세라밴드의 한쪽 끝을 발목에 묶고, 다른 쪽 끝은 고정된 소파나 의자 다리에 묶는다. 2 무릎을 펴서 다리를 뒤로 젖히고 약 10초간 유지한다. 이후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도록 유의한다. 고관절 외전근(엉덩관절 벌림근) 강화 운동 고관절 외전근으로는 고관절 옆부분에 세로로 있는 중둔근이 대표적이다. 이 근육이 약하면 서 있거나 걸을 때 상체가 반대쪽 옆으로 기울어져 바르게 걷지 못할 수도 있다. 1 세라밴드의 한쪽 끝을 발목에 묶고, 다른 쪽 끝은 고정된 소파나 의자 다리에 묶는다. 2 무릎을 펴고 세라밴드가 묶인 한쪽 다리를 옆으로 벌린다. 약 10초간 이 자세를 유지한 뒤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온다. 1 벌림 운동을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세라밴드 없이, 또는 밴드를 양쪽 발목에 걸어 할 수도 있다. 2 무릎을 펴고 한쪽 다리를 위로 들어올린다. 약 10초간 이 자세를 유지한 뒤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온다. 무릎 신전근(폄근) 강화 운동 허벅지 앞쪽에 있는 대퇴사두근을 강화시키는 운동법이다. 이 근육이 약하면 오래 걸을 때 무릎이 구부러져 넘어질 수 있다. 또한 걸을 때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을 덜어주어 무릎 퇴행성관절염을 예방해주는 가장 중요한 근육이다. 1 세라밴드의 한쪽 끝을 발목에 묶고, 다른 쪽 끝은 고정된 의자 다리에 묶는다. 2 무릎을 끝까지 펴고 약 10초간 유지한다. 이때 허리를 굽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후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온다. 무릎 굴곡근(굽힘근) 강화 운동 허벅지 뒤쪽에 있는 햄스트링 근육이며, 걸을 때 앞으로 전진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무릎 신전근(대퇴사두근)과 함께 무릎 퇴행성관절염을 예방하는 데에 필요한 근육이다. 1 세라밴드의 한쪽 끝을 발목에 묶고, 다른 쪽 끝은 고정된 소파나 의자 다리에 묶는다. 2 엎드린 상태에서 무릎을 90도 정도 구부리고 약 10초간 유지한다. 이후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온다.
- 2018-07-0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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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결같이 매일을 사는 청년 시인, 신현득을 만나다
- 큰 창 사이로 봄볕이 드는 넓은 복도 한편. 간이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트렌치코트에 중절모를 쓴 그는 시간을 쪼개서 뭔가를 읽고 있다. 가방 안에는 공부해야 할 읽을거리와 책이 가득해 보인다. 정지한 듯 몰두해 있는 모습, 옛 러시아 영화의 롱테이크 장면처럼 깊고 안정된 정적이 흐른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다물었던 입술이 엷게 미소 짓는다. 아동문학계를 대표하는 현역 동시 시인이자 영원한 선생님 신현득(申鉉得·84). 벚꽃 만발하던 주말 오후의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인터뷰 당일 생각보다 날씨가 꽤 추웠다. 봄꽃은 만발한데 새벽녘 눈까지 내렸다. 4월호 층층나무동시모임 취재로 만나 뵀던 신현득 시인을 인터뷰 지면을 통해 다시 모시기로 했다. 신현득 시인은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의 산 증인이자 스승이기에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었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제자들과 함께 익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신현득 시인이다. “동시는 재미가 있어요. 불가능이 없는 세계입니다. 말하자면 온갖 세상에 있는 것들. 살아 있거나 또는 생명이 없어도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수 있어요. 가령 컵이면 컵이 말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가정 하에 시를 구성합니다. ‘시원한 물이 담겼다’, ‘아이고 시원하다’. 이게 지금 컵이 느끼는 거예요. 뭐가 됐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난 다음에 사유하는 겁니다.” 동시가 뭐냐고 물어보니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한다. 얼굴에 화사한 기운이 도는 것을 보니 이미 마음은 아이로 돌아간 모양이다. 탁자에 놓인 컵을 보다가도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를 보다가도 시상을 이야기한다. 꽃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의견을 묻기도 한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심상으로 표현하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영락없는 동시 시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현득 시인은 60여 년의 세월을 동시 짓는 현역 작가로 살고 있다. 물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도 거르지 않고 있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아이도 좋아했어요. 안동사범학교를 나와서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아이들과 생활하고 늘 보고 듣고 하니까. 노는 모습이 귀엽잖아요. 예쁜 모습을 하나씩 메모하다 보니까 시를 쓰게 됐지. 어린애들, 예술 아니에요? ‘아기는 시다’라는 말이 있어요. 어린애들은 말하는 것도 시이고 동작도 시이고 모습도 시이고 그래요. 아이들 모습이 희한해요.” 아동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그에 대한 좋은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등단 이후 10년이 조금 지나 1971년에는 세종아동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지금은 이런저런 상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아동문학상 수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글을 쓰는 시인으로 인정을 받는 중요한 지표였던 셈이다. 신현득은 20년 만에 교사를 그만둔 뒤 소년한국일보에서 15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단국대, 서울예대, 한양여대 등 대학 강단에서 세계 아동문학사, 한국 아동문학사, 창작론을 가르치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신현득은 한국 아동문학계의 큰 물줄기인 소파 방정환과 윤석중 선생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노래’를 비롯해 ‘새 신’, ‘고추 먹고 맴맴’ 등의 노랫말을 지은 윤석중 선생은 신현득 시인에게 가장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고마운 스승이다. “윤석중 선생의 추천으로 신춘문예에 뽑혔어요. 선생 사무실에 자주 다니고 얘기도 많이 듣고요. 수시로 만나 봬면서 많은 공부를 했어요.” 스승을 잘 모신 덕일까? 지금껏 스승과 제자의 끈을 놓지 않고 함께 공부하는 층층나무동시모임이 13년째 이어오니 말이다. 이외에도 동시를 쓰는 시인들 다수가 신현득 시인의 제자임을 자처한다. “나는 싫은데 제자들한테 떠받들리고 있어요. 내 영향을 받아서 시인이 됐다거나 수상을 했다거나 할 때마다 제자들 연락을 받죠. 그럼 축하도 해주고 격려도 하고 그래요. 금년에도 제자 두 사람이 상을 받았어요. 행복을 빌어주죠. 제자들한테 잘해주려고 애는 쓰지만 실제로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1분 1초가 바쁜 80대 현역으로 산다 요즘 신현득 시인은 일생일대 중요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본인의 일과 생활, 모든 생각을 정리해놓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60년 동안 신현득이라는 시인이 ‘이렇게 해서 시를 이루어갔다’ 하는 그런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신현득 동시 시법’이라고 가제를 일단 붙여놨어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언제 완성할지는 모르지만 될 수 있으면 금년 내로 완성하려고 합니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담은 책을 쓰고 싶지만 사실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다는 신현득 시인. 애초에 세계아동문학사를 한번 써보겠노라고 집필을 시작했는데 생각한 분량의 절반 정도 쓰고서 접어둔 상태다. 밀려오는 원고 청탁과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순간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법보신문에 동시 해설 연재를 하고 있어요. 거기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달라고 했으니까 무한정이지. 대외적으로도 청탁이 많아요. 지금 일곱 군데에서 원고 청탁을 해왔습니다. 문예지 같은 데에서는 작품을 내놓아라, 안 그럼 칼럼을 써라.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할 일거리를 챙기면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간추립니다. 작품은 지하철에서 구상하고 씁니다. 일기도 꼭 지하철에서 씁니다. 지하철에서 안 쉬어요. 쉬질 않아요. 여유도 없고요.” 그럼 잠은 언제 자냐고 물으니 일하다가 졸리면 잔다고. 안 졸리면 계속 일을 한다고 했다. 이 바쁜 와중에도 문예지를 받아들면 앞에서부터 끝까지 읽고 난 뒤 문예지를 보낸 곳에 꼭 이메일로 잘 봤다고 회신 메시지를 남긴다. 책을 냈다며 보내오는 사람들에게도 모니터링을 해준다 했다. 일상에 동시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벼운 이야기를 해볼까 싶어서 다소 사적인 질문을 해봤다. 가족이랑 주로 뭘 하시는지? 시를 쓰는 것 말고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영화나 연극은 좀 보시는지, 최근에 여행을 해보셨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 취미생활이건 여행이건 “할 시간이 없다”였다. “워커홀릭이시네요”라고 말을 건네니 “나만치 바쁜 사람은 없을 거 같아” 하며 식 웃는다. “나는 딱 한 가지밖에 안 해요. 동시와 관련한 건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재미를 느끼고 좋아하니까 몰입합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시를 쓰니까 건강한 겁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건강이고 자신을 위해 먹는 한약재라고 말했다. 시를 쓰니까 건강도 좋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신현득 시인은 말했다. 언제 쯤 쉬실 수 있을 거 같아요? 바쁜 이야기를 쭉 하다 보니 느리던 말투에 속도가 붙어 있었다. 언제쯤 쉬실 것 같냐는 질문에 무덤덤하게 생사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랐다. “아직 생각을 안 해봐서 몰라요. 죽으면 쉬는 거지. 그땐 뭐 더 일할 수 없으니까요. 100세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말입니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요. 불교 신자라 윤회사상을 믿으니까요. 이 세상에 났다가 좋은 일 하면 또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여기서 착한 일 하면 또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나쁜 일 하면 지옥에 가고요.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떨 것인가 하는 건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묘비에 쓸 글귀 또한 생각할 틈이 없다고 했다.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매일 해내고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제가 만약 논문을 써야 한다면 글을 쓰기 위해서 공부도 해야 하고, 찾아서 정리할 자료들이 많잖아요. 글 쓸 준비는 다 해놓고 내가 쓰지도 않고 죽고 가버리면 낭패잖아요.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내가 다 못해놓고 죽을까봐서 겁이 나요. 지금 제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다음 세대에게 꼭 필요한 거란 말이죠.” 후세에 작은 것 하나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가 1분 1초가 너무 아까웠음을 이제야 토로한다. 잠 잘 시간까지 아끼고 깨어 있는 매 순간 무엇인가 해야만 하는 신현득 시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가 없으면 안 되지. 이 세상에 동심만 있다면 다툼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니 아동문학학회가 있다며 경희대학교로 간다고 했다. 오전에 제자들과 함께하는 동시문학 모임을 끝내고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학회에 간다는 신현득 시인. 학회를 마치면 또 학회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할 거라고 말했다. 운전을 할 줄 아는지 물으니 지금까지 쭉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살았다고 했다. 우리 시대에는 자가용을 모는 일이 흔치 않았으니 이렇게 누군가 차를 태워주거나 아니면 대중교통이 내 자가용이라고 말이다. 경희대학교에 가까워질수록 개나리며 벚꽃이 절정의 모습으로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듯 차 안에서 한시도 쉬지 않는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출 때마다 기자에게 줄 자신의 시집에 조심스럽게 사인을 했다. 시상이 떠오를 때는 창밖을 쳐다보며 아이 같은 목소리로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동시를 쓰지 않았다면 신현득 시인은 80여 년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차에서 내려 미소에 존경을 담아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신현득 시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 2018-05-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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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문경시 이화령 산골에 사는 하득용·안미정 부부
-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3-1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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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습관을 만들자
- 요즘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예전 같지 않은 매너 때문에 마음 상해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우리 세대가 학생일 때는, 어른이 차에 타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누가 앞에 있든 스마트폰에 빠져 자리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동방예의지국의 오랜 전통이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이렇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참 난감한 일이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생각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대기업 삼미그룹 부회장으로 있다가 호텔 웨이터로 변신해 세간에 화제를 모은 서상록 씨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연세가 칠십 정도였다. 그는 친구들 모임에 가면 잘 걷지도 못하고 몸이 불편한 친구가 많은데 자신은 아직 꼿꼿하다면서 그 비결을 알려줬다. “전철을 탔을 때 나는 절대 자리에 앉으려 하지도 않고 젊은이들이 예의가 없다 욕하지도 않는다. 건강을 위해 서 있는 것이 훨씬 낫다.” 공감 가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필자도 가능한 한 서 있으려 한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진이 64세 이상 여성 1481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하루 10시간 이상 앉아 있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8세 더 늙는다고 한다. 오래 앉아서 일을 보는 사람들은 한 시간에 단 5분이라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줘야 한다. 운동은 하루 30분 이상 걷거나 땀이 날 정도가 좋다. 소파에 앉아 오랜 시간 TV를 시청하거나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씩 게임이나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노화를 촉진한다. 암과 당뇨, 심장질환, 비만 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도 나타났다. 스트레스도 나쁘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각자가 생각이 다르고 환경도 다르니 의견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과도하면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암, 성인병 등 무려 280여 가지 병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KBS스페셜’에서 방영했던 ‘마음 스트레스 반응 실험’은 충격적이었다. 한쪽의 토끼군에게는 좋은 음식을 주고 예뻐해주는 등 관심을 주고, 다른 한쪽의 토끼군에게는 각종 스트레스를 줬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가두어두고 각종 맹수의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실험 결과 관심과 사랑을 받은 토끼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건강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반면 스트레스를 받은 토끼들은 혈관이 막혀 각막이 혼탁해졌고 녹내장과 지방간 현상까지 나타났다. 스트레스가 과도하면 아드레날린과 코티졸이 분비되는데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독성이 들어 있다 한다. 잘못된 식습관과 건강 불감증도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식습관이 많이 바뀌었다. 채소 위주의 식사보다는 육류 소비량이 많고 간편식도 일상화되어 있다. 영양가 없이 열량만 높은 ‘엠티 칼로리(empty calory)’ 음식을 즐겨 먹는다거나 지나친 과식은 노화를 부추기는 나쁜 습관이다. 건강한 식생활을 하려면 신선한 과일, 채소, 통곡물, 약간의 육류 섭취를 통해 칼로리는 제한하고 영양 성분은 골고루 공급받아야 한다. 이것들 외에도 노화를 부추기는 나쁜 습관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습관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나쁜 습관을 고치려 억지로 제한하고 구속하면 이 또한 스트레스가 되어 건강을 해친다.
- 2018-03-08 1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