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삶의 방식들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생소하고 낯선 시간의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과거 우리 부모 세대는 대개 60 언저리 혹은 70 이전에 세상을 하직하셨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버릴 생각 없이 말짱하다. 요즘 같아서는 정말 100세 시대라는 말이 실감 난다.
그렇다면 좋은 세상이 온 건데 우울하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30년 정도의 시간이 주는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 인류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왜 걱정되지 않겠는가. 과연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그 긴 시간을 견딜 물질적 동력은 준비되기나 한 걸까?
간혹 신문과 방송 같은 미디어에 전문가가 등장해 길어진 수명에 대비하는 갖가지 대응책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살아보지 않은 것은 저나 나나 똑같지 않은가. 100세가 다 되신 철학자 김형석 선생 같은 분 정도는 되어야 경험을 말할 수 있는데 어디 그분 같은 경력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각자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각자 미래를 개척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싶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 취향에 맡겨놓는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핵심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물질적인 걱정 없이 품위 있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 활동이 왕성한 시기에 이런 미래의 실상을 모른 채 부모 봉양하고, 자식 교육시키고, 결혼 비용까지 댄 어리석은 일들이 후회되지만 다 지난 일이고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분들은 TV에 나와 그러니 나이 들어도 일을 해야 한다고 뻔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록 건강이 염려 없더라도 이 나이의 고령자를 써 줄 곳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어떤 이는 그래서 평생교육이 필요하니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을 받으라고 역설한다. 아, 앓느니 죽지! 취미로 교육받는 건 모르지만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고교 교사로 있는 가까운 친구 하나는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최근 딸이 직장 때문에 손자를 돌봐 달라는 바람에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딸네 집으로 출근하며 “늘그막에 이 무슨 고생이냐”며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우리 친구들 사이에 최고로 부러운 존재다. “야, 2년만 버티면 죽을 때까지 생계 걱정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네가 제일 팔자 좋다.” 전화 끊고 입맛이 씁쓸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딸애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결혼하고 애 낳으면 회사를 그만둔단다. 자식을 먼저 잘 키운 뒤에 다시 프리랜서로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이 여성들의 노후를 혼란스럽게 만든 원흉이 아닌가. 남편만 바라보다 물먹은 여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얘, 무슨 소리야 힘들어도 내가 키워 줄 테니 열심히 다녀. 노후를 생각해야지. 나한테 양육비 주면 열심히 키워 줄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 들고 가장 억울한 것이 소위 ‘경력단절’이라는 장벽이다. 과거에 아무리 화려한 경력이 있었어도 단절되고 나면 고철에 불과하다. 남성보다 여성의 노후가 불안한 이유이다. 애 키우는 거야 경험 많은 노인들이 더 잘하는 영역이고 노인 돈벌이에도 기여하니 힘은 들어도 윈윈 하는 길이 아닌가. ‘얘야 부디 끝까지 남아 임원 자리까지 해 보고 그만두렴.’ 여성이 떳떳하게 사는 길이다.
열흘간의 추석 황금연휴가 지났다.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새 옷도 입었던 어릴 적 추석 명절이 행복했다. 성년이 되어 밤새워 차를 몰아 부모님을 찾아뵈었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명절 증후군, 명절 이혼, 고부 갈등이란 이름의 명절 스트레스가 커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명절준비가 제일 큰 문제였다.
아내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40년 넘게 6남매 대가족의 맏며느리 역할을 묵묵히 잘하였다. 부모님 모시고 형제자매끼리 모이던 명절은 조카들이 결혼하고 손자까지 태어나 훌쩍 30명을 넘어섰다. 아내는 한해에 몇 차례씩 음식 준비에 바빴다. 모든 일이 잘 되는 줄 알았으나 눈치 없는 필자만의 착각이었다. 아내가 그때마다 녹초가 된다는 사실을 사화은퇴 후에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방송에서는 여느 때처럼 교통 혼잡을 알리는 생방송이 요란하였다. 다음으로 시어머니, 며느리의 명절 스트레스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다. 손주를 보고 기뻐하는 할아버지·할머니의 모습은 저만치 밀려있었다. 소비를 통한 경제효과 이론까지 동원하여 사상 최장 명절휴무를 실시되었다. 즐거워야 할 추석명절에 썰렁한 논쟁만 벌려서는 아니 될 일이다.
작년 어머님까지 소천하신 후, 부모님을 이어받는 가족의 ‘좌장’이 되었다. 명절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리는 큰 결단을 하였다. 개혁은 집권초기에 번개처럼 하라고 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마무리 가족모임을 가졌다. “부모님 추모회는 모두 참가하고, 설·추석 명절모임은 직계가족끼리 갖도록 하자”고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허전하다는 형제자매들의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과감하게 ‘명절분가’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지난 추석부터 대가족 모임이 사라졌다. 아들·딸 가족과 손주까지 9식구만 모였다. “음식준비를 하지 않으니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아내의 이야기였다. 명절에 꼭 집에서 모일 필요가 없다. 추석명절 소가족 여행을 지난주에 이미 다녀왔다. 명절을 의식하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려서 추석 연휴를 즐겁게 지냈다.
치매는 외상이나 암, 사고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밤손님처럼 슬그머니 온다. 치매환자가 자신의 치매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막상 자신의 병을 알 때가 되면 인지능력이 사라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건강할 때 치매에 대비하여야 한다.
어머니는 환갑이 지난 다음 해 큰 사고로 전혀 회생 가능성이 없는 ‘식물인간’ 막내딸의 곁을 꼼짝하지 않고 지키며 20년 동안 간병에 매달렸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점차 환자가 되었다. 결국 체력이 소진되어 고관절이 골절되는 큰 사고를 당하였다. “수술하지 않으면 고관절이 괴사한다”는 진단 결과였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자 걱정대로 치매가 소리 소문 없이 찾아왔다. 치매환자는 그 증상이 여러 가지다. 어머니는 야간 발작이 심하고 움직임이 불가능하였다. 가족회의를 한 뒤 노인요양원에 어머님을 모셨다. 매주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치매환자에게는 ‘삶과 죽음, 꿈의 경계가 없다’고 느껴졌다. 어머님의 의식이 조금 돌아왔을 때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기억력은 가까운 일부터 천천히 상실되었다. 문병 올 때마다 좋아했던 증손들을 먼저 잊고 손자, 며느리, 사위를 차례대로 잊었다. 장남인 필자를 마지막까지 겨우 알아보았다. 아버님과 막냇동생의 소천을 알리지 않았으나 누구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한 해 전에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밤중에도 휴대폰을 머리맡에 두고 있어야 하였다. 소원대로 아버님과 막냇동생을 따라 10년간 치매로 고생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치매 발병은 고령이나 유전이 주된 원인이라고 흔히 말하고, 불치병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요양원에서 만난 보호자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 ‘사고’가 의외로 많았다. 골절이나 외상이 없는 낙상, 조그만 외상 등 본인이나 주위에서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작은 사고가 면역력이 약해진 시니어에게 큰 병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치매는 당사자도 고생이 많지만 돌보는 가족의 고통은 더 심하다. 자신이 치매환자가 된다면 가족으로부터 격리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가끔 들었다. 하지만 막상 자기 앞에 닥치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인지능력이 상실되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치매환자다. 아무 대비 없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뿐인 ‘생명’이다.
아버지는 조상숭배는 물론이요 선산에 가묘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구순이 되던 해에 충수염 수술을 받고 나서 거동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백세인생을 넘보던 아버지는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산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뿌려 달라”고 자식과 손자까지 다 불러서 유언을 남기고 얼마 후 소천하셨다.
치매환자가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환자는 의식이 없어서 고통 자체를 모르지만, 괴로움은 오롯이 가족에게 남는 것이 치매다.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여야 한다. 가족이 모이면 종종 아내와 아들딸에게 이야기하고 대체로 의견을 모았다. 내가 걸리든 아내가 걸리든 마찬가지다.
우리 부부의 의견은 “건강하게 살도록 최선을 다한다. 치매에 걸리거든 가족과 분리하라. 그래야 남은 가족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중증이 되더라도 연명치료는 절대 하지 마라”였다.
추석,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올려다보면서 소원을 빌어보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 방아 찧는 토끼가 보일 듯 말 듯 한 아이보리 빛의 둥근 쟁반 같은 달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풍성한 차례 음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을에 햇곡식이 나고 정성으로 준비한 차례 상에 자주 볼 수 없는 시댁 가족들이 둘러앉아 “형수님, 맛있어요”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즘은 좀 간편해졌지만 예전에 추석이나 명절 상을 준비할 때는 보름 전쯤 생선 말리기부터 해야만 했다.
생선을 세 종류로 세 마리씩 홀수로 사 와서 손질을 하여 채반에 널어 말리는 것으로 명절 준비가 시작되었다.
북어포나 당면 목이버섯 등 마른 재료는 미리 사 놓아도 괜찮았고 하루하루 날이 지나면서 고기 과일 채소 나물 등을 준비하고 바로 전 날엔 두부를 사면되었다.
시댁에서는 차례나 제사를 지낼 때 잔칫상처럼 벌이는 경향이 있었다.
보통 알고 있는 대로 메, 탕, 전, 적, 생선, 과일, 밤, 대추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교자상을 두 개 붙이고 앞쪽에 과일 상까지 하나 더 놓고 그 위를 음식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 전 도 십여 종류로 가짓수를 늘려 만들어야만 했고 더구나 시아버님께서는 우리 조상님들에게 전에 맛보지 못하셨던 것들을 올려드려야 한다며 양주와 케이크, 커피, 초콜릿과 불붙인 담배까지 상에 놓으셨다.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는 제사가 없었고 명절이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정도였는데 시댁에서의 명절 상차림을 보고는 놀라기도 했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차례와 제사를 맏며느리인 필자가 모시게 되었다. 보던 가락이 있어 필자도 그 비슷하게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남들이 보면 웃을지 모르지만 삶은 계란도 음식의 한 종류가 되어 홀수로 담아 상에 올렸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삶은 계란을 좋아하셨다며 빠지지 않고 상에 올렸는데 그것처럼 쉬운 요리가 어디 있겠는지 재미있다는 생각이다.
필자가 맡은 후부터는 양주나 케이크, 커피, 담배, 초콜릿은 올리지 않았다.
전도 가짓수를 줄여서 대여섯 가지만 한다. 공연히 숫자만 늘이려고 하다가는 먹지도 않고 보관하다 결국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은 필자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차리게 되었다.
6년 전 아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우리 식구는 세 명이었다. 명절 때면 남편은 밤 까는 정도의 일만 해 주었다.
딸처럼 곰살 맞았던 아들이 필자가 준비해준 재료로 전을 부쳤다.
차례나 제사 후 돌아가는 시댁 식구들에게 음식을 싸 보내려면 양이 만만치 않았다.
수 십 장되는 녹두빈대떡, 많은 양의 생선전, 표고버섯전, 연근전, 호박전 등 모든 부침개는 아들이 맡아서 해 주었는데 거실 마루에 앉아 커다란 프라이팬에 전을 지지는 아들의 모습은 필자를 훈훈한 마음으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제 며느리가 생겨서 전 부치는 일은 며느리가 하게 되었고 아들은 귀여운 손녀손자만 챙기면 되었다. 필자에게도 쫄병 하나가 생겨서 흐뭇하다.
올해의 추석도 풍성한 음식으로 보기 좋게 상이 차려졌고 시동생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골고루 싸서 나눠 드렸는데도 음식이 푸짐하게 남았다. 다 필자가 좋아하는 것 들이라 마음도 푸짐하다.
우리 인생도 오늘 추석 한가위처럼 풍성하고 여유로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아산시 광덕산 자락으로 귀촌한 이웅기(66)씨는 시골을 홍보한다. ‘도시에 사는 시니어여, 시골로 가시라!’ 삭막한 회색 건물 숲에서 탈출하라는 얘기. 시골 자연 속에서 인생 후반을 흡족하게 누리라는 전갈. 도시라고 매력이 없으랴. 건강한 삶이 도시에선들 불가하랴.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보다 수준 높은 게 시골의 여건이란다.
이웅기씨는 죽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남들보다 밀리거나 뒤진 게 없었다. 그는 천안시에 있는 선문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누릴 거 대충 다 누렸을 게다. 응분의 실력으로 도회의 풍속을 기민하게 섭렵했을 게다. 그러나 미련 없이 시골행 열차를 탔다. 행선지를 바꾼 여행자처럼 인생행로를 변경했다.
“은퇴 이후에도 흔히들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부대끼며 삽니다. 도시에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왜 굳이 답답하게 서울에 눌러 살까. 서울의 그 비싼 아파트를 팔아치우면 얼마든지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을. 집 짓고도 여윳돈이 남아도는 것을. 귀촌처럼 안전한 노후대책이 드물다는 생각이에요.”
시골에 구미가 당기면 과감하게 털고 내려오라는 얘기다. 자연을 애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이웅기씨의 귀촌에 각별한 결단은 필요치 않았다. 시골살이는 오랜 꿈이었기에. 마음은 진즉 앞장서 산골에 가 있었기에. 아내(안경희씨·62) 역시 귀촌 지망생이었기에. 사직을 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변인들과 쾌히 작별인사를 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아하, 땅을 사는 과정엔 지체와 곡절이 있었더란다.
살터를 찾는 일은 시장에서 두부를 사는 일과 달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 기다렸다는 듯 맨발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한동안 전국을 누볐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보고 깐깐하게 따지는 눈이다. 발품을 판 만큼 일쑤 눈에 드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서 땅을 거둬들이거나 값을 올려 포기해야 했다지. 인연은 뜻밖에도 천안 인근, 수려한 산촌에서 맺어졌다. 소풍 삼아 찾아간 산골 물가에서였다. 물가의 밝은 둔덕, 초승달 모양새의 땅덩이 1000평을,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들였다. 거기에 서둘러 집을 짓고 벽송재(碧松齋)라 당호를 붙였다. 푸른 솔숲에 에둘린 집이구나.
풍광을 보는 눈들은 엇비슷한 모양이다. 산수의 미모를 기차게 추구하는 이들이 이 골짝에 일찌감치 입장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 숫자가 많다. 삼삼한 터 여기저기에 멀끔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도 많으니 휴가철엔 꽤나 버글거릴 게다. 덩달아 땅값도 뛰었다지. 산촌치고는 화려한(?) 현주소! 그래도 대자연이 압도해 시간조차 나른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적막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즈넉해 참신하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멧부리에선 우뚝한 맛이 난다. 골짜기는 깊숙한 멋을 풍긴다. 지겨운 세속의 난리블루스를 잊기에 족하다.
시골 살더라도 일은 놓지 말아야지
이씨의 집 곳곳엔 장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왜? 그는 된장을 담가 판다. 간장, 고추장, 청국장도 품목으로 삼았다. 산중에서 그저 노닐거나 빈둥거리기란 그의 적성에 맞질 않다. 일이 그의 본분사! 또는 일에서 낙을 찾고, 일로 만족을 구가하는 게 그의 본분사! 그는 날마다 고속도로처럼 분주한 눈치다. 된장 사업은 성업 중이고.
“시골에 살더라도 일을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생동하니까.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버릴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70세까진 뭐든 직업 활동을 하자는 작심으로 일을 찾았어요. 된장 사업이 적격이라 본 건 아내의 손맛을 믿어서였죠. 이게 무모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귀촌 초기에 즉시 일에 뛰어들었고, 열심히 매달렸고, 덕분에 썩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뭐죠?”
“운도 따랐겠지만, 최상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했어요. 이 산골의 자연 환경, 즉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도 장류 숙성에 호조건입니다. 순수한 천일염과 죽염을 재료로 장을 만든다는 점도 특장이에요. 방부제, 발효억제제, 조미료 등을 철저히 배제, 최상품 장류 생산에 주력했어요.”
“귀촌을 해 장을 담가 파는 사람들이 드물진 않죠. 시골에 살며 택할 수 있는 일거리 중에 비교적 유망한 업종일까요?”
“장 담그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실패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수만 성취한다는 것. 부지가 넓어야 하고, 공장 지어야 하고, 항아리 가격 비싸고, 초기 투자부터 부담되는 분야이지요. 그러나 유망한 측면도 있어요. 가령, 초중고 급식 재료로 안전한 전통 장류를 채택하는 추세가 확산될 텐데요, 고품질 장류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두세 배의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장류가 아니더라도, 여하튼, 시골에서 오히려 더 나은 일, 더 좋은 찬스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귀촌한 지 어언 10년. 이웅기씨는 이제 노련한 시골생활자.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된장 사업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연간 매출은 2억 원. 내년부터는 아산시에 소재한 모든 중고교에 된장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매출은 두세 배 는다. 그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촌귀농인 대상의 각종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류 관련 지원 사업 공모에 응모, 1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그걸 밑천 삼아 사업을 전개했던 것.
소소하게 시작한 일이 사업화되면서부터 그는 엄청 바빠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흔히 숨 막히게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탄식을 한다. 이씨는 그게 싫어서 귀촌을 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도 다람쥐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기껍다. 삶에 자연이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 도피처로 낭만적인 시골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지만, 어딜 가더라도, 시골에 살더라도, 삶의 끔찍한 증상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꾸역꾸역, 고독이나 권태가 밀려든다. 어쩌나? 이씨는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자연을 담는 게 상책이라 본다. 그는 자연의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한다.
마음을 좋게 쓰는 게 좋은 삶
“귀촌 이후 저의 만족, 저의 행복의 대부분은 자연과 함께하는 데에서 비롯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이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이게 행복이라 봐요.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됩니다.”
“병이 나기 전까진 몸을 기계처럼 부리는 게 사람이죠. 아무거나 맛있는 음식이면 뱃속에 잔뜩 집어넣죠. 자연의학의 요체는 뭐죠?”
“몸이 원하는 걸 알아채는 거. 바로 그겁니다. 건강하지 않고선 행복이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어요. 건강하긴 위해선 몸이 원하는 걸 섭취해야 해요. 일례로, 입에서 쉰내가 나면 신 음식을, 단내가 나면 단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아야겠지요. 건강 문제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예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겠죠. 그러나 마음은 날뛰는 망둥이를 닮았어요.”
“예컨대,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뛰는 소리에 분개해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마음을 잘 써 위층 애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노력을 해야죠.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는 게 좋은 삶의 길이니까.”
“천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산골에서 풀을 주로 뜯어먹고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죠.”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도 자연의학은 고칩니다. 자연식을 통해 기적적 회생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오염되지 않은 산야초를 먹게 되면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몸 아픈 사람들에겐 귀촌귀농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은 명물이다. 힘이 세다. 산야초 또는 잡초 말이다. 잡초는 그 강한 생명력으로 사람에게 이치를 가르친다. 뛰어난 약성으로 사람을 돕는다. 보잘것없는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대안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보잘 것 많은 잡초. 잡초 밟기를 극구 삼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고 지나는 건 결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초를 극진히 대접하긴 사실 힘들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들은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은 갸륵하다. 귀촌 생활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의 조우이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관을 활짝 열 수 있다면 쓸쓸한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름다운 건 자연만이 아니다. 여자도 아름답다. 아내도 아름다운 존재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싫어합니다. 불편이 많아서죠. 제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어요. 딱히 서로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니고, 묵묵히 남편을 따라준 거죠.”
“혹시 독재를 일삼는 남편? 마초?(웃음)”
“제가 여성 예찬론잡니다. 남자는 하염없이 나약한 동물이지만 여자는 강해요. 정글에서도 암컷들이 훨씬 강해요. 여자들에겐 별다른 단점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자보다 여러모로 나아요. 지구력, 지속력, 생명력 등등에서 더 우월하니까. 아내를 통해 그걸 실감해요. 수굿하고 진득한 이 사람은 평생 불만이라는 걸 내비치질 않았어요. 아, 팁 하나! 귀촌은 반드시 아내와 대동해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간 필경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시골생활엔 여자가 할 몫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특히나 원주민들과의 융화엔 안식구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부부가 서둘러 된장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교수에서 장류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이씨의 어깻죽지에 의기양양이 비친다. 상상력이란 창작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귀촌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창의를 가져오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내게 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의 도전은 어쩜 최상의 회춘 전략!
조카는 어릴 때 성당에서 같이 봉사하던 남자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자신의 친구 소개팅을 부탁했다. 조카는 마침 미혼인 친구가 있어 소개하기로 했다. 둘 다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이들이라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4명이 함께 만나 서로 소개를 해주고 좀 거들다가 둘은 빠져나왔다.
둘은 몇 번 만나더니 뭔가 삐꺽거리는 것 같았다. 조카는 중매를 잘해야 밥을 얻어먹는다고 상대의 장점을 설명하며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고민에 빠졌다. 소개받은 남자도 고민에 빠졌다.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조카는 친구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남의 부인을 탐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조카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안도하며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조카는 응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남자가 안동 양반가의 장손이라는 사실과 그 집에서는 손자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카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둘은 사랑하지만, 양가 어른들을 설득해야 하는 숙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동으로 처음 인사 가던 날 조카는 여린 참새처럼 떨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려움이 더 컸으리라. 안동에 도착하자 그의 부모님은 따스하고 정중하게 조카를 환영해주었다. 며칠 전 시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뒤에 남자아이가 함께 오더라는 말을 했다. 조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랬다. 그때까지도 시부모님께는 알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카에겐 전 남편과의 사이에 중학생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효자였고 집안에서는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그 무게로 부모를 설득하고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그의 부모님이 아직도 서당을 운영하는 깨어난 선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갈등으로 연결될 일들을 얼마나 멋지게 서로 존중하며 풀어가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예비 조카사위와 처음 만나는 날,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어떤 조건이라도 살아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이 아니던가. 더구나 결혼에 대한 상처를 이미 겪은 조카는 더 조심스러웠다. 총각과 애 딸린 이혼녀. 조카와 아들은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엔 상견례 날 중학생 아들은 그 자리에 있을 예정이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딸 상견례에 참석했다. 사돈 될 분과 나란히 앉아 아이를 소개했다. 모두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르신께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바깥사돈 될 분은 머리를 숙이더니 장래의 손자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어려운 결정은 네가 했구나. 잘 왔다.”
안사돈도 촉촉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조카는 찬란한 빛 속에 서 있는 천사처럼 보였다. 사랑과 존경이라는.
금년은 유래 없는 10일간의 추석 명절 휴일로 국민들은 긴 휴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낸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명절을 중시하는 어른들에게는 괘씸한 젊은이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명절만 되면 매년 두 번씩 반복되는 교통체증을 겪으면서도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명절이 끝난 후에는 부작용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통계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즐거운 명절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명절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계승과 소멸을 되풀이하면서 전통은 우리 앞에 서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문화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전통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례는 단발령을 계기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혼례는 서양식으로 대부분 진행되고, 상례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를 설치해 상조회사에서 대신 치루고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제사인데 그 역시 원형이 변형되고 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낼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성묘의 풍습은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장례 방식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면서 묘지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진행되면 성묘를 가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고, 한 세대만 지나면 성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70~80세가 넘은 어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일 텐데, 그 후손들은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심지어 손자 세대로 가게 된다면 이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연스런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 변화하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성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제사를 언제 지낼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집안도 많다. 과거에는 늦은 밤 시간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지만 요즘에는 직장 문제로 늦은 시간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불편해서 제사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날 결근을 하거나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후손으로서의 의무감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제사 절차나 상차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다른 종교 시설에 모시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묘의 방법을 바꾼 가족이나 문중도 많다.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상들의 산소를 한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성묘나 제사가 사라지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전통을 버리자니 불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구나 진퇴양난의 고민을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예학자였던 신의경 선생은 개장(改葬)을 논의하면서 “옛날의 개장은 분묘가 어떤 이유에서 붕괴되어 시신이나 관이 없어질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가 없이도 천장(遷葬, 천묘)을 하는데,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장(移葬)이나 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훼손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조상의 묘를 함부로 이전하거나 개장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한곳에 모시고 성묘를 하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일지 모른다.
과거 매장하던 풍습에서 화장하는 풍습으로 바뀐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70% 정도의 국민이 화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그릇에 담아 봉안당(奉安堂)에 모시는 가족이 늘고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정책으로 화장을 권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봉안당이나 수목장이 관심을 받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필자가 평소에 노인을 많이 상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은 자신들의 책무이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후손들이 잘 해내기도 어렵고 선산에 묻혀도 수시로 돌볼 자녀도 많지 많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미래에 대해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불편한 진실도 아니고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 혹은 문중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은 행복한 명절이 되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면 좋겠다.
자녀 결혼식에 신경을 써야 할 일 중 하나가 주례이지 싶다. 주례를 모시기가 녹록지 않아서다. 그래서 필자는 결혼 주례 부탁을 받으면 특별한 일이 겹치지 않으면 들어주는 편이다. 40대 중반부터 주례를 해왔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점도 한몫을 한다. 보람 있는 일이고 베푸는 일이라 여긴다. 주례는 대체로 신랑의 은사나 혼주의 지인 중에서 덕망이 있는 분을 모시게 된다.
그런데 큰아들이 결혼할 때 은퇴 후 일거리로 주례하는 직업 주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례를 맡아주기로 했던 지인이 결혼식 전날 갑작스럽게 해외 출장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져 본인의 의사와 달리 주례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사자의 연락을 받고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난감했다. 다른 주례를 찾았으나 날짜가 촉박해 쉽지 않았다. 주례가 식장으로 오는 도중 변고가 생겨 하객이 대타로 나서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주례 경험이 있는 필자가 직접 하라는 의견도 있었고 주례 없는 결혼식을 진행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상의 끝에 직업 결혼 주례를 세우기로 했다. 당시 은퇴 후 용돈벌이를 겸해 소일거리로 주례로 나서는 분들이 결혼식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필자도 주례를 구하기 힘든 젊은이를 위해 은퇴 후 봉사 차원으로 한 예식장에서 주례를 여러 번 선 경험이 있다. 예식장 담당자와 상담해 직업 주례를 선택해 진행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주례의 필요성에 의문점을 많이 갖기도 하던 시대였고 주례가 없는 결혼식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마냥 늘어지는 주례사로 축하 분위기를 다소 감소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귀한 주례 선생을 모셨을 경우 이에 따른 인사치레 등 번거로움이 있기도 했다. 필자는 1996년 부산광역시에서 손해보험사 본부장으로 근무할 때 직원 결혼 주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꽤 많이 했다. 모두 잘 살고 있어 보람도 느낀다. 신입사원 시절엔 직장 동료의 결혼식 사회를 도맡다시피 했고 주례를 처음으로 하는 분의 주례사를 대필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능은 갖지 못했으나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웅변이 뒷받침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주례 부탁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부부 인연을 맺고 한 가정을 시작하는 신랑 신부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기에 자신의 결혼생활이 문제가 없어야 하고 결혼식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는 말솜씨도 필요해서다. 필자 부부는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기에 주례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다.
애초에 주례를 맡기로 했던 그분은 출장 간 일이 잘되어 더 좋은 일을 맡게 되었다. 대타로 모신 직업 주례의 집전으로 결혼식을 치른 아들 내외도 큰 탈 없이 잘 살고 있다. 세월이 흘러 손자가 둘이나 태어났고 큰손자가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한다. 존경하고 덕망이 있는 그분을 아들 결혼 주례로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에는 나름으로 정해진 인연이 있듯 아들 녀석의 결혼 주례 인연은 아니었음을 세월 속에서 깨닫기도 했다. 황혼을 바라보는 그분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그때 주례를 하지 못한 일이 더 가까운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일은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아들 결혼에 얽힌 뒷이야기를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나이를 산다.
거친 역사와 함께 살아온 작가 채만식의 후기작 이 무대에 오른다. 남편을 잃고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최씨’. 그를 연기한 배우 강애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연출을 맡은 최용훈씨와는 오래된 친구이자 신뢰하는 동료인데 같이 하자고 해서 무조건 승낙했어요. 사실 작품도 안 보고 결정했죠. 너무 솔직했나요?(하하). 이후에 작품을 읽어보니 1930년대 작품 같지 않게 깔끔하더라고요. 다만 무대 위에서 구현할 때 단순한 구조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었죠. 다행히 수준 높은 감각과 내공 있는 연출이 더해져 입체적인 작품으로 탄생했어요. 깊이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 즐겁게 작업하는 중이에요.
‘최씨’는 어떤 인물인가요?
1930년대의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70세 할머니예요. 동학농민운동을 하던 남편을 총칼에 잃고 하나뿐인 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피신해 생사도 모르고 살아가죠. 그 와중에도 굳건히 손자들을 키우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대지와 같은 여인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70세의 연륜, 그 시대의 말투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관객과 공감할 수 있도록 ‘최씨’라는 인물에 신경 썼어요.
‘최씨’의 말 중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나요?
남편이 동학농민운동을 하느라 재산을 반이나 날렸는데도 “뭐, 그까짓 재산이야 있으나 마나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과 아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머지 재산을 탕진한 와중에도 “다 제가 객지에서 요긴하게 쓰느라 팔아 없앤 것이니까 원통할 것은 없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이에요. 물질 만능 시대를 살면서 돈에 연연해하지 않고 호탕하게 “그까짓 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멋집니다.
함께한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무대 위에서의 작업은 팀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죠.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수많은 디테일과 풍부한 감정들, 그리고 배려를 느끼고 알게 하는 게 무대 위의 삶이니까요. 극의 구조상 감정을 나누는 배우는 두 명뿐이어서 호흡도 잘 맞고 별 어려움 없이 즐겁게 연습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머지 배우들도 서로 즐겁게 조언해가며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어떤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연극인가요?
연령층과 상관없이 이 땅에 사는 모두에게 권하고 싶어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고, 중년층과 노년층에게는 슬픈 역사 속 희생양이 되어서도 자식들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더불어 근대문학의 말맛도 맛깔스럽게 녹아 있어 수준 높은 문학을 접하는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해요.
장소 백성희장민호 극장
일정 10월 12일~11월 5일
연출 최용훈
출연 강애심, 김용선, 박윤희, 최광일, 백익남, 김정환 등
하나뿐인 아들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직장생활 몇 년째인 서른 살 때였다. 안도감이 컸던 이유는 필자가 결혼적령기를 넘긴 27세까지 시집을 가지 못해 친정엄마가 엄청난 걱정을 하셨던 게 생각나서였다.
그 당시엔 여자가 27세까지 시집을 못 간 건 창피한 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어 27세 되던 해엔 엄마의 한숨소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왔다. 27세를 넘기기 직전인 12월에 중매를 통해 결혼이 결정되자 안심하던 엄마의 웃는 모습이 지금도 애틋하게 기억난다.
아들이 연애를 하는 것도 못 봤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 옛날 엄마가 시집 안 가는 딸(필자)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은 결혼적령기가 따로 없어서 아주 늦은 나이에도 인연을 만나 잘 사는 부부가 많으니 결혼이 늦는다고 그리 큰 걱정들은 하지 않는다. 또한 매우 귀하게 기른 딸이 아까워서 시집보내기를 망설이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결혼하고도 속 썩을 일 있으면 그냥 이혼하고 돌아오라고까지 한다니 아들 가진 엄마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 찾는 결혼 문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세태에 순둥이 우리 아들이 결혼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필자는 전형적인 중매결혼을 했다. 전문 중매 아주머니의 소개로 양가가 만나 선을 보고 결혼을 결정했다. 아들이 나이 들어가자 필자도 중매를 통해야 할지 어떨지 고민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좋아하는 아가씨를 소개한다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아들이 그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강남의 모 음식점에서 처음 본 우리 며느리는 참으로 단아하고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연애 한 번 못해본 것 같은 아들이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만났는지 흐뭇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직장 선배의 소개로 사귀었다고 한다. 둘을 같이 앉혀놓고 보니 얼굴도 눈도 코도 동글동글한 게 서로 닮았다.
결혼적령기를 지나도 결혼하지 못한 딸을 두었던 우리 친정엄마의 노심초사와 필자가 나서지 않고도 사랑스러운 짝을 찾아 필자를 안심시킨 아들이 비교되며 엄마께는 미안하고 아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흡족한 마음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부터 결혼시킬 일이 걱정되었다. 필자가 결혼할 땐 모든 것을 어른들이 알아서 해주셨으니 아들 결혼에 필자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구와 전자제품 등 혼수를 장만하시며 즐거워하시던 친정엄마가 떠오른다.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서 정말 기쁘셨던 것이다. 시댁에서 준비해주신 패물이 엄청났다. 보석으로 7세트를 받았다.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리고 반지와 귀걸이 팔찌 브로치 등이 7개씩 진열된 커다란 보석함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흐뭇해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렇게 남에게 보이는 걸 중요시했던 필자의 결혼이었다.
우리 며느리에게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성의껏 준비하겠다고 하자 아들이 요즘은 모든 걸 당사자끼리 알아서 한다며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일사천리로 웨딩업체를 정하고 반지도 저희끼리 맞추고 예단도 저희끼리 준비했다. 양가 어머니의 한복도 어느 날 몇 시에 청담동 한복집에 가서 맞추시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시어머니가 될 필자는 너무 할 일이 없었다. 필자는 철없이 어른이 해주시는 대로 받기만 했는데 아들은 며느리와 의논해 모든 일을 어른스럽게 결정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많이 썼던 필자와 달리 실속 있게 알찬 결혼을 한 아들은 알콩달콩 예쁜 손녀손자를 필자에게 안겨주며 잘 살고 있다. 그 모습에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는 평범함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며 아들네가 항상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중매를 통해 어렵게 결혼했던 필자보다 연애로 멋진 결혼을 한 아들이 더욱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