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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와 유채꽃
- 유채꽃은 제주도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부안의 유채꽃밭도 아주 볼 만했다. 샛노란 유채꽃이 끝없이 펼쳐져 눈부신 풍경을 이루었다. 몇 년 전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돈을 내야 한다는 팻말이 있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곳 부안 유채꽃밭은 포근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속에서 필자도 꽃이 된 양 마음껏 셔터를 눌러 멋진 유채꽃밭 사진을 얻었다. 유채꽃 만발한 부안 마실길인 수성당은 재미있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수성당은 딸 여덟 명을 낳아 일곱 명 딸을 팔도에 한 명씩 나누어주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바다를 다스렸다는 개양 할머니의 전설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고 풍어와 무사고를 빌었다고 한다. 또 수성당 주변에서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돼 죽막동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된 곳이라 한다. 유채꽃밭 속에서 손자, 손녀와 그네도 타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은 부안에서 유명한 누에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라며 고른 방문지다. 온종일 피곤했을 텐데 아이들은 잠을 안 자고 뛰어다닌다. 억지로 끌어안고 누웠더니 필자가 먼저 꿈나라로 갔던 모양이다. 아침에 손녀가 가만히 귀에 대고 “할머니~” 하고 불러 잠이 깼다. 콘도였으면 아침 정도는 간단히 해먹었겠는데 호텔이라 아래층 식당으로 갔다. 넓고 깨끗한 한식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누에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누에 형상을 한 귀여운 캐릭터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해서 손자 손녀는 신이 났다. 누에로 비단 실을 만들므로 실크로드와 부안의 선잠 농가에 관한 설명이 있었는데 실크로드(비단길) 라는 이름의 어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팬’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 주요 교역품이 비단인 것에 착안 그의 저서 ‘차이나’에 ‘자이덴 슈트라쎄’ 라고 명명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1910년 독일의 동양학자 ‘알버트 헤르만’이 교역로가 중국에서 시리아까지 간다고 주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동서의 교역로를 비단길과 초원길, 바닷길, 3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부안은 참뽕 프로젝트로 세계제일의 누에 메카를 꿈꾸며 입는 실크에서 먹는 기능성 실크로 녹색성장의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부안 참뽕 오디를 이용하여 뽕 아이스크림, 뽕 오디 과자, 오디 케이크, 뽕 술, 뽕 바지락죽 등 많은 음식을 만들고 있다. ‘잠령제’ 라는 행사도 있는데 해마다 봄누에 치기를 앞두고 순조로운 누에치기를 빌며 인간이 기능성 식품생산을 위해 큰누에를 급랭 건조하는 죄를 천지신명께 고하고 잠령들의 안녕과 양잠 농가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한다. 누에에 속죄하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게 느껴졌다. 체험관에서는 실제 누에를 만져 볼 수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캐릭터처럼 귀여운 모습이다. 5살 손녀는 징그럽다고 싫다지만 두 살짜리 손자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누에를 살짝 만져보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작은 누에에서 멋진 비단 실이 나온다는 게 정말 신비스럽다. 농약을 하지 않고 키운다는 참뽕나무 터널도 지나보고 참뽕 잎도 하나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부안의 참뽕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 보았다.
- 2017-05-1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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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 안아보기
- 첫돌이 막 지난 손녀를 보러 아들 집에 갔다. 갈 때마다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아들 부부는 할아버지가 손녀를 안아주지도 않는다며 섭섭해하기도 했다. 손자가 아니라서 손녀가 별로 반갑지 않냐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손자이든 손녀이든 차별은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매번 가자마자 할아버지 자격으로 손녀를 안으려 하면 우는 바람에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다. 손녀를 안아본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안아보는 것만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보호해주고 싶고 아끼고 싶으면 굳이 안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손녀는 필자가 품에 안을 때마다 울음보를 터뜨렸는데 아들 부부나 필자 모두 손녀를 달래는 데 서툴렀다. 심지어 퇴근하고 온 아들도 안아주려 하면 울음보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안는 것만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손녀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므로 분위기나 표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겨울에 입었던 칙칙한 옷이 벗어버리고 밝은 흰옷을 입고 갔다. 경험상 남의 집에 갈 때 그 집에 개가 있으면 남자에게는 경계심을 갖는다. 특히 검정색 옷을 입고 갈 경우는 더 짖는다. 개를 좋아하는 방문객 취향과 관계없이 방문객을 물기도 한다. 개 주인은 자신이 기르는 개가 명석하다며 물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지만, 개가 임신 중이거나 예민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예쁘다고 손을 머리에 대면 무는 개도 있다. 손녀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낮잠도 잤고 배도 부르고 변도 봤다는 것이다. 같이 간 딸과 잘 어울려 놀았다. 딸도 그동안 안으려 하면 울어버리는 바람에 필자 같은 설움을 많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 엄마 아빠가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 동안 거실에 혼자 있게 되자 필자보다는 그래도 몇 번 더 본 딸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안겨 놀았다. 손녀는 아직 걷지 못한다. 서기는 하는데 불안하다. 서는 게 되다 보니 집안 살림을 마구 꺼내기도 한다. 테이블에 놓인 것도 일단 잡고 놀다가 떨어뜨린다. 엎어져도 내용물이 흐르지 않는 용기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딸이 손녀를 안고 내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필자에게로 가까이 왔다. 경계를 조금씩 없애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순간적으로 다리도 터치하고 팔도 터치하자 묘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허용할 준비는 안 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안아보는 것은 실패했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음에 또 시도하면 된다. 아들 집에 갈 때마다 술을 마시곤 한다. 그래서 손녀가 할아버지를 술 냄새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좋아할 리 없다. 손녀를 안아보는 것보다 아들 내외와 술 마시는 것이 아직도 필자도 편하다.
- 2017-05-0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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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달, 효도를 다시 생각하자
-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인식 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효도를 하여야 하고,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선 시니어들은 고민이 깊어간다. 즐거워야 할 가정의 달에 설ㆍ추석 명절 스트레스처럼 ‘가정의 달 스트레스’를 어깨에 짊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효도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혈연ㆍ정서적 의미의 효도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붙는다. 옛날 할아버지ㆍ할머니께서 손자들에게 내리 사랑하셨던 것처럼 손주가 있는 자체가 축복이다. 뺨을 비비고 껴안아주면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다. 효도를 하는 입장인 자녀 세대는 용돈, 비상시 목돈 등 부양료 지급 등을 우선순위로 꼽아 경제ㆍ물질적 지원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지금의 세태다. 지금은 맞벌이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숨 가쁜 직장생활과 고달픈 육아 등으로 부모가 원하는 효도의 실천이 쉽지 않다. 시니어 세대처럼 전업주부는 꿈꾸기 어려운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시니어는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도맡아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정서적 교감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자녀 세대가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것을 단순히 물질만능주의로 해석해서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효도의 개념도 변하고 있음을 속히 인식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가 필요할 때 미리 알아서 티 나지 않게 보살펴주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거나 찾아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은 시니어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그 후에는 부모 봉양을 나 몰라라 해서 결국 효도계약서까지 쓰는 게 세간의 화제였다. 효도의 정도에 따라 자식을 차별하여 상속분쟁ㆍ폭탄이 터져 풍비박산한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 갈등이 계속 늘어나자 국회에서는 불효자방지법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아무리 법으로 효도와 부양 의무를 규정하더라도 효도의 총량을 수치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이 평상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를 좁혀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 2017-05-0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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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 하슬라아트월드
- 짙푸른 동해 바다. 저 멀고 깊은 곳으로 눈길이 따라가면 하늘이 시작된다. 바람과 파도소리도 경계가 흐려져 귓가에는 하나의 소리로 들릴 뿐이다. 구름 아래 뻗은 손가락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주황색 빛이 몸을 감싸 내린다. 그곳에 서 있는 기분? 이게 바로 축복 아닐까. 산과 바다, 하늘이 이어진 예술가의 놀이터 멀리 바다에서 시야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면 청록색 소나무 숲길과 다양한 형상을 한 조각상이 자유로이 서 있다. 한적한 해안도로 옆, 예술가의 숨길과 손길이 쉼 없이 스쳐지나가는 하슬라아트월드(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발길이 머무는 순간 관람객이 아닌 설치된 미술작품의 한 소재로서 존중받는 곳이다. ‘하슬라’는 고구려·신라시대에 사용됐던 강릉의 옛 지명으로 ‘해와 밝음’이라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여기에 ‘아트월드’를 붙여 ‘강릉에 세워진 예술가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강릉 출신 미술가 박신정·최옥영 부부의 예술가적 기질이 이 공간을 채웠다. 박신정 대표는 하슬라아트월드 홈페이지를 통해 “외국에 작품 전시를 다니면서 예술품뿐만 아니라 전시 장소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받아왔다”며 “모든 것이 조화롭게 화합하는 곳을 꿈꿨다”고 공간 건립 배경을 설명했다. 2003년 조각공원을 시작으로 2009년 뮤지엄 호텔(24개 객실), 2010년 현대미술관, 2011년 피노키오 박물관과 마리오네트 미술관을 순차 개관했다. 하슬라아트월드는 연간 약 15만 명이 찾는 강릉의 관광 명소다. 최근 SBS 드라마 와 영화 촬영 장소로 이용됐고, MBC 드라마 의 주요 무대가 됐다. 하슬라아트월드의 크고 작은 모든 공간이 예술가들의 작업 현장이자 방문객의 관람 장소다. 이곳은 뭐든 다중적인 감각과 의미가 부여돼 있다. 호텔일 수도, 전시실일 수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 이곳의 특징. 보는 사람에 따라 자유로이 생각하고 상상을 즐기는 곳이다. 작가들은 이곳에 상주하면서 작품 활동도 한다. 취재를 갔던 4월 초에는 마침 최옥영 대표가 전시에 필요한 작품을 손보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최 대표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온몸에 먼지가 잔뜩’이라고 멋쩍게 웃었다. 최 대표는 “자연 자체로도 아름다운 곳과 인연이 된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면서 “예술가라 타협도 잘 못하고 부족하지만 생긴 대로 오랫동안 이곳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고래 뱃속을 걷는 피노키오처럼 하슬라아트월드는 정해진 방식은 아니지만 현대미술관,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 미술관 순으로 관람한다. 현대미술관은 호텔 건물 로비에서부터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지상에서 지하로, 다시 지상으로 오르내리며 작품 감상을 하는 구조다. 동해의 파란빛과 자연광, 목조 마루, 겉치레 없는 시멘트벽을 배경으로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건물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마치 어딘가 ‘툭’ 하고 놓아둔 느낌에 시선이 간다. 감각적이고 기발함이 돋보이는 회화와 조각 작품 200여 점도 전시되고 있다. 손자·손녀의 감성자극 미술 공간이 현대미술관 다음에 이어지는 피노키오 박물관이다. 특히 박물관으로 향하는 통로가 매우 인상적이다.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큰 원형 통로 내부를 플라스틱 비닐로 촘촘하게 감싸놓았고, 형형색색 움직이는 조명을 설치했다. 마치 고래 뱃속을 여행하는 피노키오가 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각거리는 비닐 소리와 사람의 말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조명이 마블링되듯 섞여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는 곳이다. 피노키오 박물관에는 피노키오 관련 작품 500여 점이 있다. 3개월에 한 번씩 작품과 전시 성격을 바꾸고 있다고. 이곳에는 꽃으로 만들어진 피노키오와 유럽에서 들여온 각양각색의 피노키오를 만날 수 있다. 디즈니 만화영화 피노키오 관람은 덤이다. 마리오네트 미술관에서는 센서로 움직이는 하슬라아트월드의 특허품 ‘마리봇’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가까이 오면 팔과 다리를 흔들어 몸을 움직인다.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가지고 온 특별한 마리오네트가 관람객을 맞는다. 편견 없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것 실내 관람을 마치면 조각공원 산책을 한다. 호텔 안 매표소 쪽으로 다시 돌아가 실내 계단을 이용해 조각공원 입구로 간다. 반드시 편한 신발을 준비하라. 빨리 다녀도 최소 30분이고 나지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솔향 가득한 소나무 정원을 지나 무심히 서 있는 조각들을 보며 걷다 잠시 뒤를 돌아보시라. 자연이 내려준 예술작품(?)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동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바다카페와 전망대, 아이들의 체험학습장과 소똥박물관 등이 있다. 자연 속 나 자신이 작품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 하슬라아트월드 안에 있다. 하슬라아트월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작품의 제목, 작가 이름 그리고 거울이다. 심지어 거울은 화장실에도 없다. 시멘트벽도 골조 외에 별다른 장치가 없다. 이 모든 것에는 편견 없이 작품을 바라보고 집중해달라는 대표의 철학이 담겨 있다. 단, 예약제로 진행되는 도슨트 시간에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에 관한 설명이 듣고 싶다면 도슨트 설명을 들어보시라.
- 2017-05-0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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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년 개띠 아버지와 88년 용띠 아들의 용기백배 세계 일주
- 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 긴 고민 끝에 32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 퇴직한 아버지 정준일(59)씨. 포병장교 전역 3개월 전, 갑작스런 아버지의 세계 일주 제안에 진행 중이던 취업 전형까지 중단하게 된 아들 정재인(29)씨. 가장으로서, 취업준비생으로서 장기 여행은 많은 것을 내려놓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무언가를 잃지는 않을까? 후회는 없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떠난 200일의 세계 일주에서 돌아와 부자는 알게 됐다. 그때의 근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 아버지 정준일 32년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문득,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회의감에 평소 꿈꿔왔던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현재는 기타 연주, 맛집 탐방 등 건강한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다. △ 아들 정재인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꼰대’ 아버지의 제안으로 얼떨결에 세계 일주를 시작한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언젠가 본인도 미래의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기획 중이다. ◇ 정준일·정재인, 우리 부자의 여행은? 준비 기간 2개월(이후에는 여행지에서 그때그때 준비) 여행 루트 서유럽-터키-동유럽-북유럽-북/중/남미-오세아니아-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 여행 콘셉트 친해지길 바라! 역할 분담 아버지) 경비 총무와 숙소정리, 아들) 아버지의 보좌관이자 안전책임자 여행 경비 약 6000만원 (아버지 퇴직금 + 아들 장교복무 봉급) 다음 여행 내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함께하는 이집트 여행 계획 Intro>>우리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Q. 세계 일주 여행 파트너로 아내나 친구가 아닌 ‘아들’을 꼽은 이유 아버지: 친구나 아내, 딸과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장기간 여행할 수 있는 체력과 외국어 실력을 겸비한 아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하리라 생각했죠. 주변 사람들을 보면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하면서 생긴 마찰로 평생 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아들과 함께라면 혹여나 그런 서운한 감정이 생기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 여행을 가기 전 아내는 명예 퇴직을 반대했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는 고생했다면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Q.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 아들: 처음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 끝에 거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가장 친한 후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와 소주 한잔을 하게 됐죠. 후배는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많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다음 날 바로 아버지께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렸죠. Q. 여행을 앞두고 기대했던 점과 우려스러웠던 점 아버지: 여행 전, 그동안 영상과 책으로만 접했던 전 세계의 자연환경과 건축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죠. 막상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난다 생각하니 건강이 우려스럽고,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쫄쫄 굶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더라고요.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더위를 먹어 앓아눕고, 페루 쿠스코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크게 몸이 아프거나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처음엔 현지 음식만 먹겠다 다짐했지만, 한국 음식을 먹지 않으니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세계 각지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애용했죠. 아들: 모두가 한 번쯤은 꿈꾸는 세계 일주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떴지만, 아버지와 여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초기에는 아버지와 특별히 할 말도 없었고, 아버지의 잔소리에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터키 파묵칼레의 노천 온천탕에서 아버지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음을 열게 됐습니다. Travelling>> 어리기만 했던 아들, 어느새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Q. ‘역시 아들이랑 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느낀 순간 아버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외국인 포함) 대부분이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는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각종 예약, 교통 티켓, 경로를 알아서 잘 짜는 아들이 참 든든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들이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Q. 중년 여행복의 상징인 아웃도어가 아닌, 아들이 코디해준 옷을 입고 다녔다는데 아버지: 아들 덕분에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옷들을 마음껏 입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그런 옷들이 너무나 어색하고 남사스러웠는데, 이왕 여행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보기로 한 이상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아들이 권하는 옷들을 입어봤어요. 사람들이 멋지다며 엄지를 치켜 올려줬고, 사진으로 봐도 괜찮은 제 모습을 보며 점점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그때의 패션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가벼운 여행을 할 때면 헌팅캡을 쓰곤 합니다. Q.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이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들 아버지: 내게 아들은 늘 어리게만 보여서 이것저것 관심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로 여겼는지 참견하지 말라 해서 좀 서운했습니다. 결국 아들을 자기주도적인 결정 아래 책임을 질 줄 아는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걸 믿고 맡기기로 했죠. 아들: 예전의 권위적인 모습 속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 측면에서 문제들이 많았어요. 원체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가 숙소에 들어올 때마다 어엿한 성인인 제게 잔소리(빨래, 양치질, 정리정돈 등)를 해대셔서 방을 따로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남들과 여행할 때보다 두 배 세 배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매일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에게 적합한 여행 일정을 짜드리곤 했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지만, 좋든 싫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버지와 여행하려니 힘들지? 고생이 많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큰 힘이 됐죠. Q.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지했던 부분은? 아들: 저는 성격이 급하고 계획적이라 무언가 일정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스트레스를 받곤 해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속인 배낭여행에서 제가 초조해하거나 힘들어할 때 아버지께서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라며 정신적으로 안정시켜주셨죠. 청결하신 아버지께서 늘 위생에 신경 쓰신 덕분에 깨끗한 숙소에서 묵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Outro>> 아들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세계여행 강추! Q.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아버지: 여행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고정관념과 고집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히 ~해야지’, ‘무조건 ~다’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럽게 넘어가는 성격으로 변했죠.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는 우울감을 느꼈을 거예요. 여행을 다녀온 후 태어나 처음으로 책도 써보고, 인터뷰도 해보고, 방송도 출연하고, 그렇게 새로운 경험들과 연계해 제3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여행이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꿈만 같은 일들입니다. 아들: 우선 아버지가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예전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해서 어떤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편해지니 예전엔 ‘꼰대’라고 생각했던 아저씨들의 행동과 말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 빙하기인 요즘, 아버지와의 세계 일주를 좋게 봐주신 인사 담당자 덕분에 좋은 직장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부자간의 관계도 예전처럼 서먹했을 테고, 취업도 어찌 됐을지 모릅니다. Q. 처음은 늘 아쉬운 법!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아버지: 너무 체면을 차리느라 외국인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지 못했고, 액티비티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다시 여행을 간다면 나이와 체면 생각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들과 소통하고 투어 활동도 해보고 싶습니다. 아들: 계획을 너무 타이트하게 짜서 여행 중 여유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휴식시간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요가체험, 템플스테이 등)을 갖고 싶습니다. Q. ‘아들도 아들의 아들과 여행하길 바란다’고 말한 아버지, 그때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아버지: 아들이 나중에 손자를 낳아서 여행을 하게 된다면 지금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들에게 부족한 아버지였지만, 아들은 손자를 더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멋진 아버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나는 가정을 위해서 나부터 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대가 변했기에 아들은 아이와 더 많이 소통하는 아버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이고 아들은 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내 기준으로만 자식을 바라보지 말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아버지가 되길 바랍니다.
- 2017-05-0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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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에게 지어드린 새 옷
-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시게 되면 우리는 어떤 옷을 입혀드려야 할까? 물론 수의를 입고 가시지만 때가 되면 갈아입으실 다른 옷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버지께서 당시에 공부만 하던 5남매를 이 세상에 남겨두시고 1976년 엄동설한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만 41년이 된다. 중국의 천자가 쉬어갔다는 천자봉 아래 명당자리에 아버지를 모셨지만 그동안 산소의 봉분이 무너져 내려앉아 땜질하듯 손을 봐도 소용이 없어 전문업체에 의뢰해 지난 주말에 봉분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잔디만 사서 3형제가 새로 단장을 해보려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내 여동생에게 전문업체에 견적을 의뢰해보라고 했더니 60만원이나 견적이 나와 내심 깜짝 놀랐다. 견적을 받은 막내아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무튼 그런 일을 해보지 않아 전문 업체에 의뢰하기로 하고 계약금 10만원을 먼저 보냈다. 그런데 막상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전문업체가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새로 단장된 봉분을 보면서 60만원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셋째 아우와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점심도 먹지 못하고 함께 작업을 했다. 새로 만들어진 봉분이 너무 예뻐서 배도 고프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새로 옷 한 벌 사서 입혀드리는 기분이 들어 마냥 좋았다. 한편으로는 너무 늦게 해드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있었다. 오전 8시 반부터 경상도에 사는 여동생 둘(넷째와 막내 동생)도 달려와 함께 작업을 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아내가 준비해준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인사를 드렸다. 새로운 봉분 앞에서 인사를 드리니 너무 감계가 무량했다. 몸이 안 좋아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한 둘째 아우와 아내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카톡으로 사진을 찍어보냈더니 다리가 아파 집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내와 아우는 기분이 참 좋단다.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울컥 샘솟듯 솟았다. 울산에서 직장을 다닐 때 필자와 아내는 20년 가까이 성묘를 함께 다녔다. 그때마다 필자가 낫질을 잘 못했는데 시골 일을 좀 해본 아내가 대신 낫질을 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고마웠다. 그랬던 아내가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니 그 고왔던 색시가 집안일을 너무 해서 건강이 나빠진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다. 비석에는 3형제 이름과 손자 재흥이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두 누이동생이 그것을 보더니 왜 자신들의 이름이 빠졌냐고 물어와 난처했다.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왜 빠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오래전 일이고 경황이 없었던 때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손자들도 많이 태어났으니 이제 비석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다음번에는 두 여동생의 이름과 매제들 이름까지 반드시 명기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고마운 마음에 산을 내려오면서 아우들에게 남녘 바다가 조망되는 멋진 찻집에서 차를 샀다. 산소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막내는 매제와 함께 우리 형제들을 맛있는 횟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했다. 좋은 동생들을 두어 필자는 정말 행복했다. 특히 예쁘고 착한 두 여동생을 우리에게 곁에 두고 가신 부모님께 새삼스럽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귀갓길에 아내가 좋아하는 머위 대와 향내 나는 나물과 막내 여동생 농장에서 생산한 대추까지 한아름 선물로 받았다. 필자도 두 여동생들에게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셋째 아우와 필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의 행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의 행복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으로 돌려야 얻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서울은 먼 길이었지만 도란도란 대화를 하면서 오니 지루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에게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봉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봉분이 예쁘고 아름다우면 후손들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일까? 60만원 투자로 아버진 새 옷도 입혀드리고 우리 형제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시간은 새 옷을 지어 입으신 아버지께서 고마워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주신 감사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 2017-04-2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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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학년 초등학생
- 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사는 쌍둥이 손주들과 아침마다 학교에 같이 간다. 엊그제 입학한 것처럼 생각되는데 어느새 2학년이 되었다. 새봄을 맞아 학교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하여 ‘아침걷기운동’을 권장하고 있다. 고구려 기병들의 말발굽 먼지처럼 운동장이 온통 뿌옇다. 미세먼지도 없는 화창한 수요일, 손주들이 걷는 날이다. 여느 때처럼 쌍둥이가 운동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아이들의 책가방, 신발주머니와 과제물 가방을 한아름 들고 교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학년이세요?” 어느 아이가 물었다.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하였다. 나도 모르게 “나는 7학년”이라고 중얼거렸다. 아이가 다시 “누구를 찾으세요?”고 물었다. 이제야 아까의 질문을 이해하였다. 그 사이 손녀와 손자가 운동장 돌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방을 메고 교실 안으로 뛰어가면서 손을 흔든 모습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오후에 다시 보자”면서 교문을 나섰다. 아내와 함께 날마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대신하여 가까이 사는 쌍둥이 등하교를 보살피러 간다. 아침 등교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난지금은 아이들이 기상, 씻기, 옷차림은 어른처럼 혼자서도 매우 잘한다. 여기까지는 다 자란 것 같아서 매우 행복한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학교수업이 끝나는 낮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방과후 수업과 학원 보내기는 날마다 일정이 들쑥날쑥하여 도통 중심잡기 어렵다. 두 녀석 일정표를 집안 곳곳에 붙여 놓고 스마트폰에 올려서 내 일정표보다 더 열심히 쳐다보아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집에서 대기하거나 적어도 비상시 즉시 달려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만 외출하여야 한다. 왜 ‘7학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을까.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면서 독서량이 엄청 늘고 놀이문화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모른다고 하면 대화상대에서 제외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이에게 거꾸로 질문을 하면 효과가 크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정말 열심히 설명한다. 훗날 엄청 큰 자산이 될 터이다. 하기야 손자에게도 배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오후가 되자 두 녀석이 즐거운 표정으로 집에 들어섰다. 한참 클 때가 되어서인지 손 씻자마자 간식부터 챙긴다. 손녀는 가까운 학원으로 같이 가고, 손주는 버스에 태워서 보낸다. 귀가시각을 아들네와 조율하면 하루해가 저문다. 뜨거운 사랑이 있는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과임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수치로 여겼던 휴학과 유급을 요사이는 취업절벽 때문에 자청하는 경우가 많은 세상이 되었다. 부족해서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즐겁고 알찬 대화를 위하여 시니어의 하루는 바빠야 한다. 배우다 보면 어느새 꼼짝 없이 멋쟁이 제7학년 초등학생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 2017-04-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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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막아낸 녹색연합 공동대표 박그림
- 산이 그리웠던 사나이는 꽉 막힌 도시생활을 접고, 설악산이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곳으로 떠났다. 자연과 벗삼으러 갔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돈 되는 일에 목마른 인간의 욕심이 푸르른 숨통을 조여 왔다. 올무에 걸린 듯 이곳저곳 상처 난 설악산을 위해 사나이는 발길 닿는 대로 찾아가 세상에 알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의 소원대로 설악산에는 바라던 평화가 찾아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박그림 선생님!” 환경단체 녹색연합 공동대표 박그림(朴그림·69)씨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귀신에 홀린 듯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며 이름을 불렀다. 밤늦은 종로 한복판. 반갑게 인사를 이어나갔지만 신기했다. 박그림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중 그가 도깨비처럼 내 앞을 걸어온 것이다. 인연이었다. 국정농단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이던 12월 말,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사건 하나가 있었다. 1995년부터 강원도 양양군에서 추진해오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지금까지 환경과 관련한 정부나 지자체 사업은 시민단체나 주민이 발 벗고 반대해도 무사통과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깬 것. 박그림 대표가 몸소 뛰어다닌 노력으로 이제 더 이상 설악산에 케이블카가 생겨나지 않게 됐다. 마른 체구, 바람에 낡아버린 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은 그는 세상 짐을 다 지고 있는 성자의 모습이었다. 도시 남자, 산속에서 환경지킴이 되다 박그림 대표는 오랜 시간 설악산 지킴이로, 산양들의 아빠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깍쟁이란다. “서울에서 사업을 했어요. 의료 부자재 관련 사업도 하고 종목을 바꿔가면서 개인사업을 했죠. 그런데 잘될 수 없었어요. 늘 마음이 산에 가 있었거든요.” 1992년 가족들과 함께 결단을 내리고 설악산이 보이는 곳으로 옮겨갔다. 아내 또한 서울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 산이건 어디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일푼으로 갔어요. 다들 서울로 가는데 시골로 오느냐고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고, 뭘 먹고 살 것인지 말들이 많았습니다. 아내와 저는 마음의 정리가 됐기 때문에 내려갔죠. 그냥 가서 부딪치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박그림 대표의 진짜 인생이 시작됐다. 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환경의 눈으로 항상 산을 바라봤던 것은 아니지만 산에 다니면서 ‘저거는 괜찮은가?’ 하는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전부터 배달녹색연합(지금의 녹색연합) 회원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가자마자 속초 청초호유원지 건립에 필요한 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청초호 40%를 매립해 유원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죠. 이를 막기 위해 ‘청초호를 되살리는 시민의 모임’에 합류해 힘을 모았습니다. 그 이듬해에 공사가 진행됐고 고민이 많아졌어요. 그때 지역 단체보다는 전국 규모 단체의 지부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저는 온전히 설악산 문제에 매달리겠다는 마음으로 설악녹색연합을 창립했어요. 1993년 3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케이블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사업 초기에는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까지 케이블카를 놓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부결됐고, 이후 노선을 달리해 추진했지만 그 일대가 남설악의 산양 최대 서식지였기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대청봉이 아닌 끝청봉(대청봉에서 1.4km 떨어진 지점)을 상부종점으로 정하고 하부종점까지 3.5km 노선을 정했지만 결국 사업 무산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승인했던 사업을 상위법인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 10명 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사업을 부결했습니다. 1년 넘게 설악산 자연실태조사를 거쳤기에 재심을 해도 통과는 어렵다고 봐요. 현재 설악산 대청봉을 오가는 사람은 연간 40만~50만 명 정도입니다. 설악산은 벌써 다 망가진 상태죠. 만약 케이블카가 설치돼 탑승객까지 더한다면 100만 이상이 될 것이고 결국 설악산 전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설악산 산양 아빠 거리로 나서다 박그림 대표는 앞서 말했지만 ‘산양 아빠’로 불려왔다. 설악산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는 산양에 대해 관찰하고 조사해 알리는 일을 나서서 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양 아빠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산양은 천연기념물 217호이면서 멸종위기종 1급입니다.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놓아두지 않으면 멸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죠. 계속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야 했어요. 이게 바로 산양이구나,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갖고 사랑해야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양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산양을 향한 사랑은 케이블카 사업을 반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초부터 반사판으로 된 커다랗고 동그란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현장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늘 들고 다녔어요. 케이블카 사업이 부결되기 전에는 어디든 약속이 있으면 만남 시간 한 시간 전에 와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장소건. 이것을 그저 운동으로 생각했으면 못했을 거예요. 내 삶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박그림 대표는 피켓을 들고 있는 동안 당당하고 올곧았다. 제재하면 제재하는 대로 밀리면 밀리는 대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악산의 상황을 발길 닿는 곳 어디에서든 알렸다. 싸운 적도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인데 싸우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박그림 대표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꿈꿔온 세상을 만들어나가라 말한다고. 일로 보는 순간 결과를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된다, 안 된다 결과에 집중하면 포기하기 쉽지만 삶으로 나아가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박그림 대표의 설명이다. 이제 자연보호법을 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 설치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을 생각이다. “국립공원 내에 인공 시설물도 사실 너무 많아요. 데크나 계단 등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시설을 하잖아요. 국립공원은 최소한의 시설만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난간과 계단을 하나의 시설물로 만들어놓았어요. 일본 쿠시로 습지의 경우 옆으로 떨어지면 이탄지대라 쑥 들어가요. 난간이 없어요. 산도 정말 이 지역이 위험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기본적인 사다리만 딱 걸쳐놓고. 안전은 산을 오르는 각자의 책임입니다. 관리 당국이 어떻게 안전을 확보해주냐는 거죠. 위험이 없고 불편함이 없으면 무엇 때문에 산으로 가는 겁니까? 그럼 그건 자연이 아닙니다.” 시니어, 산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야 한다 갑작스런 궁금증이 생겼다. 시니어 세대 또한 산을 즐기고 싶을 텐데 케이블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도 대청봉에 올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박그림 대표는 욕심이라고 말했다. “20대는 올라갈 수 있지만 70대는 못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있죠. 시니어들을 위해 케이블카를 놓아야 한다면 그게 왜 설악산뿐이겠습니까? 그리고 왜 케이블카뿐이겠습니까? 그 나이가 되면 산을 바라만 보고도 설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꼭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옛 조상들은 산을 바라만 보고도 진경을 느끼고 시심이 일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왜 정상을 갈구하는지. 그것이 의문이라고 했다. “진경산수화 같은 것도 정말 멀리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잖아요. 바라봤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봤죠. 우리는 지금 빨리, 아주 높이 올라가지만 겉핥기식으로 산을 오르고 내려옵니다. 탄성을 지르고 내려오지만 남는 것이 없죠. 어떤 시설이 없을 때는 힘들여 산을 오르게 됩니다. 오랜 인내를 통해 올라간 정상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죠.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연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훨씬 다르게 산을 느끼게 됩니다.” 손자·손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박그림 대표가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설악산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캠프도 진행한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양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바람 소리를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바람의 느낌을 지식을 통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이게 바람이구나’하고 느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립공원 22개가 차지하는 넓이는 전국토의 5%밖에 안 된다고. 그것마저도 아이들에게 온전하게 되돌려줄 수 없다면 이다음에 어디에서 지친 영혼을 달랠 수 있을까를 박그림 대표는 걱정한다고 말했다. “제게는 다섯 살짜리 손자와 돌 지난 손녀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을 때 바라볼 설악산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난 늘 꿈꾸거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 2017-03-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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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에 가슴 떨림이 있어야
- 3월 새봄, 노란 진달래와 함께 봄이 오고 있다. 집 앞 초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고사리 손에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쌍둥이 손녀ㆍ손자가 “할아버지, 저게 뭐예요?” 작년에 보이지 않았던 광경이 2학년이 되고서 보이는가 보다. 아이들에게 ‘학생회장 선거’를 설명하면서 가슴을 떨리게 했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학생회장 선거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물론 선거를 실시해 본 일도 없었고 담임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시절이었다. 4학년 때 대도시에서 새로 부임하신 담임선생님 주도로 급장선거를 처음 실시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선거결과 신기하게도 급장으로 처음 당선 되었다. 이때는 당선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기분도 덤덤하였다. 얼마 후 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선생님은 후보추천ㆍ유세ㆍ투표ㆍ개표 등 모든 선거과정을 전교생에게 교육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4ㆍ5ㆍ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하였다.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되었다. 합동연설과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 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되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되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다음 순간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뜨거운 불길이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막상 6학년이 되어서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을 때는 왜 아무런 감격이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았다. 구름 속으로 그해 막 배운 개구리헤엄을 하였다.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느껴졌다. 그날부터 성인이 된 한참 후까지 수십 년 동안 하늘을 나는 꿈을 가끔 꾸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처음 느껴본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수줍음이 많던 시골소년은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하였다. 그 밑거름은 초등학교 때 ‘학생회장선거’로 첫 희열을 가르쳐주신 담임선생님 덕분이었다. 먼 훗날 쌍둥이 손주는 초등학교 학생회장선거를 어떻게 기억할까. 축제하는 것처럼 즐겁게 선거 운동하는 어린이들이 아름답다. 어른들의 선거에 가슴 떨리는 진지함이 있기 바랐다.
- 2017-03-1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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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진학ㆍ진급과 성장
- 3월 2일 새봄, 쌍둥이 손녀ㆍ손자는 2학년으로 진급하였다. “동생들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였다. 초등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이 어려보이고,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보다 엄청 크다고 느낄 터이다. 상급학교 진학과 한 학년 진급을 되풀이 하면서 어린이는 무럭무럭 성장한다. 쌍둥이가 2학년이 되고 방과 후 관리가 문제다. 두 아이가 한 반으로 편성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방과 후 일정은 각각 다르다. 아침 등교를 보살피고 오후에는 집에서 대기하거나 학습장으로 데려가야 한다. 할아버지ㆍ할머니가 꼭 필요한 대목이다. 아들가족과 가까운데서 사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내와 교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이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유치원을 졸업한 외손자는 작년의 사촌 쌍둥이 누나와 형처럼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엊그제의 유치원 친구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다시 만남을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넓고 깨끗한 체육관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엄숙한 분위기다. 6학년 형들이 사이사이에 앉아서 신입생에게 입학을 축하하면서 선물을 주었다.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있었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또렷하게 진행되었다. 형들과 교가를 같이 부르는 신입생들의 모습이 든든하게 보였다. 며칠 전 유치원생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 큰 아이로 느껴졌다. 교감선생님의 안내말씀에 좋은 학교라는 인상을 받았다. “혁신학교로 지정된 학교입니다.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아이들 지도에 많은 노력을 할 터이니 지켜보고 격려해주십시오.” 학부형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담임선생님과 방과 후 선생님 두 분이 아이들을 지도한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몇 개 학년 합반수업을 하였던 수십 년 전, 외손자의 부모가 다녔던 대도시의 학교와도 비교되었다.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입학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놀면서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딸 가족과 함께 외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기념사진에 남기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아버님ㆍ어머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후세대에게 되돌리고 싶다.
- 2017-03-08 1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