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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소비를 위한 행동 원칙
- 5070세대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헝그리(hungry) 세대다. 악착같이 모으고 아끼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신보다는 가족, 소비보다는 저축이 몸에 배어 있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는 아까운 줄 모르지만 ‘나’를 위해 쓰는 것은 몇 번이나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 5070세대다. 필자의 부모님도 평생 자신을 위해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은 적이 없는 분들이다. 어쩌다 자식들이 좋은 옷을 선물로 드리면 “이건 얼마짜리냐?”, “환불은 안 되냐?” 하며 자식들 눈치를 본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에 인색하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 5070세대가 모으고 아끼고 저축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꼈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 투자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누리면 어떨까? 이에 이번 호에서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비(이하, 나·행·소)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 원칙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유가 아닌 경험을 위해 소비하라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호 교수는 “행복의 기준이 과거에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에서 이제는 돈을 어떻게 소비하느냐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즉 지금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나눌 수 있는 소비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는 크게 ‘소유를 위한 소비’와 ‘경험을 위한 소비’로 나눌 수 있다. 과거 5070세대는 소유하기 위한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자동차, 집, 옷 등을 소유하고 사용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소비의 행복감은 단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렇다면 경험을 위한 소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령 학습하며 강의를 듣는 것, 여가활동, 여행을 떠나는 것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직접 체험하며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소유보다는 경험을 위한 소비가 훨씬 행복감이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뭘까? 경험은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가장 선호하는 여행([자료1] 참조)을 예로 들어보자. 여행을 떠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왜 그럴까?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여행이라는 경험을 통해 나만의 이야기가 생기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서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5070세대에게 ‘경험하고 체험하는 소비’는 익숙하지 않다. 경험을 위한 여가활동은 기껏해야 TV 시청 정도뿐이다. 5070세대가 성장해왔던 과거 1970년대에는 마땅한 여가 활동도 없었다. 화투 정도가 전부였고 1980년대에 와서야 도심에서 탁구, 당구, 볼링, 테니스 등을 즐겼다. 최근에는 골프와 캠핑 등도 여가활동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경험을 위한 소비’가 반드시 여가활동이나 여행일 필요는 없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의 좌표를 배움에서 찾는 5070세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 60세 이상 학점은행제 등록자는 2만2915명(대학학점인정 과정 기준)이며, 55~64세의 평생교육 참여현황은 OECD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교육과학기술부 국가평생교육 통계조사). 또한 지난 2013년에는 1972년 방송통신대 개교 이래 최고령자인 정한택(입학 당시 91세)씨가 입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5070세대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비’를 위해서는 ‘갖고 싶은 것’에서 ‘하고 싶은 것’으로 소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일본에서도 여가활동의 주역이 10대에서 60대 이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생산성본부에 따르면, 고수입의 활동적인 70대가 레저시장의 주도세력이다. 유병장수시대 행복하게 하는 소비 과거 학창 시절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매슬로우 욕구 5단계 이론’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 따르면, 사람은 의식주와 안전의 욕구가 해결되면 상위 욕구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궁극적으로 꿈꾸고 싶어 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욕구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 이론이자 경험론이다. 나·행·소 관점에서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1단계 생리 욕구는 의식주 관련 소비로, 2단계 안전 욕구는 건강 예방을 위한 소비로, 3단계 소속감 욕구는 친구/동호회 활동을 위한 소비로, 4단계 존경 욕구는 학습/교육 활동을 위한 소비로, 5단계 자아실현 욕구는 여행을 위한 소비로 매칭할 수 있다([자료2] 참조). 앞서 필자는 ‘경험을 위한 소비’가 나·행·소 첫 번째 요소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매슬로우 욕구 이론에 따르면 모든 5070세대가 ‘경험을 위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빼어난 경치라도 당장의 배고픔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은퇴생활을 하는 5070세대의 소비 성향과 욕구도 동일하지 않다. 은퇴 후에 소득이 중단되어 의식주 관련 소비가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는 경우도 있다([자료3] 참조). 여기에 의료, 간병을 위한 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경험을 위한 소비’는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5070세대가 나·행·소를 위한 소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소비욕구 5단계에 따르면 1, 2단계처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화와 건강과 관련된 소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은퇴재무설계 관점에서, 자산을 모으는 웰스(wealth)가 아닌 건강을 지키는 헬스(health)에 관심을 갖는 50대가 많아지고 있다. 건강이야말로 최선의 노후대책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닌가. 건강하지 못하면 노후생활의 질은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준비된 노후자산은 조금 부족해도 몸이 건강하면 긴 노후의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산의 품질이 아닌 몸의 건강품질을 높이는 소비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건강은 목표가 아닌 수단이 될지 모른다. 건강을 통해 더 젊게 살고, 더 즐겁게 살며, 더 행복하게 사는 궁극적 가치에 한발 다가서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 먹고, 건강을 예방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비야말로 나를 지키고 행복하게 하는 소비가 아닐까? Clean & Dress up 소비에 인색하지 말라 몇 년 전 개봉한 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퇴직 후 은퇴생활을 즐기다 시니어 인턴으로 일하는 70세 노신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로버트 드 니로)은 다운타운에 방 여럿 딸린 자택을 소유한 나름 성공한 중산층이다. 비록 아내와 사별했지만 자녀도 별 탈 없이 잘 자라 독립했고, 취미로 요가나 화초 재배를 하며, 가끔 손자 재롱 보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한 은퇴세대다. 주인공은 혼자 사는 은퇴세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소 옷매무새 하나도 빈틈이 없다. 그는 언제나 젊은 사람보다 더 깨끗하고 말끔한 시니어다. 옷차림새뿐만 아니다. 항상 주변을 깨끗이 한다(Clean up). 수십 년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노하우와 나이만큼 풍부한 인생 경험은 CEO뿐만 아니라 젊은 직장 동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액티브시니어들도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옷은 비즈니스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편한 게 좋은 것이여!”라며 집에서도 외출할 때도 늘 입는 아웃도어 복장은 아닌지 살펴보라. 이왕이면 깔끔하게 잘 갖춰 입고(Dress Up) 다니자. 나이 들수록 깨끗하게 잘 차려 입어야 한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반듯하게 차려 입은 상대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 손주들도 좋은 향기가 나는 할아버지를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잘 차려 입은 옷은 자신감을 더해준다. 그러므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Clean & Dress Up 소비’에 절대 인색하지 말자.
- 2017-09-1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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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한 자식이 주는 십일조
- “가형, 정말 고마워!” “원장님, 왜요?” “지난번 얘기해준 십일조 때문에….”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보죠?” “음, 덕분에 아이들한테 매달 용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 집안 분위기도 달라졌어!”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보는 선배는 자식들한테 늘 불만이 있었다. 아들이 셋인데 국립병원장 출신이라 체면도 있고 해서 결혼할 때마다 강남에 집을 사주거나 전셋집을 얻어주느라 허리가 휘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은 칠순이 접어든 나이에 허리도 안 좋고 거동도 불편한데도 동네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결혼한 자식들이 그 정도 해줬으면 당연히 용돈은 물론 명절 때나 보너스를 탈 때 선물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란다. ‘아들은 사춘기 지나면 남남, 군대 가면 손님, 결혼하면 사돈집 아들, 손주를 낳으면 해외 동포’라고 했던가. 마음 한구석이 섭섭했는지 가끔 자식교육 잘못시킨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난봄, 필자 집에서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십일조 제도’를 지나가는 말로 소개했더니 바로 가족회의를 열어 자식들한테 공개적으로 얘기했단다. 그리고 그다음 달부터 십일조까지는 아니지만 세 아들이 각각 매월 20만원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아이들과 협의해서 십일조 제도를 시작했다. 매월 받는 월급의 십 분의 일을 그동안 키워준 엄마한테 용돈으로 주라고 한 것이다. 은연중의 압력이라고나 할까 약간의 강제성을 띤 제안이었지만 아들과 딸은 입사 첫 달부터 이를 실천했다. 보너스를 탈 때도 예외 없이 용돈이 왔다. 다만 결혼한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정액으로 감면해주었다. 이러한 십일조 제도는 우리 가족에게 생각보다 큰 변화와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줬다. 첫째, 자식들과 더 가까워졌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은 부모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이상을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되돌려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받은 돈으로 맛있는 찬거리나 고기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문자를 보내보시라. 냉장고 털이범들이 차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온다. 둘째, 가족과의 대화가 많아졌다. 이번에는 무엇을 사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고 필요한 게 뭔지 자식들에게 묻다 보면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뢰가 생긴다. 셋째,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관계가 달라졌다. 어느 집이든 고부간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되고 그만큼 배려하는 마음도 생겨 작은 오해 정도는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간다. 행복이란 나비와 같아서 좇으면 도망간다. 자식들한테 바라는 것들을 내려놓으면 불만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십일조 학습 효과 덕분인지 결혼 후 아들은 장모한테, 딸은 시어머니한테 매달 용돈을 드리고 있다. 옛말에 ‘사돈집과 뒷간은 멀리 두라’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사돈집과 한집안 같은 분위기라서 자주 식사도 하고 망년회도 함께한다. 또 서로 역할 분담을 해 네 명의 손자도 보살펴준다. 어느덧 큰 외손녀와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행복은 부모 자식이 서로에게 한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는 덕분이 아닌가 싶다.
- 2017-09-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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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천벽력 같았던 소식
- 필자는 직업군인으로서 젊은 시절에 전·후방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군대생활을 했다. 따라서 아이들도 필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부분이 부모로서 늘 미안했다. 그래도 다행히 공부를 곧잘 해 재수, 삼수라는 걸 모르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 아이가 대학 졸업을 불과 한 학기 남겨놓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버렸다. 기왕에 어학연수를 목표로 가는 것이니 가급적 교포가 많지 않은 곳으로 가야 목적 달성에 유리하다며 고르고 골라서 간 곳이 미국 콜로라도였다. 2년여의 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아이는 남은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 보따리를 싸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놈까지 데리고 가버렸다. 당시에도 한국 사회는 고용불안이 심각했고 이로 인한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기지개를 한번 펴보겠다는 자식의 의지를 꺾을 부모는 없다. 빠듯한 월급으로 두 아이의 대학 및 유학 뒷바라지까지 한 필자 부부는 나름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지 1년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알고 있던 터라 죄송하다며 엄마에게만 살짝 알렸는데 아내가 필자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달이 훌쩍 넘어서야 조심스레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필자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딸아이의 배신에 필자는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도 한국에서 부모 따라 이민 간, 그야말로 불알 두 쪽만 달랑 찬 녀석이 뭐가 그리 좋다고 임신부터 덜컥 했단 말인가?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이 왔다. 사진 속 손자 녀석은 무럭무럭 잘 크는 듯했고 커갈수록 예쁘기만 했다. 필자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수 대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안정된 주거공간이 필요할 듯해서 집을 사고 ‘블랙카우델리’라는 음식점을 개업하는 데 일정 부분을 도와주었다.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열심히 노력한 딸네 부부는 사업을 잘 일궈 튼튼한 기반을 잡았고 ‘블랙카우델리 2호점’을 1호점 인근에 또 냈다. 필자는 직장 때문에 딸네 부부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년퇴직 후에야 미국행을 결정했다.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년 전 일이다. 미국에 가서 딸아이의 유학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 지금은 사위가 된 친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쳤고 이제는 단란한 가정까지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필자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필자 앞에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사위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열심히 살 것을 당부했다.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자신이 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딸 덕분에 이제는 해외여행도 자주 하고 풍요로운 노년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혼사가 있을까 자위해본다.
- 2017-09-0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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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53세 차이 나는 결혼식 사연
- 해외토픽 뉴스에서 매우 재밌는 화제를 하나 보았다. 무려 53세 차이의 결혼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 보편화 되어 아무도 나이 차 많이 나는 결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추세이다. 더구나 프랑스의 최연소 대통령 마크롱은 고교 시절 은사인 24세 연상 선생님과 결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남자가 두세 살 정도 많은 차이를 적당하게 여겼다. 남자가 나이가 훨씬 많으면 도둑이라는 표현도 하지만 여자가 나이가 많으면 능력 있다고 축하해 준단다. 그래서 신부가 연상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친구의 딸 중에도 서너 살 정도 연하의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모두 잘했다고 축하해 주었으며 아주 잘살고 있다. 이렇게 여자가 연상인 커플을 많은 사람이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필자 개인적인 생각은 여자가 너무 나이 많으면 거부감이 들것도 같다. 그런데 저 해외토픽의 소식은 좀 유별났다. 신부는 61세의 할머니인데 신랑은 8살 어린이라는 것이다. 무슨 사연 있겠구나 했더니 역시 깊은 뜻이 있는 결혼식이었다. 8살짜리 신랑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61세 할머니와 꼭 결혼하고 싶어 하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다고 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손자가 대신 나선 것이란다. 흑인인 그들은 조상이 행복하지 못하면 후손도 행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행복하시라고 손자에게 할머니와 결혼식을 올리게 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것 같은 까만 얼굴의 귀여운 신랑이 면사포를 쓴 할머니에게 뽀뽀하는 것으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는데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다행스러운 건 결혼식이 끝나도 혼인신고나, 같이 사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조상을 공경하는 뜻뿐인 이벤트였던 것 같다. 53세 차이 나는 결혼식이라 해서 어떤 가십거리가 있는지 색안경을 끼고 잠시 생각했던 필자는 약간 부끄러웠다. 조상님을 위하는 마음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 모시기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해 지면서 그 꼬마 신랑이 훌륭한 사람으로 잘 자라기를 기도해 주고 싶다.
- 2017-08-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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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의 힘
- 며느리가 어쩌다 다리를 다쳤다. 유아원에 다니는 4살 손자, 6살 손녀 둘을 할아버지가 자동차로 등하교 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며느리 입장에서야 시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식으로 들락날락 아이들 돌보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에게 SOS를 보내는 것은 마땅히 도움 청할 곳도 없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시아버지에게 부탁할까 싶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아들네 집은 멀다. 우리 집에서 전철로 한 시간 반을 가야 한다. 전철에서 내려도 집까지 십 여분은 걸리는 거리이니 편도시간만 두 시간이 훌쩍 걸리는 길이다. 왕복 네 시간은 길에서 보내야 한다. 게다가 유아원은 10시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9시 반까지는 아들네 집에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 있는 집이 다 그렇지만 아침은 집안이 온통 전쟁터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행동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깨워야 하고 씻겨야하고 아침밥을 먹여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한다. 며느리가 아픈 발을 동동거리며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는데도 아이들은 도무지 남의 일처럼 생각은 딴대 있고 행동은 굼뜨다. 그 바쁜 틈에도 뽀로로 같은 만화영화를 보여 달라고 보챈다. 할아버지도 옆에서 눈치껏 며느리를 도와주는데 아이들 하는 행동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일어난다. 등짝이라도 한 대 후려 패 버리고 싶다. 며느리는 인내심 있게 계속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르고 달랜다. 필자가 자식들을 키울 때는 어땠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이런 경우라면 달래기보다는 야단치고 매를 들었을 것이다. 전통적 육아교육에다 주먹구구식의 상식을 더해 아이를 우리가 키워 왔다면 현대의 젊은이들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육아기법을 배운다. 책꽃이를 둘러보아도 육아에 관한 책들이 많다. 젊은 세대가 우리세대보다는 아이들 키우는 방식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짬을 내어 냉장고를 보니 ‘어머니의 기도’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어머니의 기도 - 찰스 마이어 『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묻는 말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도록 도와주소서. 면박을 주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아이가 우리에게 공손하길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 아이에게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웃거나 창피를 주거나 놀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비열함을 없애주시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며느리도 사람인데 울컥 화가 치밀 때는 매를 들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같은 글을 자주 읽으며 마음 수양을 하는구나! 역시 내가 며느리는 잘 얻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시집간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너도 아이를 때려서 훈육하려고 하지 마라. 하고 며느리 자랑을 하였다. 딸을 통해 이 이야기는 아들에게 전해졌다. 아들이 폭소를 터트리며 한바탕 웃은 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시아버지 앞에서 아이를 어떻게 때리느냐! 우리끼리 있을 때는 훈육의 매를 들기도 하지’ 하더라는 것이다. 아! 그래 맞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힘이다. 우리도 어른들 앞에서는 아이들을 때리지 못하게 교육받았다. 화가 난 아버지를 피해 할아버지 방으로 도망가면 상황 끝이었다. 할머니 품속 치마 속은 엄마도 건드리지 못하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부모한테 매를 맞아 죽은 아이가 있다는 방송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있는 집의 아이였다면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할아버지가 아비나 어미보다는 한발 뒤에 물러서 있지만 매의 눈으로 손자, 손녀를 지켜보고 있다.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넓은 보호막을 치고 있다. 정신이 온전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한 친부모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정교육이요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위력이다.
- 2017-08-1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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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택시기사의 아하 그렇구나!
- 지난해 가을 결혼식이 많은 토요일이었다. 양재역에서 지하철을 탈까하다가 논현동에 있는 호텔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문을 열고 좌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전석에서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언뜻 백밀러로 비치는 기사님의 얼굴은 백발의 노신사였다. 요즘 택시를 타면 싸움이라도 하고 막 돌아온 사람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있거나, 무뚝뚝하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어서 먼저 목적지를 말하면 마지못해 겨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예”하고는 운전만하는 기사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특이한 분이라 생각되어 말을 걸었다. “그 연세에 어떻게 즐겁게 운전을 하세요?” “아아! 아니예요, 저는 40대 청년인데요....” 마침 주말이라 10분정도 걸릴 거라 생각했던 길이 차가 밀리는 바람에 50여분이 걸렸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 기사 분은 신나는 말투로 자신이 왜 즐겁게 손님을 대하고, 신바람 나게 운전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주었다. 그 기사분의 정확한 나이는 36년생이니 우리나이로 팔십 둘이다. 그 나이라면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반이 넘고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하며 소일할까 고민하거나 갈 데도 별로 없이 쓸쓸하게 지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서른살 때부터 운전을 했으니 50여 년간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20년전 환갑이 지나면서 택시운전은 물론 세상이 싫어졌다고 했다. 손님들이 보기만 해도 짜증스럽고, 운전은 갈수록 하기 힘들어지고, ‘왜 나만 이런 힘든 일 하고 살아야 하는가?’하는 자학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운전대를 던져버리고 무작정 쉬면서 산에도 가고, 없는 돈에 해외로 놀러 다니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술도 마음껏 마셔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작정 놀고먹는다는 게 점점 힘들기 시작했다. 몸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몸에는 전에 없었던 당뇨와 고혈압이 생기고 얼굴의 표정은 점점 어둡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운전대를 놓은 지 6개월이 지나니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조차 없어지면서 세상과 격리되어 나 혼자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운전이야말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소중한 사실을 알게 된 어느 순간 손님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일의 소중함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아하, 그렇구나! 내 생각을 먼저 바꾸자’를 마음먹었다. “아하, 그렇지! 모든 게 내 탓이다.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거꾸로 생각하자. 세상의 주인은 남이 아니고 바로 나다. 나를 바꾸어보자!” 그분의 행복의 개념도 욕심에서 봉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그분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변화의 시작을 하기로 하고 부인에게 무조건 존대말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로 긍정의 하루하루를 시작,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집안 청소를 도와주는 작은 일부터 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거리감응 느껴왔던 할머니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외출할 때는 연인들처럼 늘 손을 잡고 다니게 되었다. 1년만에 다시 완전히 놓았던 택시운전대를 잡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친절한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한지 벌써 20년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미 손자들까지도 모두 대학생이 되고 아무 할일도 없을 나이지만 지금 집안에서의 위치가 상당히 달라졌다. 한때는 자식들이 언제 용돈이라도 듬뿍 주려나 기다리기도 했고, 자주 찾아주지 않는 자식, 손자들이 야속하가도 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며느리나 손자들에게 가끔 용돈까지 주다보니 당당한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심각했던 당뇨도 다 없어졌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5,60대 건강을 유지하여, 지난해 말 종합검진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다. 오히려 의사들이 “이처럼 건강한 비결이 도대체 뭐예요?”하며 묻더라고 자랑을 했다. 정말 ‘아하, 그렇구나!’라는 말 한마디의 효과는 만병통치약이요, 자신을 변화시켜 세상을 바꿔나가는 대단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날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하루하루 신나게 택시에 실어 나르는 긍정바이러스의 힘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 2017-08-1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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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한듯 뭉클한 영화 <천수위의 낮과 밤>
-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뭉개다 일어나 TV를 보는 고등학생 아들 가오(량진룡 분). 그 시각 어머니 정 여사(포기정 분)는 동네 ‘Wellcome’ 슈퍼마켓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도입부만 보면 게으른 망나니 아들을 둔 홀어머니 고생담 아닐까 싶지만, 점차 관객은 가오가 HKCEE(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며, 신문을 사오라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는 어머니의 소소한 심부름에도 군말 않는 착한 아들임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 생신 잔치 때, 외국을 들락거리는 잘사는 외삼촌 가족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정 여사와 가오. 외할머니가 입원하자 가오는 바쁜 어머니 대신 사촌 여동생(진옥련 분)과 함께 부지런히 죽 도시락을 날라댄다. 외할머니는 “네 엄마는 일밖에 모른다. 남동생 둘을 다 공부시켰고, 맏딸로 고생 많이 했다”며 울먹인다. 이 장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홍콩 여성들의 옛 사진과 남편의 관 앞에서 서럽게 우는 정 여사 모습으로 이어진다. 정 여사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혼자 사는 할머니(진려운 분)의 TV 구입을 도와주고, 할머니는 말린 버섯을 선물한다. 서로 의지하는 이웃이 된 정 여사와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시험 결과를 궁금히 여긴다. 세상 떠난 딸이 남긴 유일한 자손인 손자가 보고 싶지만, 사위가 재혼해 맘놓고 전화하기도 힘든 할머니. 정 여사는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동행한다. 손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며 나오지 않고, 사위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게 없어서…”라며 내미는 금반지를 물리치고, “새 장모님이 아프셔서…” 하면서 음식 값을 치루고 훌쩍 나가버린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자네와 가오에게도 주려고 은반지를 샀어. 손자와 사위 내외에게 주려던 금붙이도 자네가 갖게”라며 반지 상자들을 내민다. 정 여사는 “그럼 간직해둘게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게요” 한다. “나도 가오를 손자로 여기고 기도할게”라고 답하는 할머니. 중추절을 앞두고 월병(月饼) 티켓을 구해온 외삼촌(고지삼 분)은 배웅 나온 가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허안화 감독의 은 정 여사와 가오, 할머니의 일상(장을 보고, 조리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별스럽지 않은 하루하루)을 통해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밥 먹는 장면이 어찌나 많은지 고기와 푸성귀 볶음, 계란 부침과 국 등 두 개 이상 찬이 오르지 않는 식탁에,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입안에 쓸어 넣듯 하는 빠른 식사까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자랑하는 중국 요리를 느긋느긋 음미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초간단 조리와 초스피드 식사 장면으로 시간 흐름을 보여주며, 원제목인 ‘天水圍的日與夜’와 영어제목인 ‘The Way We Are’에 충실한 영화임을 증명하려는가 싶다. 먹는 문제를 중하게 혹은 별스럽지 않게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도 식사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중추절을 맞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정 여사와 가오와 이웃 할머니. 웃으며 과일과 월병을 나누는 그들 뒤로 고층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창밖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아파트 광장에 모여 중추절을 기리는 주민들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그날의 끼니를 장만하는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게도 달은 은은한 빛을 내린다. 이 영화는 허안화 감독의 생활 밀착형 세밀화 작품(, )의 맥을 잇고 있다. 가족과의 마작놀이 셈도 바로 치루는 정 여사의 반듯함, 금목걸이를 주고받는 정 여사와 할머니의 정서적 연대를 식사 장면처럼 무심하게 그려낸다. 눈썰미 좋은,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이 아니라면 물처럼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들.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들은 교회 선생님을 잠깐 흠모하고, 어머니는 늙고 병들며, 친척 장례식장에서 종이돈 접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교훈 없이 담백한 장면을 그리기만 했는데도 허안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뭉클하게 떠올릴 것 같다. 허안화 감독의 작품에는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닌, 마치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외모의 실제 인물이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무심한 표정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삶의 회한을 미세하게 드러내는 포기정과 진려운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은 영화 배경으로 천수위를 택함으로써 홍콩 현실을 담아내는 사회적 책무에도 충실하게 복무한다. 천수위(天水圍)는 1990년대 홍콩의 토지 개간으로 생긴 서민 주거 지역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이들 30여 만 명이 살며 고층 아파트형 공용 주택이 많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사회 지원 부족으로 가정 폭력, 자살, 실업 등의 불행한 뉴스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 어머니와 두 자녀가 고층 주택단지에서 사망한 사건이 유명하다. 홍콩과 중국은 하나가 됐지만, 영화에서는 높은 벽이 그려진다. 특히 천수위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묘사된다. ‘슬픔의 도시’로 알려진 천수위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모순이 집약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유국창 감독의 (2008)도 홍콩 영화 금상장 신인상과 미술상 후보에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천수위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허안화의 제안에 제작자는 영화가 음울해질 거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 아주 저렴한 텔레비전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9월에 촬영을 시작해 연말 전에 완성했다. 제작비도 100만 홍콩 달러 정도밖에 안 들었다. 고화질 HDV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을 본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2009) 제작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국과 홍콩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구 이동과 계급, 사회 격차를 은유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은 제28회 금상장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는 과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 분)과 리삼(임달화 분) 부부는 천수위의 아파트에 산다. 의처증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내를 폭행한다. 참다못한 웡히우링은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한다. 리삼이 찾아와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웡하우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근사한 삶을 상상했던 중국인 아내의 팍팍한 일상. 이 나이를 초월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면, 는 중국-홍콩 가족의 파멸 드라마다.
- 2017-08-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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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어항 이야기
- 이사한 아들네 집에 가보니 전에 살던 집에서는 못 보았던 어항이 거실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귀여운 손녀가 조그마한 손으로 필자를 어항 앞으로 이끌며 “할머니, 아빠가 물고기 사왔어요, 예쁘죠?” 하며 자랑이다. 하긴 우리 아들은 늘 강아지나 금붕어 등을 키워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혼 전에는 필자가 반대했고 결혼 후에는 마누라가 싫다고 해서 이루지 못했다. 남편이나 아들이나 마누라의 입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아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평소 며느리가 큰 집으로 옮기면 물고기를 길러도 좋다고 했단다. 이번에 집을 늘려나간 아들은 ‘이때다’ 하며 갖고 싶었던 어항을 설치한 것이다. 크기는 작아도 산소 공급기와 물 순환 기구, 온도계 등 설치 비용이 꽤 들었다고 한다. 아들이 어릴 때 어항을 한번 설치한 적이 있어 그 비용이 얼마쯤 될지 짐작이 됐다. 필자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저렇게 깨끗하고 맑은 물에 초록 수초가 살랑거리고 자그마한 색색의 물고기가 유영하므로 보기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항 유리벽에 이끼가 생기고 물이 탁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손녀에게 예쁜 어항을 보게 해줘야 할 텐데 걱정스럽다. 무엇이든 생물을 기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어항도 관리가 무척 중요하다. 그러니 아들이 앞으로 어항을 잘 관리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잘 보살피겠다며 물고기를 기른 적 있다.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나 갖고 싶어 해 허락을 했다. 물고기를 기르면서 신기한 모습도 봤다. 필자는 그때까지 물고기는 알을 낳아 부화시키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구피’라는 색이 고운 작은 물고기는 새끼를 낳았다. 어느 날 보니 어항 안에 아주 조그만 새끼 물고기들이 잔뜩 생겼다. 너무 신기하다며 즐겁게 들여다봤는데 다음 날 보니 새끼들이 온데간데없이 거의 다 사라지고 몇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아들은 어미가 먹이로 착각하고 잡아먹은 거라며 새끼 보호통을 어항 위쪽에 설치했다.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어미와 새끼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아들 말대로 새끼 보호통에서 어린 구피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신기했다. 어느 정도 컸을 때 통에서 풀어놓았더니 어미와 새끼 물고기가 잘 어울려 지냈다. 작은 물고기였지만 집 안에서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건 가슴 뛰고 신선한 일이었다. 구피는 번식력이 왕성해 새끼를 자주 낳았고 아들은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어린 새끼를 분양해주기도 했다. 어떤 아저씨는 구피 새끼들을 분양받으려고 우리 동네까지 오렌지 주스를 사 들고 오기도 했다. 인터넷의 물고기 동호회에 들어가면 각종 물고기를 기르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서로 물고기를 교환하기도 하고 정보도 나눈다는데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한동안 어항 청소 등 관리를 열심히 하던 아들은 그 뒤 입시에 매달리게 되면서 물고기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졌다. 작은 어항이지만 손이 보통 가는 게 아니었고 청소를 할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물갈이를 자주 해주지 않으니 유리벽에 녹조가 생겼고 물도 탁해져 더는 예쁜 장식품이 되지 못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인지 물고기도 다 죽어버렸다. 그때 필자는 다시는 생명이 있는 걸 기르진 않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아들네 집에 들여놓은 어항은 참 깨끗하고 보기에도 좋다. 어항이 가습기 역할도 한다니 관리만 잘하면 좋은 실내 장식품이 될 것이다. 이제는 물고기를 보며 즐거워하는 귀여운 손녀 손자를 위해서라도 항상 깨끗한 어항으로 관리되기를 바란다.
- 2017-08-0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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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울 학(學)을 가르쳐주신 조부모님
- 과거에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회생활을 하다가 7년 만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가려고 하자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대학 교수가 얼마나 너를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크게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지나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당시 필자가 5남매의 장남으로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말씀은 학문보다는 인격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뒤늦게라도 대학의 문으로 들어선 것은 참된 지식을 깨우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학문이란 무엇이며 왜 대학이라는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필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학문의 세계는 깊고 넓었다. 필자는 곧 국내외 경제의 흐름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법대에 진학해 법관이 되고 싶었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공직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나와 사업자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꿨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세 살이나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일가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은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훗날 독일 백림대학을 나온 친구 김준연씨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증조부님에게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나 한동안 처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필자는 아름다운 미모에 고매한 인격의 할머니를 두게 된 것이 어릴 때도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가면 일꾼들을 두고 농사를 짓고 생활하시던 생각이 난다. 시골에 왔다고 특별히 달걀 하나를 뜨거운 밥 속에 넣어주시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누구를 크게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대하니 할머니가 싫다는 친․인척들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는 과묵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손자가 방학이라고 시골집에 인사를 가면 혹시 집안 내력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되어서인지 족보를 내어놓고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래서 필자가 족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거창 신가 집안의 32대 손이고, 고려시대 대장군으로 몽고군과 끝까지 항쟁하신 집자 평자 조부님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문무 고관대작의 집안이 되었던 내력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셨다. 필자는 당시 할아버지에게서 배울 학(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확실하게 배웠다. 만일 필자가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한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나의 한자만 가르쳐주셨을까? 살면서 항상 배우면서 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필자는 지금도 학문이 좋고 즐겁다. 어쩌면 학자를 많이 배출해낸 집안 내력 때문일 수도 있다. 작고하신 부산의 숙모님은 결혼 전에 선도 보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결혼했다고 이야기하실 정도로 할머니는 기품이 있고 위엄이 있는, 그러면서도 친절함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부모라는 사실은 항상 필자를 기쁘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95세까지 장수하신 조부모님의 영정을 필자의 집에 모시고 싶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양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온 집안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 손자들에게도 들려주고 더욱 빛나는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또 후손들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 2017-08-0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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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의 탄생 150주년에 즈음해
- 필자가 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Koll witz, 1867~1945)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이 얼마 전 독일 언론 매체에 실린 케테 콜비츠 탄생 150주년과 관련한 칼럼을 보내왔다. ‘반전(反戰) 화가’이자 ‘인권 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출생 연도가 1867년에다 생일이 7월 8일이라 적절한 시기에 그녀를 재조명한 것이다. ‘케테 콜비츠’는 작품을 통해 끈질기게 당대의 굶주림, 가난, 탄압, 인권유린, 전쟁을 고발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는 웃음이 없고 무거운 기류가 잔뜩 흐른다. 그녀는 다양한 색채를 거부하고 오직 검은색만 고집했는데 이를 통해 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콜비츠는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녀의 아버지(Schmidt)는 당시 보수파였던 비스마르크 정권의 월급을 받아 가정을 유지하기 싫다며 공무원 되기를 거부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수상(1912)한 당대의 지성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 비판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녀는 특히 하웁트만이 선보인 무대 작품 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둘째 아들 페터가 자원해 나간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1924년에 그린 [그림 1]이란 작품은 작가의 반전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콜비츠는 평화주의자의 기수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사회 빈곤 문제도 작품에 반영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수모와 시련을 겪는다.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타락한 예술’로 분류하고, 게슈타포는 콜비츠를 체포하려고 조사 협박한다. 콜비츠는 자신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억압 사실을 알리겠다고 저항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해외 구명운동도 도움이 됐다. 1941년에는 손자마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그 무렵 반전 작가로서의 메시지는 더욱 뚜렷해진다. 콜비츠는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을 비롯해 , , , , , , ,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자신이 살던 사회의 아픔을 그림에 담아낸 케테 콜비츠.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그녀 작품의 위대한 원천인 모성애를 다시 생각해본다[그림 2].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7-07-25 1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