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뉴욕 변두리 지금의 집으로 이사한 지 10년 되었다. 이 동네는 단독주택 주거지로 중산층 마을이다. 1950년대에 조성되었으며 그 시절에는 두 블록만 건너가면 맑은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다. 지금 그 개울은 오버브룩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만 남기고 있다
이웃들은 새집을 지어 입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아들딸 낳아 길러 독립시키고 이제는 나이 지긋한 시니어가 되어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는 마을 공동체의 속성이 있다. 아들이 이사하고 며칠 되지 않아 앞집에 사는 로즈라는 이름의 80대 유태인 할머니를 만났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우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동네를 소개하면서 아들 옆집에는 잭이라는 아이리시 독거남이 산다고 알려줬다. 그 집 이름은 ‘보이스 클럽’이란다.
잭을 만나니 로즈의 집은 ‘칠드런스 하우스’라고 알려준다. 그 의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로즈의 집은 6남매 자녀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 자녀들은 물론 손자들, 증손자들까지 놀러와 늘 붐볐다. 때로는 이들이 한 달씩 로즈와 함께 살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녀들의 집’이다. 잭은 70대 부인과 사별한 독신남으로 잭의 집은 늘 남자 친구들이 들이닥쳐 북적인다. 원래는 잭의 아버지 집이었는데 잭이 매입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남자들이 모여 담소도 하고 스포츠 게임도 보고 포커 게임도 하는 모양이다. 늘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이 집 이름 역시 ‘남성 클럽’이 딱 맞다.
필자 며느리는 그 마을로 이사 갈 때 두 번째 아이를 가진 상태로 만삭이었다. 아이를 출산하는 날, 마침 로즈의 생일파티가 있어 동네가 붐볐다. 그 인연으로 로즈는 손녀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긴다. 생일이 같다는 인연이 그렇게 반갑고 좋은 모양이다. 로즈는 마을에 활기를 가져다준 새 에너지가 경이로웠는지도 모른다.
잭은 아들이 정원일을 하거나 바깥 청소를 하면 “장인이 해줄 텐데, 장인 기다리지?” 하며 아들을 놀린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민망해한다. 작년에 바깥사돈은 은퇴를 했다. 은퇴 후 처음으로 딸 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이때 필자 아들이 바빠서 미루기만 했던 집 페인트도 장인이 해줬단다. 아마도 잭에게는 그 풍경이 낯설고, 가정을 이룬 자녀 집 페인트를 해주는 별난 내리사랑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필자의 아들을 만나면 종종 그렇게 장난을 쳤다. 잭은 세 자매를 두었는데 모두가 교사다. 그런데 딸과 손자들의 방문은 거의 없었다. 70대인데도 햇살이 깜짝쇼를 하는 봄에는 무개차를 타고 달리는 멋도 부린다. 집과 정원관리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해낸다. 어느 구석 하나 홀아비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들 집은 오래된 집이라 고장도 잘 나고 부품 구하기도 힘들다. 있는 것을 다시 사용해야 하니 쉽지가 않다. 이럴 때마다 잭은 친절하게 도와주는데 필자 아들에게 닦아라, 돌려라, 빼라, 밀어 넣어라 하며 수리를 도와준다. 본인 손은 절대로 대지 않는다. 이런 잭의 태도를 보면 바깥사돈이 신체 멀쩡하고 건강한 자녀 집 페인트를 대신 칠해준 게 이상스럽기도 했겠다.
필자도 종종 아들 집에 가서 손자들을 돌봐준다. 이웃들은 틀림없이 필자 아들 집을 ‘부모의 집’이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나이 65세가 되면 전철ㆍ공원 무료에 국민연금 수급자가 된다. 방학을 맞는 학생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고생은 끝나고 안락한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스스로 물었다.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는가? 대답이 쉽지 않는 대목이다. 세월이 번개처럼 흘러 2016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고령자가 된지 어느덧 몇 년이 됐다. “건강하고,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친구가 있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면 더욱 좋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사에 정신 차리기 어렵다. 머리 싸매고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몇 해 전까지 없던 나이제한이 보편화 되었다. 고령자는 수강이 제한되고, 수입창출 알바기회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이 위주의 취업과 창업만이 성행하고 있다. 시니어들이 주축으로 하는 재능기부 자원봉사단체가 많다. SNS를 비롯하여 노래 부르기ㆍ그림그리기ㆍ스포츠댄스 등 배울 곳은 많다. 시대변화에 따라서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나태해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일과표를 작성하고 꾸준히 실행하여야 한다. 올 겨울은 다른 때보다 추위와 찬비, 미세먼지가 많아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한다. 휴일 이른 아침, 몇 번이나 창밖을 살피고 나서야 친구들과 산행하려고 집을 나섰다. 창문을 내다보면서 비가 올지 걱정하지말자.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눈이 오면 방한복 하나 더 입고 아침부터 집을 나서자. 망설이면 하루를 헛되게 보내고 만다. 은퇴 전보다 더 엄격한 일정관리를 하여야 한다.
정기적인 모임이 운동을 쉬지 않고 하는데 도움을 준다. 운동을 지속하려면 재미가 있어야 한다. 같은 운동을 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동호인과 사귀면 운동하는 재미가 난다. 30년 넘도록 산행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친구들과 정기적인 동호인 모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시니어 소비지출 항목 중에서 건강관리비가 상당함을 누구나 경험하고 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단련비 등은 필요하지만 병원비, 약값은 건강을 미리 챙겼다면 절약할 수 있는 부분이다. 건강이 행복의 시작이면서 소비절약의 중요한 요소이다. 건강한 생활을 하는 방법으로 운동ㆍ공부ㆍ자원봉사 등이 있다.
손주와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한다. 주말에 가까이 사는 쌍둥이 손주와 세종에서 올라 온 외손자 등 세 녀석이 한 달여 만에 ‘합숙’을 열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니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열렸다. 깔깔 웃어대고 놀이에 몰두하면서 할아버지ㆍ할머니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세 녀석을 옆에 뉘이고 잠자리가 불편할 새라 한밤을 지켜도 즐겁기만 하다. 손주는 인생의 제일 큰 행복이며 세대를 따뜻하게 이어줄 것이다.
어릴 적 할아버님, 할머님께 사랑 받았던 기억이 뚜렷하다. 손주들에게 그만큼 잘할 수 있나 종종 스스로 묻는다. 자식을 기르면서 한 세대를 다시 살았고, 손주를 돌보면서 또 한 세대를 다시 산다. 절묘한 자연의 순환이다. 건강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은 손주와 친하게 지내는데 있다.
신부처럼 아름답다는 5월의 어느 주말, 아들 결혼식을 뉴욕 변두리 스포츠클럽의 야외정원에서 하기로 했다. 사촌까지의 가까운 가족들과 신랑 신부 친구들만 초대되는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혹시 날씨가 안 좋을 수도 있음을 예상해 우천 시에는 실내에서 식을 치를 수 있도록 1년 전부터 계획해놓았다.
그런데 아침에 화창했던 날씨가 정오가 지나면서 갑자기 흐려지더니 여우비처럼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결혼식이 거행될 오후 두시쯤 되자 작은 빗방울은 가는 선을 그리며 약 올리듯 내렸다. 하객들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간소한 결혼식이라 해도 하객들을 빗속에서 허둥대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실내에서 결혼식을 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결혼식 대행업체 측은 빨리 결정을 내려줘야 식장을 준비할 수 있다고 재촉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잠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신부가 말했다
“오늘은 제 날이니까 제가 결정하겠어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야외에서 하고 싶어요.”
신부의 말 한마디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고 결혼식은 야외에서 진행됐다. 신부의 복 때문인지 날씨는 금세 말끔하게 개었다. 덕분에 비둘기 한 쌍이 신랑 신부 머리 위를 날며 축하해주는 아름다운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 후 10년이 지났다. 미국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날’이 있다 그날은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직장으로 출근을 해서 부자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아들은 필자의 손자인 아들을 데리고 출근을 했고 며느리와 필자는 오랜만에 와인을 즐기며 고부간의 다정한 시간을 가졌다. 며느리는 시간을 적당히 잘 선택해서 말하는 특기가 있다. 며느리는 궁금했던 제 남편, 즉 필자의 아들이 성장한 얘기며 시댁 가족들의 재미있고 특이한 것들에 대해 물었고 궁금한 것도 스스럼없이 질문했다. 당연히 며느리의 성장기도 들려줬다. 고부간의 이야기가 풍성해져갈 때 며느리가 불쑥 말했다.
“어머니는 제 결혼식 날에 행복해하지 않았어요.”
볼멘 목소리였다. 필자는 며느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너는 여자이면서 나를 그렇게도 이해하지 못하겠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는 첫 만남에서 아들이 시아버지 산소로 데려갔다고 무척 감격하고 행복해한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아들 부부의 만남 첫 연결고리는 필자였다. 필자가 친구의 딸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로 온 며느리를 보았고 친구와 나는 두 청춘 남녀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줬다. 아들 부부가 만나게 된 씨앗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매파 역할까지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불만이 있었을까!
아들이 결혼하기 10년 전에 남편은 심장마비라는 복병에 저버렸다. 남편은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부터 유난히 아들이 이룰 가정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필자는 아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잘 적응할지 걱정했고, 남편은 며느리와 손자로 확장될 미래의 가족들을 자주 그려보곤 했다. 당장은 그렇게 말하는 며느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의 꿈이었던 아들 결혼식 날에 남편이 없다는 사실이 필자는 힘들었던 것 같다. 괴테의 소설 속 인물처럼 필자는 그 하루 영혼을 남편에게 팔아버린 거다. 수수께끼 같은 일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내 영혼의 부재를 신부인 며느리만 알아챘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화순(전라남도)에서 사는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아흔 넘은 노모의 충격적인 행위는 다큐멘터리 영화 의 모티브가 됐다. 이승을 떠나고 싶은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딸, 아직은 할머니와 헤어질 때가 아니라는 손녀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세대 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한 . 관객과의 대화 현장을 찾아 영화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장소 한국영상자료원 일시 2016년 9월 27일
감독 이소현
진행 맹수진(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맹수진(이하 진행)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슬픔보다는 감동이 전해지는 영화인데 현재 할머니의 건강상태는 어떠신가요?
이소현(이하 감독) 올해 아흔여섯 살이십니다. 건강은 영화에서보다 더 안 좋으시고요. 죽는다는 말은 여전히 계속하고 계셔요.
진행 따님이 영화 찍는다고 할 때 뭐라 하셨나요?
장춘옥(이하 어머니) 맨날 와서 찍는데 도대체 뭘 찍느냐고 물어봤어요. 어느 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봤는데 내가 악역 중에 악역이더라고요(웃음). 뭘 이런 것을 찍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좀 빼달라고 딸아이한테 부탁했는데 잘 안 됐어요.
진행 이 영화의 검열관이셨군요?
어머니 죽고 싶은 엄마 마음을 이해하니까요.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를 원하는 건 불효막심이죠. 그런데 지금도 어머니가 어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행 감독님은 어머니와 다른 의견이신 거죠?
감독 제가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도 그 지점이에요. 할머니는 자신이 빨리 돌아가시기를 원하고, 엄마도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살아계셨으면 하고요. 현상학적으로는 다르게 표현됐지만 너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각자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생각해요.
진행 그래도 어머니는 못마땅한 부분이 있으실 거 같은데요. 나름 편집자 역할을 하신 거 같은데 어떤 부분을 뺐고 또 어떤 부분을 영화에서 살렸나요?
어머니 우선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을 뺐으면 했는데 빼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제가 말하는 내용이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니 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관객 질문
할머니께서 자살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감독 영화 초반 제가 할머니께 물어봤을 때 “성가신께”라고 대답했어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어요. 같이 생활하면서 느낀 건데 할머니는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살아 있는 친구가 얼마 남지 않으셨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본인 손으로 손자·손녀 13명을 다 키우셨어요.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는 죽음의 거리가 손녀인 저와는 아주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능동적인 선택을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머니 제 생각은 큰아들인 저희 오빠가 위암 수술을 해서 엄마 음식을 먹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 낙이 큰아들 밥해주는 것이었어요. 아들이 당신이 해준 밥을 먹는 것이 보람이었고 살아가는 이유였죠. 당신 음식을 못 먹고 병원 음식이나 주로 죽을 먹었는데 아마 거기서도 재미를 전혀 못 느끼셨던 거 같아요.
할머니가 어서 빨리 돌아가셨으면 한다 했을 때 어머니의 진짜 심정이 궁금합니다.
어머니 우선 저희 집을 보면, 위암인데 술밖에 줄 수 없었던 오빠가 영화를 찍던 도중에 먼저 갔잖아요. 둘째 오빠도 지금 건강이 좋지 않고요. 어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혼자 외롭게 계셔요. 저는 적어도 어머니가 자식들 더 가기 전에 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독님은 할머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으면 하나요?
감독 저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만나러 가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곁에 있을 때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서울에 있을 때 일이 생기는 건 상상하기도 싫어요.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사랑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이기심은 아닐까요?
감독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한테 묻고 싶은데요,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본다는 슬픔 때문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어머니 내가 보고 싶은 것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지금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요.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하면 여태까지 좋은 일을 하고 사셨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아주 좋게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서 어머니를 보고 싶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다시 좋은 삶으로 태어나길 바라요.
감독 할머니께서 자살 시도를 하시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으니 할머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더 늦기 전에 기록해두자, 어쩌면 저를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나중에 취업준비 한다고 나갔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될까, 그래서 계시는 동안 많이 보고 시간 할애하면서 제 이기심 채우고 있습니다.
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있다면요?
감독 문학도인 제 친구가 지어줬습니다. 물리적으로 할머니가 사는 곳이 제가 사는 서울과 많이 멀기도 하죠. 또 이 영화는 삶이라는 공간의 집에서 죽음이라는 공간인 또 다른 집, 즉 무덤으로 가는 여정의 한순간을 기록하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해서 지어진 제목입니다.
어젯밤에는 ‘이자카야’ 데이트 나갔던 아들, 며느리가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잠이 들었다. 팔짝거리며 뛰어다니는 아기들 때문에 잠이 깼다. 17개월 된 손자가 누나가 하는 대로 따라서 뒤뚱뒤뚱 쫓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오늘도 역시 화창하고 환한 바깥 풍경이 감동을 준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은 그림같이 예쁘다. 가끔 뎅 뎅 종소리가 울리는 하얀 교회당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결혼식을 주로 한다는데 이곳에서 결혼한 부부는 평생 평화롭게 잘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옆으로 수영장과 맞닿은 곳의 너르고 푸른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줬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쉽기만 하다.
여행을 할 땐 미리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호텔에서 외출할 때 문밖에 초록색 카드를 붙이면 방 정리만 원하고 청소는 안 하겠다는 에코 클린 표시라고 한다. 그러면 메이드는 방 정리만 해주고 호텔 측에서는 500엔짜리 쿠폰을 2장 준단다. 이 쿠폰으로 호텔 쇼핑센터에서 기념품 등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으니 좋다며 며느리가 웃는다. 알뜰하고 현명한 며느리가 예쁘다.
600엔짜리 작고 귀여운 수호신 ‘시사’를 3개 사면서 쿠폰을 사용했다. 초록색 ‘시사’ 하나는 내가 가졌다. 그들의 이런 작은 서비스가 고객을 즐겁게 하고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 같다. 여행 마지막 식사로 일본 가정식을 먹은 후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는데 왜 그리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도 여행을 한다면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 오키나와에 와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매우 작은 차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 관광지만 다녀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친절하고 거리는 깨끗했으며 도로 위의 차는 우리나라 티코 정도의 차들이 많았다. 본받을 만한 점인 것 같았다.
1시 반 비행기라 서둘러 나서서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웠다. 렌트할 때 기름이 가득 차 있었던 만큼 돌려줄 때도 그만큼 채워서 반납해야 한다. 3박 4일 동안 300km 정도를 다녔고, 주유비는 3만원이 나왔다. 렌트비가 26만원이고 주유비가 3만원이니 교통비로 30만원밖에 안 드는 편리한 이동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를 반납한 후 셔틀버스로 ‘나하’ 공항으로 가니 우리가 탈 아시아나 비행기가 바람 때문에 연착해 1시간 정도 늦어질 거라고 한다. 오히려 잘됐다며 우리는 느긋하게 면세점에서 선물과 초콜릿 등을 사며 기다렸다.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여러모로 독특한 지역이다. 과거 존재했던 독립국 류큐 왕국이 일본에 포함된 지 채 200년이 되지 않아서 류큐 왕국의 유산, 독특한 문화, 그리고 남국의 자연 풍경 등 볼거리가 많아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원래 류큐 왕국의 중심지는 ‘슈리’ 로 ‘슈리 성’이 있기도 한데 일본에 병합된 후에는 ‘나하’가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오키나와 전투의 아픔이 있기도 하고 주일 미군기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오키나와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았으므로 다음 기회에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어린 손자 손녀와 함께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께는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박 4일 동안 주차비는 하루 9000원으로 36000원이 나왔다. 집에 왔는데도 여행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 즐겁고 편안했던 가족 힐링 여행이었다. 벌써부터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이날도 역시 쾌청하고 한낮은 31도의 무더운 날씨였다. 미리 알아봤던 여행 내내 흐리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틀려서 너무나 고마웠다. 아침식사는 일본 가정식을 택했다. 김치 없이 하는 식사가 심심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아침상을 받았다. 실이 죽죽 늘어나는 낫또를 보고 손녀가 거미줄 같다며 웃었다.
스케줄은 아기들을 위해 ‘해양 박 공원’에서 ‘오키짱 쇼(돌고래 쇼)’를 관람하고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커다란 고래상어를 보기로 했다. 사실 필자는 돌고래 쇼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살아야 할 돌고래를 훈련시켜 사람들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게 마음 아프다. 돌고래는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이런 쇼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아기들이 좋아한다니 어쩔 수 없이 관람하기로 했다.
‘해양 박 공원’에 가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어 북부에 있는 100년 전통을 가진 음식점 ‘우후아(대가)’에 들렀다. 길 옆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이 음식점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마당이나 안쪽 어디에든 크고 작은 모습의 다양한 ‘시사’가 이곳을 지키겠다는 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구(흑돼지)구이 정식, 아구 우동, 돈가스 정식 등의 메뉴가 있는 정통 일본식 집이었다. 검은색 목조건물인 이 음식점은 마룻바닥이 넓은 대청으로 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오르내리는 좁은 나무 계단이 아기자기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다다미방도 흥미로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폭포가 흘러내리며 자연의 운치를 물씬 풍기는 일본식 구조의 집이었다. 이제까지 깔끔한 휴양지만 보았다면 이곳은 일본의 체취가 느껴지는 정감 넘치는 곳이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우후아’에서 점심을 마치고 ‘추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해양박 공원’으로 갔는데 규모가 엄청났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속에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걷느라 땀깨나 흘렸다. 평일인데도 우리나라 제주도 같은 관광지여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도 많았다. 돌고래가 안쓰럽긴 해도 손녀 손자를 안고 손뼉을 치며 쇼를 관람했다.
돌고래 쇼가 끝난 후 추라우미 수족관에 가니 지인 한 분이 생각났다. 코엑스 아쿠아리움 부사장이신 지인은 코엑스 수족관을 직접 설계하셨는데 아쿠아리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규모는 비슷했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이 수만 마리 정어리 떼의 군무가 멋지다면 이곳 ‘추라우미’는 거대한 고래상어가 놀라웠다.
날씨가 너무 더워 좀 지쳤을 때 저녁식사로 ‘플리퍼’라는 유명 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해서 기운이 번쩍 났다. 역시 여행은 식도락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우리 나이가 되면 가장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여행 동안 손 하나 까딱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니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숙소에 돌아와 아기들을 재운 후 아들과 며느리가 근처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하고 오겠다면서 나갔다. 다정하게 나가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즐겁고 흐뭇했다.
전날 밤 늦게 잠이 들어 아침 기상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커튼을 여니 환한 햇살이 눈부시고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반짝 눈이 떠졌다. 그보다는 아기들이 먼저 잠에서 깨어 필자를 흔들어댔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의 즐거울 시간을 상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번 여행은 아들, 며느리의 계획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스케줄을 물었더니 아침식사는 호텔에서 하고 오전엔 호텔 해변과 수영장에서 보내겠다고 한다.
호텔에 딸린 수영장은 해변처럼 물이 흐르게 해놓았고 뜀틀과 미끄럼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시설이 있어 손녀와 손자가 매우 즐거워했다. 수영장 바로 너머로 오키나와의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어 신기하기도 했다. 호텔 입구와 안쪽에는 ‘시사’라는 신기한 동물 형상을 한 조형물이 많이 보였는데 오키나와를 보호해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해태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표정이 매우 다양하고 귀여웠다. 보통 한 쌍으로 되어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수컷이고 닫고 있는 건 암컷이란다. 닫힌 입은 안으로 들어온 복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열린 입은 복을 불러들이고 잘못 들어온 액을 내쫓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작은 열쇠고리의 ‘시사’는 600엔 정도여서 떠나는 날 귀국 선물로 점찍어두었다.
아침식사 후 곧바로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수영복 차림이 좀 민망했지만 여기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니 주눅 들 필요 없이 당당하게 놀았다. 흰색 비치 의자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은 하얀 솜사탕 구름이 탐스럽게 떠 있는 너무나도 깨끗한 파란빛이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풀장에서 수영도 하고 튜브 탄 아기와 놀아주며 어린아이처럼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예정대로 미리 검색해온 유명 맛집 ‘류큐노우시’에서 ‘와규’를 먹기로 했다. 일본산 소고기인 와규는 가격이 비쌌지만 소문대로 입에서 살살 녹았다. 오키나와는 바다로 둘러싸였어도 생선회보다 와규 소고기나 스테이크가 더 유명하다고 한다. 호텔 주변에 있다 해서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일본 동네도 구경할 겸 걸었는데 음식점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던 청년에게 보디랭귀지와 영어를 섞어가며 물었더니 메모를 보고는 따라오라며 앞장서 주었다. 어느 쪽인지만 알려주면 될 텐데 3~4분 거리에 있는 우리가 찾는 음식점 앞까지 안내해주고 가던 길을 갔다. 듣던 대로 매우 친절한 일본인이어서 고마웠다. 필자도 관광객이 길을 물으면 바쁘지 않은 한 친절하게 안내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메뉴판을 가져온 종업원은 “코리언? 차이니즈?”라고 물으며 국적에 맞는 언어의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일어 못한다고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다. 숙소로 돌아와 호텔에서 제공한 무료 티켓으로 바다가 보이는 예쁜 창가에 앉아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는 여유도 가졌다. 저녁에는 오키나와에 가면 꼭 들러보라는 ‘아메리칸 빌리지’에 가기로 했다. 아메리칸 빌리지는 1981년 미군 소유의 비행장이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1988년 비행장 북쪽에 인접한 해안을 매립하여 미국 샌디에이고를 모델로 해서 지어진 도시형 리조트 형태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미국풍의 각종 편의시설과 음식점들이 있으며 커다란 관람 차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상징물로 화려한 불빛을 뽐내며 돌고 있다.
이곳에는 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는 구르메 스시집이 있다. 회전 초밥집으로 우리 가족은 번호표를 받고 30~40분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둘러보았다. 네온사인이 화려하고 가게들이 예뻤다. 메인 광장에서는 무명가수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구르메 스시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관람 차를 탔다. 크기가 엄청나 맨 꼭대기에 매달렸을 때는 오금이 저려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어렸을 적 창경궁에는 ‘허니문 카’ 라는 이름의 관람 차가 있었다. 친구들과 관람 차를 타며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라 그리움이 밀려왔다.
100엔 숍에서 간식거리를 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두 꼬맹이 아가들은 잠에 빠져버렸다. 즐거운 여행 둘째 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한다. 가족여행이면 더욱 좋다. 10월의 마지막 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함께 일본 오키나와로 휴가를 떠났다. 가기 전 그쪽 날씨를 검색해보니 우리가 가는 3박 4일 내내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한 달 전부터 계획하고 예약한 상태라 날씨가 흐리다고 안 갈 순 없었다. 흐리면 흐린 대로 즐거운 게 여행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햇살이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론 좀 추운 날씨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10월의 막바지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여름 옷과 카디건을 챙겼다.
9시 반 비행기라 우리 가족은 새벽 6시 좀 지나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까봐 우려했지만 마침 빈자리가 있어 주차 걱정 없이 산뜻하게 떠날 수 있었다. 아시아나 항공기로 일본 오키나와 ‘나하’ 공항까지 가는 데는 2시간이 채 안 걸렸다. 오키나와는 제주도처럼 남쪽에 있는 섬이라 본토 사람들이 우리가 제주도로 휴양가듯 찾는 섬이라고 한다. 원래 오키나와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독립적인 섬으로 일본이 아닌 류큐 왕국이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땐 미군이 점령해 지금까지도 곳곳에 미군 기지가 남아 있는 아름답지만 슬픈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하’ 공항에 도착하니 하늘이 너무나도 파랗고 깨끗해서 여행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 기상청의 틀린 예보가 좀 우스워졌다. 공항 밖은 정말 들은 대로 매우 더웠다. 한여름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찾아 나가니 도요타 렌터카 회사 사람이 팻말을 들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타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는 공항 가까운 곳에 있었고 우리 가족은 예약한 대로 7인승 차를 빌렸다. 일본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도로도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좀 걱정되었지만 아들이 능숙하게 운전해서 다행이었다.
먼저 ‘나하’에서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며 목적지를 ‘류보’ 백화점으로 잡았다. 마음에 든다는 예쁜 그릇을 고르고 오키나와 브랜드인 블루씰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여행은 시작되었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오키나와 남쪽 ‘나하’ 공항 중부 쪽에 있는 예약 숙소 몬테레이 호텔은 코앞에 바다가 멋지게 펼쳐진 곳에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눈이 시릴 정도여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호텔은 모든 방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고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결혼식을 주로 한다는 하얀색의 교회당과 수영장 너머로 아름다운 바다가 끝없이 보이는 정말 예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아직 어린 아기가 있어 잠자리가 편해야 한다고 고른 호텔이어서 모든 것이 안락하고 깔끔했다.
하루 한 끼는 호텔에서 제공하는데 뷔페와 일본 가정식 중에서 고르면 되었다. 그런데 숙소로 오는 도로가 엄청 막혔다. 지나다 보니 버스 한 대가 다 타버린 사고가 있었다. 좀 늦은 시각 도착한 우리는 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맛이 있든 없든 귀부인이 된 듯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이들도 여행이 즐거운지 재롱을 부리며 늦도록 잠을 안 잤다. 이렇게 오키나와 여행 첫날이 지나갔다.
생각과 계획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게 여행이다. 한동안 집안에 우환이 있어 마음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국외 가족여행을 제의했다. 한 달여 전부터 아들과 며느리는 열심히 여행지를 알아보고 예약하는 등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예쁜 손녀 손자와 함께여서 더욱 설레고 즐거운 기분이었다(그러나 젊은 시절과 달리 아기들 데리고 다니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아들이 어렸을 땐 한 손으로 번쩍 안고 다녀도 전혀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기를 잠시 안고 있어도 힘에 부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필자에겐 국내, 국외여행을 함께하는 친구 삼총사가 있다. 필자와 달리 그 친구들은 평소 일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일본 정도는 자유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항상 여행사의 패키지를 선호했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과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자유여행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가이드를 따라 하는 여행은 일단 여행비용이 적게 든다. 또한 그 나라의 어디를 보아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등을 전혀 고민할 필요 없이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하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는데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여행한 나라의 볼 만한 곳과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어 항상 즐겁고 보람이 있었다. 단점이라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루 세 번 식사를 해결해주니 가보고 싶은 유명한 맛집을 따로 경험할 수 없어 아쉽다는 점이다.
자유여행은 어디라도 가고 싶은 대로 다니고 먹고 싶은 음식도 고를 수 있어 좋지만 항공권부터 숙소와 여행 장소까지 알아서 정해야 하니 번거롭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을 것이어서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 이번 가족여행을 패키지로 갈 것인지 물으니까 아기들이 어려서 패키지는 무리란다. 여행지는 일본이고 여러모로 알아보니 오키나와가 비행시간도 2시간 정도로 짧고 아이들 놀기에 적합한 휴양지라 한다. 벌써 저희끼리 3박 4일의 일정도 다 짜놓아서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했다.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시니어들도 대부분 고만한 손자 손녀가 있을 것이므로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선택할 경우 필자가 경험한 것들을 알려드리면 도움이 될까 해서 이 글을 쓴다.
며느리는 다섯 살 손녀와 17개월 된 손자 때문에 무엇보다 숙소가 편해야 한다며 오키나와 중부쯤에 있는 바닷가의 멋진 호텔 몬테레이를 선택했다. 1박에 40만원이었다. 비행기는 아시아나로 어른 셋에 아기 둘 포함 100만원이었다. 그리고 공항에 내리면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여행 동안 이용하는 데 26만원, 반환하면서 기름을 가득 채워주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300km 정도를 다녔고 3만원어치 주유를 해서 반납했으니 쇼핑과 식사를 제외한 여행 기본 비용은 250만원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은 뷔페나 일본 가정식을 골라먹을 수 있어 점심과 저녁만 사먹으면 된다. 미리 검색해간 유명 음식점을 빼놓지 않고 다녀볼 수 있어 좋았다. 이 모든 예약을 며느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참 편리하기도 하고 스마트폰 기능을 잘 아는 며느리가 대견스럽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일본은 모두들 알다시피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필자도 한 번 운전해보고 싶었지만 국제면허가 없어 아쉬웠다. 평소 운전을 잘하는 시니어라면 국제면허를 꼭 따서 오른쪽 운전으로 차를 달려보는 이색적인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10월의 막바지여서 한낮의 태양은 뜨거워도 아침저녁으론 좀 춥다고 느껴지는데 오키나와는 제주도보다 더 남쪽이어서 지금도 기온이 30도를 넘는 한여름이다. 이렇게 미리 계획한 대로 즐겁고 행복한 가족여행이 시작되었다.
17대 고려대 총장, 사립대총장협의회장,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중국연변과학기술대·러시아모스크바국립대·미국조지워싱턴대 등 국내외 유수 대학의 명예교수 및 석좌교수를 역임한 이기수(李基秀·71)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경력은 법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성공 사례들의 목록이다. 그런 그가 법학이 아닌 예술계의,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이 된다고 했을 때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소 돌출적인 행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그 선택이야말로 확고한 기준을 갖고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사장이 예술을 접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평생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버릇이자 의지일 것이다.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 말,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한합니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서만 살잖아요. 그런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체험하는 거니까 책을 읽는 만큼 내 삶이 더 윤택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죠. 나는 법학을 공부했으니 법학에 대해선 조금 알지만, 그 밖의 경제와 인류,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모든 것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가져와서 내 삶에 녹여 삶을 좀 더 향상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예술의 후원자가 되다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이사장은 그동안의 삶을 법 연구로 세운 대표적인 법학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는지 궁금했다.
“이배영 이화여대 총장께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초청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인숙(예원실그림문화재단 관장) 작가가 만든 를 보고 ‘어떻게 저런 작품을 직접 만들 수가 있었을까. 저건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죠. 그런 걸 오천 점 정도 만들었다니까, 신의 경지여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작품에 매료되어 있는데 손 작가가 재단을 만들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갖고 있던 돈 삼십만원을 후원금으로 냈어요.”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첫 후원자였다. 재단 통장에 첫 번째로 후원금을 넣은 첫 후원자로서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요청으로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
올해는 한불수교 1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작품 전시와 공연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부터 12월 말까지 130개의 작품을 전시 및 공연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파리에서 3개의 작품 전시 및 공연이 이뤄졌는데 각각 종묘제례, 공예 작품, 그리고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이다.
실그림 작품 전시는 우선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기메박물관에서 했고 이어서 니스 동양박물관에서 콜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8월까지 3개월 동안 8만 명이 관람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르몽드 지는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라는 카피를 내놓으며 두 번이나 지면에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예원실그림문화예술로 한국 예술의 위대함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흡족해했다.
“지난 9월에는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만났어요. 이분이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가서 프랑스 부모님 밑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자랐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사실이죠. 그런데 손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다는 걸 자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와서 작품을 보고는 계속 감탄하시더군요. 전통과 모던의 조화라고요.”
이사장이 추구하는 ‘헌법에 입각한 예술론’
이사장 역할까지 하면서 실그림을 알리는 데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고, 예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총장을 끝내고 난 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론은 나머지 인생을 대한민국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바치겠다는 거였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또 고민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만든 헌법 소책자가 눈에 띄었어요. 헌법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고, 그 텍스트에 입각해 자신을 설명했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되려면 주권, 국민,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입니다. 이는 통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죠. 그리고 해야 할 게 9조입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제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헌법 가치 제고와 통일, 문화가치 창달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예원의 작품들을 보고 내 나머지 인생을 위한 이사장직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거죠.”
실그림에 담긴 민족문화 창달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이라는 빨간색 소형 책자. 그는 기자에게 헌법 제9조와 69조를 읽어보라고 했다.
“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69조는 대통령 취임 선서문인데, 여기에도 대통령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라고 적혀 있지요.”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 중
이 이사장은 1945년생이다. 이제 70이 넘어가는 시니어로서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정년을 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웃음). 명예교수로서의 생활이 참 좋습니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시간이 있어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해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주가였는데 이제는 반주 정도로 줄였어요,”
이 이사장은 최근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쓰면 손녀가 정리해주고 있다. 이 이사장으로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고, 손녀에게는 할아버지의 삶을 체험하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쓰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가 이렇게 잘 기억이 나네’ 하고 마누라한테 얘기하니까 마누라가 ‘당신이 술을 안 먹으니 머리가 맑아져서 그런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웃음).”
이 이사장의 경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잘살아왔다고 생각할까?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둘 다 시집 장가 잘 갔어요. 친손녀가 대학 3학년, 친손자가 대학 1학년, 외손주 중에 가장 큰 녀석이 대학 1학년이고 둘째가 고3, 셋째가 중3이죠. 제 처가 오십 될 적에 가족들 전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 칠순잔치 때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어요. 그렇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찍으니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게는 즐거운 일이 또 있었다. 올해 3월 1일, 그의 제자들 중에서 마흔 번째 교수가 탄생한 것이다.
“학문을 하는 학자 입장에서 제자가 마흔 명이나 4년제 대학 교수로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그는 확실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총장 재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그때 사진보다 지금 사진이(웃음) 다들 좋다고 그래요. 그때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시간에 쫓겼고 저녁에도 두세 군데 들러 인사해야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자유를 느껴요.”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사장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 대답은 천생 학자다웠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로 돌아가고 싶죠. 공부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가장 행복했고. 논문만 쓰면 되니까(웃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진행하는 작업이 또 있다.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 중 조교가 스물일곱 명, 교수가 마흔 명이 나왔다. 그 제자들이 그와의 인연을 원고로 만들고 있다. 이제 제자들과의 인연을 정리한 원고는 책이 되어 그의 삶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회고하는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은 제가 만으로 예순다섯 살 되던 날이었어요. 정년퇴임 논문집을 만들어 롯데호텔에서 기증식을 가졌는데 그때 말했어요. 내 인생 20년은 준비기간이었고, 45년은 고대 법대, 독일 박사, 회사법·공정거래법·지식재산권법·국제거래법 갖고 먹고 살았는데 예순다섯 살부터 45년간은 다른 나라들에서의 인연과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하면서 살겠다고. 그럼 110세예요. 그런데 왜 하필 110세냐. 고려대가 19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55년이 고려대 150주년이에요. 그해가 마침 제가 110세 되는 해고. 그래서 고려대 150주년이 되는 5월 5일에 17대 고대 총장을 한 사람으로서 축사하는 게 마지막 내 꿈이에요.”
그는 호탕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사실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가장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내용은 그의 섬세한 친화력에 관한 것이다. 인터뷰 당일 약속시간보다 좀 늦었다. 자식뻘 되는 기자인데 늦어도 괜찮다며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웃었다. 며느리에게도 이름을 불러주는 시아버지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110세까지 발굴에 나설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마르지 않은 깊은 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깊은 연구와 후덕한 인품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학계에서 우뚝 섰던 그가 요즘 부단히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만들면서 스스로 정한 가치에 열렬히 투신하고 있다. 이런 이사장은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 대답은 단순했으나 여운이 길었다.
“저는 전주 이씨 경남 하동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열심히 산 사람이다’라고 기억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