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후배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노후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필자는 늙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필자가 젊은 시절 연세 드신 분들의 모임에 가보면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져서
왠만 하면 가기가 싫었다.
무언가 칙칙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저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아니 젊은이들이 볼때는
필자도 불편한 존재가 이미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즘 의학적으로 수명연장에 대한 연구가 많아져 얼마전 백세인생라는 노래가 유행하면서 이미 100세 시대는 당연하게 인지되고 있다.
살고 있는 동안 더 의학연구가 이어져서 120세까지 살아갈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이 돈다.
우리의 세대까지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한 세대이지만,
막상 우리의 노후는 이제 우리세대 스스로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 서 있다.
자녀가 곧 보험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큰아이가 막내학비를 해주면서 키우다 시피 하는 시대가 이미 아닌 것이다.
과거 봉지 쌀을 사먹고 연탄으로 난방과 식사준비를 하고 전화있는 집이 부의상징이 되던 그 오래전 시대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방방마다 tv가 있고 가족수만큼 휴대전화도 있는 아주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환갑잔치 요즘 안한다. 이미 80세어르신들도 많기에 환갑나이는 청년이라고 하면서 아예 자녀들도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 여느생일 때처럼 지낸다.
65세가 되면 전철무료로 탈수 있고 기초노령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으로 다
노후생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노후에 왜이리 경조사문자와 카톡은 날아오는지 먹고 사는 것보다 사람노릇하고
살기가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도 큰아들때는 알렸던 하객을 지난주 결혼시킬때는
100명이나 줄여서 초대했다. 시니어들의 부담을 드리기 위해 부르지
않은 것이다.
어떤시니어분이 빈봉투만 내고 식권타고 어울리고 간뒤에 보니 죄송합니다.
라는 멘트만 봉투속에 펼지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시니어들사이에 돌정도이니
그 심각성을 알만하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그중에 남성어르신분들이 일하고 싶은 이유중에는
아내분인 할머니에게 뭔가 일하고 있는 모습과 매끼니 집에서 먹는 것이
미안해서이고 손자손녀에게 용돈도 주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한다.
노후준비 하루라도 빨리하라고 인생후배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서 글을 쓴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유치원이나 유아원 버스가 오면 직장에 출근한 엄마. 아빠를 대신하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원생들을 데리러 온 선생님에게 인계하고 빠이빠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행복한 함박웃음을 짓고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조심스럽게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보면 대부분 외손자. 외손녀라고 답을 한다.
자식들이 인근에 살면서 출근 전에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맡기고 가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식들 집에 아침마다 오기도 한다. 어떤 집은 아예 딸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산다. 어떤 할머니는 딸 식구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창피한지 속마음과 다르게 ‘딸년은 도둑년이야 사위 놈은 더 나쁜 놈이고’ 하고 웃지만 퍼줘도 기분 좋은 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처가에 얹혀사는 것이 남자들의 수치로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은퇴한 노인부모들이 의료, 간병이슈의 돌파구를 딸에게서 찾으려는 심리가 강하다고 한다. (은퇴위기의 중년 보고서, 전용수 지음에서 인용)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예도 딸이 우선이다. 일본의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대도시 고령부부의 근거리에 살고 있는 자녀의 남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1시간이내 거리는 딸(75%)이 아들(55%)보다 많다 (2012년도 통계임) 30분이내도 각각 51%, 42%로 딸의 승리다. 딸이 가까이 살면서 부모와 일상을 공유하며 긴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는 증거다.
또 다른 재미있는 통계도 있다. ‘곤란해 질 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에 딸(86%)이 아들(76%)보다 높게 나왔다. 기억력,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눈치 채는 것도 딸(86%)이 아들(76%)보다 먼저다. 돈독한 모녀관계에서 일상교류가 훨씬 잦다는 의미다. 2~3일 한번이상 대화한다는 응답자는 ‘딸+엄마(60)%)가 아들+엄마(26%)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딸+아빠(42%)도 아들+아빠(23%)보다 높다. 점점 모계사회로 흘러가는 것을 감지한다.
우리의 부모들은 딸은 출가외인 이라 하여 시집보내면 끝이었다.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보편화 시대로 살았다. 지금도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쪽은 남자 쪽이니 비용부담이 아들이 크다. 아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재사를 지내주고 집안의 기둥 같은 존재라고 인식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딸에게 쏠리고 있는 세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아들하고 살면 며느리가 좋아하나요. 딸하고 살려고 해요. 각종 통계가 이 말을 뒷받침 한다.
파란 하늘빛으로 상큼한 9월이 시작된 첫 주말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샤갈, 달리, 뷔페 전시회에 다녀왔다.
초대권이 있어 나서긴 했지만 어린 손녀, 손자와 그림을 감상한다는 게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는 했다.
꼭 보고 싶은 그림전시회인데 아기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지루해하면 빨리 퇴장해야 할 테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예술의 전당 광장에서는 시간에 맞추어 분수 쇼도 펼쳐지고 있으니 꼭 그림 감상만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나들이에 나섰다.
주말이어선지 관람객이 상당히 많았으며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인 듯 단체로 온 사람도 꽤 보였다.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이들은 세계 현대 미술을 이끈 거장들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화, 판화, 드로잉, 조각 작품으로 총 128점이 전시되었는데 수채물감과 비슷한 ‘과슈’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스타일은 각기 다르지만, 평생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샤갈과 달리는 익히 들었던 이름이고 작품도 많이 보았지만, 솔직히 뷔페는 생소해서 작품을 보기 전에 미리 검색해 보았더니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생전에 상업적 성공으로 부유하게 살았지만,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전시회 퇴장하는 문 앞에 감동한 세 거장에게 스티커 붙이는 판이 있는데 뷔페의 판에 가장 많은 사람이 스티커를 붙여서 그의 인기를 알 수 있었다.
전에 마크 로스코 전시회 때는 도슨트가 있어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했었지만 이번 전시회에 도슨트는 따로 없어 설명문을 열심히 봐야만 했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은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말한 샤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등 폭풍 같은 세계사를 온몸으로 맞으며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겪었고 고난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만은 좌절의 수렁에 빠트리지 않고 꽃과 동물, 자유로운 연인들의 모습 등으로 오늘의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냈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샤갈의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떠오르는 말이다.미친 사람 같다는 평을 들은 광기 어린 천재 화가 달리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며 세간의 편견을 일축했다. 그가 매우 독특한 인물로 비친 것은 강렬한 콧수염과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성취에서 비롯되었는데 달리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최고의 희열과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나 살바도르 달리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할 거냐고.”
매우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작가로 느껴진다.베르나르 뷔페는 1950년대 당시 ‘모던아트의 모차르트’라는 평을 받으며 피카소의 대항마로 여겨졌다는데 그의 작품은 쓸쓸하고 메말랐으며 삭막하기 짝이 없다. ‘가감 없는 직시와 표현, 쓸데없는 화장으로 희망을 고문하지 말자’가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고 또한. 뷔페는 자신의 화풍에 대해 ‘즐거우려면 서커스에 가라. 미술이 세상을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고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다섯 살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감상을 시작했다. 달리의 유명한 늘어진 시계 작품을 본 우리 손녀가 “할머니, 저 시계가 잠자나 봐요, 아니면 녹아내리고 있나?”라고 한다.
매우 정확하고 귀여운 표현에 놀라며 우리 어린 손녀가 벌써 미술 보는 눈이 있는 건가? 팔불출이 발동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직은 작품을 만지려 하기도 해서 통제하느라 힘들었지만 이런 전시회나 공연에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자가 지루한지 보채기 시작해 좀 일찍 퇴장했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멋진 음악에 맞춰 피어오르는 분수의 화려한 모습에 아이들과 함께 매우 즐거웠다.
먼 훗날 손녀가 할머니와의 미술전시회 나들이를 즐거웠다고 기억해 준다면 행복할 것 같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백로다. 아침·저녁이면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에 생기가 돈다. 제일 무더웠던 여름날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100세 인생’도 번개처럼 지나갈 터이다. 은퇴자가 매순간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감별은 ‘병아리의 암수를 가려내거나 골동품, 보석 따위의 가치를 가려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은퇴자가 많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흔하다. 아름답게 사는 은퇴자 감별법을 살펴본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배려하는 사람
사회에서 은퇴한 지 수년이 지났다. 만나는 친구도 많이 달라졌다. 옛날에 사귀는 친구는 주로 죽마고우 또래였다. 사회에서 만난 지금의 친구들은 40대부터 70대까지 나이가 다양해지고 취미와 관심도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나이 들면 말이 많아졌다.
“나는 말이야----”로 시작하면 끝이 없다. 면전에서 고개라도 끄덕여주면 ‘뻥’까지 더해진다. 자기자랑에 손자자랑, 심지어 강아지 자랑까지 한다. “중앙방송 중이니 지방방송 꺼주세요.” 억지를 부린 경우도 나온다. 스스로 ‘물 위의 기름’이 된다.
“한 번 말하고, 두 번 경청하라. 그리고 세 번 감명하라.” 사회은퇴 후 첫 사회인문학 강의에서 들었던 가슴에 깊이 새긴 경구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기 마련이다. 자기 말을 줄이는 것이 아름답게 사는 첫째 덕목이다.
◇갑옷을 내려놓고 술잔을 따를 줄 아는 사람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갑질’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갑옷’을 벗고도 갑질을 계속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짓거리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속 시원한 해법을 고대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자.
사회은퇴 후에도 매 주마다 두세 차례 친구들과 산행을 한다. 사회은퇴 전에는 부부동반이 많아 도시락으로 산상 파티를 즐겼다. 이제는 동행이 거의 사라지고 간식으로 도시락을 대신하고 하산하여 ‘만원의 행복’ 뒤풀이를 한다.
무더운 날은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이 모든 갈증을 풀어 주었다.
지난날의 자식경사는 거의 마무리되고 이제는 손자경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며칠 전 귀여운 손자를 봤다. 재미있게 한 잔 마시자!” 한 친구가 술잔을 돌리고 한턱 쏘았다.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좋은 명분을 붙여 술잔을 따르는 친구가 많다. 진정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
은퇴자가 과거에 많이 집착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지난날의 성과를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여 빛의 속도로 변하는 ‘내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기업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주위에 조력자도 없다. 은퇴자는 스스로 더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한다.
성취에 대한 강박감, 자식에 대한 집념을 버리려야 한다. ‘먹는 것보다 잡는 훈련을 시키라’ 흔히 말한다. 자식들에게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무조건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교훈도 함께 전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난날은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열심히 살았다. 인생은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사회에서 받았던 은혜를 후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는 은퇴자가 많다.
낮잠. 어린이집에 간 손자, 손녀만 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낮잠 자는 시대다.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라도 편히 쉴 곳, 잘 곳을 찾아 나서고 있는 세상. 노곤하고 피곤한 삶을 보듬고 치유하고자 낮 시간 잠시라도 누울 자리를 찾고 또 내어주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낮잠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수면시간은 적고 스트레스는 높고 “낮잠을 팝니다.”
‘낮잠 카페’ 혹은 ‘힐링카페’가 도시 곳곳에서 성업 중이다. 체인점화된 업체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업장까지, ‘잠’, ‘피로’, ‘힐링’이 산업의 아이콘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일. 책상에 누워 잠깐 쉬면 될 것이 사업이 됐다. 낮잠 카페 등 소위 ‘힐링 사업’이 늘어난 것은 한국인의 잠 부족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2014년 OECD 18개국의 평균 수면시간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7시간 49분으로 꼴찌. 1위 프랑스와 1시간 차이가 났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16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서 한국 노동자의 은퇴 시기는 2014년 기준 남성 72.9세, 여성 70.6세다. OECD 국가의 평균 노동자 은퇴 나이가 남성 64.6세, 여성 63.2세인 것에 비해 7~8년은 더 오래 일하는 셈.
이렇게 잠 덜자고 일은 많이 하니 자연스레 낮잠, 피로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113시간으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이OECD 34개 회원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낮잠 이색 공간 ‘여의도 CGV 씨에스타’
현재는 여의도CGV에서만 운영하는데 이용객 추이를 살펴 점차 다른 지점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낮잠 장소로 이용되는 곳은 바로 프리미엄관. 대체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운영한다. 잠들기 좋은 어두운 조명에 아로마 향과 뉴에이지풍 음악을 방안 가득 채운다. 좌석마다 촛불형태의 수면등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편안한 숙면을 위한 허브티에 담요 등을 놓아 정말 낮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CGV 프리미엄관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곳이기에 그 어떤 관보다 안락한 좌석에서 편안한 낮잠을 즐길 수 있다. 왼쪽 팔걸이 안쪽의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쫙 펴지면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다. 좌석은 좌우로 남성, 여성석, 중간 좌석은 커플석으로 배치했다. 이용자 양옆으로는 티켓을 판매하지 않아 보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힐링 카페처럼 안마의자는 아니지만 부드럽고 안락한 의자에서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씨에스타에는 이용객을 살피는 ‘미소지기’가 상주해 잠을 깨워주는 등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여의도 유일한 낮잠 공간을 꼭 한 번 이용해 보시길.
이용 요금 1만원(음료, 담요, 안대, 실내화 등 제공)
낮잠 카페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낮잠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힐링 카페 두 곳을 찾아갔다. 고른 연령대가 이용한다는 체인형 힐링 카페인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명동점을 찾았다. 두 곳 모두 기본은 전신 마사지기를 이용한 서비스로 개인 부스와 커플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덧신과 손 세정제를 제공하는 것과 서비스 후 음료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점이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콘셉트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취향에 맞게 골라 이용해야 한다.
미스터힐링 (명동 인터내셔널점)의 장점은 음료를 마시는 공간(1,2층)과 휴식 공간(지하1층)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전신 마사지기 위에서 쉬는 동안 외부 소음이 적어 쉽게 숙면할 수 있었다. 실내 전체에서 느껴지는 아로마 향과 낮은 조명, 음악, 부스마다 설치된 그림들이 휴식에 도움을 준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심신의 안정에 중점을 두어 구성한 것이 이용객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다. 이용 요금은 30분 코스 9000원(20회/15만원)이고 50분 코스는 1만3000원(10회이용권/9만원)이다.
‘퍼스트클래스’ 는 공항을 연상하게 하는 인테리어 때문일까? 여행가방 하나쯤 들고 티켓 부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피로를 푸는 방 또한 항공기 1등석처럼 꾸며 놓아 재미를 더했다. 퍼스트클래스는 음료 카페와 마사지 부스가 같은 층에 있다. 대신 마사지를 하면서 눈 안마기를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조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퍼스트클래스 마사지 코스는 총 6개로 활력, 쾌적, 수면, 목과 어깨, 허리와 엉덩이, 공기 마사지로 구성돼 이 중 원하는 두 종류를 고르면 된다. 객실마다 개별 이어폰과 스마트폰이 있다는 점도 편리하다. 이용 요금은 7000원에서 1만 3000원가지 다양하며 소셜커머스에서 더욱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의 '공간 휴'
‘공간 휴’를 말하기에 앞서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서울혁신파크가 있는 곳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자리다. 오래전부터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유명했던 곳.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미래청 건물 안에 바로 ‘공간 휴’가 있다. 창문 카페와 서고 사이, 천장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쉬는 곳이 바로 ‘공간 휴’다. 공원에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좀 자고 싶으면 누구든지 누워 잘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베개와 이불도 준비돼 있다. 전기보일러가 설치돼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용할 수 있다. 조명이 있어 뒹굴면서 만화책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엄연히 잠을 자고 쉬기 위한 곳. 10분이고 1시간이고 잘 수 있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이용료가 없는 대신 자기가 쓴 물건만 잘 정리하면 된다. 멋지고 화려한 것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쉼’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뒷동산 고갯마루에서 꿈을 키웠다. 성년이 되어서는 대도시 고갯마루를 찾았다. 어머님 품 같이 포근한 그곳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활력을 얻었다. 가는 곳마다 필자의 아지트 ‘고갯마루’이다.
◇시골 뒷동산으로 가출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계셨다. 할아버님께서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고 할머님은 항상 업어주셨다. 그때까지 아버님, 어머님에게 안겼던 기억이 없다. 조부모님의 손자사랑 덕분에 꾸지람 한 번 들어본 일도 없었다.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부모님의 직할통치가 시작되고 ‘훈시’가 본격화 되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몇 년 후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맘 때로 기억된다. 어느 날 아버님으로부터 이유도 모르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무나 서러웠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집에 있기 싫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른바 가출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보는 논과 밭이 있는 마을 앞으로는 갈 수 없었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뒷동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큰 산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비교적 쉬운 길을 걷다가 경사진 대목 ‘고갯마루’에 이르자 덜컥 겁이 났다. 뛰어봐야 벼룩이지! 어린이가 어디로 가겠는가?
◇어린 시절 꿈을 키운 뒷동산 고갯마루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있고 펑퍼짐한 쉼터가 있었다. 그곳에 멈췄다. 그날따라 석양에 물든 빨강·분홍·하얀색 새털구름·조개구름·뭉게구름이 황홀하게 피어났다. “저 구름 위에 오를 수 없을까? 구름을 타면 어디까지 갈까?” 짧은 시간이지만 상상의 날개는 끝이 없었다. 가슴이 펑 뚫리는 것 같았다. 구름 위로, 더 멀리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아버님의 꾸지람은 이미 잊고 말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에 왔으나 농사일에 바쁘신 부모님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아니 어린 아들의 겁 없는 가출(?)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다. 몇 시간의 짧은 가출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필자에게만 남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다시는 가출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성장하면서 동생과 가끔 그곳에 오르곤 하였다. “우리는 무엇이 될까?” 제일 많이 나누었던 이야기로 기억된다. 더 자라면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는 놀이터였다. 어린 시절 꿈을 키운 필자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새로운 아지트 도시의 고갯마루
성인이 되어서 산행을 꾸준히 하였다. 북한산·관악산·청계산을 올라서면 ‘고갯마루’를 만났다. 여름에는 바람이 제일 시원하게 불고, 겨울에는 눈으로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이 쉬면서 교차하는 곳이었다. 잘 자란 나무 몇 그루가 햇볕을 가려주고, 평탄한 자리는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면서 대화하는 광장이 되었다.
고갯마루 가는 곳마다 새로운 아지트로 삼았다. 친구들과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었다. 조개껍질처럼 옹기종기 ‘도시’가 발아래 펼쳐졌다. ‘천군만마 위에 군림’하는 호기를 부릴만한 곳이 고갯마루다. 책 한 권 펼쳐들면 신선이 따로 없다. 모두가 다 아는 만인의 아지트다.
머지않아 추석이 다가옵니다. 설날이나 추석은 우리민족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차례를 지내고 동기간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행복입니다. 명절날은 객지에 나가있는 친구들도 몰려드니 온 동네가 들썩들썩 합니다. 가고 싶은 고향에 가기위한 열차표 예매를 새벽부터 나가서 기다려서 구입한 추억도 갖고 있습니다. 자가용 시대가 도래 하면서 자가용을 타고 가는 사람이 부쩍 늘자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대형 주차장을 방불케하여 자동차가 가다 서다를 계속합니다. 대여섯 시간은 기본이고 무려 10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고생담이 명절 뒷날의 추억담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녀들도 결혼하면 고향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나와 고향이 같은 후배가 올 추석부터는 고향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부모님 돌아가시고 큰형님 내외분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데 이 분들이 연로하시어 찾아오는 동생들을 맞이하기가 힘이 든다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큰형님 직계 가족으로 고향을 찾아오는 아들 딸 손자손녀들만 해도 10여명이나 되는데 동생들 가족까지 다 맞이하기가 벅차다고 큰 형님이 오지 말라고 했다며 이제는 못가겠다고 합니다.
나의 경우도 명절날 내 아들내외와 손자들이 오고 딸 내외와 외손자들도 우리 집으로 옵니다. 이런 식구들을 다 데리고 멀지는 않지만 같은 서울에 사는 형님네 집에 가기는 너무 많아 지금까지는 두세 명 추려서 데리고 갔습니다. 며느리는 곧 친정집에도 가야하는데 내가 큰집에 가서 오지 않으니 친정집에 빨리 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됩니다. 우리 집은 명절분위기도 덜 나고 손자손녀들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부재를 어리둥절해 합니다.
내가 형님네 집에 차례 지내러 가지 않으면 부모님께 불효를 하는 것 같아 집에 있어도 좌불안석이 될 것 같습니다. 또 내가 가서 형님을 대신해서 어른으로서 조카들에게 훈계해야할 일도 있습니다. 내가 가야 동생 빽(?) 믿고 형님내외분이 어깨를 으쓱할 일도 있습니다. 자식들 하고는 세대차이가 나서 말 못할 이야기를 동시대를 사는 형제끼리는 나누기도 합니다.
가족의 범위를 좁혀서 생각하려는 젊은 세대와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형제와 사촌까지 유지하려는 나이든 세대와의 생각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명절날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가장이 어떤 방법으로 조상님 차례 모시러 큰집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 좀 해보려 합니다.
오늘은 모처럼 장롱 속을 뒤집어 정리하기로 했다. 잘 입지 않는 옷이 가득한 옷장은 한숨부터 나온다.
연례행사로 안 입는 옷을 추려내어 재활용 옷 수거함에 넣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입지 않지만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옷이 한 가득하다.
한복 넣어 둔 서랍을 열어보니 곱게 싼 보자기에 보관한 우리 아들 아기 때 입혔던 옷이 나왔다.
면으로 된 흰색 쌍방울표 러닝과 팬티가 어찌나 조그맣고 인형 옷처럼 예쁜지 미소부터 지어진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아들 아기 때 입혔던 배냇저고리랑 앙증맞게 작은 첫 신발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워낙 물건 버리기를 잘 못 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내 옷은 수십 번 처리하며 살았어도 아기 옷 몇 가지는 꼭 갖고 있고 싶었다.
하얀색 융으로 만든 배냇저고리 2장은 우리 아들이 태어났을 때 솜씨 좋으신 시어머님이 직접 재봉질하셔서 만들고 하나씩 맡아 앞섶에 수를 놓았다.
어머님은 파란 색실로 감치셨고 나는 분홍 색실로 사슬뜨기를 해서 모양을 내었다.
사서 입혔던 많은 아기 옷은 아기가 자라면서 없어졌지만, 어머님과 내가 수를 놓아 만든 아기 옷은 버릴 수가 없었다.
가끔 장롱 속 서랍 한쪽에 넣어둔 아기 때 입혔던 옷들을 꺼내보면서 정말 우리 아들이 요렇게 작은 옷을 입을 때도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웃음이 난다.
어쩌면 필자는 손자가 생기면 “네 아빠가 입었던 옷이란다.” 하고 입혀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필자도 이제 할머니가 되어 예쁜 손녀 손자를 갖게 되었다.
앙증맞은 팬티는 남자용이라 할 수 없지만, 필자랑 어머님이 마주 앉아 고운 색실로 수를 놓았던 배냇저고리는 손녀에게 입히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의 도움 없이 모든 일을 참 잘 처리한다.
연애결혼을 한 우리 아들도 결혼할 때 모든 걸 웨딩회사에 맡겼다며 필자에게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예전 필자가 결혼할 당시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엄마가 준비해 주셨다. 예물도 그렇고 별로 필요하지 않은 그릇도 그때 유행하던 일본제 노리다케와 아리타로 한 세트씩 사주셔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쓴 그릇도 있을 정도로 알아서 준비해 주셨는데,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몇 시까지 청담동 어떤 한복집에 가서 옷을 맞추라던가 가봉을 하라고 하는 등 엄마가 신경 쓰는 일 없게 진행했다.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갔던 필자는 시댁으로부터 롤렉스시계와 패물로 7세트를 준비했다거나 밍크 목도리 등 당시로써는 많은 예물을 받았기 때문에 필자도 아들 결혼 준비를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예물도 둘이 알아서 골랐다 하고 함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물품도 알아서 준비했다고 해서 참 세상 좋아졌구나! 손뼉을 쳤었다.
그렇게 저희 둘이 알아서 하니 어떤 일도 참견을 할 수가 없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필자는 필자가 수놓은 배냇저고리를 꼭 입히고 싶었다.
며느리에게 넌지시 “이것 봐라, 예쁘지? 네 남편이 아기 때 입었던 거란다.” 하며 보여 주었더니 예쁘다며 하하 웃을 뿐 아기에게 입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새 옷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래도 옷감도 부드럽고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 입히라고 말하진 못했으며 아기용품은 이미 다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게 좋았지만 이럴 때 필자 의견을 주장 할 수 없는 게 좀 아쉽긴 하다.
필자는 꺼냈던 아기 옷들을 다시 싸서 장롱 서랍에 간직해 두었다.
가끔씩 꺼내 보면서 우리 아들이 손녀 손자보다 더 작을 때도 있었구나, 그때를 언제까지나 추억해 볼 것이다.
택시를 타보면 대부분 젊은 나이의 운전자보다는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다.
똑같이 운전을 하여 돈을 버는 입장이지만 어떤 분은 할 일없어서
마지못해 하는 거라면서 언제든 그만둬야 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이동하는 내내 불만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일이 있음을 감사하면서 아주 좋은 직업이라고 한다.
그 이유도 다양하게 말씀하신다.
첫째 운전대를 잡고 차를 갖고 나오면 개인택시가 아닌 회사택시소속이라고
해도 내가 오늘하루를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좋다.
둘째 나가면 돈이 생기니 경제적으로 도움 되니 좋다.
하루 입금할 돈이 걱정도 되지만 어쨌든 월급이 나오니 아내에게 떳떳하고 손자에게 용돈도 줄수 있다고 좋아하신다.
셋째 수많은 승객의 인생지혜를 들을 수 있어서 넓은 지혜가 생기는 것 같다고 하신다.
넷째 출근하기 위해 스케줄이나 술약속도 아무래도 덜하고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아서 좋다.
그러면서 모든 승객들을 보면서 전전긍긍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고 한다.
다양한 계층의 직업도 다양한 분들이 몸이 안 좋아서 타기도 하고,
빠른 이동이 전철보다 더 지름길로 빠르게 도착할 것 같아서 택시를
타기도 하고, 짐이 많은데 대중교통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여 택시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그 모든 이들이 모두
전전긍긍 걱정하면서 산다고 한다.
다리가 아파서 계단이 걱정된다는 연세 드신 분들,
학교 다니는 자녀가 학교에서 말썽피워서 학교에 불려간다는 분,
빌딩에 공실이 많아 건물만 가진 거지라고 속상함을 이야기 하는 분,
사업하는 이는 세금 때문에 힘들다는 분,
아이 대학등록금이나 유학비용 대기 어렵다는 분,
결혼할 아들 집을 사주지는 못할망정 전세라도 얻어줘야 한다는 푸념에
참으로 다양하게 나름대로 전전긍긍 살아가더라는 것이다.
우린 어떤가요.
오래전 보다 방마다 TV에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휴대전화에
삼시세끼를 먹기 위해 애쓰고 살던 시대에서 오히려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적당한 스트레스와 궁핍함이 오히려 생활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내려고
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살아내는 삶이 이 시대를 살아내는 대한민국을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닐까 택시를 타서 기사님께 다양한
인생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사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