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냄새가 짙게 풍기는 휴일, 친구들과 을미사변 때 희생된 항일 인물들을 배향하는 장충단에 모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성곽길을 따라 남산에 올랐다. 차를 타거나 아스팔트를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을 느꼈다.
남산에 오르면 고층 빌딩이 가득한 시가지 모습에 감격한다. 높은 건물 몇 개뿐이고 삼일고가도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았던 시절, 반듯한 건물이 언제쯤 들어서나 부러워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남산타워가 우뚝 솟은 262m 높이의 나지막한 남산광장에는 붐비는 여행객 만큼 수많은 사연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나온 60ㆍ30년이 문득 그리워졌다. 젊은 시절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서서 한참 기다렸었다. 중년이 되어서는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였고, 이제는 건강을 위하여 걷기운동을 하는 장년이 되었다.
지금은 9살 손자의 오늘이다. 내 나이에서 60년을 빼면 지금의 손자의 이야기이고, 30년을 지우면 자식의 일이 된다. 손주의 오늘에 60년을 더하면 나의 오늘 모습이 되고 30년을 보태면 아들ㆍ딸의 이야기가 된다. 앞으로 전개될 60ㆍ30년은 내 후손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남산은 북악산ㆍ낙산ㆍ인왕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목멱산 봉수대가 남아있는데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이루는 푸른 수림경관이 훌륭한데, 특히 조선시대에 소나무가 많이 자랐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꼭대기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다.
수림은 잘 보호되어 대도시 도심부임에도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ㆍ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서울시 전망을 조망하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과 N서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 등의 시설이 있고, 산정부에 한국의 경위도 원점이 있다.
남산 서쪽은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광장은 녹지대를 포함하여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다. 그 위에는 약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이 있고, 위쪽 광장에는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이 있는데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은 어린이회관으로 건립한 18층 건물이다.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데 1970년에 건립하여 의사의 사진ㆍ유묵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안중근의사 동상과 휘호ㆍ·장인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남산골 한옥마을, 장충단공원, 정도 600년 타임캡슐 등이 주변의 명소들이다.
남산에서 옛일을 회상해 보니 수십 년 세월 동안 쓰레기 분리수거와 야외 취사금지 성공으로 우리 서울이 엄청 깨끗해졌다. 다음 60ㆍ30년에는 더 좋은 발전이 있기 바랐다.
동대입구역으로 내려가는 순환로가 연인들의 산책로로 제격이다. 동대 정문을 거쳐 장충동족발과 막걸리 한 사발로 즐거운 남산 산책을 마무리하였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생텍쥐페리의 속 한 문장이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행성을 길들였던 것처럼, 한홍섭(韓弘燮·71) 회장은 자신의 마음속 소행성 ‘쁘띠프랑스’를 길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돈’이 아닌 ‘꿈’ 덕분에 지금의 작은 프랑스 마을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청평호반 언덕 위의 아름다운 소행성, 반짝이는 그 꿈은 30년 전부터 빛나고 있었다.
1980년대, 연 매출 100억원의 페인트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한 회장은 기술제휴 건으로 유럽 출장이 잦았다. 프랑스에도 종종 오가며 혼자 미술관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신문 문화면의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피카소의 딸이 아버지의 소장품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회를 연다는 기사였다. 그길로 프랑스를 찾은 한 회장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시장에 관람객들이 긴 행렬을 이룰 정도로 성황이었어요.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프랑스 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무렵 내 형편에 맞는 작은 미술관 하나 있었으면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막상 구체적으로 검토하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거예요. 미술 작품보다는 그 나라의 생활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더 유익하리라 판단했죠. ‘그래, 프랑스 마을을 한국에 옮겨 놓아보자!’ 하고는 그때부터 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떼섭이 왕자의 집념으로 길들여진 소행성
그가 프랑스 마을을 계획할 당시에는 88서울올림픽 개최로 국제화 바람이 한창이었다. ‘국제화 시대에는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도 상대의 문화를 알아야 경쟁할 수 있으리라!’ 그의 마음에는 남모를 사명감까지 움트고 있었다.
“중소기업 경영자로서 큰일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나라에 보탬이 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고, 일 년에 서너 번씩 현지에 직접 찾아가 골동품을 수집했죠. 틈만 나면 차를 몰고 마을 부지를 물색했는데, 1995년에 지금의 터를 찾았어요. 명의 이전을 마치고 허가가 난 건 3년 뒤였죠. 묘지 이장 문제랑 IMF 여파로 지체됐거든요. 페인트 사업을 병행하며 준비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꿈에 대한 열정과 각오가 남달랐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는 동안에도 서울대·고려대·홍익대 등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30년에 걸쳐 10군데 이상 수료하는 등 경영과 문화에 대해 익히고자 노력했다. ‘잘나가는 중소기업 CEO가 뭐가 아쉬워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하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향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었노라 말하는 한 회장이다.
“어렸을 적 별명이 ‘떼섭이’였어요.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포기를 몰랐으니까요. 회사를 경영하면서 먼 프랑스에 비싼 여비를 들여가며 발품을 파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그러나 강한 집념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페인트 사업은 내가 달리 아는 게 없어서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면, 쁘띠프랑스는 나 스스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래서인지 힘들긴 했어도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 것 같아요.”
한 회장은 쁘띠프랑스라는 소행성은 떼섭이라는 어린 왕자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가 100여 차례 유럽을 오가며 직접 발품을 팔아 마련한 골동품과 미술품 등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떼섭이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은 바로 주택전시관이다. 150년 된 프랑스의 전통 가옥을 목재와 기와, 바닥까지 모두 해체해서 한국으로 싣고 와 재현한 것이다. 프랑스 시골집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이곳은 현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 가옥이라고. 그만큼 한 회장의 고난이 뒤따른 산물이기도 하다.
“수년간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프랑스 전통 가옥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막상 마음에 드는 고택을 사도 뜯어서 한국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프랑스인들은 자기 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거든요. 겨우 찾아낸 150년 된 목조 가옥을 해체해 한국으로 옮겨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어요. 우리와 건축 방법이 다른 데다가 설계도면도 없으니 다시 조립하기도 어려웠죠. 그러나 무엇 하나 대충하려 들지 않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지름길은 ‘정직’이거든요. 100명 중 99명이 몰라본다 할지라도 오리지널을 고수하고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죠.”
수익보다 유익을 추구하며 이뤄낸 값진 꿈
주택전시관 안에는 그가 20년 동안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구한 19세기 장롱이며, 200년이 넘은 타피스리 의자와 가구, 장식품들이 놓여 있다. 이 공간뿐 아니라 쁘띠프랑스를 둘러보면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애초에 이곳을 계획할 당시 150년 전의 프랑스 시골 마을을 모티브로 해 옛날식 인테리어와 골동품이 많기 때문이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 가이드가 ‘200년 전 사진과 현재가 똑같은 마을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하는 거예요. 밀레의 생가가 있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인데, 가서 보니 정말 옛날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새로 지은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오래된 마을이 좋겠다 생각했죠. 손때가 묻은 골동품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가 더 와 닿거든요. 또 디자인이 좋고 물건 상태가 좋아야 100년, 150년을 가는 거지 나쁜 물건은 그렇게 오래 남아 있기도 힘들죠. 그만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가 수집한 골동품만큼이나 쁘띠프랑스에서 가치 있는 공간은 ‘생텍쥐페리 기념관’이다. 떼섭이의 집념과 인생의 좌우명과 같은 정직 덕분에 프랑스 생텍쥐페리재단과 정식으로 국내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현지 통역사를 통해 생텍쥐페리 외삼촌의 손자가 생텍쥐페리재단의 대표로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2000년 한 해 동안 네 차례나 재단을 방문해 내가 왜 이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의미로 기념관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 무던히 설명했죠. 페인트 사업을 할 때도 오로지 ‘정직’을 무기로 그 흔한 접대 한 번 안 해봤어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열심히 이야기하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런 경험이 생텍쥐페리재단과의 협상 때도 통했죠. 덕분에 쁘띠프랑스를 개장했을 때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작가가 입었던 옷 등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유품을 전시할 수 있었어요.”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가면 1943년에 출간된 의 초판본을 비롯해, 작품 구상 당시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자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오르골 전시관, 인형 박물관 등도 프랑스 현지 못지않은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 때문에 더러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만든 공공 문화시설 아니냐?’며 묻는 이들도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일궈진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저마다 감탄을 마다치 않는다. 수익보다는 유익을 위해 시작한 사업인 만큼 쁘띠프랑스는 아직도 개관 당시 입장료(8000원)를 받고 있다. 그동안 그가 들여놓은 볼거리, 즐길거리가 더 풍성해졌으니 오히려 손해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보람에 무게를 둔다.
“나는 자선사업가는 아니지만,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을 이뤘고 그것에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만족하니 더 바랄 게 없어요. 지금도 인스타그램(사진 공유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보면 우리 마을을 찾아간 사람들이 올린 사진만 4만7000장이 넘어요. 참 뿌듯하죠. 그전에 페인트 사업을 할 때는 인화성 물질, 니스, 신나 같은 것을 다루니 늘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미술품, 예쁜 소품을 만지니 한결 기분이 좋죠. 또 사업을 할 때는 100여 명의 직원을 신경 쓰고,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나를 위한 즐거운 목표를 찾아 움직이고 있어요. 경쟁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때와는 전혀 다른 기쁨을 느끼고 있죠.”
완벽한 꿈을 향해 여전히 발품을 팔다
프랑스 마을 조성을 꿈꾼 것이 1988년, 터를 잡은 것이 1998년, 그리고 쁘띠프랑스가 문을 연 것이 2008년. 중년 사나이의 가슴에 피어오른 순수한 꿈은 꼬박 20년 만에 이뤄졌다. 그는 40년 넘게 공을 들였던 페인트 사업을 정리하고 ‘문화마을 촌장’으로 본격적인 제2인생을 맞이했다. 어느덧 고희를 넘겼지만, 여전히 발품을 팔고 있다는 한 회장이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우려가 있었어요. 그런데 개관하고 2개월 만에 드라마 촬영지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죠. 막상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니 부족한 것들이 보이고,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지런히 프랑스를 오가며 모은 수집품들로 3년에 걸쳐서 건물 두 개를 더 지었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직접 수집하러 다닐 생각이에요.”
꿈을 이룬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이뤄가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꿈에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보내는 평범한 삶은 무의미하죠.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쁘띠프랑스를 만들면서 막연했던 꿈은 이뤘지만, 아직도 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지금은 이탈리아 마을을 조성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여전히 우려하는 사람도 있고,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그러나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제2인생의 꿈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멀리 내다보고 열심히 발품을 팔아보려고요.”
장소영 호남대 의상디자인학과 교수
내적으로 갖춘 아름다움이 외적인 꾸밈, 그것보다 앞설 수는 없으며 높이 평가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 초라한 겉모습일 때 대놓고 무시하는 일을 종종 겪고는 한다. 좀 더 예의를 갖춘 옷차림으로 누군가와 마주할 때 그에 맞는 응대가 돌아오는 것이다. 고작 옷 따위에 흔들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살면서 적지 않게 그런 겉모습이 매우 중요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옷차림, 즉 패션은 중년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중요한 인격과 같은 것이다.
20~30대에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일이 나를 가꾸는 즐거운 일이며 모든 관심사였는데 점점 나이가 들어 40~50대가 되면 변해버린 몸매 때문에 아예 패션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버리거나, 옷 입는 방법이 어려워 포기해버린다. 아무거나 입어도 예뻤던 젊은 시절과 달리 나이가 들면 몸매도 망가지고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아 남다른 노력과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어렵기만 한 패션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꽃중년, 노노(No老)족이라 불리며 패션뿐만 아니라 운동, 식생활 관리로 멋있게 중·장년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꽃중년으로 닉우스터가 있고 한국에는 65세의 여용기라는 분이 있다. SNS를 통해 옷 잘 입는 대표적인 꽃중년으로 스타가 되어 있는 그분의 스타일링 비법은 “머리색, 안경부터 바꿔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꿔라!”였다. 패션니스타의 비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이처럼 패션은 간단해 보이지만 만만치 않다. 아무리 봐도 어렵고 누가 알려줘도 내게 옷이 없으면 실행할 수 없고 사람마다 체형이 다 다르니 더더욱 힘들다. 하지만 요즘은 그 답을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모두에게 적용하기 힘든 코디법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멋지게 자신 있게 입는 것이다.
어디서나 어울릴 수 있는 팔색조
인기 패셔니스타의 SNS를 살펴보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자신감’과 ‘건강함’이었다. 놀랄 만큼 멋진 옷차림과 혹은 민망한 컬러와 난해한 코디도 있었지만 무엇을 입든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자신감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잘 관리되어온 건강한 신체가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해줬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채워가야 할 것은 나를 지켜줄 건강한 신체와 자신감임을 기억하고 거기에 도움을 줄 몇 가지 꿀팁을 살짝 공유해보고자 한다.
청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너무 캐주얼하고 가벼워 보여 주말에 잠깐 입는 옷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양한 패션이 공존하고 미스매치(mis-match)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은 못 입을 이유가 없다. 다만 나이에 어울리는 멋이 중요하다. 멋도 멋이지만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이에 맞는 품격인 것이다.
젊어서 청바지를 한 번쯤 입어봤던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서 민망하긴 하겠지만 청바지에 도전하기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청바지라는 아이템을 통해 요즘 흔히 말하는 상남자로 스타일링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자.
남성 임원들이 회사에 출근할 때 입던 정장 그대로를 떠올리면서, 바지만 청바지로 바꿔서 입는다고 생각해보자. 먼저 청바지와 비슷한 색과 톤의 재킷이라면 무리 없이 통과. 셔츠는 청바지가 어두운 색이라면 반대로 밝게 입어주면 된다. 또 반대로 셔츠가 청바지와 비슷한 색과 톤이라면 재킷을 청바지와 반대색이나 톤으로 입어주면 된다. 이런 경우 넥타이는 폭이 좁은 것, 캐주얼한 것으로 하고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겨울에는 폴라도 가능하고 스카프로 코디하면 된다. 만약 모임이나 레스토랑에 간다면 나비넥타이로 코디해도 좋을 것 같다.
어렵지 않은 청바지 코디법
밝은 색 청바지에는 브라운, 카멜, 카키 등 어두운 톤의 콤비 재킷으로 캐주얼하게 배색하는 것이 좋으며 셔츠는 무채색 계열로 선택해주는 것이 안정감 있게 만들어준다. 짙은 인디고컬러 청바지는 하체를 날씬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고 코디하기에도 편리하다. 색이 너무 밝은 것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고, 그레이나 블랙진도 코디의 폭을 넓혀주는 아이템이다.
체크나 무늬를 선택할 때는 재킷, 셔츠, 넥타이 중 하나만 입어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늬는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좋다. 종종 체크무늬 재킷, 줄무늬 바지, 페이즐리 넥타이를 입는 사람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하게 되는 흔한 실수다. 무늬는 되도록 하나에만 들어가도록 신경 써서 고르도록 한다. 패션의 법칙은 없지만 금기되는 코디법이다.
마지막으로 신발이다. 내가 더 젊어 보이고 싶다면 운동화를 선택하고 더 품위 있게 보이고 싶다면 구두를 선택하면 된다. 이미 청바지에 정장을 코디한 상태라면 어떤 것도 스타일리시해 보이므로 어느 것이든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운동화는 사이즈가 허락한다면 아들, 손자의 것을 살짝 빌려도 괜찮을 것 같다. 구두는 정장구두를 그대로 신어줘도 괜찮고 더욱 멋져 보이고 싶다면 통가죽의 컬러가 살아나는 구두나 워커도 괜찮다. 이때 양말은 바지보다 짙은 색을 신어주고 더욱 과감한 코디를 하고 싶다면 컬러 양말이나 맨발도 좋다. 이럴 때는 바지 밑단을 몇 번 접어 멋쟁이임을 과시해도 될 것 같다.
키가 작을수록 청바지 통에 신경 써야 한다. 너무 넓은 것은 선택하지 말고 배가 나왔다면 밑위길이가 짧은 골반바지는 피하는 것이 좋다. 배바지는 밑위가 길어 편하기는 하지만 윗배가 더 나와 보이게 하므로 역시 피하는 것이 좋다. 배가 나온 중년은 조금 불편하겠지만 반골반 청바지를 권한다. 골반과 허리 중간에 위치해 벨트 여밈이 나온 배를 적당히 눌러 커버해주므로 한 치수 큰 것을 선택하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엉덩이가 너무 작은 사람은 주머니가 큰 것을 권하며 엉덩이가 큰 사람은 작은 주머니를 선택할 것을 권한다.
봄가을 옷으로 쉽게 사계절 코디 가능
젊어지고 싶은 여성들의 욕심은 끝이 없나보다. 20~30대 의류를 주로 구입하는 연령층이 40~50대이며 자신들이 직접 입으려고 구입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단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의 옷을 입는다고 젊어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이에 어울리는 품격 있는 옷을 멋있게 입었을 때 진정 젊어 보이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여성들의 영원한 꿈의 아이템은 허리가 딱 맞는 미니 원피스일 것이다. 젊어서 원피스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 빼서 입어야지” 하며 구매한 원피스가 지금도 옷장에서 잠자고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살은 빠지지 않고 아까운 원피스는 계속 몇 해째 묵혀두고 있다. 이런 옷은 과감하게 딸과 손녀에게 줘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요즘 누가 그런 것을 입겠냐고 하겠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폼도 가능하기 때문에 원단이 좋으면 분명 환영할 것이다.
원피스는 길이에 상관없이 봄가을에 유행하는 카디건이나 재킷으로 코디해주고 겨울에는 코트를 입어주면 사계절 베이직 아이템이 된다. 원피스를 고를 때는 나이를 생각해서 허리가 타이트하지 않은 옷을 선택하는 게 좋다. 디자인이 아무리 좋아도 불편하면 잘 입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또 몸에 꼭 맞게 입으면 날씬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몸에 붙는 옷은 오히려 몸의 라인이 드러나 좋지 않은 인상을 주며 날씬해 보이지도 않는다. 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옷보다는 단색 계열의 단순한 디자인을 권한다. 화려한 무늬는 오히려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며 패턴이나 디자인이 복잡한 옷은 다양하게 코디할 수가 없다. 여름옷을 제외하고 봄가을 옷을 선택하면 사계절 내내 입을 수 있다. 추우면 겹쳐 입을 수 입고, 겹쳐 입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코디법이다.
마지막으로 장식이 없는 깔끔한 미니멀리즘의 원피스를 선택할 것을 권한다. 장식은 유행에 민감해 유행이 지나면 구닥다리 옷이 된다. 원피스만으로 멋쟁이가 되려면 계절마다 몇 벌씩 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유행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욕심껏 사다가 파산에 이를지도 모른다. 소재가 좋은 기본 컬러의 원피스를 선택한 후 스카프, 가방, 액세서리 등으로 다양하게 코디해 10년 젊게 보이는 코디법을 제안해본다.
첫째, 스카프는 가격대비 효과가 가장 좋은 아이템이며 연출법도 다양해 방법만 잘 익혀둔다면 효과가 200%다. 요즘은 인터넷에 스카프 연출법이 동영상으로 친절하게 잘 나와 있다. 나이가 들어 목에 주름이 생겨 고민인 사람에게도 스카프는 고마운 아이템이다. 여름에 에어컨의 찬 공기도 막아주고 겨울엔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무난한 소재는 시폰 소재이며 무늬가 화려한 것과 무채색으로 여러 개 준비하는 것이 좋다.
둘째, 요즘엔 가방이 중요한 패션 아이템이 됐다. 스카프와 가방은 하나에만 포인트를 주거나 색과 톤 느낌을 통일하면 된다. 가방을 강조하고 싶을 땐 스카프와 원피스를 같은 색과 톤으로 통일시켜주면 된다.
셋째, 액세서리는 마치 화장 같은 것이다. 귀고리, 목걸이, 팔찌가 기본이지만 요즘에 다양한 브로치, 코사지를 활용한 코디가 유행이다. 낮에는 지나치게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피하는 것이 좋으며 파티를 할 때나 밤이라면 괜찮다. 키가 작은 사람은 벨트를 이용하면 좋다. 허리에서 시선을 한 번 차단해주면 비율을 좋게 해줘 키가 커 보인다.
넷째, 신발만큼은 한껏 젊어도 된다. 자칫 놓치기 쉬운 아이템이 신발이다. 나이 들었다고 할머니 같은 신발을 신는다면 잘된 스타일링을 망칠 수 있다. 하이힐이 불편하다면 젊은이들이 즐겨 신는 편안한 로퍼를 권한다. 귀여운 리본이나 체인 장식이 있는 젊은 스타일로 포인트를 줘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스타일링 기록이다. 자신이 보는 것과 타인이 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매일매일 자신의 스타일을 셀카로 찍어 기록하고 일주일을 정리해 스스로 만족하는 스타일을 그다음 주에도 시도해보자. 그렇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면 된다. 너무 유행을 좇다 보면 흔한 패션이 되어 개성을 잃기 쉽다. 나이가 들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스타일이 가장 멋스럽다.
>>장소영 호남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교수
디자이너인 어머니에게 디자인을 배우고 실무를 익혔다. 지금은 그것들을 다시 학생들에게 전하고 있다. 고객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강의한다. 가끔은 입을 수는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의상을 제작한다. 네번의 개인전과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다.
‘에게 해의 진주’와 ‘바람의 섬’이라는 별명을 지닌 미코노스는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손꼽힌다. 영화 등 촬영지로도 인기를 누리는 섬. 특히 동양인에게 많이 알려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 섬에 머물며 소설 를 쓰기 시작했고 에세이 에는 이곳의 ‘한 달 반’ 생활이 낱낱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섬은 예술가나 특정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화로운 곳은 절대 아니다.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 저자, www.sinhwada.com)
아폴론의 손자 미콘스의 이름을 딴 섬
그리스는 섬들의 나라다. 6000개가 넘는 섬 중에서 유인도는 227개. 에게 해의 섬들 중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 미코노스다. 미코노스 선착장에서 ‘워터 택시’를 타면 코라(구항구)에 금세 다다른다. 이 섬의 첫 느낌은 ‘눈부신 흰색’이다. 그리스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미코노스는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 가운데 하나다. 북서쪽에 티노스 섬, 남쪽에 낙소스 섬과 파로스 섬이 있고, 델로스 섬과는 2㎞ 떨어져 있다. 면적은 86㎢로 작으며 최대 고도는 364m로 산토리니 섬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는 달리 평지다. 지질은 주로 울퉁불퉁한 화강암이고 신선한 자연수가 적어 염분을 제거한 해수도 이용한다.
미코노스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BC 11세기경으로 이오니아인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프텔리아 해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카레스(Kares)족의 유물은 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코노스 섬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됐다. 제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과 거인족 기간테스가 신들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10년간이나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제우스를 도운 헤라클레스가 거인족을 섬멸하기 위해 던진 바위 조각이 바로 이 섬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태양신 아폴론의 손자인 미콘스(Mykons)의 이름을 딴 섬이 됐다고 한다.
만토 광장, 좁은 골목길 걷다 만난 보니스 풍차
바닷가 옆, 마토이아니 거리에서 만토 광장으로 들어서면 만토 마브로게누스(1796~1848)의 동상이 있다. 그녀는 그리스 독립운동(1821~1832)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다. 그리스 동전(1988~2001)에도 얼굴이 새겨져 있는 그녀의 삶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만토 광장을 비켜나면 아기자기한 부티크숍, 레스토랑, 호텔, 작은 박물관 등이 있는 좁은 골목이 나온다. 여름철, 화사한 부겐빌레아꽃이 피어나면 ‘흰 빛’의 가옥들은 차라리 눈이 부시다. 화분으로 치장한 발코니가 있는 앙증맞은 집들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보니스(Boni´s) 풍차가 보인다. 더 이상 돌지 않은 풍차이지만 미코노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자리다. 구항구에 떠 있는 큰 배와 부산하게 움직이는 작은 배들, 그리고 교회, 하얀 집들이 어우러진 섬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다.
미코노스가 산토리니와 다른 점은 건물 색이다. 획일화를 싫어하는 그리스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듯 흰색에 밤색, 청색을 덧칠했다. 보니스 풍차를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선사유적지가 있고 동쪽 끝으로는 다섯 개의 풍차(Kato Milli, Lena´s House)가 있다. 원래 16대였던 풍차는 이제 5대만 남아 미코노스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 풍차들은 육지에서 가져오는 곡식을 빻는 방앗간 역할을 했다. 현재는 바람을 거절하는, 돌지 않은 풍차이지만 농업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에게 무료 공개되고 있다. 풍차를 등지면 에게 해가 에둘러 섬을 감싸 안고 알록달록한 ‘리틀 베니스’ 건물들이 휘어진 해안선을 만난다.
그리스 정교회가 400개를 웃도는 섬
미코노스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작은 교회가 유난히 많다. 무려 400여 개나 있어 미코노스 작은 시가지에서는 엄청난 교회와 맞닥뜨린다. 가장 유명한 곳이 파라포르티아니(Paraportiani) 교회다. ‘중세 성채의 뒷문’이 있던 곳이어서 뒷문을 뜻하는 ‘파라포르티’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지인들은 ‘성모 마리아 파라포르티아니’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이 교회는 독특하게도 5개의 예배당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지상에서 보면 한 개의 건축물(1425년)이지만 지하에 4개의 예배당이 더 있다. 지상 건물이 가장 오래됐고 지하는 16~17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비잔틴 스타일에 미코노스 섬과 서구 교회 양식이 조합돼 오묘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키클라데스 군도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건축 양식이다. 교회 앞쪽으로는 ‘리틀 베니스’로 불리는 골목이 이어진다. 때때로 펠리컨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 섬은 낮보다는 밤 문화가 발달된 도시로 고요함보다는 생동감이 넘친다. 활동적인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섬이다.
◇ Travel Data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까지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야 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한국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는 직항 노선이 있다. 터키 항공사를 이용하면 가격이 저렴하다. 11시간 40~50분 소요.
현지 교통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나 그리스 국내 항공을 이용하면 된다. 항공편으로는 약 35분 정도 소요. 초고속 페리는 3시간, 완행은 6시간 정도 소요된다. 파로스, 산토리니, 크레타, 테살로니키 등에서도 페리가 연결된다(배편 인터넷 예약 사이트는 hellenicseaways.gr). 주말, 연휴 때는 가격이 두 배로 오른다. 표를 직접 구하기 어려울 때 항구 주변의 여행사를 통하면 알아서 척척 저렴한 가격의 표를 만들어준다.
현지 정보 올드 타운은 걸어 다니고, 그 외 델로스 섬은 투어 상품을 이용하면 된다. 파라다이스 해변 등은 올드 타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피크 시즌에는 숙박 가격이 매우 비싸다. 시즌을 피해서 가는 것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호텔보다는 가정집을 빌려주는 아파트를 이용하면 저렴하다. 그리스의 일반 식당으로 알려진 타베르나(taverna)가 많고 문어, 새우 등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다. 화덕에 굽는 숨은 빵집(Gioras Wood Medieval Mykonian Bakery)이나 피아노 바인 몽파르나스도 기억해두자.
기타 정보 그리스 경기가 불안하다고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지만 실제로 여행을 할 때는 체감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매우 밝고 친절하다. 통화는 ‘유로’이고 물가는 싼 편이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미코노스를 기점으로 델로스, 시로스, 파로스, 낙소스, 산토리니 등 주변 섬 여행을 해봄직하다. 섬 여행이 지루하다면 아테네로 나와 그리스 내륙 여행을 즐기면 된다. 메테오라, 테살로니키, 델피, 칼라마타 등 그리스는 한 달 이상 머물러도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다.
언제 친구가 되었는가에 따라 서로간의 친밀도가 다릅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기억은 너무 멉니다. 그러나 몇몇 단편적인 상황은 의외로 또렷합니다. 예를 들자면 얘기를 나누던 표정과 쪼그려 앉아 있던 곳, 함께 맡던 공기 냄새와 햇살까지 분명합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갈라져야 했던 몇몇 아이의 이름과 얼굴도 또렷합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친구들도 구체적으로 나뉘어 기억됩니다. 그렇게 중학교 때 만난 귀한 친구가 아내와 함께 지난여름 우리가 사는 몽골로 놀러왔습니다. 그 친구는 어렸을 적에 나에게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당시의 내 별명은 ‘용가리’, ‘하마’ 등 외모와 연결되었는데 의외의 ‘꿈쟁이’였습니다. 지금은 조금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들렸습니다. ‘꿈쟁이’라니 내가 그렇게 허무맹랑한가? 내가 그렇게 현실감각이 없나? 그렇지만 내 삶의 고비마다 ‘꿈쟁이’라는 그 친구의 말이 떠올랐으며 그럴 때마다 그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책에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쓰인 말대로, 나는 이제 행복한 꿈을 만들어내는 늙은이가 되고 싶습니다.
사진으로 예술과 꿈을 이해
꿈은 현실과 대비되지만 실제로 그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꿈을 꾸기 위해선 먼저 잠이 들어야 합니다. 손자가 생기고 갑자기 아기를 안아 재울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잠잘 때가 예쁘다는 말을 합니다. 거기에는 잠재우기가 힘들다는 경험도 스며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주위에 반응하고 웃기 시작하면서 차츰 잠드는 순간을 구분하게 됩니다. 잠이 오면 스르르 잠에 떨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 깨어 있으려 뻐팅기기도 하고 갑자기 떼도 쓰고 울기도 합니다. 관성의 법칙이 잠에도 적용되나봅니다. 일단 잠들면 몸의 모든 긴장이 빠지고 전혀 다른 상태가 됩니다. 거기서 다시 꿈을 꿀 때는 또 다릅니다. 곁에서 봐도 그냥 자고 있는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꿈을 꿀 때는 놀라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현실과 잠이 다르듯이 현실과 꿈은 또 다릅니다. 그렇게 예술은 현실과 꿈처럼 또 다릅니다. 사진을 하면서 난 예술과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친구 말대로 내가 꿈쟁이라서 예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난 사진으로 꿈을 꾸고 있습니다. 무의식에 끌려 다니는 꿈과는 조금 다릅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꿈입니다. 아내는 그 꿈이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난 열심히 아내에게 내 꿈을 설명합니다. 설명하다 아내에게 여러 번 망신당하고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난 지치지 않고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꿈틀대며 반항을 해왔습니다. 난 꿈쟁이니까요.
인문학이 사람의 꿈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난 이제 꿈만 꾸는 게 아니라 해몽도 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해몽을 합니다. 우선 아내에게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 꿈과 해몽이 이젠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립니다. 조금 있으면 그 꿈과 해몽이 실크로드를 타고 우리나라와 몽골을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지길 바랍니다. 꿈이 돈이 될 수 있고 더 큰 것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또 한 발짝 들어가 예술뿐 아니라 역사도 그 테두리 속에 꿈의 원자재로 넣었습니다. 인문학이 사람의 꿈임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사진가로 나는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으로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해왔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LA캠퍼스 Kerkhoff Hall Art Gallery에서 2003년 11월 초대받은 Forgotten Terror–I SAW YOU! 그리고 한국에서 개최된, 20개국이 참여하는 역사NGO세계대회에 초대받았습니다. 주제는 동남아시아 역사 화해를 위한 역사 교육이며 주최 단체는 세계NGO역사포럼과 동북아 역사재단이었습니다. 이어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희생당한 필리핀 할머니 생존자들을 찾아 2009년 열린 역사NGO세계대회에서 필리핀 위안부 할머니들을 촬영한 사진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발표했고, 일본국회의원회관, 노근리평화공원 설립을 위한 역사학자 모임 등에 초대받았고 문화체육관광부, 외교통상부, 지식경제경부와 중앙일보 주최로 2009년 5월에 ‘Gems of Central Asia’를 용산국립박물관에서 초대 전시를 가졌습니다.
그렇게 사진에 역사를 담다가 사건은 보는 시각에 따라 같은 내용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마치 요리사들에게 같은 재료를 주고 다양한 음식을 기대하는 프로그램이 가능하듯 관심을 가져온 실크로드 국가들의 역사가 그렇게 보입니다. 역사는 특히 사실만을 찾는 학문인 줄 알았습니다. 학자들이 힘을 다해 사실을 찾듯, 좋은 재료를 찾는 일이 역사의 전부로 생각했는데, 그 후의 작업, 즉 찾아낸 역사적인 사실로 어떻게 좋은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먹이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실크로드관련국에서 발표되고 있는 역사에서 우리 대한민국만이 독점한 사건이고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조상들에 대한 언급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받았던 역사 교육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남의 역사를 건드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공통분모 찾기
생각을 멈추고, 같은 재료를 갖고 다른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해보았습니다. 나와 내 주위 나라들은 서로 다른 역사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닫힌 역사와 열린 역사관?
유목적인 이해와 농경적인 가치?
역사를 쪼개고 분열시켜 작게 방향을 잡는 방법과 합하고 어울려 크게 보는 대승적 관점.
다시 멈춰 주위 다른 민족과 분리해내었던 내 나라의 역사를, 그들과 서로 교차하며 만났던 공유된 역사로 짜보았습니다.
여행 중 만났던 중앙아시아인의 외모에서 우리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닮은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역사는 서로를 갈라내기도 하지만 서로의 공통분모가 찾아진다면 이제라도 반갑게 만날 수 있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며 국경을 초월한 유럽연합 국가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 부러워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서로의 묻힌 역사를 재료로 아시아와 유럽-유라시아에 대승적 실크로드 연합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멋진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꿈입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랙션대회(NGO의 유엔총회)에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상속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나 심지어 빚쟁이에게도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창업부자보다 상속부자가 훨씬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상속자끼리 죽기 살기 싸우다가 재산 다 날리고 가족우애까지 끊는 경우가 허다하다. 창업자 선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언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이 제일 중요하다. 민법에서 규정한 유언방법은 매우 엄격하여 자필증서ㆍ녹음ㆍ공정증서ㆍ비밀증서ㆍ구수증서 등 5가지 방법만이 법률적 효력을 갖는다. 형식적 요건이 일부라도 미비할 경우에는 법적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상속 전에 상속포기각서를 작성하더라도 효력이 없다.
법에서 정한 유언이 없으면 상속순위와 지분은 민법의 규정에 따른다. 아들과 딸, 장남과 차남 차별이 없다. 재산형성 기여정도에 따라 다른 계산을 할 수 있지만, 자식들에 대한 차별이 대부분 상속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얼마 전 ‘미성년자 주식 부자’가 장안의 화제였다. 유력기업 오너 할아버지가 여러 명의 어린 손자에게 회사의 주식지분을 나누어서 증여하였다는 이야기였다. 부동산이나 회사의 주식을 공동으로 물려주는 것은 삼가야 한다. 공동재산은 훗날 분쟁의 씨앗이 될 뿐이다. 결국 상속재산 다 날리고 가족끼리 원수가 된다. 재산을 후대에 물려줄 때는 각자에게 나눌 몫을 확실하게 하여야 한다.
재산관리 능력자에게 상속하는 방법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먹이를 입에 넣어주는 것보다 잡는 훈련을 시키라’고 흔히 말한다. 자식들에게는 자립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능력이 부족한 상속 2세에서 무너지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목격한다.
상당 규모 사업을 하는 친구가 있다. 몇 해 전 평소와 달리 상당히 어두운 표정으로 고민을 털어놨다. 자식이 사업승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한 후계자감을 찾아서 마음을 비우고 경영을 일임하라. 목표 초과에 대하여는 막연한 훗날 이야기를 하지 말고 즉시 성과보상을 하면 결과가 좋을 것 같다”고 권유하였다. 얼마간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손때 묻은 창업 사업이지만 그는 미련을 버렸다. 젊은 임원 한 명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목표 초과 성과에 대한 보상도 분명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성과가 차차 좋아졌고, 지금은 대주주 지분까지 양도하고 완전히 은퇴하였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그림그리기에 파묻혀서 장년생활을 즐기고 있다.
사랑과 믿음을 기초로 하는 부부가 재산을 공유하는 방법도 모색할 때다. 부부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면 서로 믿음이 커지고, 누진세가 적용되는 세금에서 유리하다. 공유재산에 대한 권리행사는 부부가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 질 수 있다.
상속자가 '빚 폭탄'을 피하려면, 상속승인과 포기제도를 활용하면 된다. 상속승인과 포기는 상속개시를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 법원에 신청하여야 한다. 단순승인은 특별한 절차가 없다. 상속재산을 처분 등 행위를 단순승인이라고 한다. 단순승인 후에는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할 수 없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며느리나 사위는 내가 낳은 피붙이는 아니지만 친자식과 함께 사는 자식 같은 존재 관계다.
며느리보고 ‘나는 널 딸처럼 생각한다’ 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막역한 친자식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때로는 할 말 다 못하고 사는 사이다. 예전에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딸은 남처럼 대해야 된다하고 사위는 백년손님 이라 하여 씨 암 닭도 잡아주는 영원한 손님처럼 융숭히 대접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아들의 자식보다 딸의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친가보다는 처가 가까이에 집을 얻는 젊은 세대가 부쩍 늘었다. 딸의 위세에 눌려 부계사회가 무너지고 제사제도까지 흔들린다. 불과 10여 년 만에 고모보다는 이모가 더 가깝게 모계사회로 변해간다.
치과의사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노인이 치아가 나빠 치과병원에 진료를 받고 치과의사로부터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우선 당사자인 노인은 비싼 임플란트 가격의 위세에 눌려 ‘다 늙어 뭐 땜에 이빨에 그렇게 큰돈을 들이느냐 그냥 이럭저럭 살다가 죽을란다.’ 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매 끼니때마다 치아가 부실해 불편함을 스스로 잘 아는지라 자식들이 좀 해줬으면 하는 눈치를 치과의사는 읽고 있단다.
노인을 모시고 온 사람에 따라 대답이 다 다른데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 이렇다고 한다. 아들은 임플란트를 “해드린다 못해드린다” 대답은 하지 않고 인상만 푹푹 쓰고 있고 며느리는 “그거 꼭 해야 되요?” 하고 반문한단다. 하지만 딸은 제품별 가격을 물어보고 이것저것 장단점을 알려고 하고 사위는 시원시원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먼저 한다고 한다. 그것도 아내가 있으면 더 큰소리로 “예! 제일 좋은 것으로 해주세요!” 하고 아내에게 어깨를 으쓱해하며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과시하듯 제스처를 쓴다고 한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 아들은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사위는 딸의 표정을 살피는데 아무래도 딸의 입장에서는 친정부모 편에 기울기 마련이다. 딸과 아들은 성장과정에서부터 다르다. 퇴근해 온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으면 딸은 “아빠 커피 타 줄까? 안마 해 줄까?” 하고 아버지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주려고 하지만 아들은 불똥이 자기까지 튈까봐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피해버린다. 이렇다보니 부모에 대한 세세정보는 아들보다 딸이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하다. 무덤덤한 아들보다 알랑방귀 뀌는 딸이 더 좋다.
아버지가 시골선산에 다녀오려고 아들이나 사위에게 차를 운전해서 함께 가주기를 부탁하면 선 듯 대답이 나오는 쪽은 아들보다 사위 쪽이 먼저다. 사위는 자신이 OK하면 아내가 당연히 OK 해 주고 이번 일로 점수를 딸 것이라 믿고 있는데 반해 아들은 머뭇거리는 것이 과연 아내인 며느리가 OK 할지에 대해 확신이 덜하기 때문에 선뜻 대답을 못한다.
고려시대까지는 모계 사회였다. 고려시대의 제상 파평 윤씨 윤관의 묘가 외가인 청송 심씨의 파주 선산에 묻혔지만 양 가문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당시로는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처가나 외가의 선산에 묘를 쓰는 것이 용인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문화로 엄격한 부계사회가 되면서 부계 조상의 족보가 정비되고 부계 혈통 조상의 산소를 찾기 시작하면서 가문의 사활을 건 엄청난 산송(山訟)사건이 조선 팔도를 흔들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왕의 명령도 듣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든 것이 몇 백 년을 이어온 윤관의 산송사건이다. 조선시대의 부계사회에서는 부계씨족을 벗어나서 외가나 친정집의 선산에 무덤을 쓰지 못했다. 비록 누나라 하더라도 출가외인은 친정집의 선산에 묻힐 수 없었다. 앞으로 모계 사회로 발전해 가면 가족무덤이 성행하고 딸과 사위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성씨가 다른 가족선산에 함께 묻히는 세상을 예상한다.
딸과 며느리를 사랑이라는 저울에 올려놓고 어느 쪽으로 기우는 가는 각자 하기 나름일 것이다. 친손자 똥은 맨손으로 만지지만 외손자 똥은 막대기로 치운다는 말도 겪어보니 헛말이다. 출가외인이라 하여 딸을 배척할 수도 없는 시대고 나와 성씨가 다르다고 며느리를 딸 뒤에 세울 수도 없다. 이기는 쪽이 우리 편이라고 정해진 법도에 따라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며느리나 사위가 잘하면 잘하는 쪽으로 마음이 간다.
군대 복무시절 초등학생이 보낸 위문엽서 한 장이 마음에 들어 호주머니에 고이 간직하였다.
필자가 군대에서 복무한 시절은 월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가슴 아픈 때였다. 월남전 소식이 주요 뉴스가 매일 등장하고 온 국민이 군가를 부르면서 국군장병을 위로하였다. 6월에는 전 국민이 위문품을 모았고, 학생들은 위문편지를 단체로 군인에게 보내곤 하였다.
현충일이 한참 지난 후에 위문엽서가 한 다발 부대에 배달되었다. 고등학생 엽서는 상급부대로, 중학생 것은 중급 부대로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생들의 사진엽서가 배당되었다. 내용은 단체 받아쓰기 수준으로 읽을 만한 것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행정업무를 담당한 필자는 무더기 속에서 눈에 띄는 엽서 한 장을 고르고, 나머지는 부대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무도 초등학생의 엽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유행하였던 펜팔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연필로 또박또박 쓴 엽서였다. 칠판에 적어준대로 쓰지 않고 성의껏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었다. 절반으로 접어서 하복 상의 호주머니에 넣은 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몇 달이 지나서 하복을 정돈할 가을이 왔다. 관물정돈하려고 상의를 정리하는데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뭉치가 손에 잡혔다. 펼쳐보니 연필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름에 받았던 위문엽서였다. 막내 동생 같은 초등학교 4학년생에게 답장을 썼다.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답장도 오지 않았다. 완전히 잊고 해가 바뀌었다.
새해가 되자 발신자 주소도 이름도 없는 그림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여자의 글씨체이고 내용은 자작시나 수필처럼 느껴졌으나 도통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답장할 방법도 없어 갑갑하게 느끼고 초등 4년생에게 편지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 이름이 있는 엽서가 오고, 또 시간이 지나서 주소가 있는 답장이 왔다. 비로소 초등학생의 언니라는 사실을 알고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꼬맹이는 학교로 보냈던 답장을 뜯어보지도 않고 한 구석에 방치하였다.
큼직한 글씨가 마음에 들어 동생 대신 답장을 썼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편지쓰기에 온 정신이 빠져들었다. 예쁜 글씨에 맞추려고 글자를 그렸다. 글 수준에 뒤지지 않으려고 썼다 지우기를 되풀이 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어갔다.
그가 ‘국군의 방송’에 필자를 위하여 신청한 희망곡이 방송을 탔다. TV커녕 변변한 라디오도 없어 방송청취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고참병의 트란지스타 라디오로 휴식시간에 국군의 방송을 듣는 것이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방송의 내용보다 정말 나오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저녁 6시 귀한 휴식시간도 잊은 채 부대원이 주위에 빙 둘러 앉았다. “백외섭 상병에게 보내는 희망곡입니다.” 아나운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부대 내무반이 발칵 뒤집혔다.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갓 데뷔한 정미조의 감미로운 노래였다고 기억한다. 자기 일처럼 좋아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멋있다”면서 손뼉을 쳐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새 달랑 한 장 엽서가 두툼한 봉투편지로 바뀌었다. 사진을 교환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전지에 글을 가득 써서 소포처럼 보내기도 하였다. 가슴 설레는 즐거움이 있었다. 군대 생활하는데 활력소가 되었다. 주고받았던 많은 편지는 ‘가보’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제대 후 첫 만남을 가졌다. 꿈같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아들ㆍ딸 가족과 쌍둥이 손녀ㆍ손자와 외손자를 거느린 할아버지ㆍ할머니가 되어 곱게 산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부지런히 살았던 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능기부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아내는 시인으로 활동한다. 세 손주들의 얼굴만 쳐다봐도 입이 귀에 붙는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즐겁게 산다. 앞으로 긴 여정을 더 보람차게 살 것이다.
가슴 떨릴 때 세계여행을 떠나야지 늙어서 다리 떨릴 때 여행 가면 사서 개고생이라고 어느 장년모임에서 젊은 강사가 말한다. 돈이 있어야 세계여행을 다녀올 텐데 무슨 돈으로 여행을 가라는 말이냐는 청중들의 질문에 강사는 답변을 준비한 듯 꼭 집어서 집을 잡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라고 한다. 주택 역모기지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강사는 신바람이 나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시대는 지나갔다, 집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 하지 말고 신나게 폼 나게 다 쓰고 한 푼도 자식에게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셀프부양 시대라며 자신의 몸은 스스로 돌봐야지 자식이 나를 부양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인기가 있는 어느 스님은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모 자식 간의 트러블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식이 20세가 지나면 부모 자식 간 정을 끊고 서로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세계를 봐도 다 큰 자식을 끼고 사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자식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세태에 이런 달콤한 강의는 자식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부모 세대에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변화된 시대를 탓하고 자식들을 억지 이해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우리 세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에게는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자학적으로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모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0%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열심히 세금을 납부했으니 늙어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식을 열심히 키워준 것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사자가 다 큰 자식 사자를 돌보는 일은 없다, 젊은 자식 개가 늙은 어미 개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일도 없다는 등 짐승의 행태를 사람에게 비유해 부모 자식 간에도 남남처럼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홍보하고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모든 행위에 서글픔을 느낀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짐승은 아니다. 남녀가 성년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들이 태어나고 재롱떨며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짐승이 자식에게 먹이를 주는 본능과는 또 다른 이성이 사람에게는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옛날부터 세상에서 보기 좋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부모의 즐거움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수천 년 동안 해온 인류역사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과 다른 점이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었다고 쫓아낸 후 나 몰라라 하고 해외여행 다니면 부모 마음이 편할까. 부모는 개천에서 뒹구는데 자식인 나만 잘살면 행복할까. 부모 자식 간은 한 몸과 같다. 오른팔이 아픈데 왼팔이 희희낙락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동물에 빗대어 억지로 떼어놓고 행복 운운하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다. 행복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가족을 모아주는 정책을 개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지 않고 함께 살게 하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핵가족화가 고착화되다 보니 가족의 개념도 희미해져간다. 초등학생이 함께 사는 강아지는 가족이라 하고 따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가 번 돈 내가 다 쓰고 죽는다고 신나게 쓰다가 돈이 떨어지는 날 죽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점쟁이도 아닌데 죽는 날을 어찌 안단 말인가. 나는 해외여행보다 일하며 돈 버는 것이 좋다. 누군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냐고 물어보면 일하다 죽는 것이 해외여행하다 죽는 것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행은 절대 안 하고 자린고비처럼 돈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겠지만 집을 저당 잡혀서까지 해외여행 갈 마음은 없다. 내 입에 고기반찬 들어가는 즐거움보다 손자 입에 사탕 하나 물려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기쁨이다.
이제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직장 때문에 핵가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유명 강사들이 핵가족을 찬양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가족 단위로 함께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임은 자명하다.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식하지도 않고 위생관념도 투철하기 때문에 손주들의 양육 면에서도 함께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요즘,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이 돌보는 양육자가 바뀌고 있다. 미안한 부모는 돈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어느 초등학생이 생일파티라며 4만원짜리 뷔페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부모가 아이들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니까 혹 나쁜 길로 빠질까봐 이런저런 생각을 못하게 여러 학원을 투어하도록 교육 프로그램도 짠다. 아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격형성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부는 대가족제도의 장점을 홍보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선생, 수학선생을 하면 일거양득이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지혜를 정책으로 반영 보급하도록 정부는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필자에게는 연년생으로 성별이 같은 아들 둘이 있다.
두 아이는 여친도 한 해 시차를 두고 생기더니 결혼도 한 해 시차로 한다. 배우자와의 나이도 한 해씩 연하이다. 그러다보니 가정의 모든 일들이 장남, 차남이란 연령별, 서열이 아예 없다. 아들들이 결혼하고부터 며느리들 주도로 필자 생일을 치룬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며느리들 간에는 생각이 같을 확률은 드물다. 해마다 생일이 오면 큰 며느리는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조금 화려한 디너를 갖자는 생각이다. 전망이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한다. 특별한 꽃꽂이도 하고 생일케이크도 특별하다고 이름 난 집에서 먹기 아까울 정도의 고운 장식을 한 것으로 선택한다. 그러다보니 짧은 시간 즐기는 것에 대비하여 경비가 크다. 생일을 맞이한 필자에게 돌아올 선물에 투자 할 돈은 적다.
작은 며느리가 한 해 늦게 결혼했다고 처음에는 그냥 따라주더니 어느 해부터 이 생일축하 파티를 바꾸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간단하게 일반식당에서 밥은 먹고 남는 경비를 합하여 어머니께 현금을 드리면 어머니가 유용하게 쓰실 수 있지 않느냐란 의견이다. 동서에게 말하면 기분 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동서에게 말하기 전에 필자더러 선택하라고 귀띔한다.
둘째 며느리 얘기를 듣는 순간 알뜰함이 기특하고 실용적으로 쓸 수 있겠다고 느꼈다. 한편 은근한 섭섭함이랄까 아쉬움도 있다. 필자는 물론이고 우리 세대 서민이라면 알뜰함이 경제적이다 못해 나를 위해서는 삶의 기본적인 것 외에 심지어는 문화비마저도 지출하지 못하는 인색함이 많지 않은가. 나를 위하여 호화롭거나 사치스런 소비에는 익숙치 않다. 내일을 대비하여 닥칠지도 모르는 어려움이 불안으로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이 작은 불안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은 자녀들이 베푸는 효심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분이다. 그 마저도 엄마답지 못한 치기였나 싶고 호사에 대한 동경이 드러났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다.
일단 큰며느리에게 작은 아이의 아이디어를 말했다. 큰며느리는 단연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늘 있는 일도 아니고 검소하게 평생을 살았는데 더 이상 경제적이고 실용적일 이유가 무엇이냐는 대답이다. 그보다 나를 정신 들게 한 것은 손자들에게 고급식당에서의 테이블매너를 가르쳐 줄 기회도 되고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즐기는 시간의 고급스러움이 좋은 추억도 된다는 것이다. 그 경비로 가족들과 즐기는 것 외에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온다.
큰며느리 의견을 받아들였다.
씁쓸함은 필자 자신이다.
엄마의 품위를 지키고 싶어하는 명분 찾기에 급급한 모습이 한심하다. 손자교육 운운 하는 말은 하면서 필자도 이제는 좀 고급스런 소비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필자는 늘 버리고 싶은 내가 있다. 좋아하기 때문에, 하고 싶기 때문에 하면서도 나중에 보면 자신에게 당당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는 늘 하는 말이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그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