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초복인 오늘은 종일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네요. 한해의 중간에 있는 7월 중순이다 보니 무덥기도 하고 비가 자주 오는가 봅니다. 아부지 계신 곳 날씨는 어떠신지요? 많이 덥지는 않으신지요?
지난주에는 시골집 엄니께 들려서 주변 정리도 해 드리고 텃밭 마늘도 캐서 묶어 매달아 두었지요. 햇 옥수수도 첫 수확으로 따서 쪄 먹기도 했답니다. 엄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부지! 2주전엔 아부지 손자 ‘우태’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로 이사 오려고 매매계약을 했어요. 돌아오는 10월 초엔 아부지 증손자가 태어날 건데 며늘아가가 맞벌이로 직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저희한테 아기를 맡기기로 하고 이리로 이사 오려 한거예요. 아부지는 알고 계셨는가 봐요? 그날 밤 제 꿈에 오셨었잖아요. 옆 동네 새로 짓고 있는 전원주택 옆을 지나가며 여러 가지 일러주시던 꿈속 기억이 생생하기만 한데 벌써 멀리 가 계시는군요.
아부지가 26살 되던 해, 제가 4살 때 큰집에서 분가하시며 지으셨던 고향의 옛집! 아부지는 그곳에서 23년을 사시다가 엄니와 우리 5남매 남겨두고 그 곳 멀리로 가셨던 거잖아요. 그 후로도 19년은 더 살다보니 엄니는 점점 늙어 가시는데 여러모로 불편해서, 텃밭을 정비해서 터를 다듬고 지금의 새집을 짓고 이사했던거지요. 그 후로 13년 동안 비워놓다 보니 많이 망가지고 보기도 흉해서 헐어 버리고, 메꾸어 밭으로 만들려고 흙을 받아 쌓아 놓은걸 보니 아부지께서 서운하셨던지 2주전 제 꿈속에 다니러 오신 거 같아요.
아부지 손길과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성리 136-2번지 옛 집터 이지요. 기역자로 지어진 초가집에 안방, 윗방, 건넌방에 부엌과 외양간, 뒷간.
처음엔 마루도 없이 문 앞 댓돌에 두툼한 발판을 놓고 드나들었던 기억이 제겐 아직 생생하거든요. 차차 바깥 행랑채를 들이시고 사랑방과 헛간도, 곡간도 늘리고 초가도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바꾸시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단단히 길들이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다듬으셨었죠.
뒤꼍에 펌프 물을 팠다가 가물면 물이 짧아, 다시 안마당에 깊숙이 파고 파이프를 박아 동네에서 제일 달고 시원한 맛있는 샘물 올리는 펌프를 장만 하셨었지요. 한여름 무더위에 논밭에서 땀에 젖어 돌아오시면 치컥치컥 펌프물 퍼올려 흙먼지도 털어내고 등목도 해드리고, 마루 위에서 함께 했던 보잘 것 없지만 푸짐했던 밥상이 목이 메이게 그립습니다.
강 건너 골짜기에 다락 논을 장만 하시고는 배타고 건너다니시며 논농사를 지으셨죠. 이른 봄 뒷간의 재거름을 배에 싣고 건거가 못자리를 만들고, 연장 질 할 큰 소들은 나룻배에 태우고 건너가 갈고 써래질 하여 모내기를 한 후로는, 이틀이 멀다 않고 돌아보며 어린자식들 이밥을 먹이려 애쓰셨던 거지요.
윗마을 너 댓 배미 논도 그 아래 경사진 돌밭도 보리밭으로 콩밭으로 바꾸어 가며 곡간의 항아리를 채우고, 검단 논과 밤나무골 다락 논은 우리 식구 귀중한 식량의 터전 이였지요. 그런 농토를 한 필지, 한 마지기 손수 늘려 가시며 그렇게 좋아하시고 뿌듯해 하셨다는 걸 나중에 엄니로부터 말씀 들어 알게 되었었구요.
아부지! 제가 중학교 시험을 쳐야 할 때나 고등학교 진학하고파 할 때엔 주렁주렁 5남매 자식들 걱정에 덥석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지 못하셨던 거 전 기억하고 있어요. 힘들게 어렵사리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 혼자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에 올라가 애쓰다가, 예비고사에 떨어지고 난 한겨울에, 성남시 어느 버스종점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다가, 툭툭 털고 군대에 간 후로는 휴가, 외출, 외박, 면회도 없는 힘든 부대에 가서 33개월 넘게 아부지 엄니 속 애타게 만들기도 했었지요.
1979년 1월 군대 제대 하던 해 운 좋게 한국전력에 입사하였고, 입사한 후 아부지 친구 분들이나 이웃 분들의 소개를 받아 장가도 들이고 며느리도 보고 싶어 하셨는데, 그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제 생각대로 살다보니 입사 후 3년 만에 아부지는 제가 뵈러 갈 수 없는 먼 나라로 가신 거예요.
아부지! 49년 젊은 세월 접고 멀리 그 곳으로 가신지가 올해로 33년째 입니다. 이젠 거기서도 터 잡고 재밌게 사시나요? 가끔은 이 곳 생각도 하시는지요? 아부지가 갑작스레 허망하게 떠나가신 후 저는 엄니와 우리 5남매 열심히, 남들 손까락질 안 받고 살아보려고 애썼지요. 아부지가 뿌려 놓으신 삶의 터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반듯하게 살려고 했던 거예요.
그 후로 우리 5남매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낳아 키워가며 가끔씩 만나 옛 얘기도 해가며 ‘배나들이’ 혈육의 정 이어가고 있답니다. 재작년 12월엔 제 딸, 아부지 손녀딸을 시집 보냈구요, 지난해 봄 4월엔 제 아들, 아부지 손자 장가를 보내어 춘천 가까운 곳에 둥지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저희 끼리 잘 살아 갈 거예요. 두 녀석 다 직장에 다니며 나름 생활을 개척해 가고 있거든요
아부지! 이렇게 식구들의 모습이 변해 갈 때마다, 얼마나 아부지가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이정도 살아온 것도 다 아부지 덕분이고 가르치심 이었지만, 실은 저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맘 편히 의논드리고 도움 받아야할 아부지가 멀리 만날 수 없는 곳에 계시다는 게 얼마나 속상하고 야속 하던지요.
아부지의 땀 냄새가 그립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용마루로 타고 오르던 아부지의 담배연기가 보고 싶습니다. 데이터 무제한으로 영상통화도 하고 싶습니다. 패밀리레스토랑에 모시고 가서 한 번도 맛보신적 없는 스테이크도 잡숫기 좋게 잘라 드리고, 보랏빛 와인도 조심스레 따라 드려 보고도 싶습니다.
지난 1월에는 엄니 팔순 생신이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부지는 팔십 둘 되시네요. 우리 자식들하고 혈육 가까운 친척들 모여서 엄니 팔순생신 차려 드렸어요.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농사일에 진땀 흘리시던 아부지가 더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자주감자 깎아 썰어 넣은 수제비국으로 허기진 배 채우고 바깥마당에 멍석 펴고 누워 올려다보던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자주 편지 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초복 날 늦은 밤. 큰 아들 올림
베이비시터는 아기를 돌보는 사람이고 민간자격증도 있는 전문직dl다. 요즘 맞벌이가 대세다보니 아이를 내 친자식처럼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쪽지가 아파트 게시판에 붙어있다. 구인광고를 보고 정확히 어떤 베이비시터를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이 돌봐줄 이모 구함’ 이라는 뉘앙스로 보아 40대나 50대 초반의 아줌마를 지칭하는 것 같다. 남자고 게다가 할아버지는 꽝이다.
베이비시터가 되려는 사람은 아이엄마와 면담을 거쳐 고용이 되겠지만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직장에 가야 하는 아이엄마들은 불안할 것이다. 처음 약속 대로 아이를 제대로 돌봐 주어야 하는데 때리거나 먹을 것을 제시간에 맞춰 제대로 줄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급기야 CCTV를 거실에 달고 베이비시터의 동작을 살핀다. CCTV가 거실에 설치 된지를 모르고 옷을 갈아입다가 ‘거실에서 옷을 갈아입지 마세요.’ ‘아이에게 집중해 주세요.’라고는 문자 통보를 받으면 감시당한다는 기분이 들어 억울해하기도 하고 결국 그만두기도 한다.
베이비시터는 여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건강한 할아버지에게 적합한 일거리이다. 필자가 며느리를 도와서 손자, 손녀를 돌보면서 얻은 결론이다. 물론 모든 할아버지가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평소 아이를 사랑하는 따뜻한 심성에 신체 건강한 할아버지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할아버지 베이비시터 장점은 이렇다. 첫째는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힘이 있어서 덜 지친다. 아이를 좀 더 오랜 시간 안아줄 수 있다. 서너 살 먹은 아이가 갑자기 뛰어와서 ‘할머니!’하고 덤벼들 듯 안기면 할머니가 벌러덩 나자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할아버지는 버티는 힘이 할머니 보다는 강해 넘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둘째로 할아버지는 대부분 운전을 하므로 아이가 아플 때 병원 투어에 제격입니다. 동네병원은 주차시설이 좁고 열악하여 숙달된 운전자가 필요하다. 셋째로 직장에서 조직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할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다. 시간 맞춰 분유를 타주거나 간식을 주는데도 할아버지가 더 잘 할 수가 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들보다 위생관념이 덜하고 아이를 건성건성 볼 것이라는 생각도 선입견이다. 요즘 할아버지들은 외출해서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손을 씻고 아이를 안아준다. 보건, 위생관념이 예전의 할아버지와는 다르다. 아이의 정서적인 면에서도 베이비시터가 자주 바뀌는 것은 좋지 않다. 젊은 여성베이비시터는 할아버지에 비해 자주 바뀔 가능성이 높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일다. 할아버지 베이비시터는 큰돈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고용하는 입장에서도 경제적이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도 힘에 부치지도 않는 아이 돌봄을 하면서 신체와 머리를 쓰므로 건강해지고 일을 한다는 자존감으로 행복해진다. 국가적으로도 노인의 의료비가 높은데 노인이 일을 함으로써 건강해지면 의료보험재정이 튼튼해진다.
한번 고착된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이돌보는 것은 여성이 제격이라고 믿고 있고 일부 타당성의 근거도 있지만 절대적은 아니다. 평소 아이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고 베이비시터 전문적인교육을 받으면 충분히 할아버지도 훌륭한 베이비시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솔모랭이는 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추억의 물건들이 진열돼 있어 먹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까지 만끽할 수 있다. 향수가 느껴지는 양철 도시락, 괘종시계, 타자기, 기타, 축음기, 뻥튀기 기계 등 주인장의 남편이 30년 넘게 모은 것들이라고 한다.
중·장년에게는 추억을 되새기는 가슴 따뜻한 공간이면서, 아이들에게는 옛 물건들을 살펴볼 수 있는 교육적인 곳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몇몇 테이블은 수십 년 된 집의 마루를 뜯어 만들어 빛바랜 나무 무늬가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낸다.
천장을 가득 메운 글과 그림은 주인장 시누이의 작품들이다. 그 밖에도 찬찬히 살펴보면 수백 년 된 기와, 전통방식으로 엮은 짚단, 옛날 동전, 고서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끔 물건을 살 수 없느냐는 손님들이 있지만 어렵게 모은 것들인 만큼 판매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대신 마음껏 여유롭게 구경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라고.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풍세로 289
문의 041-622-6262 백숙 메뉴 예약 필수
영업시간 10:00~22:00 매주 월요일 휴무
길고양이로 살다 입양된 순돌이와 저자의 어머니가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3년에 걸쳐 기록한 사진 에세이다. 저자에게 순돌이는 막내 동생처럼 귀엽고, 자식들이 장성한 뒤 헛헛한 일상을 보내던 어머니에게는 손주처럼 사랑스러운 존재다. 의 저자 정서윤 작가와 어머니 최순이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고양이(순돌이) 사진을 찍다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책으로 펴내기까지
A. 저자: 길에서 만난 순돌이에게 가족을 찾아주고 싶었지만 남루한 모습에 다 큰 고양이라 입양처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5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밥을 챙겨주다 가족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이 생기면서 순돌이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상대적으로 입양이 힘든 성묘(成猫)도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순돌이가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엄마를 담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습니다. SNS에 순돌이와 엄마의 일상을 기록했더니, 많은 사람이 좋아해주었습니다. 결과물들이 모여 책으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는데, 마침 출판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Q. 책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
A. 저자: 엄마도 고양이도 겉으로는 무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가족을 위해 늘 묵주 기도를 하고, 순돌이도 무심한 척하지만 가족 곁을 맴돌며 소소한 애정 표현을 합니다. 겉으로는 무심하게 대하지만, 속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그런 엄마와 고양이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Q. ‘(책에서)순돌이와 예정된 이별을 생각하면서 엄마와의 이별을 생각 못했다’는 깨달음이 준 변화
A. 저자: 무엇보다 엄마, 순돌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아 오랜 시간 차 타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멀지 않은 맛집이나 카페에 함께 다니기도 하고, 주말이면 성당 미사 후 단둘이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소소한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앞섰지 현실에서는 내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순돌이를 많이 챙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Q. 순돌이와 딸이 닮은 점
A. 어머니: 순돌이는 순하지만, 때로는 새침하고 예민합니다. 이런 점이 딸이랑 닮았습니다. 순돌이는 잠을 잘 때면 저를 찾는데, 늦둥이로 낳아 제법 컸을 때까지 제 곁에서 자려 하던 딸이 떠오릅니다. 어른이 되고도 악몽을 꾸면 제 품을 파고들던 딸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손주들도 다 장성해서, 순돌이는 제게 어린 손자 같습니다. 딸은 직장 일로 바쁘고, 남편과는 별다른 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안은 대체로 조용하고 특별히 웃을 일이 없지만, 순돌이의 재롱을 보면 웃음이 납니다.
Q. 노년기에 반려동물을 키워서 좋은 점
A. 어머니:외출하고 돌아오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반겨줍니다. 장성한 딸은 늦게 들어오고, 무뚝뚝한 남편과는 별다른 대화가 없는 덤덤한 집안 분위기에 순돌이가 있어 웃을 일이 있고, 순돌이 이야기로 대화가 됩니다. 늘 곁을 맴돌고 내 옆에서 잠자는 순돌이가 좋습니다. 희한하게도 순돌이는 자기 주인(딸)을 더 좋아하지만 잠은 꼭 제 곁에서 자려 합니다. 가족이 식사할 때면 자기도 간식을 달라 보채고, ‘까까’라고 말하면 다 알아듣고 달려옵니다. 동물이지만 정을 나누고 사니 이런 모습들이 다 예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키우는 동물이니 좋습니다.
>>정서윤 작가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현재 부산에서 장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3년부터 순돌이와 노모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백외섭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손녀, 손자 쌍둥이와 외손자가 있다. 그중 태어난 지 10일 된 손녀에게 신종플루 증상이 나타났다. 노약자와 영유아는 별다른 대책 없이 공포에 떨고 있던 때였다. 병원마다 “치료가 어렵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한 병원에서 천사 같은 의사가 지극정성으로 치료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세 손주는 건강하게 자랐고 그때부터 행복 시작이었다.
살아 있는 천사를 만나다
2009년 10월 쌍둥이 손녀와 손자가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런데 산후조리원에서 조리 중 손녀가 고열과 설사, 식음 전폐로 비상사태가 발생하였다. 토요일 오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조리원에서 동네병원으로 데려갔으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오쯤 모 대학병원으로 갔으나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아이는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고, 몸은 불덩이 같았다. 대책 없이 내쫓김을 당하고 보니 자신의 무력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아이가 출생한 ‘제일병원’으로 전화를 하였다. “신종플루 감염 위험이 크다. 빨리 데려오라.”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때처럼 사람의 목소리에 감격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보통 때면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이렇게 차는 밀리는지 숨이 막혔다. 아내와 며느리는 눈도 뜨지 못한 아기를 안고 초주검 상태다. “내 생명이라도 바치겠소. 손녀를 살려주오” 무언가를 갈구하였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었다. 이때보다 애탔던 기억은 없다.
토요일 오후 제일병원 응급실! 채혈하느라고 주사기를 찌를 때마다 아이는 아파서 자지러졌다. 당직근무 중인 여의사는 아기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대변의 냄새를 맡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3일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경험상 세균 감염으로 보이니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병원 진료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의사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지극정성을 다하는 담당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정성어린 치료로 열도 차차 내리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나온 검사결과도 다행이 신종플루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균에 감염되었으나 경과가 좋다”고 했다. 산후조리원에서 세균 감염이 자주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이 일을 계기로 다섯 달 후에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산후조리원 대신 필자의 집에서 6주간 딸의 산후조리를 하게 하였다.
한 주일 치료결과 체온도 정상으로 되고 젖도 잘 먹으면서 무사히 퇴원하였다. 퇴원 후 한동안은 손녀의 건강을 항상 걱정하였다. 다행히 별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이제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손녀를 구해준 의사선생님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세 손주 보살피기
쌍둥이가 어렸을 때는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가까이 사는 아들 집으로 갔다. 잠에서 덜 깨 칭얼거리는 아이들 달래려고 목마가 되어 무동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고 씨름상대 되어 주면서 한바탕 즐겁게 논다.
아이들의 기분이 어느 정도 좋아지면 얼굴 씻기고, 밥을 먹여서 옷 입히고 등교 준비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조그만 전쟁터다. 아침 이때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제일 어려운 어린이 보살핌이라고 본다.
쌍둥이는 길거리 간판의 글씨를 익히면서 질문하기 바쁘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재미있게 구경한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그네, 미끄럼 타고, 술래잡기 놀이까지 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어린이집에 도착한다.
외손자는 오후에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있다. 가끔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애교 떠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아이들 돕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하고 있다.
쌍둥이는 올해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독후감을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손녀는 그림을 선물하고 손자는 미니 야구를 하자고 한다. 외손자는 솜씨를 자랑하여 종이접기 작품을 선물로 내민다.
손주, 가슴으로 안아라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다. 손으로만 만지는지 가슴으로 안아주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외가에서 산후조리를 하였던 외손자는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자는 걸 지금도 제일 좋아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배우면 친해진다. 터닝메카드 놀이를 잘 모른다고 밀어내지 말고 하나씩 배우는 자세로 무릎을 맞대보라! 틀림없이 친구가 된다.
칭찬하라! 장래 귀중한 자산이 손주이다. 수만금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보물이 된다. 사랑을 먼저 주면 행복은 저절로 돌아올 것이다. 씩씩하고 명랑한 아이들! 생각만 해도 입이 귀에 붙는다.
은평구 서울혁신센터에 자리한 ‘금자동이’라는 장난감 재활용 기업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금자동이라는 단어가 참 정겨운데 금자동이는 어린아이가 금처럼 귀하고 보배롭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필자에게도 금자동이 손녀, 손자가 있어 이곳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관심이 갔다. 버려지는 장난감과 폐목재를 활용해 창의 예술교육과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회적기업 금자동이입구에서부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폐장난감으로 만든 흥미로운 설치물이 많았다.
장난감은 재활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고무와 플라스틱, 전자기기판 등이 복합되어 있어 분해하는 비용이 원료비보다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소각되거나 매립된다는데 장난감이 버려지면 재활용하기도 어렵고, 없앨 수밖에 없는 골칫덩이 폐기물이 된다.
2013년 자원순환사회연대 통계에 따르면 선별장에 반입되는 플라스틱의 3.8%가 완구오락용품으로 약 3만 톤 정도였다고 한다.
안내해 주신 대표는 올해 장난감 학교의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장난감 재활용 문화를 확산시킬 계획이며 더불어 금자동이의 장난감과 '쓸모' 프로그램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해주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장난감 및 유아용품을 처리할 장난감 재활용 센터를 기반으로 한 장난감단지(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지자체의 남는 건물이나 부지를 활용해 장난감 재활용 단지를 만들고 체계적인 수거시스템을 확립해, 단지로 수거한 후 판매와 교육, 전시 등의 카테고리로 나눠 테마파크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장난감단지가 조성된다면 전 세계에서 장난감 재활용 시스템을 보러 한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고, 장난감 재활용 문화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그냥 버리면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가 큰 문제이다. 이곳에선 안 쓰는 장난감을 가져오면 사기도 하고 기부를 받기도 한다. 기부받은 장난감을 수리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도 하고 시리아 난민학교나 다람살라 티베트 마을, 인도 등 어려운 나라에 기증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손 본 많은 장난감이 주인을 기다리듯 진열되어 있었다. 장난감 앞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설레고 순수해진다. 많은 사람이 대부분 장난감과의 놀이과정을 통해 자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에선 버려진 장난감을 분해해 놓고 아이들이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체험도 할 수 있었는데, 장난감 학교 ‘쓸모’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버려진 장난감 부속으로 자신들만의 새 장난감을 만들어 보는 체험 공간이 있었다. 버려진 장난감이 새로운 자신만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질 때 성취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으니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 체험단도 장난감 부속으로 작은 소품을 만들어보았다. 필자는 접착제를 이용해 이것저것 붙여 핸드폰 세워놓는 소품을 만들었는데 제법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쓸모없어진 장난감이라고 함부로 버리지 말고 이곳에 기부하거나 판매하면 자원절약과 환경오염도 막는 일에 조금의 보탬이 될 것이다.
시간을 내어 손자 손녀 손을 잡고 이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버려진 장난감으로 만든 흥미로운 조형물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장난감도 골라볼 수 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다. ‘금자동이’는 장난감이 작품이 되어서 멋지게 전시관을 채우고 중고 장난감도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니 환경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멋진 사회적 기업이라는 생각이다.
만나면 반갑지만 막상 함께 있다 보면 서로 지지고 볶다, 헤어지면 그리워하기를 반복하는 대상이 바로 손자와 손녀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손자 손녀를 책임지고 뭔가 해야 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보내야 할까?
그래서 서울 S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26명에게 물었다. 할아버지·할머니와 어떤 것을 하고 싶고, 좋았는지.
어떨 때 할아버지·할머니가 미운지도 들었다.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둘 것! 체력은 필수다.
(*주관식으로 이루어진 설문으로 중복 대답한 어린이가 다수 있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26명의 아이들은 조부모와의 경험이나 해보고 싶은 것으로 여행이나 놀이공원을 많이 대답했다. 특이한 점은 조부모와 함께 공놀이나 배드민턴 등을 했던 경험을 말한 어린이가 다수였다는 점.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뛰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기타 의견에서 대중목욕탕에 갔던 것, 보드게임 했던 기억 등을 꼽기도 했는데 어린이 자신에게 집중해 주고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손자 손녀들은 일단 부모 없이 조부모와 있는 동안만큼은 약간의 일탈을 꿈꾸는 것으로 드러났다. 2번 문항의 ‘조부모와 몰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1위가 바로 영화와 TV 보기. 평소 부모 제재가 아이들에게 있다는 의미다. 기타 의견에 ‘숙제 안 하기’나 ‘아이스크림 먹기’ 등도 부모가 들으면 싫어할만 한 행동 아닌가. 적어도 조부모를 부모보다는 편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들이 조부모와 하고 싶은 것은 참으로 다양했다. 윷놀이, 오목, 보드게임 등 앉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야외 활동은 기본이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등산이나 캠핑을 가고 싶다는 어린이, 태국이나 프랑스 등 해외 여행을 하고 싶다는 어린이도 있었다. 여름방학을 의식해서인지 바닷가나 수영장에 함께 가고 싶다는 의견도 많다. 손자 손녀와 뭔가를 하고 싶다면 체력 먼저 꼭 길러야 할 것 같다.
조부모가 싫을 때는 단연 화내거나 혼 낼 때였다. 기타 의견에서 ‘공부한다고 칭찬할 때가 싫었다’라고 응답한 어린이도 있었다. 혹시 공부를 막 시작한 손자를 보고 칭찬한 적이 있다면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싫어하는 것을 먹으라고 할 때’, ‘할머니 혼자서 힘들게 어디 갈 때’가 싫다고 답한 어린이도 눈에 띄었다.
최근 영화 이 할머니와 손녀지간이라는 독특한 관계 설정으로 관객의 관심을 모았다. , , 등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를 그린 몇몇 영화들이 나왔었지만,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라는 점이 신선함을 주었다. 처럼 할머니와 손녀의 동거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 은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손녀의 한글 정복’이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돋보인다.
아들·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한글’로 채우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으로 시골에서 손녀 동이를 키우게 된 할머니 오난이는 아들이 남긴 다이어리와 편지를 읽기 위해 한글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죽기 전에 꼭 아들의 편지를 읽겠다’는 각오로 다문화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실에 다니기로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글 선생이었던 부녀회장이 병원에 실려 가고 더는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오난이는 어쩔 수 없이 혼자 한글 공부를 하지만, 선생이 없어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 모르는 채 지나가기 일쑤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본 동이는 그동안 유치원에서 배운 실력으로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 갈 무렵, 일곱 살밖에 안 된 손녀에게 가르침의 한계가 찾아온다. 할머니보다 한글을 잘 알았지만, 시골로 내려온 뒤로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어 완벽하지 않았던 것.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낀 오난이는 학교를 찾아가지만 이내 거절을 당한다. 학교 직원에게 아들의 유품을 보여주며 “그동안 아들이 내게 보낸 편지들인데 내가 글을 못 읽어 미안한 마음에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죽기 전에 꼭 읽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한다.
마침내 초등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오난이는 손녀의 핑크색 책가방까지 메고 등교한다. 학교에 다닌 뒤로는 이전과는 반대로 오난이가 동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서로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대화도 없이 서먹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들은 한글을 배우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며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한글을 익히고 아들의 편지를 열어보는데, 편지봉투 속 아들의 편지는 글이 아닌 사진이었다. 오난이는 “어미가 까막눈인 것을 알았구나”라며, 동이에게 “세상은 많이 안다고 잘 보이는 게 아닌가 보다. 글자도 세상도 마음으로 읽어야지”라고 이야기한다. 서로 한글을 가르쳐 주며 티격태격하는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이 웃음 짓게 하고,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