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장면, 그리고 말이 있습니다. 2015년 7월 31일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야외무대에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오릅니다.
“제가 부를 곡은 저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이 원하고 갈망하는 곡일 수 있습니다. 통일이 빨리 되어서, 제가 부르는 이 ‘그리운 금강산’이 오늘 이 베를린에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그리운 금강산이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겠습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열린 ‘유라시아친선특급’ 폐막 음악회, 그리고 앙코르 곡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기에 앞서 조 씨가 한 말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모스크바와 벨로루시, 폴란드를 거쳐 독일 베를린까지 19박 20일 동안 대륙횡단열차를 탔던 학생, 시인, 소설가, 화가, 경찰, 소방관, 기자, 음악가, 교수, 관료, 정치인, 독립운동가 후손 등 각계각층에서 참여한 원정 대원 400여 명은 조 씨의 발언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진한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조 씨와 원정 대원, 그리고 국민 모두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달라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이 남과 북, 미국의 정상이 숨가쁘게 만나는 등 희망을 키우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가시적인 성과는 없습니다. 금강산은 여전히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여전히 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그런 씻기지 않는 갈증과 그리움을 다소나마 해소해주는 ‘우리 꽃’이 있습니다. 특산 식물인 봉래꼬리풀이 그 주인공입니다.
봄 금강(金剛), 여름 봉래(蓬萊), 가을 풍악(楓嶽), 겨울 개골(皆骨).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광을 자랑하기에 그 이름을 달리 불렀다는 금강산. 여름이면 1만2000 봉우리마다 계곡마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푸름을 뽐낸다고 해서 쑥과 명아주를 뜻하는 한자어 ‘봉래(蓬萊)’란 이름을 얻은 금강산. 그곳에서 여름철이면 꼬리 모양의 꽃을 피운다고 해서 봉래꼬리풀이란 국명을 얻었습니다. 학명 중 변종명 ‘디아만티아카(diamantiaca)’는 봉래꼬리풀이 처음 채집된 장소가 바로 ‘Diamond Mountain’이라는 영어명으로도 불린 금강산이며, 한국의 고유 식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높이 20cm 안팎으로 자라며, 달걀 모양으로 마주나는 잎의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붉은빛이 돕니다. 7~8월 원줄기와 가지 끝에 연한 보라색 꽃이 원뿔 형태로 줄줄이 달립니다.
Where is it?
금강산에 자생하는 봉래꼬리풀이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1990년대 초. ‘설악산의 꽃’을 찾아 나선 식물학자와 야생화 사진작가, 동호인 등이 설악산 마등령과 서북능선, 안산 등지에서 자라는 봉래꼬리풀을 잇따라 확인한 것. 이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봉래꼬리풀이 “금강산 비로봉의 사스래나무와 눈잣나무의 숲속에서 자라며, 강원도 속초시와 인제군에도 분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5분여 만에 오르는 권금성 바위 더미 사이사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울창한 숲이었으나 케이블카 운행으로 숱한 관광객이 오가면서 대머리 돌산처럼 변한 권금성 곳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놀랍고 반갑다. 미시령 옛길 주변에서도 울산바위를 바라보고 당당하게 선 봉래꼬리풀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고 말하는 이규리(李珪里·64) 시인. 그런 그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심어준 문장은 바로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틱낫한)이다. 종이는 종이 그 자체가 아닌 물, 나무, 바람, 햇빛 등 수많은 요소로 이뤄졌다는 것. ‘종이’와 ‘종이 아닌 것’이 같다는 걸 알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렇듯 시로써 다 말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모아 그는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담았다.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규리 시인의 새 책은 시가 아닌 아포리즘(격언, 경구 등의 글귀)으로 채워졌다. 책에는 오랜 세월 시인이 삶과 자신에게 던져온 숱한 질문과 대답의 흔적들이 녹아 있다. 아포리즘의 형태를 가져왔지만, 책을 읽다 보면 시인다운 표현들이 눈에 띈다. 어쩌면 시를 통해서도 같은 의미를 전할 수 있었으리라. 특별히 아포리즘으로 일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라는 건 굉장히 압축되고 비유되고 또 감춰져 있어서 정작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에 비해 아포리즘은 말하려는 바를 더 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죠. 그동안 살면서 제가 품었던 궁금증이나 질문들은 책과 사람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내가 정리한 답이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 이야기를 보다 명징하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포리즘이 적합하다고 봤어요.”
뒤를 바라보며 지나는 삶
독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글들이겠지만, 그는 집필기간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책을 위해 단기간에 글감을 찾아 모은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여 동안 메모노트에 적어둔 글들을 바탕으로 3년 정도 엮는 과정을 거쳤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메모노트는 그에게 ‘재산’과 같단다.
“메모노트는 늘 가지고 다녀요. 노트 중간에 간지를 끼우고 절반은 제 생각이나 글을 쓰고, 나머지 절반은 독서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적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글인데 이게 내 생각인지,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쓴 메모노트 내용 중 시로 탄생한 것도 있고, 아포리즘으로 풀어낸 것도 있죠.”
이규리는 서두 ‘작가의 말’에 “오래전부터 메모되었던 글들이 모였을 때 그 흔적이 아픔이고 견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다. 많은 것을 견디며 살았다는 그는 책에서 ‘견디고 있다’와 ‘지나고 있다’는 두 말을 ‘결혼시키고 싶다’고 표현했다. 그 독특한 문장이 지닌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누가 ‘어떻게 지내?’라고 물었는데 ‘견디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곱씹어보니 견딘다고 하면 내가 뭔가 수고했다는 게 포함된 말 같은 거예요. 그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없을까 생각하니 ‘지나고 있다’가 떠오르더라고요. 물론 둘 다 좋고 아름다운 말이에요. 이런 말들을 새기고 산다면 경멸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와도 잘 견디고 지날 수 있죠. 그때가 지나면 언젠가 말할 기회가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늘 성급해서 먼저 얘기해버리고 후회를 하잖아요. 견디고 지나며 살아갈 때 인간은 성숙해지고, 세상은 평화로우리라 생각하니 두 말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 짝지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누군가가 견디고 지나는 모습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뒤’라는 존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찰했고, 그 생각들은 이번 아포리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의 3부에는 “뒷모습은 정확함보다 정직함에 가깝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는 특히 시인이라면 겉이나 앞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그 내면과 뒤의 모습까지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죠. 그 음식을 내놓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수고했는지까지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그날 해고된 직원이 식당 뒤에서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단순히 잘 차려진 식탁만 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 특히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삶과 세계까지 살피고 이해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앞보다는 뒤, 밝음보다는 어둠, 만복보다는 공복 쪽에 서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완성은 과정이 머물다 멈추는 지점
이규리 시인은 불안(不安), 불리(不利), 부족(不足) 등 ‘아니 부(不)’를 지닌 단어들도 가까이하고 좋아한다. 그렇다고 ‘부’가 들어간 단어 모두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不正), 불법(不法), 불신(不信) 등은 멀리한다. 어떤 기준으로 단어들의 호불호가 나뉘는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해답을 찾았다.
“칼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불안, 불리, 부족 등은 내가 불편하고 손해를 보기 때문에 칼날이 나를 향하지만 부정, 불법, 불신 등은 칼날이 상대를 가리키고 다치게 하죠. 그걸 발견한 뒤부터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칼날의 방향을 따져보고 판단해요.”
그렇게 인생을 알아가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동안에도 고민과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해답을 고요히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연륜이 생겼다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삶을 살아낸 중장년이라면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 인생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린 답은 모두 정답일까?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묻고, 부정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어떤 답을 내렸을 때, ‘그래 이게 맞아’라고 끝내기보다는 ‘과연 내 답이 맞을까?’라고 의문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할 때도 ‘완성했다’고 여기지 않으려 합니다.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마지막 초상화를 그릴 때 완성에 가까운 작품인데도 18일 동안 지우고 또 지우며 다시 그렸다고 해요. 그렇게 완성이란 무언가를 계속하는 과정 속에서 멈추는 지점일 뿐이지, 완벽한 완성은 없다고 봐요. 같은 맥락에서 우리 인생 역시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완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한 삶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문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아포리즘에 영감을 준 도서 by 이규리
◇ 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에게 영혼과 인생을 사로잡혔던 한 청년의 이야기. 저자는 17세 당시 37세의 카프카를 만났다. 이후 카프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년여 동안 그와 나눈 대화와 정신적 교류에 대해 기록했다.
◇ 작가수첩 (알베르 카뮈 저)
알베르 카뮈가 22세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록한 총 7권의 노트 내용을 모아 엮었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떠올린 단상과 창작계획, 초고, 독서메모 등으로 구성돼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성찰을 엿볼 수 있다.
◇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울라브 하우게 저)
평생 정원사로 일하며 400여 편의 시를 쓰고 200여 편의 시를 번역한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대표 시 30선을 담았다. 쉬운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한 그의 시들은 담백하게 읽히면서도 강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 소유하지 않는 사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장미를 사랑했으나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 그런 모순과 방황 속에서 살았던 시인의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해 정리했다. 마지막 4부에서는 릴케의 시작노트와 헌시, 그리고 미발표 원고를 공개한다.
2분에 한 번씩 접객을 하는 직업이 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 하지만 그의 업장은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손바닥만 한 공간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이곳을 지나친 사람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것. 어찌 보면 단순한 업무이지만 사선에 선 사람들은 그가 건넨 희망의 한마디를 꼭 붙잡는다. 강동성심병원에서 만난 나누미동행팀 김창원(金昶源·70) 씨 이야기다.
병원에서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직종인 ‘이송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술을 앞두었거나 막 수술을 마친 환자를 수술실과 병실로 옮기는 일을 주로 한다. 병원마다 다르지만 안전하게 환자를 이동시켜야 하므로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 맡는다.
김창원 씨의 업무는 단순하다. 호출을 받으면 이송팀이 환자와 함께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이동형 침대의 승하차를 돕는 일이다. 시간을 때우려고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형식적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바라보면 예사롭게 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 씨의 소속은 강동성심병원 ‘나누미(美) 동행팀’. 병원 사회사업팀과 강동노인복지관이 주도해 진행하는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목적으로 지난 3월부터 운영 중이다.
2분마다 울리는 호출음
까톡!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그의 휴대전화에 암호 같은 메시지 ‘3 12 ㅎ’가 뜬다. 대부분의 업무 요청은 이렇게 스마트폰 메신저로 이뤄진다. 바쁠 때는 2~3분 간격으로 계속 울려댄다.
“3층에서 12층으로 이동하는 환자가 있다는 뜻이죠. 다들 바쁘니까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간단한 메시지로 주고받습니다. 환자가 이동하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아요. 수술 전에는 걱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수술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회복실로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이 호출음으로 전달받은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기다렸다가 이송팀과 환자를 태우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겁니다.”
그와 이동하는 중에 문득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주변을 둘러보자 그가 핸드폰을 들어 보인다.
“환자분들을 대해보니 대부분 긴장하시더라고요. 큰일(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어찌 긴장이 안 되겠어요. 그래서 제가 유튜브에서 찾아봤죠. 환자의 회복에 좋은 추천 음악들이 있더라고요. 스무 곡 정도 다운받아 늘 틀고 다닙니다. 힘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고요.”
이보다 환자들에게 더 힘이 되는 것은 그의 응원의 말이다. 강동성심병원 사회사업팀 관계자는 그가 건네는 여러 가지 위로의 말들이 큰 위로가 되고 있다면서, 실제로 많은 환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또 “스마트폰으로 이뤄지는 소통에도 능숙하고 적극적이어서 병원 직원들이 그의 계약 종료를 걱정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김 씨는 환자들과 소통할 때 가장 고려하는 부분이 환자의 감정 상태라고 말했다.
“무척 조심스럽죠. 처음 얼마간은 눈치를 많이 봤어요. 기분 나쁘지 않게 말을 걸어야 하니까요. 이제는 환자의 이동 목적을 잘 알아서 ‘수술 잘될 겁니다’, ‘치료 잘 받으셔요’, ‘수고하셨어요’, ‘쾌유를 빕니다’ 등등 상황에 따른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여유가 있으면 조금 길게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요. 간혹 환자분들이 제게 감사 표시를 할 땐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 나이에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어요.”
그는 자신의 업무가 비록 단순한 일이긴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쉽게 권하기가 어려운 것은 이 점 때문이에요. 엘리베이터의 흐름을 파악해야 하고, 동선도 고려해야 해요. 한꺼번에 들어온 요청을 차례대로 처리하는 게 좋을지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나을지 빨리 판단해야 하고요. 처음에는 고지식하게 요청 들어온 순서대로 처리하다 애를 먹기도 했죠. 지금은 요령이 생겨 운행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잘 해나가고 있어요.”
국가부도의 날에 나온 은행맨
김 씨는 외환위기 전까지는 꽤 잘나가던 은행맨 출신. 당시 5대 은행으로 불리던 곳에서 지점장까지 했다. 그러다 문제의 ‘국가부도의 날’이 도래하면서 실적에 시달리게 됐고 결국 은행을 나와야만 했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본점에서 독려가 심했죠. 예금을 가져오라 하는데, 당시에 저축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결국 25년 만에 은행을 나와야 했어요. 다행히 안전용품을 생산하는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맡아 10년 넘게 일할 수 있었어요.”
그는 젊은 직원들과 즐겁게 소통하고, 스마트폰도 자유롭게 다룬다. 컴퓨터에 해박하고 온라인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선택한 직업도 컴퓨터 수리. PC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에 워낙 관심이 많아 몇 년 전까지도 관련 일을 해왔다. ‘K삿갓’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그의 블로그에는 그가 만든 영상을 비롯해 다양한 정보들이 올라와 있는데, 800여 만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인기다.
“어릴 적 시골에 살았는데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곧잘 불렀어요. 명국환 씨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애창곡이었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부르게 되더라고요. 자연스레 김삿갓에 대한 동경도 생겼고요. 닉네임을 만들 때 그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게 실례 같아 K삿갓으로 지었어요.(웃음)”
그는 강동성심병원에서 나누미동행팀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최근 흥미가 생겨 드나들던 기원에서 지인의 추천을 받은 것이다. 막걸릿값 벌어볼 생각 없냐는 제안에 솔깃했다.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반가웠죠. 병원이 마침 집 근처라서 무조건 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용돈이나 벌어야겠다 했는데, 환자를 자주 대하다 보니 이제는 사명감 같은 게 생겼어요. 제가 옮기는 것은 침대가 아니라 생명이니까요.”
근무시간은 일주일에 30시간.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근무하는데 금요일은 격주로 일한다. 급여는 월 27만 원 정도. 근무시간 내내 앉아 있을 틈 없이 계속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체력적으로 문제없냐고 물었더니 끄떡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아직은 문제없어요.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해서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젊은 사람들하고 일하는 게 즐거워요. 첫 월급을 탄 뒤 친구들에게 기분 좋게 막걸리 한턱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일을 통해 얻은 행복이에요.”
최근 김 씨는 또 다른 공부에 한창이다. 바로 마술. 인터넷에 게재된 영상과 게시물을 통해 여러 가지 마술 기법을 익히는 중이다. 여생에 꿈 하나 더 갖기 위해서다.
“마술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주변 노인복지관이나 노인생활시설을 돌며 공연을 하고 싶어요. 계속 같은 공간에 계시면 적적하잖아요. 유명 마술사에 비하면 보잘것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면 만족할 것 같아요. 병원 일과 마술 공연 모두 체력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해나가고 싶어요.”
Best in New Zealand
영화 속 자연 ‘커시드럴 코브’의 ‘코로만델 반도’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영화로 만들 때 촬영 장소 중 한 곳이 북섬의 ‘코로만델 반도(Coromandel Peninsula)’에 있는 ‘커시드럴 코브(Cathedral Cove)’다. ‘오클랜드’에서 출발하면 삼림공원과 바다를 끼고 가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즐기면서 초록색 자연에 풍덩 빠지게 된다. 다만, 반도의 북쪽은 도로가 좁고 굴곡이 심해 캠퍼밴 운행을 제한하고 있다. ‘커시드럴 코브’로 가는 여정은 푸른색 바다를 옆에 끼고 사암으로 형성된 절벽 위 숲길을 걷는 산책이다.
유리 호수 ‘타우포’와 북섬의 제왕 ‘통가리로 국립공원’
뉴질랜드에는 총 3800개의 호수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호수는 북섬에서 제일 아름다운 ‘타우포(Taupo)’ 호수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 언덕에 올라서면 파란 호수가 보인다.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동시에 여행자들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유리보다 맑은 호수 건너편으로는 설산이 점잖은 선비처럼 앉아 있다. 초록빛 언덕에는 키 작은 야생화들이 바다 같은 호수를 넘어온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춘다. 호수를 옆에 끼고 1번 도로를 타고 가면 ‘통가리로 국립공원’을 만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마운트 둠으로 나오는 나우루호에(Ngauruhoe) 산과 북섬의 최고봉 루아페후(Ruapehu)와 통가리로(Tongariro) 산이 포함된 지역이다. 마오리족의 영산으로 아직도 5~6년에 한 번씩 폭발하는 활화산이다. 호수, 초원, 용암대 등 화산지역에 나타나는 자연의 특징을 공부하면서 여행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고래와 물개의 서식지 ‘카이코우라’
뉴질랜드는 사람이 살기 전까지 토종 포유동물이 박쥐, 고래, 물개 세 종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중 고래와 물개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남섬의 ‘카이코우라(Kaikoura)’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으로 동물의 먹잇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마을 앞바다로 나가면 고래를 비롯해 돌고래와 바닷새를 볼 수 있다. 매년 1월은 물개 산란기여서 해변으로 어미 물개와 새끼들이 모여든다. 이 마을 인구는 약 2000명인 데 물개는 5만~6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빙하의 눈물 ‘데카포’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물이 흘러와 만들어진 옥색의 호수가 ‘데카포(Tekapo)’다. 호수 뒤편으로는 ‘마운트 쿡’과 ‘서던 알프스 산맥’의 흰 봉우리들이 보인다. 이 풍경에 취해 호숫가에 앉아 한참 동안 멍때리기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교회의 좁은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잠깐 동안 숨을 멈추게 한다. 호숫가 돌 사이 루핀의 보라색은 호수의 푸른빛과 어우러지면서 고고하고 이국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옆의 산꼭대기에 있는 ‘마운트 존 천문대’로 가는 길 곳곳에서는 루핀의 군락지가 색과 향기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아스트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파란 하늘과 호수와 흰 산봉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나온 시간의 상념들이 씻겨 내린다. 그래서 이곳을 ‘영혼의 세탁소’라 부르나보다.
별 헤는 밤, 대자연의 ‘마운트 쿡’
남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 ‘마운트 쿡(Mt. Cook)’이다. 본래 이름인 ‘아오라키(Aoraki)’는 마오리족 언어로 ‘구름을 뚫는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마운트 쿡으로 가는 길목에서 서울시 크기만 한 빙하호 푸카키(Pukaki) 호수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가는 길 곳곳에 전망대가 있다. 절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화이트 호스 힐 캠프 사이트’에 도착하면 두 개의 빙하 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후커밸리 트랙(Hooker Valley Track)’이 반겨준다. 만년설에 덮인 산들과 빙하, 호수를 떠도는 유빙들을 볼 수 있는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
이곳은 밤이 되면 수많은 별이 쏟아진다. 어린 왕자의 고향 별인 생텍쥐페리의 별, 별이 되어버린 시인 윤동주의 별, 창문을 통해 본 기억 속 고흐의 별, 순수한 감성을 지닌 양치기 목동의 별인 알퐁스 도데의 별들이 말을 건다.
태고의 신비 피오르드 랜드 국립공원 밀퍼드 사운드
피오르드(Fiord) 지형을 대표하는 남섬의 밀퍼드 사운드(Milford sound)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다. 빙하에 의해 수직으로 깎인, 1200m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뉴질랜드 최대 국립공원이다. 빙하와 온대우림이 만나 비경이 탄생했다. 우림의 3분의 2는 ‘너도밤나무’와 ‘포도 카프 상록수’의 울창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 아나우’에서 ‘밀퍼드 사운드’로 가는 94번 도로 곳곳에서는 기가 막힐 만큼 웅장한 지형과 폭포 등 대자연을 만난다. 크루즈 관광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가슴에 담는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단애와 폭포를 바라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한다.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3대 걷기 명소인 ‘케플러 트랙’·‘루트번 트랙’·‘밀퍼드 사운드 트랙’은 모두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안에 있다.
‘아서스 패스’에서 찍는 로드 무비
남섬 서부에서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 처치(Christchurch)로 가는 73번 도로는 ‘아서스 패스 국립공원’을 통과한다. 캠퍼밴을 비롯한 자동차 여행을 한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가끔 지나가는 화물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천천히 이동한다. ‘아서스 패스(Arthur′s Pass)’에서 만나는 하나하나의 풍광을 음미하다 보면 뉴질랜드 여행의 백미를 맛보게 된다. 잭슨스(Jacksons)에서 다필드(Darfiels)까지의 거리는 140km. 길 위에서 나만의 로드 무비를 찍는다. 이곳에서 만나는 ‘오티라 밸리(Otira Valley)’의 멋진 풍경들과 폭포, 와이마카리리(Waimakariri) 강 주변의 황량함, ‘피어슨 호수(Lake Pearson)’, ‘케이브 스트림 시닉 리저브(Cave Stream Scenic Reserve)’, ‘캐슬 힐(Castle hill)’ 등이 내 로드 무비에 기록된다. 이 길을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비용과 효율 등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할 때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의 가장 적합한 시기는 봄과 가을이다. 힐링과 자유로움,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을 해보자. 최고의 선택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알면 도움이 되는 정보
•뉴질랜드로 여행할 때 이용하는 항공편이 경유할 경우 가능한 한 상하이 푸둥 공항은 피하는 게 좋다. ‘수화물 자동 연결’이 되지 않아 짐을 찾은 후 다시 부쳐야 할 뿐만 아니라 입국, 출국 신고와 검사를 또 받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뉴질랜드는 농업 국가라서 입국할 때 식품에 대한 검사가 매우 엄격하다. 통관할 수 없는 식품류는 아예 가져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통과되는 식품들은 겉면에 라벨을 일일이 붙이고 리스트를 준비해 세관 검사를 받을 때 제출하면 좀 더 편리하다.
•여행 중 뉴질랜드 내 북섬과 남섬을 오가는 ‘인터아일랜더(Interislander) 페리 크루즈선’을 이용할 때 ‘톱10 홀리데이 파크’ 회원은 15% 할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인터아일랜더 크루즈선 홈페이지: www.interislander.co.nz
㈜INL 메일주소: inltours@campervan.co.kr
톱10 홀리데이 파크 홈페이지: top10.co.nz
키위 홀리데이 파크 홈페이지: www.kiwiholidayparks.com
톨로드 비용 납부 사이트: www.tollroad.govt.nz
공주의 젖줄인 제민천을 따라 걸으면서 도심을 여행했다. 골목골목 걷는 내내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문장이 공주를 표현한 듯 느껴졌다. 공주는 풀꽃처럼 소박하고 소탈한 도시였다. 풍경도, 사람도, 음식마저도. 그래서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었다.
걷기 코스
공주시외버스 산성정류소(구터미널)▶ 공산성▶ 산성시장▶ 공주역사영상관(구읍사무소)▶ 풀꽃문학관▶ 충청감영 터(현 공주사 대부고)▶ 카페 ‘반죽동247’과 이미정갤러리▶ 하숙마을▶ 반죽동 당간지주(대통사 터)▶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루치아의뜰▶ 산성정류소 또는 공주역
금강 변 공산성과 산성 아래 산성시장
공주 산성정류소에 하차하면 공주의 자랑인 공산성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터미널에서 5분 정도 걸으니 공산성 매표소에 닿는다. 공산성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을 때 금강 변 야산에 지은 산성이다. 산 능선에 조성한 성곽이 물결처럼 울렁울렁 춤춘다. 성곽의 등을 타고 공산성을 한 바퀴 돌 수 있으며, 90분 남짓 걸린다. 성곽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를 통과해 성곽에 오르자마자 시원한 강바람이 반긴다. 바람을 얼싸안고, 발아래로 흘러내리는 성곽과 반짝이는 금강, 나지막한 공주 시가지를 여유롭게 굽어본다. 오랜만에 탁 트인 풍광을 마주하니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산성을 일주한 뒤, 다시 터미널 앞을 지나 산성시장으로 향한다. 공산성 아래에 있어 산성시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82년 역사를 지닌 공주 대표 시장이다. 그만큼 규모가 크다. 5개 구획마다 갖가지 생필품과 식자재, 식당들이 즐비하다. 특히 요기할 만한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맛 좋기로 전국에 소문난 ‘부자떡집’의 쫄깃한 떡, 줄 서서 먹는 ‘대박난찹쌀호떡’의 달달한 호떡, 가끔 생각나는 ‘단골닭강정’의 매콤달콤한 닭강정, ‘청양분식’의 잔치국수, ‘간식집’의 잡채만두 등이 있다. 대부분 소박한 음식이다. 맛도 그렇다. 공주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궁금하다면 하나씩 맛보는 것도 좋겠다.
풀꽃 시인 나태주와 풀꽃문학관
시장통을 벗어나면 이내 공주역사영상관(등록문화재 제443호)에 닿는다. 1923년에 지어진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 건물로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섞어 쌓아 올린 근대건축물이다. 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공주 역사를 담은 디지털 영상기록물을 전시해두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목조 건물 한 채가 보인다. 1930년대에 지은 적산가옥을 개조해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야생화가 오종종히 피어 있는 뜰과 오래된 목조 건물의 조화가 멋스럽다.
나태주 시인은 금요일에만 문학관을 방문한다. 문학관 앞에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세워놓아 문학관에 있음을 알린다. 문학관 내부는 다실과 강연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두 다다미방 형태다. 벽면 곳곳에 나태주 시인이 쓰고 그린 시화가 걸려 있다. 마침 나태주 시인이 다실에서 방문객들이 가져온 시집과 엽서에 정성껏 시를 써주고, 덕담을 건네는 중이다. 다실에서 웃음소리가 끓이지 않는다.
풀꽃문학관을 내려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정문이자 옛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앞을 지난다. 으리으리한 문루를 통과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다. 제민천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지인이 추천한 카페 ‘반죽동247’에 들른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꽤 많다. 소문대로 커피 맛이 좋다. 시원한 카페라테 한 잔을 홀짝 비우고, 카페 2층에 있는 이미정갤러리 구경에 나선다. 공주 출신 서양화가 이미정 대표가 지역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종종 기획전을 여는 공간이다. 방문할 때마다 수준 높은 작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유학생들의 제2의 고향, 제민천 변 하숙마을
제민천 대통교 앞에 이르자 ‘하숙마을’이 보인다. ‘하숙마을’은 옛 약국과 옆 건물 4채를 개조해 한옥 숙박시설 및 마을 안내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주와 하숙마을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공주는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명문으로 알려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과 공주사대 부속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주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학교 주변에 하숙집이 많이 생겨났다.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하숙집 주인은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숙집을 물려주거나 같은 하숙집에 산 인연으로 부부가 되어 부부 교사가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단발머리 여고생과 까까머리 남고생들이 수없이 거쳐갔을 비좁은 하숙집 골목길을 거닐며 당시 풍경을 상상해본다.
하숙마을 옆, 사대부고 학생들이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는 중앙분식을 지나 반죽동 당간지주를 만나러 간다. 동네 한복판 작은 쉼터에 527년(백제 성왕 5년) 백제 최초로 지어진 대통사의 당간지주(보물 제150호)가 홀로 서 있다. 당간지주 옆에는 1903년에 설립된 공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으로 유명하다. 유관순 열사와 조병욱 박사가 이 교회에 다녔다. 지금은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후미진 뒷골목을 밝히는 등불들
다시 제민천으로 돌아와 대통교를 건넌다. ‘백성을 구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민천은 공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유유히 흐른다. 주민들이 대통교 그늘에 앉아 다리를 담그고 더위를 식힐 만큼 수질이 좋다. 제민천 변 건물 담벼락에는 옛 하숙마을 풍경 사진과 나태주 시인의 시, 하숙집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전시돼 있다. 담벼락을 구경하며 한옥 찻집 ‘루치아의뜰’로 향한다. ‘맛깔’식당과 ‘이안게스트하우스’ 사이의 터널 같은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다. 파란 대문 너머로 야생화가 만발한 뜰과 한옥 한 채가 반긴다. ‘루치아의뜰’은 차 문화 전문 사범인 아내 루치아와 쇼콜라티에인 남편 요한이 운영하는 찻집이다. 보이차, 홍차, 커피, 디저트를 판다. 폐허나 다름없던 집과 골목을 부부가 살뜰히 가꾼 덕에 공주 명소로 거듭났다. 도시 재생 성공 사례로도 손꼽힌다. 공간 못지않게 루치아가 차려내는 찻상 또한 작품처럼 아름답다. 찻상을 바라보고, 차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공주에서 루치아와 요한 부부처럼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를 많이 만났다. 공주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조연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서울에 사는 그는 공주 사랑이 대단하다. “공주는 관광객들을 끌거나 관광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 치장하지 않아서 좋아요.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옛날 시골 동네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어 맘이 편안해져요. 이게 공주 원도심의 매력이죠.”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면 그처럼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 같다.
주변 명소 & 맛집
단골들이 추천하는 ‘중앙분식’
제민천 대통교 앞에 있는 중앙분식은 즉석떡볶이, 쫄면, 비빔만두 등을 판다. 떡볶이 1인분을 주문해도 커다란 냄비에 2인분은 됨직한 양을 내놓는다. 쌀떡, 쫄면과 당면사리, 양배추, 어묵을 듬뿍 넣어준다.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졸여 먹어야 제맛이 난다. 맛의 비결은 안주인장이 만든 특제 소스에 있다고. 학생 때부터 즐겨 찾던 단골,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올 8월 중순 공주우체국 옆으로 이전한다.
공주시 제민천1길 67, 041-856-1497, 10:30~19:00, 월요일 휴무
전국에서 소문난 ‘부자떡집’
1982년 산성시장 안에 창업한 떡집이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당일 생산·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삼는다. 작업장이 공개돼 있어 제작 공정에 대한 신뢰감을 준다. 영양떡인 부자떡이 대표 메뉴이며, 헤이즐넛 호두설기는 이곳에서만 파는 제품이다. 공주의 특산품인 밤을 넣어 만든 알밤찹쌀떡 세트가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쫀득한 찹쌀떡 안에 밤이 통째로 들어 있다. 부자떡집의 떡은 달지 않아 부담 없다.
공주시 용당길 11, 041-854-5454, 08:00~19:00, 연중무휴
추억을 부르는 잡채만두집 ‘간식집’
산성시장 내 분식집이다. 잡채만두, 김밥, 떡볶이를 판다. 대표 메뉴는 잡채만두. 통통한 만두 안에 당면이 가득 들어 있다. 대구 납작만두의 통통만두 버전 같다. 만두피와 당면만으로 이루어진 만두가 특별히 맛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공주 사람들이 한 봉지씩 사간다. 간장 대신 초장을 찍어 먹는 것이 독특하다. 만두 맛보다 만두를 구울 때 나는 자글자글 소리가 정겹다.
공주시 산성시장1길 46, 041-852-4812, 화요일 휴무(1, 6일 장날 제외)
담백한 육수가 일품 ‘고가네칼국수’
공주는 예로부터 면 요리가 발달해 칼국수집이 많다. 고가네칼국수는 칼국수를 상에서 끓여 먹는 방식이다. 한우 사골, 양파, 무, 파, 닭발 등을 넣어 담백하게 끓인 육수에 각종 채소와 우리 밀 면을 넣어 익힌다. 직원이 우리 밀 면은 더디 익는다고 알려준다. 고가네칼국수는 저염식 식단을 추구해 칼국수 맛이 심심한 편이다. 배추겉절이와 섞박지로 간을 맞춰 먹는다. 1인분도 주문할 수 있다.
공주시 제민천3길 56, 041-856-6476, 10:00~21:30, 일요일 휴무
걷기 Tip
❶ 4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금·토요일에 산성시장에서 공주 밤마실 야시장이 열린다.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한다.
❷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주말에 공산성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
마을 뒤로는 신록이 사태처럼 일렁거리는 큰 산. 앞쪽엔 물고기들 떼 지어 노니는 냇물. 보기 드문 길지(吉地)다. 동구엔 수백 살 나이를 자신 노송 숲이 있어 오래된 마을의 듬직한 기풍을 대변한다. 겨우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였으니 한눈에 살갑다. 마을 여기저기로 휘며 돌며 이어지는 돌담길은 야트막해 정겹다. 이 아늑한 산촌에 심히 고생을 하는 농부가 있다.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그는 특별한 준비 없이 귀농했다. 귀농을 좀은 만만하게 봤을까? 혹은, 매사 서둘러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배짱의 소유자일까?
물론 그가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니다. 내려오라! 연로한 부모님께서 먼저 사인을 보내왔더란다. 그럴 즈음 그의 건강도 좋지가 않았다. 해서, 으라차차, 가자, 고향으로 내려가자! 그렇게 결연히 부르짖으며 아내와 함께 귀향을 했던 모양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은 산촌의 포실한 경관과 공기를 일용한 양식처럼 취하며 살아온 지 어언 5년. 박병각 씨(63, 영농조합법인 알토팜 대표)의 낯빛은 들판에서 타 구릿빛이다. 몸엔 땀내가 배었으니 그의 일상적인 근로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직감할 수 있다.
도시에선 갖가지 직업을 편력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 씨는 한때 교수생활을 했다. 기업체 중견간부로도 일했다. 돈을 실컷 벌겠다고 맘먹고 통신장비 관련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지. 비록 꽃을 피우진 못했지만. 귀농 직전까진 번역 사업을 했다. 박병각 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재에 밝지 못한 사람이다. 몇 번의 기회가 왔으나 어여삐 머물러주지 않았단다. 그러나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니 갖가지 노하우가 실하게 쌓였을 것이다. 빛은 빛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질주의 돛대 역할을 하는 법. 때로는 순항으로, 때로는 난항으로 건넌 세상이 그에게 응분의 기량을 증정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와 몸에 축적된 실력을 다 끌어올려 농사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이 아직 방문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저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은 탓일까? 농사는 제자리걸음이다.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테지. 애초 “거의 빈털터리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귀농 5년 사이에 뭐 별반 늘거나 불어난 게 없는 모양이다. 싱글벙글 낙천적인 미소가 얼굴에 피부처럼 붙어 있지만, 5년간 들판에 쏟은 땀방울을 생각하면 내심 긴장감이 들솟을 게다.
“귀농할 때 별다른 준비 없이 내려왔어요. 우선은 건강부터 챙기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그럼에도 첫해부터 농사를 지은 건 부모님께서 경작하시던 농토가 있어서였어요. 밭 2000평에다 참깨를 심었어요. 기대치만큼의 수확이 나오질 않더라고. 현재는 규모가 늘어 1만 평입니다. 콩을 주 작물로 하고, 찰수수와 레드비트도 재배합니다. 양봉도 하고요. 그러나 타산을 맞추기는 여전히 힘들어요.”
“적자를 보는 거예요?”
“당연하죠. 초보 농부의 자세로 그저 열심히 노력하지만 농사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사실, 귀농 5년 차인데도 적자를 본다면 얼른 떠나는 게 현명해요. 하지만 저에겐 희망이라는 게 있어요. 나름 최선을 다해 농사를 하기에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낙관, 그런 거.”
“부진한 농사, 그건 사전 준비를 소홀히 한 사필귀정 아녜요?”
“그런 측면도 있죠.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요즘 제가 남들에겐 준비를 철저히 해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농사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봉착하게 되더군요. 그 무엇보다 기후 조건에서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농부의 능력보다 하늘과 땅의 조력이 더 중요한 변수라는 거. 농부가 직접 유통에 나서야만 하는 구조도 벽으로 다가와요.”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
대지를 일구는 농부란 시를 쓰는 시인과 다를 바 없다. 방울방울 진땀 뿜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무심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영감을 짜내느라 머리칼을 쥐어뜯는 시인처럼, 농부 역시 비와 바람을 주재하는 하늘의 협찬을 간절히 기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농부의 하늘은 더 절대적이다. 더위와 추위와 서리, 가뭄과 홍수와 태풍, 이 모든 자연의 순환과 횡포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게 농사이지 아니한가.
“농부란 ‘숭고한 신앙인’에 가깝다고 봅니다. 처음엔 몰랐으나 농사를 지으며 그걸 알았어요. 시골 사람들이 아는 게 농사뿐이라 그냥저냥 농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투철한 가치관이 아니고선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도 기후의 혼란과 변덕 앞에선 속수무책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제 겨우 5년. 정착까지는 아직 멀었어요. 아마도 10년은 흘러야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끙.”
“건강은 좋아지셨고?”
“농사일이 워낙 많아서 건강이고 뭐고 돌볼 틈이 없는 것을.(웃음)”
“농림축산식품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귀농 5년 차 농가의 평균소득이 3898만 원이라고 해요. 이거 믿을 만한 소식일까? 제가 만난 귀농인들은 흔히들 고전하고 있었어요.”
“정부의 공식 통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겠죠. 그러나 가처분 소득이 아니고 매출액 기준의 산정이라 봅니다.”
“선생의 농사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예요. 만약에 말이죠, 누군가 귀농을 하려 한다면 뜯어말리시려나?”
“흠. 텃밭농사 정도가 이상적이죠.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사실 위험합니다. 전적으로 농사 하나에 생계를 걸 경우엔 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시행착오의 연속일 수 있으니.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할 일도 아녜요. 귀농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연의 방식에 부합하는 신념으로 산다면 만족을 누릴 수도 있죠.”
“자연의 방식이라는 건 순응의 태도? 있는 그대로 자족하는 거?”
“제가 아무런 준비 없이 귀농했지만 한 가지는 가슴에 새기고 내려왔어요. 비우자! 이제부턴 비우고 살자! 그런 마음가짐 말이죠. 도시에서 가졌던 과욕이나 비즈니스 마인드 대신 빈 마음으로 살자는 거. 한마디로, 돈벌이 목적보다는 비우려고 귀농한 겁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과 달라 내공이 필요하다. 흔히들 마음 비우기에 관심을 두지만 비울수록 마음은 허기로 보챈다. 매사 비우려는 건 어엿한 지향이지만, 진정 비우기도 전에 고프고 슬퍼 떨리는 게 삶이지 않던가. 먹고사는 일의 고역과 경쟁은 거의 항구적인 숙명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진한 농사는 이 비우기를 쉬 구현하게 하는 기묘한 견인차란 말인가? 박 씨는 농사 부진에 그다지 조바심치지 않는 것 같다. 들어오는 게 없으니 굳이 채울 것도 없으며, 따라서 비우고 살고자 하는 신념을 관철하기가 오히려 용이하다는 투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치레가 없어 푸근한 농가주택
귀촌이든 귀농이든, 그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기에 모두들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생판 낯선 객지보다는 가급적 연고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농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귀농자의 53%, 귀촌자의 37%가 고향, 또는 사소하나마 연고 있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연고 덕분에 적응과 정착이 더 수월할 거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연고지로 이주하더라도 크고 작은 애환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박 씨는 이웃들에게 그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예 밝히질 않았다. 자칫 오해와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서.
“고향이라는 단 하나의 근거를 앞세워 귀농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중요한 건 어디로 내려가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충분히,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이에요. 만약 돈벌이에 목적을 둔 귀농이라면 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죠. 일테면 선택한 작물의 재배조건, 생산한 농산물의 유통 환경 등을 심도 있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모저모 의지대로 살기 쉽지 않은 게 시골이라 보면 됩니다. 이건 제 경험에서 우러난 얘기들이에요.”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말씀?”
“바로 그거! 저는 도시가 싫었어요. 힘겨웠어요. 그렇다면 도피성 낙향일까? 그렇게 물으실지 모르지만, 기꺼이 내려왔으니 탈출이라 해두죠. 충분한 준비보다는 도시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생각이 쏠려 있었어요.”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두 가지에 놀랐어요. 하나는 수려한 마을 풍치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께서 농약을 쓰지 않는 농사를 처음부터 고수해왔다는 점이에요. 일반 관행농법보다 몇 곱절 더 어려울 무농약 농사에 어떻게 착안하셨죠?”
“아하. 당연하고도 간단한 이유가 있어요. 내 가족들이 먹을 음식에 농약 성분이 섞인다면? 그런 자문을 하면 답이 빤할 수밖에. 남의 가족들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작물이 병들어갈 때 약은 필요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화학적 농약 대신 자연에서 얻어온 재료들로 만든 농약이나 퇴비를 사용해요. 공장 농약 외 대안이 없다면 이미 농사를 포기했을 겁니다.”
“괴산군 귀농귀촌인 협의회장을 맡으셨죠? 귀농귀촌 실태에 환하겠어요. 실패 사례엔 어떤 게 있죠?”
“대체로 귀농이 아닌 귀촌 케이스가 만족도가 높습니다. 실패자엔 두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덜커덕 귀농했다 망치고 돌아가는 경우, 둘째는 적막한 시골에서 우울증을 얻고 쓸쓸히 떠나는 경우.”
대책 없는 전원 판타지를 꿈꾸는 그대여, 그냥 도시에 사시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귀농귀촌의 실상이 꽤나 알려진 요즘엔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맹목적이거나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냅다 시골로 들이닥치는 우행은 생고생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니까. 문제는, 인류를 구원할 듯한 기세로 머리를 싸맨 준비와 연구를 선행하더라도 허무한 귀결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일 테지. 특히나 어려운 건 역시나 주민과의 융화 문제.
“시골의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듯 인심도 변했어요. 합리성이 결여된 시골 분들이 많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합리나 법리보다는 마을의 관습적 불문율을 중시해요.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죠. 그러나 그걸 불편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텃세를 메시지로, 우리의 규율 안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로 읽어야 해요. 이건 불변의 풍습이에요. 일단 불문율을 존중, 선선히 마을에 녹아들어간 뒤 바꿀 걸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게 순서이지 않겠어요?”
그의 거처는 오래되고 소박한 농가주택이다. 꾸밈이 없어 담백하다. 치레가 없어 푸근하다. 앞뜰과 뒤란엔 향이 번진다.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둬서다. 항아리들은 불룩한 배통을 두드리며 저희들만의 밀어를 속닥거린다. 지붕 위를 가로지르며 노래하는 가수는 박새구나.
아무런 결함이 없는 평화. 집 안팎에 그런 기운이 남실거린다. 밤이면 창으로 들이친 별들이 부부의 침실을 염탐하려나? 박 씨에 따르면 부부가 각방을 쓰는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그는 농사에 시달린 나머지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아내의 손가락 열 개에 송구스럽다. 농사엔 여자들이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다. 그는 그게 또 미안하다. 아마도 그는 다정다감으로 아내를 자주 살살 녹일 것 같다. 하지만 아니란다. 밖에서만 다정한 처신을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 최선희 씨(63)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기와는 다른 남편이에요. 도무지 제 말을 들어주질 않아요. 양봉을 만류했으나 기어이 시작하는 식으로요. 이젠 아예 단념하고 삽니다.(웃음) 귀농 얘기 좀 할까요? 농사 경험 없이 덤벼들어 참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지요. 한마디로 아직은 답이 없어요. 그러나 이젠 도시에서 다시 살기 싫어졌어요. 시골에만 있는 맑은 공기와 순수한 자연, 손수 기른 깨끗한 먹거리들.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이미 개선된 걸 느껴요. 게다가 부부가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연풍성지가 가까이에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쩌면 모든 게 축복이죠.”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그 사소한 축복들. 고달픈 일상의 굽이에서 축복을 느낀다면 그건 잘 산다는 증빙이겠지. 삶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귀농은 아찔한 모험일 수 있지만, 삶은 단 한 번 주어진 복주머니이겠고.
박병각 씨가 주는 귀농 준비 Tip
•귀촌인이야 집 사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귀농엔 고난이 많다. 사전 준비를 단단히 하자. 돈만을 목적으로 삼기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급자족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가치관을 확고히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활자금은 미리 비축하고 귀농하자. 아울러 극도로 지출을 자제하자. 자금 회전이 안 될 경우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봉착하기 쉬운 게 귀농이다.
•굳이 집 사지 말라. 컨테이너 하나로 시작하는 게 좋다. 농토도 사지 말라. 묵은 전답을 빌리면 된다. 비싼 농기계도 살 필요 없다. 임대하면 된다.
•반드시 부부 합의로 함께 내려오는 게 옳다. 만에 하나, 가족공동체가 깨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어느 땅은 닿는 순간 전혀 다른 행성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슬란드야말로 이렇게 불러 마땅한 야생의 땅임에 틀림없다. 빙하에서 내려온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온종일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선 목장에서 꼬물꼬물 뛰어노는 양떼라도 만나게 되면 새삼 생명의 강인함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는 곳. 다시 차를 몰다가 시원하게 내리꽂는 폭포 옆으로 러브마크라도 날리듯 선명한 무지개를 보노라면 살아서 이곳에 닿은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낯선 행성을 여행하는 최적의 방법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최적의 방법은 자동차를 빌려 1번 링로드(ring road)를 따라 섬을 둥글게 한 바퀴 도는 것이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일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만으로도 수도 레이캬비크에 숙소를 두고 핵심 여행지가 몰려 있는, 이른바 골든 서클(golden circle)을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다. 겨울엔 많은 눈 때문에 길이 끊기는 일이 잦지만 상대적으로 날씨가 온화한 7~8월에는 링로드 자동차 여행은 물론 다양한 버스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빙하가 떠다니는 요쿨살론(Jokulsarlon)과 간헐천 게이시르(Geysir), 황금폭포라는 의미를 지닌 굴포스(Gullfoss), 폭포 뒤를 트레킹할 수 있는 셀랴란드스포스(Seljalandsfoss), 선명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스코가포스(Skogafoss)까지 남서쪽에 주요 명소가 집중되어 있다.
빙하가 떠다니는 신비로운 풍경 요쿨살론
겨울이면 온통 흰색 세상이 되는 아이슬란드는 여름엔 한 번도 세상에 내보인 적 없는 듯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프로메테우스’, ‘왕좌의 게임’, ‘인터스텔라’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된 아이슬란드는 “지구의 심장부로 통하는 현관”, “신이 세상을 만들기 전에 연습 삼아 만들어본 곳”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신비함을 자아내는 나라다. 여름인데도 거친 바람과 낮은 온도는 패딩을 입고도 옷깃을 여미게 했다.
검은 모래 해변과 처음 보는 땅들, 붉은 첨탑의 교회들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하나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얗다 못해 차라리 푸른빛이 도는 빙하들 사이로 샤프란색 승복을 입은 승려가 유유히 사라져간 요쿨살론은 꿈속인 듯 아련했다. 빙하에서의 의식 중 하나인, 위스키에 빙하 조각을 넣어 마시는 맛은 상상 그 이상으로 짜릿했다. 그래서일까? 영국 시인 위스턴 오든(Wystan Hugh Auden)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아이슬란드에 관심을 갖는다.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구수 10만의 힙한 수도, 레이캬비크
총인구 34만 명 중 약 10만 명이 모여 사는 레이캬비크는 예쁜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 서점, 레코드 가게가 정갈하게 모여 있는 아티스틱하고 힙한 도시다. 아이슬란드에서 유일하게 도시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레이캬비크조차 한산하기 짝이 없어서 이 나라 말에 ‘북적인다’라는 단어가 있기나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중세의 성처럼 우뚝 솟은 할그림스키르캬(Hallgrmskirkja) 교회는 레이캬비크의 상징으로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형형색색의 집과 푸른 바다의 조화로움은 잠시나마 시력이 좋아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쏘다닌 탓에 문득 시장기가 돌아 들어간 현지 음식점 카페 로키(Loki)에서 용기를 내어 이 나라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말린 생선포와 버터 바른 딱딱한 호밀빵, 삭힌 생선요리는 실패한 모험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도전해봤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배고픔을 안고 숙소로 향했다. 레이캬비크의 숙소들은 쾌적함을 자랑하는데
8명이 자는 게스트하우스마저 조용했다. 이곳에선 자는 사람 또는 책 읽는 사람뿐이어서 발걸음 소리가 안 들리도록 걸어야 했다. 교류를 원한다면 로비를 이용하라고 안내 문구가 있었다. 성수기인 여름엔 비싼 물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몰려오므로 예약하는 것이 좋다.
천국에 온 듯한 온천 체험, 블루라군
아이슬란드에 왔다면 아무리 비싸도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신선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다는 야외 온천 블루라군이 그곳이다. 5000㎡에 달하는 이 거대한 야외 온천은 구름인 양 뽀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뒤덮여 있어 마치 천국에 온 듯한 환상을 일으키게 했다. 평소 인증 숏을 우습게 여기는 여행자들도 핸드폰과 카메라를 손에 들고 일생일대의 추억을 저장하느라 바쁘다.
발바닥에 닿는 하얀 진흙 실리카 머드는 천연 무기염이 풍부해 피부병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종일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니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지구의 근원에서 올라오는 야생의 기운까지 듬뿍 받는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검은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북극광 오로라까지 만난다면 행운은 당신 것임이 틀림없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맹문재 시인이 한평생 민족의 통일을 노래한 故 김규동 시인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서 안방을 둘러보다가 저는 잠시 흠칫했습니다. 선생님의 침대 머리맡에 낡은 증명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선생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든 살이 넘도록 어린 아들이 되어 밤마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7년 3월 초 즈음이지요. 어느 날 밤늦게까지 학교 연구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박스 하나가 택배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가 하며 박스에 적힌 주소와 성함을 보니 바로 우리 문단의 원로이신 김규동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이전에 한 번도 선생님을 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했습니다.
박스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박스 안에 김기림 시집 ‘바다와 나비’와 ‘태양의 풍속’을 비롯한 여러 권의 고서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도 한 통 눈에 띄어 저는 흥분한 채 읽어보았습니다.
맹 교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좋은 시와 평론 올해는 더 많이 쓰십시오.
서가에 있던 冊 몇 권 보내드립니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태양의 풍속(문고본),
맹 교수가 갖고 계십사 하고 보냅니다.
태양의 풍속은 원래 호화 양장본이 있었지만 이북에 두고 나왔습니다.
문고본이나마 보존하시옵소서.
함께 구간들이지만 바쉬랄르 2권(일역본), 샤르트르(문학이란),
리쳐즈의 불확실의 명상을 보냅니다. 학문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리쳐즈는 기림 선생이 특히 강조해서 말씀하던 비평가(과학적인)였습니다.
옛날 冊 선물로 드려서 어떨까 싶군요. 건필하시옵소서.
며칠 뒤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아주 따스한 미소로 맞아주시고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조곤조곤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모두 귀한 말씀들이어서 저는 가슴속에 새겼습니다. 그렇게 스승으로 모신 뒤 저는 이 지면에 다 담을 수 없는 선생님과의 추억들을 갖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영어 및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김기림 시인을 만나 시인의 꿈을 키웠지요. 경성고보를 졸업한 뒤 연변의대에 진학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망을 접을 수 없었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학부에 입학했지요.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문학을 강요함에 따라 문학의 자유를 위해 당시 남한에 거주하던 김기림 시인을 찾아 교복을 입은 채 월남했지요.
선생님께서는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강’ 등이 입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한국전쟁의 피란지인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해 모더니즘 시 운동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군사독재 상황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리고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55년 시집 ‘나비와 광장’을 간행한 뒤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내셨는데, 마지막 작품을 이 지상에 남기면서 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등불이 언제까지나 희미한 적 없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의 길 걸어왔지요
청춘은 알지 못할 위대한 길
두고두고 생명을 괴롭혀 왔습니다
생명은 너무 길었지요
시인이 왔습니다,
불운으로
그가 하늘과 구름 사이로 노래해 주었습니다
나는 시인을 따라 밤길을 걸었지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은 하나의 길
그 고독이 나에겐 그리운 종소리였습니다
시인이여
안녕
-‘인사 – 맹문재 씨에게’ 전문
선생님,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고바우’ 집에서 사모님과 함께 점심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시를 쓸게요.
함북 종성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는 나비는
지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로막힌 철조망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 맹문재, ‘광장의 나비’ 중
맹문재 시인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가 있고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등 여러 권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릴 때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 눈물의 언덕을 / 피ㄹ 닐니리.
한하운 시인의 애달픈 시 ‘보리피리’다. 소록도를 다녀오고 나서 비로소 그 고독과 고통을 백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 채 시를 읊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나병으로 한 맺힌 일생을 살아간 분들의 절망을 비로소 마음속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다.
전남 고흥에서 소록도 가는 바다는 평화롭기만 하다. 해안 울창한 솔 숲 옆으로 도로가 길게 나 있다.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뿐인 한센인들의 면회가 먼발치로 떨어진 채 이루어진다. 행여 바람결에 병이 옮겨질까 봐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고 한다. 부모형제여도 손잡아 볼 수도 없고 서로의 숨결 한번 느껴보지 못하던 아픔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애환 어린 탄식의 장소란 뜻으로 수탄장(愁嘆場)이다.
일생을 소외와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편견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병원 치료도 못 받고 부모형제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간 곳이 소록도다. 103년 전부터였다. 한때는 6000여 명 정도 수용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500여 명의 환우들이 남아있다.
그 세월 소록도 병원의 나무는 자라서 울창해졌다.
그분들의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을 건물들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검문소를 지나 수술대와 검시대, 세척실, 감금실, 시체 해부실, 형무소를 돌아보며 처절했을 그 시간들을 짐작해 본다.
밖으로 나오면 6000여 평의 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조성된 곳이다. 환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한으로 만들어진 공원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다. 편백나무, 소나무, 향나무, 철쭉과 종려나무, 장미터널 등 각종 꽃과 나무, 그리고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 위에 그들의 아픔을 표현한 시화가 줄지어 서있다.
공원 중앙에 하얀 탑이 하늘 높이 눈부시다.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인 한센병을 발로 밟고 박멸하듯 창으로 찌르는 형상이다. 그 아래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있다. 옆면으로는 1963년 당시 근로봉사단이었던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의 대학생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것이 소록도의 랜드마크 구라탑(救癩塔)이다. 말 그대로 나병에서 구함을 얻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탑이 있다.
1962년 소록도의 나환자를 돌보러 오스트리아에서 멀고 먼 이 땅으로 온 마리안과 마가렛 두 수녀님의 공적비다. 40년이 넘도록 맹목적인 헌신으로 수많은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았던 분이다.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봐 편지 한 장 남기고 40년 전에 들고 왔던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고향으로 떠났다고 한다. 현재 두 수녀님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을 위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소록도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지켜주고 덮어주지 못한 세월을 산 분들에게 가졌던 편견의 벽이 부끄럽다. 그들이 소록도에 갇혀 산 시간에 편안히 살아서 미안하다.
전남 고흥의 끝자락인 녹동항 앞바다에 있는 아기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은 작은 섬 소록도(小鹿島), 지금은 그 섬의 생명력을 닮은 푸르른 등나무가 붉은 벽돌담을 가득 덮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