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놀자 계열사 여행대학(대표 강기태)이 내달 7일까지 ‘시니어 꿈꾸는 여행자 과정’ 2기 수강생을 모집한다.
60~70대 시니어들 대상의 여행문화 교육 프로그램인 시니어 꿈꾸는 여행자 과정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하고 한국관광협회중앙회와 야놀자 여행대학 주관한다. 행사는 우리 사회에도 점차 여가생활을 능동적으로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가 늘어남에 따라, 중장년층이 자유로운 여행 설계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기획됐다.
수강생들은 7주간 총 8회에 걸쳐 전문 여행가들의 수업을 듣게 된다. 전담 멘토에게 자신의 여행계획서에 대한 첨삭 및 조언도 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 짠 프로그램으로 강사 및 동기들과 함께 자유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과정을 모두 마치면 수료증이 발급되며, 졸업여행과 여행대학 수강권이 무상 지원된다. 2기 과정은 2월 14일부터 3월 28일까지 진행한다.
강사진으로는 이문재 경희대학교 교수 겸 시인, 이영관 순천향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 겸 여행작가, 강기태 여행대학 총장 겸 트랙터 여행가, 문요한 정신과 의사 겸 여행작가 등 사회 각계 전문가가 참여한다.
60세 이상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지원동기, 참여 의지 등을 심사해 기수마다 30명씩 선발한다. 참가 신청은 여행대학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으로 접수할 수 있다. 합격자에게는 내달 11일 개별 연락 예정이다.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 전시회가 네 개나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뉴욕의 힙합 문화에서 발아한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 낙서화)와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는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 미술) 작가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단체전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서울숲 아트센터의 ‘반항의 거리, 뉴욕’이 있고, 개인전으로는 DDP의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잠실 롯데뮤지엄의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가 있다.
1980년대부터 활동한 이 전시회 작가들이 1950년대에 태어났으니 같은 세대인 시니어가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나와 같은 연대에 태어난 미술가들은 젊은 시절 어떻게 예술혼을 싹 틔웠을까. 이런 호기심만으로도 전시장을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새로운 세대 미술이 이스트 빌리지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는 여기다”라고 외치게 했던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2019년에 돌아보는 감회가 새롭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공부도 해보니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예술가들 중에는 끔찍한 환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작가가 적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간 이유는 뭘까? 나는 젊은 시절 무엇을 꿈꾸고 행동했던가. 부끄러웠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감상안이라도 있다는 걸 감사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전은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 미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 26명의 75점 작품, 73권의 ‘이스트 빌리지 아이’ 잡지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뉴욕 맨해튼 동남쪽에 위치한 이스트 빌리지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 학생, 히피족이 모여 살았다. 자연스럽게 뉴욕의 반체제 문화 중심지, 예술운동 발생지가 되었고 항의와 폭동의 장소이기도 했다. 1980년대의 뉴욕 이스트 빌리지는 무분별한 재개발과 그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슬럼화되었다. 버려진 거리와 건물이 많았지만 가난한 젊은 작가들이 들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영화, 퍼포먼스, 비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유와 패기로 ‘쿨’하고 ‘힙’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뒷모습에는 고단한 삶과 그늘이 있었다. 이스트 빌리지 예술가들은 계급·성별·인종 차별과 마약, 빈곤, 범죄, 동성애, AIDS 등의 사회적 문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레이건 정부의 보수 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확립에 발맞춘 예술의 상업화와 보수화에 자신들의 예술작품으로 저항했다는 것이 현재의 평가다.
‘19세 이하 관람 불가’라는 과격하고 논쟁적인 작품이 포함되었지만, 어느 전시장이든 그러하듯 흰 벽면에 질서 정연하게 전시된 작품으로,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분위기를 읽어내기는 힘들다. 또 하나,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망라하는 회고전이 아니기에 시대와 작가의 일면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상주의’ ‘야수파’식으로 특징지을 수 없는 작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면 좋겠다. 이 글에서는 일찍 세상 떠난 작가 7명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해본다.
1)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년)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려준 만화를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춘기에는 기독교에 심취했고, 15세 이후에는 록 음악과 마약, 섹스에 빠졌다. 뉴욕 시각예술학교에서 케니 샤프,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이스트 빌리지 낙서 화가들을 만나면서 낙서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당시 주류 미술계에 편입되지 않은 젊은 예술가들은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퍼포먼스와 전시회 등을 열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는데, 이러한 이벤트는 주로 클럽에서 일어났다. 키스 해링은 그중 대표적 클럽인 ‘클럽 57’의 큐레이터로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32세에 에이즈로 사망할 때까지, 매해 개인전과 기획전은 물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공공미술, 기업과의 협업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키스 해링은 간결한 표현으로 드러내는 무거운 메시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고급 예술이라 고집하는 건 자기 과시를 위한 허튼수작”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그라피티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고유 표식인 ‘태그(tag)’를 적극 활용했다. 기어 다니는 아기, 비행접시, 하트 등이 그것이다. 단순하고 밝고 가벼운 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기성 미술계와 보수 정권 비판, 퀴어, 에이즈, 마약, 인종 차별, 반핵·반전에 이르기까지 작품 주제가 광범위하다. 말풍선이나 그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제목을 달지 않아 관객들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했다.
2) 아치 코넬리(Arch Connelly, 1950~1993년)
도예를 전공했고, 10년 남짓 작가 생활 후 미국 전역을 덮친 에이즈로 43세에 사망했다. 에이즈로 사망한 수많은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그는 2012년 회고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코넬리는 화려하지만 싼 재료(가짜 보석, 작은 꽃다발, 장식 조각, 반짝이, 동전)를 이용해 작업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재료는 사내답지 못한 ‘호모’의 것으로 여겨졌다. 잡지에서 잘라낸 벌거벗은 남성 모델 사진과 게이 섹스 사진을 싸구려 보석으로 장식하는 콜라주 작품 등 ‘남성적’으로 간주된 몸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을 격하시키는 작업도 하며 규범적인 성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키스 해링, 데이비드 워나로비치, 마틴 웡 등과 함께 이스트 빌리지 게이 예술가 그룹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제도권 예술의 주류였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과 대비되는 코넬리의 작품은 과열된 미술시장에서 부풀려진 예술의 상업적 가치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전략은 20세기 중반 미국 모더니즘 예술 이후 등장한 팝 아트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가 1981~1989년에 만든 7점의 ‘자화상’ 연작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 형상을 그리는 대신 직사각형, 타원형 캔버스에 가짜 진주, 반짝이는 장식 조각 혼합물을 가득 채운 자화상은 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을 드러낸다.
3) 마틴 웡(Martin Wong, 1946~1999년)
중국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자랐다. 부모는 중국인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멕시코인 피도 흐르고 있어, 자신을 ‘중국-라틴계’라고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의 지지를 받으며 13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예를 전공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할 때는 히피운동에도 참여했다.
1978년 뉴욕에 왔을 때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텔 야간 짐꾼으로도 일했다. “내가 그리는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라고 말한 그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시인 미겔 피네로와 함께 살며 작업을 했는데, 둘의 활동은 뉴욕에서 일어난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예술운동 ‘뉴요리칸(Nuyorican)’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스트 빌리지 그라피티와 아시아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이스트 빌리지에 아메리칸 그라피티 뮤지엄을 설립하기도 했다.
마틴 웡은 1994년에 에이즈 진단을 받고 53세에 숨을 거뒀다. 그의 작품은 PPOW 갤러리에서 관리하고 있고, 어머니가 마틴 웡 장학재단을 만들어 미술가를 후원하고 있다.
작가 4명의 이야기는 후속 기사에서 계속됩니다.
수도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날, 부산역에 도착했다. 위쪽 지방보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부산은 아직 초겨울 같았다. 평소대로라면 부산역 옆 돼지국밥 골목에서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은 초량이바구길에서 시래깃국을 먹기로 했다. 구수한 시래깃국을 호호 불어가며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걷기 코스
부산역 ▶ 옛 백제병원(브라운핸즈백제) ▶ 남선창고 터 ▶ 동구 인물사 담장 (초량초등학교) ▶ 이바구정거장 ▶ 168도시락국 ▶ 168계단과 168모노레일 ▶ 전망대 ▶ 이바구놀이터와 6·25막걸리 ▶ 이바구충전소 ▶ 당산 ▶ 이바구공작소 ▶ 장기려더나눔센터 ▶ 스카이웨이전망대 ▶ 유치환의 우체통
부산의 산동네와 산복도로
한국전쟁 발발 두 달 뒤, 최후 방어선이었던 부산이 피란수도가 되었다. 전국의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전쟁 전 40여 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00만 명으로 늘었다. 전체 면적의 절반이 산지인 부산은 폭증한 인구를 수용할 만한 땅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에서 가까운 산동네로 몰려들었다. 산비탈을 깎아 판잣집을 짓고 부두 노동자로, 자갈치 시장 일꾼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산동네에 정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동네가 지금의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마을, 영도 흰여울마을, 초량동 산복도로 마을 등이다.
부산에 산동네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산중턱을 지나는 산복도로(山腹道路)가 생겼다. 실핏줄처럼 산동네를 연결하며 부산의 상징이 되었다. 부산 동구에서 산복도로가 처음 개통된 초량동에 부산의 근대 역사를 담은 ‘초량이바구길’을 조성했다. ‘이바구’는 이야기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까꼬막이 천지삐까리’ 초량이바구길
초량이바구길은 부산역에서 산복도로까지 걷는 길이다. 짧은 코스이지만, 부산말로 “까꼬막(오르막길)이 천지삐까리다(아주 많다).” 급경사 계단에는 모노레일이 있으니 앞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산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첫 목적지인 옛 백제병원에 도착한다. 백제병원은 1927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종합병원이었다. 폐원된 이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 1층에 카페 브라운핸즈백제가 입점했다. 근대 건축물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인기를 끌고 있다. 1900년에 지은 부산 최초의 창고인 남선창고 터와 부산 동구의 근현대사와 인물을 소개한 초량초등학교(1937년 개교) 담장을 지나면, 이내 이바구정거장이 나타난다. 이바구정거장은 초량이바구길의 안내소로서 캐리어 보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바구정거장 옆에 있는 바람개비로 장식한 계단에서 본격적인 까꼬막 여행이 시작된다.
초량이바구길의 명물 168모노레일
바람개비계단 끝에서 분식집처럼 생긴 168도시락국 식당이 반긴다. 추억의 도시락을 주문하면, 달걀부침을 얹은 양철 도시락과 진한 멸치 육수 맛이 일품인 시래깃국을 맛볼 수 있다. 시래깃국을 들이마시다시피 하니, 주방을 지키던 할머니가 빈 국그릇을 가득 채워준다. 배불리 먹은 밥값은 단돈 5000원. 감사 인사가 절로 나온다. 168도시락국 식당을 비롯해, 이바구놀이터(영진어묵&공감카페), 6·25막걸리, 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충전소, 커뮤니티 센터인 이바구공작소 등에는 동구 지역 시니어가 근무한다.
168도시락국에서 조금 올라가면 경사 45˚의 168계단이 기다린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다행히도 2016년, 계단 옆에 무료 모노레일이 생겼다. 운행거리는 약 60m. 모노레일에 함께 탄 아주머니가 168계단을 가리키더니 “이 계단이 부두 노동자들이 일하러 갈 때 다녔던 지름길이라. 계단 밑에 있는 우물도 봤지요? 할매들이 이 계단으로 물 뜨러 다녔는데, 한 계단 오르고 한 번 쉬고, 고생이 말도 몬했다꼬. 모노레일이 생겨서 얼매나 좋은지 몰라요. 여름에도 시원코. 저짝 아래 함 보소. 갱치가 울매나 좋은지”라며 추억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바구길 최고 전망은 이곳
모노레일에서 내리면 바로 전망대로 이어진다. 비탈에 층층이 자리 잡은 초량동 주택가와 멀리로는 황령산, 해운대 마린시티, 부산항과 부산항대교, 영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모노레일 승강장 옆에 있는 이바구놀이터도 전망대만큼 훌륭한 뷰를 자랑한다. 이곳은 야경 감상에 최적화된 장소다. 통통하고 쫄깃한 부산어묵으로 끓인 어묵탕을 먹으며 야경을 감상하노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인정 넘치는 시니어 직원들이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음식이 식을세라 살뜰히 살피기도 한다. 이바구놀이터 맞은편 6·25막걸리에서는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맛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갈 때는 모노레일 대신 계단을 추천한다. 걸어 내려가면서 빵집, 아트숍, 카페, 갤러리, 추억의 물건을 파는 다락방장난감BOX, 김민부 전망대에 들를 수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하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이가 바로 시인 김민부다. 전망대와 마주보고 있는 이바구충전소를 지나 마을 수호신을 모신 당산 쪽으로 올라가면 산복도로와 만난다.
부산에서만 가능한 산복도로 투어
산복도로 턱밑에 자리한 이바구공작소는 방문객 안내센터 겸 주민커뮤니티센터다. 이곳에 근무하는 시니어 문화해설사에게 초량의 근현대사를 들을 수 있다. 이바구공작소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장기려더나눔센터도 들러볼 만하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송받는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데 일생을 헌신한 의사이며, 의료보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장기려더나눔센터에서 유치환의 우체통으로 가는 길에 산복도로를 지나다 보면, 독특한 풍경이 눈에 띈다. 도로 폭이 좁아 건물 옥상을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한쪽 차바퀴를 들어 주차하는 ‘개구리 주차’를 볼 수 있다.
산복도로 가에 위치한 유치환의 우체통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2층 시인의 방에서 엽서를 써 3층 전망대에 설치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다음 목적지로 가려면 유치환의 우체통 앞에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초량차이나타운
1884년 초량에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뒤, 중국 상인들이 점포를 겸한 주택가를 형성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93년 중국 상해시와 부산시가 자매결연을 해 상해문을 건립하는 등 상해 거리를 조성했다. 고기만둣집인 신발원이 유명하다. 차이나타운 일부 구역에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들어선 텍사스 거리가 있다. 두 곳이 한길로 이어져 있는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동구 중앙대로 196번길 8.
밀면과 돼지국밥
부산에 여행 와서 밀면과 돼지국밥을 먹지 않으면 서운하다. 부산역 근처에 있는 초량밀면과 본전돼지국밥이 소문난 식당이다. 밀면은 피란 온 이북 사람들이 원조 물자로 공급된 밀가루로 냉면을 대체할 음식을 만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돼지국밥도 피란민들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돼지 뼈를 이용해 국을 끓인 것이 시초라 한다. 밀면과 돼지국밥은 싼 재료로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만든 피란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초량밀면 동구 중앙대로 225, 본전돼지국밥 동구 중앙대로214번길 3-8.
돼지갈비와 돼지불백거리
초량은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직후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작업을 마친 뒤 초량시장에서 돼지갈비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초량 육거리 부산고등학교 앞에 돼지불고기백반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검정 프라이팬에 달달 볶은 매콤한 돼지불고기가 없던 입맛도 살아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싼값에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초량돼지갈비골목 은하갈비 동구 초량중로 86, 초량불백거리 원조불백 동구 초량로 36.
초량1941
초량1941은 초량동 산복도로 위에 자리한 우유 전문 카페다. 1941년 지어진 일본 적산가옥을 개조했다. 이색적인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이 눈길을 끈다. 커피와 말차우유, 홍차우유, 커피바닐라우유, 동백우유 등 다양한 병우유를 판다. 고소하고 진한 우유와 쫀쫀한 생크림 속에 과일을 콕콕 박아 만든 과일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면 한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동구 망양로.
여행 정보
➊ 찾아가는 길 전철 1호선 부산역 7번 출구에서 ‘백제병원(브라운핸즈백제)’ 또는 ‘이바구길모노레일’ 방면으로 이동
➋ 이바구자전거 시니어 도슨트(문화재 해설사)가 운전하는 전동 자전거에 타고 초량이바구길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도슨트가 이바구길의 명소 소개와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산역 분수대 옆에서 출발/ 10시, 11시, 12시, 13시, 14시, 15시 출발. 예약 070-8224-0122/요금 어른 1만 원. 초등학생 7000원(미취학 아동 무료) 우천 시 운행하지 않음
➌ 이바구버스투어 가이드와 동행하는 이바구버스 투어 상품도 있다. 요금 어른 1만6000원, 초등학생 9000원
발코니 쪽 창문에 에어비닐을 붙이면서 겨울이 옵니다. 여느 계절이 그러하듯 겨울도 순식간에 왔지요. 겨를도 없이 허전한 풍경이 펼쳐지고 싸늘해진 공기가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해도 에어비닐이 창을 다 가리지 않도록 풍경을 위해 가운데를 뚫어놓았고 어느 창은 비워놓기도 했습니다. 풍경 가운데 나무들이 가장 숙연하게 서 있습니다. 한때 열매와 그늘과 싱그러움을 주던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견딤이 있을 뿐 나무들에겐 정작 아무런 보상이 없지요. 그 보상은 인간의 몫인데 나무들만이 한사코 의연히 견딥니다. 겨울이 주는 사유로 사람들에게 내면이란 것이 조금 더 생겨났다면 나무들이 준 의미가 닿은 때문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게 건너갈 수 없는 시간의 표정이 겨울 안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씩 침잠하며 돌아보며 긴 시간의 여행에 듭니다.
추위와 더불어 당신이 왔습니다. 이제 당신은 여기 없는데 당신 그리움이 왔습니다. 그곳에서 발은 시리지 않나요? 따뜻한 물은 자주 드시나요? 이제 더 추워하지 않으셨음 해요. 당신을 처음 만나던 15여 년 전의 어느 날도 겨울이었습니다. 어느 문학행사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지요. 지면을 통해서 작품으로만 뵙던, 저보다 훨씬 선배이셨던 분을 만난 거지요. 따뜻하고 진솔한, 아주 시를 잘 쓰시던 분이라 단박에 기억했습니다. 시로써 만나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면 뭔가 통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우린 스치듯 서로 그런 느낌을 확인한 듯했습니다. 그런데 첫눈에도 당신은 추워보였습니다. 한겨울에 서늘함이 느껴지는 흰 와이셔츠에 재킷 하나만 걸친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웃는 표정도 겨울처럼 스산하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안부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태 뒤 당신은 신작 시집을 부쳐왔습니다. 시는 여전히 깊고 간절했습니다. 반갑고 감사했지요. 무어 그리 더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는데 곱게 사인한 시집을 보내시다니, 저는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서로 대구와 서울 떨어져 있는 터라 우선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드렸던 겁니다. 수줍은 듯 작게 웃으시더니 당신은 되레 고맙다 하셨습니다. 더듬거리며 어떤 시가 좋다는 몇 말씀을 하고 저는 서둘러 꽃 피는 날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 말하고 끊었습니다. 꽃 피는 날은 속절없이 여러 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다는 부음을 들었습니다. 향년 61세. 그것도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말의 빚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책으로 엎디었습니다.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저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겨울 당신이 초췌하게 보인 이유와 스산했던 바람 소리가 나던 표정이 오버랩되어 아프게 왔습니다. 하나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글을 쓴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지, 저는 아주 하찮은 사람이 되어 겨우내 더욱 추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을 위한 저의 자책을 시로 적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당신에게, 그리고 저처럼 때를 놓쳐 낭패한 일을 안고 사는 모든 당신에게 바치는 시이기도 했습니다.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꽃 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아,/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죄송해요/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 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전문
창이 커다란 집에 살면서 창을 가리게 된 이유도 많은 풍경을 다 들이기가 아팠던 탓입니다. 커다란 그리움을 다 담기 힘들었던 이유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겐가 턱없이 모자랐거나 상처를 주었다면 어떤 일로 되돌려야 할까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달리 가진 재주가 없어 저는 시로써 삶을 살피며 살기로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사물이나 대상, 무생물에게도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한다는 시인의 명분을 깊게 끌어안았습니다. 그건 당신이 가르쳐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당신,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진실. 겨울 풍경 앞에 오래 머무는 건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살아 이 풍경을 보며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저는 시를 쓰고 풍경을 나눌 것입니다.
제가 어느 창에는 에어비닐을 붙이지 않는다고 했지요, 풍경을 위한 동시에 당신을 위한 통로임을 고백하겠습니다. 창으로 드는 저 풍경 속 나무 한 그루가 이미 당신이지요. 그래도 종내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 다 못한 그리움으로 이젠 제가 당신에게 풍경이 되겠습니다. 안과 밖 사이, 냉기와 온기 사이, 삶과 죽음 사이, 모든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지라도 당신에게 저는 꽃 피는 봄날이 되겠습니다. 세상에는 비유가 필요 없는 순간이 있지요.
불가해의 일, 불가능의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홀연 떠나신 아쉬움 대신 당신의 침묵을 기억하겠어요. 그리고 뻔뻔하게도 저는 다시 당신께 말하겠습니다.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규리 시인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구미대학교 강사 역임. 질마재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있다.
치매(癡呆). 한문사전을 찾아보면 ‘치’에는 ‘어리석을, 미련한, 미치광이’ 등의 뜻이 있다. ‘매’에도 ‘어리석다, 미련하다, 어리둥절하다’ 등의 뜻이 있다. 이렇게 사전에 나오는 여러가지 ‘치매’의 의미에서 보듯 좋은 말은 하나도 없다. 치매에 걸리면 뭔가를 잘 까먹다가 기억을 못하는 게 일반적인 증상이다. 그리고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성품보다 더 순해지는 치매도 있지만 무척 난폭해지는 치매도 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하고는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달라 어리둥절해 질 때가 많다. 어리석게 보이거나 미련하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미친 사람의 행동처럼 보일 때도 있다. 치매의 글자 뜻이 좋은 말은 아니지만 사전은 그런대로 적당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얼마 전 치매를 앓던 장인어른이 요양원에서 별세했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 요양원에 치매 어르신이 꽤 있었는데 장인의 경우 종전 보다 양순해졌지만 사위는 물론, 아들딸, 손주들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떤 어르신은 난폭한 행동과 말 때문에 요양보호사와 자식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2017년 중앙치매센터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인구 7,066,201명 중 치매환자 수는 702,436명으로 유병률이 9.94%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남자는 29.1%, 여자가 70.9%로 남자보다 월등하게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85세 이상에서는 전체의 38.8%가 치매환자로 10명 중 4명 가까이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치매는 노년층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건강보험평가원의 발표에 의하면 2016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치매환자 수는 424,239명으로 이 중 초로기 환자는 19,665명이며 30대에서 50대까지의 환자 수도 8,521명이었다. 최근 국회복지위원회 김승희 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에는 2017년 기준으로 65세 미만의 비교적 젊은 치매환자 수가 18,622명이라고 나와 있다.
알츠하이머치매, 혈관성치매, 파킨슨치매 등 치매의 원인과 종류도 다양하다. 종전에 주로 노년층에서 발병하던 것이 근자에는 65세 미만 층의 치매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젊은 층에서 발생하는 알콜성치매, 디지털치매 등의 환자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017년 우리나라의 전체가구 수가 2,175만 여 가구라고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30가구 중 한명 꼴로 치매환자가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여러 자료에서 보듯이 누구도 치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다행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 치매예방과 치료를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고 속도는 더디지만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으니 기대해 볼 일이다. 최근에는 하버드의대 연구진이 운동효과가 있는 알약으로 알츠하이머치매의 치료 가능성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고 보도되어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 한다. 많은 가정에서 치매로 인해 가족 간의 갈등과 불신으로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자식이 치매를 앓는 부모를 내다버리는 패륜 사례는 물론, 간병을 하던 배우자가 살인을 한 경우까지도 종종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치매환자 본인의 심리적 상실감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간병인을 힘들게 하는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어느 시인은 치매에 걸린 노모를 보고 영혼의 정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장인이 계시던 요양원에 드나들면서 치매어르신들을 보고 지은 시조 한 수를 올리며 모든 사람들이 치매걱정에서 벗어나는 때가 속히 오기를 바란다.
망각의 강
저 애가 누구더라
안개 낀 듯 자욱하다
행여나 실수할까
초점 없이 바라볼 뿐
딸인지 며느리인지
아들인지 사윈지
나가려 서있었나
들어오다 섰는 건가
도무지 모르겠네
누가 알까 민망하다
차라리 백지장처럼
하얘져 버렸으면
정끝별 시인이 추천하는 '삶이 힘에 부칠 때,위로가 되는 시집'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저)
최근 독일에서 유명을 달리한 친구 허수경을 기리는 마음으로 골랐다. 그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단한 시기에 나온 시집으로, 제목 자체에 삶과 늙음과 죽음이 담겨 있다. 시인의 흔들리는 내면을 담은 시편들이 홀로 힘겨운 삶을 사는 이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백석 문학전집
우리가 고단한 삶 속에서 잃어버린 채 살아온 본원적이기에 향수어린 감각, 언어, 서사들을 일깨워준다. 훈훈하게 감싸 안는 듯한 백석의 시를 읽다 보면 마음 편안한 위로를 받게 된다. 기교 없이 담담한 언어로 쓴 서정시들은 차분히 삶과 시간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게 한다.
김수영 전집
김수영의 시는 현실의 좌절과 억압 속에서 냉철하게 사회를 직시하고 거침없이 분노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백석의 시와 대조를 이룬다. 부조리한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은 공격적으로 저항하고 토해내는 김수영의 시가 선사하는 가슴 통쾌한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김종삼 전집
김종삼의 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실을 아주 맑고 영롱하게 표현한다. 그의 삶을 견주어 보면 그의 시가 지닌 투명함은 처절한 고통 속에서 걸러진 증류수와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삶의 무언가를 거르고 싶거나, 현실 넘어 삶을 말갛게 보고 싶을 때 읽어보면 좋겠다.
오래전부터 ‘나이 듦’을 주제로 책을 엮고 싶었다는 정끝별(54) 시인·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컴퓨터 바탕화면 속 ‘늙음’이라는 폴더에는 그 날것의 이름에 어울림직한 시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50대 중반이 되었을 즈음, ‘지금이야말로 나이 듦을 이야기할 최적기’라 느꼈다. 청년기엔 늙음을 막연히 멀리 볼 것만 같았고, 노년엔 너무 자신의 늙음에 매몰돼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젊음과 늙음의 경계인 중년을 사는 현재, 그는 ‘삶은 소금처럼 그대 앞에 하얗게 쌓인다’를 통해 나이 듦에 대한 오래된 생각들을 꺼내보려 한다.
단번에 주제가 연상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인상적인 책 제목이었다. 그리고 정 시인의 입에서 함축된 의미가 하나씩 풀렸을 때, 나이 듦을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좋은 표현이라는 걸 알았다.
“흔히 삶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하죠. 바닷물을 사나흘 햇빛에 말려야 소금이 얻어져요. 그렇게 비유해본다면, 우리는 바다처럼 넓고 막막한 삶 속에서, 내리쬐는 햇빛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만, 소금처럼 귀한 삶의 결정체를 남길 수 있어요. 소금은 음식의 맛도 더해주지만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도 하죠. 살면서 어떠한 경험을 통해 얻은 산물은 인생을 살맛나게 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해줘요. 나이가 들수록 백발처럼 하얀 소금은 계속 쌓일 테고요. 또한 그 삶은 혼자가 아니기에 ‘그대’라고 호명함으로써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해요.”
책을 읽으면서 ‘시로 말하는 웰다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가 큰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웰다잉도 웰빙처럼 젊은 시절부터 해나갈 것을 조언한다. 정 시인 역시 같은 맥락에서 “노인만을 위한 도서가 아니다”라며 세대를 불문하고 함께 읽으며 나이 듦을 고민해보길 바랐다.
“늙음과 죽음은 이미 받아놓은 밥상 같은 거예요. 나이 듦을 성찰할 때 젊은이는 노년을 이해하고, 노인은 늙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젊은 세대를 인정하게 되죠. 무엇보다 나부터 그런 나이 듦에 대해 익숙해지고 싶었고요.”
정 시인은 늙음과 죽음이 주는 슬픔을 인정하면서도, ‘늙은 꽃’이 존재하지 않듯 살아 있다면 여전히 꽃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노년의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긍정적으로 여길 부분도 분명 있다는 얘기. 현재 중년인 그가 느끼는 삶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나름은 ‘나는 꽃이야’라고 생각하려 해요. 그러나 그건 관념적이고, 그냥 그렇게 인식하고 싶은 거죠. 현실은 부정적이에요. 늙음이란 결코 아름답지 않고, 짐스러운 거구나, 고집이 생기고 과거에 몰입되는 거구나, 그리고 그걸 모르는 거구나! 그렇게 자신을 모르고 살 때 늙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꽃이라고 여기는 주관과 진짜 꽃을 달고 나가는 건 다르잖아요. 마음은 늘 꽃이지만, 어떤 상황에 따라서는 ‘늙은 꽃’인 척해야 하거나,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죠. 잘 늙으려면 유연성을 갖고 품이 넉넉해져야 할 것 같아요.”
나의 늙음을 자각하는 순간들
20대 두 딸의 엄마로서, 그리고 대학교수로서 그는 젊은 세대와의 소통 기회가 잦은 편이다. 거울을 보는 것보단 오히려 마냥 예쁜 그 아이들을 볼 때 자신의 늙음을 체감한다고. 싱싱했던 과일이 말라도 형태만 달라질 뿐 본질에는 변함없듯, 노화로 인한 외모 변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단다. 그러나 소통에서 느끼는 세대 차이는 내면의 나이 듦을 절절히 자각하게 했다.
“딸들이랑 대화하다 보면 ‘나는 항상 열려 있는데 저들은 왜 나한테 쉴드를 치지?’, ‘왜 나를 꼰대라고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젊음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들과의 벽이 느껴질 때 늙음을 인식하죠. 딸이 언젠가 ‘엄마는 자기가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하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과거 20대였던 30여 년 전 나의 가치관으로 현재의 20대에게 조언하는 건 옳지 않구나.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처럼, 과거인 나의 말은 적게 하고, 현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싶었죠.”
정 시인은 책에서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생각난다면 철이 들었다는 거다. 늙었다는 거다’라며 늙음을 자각하는 또 다른 사례를 들었다. 젊은 기자로서는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가 표현하려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젊을 때는 크리스마스에 뭔가를 채우고 싶어 하죠. 애인과 사랑을 하거나 친구들과 파티를 하며 들뜨고 설레고. 그러다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를 채워주려고 해요. 저도 딸들이 어릴 때는 트리 만들고 선물 사느라 바빴으니까요. 그러고 나면 어느 순간에는 그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점이 와요.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 크리스마스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엄마 생각이 나는 거죠. 늘 소중하게 여기지만, 자칫 다른 것들에 밀려나기 쉬운 짠한 존재잖아요. ‘내 영순위를 너무 미뤄놨구나’, ‘엄마도 쓸쓸했겠구나’ 깨달으며 철이 들고, 자신도 그때의 부모처럼 늙었음을 인식하는 거죠.”
인터뷰 동안 정 시인에게서 들은 노년의 감정은 슬프고 측은했다. 나이 듦에 대해 논하며 다소 식상한 질문이지만 늙어서 좋은 것은 없는지 물었다.
“그럴싸한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웃음) 과연 좋은 게 있을까요? 애써 ‘나는 꽃이야’ 하는 격인데, 솔직한 생각은 뭐든 젊음이 좋아요. 더 많은 미래의 시간을 확보한 것만큼 멋진 일이 어디 있어요. 희망이고 가능성이잖아요. 그렇다고 ‘다시 20대로 돌아갈래?’라고 물으면 안 갈 것 같아요. 젊은 시절 느꼈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멀미, 그건 공포였어요. 나이 들어 좋은 건 안정감일 듯해요. 내가 살아온 만큼의 규모에 맞게 내 삶이 세팅됐고, 크게 바뀔 것 같지 않거든요.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평온함을 느끼죠.”
내가 꿈꾸는 ‘강원남도 두천’
그는 나이 들어 얻는 평안함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외모는 무너지고, 정신은 둔해지고, 관계는 줄어들고. 그러나 그 시간을 고독하게 느끼기보다는 오롯이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즐기길 권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원남도 두천’을 꿈꾸며 말이다.
“강원남도 두천은 지도에는 없는 지명이에요. 누구나 삶이 너무 힘들 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잖아요. 저에게 강원남도 두천은 오로지 시인으로 사는 곳이었어요. 딸들이 성인이 되고 엄마로서 어느 정도 의무는 덜었고, 더 지나면 교수직도 물러나야죠. 그쯤엔 꿈꾸던 것처럼 시를 써도 재미없거나 그 끝이 보일지도 몰라요. 그러다 어느 시점엔 시인의 삶도 아닌, 그저 날것의 인간으로 사는 삶, 정끝별이라는 이름도 없이, 성별도 없이… 어쩌면 그것이 죽음에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정 시인은 “몸소 감소, 축소, 청소하지 않으면 늙음의 시간은 소굴이 되기 십상”이라 말한다. 다가오는 2019년, 그는 ‘말’을 줄여가고 싶다고 소망했다.
“젊어서는 철없이 얘기해도 주변에서 귀엽게 듣지만, 늙으면 딱 두 가지로 받아들여요. 권력이 들어갔을 때는 ‘폭력적인 언어’로, 그렇지 않으면 ‘잔소리’에 그치죠. 그런데 둘 다 의미 없는 말이잖아요. 특히 내가 권위가 있을수록 의도치 않더라도 그 말이 상대에게 강요가 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줄이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다는 정 시인. 바로 ‘나답지 않은 것’이란다.
“내가 많이 컸구나, 힘이 생겼구나 느꼈던 순간이 ‘안 할래요’라고 거절했을 때예요. 나에게 주어진 역할들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계속 가면을 바꿔가면서 말이죠. 가끔은 지하철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무표정한 낯선 얼굴이 내 본질이 아닐까 해요. 나다운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 가면들을 벗겨내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시인의 ‘눈 오는 지도(地圖)’의 한 대목이다. 누구든 눈이 내리는 겨울엔 추억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에 가슴앓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 때문에 설레는 연인들도 있다. 내게도 아련한 추억이 있다. 어린 시절, 시골에는 정말 눈이 많이 왔다. 어려서 더 그렇게 보였겠지만 눈이 왔다 하면 무릎, 가슴 높이까지 쌓이는 게 다반사였다. 눈길을 내야 이웃집에도 다닐 수 있었고, 야외활동은 어느 정도 눈이 녹아야 했다. 시골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이 되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같은 소나무는 계속 내리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려 눈을 털어내곤 했다. 대부분 그렇듯 시골 마을이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눈 내린 하얀 지붕 굴뚝 위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나무의 언 홍시에도 흰 털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눈밭을 뒹굴며 눈싸움을 하느라 옷이 젖는 줄도 몰랐고 해질녘까지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다 손이 시려우면 개구쟁이들은 근처에서 짚단 몇 개를 가져와 모닥불을 피우고 언 몸을 녹이곤 했다. 젖은 옷 말리느라 불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만 바지를 태워 먹고는 ‘앗! 뜨거워!’ 하며 날뛰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엄마한테 혼날까봐 구멍 난 바지를 고구마 통가리 뒤에 꼭꼭 숨겨놓고 며칠 끙끙 앓다가 이내 발각되어 혼쭐이 나기도 했다.
장독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 위에 시루떡처럼 흰 눈이 덮이면 참새떼들이 먹이를 찾아 이 집 저 집 울타리를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 집 뒤뜰 처마 밑엔 소에게 먹일 쌀겨가 담긴 드럼통이 항상 놓여 있었다. 참새들이 울타리로 몰려오는 것은 이 쌀겨 때문이었다. 수시로 드럼통으로 날아와 마음껏 만찬을 즐기고 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미리 드럼통 뚜껑을 열고 지지대에 긴 새끼줄을 붙들어 매어놓고 참새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참새가 울타리를 벗어나 쌀겨 드럼통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때 새끼줄을 잡아당겼다. 드럼통 뚜껑이 ‘덜컹!’ 하고 닫히는 순간 잽싼 놈들은 재빨리 빠져나가지만 두세 마리는 갇힌 채 ‘후다닥!’ 날갯짓을 한다. 그렇게 어린 팔뚝이 들어갈 만큼 뚜껑을 열고 갇힌 참새를 한 마리씩 꺼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러한 행운은 눈이 많이 내려야 가능했다. 들판 위에 눈이 덮여 먹을 것이 없어야 참새들이 인가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시골집이 그립다. 함박눈이 내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집, 그 위로 참새, 토끼, 족제비, 너구리 발자국이 다 찍혀 누가 왔다 갔는지 알 수 있었던 집, 부모님과 어린 형제들이 평화롭게 잠들던 초가집, 지금은 재개발로 흔적조차 없는 내 마음속 초가집. 나이 들수록 그 집에 가고만 싶다.
켜켜이 쌓인 해안 절벽이 오후 햇살이 들어오자 보랏빛으로 반짝입니다. 늘 서쪽 바다를 향해 있는 탓에 제아무리 찬란한 일출이라도 남의 떡 보듯 아예 거들떠보지 않지만, 해가 중천을 지나 뉘엿뉘엿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그 누구보다 활짝 가슴을 열고 해바라기에 열중하는 변산반도 바닷가의 층층(層層) 단애(斷崖). 깎아지른 절벽에 보랏빛이 번지는 걸 보고 처음엔 석양빛에 붉은 물이 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곰곰 살펴보니 오랜 세월 강한 바람과 바닷물에 깎이고 깎여 형성된 퇴적암에 번지는 색이 석양빛과는 다릅니다. 노루 꼬리만큼 짧은 오후 햇살이 거무튀튀한 바위 절벽을 붉게 달구는 건 맞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수직 절벽 곳곳에 촘촘히 박힌 자주색 꽃송이가 눈부신 석양빛을 온몸으로 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해안 전체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해 못지않게 다사다난했던 2018년 한 해도 이제 저물어갑니다. 12월이면 많은 사람이 장엄하게 지는 해를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겠다면서 서녘 바다를 찾습니다. 서해 3대 낙조 명소의 하나라는 솔섬 등이 있는 변산반도도 제법 찾는 이가 많습니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지?”로 시작하는 안도현 시인의 ‘모항으로 가는 길’이란 시가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문득 변산반도를 찾는 발걸음도 생겨났습니다. 시인은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 밥 먹다가 석삼년 만에 제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라며 꼬드깁니다. 그러면서 변산해수욕장이나 모두가 꼽는 변산반도의 최고 비경인 채석강에는 잠시만 머무르라고 짐짓 어깃장을 놓습니다.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그런데 수직 단애가 수천 권의 책을 켜켜이 쌓은 것 같다는 채석강(彩石江)과 붉은색 암반 및 절벽으로 유명한 적벽강(赤壁江) 등의 변산반도 해안 절벽은 지질학적 명승지일 뿐 아니라, 특산식물인 변산향유의 유일한 자생지여서 ‘한 해 야생화 탐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꽃쟁이’들도 불러 모읍니다. 변산향유는 2012년 꽃향유와 가는잎향유, 애기향유, 좀향유 등 기존의 향유속 유사종과는 구별되는 신종으로 발표되었으나, 아직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오르지 않은 종입니다.
꽃향유(香油)는 줄기는 물론 가지 끝에 칫솔처럼 한쪽으로 뭉쳐서 피는 꽃이 아름답고 식물체 전체에 향기로운 정유(精油)가 함유되어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는데, 변산향유는 꽃향유를 닮았지만 분자생물학적 분석 결과 몇몇 차이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먼저 몸집이 꽃향유에 비해 작을 뿐 아니라, 줄기가 녹색의 꽃향유와 달리 자주색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넓은 달걀형 또는 타원형으로 마주나는 잎도 가죽처럼 두껍고 윤기가 나는 혁질(革質)이어서 초질(草質)인 꽃향유와 비교가 됩니다. 높이 30cm 안팎의 줄기나 잎자루 등에 털이 전혀 없이 밋밋한 것도 큰 차이입니다. 자생지도 크게 다릅니다. 꽃향유는 전국 어디서나 숲 가장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변산향유는 변산반도 해안 절벽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향유속 다른 유사종들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꽃이 피지만, 늦가을인 11월까지도 꽃을 볼 수 있어 앞서 언급했듯 ‘한해 마지막 꽃 탐사 대상’으로 꽃쟁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Where is it?
변산에서 처음 발견된 꽃향유의 일종이라는 이름답게, 변산반도가 자생지다. 학명 중 종소명 byeonsanensis는 자생지가 바로 전북 변산임을 말해준다. 신종 발표 이후 추가 연구 조사 결과가 없어 변산반도 이외 자생지는 알려진 바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자생지는 변산반도 안에서도 격포항 인근 해안 절벽이다. 10~11월 격포항 방파제 내 수직 절벽에 자생하는 변산향유는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그 외 지역은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 시각에 맞춰 찾아가야 한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여행을 좋아하는 까닭에 각 방송사의 여행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과거에 가본 곳은 추억을 되새기고, 새로운 곳은 마음 갈피에 담는다. 최근의 문화 트렌드가 여행임을 증명하듯 식욕을 주제로 한 ‘먹방 여행’, 돈 안 쓰는 ‘짠내투어’, ‘패키지여행’ 등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이 방송사마다 넘쳐난다. 그중 가장 역사가 오래고 호들갑 떨지 않아 오롯이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KBS1)’를 좋아한다.
토요일 오전, 마음이 가장 한가한 시간에 커피 한잔을 옆에 놓고 TV를 켜니 ‘모로코 편’이다. 아, 모로코! 오래전 영화‘카사블랑카’를 본 이후로 늘 동경하던 곳이 아닌가. 나중에 그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할리우드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환상이 깨지고 말았지만. 그런들 어쩌랴. 사막에서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오래전부터 꿈이었다. 프로그램 후반부에 사하라 사막이 등장했다. 특히 먼 지평선부터 붉어 오는 사하라의 황혼이 압권이다. 기억이 아물아물하지만, 어느 시인의 “사막은 낙타가 가는 곳이 길이 된다.”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에 한 가닥 위안을 주는 듯해 가슴에 새겼던 구절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에 한 가닥 위안을 주는 듯해 가슴에 새겼던 구절이다. 드디어 담당 PD가 사막 낙타 시승에 도전하는 모습을 더욱 불현듯 과거 여행 중 겪었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십수 년 전인가 이집트로 여행했을 때이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의 중심인 기자(Giza)에 방문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대에 설레었다. 그림으로만 보던 유적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자 코로 훅 들어오는 역겨운 냄새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낙타 시승 프로그램이 있어 낙타 정거장에 다가가자 냄새는 절정에 달했다. 그림으로 보던 아름다움의 기억은 순간 남루한 현실로 바뀌고 말았다. 비슷한 기억은 또 있다.
막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 설레는 마음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여행 전 책자를 통해 미리 봐두었던 관광지 중에 수상 시장이 기억에 남았다. 불교 유적이야 거기서 거기인데 물 위에 떠있는 시장이라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보트에 타는 순간 코에 스치는 악취가 끝끝내 코를 괴롭혔다. 보트에 타기 전 나눠준 향기 나는 꽃목걸이의 용도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대부분 여행지에 관한 정보는 시각을 통해 전해진다. 우리는 시각으로 들어온 정보만을 토대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나 현지의 진정한 삶과 진실은 후각을 통해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여행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온통 시각 정보의 홍수 속에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대인은 갈수록 시각 이미지에 빠져 사는 듯하다. 진정한 현실은 이미지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현장에 가서 후각을 통해 진실을 만나야만 진실을 알 수 있다. 고약한 땀 냄새 속에서 노동의 참뜻이 드러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