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나비, 김규동 선생님께

기사입력 2019-05-27 15:34 기사수정 2019-05-27 15:34

[부치지 못한 편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맹문재 시인이 한평생 민족의 통일을 노래한 故 김규동 시인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어느 날 선생님 댁에서 안방을 둘러보다가 저는 잠시 흠칫했습니다. 선생님의 침대 머리맡에 낡은 증명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선생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든 살이 넘도록 어린 아들이 되어 밤마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7년 3월 초 즈음이지요. 어느 날 밤늦게까지 학교 연구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박스 하나가 택배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가 하며 박스에 적힌 주소와 성함을 보니 바로 우리 문단의 원로이신 김규동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이전에 한 번도 선생님을 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했습니다.

박스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박스 안에 김기림 시집 ‘바다와 나비’와 ‘태양의 풍속’을 비롯한 여러 권의 고서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도 한 통 눈에 띄어 저는 흥분한 채 읽어보았습니다.


맹 교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좋은 시와 평론 올해는 더 많이 쓰십시오.

서가에 있던 冊 몇 권 보내드립니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태양의 풍속(문고본),

맹 교수가 갖고 계십사 하고 보냅니다.

태양의 풍속은 원래 호화 양장본이 있었지만 이북에 두고 나왔습니다.

문고본이나마 보존하시옵소서.

함께 구간들이지만 바쉬랄르 2권(일역본), 샤르트르(문학이란),

리쳐즈의 불확실의 명상을 보냅니다. 학문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리쳐즈는 기림 선생이 특히 강조해서 말씀하던 비평가(과학적인)였습니다.

옛날 冊 선물로 드려서 어떨까 싶군요. 건필하시옵소서.


며칠 뒤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아주 따스한 미소로 맞아주시고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조곤조곤하게 들려주셨습니다. 모두 귀한 말씀들이어서 저는 가슴속에 새겼습니다. 그렇게 스승으로 모신 뒤 저는 이 지면에 다 담을 수 없는 선생님과의 추억들을 갖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영어 및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김기림 시인을 만나 시인의 꿈을 키웠지요. 경성고보를 졸업한 뒤 연변의대에 진학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망을 접을 수 없었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학부에 입학했지요.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문학을 강요함에 따라 문학의 자유를 위해 당시 남한에 거주하던 김기림 시인을 찾아 교복을 입은 채 월남했지요.

선생님께서는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에 ‘강’ 등이 입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한국전쟁의 피란지인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해 모더니즘 시 운동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군사독재 상황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리고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55년 시집 ‘나비와 광장’을 간행한 뒤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내셨는데, 마지막 작품을 이 지상에 남기면서 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등불이 언제까지나 희미한 적 없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의 길 걸어왔지요


청춘은 알지 못할 위대한 길

두고두고 생명을 괴롭혀 왔습니다

생명은 너무 길었지요


시인이 왔습니다,

불운으로

그가 하늘과 구름 사이로 노래해 주었습니다

나는 시인을 따라 밤길을 걸었지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은 하나의 길

그 고독이 나에겐 그리운 종소리였습니다


시인이여

안녕

-‘인사 – 맹문재 씨에게’ 전문


선생님,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고바우’ 집에서 사모님과 함께 점심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시를 쓸게요.


함북 종성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는 나비는

지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가로막힌 철조망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 맹문재, ‘광장의 나비’ 중


맹문재 시인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가 있고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등 여러 권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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