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아침 며느리가 전화했다. 친정엄마가 동치미를 보내셨는데 어머님께도 갖다 드리라며 한 통을 더 주셨다 한다. 말만 들어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사부인의 김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어서 맛보게 될 동치미에 벌써부터 입맛이 다셔졌다.
사돈댁이 사는 곳은 충청도인데 마당에서 익힌 동치미라 했다. 며느리가 들고 온 동치미에는 탱글탱글한 무가 알차게 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국자 떠 국물을 마셔보았다. 달콤 시원하며 쨍한 맛이 났다. 이 맛은 예전 정릉의 마당 넓은 집에 살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정릉의 집은 파란 잔디가 깔린 마당이 꽤 넓었다. 잔디밭 주위로는 해마다 새빨간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곤 했다. 한쪽으론 커다란 라일락나무가 있어 향기에 취했고 안방 창문 앞 등나무엔 은방울처럼 예쁜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보기에 좋았다.
마당이 넓었던 정릉 집은 꽃이 필 때도 아름다웠지만, 눈 내리는 한겨울 풍경도 못지않게 좋았다.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마당 한쪽에 구덩이를 파고 서너 개의 큰 장독을 묻던 일도 즐거운 추억 중 하나다. 한겨울이면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집에 찾아오신 소사 아저씨와 함께 커다란 장독을 땅에 묻었다. 장독을 묻은 후엔 솜씨 좋은 소사 아저씨가 지푸라기를 꼬아 멋진 장독 덮개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소사 아저씨는 잔디밭 주변의 장미나무에도 겨울옷을 입혔다. 칭칭 새끼줄로 꼰 짚옷을 두른 장미나무는 이듬해까지 따뜻하게 겨울을 견뎠다.
예전에는 김장을 하면 한 접 두 접씩 했다. 한 접이 배추 100포기이니 4등분 한 배추 400개가 산처럼 쌓였다. 요즘에는 4~5포기 정도만 하지만 그땐 다들 찬거리가 부족할 때라 겨울 반양식으로 김장을 했다. 물론 딸들도 돕기는 했지만 대부분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왁자지껄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김장을 도와주셨다.
엄마는 김장보다 아주머니들께 대접할 음식 준비로 바쁘셨다. 따끈한 쇠고기뭇국과 김칫소와 함께 먹을 돼지고기를 삶아냈다. 뽀얗게 김이 서린 주방에서 아주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어울려 먹던 밥상은 늘 즐겁고 풍성했다. 그렇게 배추김치와 동치미가 땅에 묻은 장독으로 차곡차곡 들어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게 익었다.
어느 눈 내린 추운 겨울날, 바가지를 들고 나가 짚 덮개를 벗기고 장독 뚜껑을 열어 떠낸, 살얼음이 사르르 뜬 동치미는 쨍한 사이다 맛이 났다. 어쩌면 그렇게 달고 시원한지… 땅속에서 서서히 익힌 게 아니면 어떤 김치도 그런 맛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마당 넓은 집에서 사는 동안은 매년 겨울 맛있는 김치와 동치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살기 편한 아파트로 이사하신 후부터는 한 번도 그 맛을 본 적이 없어 아쉽다.
오늘 며느리의 친정에서 보내온 동치미가 옛 맛을 떠오르게 했다. 아삭한 무와 국물을 맛보며 옛 추억을 떠올려봤다. 사부인께 감사 전화를 드려야겠다.
맹추위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중부 내륙을 중심으로 영하 15도 안팎까지 떨어졌는데,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12도에 바람까지 불어와 엄청난 체감온도를 느껴야 했다. 어제보다 기온이 약간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춥다. 이 길고 지루한 한파는 내일 낮부터 영상권을 회복하며 누그러진다고 한다.
이제 겨울 추위를 삼한사온이라고 일컫는 말도 옛말이다. 삼한사온의 온난주기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아주 불규칙적으로 변하며 일정기간 지속해서 춥다가 반짝 추위가 가시고 있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이를 13한2온이라 칭하며 바뀐 날씨 주기를 설명하기도 한다.
좀처럼 입지 않고 버티어 내던 겨울 내의를 금년에는 일찌감치 꺼내 입었다. 그것도 아주 두툼한 것으로. 매일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체감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두툼한 점퍼에 마스크와 목도리, 그리고 모자까지 갖추어 완전무장을 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오늘따라 운동하는 장소의 오픈이 1시간여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늘 아침마다 문을 오픈하는 책임자가 오늘따라 시내에 나갔다가 차가 막히는 바람에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가서 시간을 보내지? 이 추위에...
망설이던 끝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늘 지나다니던 모퉁이에 횟집이 있었는데, 어항속의 물고기들이 왠지 모르게 궁금해졌다. 이 추위에 차디찬 물속에서 어떻게 견디어 낼까?
멍게가 어항 속에서 흔들흔들 몸을 움직이면서 조금씩 이동을 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사실 멍게를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냥 물속에 잠겨 있는 줄로만 알았던 멍게가 조금씩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거참 신기하다. 통상 멍게는 도서 연안의 10~20m의 수심에 있는 암초지대나 자갈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영하의 맹추위속에서 어항속의 멍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고 자란 암초지대를 끊임없이 그리워할 터인데, 아무리 이리저리 움직여봐도 미끈미끈한 어항의 유리벽만 나타나니 절망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옆 어항에는 중(中 )크기의 숭어와 갯장어가 함께 있었다. 갯장어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추위와 싸우고 있나보다. 그런데, 숭어의 최적수온은 22~26℃라고 하는데, 어항속의 수온은 꽤나 차가워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숭어의 비늘에 작은 물방울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숭어는 겨울에는 연안보다 상대적으로 수온이 높은 먼 바다로 나가 산란을 하고, 봄이 되면 알에서 깨어난 치어들과 함께 연안의 기수역으로 몰려온다고 한다. 하지만 채 한 평도 안 되는 수족관의 수온이 낮다보니 활동성은 떨어지고 둔감해보인다. 어쩌다 자세히 살펴보니 숭어 무리가 한 곳을 향하여 머리를 맛대고 있었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동쪽의 햇살을 향해 머리를 모으고 있었다. 아~ 숭어들도 최악이긴 하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나름대로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나보다.
숭어 하면 잠시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한창 젊은 시절, 여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덕적도로 여름휴가를 떠난 적이 있었다. 당시 청소년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수련회였는데, 민박을 하시던 마을 이장님께서 청년교사 두서너 명의 협조를 요청하셨다. 덕적도 앞 바다 서포리 해수욕장 근처에서 숭어그물을 친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젊은 청년교사 2명이 이장님을 따라 나섰는데, 일단은 그물을 들고 바닷가 쪽으로 나가자고 했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초 재래식 방법이었다. 길이 약 50여 미터쯤 되는 그물을 바닷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약간은 깊은 곳에 반원모양으로 그물을 펼치고 양쪽 끝과 가운데 두어 군데에서 손으로 그물 말목을 잡고 서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썰물이 점차 빠져나가면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숭어들이 그물에 갇히는 것이다. 그 때에 숭어를 건져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물에 갇힌 숭어들이 그냥 잡힐 리는 없었다. 물이 점차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물에 갇혔다는 것을 인지한 숭어들이 갑자기 물밖으로 튀어올랐다. 물고기가 그렇게 멋지게 튀어오르는 것을 그 때에 나는 처음 보았다. 마침 석양이 내려앉은 바닷가에 숭어떼가 이리저리 튀어 오르니 석양에 번쩍이는 비늘이 무지갯빛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멋진 장관을 연출했다. 여기저기서 환호를 질러댔다. 그 날은 이장님댁 마당에 식탁을 펴고 갓잡은 숭어회와 숭어구이, 숭어찜 등으로 포식을 하던 생각이 났다.
엄동설한 어항 속에 숭어들의 꿈은 무엇일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숭어들의 멋진 꿈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그리워 할 지도 모르겠다.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1960년대 말부터 장미만 그려왔다. 물론 바닷가 풍경이나 누드화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성 화백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초·중등학교 교사, 지방 방송국 편성부 등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산 권역을 벗어나지 않고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5년 부산에서 ‘민주신보 창간 10주년 기념 초대전’이 열린 것을 보면, 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한 이래 그림에 정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1975년 서울 명동화랑과 공간화랑의 전시가 중앙 화단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여의도 정송갤러리 초대전이 전국적으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장미 그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두어 점의 풍경이나 누드화가 겻들여지기도 했으나 장미만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미는 꽃병에 꽂힌, 그래서 식탁이나 서재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인 정물화다. 청화백자 항아리나 유리단지에 성기게 꽂힌 몇 송이 혹은 꽉 찬 아름진 장미 다발이 언제나 맑은 향을 뿜는다.
“그는 꽃의 실제적 형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파상적 율동에 의해 창출되어 나온 선과 터치에 의한 궤적이다. 꽃을 응시하고 연후에 그것을 화면 형상으로 바꿀 때 표현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하다. 담채와 농채가 적절히 배분된 화면은 활기차 보이며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라고 평자는 말한다.
주로 정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나보면 “꽃, 그것도 장미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장미는 그 종류만 수백 종에 색깔도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꽃잎이 수십 장 포개져 있어 입체감의 표현과 꽃잎마다 빛의 반사가 다채로워 평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 화백의 장미는 극사실의 요염한 자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장미를 많이 그렸지만, 한 번도 장미라는 물질적 속성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화폭에 어떻게 조형성을 심어가느냐의 문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남에게 보이기보다 내 작업을 연출된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느 전시회를 앞두고 그가 한 말이다.
이 그림[사진1]은 1992년, 서울 여의도 정송갤러리에 전시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꽃송이와 줄기가 얼비추어 푸르른 그림자를 만들고 속도감 있게 처리된 배경과 꽃잎 끝에 건듯 묻어나는 옅은 색깔, 꽃송이와 봉오리에 깊은 마티에르가 하모니를 이룬 회심작이라 생각한다. 식탁에 걸어놓고 맑은 향을 맡는다.
한때 나팔꽃을 좋아해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나팔꽃 덩굴을 만나면, 씨가 여물 때를 기다려 몇 알씩 따두었다가 이른 봄, 마당 창가나 담장 아래 씨앗을 틔워 줄기가 늘어뜨린 끈을 감고 공중에 꽃 피우는 신선함을 즐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가요의 가사처럼 짧은 꽃피움이 애잔했다. 나팔꽃 기르기를 좋아하던 서예가와 경기도 여주의 도예촌을 동행하며, ‘백제도예연구소’의 정지현(1958~) 도예가를 찾았다. 몇 차례의 방문이라 익숙하게 후원을 빙 돌며 작약이며 들꽃 틈에 깨뜨려버린 도자기를 휘감은 나팔꽃 덩굴의 진분홍 꽃을 감상했다.
“어느 날 새벽 도자기 작품 구상이 안 떠올라 이곳을 거닐다가 무심코 도자 파편 위 저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팔꽃 이미지를 도자로 빚어보았지요.”
작업실 안에는 철화와 진사채로 완성된 나팔꽃 이미지의 아름드리 대형 도자기와 초벌구이한 도자기가 나란히 있었다. 정지현 도예가는 뒤늦게 도예에 입문해 예술자기와 생활자기 사이에서 많은 고뇌를 했다. 현실적 생활고도 체감했다. 이제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생활자기를 수출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문득 일상의 쓰임을 벗어난 도자에 예술혼을 굽고 있다 고백했다.
이 대형 푼주[사진2]는 몇 달 후 그날 동행했던 서예가가 우리 집까지 날라준 크나큰 선물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아내와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마음 깊게 감상했다. 겉은 정지현이 개발한 특유의 연록빛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넘쳐서 나팔꽃 줄기와 잎의 싱싱함을 나타내었다. 입술부터 안쪽으로는 붉은 진사의 유약을 두텁게 발라 고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도자기 속에다 속삭이면 그 잔잔한 울림이 좋았다. 이 푼주의 쓰임을 놓고 가족회의도 열어보았다. 겉과 속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낮은 탁자 위가 제자리다 싶으면, 찻잔을 나르거나 과일을 나르다 부딪힐까봐 조바심되었다. 마침내 거실 큰 유리문 앞 튼튼하고 낮은 탁자를 따로 마련해 옆에 백자 달항아리를 나란히 두어, 사계절 남향 타고 스미는 햇빛이 부서지는 반사광까지 즐기고 있다.
“가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고 첫닭이 우는 새벽, 부끄럽고 두려움에 떨면서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꺼내죠. 무슨 항아리가,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반은 내가 만들고 반은 불이 만들거든요. 꿈꾸던 작품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그건 맛본 사람들만 알아요. 도예가들의 삶의 원천이죠.”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정 도예가가 한 말이다.
꽃은 인류가 문명세계를 열기 이전부터 생명의 원천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꽃은 기쁨의 표상이고 추모의 상징이다. 구순 넘긴 노 화백의 여린 붓끝에서 피어나는 장미에서 인생의 환희를 느끼고 연륜 깊은 향을 맡는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린 푼주에서도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을 듣는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
몇 년 전이었더라. 베란다 창밖 난간에 매달린 선반에 기다란 화분이 두 개 있었다. 봄이면 베고니아처럼 자잘한 꽃들을 몇 포기씩 사다가 나란히 심었다. 아주 예쁘게 잘 자라 봄에서 가을까지 꽃을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가끔 고추나 체리토마토 모종도 몇 포기 심어봤는데 역시 잘 자랐다. 빨간 토마토가 앙증맞게 방울방울 달리고 크진 않았지만 고추도 몇 개씩 달려 푸른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물과 햇살만으로도 잘 자라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심지도 않은 채송화 싹이 나오더니 얼마 안 돼 꽃들이 정신없이 피어났다. 우리 가족은 환호했고 그 신기한 모습을 다투어 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떤 인연으로 우리 집까지 날아온 씨앗일까.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은 피고 지면서 눈을 호강시켜줬다. 그리고 해마다 포기가 점점 늘어나 화분에 가득 찼다. 채송화가 그렇게 강한 번식력과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정은수. 내 짝꿍 은수네 집은 채송화가 아주 많이 피어 있었다. 마당 한쪽 꽃밭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채송화로 덮여 있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비가 내린 다음 날이면 은수 엄마는 채송화 캔 것을 양동이에 한가득 담아 학교에 가져오셨다. 그리고 교실 앞 화단에 조용히 앉아 촉촉해진 땅을 호미로 파 채송화를 심으셨다. 당연히 교장실 앞 화단에도 정성껏 심곤 하셨다. 선생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채송화보다도 더 예뻤던 은수 엄마의 마음을 필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은수네 집에 놀러갔을 때 필자에게도 뿌리째 캐어 한 소쿠리 담아주셔서 아침에 세수하려고 우물가에 앉으면 활짝 핀 채송화랑 눈이 마주쳤다. 우리 집 꽃밭 채송화도 어느새 꽃밭 둘레를 가득 채웠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은수와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이사를 가버렸는데 그 뒤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나 필자는 어느덧 여고생이 되었다. 문득문득 은수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수를 보게 됐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보내면서 어쭙잖게 규율부 활동을 했는데 등굣길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명분하에 교문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때 놀랍게도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은수를 보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다시 봐도 분명 은수였다. 너무 반가워서 “은수? 은수지?” 했더니 나를 알아보고 조금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필자만큼 반가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그렇게 몇 번 더 마주쳤는데도 역시 반기는 모습은 아니었다. 필자는 슬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은수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1년을 쉬었다가 다시 진학을 해서 필자보다 학년이 하나 아래였다. 선후배를 유난히 따지던 시절이라 그랬을까. 은수는 필자를 보면 오히려 슬그머니 피하는 것 같아 너무 서운했다. 그래도 필자가 씩씩하게 다가갔다면 좋았을 텐데 바보처럼 씩 웃거나 멀리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필자가 먼저 학교를 졸업하면서 단짝 은수와는 그렇게 또 헤어지고 말았다.
“채송화가 무척 많이 피었어” 하면서 손을 잡아끌던 은수의 모습을 떠올리면 바보 같았던 필자 모습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왜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걸까. 꽃이 필 때마다 서로를 추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한 통과의례일까.
오늘은 필자의 마음속으로 싸아~ 하니 박하향 같은 바람이 분다.
SBS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에 출연해 사랑스럽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배우 추자현의 남편, 중국 배우 우효광은 ‘우블리’로 불리며 시청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운전사’에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송강호와 함께 주연으로 나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 외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미국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해 시청자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릴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외국에서 K-Pop 열풍을 고조시키고 있는 아이돌 그룹 엑소의 레이는 중국 멤버이고, 트와이스의 9명 멤버 중 대만 멤버 쯔위와 일본 멤버 모모, 사나, 미나 등 4명이 외국인 멤버다.
최근 한국 방송 프로그램과 영화에 출연하는 외국인 배우가 급증하고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가수가 늘고 있다. 방송·영화의 외국인 연예인과 외국인 출연은 대중문화의 트렌드로 부상했고 외국인 멤버가 포함된 아이돌 그룹 활동은 대중음악계의 대세가 됐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공연 무대의 일회성 출연에서 벗어나 아이돌 그룹의 지속적 활동과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장기간 출연을 위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연예인도 늘고 있다. 또한,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그램도 급증하고 샘 해밍턴, 후지타 사유리, 샘 오취리 등 방송 출연을 통해 유명인 대열에 합류하는 외국인도 등장하고 있다.
1970~1980년대에도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과 외국인 배우, 가수의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추석 등 명절에 ‘외국인 노래자랑’ 같은 특집 프로그램이나 내한한 외국인 스타의 예능 프로그램 단발성 특별 출연을 통해서다.
1990년대 들어 국제결혼과 직장 근무 등으로 한국에 이주한 외국인 중 일부가 KBS1 ‘아침마당’ 등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과 한국 문화·생활에 대한 소감을 들려줬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독일 출신 귀화 한국인 이참, 미국 출신 로버트 할리, 프랑스 출신 이다 도시 등은 눈길을 끌어 예능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밀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한류가 본격화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이 급증하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는 국내 방송과 대중문화계에 진출한 외국인 연예인과 외국인이 증가했다. 중국, 독일, 미국 등 외국 미혼 여성이 출연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KBS2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방송돼 큰 인기를 끈 것을 계기로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붐을 이뤘다. 또한 KBS2 ‘개그콘서트’의 샘 해밍턴을 비롯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도 많아졌다.
요즘 시청자와 만나는 SBS ‘내 방 안내서’, JTBC ‘비정상회담’, MBC 에브리원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KBS1 ‘이웃집 찰스’, JTBC ‘나의 외사친’, tvN의 ‘서울메이트’처럼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동상이몽2’의 중국 배우 우효광, KBS1 ‘이웃집 찰스’의 일본인 사유리,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호주 출신 샘 해밍턴 등 외국인 출연자가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외국인 배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봉준호 감독 ‘옥자’의 할리우드 스타 틸다 스윈튼, 홍상수 감독 ‘다른 나라에서’의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 나홍진 감독 ‘곡성’의 일본 연기자 쿠니무라 준, 김태용 감독 ‘만추’의 중국 스타 탕웨이, 허진호 감독 ‘위험한 관계’의 중국 배우 장백지, 장훈 감독 ‘택시운전사’의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미국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처럼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하는 외국인 연기자가 많아졌다.
또한 일본 배우 ‘엽기적인 그녀2’의 후지이 미나, MBC ‘구가의 서’, SBS ‘추적자’의 오타니 료헤이처럼 아예 활동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지속해서 출연하는 외국인 연예인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가수 역시 급증하고 있다.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은 아이돌 그룹 멤버 중 10% 정도가 외국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K-Pop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걸 그룹 트와이스의 9명 멤버 중 대만인 멤버 쯔위와 일본인 멤버 모모, 사나, 미나 등 4명이 외국인 멤버다. 또한 2PM의 태국인 멤버 닉쿤, 에프엑스의 중국인 멤버 빅토리아, 미국인 멤버 엠버, 엑소의 중국인 멤버 레이, 우주소녀의 중국인 멤버 성소·선의·미기, 블랙핑크의 태국인 멤버 리사와 뉴질랜드인 멤버 로제, 갓세븐의 홍콩인 잭슨, 태국인 뱀뱀, 미국인 마크 등 수많은 외국인이 아이돌 그룹 멤버로 활동하며 스타로 부상했다.
방송, 영화, 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계에 진출한 외국인 연예인이 늘어나고 외국인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이 증가하는 이유는 뭘까.
한류로 인해 한국 대중문화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연예계에 진출해 쌓은 경력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하려는 외국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 멤버를 비롯한 연예인이 되기 위해 한국을 찾아 연예기획사의 오디션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외국인 수는 엄청나다.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의 국내외 오디션에는 수천 명의 외국인이 참여한다.
외국인을 기용해 한류를 확산하려는 연예기획사, 드라마 제작사 등 대중문화 콘텐츠 관련 업체의 의도도 외국인과 외국인 연예인 출연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 음반의 증가를 가져왔다. 모모 등 일본 멤버가 3명이나 있는 트와이스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태국인 닉쿤이 멤버로 있는 2PM은 태국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등 외국인 멤버가 있는 아이돌 그룹이나 외국인이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한류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드러내면서 외국인의 한국 연예계 진출이 붐을 이루고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 급증도 외국인 방송 출연과 외국인 참여 프로그램 증가의 한 원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현재 국내 거주 외국인이 171만 명에 달한다. 2006년 53만 명이었던 외국인 인구가 10년 사이 3배 이상 증가할 정도로 국내 거주 외국인이 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방송 등 대중문화에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외국인 연예인의 국내 방송과 대중문화계 진출 붐은 대중문화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류 진작(振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화 차이, 한국어 부족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 등으로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 엑소를 탈퇴한 중국인 멤버 크리스·루한·타오처럼 소속 계약이나 수입 배분, 대우 등으로 연예기획사를 대상으로 한 외국인 멤버의 법적 소송이나 갈등이 늘어나면서 한국에서 외국인 연예인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아지고 있다.
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갑을 맞이하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땡볕 내리쬐는 공사장에서, 시끄럽고 위험한 공장에서, 갑갑한 사무실에서, 긴장이 넘치는 병원에서, 영혼 없는 학교에서, 쓸쓸한 들녘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삶터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벗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잘 견뎌주어 고마우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길로 먼저 떠난 벗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 몫까지 살다가 곧 따라갈 테니 기다려주시게나.” 벗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이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이었다. 신발과 양말이 귀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내 발은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붓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메주콩을 수건에 싸서 밤마다 내 발을 감싸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우리 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꽃이 피고, 마당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랐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마당과 들머리에는 아침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과 같은 수십 가지 꽃이 피었다. 채송화만 해도 여름 내내 하루 천 송이가 넘게 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친구랑 꽃송이를 헤아리다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석류나무 집’이라 불렀다. 마당가에 나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석류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류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제일여고 정문 앞에서 석류를 팔았고, 석류 판 돈으로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사주었다. 가끔 서리꾼이 나타나 석류를 도둑질해가는 바람에 아버지는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탱자나무 가지를 꺾어서 걸쳐놓곤 했다. 가끔 그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오래도록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형은 집을 나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누나 셋은 모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부산 가발공장으로,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나는 가난이 싫어서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때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면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몇 시간 겨우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야간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가난했다, 더구나 같은 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많았다. 서너 살 많은(1954~1957년생) 형들도 뒤늦게 공부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또래들보다 ‘세상’을 일찍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첫 시집 ‘58년 개띠’
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58년생 개띠다. 쉽게 58년 개띠라 불러주어 고맙다. 왜냐하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친근감이 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에 보리출판사에서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내고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시집을 내고 가톨릭여성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00명이 넘는 손님들(거의 현장 노동자들이었다)이 찾아와 강당에 신문지를 깔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시를 읽거나 ‘민노래’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행사를 하면 손님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 그때 손님들이 방명록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띠’에 관한 글이었다.
“70년생 개띠 왔다 갑니다. 저도 12년 뒤에 선배님처럼 꼭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58년 개띠 친구가 시집을 내다니, 내 시집처럼 기쁘네그려.”, “60년생 쥐띠인데요. 왜 58년생 개띠만 유명한가요?”
사람들은 ‘58년 개띠’에 실린 시들 중 ‘58년 개띠’라는 시를 좋아한다. 지면을 줄이기 위해 줄과 연을 조금 붙여서 옮긴다.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는 20년 남짓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기록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집 제목과 표지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보리출판사 차광주 대표, 편집부 강순옥 선생, 함께 편집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과 나까지 모두 58년 개띠였다. 그래서 모두 시집 제목을 ‘58년 개띠’라 하자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펄펄 살아서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58년생 개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평생 옆집에서 살았던 친구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58년생 개띠들이 모여 ‘58년 개띠’ 시집을 내고 4년 뒤,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가는(대부분 글만 써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 58년 개띠 작가들 모임을 가졌다. 1999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 맞은쪽 ‘동루골’이라는 조그만 술집이었는데 전국에서 서른 명쯤 모였다. ‘서울’이라는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올라온 58년생 개띠 작가들 모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은 엉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개띠’다운 술판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그날 모인 58년생 개띠 중 창비 김이구 평론가와 박영근 시인은 몹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회갑을 맞이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13년 전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 같은 작은 산골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 나이에 13년째 마을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작물을 가꾸듯 살고 싶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산골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맛이 아주 깊고 그윽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을 떠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농부가 되고서야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왔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가는 벗들이 있어 든든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벗들이여, 이제 우리 나이 예순한 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한다는 것을. 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는 그날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벗들이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허둥거리며 바쁘게 살지 마시기를! 사람으로 태어나 바쁘게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강물처럼 깊어져 미련도 원망도 욕심도 그냥 내려놓을 수 있기를! 살다 보면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으랴마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 흠뻑 적실 수 있기를.
이제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월요일 날 아침에 당구장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사락사락 내리던 눈이 5분여를 걸어가니 엄청나게 퍼부었습니다. 금년 들어 서울지역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은 어둠침침...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걸었는데, 기분은 좋았지요. 문득, 군 복무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현역으로 군복무 하던 시절에 설악산 후사면 '선유실리'라는 곳에서 근무했는데, 그해 겨울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골짜기마다 내린 눈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은 내려도 밥은 먹어야 하니 보급로 확보 차원에서 내리는 즉시 눈을 치우곤 했습니다. 내리는 눈은 아름답지만 치울 때는 정말 힘이 들었지요. 병사들이 모두 동원되어 넉가래, 빗자루 등, 제설도구를 총 동원하여 온종일 뼈 빠지게 눈치우고 돌아오면 온 몸이 노곤하고 만사가 귀찮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하염없이 내린눈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 쌓였습니다. 눈이 온다고 좋아하며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눈사람 만들어 모자 씌우고 목도리 걸어주던 시절은 그저 꿈 많던 어린 시절의 얄궂은 낭만일뿐이었지요. 어쩌겠습니까? 무슨놈의 운명의 장난이 이리도 짓궂단 말입니까? 그래서 눈치우는것도 전투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제설도구를 들고 눈치우러 나갔습니다. 어차피 오늘 치우고 나도 내일 또 올 눈이지만 열심히 치울수 밖에 없었지요. 아마도 대한민국의 남자들이라면, 군복무를 마친 분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실 겁니다.
군 시절을 추억하다보니 '이등병과 인사계' 라는 제목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한 이등병이 몹시 추운 겨울날 밖에서 언 손을 녹여 가며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소대장이 그것을 보고 안쓰러워하며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김 이병,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다가 하지.” 그 이등병은 소대장의 말을 듣고 취사장에 뜨거운 물을 얻으러 갔지만, 선임에게 군기가 빠졌다는 핀잔과 함께 한바탕 고된 얼차려만 받아야 했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와 찬물로 빨래를 계속하고 있을 때 중대장이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김 이병, 그러다 동상 걸리겠다.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서 해라.” 신병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이번에는 취사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 봤자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혼만 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빨래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중년의 인사계가 그 곁을 지나다가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김 이병, 내가 세수를 좀 하려고 하니까 지금 취사장에 가서 그 대야에 더운물 좀 받아 와라!.” 이등병은 취사장으로 뛰어가서 취사병에게 보고했고, 금방 뜨거운 물을 한가득 받아 왔습니다. 그러자 인사계가 다시 말했습니다. “김 이병! 그 물로 언 손을 녹여가며 해라. 양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동상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소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인사계 3명의 상급자 모두 부하를 배려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정말로 부하에게 도움이 된 것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일방적인 태도로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에게 도움을 줬다고 혼자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배고픈 소에게 고기를 주거나, 배고픈 사자에게 풀을 주는 베려는 나의 입장에서 단지 내 만족감으로 하는 허상의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배려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나만의 만족감이 아닌 진정한 배려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눈 오는 날, 잠시 지나간 추억을 상상해 본 하루였습니다.
필자는 도전을 즐겨 한다. 삶을 활기차게 하며 희망을 준다. 현재 자리에 머물고 있음은 퇴보이다. 왜냐하면, 주변 환경이 급하게 움직이며 변하고 있어서다. 앞서지는 못하여도 변화의 속도에 묻어가야 한다. 인간의 뇌는 자극을 줄 때 성장하고 더 건강해진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기회가 있으면 망설이지 않으려 한다. 2014년 11월 24일 KBS 1TV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름 세자를 삼행시로 지어 이렇게 소개했다.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 이러한 공개적 선언도 도전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담배를 끊으려는 의지를 강건히 하기 위해 친구들 앞에서 금연을 선언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도전으로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인 노사발전재단에서 주관한 “금융인 희망 스토리 수기 공모전”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았다. 금융권에 재직 또는 퇴직한 사람을 대상으로 모집하여 같은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한 사업의 하나다. 필자는 조기 퇴직한 후 먹고 살기 위하여 다양한 직업과 일을 하였다. 대중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 조경관리, 만화방 창업, 부대찌개 음식점 운영, 결혼 주례 등 별별 일을 하였다. 뒤늦은 나이인 63살에 “은퇴설계 전문 강사 과정”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인생 은퇴설계 전문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이 일이 후반생을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어 가고 있어 “새로운 인생, 은퇴설계 전문 강사” 제목으로 수기 공모전에 출품했었다. 우수상에 선정되어 11월 3일 노사발전재단이 주최한 “2017년 금융인의 밤” 행사에서 상을 받았다. 수기 공모전은 두 번째 수상이다. 2016년도에 사회연대은행이 주최한 공모전에 “세 알의 씨앗을 뿌리다”라는 수기를 출품하여 수상한 경험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경험과 삶에서 얻은 지혜를 전수하는 일은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준다. 미국인 젤린스키는 수많은 은퇴자를 면담하여 얻은 결과치를 모아 펴낸 “은퇴 생활백서”에서 은퇴 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경험 전수와 봉사를 들고 있다. 전 반생에서 경험한 삶의 지혜를 혼자 가지고 있다 세상을 떠난다면 아까운 일이다. 필자는 그런 일로 은퇴설계 전문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그 배경과 내용 그리고 희망 사항을 수기로 썼다. 필자의 강의는 직접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공감과 관심도가 높다. 뒤늦은 나이 63살에 시작하였으나 어느 사이 5년의 경력이 쌓였다. 이제 조금 강의에 대해 눈을 떠간다. 수기공모전 우수상 또한 강사 경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되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월간지 동년 기자로 써온 글들이 수기를 쓰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평범한 문학관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에 위치한 이 작은 문학관은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안정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문학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설가 이동희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농민문학기념관은 그의 소장품들과 사유물 그리고 농민문학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번듯한 입구나 잘 차려 입은 안내인은 없지만 농민문학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이곳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누구에게는 훌륭한 박물관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학교 또는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둘러보니 농민문학을 이야기할 장소로 여기만 한 곳이 있을까 싶다. 전형적인 농촌마을.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한 방문은 불편하다. 영동과 물한을 왕복하는 버스가 문학관 앞 노천리에 서지만 하루 다섯 번만 운행된다. 다행히 고속도로가 멀지 않아 경부고속도로 황간IC로 나오면 차로 20분 거리다.
과거의 흔적만 남은 마을 앞 가게 터를 지나 골목으로 좀 걸어 들어가자 마을회관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농민문학기념관 앞이다. 관장이자 창립자인 소설가 이동희의 사택을 겸한 곳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정집과 구분하기 힘들다. 마당에는 작은 텃밭까지 있다.
민초의 삶 다룬 농민문학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농민문학에 대해서다. 농민문학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왔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시작됐던 1930년대 초에는 일종의 노동자문학의 하위 개념으로 빈농을 계몽해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도록 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이후 농촌의 자연이나 지방색, 농민의 생활을 그린 문학으로 변화해왔다.
대표적인 농민문학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이광수(李光洙)의 , 이기영(李箕永)의 을 필두로, 이무영(李無影)의 ·, 김동리(金東里)의 등이다. 이동희 관장은 농민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든 농촌은 과거와 많이 바뀌었지만 땅과 흙은 변한 것이 없어요. 농민에게는 쌀이 떨어지고 보리도 나지 않는 절량기를 버텨온 정신이 있어요. 흙의 마음 말이에요. 농민문학은 그것을 표현하고 추구하는 문학입니다. 밭 갈고 논매는 이야기보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면해야 하는 삶의 이야기가 소재가 됩니다.”
소설가 이동희 일생의 자료 모아놔
농민문학기념관이 설립된 것은 2005년 2월 10일. 문학관 설립에는 이동희 관장의 스승인 소설가 이무영을 기념하기 위한 취지도 있다. 이동희 관장은 문학 지망생 시절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면서 이무영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의 가르침을 통해 소설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단국대학교에서 스승의 강의를 이어받아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과 등이 있다.
문학관 설립을 위해 이 관장은 한국전쟁 때 소이탄을 맞아 불탄 옛집 터에 흙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너와로 지붕을 이어 복원한 생가에 모교 연구실에 있던 책과 자료를 5톤 트럭으로 네댓 번 날라야 했다.
현재 농민문학기념관에는 농민문학 작가인 이무영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소설가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 김용호, 구상, 권웅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영동 지역의 작가 박희선, 박운식, 장지성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이 문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단행본과 잡지를 포함해 약 5000권 정도다. 여기에는 1930년대 농민문학의 영향을 받은 북한의 책들과 잡지 도 포함되어 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편찬한 , 한글 소설을 출간하는 중국 출판사의 단행본도 전시되어 있다.
이 관장은 이 문학관을 기반으로 한 모임 ‘한국농민문학’을 바탕으로 계간지 도 출간 중이다. 한국농민문학 회원은 약 500명. 1990년에 창간호를 발간해 2017년 여름호까지 통권 102호를 출간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해
규모는 작지만 이 문학관을 통해 다양한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창작교실 ‘농민문학 사랑’을 운영하고 있고, 전원문학 콘서트도 연다. 얼마 전에는 농민문학 4대 작가 이무영,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의 활동전도 열었다.
때로는 인근에 위치한 매곡초등학교 학생들의 글짓기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전교생이 30여 명에 불과한데, 그중 절반가량이 문학관에서 글쓰기를 배운다. 이 관장은 “아이들의 삶의 수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아이들 반응도 좋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이 관심 있는 책을 선정해 독서 후 토론도 하고 독후감 쓰기, 시·수필·소설에 대한 설명이 수업으로 진행된다. 이 관장의 희망은 문학관 자료들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쉽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관련 협회와 다른 문학관, 박물관과의 교류를 통해 안목도 넓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요. 시골 농촌의 작은 시설이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과 호흡하고 있는 셈이죠. 소장품 등록이나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통해 궁벽한 지역의 자료가 중앙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싶어요. 또 한 집 한 집 민족의 애환을 지니고 있는 지역 농가를 개발해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관람 정보
주소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622-3
전화 043-743-5186
관람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관람료 무료
70,80년대 농촌에는 쥐가 엄청 많았다. 먹이를 구하려고 집 마당의 볏단과 부엌을 뒤졌다. 논밭에는 분탕질 잔해가 널려있었다. 심지어 방안으로 뛰어들어 주인장의 밥상을 덮치는 녀석도 있었다. 지금의 멧돼지 출몰지역 주민처럼 농사를 다 망치지 말기를 바랄 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농산물 적당량을 쥐가 차지하는 것으로 양해할 지경이었다.
“못 살겠다. 쥐를 잡자.”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해에 몇 차례씩 같은 날을 잡아서 모든 주민과 학생을 동원하여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그동안 집집마다 따로 쥐약을 놓았던 일은 풍선효과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을 전체에 쥐약을 놓고 쥐덫을 설치하는 일제소탕 작전을 하였다. 쥐꼬리를 모아서 실적을 보고하던 옛이야기다.
시간이 지나자 이 방법을 계속할 수 없었다. 개ㆍ돼지ㆍ닭 가축이 먼저 쥐약을 먹고 나자빠졌다. 영리한 쥐는 사람 냄새가 묻은 음식물이나 쥐덫에는 아예 접근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쥐덫에 걸리기도 하였다.
“이건 아니지! 다른 방법을 찾자.”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쥐에게 시련이 커졌다.
쥐약과 덫을 없애고 집집마다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고양이는 항상 쥐를 잡는 구조다. 쥐가 고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고양이는 쥐가 파고들어간 땅굴까지 쫓아갔다. 쫓기는 쥐가 편안하게 살았던 논밭을 버리고 잘 보이지 않는 돌담장 틈으로 숨어들었다. 쥐가 잘 보이지 않자 농민들은 행복의 시작인 줄 알았다.
“역시 고양이가 최고야!” 하면서 애지중지하였다. 고양이가 주인어른 밥상머리에 앉아서 음식을 받아먹기에 이르렀다. 강아지와 동급대우를 받는 반려동물이 되었다. 고양이의 전성시대였다. 그렇다고 고양이 때문에 쥐가 다 잡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자 배가 부른 고양이는 양지 바른 곳에서 낮잠 자기 바빴다. 쥐보다 덩치가 훨씬 큰 녀석들은 밤이 되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온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려운 쥐잡기 대신 닭과 계란의 포식자로 탈바꿈하였다. 고양이 수가 점점 많아졌다. 무대 위에 더 골치 아픈 주인공이 등장한 꼴이 되었다.
“고양이 때문에 못 살겠다!”
하루아침에 반려동물에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돌담장 속에서 쥐가 아무리 떠들어도 몸집이 큰 고양이는 작은 틈을 뚫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긁어댔지만 뾰쪽한 방법이 되지 못하였다. 쥐들은 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도망갈 이유가 사라졌다. 농산물이 풍부해지면서 추수하고 남은 ‘이삭’이 넓은 들판에 넘쳐났다. 쥐는 고양이에게 시달리던 때 먹이를 돌담장 속에 저장하는 요령을 터득하였다. 그전처럼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고양이는 말짱 허깨비야!”
고양이의 무용론에 힘이 실렸다. 고양이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가 식사 때에 나타나는 습성이 있다. 주인이 음식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길고양이가 되고 만다. 주인과의 사랑 다툼에서도 애완견에게 밀려났다. 얼마 후 고양이가 마을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은 쥐들의 세상이 되었다.
항상 먹히기만 하였던 쥐들이 변화하는 환경을 이용하여 천적 고양이를 확실히 잡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