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도로의 두꺼운 바닥을 뚫고 연약한 풀이 자라고 있다. 생명력의 끈질김과 그 강인한 힘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매일 아침 산책을 하며 지나다니는 집 주변에 있는 도로 위다. 통행량이 많지 않아도 트럭과 승용차 그리고 농업용 경운기가 가끔 다니는 곳이다. 지난가을에 도로를 넓히면서 새로 포장했기에 갈라진 곳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도로 한쪽에 바랑이 풀이 아스팔트를 위로 밀어제치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스팔트 두께도 꽤 되지 싶다. 차량이 지나가고 사람이 걸어 다니는 그 도로의 밑에서 연약한 풀(草)이 아스팔트를 뚫고 잎을 피어 올리고 있다. 장비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뚫을 수 없는 포장도로 바닥을 뚫고서 말이다.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바랑이 풀이다. 포장도로 틈새를 비집고 나온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굳어진 포장을 스스로 뚫고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도로 위 틈새에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튼 것이 아니었다. 다년생 뿌리에서 자란 풀 줄기다. 산책하며 이곳에서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풀이 솟아난 부분은 도로를 넓히기 전에 논둑으로 풀이 자라던 곳이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풀이 자라난 것이 틀림없다. 예전에도 똑같은 현상을 마산시에 살았던 친구 집 마당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친구 집 입구의 아스팔트로 포장한 마당 한가운데서 이른 봄에 꽈리 서너 포기가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주민들도 신기해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꽈리 줄기가 올라오던 주변이 불룩하게 들떠 있어서 스스로 밀고 올라왔음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가 쉽게 가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의 신비로운 힘, 경외 그 자체다. 카메라를 잡은 손이 떨리는 듯하다.
큰형님은 타고난 바람둥이였다. 키도 그리 크지 않으니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얼굴은 그런대로 말끔한 편이었다. 그런 용모로 여자를 유혹하는 재주는 좋았다. 당시 큰형님이 자랑해대던 무용담이 있다. 어느 다방 마담에게 눈독을 들이면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그 다방에 가서 가장 비싼 메뉴의 차를 주문하고는 말없이 마시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만 하면 마담이 다가와 말을 걸게 되어 있다는 얘기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찍은 후, 치밀하게 작전을 구사하고, 걸려들면 여지없이 낚아채는 재주를 큰형님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재주 덕분인지 어느 대학 메이퀸 출신의 여자를 사귄 적도 있고, 의사 딸과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선보러 나가 여자에게 퇴짜를 맞았으나 결국 그 여자가 다시 매달린 적도 있다. 직장에는 오피스 와이프가 있었고 퇴근하면 또 만날 여자가 있었다.
그런 형님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바람둥이 기질 때문에 자주 귀가시간이 늦었고 그럴 때마다 동생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 좌불안석이었다. 들어오면 가만 안 두겠다며 엄포를 놓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형님 때문에 애꿎은 동생들이 피해를 봐야 했던 것이다. 연애 대상자가 괜찮은 여자였다면 부모님은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님은 연애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괜찮은 여자와 사귀다가도 실컷 놀고 나면 차버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무책임하게 보였고, 인간적으로도 비난을 받을 만했다.
그중의 한 여자인 그녀는 형님의 여자였다. 필자보다 5세 위인 큰형님과 결혼할 사이였다. 나이는 필자와 동갑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가 탱탱하고 날씬해서 매력적인 여자였다. 미니스커트 아래 곧게 뻗은 두 다리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필자 재주로는 절대로 넘보지도 못할 미인이었다. 성격도 밝아서 우리 동생들이 모두 좋아했다. 필자가 대학 3학년을 마칠 무렵 그녀를 처음 만났다. 형님과 곧 결혼 할 사이이므로 시동생이 될 필자와 우리 동생들에게도 잘 했다. 동생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 해주겠다며 제의했을 때 필자는 서슴없이 “생맥주를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사 달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점심시간에 명동의 한 생맥주집에 갔다. 필자는 1000cc, 그녀는 500cc로 시작한 술판이 밤 11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처음에는 안쪽 아늑한 자리에 앉았다가 번갈아가며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자 아예 화장실 바로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맥주를 흘렸는지 바닥이 흥건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형수님 될 사람이라 형님 얘기로 시작했지만, 마침 필자는 2년간 사귀던 여자와 결별한 직후라서 할 말이 많았다. 도대체 왜 필자에게서 여자가 떠나갔는지 여자에 대해 궁금증도 많았다. 그날 필자가 1000cc 18개인 18000cc를 마셨고 그녀가 500cc를 같은 비율로 마셨으니 9000cc를 마신 셈이다. 필자 생애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서 맥주 집에서 영업을 끝낼 시간이라 거기서 그쳤다. 무려 11시간을 같이 마신 것이다. 나이가 같아서 통하는 얘기도 많았다. 어쨌든 그날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녀에게 특별하고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녀와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다른 동생들보다 유난히 친했다. 만날 때마다 밝은 미소와 애교 넘치는 행동이 좋았다. 필자는 그녀의 술친구이자 든든한 우방으로 우리 집 형수님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형님이 그녀와 헤어지고 말았다. 누가 어떤 연유로 헤어지자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전처럼 자주 볼 수 없었다. 다시 형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와 사귄다는데 이번 여자는 맥주를 사 달라는 필자의 제의에 콧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결혼 당사자가 중요하지 시동생들 비위까지 맞춰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동생들에게는 싸늘한 여자였지만, 형님은 결국 이 여자와 결혼했다.
술친구 그녀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였다. 어느 날 영등포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했다. 주변 여관을 찾아보았으나 여관도 찾기 어려웠고 어쩌다 찾은 여관은 빈 방이 없어 난감했다. 점점 더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래서 얼핏 생각해낸 것이 영등포 시장 근처에 산다는 그녀였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그녀가 반갑게 받았다. 얼른 오라는 것이었다.
시간도 늦고 술도 만취 상태라서 그날은 그냥 잤다. 깨끗하게 깔아준 이불과 요에서 잠이 포근하게 밀려왔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침식사를 차려놓았다며 불렀다. 아침상은 노릿하게 잘 구운 굴비 한 마리를 비롯해서 뻑적지근했다. 그녀와 겸상을 하면서 한마디도 안 했다. 할 수가 없었다. 이미 형님과 헤어진 마당에 필자와 이런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니 아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만 그녀를 잊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우선 형님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필자와 결혼한다 해도 한집안에서 형님과도 마주쳐야 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형님과 사귄 것은 사랑도 있지만, 그 당시 우리 집안의 재력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가업을 이어 받을 사람이고 필자는 그렇지 못한 위치이니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혼기가 차서 결혼을 서두르던 나이였고 필자는 군대 3년의 장벽, 남은 1년의 대학생활, 그리고 취직해서 자리 잡는 기간까지 고려하면 최소한 5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이 뜨거웠다면 이 모든 걸림돌들을 이겨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다 쳐도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만 띤 채 아무 말 안 했을 것이다. 연애나 결혼 상대자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필자는 그때 어렸다. 남자가 여자보다 정신연령이 뒤늦은 것이나 연애 경력으로 보나 미달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는 다르다고 한다. 우리의 결혼은 사랑보다는 조건이다. 조건이 좋으면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랑 없는 결혼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한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그것도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부러운 존재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그걸 못해보고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아버지는 섣달그믐날 저녁에는 밤새도록 온 집안에 불을 밝혀놓아야 조상님들이 잘 찾아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느새 해가 지면서 집안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며칠 전 동네 방앗간에서 뽑아다 놓아 꾸덕꾸덕해진 가래떡을 써셨다. 설날 아침에 끓일 떡국 떡을 준비하시느라 밤늦도록 떡국떡 써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섣달그믐날에 잠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억지로 버티다 결국 자정 조금 넘은 시간에 모두 곯아떨어졌다.
어김없이 설날 아침은 밝아왔다. 아버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큰 마당은 물론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마을 어귀까지 50여 미터 이상 말끔히 쓰레질을 하고 들어오면서 전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직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들을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깨우셨다. 새벽에 아버지가 말끔히 쓸어놓으신 길 따라 두루마기 옷고름 휘날리면서 사촌 남동생들 앞세워 휘적휘적 대문 안으로 들어서시는 작은아버지의 손에는 정종병이 달랑 들려 있었다.
드디어 대청마루에 정성껏 차례상이 차려지고 조상님의 상청이 열렸다. 설빔으로 모두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서니 그 숫자만 해도 열서너 명쯤 되어 보인다. 필자의 형제는 8남매, 그중 아들이 5형제. 작은아버지의 자손들까지 순서대로 늘어서 있으니 대청마루가 꽉 찼다.
차례 예식이 시작되면 조상 윗대 할아버지에서부터 차례차례 떡국과 빚은 술을 정성껏 올리신 후 아버지는 나직한 헛기침을 하셨다. 그 신호에 맞추어 우르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필자를 포함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어른들 따라 대청마루에 쪼르르 엎드린 채 어른들이 언제 일어나나 좌우로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아이가 있어 킥킥대며 웃기도 했다. 모두가 일어설 때 엎드리고, 엎드릴 때 일어서는 아이 때문에 안 그래도 겨우 참고 있었던 웃음보가 터지면 참으려고 애를 써도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열 번도 넘게 절을 하는 동안 킥킥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버지는 산만해진 아이들 쪽을 쓱 한번 훑어보셨다. 그러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들 움찔 놀라 얼어붙은 표정이 됐다.
침묵이 흐른 다음 아버지는 다시 눈빛을 풀고 차례를 마치셨고, 불호령이 떨어질 줄만 알았던 아이들은 아버지가 “조반을 서두르거라!” 한마디 하면 “휴! 천만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떡국으로 아침상을 물린 후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놓은 음식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면 아이들도 따라 부지런히 선산(先山)으로 향했다.
산소 위에 남은 잔설을 치울 때도 있었지만, 눈이 아주 많이 왔던 어느 해에는 눈 위에 그대로 돗자리를 펴고 절을 했다. 조상님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손과 발이 시려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인 사랑방에 들러 한 분 한 분께 세배를 하며 새해 인사를 올렸다. 이때 어르신들은 덕담과 함께 세뱃값으로 한과(漢菓)나 떡, 식혜 등을 내놓았으며 슬그머니 눈깔사탕을 손에 쥐어주셨다. 달콤했던 그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세뱃값으로 먹을 것을 내놓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마음이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요즘 아이들처럼 세뱃돈 받으려고 미리 계산을 하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글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귀촌을 하자고, 시골의 자연 속에서 노후의 안락을 삼삼하게 구가하자고, 흔히 남편 쪽에서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발칙한 발상이라 규탄당하기 십상이다. 아내에 의해서 말이다. 무릇 여자란 명민하게 머리를 쓰는 버릇이 있는 종족이다. 감관이 발달한 이 고등한 생물체는 도시의 아파트라는 쾌적한 온실과 결별하고 시골이라는 야생으로 이주하는 ‘거사’에 따라붙을 온갖 불편과 고생을 미리 훤히 내다본다. 일테면, 시골엔 손쉽게 쇼핑을 즐길 마트나 백화점이 없으며, 우아한 사교를 즐길 문화공간도 열악하고, 자칫 고독을 벗 삼아야 할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 풀이나 해충에게 시달릴 일이 정말이지 몸서리치게 싫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대뜸 반기를 들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귀촌을 선창한 남편은 머리칼을 득득 쥐어뜯으며 부르짖는다. “아아, 괴롭고 괴롭도다. 마누라는 어쩌면 그토록 나와 취향과 이상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무슨 잔인한 운명의 농간이란 말이냐!” 소나기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비감에 젖어 속으로 악을 쓰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불운을 타박하며 귀촌의 꿈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귀촌생활에의 도도한 로망과 세찬 영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편들의 경우엔, 불굴의 의지를 발동해 아내를 기차게 구워삶을 정교한 방책을 새삼 모색한다. 당나귀처럼 드센 고집으로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한, 자못 그럴싸한 유인책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청사진을 개발할 경우, 그는 비로소 성공을 거둔다.
나는 지금 경북 예천 풍양면의 시골마을에 있는, 정진성(69)씨 내외가 사는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정씨의 귀촌은 순탄한 과정을 밟았다. 상당수의 귀촌 부부들이 난해하고도 예리한 충돌과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귀촌에 이르지만, 그는 아내의 갈채와 자비에 힘입어 쾌조의 시발을 했다는 게 아닌가.
부부가 의기투합한 귀촌
서울에서 살았던 정씨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색적인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걸 알아차렸다. 서울을 냅다 걷어차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초저녁별처럼 영롱하게 들솟았던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들끓고, 소음과 미세먼지가 난무하고, 계산과 꿍꿍이가 창궐하는 대도시, 그 머리 아픈 정글을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이 심상치 않은 기분은 점점 자라 확고한 신념으로 비약했다. 이후 그는 드디어 아내에게 귀촌을 제안했다. 아내 전용숙(64)씨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선선히 동의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진성씨는 귀촌을 둘러싼 아내와의 논쟁이나 힘겨루기를 일거에 면제받은 셈이다. 그렇게 단숨에 의기투합해서 부부가 시골에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 아내 전용숙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통은 여자들이 귀촌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시골로 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어요. 남편이나 저나 서울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제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을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요. 귀촌을 하면 실컷 꽃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어요.”
“꽃의 그 무엇을 매우 좋아하죠?”
“음.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이나 향기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같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피어난다는 게 참 좋아요. 크거나 작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든 초목마다 제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우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남편께서 귀촌을 발상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생활이 주는 피로감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남편은 토목 기술자로 평생 공사 현장에서 뛰었어요. 대림산업 부장으로 재직했던 1996년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로 토목 현장을 누빈 사람이었죠. IMF 직후엔 심각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엔지니어에겐 정년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이 가능하죠. 그러나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신에 공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비즈니스상의 술자리가 잦아 더 이상 일을 계속하다간 몸부터 무너질 거라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즈음 귀촌을 착상했는데, 다행히 남편의 고향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10년째 비어 있는 집이 있어 결정과 실행이 빨랐어요. 그러고 보면 저희는 귀촌이자 귀향을 한 경우라 봐야겠죠.”
“예수조차 고향에선 배척당했다고 해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쏠렸을 이웃들의 각별한 관심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텃세랄까, 그런 거 말이죠? 처음 그런 문제에 염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워낙 인심 좋고, 반듯한 풍속이 정착된 시골이라서 오히려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융화가 쉬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우리 마을의 노인회장이에요.”
전용숙씨 내외가 사는 집의 풍색은 소탈하다. 시부모님들이 살았던 당시의 구색을 가급적 그대로 놓아두거나 살려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약간의 손질과 약간의 단장을 했을 뿐이다. 인간이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집이라는 사물 역시 결국은 자연으로 귀환하는 법이니 굳이 거창한 인위를 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햇볕이 물살처럼 찰랑이며 들이쳐 화단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 이미 만족스럽고, 대기의 입자를 흔들며 불어오는 솔바람, 강바람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유리창이 있기에 더욱 흡족하다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시골살이 3년을 통해 배우거나 얻은 것 중에 최상의 것은 무욕(無慾)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라지.
시골생활이 부여하는 절호의 기회들
집 뒤편으로는 제법 너른 텃밭이 딸려 있다. 12월의 텃밭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하지만 온기라 할 만한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서울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키워 자연과 땅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웠던 전씨에게 시골 텃밭은 숫제 낙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녀는 갖가지 작물을 심어 기른다. 풀을 뽑아내는 일이 고역스럽다기보다는 미안스러워 내심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보낸다. 텃밭이니 가혹할 정도의 노동은 필요치 않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기에 소출에 욕심을 낼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비지땀을 흘려 공을 들이는 건 작물들이 갓 태어난 손주나 노랑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애틋한 생명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텃밭 농사를 서정적으로 즐긴다. 도시의 여자들이 찜질방에서 즐기듯이, 찻집에 둘러앉아 애먼 남편들의 흉을 푸짐하게 늘어놓으며 수다를 즐기듯이, 그녀는 텃밭에서 유유하게 노닌다.
텃밭보다 더 오래, 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꽃밭에서 구현한다. 그녀는 해마다 30여 종의 화초를 가꾼다. 꽃철이면 울안에도 울밖에도 온통 꽃이다. 경북대 농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꽃은 만고에 친애할 만한 동무다. 유심한 눈길로 꽃을 바라봐 꽃과 바람이, 꽃잎과 햇살이 어떻게 속삭이는지를 재빨리 간파한다. 폭풍에 찢긴 꽃대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 만개한 꽃들의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에 기쁨을 담뿍 담는다. 그렇기에 시골의 나날은 태반이 꽃날이렷다. 이런 자각을 할 때면, 그녀는 서둘러 일찌감치 귀촌을 하지 않은 것을 살짝 아쉬워한다.
“서울에 살 때 실내원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실내조경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화센터 원예 강좌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어요. 꽃을 즐기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원예치료사 자격증도 있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치료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일상 안에 꽃 사랑이 들어와 있을 경우, 한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 같아요.”
“꽃을 너무 편애하는 건 아네요? 사람도 꽃 아닌가(웃음)?”
“맞아요. 사람과 꽃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시골에 살며 더 실감해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요즘의 시골 인심도 도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보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래요. 뭐든 나누고 돕는 풍속이 여전하거든요. 귀촌한 뒤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죠? 그건 시골의 바탕에 깔린 나눔의 정서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라 봐요. 무조건 나누고 베풀어야 해요. 그런 처신이 손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득을 얻는 현명함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시골생활이란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절호의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가 저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상은 이웃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 바로 그런 것이에요. 나만을 중심에 놓는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남들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건 참 잘 사는 인생이지 않겠어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평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할 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망둥이는 자주 길길이 날뛰어 소란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마음의 동향을 주시해서 단속할 수 있는 기회를 시시때때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게 귀촌생활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시골생활을 무난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의 스케일을 확대해야 한다. 마을 전체를 나의 집으로, 마을 사람 전부를 내 가족으로 바라보는 광폭의 마음, 그리고 소소한 풀꽃에까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까지 가세한다면 귀촌의 나날들은 안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시골에 살며 저는 많은 걸 얻었어요. 서울에 살 때엔 부부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기 내려온 뒤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렇다 해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미스터리이지만, 남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기할 건 딱 포기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서울에서 지출했던 생활비의 절반쯤이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매력적이죠. 천성이 게으른 사람들에겐 오직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갖가지 노동도 운동이나 춤처럼 즐길 줄 아는 힘이 생겼고요,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어요. 남모를 애환? 숨기고 싶은 고민? 그런 게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사실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인 존재잖아요? 마음에 소용돌이가 칠 때면 강변을 산책해 속을 비워냅니다. 우리 마을의 멋진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함께 걸어보실래요(웃음)?”
전씨 내외가 앞장서 강변으로 향한다. 첼로의 저음처럼 깊어가는 12월의 강변 오솔길. 강가에 늘어선, 잎 떨군 나무들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모습으로 비쳐서. 사람이 어떻게 저 겨울 나목의 허심(虛心)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마는, 가급적 비우고 또 비우라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전용숙씨가 누리는 소박한 시골생활의 즐거운 지향도 비우기에 있다는 것이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시간처럼 오묘한 것도 없다. 공간은 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시간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시간은 강물을 닮아서 때로는 폭포처럼 정신없이 바쁘다가도 어떤 때는 평탄한 지형을 흐르는 잔잔한 강물처럼 지루하기도 하다. 때로는 가뭄에 드러난 강바닥처럼 별일 없이 왜소하게 흐르다가도 어느 때는 장마로 부풀어 올라 모든 것을 휩쓸어 가듯이 도도하게 흐르기도 한다.
한때 과학 시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등장하는 시간의 개념을 배우면서 무척 신기하고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모든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다를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과학적으로도 다르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춘다는 데에서는 머리 회전도 멈추었다.
시간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늙었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사실 젊은 날에 이런 시간의 비밀을 읽어내기에는 지나치게 우리 몸이 뜨겁고 혈기 왕성했다. 시간과 한 몸이 되어 뒹굴 때는 시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을 관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만 비로소 시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이미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 문제이지만.
병신년이 서녘 하늘가로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면서 정유년이 밝았다. 그렇지만 광장 촛불로 촉발된 시간의 과잉은 새해의 담장을 무시하고 정유년의 정결한 아침 마당으로 넘쳐흐른다. 인간이 설치한 인위적 시간의 칸막이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다. 인류가 그토록 애써서 쟁취한 시간의 분절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넘쳐나는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도 순결한 새해 소망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시간이 비록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슬퍼하지 말고 새해에는 살을 빼야 한다. 그것이 비록 작심삼일(作心三日)일지라도 우리는 새해 아침 자신과 약속해야만 한다. 새해도 주머니가 두둑해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주머니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그것이 시간에 대한 예의이다.
눈 덮인 새하얀 들판을 보듯 새해 아침은 그렇게 정결했으면 좋겠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로 첫발자국을 찍고 싶다. 새해는 그렇게 시작하고 싶다. 늘 단골로 다니는 을지로 냉면집을 찾아가다 보면 을지로 3가 못 미쳐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새해가 되면 떠오르는 김종길 시인의 라는 시다. 올해는 유독 그 시비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었다.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 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중략)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새해는 젊고 어린 세대들의 마음에 고운 이빨이 돋기를 기원한다.
둘째 동생이 우체국에 예금을 많이 한 VIP 고객이라 한다. 요즘 시중 은행의 저축예금 금리가 바닥을 기고 있는데 그중 우체국은 금리가 더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왜 우체국에 예금을 하느냐고 했더니 나라에서 하는 금융기관이라 금리는 낮지만 믿을 수 있어 그냥 맡기고 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제2금융권까지 찾는 필자와는 다르게 느긋하다.
그런데 이번에 신나는 일이 생겼다. 우체국에서 일 년에 한 번 김장철에 우수고객을 초청해 김치 투어를 하는데 동생이 초청된 것이다. 다른 사람 한 명과 동반해서 갈 수 있는 이벤트였다. 또 충청도 진천에 있는 식품회사에서 김장 체험을 한 뒤 자기가 만든 김치 10kg을 선물로 받아온다고 하니 은근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둘째 동생이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뛸 듯이 기뻤고 이 정도면 올해 김장은 안 해도 될 것이어서 신이 났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해도 각 가정에서 김치를 많이 담지는 않는다. 소규모 가구 증가와 주거 양식이나 생활 방식의 변화로 김장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고, 한겨울에도 마트에 가면 배추를 살 수 있고 김치냉장고의 등장으로 언제든 만들어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김장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된 자랑스러운 문화다. 필자도 김장철이 되면 아예 안 할 수는 없어 대여섯 포기 정도만 담근다. 누가 김장 몇 포기 했냐고 물으면 슬쩍 민망해지는 양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11월이 되면 각 가정마다 김장을 하는 일이 대행사였다. 그 양도 100포기 또는 200포기 등 어마어마했다. 또 배추를 보통 4쪽으로 갈라서 소금에 절이기 때문에 그 수가 엄청났다. 김장철만 되면 필자가 살던 정릉의 마당 넓은 집은 분주했다. 약간 비탈진 언덕 위에 있던 필자의 집으로 시장에서 엄마가 고른 배추를 배추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로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며 날라다 주었다.
그러면 대문간부터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뒤란 수돗가로 옮기는 건 우리 식구 몫이었다. 아버지와 엄마, 우리 딸 셋이 총동원되었다. 김장은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배추를 절일 때부터 윗집 꼭지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도와줬다. 커다란 함지에 맛있게 생긴 노란 속이 보이는 배추를 네 쪽으로 갈라 하룻밤 절이고 깨끗이 씻어 넓은 대나무 채반에 엎어 물기를 빼고 산더미처럼 썰어놓은 무채에 젓국과 고춧가루, 마늘, 파, 갓, 각종 양념을 섞어 새빨갛고 걸쭉한 배춧속을 만들었다.
김장하는 날 필자 엄마는 김장보다는 쌀밥과 쇠고기뭇국, 돼지고기 수육을 만드느라 바빴다. 몇백 쪽이나 되는 김치와 동치미까지 다 만들고 나면 모두들 둘러앉아 엄마가 끓인 고깃국에 밥을 말고 노란 배춧속에 빨간 양념과 돼지고기 수육을 얹어 싸 먹으며 왁자지껄 수다판도 벌였다. 솜씨 좋은 동네 아주머니들이었으므로 우리 딸들은 그저 심부름이나 하면 충분했다.
김장독은 마당 한쪽에 묻었다. 서너 개의 김장독은 한겨울 동안 땅속에 묻혀 요즘의 김치냉장고 맛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맛있는 김치를 먹게 해줬다. 그 시절 장독 속에서 갓 꺼낸 김치와 동치미의 맛은 어디에서 찾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특히 추운 아침 바가지를 들고 나가 살얼음 헤치고 떠온 동치미 국물은 사이다의 탄산의 짜릿한 맛보다 더 시원했는데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건 장독 위를 덮은 새끼줄로 꼬아 만든 예쁜 덮개다. 솜씨 좋은 아버지가 만드신 고깔 모양의 짚 덮개는 눈, 비로부터 장독을 보호해주기도 했지만, 그 모양이 참 예뻤다.
예전엔 이렇게 한겨울 반양식이라는 김장을 축제처럼 치렀는데 이제 그런 풍습은 사라져버렸다. 요즘에 아무리 성능 좋은 김치냉장고가 있다 한들 그 시절 땅속에 묻혔던 김치 맛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 마당 넓은 집에서 벌어지던 김장 잔치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동생과 함께 다녀 온 김치 축제는 즐거웠고 김치 맛도 정말 좋았다. 한 사람당 노란 속이 꽉 찬 배추 9쪽이 배당되었고 이미 만들어놓은 양념을 넣어서 김치를 만들었다. 다들 자신이 가져갈 김치라서 그런지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집으로 배송까지 해준다 해서 필자는 편하게 앉아 맛있는 김치를 맛보게 되었다. TV를 켜니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줄 김치를 대량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옛날 왁자지껄 떠들며 김장을 하던 날이 떠올라 아련해진 가슴으로 추억에 잠겨봤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날 인생 1막에서 인생 2막으로의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용도변경’이라는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통해 활기찬 후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용도변경’은 필자의 이름 ‘변용도’를 원용해 만든 단어다.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도(用途)와 한글 표기는 같다. 필자는 이 단어로 가족을 위한 그동안의 헌신적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또 생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두었던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47세의 조기퇴직, 금융위기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사진작가, 강사로 거듭나 현재는 인생이모작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손해보험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는 이후에도 보험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지금은 평생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오늘 들려드리려고 한다.
47세에 용도 폐기되다
필자는 대학교 졸업 직전 고려화재해상보험에 입사해 20년을 다녔고 촉망받는 직장인이었다. 20년 전에는 임원으로서 부산·경남 본부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말에 해임되었다.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 즉 용도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름에 빗대어 ‘용도폐기’되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금융위기(IMF)까지 닥쳐 재취업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밥벌이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다. 만화방으로 시작해 부대찌개 음식점까지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월 40만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 조경관리사로 취업해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회사 마당을 쓰는 마당쇠 역할도 했다. 일당을 벌으려 MBC 드라마 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퇴직 후 10년간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용도변경된 삶을 살기로 하다
필자의 나이 57세 때 두 친구를 갑자기 잃었다. 모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느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퇴직 후 잡다한 일을 하며 보낸 10년을 되돌아보았다. 분명 열심히 살았으나 세월만 쏜살같이 지나가고 내로라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두 친구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100세 장수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람 있는 후반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40,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후의 긴 시간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삶이었고, 타인을 위한 용도, 즉 타(他) 용도로 사는 삶이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인공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필자는 먹고사느라 오래전에 접어둔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꿈을 실현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사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언덕배기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꿈과 유사한 사진으로 바꾸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인생 2막의 길이었다.
60세에 늦깎이 사진작가가 되다
필자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웠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채화를 자주 그렸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직장에서 홍보 업무와 사보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흥미를 키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6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진을 배울 용기를 가졌던 것 같다. 2010년 7월, 필자는 고양시 무료사진 교실에 참여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초보자 솜씨에 카메라 장비 또한 콤팩트 카메라가 전부였다. 함께 공부한 다른 수강생의 고가 카메라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과 형편을 인정하고 사진 실력 향상에만 몰입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부터 공인 사진작가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인 사진작가 인증을 받으려면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이나 입상으로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이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 년에 스물여덟 번 응모해 절반을 낙선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1년 9월에 드디어 인증을 받아 공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해 국전에 입선했고 부산일보가 주최한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작품 ‘닭장’이 좋은 심사평으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사진 부문에서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으로 뽑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40만장을 찍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6년 4개월을 매일같이 사진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는 무려 40만장에 이른다. 역산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200여 장을 찍어야 나오는 숫자다. 어느 날은 파파라치로 오인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좌절과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몰입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4일에는 KBS 1TV 에 사진작가로 출연함으로써 삶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은퇴연금협회와 머니투데이 방송이 주최한 ‘The Senior 2016’에 사진 전시 초대를 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을 주제로 사진을 전시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는데 작품 모두가 팔려나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진을 바탕으로 명강사에 도전장을 내밀다
카메라를 들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짧기만 하다. 이제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카메라는 필자의 또 다른 친구다. 100세 장수시대가 두렵지 않다. 은퇴 전의 직업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결과가 됐다. 이후 필자는 사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영역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통한 여가관리의 모범적 사례가 되면서 그 경험을 배우려는 퇴직 예정자와 은퇴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62세에 또 다른 분야인 강사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여가설계, 변화관리 강사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보다 강사로서의 활동이 더 많아져 기업체와 국가 산하 인력개발원,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사회종합복지관 등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 SBS라디오 러브에프엠의 프로그램에 3년간 고정 출연, 토마토TV와 머니투데이 방송에서 특강, 한국직업방송 로 출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을 기회로 전환하는 ‘용도변경’의 삶이 성공의 핵심
필자는 사진작가, 강사로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제2직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전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과거를 내려놓고 현실을 인정하며 몸집 줄이기(다운사이징)로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 ‘용도변경’의 생활 방식이 성공의 핵심 역할을 해줬다. 뱀이 고통을 참으면서 허물을 벗어야 살아갈 수 있듯 환경 변화에 대한 꾸준한 자기 변신, 즉 용도변경을 통한 2차 성장은 인생 2막의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라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다.
베풀고 나누면서 다 쓰고 가리라
필자의 오늘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은혜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은혜에 보은할 할 때라 여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베풀고 나누는 사회공헌을 위해 또 다른 용도변경, 즉 ‘공(公)용도’를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의 하나로 두 권의 책, 와 를 출간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음을 느낀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필자의 소소한 경험담이 같은 길을 가려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이날도 역시 쾌청하고 한낮은 31도의 무더운 날씨였다. 미리 알아봤던 여행 내내 흐리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틀려서 너무나 고마웠다. 아침식사는 일본 가정식을 택했다. 김치 없이 하는 식사가 심심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아침상을 받았다. 실이 죽죽 늘어나는 낫또를 보고 손녀가 거미줄 같다며 웃었다.
스케줄은 아기들을 위해 ‘해양 박 공원’에서 ‘오키짱 쇼(돌고래 쇼)’를 관람하고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커다란 고래상어를 보기로 했다. 사실 필자는 돌고래 쇼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살아야 할 돌고래를 훈련시켜 사람들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게 마음 아프다. 돌고래는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이런 쇼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아기들이 좋아한다니 어쩔 수 없이 관람하기로 했다.
‘해양 박 공원’에 가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어 북부에 있는 100년 전통을 가진 음식점 ‘우후아(대가)’에 들렀다. 길 옆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이 음식점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마당이나 안쪽 어디에든 크고 작은 모습의 다양한 ‘시사’가 이곳을 지키겠다는 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구(흑돼지)구이 정식, 아구 우동, 돈가스 정식 등의 메뉴가 있는 정통 일본식 집이었다. 검은색 목조건물인 이 음식점은 마룻바닥이 넓은 대청으로 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오르내리는 좁은 나무 계단이 아기자기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다다미방도 흥미로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폭포가 흘러내리며 자연의 운치를 물씬 풍기는 일본식 구조의 집이었다. 이제까지 깔끔한 휴양지만 보았다면 이곳은 일본의 체취가 느껴지는 정감 넘치는 곳이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우후아’에서 점심을 마치고 ‘추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해양박 공원’으로 갔는데 규모가 엄청났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속에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걷느라 땀깨나 흘렸다. 평일인데도 우리나라 제주도 같은 관광지여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도 많았다. 돌고래가 안쓰럽긴 해도 손녀 손자를 안고 손뼉을 치며 쇼를 관람했다.
돌고래 쇼가 끝난 후 추라우미 수족관에 가니 지인 한 분이 생각났다. 코엑스 아쿠아리움 부사장이신 지인은 코엑스 수족관을 직접 설계하셨는데 아쿠아리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규모는 비슷했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이 수만 마리 정어리 떼의 군무가 멋지다면 이곳 ‘추라우미’는 거대한 고래상어가 놀라웠다.
날씨가 너무 더워 좀 지쳤을 때 저녁식사로 ‘플리퍼’라는 유명 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해서 기운이 번쩍 났다. 역시 여행은 식도락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우리 나이가 되면 가장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여행 동안 손 하나 까딱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니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숙소에 돌아와 아기들을 재운 후 아들과 며느리가 근처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하고 오겠다면서 나갔다. 다정하게 나가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즐겁고 흐뭇했다.
가을이 온전하게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논 물웅덩이에도 얼음이 얼었다. 추수 끝자락 논에 널린 볏짚 위로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강아지 목줄을 잡은 손끝이 시리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다. 찬바람이 대나무 잎을 가르며 쌩쌩 불던 겨울 밤, 어린 필자는 어머니 따뜻한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다. 생일이면 꼭 끓여주시던 따끈한 미역국도 생각난다.
미역국은 아이를 낳은 산모에겐 필수 음식이다. 산후조리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모의 밥상에 꼭 올라오는 음식이다. 가난한 산골마을에서도 아이를 낳은 산모는 미역국을 꼭 먹었다. 아내가 큰아들 낳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두 손주를 우리 부부에게 안겨준 녀석이다. 80년생이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아내는 서울시 망우리의 처가에서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의 산통이 잦아져서 청량리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차를 불렀으나 도착이 늦어 처가 근처의 작은 병원에 급히 입원했고 그곳에서 첫아이를 순산했다. 여기서도 아침, 점심, 저녁 산모 밥상에는 미역국이 따라 나왔다. 아내는 매번 미역국을 다 먹지 않고 남겼다. 그나마 필자와 시어머니의 권유로 두세 숟가락 떠먹는 게 고작이었다. 미역국이 산모에게 좋다는 것은 알지만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젓갈을 좋아하는 등 다소 짜게 먹던 아내의 입맛에는 싱거운 병원 음식이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미역국을 싫어했다. 그래서 아내가 미역국을 남기면 대신 필자가 먹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고 했으니 남편이 미역국을 먹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을 잘 먹었다. 특히 부드럽게 푹 끓인 미역국을 아주 좋아했다.
필자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피난처를 찾아 거창 지역에서 산을 넘고 넘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이주하셨고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고 청학동 계곡 주변에서 다랑논을 만들어 논농사도 지으셨다. 어느 가을날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총질을 하지 않고 소나무 둥치에 묶어두고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밧줄을 간신히 풀고 그 길로 동네를 떠나셨다.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도 팽개치고 빈 몸으로 청학동에서 10리 길이나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마을로 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다.
옛날 시골생활이 다 그랬듯이 필자의 집도 지지리 못사는 가난한 집이었다. 보리가 익어가는 춘궁기면 뒷산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고들고들 말려둔 것을 솥에 넣어 밥을 해먹는 날이 다반사였다. 고향 마을에선 이것을 ‘송구밥’이라 불렀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생일이면 어머니는 집 안 구석에 아껴둔 찹쌀과 팥으로 찰밥을 하셨고 미역국도 함께 끓여내 주셨다. 미역은 아버지가 하동읍 장날에 40리 길을 걸어가 사오셨다.
생일 아침이면 새벽녘에 일어나신 어머니가 불을 지펴 큰 가마솥에는 밥을 짓고 작은 가마솥에는 미역국을 끓이셨다. 그런 뒤 안방 윗목에 정화수 한 사발과 팥물이 곱게 물든 찰밥 한 그릇, 미역국 한 대접 그리고 잘 다듬은 짚 서너 줄기를 묶어 벽에 비스듬히 세우고 삼신할머니께 기도를 드렸다. 꿰맨 자국이 있는 치마저고리이지만 깨끗이 손질해 갈아입으시고 다소곳이 앉으셔서 두 손을 비비시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들의 무병장수를 비셨다. 그러고 나면 찰밥과 미역국은 필자 차지가 되었다. 그 시절의 미역국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미역국에 고기를 넣을 만큼 형편이 좋은 살림이 아니어서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을 맞췄을 뿐인데도 참 맛있었다. 일 년에 서너 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었으니 당연히 꿀맛이었다. 미역 또한 자연산 돌미역이었을 테니 지금보다 그 맛이 풍부하면서도 구수했다. 세월이 흘러 먹거리가 많아진 요즘 세상에도 미역국은 여전히 필자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지금은 거의가 양식 미역이다 보니 예전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미역국을 즐긴다.
남편들은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기 힘들다. 물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이것저것 다 챙기는 아내들도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야 더 정성이 담긴다. 서울에서 주로 자라고 생활한 아내의 입맛과 시골 촌놈인 필자의 입맛이 비슷할 리 없다. 두 사람 입맛이 비슷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건강을 위한 웰빙 먹거리 바람 덕에 요즘은 아내도 시골 음식을 점점 좋아하고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비롯해 우거짓국, 된장찌개, 청국장도 밥상에 자주 오른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채소 코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가 즐겨 먹는 머위, 곰취에 아내도 이젠 익숙해졌다. “시골 촌사람 아니랄까봐 티낸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이젠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제는 아예 주변이 논밭인 고양시의 외곽 전원마을에서 살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 텃밭도 가꾼다.
나이가 들어가고 미역국을 좋아하는 남편과 오랫동안 살다 보니 아내도 요즘은 입맛을 들여 자주 미역국을 끓인다. 쇠고기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끓여 한 대접 가득 퍼주면 필자는 뚝딱 먹어치운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니다.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입맛과 지금의 입맛이 같을 수는 없다. 고기도 안 들어가고 양념도 안 된 미역국이지만 가끔 어린 시절에 먹던 그 담백한 맛을 느끼고 싶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미역국을 먹을 때면 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새벽에 필자에게 줄 음식들을 마련하느라 아궁이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손으로 끓이시던 미역국은 이제 필자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젖줄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진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필자가 미역국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