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의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을 앞두고, 올해 10월부터 시작된 시범사업이 내년 1월 15일까지 진행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사회적으로 논의된 것은 2009년 ‘김 할머니 사건’ 이후부터다. 당시엔 ‘사전의료의향서’로 불렸고 이후 민간 차원에서 캠페인을 통해 작성되기도 했다. 정부의 공식 사업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제각각 이뤄져 작성을 고려하는 시니어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
정부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관련한 이번 연명의료 시범사업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위해 희망자와 상담하고,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작성된 의향서를 등록해주는 기관과 작성된 의향서에 따라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이행하는 병원이 지정된 것이다. 정부는 이 기관들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진단해 시범사업 이후 제도를 시행할 때 보완할 계획이다.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작성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면 일단 정부가 시범사업을 위해 지정한 기관으로 연락해보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비공식 기관에서 작성하면 효력 없어
현장 관계자들은 정식 등록기관이 아닌 비공식 민간기관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유도하는 곳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한다. 이들 민간기관들은 홈페이지나 SNS 등을 통해 임의로 만들어진 양식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하면서 작성과 보관에 대한 비용 등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범사업의 공식 등록기관들은 의향서 상담과 작성비, 등록비를 받지 않는다. 관계 기관은 여전히 활동 중인 비공식 민간기관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설립추진단 백수진 부장은 “시범사업 등록기관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 작성된 의향서는 양식이 동일해도 법적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는 등록 과정에서 진행되는 상담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전에 작성된 의향서들 역시 법적 효력은 없다. 다만 현재 의향서 작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의사능력이 없는 환자라면 과거에 작성한 의향서를 추정적 의사로 활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참고자료일 뿐 효력을 지니진 못한다. 의사능력이 없는 환자가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가족 2인의 동일한 의사 진술이 있어야 한다. 연명의료결정법상 가족 전원의 합의도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시범사업에서는 제외된다.
정부는 이번 시범사업에서 각 공식 등록기관이 지방의 다른 협력기관과의 협약을 통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대한 상담과 작성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등록기관 중 2개의 의료기관을 제외하면 공식 등록기관이 서울에 두 곳, 대전에 한 곳뿐이기 때문이다. 타 지역의 수요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문제는 협력기관과 비공식 민간기관을 일반인들이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관계자들은 “반드시 공식기관을 통해 주거지 인근의 기관이나 상담사를 안내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희망자들이 주의해야 할 사항은 더 있다. 의향서 효력에 관한 내용이다. 공식 등록기관인 각당복지재단 관계자는 “간혹 의향서를 작성하고 나면 교통사고 등 응급상황에서 심폐소생술 등 의학적 처치를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연명의료 중단은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이 있을 때만 진행하며 의향서를 작성했다 해도 예기치 못한 응급상황에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전에 웰다잉 교육과 숙고 필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는 안락사나 존엄사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다. 의향서 작성은 임종 과정에서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의학적 처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지, 생을 일찍 마감하고 싶다고 해서 죽음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는 아니다. 시행 관계자들이 연명의료결정법이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11월 15일 기준으로 전국에서 시범사업을 통해 작성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총 1331건. 적지 않은 숫자다. 현장 실무자들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결정하기 전에 관련 기관에서 진행하는 웰다잉 수업 등 교육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결정하는 일은 심사숙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 혹시 상대를 못 알아볼까봐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자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니가 대학생이고 필자가 중학생일 때 이문동 주택에서 월세를 산 적이 있다. 우린 별채에 살고 주인은 안채에 살았다. 작은 정원에는 철 따라 꽃이 피었다. 청신한 봄이면 유난히 라일락꽃이 탐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 핀 꽃은 가난했던 우리 자매의 방을 향기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첫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우리의 꿈을 키워가며 설레던 시절이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는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아들 넷, 딸 하나였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갈한 모습에 세련미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가족이 성가를 부를 때면 아들들은 테너와 바리톤, 딸은 알토, 어머니는 소프라노로 멋진 화음을 들려줬다. 경외감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는 이북식 김치밥을 주발에 그득히 담아 건네주시곤 했다. 김치와 고기를 듬뿍 넣은 따끈따끈한 밥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처럼 맛있는 김치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던 우리는 이제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 자매는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에 만난 둘째 아들에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뵈올 수 있기를 잔뜩 기대하며 현재 어디 사시는지, 건강하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해하며 어머니가 치매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니,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엉망으로 변해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 자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매. 인간에게는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인 마무리를 방해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가 예견된다면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남은 삶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배우자나 자식들은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고 평판을 염려해야 하고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산 자들이 종종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할 수 있으려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치매가 깊어 회복할 수 없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듯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치매 집단시설도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지 환자를 위한 공간은 아니다.
죽을 날 기다리며 남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은 최악이다. 필자라면 한 손에 읽던 책을 든 채 자는 듯 죽고 싶다.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눈만 멀뚱멀뚱.
“할머니 나이가 몇이세요?” 묵묵부답.
“할머니 집이 어디세요?” 무표정.
“이 사람 누구예요?” 딴청.
그런데 한 자리 숫자를 아래로 여러 개 써놓은 종이를 네댓 개 보여주며 “아무거나 위아래 숫자를 더해보세요” 하니 10초도 안 되어 분명하게 숫자를 말한다. 모두 정답이다.
그러셨다. 일제강점기 암산 7단의 머릿속에 아직 주산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선 치매로 오래 편찮으셨다. 산을 좋아하셔서 친구 세 분과 세계 3000m급 산도 너끈히 등정하셨다
네 분이면 택시도 한 대, 테이블도 하나, 호텔도 한 방이면 되니 좋다 하시며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일본 잡지 을 구독하시고, 다녀오신 분을 수소문해 교통편, 날씨, 대사관, 호텔, 주의할 점, 금액 등을 산정하시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을 가장 잘 타신다는 친구분이 혼자 도봉산에 가셨다가 낙상해 고관절을 다쳐 깁스를 하고 움직이질 못 하신다 하더니 그로부터 8개월 뒤 돌아가셨다.
친구 일을 겪으신 후 자식들 고생하면 안 된다 하시며 등산 장비 일체를 처분하시고 6개월을 거의 집에서 쉬셨는데 그때부터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취미인 등산을 못 하신 뒤로 6개월 사이에 바로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중1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황스러웠던 날보다 더 놀랐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경련이 일어날 정도이니 아마도 필자 인생에 가장 놀란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머니는 아내와 함께 산에 모시고 가도 차에서 내리시질 않았다. 아마도 당신이 다치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말씀이 어눌해지시고 깜빡깜빡 하시는 빈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급성이란 이런 상황인가 할 정도로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지셨다.
2~3개월에 한 번씩 찍은 사진을 비교해봐도 눈에 띌 정도로 체중이 줄었다. 당시는 요양원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집에서 아내가 모셨는데 잠시도 곁을 떠날 수 없었고 수시로 해야 하는 빨래는 늘어만 가 결국 아내도 아프기 시작했다. 필자가 퇴근 후 집에 가면 늘 환자가 둘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이사를 갈 정도로 생각하기 싫은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만나면 치매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느 누구도 치매라는 질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자식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할머니 경우를 봐서 치매가 어떤 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테고,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셨고 또 그 후유증이 평생 간다는 것도 실감했을 것이니 만약 엄마가 치매에 걸리면 아빠가 알아서 혼자 책임진다. 만약 아빠에게 닥치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놨으니 그동안 고생만 하신 엄마 가시는 날까지 잘 모시고, 될 수 있으면 너희들 오기 힘든 가장 먼 곳으로 나를 보내라. 너희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왔다 갔는지도 모르고, 죽을 줄도 몰라 살아 있을 경우 아빠는 너희들에게 추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고, 아빠로서 너희들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고 싶으니 요양원 비용만 계좌이체하고 절대 면회 오지 마라. 이것은 너희에게 주는 아빠의 선물이고 유산 중 일부임을 기억해라. 두렵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일명 ‘웰다잉법’에 따라 8월 4일부터 말기환자에 대한 호스피스가, 내년 2월부터는 임종기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해졌다. 우리 삶의 일부인 ‘죽음’에 대한 법률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동안 ‘죽음’과 관련한 책을 출간하고 다양한 강연을 펼쳤던 서울아산병원 유은실(劉殷實·61) 교수는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는 최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데이비드 케슬러의 을 우리말로 옮겼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웰다잉법을 이르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올해 8월 4일부터는 말기 암환자에 한해 시행되던 호스피스 서비스가 후천성면역결핍증·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만성간경화 말기 환자에게도 확대됐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도 중요하겠지만, 유 교수는 그보다 앞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개개인의 마음가짐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법률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자연스레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겠지만, 무엇보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의사와 환자를 곁에 둔 가족에게 더욱 중요한 이야기다.
“사실 의사들은 늘 죽음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의식하려 하지 않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또 주변에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를 돌보는 분들이 읽으면 좋겠더라고요. 막상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이런 책을 읽게 되지 않아요. 오히려 아직 건강한 중장년이나, 환자를 둔 가족이 읽으면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죠.”
웰다잉법 시행, 죽음을 이야기해야 할 때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의미나 영적인 부분을 다루면서도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등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실질적 항목들을 소개한다. 유 교수는 일단 이러한 책을 사서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 준비의 첫 단추를 꿴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우리 여고 동창 중에는 의사가 꽤 많은 편이에요.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제가 어디서 강의하는 걸 들었는데, 다들 웬만큼 공부도 하고 알만 한데도 막상 자신들이 실천해온 게 없다고 털어놓더라고요. 그만큼 ‘죽음 준비’는 우리에게 낯설죠. 이제 웰다잉법이 시행되면서 여기저기서 강연도 열리고 관련 책도 쏟아져 나올 거예요. 그런 데 참여하고, 책 한 권이라도 찾는 분들은 이미 죽음 준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죠.”
은 유 교수의 번역을 통해 올해 국내에서 만났지만, 본래는 미국에서 라는 제목으로 1997년 출간됐다. 그리고 10년 뒤 현재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고, 그로부터 10년 뒤 유 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전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혹시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지 묻자, 유 교수는 오히려 시점이 잘 맞는다고 답변했다.
“책은 오래됐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 의미 등은 변함없이 통해요. 다만, 미국과 우리나라의 법적, 제도적 환경이 다르죠. 그동안 우리는 죽음에 대해 공론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당시 미국의 모습이 현재 우리 형편에 실질적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요.”
유 교수는 무엇보다 법이 시행되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나 보호자가 똑똑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녀가 말하는 ‘똑똑함’이란 의료 행위나 질병 등에 대해 알고 싶은 부분을 의료진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을 뜻한다.
“완화의료는 무엇인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어떻게 쓰는지, 호스피스 기관에는 어느 단계에서 가는 것인지 등 궁금증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환자나 보호자들은 이런 문제를 주치의와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더라고요.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의사가 안 좋아할 것 같다는 등의 이유로 뒤로 딴 사람을 통해 알아보죠. 그런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큰 문제는, 그런 질문을 해도 속 시원히 대답해줄 수 있는 의사나 기관이 몇 안 된다는 거예요. 법 시행 전에 교육을 하고, 뒷받침하는 제도 등이 마련돼야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 보조를 못 맞추는 실정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죠.”
죽음의 질이 높아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2010년 영국 가 OECD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평가에서 한국은 32위에 머물렀다. 쉽게 말해 죽음의 질이 낮은 편. 그렇다면 죽음의 질이란 무엇일까?
“간단한 예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평생 쓸 의료비의 절반을 죽기 전 1년 사이에 쓰고, 그것의 절반 이상을 떠나기 석 달 안에 쓰고 간다고 해요. 대부분의 환자가 치료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시점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의 과정에서 삶의 질을 죽음의 질이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때의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죽음의 질이 좌우된다고 볼 수 있어요. 죽음의 질이 높은 나라의 경우를 보면 무의미한 치료보다는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면서 더 의미 있게 보내는 편이죠.”
환자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보호자들이 있다. 혹시 이런 행동이 환자의 죽음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우려스러웠다.
“물론 당장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의사들도 자기 가족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쉽게 입을 떼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미루지 말고 단계적으로 본인과 신뢰하는 가족, 심지어는 문제가 될 만한 가족과도 사실을 공유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자기 죽음에 대해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존엄한 죽음이 가능해져요. 자기결정권을 행사해서 순간순간 선택해야 할 일이 많은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모든 게 엉켜버리고 말죠. 그러면 한 사람의 죽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요.”
맞이하는 죽음을 위해 실천할 것들
유 교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타인이 아닌 환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전에 가족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 등을 미리 써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이러한 준비를 모두 끝내놓은 상태다. 이밖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서류를 당장 어디에 제출하지 않더라도 한번 쓰려고 시도해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거예요. 저도 죽음학회에서 나온 유언장 샘플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필요로 하죠. 그러니 꼭 죽음이 다가왔을 때보다는 해마다 연말연시나 생일 등 특정일을 정해서 써보면 어떨까 해요. 혹시 병을 앓고 있다면 막연히 치료를 받기보다는, 내가 왜 아프고 무슨 치료를 받고 어떤 약을 먹는지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어요. 또 시간을 내서 호스피스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해볼 것을 권해요. 그렇게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다 보면 나에게 맞는 실천 사항들이 하나둘씩 생겨날 겁니다.”
“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유 교수의 상식적인 세상에서의 깨달음을 들여다봤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덤볐으니까.”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반골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확신에 찬 합리적 반골이다.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과도했죠(웃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특권층에 속했거든. 그러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공부 못하고 가난한 학생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많이 싸웠지.”
아직 유교사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안 되었던 세상에서 그는 스승과 대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단 한 사람의 멘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 속에서 체득한 겸손에 가까운 의미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고 오만해서 잘 배우지 못할 뿐이죠.”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넘쳤던 사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다.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칼같이 단정하게 하고 다녔죠. 얼핏 내비치는 걸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심도 있었고. 그리고 아주 무섭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해서 누가 촌지라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죠.”
그가 중학교 2학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학교에서 갑자기 ‘10월 유신’이라고 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야인사들의 강연을 듣고 다녔던 유 교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지시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그를 매우 심하게 체벌했다. 아마 시대에 대한 분노를 다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한 게 아닐까, 그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한다. 그 짐작을 증명해주듯,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그에게 함석헌이 쓴 를 선물했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이 책과 함께 유 교수는 차차 유신시대의 금서들과 접하게 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책은 리영희의 와 황석영의 였어요. 그리고 을 정기적으로 구독했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런 책들을 접하다 보니 이 사회의 모순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과 공부를 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죠.”
그는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 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라는,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경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유종일 교수는 기득권에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과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는 일상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고,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적도 있었죠.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때 그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등장한다. 유종일처럼 철저한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새내기 교수였던 정 전 총리는 선배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힌 유 교수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유 교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정운찬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말하는 것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죠. ‘학교에서 뭐라고 하건 지도교수로서 널 통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나 대신 한 가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학점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는 게 정 전 총리의 주문이었다. 유 교수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데 그 조언을 안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강의실에는 개강할 때 한 번, 종강할 때 한 번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시험 때가 되면 점수를 받기 위해 신경 써서 준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 전 총리의 혜안은 유 교수가 하버드대학을 가게 되는 발판이 됐다.
운동권 문제아, 하버드대학 장학생 되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제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그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정운찬 전 총리에게 자문을 했다. 그러자 정 전 총리는 하버드대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자유로우니 유 교수의 기질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토플과 GRE가 뭔지도 몰랐던 유 교수는 이 무모한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면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학생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니드 블라인드 정책(Need-blind policy)’이라는 하버드대학 입학사정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도 반골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한인 민주화운동 단체와 접촉해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대학을 떠나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해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용기와 신념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교수로서의 삶이 안온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소수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을 차별이 걱정돼서였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인 유 교수를 찾는 러브콜은 많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석 제의를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기에는 경제 공약을 총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만족할 만한 액션이 취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자 반발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 완고한 경제학 교수는 냉혹한 정치세계의 격랑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그러고 살잖아요(웃음). 옛날보다야 너그러워졌지만,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과거보다야 너그러워졌다.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던 때였어요. 그때 안식년을 받아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고 가을 학기는 미국에서 강의하게 되었죠. 그런데 미국을 가야 하는데 담배가 안 끊어지는 거예요. 미국 가서 처마 밑에서 담배 필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면 백 퍼센트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산속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었죠.”
폐부를 찌른 한마디, 인생을 바꾸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앉자마자 스님은 유종일 교수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아무리 유 교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눌리고 싶지 않았던 유 교수는 “스님, 초면에 질문을 세게 하십니다” 하며 잠시 여백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를 쳐다보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물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갈 수 없더라고. 꾸밀 수도 없고. 그래서 대답했죠.”
“세상 한 번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직설적인 답변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인생을 왜 그리 어리석게 사십니까.”
유 교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치열하게 산다.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머리 갖다 박고 깨지면 되느냐.”
유 교수는 스님의 말이 자신의 폐부를 찔렀다고 말했다. 그런 문답이 오간 후 스님은 기 치료를 해줬고 유 교수는 그 후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됐다. 희한한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룻밤을 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밥을 해먹자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쯤에 물 한 모금 마신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전혀 공복을 못 느꼈습니다. 신기한 만남이었죠. 그 스님은 티베트로 가셨다고 소식만 들었습니다.”
신우암은 몸을 존중하라는 시그널
“스님이 해준 말씀 중 ‘숨을 들이마실 때 지혜를 생각하고 내쉴 때 자비를 생각하라. 들어오는 모든 것은 지혜, 나가는 것은 자비여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웃음). 스님이 제 지난 삶을 알아본 거죠. 그렇다고 지난 삶이 가치 없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중심을 잡도록 만들어준 말이죠.”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이건 아니야’ 싶으면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려가면서 싸워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오지 않고 나쁜 쪽으로도 왔다. 낙천주의자이자 긍정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 여기고 살았죠. 속에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T 촬영을 하고 나서 예후가 좋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우암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용을 찾아보니까 곧 죽겠더라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멋있게 맞이하자’
2015년 1월 신우암 판정을 받았을 때 유종일 교수가 한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훨씬 일찍 죽음이 찾아온 건데 여기서 당당하게 멋있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두려워하거나 너무 억울해 하거나 소심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잘살았다, 잘 정리하고 가면 되겠다 싶었죠.”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유 교수의 그런 기질이 운명을 바꾼 걸까? 수술 후 회복하는 중 삶을 돌아보고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의 질이 아닌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수술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유서와 장기기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의 서약이었다.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던 경험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2년 반이 지난 지금 건강은 회복했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이 기회에 정책 제안을 하나 할게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야 한다고 봐요. 이는 의료비 절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이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치료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본인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스스로 미리 해놔야 하는데, 사실 닥치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하면 많은 관심이 생기겠죠.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얻은 삶의 평온
삶의 수라장을 거쳐 암 투병을 겪고도 여전히 일복 많은 유종일 교수에게선 긴 사이클을 거치고 나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원로학자들 중에서 김경동 선생님 등은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시죠. ‘어떻게 그렇게 유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드리니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들을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죠. 이제 좀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 편안해진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유 교수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과도하게 집착하면 굴레가 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도 유종일이라는 ‘자존감 강한’ 남자가 좋아졌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오피니언 리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호스피스는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가 육체적 고통을 덜 느끼고 심리적·사회적·종교적 도움을 받아 ‘존엄한 죽음(well-dying)’에 이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의료 서비스다. 하지만 아직 의료기관 중에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 이와 관련,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관한 법률이 8월부터 시행된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시행되던 호스피스가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비암성 말기 환자(만성폐쇄성폐질환, 간경변, 후천성면역결핍증)에게도 서비스가 확대되는 것. 이로 인해 관련 질환 환자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시범사업을 위한 의료기관도 지정했다. 일산서구 탄현동 소재 연세메디람내과에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고 있는 황의동 원장을 만나 호스피스의 역할에 대해 들어봤다.
호스피스 지원 대상이 확대된다던데 어떤 서비스인가요?
말기 환자는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돼 담당 의사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진단받은 환자를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암 관리법에 따라 말기암 환자만 호스피스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8월부터는 만성간경화·후천성면역결핍증(AIDS)·만성폐쇄성폐질환 말기 환자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이런 법률이 시행됐나요?
대형 병원은 대기 환자가 넘쳐나고 다른 환자에 비해 호스피스 대상 환자의 수가도 떨어져 병원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말기 환자가 많이 찾는 대형 병원들의 상황이 이처럼 엉망이니 보건당국이 나서서 호스피스 대상도 확대하고 시범으로 운영할 병원도 지정한 거죠. 5월 말 기준으로 전국 상급종합병원 43곳 중에서 16곳만이 호스피스 병동과 병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보건당국이 8월 4일부터 호스피스 서비스 시범사업을 의료기관 45곳에서 시행합니다.
호스피스 병원을 설립한 이유는 뭔가요?
대형 병원은 치료 중심의 병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호스피스나 완화의료에 대한 관심이 낮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부족한 부분을 완화의료기관에서 보완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생각했고 의사로서 사회적인 책임도 느꼈어요. 이제 설립 4개월이 조금 넘었는데, 도심에 호스피스 병원이 부족해서인지 100일 넘게 집에 못 들어 갈 정도로 치료를 받으려는 환자가 많습니다.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일반 병원은 환자-질병-치료-퇴원의 흐름을 생각하는 게 대부분인데, 호스피스 병원은 환자 및 가족-증상조절-육체적·심리적·영적 안정을 목표로 하는 게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하는 환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퇴원보다는 병원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는 환자의 심리는 어떤 상태인가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임종의 심리단계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이 다섯 단계가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공통된 심리상태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에서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가족을 위한 상담이나 환자가 임종한 후 유가족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개별적인 법률, 보험 등의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일대일 케어 서비스가 특별해 보이는데 간병인과 다른 점이 있나요?
저희 병원은 환자와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병원을 목표로 설립되어 모든 병실을 개인 병실로 구성했습니다. 또 간병은 가족 간병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병이 안 되는 예외적인 환자의 경우 간호사와 직원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줍니다. 저희 병원은 환자 수 보다 직원 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인력 충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관리 프로그램을 알고 싶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환자의 ‘통증 완화’가 가장 기본적인 목표입니다. 그다음이 종교적 접근입니다. 전담 목사가 환자 예배와 종교 상담을 하고 있고 천주교, 불교 등에서도 내원합니다. 미술 치료, 아로마 치료, 원예 치료, 음악 치료, 마사지 치료 등도 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목욕·미용·말벗·성가봉사·연주회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말기암 환자에게는 심리 치료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통증이 우선 해결되고 호흡곤란 등이 해결되어야 심리적인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의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심리적인 접근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숨이 차고 아픈데 환자에게 무슨 소리를 해준들 들리지 않겠지요. 따라서 심리적 접근은 의학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 의료진, 사회복지사, 가족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환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 위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잘 죽는다’는 의미를 남다르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글쎄요. ‘잘 죽는다’는 의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잘산다’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삶의 마지막까지 육체적으로 편안해야 하고 또한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유지되어야겠지요.
호스피스 병원의 간호사들은 특별 교육을 받나요?
저희 병원의 모든 간호사는 채용 전 반드시 60시간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인력 표준과정을 수료해야 하고, 입사 후에는 보수교육 이수가 의무사항입니다. 또한 병원 프로그램을 통한 반복적 교육으로 환자에 대한 서비스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요?
병원에 입원했던 모든 환자들이 기억에 남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첫 환자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나이가 저보다 어렸던 30대 여자 환자였는데 마음을 열 때까지 가족들과 직원들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하지만 가족과 의료진이 함께 기도할 때 임종 순간을 편안히 맞이했습니다.
은 오사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소설가 쿠사카베 요의 의학 미스터리 소설이다.
‘사라카와’라는 유능한 담당 의사가 항문 암 말기 환자인 갓 스무살 난 쇼타르란 청년의 고통스러움을 지켜보면서 안락사에 대한 의사로서의 고뇌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아들이나 다름없이 키워온 이모까지 안락사를 간곡하게 부탁하지만 법적으로 금해 있는 안락사를 시도할 수 없어 고민 고민 하다가 환자가 잠깐 진통에서 깨어나는 순간, 본인의 동의를 얻어 케타민이란 진통제를 다량으로 투입시켜 안락사 시킨다.
그 후 일본 사회는 정치인과 의사들이 안락사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이는 중에 의문사 사건이 줄줄이 일어난다. 사라카와 의사는 양쪽 이익 집단 사이에 끼어 진정한 의료 행위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대형 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내 놓고 동네 보건소 같은 데서 환자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 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인간에게 가장 아픈 이별은 동반자와의 사별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이별은 애증의 관계로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나 대상에 대한 모든 흔적까지도 유골과 함께 묻어야 하는 형식이 곧 사별이다.
벌써 남편과 사별한지 4년이 되었다. 대장암 말기환자인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어떤 연명 치료도 거부한 채 한 달 일주일을 진통제만을 투여하며 이생에서의 이별을 준비했다. 삶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뛰어 내리질 못하고 가픈 숨만 몰아쉬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필자와 아이들이 교대로 환자 곁을 지키면서 약효가 떨어지면 밤중에라도 즉시 간호사를 불러 주사를 놓게 했다.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마약 때문에 헛소리를 하고 혼수상태가 되다가 결국에는 정을 떼기 위한 행위인지 나를 때릴려고 벌떡 일어나기도 했고 배변을 밤새껏 쏟아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망고즙과 흰 죽을 입에 넣어주면 제비새끼처럼 홀짝홀짝 받아먹었다. 참으로 질긴 것이 생명이라더니.
가족 전체가 동의하면 산호호급기를 꽂지 않을 수 있었으나 아들의 반대로 이루지못했다. 우리 가족 모두 파죽음이 되어가면서 그의 마지막을 빨리 보내고 싶어 기도까지했다. “저 불쌍한 생명을 빨리 고통에서 해방시켜 평안하게 잠들게 해 달라”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늘 하던대로 망고즙을 먹였더니 기도가 막혀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산소 호흡기를 꽂으면 아무것도 먹이지 말아야하는데 사전 지식이 없어서 결국 내가 안락사 시킨 셈이 되었다. 죄책감 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간병 할 때와 그를 떠나보낼 때의 심경을 표현한 필자의 졸시다
칼바람 스미는 12월의 창가 병실
한밤중 또,또,똥 그의 서툰 발음따라 팔이 치켜올라간다
저 바위의 기저귀를 어떻게 갈아야하나
돌돌돌돌 구심력에 끌려간 내 고향 마을을 가로지르는 샛강
냇물 따라 나도 돌돌돌 흘러간다
어느 철학자는 “한 번 담근 물에 두 번 발 담그지 말라” 했건만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암반 끌어안고 돌돌돌 바윗돌 씻으며 가야하네
바다가 가까워 왔는지 질머진 똥짐 모두 내려놓는 화석 한 덩이
별자리를 찾아 떠난 그대
그와 나의 절취선에 폭풍이 인다
아직은 말랑말랑한 기억의 지층에서 소리쳐본다
새로운 영토를 찾아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그대
안녕하신가
응답하라
-송시월 시 전문
자수성가한 한정현(67세, 남)씨의 돈에 대한 제1원칙은 ‘절약’이다. 평생 근검절약이 몸에 밴 한정현씨의 돈에 대한 태도는 자녀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내 김혜숙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제 아이들도 독립하고 큰돈 들어갈 일도 별로 없으니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여행도 좀 다니면서 ‘적당하게 쓰면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던 중 남편 한정현씨의 생각이 변하는 계기가 있었다. 친구 중에 자수성가한 한 사업가가 있는데 평생 힘들게 돈만 벌다가 얼마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 친구가 죽은 뒤에 일어났다. 재산을 두고 자녀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씨는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노력하던 친구의 삶이 참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아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적당하게 돈을 잘 쓸 수 있는지 전문가에게 재무상담을 받아봤다.
삶의 가치관 알기
“당신에게 돈이 왜 중요합니까?”
재무상담사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한정현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돈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지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한씨에게 돈은 왜가 아니라 무조건 중요했다. 돈이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재무상담을 위해 한정현씨가 상담사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상담사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한정현 아직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상담사 네, 그러시군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드린 질문입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신 후 답을 하셔도 됩니다.
한정현 (3분 정도 침묵 후)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좀 쓰고 싶습니다.
상담사 그 전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한정현 책임감 때문이죠.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게 마무리되어야….
상담사 책임감… 한정현씨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군요. 그렇다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한정현 짜릿하겠죠. 성취감도 들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울 것 같네요.
상담을 통해 드러난 한정현·김혜숙씨 삶의 가치는 각각 다음과 같다.
제안
노후실손의료보험
노후실손의료보험은 50세 이상부터 75세까지의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민간보험회사에서 판매하는 보험이다. 보험사에서 정한 건강기준에 적합하면 가입할 수 있으며, 입원과 통원을 합산해 연간 1억원 한도로 실제 발생한 의료비를 보장한다. 일반실손의료보험에 비해 자기부담금비율이 10~20% 높은 대신 보험료가 저렴하다. 자기부담금비율이 높아 치료비가 적게 발생하는 입원이나 통원 시의 혜택보다는, 고액의 치료비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해 가입을 고려해볼 만한 상품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9억원 이하의 주택 소유자나 배우자가 60세 이상일 때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다. 주택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하면 사망 당시에 주택 매도가격이 연금 총액과 이자 등 비용을 상계하고도 남으면 자녀들이 잔액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연금 총액과 비용이 주택 매도가격보다 더 높으면 자녀들이 주택 상속을 포기하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의학적으로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전문의의 판단이 있을 때, 추가적인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의견을 미리 작성해둘 수 있다. 우리나라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2018년 2월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유언장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전 유언이 있을 때 그 내용을 우선으로 한다. 유언이 없을 때는 상속인들이 협의분할을 해야 하는데 서로 협의가 되지 않으면 법정상속을 한다. 이런 갈등을 방지하려면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두는 것이 좋다. 다만 유언장은 법이 정해놓은 요식을 준수해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법률 전문가와 상담한 후 작성한다.
일시납 연금보험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면 피보험자가 사망하는 시점까지 연금이 지급된다. 피보험자가 55세가 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며 피보험자가 사망 시 연금액이 소멸하는 연금보험은 세법상 이자소득세가 비과세된다. 그러나 확정된 기간 동안 연금을 받거나 피보험자가 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 시 남은 금액이 상속인에게 지급되는 일시납 연금보험은 2017년 4월 이후부터 가입 금액이 1억이 넘으면 수령 시 이자소득세가 과세된다.
여가활동
시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활동 공간과 영역도 점차 늘고 있다. 시니어들의 여가활동 특징은 배움과 여가를 동시에 고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의 수입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각 지역 지방자치단체에 가면 시니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나 여가 프로그램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시 산하의 50+재단(50plus.or.kr)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령자 교통안전교육
만 65세 이상의 운전자가 교통안전교육을 이수하면 자동차보험료의 5%를 할인해준다. 고령운전자 교통안전교육은 도로교통공단 13개 시도 지부에서 실시하며 비용은 무료다. 교육시간은 3시간 정도 이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 65세 이상 운전자가 교육이수 후 수료증을 보험사에 제출하면 자동차보험 5% 할인특약에 가입할 수 있다.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