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7일 걷기 모임 아름다운도보여행(이하 아도행)의 남산 밤 산행에서 송주희(宋周憘·59)씨와 이숙희(李淑姬.62)씨를 만났다. 아도행에서도 알아주는 단짝이라는데 아니나 다를까 빨간색 커플 워킹화를 신고 걷기 모임에 등장했다.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된 지도 어언 33년. 결혼하고 얼마 안 돼 같은 고향 출신의 주류 사업을 하던 남편들 소개로 처음 만났다가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박영희·신미숙(아름다운 도보 여행 회원)
송주희 그런데 정작 남편들은 지금 안 친해요.
이숙희 저희들만 이렇게 만납니다.
남편 친구의 부인으로 만난 사이라니. 솔직히 가깝고도 먼 사이 아닌가. 게다가 동종 업계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들인데 말이다. 대부분 일종의 정보 교환을 한다든가 혹은 남편을 대동하지 않고는 잘 만나지 않는 사이가 바로 남편 친구의 부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가 친해지셨나요?
송주희 사실 남편 흉보다가 친해졌어요.
폭탄선언 같은 대답에 놀랐더니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송주희 남편 흉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언니한테 얘기하면 남편 귀에 안 들어가더라고요. 비밀 보장이 되잖아요(웃음). 그러다 보니 만나면 편해지고 서로 친하게 된 거죠. 솔직히 말 잘못했다 남편이 알게 돼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잖아요. 옛날에는 신랑 친구들하고 어디가면 말 함부로 한다고 집에 오면 뭐라 그랬거든요.
이숙희 원래 신랑 와이프들은 다 가까이하기에는 먼 사이잖아.
송주희 그래, 여럿이 같이 모이면 입조심해야 하고 그래.
이숙희 집에 가서 신랑한테 한소리 듣잖아.
송주희 쓸데없는 소리한다고. 남편의 다른 친구 부인들 만나고 오면 제가 불만이 좀 쌓이고 그랬거든요. 다시는 모임에 안 간다고, 뭔가 안 맞더라고요.
결혼하고 아이들이 한창 어렸을 때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여행을 자주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집에도 서로 다니곤 했다. 송주희씨가 분당에 살고, 이숙희씨가 김천에 살 때는 중간쯤인 대전에서 만나 여행도 갔다. 사는 지역이 다를 때는 주로 전화로 소통하며 살았고 이숙희씨가 서울로 이사 오면서 더 자주 만나고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들이 더 가까워진 이유는 걷기 모임인 아도행에 함께 나가면서 부터다.
송주희 언니가 적극적으로 모임에 오라고 했어요. 일을 하다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였어요. 무료하게 있지 말고 오라고요.
이숙희 그 전에는 둘이 만나면 뭐 할 것이 별로 없었어요. 매번 만나 영화 보고 둘이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고 딱 그거였어요.
송주희 둘이 노래방 가서 미친 듯이 놀기도 하고(웃음).
이숙희 그랬는데 아도행 같이 다니면서 더 자주 만나게 됐어요. 같이 걷는 거도 좋고 여행도 같이 가고요. 취미가 비슷하니까 건강도 챙기고 그래서 관계가 더 좋아진 거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우리 같은 사이면 견제 이런 거 할 텐데 전혀 그런 거 없어요.
둘 이외에 다른 친구가 있다거나 같이 만나는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 어떤 친구가 있는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단점 같은 것을 발견했는지 물어봤다. 그런데 이들은 의아하단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숙희 우리 그런 거 못 느꼈어요.
송주희 단점을 알기 시작하면 틈새가 벌어져요. 사실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어요. 단점을 생각하게 되면 안 돼요. 단점이 보이면 사람이 싫어지게 되잖아요.
이숙희 경계 없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거 같아요.
송주희 그저 만나면 마음이 편해요.
남산 푸른 산속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두 사람. 송주희씨가 대뜸 “찢어진 청바지 한번 입어 볼까? 재작년에 꼭 한번 입어 보고 싶었는데”라고 말한다. 이숙희씨는 “어떻게 찢어진 청바지를 입냐, 부끄럽다”라 말하다가도 “우리 언제 그렇게 입고 한번 만날까?”하면서 송주희씨의 계획에 화답한다. 오래된 청바지가 몇 개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자며 웃는 비밀스런 친구의 뒷얘기. 무척이나 궁금하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선암이란 이름은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서 배를 묶는 바위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었다고 내가 어릴 때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아마도 오래전에 심한 지각 변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에서 먼 이곳까지 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우리 선조께서 4월의 따스한 기온이 내리쬐는 이곳 선영에 자리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마음이 참 편안해짐을 느낀다.
어제 일요일이 시제를 지내는 날이라 오랜만에 시제에 참례하였다.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6시 서울을 출발하여 10시쯤 선영에 도착하였다. 증조부모님부터 조부모님 그리고 백부모님 순서로 인사를 드린 후에 시제를 지내고 나서 옛날 조부모님께서 사시던 고가로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사촌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시제에 참여하신 집안 당숙과 숙모님, 그리고 형님뻘 되시는 나이든 형님 및 형수님들과 함께 자리하니 객지생활만 하던 나도 고향이란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사촌 큰 형님이 양자로 갔으나 같은 집안이라 여전히 시제 준비를 제수씨들과 함께 형수님께서 주로 하신 것 같다. 마침 바로 밑의 사촌 동생이 시골로 귀향하여 옛날 고가를 수리하여 생활하고 있으니 마치 옛 어른들을 뵙던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봄날 새싹 돋아나듯이 생각났다.
건너 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던 곳이었다. 기침을 유달리 많이 하시면서도 족보관련 말씀을 즐겨 해주셨던 할아버지, 만석궁의 딸로 시집와서 고생하시면서 지내셨지만 항상 우아한 모습과 여유를 지니셨으나 동네 아시는 분들에게 부족한 손자 자랑은 부끄러움 없이 꽤 많이 하셨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자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그분들의 체취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우리 아버지가 효자이셨기에 나도 가끔 그런 흉내를 내려고 해왔다. 사탕을 드리면서 누워 계실 때 책을 읽어드리거나 안마해드리면 즐겨하시던 모습, 소원을 여쭤보고 해결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던 기억들이 눈물 속에 아롱거렸다.
우리 선영은 월출산을 마주보며 위치해 있어 산을 좋아하셨던 옛날 선비들의 취향에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공자도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으니 선조께서는 물과 산을 함께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마 그분들은 해마다 이때쯤 산 아래서 실시되는 왕인박사 관련 축제행사도 다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다.
14대 선조께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시어 계시다가 귀경 후에도 4형제의 막내아들인 우리 직계 선조인 후(後)자 경(庚)자 할아버지께서 영암의 최 씨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시어 계속 사시면서 일가를 다시 일으키신 곳이다. 연전에 14대 조부께서 사시던 생가와 한석봉 등을 제자로 학문을 가르치던, 그리고 조선시대 이이 율곡과 같은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이우당을 방문하였던 생각이 난다. 결과 지금은 반상의 구별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옛 어르신들로부터 이 지역 최고의 가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바로 위 형님이셨던 선(先)자 경(庚)자 할아버지는 지금 서울 오금 공원에 영면해 계시고 그 비석은 시울시 문화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위의 두 분 할아버지 선(先)자 갑(甲)자 와 후(後)자 갑(甲)자 할아버지는 서울 수락산의 선산에 영면해 계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서울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고 조상님과 함께 하기 위함인 것도 같다. 이름이 비슷하여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 분은 쌍둥이셨다. 그래서 어쩌면 약간은 의도적으로 우리 직계 할아버지가 결혼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 영혼의 고향은 달이 처음 비추는 곳이라는 바로 월출산의 정기가 서린 곳이다.
'우리는 왜 위험한 것에 끌리는가'는 영국의 리처드 스티븐스(Richard Stephens)가 쓴 책이다. 대학 교수이며 영국심리학회 정신생물학 회장을 맡고 있다. 원제는 ‘Black Sheep:The Hidden Benefits of Being Bad’로 되어 있다.
위험하고, 삐딱하고, 나쁜 짓에는 대부분 안 좋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한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섹스, 음주, 욕, 과속운전, 익스트림 스포츠, 공상, 게으름 피우기, 집안 일 미루기, 낙서하기, 껌 씹기 등 하나 같이 악동을 연상하게 하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런 나쁜 짓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지만, 일시적인 일탈이라면 수많은 이익이 숨어 있다는 심리학자의 신선한 관점이다.
“술을 마시지 마라”, “기름진 음식을 멀리 하라”, “규칙적으로 운동하라” 그러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면 재미는 어디서 찾느냐는 것이다. 책이나 영화를 봐도 리스크를 무릅쓰고 모험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뿐이지, 일탈 없는 정도만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며 재미있는 삶을 살고 싶으면 리스크를 무릅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주장하는 것이 성생활의 이로움이다. 성서에 나온 이야기를 해석할 때 자위행위가 나쁘게 묘사되어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다. 피임약도 나오고 콘돔도 나와서 성생활이 자유로워진 것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성적 행동은 좋아하는 축구팀이 득점했을 때처럼 뇌의 보상 경로가 활성화된단다. 섹스는 즐거운 행위이며, 젊고 탄력적인 외모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통증과 불안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된단다. 의사결정력을 극단적으로 손상시키기도 하는데 그 덕분에 맨 정신으로는 못 사는 그 비싼 명품, 레스토랑, 등 소비시장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다음으로 든 것이 술이다. 술은 양면성이 있다. 잘 마시면 약이요 잘못 마시면 악마로 변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금주령이 내려졌을까. 지금도 일부 회교국가에서는 국법으로 술을 금지 시키고 있다. 술은 강심제 역할도 하고 진정제 역할도 한단다. 창의적인 머리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음주운전처럼 사고도 유발한다. 다행히 숙취라는 스톱 버튼이 있어 숙취로 고생하고 나면 과음을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욕설이 있다. 욕에는 감정을 짧게 전달하는 숨은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블랙박스의 조종사 음성을 들어보면 대부분 욕이 들어있다고 한다. 산모의 극심한 고통 때도 욕이 나온다고 한다. 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삶과 죽음의 고비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질주 본능이다. 액션 영화를 보면 질주하는 자동차 장면이 자주 나온다. 운전 질주도 치고 박는 액션 이상으로 짜릿한 쾌감을 주는 것이다. 속도를 높이면 크게 다ㅊ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서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질주가 주는 혜택을 맛보려는 것이다.
사랑도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잘 되면 좋은 혜택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랑이 이별을 동반하듯이 잘 못 풀렸을 때에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손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찬밥이든 더운밥이든 기회가 오면 잡으라고 권고한다.
다음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니 무조건 피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나쁜 스트레스인 디스트레스이고 좋은 스트레스도 있다. 유스트레스이다. 롤러코스터, 번지 점프, 스카이다이빙 등은 출발하기 전에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끝나고 나면 회복되는 과정이 유스트레스라고 한다. 일상의 지루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시간 낭비도 낭비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이듯이 나쁜 것으로만 알지만, 그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주변을 지저분하게 방치해두고 있을 때, 멍청한 사람처럼 껌을 씹을 때, 강의가 지루해서 낙서할 때 오히려 집중력이 길러지고 창의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에 관한 것이다.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볼 때 죽음은 고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심장마비로 죽었다가 심폐소생술로 살아난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면 너무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감독에 피터 첼섬, 출연에 헥터 역으로 영국의 코미디언 겸 배우 사이먼 페그, 헥터의 동거녀 클라라 역에 로자먼드 파이크가 나왔다. 사이먼 페그는 코미디언 배우라서 표정이 순수하고 밝다. 로자먼드 파이크도 성격 밝고 금발의 미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다. 원제를 보면 ‘헥터와 행복 찾기’ 정도가 될 것이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원작자의 실화라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으니 내용의 수준에 대해서는 더 말 할 것도 없다.
정신과 의사 헥터는 별 탈 없이 클라라와 동거하며 의사 생활을 해오다가 어느 날 고객들의 다양한 행복 찾기 질문에 맞는 답변을 주기 위해 행복 찾기 여행을 떠난다. 고객들은 하나 같이 불행하다며 행복의 길을 찾는 방법을 묻는다. 헥터 또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어느 날 갑자기 행복 찾기 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첫 번째 여행지는 중국이었다. 경제가 한창 살아나는 중국의 무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으로 보아서도 살맛나는 나라였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나 상대였던 젊은 중국여자와 그런대로 좋았는데 매춘녀로 밝혀지면서 동양의 이미지를 떨어뜨린 것은 좀 아쉽다. 눈 내린 산속의 스님에게 찾아가서도 행복은 어느 하나가 아닌 바람처럼 여러 가지가 섞이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두 번째 여행지는 아프리카였다. 의료 봉사하는 친구가 있어서 들러 보았고 비행기에서 알게 된 주민의 초대를 받아 행복한 그들의 삶을 보았다. 오다가 강도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인데 마약을 재배하는 거부의 덕분이었다. 마약을 팔아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해보지만, 그 사람 덕에 살았으니 살아 있다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도 배운다.
세 번째 여행지는 로스앤젤레스였다. 옛 여자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다. 12년 만에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났으나 이미 결혼해서 애가 둘이고 임신 중이다. 그동안 같이 찍은 사진을 고이 간직할 정도로 감정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나 그녀로부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포기한다.
문제는 행복 여행을 떠났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정작 동거하고 있던 여자 친구 클라라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결국 행복은 클라라였던 것이다. 결혼식을 치르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헥터가 새로 배운 행복의 요소들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행복은 돈이나 지위가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늘 장래에 있을 거라며 기다릴 것도 아니다. 지금 현실이 행복이라는 것을 여러 번 일깨워준다. 심지어 ‘사랑은 귀 기울여 주는 것’이라는 대목이 와 닿는다. 시니어들일수록 아는 게 많고 그럴 자랑하고 싶거나 얘기해주고 싶어 말이 많아진다. 그러나 말하는 쪽보다는 들어주는 쪽이 행복하다는 교훈이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원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찾아 갈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나 행복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딱 떨어지게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현재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행복의 요소이며 다 같이 바람처럼 섞여 내 주변에 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복이 무엇일까 어디 있을까 찾는 중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손에 쥔 것은 소중한 줄 모르고 남이 가진 것만 탐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헥터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비행기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행복하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행복의 기준이나 요건은 서로 다르다. 처음엔 남이라 서로 꺼리지만, 그 사람의 관계로 인하여 행복 찾기 일이 전개되며 그 사람 덕에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시가 시대를 장식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시 을 한 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학의 죽음이 얘기되고 시가 소수에게만 향유되는 취미가 된 현재를 비웃듯 은 단 세 문장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지금도 저릿하게 만들며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을 쓴 시인이자 현재 공주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는 나태주(羅泰柱·71) 시인은 요즘 시의 인기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흔이라는 나이를 넘겼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를 만나 시, 삶, 그리고 죽음에 관해 물어봤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너도 그렇다’
사람들은 시 의 이 마지막 연에서 굉장한 위로를 받는다.
“지쳐 있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요. 그것이 제가 생각해왔던 시의 의도나 작업과 이 세상의 의도나 필요와 맞아 떨어진 거죠. 내가 시를 엄청 잘 써서가 아니라 내 작업과 세상 사람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단 세 문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시 의 나태주 시인은 요즘 강연과 초청의 연속으로 부쩍 바빠졌다. 하지만 그런 현상에 대해 나 시인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잠시 나한테 몰렸다고 봐야죠. 귀찮다고 소홀히 대하면 교만해졌다고 할 테니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웃음)”
시는 사랑처럼 유용해야 한다
시는 자신을 살리는 밥이고 물이고 공기라고 말하는 나 시인은 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울리고 응원하고 살리는 정신적인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게 안 될 때는 시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내용의 러브레터를 세상에 수없이 보냈어요. 그런데 그중의 몇 개가 세상과 맞아 떨어져서 세상이 수용을 한 거죠. 덕분에 바빠졌고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람이 됐어요. 웬만하면 그 요구들을 다 들어주고 싶어요. 그것이 시인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해요.”
글을 쓴다는 건 세상에 대한 봉사라고 말하는 나 시인은 봉사의 기준을 자기가 태어난 세상보다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에 두고 있었다.
“많이가 아니에요. 조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이에 집착해요. 누군가 삶에 대해서 말하길 ‘나는 모래밭에 와서 모래알 두세 개 만지고 간다’고 했어요. 그런 간편함이 있어야지 세상을 개혁하고 혁명한다는 얼뜬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거예요.”
그가 좋아한다는 말은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는 우리가 맨날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소망이었다. 그처럼 간단하고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시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거창하게 쓰지 않고 간결하고 쉽게 와닿게 쓰라는 것이 그의 창작의 근원이다.
“심플(Simple), 숏트(Short), 이지(Easy), 베이직(Basic)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늘 우리는 아침으로 돌아가잖아요. 아침에 피는 꽃처럼 아름답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해요.”
삶이란 계속 가야하는 길
나 시인은 삶에 행복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되는 연장선일 뿐이며 그 과정에서 시야가 넓어지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삶은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계속 가는 길입니다. 저는 강연에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요. 언제부터 여름이고 언제부터 가을인가. 가을은 낮에 오나 밤에 오나. 뻐꾸기는 밤에 울까 안 울까.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어요. 무심한 거지.”
나 시인은 시인의 감성이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을 세심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혼의 양식이고 영혼의 양식은 세미(細微)한 신의 소리에서 옵니다. 미세한 간극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도 세미한 틈을 타고 옵니다. 시장통이나 터미널에서도 시인은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세미한 틈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는 의외로 쉽고 가깝고 작은 것입니다.”
영혼끼리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다
나 시인은 글을 쓰는 시간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시라는 장르의 특이성 때문이다.
“산문은 시간을 정해야 하고 시는 시간을 정하면 안 돼요. 시는 언제라도 나오면 써야지 나올 때 안 써주면 가버려요. 휘발성이 강해서 보존이 잘 안 되거든요, 시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시 쪽에 있어요. 언제 올지 기약이 없어요. 말 하나하나가 그때의 교감과 흥취에 따라 달라져요. 산문은 작정하고 쓸 수가 있어서 설계가 가능하지만 시는 계속 쓰면 본래 흥취에서 벗어나죠. 그래서 저는 퇴고를 잘 안 해요.”
시는 사람을 울리고 위로해주고 살려준다. 그는 이 세 가지 단계를 해줄 때 시를 안 읽을 사람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인은 그런 시를 쓰고 있나요? 혹시 본인들만 잘나서 쓰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자식이 사무관이고 딸은 돈을 얼마를 벌고…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가라고 하죠. 그러나 ‘나는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고 지금 작은 데서 만족하고 이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해야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지금은 나하고 같이 울어주며 동행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가르치려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에요. 시는 투 티치(to teach)도 아니고 투 액션(to action)도 아니고 투 무브(to move)예요.”
그는 쉬운 걸 어렵게 말하는 건 아주 나쁜 짓이라고 비판했다. 예술적인 것은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예술의 대표적 접근은 초월이에요. 영혼과 초월로서 설명 없이 하는 것이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걸 주님도 아시나이다’라고 말하죠. 이게 영혼의 대화예요. 시의 바탕이 이거예요. 영혼끼리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어요.”
가장 중요한 일은 무겁고 느린 일
나 시인은 일에 있어 엄격한 자기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네 가지로 나눠서 다뤘다.
“일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일의 완급이 있고 경중이 있어요. 일의 1순위는 중하고 급한 겁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것이야말로 1순위죠. 2순위는 경하고 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늘 빨리 해요. 2순위를 제일 먼저 하는 이유는 3순위를 잘하기 위해서예요. 제가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이 3순위인 완하고 중한 것입니다. 이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들이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4순위인 완하고 경한 거예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거기에 시간을 쏟습니다. 그래서 저는 3순위를 늘 챙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내 앞에 쌓이는 게 있어요.”
나 시인의 3순위는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시 쓰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진 소원은 책과 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이 시집만 37권이고 총 93권입니다. 책과 글에서 해방은 안 될 거예요. 그런데 끝내 해방되고 싶은 심정으로 쓸 거예요. 열심히 써서 더 이상의 책이 없다, 더 이상의 글이 없다고 할 때가 제가 해방될 때예요. 내 안에 있는 걸 모두 끄집어냈을 뿐더러 더 이상 내가 쓴 글로는 돈을 벌 수 없다, 그렇게 됐을 때가 해방일 거예요.”
무엇보다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내
나 시인의 나이도 일흔을 넘겼다. 아무래도 나이를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부모님이 밥맛이 없다고 말할 때 이해 못했는데 요즘 내가 밥맛이 없어요. 모든 사람은 두 가지로 죽어요. 하나는 밥을 못 먹어서 굶어 죽고 둘째는 숨을 못 쉬어서 죽고. 마더 테레사는 숨을 못 쉬어서, 미당 서정주는 영양실조로 죽었죠. 나이 먹는다는 징후는 별게 아니에요. 숨쉬기 어렵고 밥 먹기 어렵다는 게 그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사람으로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내가 누군가의 아들로, 친구로, 제자로, 아버지로, 선생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어요. 다시 한 번 시련을 당하는 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안 시켜주셨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살고 싶어요.”
집착하고 있지만 해방되고도 싶은 마음. 책과 글에 대한 나 시인의 이중적인 태도처럼, 삶과 죽음 또한 그렇게 이중적이다. 그 말에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 그렇게 의미를 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가족의 소중함, 이건 아주 흔한 거예요. 하지만 놓치면 안 돼요. 특히 부부는 더욱 그래요. 부부는 마지막 보루고 자식보다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혼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죽으면 그게 바로 이혼이니까요.”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공가는 함께 공(共)과 집 가(家)로 ‘비어있던 집에서 함께하는 집으로’ 라는 슬로건을 걸고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공유주택을 말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이터에서 모래밭에 한 손을 묻고 다른 손으로 토닥이다가 살짝 손을 빼면 작은 동굴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놀이를 했다. 그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두꺼비에게 헌 집 줄 테니 새집을 달라고 노래를 하며 놀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어쨌든 두꺼비는 집과 관련 있는가 보다.
요즘 주거는 아파트가 대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층수가 올라가는 아파트는 그 동네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이 살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재산이 되었다. 어릴 적 아파트가 개발되기 전 우리나라는 단독주택에 작으나마 마당 딸린 집이 대세였다. 거기에 이 층이나 삼층집이면 부잣집이라고 했다.
요즘은 모두들 편리한 아파트를 선호해 이사를 하거나 결혼한 자녀가 집을 떠나 단독주택에는 노부부만 남기에 그들도 살기 편한 아파트로 주거를 옮기는 가구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하기에 힘든 불편한 변두리 작은 주택은 그만 비어서 방치되는 집이 많이 생겨났다.
관리가 안 되는 집이 늘면서 범죄위험도 늘고 지역공동체에 위협이 되기도 하니 이런 집을 수리해 집이 없는 청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주는 ‘두꺼비하우징’ 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생겼다. ‘두꺼비하우징’은 LG전자와 LG화학의 지원을 받아 도심 곳곳의 비어서 방치된 주택을 찾아 집주인과 계약을 하고 수리해서 살 곳이 없어 힘든 젊은이들에게 빌려주는 셰어하우스를 만들기로 했다. 도시의 역사를 그대로 담았지만, 지금은 낡아서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춥고 불편했던 집을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고쳐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집주인과는 6년간 한 달에 월세로 120만 원을 주기로 계약하고 입주청년들에게서는 시세보다 저렴한 20~30만 원의 임대료를 받아 서로 윈윈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사회적기업을 방문해 그들의 하는 일을 체험해 볼 기회를 가졌다. 은평구의 마당이 딸린 이층집이 막 수리를 끝내고 있었다.
오래 비었던 집이라 손 볼 곳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깔끔하고 아늑한 이층 양옥으로 변신했다. 작지만 마당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정다웠고 새집 냄새가 나는 현관을 통해 들어가니 깨끗한 거실과 주방, 그리고 일인실, 이인실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이 집은 일 층과 이 층에 모두 9명이 거주하도록 지었다고 한다. 주방과 욕실은 공용이고 전기요금, 가스요금, 수도요금 등 관리비는 공통으로 나누어 낸다. 누군가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은 설치하지 않는지 질문을 던졌다.
두꺼비하우징 대표님은 그 문제는 입주민의 상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답을 했는데 찬 바람을 싫어하는 사람과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동행하신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LG 직원께서 만약 에어컨을 설치하게 되면 꼭 자사제품을 써달라고 애교스럽게 말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고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진다며 칭찬도 했다. 이곳의 계약 기간은 기본 6개월 이상이며 담당자와 협의를 통해 계약 기간을 정한다고 한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자동 연장되고 이사하고 싶으면 계약종료 1개월 전에 퇴실 의사를 말하면 된다.
필자가 본 은평구의 아담한 이층주택은 모든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 책상, 주방시설, 세탁기 등 필요한 건 이미 다 있으므로 이불만 준비해서 입주하면 된다니 형편이 어려운 청년에게 매우 편리하고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다.
‘두꺼비하우징’은 함께 사는 것의 힘을 알고 마을 만들기를 통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것을 도우며 주거를 통해 사회를 고민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도시재생 전문 사회적 기업이다. 이런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대기업이 더 많이 늘어날수록 우리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회적 기업의 도움을 받아 저렴한 월세로 모여 살게 될 젊은이들을 생각하니 흐뭇하다. 각자의 일을 마치고 들어와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며 맥주 한잔으로 우정을 다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지고 그들의 앞날이 환히 빛나기를 응원해 주고 싶다.
(‘두꺼비하우징’의 홈페이지는 www.toadhousing.com이다.)
지구 온난화의 여파로 그 폭염 열기가 계절을 초월해 최고조를 달린다. 이에 상응이라도 하듯 나라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곳곳에서 터지고 그 애도의 열기도 식을 줄을 모른다. 가습기 사건, 강남 묻지마 화장실 사건 등등.
희생의 아픔보다 더한 무기력을 채우기 위해 햇살 가득한 베란다 밖으로 세상을 내다보았다. 자연은 여전히 청아하고 맑은 계절의 기운을 창출해 내고 있다. 아직은 살아있기에 성찰하며 그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낭떠러지 끝에서 마지막 발버둥의 소리들이 귓전을 맴돌며 삶에 대한 허무가 눈물 범벅으로 내 몸을 전율로 뒤흔든다.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 나온 가해자는 살아있고 살기 위해 허둥댔던 피해자는 너무나 우습게 죽어갔다.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 그 속에서 엇갈린 경계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위급한 상황아래, 죽어가는 자는 무엇을 생각하며 삶의 문전이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웠을까를 상상하면서 살아서 호흡하는 사람의 가슴에는 그저 아픔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그 고귀한 희생 앞에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통계의 수치가 무슨 의미이며 애도의 손길조차 어쩌면 한갓 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 부재의 의식적 공백이 치유되지 않는 한 얼마든지 반복되고 또 언젠가 내 자식들, 내 주변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다.
너무나도 소중하다고 외쳐대던 또 하나의 삶의 의식들이 그렇게 맥없이 사라져간 원인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진정 넋 나간 한 사람의 병리적 원인으로만 탓해야만 할 것인가?
어느 때 어느 지역에서든 간에 소외 당한 자의 불평등에 대한 작고 큰 보복들, 아니 가슴에 담겨있는 응어리들은 그 정신적 사고를 넘어선 돌발의 범죄덩어리로 이 땅에 언제 다시 떨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평등은 그 완전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늘 요원 되어야 할 것이며 다만 우리는, 산 자들은 그리고 다행히도 살아 남은 자들은 그 심리적 공백의 허점을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위임 받은 공권력들은 세상을 이간질하고 시대를 대변치 못하는 양심들로 뻔뻔한 지성인들은 그 임무의 시기적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 인듯하다.
힘없는 국민은 위기의 순간에 그저 비명으로만 생을 마감한 희생자와 가족들의 가슴 아픈 삶의 허덕임 앞에서, 그 인간존재의 배타성 앞에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으며 꺼이꺼이 흐느끼는 속 눈물로 쓰린 가슴만을 적셔낼 뿐이다.
이처럼 온 세상을 슬픔의 도가니로 응분의 잿더미로 남겨놓은 그 희생의 뒤안길에는 어처구니없는 씁쓸함만이 남은 자들의 가슴을 후벼 파낸다.
철저한 배신과 죽음보다 더 무거운 불신으로 기인된 거부반응과 허무감만이 팽배해 있는 세상에는 또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르는 위태로움의 위기와 가치관의 왜곡들이 고스란히 폭염의 열풍에 또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돈과 기계, 물질만능을 신봉하는 인간세계는 아니 인간을 배신하는 행위는 결코 묵과 될 수 없음을 상기하지 않으면 간단히 죽음의 참사는 반복되는 것이리라.
슬픔이 넘치고 화가 나는 국민들은 저기 사라져 가는 영정 앞에 무엇을 어떻게 보답 해야 할 것인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비통한 유가족 들에게 무엇으로 채워 줄 것 인가. 때마다 감당하는 애도의 물결만이 감정의 앙금들을 치유 될 수는 있는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보이는 비상식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몸짓만큼이라도 보여 줄 수는 없는 것 일까.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여리고 파란 잎들처럼 맑고 청아한 세상, 그곳이 존재한다면 단 하루 만이라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아니,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니? 나이 든 부부에게 불 지를 일이 있나? 필자가 강의를 하다가 불쑥 “나이 들수록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대다수 청중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무릎을 친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배우자 둘 중 하나는 남편 또는 아내를 뜻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뭔가를 배우자는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는 가장 좋은 친구
다 아는 유머 한 토막. 나름 오순도순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여고 동기모임을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나는 부인에게 남편이 멋진 옷도 한 벌 사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가라는 등 신경을 썼다. “그래, 다녀오든지~”하면서 시큰둥한 통상의 남편에 비하면 엄청 배려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모임에 다녀온 아내의 표정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남편이 “식당이 마음에 안 들더냐, 몇 명 안 왔더냐, 마음에 안 드는 친구가 있더냐”라고 물었더니 다 아니란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라고 대답하더란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어서 마음대로 나다니는데 그 부인만 아직도 남편에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유머일 뿐이다. 영화 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요즘 TV에서 늘어나고 있는 장수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팔순, 구순의 노부부가 아이들처럼, 신혼부부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재미있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둘이 한날한시에 먼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죽을 때까지 이마와 등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대화 상대, 밥을 함께 먹을 상대, 나들이를 함께 할 상대, 그 상대로 배우자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에서도 배우자는 필수 요건이다. 5F는 돈(Finance), 할 일(Field), 재미(Fun), 건강(Fitness), 친구(Friends)이다. 사실 젊어서는 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직장이나 사회 친구들을 주로 만나며 바쁘답시고 다닌다. 하지만 은퇴하고 나면 하나씩 둘씩 다 떨어져 나가고 남는 친구는 한 손도 다 못 채우기 십상이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함께 할 친구는 결국 가족, 즉 배우자와 자녀, 손자녀들이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FAMILY’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알파벳인 것도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배우자가 가장 좋은 친구라면 다른 것 다 제치고 성공한 인생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특히 부모와 조부모가 정겹고 애틋한 부부애를 보여준다면 자녀와 손자녀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나의 제1 배우자와 친구처럼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이다.
소일거리를 찾아라
두 번째 배우자 또한 첫 번째 배우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이미 82세를 넘어서고 있고 지금의 40~50대는 적어도 90세를 넘어까지 살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우리 부모님들과는 달리 우리는 은퇴한 후 ‘뭔가 할 일(Field)’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래 살면 오래 일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남성을 기준으로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는 53~54세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부터 정년이 60세로 의무화된다고는 하지만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60세에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30~40년을 살아갈 계획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20~30년 이상을 열심히 일하다가 은퇴했으니 실업자는 아니지만 뭔가 할 일이 없다면 실업자 아닌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이다.
죽치고 앉아서 TV나 보는 게 돈 안쓰고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활기차고 의미있는 소일거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소일거리는 말 그대로 ‘소소한 할 일거리’로 꼭 상당한 소득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내가 의미를 찾으면 그게 곧 좋은 소일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추천하는 것이 ‘뭔가를 배우자’이다. 나이를 들어 배운다는 것은 학창시절에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배우는 일이라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만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의 적절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하지 않는가.
배우고, 익히고… 새출발을
취미활동도 배워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댄스와 악기 등과 같이 서로 맞대야 가능한 배움은 처음부터 친구들을 사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요즘엔 온라인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옮겨가는 모임도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으로만 주고받던 정보와 모임이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댈 경우 사람 사는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6만 곳이 넘는 노인 여가복지시설과 노인대학 등이 늘어나면서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고 있다. 오죽하면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좀 더 체계적인 배움을 원한다면 방송통신대학이나 사이버대학에 정식으로 등록할 수도 있다. 2013년 상반기 기준으로 대학 학점인정과정에 등록한 60세 이상 학생 수가 2만3000여명에 달하고 있다. 특히 방송통신대학에만 60세 이상 학생이 3000명을 넘고 있다. 1972년 방송통신대학 개교 이후 240만 명의 입학생 중 최고령자는 2013년 2학기 일문과 3학년에 편입한 정한택씨로 당시 92세였다. 방송통신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은 35만원 안팎으로 큰 부담이 없는데다 도서관 등 시설이 좋아 이를 이용하는 어르신 학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분은 중국어과와 일본어과를 찍고 프랑스어과에 다니고 있다. 졸업기념으로 부부가 중국과 일본 여행을 했으니 프랑스어과를 졸업하면 유럽 여행을 할 계획이란다.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하는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기념으로 해외여행까지 한다니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를 완벽하게 갖춘 멋진 인생이 아닌가.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가수 서유석의 노래 ‘너는 늙어 봤냐 나는 젊어봤다’의 가사로 끝을 맺자.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뭐라 해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 말도 배우고 중국 말도 배우고 아랍 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거야. 너~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출발이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에게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여러 명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이, 2학년에 올라가면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양도서도 열심히 읽겠다고 말했다. 기대한 반응이었는지, S 교수는 줄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J 차례가 되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많은 학생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에 여학생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J는 언행을 절제하는 모범생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그렇게 당돌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례가 오자 나는 J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나는 ‘남학생’을 ‘여학생’으로 바꾼 것 말고는 J의 말에 한 자도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J도, S 교수도 웃었다.
내가 J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기 초 독서토론회 이후였다. 지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두 연인의 순수성을 예찬했다.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 희곡의 주제이자, 대학 새내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몇 학생이 두 연인의 무모함이나 맹목성을 지적했다. 어떤 학생은 우연한 사건이 중첩되고 있다며 작품의 플롯을 비판했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뒤엎지는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보며 S 교수가 말했다.
“김 군. 작품을 읽었을 텐데, 독후감을 말해보게.”
기다리던 바였다. 1학기 말의 토론회에서 S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교수가 나에게 반드시 발언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저는 이 희곡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도 사회적 상황을 덮어두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16세기 후반에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시작됩니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새 세력이 대두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구세력은 뒤로 밀립니다.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 엄청난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력 지배층인 귀족 자녀들이 사랑에 탐닉해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회변화의 변곡점에서 볼 수 있는 말기적 현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그런 사랑을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는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 곁에 줄리엣 같은 여인이 있었다면, 물론 저 역시 앞뒤 살피지 않고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S 교수의 웃음소리가 컸다. 토론회가 끝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가지고 놀다니?”
“학생들 뒤통수를 쳐놓고, 마무리로 앞이마까지 쳤잖아요?”
J는 고개를 돌려 상긋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바로 그 미소가 화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찰나에 J는 말 위에서 등을 돌리고 화살을 쏜 고구려 궁사였다.
1967년 1월 1일 자정이 되자 나는 5분 동안 나와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철필에 검은 잉크를 찍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날짜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땐 0시 5분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었다. 나는 편지지 맨 위에 ‘1968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J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을 앞에도 우체통이 있지만,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십리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1월 4일이 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도 없는데 울안에 서 있는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집배원이 우편물을 가져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J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지 맨 위에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J의 편지를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내 손 안에 있었다.
편지 내용에, 보고 싶다든가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후 2월 20일까지 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 답을 쓰는 식이 아니었다. 답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편지를 썼다. 나도 그도 몇 번인가는 하루에 두 통을 써서 부치기도 했다. 평생 쓸 편지의 반쯤을 50여 일 동안에 쓴 셈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안개처럼 말없이 다가와 나를 휘감는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사랑이라면 나의 J에 대한 사랑은 안개보다 짙었다. 사랑이란 내 곁에 그가 없어도 그를 내 마음에 담는 것일까? 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은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쓸까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끼고 싶었다. 그래. 그 말은 직접 만나서 할 거야. 그것도 여러 번 만난 뒤에 해야 해. 나는 그런 절제가 사랑의 품격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2월 20일에 상경할 예정이라며 21일에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J는 하루 뒤에 보자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를 맞추어 2월 22일 오후 두시에 둘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도 J가 정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곳을 찾으려고 여러 군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가 결론을 내린 곳이 바로 신설동 로터리의 어느 다방이었다.
둘이 만나 나눌 이야깃거리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J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삶의 지표 셋을 밝혔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게 그것이었다.
J는 처음에는 가난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다. J가 강조한 것은 전문성이었다. 언젠가 나라가 전문인을 요구할 것이고,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서른 통쯤 주고받은 무렵부터, J도 가난의 의미를 재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기 강조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둘이 만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접점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21일 상경한 나는 절친인 P의 집으로 갔다. P는 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털어놓았다. 겨울방학 동안에 다른 사람이 아닌 J에게 집요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편지도 보내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J가 끄덕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P가 말했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피난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었어. 내 꿈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야. 난 여자를 찾았어. J야. 내가 걔하고 결혼한다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그렇지 못하면 난 살 이유가 없어.”
사랑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P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결연했다.
그날 저녁 나는 P의 집을 나와 제기천 천변의 어느 판잣집 주막에 들어가 혼자서 막걸리를 마셨다. 주막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J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는 기억에 생생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섰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식 2층 저택이 골목 양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J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티가 났다.
문득 희곡 이 생각났다. J는 줄리엣이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나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었다. 오래전부터 심하게 해소를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욱 불행한 것은, 독서토론회에서 내가 한 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내 말이 J의 집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도 친구려니와, 이런 부잣집 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월 22일 오후 두 시에 J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가지 않았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지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지표를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 뜻과는 무관하게 아직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서울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J는 빈민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와 결혼해 평생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미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어 있을 J가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