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폐는 아직도 국제 시장에서 공식 환전이 안 되는 돈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의 경우에는 한국 돈이 별 불편 없이 사용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호텔 숙박비나 식비 등 큰돈은 여행사에서 알아서 지급하므로 관여할 바 아니고 개인적으로 쇼핑에 사용할 돈을 말한다.
호텔 룸서비스 팁, 마사지 가게, 기념품점, 동네 행상, 기념품 판매점, 농산물 판매점, 공항 면세점에서도 한국 돈이 통한다.
한국 돈 1만 원은 중국 돈으로 약 60위안이다. 중국 돈 1위안은 우리 돈으로 약 167원이다. 미국 돈 1달러가 약 6.71 위안이다. 물건값이 중국 돈으로 되어 있으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금방 계산이 어렵다.
그래서 한국 돈으로 지급 할 수 있으면 금액에 대한 감이 있으므로 계산이 편한 것이다. 우비 하나에 3000원, 좀 더 고급은 5000원, 삼단 우산은 5000원, 장뇌삼 10뿌리에 1만 원부터 굵은 뿌리는 하나에 5만 원도 부른다. 행상이 가지고 다니는 현지 교통지도가 1000원 식이다.
호텔 룸서비스 팁은 보통 1불을 놓고 나온다. 1불은 우리 돈 약 1120원 정도이지만, 1000원으로 간단하게 보면 된다. 그래서 테이블에 팁으로 1000원권 지폐를 놓고 나온다. 무거운 가방을 방까지 갖다 주는 팁도 마찬가지로 1000원이다. 1불은 우리 돈을 미국 돈으로 환전해야 하므로 환전 수수료가 붙는다. 환전한 미국 돈이 한정적이므로 우리 돈 1000원보다 귀하게 쓰인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에 갈 때는 우리 돈 1000원짜리를 많이 준비해 가면 좋다. 1만 원권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1000원 지폐가 더 용도가 많다. 굳이 수수료 내가며 위안화로 환전해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면세점에서도 가격을 미국 돈, 중국 돈, 한국 돈으로 따로 매겨놓았다. 역시 한국 돈으로 지급하면 편하다. 지갑이 불룩한 것이 싫어서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한국 돈을 꺼내 줬더니 구겨진 돈은 은행에서 환전해주지 않는다며 반드시 지갑에 넣어 다니라는 충고를 들었다.
동전은 걸어 다닐 때 짤랑거리고 무게도 있어 불편하다. 보안 검색 때도 금속이므로 여지없이 걸린다. 보안 검색은 공항뿐 아니라 중요 관광시설을 이용하기 전에 받는다. 백두산 산문에서 입산 절차를 밟을 때도 거쳐야 한다. 따로 가방에 넣어 두거나 아예 동전은 떠날 때부터 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단,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이므로 유로 동전이 필요하다. 보통 한번 사용에 30센트, 50센트를 받는다. 동전이 없으면 지폐로 내면 팁으로 생각하고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 일도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면 합해서 지폐로 사용할 수도 있다.
때로 선거나 시험은 도전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얼마 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아홉 번의 출마 만에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이 그랬다. 범인들은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든, 지치지 않는 도전은 과정만으로도 가치를 갖는다. 숫자의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 5년 차 변호사가 된 한 사내가 있다. 경력만 보면 막 커리어를 쌓아가는 푸릇한 젊음이 연상되지만, 이미 초로의 몸이 됐다. 대신 그의 가슴에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얻은 흉터와 사법고시 14전 15기라는 숫자가 훈장처럼 달려 있다. 오세범(吳世範·63) 변호사의 이야기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선 맹수처럼 그를 둘러싼 카메라와 마이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4년을 꼬박 도운 세월호 가족의 가슴을 후벼판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인을 제공한 방송사의 요청에 의한 조사였다. 결과도 대중을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방송인의 사회적 책임감 부족이 낳은 참사입니다.”
오세범 변호사는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MBC의 ‘전지적 참견 시점’ 세월호 보도영상 사용 논란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MBC로부터 긴급 진상조사위원회 참여를 부탁받았고, 조사에 참여후 위원회와 함께 언론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누구보다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애썼죠. 제작 과정을 모두 확인했는데 사회적 공감대와 상식 부족이 만들어낸 사건이에요. 편집 과정에서 다른 문제에 제작진의 관심이 쏠려 제대로 점검이 안 된 문제도 있었죠. 외부에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건으로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조사 결과를 이해해주셨죠.”
변호사 오세범 그리고 세월호
변호사 오세범을 이야기할 때 세월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운명처럼 인연을 맺었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세월호와 관련한 경험은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몸속에 박혀 있는 그것이 사회에서 진주 같은 존재로 변화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변호사 일을 시작한 것이 2014년 2월이에요. 2011년 11월 사법고시 합격 후에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정식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두 달도 안 돼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온 국민이 보는 TV로 생중계됐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바로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오 변호사는 그 길로 변호사를 대변하는 두 단체,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모두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법률지원 창구가 일원화되면서 만들어진 대한변협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법률상담지원단 중앙지원팀장까지 맡았다.
“아시는 것처럼 부당한 여러 원인 때문에 유가족은 스스로 조직을 갖춰야 했어요. 그래서 상주 역할부터 당직까지 반별로 움직였는데, 이에 맞춰 변호사들도 반별로 담당이 정해졌죠. 전 2학년 1반을 맡아 특히 1반 가족들과 친분이 두터워졌어요. 반별 스케줄에 맞춰 저도 정기적으로 안산으로 달려갔죠. 뿐만 아니라 세월호 유족들과도 두루 친해졌어요. 4년을 함께 지냈으니까요.”
2학년 1반에서는 세월호 인양과 함께 뒤늦게 가족에게 돌아온 조은화 양을 비롯해 학생 1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오 변호사는 의지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는 부당한 압력을 막는 법적 우산이 되고자 집회 참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의 활동을 강제로 종료시키려 했던 2016년엔 다른 민변의 변호사들과 함께 릴레이 단식에도 나섰다.
옥사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
애초에 그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청년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그는 학자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많은 학우들이 외치던 독재정권 타도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4학년이 됐을 때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들이 사라졌더라고요. 상당수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거죠. 독재 말 상황에서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도피임을 깨달았어요. 그제야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마음먹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유신타도와 헌법 개정을 외친 대가는 적지 않았다. 징역 2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적잖은 형량과 옥살이는 그를 기죽게 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4월 19일이었어요. 구치소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했어요. 누구인지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고함이 전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죠. 목소리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저도 외치기 시작했어요. 유신헌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민주주의 회복을 말이죠. 결국 긴급조치 9호 위반의 혐의로 형량을 2년 더 받았어요.”
다행히 형량 4년을 모두 채울 필요는 없었다. 2년 4개월 만인 1979년, 그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하지만 자유의 몸으로 보내는 시간은 짧았다. 이번엔 ‘YMCA 위장결혼식’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집회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절, 사전신고 없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결혼식으로 위장해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민주화 인사들 사이에서 저는 갓 출소한 막내여서 유인물을 만들고 나르는 잡일만 맡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결국 1년 6개월 형을 받고 1년 만에 다시 형 집행정지를 받았어요. 중간에 잠깐 쉬고 총 3년하고 넉 달을 옥살이한 셈이죠.”
평범하게 끝나지 않은 평범한 삶
그 과정에서 그가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 학생운동과 연행, 조사 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세상물정 몰라 그런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진짜 세상물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갓 출소한 27세 청년은 학교에서도 제적당해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남들처럼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기로 맘먹었다. 다행히 공부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렇게 고압가스와 열관리 자격증을 따고 제약회사 보일러실 담당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그 시기 사회는 또 다른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운동이었다. 큰 파도는 그렇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죠.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노조가 만들어졌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노조 총무부장을 맡게 됐죠. 노조활동을 반대하던 사 측에서는 제가 이력서에 서울대학교 중퇴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해고됐어요. 복직소송에선 졌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김칠준 변호사를 만나게 됐어요. 법조인으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김칠준 변호사와의 인연은 의뢰인과 인권변호사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원에 자리 잡은 김칠준 변호사 사무소에 상담실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다산인권센터와 법무법인 다산이 시작된 곳이다.
“노조와 관련한 5~6건의 소송 당사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송사와 관련한 경험이 생기더라고요. 그 경험이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당시엔 노동 상담에 관심 있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는 않아 관련 사건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인근에 있던 삼성전자나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같은 큰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상이었죠.”
1993년, 그는 장명국 발행인과의 인연으로 내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한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자주관리경영을 원칙으로 창간한 언론사다. 그는 이사 겸 업무 기획실장으로 신문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4년간 일했다.
“말이 기획실장이지 잡다한 사무를 도맡아 하는 총무 같은 역할이었죠.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신문사라는 곳이 내 생활이 없는 곳이잖아요. 밤낮없이 마감에 시달리는 기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꽤 고생이었나봐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지금 그랬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제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보람 있는 직업 중에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도울 수 있는 변호사가 제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했어요.”
안정된 삶 뒤로 하고 책상 앞으로
변호사가 되는 일은 평범한 결심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몸이 좀 불었으니 아침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가장인 남편이 고시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쉽게 허락할 아내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응원해줬다. 서울대학교 시절 농활에서 만난 1년 후배인 아내는 당분간 생계는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그를 봐온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는 “사법고시를 통과하는 데 평균 5년 정도 걸리니, 나도 그 정도면 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들 대학 입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끝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7년에 도전한 지 3년만인 2000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번번이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면 쉽게 포기했을 거예요. 2차 시험 결과가 매년 12월에 발표되는데 바로 석 달 후에 다시 1차 시험이 진행되거든요. 2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공부한 것이 아까워 다시 1차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다시 2차 시험에 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이 지나자 고비가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도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법무법인 다산에 들어가서 민사 사무장을 하면서 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엔 붙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는데, 붙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나중엔 법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취업이 보장되는 의대와 육사에 합격해서 부담을 덜게 되면서 다시 일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도전했죠.”
그리고 2011년 겨울, 드디어 사법고시 53회 시험에서 그는 최고령으로 합격증을 받는다. 첫 도전을 한 지 15년 만이었다. 2차 시험만 8번을 봤다. 매스컴도 주목했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제가 제일 좋아했어요.(웃음)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이미 아이들은 취업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저만큼 좋아하지는 않더라고요. 이틀을 잠을 못 잤어요. 하루는 믿어지지 않아서, 하루는 너무 좋아서요.”
‘안전한 삶’ 위한 법조인 되고파
변호사가 된 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가 많은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국민과 더불어 함께 웃을 수 있는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었을까.
“제가 꿈꿨던 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생명안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사고에 무관심하고 사람이 죽어도 위자료 주고 끝내는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대한변협 생명존중재난안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집단재난 현장지원 변호사 매뉴얼도 만들었어요. 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변호사도 우왕좌왕하기 쉬우니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고양터미널 화재나 오룡호 침몰같은 재난 사건에서 얻은 경험을 결과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민변의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공간 이상으로 생활 단위,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운영을 투명화하고 마을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주민, 특히 시니어 세대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50플러스재단을 통해 공동주택 입주자 대표가 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관련 민·형사 사례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어요. 남들에게 잘하라고 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저도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자회의 감사를 맡았어요. 입주자 커뮤니티의 활약에 따라 입주자들의 삶과 안전까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중년의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실패했을 때 지고 견뎌야 할 짐도 무겁다. 자칫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주위 평가를 의식하며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이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도전하기 전에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런 주관적 열망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에는 그에 대한 객관적 판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말이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의 경우는 아내였죠. 그리고 도전 가능한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 점검하면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게 돼요.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점검후 실천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마음속에 어떤 열망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는지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가방 속에 늘 휴대용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다. 하루 외출하다 보면 차를 서너 잔은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라면 비싼 차도 마다하지 않지만 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지 냉·온수 정수기가 마련돼 필요할 때마다 준비해온 차를 마실 수 있어 편리하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부터 일회용품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업소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편리함 때문이라고 한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안 되는 일이지만, 업주 측에서는 시간과 인건비에 관련된 사항이라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고 한다. 요즘 매장에 갈 때마다 관찰해보니 아무 생각 없이 일회용 컵에 담아주는 것에 반론하는 사람 또한 흔치 않았다. 옆자리 손님에게 질문했더니 “‘이제는 아예 머그잔에 드릴까요?’라는 질문도 없으니 그냥 습관적으로 받아가기도 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매장에 앉아서 마실 수 없다”라며 반쯤 남은 커피를 들고 나간다.
업체마다 다르지만, 텀블러를 가지고 매장에 가면 일회용 컵 하나 값을 빼주는 곳이 있다. 앞으로는 유명 20여 개 커피전문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 개인 컵이나 텀블러를 소지한 고객에게 가격의 10%를 할인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선택은 고객의 몫이다. 사람들은 적은 금액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비율(%)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드사용 시 구매금액의 0.5% 내지 1%를 포인트로 적립해 주는 것을 감안하면 10% 할인이란 10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요즘은 여성이나 남성 대부분 손가방이나 백팩을 메고 다니기 때문에 개인 컵 하나쯤 넣고 다니는 일이 어렵지 않다. 더구나 일회용품을 덜 사용하면 지구와 자연을 살리며 절약까지 할 수 있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혹, 나 하나쯤 일회용 사용하지 않는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까 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지난해 환경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종이 컵, 플라스틱 컵을 61억 개 사용했으며 재활용률은 겨우 10% 미만이라고 한다. 일회용 컵 하나가 썩는데 20~100년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100년이 걸린다면, 최소 3세대가 지나야 하는 기간이다. 약간의 수고가 후세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심 곳곳에 놓여있는 일회용 용기 수거함에 넘쳐나는 음료 컵들을 보면 두렵다. 쓰레기 대란. 재활용이 10%밖에 안 된다니 쓰레기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며칠 전 갑자기 국지성 호우가 내린 날은 망가지지도 않은 일회용 비닐우산도 여러 개 꽂혀 있었다. 비가 그쳤으니 귀찮아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길에 버리지 않고 수거함에 넣은 것을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헛된 꿈일지 몰라도 한 사람이 시작한 행동이 언젠가는 전체가 될 수도 있는 생각을 해본다.
스웨덴 소설가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그 유머러스한 제목에 궁금증을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는 저마다 사연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수많은 서랍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창문을 막 넘으려는 100세 노인의 앙상한 다리를 비추고, 제 할 일로 부산한 4명의 배우가 등장하며 시끌벅적하게 막이 올랐다. 길고 긴 100년의 숨 가쁜 세월과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5명의 배우가 시대를 나눠 주인공 알란을 연기했다. 조실부모하고 배움도 짧지만 알란은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각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는 등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혁혁하게 등장한다.
작품 속 알란은 세상 피곤한 인생 수레를 탄 듯 고단한 일들을 맞닥뜨리게 되지만, 매 순간 지혜의 기근을 겪지 않는 인물이다. 다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월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따끈하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에, 제아무리 장수시대라 하더라도 숱한 고비를 겪은 그가 100세를 누린 비결이 궁금해졌다. 1905년 출생해 2005년까지, 100세를 맞이한 이 현명하고 바쁜 개구쟁이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은 어느 귀퉁이에 숨어 있는 것일까?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어머니가 남긴 이 말을 평생 빼지 않는 반지처럼 간직한 것이 알란의 장수 비결 일등 공신으로 보인다. 웬만한 일에는 불평불만 않고 순응하는 삶이랄까? 명심보감에도 ‘세상 만물이 순리로 찾아오거든 거부하지 말고, 세상 만물이 가버렸으면 아쉬워 뒤좇지 말라’고 나와 있다. 그 이치를 깨달은 것을 보니 어쩜 알란의 어머니도 공자를 공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생각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뭐든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비를 막겠다고 술잔에 우산을 씌우는 게 우리네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알란은 자신에게 벌어진 수많은 날벼락 같은 일들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스르르 빠져나갔는지도 모른다.
노년기 알란은 “누울 수 있는 침대, 술 한 잔, 식사 한 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100세 노인이 녹여낸 수수한 인생 철학이다. 듣고 보니 그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그 외에 더 필요한 게 있을까? 먹을 것과 잘 곳, 거기에 좋은 벗까지 있다면 인생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욕심을 내지 않으니 조바심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 장수한 알란에게 너무 많은 것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모두가 가버리고 홀로 남았지만 나는 어디론가 다시 떠난다.”
100세 알란의 발걸음은 조금 느려졌지만 도전정신은 여전히 퍼덕인다. 일하는 노인이 장수한다는 건 평범한 이야기지만 마음에 든다. 평생 일하며 도전해온 삶 또한 알란의 장수 비결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정치적인 이유로 거세를 당했지만 사랑까지 끊어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만다와의 결혼 덕분에 거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 나이 때문에 사랑에 뒷걸음질 치는 것은 알란답지 않다. 격동의 세월을 사느라 만나지 못했던 사랑을 이제야 품은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이든 잔잔한 사랑이든 사랑은 꽃그늘이다. 나이를 셈하지 않고 사랑을 꿰찬 것도 그만의 장수 비법인 듯하다.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이 남기고 간 땀 냄새 끄트머리엔 알란이 달려있었다. 이런저런 방법과 통찰로 건강한 100세를 기록한 알란이 결국 마음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우리는 모두 자라나고 또 늙어 가는 법이지. 어렸을 때는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
유쾌한 알란은 “백 살이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야”라며 밑줄까지 그어준다. 마치 “아직도 사과는 다 익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천공항에서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는 비행기로 네 시간 남짓. 비행기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마음먹어볼 수 있는 피서지 몽골! 그 낯선 땅에 발을 딛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툭 치며 환영 인사를 던진 건 사람도 동물도 아닌 바람이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해봤지만 몽골의 바람은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초원의 상큼함 같기도 하고 동물의 썩은 가죽 냄새 같기도 한, 뭐라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태초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지구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머물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을 그런 바람이 지니고 있는 냄새. 그제야 난 깨달았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와 닿은 곳은 대륙의 이편저편이 아니라 내가 살던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삶이 있는 땅임을.
한여름 최적의 피서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골은 평균고도 1580m에 위치하며 5분의 1이 고비사막이다. 넓게 퍼져 있는 사막의 영향으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이르면 9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4월까지 겨울이 계속되고 매우 춥기 때문에 7월과 8월 한여름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다. 여름 한낮의 평균기온은 16℃이고 밤엔 살짝 한기가 느껴질 정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쾌적한 휴양지를 찾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파카를 꺼내 입고 밤새도록 불을 지펴도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 7.5배의 면적에 달하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인구는 고작 서울의 한 구에도 못 미치는 280만 명이 사는 곳.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바다라 불리는 호수 홉스굴까지 한 바퀴 돌아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2499km의 길고 험한 여정이다. 피서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만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에겐 맞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몽골 여행은 바람에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난다. 초원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구릉의 바람으로, 구릉의 바람에서 시작해서 호수의 바람으로. 러시아,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초원과 구릉 외에 4000개에 달하는 호수와 강이 있는 대자연이 몽골이다. 그렇다고 대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에르덴조(Erdene Zuu) 사원, 간단(Gandan) 사원 같은 불교 사원, 칭기즈칸 기념관, 자이승 전망대, 이태준 공원 등 역사적 건물들과 화산, 협곡까지 다채로운 자연을 품고 있다. 지구상에 아직 이런 땅과 이런 유형의 삶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이다.
실크로드와 칭기즈칸의 나라
기원전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건설한 몽골 대제국은 ‘용감함’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나와 있듯 러시아와 중국, 동남아와 유럽, 중동 국가에 이르기까지 동서 문물교류에 큰 영향을 끼치며 실크로드를 열었다.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던 이 야생의 유목제국도 결국 막을 내리고 내륙 중앙부가 1688년 중국 청나라에 복속되어 ‘외몽골’로 불리다가 1911년 제1차 혁명과 1921년 제2차 혁명을 통해 독립을 이루게 된다. 고비사막을 주변으로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며 내몽골은 아직도 중국에 속해 있다. 몽골 여행 하면 대부분 울란바토르와 테를지를 중심으로 한 옛 몽골 제국으로의 여행을 말한다. 지금도 도시 한가운데서 전통 복장에 무공훈장을 단 노인을 볼 수 있는데 현대식 마트 앞 벤치에 앉아 먼 과거로 시선을 둔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자아낸다.
한국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마트
울란바토르 마트에는 한국 음식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 집 건너 한국 음식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에만 머무른다면 먹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몽골의 대표적 휴양지인 테를지에는 전통 가옥 게르를 호화롭게 개조한 호텔부터 유럽식 리조트까지 편리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말을 타며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그러나 몽골까지 와서 이런 편리함만 만끽하고 간다면 진정 몽골을 여행했다 할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수만 마리의 양떼와 말떼들을 호령하는 거친 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몽골의 옛 수도 하르호린(Kharkhorin)을 지나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호숫가 차강노르와 푸른 진주라 불리는 홉스굴까지 적어도 열흘간의 유목생활을 체험해보길 권한다. 유목민 전통 천막 게르에서 잠들고, 삶은 양고기 허르헉을 먹고, 30도의 독한 칭기즈 보드카에 취해보는 것. 그리고 새벽에 깨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대자연에 온몸과 마음을 맡겨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몽골 여행이다.
스타렉스와 초원 화장실
몽골 여행은 눈뜨면 4륜 구동차를 타고 온종일 초원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오프로드를 달리다가 아무 데서나 철퍼덕 앉아 도시락을 먹고 볼일도 수풀 사이로 찾아들어가 보는 일이다(아프리카에선 이를 ‘부시 토일렛’이라 표현하는데 몽골에선 초원 화장실쯤 되겠다). 처음엔 우산이나 옷으로 가리면서 불편해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익숙해지면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간혹 길 한가운데 간이화장실처럼 보이는 곳도 있는데 재밌는 것은 앞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얼마나 귀한 대자연과의 교감인데 문으로 풍경을 굳이 가릴 필요가 있을까.
말과 양 외에 초원을 달리는 차는 딱 두 종류, 한국 차 스타렉스와 러시아 차 푸르공뿐이다. 편한 아스팔트길은 없고 대부분 협곡과 구릉을 번갈아 넘어가는 롤러코스터 같은 길이다. 그중에서도 차강노르에서 홉스굴까지 12시간이나 달려야 했던 비포장도로는 내 생애 가장 고단한 여정으로 기록될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답답했던 가슴속을 한방에 뻥 뚫어줬다. 도로 곳곳엔 ‘어워’라는 이름의 파란색 천을 두른 돌무덤이 있었다. 샤머니즘의 강한 전통을 보여주는 어워의 돌 사이사이에는 음식과 돈이 놓여 있었는데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 어워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며 기도를 드렸다. 거친 비포장 길을 달리다 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차를 타고 가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처럼 끝없이 요동치던 길. 어이쿠, 어이쿠 비명을 지르다 나중엔 그마저 체념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면 이 길을 가장 잘 만끽하는 방법은 칭기즈칸을 떠올리며 말 타고 달리는 상상을 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옛 수도 하르호린에서 만난 에르덴조 사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모든 종교를 허락하고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옛 수도 하르호린의 폐허 위엔 1585년에 세워진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다. 바로 에르덴조 사원. 108개의 불탑으로 성벽과 같은 벽을 이루고 있어 한참을 걸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광활하다. 사원 주변에서는 9세기경 투르크 기념비와 8세기경 위구르 왕국 수도의 폐허 등 역사적 유적도 만날 수 있다. 대륙 횡단용 캠핑카를 타고 이동하는 유럽의 단체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저들이 몽골 한 귀퉁이까지 왔을까 신기했지만 칭기즈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홉스굴의 비 내리던 밤과 차탄족 소녀
‘푸른 진주’라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 홉수굴 근처 타이가 숲에서 진정한 노마드로 불리는 차탄족을 만났다. 전 세계에 약 2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차탄족은 순록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영하 40℃의 날씨에도 순록의 등에서 잠을 잘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부동산이 부의 상징이지만 이들 유목민들에겐 순록의 숫자가 부의 상징이다. 오르츠라 불리는 천막은 게르와 다르게 생겼는데 에스키모족의 원추형 천막 티피와 닮았다. 여름엔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거나, 손수 만든 전통 장신구와 사탕, 꿀, 옷을 팔기도 한다. 전통 복장을 다소곳이 차려입은 차탄족 소녀의 수줍은 미소가 오랜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단순한 삶을 보여주는 땅
전통 음식 허르헉을 끓이는 강인한 인상의 몽골 여인. 밤새도록 난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두세 시간 간격으로 야크 똥을 넣어주던 무뚝뚝한 아들. 평생 번 돈을 주고 산 스타렉스를 애지중지 닦으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하던 무뚝뚝한 아트레 아저씨. 그들의 웃음은 요란하지 않았고 그만큼 귀한 감동을 주었다.
노을이 지고 칠흑 같은 밤이 오자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여명이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몇 곳이나 될까? 짜릿한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몽골 여행이 허무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하루 종일 초원과 구릉을 달려 게르에 도착한 뒤 작은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일, 게르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못해본 경험을 하면 그만큼 인생이 레벨업되는 것”이라던 어느 일본 영화의 대사처럼 한 번쯤은 복잡한 삶의 시간을 멈추고 단순한 야생의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한 여행지로서 몽골은 최고의 땅이 아닐 수 없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토요일,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를 여행했다. 부추겉절이를 넣어 먹는 독특한 곰탕으로 따뜻하게 점심을 먹은 뒤 궁남지를 찾았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의 궁남지 분위기는 그윽하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634년) 때 만든 왕궁의 정원이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만든 연못으로 삼국 중, 백제의 정원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궁남지를 찾았을 때는 초여름이었다. 남편의 직장 따라 대전에 와서 살 때였고 서울에서 놀러 온 두 친구에게 충청 지역의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마침 궁남지 연꽃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었던 터라 함께 갔다. 엄청나게 큰 연못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도 놀라웠지만 세숫대야만한 연잎과 연꽃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연잎은 우산으로 삼을 만큼 정말 컸다. 사진작가들이 떼 지어 몰려와 연못 곳곳에서 사진 찍느라 몰입해 있었는데 충분히 가치 있어 보였다. 친구들이 궁남지에 만족한 것은 물론이다. 그 뒤 한강 두물머리 세미원의 연꽃을 보면서도 감탄하였지만 내 기억 속에 ‘연꽃 1번지’는 여전히 '궁남지'이다.
그런 연꽃을 기대하기는 이른 오늘, 뜻밖에 연못 가득히 수련이 피어있다. 흰색, 붉은색, 노랑어리연까지.
연못 주변을 천천히 산책한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가리기 싫어 우산을 접고 비옷만 입고서. 자연의 생동 발랄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문득 스치는 달콤하고 익숙한 향기가 있다. 찔레꽃이다. 며칠 전 다녀온 북한산에도 찔레꽃이 많지만, 아직 피기 전이었다. 빗속에 깨끗하게 핀 찔레꽃에 코를 가까이 대어본다. 역시 매혹적인 냄새다. 마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반가운 친구 같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가 보면 안다. 많은 한국인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매력이 넘치는 바르셀로나는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도 큰 인기다.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비우티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또 몬주익 언덕에는 마라톤 선수 황영조 기념탑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우승을 안겨줬던 도시. 낯선 나라에서 한글을 보면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인 대성당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자치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는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어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특히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은 탁월한 명소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는 건축 문외한의 눈길도 저절로 이끈다. 특히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뜻은 ‘성 가족’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요셉을 뜻한다.
이 성당의 원 설계자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 성 요셉 축일(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으나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로 중도 하차했고 이듬해부터 가우디(당시 31세)가 맡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까지, 총 12년간을 오로지 이 성당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성당을 완공도 하기 전, 그는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할 당시 이 성당은 ‘예수 탄생’ 파사드, 종탑 한 개, 네 개의 탑, 지하 납골당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가우디 사후 100년(2026년)이 되는 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당은 천천히 자라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을 운명을 지녔다”는 생전 가우디의 말이 이뤄질 것 같다. 입장료가 비싸지만 매표소는 늘 장사진을 친다. 매표 요금은 완공을 위한 기부금 형태로 쓰인다.
바르셀로나를 빛내는 건축가 가우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400여 개의 회오리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가우디의 유해는 지하 박물관에 있다. 1869년(17세), 가우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이미 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터전을 옮겨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고향과는 달리 큰 도회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 시절, 많은 자극과 동기를 받는다. 1874년(22세),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창조성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 그는 늘 말이 없고 허름한 차림새에 이상한 실험들을 일삼았기에 평생 괴짜라는 꼬리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귀족적이면서 천박한, 댄디(dandy)이자 방랑자, 박식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기지가 넘치지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가우디를 천재라고 칭찬했다. 사후 30년 뒤인, 1960년대부터 그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빛내고 있다.
카사 밀라에서 구엘 공원까지
바르셀로나에는 성 가족성당 말고도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로 꼽히는 카사 밀라가 있다. 산을 주제로 디자인하고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건축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곡선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또 바다를 주제로 디자인한 카사 바트요(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는 도자기 타일과 유리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구엘 공원(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다. 가우디와 구엘 백작의 합작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은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펠라다 지역 땅을 매입한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해서 그리스의 팔라소스 산과 같은 신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원 부지가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땅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단지를 위해 무려 14년(1900~1914)이나 매진했지만 결국 자금난 등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 친화적 건축물,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한 공원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바지에 구엘 공원이 있다. 초콜릿을 닮은 듯한 돌기둥,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 석굴, 계단 위에 타일로 만들어진 도롱뇽, 기념품 파는 건물 등 가우디만의 색깔이 분명한 건축물이 오롯이 모여 있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만든 도리아식 기둥도 눈길을 끈다. 녹색 식물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시내가 조망되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가세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단 과거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해 유료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 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 포인트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직항이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13~14시간.
현지 교통 바르셀로나는 규모가 커서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 제일 편리하다. 도심이 복잡하므로 1일권을 사서 무제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음식정보 보케리아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구입해 즉석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근처의 레스토랑을 이용하자. 흥정으로 절반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숙박정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호텔 가격은 1박당 50만 원 이상. 아파트, 한인 민박,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숙박은 1박당 10만 원 정도.
화폐 유로화 통용.
날씨 바르셀로나의 4월 평균 최저기온은 8.5℃, 평균 최고기온은 17.6℃로 서울의 4월 중순 기온과 비슷하다. 예측 없이 비가 내릴 수 있으니 비옷과 우산은 꼭 챙겨서 외출하자.
시니어 여행 포인트 바르셀로나는 서둘러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도시다.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 도시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기장 근처로 내려오면 차도 옆으로 황영조 동상이 있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미로 미술관을 만난다.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근처 소도시 여행은 꼭 해야 한다. 몬세라트 성지와 타라고나를 적극 권한다. 누드 비치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체스(Sitges) 해변을 찾으면 된다.
새봄이 왔다. 세 손주에게 새 학기 시작이다. 집 앞 초등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손주와 함께 새봄이 시작됐다. 며느리와 딸에게 쌍둥이 손녀·손자와 외손자의 일정표를 받아 아내와 함께 살폈다. 초등학교 3학년 진급한 쌍둥이와 2학년이 된 외손자의 일정이 휴대폰에 기록했던 지난해 수준을 훌쩍 넘었다. 컴퓨터에 할아버지·할머니와 손주들의 일정을 정리했다. 한편의 종합 작전도가 완성됐다.
아내는 아침 일찍 가까운 아들집에 먼저 가서 아이들을 깨우고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가 끝날 때쯤 가서 손자와 아침마다 ‘어린이씨름’을 한다. 이 녀석을 잡아보면 기분을 알 수 있다. 요사이 새 학년이 되어 힘이 더 세졌다. 붙들고 부비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등을 토닥거리면 품안에 안긴다. 어릴 적 따뜻한 할아버지 품에 안겼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에게 옷을 입혀달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어리광을 부린다. 손녀는 옷 고르기, 머리 빗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옷에 까다롭던 어릴 때 습관은 많이 달라졌다. 할머니와 오순도순 옷 고르기를 제법 잘 한다.
쌍둥이 손주와 가까운 학교를 같이 간다. 세 손주의 등·하교를 보살피는 나름 이유가 있다. 먼저 복잡한 교통 환경이 마음에 걸린다. 손잡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교실 현관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인다. 아이들과 등·하교를 같이 하면 하루 만보걷기 걱정이 없다.
아이들이 고층 아파트 엘리베이터 이용을 꺼리고 홀로 집에 있기를 싫어한다. 손녀는 기계소리에 예민하다. 학교수업 끝나서 집에 왔다가 방과 후 수업에 다시 가고 다른 공부하러 몇 차례 집을 드나든다. 날마다 그 시각이 다르다. 때맞춰 마중을 나간다. 손주를 기다리는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말벗이 되었다. 간식을 챙겨주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어느 날 하교 길에서다. 아침에 들고 갔던 우산을 학교에 놓고 왔다. “우산은?” 했더니, “부전자전이야!” 손녀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빠는 책가방도 잃었다고 하던데요!” 이미 제 아빠로부터 얘기를 들었단다. 아들이 학창시절 책가방, 우산을 통째로 놓고 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심지어 한발에는 신발을 신고 다른 발은 맨발로 집에 오는 경우도 있었다. ‘부전자전!’ 쌍둥이에게 우산 분실 정도는 다시 묻지 않기로 했다.
딸이 육아휴직이 끝나 복직을 하면서 더욱 바빠졌다. 한주에 두 번 아내와 교대로 한 차례씩 세종시에 가서 외손자를 돌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낮에 출발하여 오후에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 아이가 저녁식사 후 운동하고 집에 오면 늦은 저녁이 된다. 다음 날이 되어야 서울에 올 수 있다. 한주에 이틀씩 외손자 돌보고,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이 꼬박 쌍둥이를 보살핀다. 일주일에 나흘은 혼자서 쌍둥이와 외손자를 돌보고, 하루는 교대로 쌍둥이를 살핀다.
세종시에 오갈 때는 짬을 내는 방법을 찾는다. 자기 일정을 빠듯하게 조정하고 교통수단 이용을 잘하여야 한다. 자원봉사일이 세종에 가는 날과 겹칠 때는 간식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한다. 관악문화원 문학공부 날은 아내에게 단독 돌봄을 부탁한다. 아내의 여유시간은 없다. “그래도 공유일과 주말이 있어서 다행이다.”며 웃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들·딸 가족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할아버지·할머니 여유시간은 사라졌다. 아내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과 새봄을 같이 할 예정이다.
새봄잔치는 시작됐다. 일흔 잔치다. 69세로 10년을 그냥 살고 싶다. 돌이켜보니 10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학생시절에 읽은 어느 여류작가의 ‘29세 10년’이라는 글귀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25세부터 노숙미를 자랑하려고 29세 행세하였으나, 막상 그 때가 되니 불효하는 노처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나이가 겁나서 35세까지 29세로 10년을 살았다’는 줄거리다.
샛별보고 출근하고 초승달을 벗 삼아 집을 찾으면서 열심히 살았다. 날마다 삶은 희망이 있었다. 사회은퇴 후에 생활이 안락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장년생활의 문제점을 제일 많이 안고 있다. 아들세대 청년들과는 취업전선에서 맞서야 하는 기막힌 처지에 놓였다. 사회에서 조기은퇴가 시작되지만, 국민연금 지급은 오히려 늦춰지는 어려움에 처했다. 평균수명은 매년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지공거사 65세, 사회에서 은퇴한 이때부터 생각이 깊어졌다.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는가. 대답이 쉽지 않다.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친구가 있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면 더욱 좋다. 희망사항은 많은데 해결방법이 쉽지 않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사에 정신 차리기 어렵다. 머리 싸매고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사회평생교육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몇 해 전까지 없던 나이제한이 보편화 되었다. 고령자는 수강이 제한되고 젊은이 위주의 취업과 창업이 성행하고 있다.
지하철을 타면 어느새 경로석 앞에서 서성인다.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젊은 세대에 대한 배려라는 이야기에 공감한다. 곤란하지 않게 알아서 처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가고 행동은 굼떠졌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증표가 되었다. 사회은퇴 전에는 현업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회은퇴 후에는 자원봉사와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보람차게 살고 있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면서 즐겁게 자원 봉사하는 분들도 만났다. 그들에게 숭고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평생사회교육에 참여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제는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경험을 사회에 되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사회교육 참여는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사회평생교육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 얼마 전까지는 취미·여가 활용 등 장년의 사회은퇴 후 생활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어느 틈에 일자리 창출·창업 위주로 청장년 교육처럼 교육과정이 변하고 있다. 장년도 새 삶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사회은퇴가 엊그제인데 눈 깜작 할 사이에 5년이 지나 70대로 훅 뛰어 넘었다. 멈추고 싶은 지점이다. 관악문화원에서 글쓰기 공부를 하고 신문원고 작성을 하면서 날 새는 줄 모르고 지낸다.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손주 돌보기를 한다. 나이 먹기를 멈추고 젊은 오빠인양 10년을 살아 갈 터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새 삶을 떳떳이 맞이할 것이다. 안락한 은퇴생활만 기대하기는 너무 젊었다.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나태해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일과표를 작성하고 꾸준히 실행하여야 한다. 휴일 이른 아침, 몇 번이나 창밖을 살피고 나서야 친구들과 산행하려고 집을 나섰다. 창문을 내다보면서 비가 올지 걱정하지말자.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눈이 오면 방한복 하나 더 입고 아침부터 집을 나서자. 망설이면 하루를 헛되게 보내고 만다. 은퇴 전보다 더 엄격한 일정관리를 하여야 한다.
69세 10년! 자식을 기르면서 한 세대를 다시 살고, 환갑동갑 손주를 돌보면서 또 한 세대를 다시 산다. 절묘한 자연의 순환이다.
요즘 십중팔구 자영업에 뛰어들면 망한다고 한다. 집 주위 가게를 별 생각 없이 보면 언제나 가게 문은 열려있고 영업은 한다. 그러나 어떤 가게를 타깃으로 하여 집중적으로 눈여겨보면 알게 모르게 업종변경이나 가게 주인이 바뀌고 있다. 손님이 제법 있어 성공했구나 싶었는데 업주가 바뀌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그 정도 사람이 들어와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박리다매라고 싸게 팔면 손님이 더 많아야 자영업은 살아남는다.
우리 집 뒤편에 작은 길이 있고 중간쯤에 생뚱맞게 10평대 작은 가게가 하나 있다. 주택지 사이에 있기에 눈에 잘 들어나지도 않는다. 가게업종이나 주인이 참 자주 바뀐다. 처음에는 중국음식점이 들어왔다. 40대의 배달부 아저씨가 겉에는 하얀 위생복을 입었지만 안에는 와이셔츠에 붉은 색깔의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배달을 다닌다. 식당 내부도 아주 깨끗했다. 장사가 제법 잘되는 것 같더니 문을 닫았다. 위생적으로 문제가 없었고 맛도 있고 동네장사니 착한가격까지 고집했다. 한동안 장사가 잘되는 것 같더니 문을 닫았다. 풍문에는 깔끔하던 남자 주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하는데 확인은 못했다.
다음에는 커피점이 들어왔다. 벽지도 새로 하고 고급커피머신도 들여놨다. 단골을 확보하려는 영업 전략으로 마일리지 카드도 만들었다. 차 한 잔에 마일리지 카드에 도장하나를 찍어 준다. 10개가 모이면 손님이 원하는 차 중에서 딱 한잔을 서비스하겠단다. 집근처라 해도 자주갈 일이 없어서 아주 드문드문 갔지만 내가 먹은 커피 열 잔을 채우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필자가 자주 팔아주지 못해 문을 닫은 것 같아 미안했다. 동네 한가운데 커피전문점은 단골 고객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 문을 닫은 주된 이유로 보인다.
다음에는 또 음식점이 들어왔다. 주인아주머니가 전라도 여수사람이라고 했다. 여수식의 바다 장어탕을 만들었다. 장어탕위에 손바닥 크기의 큼직한 두부가 한 점 올라가는 것이 특색이다. 내 입에는 잘 맞았지만 손님이 별로 없다. 주인에게 ‘이렇게 맛도 좋고 가격도 착한데 아직 선전이 덜되어서 그런지 손님이 생각만큼 적네요.’했더니 ‘전라도식 장어탕이 서울 사람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라고 한다. 지방에서 승승장구 하던 토속 음식점이 서울에 오면 맥을 못 추고 주저앉는 모습을 본다. 손님이 없으니 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다.
호프집도 들어왔고 과일가게도 들어왔다. 그마저도 잘 안될 때는 한동안 가게를 비워두기도 했다. 어느 날은 시끌벅적 사람이 모여 있어 가봤더니 천원, 오백 원하는 반짝 떨이상품을 팔기도 한다. 화장품 세일 전문매장도 들어왔다. 50% 할인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을 내다 걸었다. 떨이상품 매장은 원래 10일이내로만 장사를 하니 재미를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업종은 바뀐다.
최근에 만두전문점이 들어왔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손님들이 먹고 가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요리 전문가가 직접 와서 비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줄을 서서 몇 십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얼마나 맛있으면 저렇게 꿋꿋하게 기다릴까! 궁금해진다. 비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밖에서 기다리는 모습에 만두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도 두 손 들었다. 먹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직장인들이 우르를 몰려오는 11시 반부터 1시반 까지가 피크시간이다. 이 때를 피해 오후 2시쯤 아내와 함께 갔다.
손님이 차고 넘치다보니 메뉴가 아주 단순하다. 순한 맛과 매운맛의 두 가지 종류의 만두를 찐 만두와 만둣국으로만 팔고 있다. 반찬이라고는 달랑 단무지 하나뿐이다. 배달은 정중히 거절이다. 매운맛과 순한 맛의 만둣국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고 준비된 재료로 즉석에서 만든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영업 전략의 일종이 아닌가하고 의심도 한다.
먹어본 맛을 평가할 때다. 모두가 맛있다고 하는데 혼자서 맛없다는 말 못한다. 맛은 있다. 그렇다고 몇 십 분을 기다려서 먹기는 싫다. 요리달인이 직접 지도해주고 갔다는 유명세 때문에 손님이 차고 넘치는지 아니면 나 같은 맛을 잘 모르는 맛치 따위가 못 느끼는 독특한 맛이 있는 것이지 아니면 모두가 줄을 서니 덩달아 줄을 서는 필자와 같은 줏대 없는 사람들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손님은 줄을 서서 20~30분은 족히 기다린다. 여러 사람이 들어와서 망해나간 자리지만 역시 장사의 신은 있다. 틈새시장, 블루오션을 찾아 헤매는 자영업희망자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