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 들거나 비옷을 꺼내입고 또는 신문으로 머리를 가린 채 걸음을 서두른다. 하지만 작가는 노트와 펜을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리고 웅덩이를 바라본다. 웅덩이를 채우는 빗물과 가장자리에서 튕기는 물방울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다가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는 소제목을 보고 숨이 멎을 듯이 깜짝 놀랐다.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강력하게 그리운 이름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필자는 해방촌 꼭대기, 어수룩하고 가난한 동네에 자리한 보성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늑하고 정겨운 학교였는데 아침마다 등산하듯 학교를 다녀야 했던 우리들은 불만이 많았다.
미션스쿨이던 학교에는 인자하고 반듯한 선생님이 많이 계셨다. 사랑이 많은 선생님들이었지만 고루하고 답답한 편이었다. 학생부장을 맡은 화학 선생님은 깡마른 체구에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다니셨다. 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의 복장을 지적하거나 품행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하셨다. 필자는 그 선생님을 볼 때마다 현진건 소설에 나오는 B사감이 떠올랐다. 다른 선생님들도 화학 선생님처럼 엄격하거나 재미없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선생님들 가운데 유난스런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어느 봄날, 양지 바른 곳부터 목련이 피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마다 푸른 싹이 돋아나고 바람이 불 때 마다 교실에 쳐 놓은 커튼이 살랑거렸다. 봄이 오니 수업을 듣는 우리들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2교시가 지나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체육복을 갈아입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바깥 날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 한 친구가 소리쳤다.
“야, 박호순 좀 봐”
우리는 뭔가 재미난 일이 없을까 하던 차였으므로 눈에 불을 켜고 창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작은 키에 항상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던 국어 선생님을 우리는 박호순이라 불렀다. 순호박을 거꾸로 해서 붙인 짓궂은 별명이었다. 그 박호순 선생님이 목련나무 아래서 비를 맞고 있었다. 교실에선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목련꽃을 쳐다보면서 한 손으론 꽃향기를 맡고 있는 선생님을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선생님을 볼 때 마다 키득거렸다. 국어 선생님은 유치한 나르시스트라고 흉보느라 한동안 신이 났었다.
이 국어 선생님이 바로 을 쓴 최명희 작가다. 대하소설인 은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여러분 나는 유명해 질 거예요”
라고 말씀하더니 그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됐다. 그리고 이듬해 동아일보 공모에 1부가 당선돼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에 들어서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집필에 매진하였다. 선생님은 미완의 한 작품만을 세상에 남기고 갔지만, 한국현대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거나 신문으로 머리를 가리고 바삐 걸어가지만 작가는 물방울이 어떻게 웅덩이를 채우는지, 또 어떻게 웅덩이를 튕겨나가는지 관찰하여 글로 쓴다. 그러느라 비를 맞는 사람이다. 선생님도 빗속을 걸어 들어가서 하얀 꽃잎에 튕기는 물방울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생명의 기운을 언어로 길어내기 위해 기꺼이 비를 맞고 섰던 것이다. 비 내리는 교정에서 비를 맞고 섰던 선생님이 참으로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작가였다는 걸 몰랐던 우리들이 진짜 바보였다.’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 승객이 많아 좀 붐비는 상태였다. 사람이 많으니 늦게 탄 필자는 출입문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잠시 후, 문이 반쯤 닫히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투박한 어그부츠 발을 문틈에 쑥 들이밀고 있다.
이미 문이 닫히기 시작했으므로 다음 차를 기다리면 될 텐데 굳이 거의 다 닫힌 문을 열겠다고 발로 버티는 여자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한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그 여자는 계속 전철 앞쪽을 쳐다보며 발을 빼려 하지 않았고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언젠가 전철을 탈 때 문이 닫히고 있는데 무리하게 손을 넣거나 핸드백이나 우산 등으로 닫히고 있는 문에 들이밀어 억지로 여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경고 안내 방송을 들은 적 있는데 오늘 딱 목격을 했다.
앞쪽 기관실에서는 문틈에 발을 들이민 사람이 보이나 보다.
그것을 아니까 그 여자는 열릴 때까지 한쪽 발을 문 사이에 끼우고 앞쪽만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이 열리니 그 여자와 일행 남자가 탔다.
그들 뒤편에 서 있는 필자 눈매가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닫히는 지하철 문에 발 한쪽을 탁 들이민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필자는 잔뜩 그들을 흘겨보다가 얼마나 바쁜 일이 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해해 보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는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일본인이었다.
일본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는 예의 바르고 예절을 잘 지키기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렇게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남의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걸까?
며칠 전에 가회동에 있는 은행에 볼 일이 있었다.
가회동에 갈 때마다 필자에겐 별스럽게 보이지 않는 골목인데 대형관광 버스나 소형 버스에서 내린 외국 관광객들이 그 골목으로 구경하러 가는 걸 보면서 뭐 볼 게 있나? 했는데 얼마 전 정식으로 북촌 탐방을 해 보니 그 골목은 북촌 8경의 한 곳으로 참 아름다운 전통 한옥 골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통 한옥을 잘 느껴보기를 바랐고 우리나라로 여행을 와주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내리니 길 위에 한 무리의 일본인 여행객들이 아마 개인으로 놀러 왔는지 커다란 지도를 펼쳐 들고 의논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따로 없으니 아마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필자는 우리나라를 찾아 준 것이 고마워서 잠시 미소를 짓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고여덟쯤 되는 여행객들이 ‘스미마센’ 하면서 한옆으로 우르르 피해 주고 있었다. 아마 자기들이 필자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필자는 좀 놀랐다. 그들이 필자를 방해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필자가 조금 옆으로 비켜 지나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본어를 좀 할 줄 알았다면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몹시 아쉬웠다.
그런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친절한 일본인도 있는 반면 오늘, 닫히는 지하철 문을 열겠다고 한쪽 발을 쑥 들이민 그런 일본인도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필자부터도 행동에 조심하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는 시니어가 관절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운동을 추천하고 그 방법을 강동경희대학교병원과 공동으로 제작, 연재한다. 척추, 어깨, 팔꿈치, 무릎, 엉덩이 부위에 대한 건강 예방법, 수술 전후 관리, 스포츠 활동 시 주의사항으로 구분해 소개된다. 각 동작들은 시니어의 체력과 몸 상태를 고려해 누워서 혹은 기대어 하는 운동들로 구성됐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도움말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김동환 교수
모델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김은혜 물리치료사
재활의학과 전문의들은 어깨와 팔꿈치뿐만 아니라 척추, 무릎까지 모든 관절이 최대 위기인 날이 명절이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추운 겨울 외부활동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외부활동을 하게 되면 체온이 낮아져, 근육과 힘줄이 심하게 긴장하게 되고,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염증이 악화되기도 쉽다. 여기에 따라오는 장시간 운전도 관절을 해치기 쉬운 요소 중 하나. 가사활동도 문제다. 차례 준비를 위해 불편한 자세로 동일한 동작을 장시간 반복해야 한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김동환 교수는 “어깨는 우리 몸의 관절 중 가장 운동 범위가 넓은 부위이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하루 평균 3000~4000번 움직이는 과정에서 퇴행성 변화가 빨리 오게 됩니다. 다만 체중 부하가 되지 않는 관절이기 때문에 뼈와 연골보다는 근육과 힘줄의 퇴행성 변화가 더 흔하게 나타나지요. 그래서 기본적인 스트레칭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어깨·팔꿈치 질환 예방 운동
1 팔 앞, 뒤, 옆으로 흔들기
침대에 엎드려 팔을 위, 아래, 바깥쪽으로 움직이는 운동. 집에 침대가 없으면 책상 등에 한쪽 팔을 기대고 하는 방법도 있다. 이 운동의 명칭은 ‘흔들기’이지만 중력에 몸을 맡겨 흔들기보다는 천천히 움직이며 잠시 멈춰주는 것이 핵심이다. 팔을 뻗은 후에는 5~10초가량 멈춰준다. 엎드릴 때는 베개를 가슴에 받친다.
2 팔 펴서 당기기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스트레칭 방법 중 하나다. 팔을 쭉 편 상태에서 팔꿈치 위쪽에 반대쪽 팔의 손등을 걸어 가슴 쪽으로 당긴다. 완전히 당긴 상태에서 5~10초 정도 멈춘다. 팔의 각도를 위로, 중간으로, 아래로 내리는 방향에 따라 뒤쪽의 날갯죽지 주변의 여러 근육들이 각각 스트레칭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 문틀 잡고 가슴 펴기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스트레칭 방법이다. 문의 양쪽 틀에 팔을 걸쳐 체중을 실은 후 상체를 앞으로 가볍게 밀어준다. 시작할 때 어깨는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고, 팔꿈치의 각도는 90도 정도가 적당하다. 통증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몸을 내민 상태에서 5~10초 정도 유지하고, 1회 운동할 때마다 20회 정도 반복한다. 팔의 각도를 올리거나 내리면서 변화를 주면 가슴 앞쪽의 여러 근육이 스트레칭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4 수건 스트레칭
우선 팔을 뒤로 돌려 엄지손가락으로 등을 타고 올라가는 범위를 측정해본다. 잘 안 올라가는 쪽이 운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쪽이다. 사진에서 왼쪽이 운동 제한이 있는 쪽이라고 가정할 때 몸 뒤에서 수건의 아래쪽을 왼손으로 잡고 위쪽을 오른손으로 잡아 수직으로 세운 상태가 스트레칭 시작 자세다. 왼손으로 가볍게 수건을 잡고 힘을 뺀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수건을 위로 당기는 연습을 한다. 오른손을 서서히 움직이면서 위아래로 수건을 이동시키면 자연스럽게 왼쪽 어깨 주변 근육이 스트레칭되면서 운동 범위가 늘어나게 된다.
5 막대 스트레칭
지팡이 또는 집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구둣주걱, 우산 등을 이용해도 된다. 막대의 양쪽 끝을 잡고 한쪽 팔을 쭉 펴 이완시켜주는 스트레칭 방법이며, 수건을 이용하는 방법의 반대로 생각하면 쉽다. 운동 제한이 있는 쪽 손을 이번에는 위쪽으로 잡고 아래쪽 손으로 막대를 미는 방법으로 스트레칭을 진행한다. 특정한 각도에 구애받지 말고 머리 위, 수평 방향 등 다양한 각도로 스트레칭한다. 마찬가지로 통증이 없는 범위 내에서 팔을 쭉 편 상태로 5~10초 정도 자세를 유지한다. 각 방향별로 10회 정도 반복한다.
수술 전후 시행할 수 있는 초기 재활운동
어깨나 팔꿈치를 다치면 제때 치료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재활이다. 관절 수술은 힘줄을 묶거나 뼈에 고정시키고, 근육과 연골 등에 물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 정상의 운동 범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술 주변 부위에 구축이 오기 전에 재활 프로그램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근력을 키워야 한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 김동환 교수는 “수술 전후 가장 중요한 사항은 수술을 담당한 전문의에게 수술방법 및 수술 후 주의사항을 잘 듣고 재활 프로그램을 수립해야 합니다. 수술 방법에 따라 관절가동 범위의 정도나 운동 프로그램을 결정할 수 있으므로 재활의학 전문의와 상담할 때에도 그 내용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조언한다.
1 팔을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벽에 대고 걷는 두 다리를 흉내 내듯 손가락을 위로 움직여 팔이 천천히 펴지도록 한다. 어깨나 팔꿈치가 통증을 느끼는 시작점까지 일단 올렸다가 절반 정도 다시 내려온다. 다시 올릴 때는 처음 올렸던 높이보다 조금 더 올라갈 수 있도록 서서히 시도해 본다. 반복해서 목표를 정해 시도하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높이를 확인할 수 있다.
2 팔을 몸 안쪽으로 밀기
어깨와 팔꿈치의 근력을 키우기 위한 기본 운동이며, 베개만 있다면 집 안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겨드랑이 사이에 베개를 끼운 상태에서 팔꿈치는 자연스럽게 90도 정도로 유지한다. 베개를 누른 후 5~10초 정도 그 자세를 유지한다. 통증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시행하며, 너무 무리하게 힘을 주지 말고, 하루에 수회 반복한다.
3 팔을 몸 바깥쪽으로 밀기
팔꿈치를 자연스럽게 90도 정도로 위치한 상태에서 벽과 팔 사이에 베개를 대고, 다른 쪽 손으로는 베개를 받쳐준다. 팔 안쪽으로 밀기와 마찬가지로 베개를 누르면서 힘을 주어 버틴다. 체중을 싣지 않고 팔의 힘으로만 눌러야 제대로 근력을 키울 수 있다. 누른 후 5~10초 정도 자세를 유지한다. 동일하게 통증이 없는 정도로 너무 무리하게 힘을 주지 말고 하루에 수회 반복한다.
뉴욕이나 도쿄 등 선진국 대도시에 가면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과 술은 물론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문화를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각 나라 방문 비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싼 값으로 먼 나라의 문화를 맛보고 즐길 수 있다. 이때 제시할 수 있는 단어가 ‘문화력(文化力·Cultural power)’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문화력을 국가와 국민이 갖는 매력이면서 한 국가의 브랜드 파워로 풀이하고 있다. ‘경제력(經濟力·Economic power)’이 경제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문화력도 문화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문화력은 그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매력 정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의 정도를 문화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만약 ‘문화력지수(Cultural power index)’를 만들어 주요 도시들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의 서울은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음식과 술의 종류가 다양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도 수시로 무대에 오른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각설이처럼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오리지널 공연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요즘엔 일부 대형 영화관에서 해외 유명 오페라 또는 콘서트를 녹화해서 방영하거나 생중계하기도 한다. 이태원이나 홍대 앞 거리에는 각 나라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요르단,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다 비슷해 보이는 음식 같아도 조금씩 다르다. 중남미는 물론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아프리카 음식점도 있다.
필자는 운 좋게도 뮤지컬 , 오페라 를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여러 번 봤다. 그래서 가끔 무대와 의상, 주연배우 등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프랑스 3대 뮤지컬인 , , 도 외국과 서울에서 번갈아 가며 관람했다. 는 하도 많이 봐서 주인공 이름은 물론 대사를 듣지 않아도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대강 알 수 있다.
무슨 큰 자랑처럼 필자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문화력지수가 높은 서울을 잘 활용해 개인별 문화력지수를 키우자고 제안하기 위해서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 같은 대도시만 활용해도 문화적 욕구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 가끔 1박 2일 코스로 서울을 방문해 다양한 문화 체험과 함께 음식점 등을 순례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근처 호텔 방들이 만석이라고 한다. 지방에 사는 가족들이 촛불 집회 참가 겸 서울 나들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영화 에서 주인공 태식(원빈 분)이 하는 말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오늘 놀고 쓰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해석하고 싶다. 열심히 일해서 모았든, 투자와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든,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 늙어 죽을 때까지 쓸 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가장 먼저 고민할 일은 ‘돈을 어떻게 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닐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또 내일 하며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다리에 힘이 빠져 돌아다닐 기력마저 없어진 뒤일 수도 있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하는 게 아니라 가슴 떨릴 때 해야 한다.” 이 말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돈을 쓸 때도 다 때가 있다. 나이 들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물론 자녀나 친인척들에게 주거나 사회에 기부하겠다면 말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엔 강의하러 가면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자주 청중들을 부추긴다. 버킷리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다. 대단한 일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이렇게 한번 짜보자. ‘올해에는 오페라를 두 개 보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영화를 보자.’ 오페라나 영화를 보러 갈 때 괜찮은 음식점에 들러 식사까지 할 수 있다면금상첨화. 이처럼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해서 실천해보자.
오페라와 영화에는 취미가 없고 여행을 더 선호한다면 목록을 바꾸면 된다. 문화력지수가 꼭 오페라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수도 있고 박물관이나 유배지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섬이나 폐사지(廢寺地), 전적지(戰跡地), 이름난 고택(古宅), 습지(濕地), 유명 사찰, 교회(성당) 등도 좋은 선택지다. 술과 음식을 좋아한다면 지역 양조장이나 맛있는 음식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교의 산들을 섭렵하는 것도 좋은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다. 서울만 해도 가까운 산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먹거리, 볼거리도 많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오페라 이름 하나, 산 이름 하나, 음식점과 양조장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느끼는 뿌듯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버킷리스트는 문화력지수를 키우기 위한 일종의 계획서 역할을 해준다. 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것도 좋지만 전국 지도를 놓고 여기저기 갈 만한 곳들을 기웃거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페라와 뮤지컬도 익숙한 작품에서부터 좀 낯선 작품들까지 죽 적어보라. 다 못 보고 죽을 만큼의 목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욕심 많다고 누구에게 야단맞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쉬고 싶으면 쉬는 것이 인생이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보겠다는 다짐도 좋지만 중간에 다른 게 더 재밌어지면 지우고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면 된다.
중요한 것은 유인(誘引)과 동력(動力)이다. 이것에 시동이 걸려야 하고 싶은 일과 목표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고 노력한다. 은퇴 후 나이 탓이나 하면서 넋 놓고 앉아 있다가는 뒷방 노인네 취급받기 십상이다. 당장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계획대로 움직여보자. 적절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은 ‘필요악(必要惡·Necessary evil)’이라는 말이 있다. 버킷리스트는 필요악을 넘어 ‘필요선(必要善·Necessary virtue)’이다. 비가 올 때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우산이다. 우산처럼 버킷(양동이)도 기왕이면 여러 개가 더 좋지 않을까.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2017년 정유년 열 번째 아침이 밝았다.
우와~
오늘따라 유난히 쨍한 햇빛이 가슴에 와 박힌다. 하도 눈이 부셔 윙크하듯 눈이 저절로 찡긋해지고, 촬영할 때 라이트를 가득 받은 사람처럼 온몸이 자연에 발가벗겨진다.
거실과 안방의 먼지들도 모든 죄를 천지에 드러내듯 하나하나가 작은 차돌만큼 크게 보인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고 용서를 바라는 마음처럼 겸손해지는 날이다.
날 선 추위는 곁에서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대단한 햇빛을 본 게 과연 언제였던가.
그날도 그랬지.
친구 소개로 예쁜 여학생 만나 학교에서 늘 붙어 다니고 서로의 강의시간표도 달달 외웠지.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친구들의 볼멘소리 뒤로 하고 둘만 아는 장소로 뛰어가 나중에 오는 사람이 나타날 골목길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렸지. 개나리와 진달래 필 때는 고궁을 거닐었지.
여름방학이면 일을 해야 하는 필자 때문에 뚝섬 모래사장에서 만나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마냥 즐겁기만 했지. 차비까지 탈탈 털어 국화빵 사 먹으며 한 없이 걷고 또 걷는데도 발이 안 아팠지.
우리가 만날 때는 왜 그리도 비가 자주 내렸을까. 변변한 우산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비닐우산은 우리를 급속도로 밀착시켜 비 오는 날씨를 은근히 고마워했지. 그 시절엔 눈도 왜 그리 많이 왔는지 함박눈 내리는 날이면 우산을 털어가며 걸었고 넘어질까 걱정되어 더 밀착하고 걸었지.
그렇게 봄에서 겨울까지 일 년을 꿈같이 보냈지.
다음 해, 봄도 오기 전 영장이 나와 입대를 하고 훈련받는 동안 우리 소대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았지. 자대배치 받은 부대에 면회도 자주 오고 즐거운 기대감에 병영생활이 희망찼었지.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다음 바쁘다며 편지와 면회가 뜸해지더니 상병 계급장 달던 날 오전에 절교 편지를 받았지. 그날 본 하늘이 오늘 본 하늘과 같았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지만, 10여 통의 편지를 보내도 끝내 소식은 오지 않았지. 소개해준 친구를 통해 같은 은행원 상사와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지. 제대하고 만났을 때 결혼을 약속했다는 말을 듣고 축하해주며 끝냈지.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오늘 눈부신 햇빛이 그 시절을 끄집어낸다. 첫사랑은 다시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만났던 장소들이 하나하나 모두 생각나는 걸 보니 ‘첫’이라는 단어만큼 여전히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추억임이 분명하다.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려봤다. 박시룡(朴是龍·65)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의 기사는 그저 황새복원의 역사다. 읽다 보면 ‘박시룡’이 아닌 ‘황시룡’으로 읽힐 정도다. 한국에서 멸종된 황새 복원을 위해 살아온 세월만 20년. 황새들의 안녕을 잠시 뒤로 하고 사회에서 허락한 현역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고별 강연 준비에 여념이 없던 1월의 어느 날, 교원대 교정에서 박시룡 교수를 만났다.
한 분야의 대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인생에서 그 분야의 것을 빼면 어떤 얘기를 하게 될까? 박시룡 교수와의 인터뷰가 궁금했다. 그래서 황새 복원에 관한 이야기는 최소화해보려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 승 전 황새 복원’. 박 교수가 교원대에서 한 마지막 강연 제목도 ‘황새를 부탁해’였다.
“고별 강연 주제는 제가 정했어요. 제2권역인 충북을 통해서도 황새 야생 복귀를 실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떠나고도 교원대를 중심으로 황새 복원 사업이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죠.”
은퇴를 앞뒀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박 교수는 여전히 바쁘고 할 일이 많았다. 황새를 한반도 땅에 다시 날게 한 사람으로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황새 복원 男, 알고 보니 박쥐 박사?
박시룡 교수는 원래 박쥐 연구로 공부를 시작했다. 경희대학교 학부와 석사과정을 통해 박쥐의 유전과 관련한 연구를 했고, 독일 유학 시절 박쥐 행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것도 흡혈박쥐에 관한 연구였다.
“독일 유학 당시, 본 대학교에서 지도교수를 만나 박쥐를 연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분이 흡혈박쥐를 연구하는 분이셨어요. 세계보건기구(WHO) 파견으로 흡혈박쥐 주 서식지인 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전문가셨습니다. 흡혈박쥐를 독일로 옮겨 실험하고 있었죠. 저는 박쥐의 감각, 생리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초음파를 이용한 일상적인 박쥐의 음성학적 소통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교원대 동물학 분야 교수가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교육환경이 독일에 비해 매우 열악했다. 독일에서 썼던 초음파 녹음기는 당시만 해도 몇천만원 되는 고가 장비여서 살 엄두를 못 냈다. 교육부에서 기자재 지원 비용을 얻어냈지만 필요한 장비들이 너무 많았다.
“소리를 분석하는 분석기가 필요해서 그걸 먼저 샀어요. 초음파 녹음기는 비싸서 포기하고 가청음이라고 있어요. 릴 테이프로 녹음하는 건데 그건 얼마 안 비싸더라구요. 가청음은 어디다 쓰냐면 새소리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파라볼라(우산 모양의 극초단파 중계용 안테나)’라는 집음기를 들고서 새 가까이 가서 소리를 녹음해 수집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파라볼라가 없어서 TV안테나 뽑아서 썼어요(웃음). 조잡하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황새 복원 사업이 중요하다고요? 왜죠?
굳이 다른 얘기를 해보자고 해놓고 뜬금없이 물었다.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황새 복원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해 이 땅에 살게 하겠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유학길에 올랐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때가 1981년이었는데 광주 민주항쟁 바로 직후였어요. 외국에 처음 나가본 거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르푸트한자를 타고 이동하는데 프랑스 대학생 무리가 한쪽 좌석에 무리 지어 앉아 있었어요.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그 당시 우리가 많이 못살았어요. 저애들은 여유 있게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뭘 배우겠다고 유럽이라는 곳을 가고 있나. 눈물이 나더라고요.”
유럽에 가보니 모든 것이 풍부했다. 대형 마트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문화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은 모두가 급물살을 이겨내며 살던 시절이었다. 시국을 의식한 듯 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하고 저는 1952년생 동갑입니다. 대학 시절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계엄령을 내리고 학교 문을 닫아버렸어요. 공부를 못했어요. 저는 주동자가 아니었지만 경찰에 끌려들어갔다가 훈방조치됐고, 장발족 단속에 걸려 또 경찰서에서 하루 있다 나오고요. 통제당하고 어려운 시대에 박 대통령은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만 다녔어요. 나라의 아픔도 느끼고 성장했어야 하는데….”
또다시 유학생활의 단상이 이어졌다. 6년 동안 유럽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그들의 ‘배려’하는 국민성에 놀랐고, 과거·현재·미래와 함께하는 장묘문화가 새롭게 느껴졌다.
“독일의 경우 우리와 정말 다릅니다. 묘소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화단으로 돼 있어요. 더 충격인 것은 30년이 되면 법적으로 없어집니다. 제한된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걸 다 놔둬버리면 지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새 복원 사업은 근본적인 상생운동
박 교수는 독일 유학생활 이야기를 통해 황새 복원 사업의 가치를 전하려는 듯했다. 배려를 기본 바탕으로 자연과 마주하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독일인들의 삶이 귀감이 됐다. 황새가 대한민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개체 수를 늘려간다는 것은 상생과 순환의 근본을 잡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황새 복원 사업은 자연이 살고, 나라가 살고,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국민의 배려가 밑바탕이 돼야 합니다. 사람도 생태계의 한 구성원입니다. 사람은 숫자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 잘 몰라요. 그런데 멸종 위기종, 한 개체의 멸종은 100년 200년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그 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요. 황새의 멸종은 결국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가령 ‘농약을 얼마나 많이 썼기에 개체의 멸종을 가져왔을까?’ 예를 들어 일고여덟 쌍 중 한 쌍이 불임이라고 해요. 1960~1970년대에는 1cc당 1억 마리 정도 정자가 생성됐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1cc당 5000만 마리밖에 안 된답니다. 4000만 마리 밑이면 불임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화학 물질에 어려서부터 노출되어 왔다는 거죠. 우리 생애는 너무 짧아요. 황새를 복원하기에는요. 황새를 넘어서 결국 우리 인간의 삶에 부메랑이 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날 것입니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포함한 생태계와 우리 생활,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거로 생각합니다.”
황새는 현재 한국교원대 사육장에 96마리, 예산에 67마리가 있고 자연 방사로 서식하는 개체 수는 14마리다. 작년에는 자연 번식을 했던 암컷 두 마리가 전신주에 걸려 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전반적인 시스템 재고의 필요성도 황새 복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법적인 정년퇴직을 맞은 저는 겨우 20년 했는데 이 사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꼭 좀 이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품은 것은 40년, 그림 그린 것은 1년
박 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있던 작년 말,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황새와 자연을 주제로 한 수채화 전시회를 가졌다. 손사래를 치면서도 “유년 시절 미술 선생님이 ‘수’는 꼭 줬다”며 청문회식 답변(?)으로 본인의 소질을 인정했다.
“유학 시절이 외롭더라고요. 독일 본은 흐린 날이 많아요. 그래서 가끔 스케치를 하고 그랬어요. 수채화의 대가 에밀 놀데(1867~1956)의 수채화 책을 보고 난 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속앓이를 했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 그림을 팔아서 학비를 벌 정도였다고 하니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본에서 유럽 박쥐학회가 있었어요. 그때 박쥐를 그려 액자에 넣어 30점 정도를 전시했는데 다 팔렸어요. 그림 팔아 번 돈으로 몇 개월 생활비로 썼습니다.”
그는 황새복원사업의 홍보를 위해 그림 재능을 활용하고 있다. 시중에 본격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컵이나 텀블러, 홍보용 티셔츠 등에 직접 황새를 그려넣었다. 글씨 디자인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 틈틈이 연습해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박 교수가 그린 황새 그림 100점은 질소 처리돼 고별 강연 이후 타임캡슐에 저장됐다. 이 캡슐은 100년 후인 2096년에 열게 된다고.
“몇 작품은 학교 박물관에 기증했고 100점은 타임캡슐에 넣었습니다. 100년 후에 결국 황새가 복원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게 되겠죠. 이 그림과 함께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할 겁니다. 우리 후손들이 되겠죠.”
은퇴 후 박 교수는 예산황새공원(충남 예산군 광시면) 쪽에 사무실을 얻어 황새 복원을 위해 다시 뛸 계획이다. 살면서 다른 길을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없다는 듯 멀리 시선을 둔 채 미소만 짓는다.
“그래도 자연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인생을 살면서 감동 아닌가요? 황새와 상생할 100년 후를 상상해봅니다.”
필자는 은퇴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5F(Finance, Field, Fun, Friend, Fitness), 5자(놀자, 쓰자, 주자, 웃자, 걷자), 연타남(연금 타는 남자)과 연타녀(연금 타는 여자) 등이다. 그중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것 중 하나가 LED다. LED는 원래 ‘발광다이오드(Light Emitting Diode)’라고 불리는 반도체 소자를 말한다. LED를 사용하는 LED TV와 LED 전구는 매우 밝을 뿐 아니라 수명이 길면서도 유지비용은 적게 든다고 한다. 이에 필자가 저금리·고령화시대의 어둠을 밝혀줄 뿐 아니라 수명이 길면서도 비용과 노력은 적게 들어가는 3가지 은퇴 설계 전략을 기왕이면 ‘L·E·D’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에 맞춰본 것이다.
먼저 ‘L’은 ‘롱 워크(Long work·오래 일하기)’로부터 가져왔다. 고령화시대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오래 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면 그에 따라 근로기간도 늘어나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퇴가 빨라지면서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평균 53~54세에 불과하다. 2016년부터 정년 60세 의무화가 시작되었지만 은퇴 연령이 크게 늘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자녀들에게만 ‘스펙’을 키우라고 요구할 게 아니다. 중·장년들도 현역으로 있을 때 스스로 자기계발을 통해 인생 이모작, 삼모작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E’는 남보다 빨리 시작하자는 ‘얼리 스타트(Early start·빠른 준비)’를 의미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처럼 가능한 한 일찍 돈을 벌기 시작하고 돈을 버는 순간부터 은퇴 설계를 염두에 둬야 한다. 일찍 시작하고 늦게까지 소득을 올리는 맞불작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제 직장을 잡았으니 좀 즐기고 놀아야지 하다가는 나이 들어서 은퇴 설계 전문가로부터 “노후 설계·은퇴 설계가 안 나오는데요”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유능한 의사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은퇴 중환자(重患者)’가 되지 않으려면 1년이라도 빨리,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게 노후 준비와 은퇴 설계의 핵심이다.
‘D’는 ‘더블 인컴(Double income·맞벌이)’으로 부부가 맞벌이 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외벌이로는 은퇴 설계가 불가능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대수명이 70세였던 시절에는 남편 혼자 30년 벌어 부부의 여생 20년(남편의 60세 은퇴 후 부부가 평균 10년씩 더 산다고 가정)을 설계하면 그만이었다. 30년으로 20년을 설계하는 것이므로 산술적으로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30년 벌어서 적어도 60년(부부 두 사람이 각각 30년)을 먹고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맞벌이 비율은 43%로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낮다. 미국이 65%, 독일이 61%, 프랑스가 60% 등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 57%에 달한다. 가부장적 관습, 육아 및 교육, 가사 분담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맞벌이 비율이 급속하게 높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개인들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과제다.
L·E·D는 결국 “인생 이모작을 미리 준비하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한 집에 두 마리는 있어야 한다”는 지침이다. 사실 이 3가지 중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어렵다고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현실을 피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이렇게 LED를 설명하면 30~40대의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은 크게 공감을 하면서 어떻게든 헤쳐 나갈 궁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현재 50대 이상, 특히 60~70대에게는 LED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챙겨보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 나이에 나도 일할 자리가 없는데 배우자까지 일을 찾으라고? 거 돼도 않는 말, 실상과 맞지도 않는 말 하지도 마쇼!”
필자도 50대 이상 나이 드신 분들에게 LED를 권장할 마음은 없다. LED는 오히려 그분들의 자녀 세대들에게 적용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새로운 LED를 소개하고자 한다. 두 번째 LED의 ‘L’은 ‘배우자(Learn)’,‘E’는 ‘연습하자(Exercise)’, ‘D’는 ‘하자(Do)’를 의미한다. ‘배우자’라는 말은 얼마 전 기고에서도 주장한 것처럼 나이 들수록 필요한 두 배우자 중 하나다. 다른 한 배우자는 남편과 아내를 뜻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셨을 것이다. 은퇴한 후 30~40년을 별달리 하는 일 없이 보낼 수는 없다. 은퇴 후의 배움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뭔가 할 일(Field)’을 찾기 위해서 하는 행위에 가깝다. 취미활동도 배워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또 실내에서 온라인 등을 통해 배우는 것도 좋지만 밖에 나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배우는 것이 신체적·정신적 건강에도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댄스, 악기 등과 같이 서로 만나 함께 배우고 취미생활을 하면 덤으로 다양한 친구들까지 사귈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다. 배운 뒤에는 부지런히 익히고 연습(Exercise)해야 한다. 피아노 또는 사진 촬영, 커피 만드는 법을 배운다고 예를 들어보자. 무엇에 빠지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다. 그러다가 자신감이 생기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배운 것을 실행해보기도 하고 동호회는 물론 봉사활동 등에도 적극 나설 수 있다. 배우고 익힌 다음 실제 활동(Do)에 나서는 것이다. 좀 서툴다고 탓하는 사람은 없다. 공자님께서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好)’, 즉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우고 익힌 것을 실행한다면 더 기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學習而時行之 不易說好’, 즉 ‘배우고 익혀서 때때로 행하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로 바꿔 말하고 있다.
한 선배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할까 말까 고민이 되면 하고, 갈까 말까 고민이 되면 가야 한다. 나이 들면 무엇이든 하는 게 좋다. 다만 더 먹을까 말까 고민이 될 때는 그만 먹는 게 좋다.” 은퇴학자로 유명한 미국의 칼 필레머 교수가 쓴 책 에는 “비가 올 때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우산”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막연한 걱정이 아니라 전략과 준비, 학습과 실행, 즉 ‘L·E·D(Long work, Early start, Double income)’와 ‘L·E·D(Learn, Exercise, Do)’ 같은 여러 개의 꼭 있어야 할 우산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통금이 해제된 크리스마스는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통금해제 크리스마스이브 인파에 밀리고 진눈개비에 눌려 아내에게 선물할 우산은 이미 부서져버렸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었다.
야간통행금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민심회유책으로 해제할 때까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위반자는 파출소에 연행되어 즉결재판을 받고 과태료를 납부해야 했다. 밤 11시가 되면 귀가전쟁이 벌어졌다. 대중교통이 끊기면 택시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도심 광화문·을지로·충무로는 늘 귀가 인파로 뒤덮였다.
통금시간의 거리에서는 야경원의 호루라기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금해제는 그야말로 별천지와 다름없었다.
통금해제 체험
젊은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 필자는 퇴근 후 근처에서 근무하는 몇몇 친구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났다. 그날은 마침 눈까지 내려 눈꽃에 취한 우리는 저녁식사에 반주까지 곁들였다. 결국 술기운이 불을 붙였다. “통금해제를 체험하자!” 누군가의 제안에 “옳거니!”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연년생 아이들이 어려서 외출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코트 주머니에는 아내에게 줄 예쁜 우산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미니스커트 입고 꽃무늬 우산을 든 미녀들이 방송 화면에 자주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양산 겸용 접이식 우산은 숙녀들의 소지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부서진 우산
수천·수만의 인파 구경이 통금해제 체험의 전부였다. 자정이 넘어도 귀가전쟁이 없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초저녁에 내리던 눈이 자정 무렵 진눈개비로 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날씨가 안 좋아 대중교통이 거의 끊겨 걸어서 귀가를 해야 했는데, 걸어가는 동안 통금해제로 몰린 사람들과 부딪치고 진눈개비에 젖었다. 도리 없이 아내에게 주려고 산 우산을 펴들고 말았다. 그래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물에 빠진 생쥐 모양새가 되었다. 우산을 살펴보았다. 비에 젖은 천은 말짱하였는데 살은 이미 구부러지고 부러져서 선물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물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아내에게 쑥스럽게 내밀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우산 덕분에 걸어서 무사히 집에 왔다. 다음에 더 좋은 선물할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눈개비 피하는 우산으로 사용하면 되지! 살 몇 개 고치면 새것과 똑같겠네!” 천사의 대답이었다.
불현듯 헤이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여럿이 어울려 스치듯 지나쳤는데 그때는 아직 건물들이 제대로 들어차지 않았을 때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간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여러 번 듣게 되어 다시 한 번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움츠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합정역 1번 출구에서 2200번 버스가 파주까지 가는데 헤이리를 경유한다. 편도 2,500원이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자리가 거의 만석이다. 바로 강변으로 빠져 자유로를 타고 가다 보면 오른쪽에 고양시, 일산이 멀리 보이고 왼쪽에는 가시철망 너머로 서해가 보인다. 1시간가량 달리니 출판단지를 지나 헤이리 1번 게이트에 도착했다.
헤이리는 1998년부터 조성된 곳이므로 아직 역사가 20년이 채 안 되었다. 15만 평 부지에 미술인, 음악가, 작가, 건축가 등 380여 명의 예술인들이 각자 개성 있게 자신의 작업장, 갤러리, 공연장, 박물관 등을 짓고 있다. 문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곳이다.
이번에 가본 헤이리의 모습은 5년 전과는 많아 달랐다. 입구에 문화예술단지 답지 않은 어설픈 매표소가 있었다. 영화박물관 등 여러 가지 박물관들도 많이 들어차 있었다. 입장료가 대부분 7000~8000원대라서 양껏 구경하려면 일인당 10만원은 잡아야 했다. 티켓을 구입하면 휴대폰에 영수증이 뜬다. 해당 박물관에 가서 휴대폰에 저장된 영수증을 보여주거나 휴대폰 끝자리를 불러주면 입장할 수 있다.
영화박물관부터 둘러봤다. 입장권은 8000원이다. 입구에서 휴대폰 번호를 대니 연락받았다며 3층부터 구경하고 지하 1층까지 구경하면 된다고 했다. 음향 효과를 내는 방법을 소개하는 영상이 있었고 각종 소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소품들을 갖다 놓았으나 입장료 8000원은 많이 비싼 듯했다. 30분 정도 소요되는 국내외 명작들의 OST와 추억의 장면들을 다시 본 것만으로 겨우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려고 했으나 길이 미로 같아서 몇 바퀴 돌아도 제자리였다. 안내 지도에 현 위치를 표시해놓지 않아 헤매는 사람이 많았다. 화장실 인심도 야박했다. 공중화장실이 한 군데도 없어 화장실에 가려면 업소에 들어가 매상을 올려줘야 겨우 화장실 열쇠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국내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얼마나 헤맬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한길출판사가 지은 북하우스가 좋았다. 독특한 건물 양식에 3층까지 책을 전시해놓았다. 그런데 건물 뒤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책 전시관은 입장료를 6000원씩이나 받았다. 굳이 입장료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 무료로 개방한 아프리카 박물관은 좋았다. 쇼나 조각에 관심을 보였더니 1번 게이트 근처의 ‘레오파드 락’이라는 가게를 소개해줬다. 과연 가보니 사고 싶은 조각품들이 많았다. 가격대도 소품이 30만원 정도였다. 차를 가져갔더라면 몇 개 샀을지도 모른다.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점심으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으나 피자, 케이크 등 브런치 메뉴들이 많았다. 겨우 찾아낸 곳이 편의점에서 같이 운영하는 푸드코트였다. 그런데 새우볶음밥이 7,000원이나 했다. 5,000원 정도만 받아도 될 만한 음식이었다. 이런 곳에도 설렁탕이나 감자탕 또는 동태탕, 하다못해 김치찌개를 파는 음식점이 한 집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그 밖에 게임박물관, 인형박물관, 커피박물관, 추억박물관, 악기박물관, 동화세상박물관 등이 있었지만 관람객들이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적은 것을 보니 입장료 책정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입장료를 대폭 할인하거나 주기적으로 반값으로 할인하는 행사라도 해야 관람객들이 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리 마을 건너에 있는 거대한 영어마을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인적도 없이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저러다 흉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기억으로는 입장료도 있었다.
마침 첫눈이 왔다. 비 소식이 있어 눈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싸라기눈이 한나절은 퍼부었다. 우산 없이는 도저히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축복 같은 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서울에 도착하니 이 도시가 좋다. 역시 필자는 도시민이지 헤이리에 거주할 예술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리는 해가 지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란다. 가끔 둘러볼 가치는 있는 곳이지만 살고 싶은 동네는 아니다. 몇 해 지나서 다시 가보면 더 알차게 꾸며져 있을 것이다. 보완되어야 할 점이 많아 보이는 헤이리 마을이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