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을 명령받을 때가 있다. 내 스스로 정한 곳이 아니라,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다녀와야 하는 지역과 대상이 정해질 때다. 프놈펜에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 길이 주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유엔 요원들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나를 떠나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멈추면 절대 안 됩니다. 만약 보트 엔진이 꺼지면 침입자로 오인받아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나를 태운 보트는 두 대의 엔진을 가동하면서 만약을 위해 중간중간 연료를 채워 넣어야 했다. 막무가내인 엔진 소음도 투명한 긴장을 깨진 못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이 얕아지더니 구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한 진동이 일었다. 프놈펜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다. 보트가 바닥을 긁고 있었다. 좁고 얕아진 물길에서 배의 프로펠러는 물이 아니라 모래를 밀어내며 탱크처럼 움직였다. 한동안을 그렇게 가면서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제야 유엔 요원이 들려준 주의사항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가 엔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엔진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야 했다.
마침내 그 고비를 넘기자 거대한 호수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목적지에 닿은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톤네샵 호수는 장관이었다. 두 시간 동안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음으로 피곤해진 귀가 놀랐다. 고요함. 너무 조용해도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귀도 상대적인 감각기관인가보다. 어디 귀뿐인가. 눈과 코가 열렸다. 피부도 긴장해 소름이 돋았다. 호수의 엄청난 크기와 고요 앞에서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내가 느낀 긴장감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화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극적인 반전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오감을 되찾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은 나에게 주어진 다큐멘터리 취재 사진이 아니다. 거기 살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을 감싸고 안아주는 구름과 하늘빛이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긴박한 현장 고발 사진보다 더 강했다.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난 거기서 알았다. 눈에 보이는 평화와 낭만과는 다른 현실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바람과 물 그리고 구름들로부터 위로받고 있었다. 호수 위로 바람이 불자 새들이 날았고, 사람들은 곧 있을 비바람에 대처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여자아이 둘이 아버지를 따라 지붕에 올라가 노는 모습이 뷰파인더에 잡혔다. 아이들은 지는 해를 배경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아이들의 겨드랑이 사이로 조금 더 빨라진 호수의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과 노는 아이들. 이들이 과연 어른들의 싸움에 휘둘리는 아이들인가? 불안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누가 그들에게 평화를 가르쳤을까?
비 내린 다음 날 하늘은 맑았고 호수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다시 무더운 오후가 되자 그 얕은 평화 위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서너 명의 아이들은 벌써 연잎 하나를 꺾어 머리 위에 썼다. 물에 들락거리느라 벌거벗은 아이들은, 젖는다는 기준으로 보면 연잎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이것은 아이들의 유희다. 세상의 아이콘이다. 자연과 함께 노는 아이들의 방식이다.
톤네샵이 준 선물. 사진을 찍을수록 나의 카메라가 그 선물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아이들에게서 바람과 비와 나무의 소리를 빼앗고 그 대용물로 장난감과 전자게임기를 건네준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아이들의 웃음과 울음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웃는 웃음 지키기와 빼앗긴 웃음 뒤에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몇 배의 돈이 드는지 나는 사진으로 전해야 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 난감해 있는 내게, 연어 빛으로 물들어가는 톤네샵 구름이 보이지 않는 위로의 손이 되었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Gems of Central Asia',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Quando il Vento incontra l’Acqua'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이 있다.
필자는 국립공원인 북한산과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다. 요즘 등산하는 인구가 많아져서 산은 항상 붐빈다. 남들은 자가용이나 버스로 이곳까지 와서 산에 오르지만, 필자는 운동화 끈만 질끈 매고 문을 나서면 언제라도 산에 오를 수 있으니 비록 땅값 집값이 싼 동네라지만 만족하고 공기 좋은 우리 동네를 사랑하고 있다. 잠시 전에도 산에 다녀왔다. 흰 눈이 내린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하얀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보석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설경이었다. 계곡을 따라 눈이 많이 쌓였고 군데군데 작은 폭포도 흐르던 모양 그대로 얼음 조각상이 되었다.
한여름에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던 커다란 연못도 작은 구멍을 남기고는 모두 꽁꽁 얼어버렸다.
그래도 난간에 기대어 지난번 보았던 연못 속의 물고기가 있으려나? 찾았더니 살얼음이 얇은 곳에 여전히 작은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렇게 추운데 물속은 어떠냐고 혼잣말을 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무릎도 아프고 산길도 좀 미끄러워서 높게는 못가고 중간 약수터까지만 올랐다. 쨍하는 차가운 날씨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산은 쾌적하고 산뜻한 기분이 든다.
몇 년 전에 필자는 일 년간 새벽 6시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에 오른 적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였는데, 어느 폭우가 쏟아졌던 장마철, 징검다리에 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었던 날 하루를 그냥 돌아온 걸 제외하면 정말 비가 오면 우산을 받치고 눈이 오면 두툼한 옷으로 무장을 하고서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물론 첫 번째 이유는 건강 지키기, 다이어트 때문이었고 다른 이유는 새벽 6시 이전에는 무료로 산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국립공원이 1200원씩 입장료를 받았다. 돈이 그렇게 궁한 것은 아니어도 매일 1200원씩 내야만 산에 갈 수 있다는 건 이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작은 불만이었다. 그런데 새벽 6시 이전엔 아직 매표소가 문을 열지 않아 그냥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정말 열심히 산에 올랐었다, 그 새벽에, 2.5 킬로미터쯤 오르면 영추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까지 매일 다녔다. 다이어트에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건강에 도움은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1년쯤 산행이 계속되던 어느 날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었다. 참 이상하다, 그렇게 열심히 새벽마다 산에 갔는데 이제는 하루 중 아무 때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니까 새벽 등산을 게을리하게 되었다. '가고 싶을 때 가면 되지'하는 안이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필자의 새벽 등산은 중단되었고 그 후로는 가끔씩만 산에 가고 있다.꼭 입장료 때문에 그 새벽에 나갔던 것일까? 그건 아닐 텐데 리듬이 무너져버린 지금 다시 새벽등산을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쉬운 기분이다.
2018년 개띠의 해가 열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구는 돌고 역사는 기록될 것이고 개개인의 삶은 흘러갈 것이다. 올 새해맞이는 따뜻한 휴양지 코타키나발루에서 ‘지치지 않는’ 여행을 하면서 쉬는 것. 낮에는 바닷가에 나가 물놀이를 하고 배가 고프면 슬렁슬렁 시장통에 나가 애플망고를 실컷 먹고 저녁에는 밤하늘을 보면서 수영을 즐기는 일. 한 해의 초문을 여는 방법으로 이보다 행복한 여정은 없다.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에서 놀고 액티비티 투어도 하고
코타키나발루는 사바 주의 주도(州都)다. 사바 주는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보르네오 섬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낮에는 툰구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 해양공원의 5개 섬을 골라 다니면서 놀면 된다. 가야(Gaya), 마누칸(Manukan), 사피(Sapi), 술룩(Sulug), 마무틱(Mamutik) 섬이다.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의 이름은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1903~1990)의 이름에서 따왔다. 물빛이 아주 맑은 수트라 항구(Sutera Harbour)에서 배를 타고 빠르게 달려 5분도 안 돼 마무틱 섬에 이른다. 5개 섬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고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 일명 ‘산호섬’으로 불린다. 섬에서 노는 게 지겨운 날에는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키나발루 국립공원(Kinabalu National Park)으로 가서 트레킹을 하면 된다. 골프를 하고 싶다면 탄중아루(Tanjung Aru) 리조트 내의 골프 코스를 찾으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제셀턴 포인트(Jesselton Point)에서 배를 타고 반딧불 투어, 밀림 투어 등을 해도 좋다. 제셀턴 포인트는 주변 섬으로 갈 수 있는 페리 탑승장이다. 이 도시와 인근 섬들을 연결하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수많은 현지 여행사가 있어 각종 투어와 액티비티 투어 등을 예약할 수 있다. 참고로 제셀턴은 과거 영국의 식민통치 시대에 말레이시아의 물자를 실어 나르던 항구로 1945년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내려 거주하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 일본군으로부터 코타키나발루(당시 이름 제셀턴)를 탈환하기 위해 진입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야영했던 곳이라서 붙여진 지명. 기념 동판 하나만이 남아 그날을 일러준다.
필리핀 마켓 야시장에서 애플망고 실컷 사 먹기
코타키나발루 여행의 백미는 야시장 구경이다. 이 도시로 이주한 필리피노들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내다 팔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시장. 오후 4시경 문을 여는 노천 야시장엔 활력이 넘친다. 상인들 거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에 ‘히잡’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시장에는 망고가 지천이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사 먹을 엄두를 낼 수 없는 애플망고를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새우튀김도 사고 닭 날개(사테, Satay)도 사 먹는다. 한국인이 많이 오는지, 구운 닭 날개 소스에 대해 능숙하게 말한다. ‘매운 맛’이나 ‘맛있어요’라는 말은 아주 잘한다. 바나나튀김도 맛있고 작은 팬케이크는 보는 재미가 있다. 또 첸돌(Chendol)도 재미있다. 간 얼음 위에 꼬물꼬물한 연두색 첸돌과 코코넛밀크, 흑설탕을 넣어 만든 빙수다. 이와 비슷한 아이스카장(Ice Kajang)도 있다. 잘게 간 얼음 위에 야탑 열매와 옥수수, 팥, 젤리 등과 여러 가지 시럽을 넣은 빙수다. 시장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질 시간. 시장통을 비껴 워터 프런트 쪽으로 걸어가면 바다 너머로 해가 진다. 지는 해의 열기는 생각보다 뜨겁다. 숙소로 피신하는 게 답. 달빛과 별을 보며 수영하면서 맛있는 애플망고와 새우튀김을 안주 삼아 지역 맥주 한잔 곁들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자가 된다.
전통 부족민 볼 수 있는 ‘카다잔-두슨 원주민 민속촌’
사바 지역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 전통가옥을 재현해놓은 사바 카다잔-두슨 문화협회(Kadazans-Dusuns Cultural Association Sabah)를 찾는다. 사바 주의 용맹한 ‘카다잔’ 원주민 전사와 몬소피아드 사냥꾼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민속촌이다. 카다잔족, 두슨족, 룬구스족, 바자우족, 무루트족(Murut) 등은 이 나라 대표적인 전통 부족들. 카다잔족과 두슨족은 사바 주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30%나 된다. ‘키나발루’라는 이름도 카다잔족의 언어로 ‘죽은 자들의 안식처’를 뜻하는 ‘이키나발루’에서 유래되었다.
두 부족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다. 다른 점이라면 카다잔족은 분지에서 쌀농사를 짓고 두슨족은 구릉성 산지에서 산다는 것. 카다잔-두슨 민속촌에 이들이 살던 집과 풍습 등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마련되어 있다. 또 매년 5월 30~31일에는 추수 축제가 열린다. 벼를 수확한 후 한 달 정도 풍성한 축제가 벌어질 때 훨씬 볼 만하다.
도시 전망은 시그널 힐에서, 낙조 감상은 탄중아루에서
시그널 힐(Signal Hill) 전망대도 오른다. 걸어서 가기에는 가파른 길이다. 낙조를 감상하기 제일 좋은 곳이지만 낮에는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의 역할을 한다. 전망대에서는 코타키나발루 시내 전경과 페낭 해변을 둘러볼 수 있다. 근처 시계탑은 랜드마크로 원래 등대 역할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건축물이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근처의 선데이 마켓으로 간다. 잘란 가야(Jalan Gaya)에서 열리는 선데이 마켓은 300개 이상의 노점이 생활용품, 식재료, 약초, 의류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한다. 원래는 현지인들을 위한 작은 로컬 마켓이었지만,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판매 품목도 다양해졌다. 필리핀 마켓과 달리 수제품이나 공산품이 많다. 보기 드문 제비집도 있다. 마켓은 생각보다 일찍 파장한다. 다시 가장 번화한 원보르네오(One Borneo)와 와리산 스퀘어(Warisan Square)로 이동해 마사지를 받고 천천히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낙조를 볼 수 있는 탄중아루로 간다. 탄중아루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 이 도시의 낙조는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와 함께 세계 3대 해넘이로 꼽힌다. 아쉽게도 바닷가에는 비가 내린다. 낙조를 보지 못하면 어떠리. 맘껏 휴식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Travel Data
항공편 인천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 직항편은 대한항공이 주 2회, 아시아나와 이스타항공이 주 4회 운항하고 있다. 말레이시아항공 직항편도 있다. 매주 금요일 출발.
기후 1년 내내 덥고 습한 기후다. 평균 기온은 영상 30℃. 계절에 따른 기후변화가 없어서 여행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나뉘지 않는다. 날씨는 대체로 맑은 편이지만 하루 한 번 열대지방의 소나기인 스콜이 내린다. 코타키나발루의 1월은 우리나라의 한여름 날씨와 비슷하다. 통풍이 잘되는 얇은 옷 위주로 챙기고, 한 달 평균 일주일 이상 비가 내리기 때문에 우산은 필수다. 고산인 키나발루 산과 쿤다상(Kundasang) 지역은 기온이 서늘한 편이다.
언어 공식 언어는 말레이어다. 하지만 호텔 및 관광지에서는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통화 정보 자국 통화인 말레이시아 링깃(Ringgit)이 통용된다. 1링깃은 260원대다. 인천 공항에서 환전해서 가면 된다.
사용 전압 200~240V, 50Hz다. 우리나라와 콘센트 모양이 다르니 꼭 어댑터를 준비하자.
음식 정보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 외 볶음밥인 나시고렝(Nasigoreng)이나 국수 등 메뉴가 다양하다. 한국인이 일부러 찾는 집으로는 ‘웰컴씨푸드’가 있다. 주문하면 수족관에 있는 해산물로 즉석요리를 해준다.
숙박 정보 휴양도시라서 고급 호텔, 리조트, 콘도, 레지던스, 아파트 등 묵을 곳이 많다. 골프를 원한다면 리조트를 선택하는 게 좋다. 한 달 정도 머물 예정이면 아파트를 추천한다. 거실 하나에 방 두 개다. 아파트 객실은 에어컨, 평면 TV를 갖추고 있으며, 일부 객실에는 냉장고 등이 완비된 간이 주방도 마련되어 있다. 1일 7만~10만 원 선이다. 수트라 항구 근처의 이마고(Imago) 쇼핑몰·콘도는 장기투숙자가 많이 이용한다. 또 KK 베케이션 아파트먼트 @ 마리나 코트 리조트 콘도미니엄을 비롯해 여럿 있다.
기타 볼거리 북보르네오 증기기차 투어나 새로 지은 시청사, 석호(潟湖, lagoon) 위에 세워진 시티 모스크, 사바 주 모스크(Sabah State Mosque)가 있다. 건물 돔은 온통 황금으로 뒤덮여 있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정보 www.mtpb.co.kr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코타키나발루는 관광지를 찾아다니느라 애쓸 필요 없는 곳이다. 많은 곳을 다니기 싫어하는 시니어에게 좋은 여행지다. 대부분의 숙소에는 수영장, 피트니스 센터, 마사지 숍 등이 갖춰져 있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문학모임 단톡방에 올라온 나훈아 쇼를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그의 모습이 반갑다. 그는 완전 카리스마 쩌는 남자이다.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클리프 리차드는 70년대 미국의 팝가수이다. 그가 우리나라 이대 강당에서 공연할 때는 흥분한 이대생들이 팬티를 무대 위로 벗어던졌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처럼 광적인 사랑을 받은 클리프 리차드 버금가는 한국의 클리프 리차드가 바로 나훈아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에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
이쯤 되면 여인네들이 안 쓸어지고 배길 재간이 없다.
그의 노래 '사랑'을 들으며 내 가슴은 심쿵했다. 90년대 '사랑'과 2000년대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가 나를 울렸었다. 호소력 짙은 그의 음성과 어우러진 가사가 너무 절절해서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의 사랑노래는 여인의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마력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남성은 지적이고 몸매 날렵한 영화배우 '이민'같은 스타일이다. 그러나 한국 가요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나훈아의 가치만큼은 인정을 해줘야 할것 같다.
그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여장부 김지미를 홀린 남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김지미의 남자들이다. 그녀는 젊고 야성미 넘치는 나훈아와 살아봤다. 그와 대척점에 있는 나이 지긋하지만 교양과 지성을 겸비한 심장병 전문의 이종구 박사님과도 부부의 연을 맺어봤다. 이 박사님은 오페라에도 해박하여 고정적인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오페라 해설가이기도 하다. 무지크 바움에서 만나 뵌 이 박사님은 전형적인 지성인으로 키 크고 잘 생긴 훈남이었다. 후에 김지미는 나훈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가방끈 긴 남자는 너무 계산적이라서 별로라고 하였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서 여전히 제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그 자체가 엄청난 파워를 가진 유명 브랜드이고 단번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기업체이다.
지금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수입을 단번에 올릴 수 있는 능력남인 그다. 이혼을 원하는 아내와는 쿨하게 헤어지고 더 이상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때는 사랑했던 여인이다. 항간의 얘기대로 금전적인 손해를 피하려 미적거린다면 그처럼 비겁한 일은 없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그답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사나이로 태어나 비겁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보통의 남정네들도 견디기 힘든 치욕이다. 하물며 여인네들의 로망인 그가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말이다.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는 팬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이다.
다시 한번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나 아직 살아있어' 큰소리치며 화려하게 등장한 그가 고맙다. 앞으로 내내 건강하여 수많은 지구촌 여인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돈 걱정 없이 사는 방법은 번만큼만 쓰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시니어의 사회은퇴 전후의 생활은 전혀 딴판입니다. 은퇴 전에는 돈이 부족하더라도 나중에 보충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입은 줄고 늘리기 매우 어렵습니다. 소비지출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생활주변에서 지나치기 쉬운 낭비를 줄여야 해답이 나옵니다.
건강관리비
누구든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소망합니다. 건강하면 병원이나 약국을 찾을 필요가 없고 건강식품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건강관리비를 확 줄일 수 있습니다. 건강하려면 섭생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바람이 부는 운동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산행·마라톤·수영·골프 등 체력과 취미에 맞는 운동을 하면 됩니다. 운동을 쉬지 않고 하여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마음을 다잡이야 운동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고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걱정하면 운동하러가기 싫어집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비오면 우산을 들고, 눈이 쏟아지면 털모자 하나 머리에 쓰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먼동이 트면 집을 나서 아침 산책을 하면 하루가 상쾌합니다. 아침 산책길은 맑은 날도 이슬이 내려서 평지보다 미끄럽습니다. 산에서 넘어지면 대형 골절사고가 납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동호인을 즐겁게 사귀면 운동을 지속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친구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운동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산악회에 참여하여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지방 원거리를 찾고 가끔 해외원정 산행을 하면 효과는 더욱 높아집니다. 산행이 어려우면 걷기 쉬운 둘레길을 찾고, 더 낮은 자락길을 걸어도 좋습니다. 신체조건에 맞춰 무리하지 않도록 걸으면 건강에 유익합니다. 햇볕 쪼이고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으면 됩니다. 누구나 만보를 걷을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에 동참하면 건강유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재산기부·재능기부·노력봉사 중 자기처지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체험을 후세대에 전하는 숭고한 일입니다. 참가자들과 함께 어울려서 마음의 평온을 얻고 나눔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회교육에 참여하여 새로운 배움을 익히고, 남녀노소 세대들과 어울리는 일도 건강유지에 큰 보탬이 됩니다. 자기완성을 위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차량유지비
자동차는 편리한 교통수단입니다. 하지만 차량유지비를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를 구입할 때나 유류가격이 상승할 때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잊고 생활합니다. 사회은퇴자는 차를 사용할 필요가 많이 줄어듭니다. 가끔 운전석에 앉으면 차운전이 낯설게 느껴지고 행동이 굼떠져 사고를 내기 쉽습니다. 차는 주차장에서 먼지만 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전을 그만 둬야하는 이유입니다. 차가 보이면 차를 사용하고 싶고 걷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차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야 대책이 나옵니다.
자원봉사활동과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굳이 자동차를 이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로혼잡에 고생하지 않고 약속시간을 잘 지킬 수 있는 전철과 버스 대중교통 이용이 최선입니다. ‘건강하려면 불필요한 차를 없애자.’ 차 없애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 차의 편리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입니다. 차는 편리하게 이용하되 불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하게 없애야 합니다. 이를 실행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자동차를 없애면 유류비·수리비·세금·보험료 등 차량유지비가 모두 없어집니다. 새 차 구입하는 목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로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어집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리거나 교통사고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이 옵니다. 몸이 건강해지면 건강관리비도 확 줄어듭니다. 한가한 때 전철에 앉아서 책을 읽고, 버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전철역까지 왕복 걷기를 자주 하고 운동량이 부족하면 다음 날 꼭 보충하는 습관을 기르면 더욱 좋습니다.
허망한 투자
세상에 공짜가 없는 줄 알면서도 고수익·고배당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섣불리 투자하였다가 재산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보다 판단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쇠퇴하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을 하루속히 잊어야 합니다. 자랑해서도 아니 됩니다. 후세대에 자리를 비켜주고 물러나야 합니다. 유능한 후계자를 도우면서 여유를 가져야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환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소비를 희생하면서 장기투자를 헤서도 아니 됩니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관리할 수 없습니다. ‘현금만이 나의 것’ 입니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차입금이 있으면 빨리 정리하여야 합니다. 현금수입이 없는 부동산 담보 대출이라면 당장 큰 부담입니다. 이른바 흑자도산입니다. 부동산이 커지면 나중에 자식들의 상속분쟁만 키웁니다. 부동산·장기채권 대신 현금을 확보하여 지기의 소비를 희생하지 않아야 합니다.
후세대 관리
시니어 살림살이는 ‘현금흐름 수지균형’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금이 부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 전반부는 증기기관차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앞만 보고 열심히 살면서 수입을 늘려 재산을 키웠습니다.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선 후반부는 빈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족해서도 아니 되지만 남길 수도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신은 알뜰하게 살았으나 자식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주위에 많습니다.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면 자신과 자식 모두에게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이를 거절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먹는 것보다 먹이를 구하는 훈련을 시키라’라고 흔히 말합니다. 자식들에게는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무조건 자식을 도와주는 것보다 교훈도 함께 전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포르투갈.
영토는 한반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서유럽에서는 최고로 가난하다. 그런데 포르투갈 여행을 하다 보면 왠지 친밀하다. 일찍이 해양 진출을 통해 동양 마카오를 식민지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고 가난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겹고 사랑스러운 나라. 그라피티가 난무하는 좁은 골목길, 가파른 계단이 있는 빈민촌 같은 골목에서 은근슬쩍 비춰주던 강변의 아름다운 전경. 지는 햇살에 한껏 색깔을 내주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소도시 포르투 여행은 그냥 행복하다.
도우루 강변의 항구도시, 2000년 역사지구
도우루(Douro) 강변 도시 포르투(porto) 시내에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상 밖으로 앤티크한 웅장한 건물들이 온 도심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벤투 역,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이 포함된 도우루 강 어귀의 포르투 역사지구(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2000년 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고전주의,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시대별 건축물들이 있다.
포르투의 중심지인 자유(리베르다지, liberdade) 광장 위쪽, 포르투 시청사 주변에는 상벤투 역, 포르투 대성당, 76m 높이의 바로크 양식의 클레리구스(Clerigos) 성당과 종탑, 카르무(Carmo) 성당,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볼사궁전 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건축물 중에는 파란 타일을 이어 그림을 그려놓은 아줄레주(Azulejo, 주석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구운 포르투갈 특유의 푸른 빛 타일)가 특징적이다. 또 포르투는 를 쓴 조앤 롤링(Joan Rowling, 1965~)과도 연관 깊은 도시다. 조앤은 1991년 11월부터 이곳 인카운터 영어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다. 1992년 10월에는 현지 방송사 기자인 3세 연하의 조르즈 아란테스(Jorge Arantes)와 결혼해 1993년 7월에 딸을 낳았지만 그해 이혼하고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 명작을 남겼다. 그녀가 이 도시에 머물면서 자주 갔던 렐루 서점(Livraria Lello), 마제스틱 카페(Majestic Cafe, 1921년 오픈)는 이제 명소가 되었다.
포르투를 여행하는 재미는 따로 있다. 이런 역사적인 건축물도 좋지만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 여행이 특별하다. 강변의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여 지은 가난한 건축물들과 그라피티가 난무한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도우루 강변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이 해맑게 미소를 짓는다. 좁은 골목에서 만나는 작은 박물관, 오래된 개인 저택, 공원 등도 흥미롭고 현지인들의 친절도 정겹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도와줄까?”를 묻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포르투다.
도우루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와이너리
포르투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도우루 강변을 잇는 카이스 다 히베이라(Cais da Ribeira, 강변의 부두라는 뜻) 거리다. 도우루 강변 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도심의 집들이 이어지고 동(쪽) 루이스 1세 다리까지 와인 판매장, 노천 바들이 이어진다. 도우루 강변을 걸치고 있는 172m의 길이에 아치형의 루이스 1세 다리는 포르투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한다. 이 다리는 에펠탑으로 유명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Teophile Seyrig)가 설계해 1886년에 완공했다.
1층에는 자동차가, 2층에는 트램이 다닌다. 1, 2층 모두 보행자 도로가 있어서 걸어 다니며 강변 풍치를 감상할 수 있다. 다리와 강이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다.
강을 건너,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지역의 강변길에는 샌드맨(Sandman), 테일러(Taylor), 그라함(Graham), 카렘(Calem), 오플리(Offley), 크로프트(Croft), 도우(Dow), 라모스 핀토(Ramos Pinto) 등 유명 와이너리가 줄지어 있다. 입장료만 내면 와이너리의 역사, 특징, 재배 및 제조과정, 저장 중인 와인 종류와 특징 등을 알아보는 투어를 할 수 있다. 또 강변을 따라 ‘도우루 아줄(Douro Azul)’ 유람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강변에서 바라보는 풍치는 훨씬 입체적이다. 도우루 강변에 있는 6개 다리(동 루이스 1세, 마리아 피아, 인판테, 상주앙, 프레이소, 아라비다)도 볼 수 있다.
포트와인 이야기
포르투 와인을 ‘포트와인(Port Wine)’이라 부른다. 이곳이 포도 산지로 유명해진 시기는 17세기. 100년 전쟁으로 오랜 견원지간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냉전에 들어갔다. 단단히 토라진 프랑스는 영국에 와인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와인의 공급지를 새로 구해야 했던 영국 상인들은 빌라 노바 드 가이아로 이주해 자국으로 수출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의 항해는 한 달이 걸렸고, 그 사이 와인은 식초가 되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와인에 브랜디를 넣어 숙성시킨 포르투 와인이었다. 알코올 도수는 더 높아지고, 당분 발효가 중단되어 더 달콤한 맛을 냈는데, 이것이 큰 인기의 비결이었다.
그 후 포르투갈은 발달된 항해술로 일찍이 신대륙과 아시아에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한 서양 와인도 바로 ‘포트(Port)’다. 아직도 와인은 달고 은근히 취하는 술이라 여기고, 오래될수록 좋은 와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 ‘포트’ 때문이다. 포르투는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와인에 포트와인이라는 상표를 붙인다. 포트와인은 알코올 함량(18~20%)이 높아 취하기 십상이다. 잘 구운 닭 요리에 도수 높은 포도주 알코올에 취하는 포르투는 영원히 마음속 깊이 간직된다.
Travel Data
항공편 한국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직항은 없다. 먼저 마드리드, 파리,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서 포르투갈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면 한국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가는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마드리드에서 저가 항공을 이용하거나 차마르틴 역에서 야간열차를 이용해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 역(10시간 30분 소요)까지 가면 된다. 마드리드-리스본행도 운행되고 있다.
현지 교통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포르투까지 버스로 약 3시간 30분, 기차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리스본 공항역에서 출발하는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오리엔테 역(약 10분 소요)으로 가면 기차나 버스(Renex)를 이용할 수 있다. 기차는 포르투 캄파냐 역에서 환승해 지하철로 포르투의 중심지인 상 벤투 역에 하차하면 된다. 버스는 환승이 필요 없다.
맛집 정보 포르투갈은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프란세지냐(Francesinha)가 있다. 양이 어마어마해 ‘내장파괴버거’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또 그릴에 구워주는 닭고기 요리가 맛있다. 청과물 시장에서 파는 과일들도 맛이 좋다.
숙박 정보 포르투의 베스트 호텔은 도우루 강을 전망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이트맨(Yeatman) 호텔이다. 야외에서 레드와인 목욕을 즐기거나 와인 투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니콜라우 나소니(Nicolau Nasoni)가 설계한 페스타나 팔라시오 도 프레익소(Pestana Pala′cio do Freixo)는 바로크 시대에 지어진, 포르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 호텔의 프랑스풍 정원 앞으로 푸른 도우루 강이 펼쳐진다. 이 외 18세기 궁전을 개조해 만든 최고급 호텔인 인터컨티넨탈 포르투(Intercontinental Porto)와 2개의 실내 수영장, 터키식 목욕탕, 사우나, 스쿼시 코트 등을 갖춘 포르투 팔라시오 콩그레스 호텔 앤 스파(Porto Pala′cio Congress Hotel & Spa) 등 꽤 많다. 고급 숙소는 100만원이 넘지만 4~5만 정도로도 2인용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
물가 정보 포르투갈의 통화는 ‘유로화’다. 유럽에서는 물가가 낮은 편이어서 큰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날씨와 옷차림 유럽의 11월(가을)은 비가 자주 내리는 시기다. 평균 최저기온은 영상 11.2℃, 평균 최고기온은 영상 17.8℃로 선선한 가을 날씨를 생각하면 된다. 한 달에 2주 정도 비가 내리는데 적지 않은 양이기 때문에 우산을 지참해야 한다. 또 낮에는 선선하지만 밤에는 쌀쌀하니 긴소매 옷들과 두께가 있는 외투와 점퍼를 함께 준비하면 좋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포르투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이 넘치는 도시다. 세계 베스트 관광지에서 항상 최고 순위를 차지하는 곳이지만 물가가 그다지 비싸지 않고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다. 강변에서 여유롭게 낚시도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포도 수확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와인 투어는 필수다. 나라가 크지 않으니 수도 리스본과 주변의 소도시 여행을 연계하면 된다.
유명 아이돌 중 한 명의 집 개가 사람을 물어 사망한 뉴스를 접하고 또야 생각이 난다
“다녀 오겠습니다”
“미끄럼 조심해”
큰애가 진눈깨비 오는 날 우산 챙겨 외출을 한다
일주일 후
왠 강아지를 안고 들어온다
“아이구 예뻐라 누구네 강아지야“
“엄마 할 얘기가 있어”
왠지 스치는 이상한 예감
“일주일 전 진눈깨비 많이 온 날 아파트 앞에 얘가 흠뻑 젖어 제대로 서지도 못 하고 비틀거리며 있는 거야.
하도 안 되서 동물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주라하고 돈도 주고 나왔는데 아까 데려가라고 전화가 온 거야.
우리는 키울 수 없으니 병원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니 요즘 IMF로 이런 강아지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유기견 보호소로 연락할 수밖에 없는데 주인이 안 나타나면 보름 지나 안락사 시킨데 우리가 키우자”
이상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더니 바로 그 꼴이다
지난해까지 강아지를 키우다가 잃어버려 마음이 너무 아파 이제 다신 키우지 않기로 아이들과 약속도 했는데 다른 두 애들이 들어오면 더 큰일이라 단호하게 안 된다 하자 그때부터 어떻게 죽이냐며 울기 시작한다.
띵똥 아이들이 차례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젠 셋이 운다.
우리들이 돌아가며 당번제로 키울 테니 기르게만 해 달란다.
“안 돼”
우리 방에서 절대 나오지도 못 하게 하고, 변도 우리들이 치우고, 목욕도 시키고 병원도 우리가 데려가고 모든 비용도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엄마~~
자식을 누가 이겨
그럼 지난번 나간 애 대신이라 생각하고 이름은 또 들어왔으니 “또야”다
너희들이 약속한 거 하나라도 안 하면 내다 버릴테니 그리 알아
금방 야호 소리가 나고 난리도 아니다
너무 고생하고 힘들었던 스트레스 때문인지 등이 굽은 잡종 또야는 일주일 쯤 적응기간이 끝나 그렇게 한 식구가 되어 집안을 즐겁게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을 데려온 게 큰애라선지 집에 큰애만 있으면 그 곁을 떠나질 않는다
아이들 약속은 한 달이 가질 못 하고 모든 게 엄마 몫이 되었지만 워낙 강아지를 좋아하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밖에 나갔다가도 친구들과 일찍 헤어져 또야 건사하기 바쁘다
식구들이 외출하면 누군가 들어올 때까지 대문 앞에 앉아 아무 것도 안 먹고 기다리고 변은 전 집에서 훈련받은 결과인지 몰라도 제대로 가리고
식구들 외출할 때 차에 태우면 아마 전 주인이 차에 태워 아파트 앞에 놓고 간 기억이 남아 있는지 얼마나 짖어대며 안 탈라하는지
또야는 대단히 호전적이었다.
다른 강아지를 보면 품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뛰어내려 자신보다 몇 배는 큰 개에게도 거침없이 달려들어 물고 흔들어 큰 개도 피할 정도로 법석을 떨어 식구들을 난처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세월이 흘러 또야도 나이가 드니 털이 빠지고 이빨도 빠지고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전담으로 먹이고 용변 뉘고 편하게 해 주려 온 정성을 다 한다
아이들도 일찍 들어와 함께 놀아준다.
몇 달이 지났다
갑자기 옆으로 누워 거의 숨을 못 쉰다.
일반 동물병원의 차원을 넘어선 듯하다
동물들의 종합병원 건국대로 달렸다
각종 검사가 실행됐고 임종이 몇 시간 안 남았다는 판정을 받는다.
병원 권고에 따라 더 괴롭지 않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안락사 시키기로 결정하고 온 식구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할 때 잠시 반짝 하는 듯 했었지만 결국 커다란 문 안으로 사라졌다
화장(火葬)도 병원에서 알아서 해 주고 유해는 목걸이로 만들어 전해 준단다.
얼마 후 목걸이가 도착했다
선산 부모님 산소 곁에 묻어줬다
산소에 갈 때는 또야 제물도 가져가 부모님 산소 잘 지키라 당부하고 온다
반려동물 보호법만 있고 반려동물 키우기 지침이 없는 게 현실에서 또야 생각이 더 난다.
높고 푸른 전형적인 맑은 가을 날씨가 이어지는 요즘 신대방동의 기상청과 충북 진천의 국가기상위성센터로 천리안 위성을 보러 가게 되었다.
기상청은 우리 생활과 직접 연관이 있는 날씨를 알려주는 곳이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호기심과 관심이 컸다.
이상하게도 예전 어릴 때 소풍 가기 전날이면 꼭 비가 왔다.
전날까지도 맑았는데 왜 소풍 당일 날 비가 내려서 즐거운 소풍을 가지 못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는지 제대로 된 일기예보를 해주지 않은 기상청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예전엔 대체로 일기예보를 믿지 않았다.
맑은 날씨라 해서 그냥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낭패를 보았고 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믿고 우산을 챙겨 나갔는데 온종일 쾌청해 들고 나간 우산이 매우 거추장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일기예보가 맞는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으면 오후에 꼭 비가 내렸다.
다들 예전과 달리 예보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상청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우리나라 기상청이 첨단으로 발전해서 필자가 어렸을 때처럼 오보가 많지 않고 정확하다고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날씨를 미리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기상청의 존재 이유가 일기예보만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기상청은 관측과 예보라는 튼튼한 뿌리에 기반을 두고 지진, 화산, 기후변화, 기상 기후산업, 수문 기상, 국제협력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기관이다.
국가기상업무는 하늘 땅 바다, 그리고 우주에서 대기와 해양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관측하고, 국내외에서 생산된 기상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 처리 분배하며, 슈퍼컴퓨터를 활용, 정확하게 분석해 수치예측을 하고, 수집된 다양한 관측 자료와 현재의 기상상태 수치예보모델 결과에 예보관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예보를 생산하고, 방송 신문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
정확한 기상정보를 국민에게 알려주기 위해 많은 분이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는 기상청을 뒤로하고 진천의 천리안 위성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2시간쯤 달려 도착한 국가기상위성센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지궤도기상위성인 천리안 위성을 운영하기 위해 2009년 4월에 신설된 기상청 소속 기관이다.
천리안이라는 명칭은 국민공모를 통해 지어졌다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성센터는 높은 건물 등 전파방해시설 때문에 도심에 위치할 수 없어 지방에 유치하였다.
진천센터는 청주와 대전의 위성센터와 협력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기상위성 활용으로 재난재해 분야뿐 아니라 기후변화 분야, 환경 분야, 농업 분야, 해양 분야, 항공분야까지 광범위하다.
하늘을 향한 우리의 꿈은 현재의 상상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도전을 망설이지 않은 국가기상위성센터의 노력으로 천리안위성 1호는 2010년 6월 남미 기아나 꾸르 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천리안위성에서 관측된 기상자료는 천리안 위성을 통해 아시아태평양지역 30여 개 국가에서 수신할 수 있다고 한다.
천리안위성 1호에 이어 더 나은 천리안위성 2A 호가 2018년 우주로 향한다.
차세대 기상 센서가 장착된 천리안위성 2A 호는 광범위한 지역의 기상 현상을 3~4배 향상된 고해상도로 관측한다고 하며 우리 기술로 개발한 우주기상 관측용 센서를 최초로 탑재하여 태양 활동 등 실시간 우주 기상 감시가 가능하고 기후변화, 지구환경 감시, 해양, 항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여 세계 최고의 기상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 한다.
천리안 2호와 같은 위성은 미국 일본 한국 세 나라만 보유한 자랑스러운 위성으로 기상위성을 선도할 것이라니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다.
이제 우리나라는 천리안 위성으로 기상위성자료 수혜국에서 기상위성자료 원조국으로 국가의 기상을 높이 세우게 되었다.
날씨예보만이 아닌 기후변화에 의한 국민의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상청의 활약을 기대한다.
필자는 평소 백팩을 메고 다닌다. 캐주얼 의상이든 정장이든 항상 백팩을 멘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일상적인 패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백팩이 아직 낯선 모양이다. 백팩을 애용하는 이유는 양손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양손이 자유로우면 위기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원래는 댄스 하는 날 댄스용 신발과 의상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백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자의 백팩은 큰 편이라 쇼핑 물건을 담을 때도 편리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재질이나 크기도 중요하다. 한때는 어깨에 메는 숄더백을 주로 메고 다녔으나 숄더백은 한쪽에 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쪽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007 백’이라 불리는 서류가방도 마찬가지다. 신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게다가 내용물을 넣을 공간이 부족하다. 서류가방에 수박을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백팩은 다르다. 내용물의 형태에 관계없이 담을 수 있어 편리하다.
필자의 백팩은 명품 가방들의 역사를 볼 때 원조 백팩에서 진화된 형태의 디자인이다. 인조 가죽으로 만들었고 윗부분을 끈으로 조인 뒤 뚜껑으로 덮게 되어 있다.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백팩의 디자인을 보면 99%가 지퍼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야 가방 안의 내용물이 빠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상단이 뚜껑으로 되어 있어도 백팩을 뒤집지 않는 한 중력의 작용으로 내용물이 빠져 나올 일은 없다. 지퍼로 되어 있는 가방은 열고 닫을 때 양손을 써야 한다. 한 손으로는 가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지퍼 고리를 잡고 당겨야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뚜껑으로 디자인된 백팩은 집어넣기도 빼기도 쉽다. 또한 옆쪽으로 지퍼가 달려 있어 아래쪽에 있는 내용물도 쉽게 꺼낼 수 있다.
필자가 메고 다니는 백팩의 단점은 인조 가죽이라 수명이 짧다는 데 있다. 인조 가죽은 늘어나기도 하고 습도 때문에 오래 쓰면 껍질이 벗겨진다. 발트 연안에 있는 라트비아로 여행을 갔을 때 같은 모양의 가죽 백팩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가격을 물어봤더니 100달러를 불렀다. 그러나 가죽 소재가 너무 무거워 결국 사지 않았다. 백팩은 디자인도 실용적이어야 한다. 몸통 바깥쪽으로 사이드포켓이 있어야 좋다. 한쪽에는 물병을 넣어 다니고 한쪽에는 삼단 우산을 넣고 다니면 편리하다. 생수병과 삼단 우산이 들어갈 만큼 깊이도 있어야 한다. 그 외의 잡동사니는 정면의 사이드포켓에 넣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면 곤란하다. 몸통에 온갖 내용물을 다 넣으면 찾기가 어렵다. 수납공간이 따로 없어 마구 뒤섞여버리는 것이다. 물건이 섞이지 않을까 우려되면 부직포로 된 별도의 작은 가방을 넣어가지고 다닌다. 필자의 백팩은 디자인 면에서는 명품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게 많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도 같은 백팩을 멘다. 어지간한 필수품은 백팩 안에 다 들어간다. 해외여행 때는 세면도구와 양말, 여벌의 옷가지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한번은 초봄에 서울 근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날씨가 추웠다. 눈도 왔다. 일행 중 추위를 유난히 타는 사람이 있어 우산도 꺼내주고 장갑도 꺼내줬다. 가볍고 부피도 크지 않아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바람막이도 꺼내줬다. 필자는 모자를 꺼내 썼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도 잡아주고 눈발도 견딜 수 있게 해줬다. 사람들은 백팩 안에 없는 게 없다며 놀라워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무게가 3kg 정도인데 더 무거울 경우 어깨 근육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는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