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아지트로 가는 길은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렵다. 아니 길이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북한산 좁은 등산로를 오르다가 오 부 능선 어느 지점에서 등산로를 살짝 빠져서 큰 나무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약간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내려간다. 그 비탈길은 나무가 빽빽해서 주변 지형과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술처럼 눈앞에 넓고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북한산 인수봉의 거대한 자태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능선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자연의 향연
봄에 그 바위에 앉으면 어린잎의 연두, 산수유의 노랑, 진달래의 연분홍이 그려내는 색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파스텔조의 색깔을 찬란한 햇빛이 더 가볍고 투명하게 만든다. 수채화가 따로 없다. 봄바람이라도 지나가면 그 바위에 누워 바람과 햇살을 동시에 온몸으로 만끽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멀리 산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짙은 초록으로 물든 여름에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숲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세상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들으면 어느 거대한 폭포 속에 들어온 듯 착각에 빠진다. 소나기가 숲에 부딪히며 내는 ‘쏴~아’하는 소리는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 어느 순간 소나기가 지나가면 계곡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 사이로 바다색 하늘이 나타난다. 잠시 조용하던 산 벌레들이 다시 합창을 시작한다. 여름엔 이곳 바위에서 낮잠을 잔다. 우산을 펴고 그 그늘에 얼굴을 넣고 눕는다. 한여름 숲에서는 냉장고 바람이 살살 불어온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개운해진다. 삶은 달걀 하나, 김밥 한 줄로 요기가 충분하다. 그곳에는 바다색 하늘과 빛나는 인수봉과 수많은 초록 능선이 있다.
봄이 수채화라면 북한산의 가을은 유화다. 북한산 능선들이 어느 순간 온통 노랗고 붉게 변한다. 그 바위에 앉아 있으면 저 북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수봉을 타고 넘어온다. 겨울이 가까이 왔다. 떡갈나무 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다리를 세우고 카메라를 장착한다. 거대한 자연 캔버스를 배경으로 셀카를 여러 장 찍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을 시간을 박제로 보관해 둔다.
동양화를 닮은 겨울 산은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처럼 단아하다. 겨울나무를 보면 버리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바위에 서서 훤히 다 드러난 능선과 비탈에 서 있는 나목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 소리를 낸다. 지난여름 초록이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
◇바위의 영속성과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성
북한산에는 꽃이 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낙엽이 지나가면 텅 빈 곳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봄이 오고 연두색 이파리가 돋아난다. 수많은 계절이 왔다가 사라져도 그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바위는 변하는 것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만날 수 있는 필자의 숨겨진 아지트다
1. 잠 못 이루는 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싶은데 도대체 잠은 안 오고 정신이 더욱 말똥말똥해져서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면 머리는 무겁고 몸은 천근 만근이 되어 이튿날은 거의 녹초가 되어 버린다.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뭔가 마음의 근심이 있던가 걱정거리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이다. 낮에 커피를 지나치게 마셨다든가 회식으로 과음∙과식으로 자다 깨 화장실을 갔다 와서 잠 못 잔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이럴 땐 푹 자지 못해 그 다음 날은 생활의 리듬이 깨져 비실거리게 된다.
2. 인생의 평범한 행복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밤을 새워본 사람들은 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그래서 누군가 행복을 말할 때 가장 쉬운 말로 이렇게 표현을 했다. 인생의 행복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다.’라고. 좀 저속한 표현 같지만, 이것처럼 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병은 다 이것 세 가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서 오는 병이다. 몸에 맞지 않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다. 술 좋아하던 친구가 건강에 치명적이니 술 담배 다 끊으라 했다고 ‘사는 재미가 없다.’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불면증에 시달려 몸이 바싹 말라 버린 것처럼 체중이 줄어든 친구도 있다. 병원에 가면 배설이 안되어 별도 기구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닌가 싶다.
3. 무엇이 잠 못 이루게 하나?
잠을 잘 못 이루는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다. 신체적인 요인과 정신적인 요인이다. 신체적인 요인은 보면 개인마다 가진 체질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잠들기 전 커피를 몇 잔 마셔도 전혀 잠자는 데 문제가 없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낮에 커피 한잔 마신 것 때문에 잠이 안 온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커피가 카페인 성분이 있어 잠을 이루는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낮에 커피 한잔 마셨다고 잠이 안 온다면 커피는 좀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그다음이 정신적인 요인이다.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있고 걱정거리가 쌓이기도 한다. 곱씹을수록 근심 걱정이 되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불안해했던 경험도 많다. 어쩔 수 없는 걱정이야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쓸데없는 걱정은 버려야 한다. 옛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우산장사 아들과 짚신장사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비 오는 날이면 짚신장사 아들이 짚신이 안 팔릴 것을 걱정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면 우산 장사 아들이 장사가 안될 것을 걱정하고, 평생을 걱정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한다. 차라리 비 오는 날은 우산장사가 잘 될 거라 생각하고 햇볕 나는 날은 짚신이 잘 팔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평생을 즐겁게 살지 않았을까? 이렇듯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걱정 근심 버리고 두 발 쭉 뻗고 잘 수도 있는 것이다.
4. 잠잘 자는 나만의 비결
잠 못 이루는 원인에서 살펴보았듯 거기에 따른 처방도 있게 마련이다. 필자의 경험상 잠잘 자는 나만의 비법을 3가지만 공개하고자 한다.
1) 물리적인 원인과 처방
- 잠자리를 안락하게 한다.
우선 잠자리는 안락해야 한다. 창문은 커튼으로 밖의 가로등 불빛도 들어오지 않게 가려줘
야 한다. 또한, 침실의 벽지 색상도 안락한 분위기를 느끼게 골라줘야 한다.
- 침실은 어떠한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방음이 될 수 있도록 한다
- 침대나 베개는 편안해야 한다.
침대나 베개는 몸에 맞아야 좋다. 요즘은 광고처럼 ‘침대도 과학이다.’라는 말이 있듯 체형
에 맞는 침대와 벼개도 많이 나와 있다, 편안한 침대를 사용하고 베개도 너무 높거나 낮지
않게 알맞은 것을 골라 사용한다.
2) 신체적인 원인과 처방
- 카페인 성분의 음료는 될 수 있으면 삼간다
커피. 홍차. 콜라 등 카페인 성분의 음료는 저녁엔 주로 먹지 않는다.
- 술 담배 등은 삼가거나 과식을 피한다
술 담배 등은 몸에 맞게 적당히 마시고 특히 과식은 피한다.
- 적당한 운동과 목욕
저녁 먹고 주로 헬스장에 가거나 아니면 아파트 주변이나 공원을 돌며 운동을 한다.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따뜻한 물로 샤워나 목욕을 하게 되면 잠이 잘 온다
- 밤에 깊은 잠을 자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낮잠을 길게 자거나 하지 않는다. 낮잠을 많이 자
게 되면 밤에 잠드는데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몸 긴장완화를 위해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문질러 주고 눌러 주면 좋다고 하여 가끔
은 그렇게 하고 있다.
3) 마음 다스리기
- 잠을 잘 못 자는 원인은 주로 근심과 걱정 또는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이것을 덜어주는 마
음 다스리기를 한다. 만약 걱정거리가 있으면 가벼운 운동이나 호흡조절 등을 하며 긴장을
풀어준다.
- 걱정을 잊기 위해 재미있는 책을 보거나 코미디 프로를 본다
- 명상을 한다.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명상을 하기도 한다.
- 침대에 누워 편안한 생각을 한다. 특히 잠이 잘 안 오는 날은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눈꺼
풀이 무겁게 느껴지도록 깊은 잠에 빠지도록 생각을 하는 편이다.
- 멍 때리기도 효과가 좋다. 가끔은 이것 저것 생각 다 잊어버리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본다.
아무생갹 없이 다 내려놓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든다.
- 잠들기 전 자극적인 TV프로 등은 보지 않는다. 잠드는데 지장이 많았던 탓이다
5. 행복한 밤
잠 못 자는 것도 고통이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가끔은 죽은 것처럼. 아이들이 하는 ‘시체놀이’처럼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있는 그 대로에 자신을 맡겨 보는 것도 좋다. 잠은 생활의 활력소다. 잠을 잘 자야 인생도 즐겁고 행복하다. 마음들 더 느긋하게 먹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편안해진다. 행복한 밤을 위하여 ~ 굿 나잇!
어느 늦은 가을날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오늘 비가 그치지는 않는단다. 아침에 학교 갈 때는 맑음이었는데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오니 우산을 안 가지고 간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다. 여름이면 마음을 놓을 수가 있으나 이런 비는 아직 일본 날씨에 적응도 못한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마음이 쓰여 우산 두 개를 챙겨서 학교에 갔다. 전교생이 학교 교실로 들어가는 현관에 신발장이 놓여 있다. 학교 출입은 오로지 이 한군데다. 나는 아이들 반에 가서 어떻게 전달해 줄까 걱정하면서 일단 현관으로 들어갔다. 일본에 온지도 얼마 안 되어 일어도 아직 서툴러서 누굴 만날까봐 언제나 걱정이었다. 그런데 몇 엄마들이 나처럼 우산을 챙겨 가지고 와서는 즉시 신을 벗고 들어가지는 않고 신발장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눈치였다. 하는 양을 보고 있자 자기 아이의 학년과 반과 이름을 찾아서 우산을 자기 아이 운동화에 착 걸어 놓고 휭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나는 얼마나 기쁘고 이런 방법을 하고 있는 일본 엄마들의 마음에 저절로 고개 숙여지고 말았다. 여기 저기 그렇게 우산을 꽂아 놓고 간 엄마들의 아름다운 손길이 보였다.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나처럼 학교에도 안 오는 엄마로 선생님들에게 찍힐 일도 없이 자기 아이가 수업이 끝난 뒤에 어머니가 왔다 간 사실을 알고 그 고마움을 생각하며 우산을 펴 들 것을 미루어 짐작하니 정말로 가슴에 뭔가 중요한 주고받음의 따뜻함이 흘러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이 놀랍고도 반가운 방법에 웃음을 활짝 웃으면서 나도 두 아이 운동화에 살며시 꽂아 놓고 집으로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우산을 챙겨들고 자전거를 씽씽 타고 지나가는 엄마들을 계속 만나면서 일본 엄마들에게 참 좋은 걸 배울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감사함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비도 안 맞고 아이들이 웃으면서 현관을 들어서면서 아주 즐겁게 떠들어댔다. ‘엄마가 언제 그런 걸 다 배웠어? 친구들도 엄마들이 다 그렇게 해 놓고 갔던 걸?’ 한국이라면 선생님이 있는 교실에 가서 인사도 해야 했을 일인데 이렇게 감쪽같이 학교에 갔다가 아무도 안 만나고 가볍게 되돌아 올 수가 있고,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고마움을 저절로 느끼게 해 줄 수가 있다니 정말 즐거웠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어머니회가 있다는 쪽지를 받고 갔다. 원래 화장도 안 하고 액세서리도 안 하는 엄마라 별 준비할 게 없어 작은 노트와 연필을 들고 그냥 갔다. 대부분의 일본 엄마들은 그저 깨끗한 차림에 자전거들을 타고 왔다. 걸어 온 엄마들도 귀걸이 하나 안 달고 옅은 화장에 가방도 안 들고 작은 헝겊 주머니만 하나 들고들 왔다. 정말 검소한 차림이었고 집에서 아이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일하는 본연의 엄마들 모습, 우리나라 농촌에서나 만날 거 같은 깨끗한 마음이 엿 보이는 모습들에 오히려 의아스럽기만 했다. 우리나라 엄마들의 뻐기는 듯한 표정과 왜 그런지 누구에겐가 자랑하려는 태도들이 여기에선 안 보였다. 누가 잘 사는 사람인지 누구 엄마가 반장 엄마인지 전연 어느 누구도 표시를 내지 않았다. 서로 만나면 똑같이 밝은 톤으로 반가움을 나누며 인사들을 하는 거였다.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고 편했다. 일본 엄마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부끄러워지는 구석에 찔끔했다. 이런 좋은 것들은 배워야 한다고 절실하게 느끼며 깨달으며 자꾸 부러워지기만 하는 마음에 속상했다. 밖으로 뻐기면서 남에게 보여주는 사랑이 아닌 일본 엄마들의 숨겨져 있는 자식사랑에 나는 마음이 갔다. 좋은 점수가 주어졌다.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에 왔을 때 질색하는 것이 있다. 길을 가다가 어깨를 밀치고는 그냥 가버리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복잡한 전철에서 내려 출구로 가려면 타려는 사람은 물론 같이 내린 사람 중에도 앞질러 가려고 어깨를 부딪치고는 그냥 간다. 전혀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철 역사 내에서 자주 당하는 것 중에 자기네들끼리 방향을 얘기할 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있다. 사람이 지나가는데 손가락질을 하면 그 손가락에 눈을 찔리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긴 우산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우산을 뒤로 흔들 때 역시 뾰족한 우산 꼭지에 뒤에 있는 사람이 찔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위험성을 전혀 의식을 못하는 모양이다.
이런 예는 공간 공해이자 접촉 공해인 셈이다. 소리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소리 공해도 있다.
도서관은 조용하게 사용해야 하는 곳이다. 소리가 나는 요소를 모두 조심해야 한다. 골어 들어갈 때 구두소리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의자에 앉고 나서는 조용한데 가방을 책상에 놓는 소리, 의자를 당기는 소리, 뭔가 마시는 소리 등이 거슬리게 한다. 문만 나서면 바로 떠들거나, 창문을 열어 놓아 바깥 소리가 다 들리는데도 모여서 웃고 떠드는 경우가 많다. 떠드는 것은 아예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편이다. 몇 명이 모이면 소리는 더 커진다. 전철 내에서의 장시간 큰 소리로 휴대폰 통화도 그런가보다 한다.
영화관이나 밀폐된 공간에서 비닐 봉지 바지작 거리는 소리도 공해이다. 딱딱 소리내며 껌씹는 행위는 소리를 물론 냄새까지 공해이다. 아예 껌을 못 팔게 하는 싱가포르처럼 태형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자동차들은 굳이 클랙슨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클랙슨을 사용하는 운전자가 많다. 앞 차나 앞에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인데 주변 모두가 클랙슨 소리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층간 소음도 아래층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이다. 아래층 사람이 겪는 고통은 아랑 곳 없이 오히려 잘못이 없다고 다투다가 종종 살인사건으로 번지기도 한다. 음식점에서도 목소리를 크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술집에서는 무리가 모이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소리 공해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조용히 얘기해도 될 것을 큰 소리로 해야 돋보이는 모양이다. 웃음소리에는 박수까지 친다. 항의 해봐야 주인도 손님 떨어질까 봐 그냥 넘긴다. 우리나라 음식점들은 대부분 소리에 대한 대처가 없이 인테리어를 한다. 천장도 낮고 천장이나 벽이나 소리가 그대로 반사되어 나오게 평면으로 되어 있다. 외국의 경우 소리를 흡수할 수 있도록 벽이나 천장도 높게 하고 벽면에도 굴곡을 만든 경우가 많다.
당구장에도 저녁에 가보면 술이 취해 칠 때마다 마구 괴성을 지르는 손님들이 많다. 다른 손님들도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항의해봐야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인은 오히려 TV에 시끄러운 스포츠 경기를 틀어 놓아 한 술 더 뜬다. 이런 소리 공해에 대체로 둔감한 편이다. 가해자는 그 행동이 남에게 피해가 되는 줄 모르고 피해자는 대부분 짜증은 내지만 관대하다. 투명인간 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자동차 상향등을 아무 때나 켜고 달리는 빛 공해도 있다.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아무 의식 없이 아무데나 휙 버리는 사람도 많다. 감각이 무디다는 것이 여러 가지인데 지적을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 무례한 면이 한국적인 매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결코 자랑할 것은 못 된다. 선진국 대접을 받으려면 선진국 사람들 수준의 감각공해의식을 가져야 한다.
상공회의소 CEO인문학포럼에 강사로 초대받아 갔다. 2008년 수료 후 8년째 이어지고 있는 현직 CEO들의 모임이다. 문학, 역사, 철학을 좋아하는 사장단 모임이다.
필자 주제는 ‘CEO와 댄스스포츠’였다. 그간 댄스스포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편견과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크쇼로 진행한다니 어디 한번 알아나 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댄스스포츠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의 자료는 미리 유인물로 파일 제본하여 배포하고 내가 먼저 강의하고 질문과 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의외로 높은 관심과 열띤 질문이 있었다. 이미 외국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댄스의 필요성을 톡톡히 깨닫거나 크루즈 여행에서 춤을 못 춰서 낭패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댄스스포츠는 인문학 부문과 굳이 연결지으라면 역사와 연결이 된다. 우산 우리나라 춤의 역사와 문화사를 보면 정비석의 자유부인, 박인수 사건, 7공자 사건 등 어두운 역사 때문에 춤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사실, 루이 14세부터 체계화되어 발전해온 발레의 역사, 궁정댄스의 문화, 유럽 귀족 사회에 댄스스포츠가 정착하게 된 문화사, 미술 등에 묘사 된 춤의 문화 등이 관심사가 될 것이다.
추가로 CEO들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댄스스포츠와 시니어 건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했는데 오히려 건강을 상하는 경우도 있고 운동 자체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어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시간이나 돈도 많이 안 들고 접근성이 좋아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역시 가장 관심이 있어 한 부분이 댄스스포츠가 커플댄스라서 부득이하게 동반되는 스킨십에 관한 것이었다. 남녀가 손을 붙잡고 춤을 추다 보면 바람이 나거나 이상한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질문자는 쑥스러워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다.
춤을 추기 위해 처음에 이성과 손을 맞잡는 홀드를 하게 되면 양자가 모두 긴장하게 된다. 그런 마음에서 혹시 상대방에게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그 마당에 다른 이상한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음악은 흐르고 스텝을 하기에도 바쁘니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댄스스포츠는 밝은 조명 아래에서 배운다. 전면 거울이 한 명이상 있고 단체반에서는 서로 보는 눈이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상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성과의 스킨십에서 댄스스포츠는 라틴댄스에서는 남자 왼손 여자 오른손으로 서로 움켜쥐면서 엄지만 여자 위로 살짝 올라간다. 모던댄스에서는 손바닥을 맞잡는다. 손바닥은 손 등과 민감성 면에서 떨어진다. 남자 오른 손이 여성의 등 뒤 견갑골을 잡지만 살짝 대고 있는 느낌이지 붙잡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스킨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이다.
다리 사이에 다리가 들어가는 것도 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남자 오른쪽 다리가 여자 다리 사이로 들어가면 여자는 왼발을 뒤로 빼므로 사이로 들어간다는 개념과 다르다.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동작에서 주로 오른쪽 다리끼리는 축이 되어야 하므로 접촉이 있긴 하지만 남자의 민감한 부분과 반대 편 다리라서 참으로 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왼쪽으로 돌 때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온다. 왼쪽으로 도는 리버스 턴은 여성을 먼저 보내고 남성이 뒤따라가는 형식이라 참으로 감탄스럽다.
무슨 스포츠를 하든 마음속에 바람피울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라고해서 유난히 바람이 많이 나는 종목은 아니다. 오히려 조심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덜 일어날 수 있다. 바닥도 좁아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댄스 계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답했다.
토크 디너 쇼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참석자들끼리 단체반을 구성하여 같이 배우라는 팁을 줬다. 내 댄스 토크 디너의 소식이 전해지자 부득이하게 결석했던 사람들도 다음 달에 앙코르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 왔다.
대학원 시절 3총사가 있었다. A는 국무총리의 장남이었고 B는 국내 굴지 제약회사 사장의 장남이었다. 필자는 조그만 사업을 하는 보통 아버지를 둔 처지여서 격차가 컸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지지직 전기가 통하여 거의 매일 당구 치러 다녔다.
셋이 당구 치러 가면 진 사람이 게임비와 술값을 내는 내기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셋은 진 사람이 게임비와 술값을 내고, 더불어 여자도 붙여주는 내기를 했다. 서로 실력이 비슷해 당최 승부를 가릴 수 없어 통 큰 내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평소는 조금이나마 승률이 앞섰던 필자가 이날은 어이없게도 지고 말았다. 큰 승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약속대로 서울 신촌의 술집에 갔다. 한참 즐겁게 술을 마시는데 옆자리를 보니 마침 세 명의 젊은 여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학 시절 과 대표하면서 ‘미팅 주선의 달인’ 소리를 들어온 터라 자신감이 충만해 여자들에게 합석을 권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기의 세 번째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들은 합석했다.
여자들은 술김에 봐도 수준급이었다. 그렇게 수준급 여자들과 마시다 보니 술도 많이 마시고 많이 취했다.
그런데 술자리를 파하고 술값 내고 밖에 나와 보니 웬 불량배 셋이 여자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숫자가 열세여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3대 3이니 여자들을 구해주자”고 했다. 그래서 필자가 불량배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A는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B는 “모른 척하자”며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필자가 친구들을 따라가서 팔을 잡았으나 강하게 뿌리치며 도망가기 바빴다. 평소 얌전한 A에게는 기대를 안 했지만 B에게는 나름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합기도 고단자였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유도, 태권도, 복싱으로 다져진 몸이어서 둘이 힘을 합치면 불량배들을 혼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B는 “여자들이 희롱당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 불량배들과 어울리는 사이”라며 사양했다.
할 수 없이 필자는 혼자 불량배 3명을 상대로 싸움을 했다. 그런데 술에 취한 때문인지 몸놀림이 완전 슬로 비디오였다. 그런 와중에도 세 명을 상대로 때리고 맞으며 싸웠는데 두 명은 시야에 다 들어와서 치고받고 할 수 있지만 한 명은 뒤편에 있어서 안 보이니 속수무책이었다. 도망간 B가 원망스러웠다.
그나마 선전하던 중 불량배들이 어디서 몇 명이 더 왔다. 도저히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도주 모드’로 바뀌어 달리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덧 신촌로터리 육교에 다다랐다. 그리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는데 이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필자는 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도망치는 입장이고 쫓아오는 불량배들은 치워진 공간을 이용해서 따라오니 결국 육교 위에서 붙잡혔다. 상대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우산대를 휘둘렀으나 우산대가 그토록 힘없이 부러질 줄은 몰랐다.
필자는 육교 위에서 불량배들에게 흠씬 맞고 쓰러져 짓밟혔다. 다행히 육교 위에 널브러진 대학원 교재를 보고 지나가던 학생들이 “우리 학교 학생이 불량배들에게 주어터진다”라며 달려들어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몸을 추슬러 보니 옷도 찢어지고 손목시계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이 일로 두 가지 후유증이 생겼다. 하나는 아내에게 칭찬받으려고 무용담처럼 얘기했다가 오히려 ‘야단 세례’만 들은 것이다. “남자로서 그 정도 의리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했는데 아내는 “싸움은 무조건 나쁘다. 이제 싸움은 하지 말라”며 이번에는 잃어버리면 속이 아플 정도의 고급 시계를 필자에게 선물했다.
A와 B는 그 일로 더는 어울리지 않고 우정도 싸늘하게 식었다. 오랜 시간 다져온 우정이 그 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7월의 마지막 주까지는 장맛비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꿉꿉하고 습한 데다 틈만 나면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게 싫은 요즘, 조금이라도 뽀송뽀송하게 지내고 싶은 당신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모았다. 비에 젖은 가죽 신발 안고 울지 말라. 비에 당당한 아이템 장착하고 기분 좋게 비와 맞서 보자.
사진 제공 라이젠탈·크록스·락피쉬·헬로레인캣츠·센즈
우비 소녀시대도 패션 아이템!!
산행이나 걷기를 할 때 주로 챙겨 나가는 아웃도어 제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우비.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비는 여름의 패션 아이템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투박하지 않다. 비를 막아주는 방수 기능은 기본이다. 가지고 다니기 간편하게 우비 주머니가 있거나, 우비 자체에 파우치가 부착된 것도 있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옷이 다 젖는 게 두렵다면 장만하시라. 2만원에서 5만원대라면 예쁘고 세련된 느낌의 우비를 살 수 있다. 우산 쓰고 레인부츠 혹은 젤리 슈즈를 신고도 몰아치는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면 우비를 입자.
물이 금방 마르는 ‘젤리슈즈’와 ‘우븐슈즈’
온종일 내리는 비가 아니라면 젤리슈즈를 신고 외출하자. 젤리슈즈는 고무 재질이나 폴리에틸렌 소재로 만든 여름 전용 신발로 물이 닿아도 금방 마르고, 가볍고 활동도 편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애용한다. 굽이 낮은 젤리슈즈는 발에 충격을 줄 수 있어서 되도록 3cm 정도 되는 굽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젤리슈즈의 단점은 물이 발바닥에 닿으면 조금 미끄럽다는 점. 발목을 다칠 수도 있으니 특히 비가 오거나 물놀이 할 때 조심히 걸어야 한다. 시니어의 경우 높지 않은 굽에 발등을 밴드로 고정해주는 젤리슈즈를 선택하면 훨씬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시니어에게 장마철 추천하고 싶은 신발은 ‘우븐슈즈’다. 젤리슈즈처럼 힐이 있다거나 여성스럽지 않다. 대신 남녀불문 떠오르는 인기 여름상품으로 유독 요즘 눈에 많이 띄는 게 바로 우븐슈즈다. 두껍고 납작한 실로 직조한 천으로 발등을 감쌌으며 메모리폼을 밑창에 써서 발이 상당히 편하다. 영국 브랜드 락피시가 출시한 우븐슈즈의 경우 내부 충격에 강하고 흡수가 뛰어난 EVA(ethylene-vinyl acetate) 소재를 발등 부분에 이용해 푹신한 느낌을 더했다고. 제조사마다 다양한 소재의 제품을 내놓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통기성이 뛰어나고, 가볍고, 빠르게 마른다는 것이 우븐슈즈의 장점이다.
레인부츠 당당하게 신어보자!
최근 나온 레인부츠는 색깔뿐만 아니라, 길이, 스타일이 다양해 본인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신을 수가 있다. 디자인을 보고 레인부츠를 선택하기에 앞서 따져봐야 할 것이 바로 소재다. 천연고무에 부츠 안쪽은 천으로 마무리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안까지 고무일 경우 살에 붙어서 걷다 보면 통풍이 안 돼 다리가 부어 답답하고 불편할 수 있다. 본인의 치수보다 반 혹은 한 치수 큰 것을 선택해 면양말을 신고 착용하면 좀 더 산뜻한 장마철을 보낼 수 있다.
천연고무 소재는 통풍이 안 되는 애로사항이 있어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장화 안에 남은 물기와 땀 때문에 악취가 나거나 심하게는 곰팡이가 생길 수도 있다. 되도록 신고 생활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른 수건으로 닦은 뒤 완전히 건조시켜야 한다. 건조시킨다고 헤어드라이어나 직사광선에 레인부츠를 노출해서는 안 된다. 고무 혹은 플라스틱 소재로 만든 레인부츠는 열에 약해 원형이 변하기 쉽고, 변색될 수 있다. 보관할 때는 제습제 혹은 신문지 등을 구겨 넣어 두면 된다. 녹차 티백이나 커피 찌꺼기를 담은 주머니를 부츠 안에 넣어 두면 악취를 없애는 데 효과적이다. 시니어의 경우 너무 긴 것보다는 종아리 정도나 단화를 착용하는 것이 덜 무겁고, 신고 벗고 하기가 편하다.
레인부츠는 표면이 하얗게 변하는 백태 현상이 일어난다. 레인부츠 전용 클리너도 있지만 5000원 안팍의 ‘타이어 광택제’로도 훌륭하게 레인부츠를 관리할 수 있다.
명화 우산 VS 태풍을 이기는 우산
장마철 신경 써야하는 1순위가 바로 우산이다. 예쁘고 멋진 우산을 살까? 아니면 튼튼한 우산을 살까?
요즘 비교적 저렴하고 예쁜 우산들이 인터넷을 통해 많이 판매되고 있다. 특히 ‘명화 우산’은 시니어들의 중후함과 멋을 살려주는데 더할 나위 없다. 고흐, 모네, 르누아르, 신윤복 등의 그림을 디자인에 따라 우산의 겉 혹은 안에 넣었다.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에서 구매 가능하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명화 우산’을 치면 된다. 또한 각 시립 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의 아트숍에서도 살 수 있다. 비 오는 거리를 명화로 수놓고 싶은 시니어에게 추천한다. 단,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이용하시길.
비바람을 뚫고 걸어 본 일이 있는가? 앞은 보이지 않고 정신없이 향해 걷는 느낌, 대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다 우산이 뒤집히는 일은 다반사고 심지어 휘거나 부러지는 일도 발생한다. 이 불편함을 단순하면서도 간단한 아이디어로 해결한 우산이 바로 ‘태풍을 이기는 우산’이다. 전통적인 우산의 대칭구조를 비대칭으로 디자인해 비바람에 불 때 몸이 우산으로 쏙 들어가 게 만들었다. 이 우산은 앞뒤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우산대가 짧은 게 앞쪽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앞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네덜란드 센즈(SENZ)사와 델프 공과대학(Technische Universiteit Delft)이 공동으로 개발한 이 우산은 강풍을 견디는 실험에서 최대 풍속 28.5m(시속 약 100km/우산 사이즈 : XL)에서도 뒤집어지거나 망가지지 않았다(초속 10m정도(시속 약 3km)의 바람은 큰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전깃줄에서 소리가 나며 우산을 쓰기 어려운 바람의 세기).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4년여 전 필자가 은퇴연구소 소장이 되었을 당시만 해도 은퇴연구소라는 곳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의 친구와 동료, 후배들뿐 아니라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를 하신 선배님들께서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셨다. 몇몇 분은 도대체 은퇴연구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며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해프닝 한 토막.
필자가 미리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필자를 주빈(?)으로 초청한 선배님이 들어오셨다. 필자가 일어나서 인사하는 걸 보신 선배님께서 대뜸, “아니, 은퇴도 안 해본 양반이 무슨 은퇴연구소장을 한다고 그래?” 이 말에 머리만 끄덕거릴 필자가 아니지 않은가? “선배님, 외람되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보통 사람은 보면 알고 우둔한 사람은 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꼭 당해 봐야 알겠습니까?” 좌중이 웃음보가 터진 것은 당연지사! 그 선배님께서도 함께 박장대소를 하시다가 자리에 앉으시면서 왈, “역시 은퇴연구소장 할 만 하구만.”
당해야 아는 우둔한 사람을 넘어 당해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지만 은퇴를 하고 나서도 자신이 은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한두 번은 은퇴를 하고 그러다 완전히 은퇴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다 보니 은퇴연구소장인 필자는 은퇴자와 은퇴예비자들에게 둘러싸여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큰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유명한 점쟁이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경험과 통계가 쌓이면서 더 용한(?) 점쟁이가 되는 것과 같다. 용한 점쟁이가 스스로 익힌 이론과 타고난 식견에 더해 실전을 통해 쌓인 사례와 결과를 가지고 이리 엮고 저리 엮어서 처방(?)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은퇴 컨설팅을 통해 터득한 제1 원칙은 “눈높이를 낮춰라!”이다. 2500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 “너 자신을 알라!”와도 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수천년 전부터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다음 노래 가사가 우리 마음에 와 닿겠는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가수 김국환의 ‘타타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 인생. 사실 이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우리들은 그에 맞게 옷차림을 바꾸고 또 우산을 들고 나서는 등 상황에 맞게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퇴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십중팔구 마음의 준비 등 나름 은퇴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막상 은퇴를 하고 나면 그게 아니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 중에서 말과 실제가 가장 크게 달라지는 이벤트가 은퇴라는 것이다. 특히 고위직 공무원이나 군인, 회사 임원을 하거나 자영업자로 한때 잘나가던 사람들이 은퇴 후를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은퇴 후에도 예전의 영광과 지위(?)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행복한 마음과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내가 왕년에 ~~”하는 마음가짐과 말이다. 겉으로는 다 내려놓았다고 하면서도 행동거지와 말투를 보면 아직도 어깨와 목소리에 힘이 많이들어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복지회관이나 문화센터에 남자들은 거의 없고 여자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가을 단풍철에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가보면 남자들끼리 여행가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대부분 여자들끼리 가거나 남자 몇몇이 끼어 있을 뿐이다. 도대체 남자들은 다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필자의 추측으로는 하루에 1만원을 받아서 TV를 끼고 있거나 당구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조금 나은 경우가 친구들과 청계산이나 북한산 산행을 다녀오는 정도일 것이다. 함께할 친구가 없거나 혼자가 좋다면서 나홀로 산행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은퇴한 후에도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진찍기 또는 그림그리기 등과 같은 취미활동에 나서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요리학원에서도 50~60대 남성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눈높이를 낮추는 일이다. 내가 왕년에 뭐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들과 이 시간에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마련이다. 반대로 내가 그간 일에 바빠 이렇게 좋은 것과 좋은 사람들을 모르고 지냈구나, 세상에는 할 일, 재미있는 일과 나와 다른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모든 게 새로워 보이고 좋아 보인다. 눈높이를 낮추는 데서 시작되는 변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눈높이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 회사에 들어가면 그 회사에 맞는 눈높이가 필요하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 함께 눈높이를 맞추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더없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손자손녀를 보게 되면 더 극적으로 눈높이가 낮아진다고들 한다. 내 눈높이를 맞추거나 낮추면 배우자와 아이들은 물론 손자손녀들의 눈도 보이고 그들과 생각도 함께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눈높이를 낮추면 보다 많은 친구들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고은(高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짧은 시이다. 산에 오를 때는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가느라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려오면 그때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오면서 못 보던 꽃도 보일 것이다. 우리 인생도 젊어서는 앞만 보고, 위만 보고 정신없이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이가 웬만큼 들고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은퇴를 했다면 이제 그런 짐들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그래야 그간 미처 보지 못한 세상과 미처 보지 못한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꽃이나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내 눈높이에 따라 예전과는 다른 느낌과 모습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추면 할 일도 친구도 더 많아지는 것은 물론 더 넓은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사흘 전에 여고시절의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다음 주 목요일 11시 30분에 예전에 잘 다니던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하자는 내용이다. 필자는 기쁜 마음으로 약속하고, 즉시 휴대폰 일정표에 친구와의 약속을 메모, 입력한다.
내일은 보고픈 친구를 만나는 날이다. 내일 날씨가 어떤지 휴대폰 인터넷을 열어 날씨를 점검한다. 오후에 비가 오락가락 할 것이라는 예보를 확인하고, 작은 우산을 꼭 챙겨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오늘 아침은 무척 바쁘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작은 우산 하나를 가방에 넣는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실시간 버스 노선 안내 서비스 앱을 이용하여 내가 탈 버스 번호를 검색하니, 7분 후에 이용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예정이란다. 와우~, 빨리 나가자. 휴~, 정확하게 예정된 시간에 도착한 버스에 승차한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출발하였음을 알린 후, 버스 이동 시간을 이용하여 은행업무 한 건을 폰뱅킹으로 신속하게 처리한다.
조금 후에 있을 친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차창 밖을 보니, 스쳐지나는 풍경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행복하게 시작하는 하루, "오늘~"
위의 내용은 필자의 어느 날 하루의 시작을 적어 보았습니다. 휴대폰에 설치한 여러 가지 앱 덕분에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오후에 흩뿌리는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으며, 길거리에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또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중요한 일도 처리하였지요. 이것은 모두 IT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 현대인들은 정보의 생산과 응용, 관리에 관련된 모든 정보통신 기술과 밀접한 관계에 있게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고속인터넷, 이동통신, 홈네트워크 등의 기술이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정보 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을 약자로 'IT'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현대인으로서 시대에 걸맞게 IT를 잘 익혀 풍성하고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시니어들의 심리적 특성 중 하나는 과거 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오랫동안 사용하던 사물이나 공간이 아닌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 현재나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예전을 그리워하고, 옛날 이야기를 즐겨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흔히 새로운 것과 관련하여 호기심을 갖거나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갈수록 변화의 주기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세대간의 소통 단절과 열등감으로 자존감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이로 인하여 스스로 '고물'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곧 인생의 낙이 없고, 따라서 행복을 맛볼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100세 시대를 맞이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풍성한 삶,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 시대 곳곳에 산재해 있는 IT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우리 모두는 'IT도사'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IT와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 발전은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새로움의 연속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배움을 포기한다면 이미 그 인생은 발전은 커녕 정지된 인생을 사는 무의미한 시간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복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할 때 자신감이 회복되며, 목표가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나'가 될 때 IT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내게 재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셋째, 사랑하는 가족, 친구, 지인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공유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척이나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어 예전에 비해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절대 부족한 실태입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의 대안으로 IT는 온라인상에서 대화의 장(메신저, SNS 등)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장을 적극 활용하여 타인들과 소통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때 실력있는 'IT도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IT강국입니다. 이 시대에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IT강국 국민으로서 IT를 맘껏 활용할 수 있는 실력있는 'IT도사'가 되어 풍성하고도 멋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IT도사'가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의 팁 한 가지를 덧붙여 본다면, IT를 익혀 나갈 때 단말기 터치(클릭)를 함에 고장이 날까 조심스럽게 주저하기보다는 미지의 모든 탭들에게 처음 인사하는 마음으로 터치하여 열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IT는 우리들을 다정한 미소와 함께 유익한 친구로 맞이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