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했다. 아침 시간에는 요양원 봉사에 오후에는 영화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바쁜 일정 쪼개서 만난 이 사람. 발그레한 볼에서 빛이 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웃으며 나왔을 것 같은 표정. 미련 없이 용서하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 누구에게도 남부끄럽지 않은 환한 미소의 주인공이 됐다.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이 꿈의 무대. 시니어 마술사 겸 영화인 조용서(趙鏞瑞·92) 씨를 만나 90대 소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전 11시에 복음병원에서 6월 생일인 분들의 생일잔치가 있었어요. 거기에 20명가량이 모였는데 그 앞에서 제가 마술을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영화교실에서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었어요.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막바지 작업을 해야 해서 요즘 좀 정신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요즘 왜 바쁜지 설명하는 조용서 씨다. 배낭에는 뭣이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지 무거워 보였다. 영화 제작에 마술 공연도 하기 때문에 가방은 가벼워질 날이 없을 듯싶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입선해 실력을 인정받은 시니어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손수 영상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촬영에 대본에 내레이션도 직접 한다.
“서울노인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에서 시니어 감독으로 네 차례 입선했습니다. ‘어르신 통역사들’이라는 작품은 작년에 대한극장에서 상영했어요.”
이번 영화 ‘긴 세월 살았다네’는 조용서 씨와 아내가 주인공이다. 단편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영화제 출품을 마쳤다고 전해들었다.
“작업을 해보니 러닝타임이 5분 40초더라고요. 90세 노년의 생활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0월에 영화제가 있는데 입선이 되면 상영할 겁니다.”
조용서 씨가 만든 영상은 담담하고 담백한 게 매력이다.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신과 주위 동료가 배우이자 주인공. 이 시대 시니어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방송인 송해 선생이라고 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송해 선생이 건강하게 전국을 누비는 모습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저에게 많은 소재와 영감을 주십니다. 나이가 많아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시는 삶의 지표 같은 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나이를 먹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잖아요. 제가 팔십이 넘어 영화를 만들게 될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2008년부터 영화 수업을 받고, 영화 제작을 하고,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어서일까? 봉준호 감독 부럽지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반짝이는 관객들의 눈이 좋다
영화와 엇비슷한 시절에 입문한 것이 바로 마술이다. 현재 조용서 씨는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의 ‘꿈전파 문화공연단’ 마술팀 소속으로 매주 틈새 없이 복지관, 병원, 어린이 도서관 등을 돌며 공연을 펼친다.
“영화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침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에서 마술 교육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붓글씨나 노래교실도 있었는데 마술 수업을 보자마자 좋았어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제가 할 수 있는 마술은 200여 가지 됩니다. 손에 완벽하게 익어서 공연할 수 있는 마술은 30개 정도 되고요.”
조용서 씨의 마술 도구는 큰 공연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많게는 200~300명 정도의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마술을 주로 구현한다고.
“손재주가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없어요. 그래서 동작도 크고 화려해 보이는 마술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마술은 분위기에 따라서 다른데 부채 마술이랑 인형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입니다. 스펀지나 꽃을 사용하는 마술도 있고요. 특별히 잘하는 건 우산과 꽃을 이용한 마술입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신기해 보이겠죠?”
애로사항이 있다면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은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서는 이유는 관객들의 눈 때문이라고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요. 어린아이들이 손뼉 치는 거 보면 희망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저는 무대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봐주는 게 행복해요. 자부심도 갖게 되고 말이죠.”
92세 시니어가 하는 말이 소년 감수성 저리 가라다. 사실 조용서 씨는 꽤나 매스컴을 탄 인물이다. 장수 관련 방송 다큐멘터리와 시니어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꼭 물어볼 질문이 생겼다. 장수 비결 말이다.
“저는 90대의 모범생으로 살고 있다고 봅니다. 바쁘게 살아요. 그게 장수하는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뭐하겠어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노인 일자리를 통해서 시니어나 어린이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 받는 시간들이 기쁘고 즐거워요.”
90년 인생 철학을 묻다
장수의 관문인 구십 문턱을 넘어 건강하게 살고 있는 시니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안 해봤던 옛이야기 혹은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쉼 없이 이야기를 펼치며 한껏 들떠 있던 그의 들숨날숨이 순간 잔잔해졌다. 그리고 정적이…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하루하루 마음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게 복이고요. 아프지 않게 우리 부부가 더 오래오래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한숨 돌리더니 옛일이 파란만장했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의 제1차 경제 부흥을 일으켰던 세대에 속합니다. 서독 간호사, 광부들 아시죠? 그 시절 사람이에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있었잖아요. 제 삶도 주인공과 비슷해요. 베트남전쟁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도 항만하역 근로자로 긴 시간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이제 몇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백전백패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다시 일어나서 오늘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 즐겁게 행복하게사는 것이 지금 제 인생 최대의 바람입니다.”
이후에도 나긋하게 살아온 얘기를 하는 얼굴에 잔잔한 평화가 보였다. 본인 스스로를 연예인이라고 했던 초반의 긴장감이 없어서 더욱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도 그 미소 잊지 말고 마술가로 영화감독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수년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더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전국 각 지역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축제에서 가는 세월을 즐겨보면 어떨까? 더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핫(?)한 여름을 책임질 전국 방방곡곡의 축제를 찾아봤다.
연재순서 ① 축제? 먹고 즐기자! ②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③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사진 제공 각 지자체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언제부턴가 여름이 되면 대한민국 전역은 온통 물의 도시로 변하는 것만 같다. 태국 물 축제인 송크란을 옮겨놓은 듯한 광경이 서울은 물론 다양한 지역에서 펼쳐져 더위를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세부 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한강몽땅축제’는 영등포구 한강공원과 수상 일대에서 7월 19일부터 8월 18일까지 한 달간 펼쳐진다. 물에 첨벙 뛰어들고 시원한 파도를 만끽하는 축제가 다양한 이벤트로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보령 머드축제
머드(진흙)팩으로 유명한 보령시. 1996년 머드 화장품을 개발한 보령시는 2년 뒤 보령머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상품화에 성공한 보령머드 화장품과 대천해수욕장 및 주변 지역 관광명소를 홍보하기 위해 축제를 기획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신나는 축제 마당이 됐다. 동양에서 유일한 패각분(貝殼粉) 백사장을 자랑하는 대천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해수욕은 물론 머드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청정 갯벌에서 진흙을 채취해 각종 불순물을 제거하는 가공 과정을 거친 뒤 생산된 머드분말을 이용해 머드 마사지(해변 셀프 마사지, 첨단 머드 마사지)를 할 수 있다. 머드 축제를 제대로 즐기려면 맨발로 체험을 해야 하니 잃어버려도 되는 신발을 신고 갈 것. 모자와 선크림도 꼭 준비한다.
기간 7월 19~28일 장소 충남 보령시 대천해수욕장 머드광장 및 시민탑 광장
정남진 장흥 물축제
물로 시작해 물로 마친다는 ‘정남진 장흥 물축제’가 올해도 어김없이 열린다. 올해 12회째. ‘젊음이 물씬, 장흥에 흠뻑’이라는 주제로 시원하게 한바탕 물놀이가 펼쳐질 예정이다. 시내에서 벌이는 거리 퍼레이드 ‘살수대첩’과 ‘지상 최대의 물싸움’, ‘황금 물고기를 잡아라’, ‘장흥 워터락 풀파티’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새로 도입한 ‘장흥 워터 그라운드’와 다양한 육상, 수상 이벤트도 열린다. 편백톱밥, 파라솔, 선베드 등은 해변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놓는다. 올해는 장흥 물축제를 대표하는 새로운 콘텐츠로 아쿠아 미니게임존, 휴게공간, 포토존 등을 마련했다. 장흥만의 민속문화인 고쌈줄당기기도 수중에서 펼쳐진다.
기간 7월 26일~8월 1일 장소 전남 장흥군 탐진강 및 편백숲 우드랜드 일원
평창 더위사냥축제
2018동계올림픽 개최 도시인 평창. 올림픽만큼이나 이 고장을 알리는 축제가 있다. 바로 ‘더위사냥축제’. 작년 제1회 대한민국 빅 데이터 축제 대상에서 ‘지역경제 활성화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할 만큼 관광객 유치는 물론 축제 참여자들의 선호도 조사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관광객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대표 프로그램으로 ‘땀띠귀신사냥 워터워’와 ‘광천선굴탐험’, ‘에어바운스 물놀이’ 등이 있다. 특히 광천선굴은 평창 더위사냥축제가 열리는 10일 동안만 개방된다. 동굴 입구까지 트랙터 마차를 타고 가 문화해설사에게 동굴 형성 과정과 전설 등을 들을 수 있다. 6600 여 m²의 해바라기 밭과 포토존, 우산의 거리, 코스모스 물안개 터널 등 조경 요소도 갖춰져 있어 걷는 여유를 즐기고 싶어 하는 시니어에게 추천할 만하다.
기간 7월 26일~8월 4일 장소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땀띠공원 일원
수년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더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전국 각 지역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축제에서 가는 세월을 즐겨보면 어떨까? 더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핫(?)한 여름을 책임질 전국 방방곡곡의 축제를 찾아봤다.
연재순서 ① 축제? 먹고 즐기자! ②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③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사진 제공 각 지자체
축제? 먹고 즐기자!
잘 먹어야 더위도 이겨낼 수 있다. 축제에서 빠트리면 안 되는 것은 단연 먹거리 아닐까. 그 지역만의 문화와 먹거리 특산품을 전면에 내세운 놀이마당이 우리나라 축제의 특성. 지역의 정취를 느끼고 특산품을 현지에서 직접 맛도 보고 비교적 싼값에 구매할 수 있어 시니어 관광객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7월에는 여름 과일을 대표하는 수박축제가 열리며, 여름 야채인 토마토 는 5월부터 9월까지 부산, 화천 등지에서 수확 시기에 맞춰 축제가 열린다. 마침 7월과 8월 사이에는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이 있다. 시골 냇가에서 고기 잡아 먹던 추억에 젖게 해주는 은어축제와 섬진강 맑은 물길 따라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해주는 재첩축제도 먹거리 축제 중 하나다. 향기 그윽한 연꽃을 주제로 연꽃차 등을 시음할 수 있는 축제도 있다.
봉화은어축제
올해로 21회째를 맞이하는 ‘봉화은어축제’는 조용한 산골마을을 들썩이게 한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잃어버렸던 옛 시골 정취도 느끼고 냇가에서 놀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낙동강 상류인 봉화 지역에서 회유하는 은어는 수라상에만 오르던 귀한 민물고기였다. 봉화의 역사와 함께해온 은어이기에 더 의미 있는 축제다. 은어반두잡이와 은어낚시, 맨손잡이 체험이 기다리고 있고, 은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도 맛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다슬기잡이와 물싸움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기간 7월 27~8월 4일 장소 경북 봉화군 내성천 체육공원 일원
진안고원 수박축제
올해로 11회째인 진안고원 수박축제는 청정 고랭지 지역인 전북 진안 동향에서 열린다. 동향수박은 20℃ 이상의 일교차가 큰 고랭지 기후의 영향으로 아삭한 식감과 12브릭스 이상의 당도를 자랑한다. 이번 축제에도 할인된 가격으로 동향수박을 무한 구입할 수 있다. ‘진안고원 수박축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체험, 전시, 판매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수박 공예를 비롯해 수박부채만들기, 수박터널걷기 등은 휴가철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체험 행사다. 체련공원 특설무대에서는 깜짝 수박경매, 수박퀴즈 등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기간 7월 27~28일 장소 전북 진안군 동향면 체련공원 일대
부여 서동연꽃축제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령 인공연못인 궁남지에서 펼쳐진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축제 이름도 부여서동연꽃축제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이 축제장에서는 백련, 홍련, 수련, 가시연 등 330여 m² 규모의 연못에서 자라는 50여 종의 다양한 연꽃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용을 품었다는 포룡정은 더없이 아름답고 연꽃 단지 곳곳에 추억 어린 원두막이 놓여 있어 나들이 장소로도 좋다. 또한 야생화와 수생식물이 많아 아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무왕의 탄생과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담은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연꽃쿠키 만들기, 연잎차 다도시연 및 시음, 연꽃디퓨저 만들기 등 연꽃을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기간 7월 5~14일 장소 충남 부여군 서동공원 일원
무안 연꽃축제
동양 최대 백련 서식지인 회산 백련지에서 펼쳐지는 무안 연꽃축제는 뜨거운 여름의 정점에서 열린다. 1997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축제에서는 백련을 비롯해 홍련, 수련, 어리연, 가시연 등 각종 연꽃과 함께 수생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랑, 소망 그리고 인연’이라는 주제로 소망등을 달고 백련가래떡 나눔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연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카페를 운영하며 연차시음 및 행다시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밖에 연꽃얼음물길, 연꽃우산거리, 안개분수거리, 바람개비동산 등 연꽃의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특별 산책로도 걸어볼 수 있다.
기간 7월 25~28일 장소 전남 무안군 회산백련지 일원
알프스하동 섬진강문화재첩축제
경상남도 하동군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알프스하동 섬진강문화재첩축제’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손꼽힌다. 2015년부터 시작한 ‘섬진강문화재첩축제’는 먹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남녀노소가 참여하고 소통하는 축제로 인기다. 재첩홍보판매관 및 재첩시식관을 운영하고, 특산품 전시와 판매도 겸한다. 축제의 주요 행사로 ‘하동청년회의소와 함께하는 치맥페스티벌’, ‘정두수 전국가요제’, ‘황금(은) 재첩을 찾아라’, ‘섬진강을 날아라!(무동력 행글라이더대회)’가 열린다.
기간 7월 26~29일 장소 경남 하동군 송림공원 및 섬진강 일원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
토마토를 주제로 한 축제가 논산에서도 열린다.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스페인토마토축제를 벤치마킹한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은 무더운 시기에 열리는 만큼 물총축제도 겸한다.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토마토 던지기, 토마토를 주제로 한 요리와 샴페인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는 복합문화체험 축제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름 페스티벌로 자리 잡을 계획이라고. 매일 밤마다 버스킹 공연이 이어지고 주말 저녁에는 K팝을 좋아하는 외국 여행객들을 위한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다.
기간 7월 19일~8월 18일 장소 충남 논산시 성동면 원남리 일원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배출했던 대학가요제에서, 우순실(57)은 1982년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발라드 곡 ‘잃어버린 우산’은 1970년대 포크송에서 1980년대의 발라드로 넘어가는 가요계 조류에서 분명하게 각인된 노래였다. 그녀의 묵직한 목소리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난다. 그녀의 삶은 가혹했다. 뇌수종으로 잃은 첫째 아들, 전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짊어져야 했던 빚 29억 원. 그러나 막상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밝고 평온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남다른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들어봤다.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면 감사함이 없게 돼요. 굽이굽이 좌절도 해봤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그래야 참 감사하고 기쁘다는 걸 느끼게 되죠."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가수 우순실만큼 그 주제에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노래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딸 다섯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때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에 스피커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특히 이미자 등의 트로트 가수들 노래가 자주 나왔는데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단다. 그래서 음악적 후원자였던 큰언니는 그녀에게 ‘너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말하곤 했다.
타고난 가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큰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줘서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게 해줬어요. 고등학교 교련시간에는 휴식시간마다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수가 되었죠. 대학교를 작곡과로 들어간 것은 노래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어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다니던 그녀는 1학년 때인 어느 어스름한 저녁, 국악과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를 듣고 반해버렸다. 그 무렵 대학가요제 출전으로 자퇴를 해야 했고 이후 그녀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를 들어가게 된다. 20대까지의 그녀의 삶에는 순수한 음악적 매혹에 의한 선택들이 있었다. 음악적 욕심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는데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예요. 예를 들어 화가들이 자기 철학이나 인생관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저에게 있어 노래는 간절한 표현 도구인 거 같아요.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하고.”
병간호 속에서도 행복을 마주했다
우순실은 1991년에 결혼하면서 가수로서의 삶을 접는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시한부 뇌수종 판정을 받자 이후 13년 동안 함께 투병생활을 한다. 천생 가수였던 그녀가 대중의 시야로부터 멀어졌던 시간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수가 노래를 놓고 있을 때, 괜찮을 리는 없죠. 아쉬웠죠. 그러나 아이를 순탄하게 키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어요. 어느 날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감정이 안 살더라고요. 그 순간 행복한 상태에서는 한스러움이 표현되질 않는구나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나름 행복하고 만족했던 거예요.”
우리가 보는 그녀의 삶의 굴곡은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런 삶과 고통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 어쩌면 그 마음의 크기야말로 그녀가 가진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을 자리는 저 자린데 하면서도 옆에 아이가 있는 게 보이면 지금 할일은 이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죠. 늘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는 제 앞에 놓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그리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도 덜해요.”
많이 겪은 자의 성숙함
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녀가 잠깐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볍게 불렀는데 그 목소리의 맑음에 놀랐다. 동안만큼이나, 노래 실력만큼이나, 그녀는 세월의 변화에 초연한 듯 보였다.
“1982년에 데뷔를 했으니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어찌 보면 그때 노래한 걸 들어봐도 애늙은이 같았죠.(웃음) 감정이 막 요동치는 게 아니라 그냥 평행선이었어요. 어릴 때도 초월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친구들이 캔디 만화에 열광하고 로맨스에 빠질 때 저는 교정 벤치에 혼자 앉아 상념에 잠기고 고독을 씹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녀가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도 ‘한오백년’이었다. 그녀의 안에 그런 한과 우울이 많았던 때였다.
“지금은 더 밝아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죠. 뭔가 많이 겪은 자의 예전과는 다른 성숙함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사소한 달콤함에 감사
‘뭔가 많이 겪은 자’ 우순실이 도달한 깨달음은 나 자신의 소중함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래할 때도 컨디션이 좋은 사람은 장비 탓을 안 해요. 내 상태가 좋으면 생마이크에서도 노래가 잘 나오죠.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밝은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뾰족한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는 포용심이 생기니까요.”
그녀가 둘째 딸과 셋째 아들에게 하는 말도 이와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 번째다, 친구관계가 고민될 때는 너 자신을 사랑하면 된다’고 말해줘요. ‘지금 관계가 꼬여 힘들다면, 그런 자신의 힘든 마음을 먼저 알아줘라, 자신을 위로하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이죠. 그런 일은 상대와 나와의 문제 같지만 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충돌이에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 상대방과의 문제가 별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과의 관계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친구와의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마음만 충만하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든 안 사랑하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사실 나 자신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세상사에 치여서 작아지잖아요?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정말 맑고 순수한 모습이 보여요. 그걸 발견할 때 충만함 그 자체를 느끼게 되죠.”
혼자여서 너무 좋다
홀로 지내는 그녀는 남는 시간에는 이것저것 공부하며 음악 연습과 요가를 한다. 꾸준히 하고 있는 요가는 그녀가 심신이 고달팠을 때 선배 가수가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권해서 시작했다. 그녀에게 요가 시간은 곧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노래의 힘과 호흡 등을 좋아지게도 하고요.”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서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 자신을 더 충만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중에는 유독 고독을 심하게 느끼며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는 이가 많다. 그녀가 혼자 잘 지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거예요. 같이 살아도 외롭죠. 그러니 인간은 고독하다는 걸 전제하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 좋죠. 그리고 나를 위한 선물을 해야 해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걸 하는 게 좋아요. 저에게는 그게 음악, 요가, 힐링, 집안청소 등인 거죠.”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새로운 여정
우순실은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가수를 하겠다며 존 레논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데 메시지를 주는 힐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 그녀는 얼마 전 전영록에게서 곡을 받아 새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은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봄날을 연상케 하는 어쿠스틱함이 강조된 발라드 곡이다.
“원래 받을 곡은 이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영록 선배님이 우순실에게 곡을 줘야겠다 해서 녹음을 하게 됐는데,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불러봤는데 바로 선배님이 ‘이건 네가 불러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열몇 곡 중 일곱 곡을 추려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녀는 오는 4월 26일 여의도 마리나에서의 디너쇼 콘서트를 시작으로 6월까지 공연 스케줄을 잡아 놨다.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관객과의 만남인 콘서트였던 만큼 그 소망을 이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이 노래하면 내가 뭔가 힐링이 되는 거 같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이 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멋진 왕언니에게서 사랑스런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당차고 또 열정적이다. 1990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노래 부르는 신인처럼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맥주라곤 하이트, 카스만 알던 시절, 난생처음 맛본 흑맥주의 맛은 충격적이었다. ‘간장 향’, ‘한약 맛’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강렬했던 맛이 잊히지 않듯 흑맥주의 매력은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풍미에 있다. 영화 ‘킹스맨’을 본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기네스(Guinness)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Kingsman:The Secret Service), 2015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출연 콜린 퍼스, 태런 에저튼, 사무엘 L. 잭슨 등
‘콜린 퍼스의 수트 포르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영화 속 콜린 퍼스는 수트를 입고 우산 하나로 악당을 처치하며 수트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러한 ‘킹스맨’의 독보적인 스타일링은 턴불&아서 셔츠, 드레이크 넥타이, 스웨인 아데니 브릭의 여행 가방, 브레몽 시계, 조지 클레버리 구두 등 전 세계 소수만 사용하는 명품 브랜드의 참여로 완성됐다. 신사의 나라 영국의 영화답게 젠틀맨 스파이 ‘킹스맨’의 작전 기지 또한 영국 새빌로에 있는 맞춤 양복점. 킹스맨 요원이 수제 양복으로 스타일을 자랑했다면 악당은 힙합 요소가 들어간 패션을 선보인다.
‘007’, ‘본’, ‘미션임파서블’ 등 스파이 영화에서 술이 빠지지 않듯 ‘킹스맨’에서도 다양한 술이 등장한다. 특히 해리(콜린 퍼스 역)가 ‘멋진(lovely)’이라고 표현한 아일랜드 대표 맥주 ‘기네스’는 킹스맨 최고의 명대사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가 탄생한 장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고 있던 해리는 그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무리에게 “난 이 멋진 기네스를 마저 마셔야겠다”고 말하며 물러가기를 요청하지만,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떠나는가 싶더니 가게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이들을 차례차례 때려눕힌다. 이 장면의 화룡점정은 마지막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가 남은 기네스를 마저 비우는 그의 모습이다. 기네스의 풍미와 부드러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장면은 통쾌함에 갈증이 해소되면서도 해리처럼 당장 기네스를 한잔 비우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기네스를 한 번이라도 마셔봤다면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해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맥주계의 젠틀맨, 기네스
하루에 약 1000만 잔 이상 소비되는 기네스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맥주다. 하지만 청량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첫맛에 당황할 수 있다. 탄산이 강한 다른 맥주와 달리 기네스는 청량감이 거의 없다. 우리가 기네스 광고를 볼 때 부드러운 느낌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와 거품의 비결은 바로 질소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1959년 기네스는 맥주 안에 질소를 넣어 이산화탄소가 담긴 다른 맥주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 해리가 샴페인, 위스키, 칵테일이 아닌 맥주 기네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가 아일랜드 출신 배우이기 때문에’,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등 많은 추측이 있지만 확실한 건 영화가 끝나도 계속 생각나는 콜린 퍼스처럼 기네스도 한 번 맞보면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9000년 임대 계약 체결 기네스 창립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는 175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폐기된 양조장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를 매년 45파운드(약 6만5000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9000년간 임대하는, 역사상 가장 독특한 계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6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8740년이 더 남은 셈. 현재 기네스 양조장이 있는 더블린은 아일랜드 최고 관광 코스 중 하나다.
캔 속 작은 공의 정체 다른 캔맥주와는 달리 기네스 캔맥주에는 특별한 ‘무엇’이 들어 있다. 캔을 흔들었을 때 딸랑딸랑하면서 움직이는 이 물체의 이름은 ‘위젯(widget)’. 1991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술 진보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발명품은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킨다. 간단히 설명하면 캔을 땄을 때 압력 차로 인해 플라스틱 공(위젯)에 들어 있던 질소가 빠지면서 맥주와 섞여 부드러운 거품을 일으키는 원리다. 따라서 기네스 캔에 든 물체는 이물질이 아니니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기네스와 기네스북의 관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네스북’은 기네스와 관련이 있다. 기네스 양조회사의 상무이사였던 휴 비버(Hugh Beaver)는 어느 날 어떤 새가 가장 빠른가에 대해 사람들과 논쟁을 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세계 최고 기록들을 모은 책을 구상하게 됐다. 그 후 약 1년간의 조사 끝에 1955년 기네스의 이름을 딴 ‘기네스 북 오브 레코드(The Guinness Book of Records)’ 초판본이 출간됐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00년부터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s )’라는 제명으로 바뀌었고, 2001년 기네스는 기네스북 판권을 다른 회사에 넘겼다.
아일랜드보다 더 아일랜드다운 기네스 기네스 엠블럼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프 문양은 1862년부터 현재까지 총 여섯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 흥미로운 점은 1922년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악기인 하프를 엠블럼으로 사용하려고 신청했지만 거절됐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1876년 기네스 사가 먼저 하프를 트레이드마크로 등록을 했기 때문. 결국 기네스보다 한발 늦은 아일랜드 정부는 하프를 엠블럼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네스 엠블럼과는 다른, 좌우 위치가 바뀐 하프 문양을 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은 코미디언 이홍렬. 대한민국 대표 코미디언 중 한 명인 그는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인 이홍렬TV를 직접 만들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노장 이홍렬(64)은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인터뷰, 메이크업, 그리고 표지 촬영을 할 때까지 시종일관 떠들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올드보이 이홍렬에게 입이 살아 있는 그날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방송가에서 쌓은 그의 업적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나이나 경력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소위 ‘올드보이’인 그는 새로운 무대로 가장 젊은 매체를 선택했고 이 도전은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새 구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하는 ‘이홍렬TV’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이홍렬을 만나자마자 물 만난 탈출구 유튜브 얘기부터 꺼냈다.
“이제 SNS를 거부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이 됐어요. 부부도 마주앉은 상태에서 사진을 보내고 공유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제가 기계에 능해서라기보다는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거예요.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이제 이홍렬TV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과거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이홍렬은 자신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걸 SNS 시대에 맞춘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을 잘 받아들여서 쓰면 삶의 윤활유가 된다며 디지털 예찬론을 폈다.
“예를 들어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이 싸웠다고 해봐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둘이 화해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시간까지 일단 기다려야 했죠. 그때까지 두 사람 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문자로 ‘아빠가 미안했다’고 하면서 이모티콘을 사용해보세요. 딸도 같이 답해줄 거예요. 디지털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 금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사실 SNS는 젊은 세대의 주된 소통 수단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내가 사기엔 아까운데 남에게 선물 주기엔 좋은 게 이모티콘이에요. 그래서 이모티콘은 조금 친해지려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쏴요. 상대가 그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이모티콘 부자예요’ 하는 말도 듣고.”
이홍렬은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을 받아들이면 가질 수 있는 장점으로 디지털만 아는 주니어들에게 디지털로 접근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기차기를 모르고 물수제비도 몰라요. 그걸 알려주면 너무 신나합니다. 디지털로 공유하고 아날로그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면 더 큰 울림이 있거든요.”
‘고양이가 일인칭이 된다면?’
현재 이홍렬TV는 반려묘인 러시안 블루 고양이 풀벌이와의 추억과 강화에서의 일상을 다룬 두 개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에 처음 계정을 만들어두고 그냥 놔뒀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우리 고양이를 보는데, 털이 하얗게 쌓인 거예요. 털이 왜 저렇게 쌓였지? 하고 생각해보니 얘가 열다섯 살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쟤가 만약 일인칭이 된다면 할 얘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취미였던 터라 그동안 얘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찍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2박 3일 동안 유튜브에 올릴 에피소드 40편을 정리했어요.”
이홍렬은 툭하면 동영상을 찍는다. 재미있어서다. 그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온 30년 동안의 모습을 담은 아날로그 사진과 VHS를 모두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은 이홍렬TV의 자원이 되고 있다.
“유튜브가 올 시대를 준비했느냐? 아니에요. 다만 이것들이 다 짐이었거든. 보관이 힘들었어요. 사실 기록물을 정리하면 보물이고, 정리 안 하면 쓰레기죠. 그래서 다 정리한 거죠.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에 두 아들 기록, 사진, 동영상을 다 넣었어요.”
재미와 감동을 풀어주자
고양이 풀벌이는 올해 4월에 눈물이 나고 붓고 해서 진단을 하니 구강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여든네 살의 나이.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턱을 잘라내는 것, 두 번째는 방사선 치료, 세 번째는 가족이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홍렬은 세 번째를 선택했다. 고양이가 아프면 마취주사를 놔주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마시게끔 도와줬다. 얼른 안락사를 시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침내 갈 때가 되었고, 풀벌이는 그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록한 풀벌이와의 추억들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풀벌이를 키운 것과 아이들 키운 것을 맞물려서 보여주는 형식이에요. 저 말고 다른 누가 편집을 못해요. 찾는 걸 저밖에 모르니. 죽을 지경이죠. 5분짜리 동영상 만들려면 대여섯 시간이 걸려요. 심하게 본 건 백 번도 봤고.”
이홍렬TV의 목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감동이라도 보여주자, 안 찾아오면 어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무도 안 봐도 괜찮다, 풀벌이와의 추억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유튜브는 독하거든. 타이틀 독한 거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솔직히 그런 걸 쓰라면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말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하자. 늘 그럴 순 없어도, 재미가 없다 해도 메시지는 갖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입담 좋은 노장 개그맨이 유튜버로
유튜브가 독하다는 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자극적인 제목과 캡처 사진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 느낌이다. 실제 상당수의 인기 채널을 보면 먹방이라며 산더미 같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든지, 시시때때로 괴성을 지른다든지, 자극적인 춤과 억측과 욕설들을 쏟아내는 등 종종 기괴하고 무의미한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날것’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날것’을 찾는 것은 유튜브뿐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 방송들도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연예인의 가족을 구경하는 관찰형 예능이 그 증거다.
“요즘은 방송국에서 관찰 예능 기안을 올리지 않으면 통과가 안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걸 하면 당사자들은 힘들어져요. 집에 설치한 카메라 50대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거든요. 그런 예능을 하게 되면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짚어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출연자들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재밌게 하려면 여자는 잔소리하게 만들고 남자는 무식해 보여야 하니까요. 그게 페이크(Fake) 다큐거든요. 진실 반 거짓 반으로 된.”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튜브에는 가족에게 허락받은 자료만 올린다. 요즘 올리는 자료는 아이들은 열 살까지, 아내는 옛날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정도다.
얼마 안 남은 시간, 사랑하자
이홍렬에게 디지털은 가족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란 존재를 알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20여 년밖에 같이 못 지낸 거예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할 날도 그렇게 주구장창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나이로 보면 앞으로 15년만 살아도 여든 살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다.
“내일이라도 제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다 나와요. 정말 사랑 많이 베풀어야 하고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누굴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예요.”
디지털로 남게 된 어머니 목소리
이홍렬은 군대 있을 때 받은 어머니의 편지 다섯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철자법도 안 맞고 글자도 삐뚤빼뚤 썼다. 그러나 그 편지에선 소리가 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를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대화를 녹음했어요. 어머니는 대화 중에 ‘꿋꿋하게 살아야 해. 내가 너희들에게 빚 남긴 건 없으니까’라고 말해요. 지금은 그걸 CD로 구워서 내 동생 하나, 누나 하나, 나 하나 갖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학과 겸임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너무나 반응이 좋았다. 그의 과제가 없었으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없었을 뻔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게 다큐멘터리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면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라고 조언한다. 마침 디지털이 그것을 도울 수 있다. 다들 카메라는 의식해도 핸드폰은 의식하지 않으니, 살짝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쉬워요”
“유튜브가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딱 맞아요. 아이디어 발산할 데가 없었거든요.”
사실 이홍렬 나이가 되면 방송에서의 자리가 달라진다. 골든아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으레 ‘요새 왜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말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이라면 백 퍼센트 듣게 되는 말’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 든 연예인은 ‘송해 선생님도 아직 저렇게 하시는데 왜 안 보이느냐’라는 말도 듣는다.
“그렇게 묻는 분들은 제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죠. 좋아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말이에요. 처음에는 견뎌요, 뭘 좀 해요, 어쩌구저쩌구하죠.(웃음)”
사실 그의 요즘 스케줄을 보면 놀랄 정도로 바쁘다. CJ헬로TV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와 공연, 기부 행사까지 빼곡하게 잡혀 있다. 한 달 평균 10회 정도 강의를 한다.
“나눔이란 것이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워져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해왔는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 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이곳에서 활동한 제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게 해놓고 가고 싶은 꿈.(웃음)”
2005년부터 나눔 콘서트 ‘이홍렬의 락락(樂樂) 페스티벌’은 올해로 14회. 2007년부터는 기부 강의 프로그램 ‘이홍렬의 펀펀 도네이션’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강의는 이홍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현재 128회, 모두 기부 강의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인 그는 2012년 부산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국토종단을 통해 모은 모금액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남수단공화국에 전달했다. 자전거를 받은 남수단공화국의 한 아이가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이홍렬을 에티오피아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강의를 하니까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요.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해주면 답례 없이 주례를 봐주겠노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부부가 28쌍이나 된다. 이홍렬은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6307명을 파병했는데 그중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표가 또 추가됐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536명의 후원자를 발굴하는 거예요.”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어느새 9300명에 달했다. ‘열심히 하면 뒤에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해주는 숫자다.
“이제 만 명 넘으면 감사인사를 올려야지. 유튜버 선배들이 2년은 되어야 뭐 하나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구력을 쌓다 보면 댓글에 감동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힘들어도 그렇게 가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점점 거칠어지는 인터넷 방송 조류를 역행하는 ‘따뜻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홍렬이어서 가능한 이 실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독하고 무시무시한 것만이 아닌, 따뜻한 희망이 서려 있다는 걸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희소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가 디지털로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세계가 독한 세상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해본다.
‘브라보! 2018 헬스콘서트’가 지난 8일 서울 팔래스 강남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오후 2시부터 열렸다. 요즘 한창 인기 높은 TV조선 토크쇼 ‘인생감정쇼, 얼마예요?’에서 자주 보던 이윤철씨가 사회자로 나왔다. 특유의 친근감 넘치는 멘트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우려와는 달리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오후에 콘서트장은 만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사회자의 소개와 멘트로 첫 번째, 명사 초청강의는 99세의 석학이신 김형석 교수님의 강제(講題) ‘백세로 산다는 것’으로 첫 강의가 이루어졌다. 작년도 헬스콘서트에서도 뵈었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신 정정하고 건강하신 모습으로 단상에 오르시는 교수님을 뵈면서 존경의 마음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60세가 될 때까지는 학문에 대한 걱정으로 살았지만 60세가 넘으면서는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교수로써 살아야 끝까지 학교에 남을 수 있다.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은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보람이 있다. 나이 먹어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것이 좋다. 정년퇴직을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계기를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수님의 연세 99세이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좋아 보인다.
이어서 건강강의가 시작되었다. 자생한방병원 원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이돌 가수처럼 미끈하게 잘 생긴 한창 원장의 강의는 유머와 위트로 즐겁게 해준다. 겨울철 관절건강관리에 대해서 뻔 한 이야기지만 머리속에 콕콕 박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건강을 위해서 지켜야 한 6가지를 풀어준다.
① 담배를 끊어라. 흡연은 치매관계질환에 노출시킨다.
② 술을 줄여라. 지속적인 과음은 뇌건강 질환에 절대 좋지 않다.
③ 체중을 줄여라. 5~15%의 체중을 감량하면 50%의 성인병을 줄일 수 있다.
④ 잘 먹어라. 단백질 섭취와 적절한 운동이 근육을 만들어준다.
⑤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
겨울철 운동은 가급적이면 새벽에 하지 말고 낮시간이나 실내운동을 하라.
⑥ 잠을 잘 자야 한다. 하루에 6~8시간은 자는 것이 좋다.
불행은 남하고 비교하는 순간 생기게 된다. 자주 웃고 주변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라.
두 번째 건강강사로 나선 분은 예풍한의원 백태선 원장이다.
백태선 원장은 등장할 때부터 눈길을 끌었다. 의사라고 보기에는 비교적 살집이 풍부하고 남자답게 생긴 비주얼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에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는 ‘겨울철 혈관 건강관리’에 대한 강의는 시니어들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혈관 건강의 테마는 세 가지로 암, 심근경색, 중풍이었다.
모든 병이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일찍 찾아내어 치료하면 완치율도 높고 치료효과가 좋다. 그러나 혈관 건강은 전조증상이 없다. 혈관이 막혔을 때나 온 것을 안다. 그러니 주기적인 혈관검사를 통해서 예방이 중요하다.
겨울철은 혈관계통의 질환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어떻게 조심할 것인가?
① 겨울철에는 운동을 하지마라.
새벽에 일어나 운동할 때 사고가 많이 난다. 하려거든 낮 시간대 운동하라.
② 과격한 운동을 삼가하라. 혈압이 상승한다.
조절이 가능한 운동, 즉 걷기, 자전거 타기 물속에서 걷기등 규칙적으로
30~40분정도 하는 것이 적당하다.
③ 음식을 골고루 먹어라. 고기도 많이 먹어라.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의사들은 동물성 지방에 대한 경고차원에서 고기를 꼽는다. 기름을 제거하고 가급적 태우거나 굽지 말고 삶아서 먹되, 많은 량을 먹지 말라는 등의 권고를 한다. 그런데, 백교수님의 강의는 특이했다. 삼겹살도 가리지 말고 많이 먹으란다. 우리는 주식이 고기가 아니기에 가끔씩 먹는 육류는 괜찮다는 말에 모두들 박수로 환호한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오후, 헬스콘서트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실버치어리더들의 깜찍한 율동과 우리 동요 ‘나비야’를 관람하면서 많이 유쾌했다. 촉촉하게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가수 신계행의 ‘가을사랑’이 물씬 가을을 음미하게 해주었다. 가수 김목경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콘서트를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아직도 가을비는 단풍나무위에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가라앉지 않은 헬스콘서트의 잔상이 잔잔하게 머릿속에 맴돈다. 멀어져 가는 가을이 왠지 모르게 아쉬웠는데, 이번 콘서트를 통해서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은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하다. 브라보! 헬스콘서트!
동경
몇 달 전 ‘6월 백두산 여행단’에 자리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곧바로 예약했다. 백두산은 늘 마음속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백두산에 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여행단을 따라가기로 확정한 뒤 몇 달 동안 어서 빨리 백두산 등정 날짜가 오기를 기다렸다. 백두산은 어떤 모습일까, 천지를 보면 어떤 감흥이 있을까, 출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흥분이 됐다. 정상에 오르면 신명한 기(氣)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국과 북한을 통해야 갈 수 있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금방 왕래가 성사될 것처럼 분위기가 급변했지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지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중국을 통해서라도 갈 수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땅인데 중국이 자기네 땅이라면서 금을 그어놓아 속이 아프다. 우리가 주권을 잃었던 시기에 일본과 중국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맺은 ‘간도 협약’으로 중국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두산은 2750m의 고산이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을지 고민한 적이 있다. 고산병도 걱정되었다. 아직까지 그렇게 높은 산은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천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다 있다. 이번에는 중국 땅을 통해 올라가는 서파와 북파 코스에 도전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도 천지를 보기가 어려우니 날짜와 코스를 바꿔 두 번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등정 첫날 - 서파 코스
중국 땅에 도착한 지 사흘째. 드디어 백두산에 올라가는 날이다. 먼저 서파로 올라간다고 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셔틀 버스로 중턱까지 가서 거대한 건물의 산문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1440개 계단을 오르는데 비가 더 쏟아져 우비를 입고 우산까지 써야 했다. 정상에 오르니 넓은 전망대가 있었다. 그런데 천지 쪽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궂은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현지 사진사가 맑은 날 천지 배경 사진과 얼굴 사진을 합성해서 팔고 있었다. 백두산에 정상에 오른 것만으로 만족하고 하산해야 했다. 한반도 최고봉이라 해서 상당한 고생을 각오했는데 중턱까지 버스로 올라가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싱거운 면도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뒤에 로비에 걸린 대형 천지 그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내일도 천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아쉬움에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은 것이다. 가이드는 ‘천지를 보려면 5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백 번 올라가야 두 번 천지를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렵다’는 말도 전해진다 했다. 그러면서 내일 북파 코스로 올라가니 천지를 보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그만큼 천지는 신명한 존재라는 설명이었다.
등정 둘째 날 - 북파 코스
북파 코스로 도전하는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맑았다. 오늘은 천지를 꼭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천지가 워낙 고산이라 올라가봐야 천지를 볼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너무 오만을 떨거나 장담을 하면 부정 탈 수 있으니 겸손하게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분위기였다. 북파 코스는 전세 버스에서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10인승 봉고차로 갈아탄 뒤 거의 정상까지 지그재그로 운전하면서 가도록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숲 사이로 정상 부근이 보일 때마다 오늘은 천지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산 중턱쯤에서 전망대가 깨끗하게 보였는데 그렇게 보이면 틀림없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정작 정상에 오르니 하늘은 쾌청한데 묘하게도 천지 쪽은 짙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그런 풍경도 참으로 신묘하게 보였다. 세찬 바람을 참으며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기다려봤다. 줄지어 천지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함성을 질러대면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안개는 잠깐씩만 옅어졌고 그 순간도 수시로 변했다. 찰나에 천지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어렴풋이 본 것 같기는 한데 뚜렷이 본 것이 아니었다. 봤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너무 간절한 마음이 반영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천지를 보라고 주어진 한 시간을 다 소비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합 장소로 내려가려는데 일행들이 중간에서 필자를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쉽다고 했다. 오늘 천지가 보일 가능성이 높으니 점심은 물론 후속 스케줄을 포기하고서라도 더 기다려 꼭 천지를 보고 가자는 권유였다. 말은 안 했지만 모두들 천지를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 천지여!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앞줄에서 사람들이 “우와~” 하며 함성을 질렀다. 천지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뛰어올라가 보니 과연 천지가 앞에서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짙게 가려져 있던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극장 커튼처럼 걷히면서 천지의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눈앞에 펼쳐진 고고한 자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검은 물결,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고봉들 위에 아직 남아 있는 잔설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할 말을 잃고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천지를 바라봤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첫날 정상에서 무난하게 천지를 볼 수 있었다면 이런 감동은 밀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날도 날씨가 맑아 올라가자마자 천지가 보였다면 기쁨이 덜했을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데도 천지 쪽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그토록 애를 태우던 천지였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여전히 꿈쩍 않던 천지였다.
그런데 천지 보기를 거의 포기하고 내려가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적이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천지는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감탄스러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내 마음속 버킷리스트 하나가 지워지는 날이었다. 내려오는 길, 거대한 장백폭포와 계란을 삶아 먹을 수 있는 온천지대를 둘러봤으나 천지에 온몸의 감각을 빼앗겨버린 뒤라 어떻게 봤는지도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용어는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투명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본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이쪽에서 걸어가는 사람과 부딪칠 정도로 직진해 온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어느 한쪽이 비켜 갈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국, 약한 사람이 비켜 간다. 앞에서 오는 사람이 덩치가 큰 경우는 위협적이기도 하다. 걸을 때 좌우로 기우뚱거리면서 오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려는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자신만 직진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경우이다.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서거나 뒤 돌아서는 경우도 그렇다, 뒤에서 오던 사람은 관성이 생겨서 그대로 직진하려다가 충돌하게 된다.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차도에서 자동차가 그러다가는 추돌 사고가 일어난다. 그런 경우는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뒤 차가 책임질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 지점에 도달했는데 앞사람이 걸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뒷사람은 밀치고 가거나 부딪쳐야 한다. 전철을 가까스로 탔을 때 입구에 서버리는 사람도 있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서 그렇다고 본다.
비 오는 날 우산 때문에 생기는 투명인간 증후군도 있다. 우산을 펴는데 우산이 펴지면 어느 정도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펴고 보는 것이다. 우산이 탄성으로 펴지는 과정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젖은 우산은 물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는 일도 있다. 우산을 접고 걸어갈 때도 우산을 앞뒤로 내저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계단을 올라갈 때 그러면 뾰족한 우산 꼭지로 뒤따라 올라가는 사람의 얼굴에 상해를 입힐 수도 있는 일이다. 전철에서 서 있는 사람이 우산을 들고 있으면 흔들릴 때마다 위협을 느낀다.
배낭의 위험도는 이미 홍보가 되어 있다. 본인은 편하지만, 남들은 경계의 대상이다. 배낭을 메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서면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치거나 배낭의 플라스틱 고리나 지퍼 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피부를 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공간이 없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사람 중에는 물기를 바닥에 내젓는 사람이 많다. 막 들어오다가 그 물기가 자신의 팔이나 손에 뿌려지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바깥으로 밀어서 여는 문을 사용할 때도 문을 갑자기 밀치고 나가면 마침 그때 밖에 있던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안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조심스럽게 문을 밀치고 나가야 한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뜨거운 커피 한잔 뽑아 화장실도 가려다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경우를 몇 번 보았다.
사람은 움직이는 유기물이다. 그러므로 진로에 방해가 되거나 충돌할 경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배낭의 경우처럼 다른 경우에도 이런 점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례하다기보다는 모르고 있거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