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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 수유리 419 묘지 옆 한신대학교 정문 입구에는 문익환 목사의 시비가 있다. 네모의 유리 상자 속에 본인의 작품인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세로줄 시가 금관의 나비문양처럼 빛을 발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잠꼬대 하듯 소리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둘레를 돌아가며 빽빽하게 새겨진 뜻을 모은 지인들의 이름을 읽으니 금싸라기들이 금덩어리로 모여져 잠꼬대라는 언어를 최고의 예술품으로 형상화시켜 놓은 걸작임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그는 생전에 자기의 이상을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중얼거리며 분단시대의 산물인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지만 이 시비가 증명하듯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 때 모든 시인들의 연인이었던 고정희 시인도 이 학교인 한신대 출신이다. 전남 해남군 송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 과정을 거쳐서 이 학교에 입학을 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인 김재준, 문익환 같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졸업한 후에도 사회 부조리와 싸우며 현실 인식과 비정한 역사의 증언을 담은 목적시를 치열하게 썼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고독과 눈물의 정서로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서정시를 쓰다, 1991년 지리산 등반을 하다가 실족사 했다. 그녀의 넋을 위로라도 하는 듯 여름철새들의 잠꼬대가 교정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인 란 시를 음미해보자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맛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시인의 시 전문 형상화가 최고의 예술로 마치 신라의 왕을 만난 듯 황홀경에 빠져 넋을 놓고 귀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시비에 취해 나도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읖조려본다. 금관의 언어 문익환 당신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4.19 묘지 뒤쪽 한신대학교 정문에 금관 같은 시비로 환생했습니다 너무나 정교하면서도 미로 같은 언어의 구도, 수런거리는 금관을 연상케 하는 시비입니다 당신의 잠꼬대는 당신이 듣지 못합니다. 나의 잠꼬대는 내가 듣지 못합니다. 반드시 타인을 통해서만 나의 잠꼬대는 들을 수 있듯이 당신의 잠꼬대는 우리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잠꼬대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늘 갈망하던 무엇인가가 당신의 영혼 속에 잠재해 있다가 당신도 모르게 잠꼬대로 튀어 나온 것입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신라 천년 문화의 상징이 한신대 정문 입구에 화려하고도 중후하게 되살아나 역사를 증언하듯 금빛을 반사하며 잠꼬대로 두런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알아듣지 못해도 뭉쿨한 이 감동 내 안의 강을 뜨거운 피가 휘돌아 흐르는 느낌입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두런거리는 금빛 언어들, 참 신기 합니다. 문익환 당신은 늘 이념의 붉은 딱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살다가 우주로 귀환한 뒤에야 금싸라기 땀방울들이 한데 모여 당신을 부활시켜 놓았습니다. 둥근 세계인 그 곳에서도 잠꼬대 같은 언어가 통용 됩니까? 당신이 남긴 잠꼬대의 금관은 우리의 발길을 잠시 머물게 합니다. 사각의 유리 안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살랑거리듯 신라 천년의 금관에 노랑나비 나풀거리듯 언어들의 고요한 속삭임이 들립니다. 저 금관은 아무리 써 보고 싶어도 호흡이 있는 자에겐 불가능 합니다. 발치에 있는 315기의 영령이 머리를 맛댄 4.19탑 그 오랜 시간의 표면에서 금빛 언어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햇살이 저들에게 언어의 금관을 씌워 놓은 것일까요. 잘 익은 살구처럼 햇빛을 받으면 더욱 황금빛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갈망하던 세계, 그 미완의 이상을 후배들이 완전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으니까요. 너무 일찍 떠난 고정희 시인도 모교인 당신 곁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잠꼬대하듯 시를 두런거리고 있습니다. 수유리 수유리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여울목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기를 갈망하는 그대여. 500년 늙은 소나무가 내려다보고 있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생가보다 모교인 한신대학교 교정에서 419영령들과 함께 비정한 역사의 증언과 더불어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고독한 눈물의 정서를 시로 승화시키며 구도자처럼 살다가 지리산에서 실족사한 여루시인이여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당신의 뒤로 오늘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릅니다.
- 2017-07-3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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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인생 길게 살자
- “나쁜 포도주를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서양인들이 노후를 보내는 삶의 철학 중 하나다. 마음에 와 닿는다. 공감이 가는 말이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필자는 이 말에 매료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좋은 표현이다. 장수시대란 말이 떠들썩한 오늘날을 산다. 실제 주변에 보면서 수명이 많이 늘어난 사실은 누구나 긍정한다. ‘장수시대’, 그것도 120세 시대. 130세 시대의 도래란 말은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화두가 되고 있다. 억겁의 우주 시간대에 견주면 100세도 순간의 시간, 찰나에 불과하다. 우주에 비교하지 않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음이 느껴진다. 필자는 60대 중반을 넘어섰다. 지난 세월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엊그제 같다. 100세를 산다고 가정하고 남은 시간을 계산하면 30년 정도다. 지금까지 산 세월의 절반에 불과하다. 길게 보여도 과거에 견주면 순식간에 흘러갈 것이다. 때로는 하루가 지겨울 때도 있겠지만, 30년이 지난 시점에 생각해보면 빠르게 지나간 세월일 테고 다시 되돌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필자에게도 “100세 시대가 적용될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어제 만났던 사람과 오늘 아침에도 안녕 하고 인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건강하던 젊은이가 어느 날 갑자기 황천객이 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요소가 많다.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우리 모두는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이다. 설령 장수해도 하고 싶은 일을 자력으로 할 수 없는 삶이라면 의미가 없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동감한다. 인생이 짧다고만 여긴다면 닫힌 생각이 아닐까? 인생이 짧기에 순간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서양인들의 삶의 철학 “나쁜 포도주를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이야기에 공감이 가고 매료되는 이유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아무렇게나 살 수 없음이다. 일분 일초가 아깝다. 나쁜 포도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근래에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신조어가 인기라고 한다. “한 번뿐인 내 인생 즐겁게 살자”라는 의미다. 필자는 하고 싶은 꿈을 이루는 삶을 갈구한다. 반생은 가족이나 직장에 헌신하며 살았다. 생존을 위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필자의 인생은 늘 뒷전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인가? 후반생은 잊힌, 뒷전으로 미뤄둔 자기 인생을 되찾아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 장수시대라고 야단법석이지만 실상은 짧은 인생이다. 그래서 의미 있고 보람 있게 보내야 한다. 서울미술관 설립자는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짧은 인생을 길게 살자.” 서양인의 생활 철학과 일맥 상통한다. 길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자기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꿈을 이루는 일이다. 성인 남녀의 86%가 꿈 없이 살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제 생업으로 뒷전에 감춰뒀던 꿈을 끄집어내자. 꿈이 작든 크든 상관없다. 죽기 전에 이뤄보자. “이제 죽어도 원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살아보자.
- 2017-07-1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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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기 좋은 날
- 아침 이슬에 들녘이 싱그럽다. 연둣빛 칡 잎이 진초록으로 서서히 바뀌는 여름의 길목이다. 바람도 잔잔하다. 지난밤 볏논에서 요란스레 울던 개구리 소리, 바람결에 실려오는 산 아랫마을의 개 짖는 소리 장단 맞추고 별들과 하현달 친구 되어 놀던 달팽이 한 쌍 새벽녘에 사랑이 무르익었나보다. 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칡 잎 자락에 꼭 껴안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하룻길을 떠날 태양도 부끄러움에 동산 너머에서 살며시 빛줄기로 시샘을 한다. 이른 잠에 깨어난 뻐꾸기 저 멀리 산자락 어둠 걷힌 나뭇가지에서 짝을 찾아 구슬피 울어 운다. 간혹 주변 산책길 길손도 모르는 척 지나간다. 아침 먹거리를 찾는 백로도 사랑에 빠진 달팽이 위 하늘을 휙 날아간다. 자연은 이렇게 새 생명의 탄생을 아우르는지 모른다. 우주는 또 한 세대를 이어간다. 작은 생명체에서 우주의 영속성을 본다. 달팽이 사랑의 모습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필자의 손도 엄숙해진다. 1년에 한 번 오는 기회의 포착 순간이다. 숨소리 멈추고 셔터 소리를 낮춰 한 컷의 이야기를 렌즈에 담았다. “사랑하기 좋은 날”이다.
- 2017-07-1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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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차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약한 존재지만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가냘픈 존재이기는 하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양극을 공유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존재, 어쩌면 인간은 존재 자체로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2원적인존재인 것 같다.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여 순리에 맞춰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용의 삶을 사는 방법인 것 같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방향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 할 만큼 때로는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사는 내내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학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고 아는 만큼 지혜롭게 의사결정을 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인생2막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은 인생1막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학창시절만큼의 오랜 시간은 아니더라도 인생 2막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학습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교육이 한 인간을 양성하기 시작할 때의 방향이 그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노후로 가는 여행을 위한 최상의 양식이다” 고 말했다. 굳이 이런 철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교육과 학습의 필요성을 절실히 삶을 통해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자기 뜻에 따라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서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요약하여 한 마디로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다”라고 했다. 둘째 인생길을 안내 해주는 멘토가 필요하다.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도 항해할 때 등대처럼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스승이나 멘토가 필요하다. 훌륭한 멘토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전과 같은 책이 될 수도 있다. 직접 경험에 의해 지혜를 터득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현명한 사람은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삶의 지혜를 깨우칠 수 있다. 가장 훌륭한 멘토는 자신과 코드가 맞는 선지자가 아닐까 싶다. 함께 공감하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나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서 이를 깨우쳐주고 가이드 해주기 때문이다. 멘토는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마치 나침판이나 등대처럼 배가 옳은 방향으로 바로 항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 사물의 본질을 알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리, 배, 코 등 어느 일부분만 확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파스칼처럼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다. 삶의 맛을 북돋우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와중에서 어떻게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꽃밭에 있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함께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꽃들은 종류가 다르지만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서로 다른 개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장점을 존중하면서 단점을 보완하여 함께 공존해 나갈 수가 있지 않을까? 만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으니 따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꽃밭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약육강식의 자연의 생존법칙에 따라 항상 불안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차이란 서로 다름이지 다르다고 적은 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결코 잘못된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삶은 발전이고 평화로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다른 악기들이 다른 음으로 화를 이루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트럼펫 소리가 아름답기는 하나 혼자 내는 소리는 단조롭다. 서로 다른 악기들이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삶을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공통적인 목적이 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 차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때 미국과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그런 사고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이는 한마디로 중용의 삶과 상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차이의 화합된 순열과 조합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2017-07-0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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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사가 말하는 햇볕과 건강의 상관관계
- 불교에서 우주의 4대 구성요소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우주의 구성 원소를 물, 불, 공기, 흙으로 봤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건강하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이 4가지라 할 수 있다. 이번 달에는 불, 그중에서도 햇볕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태양은 밤낮과 사계절을 주관한다. 해가 뜨면 따뜻해지면서 밝아지고, 해가 지면 서늘해지면서 어두워진다. 태양의 고도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하루와 1년의 주재자는 태양이다. 지구상의 생물은 이 리듬에 맞춰 잠을 자고 활동하는데, 이 리듬이 깨지면 병이 생긴다. 한의학의 원전인 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밤낮의 리듬에 맞춰 사는 것이 건강과 치료에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하면서 태양의 리듬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태양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옛날에는 태양의 흐름에 맞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떠야 일어나 활동할 수 있었으며, 해가 지면 잠들어야 했다. 기름을 써서 불을 밝히는 것은 비싸서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태양의 흐름에 맞춰 살기 힘든 시대다. 인공조명이 있어 밤새워 활동할 수 있고, 그러기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실내에 있으면 밖이 어두운지 밝은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지금이 몇 시쯤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는 반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자연에서 완전히 멀어져버렸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모든 자연이 태양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도록 설정되어 있듯, 인간도 태양의 흐름에 맞춰야 건강할 수 있다. 교대근무, 야간근무, 태양이 들지 않는 지하근무를 오래하면 몸이 나빠진다. 몇백만 년에 걸쳐 누적된 유전자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땅의 물은 햇볕을 받아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물-수증기-비의 순환은 지표면에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식물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물을 원료로 하고, 햇볕을 매개체로 해서 광합성을 한다. 동물은 이런 식물을 먹고 산다. 그리고 척추동물들은 햇볕을 받아 털이나 피부에서 비타민D를 합성한다. 비타민D는 뼈를 튼튼하게 하기 때문에 척추동물은 반드시 햇볕을 받아야 한다. 동물인 인간도 일종의 광합성을 해야 한다. 야행성 동물들은 햇볕을 쬐지 못하기 때문에, 비타민D를 합성한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보충한다. 비타민D가 부족하면 뼈가 약해지고, 불면증, 우울증이 생긴다. 그래서 태양의 고도가 낮은 북유럽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광욕을 한다. 아토피피부염이나 건선 또한 비타민D 부족과 관련이 많다. 땀이 쉽게 많이 나는 것 또한 비타민D 부족과 관련이 있다. 태양광선은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으로 나눌 수 있다. 적외선은 사람의 몸을 데우고, 식물은 가시광선으로 광합성을 한다. 땅에서 사람이 받는 자외선은 UVA, UVB로 나눌 수 있는데, UVA는 유리창을 통과함은 물론 피부 깊숙이 침투해 주름과 기미, 주근깨를 만들면서 피부를 노화시킨다. UVB는 유리창을 통과하지 못하며 각종 염증과 피부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닷가나 높은 산에 갔을 때 피부가 벌겋게 익는 것은 UVB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외선은 안 좋기만 한 것일까? 자연은 지구라는 환경에서 최적화되도록 진화되었기에 자외선을 포함한 햇볕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요소다. 물론 지나치면 피부암, 기미, 주근깨가 생기기도 한다. 뭐든 적당해야 한다. 현대인 특히 한국인은 비타민D 결핍이 심하다. 햇볕을 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 노동자가 매일 햇볕을 쬐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창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쬐는 시간 말이다. 비타민D가 부족하면 뼈가 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며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 지금은 자외선 과다를 걱정하면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를 때가 아니라, 자외선 부족을 걱정해야 할 때다. 주 3회 오전 10시~오후 3시 사이에 20분 정도 햇볕을 쬐는 것이 좋다. 그런데 도시는 미세먼지, 공해, 스모그 등으로 UVB가 지표면에 잘 도달하지 않는다. 바닷가나 고산, 물가가 UVB를 받기에 더 적합하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UVB가 약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에 충분히 햇볕을 쬐는 것이 좋다. 낮에 햇볕을 잘 받으면 밤에 심해지는 병증이 호전된다. 밤에 잠 못 이루는 불면증, 밤에 얼굴로 열이 후끈 올라오는 갱년기 조열증, 밤에 심해지는 천식, 밤에 심해지는 두드러기나 아토피피부염 등이 심한 사람은 낮에 햇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낮에 기운이 없고 심해지는 증상은 밤에 잠을 잘 자야 한다. 첫째, 햇볕은 아토피피부염, 건선 등 피부병과 과민성장증후군, 대장암 등 대장 병증, 알레르기비염, 천식 등 폐 병증을 잘 치료해준다. 한의학적으로 폐, 피부, 대장은 같은 그룹이다. 척추동물이 햇볕을 받아 털과 피부에서 비타민D를 합성하는 것은 햇볕이 폐, 피부, 대장을 활성화시켜준다는 의미다. UVB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햇볕 전체의 효과다. 요즘은 비타민D를 건강기능식품으로 많이 복용하고 있는데, 피부를 통한 합성보다는 효능이 떨어지며 폐, 피부, 대장을 활성화하는 힘도 약하다. 둘째, 뼈가 약해지는 병증, 갱년기, 성기능쇠약, 자궁암, 전립선암, 골다공증, 성장에 좋다. 한의학적으로 뼈와 생식기는 같은 그룹이다. 인체를 깊이에 따라 나누면 뼈가 가장 깊은 부위이고 그다음으로는 살, 피부, 털의 순서다. 건강할 때는 뼈가 단단하고 농축되어 있지만 병들거나 노화되면 뼈의 골수가 몸 밖으로 새어 나온다. 단백뇨, 당뇨, 땀이 쉽게 나는 증상, 탈모 등이 그 사례다. 햇볕은 뼈를 단단하게 해서 몸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막아준다. 단전 회복의 의미도 있다. 셋째, 심장에 좋다. 혈압을 낮춰주고 혈전이 생기는 것을 억제해준다. 심장병과 뇌졸중을 예방해주는 효과도 있다. 우리 몸에서 열을 만들어내는 근원은 심장이다. 즉 우리 몸의 태양은 심장이며, 그 근원은 하늘의 태양이다. 넷째, 우울해서 생긴 병증을 잘 치료해준다. 우울증, 유방암, 불면증 등에 좋다. 습기가 적은 화창한 날에는 우울증이 호전되는데 햇볕의 역할 때문이다. 한의학적으로 표현하면 기가 울체된 것을 풀어준다. 다섯째,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고 해독 효능도 있다. 햇볕은 황달 등 간에 무리가 갔을 때 해독해주는 힘이 있다. 최철한(崔哲漢) -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2017-06-3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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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여름이구나!”
- 계절은 색깔을 지닙니다. 우리 다 아는 일입니다. 봄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연한 녹색을 띨 때부터 스미는 것 같습니다. 여름은 아예 온 세상이 진한 녹색입니다. 그러다가 가을이면 서서히 황갈색으로 대지가 물들여지면서 마침내 겨울은 다시 온 세상이 흰색으로 덮입니다. 당연히 이런 색칠은 사람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철이 서로 다른 색깔로 채색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계절은 이에 더해 제각기 자기 소리를 지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봄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를 냅니다. 조심스러운 희망이 흐릅니다. 겨울은 아예 침묵입니다. 고요를 잃은 겨울은 겨울답지 않습니다. 가을은 현의 낮은 울림 같은 소리를 냅니다. 고마움이 거기 실립니다. 그리고 여름은 작약(雀躍)하는 환성입니다. 삶의 약동이 그대로 자기를 소리칩니다. “와, 여름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외칩니다. 지나치게 전원적인 정서라고 마땅찮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계절을 간과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도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여름에 김장김치를 먹고(이런 묘사가 얼마나 소통이 될지 불안하지만), 한겨울에 빙수를 사먹는 세상인데 철을 일컫는다는 것은 낡아도 한참 낡은 농경사회의 의식을 드러낸 것일 터이니까요. 그렇지만 계절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요. 봄은 여전히 추위를 물리칠 만큼 따사롭습니다. 여름은 무덥고요. 가을은 서서히 을씨년스러워지는 계절이고 겨울은 모질게 춥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계절을 보내고 맞습니다. 기다리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걱정하기도 하고 무사하게 넘겼다고 안도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철의 바뀜조차 알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철부지 아니고야 철을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여름입니다. 온 세상이 싱싱하게 짙푸른 색깔로 뒤덮인 정경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고 온갖 곳에서 터져 나오는 “와, 여름이다!” 하는 환성이 합창처럼 들립니다. 소리만이 아니라 모습조차 집 안에서, 길거리에서, 들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보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갑자기 서둘러집니다. 나도 어서 배낭을 찾아 메고 어디론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바다여도 좋고 산이어도 좋습니다. 아니, 벌써 나는 여름의 한복판에 이르러 있습니다. 나는 동무들과 고추를 다 내놓고 내에서 미역을 감고 있습니다. 여름이니까요. 소쿠리를 들고 모래무지나 미꾸라지를 잡으러 동네 형들과 나갔는데 나는 물속 풀숲에서 뱀을 덜컥 손으로 쥡니다. 여름이니까요. 원두막 위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주신 참외 세 개 중에서 두 개를 먹고는 나머지 한 개를 배가 불러 마저 먹지 못해 얼마나 아쉬운지요. 가져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다가 외할아버지를 따라 대천 해수욕장에 갔을 때의 그 황홀한 바다와 파도와 황혼, 모래사장과 해파리와 조개껍질들, 그리고 천막 안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설친 잠. 돌아와 검은 살갗이 끊임없이 벗겨지는데 그렇게 온몸이 햇볕에 탔는데도 아프지 않았느냐는 누님의 물음에 “아니!”라고 나는 대답합니다. 마치 영웅이듯이. 여름이니까요. 세월이 가도 여름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내 녀석 둘과 네 식구가 배낭을 짊어지고 포항에서 속초까지 해안을 따라 갑니다. 바다가 보이는 민가에 들러 천막을 옆에 치고 물과 반찬을 얻어먹으며 그렇게 열흘을 걷고 타고 쉬고 자곤 합니다. 여름이니까요. 우리는 설악산에 올라 겹겹이 쌓인 능선을 향해 “야호~!”라고 외쳤고, 속초에서는 바다의 끝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삶의 꿈과 열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여름이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미꾸라지 잡던 형들도 없습니다. 누님도 없습니다. 원두막도 없고, 외할아버지도 계시지 않습니다. 산에서 바다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사내 녀석들은 이제 나이가 쉰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기억조차 투명하지 않습니다. 연대기조차 흐려져 30년 전인지 40년 전인지 사뭇 헷갈리기만 합니다. 한데 여름이 옵니다. 여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질 까닭이 없습니다. 계절의 바뀜은 우주의 운행인걸요. 여름의 환성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귀를 막아도 들릴 여름의 함성이 다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 몸조차 들썩이게 합니다. 곧 냇가로, 바다로, 산으로 나갈 듯합니다. 그런데 햇볕에 이리 눈이 부실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색안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따갑게 더울 수가 없습니다. 토시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창피해집니다. 배낭에 이것저것 넣고 짐을 꾸려야겠는데 벌써부터 어깨가 아픕니다. 신발을 찾아 신어야겠다고 하는 순간 발이 지레 무겁습니다. 갑자기 함께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함께 평생을 살아온 내 반쪽도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도 건강도 따로따로인 채 함께 살아온 세월이 여름 나들이를 권할 만큼, 아니면 사양할 만큼, 서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여름이 서서히 낯설어집니다. 여름인데, “와, 여름이다!”라는 환성이 천천히 멀어지면서 나는 마침내 “아, 여름이구나!” 하는 탄성을 조금은 시무룩한 음조로 발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 슬픈 정경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살아간다고 하는 것, 나이 먹으며 인생의 길을 걷는다는 것, 생각하면 계절의 지냄과 다르지 않은데, 이미 우리는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어도 봄도 여름도 우리 삶의 깊은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을마저 겪으며 그 깊은 끝자락에 이르렀고, 겨울조차 현실인 오늘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세월은 계절을 내재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말투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와, 봄이다!”가 아니라 “오, 봄이구나!” 하면서 내 봄을 회상하고, 그러면서 그 봄이 이어 펼쳤던 내 여름을 다시 회상하면서 “와, 여름이다!” 하기보다 “아, 여름이구나!” 하면서 그것이 빚은 내 가을을 되살피고, 이윽고 그 가을에 이은 겨울의 고요 여부를 헤아려야 하지 않을는지요. 환성의 언어를 탄성의 언어로 조용히 다듬을 필요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한 강가에서 물을 바라보다가 “와, 여름이다!” 하는 환성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 자식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식에게 자기가 집을 보아줄 테니 마음껏 여름을 즐기고 오라는 약속을 기어이 받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자식 집에서 보낸 그 여름이 이제까지 지낸 여름 중에서 가장 행복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짐작이 됩니다. 사는 모습 제각각인데 어떻게 사는 것이, 어떻게 여름을 보내는 것이 좋은 것인지 판단할 절대적인 척도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가을이나 초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와, 여름이다!” 하고 소리치고 덤벙거린다면 쑥스러워질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환성은 크게 외쳐져야 합니다. 여름을 사는 친구들에게요. 여름은 생동하는 삶의 푸르디푸른 절정이니까요.
- 2017-06-2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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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초원과 말
- ‘몽골’ 하면 내 머리엔 초원과 말이 떠오른다. 요즘이 그렇다.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동산과 구릉에는 긴 겨울을 이겨낸 풀들의 환호성이 온갖 색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 꽃의 색과 들풀의 향기는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만이 안다. 멀리 소문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말을 타고 들어가 보는 것이다. 몽골의 부드러운 구릉을 거닐고, 개울을 건너는 데는 말 이상 좋은 게 없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풀밭은 그 색과 향기로 어지럽다. 사륜구동차로 언덕을 올라 원하는 들판 가운데 서서 사람 키 높이로 사방을 둘러볼 수도 있지만, 원하는 곳으로 말을 몰아 말 등에 앉아 느끼는 각도와는 사뭇 다르다. 수시로 일렁이는 바람에 묻어오는 허브 향이 감지되면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리게 된다. 물론 몽골에도 깊은 숲과 높은 산이 많지만, 지금 얘기하는 몽골 초원과 연결된 부드러운 산에는 대부분 땅바닥을 기는 발목 높이의 풀과 꽃들이 땅을 촘촘히 덮는다. 가끔 키 큰 풀이 눈에 띄지만 커봐야 무릎을 넘진 않으니 두세 살배기 아기와 손잡고 걷기에도 아무 무리가 없는 꽃동산이다. 평화 그 자체가 가득 전해진다. 더구나 조금만 들어가면 주위에 아무도 없다. 초록 잎에 적당한 높이의 색과 모양의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저절로 입에서 새어 나오는 감탄사와 신음을 막을 수 없다. 견디지 못하고 말 세우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다 결국 말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말 등에서 덩어리 덩어리로 보기 아까운 군락으로 피어 있는 가냘프고 부드러운 녀석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다. 초원에 들어서면 꽃은 작고 시간은 많다. 지금 몽골의 초원은 어디라도 바닥이 깨끗해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엎드릴 수도 있다. 흙이 옷에 묻지 않을 정도다. 가까이 볼수록 체취가 느껴진다. 내려다볼 때와 눈높이를 맞추었을 때의 모습 차이만큼 심장이 귀 앞에서 뛴다. 사진을 하며 알게 된 이 땅에 어울리는 말이 있다. “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고 싶다. “꽃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보고 하늘을 본다는 것이다.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꽃에는 같은 꽃이라 해도 비교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바람이 불면 제각기 언제라도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하나같이 당당하다. 아무리 작은 꽃도 우연히 핀 것은 없다. 만약 저 작은 한 송이가 없었다면 이 우주는 그만큼 완성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꽃은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이다. 추상의 끝자리인 바람과 냄새에 어질병이 인다. 말에 올라타 ‘추~’ 바람 소리를 내며 튼실한 말 엉덩이를 때린다. 말을 달리게 할 때는 어지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때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색과 향을 맡기 위해 잠시 바람을 쐬는 공간이 시작된다. 어느 만큼의 속도가 지나면서 눈썹이 느껴지며 말과 바람을 탄다. 귀에는 바람을 넘어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후끈한 열기가 안장으로부터 올라온다. 말은 더 달리려 한다. 그때 능선 오르막길로 몰면 말의 거친 숨소리와 땀으로 젖어드는 공기가 느껴진다. 호흡을 조절하며 올라선 능선 꼭대기에 서서 바라보는 초원의 하늘과 구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우 말 하나의 위치만큼 높아졌을 뿐인데 그 풍광은 많이 다르다.
- 2017-06-1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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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탄생한 ‘흥보씨’
- 지난 4월의 첫 번째 금요일은 아내와 오랜만에 저녁 데이트 하는 날이었다.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창극 흥보씨( Mr. Heungbo)를 함께 보러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의 푸름과 꽃들로 봄이 무르익어가는 아름다운 장충단 공원길을 걸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영면한지 5년 후 고종은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직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 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단골식당이 된 ‘다담에뜰’에서 식사와 차를 한잔하고 손을 잡고 걸어서 달오름에 올랐다. 다담이란 불가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는 다과라는 뜻이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우리에게 창극이 있다. 판소리가 한 명의 소리꾼이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라면 창극은 여러 명의 소리꾼들이 역할을 나누어 노래하고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다. 지난해 해오름에서 창극 향연을 처음 함께 본 후 아내와 나는 창극을 좋아하게 됐다. 창극 흥보씨는 한 마디로 우리의 전통 흥부전(흥부가)을 집으로 치면 대들보와 기둥만 남기고 완전히 현대판 흥부전으로 바꾼 새로운 창작이었다. 우리 내외가 창극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었지만 아내도 아주 재미있게 잘 봤다고 만족할 정도로 좋았다. 흥보씨의 새로운 버전으로 창작 스토리를 소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은 것들이 예상을 불허하는 것들이었다. 첫째 흥보와 놀보의 아버지 연생원은 아이를 갖지 못해 흥보는 길에서 주워와 길렀다. 가문이 흥하라고 흥보, 아내가 바람을 피워 뒤늦게 출산한 놀보는 귀한 자식이라 놀랍다는 의미로 놀보라 이름 지었다. 이런 출생의 비밀로 시작된 이야기는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기 시작 하였다. 흥보가 형, 놀보가 아우였으나 착한 흥보는 아우를 위해 계약서 작성을 통해 형과 아우를 바꾸어 생활하는 부분도 연출가의 기획이다. 둘째 강남의 제비는 오늘날 바람둥이 제비로 묘사하고 제비가 갖다 준 씨앗은 박 씨보다 찬란한 구슬 같은 씨앗이었다. 호랑이가 말을 하고, 우주인이 나타나고 흥보의 처로 등장하는 이소연의 가난타령, 제비 유태평양의 제비 노정기, 무대장치, 보리수 나무의 등장이 특이하였다. 그럼에도 무대장치의 핵심은 칼, 몽둥이, 톱의 기능을 한 부채였다. 그 씨앗이 물질적인 부를 갖다 주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안정을 갖다 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점이 오늘날 물질보다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 같았다. 셋째 창극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통상 전래 판소리와 같이 권선징악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노래와 춤을 삽입하여도 관객들에게 친근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극 전체를 흐르는 비움의 철학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가난하더라도 바른 생활을 하는 흥보가 원래 형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스토리다. 마지막으로 창극 흥보씨가 재미있는 창작극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흥보와 놀보 역을 맡은 두 주인공의 뛰어난 연기, 예측을 불허하는 극본 과 연출, 캐릭터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해준 전 단원들, 그리고 우주의 신비스러움과 판소리의 맛을 살리면서도 젊음과 경쾌함을 선물한 음악 감독의 합작의 결과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서양음악과 춤을 차용하여 창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극이었다. 이런 훌륭한 창극단이 있는 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창극이 서양의 오페라처럼 세계화로 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흥부를 흥보로 놀부를 놀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정확한 정설은 아직 없는 것 같아 기획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2017-05-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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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 <히든 피겨스>
- 흑백 갈등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는 많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영화들을 보는 일은 불편하다. 마치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것처럼 백인들의 원죄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서서히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오바마를 배출한 자부심 때문은 아닐까? 하긴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소재를 1960년대 그 시절에 다뤘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으리라. 는 그 시대의 흑백 문제를 21세기식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훨씬 관대하고 낙관적인 시각을 보여줬다. 이 영화는 오히려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에도 감정의 앙금이 없이 산뜻하다. 는 1960년대의 냉전시대에 벌어졌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을 배경으로 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선언을 기폭제로 불붙은 이 경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NASA 프로젝트에 숨겨진 천재들의 실화가 골격이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백인 남성들의 천국인 NASA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세 여성의 이야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바로 수학 천재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엔지니어 메리 잭슨(자넬 모네)이 그들이다. 흑백 문제를 다룬 영화가 늘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현실과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 살아가는 세 흑인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첫 시퀀스부터 우리의 예상을 깨뜨린다. 세 여성이 출근길에 차가 고장 나 백인 경찰이 등장한다. 익숙한 장면을 예상하던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경찰은 그녀들을 에스코트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탓에 이야기는 지루하다. 극적인 장치 없이 자잘한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예컨대 당시 흑백분리 화장실 때문에 늘 800m나 뛰어가서 일을 봐야 했던 차별을 캐서린이 항의하자 잘생긴 상사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NASA에서 모든 사람의 소변 색깔은 똑같아!” 같은 멋지고 속 시원한 대사로 상황을 수습한다. 화장실 가는 장면의 긴박감을 경쾌한 음악으로 승화(?)시킨 점은 데오도르 멜피 감독의 재치다. 물론 극적인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 특히 흑인은 회의석상에 참석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깨고 천재를 알아본 알 해리슨은 캐서린을 회의에 참석시킨다. 그녀가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수학 공식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 칠판 꼭대기부터 써내려가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전 퍼스트레디인 미셀 오바마의 “‘절대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라.’ 이것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라는 평이 이 영화의 존재 가치를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진보적인 메시지가 이 영화를 아카데미까지 끌어올리고 결국 NASA 최초 흑인 여성 책임자이며 프로그래머 역을 연기한 옥타비아 스펜서에게 여우조연상이 돌아가는 성과를 가져다줬다. 그러나 분명 감동적인 실화임에도 여전히 미국 지상주의적 메시지가 마음에 걸린다. 또한 “이론이 아닌 숫자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 수학은 항상 믿음직하죠”와 같은 대사는 아쉽다. 오히려 마지막 엔딩이 문득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치열했던 그들의 삶은 정작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학 천재라는 빛이 가려지고 만다. 마치 에서 칼을 휘두르며 덤비는 적에게 당황하는 척하며 총을 발사하는 해리슨 포드의 유머처럼, 시대가 바뀌면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비극과 분투도 한바탕의 소극처럼 보인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실감 난다.
- 2017-05-2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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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이따금 별이 다녀간다
-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 2017-05-02 1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