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는 필자의 영혼이 가장 순수하던 시절이었다. 그보다 어린 시절은 철이 없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힘들게 거센 파도와 싸워야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처자식을 위해 밤낮없이 뛰고 또 뛰었다. 이제 흰 머리 희끗희끗한 이순의 나이가 되어 생각해 본다.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맑은 영혼의 시기에 습득했던 한권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 전율을 느끼며 보았던 한 권의 책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손때 묻은 책 한권, 그것은 다름아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썼다는 “명상록‘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오현제 중 한 사람으로서 로마제국의 번성기를 누렸던 시대에 마지막 황제였다. 재임 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는 전쟁터에서 틈틈이 자신에게 보내는 내용의 글을 써서 후대에 ’명상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도 전쟁하는 전쟁터에서 일기를 쓰셔서 ’난중일기‘라는 책으로 귀중한 자료로 남겨졌듯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총 12권의 책을 남겼다. 평범한 사람도 책 한 권 쓰기가 어려운데 그것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글을 남겼다는 자체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 12권의 책 속에 인생의 길이 담겨 있어.
12권의 책은 배움, 인생, 운명, 죽음, 인간의 본성, 자연의 원리와 법칙, 우주의 지배적 이성, 선과 악,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 사회적 존재 영혼에 대하여, 도덕적 삶에 대하여 등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서요 나침판의 역할을 하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필자가 감명을 받았던 수많은 글들이 있지만, 그중 몇 문장만 요약해 본다
제4장 죽음에 대하여
출생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자연의 신비이다. 출생은 원소의 결합이며, 죽음은 바로 원소의 분해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육체 구성의 논리에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죽은 후에도 모두 소멸하지 않는다면 대기는 태초 이래의 그 엄청난 영혼들을 어떻게 수용해 왔을까? - 중략- 그 영혼들은 대기 속에서 잠깐 머문 후에 불로 변하여 우주의 창조적 본원(本源)으로 돌아가, 다른 영혼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눈살을 찌푸린 채 진찰하곤 했던 많은 의사들 역시 죽어갔음를 기억하라.
당신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도 하나씩 죽어갔음을 기억하라. 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묻어 주었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파묻혔으며 그 사람도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무덤에 묻힌다. 요컨대 인생이 얼마다 허망하고 보잘것없는 것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피가 돌았는데 내일이면 미라나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얼마 안 되는 지상에서의 시간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편안한 마음으로 당신의 여정을 마치도록 하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원헤정 옮긴 ‘청소년 명상록’ 글에서 >
⃟ 황제가 전해준 감동
동양의 진시황은 영생불멸하고자 온 신하를 세상에 보내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고 배웠다. 원래 사람이란 삶에 대한 욕구가 있어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떠한 약을 구해 먹든지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고 싶어 한다. 평범한 범인들의 모습이 이럴진대 높은 권력을 소유한 권력자들은 어땠을까? 진시황처럼 그 오랜 권력과 삶을 간구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텐데 로마제국의 황제는 우리의 그런 편견을 깨어 버렸다. 그리고 죽음을 자연의 한 일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라 말한다. 순응하며 자신의 여생을 편안하게 마치라고 한다. 어디 황제가 할 수 있는 말인가? 필자에게 감명을 주었고 지금껏 설렘을 주었던 이 12권의 책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뿐 아니라 수 많은 사람에게도 인생에 지침서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여정을 끝 마치라고 .....
공자가 강조한 중용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생활 중 중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수없이 듣고 배어왔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중용을 흔히 쉽게 A+B/2=C정도로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용은 수학적 평균의미를 넘어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집합 A와 집합 B의 교집합 C와 같은 것이다.
A도 B도 아니면서 A와 B를 함께 수용하는 A+B+C의 의미가 있다.
아니 A도 되고 B도 되면서 그 둘만이 아닌 제 3의 세계가 중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중용은 선과 악을 다 수용하여 나아가는 길에 중용의 도가 있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을 함께 수용하는 당이 있다면 그 당이 바로 중용의 도를 행하는 당이 될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양쪽을 모두 다 똑 같이 바라볼 수 있는 세계가 중용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 자체는 중용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존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세상과 같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중용이 아니고 둘 다를 수용하면서 어느 한 쪽이 지배해서는 안 되게끔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성경말씀에도 나온다. 벼를 심는데 피가 있으면 이를 뽑아 버리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선과 악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를 포용하면서 어느 한 쪽이 지배해서는 안 되게끔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용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을 중히 여기면 객관성을 잃고 편견에 치우칠 수 있으므로 가만히 두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존을 생각할 때 악은 점점 그 모습을 줄여가게 될 것이다.
삶 중에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다.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나간다면 그 방어하는 세계 안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 중에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얻어야 한다. 좋은 것이라고 함부로 심취해서도 안 되고 나쁜 것이라고 해서 등을 돌려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다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기타를 칠 줄 모른다. 젊어서 기타를 가르치던 학원 선생이 젊은 제자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을 중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중용의 도를 당시에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논어에 공자의 말씀 중에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서 일을 피하지 않고 도전하면 그 일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즉 내가 그 일을 선택하지 말고 자신을 그 일에 맞추면 그 사람은 발전하고 성공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은 번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파 내지 패거리 문화를 청산하고 중용의 문화를 형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이 중용의 도를 요구하는데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생활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악인을 당장 처벌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는 선의 방향으로 조정을 서서히 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오랫동안 진심을 주고받으면 그 사람의 훌륭한 면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도 과거 나와 앙숙인 직장동료와 관계를 개선하다보니 그렇게 그 사람의 장점이 크게 보일 수가 있었던 적이 있다.
파당은 중용이 될 수 없고 결코 번영에로 이끌 수가 없음을 유의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겠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점심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함께하는 오찬이다. 지난 6월 이베이가 실시한 버핏 회장과 함께하는 연례 자선 오찬 참석 경매의 낙찰 금액은 346만 달러(약 40억원)였다. ‘투자의 귀재’, ‘오마하의 현인’ 등 최고의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버핏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이면서 뛰어난 혜안과 겸손한 자세로 존경받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버핏 회장이 맨해튼의 ‘스미스 앤 월런스키’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오찬을 함께하지 못하는 은퇴자들을 위해 은퇴자금 관리비법을 털어놓았다.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월간지 7월호에 특집으로 실은 ‘워런의 지혜(The Wisdom of Warren) 10가지’를 소개한다.
글 남진우 뉴욕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1. 비상시와 투자 기회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하라
예기치 않은 자금 경색으로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이면 현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은퇴를 하고 나이가 들수록 현금의 필요성이 커진다. 은퇴를 하면 월급이 나오지 않아 유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상금을 여유 있게 가지고 있어야 폭풍이 몰아쳐도 힘들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다. 또 수익성이 좋은 투자 기회도 현금이 있어야만 유리하게 잡을 수 있다. 현금을 끈기 있게 보유하다 보면 최상의 투자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2. 지루함을 참고 견더라
튀지 않는 기업이 뛰어난 실적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실례로 기저귀, 비누, 화장지 등 생필품을 생산하는 프록터앤갬블(P&G) 같은 기업은 첨단기술회사에 비해 성장 잠재력이 커 보이지 않지만 세계 소비재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P&G에 1986년 1000달러를 투자한 후 매년 나오는 배당금까지 재투자했다면 현재 시가로 3만2000달러에 달하게 된다. 해당 업종에서 최고의 기업이라면 지루해 보일지 모르지만 튀는 기업보다 좋은 수익을 보장해 준다. 버핏 회장은 이런 기업을 선택해 큰 성과를 올렸다.
3. 시장가격 지배력이 있고 브랜드 가치가 높은 기업을 골라라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을 창조하는 것이 기업 성공의 지름길이다. 재구매가 일어나고 입소문을 통해 새로운 고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충성심이 강한 고객들은 더 비싼 값으로 제품을 구매하기 때문에 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버핏 회장이 브랜드 가치를 보고 투자한 대표적인 기업이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세계 3위의 브랜드 가치를 활용하여 탄산음료에서 주스와 생수로 제품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다른 브랜드에 비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주가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강한 브랜드에 투자했을 때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원리다.
4. 우수한 경영인은 유망한 사업 못지않게 중요하다
기업이 성공을 하려면 경영인이 우수해야 한다. 우수한 경영인은 전략적 비전을 창조하고 기업이 이를 달성할 수 있게 한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립자,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 같은 경영인이 대표적인 예다. 위대한 경영자와 강력한 사업 모델이 어우러졌을 때 장기적인 수익이 창출된다.
5. 실수를 최소화하되 실수를 통해 배워라
누구나 실수를 한다. 버핏 회장도 2013년 영국의 최대 식품유통회사인 테스코에 투자했다가 회계문제가 드러나면서 주가가 폭락해 4억50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투자 실수를 극복하는 열쇠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요인으로 손실이 발생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처음에는 몰랐던 경고신호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신호를 감지할 수 있으면 반복적인 실수나 더 큰 미래의 손실을 피할 수 있다. 투자 실수를 꼼꼼히 기록해 놓으면 훌륭한 투자의 길잡이가 된다. 이 교훈을 자녀나 손주들과 공유하면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다.
6. 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고수하라
광범위한 주식시장을 전부 파악하지 못해도 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 버핏 회장은 1990년대 말 인터넷 혁명을 감지하지 못해 기술업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000년대 초에 발생한 기술주 폭락사태를 피해갈 수 있었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익숙한 금융 분야가 있다면 그 분야에 집중해서 자신의 통찰력을 활용하는 것이 더 이익일 수 있다.
7. 구매력을 높여나갈 수 없는 투자는 피하라
버핏 회장은 꾸준히 성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는 투자를 선호한다. 예를 들어 금의 경우 2011년 세계 공급량이 1926㎥ 였다. 그 당시 시세로 환산하면 162만㎢의 미국 농지와 16개 엑손모빌 공장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이 규모의 농지에서는 매년 2000억달러 상당의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고 엑손모빌 공장에서는 400억달러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데 비해 금에 투자를 했을 경우 시세 차익 외에는 아무런 수익이 나오지 않는다. 당장 수익이 필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성공적인 기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배당을 받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은퇴자들은 지속적으로 수익이 창출되는 분야에 투자를 해야 물가가 오르더라도 구매력을 유지하거나 높여나갈 수 있다.
8. 유망한 주식이라도 과도한 시세에서는 사지 말라
유망한 기업이라 하더라도 너무 비싼 시세에 주식을 사면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버핏 회장은 관심이 있는 기업이라도 주가가 적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산다. 실례로, 얼마 전 국제 유가 폭락으로 에너지기업의 주가가 급락했을 때 버핏 회장은 주식을 대량 매입했다. 평소에 관심 있는 주식의 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있다가 주가가 떨어졌을 때 사면 그만큼 투자 수익을 높일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인내심이 커지기 때문에 투자에 유리할 수 있다.
9. 매입했으면 가급적 장기 보유하라
좋은 결정을 한 번 내리기는 쉽다. 하지만 결정을 자주 내리다 보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순간, 주식거래 수익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다. 처음에 종목 선택을 잘해 수익을 올렸다가도 다음 결정이 잘못되면 수익이 사라지거나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유망한 주식을 너무 일찍 매도한 후 다시 매입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큰 수익을 놓치는 셈이다. 중요한 매입 결정을 한 번 내린 후 장기 보유를 하면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주식을 장기 보유하라는 뜻은 아니다. 가급적이면 결정의 횟수를 줄여야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실수할 기회가 많을수록 더 많은 실수를 하게 된다.
10. 혁신적인 투자를 피하지 말라
투자자는 수익을 우선시해야 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혁신적인 생각과 박애주의적인 투자에서 더 높은 수익이 창출된다. 2008년 버핏 회장은 제너럴 일렉트릭(GE)에 투자를 하면서 “GE는 미국을 상징하는 기업으로 강력한 리더십과 브랜드를 감안했을 때 지속적인 발전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 GE는 신재생에너지인 풍력과 우주항공엔진 기술, 영상 의료장비 등과 같은 신사업 분야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제품이 개발됐고 상당한 수익도 올렸다.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잠을 잘 자는 데도 비법이 있는지 잘 모른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골아 떨어져 버린다고 하니 아마도 타고난 잠자기 천재인지 모른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잠을 잘 수 있는지 아내가 무척 부러워한다. 그것도 비법이라면 차제에 한 번 나의 비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단 양치질을 하고 나서 생수를 한잔 들이키는 것으로 나의 일과는 시작된다. 청소력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청소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성공으로 이끌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집 청소를 시작한다. 약간의 땀이 날 정도의 청소를 하고 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해 진다. 또 깨끗한 집에서 하루를 생활할 아내를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간단한 아침운동을 하고 오면 아내가 준비한 건강 식단에 따라 밥을 제외한 과일과 마를 갈은 즙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한 시간 이상 읽어 본다.
가방을 들고 하루를 보내게 되는 국제계약연구소에 들러 진행되는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일과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블랙커피를 한잔씩 하기도 한다. 영등포에서 송파까지 출퇴근하면서 전철 2호선 잠실역에서 8호선 문정역 그리고 사무실까지 약 20분 정도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걷는 것이 주간 운동이 되는 셈이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저녁 식사 후에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책상에 않아 내가 주간에 하지 못한 일이나 취미로 즐기는 블로그 활동이나 바둑을 두면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아마 내가 잠을 잘 잘 수 있는 비법은 이와 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칠 정도로 업무에 몰두하기 때문일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첫째 비결일 수 있을 것 같다.
잠이 들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좀처럼 잘 깨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면 한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잔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에게 어떤 날은 잠이 잘 오지 않는 때도 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거나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는 대개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런 때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일에 더 몰두하거나 아니면 간단한 운동을 통해 몸을 더 피곤하게 하면 바로 잠이 들곤 한다.
어쩌다가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건강에 좋다는 발치기를 좀하고 나면 바로 잠에 떨어진다.
해외 출장 시도 사람들은 시차 적응이 잘 안 되어 잠을 잘 못자거나 설 잠을 잔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별 문제가 없다. 나는 시차적응을 위해 출장지 시간에 맞춰 잘 수 있도록 책을 읽으면서 취침시간을 늦추거나 함께 가는 친구가 있을 때는 출장업무와 관련 대화를 많이 하도록 한다.
그 외 또 한지가 비결이 있다면 샤워와 별도로 나는 최소 7일에 한 번은 꼭 사우나를 한다. 몸만 씻는 것이 아니고 미사를 보러 성당에 가서 영적인 때도 다 씻도록 노력한다. 그것이 어쩜 내가 한 주일을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또 다른 숨은 비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수면이란 육체적인 피로 뿐 만 아니라 영적인 피로도 회복시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잠을 밤 12시 이전에 꼭 자는 습성을 기르고 있다. 우주의 파동과 인체의 파동이 교류하면서 나를 항상 피로에서 구해준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참 신기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특히 꼭 일어나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서 자면 거의 시간을 맞춰 일어나는 나는 아마도 잠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잠의 천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잠이 올 때 잠을 참지 못하고 자야 하는 것을 보면 통제의 천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비법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 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과 사회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때 잠을 잘 잘 수가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찌푸린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빼는 이른 오후. 날씨도 부쩍 이상 증상으로 기승을 부린다. 전 세계가 무더위와 폭우, 테러로 들끓는다.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에 사람의 마음도 혼란스럽다 못해 멍하다. 혼 나간 영혼들은 정거장마다 멈추어서 한 시대를 장식하고,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저 높은 곳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한발 한 발 옮기고 있다.
산마루로 가는 길, 아침의 발걸음에는 고개를 살짝 든 햇살이 상큼한 미소로 인사를 한다. 계절의 중턱에서 올려다보는 높은 산의 절경은 웅장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산등성이들은 저마다 서로 기대어 세차게 불어대는 지독한 외로움도 잘 버텨가고 있다. 펼쳐진 대자연의 공간은 파랗게 펼쳐진 하늘의 섭리 아래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버팀의 갈증을 마구 뿜어내고 있다.
꼭대기로 향하는 초입부터 왁자지껄하다. 좁은 거리에는 병들어 신음하는 도시의 한복판을 벗어난 피난민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총천연색 일률적 빛깔로 온몸을 포장하고, 이미 소진해버린 빈 산소통에 재 충전을 준비한다. 저마다의 삶에 무거워진 심장 문을 활짝 열고 심호흡하는 소리가 왕왕거린다. 이른 아침부터 인내를 벗 삼아 두려움 없는 용기가 활기찬 삶을 향해 시작을 알린다.
봉우리를 지나고 저 높은 곳을 향해 한 고개 두 고개 의지의 기반을 쌓아간다. 어떠한 삶의 폭풍우에도 견디기 위한 강인함을, 온갖 세상 흔들림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저 바위들처럼, 든든하게 지켜내기 위한 안간힘으로 산소를 들이킨다. 사람들은 온전한 인격과 풍부한 지혜로 안정된 삶의 설계도를 위해 묵묵한 침묵과 함께 힘겨운 중턱으로 향한다.
산언덕 위로 그림 같은 하얀 집들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된다. 환상 속, 꿈을 가라앉히려 잠시 약수터로 향한다. 알록달록 차려입은 닮은 꼴 등산객들도 욕심의 갈증들을 이제쯤은 풀고만 싶은 가보다. 쪽 바가지 한 모금으로 마른 목도 축일 겸, 어깨의 무거운 짐 들을 산 중턱 바람결에 내려놓는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낡아진 긴 숨을 한껏 몰아 쉬었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여린 나뭇잎들도 파릇한 미소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미 등줄기에 다소곳이 매달려 자연의 섭리로 가냘프게 떨고 있다.
산 중턱에는 자신을 구속하며 흐트러지지 않는 해묵은 소나무들이 검푸르게 자태를 드러낸다. 계곡아래로 맑고 깨끗한 투명의 물줄기가 줄기차게 쏟아 내리며 평화로움을 노래한다. 혼탁하게 물들어 버린 사람의 가식들을 씻어내고 싶다. 뭇사람의 마음속도 계곡물처럼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쉼터가 필요한 지친 사람들이 또 마음을 감추고, 발걸음만 무작정 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내는 온갖 자유의 방종 아래서도, 자신을 속박할 수 있는 구속의 지혜를 발걸음 위로 피어오르게 하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다만 살아가면서 인내와 절제, 자신의 성찰로 그 욕심을 무던히 내려야만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꼭대기를 향할 때처럼 끊임없이 스스로 노력해 마침내 얻어 갈 수 있는 것이리라.
마지막 고개, 정상을 위한 고지가 눈앞에 보일수록 발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 끝을 향한 마지막 인내가 빗장을 풀어댄다. 마침내, 삶의 종착점 같은 환희가 두 팔을 힘껏 뻗어 올린다. 꼭대기를 향한 꿈과 인고가 넓은 하늘로 소리 없이 흩어지고 있다. 가팔랐던 오르막길을 위로받기 위해 애써 참아왔던 지나간 시간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비로소 꾹 참아왔던 올바른 삶 뒤의 터질듯한 숨 막힘이다.
어느새, 숨 가쁜 산의 끝자락 정상에 올라와 있다. 힘겹게 올라온 길들이 저 멀리로 굽이굽이 내려다 보인다. 저 아래 성냥갑 같은 온 세상은 마치 다른 나라만 같다. 발 아래로 보이는 세상이 힘껏 올라와 보니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숲과 바위와 하늘, 자연의 맑은 공기뿐이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와 보니 끝내 별것이 없었다.
단지 가볍고 가운데가 뻥 뚫린 위대한 동그라미인 원(0), 그것은 우주의 모양이었다. 영이라는 오묘한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었다. 산소라는 맑은 공기가 세상사에 찌들고 답답해진 인간의 가슴을 맘껏 녹여 내고 있었다. 꼭대기 영의 세상, 텅 비어있는 삶의 공터 공간에서 숨 쉬며 존재하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내려다보며 훌훌 털고내고 있었다.
산꼭대기를 향해 무던히도 앞만 보고 올라왔다. 삶의 정상을 위해 그렇게도 힘든 역경을 헤쳐 지나왔는데, 결국 사람들은 시작이라는 발걸음으로 또 가장 안전하게 아래로 내려 와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산행 길의 마무리였다.
꼭대기에서 다 털고 다시 빈손으로 내려가야만, 멋진 하산 길, 그것이 사람들에게 남은 삶이었다.
공자가 강조한 중용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생활 중 중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수없이 듣고 배어왔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중용을 흔히 쉽게 A+B/2=C정도로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용은 수학적 평균의미를 넘어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집합 A와 집합 B의 교집합 C와 같은 것이다. A도 B도 아니면서 A와 B를 함께 수용하는 A+B+C의 의미가 있다. 아니 A도 되고 B도 되면서 그 둘만이 아닌 제 3의 세계가 중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의 중용은 선과 악을 다 수용하여 나아가는 길에 중용의 도가 있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을 함께 수용하는 당이 있다면 그 당이 바로 중용의 도를 행하는 당이 될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양쪽을 모두 다 똑 같이 바라볼 수 있는 세계가 중용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 자체는 중용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존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세상과 같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중용이 아니고 둘 다를 수용하면서 어느 한 쪽이 지배해서는 안 되게끔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성경말씀에도 나온다. 벼를 심는데 피가 있으면 이를 뽑아 버리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선과 악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를 포용하면서 어느 한 쪽이 지배해서는 안 되게끔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 중용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을 중히 여기면 객관성을 잃고 편견에 치우칠 수 있으므로 가만히 두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존을 생각할 때 악은 점점 그 모습을 줄여가게 될 것이다.
삶 중에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다.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나간다면 그 방어하는 세계 안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 중에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얻어야 한다. 좋은 것이라고 함부로 심취해서도 안 되고 나쁜 것이라고 해서 등을 돌려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다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기타를 칠 줄 모른다. 젊어서 기타를 가르치던 학원 선생이 젊은 제자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을 중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중용의 도를 당시에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논어에 공자의 말씀 중에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서 일을 피하지 않고 도전하면 그 일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즉 내가 그 일을 선택하지 말고 자신을 그 일에 맞추면 그 사람은 발전하고 성공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은 번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파 내지 패거리 문화를 청산하고 중용의 문화를 형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이 중용의 도를 요구하는데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는 생활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악인을 당장 처벌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는 선의 방향으로 조정을 서서히 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오랫동안 진심을 주고받으면 그 사람의 훌륭한 면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도 과거 나와 앙숙인 직장동료와 관계를 개선하다보니 그렇게 그 사람의 장점이 크게 보일 수가 있었던 적이 있다.
파당은 중용이 될 수 없고 결코 번영에로 이끌 수가 없음을 유의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겠다.
l필자가 철이 들 무렵부터 가정환경이 좀 어려운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 삶속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겨왔던 것 같다. 인간다운 삶을 알기 위해 우선 “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막상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삶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경지는 가치의 성취인가, 소유의 경쟁인가, 쾌락의 충족인가?
이를 위해 우선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이해를 해야 할 것 같다.
1. 인간 존재의 탄생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의 최소 단위가 세포라면 세포는 궁극적으로 분자와 원자라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도 우주의 탄생과 같이 진동의 결과로 무에서 유로 분자와 원자의 결합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물체는 자기만의 파동을 갖고 있다. 심지어 말에나 소리에도 고유의 파동이 있다. 물론 유신론자의 생각처럼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대 전제를 부인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고 또 다른 과학적인 접근법에서 거론되는 이야기이다.
불가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표현으로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무와 유의 움직임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질은 실제가 아니고 공간속의 일시적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과 공간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불가분의 관계다. 즉 이 세상에 실의 우주가 있는 한 기필코 보이지 않는 허의 우주(저 세상)가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나(살아있는 나)가 있으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나(죽은 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과 사는 똑 같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진리를 찾아가는 존재 그것을 실천하고 지켜 가야하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소크라테스는 그 보편적인 진리를 찾는 노력을 하였고 플라톤은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운명이란 글자대로 풀어쓰면 생명을 나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의 근원이고, 그 힘이 다하면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다. 우주 전체는 이 생명의 힘이 작동되고 있다. 이 힘이 인간 내부에 작동할 때 인간은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만물을 움직이고 형성시키는, 에너지로 존재한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자기계발(학문)을 통해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나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므로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나르는데 타인의 일인 것처럼 운명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이 나쁘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서 일어난 사고방식이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인간 스스로가 자기계발을 하여 만들어 가는 삶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를 ‘기투’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2. 인간에 대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
평생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사르트르는 인간의 존재가 본성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의 저서 ‘구토’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목적 없이 이 세상에 자유롭게 태어나는 존재라고 했다. 즉 인간은 본질에 앞서 실존하므로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으나 책임이 수반되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삶속에서 앙가주망을 통해 인간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삶의 궁극적인 목적
인간이 지구상에서 태어난 것은 우주를 신이 창조했다고 가정하면 신의 뜻에 따라 참다운 인류 사회를 창설하는 일익을 담당하기 위한 것으로 개인이 생명이나 혼을 부여 받을 때 하늘로부터 하나씩 역할을 부여 받고 태어났다. 따라서 타인을 용서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 불완전 연소를 해 스스로 생명을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이렇게 유신론적 입장에서 보면 운명이란 자신의 생명을 신의 이념대로 운용해 가는 것을 말한다. 신의 생명은 인류 공통의 것으로 자신을 위해 다른 생명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의 불행은 본성 (신의 마음)이 증오, 원한, 분노, 공포 등 잘못된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은 단순한 육체적 인간이 아닌 신과 같은 자유자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상념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을 멋지게 내려놓는 방법 웰다잉의 저자 화원 김진수 선생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신을 갈고 닦아 자신을 Upgrade시키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고매한 삶의 주파수는 보통 사람들의 주파수와 다르기 때문이다. 수기안인의 삶을 사는 사람은 동일한 주파수의 사람과 사후 교류할 수 있음을 전제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다운 삶이란 그것이 유신론적으로 신의 소명에 따라 사는 존재이든 실존주의자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계발을 하며 사는 존재이든 상관없이 인류 사회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살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자신이 동경하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되 그것이 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아실현을 통한 가치의 실현이라 생각된다.
얼마 전 홍콩에서 10여 년간 거주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을 사업차 자주 방문한다는 ‘동양 전문가’인 캐나다인과 우연히 한·중·일 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동양 전문가는 삼국의 문화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듯 의아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필자가 현대식 대형 건물이 아닌, 동양식 전통 건물에 한·중·일 삼국의 각기 다른 문화 코드가 녹아 있다고 하니 무척 놀라워하는 모습이었다.
삼국의 전통 건물이 서양 건축에 비해 목조라는 점 외에 다른 공통점은 건축물에서 지붕이 차지하는 면적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한·중·일 삼국이 지붕 선(roof line)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붕 끝이 하늘을 향해 찌르듯이 올라가는 데[사진 1] 비해, 한국 지붕은 가운데 부위에서 지붕 양 끝이 조금 높아지는 느낌만 주는 정도[사진 2]이고, 일본의 지붕 선은 일직선으로 마무리되는 게 특징이다[사진 3]. 이런 차이점을 말하자, 그 동양 전문가는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정말 그러네” 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걸 기뻐하며, 왜 그 쉬운 차이를 여태껏 자기는 못 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필자가 각기 다른 지붕 선에 스며든 문화 코드를 설명해 나가자 그는 더욱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중국 건축물에는 권위적 정서가 스며 있는데, 특히 지붕 선은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 보는 이로 하여금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건축의 핵심이 간결한 직선인데, 지붕 선 역시 단순한 일직선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반면 한국의 건축물은 권위감이나 긴장감보다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특히 지붕 선(線)은 약간 휘어져 있는데, 양쪽에서 실(絲) 끝을 잡고 일직선으로 팽팽하게 당기지 않고 살짝 긴장을 푼 듯 느슨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 친화적 정서를 으뜸으로 꼽은 것이 문화의 코드라면, 일본은 ‘긴장감 속의 아름다움(beautiful charm in tension)’과 인위성이 문화의 한 코드인 셈이다.
그 동양 전문가는 우주라는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기에 “직선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조형물이다”라고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미술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의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 1749~1832)가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 바로 네 눈앞에 있어 눈으로 볼 수 있어/ 네가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Was ist das Schwerste von allem?/Was dir das Leichteste dünket,/Mit den Augen zu sehen, was vor den Augen dir liegt.”)라고 했다면서, 지금껏 동양 삼국의 문화는 중국 것이라 생각해왔기에 자신이 서로의 차이점을 못 본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한·중·일 건축물의 지붕 선이 지닌 미술사적 의미를 짚어보면서 ‘그 하나’에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삼국의 문화적 차이가 새삼 흥미롭게 다가온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
수만리 떨어진 몽골에서 저희의 둘째가 셋째 애를 잉태했다는 낭보를 인터넷으로 받았습니다. 아기의 실제 크기는 직경 2cm 정도의 동전보다 조금 크답니다. 그렇게 조그맣지만 머리와 몸통 그리고 팔과 다리가 앙증맞게 분명합니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영상과 함께 들릴 때는 내 가슴도 같이 뜁니다. 우리 생명의 씨가 아들과 며느리를 통해 자라나고 있는 가물한 현장을 친지들과 함께 나누어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비록 자그마할지라도 이렇게 눈으로 보니 분명 새로운 생명이며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독립된 한 인간입니다. 더구나, 너무나 확실하게 우리 모두를 닮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와 엄연히 구별된 하나의 개체입니다. 우주의 한 공간과 시간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사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동전크기 보다 훨씬 더 작은 점이었을 것입니다. 부피와 면적을 가름할 수 없는 점!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 있었을 존재의 시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물질 이전에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있었겠지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그 신비가 가벼워지진 않습니다. 더구나 그 과정이 생략되지도 않고 매 순간 엄격하게 되풀이되어 오늘까지 이어져왔습니다. 비록 알파고에게 바둑 다섯 판 중 네 판을 졌어도 말입니다.
지금 세상은 컴퓨터와 사람의 바둑 싸움으로 말이 많습니다. 구글 알파벳이 영국에서 인수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회사 딥마인드에서 만든 X-프로젝트의 하나인 알파고가 바둑의 정상이라는 인간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을 폈습니다. 구글이 바라던 대로 세간의 이목을 모았습니다. 사람이 만든 인공지능과 사람과의 대결이었으니 떠드는 게 밥벌이인 기관들은 너도 나도 말 만들기 풍년을 맞았습니다.
더구나 4:1이라는 절묘한 결과가 나왔으니 벌집을 건드린 형국입니다. 여기저기서 전문가들을 초대해 사고하고 판단하는 뇌구조를 분석하고, 스스로 체득하며 발전하는 N세대 컴퓨터의 자기개발지능이 이제부터 시작되었다는 등…새로운 화젯거리를 시간마다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개념을 정리하는 데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많은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더욱 복잡한 미로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지구가 좁다며 인터넷망을 확장해 집단지성을 펼치던 구글이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더 큰 의도로 이미 휘어잡은 세상을 다시 흔들고 있습니다.
저도 흔들렸지만 그때 저희가 받은 초음파 사진과 알파고가 제 머리 안에서 연결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아주 작게, 있는 듯 없는 듯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우리는 이런 생명의 시작 같은 일을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쳐 버리기 십상입니다. 스쳐가는 바람 같기도 하고 그 바람에 반응하는 호수의 물결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생명의 시작에 비해 세상일의 시작은 참 요란합니다. 아직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일들은 그런 야단스러움을 애써 유지하다 제풀에 꺾여나가거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오늘까지 유지시켜 온 생명의 일은 저절로 이뤄지는 듯, 그 시작은 여리고 작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서히 자라 마침내 개체로 완성됩니다. 바로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이 왜 그렇게 끝이 없는지 이해가 갑니다. 우주보다 더 크게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 모두를 우리 안에 넣어도 빈자리가 넉넉한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은 우리 아기의 초음파 사진처럼 아주 작은 한 점이었고 일정한 우주의 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장된 우리는 우주보다 더 커다란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내 속에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외부적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사람을 이기는 과학의 산물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의 두뇌 신경망까지 복사한 기계들이 인간을 심판하고 생명을 제어하려 들 것입니다. 온갖 인공적인 소음으로 가득 찬 혼탁한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미세하고 부드러운 엄마의 뱃속 아기가 우주에 들려주는 심장소리만큼이나 생명은 기계와는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