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별과 달이 있다면, 땅에는 풀과 꽃이 있다. 몽골의 여름 초원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온몸으로 기억할 것이다. 계절이 봄을 지나 가을이 시작되기 전의 여름이라야 한다. 세상 꽃의 원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즈음 거기에 다녀온 내 친구는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많은 꽃을 만났다. 늦은 나이에 무슨 꽃 타령! 그래도 좋다.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내게 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꽃은 하늘의 구름, 우리의 달 항아리처럼 사내를 철들게 하는 창조주의 세심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남쪽 톨강과 자이슨을 싸안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소나 낙타들이 어슬렁거리고, 여기저기 누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낯설도록 평화롭다. 조금 더 오르면 나무나 관목이 없는 느슨한 구릉이다. 거기에는 온통 키 작은 들꽃으로 빽빽하다. 아무데서나 그냥 언덕을 오르면 모두 꽃밭이고 풀밭이다. 땅바닥에서 흙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귀하게 취급받는 에델바이스 또한 흔하다. 다람쥐와 새, 그리고 나비와 벌들도 바쁘게 평화롭다.
아내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펴, 걸어 말리기에 좋은 들풀들을 모아 싼다.
비가 한 차례 더 후드득 지나간다. 아내에게 양산을 펴주고, 난 비옷을 꺼내 덧입었는데 이내 그친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 하늘은 더 파랗다.
개울물이 늘어 소리 또한 청량하고 맑다.
딛고 오르는 땅과 풀의 감촉이 더할 나위없다.
초원을 지나 산에 오를수록 갈잎과 자작나무가 빼곡한 숲이다.
관목이 둘러싸인 풀밭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들꽃과 각종 나무향이 코끝을 스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묘사했던 숲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마침 윙윙 소리를 내며 두터운 몸집의 호박벌이 지나간다.
그가 나오는 영화 ‘일 포스티노’를 다시 보고 싶다.
집에 돌아와 아내가 가져온 들풀을 세 종류로 나누어 노끈으로 묶어 창가에 걸어 놓았다. 오종종한 녀석들, 긴 녀석들, 그리고 에델바이스. 함께 싸온 풀과 꽃을 구분하며, 색과 선의 세련됨에 우린 새삼스레 다시 놀란다.
땅의 풀들은 풀대로, 하늘의 별들은 별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사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늙은이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비밀의 코드가 드러나 보인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특별한 무슨 얘기나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름다움이며, 사랑이다. 색은 색대로, 선은 선대로, 감촉은 감촉대로 그 자체가 의미이며 감동이다. 꽃도 구름처럼 추상이다.
그래서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이다.
나 같은 평민은 감히 우주를 가까이 볼 수 없다. 나와 우주는 별개가 아니며 내 머리 위가 하늘이고 바로 우주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 한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아무리 하늘을 오래 쳐다보아야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을 하며 꽃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볼수록 새롭게 열리는 꽃의 아름다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래, 아주 오래 볼 기회를 여러 번 갖다가 알게 되었다.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적인 척도가 공간과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침대 모서리에 무릎이라도 찧어 보면 알 일이다. 쓸쓸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 아무렇게나 던져둔 트레이닝복을 집어 들었다가, 바짓가랑이에 발을 잘못 끼운 탓에, 외발로 몇 걸음 콩콩거리고는, 볼썽사납게 풀썩 쓰러진다. 얼굴을 찡그리고 두 손으로 무릎이 닳도록 비비다 보면 어느새 진면목을 내밀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불청객. 곁에서 누군가 위로만 해줬어도 이렇게 아플까. 아니, 깔깔거리며 비웃기만 했어도 이처럼 서러울까. 일상에서 고독은 으레 고통과 더불어 사무친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20년 넘도록 그렇게 살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가면서 시작했으니, 네 자리 숫자에 네 자리 숫자를 빼는 나름대로 힘겨운 작업을 마쳐보면, 올해로 정확히 25년째 혼자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7000일이 넘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많은 나날 동안 대부분 홀로 잤고, 홀로 깨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가 연인에게 버림받고 일주일째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친구도, 고 3인 아들이 그 유명한 ‘PC방 폐인’이라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이웃도, 잘난 부인이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면서 초대장을 건네는 후배도…. 혼자라서 편하겠다고,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그때마다 씁쓸히 웃었다. 시퍼렇게 멍든 양 무릎을 보고도 그런 소릴 할까.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이지만, 왜 혼자 사느냐는 질문만은 질색이다. 대답할 말이 없다. 어차피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도 아닐진대 까닭이 어디 있고 곡절이 어디 있겠는가. 살다 보니 그리 됐다. 딴에는 최선을 다한 답변에도 집요한 누군가는 재차 묻는다. 달리 살 수 있었다면 그랬겠느냐고.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 했지, 아마. 개인사 또한 다르지 않다.
“살면서 점을 세 번 봤거든요. 첫 번째 점쟁이는 ‘마흔 이전에 결혼하면 이혼한다’고 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횃불처럼 홀로 타오르는 사주’라고 하고, 마지막 한 명은 ‘일생이 낙목공산’이라던가. 나뭇잎 다 떨어져 텅 빈 민둥산 팔자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뭐 더 있으세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리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쯤 되면 더 이상 내 삶의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는다. 안타까움의 한마디로 대화는 종결된다.
“여자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곰곰 생각해보니 그런 듯도 하다. 실제로 여자들은 혀를 끌끌 찬다. 세탁기가 고장 나 손빨래를 하다가 스며드는 창문 햇살에 저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는, 나의 구질구질한 경험담을 듣고 나면 말이다. 이야기 상대가 처지 비슷한 독신 여성이어도 안쓰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신세도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면서 숫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가만 듣다 보면 위로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덜 불행함에 안도하는 것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인류학이나 동물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수컷이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수컷이 하고 싶어 하는 것 가운데에는 홀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 끼어 있다. 옛날이야 돈으로 어찌어찌 무마할 수 있었다고 쳐도, 요즘은 그조차 쉽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구저분하게 사는지 모른다.
자괴감에 잔뜩 빠져들었을 즈음, 고등학교 선배와 술을 한잔하다가 생애 가장 큰 격려를 들었다. 그날은 무릎 대신 입술을 다친 터였다. 칫솔질 도중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가 그만 오른손에 힘을 너무 줘버렸다. 살짝 부운 입술을 혀로 매만지며 쓰라리기보다 처량하다고 툴툴거렸더니 선배는 엄살떨지 말라면서 나무랐다.
너만 그런 줄 아느냐고. 여섯 가족이 모여 살아도 아픈 건 아프다고. 어여쁜 마누라가 연고에 밴드까지 발라줘도,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서 후후 불어줘도 쓰라리긴 매한가지라고. 그러면 저절로 또 서럽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던 선배의 신세타령이 하도 뜻밖이어서 아예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진짜로?”
남의 불행은 진정 나의 행복이었다. 얻다 대고 반말이냐는 핀잔도 듣기 싫지 않을 만큼 위로가 됐다. 선배는 어느 책에서 읽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삶은 완벽히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
그리 참신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떤 비유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흡사 머리에 띠 두른 응원단이 곁에서 큰북을 둥둥 울리며 지옥에서 천당까지 반동이라도 해주는 듯했다. ‘어느 책’이 무엇인지 인터넷과 서점을 뒤지기까지 했다. 읽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사라 밴 브레스낙의 임을 알아내고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여쁜 부인에 토끼 같은 두 딸로 모자라 맏아들 부부까지 품에 끼고 살면서 제목이 그 모양(?)인 책을 왜 읽었을까? 전화라도 걸어 묻고 싶었지만 그냥 꾹 참았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
그럼에도 못내 선배가 부러운 것은, 그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 쉽게 말해, 나는 이야기 상대가 그립다. 텔레비전 뉴스나 오락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 예리하기까지 한 비평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상대가 “그게 지금 웃으라고 하는 소리냐?” 하고 비웃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러고 싶다.
때마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거나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휴대전화는 한결같은 바탕화면이요, 곁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나 하나라 크지도 않은 방이 그처럼 적막하고 휑뎅그렁할 수 없다.
마흔 넘어 혼자라는 어느 방송진행자는 방송프로그램에서 “오래간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니 정말 즐겁다”고 말하곤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다 사람들 속에 뒤섞였다면 자리를 파하기가 그리도 싫다.
“어디 가?”, “언제 와?”, “밥은?”
이 세 가지가 이른바 ‘나도족’ 또는 ‘젖은낙엽족’이 입에 달고 사는 3대 질문이라고 한다. ‘나도족’이나 ‘젖은낙엽족’은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엉겨 붙듯 “나도” “나도” 하면서 부인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들을 싸잡아 일컫는 신조어란다. 엉겨 붙을 부인은 없지만, 사람들과 만나면 엇비슷한 질문 세 가지를 자주 하기는 한다.
“벌써 가려고?”, “한 잔만 더 하고 가지?”, “에이, 내가 낸다니까 왜 그래?”
극구 가려는 사람을 주저앉히려 안달이다.
옛날에는 그런 스스로가 창피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되레 어엿하다. 같이 있자고 조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어느 친구가 일깨워준 덕분이다.
“말상대가 그립다고? 곁에 붙어 있어도 괴롭기는 똑같다. 너는 없어서 괴롭고 나는 있어서 괴롭고, 그 차이다.”
원효대사가 동굴에서 해골 물을 마셨을 때 정도는 아니어도, 그 말에 느낀 바가 자못 크다. 블레즈 파스칼이 에서 “끝없는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공포를 가져다준다”고 했다가 다른 페이지에서는 “사람은 외톨이로 죽으므로 외톨이처럼 살아야 한다”고 적어놓은 것을 읽고 ‘이 사람, 거의 이랬다저랬다 장난꾸러기 수준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한 적이 있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그분이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고독이 비록 두려울망정 인간으로서 어쩌지 못할 운명인 동시에 평생 따라야 할 행동강령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니 친구는 ‘있어도 괴롭다’고 투덜거리고, 선배는 ‘삶이란 홀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주의 섭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배배 꼬여 있다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떤가. 남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어떻고, 그 작업에 실패해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또 어떤가. 어딘가의 결핍은 다른 어딘가의 풍요로움을 잉태하는 법이니, 내 외로움이 남들의 단란함만 못하다고 낙망할 필요는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그들도 힘들다지 않는가. 어차피 똑같다면 두려워도 괴로워도 말자.
나는 혼자 산다. 25년째 그러고 있다. 그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다. 그렇게 살아서 때때로 외롭지만 마냥 불행하지만도 않다. 어떨 때는 더없이 좋다. 영화가 보고 싶으면 툭 털고 일어나 보러 가면 된다. 느닷없이 꽃구경이 당기더라도 문제없다. 훌쩍 떠나면 그뿐이다. 친구들이 모처럼 술 고플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나다. 자랑삼아 말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내 별명이 ‘알비데’다.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곧 갈게” 한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절대 자유. 혼자 살지 않는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내두르며 부러워할 삶을 나는 지금 한껏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 생각도 한다. 아주 옛날 영화 ‘벤허’에서 노예 신세가 된 주인공이 그러는 것처럼, 삶이란 상심의 바다를 노 저어 가는 거친 뱃길이 아닐까. 천둥 치고 벼락 치는 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면 노 젓는 이들이 수두룩 눈에 띈다. 대부분 나와 달리 한 배에 여럿이 타고 있다. 적게는 둘, 많게는 여섯. 그들이 노를 서로 나눠 저으며 파도를 헤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나룻배에 홀로 탄 신세라 그만큼 쓸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만족하려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남들이 사람을 태우려 내던져야 했던 기쁨과 행복이 내 배에는 제법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홀로 노 젓는 고달픔이나 외로움 따위는 감내하려 한다. 공간의 침묵이 괴롭더라도, 크지도 않은 방이 무섭도록 휑해도 견디려 한다. 호강에 겨워서 어딘가에 뭐 싸는 놈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하나를 잃었다면 다시 하나를 얻는다. 그것은 삶의 철옹성 같은 진리다. 누가 그랬던가. 목표의 7할만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다만 외톨박이일 뿐,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간신히 연락이 닿아 원고를 청탁했더니 “나는 컴퓨터도 안 하고 육필로 쓰잖여. 글씨도 못 알아볼 건데 그냥 됐시유. 내가 보니께 나랑 안 맞는 것 같유. 그 책하고는. 난 부족한 사람인디. 글 못 쓰니께 다른 선상 알아봐유. 난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는구먼그려.” 구수한 충청도 말씨에 그대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양하던 작가 김성동은 고색창연한 200자 원고지(金聖東이라고 인쇄돼 있다)를 노끈으로 묶은 글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문학은 삶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지”라는 그의 육성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아카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막걸리 받아 큰 슬픔을 안고 사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총소리였다. 총소리는 잇달아서 들려왔다. 사타구니에 꼬랑지를 말아들인 삽살개가 마룻장 밑으로 숨어들었고, 삼키면서 길게 끄는 동네 개들 울음소리만이 높이 떠서 흩어지고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낙이 속적삼을 헤쳐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렸다. 등꼬부리 노파가 두 팔로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를 끌어안았고 공포에 질린 눈길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던 식구들 눈길이 사방으로 돌려졌다.
*해설피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1950년 첫 때. 조선 나이로 네 살이었으니, 이 누리에 벌레몸을 받아 태어난 지 꼭 2년 8개월 되던 때였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중생에게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은 네 살 적부터인데, 총소리이다.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이 총소리라는 것이 얄망궂다. 꼭 무슨 팔자소관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오니, 운명인가. 전정(前定)된 명운(命運) 말이다. 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 같은 것. 그것으로부터 이 중생 살매는 비롯되었으니까. 아직 이빨도 다 솟지 않은 네 살짜리 어린 것 넋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총소리 말이다.
아버지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
총소리를 듣던 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중생은 영 입을 열지 않는 것이어서 벙어리인 줄 알고 큰 걱정들을 하시는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마당에 깐 멍석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막 저녁상을 받는데, 멍석 가장자리를 기어 다니던 아이가 한밭[대전]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는 미 군정과 그 사냥개들이 쳐놓은 덫에 치여 절망적 ‘피고회의’나 하던 리관술(李觀述)·송언필(宋彦弼) 선생 같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이며 인민 계관시인 유진오(兪鎭五)선생, 그리고 10월항쟁·여순항쟁·4·3항쟁을 비롯한 지리산·태백산·일월산 같은 재산인민유격대 *싸울아비들과 함께 총하지혼(銃下之魂)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정(而丁)선생[朴憲永]의 비선(秘線)으로 대전·충남 지역 조직장인 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끌려가셨던 것은 당신 나이 서른두 살 때인 1948년 늦가을이었다. 리승만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운 뒤였다. 평양행과 지리산 입성을 놓고 손톱여물을 썰던 끝에 얼굴도 못 본 자식놈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들렀던 고향집에서 당신을 맞이한 것은 벌써 몇 달째 그물을 치고 있던 서청(서북청년단) 출신 서울시경 특별경찰대였던 것이다.
뒷동산으로 피란 갔던 그때 이야기를 썼던 것이 『그해 여름』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군사깡패들한테 잡지를 폐간당하고 나서 무크지로 박아냈던 에 실렸던 것이니, 꼭 30년 전이다. 그 소설이 어떤 유명한 친왜작가 이름을 딴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올랐으나 심사위원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하니, ‘반미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조치원·대전 방어선이 무너지며 금강방어선으로 뒷걸음질하던 북미합중국 병대가 보령·청양 경계인 화성장터에서 양키병정·토인병정 구경나온 아녀자 여남은 명을 죽였던 참이야기를 바탕삼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딴 이야기인데- 요즈음 이른바 문학상이라는 것이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등단해서 십년만 되면 적어도 서너 개씩 문학상을 목에 걸고 흰목 잦히는 작가들이다. 작가를 장삿속으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보고 어떤 문학상을 거부했던 것이 1983년이었다. 물론 소설 됨됨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른바 등단 40년임에도 무슨 창작기금과 절집동네에서 주는 무슨 상 말고는 하나도 받아보지 못한 중생이므로, 더구나 눈에 밟히는 『그해 여름』이다.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른 다음부터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이다. 할아버지는 손님이 오면 꼭 아비 없는 손자를 사랑방 명색으로 불러 “이 으른께 절허구 뵙거라.” 그리고 식구들은 쫄쫄 굶는데도 꼭 진지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들여놓는 손님 진짓상을 보며 이 중생은 눈을 꼭 감았다.
주칠이 벗기어져 희뜩희뜩한 개다리소반에는 보리가 조금 섞이고 검정콩이 박힌 옥 같은 쌀밥과 췻국 한 대접, 그리고 김치와 호박무침에 간장과 고추장 보시기가 놓여 있었다. 재게 오르내리는 수저를 바라보던 이 중생은 미주알을 눌러 막고 있던 두 발꿈치에 힘을 주어야만 하였으니, 거시침이 흐르면서 그만 힘도 내음도 없는 물방귀가 비어져 나왔던 것이다. 서른 날에 아홉 끼밖에 못 먹는 *애옥살이일망정 손이 오면 꼭 진지대접을 하고 먼 길 온 과객한테는 *사슬돈푼이나마 노잣닢까지 쥐어주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은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다.
나의 소설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살그미 눈을 떠보니 밥주발은 반 넘어 주욱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목예반에 숭늉대접을 받쳐든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아흐. 저이가 숙냉이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남겨진 밥은 내 차지가 되는 겨. 그만 상을 내가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만을 목젖이 녹아들게 기다리고 있는데, 얼라? 숭늉 한 모금을 마시고 난 그 늙은 과객사람은 숭늉을 밥그릇에 부어버리는 것이었고, 으아앙! 꼴깍 소리가 나게 생침만 삼키고 있던 이 중생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던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업(業)이었던가. 배고픔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백지에 먹물이 찍힌 것이라면 콩나물을 싸온 신문지 쪼가리까지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백자 원고지로 쉰 장쯤 될 소설을 써보았던 것은 온전히 끔찍한 고문후유증의 우울증으로 괴로워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슬프구먼그려. 겁나게 슬프다니께.”
“온 삭신 사대육신 팔만사천마디가 죄 자귀루 죅여놓은 조긧대갈 같다”고 네 방구석을 맴돌면서도 자식이 지었다는 소설을 낭독으로 들으며 엷은 살푸슴(미소)을 보여주시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데, 주인공이 서울로 가는 장면에서 그 소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그려볼 재주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말하는바 리얼리즘이 뭐고 모더니즘이 뭔지 알 리 없는 때였으나, 그렇게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니고는 땅띔도 못 하는 것은 그때부터 이미 비롯된 것이었다.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은 상상 곧 *수꿈 꾸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의 변증법을 알았다고나 할까. 그때에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이다.
“얘기든 노래든 그저 모름지기 슬퍼야 혀. 그게 진짠 겨.”
칠순 다 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림
망팔(望八)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다. 이 많이 모자라는 하늘 밑에 벌레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말이기도 하니, 운명인가. 할아버지 손에 잡혀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날 열두 살짜리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시 갇혀 있었다는 경찰서 구경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던 끝에 이사 간 집으로 갔는데, 철 이른 가죽잠바를 걸치고 완강한 어깨에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할아버지를 잡고 일장 훈시를 하던 것이었다.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다가 누가 찾아오는지 한 달에 한 번씩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송판쪼가리로 해 단 대문명색 앞까지 배웅 나간 어린아이를 훑어보며 사내는 말하였다.
“붉은 씨앗이로군.”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잡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안녕히 가셔유우우.”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축댓돌 밑 아랫집에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황덕불빛을 뚫고 무당 사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허어이이. 리로 리런나. 로리런나. 라리런나. 로런나. 리런나. 어허어이이. 두 발 가진 즘생에 살생부정이로구나. 총 맞은 원혼이요 칼 맞은 원혼이요. 몽둥이 맞은 원혼이요. 포탄 맞은 원혼이요. 신실히 적적히 물리쳐 줍소사. 시위들 하소사. 원통히 죽고 서럽게 죽은 중음신들아. 어서 속히 이승으로 나가서 만인적선하고 돌아오너라.”
다음은 4월 17일 뼈잿골에서 읽을 님들을 기리는 글이다.
뼈잿골의 제망혼문(祭亡魂文)
조선공산당 창건 90주년인 단제개천(檀帝開天) 환기(桓紀) 9285년 4월 17일을 맞아 불초(不肖) 김 아무개와 그 동무(同務)들은 삼가 쓴술 한 잔과 몇 점 보잘 것 없는 제물(祭物)로 눈물의 골짜기에 누워 계신 님들 혼령(魂靈) 앞에 엎드려 슬피 고하나이다.
아, 님들이시어. 님들 떠나신 지 어즈버 65년이 되었으나 못난 뒷자손들은 여태도 그 체백(體魄)조차 건져드리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야말로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올습니다.
아, 님들은 아주 돌아가시렵니까. 저희들은 상기도 님들이 돌아가셨다고 믿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슬픔이 지나쳐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 어찌 차마 말을 다하겠나이까.
아, 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은 떨리고 손끝은 흔들려서 차마 붓을 놀릴 수 없어 1950년 7월 27일치 기사를 읽어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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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市에서도 7月 三,四일 경부터 련 五일간 尾軍의 지휘아래 人民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大田刑務所에는 濟州道麗水順天太白山事件 등의 우수한 祖國 아들딸들이 收監되어 있었다. 이들을 비롯한 七천여명의 人民들을 野獸들은 뒤로 결박하여 명태같이 트럭에 눞혀놓고 최고 一日 八十臺까지 동원하여 대덕군 사(산)내면 랑울(월)리로 운반하여 가소린을 퍼붓고 불질러 방공호로 몰아넣어 참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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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신문기사는 맞춤법, 띄어쓰기, 종지부 없는 것, 한자 노출 등 그때대로임)
아, 서럽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무들과 힘을 모아 님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이오니, 너무 걱정을 마옵소서. 이 중생이 사바에 있는 만큼 님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아, 인생이 상수(上壽)를 누리는 이는 백년을 살 수 있다지만 그 나머지는 흔히 팔구십세를 넘지 못하는데 이 중생 나이 망팔이 다 되었으니, 인간에 있을 세월이 또 얼마나 되오리까. 아, *고루살이 세상을 위하여 짓는 밥이 채 뜸도 들지 않았는데 한 세상은 살같이 가고, 천지(天地)도 그 끝이 있다는데 산천은 말이 없습니다.
가마귀는 끊어진 솔언덕에 울고 묵은 풀은 우거졌는데, 쓸쓸한 산자락에 엎드려 한소리 통곡을 하니, *푸나무도 함께 슬퍼합니다.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해설피: 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꼴, *싸울아비: 전사(戰士)
*애옥살이: 가난한 살림살이
*사슬돈푼: 싸거나 꿰지 않은 흩어진 엽전, 얼마 안 되는 작은 돈
*살그미: ‘살그머니’의 준말로 그루박을 때 쓰던 말. 살그니, 살그래
*수꿈: 낮에 깨어서 꾸는 꿈이라는 죄수들의 은어로 상상을 이르는 말
*고루살이: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겨레가 추구했던 ‘평등세상’. ‘공동체’는 기독교 세상에서 나온 서구 개념임.
*푸나무: 초목(草木)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1976년 승려생활. 1975년부터 창작생활. 창작집 『彼岸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만다라』 『길』 『국수(國手)』 『꿈』, 산문집 『염불처럼 서러워서』 『외로워야 한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등.
‘읽지 않으면 읽힌다’고 말하며 지독하게 독서하고, 70여 권이 넘는 저·역서를 출간해내는 등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출산하는 지식산부인과의사(?) 유영만(劉永晩·52)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그에게 책은 창이라고 말한다. 읽어낸 책이 많을수록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 많아지고, 그만큼 남다른 개념을 습득할 수 있으며, 남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 남다른 사유를 할 수 있다고. 유 교수가 얻어낸 무수히 많은 창 중에 라는 창을 열어보고자 한다.
‘감·상·실’에서 발견하는 중년의 ‘삶의 정도’
(2011)는 (1981), (1991), (2001)에 이은 윤석철 서울대 명예교수(경영학)의 네 번째 10년 주기 작(作)이다.
“책이 나오고 바로 읽었어요. 윤석철 교수님은 경영학자이시지만 문학가 같기도 하고 때론 철학가 같기도 하시죠. 그런 윤 교수님의 면모와 이전까지 나온 저서들의 내용이 잘 집약된 책이 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공부하시고 연구하신 것들을 목적함수와 수단매체, 이 두 가지로 아주 심플하게 표현하셨죠. 실제로 그 단순한 원리가 제가 전공하는 HRD를 비롯해 경제, 경영, 교육 등 다방면에 접목이 되요. 요즘도 손에 닿는 곳에 두고 제가 하는 일들을 대입해 보곤 하죠.”
의 저자 윤석철 교수는 복잡함을 떠나 간결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수단매체’와 ‘목적함수’라는 두 개념으로 삶의 정도(正道)를 표현했다. 목적함수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방향이며, 수단매체란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적 도구이다.
“책을 읽다보면 ‘내 삶의 목적함수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그렇다면 ‘그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죠. 대개 중년들은 자신보다 가족이나 타인의 목적함수를 위한 수단매체처럼 살아왔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남을 위해서 남들처럼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서 나만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는 중년에게 새로운 목적과 수단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책이죠.”
책의 3부 수단매체와 목적함수의 결합에는 ‘감수성, 상상력, 탐색 실행’ 세 가지 키워드가 나온다. 유 교수는 이를 ‘감·상·실’이라 부른다.
“저는 창조는 교실에서 자라지 않고 ‘감·상·실’에서 자란다고 말해요. 감수성이란 게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을 불쌍하게 여긴 측은지심(惻隱之心)처럼, 모든 창조의 원동력은 감수성에서 시작하죠. 그리고 상상력은 그 감수성으로 포착된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휘됩니다. 사람들은 상상력 하면 공상, 망상, 허상 등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상상력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아픔을 사랑하고 고민할 때 나오는 아이디어와 같은 것이에요. 그리고 그 상상력의 현실 가능성을 검증하는 노력으로서 ‘탐색 실행’이 필요하죠. 이렇게 ‘감·상·실’을 통해 얻은 확신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고, 삶의 정도를 정의할 수 있어요.”
버킷리스트 ≠ 목적함수
유 교수는 지난해 안나푸르나를 다녀오면서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를 실현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나푸르나 등정이 목적함수라 예상했지만,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버킷리스트가 목적함수는 아니에요. 얼핏 안나푸르나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함수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저 여러 수단매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안나푸르나에 오르는 등 여러 개의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제 인생의 목적함수인 거죠. 결국 버킷리스트는 삶을 남다르고 가치 있게 살게 하는 수단매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모이면 삶의 의미, 보람, 행복 등의 목적함수를 얻게 되는 거죠.”
내인생의 4130
“버킷리스트를 실천해본 사람은 또 다른 버킷리스트를 달성할 수 있어요. 제 경우는 안나푸르나를 다녀왔으니 그걸 능가하는 또 다른 버킷리스트를 상상하게 되겠죠. 그런 상상을 통해서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되고, 그 도전으로 얻게 되는 깨달음과 행복 역시 늘어날 거예요. 올해는 몽블랑을 다녀올 계획이에요. 몽블랑에 올라 몽블랑 만년필을 들고 글을 쓰는 상상을 해요. 그렇게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내년엔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겠죠?”
유 교수가 선택한 수단매체 안나푸르나의 높이는 4130m이다. 평소 습관적으로 숫자나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이번에도 역시 남다른 의미를 되새겨봤다.
“4130m를 등정하면서 ‘내 인생에 4130이 의미하는 게 뭘까?’라고 엉뚱한 생각을 해봤어요. 4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또는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1은 ‘내 인생에서 하나를 뽑으라면 결국엔 행복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자’라는 깨달음. 3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세 가지 키워드 ‘도전, 열정, 혁신’ 그 세 가지대로 살겠다는 마음. 그렇게 살다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이라는 게 다 영(0)에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 그렇게 내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제 인생의 거대한 목적함수를 이루는 수단매체라고 할 수 있죠.”
꿈꾸지 말고 꿈 깨
많은 사람이 “생각을 바꿔야 행동이 바뀐다”는 말을 하지만, 유 교수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가만히 앉아 생각만 바꾸려 하는 것은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딴짓을 해야 딴생각이 들어요.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바꾼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요? 저는 ‘꿈꾸지 말고 꿈 깨라’고 말해요. 꿈을 자꾸 앉아서 머리로만 꾸는데, 꿈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뤄내는 거예요. 내가 꾸는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몸을 움직여봐야 알 수 있죠. 요즘 지성은 있는데 야성이 없는 교수나 직장인들이 많아요. 책상에 앉아 책이나 컴퓨터만 보고 있으니 그들의 몸은 머리를 회의장소로 이동시키는 수단에 불과하죠. 그러면 몸은 점점 퇴화해요.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라고 생각해요. 몸이 망가지면 우주가 망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인드컨트롤이나 마인드파워라는 말은 의미 없죠. 몸이 망가지면 다 소용없거든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행복하려면 돈도 시간도 있어야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연골이라 생각해요. 연골이 없으면 인간은 골골해지죠. 그러니 연골이 멀쩡할 때 여행도 다니고 몸을 움직여 많은 경험과 도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삶의 목적이나 비전을 묻는 질문보다 인생에 있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언인지 묻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저보고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이 뭐냐? 책도 70권 쓰고, 이룰 것 다 이룬 것 같은데 뭘 또 사하라까지 가느냐? 안나푸르나는 왜 가느냐?’ 이런 질문들을 하지만, 저는 그저 제 인생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키워드 세 가지(도전, 열정, 혁신) 대로 사는 것뿐이에요. 도전적으로 열정적으로 혁신적으로 그렇게 살다 보면 새로운 경험이 생겨서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되고, 그 부산물로 책이 나올 수도 있고, 덤으로 제가 행복하고 즐거워질 수도 있는 거죠.”
인생의 부록을 다시 쓰는 시점 ‘불혹(不惑)’
“마흔을 불혹이라 하잖아요. 반대로 마흔부터는 유혹에 흔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내면에 흐르는 욕망을 절제하고 살았을 텐데 이제는 그런 욕망이 이끄는 대로 물 흐르듯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불혹은 인생의 부록을 다시 쓰는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또 중년이란 내가 인생의 중심이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자기 인생2막의 별책부록은 무엇인지 탐색해보고, 인생의 중심을 나로 잡아서 나다운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시점, 그게 바로 중년 아닐까요?”
학생들은 3월에 한 학년씩 올라가거나 상급학교에 입학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9월학기제를 도입하자는 논의와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봄의 들머리인 3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열리고 교원을 비롯한 직장인들이 정년퇴직하는 2월을 보낸 다음에 맞는 달 아닙니까?
학년은 1년간의 학습과정 단위이며 수업하는 과목의 정도에 따라 1년을 단위로 구분한 학교교육의 단계입니다. 학년은 이렇게 단계의 개념인데, 학업을 쌓아온 햇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학력(學歷)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에게 재산이란 인생에서 겪은 체험의 양”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살면서 배운 양, 공부한 양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학생들이 매년 한 학년 올라가듯 인생이라는 교실에서도 그렇게 차근차근 학년이 올라가 성취가 쌓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데, 학교에서와 달리 인생이라는 교실엔 낙제나 유급은 있지만 추월과 월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큰 어려움입니다. 수직 상승하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돌고 돌면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차장일 때 부장이 될 공부, 부사장일 때 사장이 될 공부, 교감일 때는 교장이 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학교 공부든 직장 공부든 인생 공부든 공부는 한결같고 근면하게 해야 합니다.
공부는 배우는 일과 생각하는 일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배우고 생각하며 생각하고 배우는 과정이 적절한 순환구조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에서 망과 태는 늘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 걸까?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것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터득하기 위해서, 자연과 우주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이를 통해 인격을 도야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일 테지요. 그래서 교과서로 배우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공부에는 의지하고 기댈 만한 교과서가 없고 늘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선생님도 없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공부입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문정희 시인의 작품 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사물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글을 많이 읽고 모든 사물로부터 배우다 보면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과 뉘우침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삶이란 어쩌면 후회투성이인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시인·작가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는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되풀이할 수 있다면/ 열여섯 살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입니다.
케스트너는 열여섯 살에 뭘 했던가? 그 시에 의하면 예쁜 꽃을 따서 책갈피에 끼워 말렸고, 학교로 가는 도중 빨강대문 파랑대문 앞에서 친구를 불렀고, 밤의 창가에 서서 별들을 헤아려봤고, 거짓말을 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토라져서 닷새 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고, 밤늦은 공원에서 키스하고 싶어 할 때 얼굴을 돌리는 볼이 빨간 소녀와 산책을 했고, 문을 닫으려는 상점에 들어가 소녀와 나를 위해 2마르크 50페니히로 똑같은 가락지 두 개를 샀고, 곡마단 구경이 하고 싶어 엄마를 졸랐고, 처음 만져본 여자의 가슴이 너무 부드러워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게 오로지 케스트너만의 기억일까요? 정도 차는 있지만 우리 모두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에리히 케스트너는 이라는 시에서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고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문입니다. 1,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고통과 나치의 혹심한 탄압을 겪었으니 그렇게 말할 만합니다. 고통이 없었던 열여섯 살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삶에는 월반과 추월이 없는 것처럼 음악의 도돌이표나 윷놀이 판의 ‘백(back)도’와 같은 과거 회귀 타임머신이 없습니다. 제자리에 머물거나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신문사의 편집국장과 주필까지 거친 분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내가 지금 사회부장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모르던 것,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밝게 보이고 사려와 분별도 나아져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석했던 다른 후배들은 ‘언제까지 혼자 다 해먹으려고?’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선배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지요. 후배들에게 교과서나 교복을 물려줄 때처럼 깨끗하고 깔끔하게 쓰고 넘겨주어야 좋습니다.
제대로 올바른 공부를 하고 그 공부를 충실하게 전수해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 ‘박학이상설지(博學而詳說之) 장이반설약야(將以反說約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가 널리 배워서 상세하게 풀이하는 것은 (학식을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장차 되돌아가 요점을 알아듣게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중국 속담에 “사독서 독사서 독서사(死讀書 讀死書 讀書死)”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단 세 글자로 만들어 낸 이 속담의 뜻은 “맹목적으로 공부하면서 쓸모없는 책을 읽으면 그런 공부 하나마나”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공부를 하랬더니 개잡이를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몇 학년 몇 반입니까? 63세는 6학년 3반, 75세는 7학년 5반이라고 부릅니다. 학교의 학년은 올라갈수록 졸업과 새로운 출발로 이어지지만 인생의 학년은 올라갈수록 생의 마감과 작별로 귀결되니 나이가 드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아질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후배들이 본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선배입니다. 어떻게, 유급 없이 한 학년 올라갈 준비가 끝났나요?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이사장,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청바지’를 즐겨라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 갔더니 건배사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외친다. 연배가 비슷한 또래다 보니 자영업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일에 매달려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 욕구 심리로 ‘청바지’를 부르짖는 것 같다. 사실 그동안은 모두들 일에 매몰돼 요즈음처럼 자유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오지 못한 것 같다.
내 경우도 1975년 직장 생활을 시작해 잠시 공직, 삼성그룹 간부 임원, (주)신라밀레니엄 CEO, 일요시사 회장 등으로 일에 파묻혀 지내다 2013년부터 자유인이 되어 최근에는 매주 2회 문화 강좌 수강, 1~2회 등산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2013년 8월에는 백두산 서파-북파 트레킹을 계획했는데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서파, 북파 등정 및 지하삼림 트레킹으로 만족하고 아쉬운 마음에 대신 2014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를 트레킹하기로 하고 건기에 트레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10월 24일~11월 3일 사이에 친구 3명 등 일행 13명이 H여행사를 통해 카트만두-포카라-푼힐 전망대-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체력, 고산병, 식사 걱정할 필요 없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세운 뒤로 히말라야에서 매일 6~9시간씩 총 80km를 팔일 동안 트레킹해야 하고 4000m 이상 고지를 오르는 데 따른 체력과 고산병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력은 나름대로 일년 넘게 매주 1~2회 4시간 내외 등산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안 했으나 4000m 이상 고산 경험은 처음이라 고민이 돼 출발 전 병원에서 다이막스(이뇨제)와 비아그라를 처방받았다.
고산은 산소가 상대적으로 희박해 뇌에 적정한 산소 공급을 위해 혈류량을 늘려주는 비아그라와 이뇨제 이외 별다른 처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트레킹 과정에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고 끼니마다 제공되는 보리차를 물통에 채워 수시로 마신 결과 처방해 갔던 약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천천히 걷고 물 많이 마시는 것이 고산병의 약인 셈이다.
또한 20여kg의 짐, 식사 등도 걱정되었으나 여행사의 편의 제공으로 걱정 없이 트레킹만 하면 되었다. 식사는 매 끼니 한식이 제공돼 잘 먹고 영양 섭취에 충분했다. 우리 일행 13명을 위해 트레커 개인 짐과 식자재 등에 포터 15명이 동원되고 식사 준비에 조리팀 5명, 전문 안내인을 비롯한 가이드 3명 등 그야말로 ‘황제 트레킹’(그러나 경비는 300만원 미만)이었다. 일행 중 50대 중반 여성이 있었는데 등산 경험도 적어 항상 맨 꼴찌에 처졌으나 마지막 가이드가 따라붙어 전속 가이드 역할을 해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아마도 각자 등산 장구를 메고 침식을 하며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라면 전문 산악인 이외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봉(高峯) 무리, 일출 황금설경(黃金雪景)은 장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푼힐 전망대를 경유할 경우 닷새 동안 올라가고 사흘 동안 내려오는 긴 여정이다. 카트만두에서 국내선으로 포카라(40여분 탑승)를 거쳐 버스, 지프로 두 시간 이동 후 맛보기 트레킹을 한 뒤 힐레에 도착하면서 롯지 생활과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쨋날 일곱 시간 트레킹 끝에 고라파니에 다다른다. 푼힐 전망대 (3210m)를 들르기 위해서다. 이튿날 새벽 네시반 기상해 한 시간에 걸쳐 등산 후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준봉에 비치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었다.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 위치한 다울라기리(8172m), 투크체(6920m), 안나푸르나(8091m) 등 고봉들의 꼭대기 만년설을 비출 때 시시각각 눈이 반사돼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고봉들의 일출 황금설경 장관을 보러 온다. 하산할 때 보니 입장료를 받던 관리인들이 없어졌다. 새벽 등정객 외에는 전망대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아침 식사 후 트레킹을 시작해 때로는 3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숲속 길도 지나고 만년설이 녹은 장엄한 물소리의 계곡, 수백 미터 높이의 폭포 등을 지나 츄일레 롯지, 시누와 롯지, 데우랄리 롯지 등에서 머문 후 마침내 트레킹 닷새째 저녁 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를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입구에 이르렀다. 불과 몇km 앞에 펼쳐지는 고봉들이 우리를 반기듯 그동안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속살을 드러낼 때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전기 사정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후 이튿날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 몇 백 미터 올라가 일출이 비추는 고봉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푼힐 전망대는 일출시 멀리서 히말라야 황금 고봉을 감상하는 데 비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바로 지척에서 안나푸르나(8091m), 안나푸르나 사우스 피크(7219m), 강가푸르나(7454m), 안나푸르나III(7555m), 네팔 성산(聖山,등정 불허)인 마차푸차레(6997m) 등의 고봉들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고개를 들고 지켜보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분지로 돼 있어 가장 가까이 한 곳에서 여러 고봉을 감상할 수 있는 히말라야 가운데 유일한 곳이라서 많은 트레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산하는 길은 발길이 한결 가볍다. 하산이라 해도 사흘 내내 오르락 내리락 해야 돼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가뿐하다.
등정할 때 하산하는 트레커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부러워 보였는데 지금 등정하는 사람들의 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이 비슷해 보였다. 밤부 롯지, 지누단다 롯지 등에서 머문 뒤 사흘 하산 트레킹을 마치게 되었다. 지누단다에서 노천 온천과 저녁 식사 때의 염소 수육 맛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포카라에서 국내선을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으로 옆을 보니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뒤덮여 줄지어선 고봉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궁(窮)하면 통(通)한다
카트만두 도착 첫날과 귀국 전날 밤은 카트만두 최고급 오성 호텔로 과거 궁전이었던 소알티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둘쨋 날부터는 고산지대여서 숙소가 롯지로 열악해 2~4인실에 투숙하고 공동 변소와 샤워장을 사용해야 했다. 공동 샤워장은 일 달러 지불하면 더운 물을 이용할 수 있으나 고산에서는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해 자칫 열을 빼앗기면 감기나 고산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전 준비했던 물티슈를 활용해 얼굴, 손발 등 온몸을 씻고 심지어 친구에게 물티슈로 등도 닦아달라고 해 매일 '물티슈 사워'를 했다.
그리고 첫날은 면도를 했으나 둘쨋 날부터는 도저히 면도하기 힘들어 수염을 기르기로 하였다. 일주일 기르니 제법 멋있게 자라 주변에서 ‘만화가 이모(某) 씨 같다’면서 계속 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옷도 등산복, 평상복, 속옷 등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많이 준비했으나 초반 하루 이틀 이외 별로 갈아입지 않게 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고 멋내기도 필요 없었다. 준비해간 체육복은 만사형통이었다.
롯지에 도착해 간편복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잠잘 때도 보온을 위해 체육복을 입고 침낭에 드는 것이 매일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노숙자’같은 생활이었다.
한 번은 등산 스틱 한 개가 고장나 ‘장애 스틱’이 되어 다소 불편했는데 친구가 맥가이버칼로 등산로 주변에 널려 있는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줘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대나무 스틱’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 행복의 근원
네팔은 1인당 국민소득이 750달러로 가난한 나라이다. 카트만두 이외 거주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트레킹하다 보면 수십 계단의 다랑이 논(주로 벼, 조 농사)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밖에 일부 국민이 트레킹 가이드, 포터, 셰르파(전문 산악인 가이드) 등 관광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반 트레킹 포터들이 일주일 동안 짐을 져나르고 몇 십 달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핑돌았다. 이마저도 고루 나누기 위해 마을별로 할당하고 순번을 정해 고용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18일 에베레스트 남동루트 쿰부 얼음폭포(5800m) 눈사태로 사망 14명, 실종 3명 사고 당시 셰르파 사망 보상금이 1인당 415달러에 불과해 셰르파 300여명이 파업을 벌인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네팔인들은 대체로 낙천적이다. 40여 kg의 무거운 짐을 이마에 메고 3000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겠지만 ‘나마스테(Welcome)’인사하면 웃으면서 ‘나마스테’한다. 저녁 식사 때 포터, 가이드, 조리팀 등 일행은 별도로 식사를 하는데 식사 전, 식사 중, 식사 후 그들 나름의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
트레킹하면서 마을을 지날 때 어른, 어린 아이들을 보면 항상 밝게 웃는 낯이고 얼굴이 평화롭다. 카트만두만 해도 거리가 무질서하게 복잡하고 매연이 심해 몇 분만 걸어가도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인데 그래도 네팔인들은 잘도 참고 견디며 산다.
그동안 보도 등에 따르면 가난한 부탄, 네팔 같은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큰 욕심 없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하루 하루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 아닐까?
노자(老子)는 소우주(小宇宙)와 대우주(大宇宙)를 설파하였다. 대우주는 우주의 생성, 존재, 법칙 등 진리로 인간이 인식하든 안 하든 존재하는 것이고 소우주는 인간 각자 거울 속에 비친 인식으로 소우주는 각자의 지식,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네팔인들은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생활 수준 및 문명 정도가 낮은 데다 전기 및 통신 제약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뿐더러 개별 수준 차이도 별로 없어 그 정도 생활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잠시나마 번뇌에서 벗어나 어떻든 그네들의 참삶의 지혜를 맛보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 감사하며 욕심을 줄이고 남과 더불어 매일 매일 충실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을 기약해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당신이 쓸모없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던 내일이다(Today that you wasted always is tomorrow that the one who died yesterday wanted to have so desperately.)’라는 경구가 새삼 귓전을 때린다.
△ 변종경(65) 일요시사 전 회장은 서울대학교를 졸업(1973)한 뒤 잠시 공직을 거쳐 미국 유학, UCLA 대학원에서 석사 취득(1985) 후 1987년 삼성물산(주) 조사부장, 경영기획부장, 1994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 담당 임원(이사,상무,전무), 2004년 삼성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기획 분야에 주로 종사해 '기획통'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삼부그룹 계열 ㈜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에 취임해 경영 혁신을 통해 2011년 지식경제부, 중앙일보 주관 '한국을 빛낸 창조 경영인' 대상(혁신 경영 부문)을 수상하였고 2012년 일요시사 회장으로서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경영자로서 경륜을 쌓기도 하였으며 2013년 자유인이 된 뒤 등산, 사진 등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그동안 못 다한 여가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연과 생명, 그리고 젊음을 말하는 청춘까지. 그렇게 초록은 싱그럽고 생기발랄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건강’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각종 성인병과 암을 유발하는 현대인의 육식 과다 섭취가 문제로 부각되면서 채식 위주 식습관이 주목받고 있다. 채소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초록’이 연상되듯, ‘초록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 몸을 더 건강하게 가꿔주는 웰빙시대의 슬로건이라 할 수 있겠다.
초록 식물의 ‘푸른 혈액’ 엽록소
초록 식물에게 생명과 색을 선사하는 엽록소를 일컬어 ‘푸른 혈액’이라 부르곤 한다. 엽록소는 소염작용과 해독작용으로 각종 염증을 막아주고 손상된 세포를 재생해 암이나 각종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또한, 항알레르기, 항콜레스테롤 작용을 하며 혈압 안정, 피로 해소, 노화 예방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
이러한 엽록소를 가장 많이 함유한 것은 역시나 식물이다. 녹차, 매실, 브로콜리, 시금치, 매생이, 알로에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린푸드에는 엽록소 외에도 비타민을 비롯한 우리 몸에 이로운 각종 영양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오히려 주변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어 섭취에 소홀할 수 있는 그린푸드. 그중에서도 특별히 꼭 챙겨 먹어야 하는 그린푸드가 있다면 무엇일까?
홍영재 박사가 추천하는 그린푸드 4선
1) 암 증식을 억제하는 ‘브로콜리’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생육을 막는 ‘설포라판’, 당뇨에 유익한 ‘크롬’, 대장암 발병률을 줄이는 ‘식이섬유’ 등이 풍부하다.
2) 독을 없애는 푸른 보약 ‘매실’
해독작용과 살균작용이 뛰어나 각종 독성물질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 준다. ‘음식의 독’, ‘피 속의 독’, ‘물의 독’ 이렇게 3독을 없애는 효능이 있어 ‘푸른 보약’이라 일컫는다.
3) 태양의 영양소 ‘매생이’
식물성 식품이면서도 단백질 함유량이 높고 지방, 탄수화물, 무기질, 비타민 등 5대 영양소를 모두 지니고 있어 우주 식량으로 지정될 정도로 ‘완벽 식품’으로 손꼽힌다.
4) 초록색 인삼 ‘시금치’
베타카로틴, 철분, 칼륨, 칼슘, 엽산 등이 풍부해 빈혈, 치매, 골다공증 등에 좋고, 눈의 노화로 발생하는 백내장의 발생 위험을 낮춰준다.
영양만점 브로콜리 맛있게 즐기자
브로콜리는 마음만 먹으면 활용도가 높은 식재료다. 과일이나 채소 등과 함께 주스를 만들어 먹어도 좋고, 조림이나 볶음 요리에 넣어도 색감이나 영양이 풍부해 진다. 라면을 먹을 때도 브로콜리를 넣어 끓여먹으면 나트륨 배출을 도와 더 건강하게 섭취할 수 있다.
# 브로콜리 스무디
일주일에 한 번, 신선한 브로콜리 스무디 한 잔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활력 넘치는 일상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스무디 재료: 요거트 80ml, 바나나 70g, 사과 40g, 브로콜리 70g, 키위 50g, 우유 200ml, 아몬드 5알
# 브로콜리 샐러드
어떤 식재료와도 부담 없이 어울리는 잘 브로콜리를 살짝 데쳐 샐러드에 응용해보자.
샐러드 재료: 브로콜리, 청경채, 양상추, 치커리, 비타민, 토마토, 아몬드, 골뱅이(인원에 따라 적당량 준비한다.)
샐러드 소스 재료: 키위 2개(180g), 사과 1/2개(90g), 양파1/4(50g), 레몬즙 약간, 올리브유 약간
암 증식을 억제하는 브로콜리
베타카로틴, 셀레늄, 각종 비타민, 루테인, 식이섬유 등 항암작용을 하는 성분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어 암에 강한 채소라고 불릴 만하다. 특히 설포라판, 인돌, 리그난 성분들은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 호르몬과 관련된 각종 암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 중 설포라판은 단순히 암을 예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암세포의 추방과 증식 억제에도 탁월하다. 인돌은 발암 물질을 해독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어 에스트로겐과 연관이 깊은 유방암 세포의 성장 및 전이를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다.
브로콜리, 선택이 아닌 필수
브로콜리의 비타민 C 함유량은 레몬의 2배이고 다른 채소나 과일에 함유된 비타민 C에 비해 열에 의한 파괴가 적고 섭취가 용이해 피로 해소 및 피부 미용,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비타민 C는 칼슘의 흡수를 촉진하여 뼈를 건강하게 해주므로 골다공증의 예방 효과가 있어 중년여성에게는 브로콜리 섭취가 매우 중요하다.
이외에도 항산화, 노화 방지, 혈전 예방, 시력 보호, 비만 예방, 면역력 강화, 성인병 예방, 변비 예방 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에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할 음식이 있다면 브로콜리는 그중 한 가지가 될 것이다.
홍영재 박사
산타 홍 클리닉 원장, 대한여성비만 노화방지학회 회장
저서 ,
명로진(明魯鎭·49). 그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배우 명로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명로진의 인생에 있어 그는 배우이기 전에 작가의 길을 먼저 걸어왔다. 지난 15년간 펴낸 책만 40여 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저자 명로진’으로 남고자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 책을 쓰고 싶다는 그에게도 오래도록 남게 될 책 한 권이 있으니, 바로 ‘장자’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장자, 그리고 깨달음
5년 전, ‘홍대학당’이라는 고전읽기 교실을 개설하며 ‘장자’를 만났다. 논어,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다양한 고전을 접했지만 ‘장자’는 그에게 남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책 쓰기 교실을 하다 보니 인문 고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장자를 접하게 됐는데, 굉장히 재밌고 ‘나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전은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한 번 읽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거예요. 분명 똑같은 문장이고 똑같은 내용인데도, 그때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빈 배’가 되어라
깊은 관계일수록 기대가 커지고, 기대가 큰 만큼 갈등이 생겼을 때 받는 상처 또한 크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빈 배’가 되고자 한다.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날 때면 장자의 ‘빈 배’를 떠올리곤 해요.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오는 다른 배하고 쾅 부딪친 거예요. 돌아보니 빈 배였죠. 그러니 화를 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고 다시 가는데 또 뒤에서 오는 배하고 쾅하고 부딪쳤어요. 이번엔 사람이 타고 있었죠. 좀 전과 똑같이 부딪쳤는데도 사람이 있으니,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 결국 욕설까지 하게 되더라는 거예요. 거기서 깨달은 것이, 그러면 우리 자신이 빈 배가 되어 살아간다면 어떨까라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나를 보고 소리를 치지도 않을 것이고, 화를 내지도 않고, 다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속세의 번뇌를 씻어주는 장자
그는 마음이 번잡할 때 북한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고 했다.
“장자는 제게 북한산 같은 책이죠. 북한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보고 있으면 ‘아, 내가 왜 저 밑에서 그렇게 아옹다옹 살았나’싶어요. 장자도 마찬가지예요. 읽고 나면 그런 위안이 되죠. 장자가 죽을 때, ‘내 시체를 길바닥에 놔둬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그럼 개미와 벌레가 스승님의 시신을 먹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장자는 ‘밤하늘이 관 뚜껑이고, 흙이 나의 관 밑바닥이고, 온 우주와 별들이 나의 죽음을 애도할 텐데 뭐가 아쉽겠느냐. 또, 내가 길바닥의 시체로 썩지 않으면 개미와 땅강아지들은 뭘 먹고 살겠느냐’라고 했다는 거죠. 그런 구절을 읽으면 ‘그래 사는 거 뭐 있어. 너무 욕심낼 것도 없고 너무 집착할 것도 없고 그렇게 물 흐르는 대로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
장자가 씌어진 지도 어언 2400년이 흘렀다. 장자는 이 세상에 없지만, 장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힘을 얻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죠. 논어나 맹자에 비해 장자는 굉장히 이야기가 많아요. 저 역시 이야기를 통해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통해 힘을 얻고 위안이 될 수 있는 책이요.”
진정한 성공의 의미, 장자에서 찾다
청년은 성공하는 삶에 의미를 두지만, 중년은 성공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 그는 그 의미를 ‘장자’를 통해 찾길 권했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진짜 성공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요. 장자는 중년 이후에 읽어야 하는 책 같아요.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을 이뤘을 때, 그 이룸의 의미가 뭔가라는 깨달음을 주거든요. 살다 보면 그 이룸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거죠. 장자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 인간의 존재나 행복에 있어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힌트를 발견하게 되죠.”
명로진의 인생 이모작
다양한 이력만큼이나 다채로운 인생2막을 꾸며가고 있을 법했던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물었다.
“저는 달리고 있지 않아요. 슬슬 걸어가고 있어요. 제 두 번째 삶은 단순화시키는 게 목표예요. 읽고, 쓰고, 놀고. 그게 남은 인생의 3대 프로젝트예요. 책도 슬슬 읽고 여행 다니고 바람처럼 살아요. 얽매일 게 없잖아요. 정년을 다한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조직이나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까요. 마음이 젊으면 젊은 거예요. 뭐든 할 수 있죠.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잘하고 싶어 하는지가 문제다’라는 책 제목처럼, 잘하고 싶으면 되는 거예요. 성과를 낼 필요는 없어요. 잘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자체로도 보상되거든요. 못하면 또 어때요. 그냥 재밌게 하면 되는 거죠. 성과는 인생 전반기에 다 냈고, 지금까지 했는데 성과 안 났으면 이제는 그냥 그만큼인 거에요. 그럼 그거에 만족하고 이제부터라도 재밌게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진주운석 유성 파편
진주 운석이 유성 파편으로 공식 확인된 가운데 가치 변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성 파편 운석의 가치는 상당하다. 외계에 떨어진 광석은 지구 내에 없는 새로운 광물일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광물로 미지의 우주를 탐구하는데 쓰이거나 희소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기권에 고압으로 연소하면서 올 때에 새로운 성질의 광물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현대 과학자들에 따르면 금과 같은 새로운 광물이 탄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새로운 광물에 대한 수요도 많다고 전해진다.
당초 진주운석은 세간에 알려진 기대 가치보다 가격이 현저히 낮게 책정 되기도 했다. 진주운석은 구립운석을 뜻하는 '오디너리 콘드라이트' 중에서 금속 함량이 높은 H-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분석됐지만 가장 흔한 종류여서 가격대는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해외 운석 가격 거래 사이트에 따르면 진주운석 가격은 1g당 3달러 선이다. 이에 따라 대곡면 파프리카 비닐하우스에서 발견된 9.36kg짜리 운석은 최저 약 3000만원이 되고 미천면 밭에서 발견된 4.1kg 운석은 1300만원 정도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국외 반출 막기위해 통관을 강화하는 등 실제 가치는 더 커질 전망이다. 또한 학술적·문화재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관계자들은 재질로 보면 세계적으로 흔하지만 국내 발견된 운석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게는 수억원까지도 전망했다.
한편 미래창조과학부는 최근 발견된 ‘진주운석’이 지난 9일 전국에서 목격된 유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낙하운석)으로 확인됐다고 24일 밝혔다.
진주운석 유성 파편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진주운석 유성 파편, 공식 확인으로 가치가 더 커지겠네" "진주운석 유성 파편, 공식 확인 됐으니 값어치가 더 커져야 할 것" "진주운석 유성 파편, 아무리 생각해도 로또" 등의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