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학교 뒷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진달래와 산수유가 몽우리를 터트렸습니다. 주위 동산뿐 아니라 무겁고 건조한 시멘트 건물마저도 환하게 밝혀줍니다. 무게 없는 분홍색이 땅 위를 떠다니며 곳곳에 봄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뿌리에 연이은 가지가 있고 다시 더 가는 가지에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멀리 떨어져 보면 색만 보입니다. 이것을 사진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사진은 다른 시각예술처럼 사람의 손으로 이미지를 일일이 그려나가지 않고, 카메라라는 어둠상자에 빛으로 상을 맺히게 하고 그것을 화학적이나 전자적 방법으로 정착시켜 서로 나누는 예술입니다. 그 빛을 인정하고 나눌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진의 좋은 점을 많이 알게 됩니다. 우리 맨눈에 잘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것을 사진기에 담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과정을 통해 미묘하게 숨어 있는 빛과 다양한 색의 변화를 나름 이해하게 됩니다. 빛의 반응에 따라 사진 속 이야기와 색의 변화는 얼마든지 바뀌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는 그중 조리개 값의 변형으로 색의 공중부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만물의 겉모양만 보게 됩니다. 물론 사물을 뚫고 적절한 두께를 선택해 볼 수 있는 엑스레이(x-ray) 같은 사진기구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색이기도 하고 질감인 그 겉모양만으로 사물의 진위와 그 속을 유추해 냅니다. 질감과 색은 엄밀히 구분하면 일종의 포장입니다. 아주 섬세하고 얇은 겉껍질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수채화를 많이 그린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색은 사물에 입혀진 얇고 아름다운 포장이다, 그것은 가장 감각적인 피부이다. 그것은 섬세하고 완벽하기까지 하다. 사물들은 색채 가운데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그림만 그린 폴 세잔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색은 인간의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구체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빛은 모든 색을 만나고 전달해 줄 수 있는 대단한 그 무엇임이 20세기 21세기를 거치며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과학이 이젠 빛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빛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빛을 응용하는 많은 첨단 결과물들을 하루가 다르게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정작 빛의 본질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색도 그렇습니다. 우선 빛이 물질인지 아닌지 그 경계를 정하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내가 만난 많은 빛은 그 색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빛이 무슨 색인지 그려보면 알게 됩니다. 빛은 자신의 색을 보여 달라는 세상에게 조건을 붙입니다. 너그러운 사랑의 시선으로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늘에도 색은 존재합니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런 빛을 경험한 사람은 그늘 어느 곳에서든 색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하며, 수많은 곳에서 그늘을 보았고, 담았지만, 나의 사진 어디에도 늘 빛이 그늘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빛의 색은 작은 불꽃이 되어 이곳저곳에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긴 겨울을 지나며 피어나는 봄꽃들이 그렇습니다.
빛은 에너지 레벨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바뀌는 감정이 없는 물리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진 작업에서의 빛에 따른 색의 변화는 문법이 있는 감정의 교감에 논리가 함께한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합니다.
봄의 들판과 겨우내 빛은 얼마나 오랜 시간 색들을 기다렸을까요?
많은 기다림으로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진달래의 원형을 보기 위해 나뭇가지도, 꽃잎의 디테일도 조리개를 열어 지웠습니다. 더구나 초점을 의도적으로 뒤에 있는 흰 꽃에 맞췄습니다. 드디어 무게도 부피도 없는 핑크빛이 디테일 없이 하늘에 떴습니다.
색도 언어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는 따짐보다 제가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연한 분홍색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축복된 봄입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나만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중년들에겐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로망이다. 굳이 ‘님과 함께’ 가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때문에 내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시선을 사로잡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직접 집 짓기에 성공한 사람이 세운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고제순(高齊淳·57) 원장의 흙집학교가 바로 그런 곳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고제순 원장은 애초에 농촌이나 건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곳에서 그는 ‘비판적 합리주의’로 잘 알려진 칼 포퍼(1902~1994)를 전공했다 .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원주에 자리를 잡고 연세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쯤 되던 시기였다.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 그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죠. 가장 큰 문제는 건강이었어요. 원주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때는 ‘새집증후군’이라는 단어도 몰랐으니까 대처할 방법도 알 수 없었죠. 아토피와 천식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병도 얻었습니다.”
대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의식주를 공부하고,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衣) 식(食) 주(住)가 아니다. 의(醫) 식(食) 주(住)이다.
“현대사회에서 옷은 충분히 해결된 문제니까요. 우리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돌보는 것과 무엇을 먹는가, 어디에 사는가인데, 현대인들은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잖아요. 제도권에서 수십년 교육을 받았음에도 말이죠. 이런 삶의 기초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귀농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주 외곽 지금의 자리, 현재는 흙집 학교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에 터를 잡았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선생이 생을 마친, 지금의 토지문학관이 있는 자리 인근이다.
터를 잡는 것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집에 대한 공부다. 그 전까지 못질 한 번 제대로 해본적이 없던 그였기에 공부를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공구도 조금씩 사 모았다. 황토로 벽돌을 만들 수 있게 유압식 장비까지 구입했다. 그런 준비과정을 통해 3년 만에 흙집을 완공했다.
왜 흙집이었을까? “다양한 형태의 집들 중에서 흙집을 선택한 것은 우선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많이 사용하는 참숯을 비롯해서 흙과 나무, 돌 등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이 이로운 에너지를 주거든요. 황토는 조직이 느슨해 온도와 습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해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집을 원했던 것도 이유입니다. 집의 수명이 다했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도 흙집은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요.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뒤끝이 고약해요. 폐기물로 변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니까.”
물론 흙집을 짓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집을 지을 당시 흙집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틈 날 때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옛집들을 살펴봤다.
가족과 함께 낙안읍성이나 용인민속촌, 안동 하회마을 등 옛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설계도 모눈종이를 사다가 직접 그려가면서 수정했다. 몇 번이나 수정해야 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물론 전기나 수도와 같은 전문적인 분야나 준공검사를 위한 행정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은 혼자 해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해냈다. 2000년 5월부터 11월까지 반년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된 첫 번째 흙집은 여전히 아름드리나무처럼 그가 기대고 쉴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두 딸을 위해 만들었던 다락방부터 볕이 잘 드는 거실, 일하기 편해 보이는 부엌 등 집안 곳곳에 그의 정성이 배어 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 좋은 것을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학교였다. 이야기 도중 그는 책을 한 권 소개했는데, 후나세 스케(船瀨俊介)의 이다. 그 책의 부제는 ‘콘크리트에 살면 9년 일찍 죽는다’인데, 다소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다. “흙집에서 사니 너무 좋더라고요. 4년 동안이나 앓고 있던 질환들도 싹 나았어요. 나는 이렇게 좋은데, 사람들은 평생 일하고 돈을 모아 몸에 좋지 않은 아파트를 장만한다는 것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화가 나더라고요. 누군가 이 흙집을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건축 전문가라는 분들은 대부분 콘크리트 전문가들이니 할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래서 경험은 짧지만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포털 사이트 다음에 카페를 개설하고 ‘흙처럼 아쉬람’을 시작했죠.”
이름에 ‘흙처럼’이란 단어를 쓴 것은 그의 호 여토(如土)에서 따온 것이다. 자연 속에서 흙처럼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 또 다른 단어 ‘아쉬람’은 인도 힌두교도들의 명상을 위한 수행처, 즉 기거하는 집이나 촌락을 뜻한다. 인도 전역에는 수행자들을 위한 아쉬람들이 곳곳에 있고,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지냈던 간디 아쉬람은 수행자들이 순례하는 성지로 꼽히기도 한다.
고 원장이 학교 이름을 아쉬람으로 지은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노동을 넘어 정신 수양과 자기 공부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수행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육을 위해 그는 그간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흙집 건축이론을 보완하고 체계화해야 했다. 어떻게 흙집을 지어야 이상적인 구조가 되는지, 구조적으로 어떤 요소들을 갖춰야 튼튼한 집을 얻는지, 단열과 건축공법, 디자인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등이다. 문득 이런 이론적 정리를 위해 그가 찾았던 스승이 궁금해지는데,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저에게 집 짓기를 알려 준 스승이 있습니다. 바로 새와 벌이죠. 풀숲에서 새의 둥지를 살펴보다 그 구조적 완벽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벌집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집 짓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배워야 할 점들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자연 소재로 직접 짓고,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집을 튼튼하게 짓는다는 점이죠.”
그가 말하는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집은 방의 형태를 뜻한다. 대칭 형태의 원형이나 육각형, 팔각형 형태의 방 구조를 갖는 집. 세계적인 명상 공간들도 비슷한 구조다. 이런 구조는 에너지가 집중되는 특징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흙집학교 ‘흙처럼 아쉬람’의 교육과정에서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철학, 그중에서도 생명철학을 토대로 한 구체적인 기술과 함께 생태적인 삶에 대해 전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는 말 그대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어요. 나와 남, 나와 사물을 떼어 놓고 생각하는 분리의식이죠. 하지만 실제로 우주에서 나만 잘되고, 나만 행복한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남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 중심적인 생명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연과 인간은 분리될 수 없고,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합일 의식을 통해 생태학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죠.”
그의 흙집에 대한 철학은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아 명지대학교에서 건축과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적도 있다고. 그가 운영하는 흙집학교를 건축과 교수나 건축사들이 찾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2004년 시작한 학교는 벌써 초급과정은 103기, 종합과정은 94기까지 배출했다. 인원으로 따지면 2700명 정도 되는 적지 않은 숫자다. 한 기수에 15~20명으로 운영되는 데, 초급과정은 이론 중심으로 3일 동안 진행되고, 종합과정은 13일간 이론뿐만 아니라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실습과 함께 가르친다. 학생은 주로 40~50대가 많고, 60대도 적지 않다. 30대나 여성도 기수마다 한 명씩은 있다고 한다.
“종합과정은 공구 사용법 같은 기초 지식에서부터 거푸집 설치, 구들이나 골조의 구성, 설비나 전기까지 모든 부분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함께 배운 동기끼리는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통하게 되는데, 안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집 지을 때 서로 품앗이를 하는 전통이 생겼어요. 건축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도 줄이고, 아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집을 지은 졸업생의 수는 적지 않다. 학교 쪽에 알려진 것만 따져 봐도 30% 정도 직접 지은 것으로 추산된다고. 숫자로 따지면 900채 정도 되는 셈이다. ‘흙처럼 아쉬람’의 다음 카페(cafe.daum.net/mudhouse)를 방문하면 졸업생들이 직접 건축한 흙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집을 짓으면 실제로 어느 정도 건축비를 절약할 수 있을까. 흙집학교에서 알려주는 방식의 단단한 집을 시공사를 통해 지으려면 토지 매입가를 제외하고 3.3㎡당 약 6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인건비를 제외하고 자재비만 따지면 약 250만원이 소요돼 절반 이상 절약이 가능하다고 고 원장은 설명했다. 예를 들어 165㎡(50평) 정도의 흙집을 짓는다면 1억2500만원에 나만의 집을 갖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시공사에 의뢰했을 때에 비해 1억7500만원을 절약한 금액이다. 물론 모든 건축 과정을 내 손으로 직접 하는 수고로움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해야 한다.
흙집에 대한 그의 또 다른 꿈은 무엇일까? 그는 현실 속에서의 ‘흙집 전도사’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저처럼 자연으로 들어와 흙집을 짓고 사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현대인들에게 이런 삶은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자연 속 흙집으로 올 수 없다면, 흙집이 그들에게 가는 것이 맞지 않나하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파트를 흙집공법으로 짓는다든가, 연립을 흙집으로 리모델링하는 형태의 일들 말이죠. 아직 구체적으로 시도는 못 해보고 있지만, 충분히 사업성도 있고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흙집 알리는 일을 더 열심히 하다보면 충분히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건넌방에서는 아버지가 계신다./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중략)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하략)“
신경림(80)의 시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충북 충주 태생인 그는 이 시에서 아무리 옮겨 살아도 어릴 적의 이 그림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시는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로 끝납니다.
사람은 살면서 집을 얼마나 옮기는 것일까? 알고 보면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집을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경림처럼 자신이 살았던 집의 주소를 이렇게 줄줄이 댈 수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기호와 지향에 맞춰 집을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요. 더욱이 노년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스스로 집을 짓거나 고쳐서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집은 개인과 그 가족에게 하나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집 宇, 집 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뜻은 같다 해도 宇는 상하사방이라는 공간, 宙는 고금왕래라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집만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도 집을 짓습니다. 대장부 사해위가(大丈夫 四海爲家), 대장부는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간 속의 집에 관한 말입니다. 맹자가 대장부를 논하는 글의 맨 앞에 나오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居天下之廣居]라는 말도 공간 속의 집을 말합니다. 정정당당하고 구차스러움이 없는 인격을 천하의 넓은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학문과 기예 등에서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시간 속의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 본받을 만한 사람을 뜻하는 대방가(大方家)나 전문가라는 말에도 시간 속의 집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천지자연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나그네입니다. ‘하이쿠의 성인[俳聖]’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시에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라는 게 있습니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와 아주 흡사합니다.
바쇼에게는 자연도 시간도 과객이고 인간은 나그네였습니다. 삶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의 길이며 집이란 그 방랑의 편의와 일정한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었습니다. 바쇼는 방랑 속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추출함으로써 불후의 시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바쇼처럼 살 수 있는 자유인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한 집을 정처(定處)로 마련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방위와 향을 보고,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이른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를 고르려고 애를 씁니다. 산남수북을 양(陽)이라 하고 그 반대인 산북수남을 음(陰)이라고 구분하면서 길지를 찾곤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물자리부터 보라”거나 “집이 망하면 지관 탓만 한다”거나 “훌륭한 집을 나쁜 땅에 세우는 자는 스스로를 감옥에 맡기는 자다”라는 각국의 속담과 격언은 다 입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찾는 것은 집을 지을 때나 묘 자리를 고를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지형과 지세를 살펴 땅을 골랐습니다.
집을 짓거나 살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기준은 이웃입니다.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百萬買宅 千萬買隣]는 말이 있습니다. 의 권학편에는 “군자는 사는 곳은 반드시 좋은 환경을 고르고 교유하는 사람은 반드시 학덕이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居必擇鄕 遊必就士]는 말이 나옵니다. 둘 다 이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명언입니다.
요즘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아동문학가 강지인의 시 ‘집’이 그런 집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네 벽을 잡아주는 땅,/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따로 떨어지지 않고/서로 마주 보고 감싸 안아/한 집이 됩니다./아늑한 집이 됩니다.”
이웃에 대한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큰 집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의염치와 청빈을 중시하던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큰 집은 죽음을 부르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고 합니다. 큰 집을 뜻하는 옥(屋)은 尸(주검 시)와 至(이를 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은 집을 뜻하는 사(舍)는 人(사람 인)과 吉(길할 길)로 구성돼 있으니 단순한 말장난이나 문자 풀이 같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선비 김정국(金正國)이 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시인 조지훈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고루거각이든 용슬소옥이든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일정한 장소,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내 몸을 담아 그 안에서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용슬소옥(容膝小屋)이란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작은 집을 말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데, 모든 사물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면 시간 속에 오래 남습니다.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집이 크거나 작은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글 ‘집’을 인용합니다. “집이란 크다고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집에는 질서가 깃들여야 한다. (중략) 집이란 지나치게 빈틈없이 꾸며졌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키 어려운 것, 설령 제한된 비좁은 공간일망정 터진 곳이 있어야 하며 또한 막힌 곳이 있어야 한다. 집이란 패각(貝殼)과도 같아 완벽해야 하나 그 속에서는 생명이 울려야 한다. 마치 그 속에 바다의 물소리가 울리듯이.”
이제 다시 꽃 피는 봄입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을 보며 집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합니다. 꽃이 가득한 집이 그립고, 시간 속에 오래가는 자신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작가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위해서 달려갈 수도 없는 곳임을 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바쳐서 작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구름의 바다 위로 동이 튼다. 나는 지금 2002년 11월, 나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 있다. 매일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해가 새롭게 뜬다. 지금 구름의 바다 위에 무지개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름바다는 내가 작년에 많이 썼던 King′s Blue이다.”
추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홍정희(1945~ ) 화가가 2002년 12월호 에 쓴 글의 일부이다. 한 가정의 주부로, 같은 미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의 어머니로 오십 여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화혼(畵魂)의 세계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학창 시절의 작품을 모두 불사른 그 결연함이 그만의 세계를 열어왔다.
‘특정 사조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채 50년 간 꾸준히 색채 탐구와 부단한 모색과 실험, 자신만의 색면(色面) 회화의 세계를 구축,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평론가들은 예찬한다. 1996년 현대화랑에서 펼친 전람회는 1000호(5.3mx2.9m) 크기의 초대작을 비롯해 100호(1.6mx1.3m) 40여 점으로 화랑을 가득 채운 장쾌한 눈부심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아(我)’ 주제에서 ‘탈아(脫我)’ ‘passion’ ‘nano’로 이어져 온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아래 그림은 ‘탈아(脫我)’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인사동 어느 모퉁이 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추상화 작품들로 벽면을 장식하던 첫날에 떼어 온 것이다. 화랑 주인은 구상(具象)의 다른 그림을 권했지만 황토 빛깔의 ‘아(我)’ 타이틀의 이 작가 그림과 나란히 걸고 싶어서 선택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담소를 하던 중에 얼핏 시선이 간 그의 손은 영락없는 험한 노동자의 것이기에, 빤빤한 내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 적이 있었다. 치열한 생산에 기여한 그 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추상화는 어떤 정형이 없기에 눈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 점, 선의 연결부터 색상의 다양함이 도대체 이성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화면을 흩뿌리는 무작위의 물감과 불규칙적인 붓질이 보는 이의 의식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런 작품들과 친해지려면 긴 시간의 눈 맞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화면의 구도와 색상의 대비와 어울림이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고 보는 이의 의식을 출렁인다. 마음의 분화구로 사유가 흘러넘쳐 용암처럼 흐른다. 내가 나를 벗어나면 나는 없다. 다만 그 길 위에는 그 무엇이 남는 걸까. 간단치 않은 화두이다.
미술사는 현대 추상화가 1910년대 러시아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화가들이 처음 시도한 이래, 현재 많은 예술인들이 그 주제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즈음 세계 유수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우리나라 원로 화가들의 모노크롬(단색 추상화)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김태호(1948~ ) 화가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탄탄한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그리드(grid, 모눈형의 사각)의 입체를 벌집을 짓듯 쌓아 올린 아크릭 물감의 여러 색상과 선들이 오묘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고 물감을 바르고 마르면 칼로 물감을 깎아내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깎아내고 하기를 스무 번쯤 반복한 후에야 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그 물리적 노고와 끈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작가는 왜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색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 힘든 작업에서 작가는 어떤 성취감을 느낀단 말인가? 작품 ‘내재율(內在律) 200801’은 화랑에서 전시회 첫날 작가가 직접 작품 설명도 하는 자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구입한 것이고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작가는 “타이틀이 왜 내재율이냐?”는 질의에 “광부가 채광해서 귀금속을 발견하듯 표면의 물질을 깎아내 찬란한 재료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진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서로 다른 색이 날줄과 씨줄로 천을 짜듯 하나하나의 그리드를 만들고 그들이 화폭 가득히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의 요철(凹凸) 공간이 수직과 수평의 입체감을 형성한다. 물감이 두께를 더하면서 그리드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일그러져 자연스레 화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층층이 다른 색들도 나타나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방에서 생명을 뿜어내는 우주를 본다”는 작가의 변(辨)이 이해된다.
한때는 이들 두 작가의 그림을 오디오 룸에 걸고 진종일 음악을 듣다가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탈아의 화두는 풀리지 않을 뿐이고, 잠재된 의식의 흐름을 운율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양(斜陽) 무렵, 서해안 작은 언덕에 올라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순간의 풍경과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 화가가 되고 싶던 열망이 그림 수집으로 대리만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치 한 수레를 사봐야 진품 한두 점을 만날 수 있다”거나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비로소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는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섭치란 ‘여러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못하고 너절한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으로 객관적으로도 가치 높은 미술품을 구입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술품의 가치 평가는 주관적이므로 언필칭 경제의 잣대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여러 기법으로 표출하는 비의(秘儀)를 풀어가는 여정만으로도 예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녘으로 스러지는 한 줌 햇살이 깊은 고요에 침잠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새 빛이 잉태되지 않던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1987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군 시절부터한의사 생활을 했으니 어느덧 30년을 바라본다. 이재동(李栽東·54)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침구과 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인체의 생체리듬과 자연치유력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헛발질을 줄일 수 있는 한방의 철학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한다. 새해의 시작,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한방의학의 비결을 알아보자.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시니어들의 새해 건강을 위한 한방학적 고찰에 관해 물었더니 의 기본 정신에 대한 설명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한의학 서적이란 게 수천 권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한의학 하는 사람이나 대체의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두가 에 열광합니다. 에는 몸이 건강하면 병은 스스로 치유된다는 정신이 있어요. 그래서 몸이 건강해지기 위한 양생법을 추구하죠. 양생이라면 도 닦는 사람이나 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저는 이걸 임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 기본 정신은 사람의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잘 따르고 순응하면 몸이 건강해진다고 설명한다.
“만물이 소생하고 형성되는 이치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태양이 지구를 비추잖아요. 햇빛은 양기죠. 그렇게 양기가 비추면 지구의 음기인 물이 위로 올라가서 비가 되어 내려오잖아요. 태양의 불과 지구의 물의 조화인 겁니다. 이 순환 속에서 생물들이 자라나는 거예요. 그것을 음양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우주, 음양의 조화가 중요
이 교수는 우리 몸을 잘 들여다보면 바로 심장이 태양의 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반면 비뇨생식기는 물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 원리를 알고서 자기 몸이 조화를 이루게끔 노력해야 건강해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수승(水昇), 물은 올라가고 화강(火降), 화는 내려가는 수승화강(水昇火降)만 잘되면 우리 몸이 스스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데, 현대인들은 삶 자체가 수승화강을 깨뜨리게 되어 있어요.”
이 교수는 어두워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게 자연에 순응하는 법인데 현대인들은 밤낮이 바뀌어 있다는 걸 지적했다. 현대의학적으로도 호르몬 생성에 중요한 시간이 밤 10시부터 아침 5시라고 한다. 건강하고 싶다면 그 시간을 필수 수면시간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밤 10시에 맞춰서 잠을 자는 현대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호르몬은 물입니다. 밤에 잠을 자야 음의 기운을 몸에 저장할 수가 있어요. 밤에 잠을 안 자면 그 음의 기운을 소모하게 되고 물이 말라서 음양의 균형이 깨져요. 물이 올라와서 불을 꺼줘야 하는데, 불을 못 꺼주니 기운이 위로 뜹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머리에서 생기게 돼요. 현대인들은 분노조절장애가 많이 있죠. 몸이 안정되고 불을 꺼주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자는 상황에서 스마트폰, 컴퓨터, TV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우리 몸의 진액을 말리는 거예요. 충혈도 그렇고 뒷골이 당기고 얼굴에 상열감이 있고 고혈압이 발생하는 등의 현상들이 다 거기서부터 오는 겁니다.”
점차 말라가는 우리 몸의 음기를 유지해야
이 교수는 나이가 들어서 만들어지는 체형을 보면 대부분이 가분수라는 점을 지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체는 가늘고 위는 비대한 체형이 된다. 이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몸에 물이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자꾸 진액을 말렸기 때문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팔은 굵어지고 어깨는 두꺼워지고. 살면서 그런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지혜가 있으니 원리를 알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이 교수는 생활과 노력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지는 걸 보완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식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키와 체중에 대해 얘기를 하지, 체지방을 구분해서 얘기를 안 해요. 우리 몸의 지방이라는 것은 일종의 독소죠. 독소가 꽉 차 있으면 기가 위로 올라가지 못해요. 에너지가 올라오는 길이 경락입니다. 지방이 몸에 쌓이게 되면 그 길에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 음양의 조화를 위해 지방을 빼야 합니다.”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
이 교수는 지방을 돈으로 비유한다. 예를 들어 키와 근육의 양을 봤을 때 필요한 지방을 남겨놓고 넘치는 분량이 12㎏이라면 그 사람은 은행에 12억 원을 넣어놓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평소에 ‘현금’을 많이 보충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산이 쌓였다고 표현하는 이 교수는 그 ‘현금’의 정체가 바로 ‘탄수화물’이라고 밝혔다.
“현금인 탄수화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럼 탄수화물 대신에 뭘 먹어야 할까요. 노후에 하는 대표적인 경제적 대비로 건물을 만드는 게 있죠? 그러한 부동산이 바로 단백질입니다. 나이가 들면 단백질을 주로 먹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나이 쉰 살만 넘어가면 무조건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을 먹으라고 해요. 왜냐하면 쉰 살까지는 현금, 그러니까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공급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은행에 매월 500만 원씩 넣다가 차단하면, 금융적으로 대처하는 데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이걸 몸의 관점으로 봤을 때, 탄수화물을 끊고 단백질 섭취에 전념하면 당장은 현기증, 어지럼증 등의 신호가 올 수 있다. 이 교수는 그러니 우선은 급하지 않게 조금씩 탄수화물을 끊고 단백질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단백질에도 일정 분량의 탄수화물이 있기 때문에 단백질만 먹어도 몸에 쟁여둔 탄수화물에 비춰보면 필요한 탄수화물의 유지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지방 분해를 위해 활용하는 약도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그는 약을 심부름꾼이라고 불렀다. 심부름꾼은 은행에서 돈을 효율적으로 찾아오는 역할, 즉 지방대사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끔 설계된 것이다.
지방이 만병의 근원이 되어가고 있다
이 교수는 배에 지방이 쌓인다는 것은 종합적인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 척추를 받쳐주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 지방이 빠져야 근육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생기는데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가 탁해지고 녹슬어 중풍, 심장병 등의 위험도 높아진다.
우리 몸의 모든 조직은 깨끗한 피가 혈관을 돌면서 영양을 공급해주고 더러운 요소들은 운반해 소변으로 걸러준다. 그런데 지방이 있으면 그 피가 탁해진다. 그렇게 되면 면역 기제들이 자기 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고 여겨 공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가면역질환이다.
“건강해지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 변화를 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무조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연골을 제거하는 그런 식의 해결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시장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치료라고 봐요.”
과거엔 발암의 첫 번째 원인이 흡연이었다. 최근 그걸 뒤집은 게 비만이라고 한다. 지방이 껴 있으면 순환이 안 되고 순환이 안 되면 혈액이 탁해지는데, 혈액이 탁해지면 의혈이라는 암세포의 식량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음양의 조화를 통한 건강, 생활속에서 만들어야
이 교수는 음양의 기운을 다스려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충분한 잠이다.
“현대인들은 밤 10시가 어렵다면 최소한 11시에는 자야 합니다. 그렇게 습관을 바꿔 문제를 예방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커피와 녹차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을 심하게 못 자는 사람은 아침 10시 이후에는 아예 커피와 녹차를 마시지 말아야 해요.”
두 번째는 되도록 많은 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물은 사라진 음기를 보완할 수 있는 음의 에너지입니다. 물은 하루에 2ℓ를 마시는 게 좋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입을 적시듯 마셔야 해요. 사람들이 물을 못 먹는 이유가 대부분 흡수가 안 돼서입니다. 입에 적시듯 먹으면 괜찮아요. 우리 몸은 70%가 수분으로 이뤄진 일종의 물통입니다. 물통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넣어주는 것이죠.”
세 번째는 음식을 구분해 먹는 것이다.
“예순 살이 넘어가면 탄수화물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과일도 간식으로라도 먹는 게 아닙니다. 과일도 탄수화물 덩어리거든요. 절제해야 해요.”
네 번째는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 상체 운동은 손가락 움직이는 것도 안 하는 게 좋아요. 대신 무조건 하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단 오르기 같은 생활 속의 운동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 걷기는 하체 운동이 아니라 유산소 운동이에요. 하체 근력 운동을 하면 유산소 운동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저는 계단을 만나면 정말 반갑고 고마워요.”
이 교수는 얼핏 보기에는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질환들이 실은 하나의 원인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병에 맞춰 각각 해당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반복적인 시술만 받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치유하자는 이 교수의 제안이 살갑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근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독일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에데카(Edeka)의 광고입니다. 이 광고에서 매년 혼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던 아버지는 자신의 거짓 부고를 자식들에게 보냅니다. 충격과 슬픔 속에 모여든 자식들 앞에 펼쳐진 것은 장례식이 아니라 성탄절 만찬 테이블이었습니다. 놀라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너희 모두를 불러 모을 수 있었겠니?”라고 말합니다.
친구가 보내준 이 동영상을 본 60대 후반의 여성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눌리듯 아픈 그 순간들을 그들이 어찌 알리오? 묻어두고, 그리곤 눌러 놓고 흐르는 눈물 못 흐르게 하늘을 쳐다보는 그 아픔을 알 리가 없지요. 한 겹은 그들을 향한 그리움, 한 겹은 저 아이가 저런 아이였나 하는 낯섦, 한 겹은 흥건한 서러움... 그 여러 겹 사이사이는 저 아이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사는 기도로 가득 차고, 나는 괜찮으니 저 아이만 늘 괜찮게 해주십사고 비는 마음. 저 아이의 가슴을 옥토로 만드사 그곳에 말씀의 씨 떨어뜨려 주소서. 한평생 주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시경 개풍(凱風)에 “슬하에 일곱 형제가 있지만/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구경에는 “열 아들을 양육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아버지 한 분마저 봉양하지 않는 열 아들도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 비슷한 말이 여러 나라 속담에 나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서양이 같고, 옛과 지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어려서 양팔의 짐, 자라서는 마음의 짐”, 이건 영국 속담입니다. “어린 자식은 어머니의 얼을 밟고, 큰 자식은 어머니의 마음을 밟는다”, 이건 독일 속담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무자식 상팔자”라는 게 있습니다.
아들과 딸을 일컫는 자식의 息자는 참 절묘합니다. 쉬다, 숨 쉬다, 생존하다, 번식하다, 자라다, 키우다 이런 뜻 외에 그치다, 그만두다, 중지하다, 망하다라는 뜻이 있으니 인간의 일생을 담고 있는 게 바로 이 글자입니다. 태어나서 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늙어서 죽게 되는 과정이 息, 한 글자에 다 새겨져 있습니다.
인생이란 부모를 만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살다가 부모와 이별하고, 그러는 동안 스스로 부모가 되어 자식들이 부모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이 세상을 떠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 없듯이 자식도 골라 낳는 게 아니지만, 나는 부모의 분신이며 자식은 나의 분신입니다. 분신이 된 인연을 보살피고 갚아야 합니다. 시경에 “아버지 없으면 누굴 믿으며 어머니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랴”[無父何怙 無母何恃]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모는 자식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부모은중경에는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메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살갗이 닳아 뼈가 드러나고 다시 골수가 보이게 되도록 수미산을 수천 번 돌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며 자식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도 자신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나와 다름없는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어버이는 제 자식을 가르치기 어려우니 남들과 바꿔 가르친다[易子敎之]는 게 동양의 옛 가르침이었고, 공자도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버이는, 특히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나이는 가슴속에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폐족(廢族)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식에게 할 법한 말입니다.
제갈량의 계자서(戒子書)는 천고의 명문입니다. 제갈량은 “군자는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는 말부터 합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말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할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나아갈 수 없다”[非淡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고 강조합니다. 바빠서 아들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던 제갈량은 편지 한 통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는 “나이는 시간과 함께 내달리고 뜻은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며 정진과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위한 기도서’는 용맹과 겸손 온유 소박함 유머를 주시기를 주님께 빌면서 “그리하여 주시면 그의 아비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맥아더의 기도도 행동이나 일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알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어버이의 분신이지만 어버이의 것은 아닙니다. 대장 부리바는 적국의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조국을 배반한 아들을 총으로 쏴 죽입니다. “네 생명을 내가 주었으니 내가 거둔다”고 했지만, 부모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것은 생명이지만 그 뒤에 줄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지혜를 말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는 대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게 적거나 없더라도 자식에게는 많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보다 나은 자식을 만드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이제 삶이 더 이상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시니어세대에게는 아쉬움과 후회가 많습니다.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 아들을 아는 데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지만 자식에 대해 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자랄 때 무슨 대화와 접촉을 해왔던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저절로 좋은 영향을 주고 교육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모습 아닙니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아쉬움이 많은 세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제는 그런 마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식을 기를 때의 아쉬운 마음을 내 자식이 그의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극복의 대상이며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과 같은 대화 단절과 갈등의 시대에는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바탕부터 새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들이 이에 응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아들세대의 땅으로 건너뛰어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낡은 세대, 지는 세대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옳게 가르치는 자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96년 로 제27회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이순원(李舜源 · 57).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던 그였다. 아버지로 인해 겪은 유년시절의 상처와 어머니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전화 한 통 드리는 게 더 어려웠다.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다녀가라는 것.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조금 천천히 다가갈 길을 택했다. 아들 상우와 함께.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대관령 꼭대기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50리(약 20km). 차로 가면 30분이 안 걸리지만, 걸어서 가자면 네다섯 시간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그 길을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들 상우와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아내와 둘째 아들이 차를 타고 가서 먼저 아버지를 달래 드리는 동안 그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아이와 길을 걷다 보니 집에서는 하지 못했던 다양한 대화가 오갔어요.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하는 대화보다 훨씬 풍부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듯 아들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고, 내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듯 아버지도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거 아녜요. 오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들의 생각도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덕분에 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단 하루였지만 훌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날의 경험을 쓴 소설이 바로 이다. 그는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권한다.
“대부분의 가정이 엄마와는 대화가 되는데, 아버지와는 필요한 말만 하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겨야 이야기를 하는데 그마저도 남편들은 아내에게 미루게 되고요. 대화도 훈련이거든요. 자주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서먹하고 어려울 수 있겠죠. 그럴 때는 대관령 옛길처럼 함께 오래 걷는 길을 가보세요. 걱정은 말고요. 일단 길 위에 서면 대화는 자연히 이루어지니까요.”
길 위에서 배우는 인생의 희로애락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썼지만, 순서는 새롭게 짰다. 대관령 굽이의 길이에 따라 긴 굽이에는 긴 대화를, 짧은 굽이에는 짧은 대화를 풀었다. 그는 길고 짧은 굽이가 모여 긴 대관령 옛길이 이어지듯 우리네 삶도 이런저런 일들이 모여 인생을 이룬다고 했다.
“책을 보면 아들이 한 굽이를 걷다가 ‘이 굽이는 짧다’며 좋아하죠.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이번 굽이가 짧다고 해서 걸어야 할 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짧은 굽이가 있으면 긴 굽이가 있게 마련이죠. 험한 길이 있으면 편한 길도 있고요.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말예요. 또 어떤 굽이를 갈 때는 아이가 뛰어서 가보자고 하죠. 그렇게 두 굽이를 달리다가 결국 발이 미끄러져 다쳤잖아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고작 두 굽이를 빨리 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죠. 인생도 그래요. 빨리 이루고 싶은 욕심에 조급해하기보다는 멀리 보고 꾸준히 걸어가야 해요. 상우도 그런 경험을 통해 인생의 굴곡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거예요.”
상우가 대관령 옛길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의 가르침을 준 길이 있다. 중학생 시절 등굣길에 있던 오솔길이다. 핑계를 대고 학교를 가지 않으려던 때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방을 들고 먼저 오솔길을 향했다. 길 양옆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에는 주렁주렁 이슬이 맺혀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옷이 젖기라도 할까 봐 말없이 이슬방울을 툭툭 털어내며 앞장서 걸어가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낀 어머니의 사랑은 그의 인생에 큰 교훈과 원동력이 되었다. 아들 상우에게는 ‘엄마 책상’이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 책에서 아들이 “나는 엄마가 엄마 책상을 가지고 있는 게 참 좋아요”라며 “친구들 집에 가도 엄마 책상이 없는 집이 더 많아요. 아뇨, 거의 다 없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데, 그런 현실이 늘 안타까운 그다.
“여자는 결혼하면서 장롱, 냉장고, 세탁기 등 많은 것을 준비해요. 그런데 정작 책상은 생각을 안 하죠. 식탁이나 화장대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있겠지만 책상이라는 것은 자아의 성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책상은 중요하죠. 어질러진 책상이라도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좋고, 산교육이 되죠. 아내가 일본어를 독학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도전도 책상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남편이 아내에게 액세서리가 아닌 예쁜 책상을 선물해준다면 좋겠어요.”
책에 나온 아이, 그 이후
책이 나온 지도 19년이 흘러, 올해 32세인 상우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소설인지라 상우의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책에 나온 아이’다. 가정의 달이면 상우와 인터뷰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아이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염려한 그는 동반 인터뷰는 거절해왔다. 어른이 된 상우도 그때 아버지의 결정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아들은 그때 통제를 잘해주었다며, 어리지만 세상사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좋게 기억하죠. 그 이후로는 상우랑 대관령을 걸어보지는 못했어요. 대신 평상시에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죠. 나중에 군대를 제대한 둘째 아들이랑 그 길을 걸었는데, 감회가 새로웠어요. 자녀가 어른이 되면 차곡차곡 가방에 짐 싸주듯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더 폭넓고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죠. 아직은 내 품에 있을 때 다시 그 길을 아이들과 걸을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아들도 언젠가는 자기 아들과 그 길을 걸을 날이 오겠죠?”
1. 배우자에게: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이것은 그냥 걷기에 대해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사색하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안고 걷는 걸음걸이에 대한 철학과 인문학이 담겨 있다. 책도 읽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라도 배우자와 함께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것은 어떨까.
2. 자녀에게:
얘들아, 그 어떤 책보다 재미있는 책이 좋지. 삼국지는 재미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또 수많은 사람의 유형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란다. 읽다 보면 사람들이 왜 이 책을 다섯 번도 읽고 열 번도 읽는지 알게 되지.
3. 친구에게: 칼 세이건
여보게, 이 책은 참 오래전에 나온 책이야.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
참 각박하지. 하늘 한번 바라볼 틈도 없지. 그럴 때 이 책을 펼쳐보시게. 지금 자네가 고민하는 것, 그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해 주지는 못해도 그게 우리 가슴안의 참 작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하지. 나이 들수록 이 세상만 보지 말고 우주를 쳐다보자고.
흔히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논어(論語) 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나이 50에 천명(天命), 즉 하늘의 명령을 알았다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천명은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 혹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50은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순응하거나 객관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깨우치는 나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물리적 시간이다. 그렇다면 한 직업을 50년 넘게 했고 그 일을 여전히 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직업에 임할까.
우리 시대 최고 연기자로 꼽히는 이순재(79), 최불암(75), 나문희(74), 김혜자(72). 이들은 50~59년 동안 연기자로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무대와 TV, 그리고 영화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기자라는 직업을 지천명의 세월 동안 행해온 이들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연기라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일까.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연극반 활동을 한 이순재는 1956년 연극 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1년 KBS 개국 드라마 를 통해 TV드라마로 활동영역을 넓힌 뒤, 1965년 영화 로 영화계까지 진출했다. 이후 연극, 드라마, 영화를 오가며 왕성한 연기 활동을 하는 이순재는 요즘에도 SBS 사극 , 연극 에 출연하고 있다. 이순재는 근래 들어 등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또 다른 면모를 보이며 젊은 시청자로부터도 사랑받고 있다.
대학 졸업 후 59년 동안을 연기자로 살아온 이순재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에선 신인상 부문이 없어요. 왜냐하면, 관객은 배우가 스크린에 나서는 순간 신인인지 아닌지 구분해서 연기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연기자는 신인이든,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든 출연한 작품의 연기로만 평가받아요. 연기력은 연차 순이 아니기에 연기 경력이 오래된 사람도 출연한 작품마다 늘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안 돼요. 연기자는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 연기 경력과 상관없이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이순재는 59년이라는 오랜 세월 연기를 해 기교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매번 임하는 작품마다 캐릭터와 출연 연기자들이 다르므로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경력이 오래된 연기자라고 하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순재는 “단 한 번도 촬영장에서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고 촬영에 늦은 적이 없어요. 드라마나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공동 작업이고 그중 한 사람이라도 잘못하면 작품이 실패할 수 있으니까요. 대사 암기력에 문제가 생겨 NG를 반복적으로 내 다른 연기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때가 은퇴할 시기예요”라고 말한다.
1961년 MBC 문화방송 1기 공채 성우로 방송계에 진출한 나문희는 1975년 TV드라마 등을 통해 드라마 연기자로 전업한 뒤 드라마에 전념하다 영화와 연극 활동을 병행하며 연기 영역을 확장했다.
지난 7~8월 서울 대학로에서 연극 에 출연한 뒤 10월 30일부터 11월 1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뮤지컬 으로 관객과 만난다.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단 한 해도 쉬어본 적이 없다는 나문희는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의 연기는 장르는 다르지만 작품마다 오랜 시간 연습을 통해 캐릭터를 체현하고 연기와 동선을 온몸으로 익혀야 하고 호흡도 조절해야 해요. 상대 배우와의 조화도 이뤄야 비로소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지요.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연기에는 왕도도 없고 경력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오랜 시간 연습하며 흘린 땀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때문인지 나문희는 54년 연기경력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나 관객, 시청자가 “연기가 좋아졌다”고 하는 말을 가장 큰 찬사로 받아들인다.
나문희는 “사람들이 물어요. 연기하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고요. 힘들지요. 무대나 카메라 앞에 서기 위해 오랜 시간 캐릭터 분석, 대사암기부터 출연 연기자와의 연기호흡 조율까지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에요. 그런데 막상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면 힘이 나고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제 연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저 역시 정말 행복하지요. 제가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설레며 연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해요”라며 웃는다.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최불암은 1967년 KBS 탤런트로 특채됐다가 1969년 MBC 개국과 함께 자리를 옮겨 , 등 수많은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또한, 영화 , 등에 출연하며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도 만나고 있다. 최불암은 ‘국민 아버지’라는 타이틀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 시청자와 만나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의 진행자로 나서 연기자 이외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최불암은 “좋은 연기자란 자신의 감성과 이성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끝없는 수련과 날카롭고 냉정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때를 씻고 내가 아닌 그의 인물을 구현, 창조해서 그 인물의 특성과 영혼을 표출해야 하므로 배우에게는 혹독한 훈련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하는 작품마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다르므로 경력에 상관없이 출연할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1961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김혜자는 그동안 드라마 , , , , 영화 , , , 연극 , , 등 수많은 작품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연극 로 11월 4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 홀에서 관객과 만나는 김혜자는 “‘연기의 달인’, ‘연기력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연기자는 지금 이 순간 관객이나 시청자와 만나는 작품으로만 평가받는 거니까요. 과거의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고 해서 지금 하는 작품에서 똑같은 연기력을 유지할 수 없어요. 지난 50여 년 연기를 했지만 제일 무서운 것은 관객의 눈이에요. 연극의 경우는 매회 연기에 대한 평가가 다르잖아요.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는 50년 경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작품에서 후배가 더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면 전 그 후배에게 많은 것을 배워요”라고 말한다.
김혜자는 “연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와 경력이 아닌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해요.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그때가 은퇴할 시점이라고 봐요”라고 말했다.
최고의 연기자로 평가받는 이순재, 최불암, 나문희, 김혜자 등 네 명의 배우는 연기자로서 50여 년의 한길을 걷는 것이 연기의 기교나 작품 분석에는 도움이 되지만 작품마다 캐릭터와 연기, 출연자가 다르므로 항상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과 시청자에게 외면 받는다고 공통으로 강조한다.
연기 경력과 나이, 그리고 명성에 안주해 공부나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후배 연기자들과의 연기 조화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연기력에 금세 문제가 나타난다고 했다. 네 명의 배우는“연기력은 연차 순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명한 어른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 “늘 책을 읽고 다른 사람 말을 듣는 연습을 해라. 결국은 삶의 태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나이라는 권력으로 쇠한 것을 메우려고 하면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듣는 연습을 해야 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게 바로 노망든 것이다. 좀 다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기를 그치지 말고 참신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를 깨닫는다는 50여 년 긴 시간을 연기자라는 한길을 걸었으면서도 이순재, 최불암, 나문희, 김혜자 등 네 명의 연기자는 황현산 교수의 말을 드라마, 영화, 연극무대에서 실천하고 있다.
연기할 때 나이와 경력, 명성을 권력화 하는 대신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첫 작품을 하는 신인처럼 노력하고 공부하는 연기자가 바로 이순재, 최불암, 나문희, 김혜자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자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문숙(文淑·61)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를 향한 놀라움은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로부터 먼저 왔다. 그녀의 모습에는 분명 세월을 증명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나이가 예순에 달했다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단순히 ‘동안’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종의 생명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출연하며 무려 38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인간’ 문숙이 밝히는 남다른 젊음의 비결과 삶의 철학.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우리는 문숙을 흔히 ‘배우’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배우 문숙’이라는 명칭에 손사래를 친다.
“영화배우요? 40년 동안 안 했는데, 갑자기 영화배우 노릇을 하려니까 힘들어 죽겠어요(웃음). 하긴 내가 한 게 배우밖에 없으니까 한국에 오면 배우라고 하는데, 배우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웃음) 갑자기 ‘선배님’, 이러면 내가 뭐 어색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웃음).”
인터뷰 내내 문숙과 같은 자유인을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든 훌훌 털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거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체험으로 사는 것밖에 없기에 잡을 만하고 걸릴 만한 게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 중의 강박은 바로 아름다움일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혹은 더 아름답게 되기 위하여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마인드 컨트롤을 매일 하며 살고 있다. 이에 관하여 문숙은 철저하게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데 문제가 있어요. 그걸 확 놔버리면, 그만큼 나이에 맞게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괜히 그 에너지를 젊어지려고 애쓰는 데 쓴다는 거죠. 그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늙어 보이면 어때요. 주름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름은 내가 제일 많을 걸? 대한민국 여자들 중에서.(웃음) 나이가 들면 지혜가 생기는데, 시간이 나에게 마련해준 것에 대해 반항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노송이 젊은 소나무에 비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눈이 없는 거죠.”
그녀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문숙 본인이 가진 아름다움과도 일치한다. 혹시 그렇게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아직 일반적인 삶의 입장에 서서 물어봤다.
“오히려 노력을 덜해야 할지 않을까요? 난 한국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피부에 쏟는 노력을 다른 데로 돌리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걸요. 그건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고 있다는 거죠.”
문숙은 해외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으며, 그만큼 아름답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 생명력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에 비해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어 하는 게 안쓰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원래 우아해요. 왜냐하면 우주의 기운이 우아하고, 우리는 그 기운의 소산물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를 우아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 건, 디스커넥트(단절)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과 분리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의 본질을 찾아서 접속시켜야 해요. 그러면 우아해질 수밖에 없어요. 꽃도 새도 우아한데 하물며 인간이야, 우아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돼요.”
목적 없는 생활의 기쁨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아픔과 익숙한 사이가 된다. 오랜 기간 수행한 요가 수련자로서 문숙은 아픔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요가는 자신과 함께 하는 수행이며 그동안 쌓여 있던 침체된 기운들을 정리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아프면 행운이에요. 왜 아픈지 그 원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까. 그래서 아픈 건 운이 좋은 거죠. 요가를 하면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어서 아픔 속으로 들어가게 해 줘요. 그 전에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모든 게 밖을 향했어요. 목적의식, 욕구 등등. 그러다보니 제 몸은 혼자 살아남아야 했죠.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다른 데로 가 있으니까 몸이 혼자 움직여야 하니 아프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프면, 내가 아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아요.”
자신에게서 어긋난 것을 고치고 나다움을 찾는 것. 문숙의 철학은 그렇게 간명하면서도 강직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성공을 위해 설정해야 하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목적’이란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목적을 갖고 사시잖아요? 그런데 목적을 갖고 살면 꼭 사고가 생겨요. 이루면 ‘이게 아니야, 허전해’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찾게 되고. 그래서 저는 목적 자체를 버리고 체험 그 자체로만 살아요. 그렇다 보니 기대가 없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죠. 그때그때 살기 때문에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커질 수 있어요. 오히려 순조롭게 살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은 ‘편안하다’는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으면 괴로워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지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는데 왜 기대를 해요?”
문숙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지금 다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 자체에 대해서, 체험자로선 적극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이진 않다는 그녀의 말을 충족시키는 확신이었다. 그토록 확신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부러웠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불행도 우리가 만들어낸 거예요. 불행과 행복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건 그 사람들 자신이 만들어낸 거죠. 컵에 물이 반 컵 차 있을 때, 그걸 반 컵밖에 없다고 보느냐 반 컵이나 있다고 좋아하느냐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행복에 너무 집중하면 불행도 커져요. 그래서 쉬이 행복하다고 떠드는 사람은 그만큼 그림자가 큰 거죠.”
행복도 애쓰면 불행이 된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자연 그대로의 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직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 삶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기대를 하느냐고 반문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지금은 애써서 하는 일이 없어요. 그리고 애써서 하면 잘 안 돼요. 자신이 잘될 일은 애쓰지 않아야 나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반면 자신이 잘하는 일은 오히려 에너지가 생겨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확연해져요.”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해져요
문숙은 이시형 박사의 힐리언스 선마을에서 요가와 요리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라는 책도 낸 자연식 전문가로서의 그녀만큼 지금까지 접한 그녀와 어울리는 일도 없을 듯했다.
“안 먹고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남의 생명을 섭취하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시금치가 나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났겠어요? 그러니 먹어야 할 게 있고 안 먹어야 할 게 있는 거죠. 이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고 저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죠. 자연식이라고 좋다고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하면 그게 또 스트레스가 돼요. 내가 진짜 필요한 게 뭔가가 중요해요. 우리는 오관(五官)의 노예가 되어 있잖아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더 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 기도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겨요. 그리고 몸이 먼저 알게 돼요.”
문숙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를 물어봤다. 그녀답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와 지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애해야지, 남자 보면 두근거리지, 아이 낳아야지, 아이 먹여줘야지…. 복잡했어요. 인류 종족을 위한 역할을 하느라고 나도 모르게 아주 힘들었어요(웃음). 이젠 나만 행복하면 돼요. 내가 우울하면, 내 옆에서 우울해할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내가 행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누군가를 행복하게끔 해주는 게 아니라. 이젠 그게 가능하잖아요?”
그녀는 그동안 남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남을 위해 살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복잡한 삶이 내 몸을 떠난 거예요. 그때 기억나시죠? 모든 게 아름다웠잖아요. 모든 게 가능했고.”
“난 지금 덤으로 사는 거예요.”
살아있으니 하루하루가 괜찮다고 말하는 문숙의 맑은 눈은 흡사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삶의 막바지에 도달했음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사람의 눈이 저토록 맑고 생명력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60살 넘었잖아. 난 덤으로 사는 거예요. 오행에서 육십이면 다 산 거니까.”
‘다 살았으니 덤으로 살고 있는 중’이라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에너지를 보면 던질 수밖에 없는 다소 짓궂은, 아직도 이만희 감독의 얼굴이 기억나냐는 질문이었다.
“이만희 감독님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해요. 60평생 그 분 처럼 멋진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웃음).”
SHE IS…
영화배우 문숙씨는 고교 재학 중 연기자로 데뷔해, 스무 살에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대종상 신인상을 받은 그는 23세 연상인 고 이만희 감독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결혼 1년 만에 병으로 숨졌고, 그는 미국으로 갔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병원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으로 묵언명상 수련을 떠났다.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산속에서 매일 열네 시간씩 요가와 명상 수련을 했다. 수행을 하며 건강을 되찾은 그는 음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치유식 요리연구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2015년 자연식 치유가로 검정색 고무신, 탐스러운 은회색 머리카락, 짙고 바른 눈썹, 자연 색깔의 쇼울을 걸치고 우리 곁으로 왔다.”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