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에서 은퇴한 강모(67세) 씨는 수입이 줄어들자 자동차를 유지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주유비에 자동차보험, 주차비도 그렇지만, 차를 구입한 지 오래되어 수리비가 만만치 않았다. 자녀들이 독립해 예전처럼 차를 쓸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차량공유 서비스를 이용하며 걱정을 덜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호출한 자율주행 공유 차는 강 씨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스스로 운전해준다. 필요할 때만 부를 수 있어 경제적인 데다 차량 소유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없다.
최근 자율주행차는 무인 상태를 최종 목표로 발달하고 있는 중이다. 또 가솔린이나 디젤을 연료로 하는 차 대신 전기차가 늘고 있으며, 차를 공유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한편으론 자동차가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기술 등과 만나 커넥티드카로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 업종에서 이제 전기전자 업종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자동차 산업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에 신기술과 새로운 용어가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는 걸까. 이에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와 시니어에게 가져올 파급 효과를 살펴보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어려워지는 일 중 하나가 운전이다. 60대 이상 운전면허 소지자는 2016년 기준 전체 면허 소지자의 14.8%인 461만 명에 이른다. 고령화의 영향으로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고령 운전자로 인한 사고도 늘고 있다. 2016년 전체 교통사고는 22만917건으로 2015년과 비교하면 1만 건이 넘게 감소했다. 하지만 2015년 대비 2016년 60대 이상 운전자가 유발한 교통사고는 무려 2784건이나 증가했다. 이처럼 자동차는 편리함도 주지만, 안전을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다. 젊을 때부터 운전을 해온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운전을 하길 원한다. 이동이 힘들면 사회 참여를 제대로 못하게 되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우울증까지 올 수 있다. 그래서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시니어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자동차 산업의 빅뱅을 일으킬 첨단기술들
현재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이끄는 트렌드는 크게 4가지를 꼽을 수 있다. 바로 자율주행차, 커넥티드카, 차량공유 서비스, 전기차다. 이 중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분야는 자율주행차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2020년에 사람이 필요 없는 완전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완성차, 부품, 반도체, IT, 통신 등 관련 기업들의 협력과 인수합병(M&A)이 적극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최근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차량용 인공지능 1위 기업인 엔비디아와 중앙처리장치 기업인 인텔을 중심으로 협력하고 있다. 인텔은 자율주행 부품 업체로 유명한 모빌아이를 인수했다. 엔비디아는 최근 완전 자율주행 인공지능 컴퓨터인 ‘드라이브 PX 페가수스’를 선보였다. 또한 글로벌 IT 기업도 이젠 자동차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다. 구글의 자회사 웨이모는 완전 자율주행차를 시험 운행했으며, 애플도 프로젝트 타이탄으로 자율주행 시스템을 테스트하고 있다. 국내 한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교통사고의 89%는 운전자 과실이 원인이다. 그래서 무인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교통사고가 90%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알아서 척척 운전을 해준다면 노화로 신체나 인지기능이 저하된 사람도 생활이 편리해진다. 하지만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려면 기술 보완 외에도 아직 걸림돌이 많다. 우선 소비자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 국토교통연구원이 2016년 실시한 조사 결과 운전에 따른 피로감이 줄고 차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율주행차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시스템 오류와 보안, 유지관리 비용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또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았을 경우 차 소유주와 제조업체 중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스마트폰, 자동차의 스마트한 변화
# 박모(74세) 씨는 은퇴 뒤 아내와 자동차로 맛집을 찾아다니고 여행을 다니는 게 취미다. 그런데 시력이 저하되면서 운전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새로 구입한 자율주행차 덕분에 드라이브하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또 차 안에서 스트레스를 측정해주고, 건강 컨설턴트와 영상으로 상담도 할 수 있다. 얼마 전엔 차에서 심장질환으로 아찔한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박 씨의 건강 이상을 파악한 자율주행차가 근처 병원 응급실까지 차를 이동시켜줘 큰 도움이 됐다.
커넥티드카가 뜨고 있다. ‘커넥티드카’는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스마트폰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사람과 자동차, 병원, 쇼핑 등 사실상 모든 것과의 연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차 안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음성인식 인공지능 비서가 교통상황도 알려준다. 또 차에서 내릴 필요 없이 신용카드와 연계되는 전자계정을 부여받은 차로 상품 결제도 가능하다. 특히 커넥티드카는 차 안에서 운전자의 건강상태를 체크해준다. 자동차에 앉기만 해도 자동 측정이 가능하다. 얼굴과 눈동자를 인식해 졸음운전을 감지하는 기술은 이미 여러 기업에서 개발됐다. 도요타는 운전자의 심전도를 측정하는 스마트 핸들을 공개했다. 현대자동차는 심박수와 뇌파를 통해 운전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기술을 활발히 개발 중이다. 건강 이상이 발견되면 차가 스스로 119에 신고도 한다. 헬스케어 산업은 자동차 산업보다 규모가 훨씬 큰 데다 고령자 급증으로 인해 자동차 업계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차량은 이제 소유에서 공유로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차량공유 기업 리프트는 자동차를 소유하는 시대가 10년 안에 끝날 거라고 예측했다. 국내에서도 젊은 층의 자동차 구매가 감소하고 있다. 반면 대표적인 차량공유 기업인 쏘카의 회원수는 2014년 51만 명에서 2016년 240만 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자동차도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현대자동차도 차량공유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전기차 비중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친환경차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는 202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를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도 판매 중단을 논의 중이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전기차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에 판매된 전기차는 100만 대를 넘었다.
자동차의 빅뱅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트렌드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빠른 속도로 발전 중이다. 자동차 산업은 이제 금융, 헬스케어, 차량공유 등 산업의 경계를 나누기도 어렵다. 자동차 산업의 첨단기술은 시니어의 이동성에 큰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운전을 하지 않는 탑승객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지, 시니어의 니즈는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미래 자동차 산업의 과제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다음 연재 순서
❹식스 포켓(six pocket) 시대, 손주와 SNS로 친해지기
❺해외 시니어 여행 트렌드
❻3D 프린팅 기술 어디까지 왔나
서울 어느 단체에서 어르신 무료취업 상담실을 운영한다고 광고를 이곳저곳에 내 걸었다. 모집직종을 보니 경비,청소,주차관리,요양보호사,식당보조,지하철택배,치과기공배달,기타직종이라고 적혀있는데 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직종이 총 망라되어있다. 더 추가한다면 농어촌 일손 돕기 외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어르신을 모신다고 하면서 나이제한으로 70세까지만 뽑는다고 한다. 70세 초과는 명함도 내밀지 말라고 미리 공고문에 못을 박았다. 다른 말로 하면 70세가 넘으면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아침에 테니스장에 나갔더니 여기저기서 수근 거린다. 무슨 말인가 들어봤더니 올해나이 70세인분이 우리 동호회 테니스모임에 가입해서 함께 운동을 하겠다고 어제 찾아왔단다. 일차적으로 회장이 면담을 해보고 반승낙을 한 상태인데 며칠 후 코트에 나와서 실력이나 인품 등 이런저런 것을 검증받기로 한 모양이다. 너무 나이 많은 분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회원들이 수군대는 요지다. 여기가 무슨 양로원이냐! 왜 그렇게 나이 많은 분을 받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테니스장도 그냥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야 한다. 눈이 오면 눈도 치워야 하고 테니스코트를 평탄하기 위한 솔질도 하루 두 번은 해야 하고 라인기로 줄도 수시로 그어야 한다. 소금도 뿌리고 석회석도 들고 와서 라인기(line機)에 채우는 등 잡다한 일도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아직까지는 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번잡한 일을 아무리 신입회원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분에게 막 시키기는 어렵다. 또한 테니스는 과격한 운동이고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데 마음은 앞서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다칠 우려도 있다. 과거 아무리 운동을 했다하여도 젊은 애들을 실력으로 당하기 어려울 텐데 누가 한편이 되어서 게임을 해 줄 것인가도 현실적인 고민이다. 자칫 동호회 분위기를 잡칠 우려도 있다는 걱정이다.
젊은 회원들이 우려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요즘 70대의 나이에 펄펄 나는 사람도 있다. 나이로 군림하려는 생각을 이미 버리고 젊은이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달릴 각오가 된 ‘액티브시니어’도 많다. ‘나이로 그럴 것이다’ 하고 미리 예단하는 것은 편견이고 잘못이다.
사람이 70세가 넘으면 정신적 신체적 변화가 정말 어떻게 오는가.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물어봤다. 우선 81세의 우리 동네 호텔 대표님에게 물어봤다. 이분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도 하지만 매일 두 시간씩 헬스클럽에서 건강관리를 하는 분이고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신체적 변화를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 사람아 다른 것은 다 먹더라도 나이만은 먹지 말게”하시면서 80이 넘으니 식욕이 좀 떨어지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나이가 들면 신체적 정신적 노화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이다. 이를 나이라는 칼날로 두부 자르듯 자르지 말고 21세기 의료과학의 힘으로 개별 맞춤으로 검증하여 건강한 사람은 건강상태를 인정해줘야 한다. 고령운전자라고 무조건 운전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성검사기간을 단축하여 검증된 사람은 계속운전을 허락하는 것이 좋은 예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서 계속 일을 하도록 해주는 세상이 정의로운 나라다, 당연히 그렇게 바뀌도록 해야 한다.
택시운전사를 선망하던 시대가 있었다. 차량의 증가를 운전자가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던 시절. 그때만 해도 운전면허증은 우월함의 상징이었다. 미래에도 그런 시대가 올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바로 최근 유행하는 드론 얘기다. 이제 드론은 사람을 나르고, 농기계로 쓰고, 짐을 배달하고, 군사용으로도 쓰인다. 현재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드론을 보면 자동차 문화가 시작되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동차도 처음 나왔을 땐 지금의 용도를 상상하지 못했다. 드론도 그렇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성장은 시니어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할까.
드론을 정확히 정의하면 무선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를 뜻한다. 드론 하면 떠올리게 되는,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린 형태의 비행체 외에 정찰이나 지상목표물 공격 등 다양한 임무를 맡고 있는 군용 무인비행기도 드론에 속한다. 우리가 드론이라고 생각하는 비행체는 항공안전법상 무인비행장치에 속하는 무인멀티콥터다.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려 멀티콥터라고 부르는데 장비에 따라 대개 4~6개의 프로펠러가 작동한다.
드론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는 역시 기술 발전 때문이다. 과거 드론 형태의 원격조정 비행체는 제 몸 하나 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늘로 날아올라도 조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격조정 헬리콥터는 동호인 사이에서도 난이도가 최고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조종이 어렵다. 그러다 약 5년 전부터 드론이 일반인에게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카메라를 거뜬히 싣고 날아올랐고, 방송용 헬리콥터에 사람이 타고 촬영한 것보다 떨림 없는 안정된 화면을 제공했다. 적재할 수 있는 무게도 늘고, 조종이 쉬워지면서 드론의 용도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방제 조종사 성수기에 연소득 올려
대표적인 드론 관련 직종은 역시 영상이나 사진 촬영 분야와 연관이 있다. 이미 드론을 활용한 항공촬영 업체가 여러 곳 성업 중이다. 일반 방송촬영뿐만 아니라 기업 홍보용 영상, 지도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또 다른 유망 직종 분야는 농업. 그중에서도 드론을 활용한 농약 살포가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농업용 드론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급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드론 조종사의 평균 연봉이 약 1억원에 이른다는 발표도 있었다. 상용 드론 시장의 세계 최강국으로 불리는 중국은 넓은 농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은 농촌의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드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방제용 드론의 도입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5년부터 농약살포용 드론을 ‘무인항공방제기’로 분류해 정부융자지원 대상 농기계로 등록시키고 있다. 아직은 중국산 업체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지만 국산 업체들도 하나둘 뛰어들고 있다.
업계에선 드론을 이용한 수요가 늘면서 “3개월 일하면 1년 쉬어도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능숙한 드론 조종사는 월 소득이 300만~500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농약 살포시기가 정해져 있고, 아직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일부 지자체에선 공동구매 형식으로 지역 농민을 대신해 드론 방제업체와 일괄 계약하기도 한다. 산업용 드론은 12kg이 넘으면 자격증 소지자만 운용이 가능하다. 농가에서 정부 융자를 통해 드론을 구매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운용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하는 등 쉽지 않다.
농약 살포에 드론 활용이 선호되는 데에는 시간 절약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농민 5~6명이 하루 종일 살포해야 하는 면적을 드론은 한 시간이면 방제한다. 게다가 사람이 뿌리는 방식은 농약이 비처럼 떨어져 농작물의 윗면만 도포가 되지만, 드론으로 방제할 경우 강한 바람으로 와류가 발생해 농약이 앞뒷면에 골고루 묻는다. 면적당 농약 사용량도 줄일 수 있어 토양 관리에도 유리하다.
국내에서 대표적 드론 개발 기업으로 알려진 바이로봇의 홍세화 이사는 “방제용 드론은 아직 모든 조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수준이지만,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은 방제 지역의 위치나 면적을 사전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농약이 살포되고, 살포된 양까지 빅데이터로 기록해서 농작물의 생육까지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로봇에선 완구용 드론 생산뿐만 아니라 어린이 대상의 드론 코딩 교육도 하고 있는데, 드론의 위치, 고도, 동선, 비행시간 등을 프로그래밍해서 드론 동작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런 코딩 방식이 산업용 드론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방제 등 드론을 응용한 각종 작업이 간편해진다.
이 밖에도 드론은 사람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러 분야에 쓰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드론 조종자를 미래 유망 직업으로, 한국고용정보원은 5년 내 부상할 새로운 직업으로 선정했을 정도. 군이나 경찰, 소방 등 공공기관에서 드론 운용 전문가 수요는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된다. 수색이나 정찰, 구조 작업에 드론이 쓰이고 원자력 발전소 같은 주요 건축물 점검이나 교통 상황 분석 등에도 활용된다.
자격증 취득 비용은 300만원 선
기본적으로 완구나 경량 드론은 비행 가능 지역이라면 누구든 날릴 수 있다. 그러나 12kg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드론은 초경량 비행장치 비행자격증명 중 무인회전익비행장치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14세 이상의 운전면허나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한 수준의 신체검사증명이 있는 사람이면 지원할 수 있다. 또 국토교통부와 교통안전공단이 지정한 기관에서 20시간 이상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파일럿의 숙련도를 인증받은 비행시간으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시간을 쌓기 위한 비행은 교관 입회 하에 휴일과 날씨가 안 좋은 날을 제외한 날 중 낮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획득하기는 어렵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은 시니어가 자격증 취득에 유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격증 취득은 학과시험을 본 후 항공이론 구술과 실제 비행시험을 거쳐야 한다. 자격 취득을 위한 지정 교육기관은 항공교육훈련포털(www.kaa.atims.kr)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조종자격 취득 희망자는 포털을 통해 국내 모든 전문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이나 교육기관에서 이수한 교육이력 및 증빙자료, 자격증명 취득 방법 등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해 자격을 획득한 인원은 지난 2월까지 총 1536명. 그간 전문교육기관이 부족해 배출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각종 규제혁신, 조종교관 요건완화, 교육기관 설립지원 등을 통해 전문교육기관이 확대돼 지난해 교육수용 가능인원 994명에서 두 배가량인 17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수강생이 부담해야 할 교육비는 기관마다 다르지만 국가자격증 과정은 약 300만원 내외다.
시니어 취미로도 안성맞춤
전문가들은 드론이 시니어에게 알맞은 분야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직업이 아닌 취미로 즐길 수도 있고, 또 맘만 먹으면 충분히 수익 사업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국드론교육협회 이재윤 대구시협회장은 “시니어들이 드론을 배우고 나면 집중력도 늘고 손주나 다른 가족에게 아직 늙지 않았음을 자랑하는 계기로도 삼는다”며 “드론 조종이 산책이나 운동을 유도하고, 치매예방 등 교육 외적인 효과도 있어 노인대학 등에서 학과개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드론은 잘 알려진 촬영이나 방제뿐만 아니라 드론의 유지 보수, 강사 등 다양한 직업 창출 효과가 기대되고 있으며, 조종교관자격 취득이나 숙련도를 확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부산인적자원개발원과 함께 시니어드론기술창업스쿨을 운영했던 동의대학교 임환섭 교수도 “모집과정에서부터 시니어가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였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며 “드론과 관련한 창업에 성공한 분과 수료생들의 취업 소식을 접했는데, 보람과 함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또 방제업계 관계자들은 만약 귀촌을 고려하고 있다면 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귀촌의 성공은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드론 방제 기술이 있다면, 연고가 없거나 마을발전기금을 내놓지 않아도 환영받는 존재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 해안 도시인 페트로바츠(Petrovac)는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구석은 없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 신선한 공기, 푸르고 맑은 물빛, 모래와 조약돌이 어우러진 해변, 16세기에 만들어진 요새, 바다 앞쪽의 작은 섬 두 개가 전부인 해안 마을이지만 동유럽의 부유층들에게 사랑받는 휴양도시다.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도시는 긴 여행에 지친 여행객의 마음을 매우 편하게 해준다. 낚싯대와 책 한 권이 꼭 필요한 곳이다.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
발칸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몬테네그로는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크로아티아처럼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선을 끼고, 해안으로부터 디나르알프스(Dinar Alps) 산맥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풍경의 장관을 보여주는 나라다. 풍치는 빼어나고 음식은 이탈리아 버금갈 정도로 맛있고 물가도 싼 나라인데도 크로아티아 뒷전인 것은 순전히 매스컴 영향 탓이다. 무분별하게 보여주는 영상매체를 스스로 걸러낼 수 있어야 수준 있는 사람이다. 몬테네그로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크기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국가다. 좁은 땅에 로브첸(1749m), 오르엔(1894m), 두르미토르(2522m) 등의 고산이 90%나 차지하고 있어 매우 척박하다. 현지민들은 살기가 힘들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최상의 여행지다. 고산을 지붕 삼고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은 몬테네그로를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조우’라고 표현했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Podgorica)는 전쟁으로 온 도시가 폭격을 당했지만 아드리아 해안선은 완전히 다르다. 코토르 만을 따라 이어지는 293.5km 해안선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와 경계에 있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를 시작으로 페라스트(Perast), 티바트(Tivat), 리산(Risan), 코토르(Kotor)까지 그림 같은 해안 도시가 이어진다.
부드바와 바르 중간쯤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
그러나 아름다운 곳에는 늘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풍치에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때때로 지나친 상흔을 보여주는 곳이 번잡한 관광지다. 긴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때 찾았던 곳이 페트로바츠다. 페트로바츠는 수도 포드고리차의 식당 직원에게 추천받은 곳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서 몬테네그로로 입성해 터미널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음식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메인 요리를 두 개나 시켜 먹고 나서 영어를 잘하는 스태프에게 질문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도시를 추천해줄래?”라고 묻자 그는 메모지에 페트로바츠라는 지명을 써주었다. 지역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코토르를 도망치듯 떠나 ‘부드바(Budva)’에 점을 찍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바르(Bar)’까지 가버렸다. 버스의 남자 안내원이 인파에 밀려 동양인 여자가 목적지를 꼭 알려 달라 했던 지명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르에 도착한 버스의 여자 운전자는 말 안 해준 안내원보다 더 안달이 났다. 그녀는 페트로바츠까지 되돌아갈 수 있는 버스 편을 가르쳐주기만 했지 공짜표는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너네 잘못이니 표 값 돌려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일 뿐이었다.
로마 때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도시
페트로바츠는 부드바(17km)와 바르(21km) 중간 즈음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대던 인근 해안 도시에 비해 조용하고 정적이다. 이 도시는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서인 듀클랴(Duklja) 공국의 성직자 연대기(年代記, 연대순으로 역사적인 사상을 열거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 로마시대 때 한 부부가 이곳의 크라스 메딘스키(Krsˇ Medinski)에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을 욕조로 한 모자이크 조각이 세인트 일리야(Prophet Elijah) 교회 뒤에서 발견되었다. 원래의 지명은 라스트바(Lastva)였다가 20세기, 세르비아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Petar Karađorđevic´, 1844~1921) 왕조 때부터 페트로바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으로 나서면 600m 해안선을 가진 루치차 해변이 있다. 작아서 한눈에도 해안 주변은 다 보인다. 해안선 북쪽 오른쪽 끝에는 오래된 듯한 작은 요새가 있다. 반대편 해안에는 자그마한 소나무 산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가옥 몇 채가 있을 뿐, 해안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바다 앞쪽으로는 작은 섬 두 개가 있고 바위 섬 위에는 마치 ‘인형 집’ 같은 작은 교회가 있다.
영화 등 촬영지로 인기
우선 눈에 익은 듯한 북쪽 해안 끝 카스텔(Castel)로 다가선다. 작은 이 요새는 16세기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선원들의 작은 등대 역할을 했다. 요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와 싸우고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하기 위한 작은 오벨리스크가 기둥처럼 솟아 있다. 요새 옆의 거대한 아트갤러리(Red Commune)는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창고 겸 검역소다. 와인 등의 제품들을 보관했고 전염병이 돌면 환자의 숙박시설, 검역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건축가인 마르코 그레고비치(Marko Gregovic)가 19세기 후반 개조해 오늘에 이른다. 이 건물에는 1만500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고 연중 많은 연극, 예술, 음악 이벤트가 펼쳐진다.
특히 이곳 풍경이 낯익은 것은 영화 (레이첼 와이즈, 애드리언 브로디, 마크 버팔로 주연)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사기꾼 형제 중 동생(애드리언 브로디 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도망쳐온 곳이 바로 이곳. 레이첼 와이즈와의 사랑을 이루는 엔딩 장면도 이 요새와 레드 코뮌을 뒷배경으로 보여준다.
바닷가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카티치와 스베타 네제리아(Katicˇ and Sveta Neđelja)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앙증맞은 이 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정보부가 유고슬로비아 게릴라와 연락 교신하기 위해 주둔했다. 난파선 선원의 귀환을 기원하는 성 일요일이라는 작은 교회가 남아 있다. 교회의 종을 울리면 행운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지만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렵다. 이 도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현재도 외부 관광객보다는 현지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지노가 있는 멋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원 없이 휴양을 즐기면 좋을 곳. 아침 햇살을 맞으며 요새 근처의 바에 앉아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싶은 곳. 낚시를 즐긴다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힌다면 한국식으로 회를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Travel Data
항공편 직항은 없다. 동유럽, 서유럽, 터키 등지에서 항공편으로 몬테네그로로 진입한다. 포드고리차 티바트 공항은 도심과 50km 거리에 있다. 육로로는 주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에서 접근할 수 있다.
현지 교통 기차보다는 버스가 편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로 이용할 경우, 헤르체그노비를 거쳐 3시간 만에 코토르에 도착한다. 코토르에서 페트로바츠까지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해상 편은 굉장히 불편하다. 인근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등 형제 국가에서의 진입에도 엄격한 여권 검사 등 국경 통과 절차를 밟아야 한다.
화폐 공식 화폐는 ‘유로화’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해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언어문제 몬테네그로어와 라틴 문자,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관광지 대부분은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없다.
먹거리 도시 안쪽이나 바닷가 쪽에 레스토랑, 바, 카페가 있다.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바닷가 근처라서 해산물이 많다. 또 몬테네그로산 프로슈토 햄도 유명하다.
숙박정보 카지노가 있는 호텔 외에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꽤 있다. 카지노 호텔은 30만원선이고 게스트하우스나 아파트는 5~6만원선에 이용 가능하다. 저렴한 호스텔은 없다.
날씨정보와 옷차림 몬테네그로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이 길다. 9월은 물론 10월 낮에도 바닷가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습기가 없고 건조해서 여행하기 좋으나 낮에는 햇살이 따갑다. 10월의 평균온도는 20도 정도이니 가을 옷을 준비하면 된다. 겨울에는 9도 정도로 온도가 급강하한다.
치안정보 몬테네그로는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대부분 안전한 편이나 관광지에서는 바가지 상술을 겪을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란다.
페트로바츠 관광 사이트 www.petrovac.org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한국인들은 매스컴 등의 영향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을 선호하지만 바로 인접해 있는 몬테네그로의 풍경은 크로아티아 버금간다. 크로아티아 여행과 함께 몬테네그로 여행 계획도 세워보자. 그리고 페트로바츠에만 머물지 말고 시간 배정을 잘해서 몬테네그로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해보자. 크로아티아부터 시작해 아드리아 해안선을 따라 울치니(Ulcinj)를 벗어나 알바니아, 그리스까지 여행을 한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렌트(www.montenegro-car-rent.com)를 하거나 유람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인 필자를 화나게 하는 일 몇 가지가 있다. 아동 구타가 그중 하나다. 한참 일하던 소싯적에 피로 회복 겸 찜질방이나 스파를 즐겨 찾았다. 그날도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한 여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의 등짝을 때리는 모습에 발끈하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아줌마 아이도 아닌데 무슨 참견이세요?”
날선 반응에 질세라 “아이가 당신 소유물이냐? 여기가 당신 집이냐?” 하는 몇 마디 말로 그쳤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누구도 힘으로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맞아야 하는 의무는 더더욱 없다. 어린아이에게 겁박을 주는 어른은 비겁하다! 힘의 제압은 폭력이고 범법이다. 그만 멈추고 거울에 비친 네 표정을 보아라!’ 날릴 수 없는 수많은 거친 말을 속으로 누르며 끓어오르는 분을 삼켰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다. 질서나 조화가 힘의 논리에서 가능하다면 그곳은 동물의 세계다. 방금 금수의 세계에서 올라온 인간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문 예외다. 나쁜 뉴스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물론 영향력은 쌍방 통행으로 상호간 원인이 된다. 열악한 환경이 가해자를 만들고 거친 가해자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의 쳇바퀴에서 해법은 뭘까를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도에는 비폭력의 의미를 가진 아힘사(Ahimsa)’라는 단어가 있다. 산스크리스트어 ‘hims(때리다)’에서 유래했다. 힘사(himsa) 피해, 상해의 의미이고, 아힘사(a-himsa)는 피해 주지 않기, 비상해의 뜻이다. 폭력은 타인을 살해하거나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 언어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도 포함한다. 물리적 폭력은 당연하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행위, 언어, 사고 등 모든 면에서 상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힘사다. 이는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된다.
벌써 2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필자를 분노하게 만든 에피소드다. 당시 ‘5분 대기조’로 구성돤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5분 안에 학부모들이 모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모임으로 자주 선생님과 학부모들을 만났다. 그런데 어느 날 사물놀이 공연 준비 과정에서 생긴 왕따와 돈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당시 학부모 모두가 전업주부였고, 필자만 프리랜서로 일하는 엄마였다. 대북 연습과 공연을 위한 뒷바라지가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시간 여유가 많은 전업 맘들은 분초를 쪼개서 움직이는 필자와는 확연히 라이프 스타일이 달랐다. 필자는 사전 모임이나 뒤풀이 참석률도 저조했고 느긋한 티타임은 로망에 그쳤다.
‘워킹 맘의 아이는 어딘지 다르다!’
일하는 엄마를 둔 우리 아이는 어느새 외돌토리가 되어 있었고 필자는 드센 여자가 되어버렸다. 선생님과의 관계도 투 트랙으로 움직였다. 왕따나 편가르기가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모은 감사금 모금도 의견 차가 컸다. 결국 당당하게 손편지 한 장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때는 김영란 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옳지 않음, 부적절함, 정의롭지 못함 등등. 이런 상황 앞에서 피하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정의의 맛을 보지 못한 미성숙함 때문일까? 고3 방학 자율학습에 대한 학교 측의 선결정 후동의에 대한 문의는 아이의 완패로 끝나버렸다. 까다로운 아이로 한 번 찍힌 낙인은 모든 교사의 눈총을 받게 했고 졸업 때까지 꼬리표가 되어 쫓아다녔다. 다행히 수련의 시간을 보내며 아이는 안으로 씩씩해졌다. 아픈 만큼 성장 한다는 말은 진리다.
소소한 건으로는 집 근처 L모 백화점의 주차비 분쟁이 있었다. 쇼핑 주차라 해도 1분 초과 시에는 1시간 비용을 요구한다. 10분 단위로 끊어서 50분에 해당되는 돈을 거슬러 달라 하니 규정상 그럴 수 없단다. 받기는 시간 단위로 받아도 초과분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완전 제멋대로다. 규정의 부당함을 제기하니 자기는 지시대로 할 뿐이란다. 나 역시 버티며 서 있자, 뒤차들이 완전 아우성이었다. 주변 운전자들의 항의에 밀려 무사 출차는 했지만 옳지 않은 것들에 지고 싶지 않았다. 버팀과 저항도 나름 자존이다.
분노는 이전까지의 모든 노력을 단숨에 공으로 만들어버리는 파워가 있다. 오죽하면 분노조절 지도사 자격증까지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어리석은 치기가 일을 크게 만든다. 반백을 넘긴 요즘은 화가 일어나면 잠시 눈을 감고 숨 고르기를 한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넓은 바다! 하지만 그 안의 크고 작은 출렁임을 안다. 내 안에서 시작한 분노는 내 안에서 끝내리라. 그리 되도록 애를 쓴다. 아직도 수행중이다.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
어려서부터 ‘오지라퍼’ 기질을 보인 필자는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일에 몸을 던지는 적이 많았다. 예컨대 동네를 지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싸우고 있으면 꼭 참견해서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누가 옳고 그른지 끝까지 판단해주고 심판관 노릇을 자임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싸움을 그치게 했다는 사실에 늘 의기양양해했다.
이런 버릇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승화되어갔다. 특히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일에 흥분지수가 제일 많이 올라간다. 길에 아이스크림 껍질을 버리고 가는 중학생을 불러 세워 줍게 하는 등 동네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곤 했다. 사실 그 감정의 정체가 분노인지 용기인지 잘 분간이 안 될 때가 많았지만, 스스로 거룩한 분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도 거룩한 분노는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 차선을 달리던 고급 세단의 창이 열리더니 운전자가 손가락 끝으로 담배꽁초를 튕기는 게 아닌가. 그때 좀 더 주의 깊게 봤어야 했다. 검은 양복 소매와 금장 고급시계를. 그러나 거룩한 분노는 나의 눈을 멀게 했고 무모한 손은 경음기를 힘차게 ‘빵빵’ 누르고야 말았다.
‘정의의 사도 황금박쥐’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다 알 것이다. 그들에게 경고를 보낸 것은 당연하며 훌륭한 시민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라고. 속으로 ‘그래 잘 걸렸다.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보자’ 하고 쫓아가 신호등 앞에 나란히 서서 그 운전자를 째려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깍두기 머리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험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덟 개의 눈동자가.
순간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온몸에 전율이 지나갔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 죽기 직전의 순간 어릴 적 일부터 온갖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더니 그것이 사실이구나! 그중 ‘너 공연히 남 일에 참견하고 다니다 큰일 난다’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크게 메아리쳤다. 신호가 바뀌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도망치는 그 짧은 순간에 어디론가 끌려가 묶여 있는 모습, 그들이 뒤쫓아 와 차를 뒤에서 박는 상상, 가족들의 울부짖는 광경 등 별의별 생각들로 마치 슬로비디오를 튼 것처럼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목적지도 잊은 채 얼마를 갔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그 검은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의 십년감수는 지금도 생생하다. 아, 거룩한 분노도 함부로 지를 일이 아니구나.
나이 든 지금, 젊은 날의 그런 모습을 떠올리게 되면 ‘거룩한 분노는 무슨, 그저 분노조절 장애였지’ 하며 피식 웃곤 한다. 아무리 그 분노가 거룩해도 분노는 분노일 따름이다. 속으로 숙성되지 못한 분노는 그저 상대방을 해치는 칼일 따름이다. 지금은 아무리 아니꼬운 장면을 봐도 일단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감정이 숙성하기를 기다린다. 누가 봐도 그 모습은 딱 비겁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딸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된 것을! 어느새 딸들도 친구들 문제 해결사가 되어 있었다. 아, 이 질긴 오지랖의 DNA여! 그나마 남편의 피로 조금 희석되어 분노의 색깔이 빠진 것이 다행이다. 어느 날은 세 명 모두 방에서 각자의 휴대폰을 통해 상담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그래, 분노가 문제지 오지랖이야 무슨 죄가 있담.’ 필자도 어느새 친구의 고민을 상담하고 있다. 제 문제는 풀지도 못한 채.
스몸비는 스마트폰(smartphone)과 좀비(zombie)를 합친 말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모습이 마치 서양의 ‘좀비’와 비슷하게 보인다 하여 ‘스몸비(smombie)’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누구나 길을 걸으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보다가 큰일 날 뻔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어느 날 전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다가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전철을 타고 내릴 때 스몸비족들은 다른 사람들을 미처 보지 못한다. 자기만 타면 그만인 것처럼 전철에 올라탄 후 거기서 정지해버린다. 뒤이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한 발만 내딛어 밖으로 나간 후 그 자리에 서 있다. 뒷사람이 내릴 때 방해가 된다. 곧 스크린 도어가 닫히므로 결국 밀치게 된다.
같이 모여 얘기를 하거나 회의를 할 때도 스마트폰을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대화가 관심 없거나 재미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소위 김이 샌다. 스마트폰 내용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리 긴급한 내용도 아니고 중요한 내용도 아니다. 나중에 봐도 충분하다.
스몸비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유 공간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하다.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 하차하는 사람이 먼저 내린 후 타야 하는데 승차하려는 사람이 먼저 밀고 들어가는 경우도 흔하다. 좁은 인도 위를 몇 명이 손잡고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바쁜 발길을 막는 광경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좁은 인도 위에 차를 주차하거나 인도에 서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이 안중에 없는 경우도 많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다녀보면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을 잊었는지 우산까지 포함한 자신의 공간 크기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 지나갈 때 우산을 치우지도 않아 다른 사람 얼굴에 빗물을 적시기도 한다.
스몸비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앞을 볼 수 없으니 그냥 돌진하거나 다른 사람의 진로를 막는다. 운전 중이라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스몸비들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스마트폰부터 만진다. 운전대를 잡으면 스마트폰은 잠시 잊고 있어야 한다. 차들의 빈번하게 다니는 골목길에서 조심하라고 하면 스몸비들은 차들이 알아서 비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운전자들도 보행자들이 알아서 차를 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행자나 운전자가 똑같이 스몸비라면 사고의 위험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걷는 중에 전화가 오면 일단 다른 사람들 통행에 지장이 없는 장소로 가서 통화를 하자. 모임 장소에서는 대화에 집중하자. 스마트폰 내용은 대부분 집에 가서 봐도 충분한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좀 풀려나보자. 안 좋은 습관은 안 좋은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자수성가한 한정현(67세, 남)씨의 돈에 대한 제1원칙은 ‘절약’이다. 평생 근검절약이 몸에 밴 한정현씨의 돈에 대한 태도는 자녀들이 모두 독립한 뒤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내 김혜숙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제 아이들도 독립하고 큰돈 들어갈 일도 별로 없으니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여행도 좀 다니면서 ‘적당하게 쓰면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던 중 남편 한정현씨의 생각이 변하는 계기가 있었다. 친구 중에 자수성가한 한 사업가가 있는데 평생 힘들게 돈만 벌다가 얼마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 친구가 죽은 뒤에 일어났다. 재산을 두고 자녀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씨는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노력하던 친구의 삶이 참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아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적당하게 돈을 잘 쓸 수 있는지 전문가에게 재무상담을 받아봤다.
삶의 가치관 알기
“당신에게 돈이 왜 중요합니까?”
재무상담사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한정현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돈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지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한씨에게 돈은 왜가 아니라 무조건 중요했다. 돈이 삶을 살아가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재무상담을 위해 한정현씨가 상담사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상담사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한정현 아직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상담사 네, 그러시군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드린 질문입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신 후 답을 하셔도 됩니다.
한정현 (3분 정도 침묵 후)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좀 쓰고 싶습니다.
상담사 그 전에 자신을 위해 돈을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한정현 책임감 때문이죠.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게 마무리되어야….
상담사 책임감… 한정현씨에게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군요. 그렇다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했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한정현 짜릿하겠죠. 성취감도 들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울 것 같네요.
상담을 통해 드러난 한정현·김혜숙씨 삶의 가치는 각각 다음과 같다.
제안
노후실손의료보험
노후실손의료보험은 50세 이상부터 75세까지의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민간보험회사에서 판매하는 보험이다. 보험사에서 정한 건강기준에 적합하면 가입할 수 있으며, 입원과 통원을 합산해 연간 1억원 한도로 실제 발생한 의료비를 보장한다. 일반실손의료보험에 비해 자기부담금비율이 10~20% 높은 대신 보험료가 저렴하다. 자기부담금비율이 높아 치료비가 적게 발생하는 입원이나 통원 시의 혜택보다는, 고액의 치료비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해 가입을 고려해볼 만한 상품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9억원 이하의 주택 소유자나 배우자가 60세 이상일 때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다. 주택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하면 사망 당시에 주택 매도가격이 연금 총액과 이자 등 비용을 상계하고도 남으면 자녀들이 잔액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연금 총액과 비용이 주택 매도가격보다 더 높으면 자녀들이 주택 상속을 포기하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의학적으로 더 이상 가망 없다는 전문의의 판단이 있을 때, 추가적인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의견을 미리 작성해둘 수 있다. 우리나라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2018년 2월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유언장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전 유언이 있을 때 그 내용을 우선으로 한다. 유언이 없을 때는 상속인들이 협의분할을 해야 하는데 서로 협의가 되지 않으면 법정상속을 한다. 이런 갈등을 방지하려면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두는 것이 좋다. 다만 유언장은 법이 정해놓은 요식을 준수해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법률 전문가와 상담한 후 작성한다.
일시납 연금보험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면 피보험자가 사망하는 시점까지 연금이 지급된다. 피보험자가 55세가 넘고 종신 지급형으로 수령하며 피보험자가 사망 시 연금액이 소멸하는 연금보험은 세법상 이자소득세가 비과세된다. 그러나 확정된 기간 동안 연금을 받거나 피보험자가 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 시 남은 금액이 상속인에게 지급되는 일시납 연금보험은 2017년 4월 이후부터 가입 금액이 1억이 넘으면 수령 시 이자소득세가 과세된다.
여가활동
시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활동 공간과 영역도 점차 늘고 있다. 시니어들의 여가활동 특징은 배움과 여가를 동시에 고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의 수입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각 지역 지방자치단체에 가면 시니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나 여가 프로그램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시 산하의 50+재단(50plus.or.kr)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령자 교통안전교육
만 65세 이상의 운전자가 교통안전교육을 이수하면 자동차보험료의 5%를 할인해준다. 고령운전자 교통안전교육은 도로교통공단 13개 시도 지부에서 실시하며 비용은 무료다. 교육시간은 3시간 정도 이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 65세 이상 운전자가 교육이수 후 수료증을 보험사에 제출하면 자동차보험 5% 할인특약에 가입할 수 있다.
필자가 이끄는 모임에서는 늘 하룻밤을 같이 자는 엠티를 고집한다. 하룻밤을 같이 자본 사람들은 끈끈한 동료의식이 생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말로만 친하다고 떠드는 모임은 그때만 친하지 친밀도가 낮다. 그래서 엠티를 가는 것이다.
이번에 엠티를 간 모임은 필자가 새로 회장이 된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총동문회’다. 시내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만나 결속을 다지자니 주인에게 눈치가 보이고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아쉬워도 헤어져야 한다. 그러나 엠티에서는 시간 제한이 없으므로 충분한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엠티는 늘 장소가 문제다. 이번에는 임원 중 한 사람이 강원도 원주에 소유하고 있는 별장이 있다 하여 그리로 정했다. 일단 숙박비가 안 드는 것이다. 총 9명이 참석했는데 자가 운전자가 있어 차량 2대도 손쉽게 정했다.
복정역에서 오후 2시에 만나 2시간가량 새로 난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가니 어느새 목적지였다. 앞뒤로 넓은 풀밭과 통유리가 시원하게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멋진 집이었다. 집 옆으로는 개울이 있었고 신록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지대에 집이 위치해 있어 독립적인 안온함이 있었다.
엠티의 즐거움 중 하나는 먹는 즐거움이다.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재미가 필수이자 엠티의 절정이다. 숯불은 늘 주인이 피워주었고 우리는 석쇠 위에 고기나 올려 잘라 먹었기 때문에 숯불 피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동안 잘 몰랐다. 그러나 이번에 해보니 손이 많이 가고 기술이 필요한 노동이었다. 며칠 전 동해안 산불로 연일 시끄러웠던 터라 불 피우는 일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상추 등 야채와 갓 익은 고기들을 싸 먹는 재미가 좋았다. 마침 비까지 내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바비큐 식사 후 방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토의에 들어갔다. 먼저 회장 인사에서 엠티의 취지와 효과, 그리고 최근 시니어 리더십에 필요한 ‘커뮤니티 리더십’과 ‘서번트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다. 직장처럼 서열이 있는 모임이 아니므로 수평적 입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중점 사업으로 계획하고 있는 동문회보 발간, 동문 온라인 카페 개설, 봉사활동과 연계한 일일호프 행사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이어서 지난해에 했던 행사 중 정기사업인 산행과 송년행사, 정기총회 등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밤늦게까지 협의하고 각자 자리를 잡고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식사 후에는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후일담을 나눴다. 나서는 길에 인근 토지문화관 산책에 나섰다. 점심 겸 해서 막국수로 배를 채우고 서울로 향했다. 1인당 회비 3만원으로 잘 먹고 좋은 과정과 결과를 만들었다.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했고 만리장성을 쌓으며 한결 친해진 느낌이었다. 이 원동력으로 앞으로 1년 임기를 끌 고나갈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