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었다. 내일모레가 환갑인데 이토록 귀엽다니,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희한한 여인이다. “일단 오늘 하루만 남편을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 평생의 꿈이었던 현모양처가 저절로 되었다고 말하는 개그우먼 이성미. 한여름 오후의 데이트는 분명 귀여운 여인과 시작했는데 끝날 무렵에 보니 작은 거인과 앉아 있었다.
그 나이에 몸무게가 40kg도 안 나간다. 뭇 여인들에게 몰매 맞기 싫은지 실토했다. “안 먹어서 이래요~ 일할 때 많이 먹으면 졸리고 느긋해져서 집중력이 떨어져 할 수 없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고 자백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성미 또래의 여인들을 할머니로 생각했다. 지금은 필자 이봉규도 60이 되고 보니 이 또래의 보통 여인들이 할머니까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섹시한 향기가 나는 여인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성미는 여름철 농익은 살구처럼 귀엽고 섹시하다. 날씬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한량 이봉규가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 프로의식을 되찾아 몰아치듯 인터뷰를 시작했다. “100세 시대에 사랑의 이모작을 위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이봉규의 다짜고짜 도발에 그녀는 “기운이 있어야 그런 모험이나 상상도 하죠!”라고 말한다. 한숨도 살짝 묻어나온다. 희극인답게 개그처럼 위장했지만 그 속내를 살짝 들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때는 션과 정혜영 커플이 부러웠다. 왜 나는 션 같은 남자를 못 만났을까?” 스스로 푸념도 해봤지만 결국 “내가 정혜영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맞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고 지금의 남편에게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성미 남편은 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연예기획사 웰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면서 국제대학교 조교수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은 이성미의 열애설을 취재하러 왔다가 그녀에게 푹 빠져버렸다. 인터뷰하고 얼마 후 남편은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으며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그녀의 반응을 엿본 남편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저랑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 하며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나름 차분한 이성미는 “연하이고 게다가 기자는 싫다”고 잘라 말했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일각의 여지는 남겼다. “부모님께 허락을 먼저 받아와라!” 하며 돌려보냈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 남편은 이틀 뒤 찾아와서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았다”며 “6개월과 1년 뒤 언제 결혼하고 싶냐?”고 이성미를 다그쳤다. 남편의 불도저식 박력에 이성미는 항복했고 4개월 뒤 결혼에 골인했다.
우리는 ‘묵은지 부부’
한 이불을 덮고 산 지가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한때 결혼생활이 살짝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잘 극복하고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권태기 시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남편과 거리를 두기 위해 캐나다에서 7년을 살기도 했다. 두 살 연하인 남편을 약간 무시하는 교만함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 생각을 바꿔 자신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맞추기로 마음먹었더니 부부관계가 확 달라졌다.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이성미 휴대폰에 ‘존경하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뜬다. “일단 오늘 하루만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까 술술 풀리더라는 것.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개구질 것 같은데 의외다. “아직도 방귀를 안 텄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성미의 꿈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현모양처다. ‘묵은지 부부’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냄새도 나고 매력은 없지만 깊은 맛이 있는 부부관계”라고 ‘묵은지 부부’에 관해 설명한다. 그녀의 현모양처 꿈이 이뤄진 것은 자식들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엄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뭐 같니?”라는 이성미의 질문에 아이들이 “하나님, 집, 가족”이라고 대답해서 너무 고마웠다고 술회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평생 꿈인 ‘현모양처’가 됐구나 하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이성미는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에 현모양처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 새엄마 밑에서 컸다.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또 다른 새엄마와도 살았다. “엄마가 네 명이나 된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이 여유로워졌지만 어릴 적 자신이 겪은 불행을 남편과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 깊은 각오가 그녀의 가족을 행복하게 이끌었을 것 같다.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
너무 여유로워진 걸까? 가끔 자식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개그맨답게 “이것들이 새엄마랑 안 살아봐서 이래!” 하며 다그칠 때도 있단다.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맙다.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고2 딸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다. 이성미는 “도둑질 아니면 뭐든지 자식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은근히 지원사격이다. 그러면서 선배 입장에서 “딸의 성격이 대범해 연예인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린다(악성 댓글에도 견딜 수 있는 성품이라야 연예계에서 버틸 수 있다). 이성미가 자식들에게 무턱대고 관대한 것만은 아니다. 큰딸이 대학 1학년 때 입학을 보류시키고 1년간 알바를 시켰다고 한다.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등 이런저런 알바를 하던 중 시간당 3만원 이상을 주겠다는 고액 알바광고 전화가 걸려왔다. 자세히 물으니 “아저씨들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된다”는 꼬임이었다. 세칭 룸살롱,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로부터의 유혹이었다. 엄마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상의하는 딸이었다. 그때도 엄마와 상의했기에 딸이 어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100% 아이들을 믿는다. 믿는 만큼 아이들도 다 얘기한다”며 딸 자랑을 하는 이성미에게 이봉규가 태클을 걸었다. “글쎄~ 진짜 다 얘기할까? 그 나이 때는 엄마에게 숨기고 싶은 일도 발생하고 상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도발했더니 그녀는 “우리 가족은 각자 결정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걱정은 지들이 하는 거지 엄마는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여태껏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말도 한다. “흙에서 자란 아이는 용기로 크고, 아스팔트에서 자란 아이는 오기로 자란다”는 말을 20세 때 어디선가에서 듣고는 가슴에 새기고 아이들을 키울 때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성미의 집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돈 항아리’가 있다. 항상 5만원 정도 비치해놓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꺼내간다. 그녀의 ‘믿음 가정교육’에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 귀여운 여인 그리고 작은 거인 아름다운 얘기만 하고 인터뷰를 끝낼 한량 이봉규가 아니라서 전매특허 질문을
훅~ 던졌다.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용서할 수 있나?” 몇 초간 정적이 흐르더니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것으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금방 “그런데 아이들 때문에 바람은 피우지 않을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맹세했거든” 하며 마무리 짓는다. 그녀의 표정에 강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이대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다. “아내로서 부족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의외의 답변을 한다.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다. 애교도 없고 사랑 표현도 못한다.” TV 화면에 비치는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그렇다면 이성미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백조처럼 귀엽게 보이려고 엄청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현모양처 이외의 앞으로의 꿈을 물으니, 교통부장관을 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밝힌다. 뉴스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운전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부연 설명한다. 교통부장관이 어려우면 사복경찰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체구는 작지만 사회봉사에 대한 포부는 무척 크다. 지금은 ‘CH 114’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교회를 찾아주는 사이트인데 올 9월에 오픈할 예정이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한 달에 1만 명 정도나 된다니 믿기 힘들다. 이성미는 이들이 안타까워 이 같은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어릴 시절과 젊은 시절 한때의 불행을 슬기롭게 승화시킨 이성미는 현모양처의 평생 꿈을 이룬 것을 넘어 지금은 남 도울 생각에 골몰하며 살고 있다. 인터뷰 시작 때는 귀여운 여인이었는데 끝날 무렵에는 그녀가 작은 거인으로 오버랩된다.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정말 모처럼의 단비다. 제발 대지를 흠뻑 적셔주면 좋겠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농심이 얼마나 고대한 비인가. 그러나 좀 내리나 하던 빗줄기는 야박하게도 금세 그쳐버린다. 또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비추며 심술궂게 혀를 내밀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뭐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피하기보단 오히려 태양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이며 목련이며 봄꽃 소식에서부터 부고장이며 청첩장까지 줄줄이 달리는 SNS 댓글들 속에서 말이다.
지난 6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부산은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해운대로 찾아든 사람들로 벅적일 것이다. 필자도 이참에 올여름 휴가지로 부산여행이나 추천해볼까?
부산이 처음이라면 동백섬 한 바퀴 돌고 해운대 백사장 거닐다 달맞이고개에서 야경에 취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도 있고, 줄서서 먹는다는 대연동 쌍둥이 돼지국밥에서 민락동 회센터로 이어지는 식도락 코스도 좋고,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는 지름신 쇼핑 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면 좋겠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대학 졸업 때까지 약 18년간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청춘의 황금기를 오롯이 보낸 곳이 바로 부산이다. 몇 년 전엔 졸업 후 약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가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고선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한참을 쳐다보며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간절함이 통했는지 이젠 칠순이 훌쩍 지난 그 옛날의 문방구 아저씨와도 짧게나마 재회의 기쁨도 누렸다. 추억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오륙도의 윤슬!
남구 용호동 끝자락을 밟으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오륙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 같은 날 햇빛에 아롱질 그 눈부신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좌측으론 광안대교를 굽어보며 우측으론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해안절경을 따라 이어진 길도 너무 매력적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몇 년 전에 개장된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그 넘실대는 파도에 부서지는 바위섬은 아찔한 스릴과 폐부를 찌르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때다 하고 ‘부산 아지매’들이 권하는 회 한 접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흥정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지 싶다.
철썩이는 밤바다에 풍경소리, 해동 용궁사!
해운대를 돌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 있는데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용궁사다. 바닷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용궁사라는 이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절이다. 낮 시간대의 비경도 일품이지만 필자는 밤 시간대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철썩철썩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경소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그 밤바다의 ‘콜라보레이션‘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Kiss in the dark’은 바로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애독자들이시여, 부디 ’낮 뜨거운‘ 시간을 피해 어둠을 틈 타 살짝궁 다녀가시길 권한다. 참고로 인근의 송정해수욕장 바다 산책로도 추천한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서울에 둘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
와우~ 여긴 또 어디일까? 부산 앞바다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동으로 이어진 해안절경 길인 송도 갈맷길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케이블카까지 재가동 했다고 하니 올 여름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빨리들 다녀가시라.
어떤 투어이든 일단 여행길엔 입이 심심해선 안 된다. 돼지국밥이나 곰장어 구이, 밀면, 물회도 있으니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부평시장 야시장(일명 깡통시장) 구경하며 거인통닭 시식도 권할 만하다. 인근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단팥죽 한 그릇 하는 것도 이열치열엔 그만이겠다.
아~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이른 아침 갈매기 울음소리에 눈이 떠진다. 찬거리가 부족하다 싶으면 낚싯대를 들고 방파제로 나서면 그만이고, 수평선을 장식하는 저녁놀은 훌륭한 안줏거리가 된다.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만큼이나 누구나 꿈꾸는 노후생활 중 하나는 어촌에서의 삶이다. TV 속 예능 프로그램이 간간이 보여주는 바닷가 마을에서의 유유자적한 생활은 어촌생활에 대한 동경을 더욱 증폭시킨다. 현실에서도 그럴까? 전문가들은 무작정 어촌으로 떠난다고 해서 즐거운 인생이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잘만 준비하면 평범한 귀농보다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는 귀어·귀촌이다.
우리가 귀어·귀촌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귀어·귀촌에 대한 명확한 정의다. 귀어 혹은 귀어업은 어업활동을 하기 위해 타지에서 어촌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귀촌 혹은 귀어촌은 어업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타지에서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촌에서 ‘어업활동’을 하는가가 핵심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관계부처에서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등을 근거로 이주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귀어·귀촌이 뜨는 이유
최근 사회적으로 귀어·귀촌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다. 먼저 활발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다. 고령화로 몸살을 앓는 어촌 지역에 젊은 도시민을 유치해 활력을 불어넣고, 이를 통해 채집이나 양식 중심의 어업에서 가공이나 관광 등 2·3차 산업과의 접목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창업자금을 1인당 최대 3억원, 주택마련 지원자금을 최대 5000만원까지 연리 2%, 5년 거치 10년 분활상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산업 경영인 육성사업 등을 통해 별도의 사업자금 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으로 취업시장으로 몰려나오고 있는 조선업 퇴직자의 구제 방안 중 하나로 귀어·귀촌제도가 활용되고 있다.
증가하고 있는 어가 소득도 귀어·귀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 5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어가경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어가 평균소득은 가구당 4708만원으로 2015년(4389만원)에 비해 7% 증가했다. 이는 2013년 이후 4년 연속 증가한 수치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40대 이하 경영주 어가의 선전과 정부의 지속적 지원이 효과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수산물 소비도 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소비된 수산물 식자재는 1인당 58kg 정도로 일본(45kg)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공급에 비해 소비가 늘면서 단가와 수익도 자연스레 오르고 있는 모양새다.
무작정 바닷가 마을로 떠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귀어·귀촌은 정서나 생활방식, 소득 마련 등 모든 면에서 도시에서의 삶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더욱 막막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귀어·귀촌을 희망하지만 배경 지식이 없어 도움이 절실한 희망자들을 위해 운영되는 곳이 있다. 귀어귀촌종합센터다.
바다에서 무엇으로 먹고살까
귀어귀촌종합센터는 한국어촌어항협회가 설립하고 해양수산부가 지원하고 있는 기관으로, 귀어·귀촌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각종 지원제도 안내에서부터 업종 및 품목별 전문적인 기술상담, 창업계획서 작성 자문까지 돕는다.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담당하는 홍순택 전문위원은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을 통한 사전준비라고 조언한다.
“보통 특정 지역에 연고가 있고, 집안에서 하던 어업 업종이 있으면 비교적 귀어·귀촌이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본인에게 맞는 정착 지역과 먹고살 업종부터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지는 않아요. 또 지원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정착에 성공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어·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경쟁력 차이가 크다고 전문위원은 설명했다.
“새 아이템으로 창업을 해보려는 20~30대와 은퇴 후 제2인생을 준비하려는 50~60대, 그리고 도시생활에서 도태돼 갈 곳을 찾는 40대로 나눌 수 있어요. 물론 정착을 가장 잘하는 부류는 자신만의 아이템으로 준비가 잘된 20~30대예요. 반면에 도피처를 찾는 40대들은 쉽게 정착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는 상태이니까요.”
귀어·귀촌을 통해 할 수 있는 업종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배를 사서 고기를 잡는 어선어업이다. 귀어업의 약 65% 정도가 배를 탄다. 이 중 3톤 미만의 작은 배를 사서 연안에서 조업하는 형태가 70%가 넘는다. 정부지원자금만으로도 창업이 가능하고 일을 배우기도 쉽다. 실패했을 때도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 3~5시간, 조업 일수도 연간 동해안은 150일, 남·서해안은 200~250일 정도로 다른 직종에 비해 짧다. 금어기가 존재하고 기상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최근 각광받는 업종 중 하나는 양식어업이다. 사전 지식과 자금 확보가 필수이지만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김, 굴, 전복 등의 해수면 양식 외에 육지에서 할 수 있는 내수면 양식도 있다. 뱀장어나 미꾸라지, 아열대성 민물새우인 큰징거미새우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수산물 유통업, 가공업이나 소금산업 등도 선택되고, 최근에는 어촌관광이나 해양수산레저 사업을 포함한 어촌 비즈니스 사업에 대한 관심도 높다.
고령 은퇴자의 경우 해안가에서 조개나 낙지 등의 수산물을 채취하는 ‘맨손 어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촌에 정착만 잘 하면 맨손 어업만으로도 기본적인 생활 유지는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필수 요소
전문가들은 귀어·귀촌을 위한 정보와 기초준비 단계로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후, 각 기관에서 마련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볼 것을 권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해양수산인재개발원에서 진행하는 귀어가, 귀어촌 정착교육 과정과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개최하는 귀어귀촌아카데미와 코칭클래스가 대표적이다. 또 어선어업, 양식업, 해양레저 등 업종에 따른 전문 교육기관도 있다.
귀어·귀촌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귀어촌 홈스테이 지원사업도 있다. 귀어·귀촌 희망자가 어촌에서 미리 살아보고 정착 여부나 업종 선택 등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정부와 지자체 예산으로 숙박비와 컨설팅 비용의 80%까지 지원한다.
귀어·귀촌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각 지자체의 도시민유치희망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도시민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지자체의 경우 어촌계 가입비 면제, 어업권 매입 안내, 주거용 사택 실비 제공, 일자리 알선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다. 다만 지자체 여건상 이런 지원책들은 지속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귀어귀촌종합센터의 SNS를 팔로우해두면 편하다.
또 귀어·귀촌 경험자들은 원하는 지역에서 미리 살아보고 마을 주민들과 사전에 의사소통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귀띔한다. 지역에 따라 어촌계 가입이 까다롭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 배타적, 폐쇄적 성향을 띠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연안어업이 가능한 어장이나 양식을 위한 해수면, 해산물 채취가 가능한 해안 등 대부분의 지역 해양자원은 어촌계의 공동소유로 관리된다. 이는 어업권이자 자산의 개념이므로 어촌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 큰 비용이 들기도 한다. 한 지역 어촌계장은 “도시민들은 어촌을 생활공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제로는 생활공간이자 생업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마을의 예법이나 상호간의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조언했다.
뭐 대수랄 게 있나? 오히려 추세 아닌가? 설거지하고 청소기 돌리고 또 빨래 개고 등등 그간 하지 않았던 일이라 처음엔 어색했지만 막상 해보니 점차 재미있기까지 해서 ‘체질인가?’ 하며 속으로 놀라기까지 한다. 돌이켜보니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부엌 근처엔 갈 일이 없었고 밤중에 보채는 아이들 업어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 전에 없던 생각이 든다.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싶은 아이들, 뭐라도 직접 만들어 주고픈 아내. 소중한 가족이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는 생각은 나이 탓일까?
깔끔하니 널찍한 공간, 테이블엔 준비된 식재료, 그리고 기분 좋은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강사님께 “오늘 잘 부탁드려요” 하고 미리 꾸벅 인사를 건네본다. 수술실 들어가는 의사인 양 손부터 깨끗이 씻는다. 맛은 둘째이고 위생이 먼저이리라. 그나저나 오늘 메뉴는 중식이라 했던가? 실습에 앞서 강사님께서 오늘 요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부터 해주시는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옆자리 수강생이 제법 경험이 많은 듯 아는 체도 하면서 여유를 부리자 슬슬 오기가 생긴다. ‘좋아~ 어디 한 번 겨뤄보자고!’ 수강생들은 나긋나긋하면서도 강단 있는 강사님의 설명을 노트와 메모지에 급하게나마 받아 적어가면서 제법 진지하다. 물론 ‘그래 어디 한 번 해봐라’ 하는 식으로 뒷줄에 계시는 그분은 여전히 ‘뒷짐모드’다. 도대체 왜 왔을까?
‘야채는 크기나 모양을 비슷하게 썰어야 보기가 좋고, 스크램블드에그는 부지런히 잘 저어주는 것이 포인트, 그리고 토마토는 지용성이라 불에 볶아주면 체내 흡수율이 향상 된다’는 금과옥조 같은 강사님의 말씀을 일단 열심히 받아 적긴 했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듯싶다. 바로 이때 마치 사과 깎듯 옆으로 돌려가면서 감자를 깎고 있는 옆자리 수강생! 보다 못해 슬쩍 필러를 건네니 그제야 ‘썩소’를 날린다. ‘이건 뭐 나보다 훨씬 더 심하잖아?’ 우여곡절 끝에 깍둑썰기한 야채와 다진 돼지고기를 팬에다 볶기 시작하는데 차츰 재미가 있고 여유도 생겨나는 듯하다. 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 실습을 하다 보니 눈치껏 '커닝'하는 재미도 있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으며 자연스레 공범이 된다. 자장면에 춘장이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을 터, 자글자글 볶아둔 춘장과 물을 넣고 함께 끓인다. 이때 면발을 잘 삶는 게 포인트가 될 텐데 한 번에 푹 삶는 게 아니라 일단 끓고 나면 찬물을 부어 또 끓여야 면발이 쫄깃해진다고 한 것 같은데 강사님 제대로 받아 적은 거 맞나요?
오늘의 메뉴는 유니 자장! 결국 마지막 단계까지 왔고 먼저 미션을 완수하신 분들부터 강사님께 검사를 받는 시간이다. 과연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릇에 예쁘게 담아내는 것, 즉 플레이팅도 중요하다는 총평을 하시면서 드디어 필자 차례가 왔다. 시식을 위해 한 젓가락 입에 넣는 바로 그 순간!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요리의 마지막은 시식 및 품평이 아니라 깔끔한 정리정돈, 즉 설거지로 완성된다는 강사님의 명언부터 전해드리며 뜸을 좀 들이겠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
부담백배! 다음 번 요리강좌의 보조강사로 명받았다. 쏟아진 박수에 부푼 자신감은 아직도 뻐근하기만 하다.
살랑대는 봄꽃들의 유혹조차 죄다 뿌리치고 생면부지의 중년 남성들이 모여 근엄하게 혹은 진지하게 또 때론 서로 피식피식 웃어가며 좌충우돌 요리강습을 받은 오늘! 실습 도중 찍어둔 사진과 레시피를 정리해보며 아이들에게, 아니 아내에게 꼭 해주리라 다짐해보는데 어때요? 저란 사람, ‘뇌가 섹시한 남자’라 불러줄만 한가요?
오랫동안 교육 책임을 맡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20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학교 성적이나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는, 너희들이 50세쯤 되었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모습의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의식과 삶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권고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더 소중한 과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갖고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성공했고 보람 있는 장년기를 맞이했다. 그러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자기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기도 하고 삶의 진로나 직업을 바꾸는 어려움과 세월의 낭비에서 오는 불행과 성공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는 후배들에게 꼭 권고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당신이 80세를 앞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부끄럽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스러운 지도자의 모습을 갖고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출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는 충고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확실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50대부터 사회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일과 더불어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런 인생의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위한 가치의식도 없이 장년기 30년을 다 보낸다면 그것은 인생의 상실이며 사회적으로는 무가치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실패했다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기대와 존경심까지도 배신당하는 과오를 범한다. 70 평생의 업적과 노고를 부끄럽고 창피스럽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되는 때가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유혹과 실망스러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갖출 수 있다면 나는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탑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인생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으면 된다. 나이 들면 나에게는 나의 인생의 길과 목표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의 길이 있다. 왜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회 속에 살면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가 60쯤이라고 본다. 그리고 75세쯤까지는 누구나 인간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75세쯤까지 성장한 자세와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하는가 함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10년 정도는 연장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80대 후반기를 맞이할 때까지는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은 60에서 80대 후반기까지가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기대가 가능으로 채워질 것으로 믿는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고 나 자신도 체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마라톤 경기를 위해서는 90을 목표선으로 삼고 누구나 열심히 달려도 좋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100세 시대를 맞는 우리들의 인생설계여서 타당하다고 본다.
가장 먼저 찾아드는 어려움은 건강이다. 많은 사람이 50대쯤부터 관리했다면 유지할 수 있었을 건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방치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는 후회하기도 한다. 또 평소부터 잘 조절했다면 충분히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장·노년기를 질병과 함께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80이 넘으면 건강이 최고 제일이라고 해서 건강을 위한 건강이 인생의 전부인 듯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포기한 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소년 기간을 병약하게 자랐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과 조심스러움으로 살았다. 50이 되면서 건강의 자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찾아왔다. 산책과 수영이 건강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되었고 그때그때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짤막한 휴식이나 오수시간을 갖는다. 나는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건강은 일을 위해서라는 신념을 갖고 산다. 그래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을 즐길 수 있고 일이 다시 내 건강을 이끌어준다고 믿는다.
건강 이외에도 문제가 있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때는 손아래 가족들의 죽음에서 오는 어려움을 담당해야 한다. 그 고통과 불행은 경혐해본 사람이라야 안다. 그런데 80을 넘기면서는 누구나 비슷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녀들의 사업이나 인생의 실패 때문에 그 짐을 분담하는 노년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때는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의 체험을 거울삼아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한다. 체념할 것은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운명에 따른다는 것은 나의 노력의 한계 이상의 사건들을 대하는 지혜다.
나는 90의 나이를 넘기면서 누구나 겪는 시련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먼저 갔기 때문에 혼자 남는 어려움도 겪었다. 평생을 함께 일해오던 존경하는 친구들도 다 떠나갔다.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이 그렇게 힘겨운 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남아 있고 정성스럽게 쌓아올렸던 학문과 인생의 교훈이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어 감사히 생각한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세월만큼 행복한 때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봉사와 섬김의 열매가 일을 통해 사회와 겨레에까지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간절히 기원해왔던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에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해왔던 두 친구의 생애를 잊지 못한다. 우리 셋은 6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는 일과 학문적인 일에만 열중해왔다. 그러다가 60을 넘기면서부터는 언제나 사회와 겨레를 위한 대화와 걱정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사회와 겨레를 위한 관심과 걱정 때문이었을까? 셋이 다 90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사회가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가 먼저 떠나면서, 우리 세 사람이 50년의 우정을 계속하면서도 셋을 위한 즐거운 시간도 못 가졌지만 이제는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조용히 서로 마음으로 위해주다가 차례가 오면 가자고 말했다. 이제 다시 정을 쌓았다가 한 사람씩 가게 되면 남은 사람이 힘들지 않게 남은 몇 해를 보내자고 말했다. 찾아올 이별을 슬픔 없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김 교수가 먼저 떠났다.
몇 해 지난 후에 안병욱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너무 간단했다. “김태길 선생을 보내고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김 선생이 혼자 남을 것 같아”라는 얘기였다 건강이 힘드냐고 물었더니, “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라면서 말을 끊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나까지 가더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당부다. ‘우리가 못다 한 일의 마무리를 위해 수고해주시겠기에 …’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다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 이상의 인생을 산 사람도 많지 않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두 분을 보내드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안 교수를 보내면서 슬프지는 않은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행복한 눈물이었다.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 교수
올해 97세인 김형석 교수는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저서활동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 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이다.
큰형님은 타고난 바람둥이였다. 키도 그리 크지 않으니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얼굴은 그런대로 말끔한 편이었다. 그런 용모로 여자를 유혹하는 재주는 좋았다. 당시 큰형님이 자랑해대던 무용담이 있다. 어느 다방 마담에게 눈독을 들이면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그 다방에 가서 가장 비싼 메뉴의 차를 주문하고는 말없이 마시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만 하면 마담이 다가와 말을 걸게 되어 있다는 얘기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찍은 후, 치밀하게 작전을 구사하고, 걸려들면 여지없이 낚아채는 재주를 큰형님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재주 덕분인지 어느 대학 메이퀸 출신의 여자를 사귄 적도 있고, 의사 딸과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선보러 나가 여자에게 퇴짜를 맞았으나 결국 그 여자가 다시 매달린 적도 있다. 직장에는 오피스 와이프가 있었고 퇴근하면 또 만날 여자가 있었다.
그런 형님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혐오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바람둥이 기질 때문에 자주 귀가시간이 늦었고 그럴 때마다 동생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 좌불안석이었다. 들어오면 가만 안 두겠다며 엄포를 놓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형님 때문에 애꿎은 동생들이 피해를 봐야 했던 것이다. 연애 대상자가 괜찮은 여자였다면 부모님은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님은 연애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괜찮은 여자와 사귀다가도 실컷 놀고 나면 차버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무책임하게 보였고, 인간적으로도 비난을 받을 만했다.
그중의 한 여자인 그녀는 형님의 여자였다. 필자보다 5세 위인 큰형님과 결혼할 사이였다. 나이는 필자와 동갑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가 탱탱하고 날씬해서 매력적인 여자였다. 미니스커트 아래 곧게 뻗은 두 다리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필자 재주로는 절대로 넘보지도 못할 미인이었다. 성격도 밝아서 우리 동생들이 모두 좋아했다. 필자가 대학 3학년을 마칠 무렵 그녀를 처음 만났다. 형님과 곧 결혼 할 사이이므로 시동생이 될 필자와 우리 동생들에게도 잘 했다. 동생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 해주겠다며 제의했을 때 필자는 서슴없이 “생맥주를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사 달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점심시간에 명동의 한 생맥주집에 갔다. 필자는 1000cc, 그녀는 500cc로 시작한 술판이 밤 11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처음에는 안쪽 아늑한 자리에 앉았다가 번갈아가며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자 아예 화장실 바로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맥주를 흘렸는지 바닥이 흥건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형수님 될 사람이라 형님 얘기로 시작했지만, 마침 필자는 2년간 사귀던 여자와 결별한 직후라서 할 말이 많았다. 도대체 왜 필자에게서 여자가 떠나갔는지 여자에 대해 궁금증도 많았다. 그날 필자가 1000cc 18개인 18000cc를 마셨고 그녀가 500cc를 같은 비율로 마셨으니 9000cc를 마신 셈이다. 필자 생애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서 맥주 집에서 영업을 끝낼 시간이라 거기서 그쳤다. 무려 11시간을 같이 마신 것이다. 나이가 같아서 통하는 얘기도 많았다. 어쨌든 그날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녀에게 특별하고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녀와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다른 동생들보다 유난히 친했다. 만날 때마다 밝은 미소와 애교 넘치는 행동이 좋았다. 필자는 그녀의 술친구이자 든든한 우방으로 우리 집 형수님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형님이 그녀와 헤어지고 말았다. 누가 어떤 연유로 헤어지자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전처럼 자주 볼 수 없었다. 다시 형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와 사귄다는데 이번 여자는 맥주를 사 달라는 필자의 제의에 콧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결혼 당사자가 중요하지 시동생들 비위까지 맞춰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동생들에게는 싸늘한 여자였지만, 형님은 결국 이 여자와 결혼했다.
술친구 그녀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였다. 어느 날 영등포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했다. 주변 여관을 찾아보았으나 여관도 찾기 어려웠고 어쩌다 찾은 여관은 빈 방이 없어 난감했다. 점점 더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래서 얼핏 생각해낸 것이 영등포 시장 근처에 산다는 그녀였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그녀가 반갑게 받았다. 얼른 오라는 것이었다.
시간도 늦고 술도 만취 상태라서 그날은 그냥 잤다. 깨끗하게 깔아준 이불과 요에서 잠이 포근하게 밀려왔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침식사를 차려놓았다며 불렀다. 아침상은 노릿하게 잘 구운 굴비 한 마리를 비롯해서 뻑적지근했다. 그녀와 겸상을 하면서 한마디도 안 했다. 할 수가 없었다. 이미 형님과 헤어진 마당에 필자와 이런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니 아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만 그녀를 잊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우선 형님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필자와 결혼한다 해도 한집안에서 형님과도 마주쳐야 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형님과 사귄 것은 사랑도 있지만, 그 당시 우리 집안의 재력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가업을 이어 받을 사람이고 필자는 그렇지 못한 위치이니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혼기가 차서 결혼을 서두르던 나이였고 필자는 군대 3년의 장벽, 남은 1년의 대학생활, 그리고 취직해서 자리 잡는 기간까지 고려하면 최소한 5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이 뜨거웠다면 이 모든 걸림돌들을 이겨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다 쳐도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만 띤 채 아무 말 안 했을 것이다. 연애나 결혼 상대자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필자는 그때 어렸다. 남자가 여자보다 정신연령이 뒤늦은 것이나 연애 경력으로 보나 미달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는 다르다고 한다. 우리의 결혼은 사랑보다는 조건이다. 조건이 좋으면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랑 없는 결혼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한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그것도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부러운 존재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그걸 못해보고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6개월 전에 결심한대로 이번 5월 말에 오랜 세월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다. 그동안 임기 연장에 대한 여러 유혹이 있었다. 일을 멈추는데 대해 불안 해 하는 아내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무엇보다도 35년이 넘도록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던 패턴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을 많이 했다. 떠나기로 결심하고 6개월 동안 이 문제를 고심했다. 결론은 60 이후의 삶을 좀 더 느리게 살자는 것.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삶처럼 앞만 보고 뛰면서 살지 말고 옆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면서 느리게 걷듯 사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느리게 걷듯 사는 것...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떠나는 것은 정리를 의미한다. 그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직원들과 정리해야한다. 업무는 워낙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정리가 필요 없다. 업무와 관련하여 당부하는 것조차도 사족이 될 듯싶다. 다만 감정 정리가 필요하다. 회사 전체에서 필자의 나이가 제일 많다. 신입사원들의 이력서에서 부모 나이를 보면 필자보다 어린 경우가 많다. 그동안 어린 직원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나이 든 직장 상사로서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고민을 많이 들어 주었다. 우리가 살면서 ‘미리 준비 했더라면’이나 ‘미리 알았더라면’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그들이 필자와 이야기하면서 이런 것을 한 가지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관계를 맺었던 회사관계자들과의 정리도 필요하다. 필자가 떠나더라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직원들과 외부 회사와의 연결고리를 인계해 주어야한다. 그 회사들과 협업하여 진행할 향후 업무도 많고 콜라보 행사도 있어서 지속가능한 관계가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가 자산이 되듯이 좋은 협력회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회사의 자산이 된다. 오랜 세월 겪은 후에 진정한 친구가 생기듯 좋은 협력회사도 하루아침에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책 욕심이 많다. 필기구 욕심도 많다. 특히 손에 잘 잡히고 써지는 느낌이 좋은 필기구는 참지 못하고 구입한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을 보니 건축 책보다 시집이나 인문학, 자기 계발서 등이 더 많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시니어’ 관련 책들이다. 그동안 저자 강연을 찾아다니면서 모아둔 책도 많다. 각종 건축 프로젝트의 서류를 모아 둔 파일도 엄청 많다. 이것들을 다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서류 중에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어서 그림파일로 저장하고 나머지는 파쇄 해 버린다. 책은 일부 주변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나머지는 그냥 서가에 두고 떠나기로 했다. 필기구는 전부 가져간다.
그동안 전시회나 여행지에서 구입한 각종 소품과 도자기, 액세서리 등이 제법 많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내 바자회를 열기로 했다. 직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더 감사한 것은 여러 직원들이 자기들의 애장품을 바자회에 기증해 주어서 바자회가 한층 풍성해 졌다는 것이다. 수입금은 필자가 운영위원으로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필자는 짐을 정리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기부에 동참하니 일석이조의 좋은 행사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그 중에는 아쉽게 떠난 사람도 많았고 떠나는 날 얼굴을 못 본 사람도 많다. 가장 적당한 때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어쩌면 떠날 때 뒷 모습이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에도 책상 옆에 붙여놓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읽어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할머니가 주재하신 식사 모임
감독; 조지 틸만 주니어
주연; 바네사 윌리엄스, 이르마 피 홀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115분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영화로 가 빠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심점이 된 삼대에 걸친 대가족 이야기.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가정의 평안을 유지시킨다는 할머니의 교훈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딸들은 직업과 사랑, 자아실현을 위해 고분군투하고 손자에 의해 가정의 전통이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여성이 맡아왔던 화해, 안정의 역할을 손녀가 아닌 손자에게 맡겼음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성장해가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사진이 죽 나열된 후 소년 아마드(브랜드 하몬드)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할머니 조(이르마 P. 홀)는 미시시피에서 시카고로 이주해온 후 도박사였던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리자 홀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온 가족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할머니가 40년째 주재해온 일요일 저녁식사 모임은 세 딸과 그들의 남편, 아이들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가문의 전통이다. 할머니는 여자가 참고 개척해나가면 집안은 잘 유지되며 인스턴트 대신 손수 만든 음식이 인간의 영혼을 살찌운다고 설교한다.
장녀 테리(바네사 윌리암스)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이며 남편 마일즈(마이클 비치) 역시 변호사여서 이들 가정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다. 테리는 성취욕과 자기주장이 강하며 변호사 일에 만족하고 있는 데 반해, 마일즈는 변호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취미로 즐겨온 음악가로 전업하고 싶어 한다. 아기가 없는 이들 가정은 이래저래 충돌이 잦다.
차녀 맥신(비비카 A. 폭스)은 전업주부로 이해심 많고 자상하며 노동자 계층인 남편 케니(제프리 D. 샘스)도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가장이다. 맥신 부부는 아마드 외에 딸 하나를 더 두었고, 맥신이 또 임신한 상태. 이들 부부의 문제라면 케니가 테리의 연인이었다는 사실, 자신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테리는 맥신에게 시비를 걸어 가끔 다툰다.
미용사인 막내 딸 버드(니아 롱)는 램(메키 파이퍼)과 사랑에 빠져 임신부터 했는데, 램이 전과자여서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다. 버드는 옛 애인에게 도움을 청해 램을 취직시키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램이 자존심을 건드렸다며 행패를 부린다. 램의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장녀 테리는 깡패 삼촌에게 램을 두들겨 패달라고 부탁하고, 램은 총으로 맞서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이 때문에 테리와 버드는 으르렁거리게 된다.
할머니의 가치관은 시대 상황 등을 고려해볼 때 당연한 것이고, 음식을 통한 영혼 고양에 대한 설교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세 딸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감독은 차녀 맥신, 그리고 그녀의 아들 아마드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가치관 잇기를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어서, 일견 시대착오적이며 안일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맥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여성만의 인내 운운하는 선이라기보다 보편적 선, 중용 정신, 전통 존중 등이므로 편협하게 볼 것이 아니다. 각박한 현대사회, 가족 이기주의, 흑인 사회의 모순을 염두에 둔 인물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가장 끌리는 여성상은 장녀 테리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묘사는 성취욕 강한 여성에 대한 묘사가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그려지는 습성이 있어, 여성의 성취욕에 대한 몰이해와 한계를 드러냈다.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격과 일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지닌 여성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여성들에 대해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작가의 인물 분석이나 구현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 등 집안 대소사에 들어가는 돈 문제에 댛새서는 테리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이 테리의 이 같은 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테리에게 금전적 도움을 받는 이들이 “돈이면 다냐”라는 식으로 대드는 것은 경제력 없는 사람들의 비틀린 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늘 머리를 써야 하고 시간에 쫓기는 테리는 맥신처럼 집안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 대신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을 내놓는 것이다.
돈에 관한 인간의 이중적 태도는 테리의 남편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테리의 남편은 성공과 돈을 위해 뛰는 테리를 인간미 없는 아내로 본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망을 잘 이해해주는 테리의 사촌 훼이스(지나 라베라)와 관계를 맺는다. 이모할머니의 딸인 훼이스는 성인 비디오 배우로 집안의 골칫덩어리인데, 갑자기 나타나 온 가족을 불안하게 한다.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반대를 하는 테리의 현실적인 태도와 즉흥적으로 아무 일이나 저지르는 훼이스의 유혹.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와 인간관계, 그리고 흑인 문제까지 얹어 아기자기하게 묘사하는 는 마지막까지 돈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0년째 방구석에 들어앉아 TV만 보던 할머니의 남동생 피트로 인해 찾게 된 돈이 이 가정의 분열을 잠재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혼을 살찌울 음식도 돈이 있어 가능한 것 아닌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영화 제목 는 ‘영혼의 음식’이라는 직역보다는 미국 남부지방의 아프로 아메리칸의 전통 음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1960년대 중반부터 ‘soul’은 아프로 아메리칸 문화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soul music’이 대표적이다. 에는 보이즈 투 맨의 ‘A Song for Mama’를 비롯해 ‘소울’ 가득 담긴 노래들, 재료의 풍미를 살린 푸짐한 흑인 가정 음식 등 들을 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부모란 자식이 아직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느낄 때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버텨 낸다. 도요새도 새끼를 공격하려고 하면 다리를 절며 천적을 유혹하여 새끼들이 안전하게 도망치게 한다. 어쩔 수 없는 타고난 본능이다.
아이들은 커가며 능력이 향상되지만 노인들은 하던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지켜주던 부모는 이제 지켜주어야 할 사람으로 역할이 바뀐다. 늙은 부모를 가치나 효용성으로 보면 형편없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옆에 있어만 주는 것으로도 가족에게 힘과 결속력을 주는 것이다. 부모나 자식 보다 서로 인간으로 역을 맡는 것이다. 가족이니까 고맙습니다. 옆에 있어 고맙습니다. 도울 기회가 있어 고맙습니다. 비판하기보다 서로 감사하며 가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게 현명하다.
시어머니가 개킨 빨래를 나중에 다시 개킨다고 했지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며느리의 존중과 지혜가 보기 좋다. 잠시 머물며 쉬엄쉬엄 갈 때 부모가 보인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
베드로나 야곱이나 비중 있는 제자들이 아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다. 그녀에게 처음 나타나신 이유가 있다. 남자들은 입이 무거워 설명도 잘 못하고 여기저기 말을 옮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여자가 선택된 것이다. 특히 여성들 앞에서 절대 알리지 말라 하면 얘기는 더 빠른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
하느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누가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묻자 아담은 이브가 따서 주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고자질인 셈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 대목에서 유혹에 넘어간 여자가 말썽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브에게 설득당한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여자는 남의 말을 듣기도 잘하고 옮기는 능력도 대단한 것이 증명된 셈이다.
남의 얘기를 듣고 공감하며 또 소통하는 능력이 탁월한 여자가 바로 인류를 결속시키고 지탱시킨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 같다. 남자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으면 얘기가 스타카토처럼 토막이 난다.
“안녕하세요. 날씨 좋죠?”
“네, 그렇네요.”
더 이상의 대화는 끝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모이면 다양하고도 재미있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날씨, 요리, 육아, 미용 등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여자들은 몇 시간을 통화하고 나서도 나머지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다시 하자고 한다. 남자들은 그렇게 수다를 떨어놓고도 부족하냐고 의아해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과 풍부함이 바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자질이 되는 것 같다. 가족 간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꾸짖기고 하는 역할이 가능한 것이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격언처럼 버티고 지켜야 상황이 바뀔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다. 밝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희망을 바라보는 삶은 불가능을 물리친다. 그것은 과거가 아닌 현실을 새롭게 사는 것이고 매 순간 부활하는 것과 같다.
여자들의 공감 능력은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이건 태어날 때부터의 남녀의 차이일 뿐이지 모자라고 우수하고의 차이가 아니다. 남자들은 체계화 능력이 있는데 이는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가를 잡아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길눈이 밝다. 그러나 바로 앞 냉장고에서 물건을 찾아내는 일은 잘 못한다.
여성들은 나약하고,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종종 본다. 여자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라고 분개한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세상은 남자가 움직이고 여성은 남자를 움직인다.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하는 소리다. 여자는 때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신이 해놓은 일을 남자들이 한 것처럼 슬쩍 밀어놓기도 한다. 그걸 모르는 남자들은 자기가 다 한 줄 알고 우쭐댄다. 이런 일은 타고난 능력이 달라서 빗어지는 일이다. 다만 외향적인 남자의 힘이 여자의 부드러움 보다 눈에 쉽게 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