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센터 한 귀퉁이에 태극기 하나가 다른 폐품들과 함께 수거 돼 있다. 태극 문양이 선명하고 낡지 않았다. 대체로 태극기는 나라의 상징이어서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버려졌을까? 쓸모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나라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을까? 한때 소수의 국민은 나라를 등지거나 이민을 선택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국가에 대한 신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현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나라가 국민을 지켜줄지 의심하는 경향이 없는 바도 아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진정한 지도자는 찾을 길이 없고 권력과 치부를 위한 다툼이 난무하는 듯하다. 근래엔 선거 양상이라고 둘러댈 수 있으나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를 주장하는 부류로 나뉘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국민 통합을 외치면서 상대의 괴멸을 부르짖는다. 핵 개발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행태 또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관련 국가들이 펼치는 국제 정세도 불안을 더한다. 먹고 사는 일도 만만치 않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다. 젊은이의 취업도 쉽지 않다. 최대의 실업률이 이를 웅변한다. 정년 퇴직자도 800만 명에 이른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려는 젊은 남녀도 늘어나고 출산율도 자꾸만 줄어들어 “인구절벽”을 실감한다. 미래가 불안하다. 4차 산업혁명으로 내닫고 있는 앞날도 걱정이다. 수명은 상상 이상으로 늘고 있다. 과연 나라가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멀쩡한 태극기를 재활용 센터에 버리듯 나라를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다른 폐품 속에 버려진 태극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인연도 있고 더 오래 만나지 못해 그립고 아쉬운 인연도 있다. 인간관계를 의지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리라. 인연은 구름처럼 마음 한구석을 지나간 그림자요, 물 위에 떠가는 꽃 이파리다. 만나고 싶어도 이승에서는 못 만나는 친구도 있고 인연이 되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인도 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Y는 미소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에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외모는 거의 스타급이었다. 필자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말도 못하고 그저 주위를 맴돌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졸업 후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다른 친구를 통해 종종 소식만 듣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 모두가 남미 우루과이로 이민을 갔다. 이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환송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갔는데 그 친구는 벌써 떠나버리고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남미로 여행이라도 가면 수소문해서 만나보고 싶은 친구다.
고등학교 친구 J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IMF 전후에 만나 어려운 시기를 같이 보냈다. 취업 기간을 빼고는 거의 매일 만났다. 사무실을 차려 전업 투자자로도 같이 활동했다. 그러나 주식투자는 수익의 변동이 크고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J는 할 수 없이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옮겨 살다가 나중에는 봉천동에서 월세로 살았다. 자존심이 강한 J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절대 없었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자가 취직을 하게 되어 좀 도와주려고 하던 차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망연자실했다. 좀 더 헤아렸어야 했는데 후회가 컸다. 내세에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P는 자격증 시험공부를 공부하다 만난 지인이다. 수년을 함께 공부하고 낙방도 함께 경험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필자는 다른 일을 하느라 중도에 포기했지만 P는 계속 공부를 해 10년 만에 자격증을 땄고 현재 관련 업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서로가 하는 일이 달라지니 만나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필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동종 업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면 관계가 더 긴밀해졌을 것이다. 아쉽다.
부친이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다. 밖에서는 무골호인이었지만 집에서는 너무 엄격하신 아버지였다. 일방적으로 강하게 요구하시는 것들이 많아 필자가 가끔씩 반발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유를 주셨더라면 필자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반발하는 마음에 아버지가 권하고 강요하시면 무조건 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부친의 바람과는 달리 전공, 종교, 직업 등에서 매번 다른 길을 택하곤 했다.
아버지는 교장으로 정년퇴직하기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17년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병으로 고생하실 때는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지셨다. 아무리 잘해도 한 번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어 어느 날 넌지시 왜 그러셨냐고 여쭈어보았다. 교만해질까봐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자식을 깊이 사랑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나마 살고 있는 것은 다 아버지의 역량 덕분이라고 여겨진다. 기대에 못 미친 불효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신 차려 잘해드리려고 하니 안 계신다.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해요. 다시 만나면 잘해드릴게요. 아버님 사랑합니다.
후회와 그리운 마음에 때늦은 사부곡을 불러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하물며 오랜시간 정을 나누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듯 등을 돌리며 얼굴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난시간, 받기만 했던 감사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오랜만에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그녀는 웬일이냐며 반갑다고 아주 큰목소리로 답을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욕심으로 지글지글 끓어 오르는 목소리에는 한국의 제주도를 운운하고 있었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의 목소리도 역력했다. 아직도 변함이 없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보다는, '그 언젠가는 변하겠지?' 라는 미련을 남기며 또 한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와는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하며 알게된 관계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방면에 상당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한계는 멈출줄을 모르고 현재 진행형이었다. 커다란 병원빌딩에서 남편은 닥터로 병원을 하고 있었고 저택도 지니고 있었다. 병원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여기저기 땅을 사들였다.1년에 두어번은 한국을 오가며 강남에 건물도 사들였고 아파트도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를 지니고 똑똑한 그녀는 돈만 생기면 늘 금 은 덩어리를 주어 모았다. 그녀는 엄청난 구두쇠였지만 언젠가 필자가 돈이 필요하다고하면 아주 잠깐이라도 덩어리 채로 빌려주곤했다. 뿐만아니라 학구적인 열정도 누구보다 남달라 쉴새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병원에서는 간호원을 못믿겠다며 직접 주사를 놓기위해 한의대도 다니고 있었다.
필자는 어느날부터 그녀의 대단한 열정에 관심을 두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부터 그녀도 필자의 딸에게 묘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서 의사가 된, 필자의 딸에게 이글거리는 욕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필자에게 서서이 다가오며 물질공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병원으로 필자부부를 불러대며, 온갖 것들로 마음을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써댔다. 주로 먹을것 들이었다. 이런저런 과일에서부터 생선까지, 미안해서 사양을 할라치면 감히 입을 뗄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명절때가 되면 그녀의 저택으로 초대해 떠들썩하게 자기의 부를 과시하곤 했다.
심지어는 그녀의 아들에게 직접 요리를 하게하며 미래의 장모에게 점수를 따려고 갖은 묘책을 써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단한 가족들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몇번에 걸쳐 한국까지 달려가 필자의 딸을 만나고 오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남녀관계의 결혼인연이란 그리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부터 찬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한다. 상냥하기만 하던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를 맞이하는 모습에도 그림자가 지기시작했다. 아마도 그녀의 목적의식에 금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서서히 그렇게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필자는 냉정하게 돌아설수만은 없었다. 늘 받기만해 아주 부담스러워했는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유를 모르니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아니 그녀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후로 부터 그녀의 일방적인 욕심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으나, 늘 그녀의 특기인 후회스러움이 필자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필자도 서서히 마음을 돌리며 억지스러운 인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관계란 바람처럼 스쳐가는 가벼운 가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바다건너 전화속에서도 그녀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못한 그녀의 아들을 또 가식적으로 자랑만 펼친다. 그러나 필자의 딸은 이미 훌륭한 배필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녀가 생각하듯 세상사 모든것이 욕심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더구나 자식문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변함없이 뭔가 똘똘뭉쳐있는 그녀의 아집속에서는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는 알수없는 미스테리이다. 오랜만에 미국으로 연락해 차마 물어볼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도 그녀는 필자의 딸을 잡지못함은 끝내 애석함으로 남아있는 듯했다. 돌이켜 지나온 이민 생활을 생각하니 웃음반으로 헛웃음도 나온다. 또 그모든것들은 지난 과거속에 서서이 묻어져만 간다. 단지 한때의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그녀는 필자가 잊지않고 국제전화로 연락해 줬음에 깊은 고마움을 전해왔다.
사람의 관계는 한번 끊겨지면 언제 다시 연락할 사이가 될지 모르지만, 필자는 그녀가 지난날 퍼부어 주었던 고마움에 감사함은 변함이 없다. 언젠가 나이를 더 먹고, 욕심의 기운이 소진을 할때면 다시 만나, 지난 과거속 이야기에 함께 머물며 자식들 이야기로 웃고 떠들며 인생을 나누고 싶다. 그저 이해타산이 없고, 소소한 정이 담긴 삶의 관계에서 자식과 함께 늙어가는 사람냄새로 만나고 싶다.
그녀와 훈훈한 인정으로 만날수있는 언젠가 그날을 기다려 본다.
갈수록 설 명절에 그들을 볼 수 없다. 인터넷에는 그들끼리 ‘설 명절을 피하는 법’ 같은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 이제는 세뱃돈의 유혹도 그들을 붙잡지 못한다. 더는 결혼에 대한 추궁을 받기 싫어서일지 모른다. 그들이 빠진 안방에는 노인들만 모여 한숨을 쉰다. “도대체 걔들은 왜 결혼할 생각을 안 하는지 몰라. 앞으로 어떻게 살려는지 원….”
새해 벽두부터 ‘인구절벽’이라는 생소한 말이 떠돈다. 미래학자 해리 덴트가 최근 저서 에서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사용한 ‘인구절벽’이라는 용어는 젊은 층의 인구가 어느 순간부터 절벽 같이 떨어지는 현상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한국도 2018년을 기점으로 경제인구가 하락할 것을 예측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내년 이후 경제인구가 감소하며 일본이 겪었던 장기 침체를 경험할 것”이라며 출산율을 높이는 해법으로 보육비 지원을 언급했다. 사실 그들이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가 보육비를 비롯한 어마어마한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기를 키우며 직장 일을 병행할 수 없으니 이중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우리 세대의 기억 속에는 10남매 가족이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도 보통 5, 6남매의 일원이지 않은가. 소위 베이비 붐 세대에게는 오히려 오늘날의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소함이다. 아이 낳는 것이 일상사였고 보조금 안 주어도 순풍순풍 아이를 낳곤 했는데 왜 그들은 아이는커녕 결혼마저 기피하는가.
하긴 인구 정책적 관점에서만 보면 인구를 늘리는데 왜 결혼을 장려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미혼모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보호받지 못하고, 만약 알려질 경우 받아야 할 지탄이 두려워 몰래 버리거나 출산 기록이 남을까 겁나 이름 없이 베이비 박스에 놓고 가지 않는가. 결혼만이 인구 정책의 외곬 길은 아니라는 말이다.
주제로 다시 돌아오면 그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다산을 권장하는 전통은 당시 경제력의 바탕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인력(人力)이었으므로 다산은 곧바로 미래를 보장하는 경제 행위였으나 지금은 과연 그런가? 우리만 해도 형제자매들이 취직하여 가정경제에 나름 보탬을 주었으나 이젠 노후에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야 할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별로 필요도 느끼지 않는데 자꾸 결혼하여 국가 경제를 위해 자식을 낳으라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게다가 꼭 자식이 아니라도 자신의 정신적 DNA를 남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글로 혹은 SNS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굳이 인구가 걱정이라면 트럼프와 반대로 이민을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젊은이들이 아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결혼할 때까지 조금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면 어떨까.
필자는 외국인이 한국어가 유창하면 질투가 깔린 선망을 하게 된다. 화가 나기도하고, 한 발 더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외국인이 한국의 역사나 문화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한국미와 한국의 진정한 가치를 논하는 한글문장이다. 그들의 한국어와 한글은 필자의 30년 이민생활의 시간을 한 칼에 무참하게 만들어버린다. 질투는 두뇌능력에 대한 열등감이고 노력부족에 대한 후회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무덤이 있을 때는 있는 것에 대한 있음의 사유가 있다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 저장하는 지식까지 그 자연법칙에 따를 수 있는가 하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핑계가 있긴 하겠다. 옹색한 핑계지만, 일하느라 달러 벌어들이느라 바쁘고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었다
급한 것부터 하느라 언어에 까지 노력할 여유가 없었다는 변명이 있다 이 변명에는 반박하는 논고가 따른다. 이민 전에 이미 10년간 영어공부는 하였다 교육 커리큘럼에 투자한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실생활에 필요한 말은 생존의 절대요구라 빠르게 배우게 된다. 얼마간의 단어와 몇 개의 문장이면 충분하다. 간단한 생활언어 몇 개를 구사하는 것으로 인간의 말이라 할 수 있으며 외국어를 말한다 할 수 있을까. 동물과 식물과도 인간은 충분히 소통한다. 그 정도의 소통인 기본생활 언어를 생각과 문화전달의 매체로의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문법으로 배운 말이라 구어가 오히려 어렵다. 모국어처럼 사용 할 수 없음은 이론을 먼저 배워 언어 탑의 기반이 되었고 그 기반에 가운데를 훌쩍 뛰어넘어 최소한의 소통언어를 익힘으로 꼭대기만 올린 것이다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가운데 부분을 채울 수 있다면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으리라 필자는 생각했다
손자가 태어났다. 이 기회를 단단히 잡기로 마음먹었다 애기가 그림책을 볼 때부터 아이와 함께 영어를 배우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배운 영어라면 손자와의 소통도 좋을 것이고 영어 독서 속도도 낼 수 있고 말 안에 숨어있는 은근하고도 구수한 언어의 진 맛을 흡수하리라, 언어 안의 혼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란 흥분감마저 들었다
백날이 되기 전부터 그림책은 늘 주변에 늘려있다. 처음 시작하는 그림책에는 그림만이라 손자에게 보여주기만 했다 겨우 옹알이 기간을 벗어나면서 그림과 그림을 말과 글 하나로 인식하게 하는 그림책을 읽어준다 옳다구나 이제부터 차근차근 아이의 자세로 단어를 배워가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림책을 펴는 순간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책을 많이 읽는다. 아들이 출퇴근 시간 기차 안에서 읽으려고 가판대에서 사들여 읽고 나면 필자의 순서다. 영문의 베스트셀러 책을 읽을 경우 넉넉하게 잡아도 10% 이상 모르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손자의 그림책은 90% 내가 모르는 단어다. 동물들의 이름은 동물 자체도 필자가 흔히 보는 가금류나 애완동물이아니라 낯설다. 이름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학명인지 발음하기도 어렵다 전자사전에서 발음을 듣고 그대로 따라하지만 정확한 발음이 되지 않는다. 그림책은 술술 읽으리라 생각한 것은 완전 오판이었다. 아기의 그림책에 나오는 단어는 지능으로 구분되거나 사회 환경에서의 사용언어가 아니었다.
시니어들은 고령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크고 작은 질환에 시달린다. 흔히 이야기하는 노화의 과정인 셈이다. 다양한 질환은 부위와 병증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시니어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대부분의 병들은 증세가 가볍다면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바로 피부병. 단지 가렵고 변색이 되는 것을 떠나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건선(乾癬)은 겨울철 건조한 환경과 함께 시니어들을 속 썩이는 대표적 질환. 한의원에서는 드물게 건선치료만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강남동약한의원 이기훈 원장(李起熏·46)을 만나 이 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대해 알아봤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건선은 피부에 작은 좁쌀 같은 발진이 생기면서 발진된 부위 위에 새하얀 비듬 같은 각질이 겹겹이 쌓여 나타나는 만성 피부병이다. 붉은 발진도 함께 나타나는데, 맨 처음에는 작은 크기로 나타나다 새로운 발진들과 합쳐져 커지고, 주위로 퍼져 나간다. 심한 경우에는 온몸이 빨갛게 발진으로 뒤덮이는 경우도 많다.
양의학에서는 건선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피부에 있는 면역세포인 T세포의 활동성이 증가되어 면역물질이 과다 분비되는 것이 주된 원인이 아닐까 추정만 하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한의학에서는 건선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이기훈 원장은 건선의 원인으로 열(熱)을 지목한다.
“건선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먼저 첫 번째 원인은 외적인 요인이에요. 건조한 환경입니다. 건조한 환경은 건선을 악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쳐요. 실제로 겨울철에 건선 환자가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요인은 바로 열이에요. 체내에서 발생한 열이 몸 밖으로 방출되지 못하고 피부에 누적되면서 여러 증상으로 발병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건선이에요.”
건조한 환경은 건선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데, 환자 중 일부는 겨울철에 발병했다가 여름이 되면 자연스럽게 증상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바로 습한 여름 공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건선 환자가 건조한 공기를 피해 습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지냈더니 건선이 말끔하게 나아 실제로 이민까지 심각하게 고려한 사례가 있었을 정도라고 했다.
시니어에 발병하면 반점이 온몸 덮기도 해
건선은 보통 20~30대 젊은 층에 많이 생기지만, 60세가 넘어 처음 발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건선은 편도염이나 고열 감기를 앓고 나서 건선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발병하는 건선은 대부분 물방울 모양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편도염이나 고열 감기를 앓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발열과 관련이 있다.
이에 반해 시니어들이 앓는 건선은 조금 다르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땀의 배출이 줄고 피부가 건조해지는데, 전신의 건조함이 건선 발병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발병하는 형태도 물방울 모양이 아닌 홍피성(紅皮性), 즉 붉은 반점이 전신을 덮는 모양으로 대부분 나타난다. 또 이런 홍피성 건선은 가려움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더욱 골치 아프다.
이 원장은 “피부에 습기가 없이 건조하고 기초 대사가 떨어지면서 열을 밖으로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건선으로 이어지게 되고요. 실제로 실내 습도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것만으로도 건선에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붉어지는 피부는 대인관계까지 어렵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피부병은 전염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 피하려는 경향이 있고, 본인 스스로도 붉은 피부를 부끄럽게 생각해 대인기피증까지 겪는 경우도 있다.
스테로이드 연고 조심해서 사용해야
이렇게 붉은 반점과 함께 가려움을 유발하는 질환이 또 있다. 바로 아토피다. 아토피와 건선은 서로 같은 듯 다른 질환이다 보니 치료의 혼선을 주는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아토피 환자는 건선으로 오해받아 엉뚱한 치료를 하고, 또 건선 환자는 아토피 치료로 시간을 헛되이 버리는 것이다. 건선이나 아토피가 생명과 직결되는 병은 아니지만 정확한 진단부터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발병하는 위치부터 아토피와 건선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토피는 관절 안쪽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반대로 건선은 관절 바깥쪽에서 발병해요. 예를 들어 무릎관절 앞쪽의 무릎뼈가 있는 쪽에 발병하면 건선일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오금 쪽에 나타나면 아토피로 볼 수 있죠. 건선은 외부와의 마찰이 잦은 부위에서 일어나는 셈이에요.”
아토피와 건선 치료를 할 때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바로 스테로이드 사용이다. 스테로이드는 아토피 질환에서 단기적인 효과를 보이는 약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건선에서도 표면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물론 그 부작용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피부가 얇아지거나 화상과 유사한 금단증상이 나타나거나 얼굴이 달덩이처럼 붓고 어깨에 비대증이 나타나는 등의 현상이다.
“만약 건선으로 스테로이드제를 처방받았다면 3개월 정도 발라보다가 시험 삼아 중단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때 만약 건선이 다시 심하게 올라온다면 그건 건선을 치료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부작용을 동반하면서 건선을 일시적으로 막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장기적으로 치료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증상이 되레 심해질 가능성도 높아요. 물론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일부에서 처방하는 면역억제제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고령의 시니어들에게는 장기적 복용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치료는 6개월에서 9개월 소요되는 장기전
그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이 원장은 건선은 그 원인을 제거해야지 외치(外治), 즉 침이나 연고 같은 외부의 치료는 그 효과가 5% 정도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치료에 대한 진행 속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한의학에서 바라보는 건선의 원인, 그러니까 피부가 마르고, 열 배출이 어려워지는 원인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스트레스와 음식, 과로, 편도염 그리고 환경적 요인이에요.”
치료를 하면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 PASI(건선의 중증도를 나타내는 국제기준) 수치가 10% 이하로(PASI90) 내려가는 데 걸리는 기간은 6개월에서 9개월 정도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일반 성인 기준이며, 시니어의 경우에는 3개월 정도 더 소요될 수 있다고 말한다.
“건선 치료는 일종의 빙산이라고 보면 돼요. 질환이 눈으로 확인될 만큼 발현되는 것은 일부일 뿐이고 진짜 문제는 수면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요.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그래도 환자의 85~90%는 PASI90에 도달합니다.”
고기는 담백하게, 튀김은 피해야
일상생활에서 건선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기훈 원장은 일단 음식을 꼽는다.
“기름진 음식을 피해야 해요. 가장 나쁜 건 튀김. 고온 상태에서 기름으로 조리한 음식은 좋지 않아요. 볶음도 마찬가지고요. 찬 음식에 가열되지 않은 기름이 첨가된 건 별문제 없어요. 그리고 닭이나 오리 같은 가금류보다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드세요. 호두나 잣 같은 견과류나 배같이 단맛이 나는 과일은 도움이 됩니다. 대신 신맛이 나는 귤과 오렌지, 사과는 피하셔야 합니다.”
조심해야 할 음식은 역시 술이다. 상대적으로 몸의 열을 덜 올리는 맥주가 그나마 낫고, 양주와 같은 독한 술은 상극이다.
“일상생활에서 고쳐야 할 습관 중 하나는 잠이에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불면이 있다면 치료해야 합니다. 또 샤워할 때 비누나 보디클렌저 같은 계면활성제를 너무 자주 쓰시면 몸이 건조해져요. 특히 때 미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스트레스 없이 생활하시면 건선 걱정은 줄일 수 있습니다.”
이기훈 원장이 말하는 건선 자가진단법
1 겨울이 되면 빨간 반점이 나타난다.
2 몸에 두드러기가 잘 생긴다.
3 피부 가려움증을 겪는다.
4 무릎이나 팔꿈치에 각질이나 반점이
생긴다.
5 각질을 떼어내면 피가 맺힌다.
6 여름에는 괜찮다가, 겨울에 반점이
생긴다.
7 붉은 반점 주위가 가렵다.
8 수포나 농포가 생기기도 한다.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용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바디 랭귀지를 같은 의미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민 초기 일상의 아주 작은 것들에게조차 적응하는 과정에 있을 때다. 알고 있었던 정보와 현실의 차이는 엄청났다. 남들이 모두 해냈다고 필자에게도 쉬운 길이 될 수는 없다. 마치 여자들의 해산의 고통처럼 고통의 몫은 저마다 다르다.
생존하려고 선택한 세탁업을 위해 필요한 기능을 익히느라 언어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한국인 특유의 빠른 눈치와 주위 상황을 종합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짐작해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필자가 한 옷수선에서 아주 쉽고 기초적인 작업인데도 실수를 했다. 그때만 해도 필자가 아직 기술이 부족해 작업이 깔끔하지 못했는데 아주 기본적인 것마저 소홀히 처리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맡은 일에 온 정성을 쏟았던 필자였기에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엉뚱한 실수였다. 손님은 실수의 증거품인 바지를 들고 왔다. 화가 나서 곧 폭발할 듯한 얼굴로 말도 없이 잘못된 옷을 필자 앞으로 들이밀었다. 필자는 순간 ‘이럴 수가… 이 쉬운 작업을!’ 하는 자책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무안했다. 먼저 손님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면서 고쳐주겠다는 약속의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필자의 말도 안 되는 실수에 어이가 없어서 그만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어색하거나 무안할 때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습관이 있다. 특히 필자가 그랬다. 아주 고약한 버릇이었다. 종종 그런 태도가 지나치다고 주위 사람들이 충고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안할 때 싱거운 웃음을 흘리는 습관이 그날도 나와버린 것이다. 그러자 손님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너는 이게 장난으로 보이니? 나는 무척 불편하고 화가 나는 일인데?”라고 말했다. 평소 필자의 작은 실수에도 관대하게 대해줬던 손님이었다. 필자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정 표현에 정확한 미국인이 필자의 웃음을, 그 복잡한 바디 랭귀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어 많이 후회가 됐다.
그날 밤 필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거리며 고민해도 그 손님에게 내 입장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한국인의 바디 랭귀지를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시도라도 해보자 하면서 종이와 펜을 들었다. 내 안에 저장된 영어 단어와 사전을 동원하고 대학 입시 때 머릿속에 암기해두었던 구문까지 사용했다. 끙끙거리며 작성한 필자의 첫 영문 편지였다. 문장이 문법적으로 맞았는지, 단어의 사용이 적절하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단지 손님이 영문 편지를 통해 필자를 이해했고, 그 뒤로 더 친밀해졌다. 옷을 정성껏 다시 고쳐 편지와 함께 전달함으로써 첫 시련을 극복한 필자는 더 이상은 그런 실수가 거듭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설픈 문장의 편지보다는 손님이 받은 손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필요했다. 불필요한 걸음을 하면서 소모했을 자동차 가스비를 필자가 부담하거나 처음 받았던 수선료를 돌려줬어야 했다. 거래상의 실수인데 시장의 생리로 대처하지 못하고 감상적인 글을 써서 해결하려 했다니… 필자의 대응 방식이 세련되지 못하고 너무 촌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필자에게는 따뜻하고 정겨운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아버지는 필자를 서울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농촌에서 태어난 필자가 그냥 그곳에서 자랐으면 농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귀농 귀촌을 꿈꾸고 있는 걸 보면 농촌을 좋아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힘도 좋고 원래 작물 가꾸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농부가 되었어도 별 불만이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서울로 올라와 공부를 했고 직장생활 후에도 여전히 퇴직 노인으로 서울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필자를 시골 사람에서 서울 사람으로 만들어놓았으니 필자의 자식들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미국 이민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싫다고 했다. 자식들을 위해 타국에서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특히 미국 사회는 백인 중심의 엘리트가 주류인 나라다. 물론 자식들의 능력에 달려 있기는 했지만 필자는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필자가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현장에서는 필자가 특진 대상이라며 인사고과 담당자에게 언질까지 받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필자는 밀리고 엉뚱한 사람이 특진자로 발표되곤 했다. 그래서 인사고과가 발표된 후에 실망해서 회사를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처음에는 일 년 동안은 어떻게든 참아보고 다음 해를 기대해보지만 다음 해에도 그런 일은 반복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인사고과에 작용했던 것이다. 대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일가친척을 중시할 것이다. 소위 로열패밀리다. 그것도 아니면 그들과 학연, 지연이라도 있어야 한다.
필자는 한 고인의 회고록을 대필해준 적이 있다. 중소기업을 탄탄하게 운영하다가 안타깝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이었다. 고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고인과 생전에 겪었던 일들을 인터뷰했다. 고인은 지방의 명문고를 나왔지만 소위 일류대학에는 못 들어가고 중류 정도의 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간 고인은 일 잘한다는 칭찬에도 불구하고 승진 대상에서 번번이 명문대 출신들에게 밀렸다. 어디에나 명문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그는 절망하고 직장을 박차고 나와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사업은 잘 되었고 재경 총동창회장으로 추대되어 눈부신 업적도 많이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런 모교 졸업자 수상자 추천에서 또 번번이 떨어졌다. 정치가 또는 공직자가 아니어서 지명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자랑스런 모교 졸업자는 늘 유명인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공사다망해서 수상식 자리에도 못 올 정도로 바빴다. 수상 이후에도 그에 걸맞은 행적을 찾기 어려웠다. 지독한 엘리트 중심의 사회였던 것이다. 법관이나 공기업 사장 정도 되어야 엘리트라고 인정이 되는 사회였고 그들만의 세계는 하도 탄탄해서 감히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오직 그들끼리만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줬다. 이런 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비주류였다.
우리 사회에는 주류, 비주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비주류 사람들은 당연히 콤플렉스와 허탈감에 시달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더 이상의 어떤 동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사회가 좀 변화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사농공상의 뿌리 깊은 잔재는 남아 있다. 그래서 신분상승을 위해 고시에 목매달고 온갖 무리를 통해서라도 정치계나 공직계로 나서는 모양이다. 참 씁쓸한 사회다.
어릴 적부터의 친구 셋이 오랜만에 만났다. 한 친구가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어 자리를 못 비워 두 사람이 가게로 갔다. 저녁시간은 치킨 배달이 많아 바쁘니 점심시간에 만났다.
치킨 집 친구는 올해 말까지만 치킨집을 하다가 은퇴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부부가 같이 장사하느라고 너무 고생을 많이 했고 돈도 벌 만큼 벌어 노후자금은 확보해놨다는 것이다. 이제 그 친구를 치킨집에서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친구도 그만 둘 날이 며칠 남았다며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다. 그만둘 생각을 하니 주문에도 더 적극적이고 친절해졌다고 한다. 그동안 쓰던 주문 전화번호도 꽤 알려져 있는데 프리미엄을 받고 넘겨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적당한 권리금을 갖고 들어올 작자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수년간 자리를 지켰을 만큼 어느 정도의 매출은 보장이 되는 가게인데도 그 동네가 곧 재건축에 들어가게 되면 재입주하기 전까지는 매출이 부진할 것이라는 약점이 있다. 결국 권리금을 좀 깎아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치킨집이 팔리면 양평에 전원주택을 하나 사서 노년을 텃밭이나 가꾸며 살겠다고 했다. 마침 먼저 자리 잡은 친구가 있어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농사지어 수익을 낸다는 것은 또다시 노동을 요구하니 어렵고 과일나무 심어 과일이나 따 먹고 즐기는 수준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전철로도 갈 수 있으니 앞으로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또 한 친구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파는 사업을 하는 친구다. 비서 한 명 두고 몇 명 안 되는 직원들과 일하는데 지식을 파는 사업이기 때문에 자신이 은퇴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복지의 최고 좋은 방법이 일하는 거라는데 하는 데까지 할 생각이라고 했다. 늘 바쁘게 살아 자주 볼 수 없어서 원망을 많이 했다.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차츰 일을 줄이고 스트레스 덜 받는 방향으로 회사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어릴 적 어울리던 친구 세 명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 최근 카톡으로 자주 연락하고 산다. 그러다 보니 이제야 자주 만나자는 스케줄을 짜게 된다. 일단 그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보내는 스케줄을 짠다. 당일 만남은 물론 일박으로 단풍여행 계획도 짜본다. 당일이면 계룡산 정도를 행선지로 잡고 일박이면 경상도의 우장산이나 전라도의 내장산까지도 가보자는 계획을 짜본다. 내년 3월에는 한국 친구들이 미국에 부부동반으로 열흘간 놀러간다는 계획도 잡아본다. 미국 친구 한 명은 벌써 캠핑카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이제 내년부터는 우리 친구들이 65세가 된다. 각자 다른 길에서 바쁘게 살았다. 다시 모여 풀냄새 난초 냄새나는 우정의 지란지교로 돌아가야 한다. 딸린 식구도 생겼다. 모두의 공통점은 여행이나 자주 다니자는 것이다. 어딜 가나 경로우대를 받을 수 있으니 더 좋다. 그러자니 내 주변의 스케줄을 줄여야 한다. 고정적으로 시간을 내야 하는 일부터 정리해야 한다. 놀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여행을 감당할 체력도 다져야 한다. 의상이나 신발 등 장비도 점검해야 한다. 여행 갈 때 새 신을 신었다가 곤욕을 치른 경우가 많으니 신발도 지금부터 길을 들여놓아야겠다.
경계의 떨림이 느껴지는 눈빛이 입을 열었다. 머리에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며 가벼운 질문에도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도, 맞서는 것도 이제는 ‘정신 사납다’고 표현하는 이 사람,
코디 최(최현주 崔玄周·55).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대나무 위 무림고수를 만나고 온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보다.
코디 최란 이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그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 세 가지가 생겼다. 어려운 문화이론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강의실력자. 현재 유럽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유명한 미술 작가. 마지막으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는 점이다. 문화이론을 가르치는 미술 작가. 이론과 실기를 엄연히 다른 분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그런 게 가능한 능력자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외적으로 직업이 두 가지입니다. 미술 작가 겸 문화이론가 아니면 교수.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이론 강의를 주로 하고 밖에서는 미술 작품 활동과 전시회 하면서요. 작가로 한 30년, 강의는 27년째 하고 있어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대학교(NYU)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줄곧 미술대학 교수였던 코디 최. 한국에서는 문화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언론정보대학이나 언론학부, 건축디자인학과, 공대, 국제대학 등에서 강의 요청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하다
코디 최는 미술 세계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20대 초반까지 한국인이던 코디 최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때 저는 80학번 어린 대학생이었습니다. 모든 게 불안한 시대였죠. 광주민주항쟁, 학교도 오랫동안 휴교하고요. 1학년 내내 서너 달 수업했을까요. 2학년에 올라갔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미국에 가는 것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가자마자 막노동 같은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코디 최. 그러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 다녔는데(웃음) 미국에서는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야간대학에 다녔어요. 한 학기 등록금 몇 십만 원만 내면 수업이 거의 무료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이었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 그때 조금이라도 피곤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일반교양으로 듣게 된 미술 과목이었다.
“전공과목 외에 일반교양수업 중에서 미술 과목 하나를 들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숨 좀 쉬려고요.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낭만을 좀 느끼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관심 갖고 바라봐 주는 교수들이 생겨났다. 제대로 된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을 때 코디 최를 유심히 봐 왔던 상담 교수가 미술대학을 권유했다. 한국에서 붓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미술이라니.
“미술이요?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버는 전공을 선택하고 싶다고 교수에게 말했더니 요즘 디자인 분야가 돈을 많이 번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LA 아트센터 칼리지(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국제무대가 주목하다
입학 초기 디자인을 전공한 코티 최는 점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불편했어요. 잘 안 맞고 힘들었어요. 우선 언어가 자유롭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리고 또 내 나라가 아니니까. 모르는 곳에 가 있으면 불안하잖아요. 눈치도 보게 되고요.”
그 불편함은 위장병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불안과 불편함, 한국과 미국의 음식 차이 등 여러 가지가 요인이 합쳐지면서 먹기만 하면 체했다.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던 분홍색의 현탁액 소화제 펩토비스몰을 이용해 문화 정체성의 혼동과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됐고 그 신선한 충격은 국제무대에 코디 최를 알리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90년대는 초 뉴욕에서 꽤 많이 주목받는 작가였고, 한국에도 이름을 좀 알리던 시기였어요. 한국의 국제화랑 전속 작가로 10년 동안 활동했어요. 2, 3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서 전시했습니다.”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90년대 초 NYU에서 강의 제의가 왔다. 강의에 대한 학생들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Adjunct professor’ 즉, 강의만 전문으로 하는 교수로 10년 넘게 있었다.
“2002년 이화여대에서 NYU 미술대 학과장한테 한 학기 초빙교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한국 출신이니까 가 보지 않겠냐며 권유하더군요.”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됐다. 뉴욕과 유럽을 돌며 활동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복잡해졌다. 개인사정이 생겼고, 50대를 바라보던 상황에 미국생활이 외롭고 모든 게 지루해진 시점이었다.
“2002년에 이화여대에 초빙교수로 와서 한 한기 동안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뉴욕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내가 더 늙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강의를 하며 사는 것도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한국에 들어온 코디 최는 2년 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20년여 고생했는데 또 다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미국과 한국의 대학 시스템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저도 어렵고 한국의 대학도 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문화 차이였던 거죠. 제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충돌이 한국에 오니까 다시 또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해가 돼요.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30대도 아니고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학과장이나 주임교수쯤 할 나이에 강의만 하는 교수를 하겠다고 온 거죠. 근데 이제는 괜찮아요. 마음은 자유로워졌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그 부분이 좀 억울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세상에 바랄 것도 없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온 거 같아요.”
코디 최, 유럽 회고전은 순항 중
현재 그의 작품은 유럽 각지를 돌며 ‘코디 최 컬처 컷(CODY CHOI Culture Cuts)’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작년 5월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할레(미술관)에서 시작해 프랑스 마르세유현대미술관 전시도 8월에 끝났다.
“올해 12월에는 스페인 렉토레이트 대학 미술관과 살라 모레노 빌라 전시관 두 곳에서 동시에 회고전이 있을 거예요. 내년 4월엔 독일 켐니츠 국립 미술관으로 가요. 제가 1986년부터 했던 작품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90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변신 안 한 슈퍼맨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이런 저런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타고 저 멀리에 가면 화려한 망토 두른 코디 최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이 들어서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한 3~4년 전 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이 다른 일로 한국에 왔다가 미술계에 수소문했다더군요. 최근 서구 미술 시장에 동양 작가, 특히 중국 작가의 활동이 활발한데 그런 관점에서 쭉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하던 아시아 작가 코디 최라는 사람이 있었고 재조명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고마운 마음으로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와 함께 작업하던 마이크 켈리 파운데이션의 평론가 존 워시맨과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마리드 부르졸라가 합세했습니다. 그렇게 2,3년 준비해서 유럽 순회 회고전이 기획된 것이죠.”
현재 그의 순회 회고전은 미국과 중국에서도 전시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100% 안 될 거라 믿었다
코디 최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대표 작가가 됐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대형이라는 큐레이터가 저에게 차 한 잔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만나 보니 20년 전쯤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라더군요.”
이대형씨는 ‘2017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한창 작가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대형씨가 나에게 와서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에 원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면서도 100%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 행사에 나가기엔 이완씨가 어렸고 무엇보다 한국 미술계에서 코디 최 자신에게 손들어 줄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됐다는 겁니다. 안 될 줄 알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어요.”
최근에 와서 이대형씨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작가 선정 작업을 하면서 젊은 작가와 함께할 연배 있는 작가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가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본인 생각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코디 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10명 중 6명은 말리더라는 거죠. 그럼에도 본인 의지를 믿었다는 말에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코디 최가 베니스 비엔날레 대표 작가가 됐다는 소식에 유럽 미술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원래 내년 4월로 잡혀 있던 독일의 한 미술관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딱 끝나기 일주일 전에 전시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또 다른 독일 화랑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 시작하고 한 달 후인 6월 24일 코디 최의 전시를 열겠다고 날짜까지 못을 박았다. 사실 코디 최의 작은 바람이라면 아내와 함께 평화롭고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베니스 비엔날레 덕(?)에 당분간 그 바람은 잠시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이다. 그것이 코디 최의 직업 중 큰 영역을 차지한다면 피곤하지만 즐기는 것이 순리 아닐까?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뭔가 보여주시길. 부탁해요, 코디 최!
‘펩토비스몰(소화제)’ 수만 통으로 적신 화장지를 뭉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 세계가 코디 최를 주목하게 된 대표작 중 하나다.
>>코디 최(최현주)
LA 아트센터 칼리지 학사,
1994~2004년 뉴욕대학교
Adjunct professor
(강의전문교수), 2002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前문화창조아카데미 지식융합 감독,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
2017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