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국, 멕시코를 향하여 가는 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비자를 받기 위한 과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사람이 막상 닥치고 나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한 투쟁은 참으로 위대한 것 같았다.
필자는 미국 비자를 얻기 위해 멕시코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제3국을 향해, 두려운 마음은 있었지만, 일단은 아무 생각이 없이 따라나섰다. 유능한 변호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역시 혼자라는 것에 조용히 떨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드디어 작고 허름한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멕시코의 변두리에 위치한 미국 영사관이라고 했다. 마치 한국의 간이역 건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모습도 미국과는 확연하게 다르고, 누가 봐도 후진국의 형편없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행은 상기된 표정으로 변호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에어컨은 켜져 있는 듯했으나 실내에서는 특유의 이상한 향수 냄새가 나고, 썩 시원하지도 않았다.
변호사는 구석진 한가한 곳으로 일행들을 데려갔다. 긴 의자에 앉아 모두 조용히 기다리라고 명령을 하고는 두툼한 서류들을 가지고 어디론가 향했다. 일행들은 서로가 침묵으로 긴장을 하며, 미리 적어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영어 쪽지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1시간쯤이나 지난 후에야, 변호사는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약속대로 모든 것들이 잘 진행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는 사람들을 가까이로 불러 모았다. 오는 내내 차 안에서도 연습을 단행했지만, 또다시 중요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예행연습을 영어로 시켰다. 예를 들면 “왜 당신은 이곳에 와서 비자를 만들려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비즈니스(세탁소)를 하느라고 한국까지 갈 시간이 없다. 가장 가까운 이곳이 가장 적합해서 왔다.” 라고, 대답해야 한다.
다른 질문들도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말 한번 잘못하면, 그야말로 비자는커녕 오히려 수습해야 할, 더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때문에 변호사는 사전에 어떻게든 입단속을 시켜야만 했다. 더구나 영어가 부족한 한국 사람에게는 무조건 외우라고 했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라도 묻는 질문에 가장 합당하고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야만 했다.
물론, 사전에 모든 과정은 다 준비를 해놓고 오는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연결고리를 통해서, 아주 잘 아는 영사관이 근무를 하는 날짜에 꼭 맞추어서, 암암리에 짜고 접수를 하고 오는 것이었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돈만 집어주면, 다 눈 감고 하는 일이 서로 통하고 있었다. 어쩌면 더 잘 통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변호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불시에 담당영사관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들은 수포로 돌아간다. 아니 시작도 할 수가 없다. 당연히 미국에서부터 연결 통로가 있어서, 단단한 조직으로 통해야만 거의 실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이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조아릴 수밖에 없다.
영사관 창구에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일대일로 달려가 무조건 대면을 해야 했다. 대체로 가족의 경우에는 다 같이 함께 부르기도 했다. 앞사람이 동그랗게 원을 그렸고, 결과는 무사히 통과했다는 뜻을 전해왔다. 더 긴장이 됐다. 순간, 필자의 이름을 불러 정신없이 달려갔다. 역시 변호사가 시킨 대로 똑같은 질문을 해왔다. 아마도 공식이었나 보다.
필자는 마구 떨려왔지만,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고 경쾌하게 대답을 해 나갔다. 미국 영사는 두꺼운 유리 벽 안에서 필자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의외로 쉽게 도장을 꽝꽝 찍어준다. 이윽고 비자를 만들기 위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크게 나왔다. 생각보다 쉽게 일행 모두가 한 번에 다 통과를 했다. 영사관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변호사는 그제야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비록 5년짜리 비자를 받았지만, 5년 후에 일은 그때 가서 또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일행은 어렵게 얻어낸 감격의 기쁨으로 환희에 차 있었다. 사람들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실마리를 풀어 낸 것만 같아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또 하나의 문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일행들은 일단 늦은 점심을 하기 위해 변두리 시내로 향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쉬운 일은 없고, 또 겪어야 할 상황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힘겨운 제3국에서 미국 비자를 취득한 일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것도 멕시코 영사관에서.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곳, 그곳이 선진국 땅이었다. 하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최고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거기에도 따라야 할 혹독한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9.11테러가 일어나고 미국 내에 모든 일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곳저곳 규제가 심해졌고 당연히 이민정책에도 심각한 정체가 일어났다. 더구나 테러범들이 학생비자로 넘어와 수 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사회는 어두운 혼란 속으로 치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서둘러 변호사를 만났다. 비자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또 다른 편법이 있다고 했다. 변호사는 돈만 들이면 얼마든지 수는 있다고 했다. 물론 미국 내에서 E2비자를 밟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세탁소를 미리 구입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사실에 입각해서 진행하는 것으로 시간만 기다리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무엇보다 큰딸이 남아있는 한국을 왔다 갔다 하려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받는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제3국비자’이다. 그것도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적어도 일반 변호사 수수료의 두 배가 넘었다.
남편과 함께 밤새 고민 끝에, 위험은 따랐지만 필자 혼자라도 제3국을 가기로 했다. 비싼 변호사 비용은 두 번에 나누어 지불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단단히 하고 변호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갔다. 제3국으로 가는 만큼 반드시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치한이 위험한 멕시코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행하는 편법적인 일들이니 마음이 몹시 떨려왔다. 그나마 변호사가 함께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만남의 장소에는 이미 도착한, 다른 시티에 사는 두 팀의 일행이 있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모두가 공항으로 갔다. 비자가 없는 일행들은 멕시코로 직접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 같이 멕시코 국경 앞까지만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자그마한 국내 경비행기가 어찌나 요란한 소음을 내는지 고막이 터질 것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귀를 막고 끌려서, 얼마 안 가니 또 내리라고 한다. 아직은 미국 땅이라고는 했지만 허허벌판이다. 그곳에는 바람 한점 불지 않고, 무지하게 뜨거우며 삭막하고 지저분했다.
변호사는 멀리 바라다보이는 조그마한 건물이 멕시코 국경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이고, 반드시 일행들이 넘어가야만 하는 곳이라고 설명을 했다. 필자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고 무슨 서부극에 나오는 장면 같은 생각으로 긴장감만 들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내색을 안 했지만 모두가 떨고 있는듯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가 가족들이었다. 변호사는 한꺼번에 온 가족이 함께 동일 비자를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러므로 가족 모두가 출동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가족들 보다 미국으로 늦게 와 비자가 서로 달랐고, 그날은 당연히 혼자 일수 밖에 없으니 더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얼마 후에 15인승 벤 하나가 도착을 했다. 당연히 운전수는 멕시코 사람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도 멕시코인으로 아마도 브로커였다. 멕시코로 가기 위해 검문소를 무난히 통과를 하고, 또 그곳 영사관으로 가서 중계업무를 하려면 그들이 무조건 필요한 모양이었다. 변호사들은 멕시코인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며 성공을 기원하고 있는듯했다.
인종은 달랐지만, 같은 목적을 가득 실은 하얀 벤이 속도를 내며 마구 달려갔다. 허허벌판의 미국 마지막 마른 땅에는 먼지가 펄펄 날려왔다. 사람들로 가득 찬,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기를, 아니 비자를 꼭 취득하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들을 했다. 물론 모든 것들이 꼬여서 실패할 확률도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드디어 국경 앞에 차가 멈추었다. 변호사는 긴장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이윽고 시커멓게 생긴 키가 크고 뚱뚱하며, 부리부리한 멕시코 경관이 총을 찬 무장으로 올라와 한 바퀴를 씩 돌아본다. 그때, 어찌나 벌벌 떨리고 겁이 났는지 참느라고 힘이 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순간들을 떠올려 생각하면 가슴이 조여온다.
멕시코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그 경관과 무어라고 한참을 떠들어댄다. 승객들은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 드디어 얼마 만에 통과하라며 손을 저어댔다. 두 손 가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은 이윽고 환희의 박수를 쳐댔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에요’ 라며 변호사는 조용히 하라고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사관으로 가서 비자를 받는 것이 아주 심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면 이문을 또 통과해야 한다며 공포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다시 맥이 떨어져 힘없이 조용해졌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필자는 깜짝 놀랐다. 비록 미국과는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땅이었지만, 주위 환경이 너무도 달랐다.
아무리 못 사는 멕시코 국경 근처였지만,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과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빨래들의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국의 그 옛날, 60년대의 청계천 뒷골목을 방불케 했다. 얼마 후, 드디어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멕시코 영사관, 작고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을 했다. 내리는 순간 이상한 기분 나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를 찔러왔다.
돈을 쳐 들여 모험을 단행했지만, 비자를 받기까지는 산 넘어 산이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또 기다리며 그 순간을 기대해야만 드디어 소유의 환희를 맛볼 수가 있었다.
도대체 그놈의 ‘제3국 비자’가 뭐길 래…
미국 내에 전쟁이 났다. 현대 미국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나라에 종교적 갈등까지 겹친 것이다. 그 이후 미국은 서서히 변화를 몰아오고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이다. 아침부터 돌아가는 세탁소 기계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필자는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한국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모닝커피로 정신을 가다듬을 즘에 이상한 방송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옆집으로 달려가 텔레비전을 보았다. 엄청난 사고가 나라를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TV에서 비쳐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혼 줄이 나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거대한 두 대의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해,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향해 부셔댔다. 대형 비행기가 높다란 빌딩에 마구 충돌을 했다. 순식간에 100여 층의 높은 빌딩이 화염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놀라서 거리를 마구 방황하고 있었다.
건물에는 하얀 수건을 흔들어 구조 요청을 하는 사람들, 살기 위한 희망으로 뛰어내리는 사람, 어마어마한 화염 속에서 호흡곤란으로 몸부림을 치는 모습은 참혹한 아우성이었다. 하루아침에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얼마 후 높다란 초고층 빌딩이 거대한 흙가루와 함께 삽시간에 그림처럼 무너져 내려왔다.
아마도 누군가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공격임에 틀림이 없었다. 약 3천 명의 애매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거대한 미국은 순식간에 내란의 전쟁공포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일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필자 부부는 솔직히 황당하고 뭐가 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상상을 초월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경기의 침체와 국력 쇠퇴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이 사건은 절망적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필자와 남편은 무엇보다 당장 가게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도 9.11사태가 몰고 온 정신적 충격은 미국인들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안겨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손님들은 발길이 끊겼고, 어쩌다 오는 손님들도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필자 부부도 어설프기는 했지만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뉴욕시장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공항에는 이착륙이 금지되었다. 항공기 납치범들이 무슬림 테러단체인 '알카에다'라는 반미 단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테러리스트가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비호 아래 은둔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그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결국 미국은 군사적 행동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필자의 옆집에는 이란 사람이 하는 이란 마켓이었다. 당연히 필자의 손님들중에는 이란인이 있었고 모두가 무슬림교도 들이었다.
미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으로, 이란인들은 외출을 삼가며 정부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가게 매출도 점차 줄어들었다. 더구나 미국의 친 이스라엘 중동정책에 반발과 불만으로 비롯된 것이므로 미국에 대한 또 다른 테러 시도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미국은 응징의 대가로 악의 축이라는 이름 하에 전면적 군사작전을 시도했다. 그 여파로 자동차 가스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서민경제는 점점 바닥을 쳐갔다. 국내적으로도 모든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대작전이 시작되고, 끝내 공항에서는 검문검색이 강화가 되어 전면적인 감시 체제를 돌입했다.
외국인들의 미국 입국과 이민에 대한 조치도 강력하게 행해졌다. 우선 미국으로 온 지 얼마 안 되는 필자의 비자 취득에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그전에 조금 느슨했던 이민정책도 더욱 까다로워져, 운전면허증도 쉽사리 얻을 수가 없었다. 졸지에 닥쳐온 이민법의 강화가 필자의 비자 해결을 어렵게 만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때보다 몇 배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사실상 전쟁은 승리로 끝이 났지만, 손해를 보는 지루한 전쟁이었다. 어쩌면 테러와의 전쟁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기도 했다. 더 이상은 세계 경제력과 군사력의 절반을 호령했던, 그 옛날의 미국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을 했다.
필자도 신분 문제를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어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미국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언제나 기쁨을 안겨준다. 생소한 곳을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은 신세계이기 때문이다. 필자 가족의 첫 디즈니랜드 여행은 잊지 못할 고통의 얼룩진 추억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또한 귀한 삶의 깊은 체험이었다.
긴 하루의 일정에 몸과 마음이 지쳤으나 정신은 말똥거렸다. 아마도 디즈니랜드의 신비한 것들을 체험한 여운이었나 보다. 그러나 웬걸 남편은 또 실수를 저질렀다. 허둥지둥했으니 후리 웨이에서 들어오는 입구를 잘못 탄 것 같다. 집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의 30분은 달린 것 같았는데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이다. 어쩌란 말인 가. 다시 내려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었다.
남편은 길눈이 어두웠다. 잠깐 필자가 딴청을 하면 다른 길로 빠져서 다투기가 일쑤다. 더구나 정신없는 하루에 그럴 만도 하기는 했지만, 화가 치솟았다. 아이들이 깰까 봐 소리를 낼 수도 없고 필자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다시 내려서 한 바퀴를 돌아 집 방향으로 향했다. 필자가 운전을 하겠다고 했으나 남편은 거절을 했다. 하는 수없이 두 눈을 감고 긴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루의 긴 일정에 정신이 없으니 생각조차 못 했다. 갑자기 남편이 큰일 났다며 필자를 쳐다보면서도 말을 꺼내지 못 했다. 너무나 엄청나니 본인도 감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나 보다.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에 집 열쇠와 세탁소 열쇠 몽땅 다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잠이 홀딱 달아나 버렸다. ‘그렇지 맞아! 까마득히 생각을 못했네. 어떡하지?’ 필자는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방법은 없었으나 일단은 집으로 향했다. 남편과는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었다. 새벽 3시가 넘어서 겨우 집 앞에 왔으나, 불 꺼진 아파트 창문은 그림의 떡이었다. 열쇠가 없으니 들어갈 수가 없어 차 안에서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뒤돌아보니 아이들은 이리저리 엉켜져 골아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깰 가 봐 조심스럽게 내려서 방법을 궁리했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어왔다.
날이 새도록 차 안에만 있을 수 없으니, 남편은 이리저리 다니며 집으로 들어갈 궁리를 했다. 얼마 후에 남편은 방법이 있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굴뚝을 타고 올라가 지붕으로 가서, 다시 2층 필자의 아파트 베란다로 뛰어내려 창문을 열겠다는 것이다. 필자 생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칫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고, 또 지붕에서 떨어지면 더 큰일이라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잔디밭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피로는 몰려오는데,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고 밤 시간은 아주 길기만 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 다시 차 안으로 살짝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다. 누군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남편의 환한 미소가 필자를 깨우고 있었다. 드디어 문을 열었으니 아이들을 깨워서 집으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일단은 나오라고 했다.
새벽 5시 반, 아이들은 떠지지 않는 눈으로 겨우 일어나 투덜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도대체가 궁금해서 조용히 물었다. 남편은 끝내 혼자서 아까 말한 방법대로 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일이었지만 우선은 문이 열렸으니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시 책임감 강한 남자였고, 든든한 가장이라는 마음에 남편이 다시 보였다. 필자는 걱정이 살짝 들어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이제 곧, 아침이 오면 세탁소 문 열 일이 또 다른 비용 고통으로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 산 넘어 산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열쇠에 대한 강박관념이 필자를 사로잡았다. 필자 부부에게는 커다란 트라우마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대체로 한인들은, 더구나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디즈니랜드를 몇 번씩은 다녀온다. 대 어둠의 추억이 남겨진 여행 이후에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여러 번을 더 다녀왔다. 필자도 손님이 올 때마다 가이드를 해주었다. 어쩌다 가끔씩은 또 가서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곳이었지만, 남편은 몸서리치며 싫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비록 진한 여행의 고통은 남겨졌지만, 어려운 초기 이민 시기에 잊지 못할 가족여행으로 필자에게는 영원한 추억이 되어 남아 있었다.
언젠가 한번 또 가서 신나게 놀면서 젊은 하루를 즐기며 만끽하고 싶다.
영어는 전 세계 공용어이기도 하다. 미국에 살려면 당연히 영어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작 영어를 한마디 못해도 살수 있는 곳, 그곳은 LA 코리아타운이었다.
필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시간 동안 영어라는 것에 마음고생을 하며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나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그놈 앞에서만 서면 주눅이 들고 만다. 늘 마음속에서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꿈이 가득했건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 그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쩌면 필수적인 일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씨름해오며 만인의 공통 과제인 영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놈의 영어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위 대학 강단에까지 섰던 사람이었지만 막상 미국인을 대하니 겁부터 났다. 물론 기본적인 영어야 가능했지만 세탁소에서 낯선 각 나라 손님을 맞이하는 일에는 선뜻 나설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용기를 내어 손님들과 눈인사를 시작으로 그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대강 눈치로 때려잡으면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애쓰기보다는 어느 정도 감을 잡으면, 먼저 기선을 잡아 할 말을 유도해나가기 시작했다. 말이 막힐 때에는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아직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면 그들도 이해를 했다.
필자는 오히려 되묻기를 했다. ‘혹시, 너 한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면 그들도 당황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NO'라고 대답한다. 차라리 당당한 마음으로 손님을 대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부터는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손님이 일단 들어오면 큰소리로 반갑게 맞이하고, 'HI!' 하면서 손을 들어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손님들은 아주 좋아한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세탁소 영어는 상황이 뻔하니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가끔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인들이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함께 대응해서 대화를 풀어주지 못하니 들어주는 척, 웃기만 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적당히 함께하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으면 남편을 불러댔다. 필자보다 훨씬 실력이 나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편은 얘기하기를 좋아하니 신나게 달려온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3년이나 먼저 왔으니 당연한 일이라 위안을 삼았다.
언젠가, 그놈의 영어 때문에 배꼽을 움켜쥐고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필자가 완전히 미국 이민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남편은 혼자 방 하나를 얻어서 살고 있었다. 집은 궁궐같이 넓고 방이 5개나 있는 큰집이었다. 혼자 사는 집주인은 외출을 했고, 방문으로 잠시 놀러 온 친척 할머니 한 분이 그 집을 지키고 계셨다. 넓고 커다란 거실에서 작은딸과 필자가 그 할머니와 이런저런 정겨운 한국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당연히 그 할머니는 그 전화를 받으셨다. 연세가 족히 80은 훨씬 넘어 보여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고 씩씩하게 전화기를 잡았다. 한동안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노바디!’하면서 전화를 꽝 끊으셨다. 필자는 멍하니 할머니를 쳐다보며 무슨 소린가 싶어 했다. 그 순간 할머니는 ‘아무 두 업는 디 전화질들이야!’라고 했다.
필자는 놀라서 또 물었다. ‘왜 그래요? 할머니, 누가 뭐라 구 해요?’ ‘몰러 내가 아남, 뭐로 구 지껄여대는지, 그래 없다 구 했지!’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웃어댔다. 잠시 후 작은딸과 필자는 갑자기 배꼽을 끌어안고 대굴대굴 굴렀다.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땅길 만큼 웃어대고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할머니의 여전히 당당한 모습에 또다시 한바탕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영어를 얼마나 쉽게, 단적으로 표현했는지 그 순발력에 기가 막혔다.
할머니는 미국에서 오래 사시다 보니 굳이 영어를 배울 필요는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의사소통하는 지혜는 갖고 계셨던 것이다. 밑도 끝도 없었지만 '노바디(NOBODY)'란 한마디로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고, 적어도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 연세에 순간적 대처능력이 엄청 세련되고 감각이 있어 보여 할머니가 매우 존경스럽게 보였다.
처음 미국에 가서는 전화받는 것도 대단히 신기하고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잘 들리지 않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당황하면서 주춤거리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끊어버리기가 일쑤다. 말을 못한다는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이민 가정마다 대체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통역관이 되곤 한다. 학생들이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고 잘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영어 잘하는 아이들이 어쩌면 집안 대장이었다.
물론 내 나라말이 아니니, 대화의 소통만 되도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10년 전이나 20년 전, 그리고 지금도 그놈의 ‘영어가 뭐길래’ 언어 정복의 자존심은 여전히 영원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전 세계 공용되는 영어가 뭔지, 그들도 한국어 때문에 고민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필자는 모자 쓰기를 좋아한다. 아주 간단히 멋쟁이로 만들어주는 기막힌 물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래전 모자 때문에 덕을 보기도 했으니 이 코디를 더더욱 버릴 수 없다.
◇용감한 외출
20여 년 전 남편이 이미 미국에 이민 가서 필자가 혼자서 모든 고난을 감당할 때 일이다. 아파트와 모든 것들이 경제 위기 속에 날리고, 손에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당시 유일한 탈출구는 신용대출이었다. 그래서 단골 은행을 찾아갔는데 코웃음만 쳤다. 할 수 없이 다른 은행을 찾아갔다. 오랜 대기 끝에 상담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영 시원치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돌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전화가 왔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전혀 않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상대는 대뜸, 필자에게 대출에 관심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전날 두 번째로 찾아갔던 은행 대부계의 과장이라고 했다. 수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서둘러 은행으로 나갔다. 은행에 갔더니 안쪽에 선비 같은 모습의 대출 과장이 앉아 있었다.
필자를 반갑게 맞이한 그 사람은 차까지 대접하며 친절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상담해주었다. 필자는 솔직하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았고 상대는 아주 자상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주었다. 필자는 그 순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속이 후련해졌다. 설사 대출받지 못한다 해도 후회스럽지 않을 만큼 그 남자는 자상했기 때문이다.
◇진솔한 친구, 은인 사이
그 사람은 “윗분과 상의한 후 결정해야 한다”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 격려해줬다. 그 직원의 말을 듣고 희망 반, 걱정 반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될 즘, 핸드폰으로 또 연락이 왔다. 시원스럽게 한마디로 원하는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무조건 필자라는 인간 하나를 믿고 해주는 대출이니 꼭 갚아 달라고 했다.
필요했던 어려운 대출이 이루어지고, 하루아침에 걱정이 사라졌으니 그 사람은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필자는 그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이번에는 필자가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쾌히 승낙했고, 필자는 정성껏 준비한 작은 선물과 함께 약속 장소로 나갔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필자는 궁금증에 질문했다. 어떻게 그리 쉽게 “아무 조건 없이 해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고객님을 모자를 쓴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필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태연한 모습으로 커피까지 마셨다. 하지만 그 사람과 대화하다 보니 흑심을 품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후엔 속마음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친한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야말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순수한 관계였으나 그 후로부터 모든 은행 일은 아주 쉽게 해결되었다.
◇ 아픈 추억
이 일이 있고 얼마후 필자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당연히 연락도 못 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미국에서 잠시 다니러 나왔다. 설레는 마음에 만나기로 한 어느 날, 그 친구는 뼈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들어가 연락을 취한 어느 날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있었다. 똑똑하고 인간다운 진실했던 친구를 보내고 필자는 한동안 가슴에 큰 구멍인 듯 가슴앓이했다.
미 서부에는 유명한 여행지가 참 많았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전 세계인의 가족공원이자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를 가기로 했다. 그곳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적 역사 유적지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먹을 것과 음료수를 챙겼다. 미국은 물값도 비쌌기 때문에 간단한 것들은 배당안에 챙겨 준비를 했다. 너무 무거우면 힘이 드니 꼭 필요한 것만 넣었다. 더구나 온 가족의 화려한 외출 경비는 한 달 치 생활비에 가까웠으나 큰맘을 먹고 한탕 쏘기로 했다. 가족들은 파란 하늘 아래 달려가는 모처럼의 나들이에 온통 마음이 들떠있었다.
미키 마우스로 유명한 디즈니랜드까지는 씨미 벨리에서 약 1시간 20분 가량 걸려 달려야 했다. 오렌지 카운티의 에너지임이라는 곳에 위치한 그곳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대 공원이었다. 넓은 주차장에는 이른 오전 시간에도 불구하고 미리 온 차들로 북적거렸다. 온통 여러 나라 언어로 떠들어대는 셔틀을 타고 입구 매표소로 향했다. 입장료도 매년 올라 네 식구 가격은 만만치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궁전 같은 시설의 어마어마한 광경이 시선을 제압해왔다. 전 세계 사람들로 가득한 매표소는 이미 길다랗게 줄을 서야만 했다. 큰딸은 하루 안에 모든 것들을 다 볼 수가 없다며 머리를 짜며 연구를 했다. 공원 안에는 입구에서부터 1890년대의 미국 마을의 멋진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보통 한 가지만 체험하는데도 2시간 남짓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인기가 있는 곳은 줄 서는 시간만도 대략 4~50분은 기다려야 하니 짜증이 난단다. 인내와 함께 한 군데를 신나게 보고 나면 누군가 한 사람이 미리 뛰어가서 다음 코스 줄을 서있어야만 했다. 필자 가족은 가장 먼저 열대 정글과 무시무시한 고대 신전 및 타잔, 스릴 넘치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모험의 나라로 가기로 했다.
'인디아나 존스 어드벤처'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무시시한 동굴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 인간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란다. 그 옛날의 탄광용 기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동굴 속의 더 깊은 곳으로 구불구불한 모험의 길을 달리면 그 이상 실감 나는 체험이 따로 없다. 아주 자세하게 만들어져 실감 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거대함에 관광객들은 탄성과 함께 입이 벌어져 닫을 줄을 모른다.
다음으로, 개척의 나라로 들어서면, 서부극의 복장 및 증기선, 골드러시 현장 등을 깊이 체험할 수가 있었다. 시원하고 울창한 정글 크루즈에서는 실제같이 만들어진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열대의 맹수들과 눈싸움을 벌린다. 더구나 통나무로 만들어진 배를 타고 언덕 위에서부터 굽이치는 강물을 타고 순식간에 떨어져 내려온다. 스릴 만점이고 입고 있는 옷들은 온통 물로 다 젖어지지만 기분은 짱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기자기한 동화의 나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인형들이 사람들을 소녀의 감성으로 만들어준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있는 성의 성문을 지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피터 팬 등이 반갑게 맞이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간들이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나라에서는 공상과학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미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볼거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세계 최고의 미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싼 입장료가 결코 아깝지 않았다. 하루를 구경거리로 만끽하고 저녁 9시쯤이 지나자 온 가족은 얼굴에 피로가 몰려왔다. 지친 발걸음도 무겁다며 모두가 그만 집으로 가기를 원했다. 하기야 집 떠나온 지 12시간이 넘었다. 서둘러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다시 셔틀을 타고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차 앞으로 왔을 때,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남편은 열쇠가 몽땅 사라졌다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왔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땅바닥에 덥석 주저앉았다. 겨우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남편은 안절부절 뛰어다니며 방법을 궁리했다. 도대체 그 넓은 땅 어디로 가서 찾는단 말인 가.
얼마 만에 공원을 순찰하는 경찰을 만났다. 달려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니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린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열쇠 공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다려 보라고 사라져버리더니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 밤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 몸을 차에 기대고 눈을 껌뻑 거리니 필자는 가슴이 답답했다.
1시간쯤이나 지나 열쇠 공 연락처를 알았으나 쉽게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두어 군데 몇 차례에 걸쳐 겨우 연결이 되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거의 1시가 될 즘에야 열쇠 공에 의해 드디어 새 열쇠를 넘겨받을 수가 있었다. 졸지에 가난한 이민 살림에 거금 200달러가 나갔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생각만으로 겨우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후리 웨이를 탔다.
기가 막혀 탈진한 필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흘끔거리며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정글 크루즈에서 신나게 배를 타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빠진 것 같네.’라고 했다. 웃을 수도 없는 어이없는 모습에 그저 무거워진 눈을 감았다.
깊은 밤, 집으로 달려가는 후리 웨이의 캄캄한 LA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있었다. 낯선 땅에서의 첫나들이가 또 하나의 얼룩진 추억으로 밤하늘에 수를 놓고 있었다.
결혼식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기호에 따라 주례가 없는, 나름대로 멋진 예식을 연출한다. 주례를 대신하여 신랑, 신부 아버지의 축사가 들어간다. 남편은 필자에게 원고를 부탁해 와, 그저 형식이 아닌 부모의 마음을 그대로 써 내려가보았다.
“안녕하세요?
우선 귀한 시간을 내시어 저의 자식들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 들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오늘 같이 멋지고 아름다운 날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어 무한한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새롭게 제2의 인생을 막 출발하는, 제 작은 딸과 사위에게 몇 마디 소감과 당부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작은딸, 그리고 우리 사위, 내 앞에 서있는 한 쌍의 남녀가 오늘 너무나 멋지고 자랑스러우며 눈이 부시다. 아름다운 너희들 모습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아빠는 이 시간 아주 행복하다. 지난 30년 전 아주 작고 여리게 태어난 우리 작은 딸. 너를 엄마와 아빠는 품에 안고 등에 업고, 안 절 부절 했었는데 어느새 어엿한 신부가 되었구나.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영어로 숙제하느라 진땀을 흘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오늘 같은 날이 왔구나. 아빠는 우리 딸은 언제까지나 엄마 아빠 품에만 있을 줄 알았었는데, 이제 멋진 남자를 만났고, 그리고 훌륭한 의사들이 되어, 또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탄생되는 것을, 무척 기쁜 마음으로 축하한다.
서로 다른 남과 남이 만나 가정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힘든 일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늘 우리 가족이 그래 왔듯이, 그때마다 잘 참고 견디며 착하고 바르게 살다 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아빠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제나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고, 서로가 위로하고 의지하며, 진솔한 믿음으로 그렇게, 현명한 아내와 진실된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격이 있고 품위 있는 훌륭한 멋진 의사 부부가 되기를 진심으로 당부한다. 이제, 우리 딸과 우리 사위, 한 쌍의 원앙같이 잘 살아라. 그리고 영원토록 행복 가득해라. 아빠는 너희 부부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사돈댁에게도 새로운 인연으로 맺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하나의 만남이라는 인연을 깊이 간직하며 늘 소중하게 지켜 나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축하를 위해 발걸음 해주신 여러 하객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올립니다. 부디, 좋은 의미 있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온갖 정성으로 키워, 남의 품으로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대견스러우면서도 늘 안타깝기만 하다. 그저 부모는 먼발치에서 언제까지나 울타리가 되어주며, 자식들이 알 콩 달 콩 하게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7월 20일 예술의 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오윤아의 재즈, 탱고, 클래식의 만남’ 공연이 있어 갔다 왔다. 프로그램에 아스토르 피아젤라의 누에보 탱고가 클래식과 융합하여 연주된다 하여 벼르던 공연이었다. 탱고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음악이다. 우리 가요 중에도 탱고 풍의 가요가 많다.
춤도 그렇다. 스탠더드 댄스 5종목에 탱고가 들어가는데 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태동한 댄스인 탱고가 라틴댄스에 안 들어가고 왈츠, 폭스트로트 퀵스텝 등과 함께 스탠더드 댄스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탱고의 문화사를 알아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탱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의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 간 사람들이 처음 췄다고 한다. 주로 이민 간 노동자들이 사창가 등 빈민가에서 추던 춤이라 관능적이었다. 이 춤이 유럽에 건너갔을 때 추기경들을 비롯해서 귀족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에 런던에서 몇 가지 동작을 스탠더드 댄스 동작에 맞춰 표준화해 오늘날의 컨티넨탈 탱고, 또는 인터내셔널 탱고가 되었다. 기존의 탱고는 그대로 아르헨티나 탱고로 불린다.
초기의 탱고는 춤을 위한 음악이었다. 아르헨티나 전통음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를 클래식이나 재즈처럼 별도의 음악 장르로 승격시킨 사람이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이다. 그러므로 탱고는 피아졸라 이전의 탱고와 이후의 탱고로 나눠 피아졸라가 만든 탱고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라 부른다.
피아졸라는 탱고 춤이 유럽에서 한창 수난을 당하고 있을 1921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4세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이민 간 덕분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가 16세이던 1937년, 그의 가족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 와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던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1954년 프랑스로 유학 가서 세계적인 음악 스승인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나디아 블랑제가 피아졸라의 탱고 연주를 듣고 탱고를 버리지 말고 승화시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해인 1955년에 귀국하고부터 누에보 탱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200년 정도 밖에 안 된 나라이다. 나라는 큰 데 일할 사람이 없으니 유럽 이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덕분에 고기, 낙농 제품, 광물 등을 수출하며 세계 5대 경제 대국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0년대 페론 정부가 들어서면서 실업자들에게도 직장인 평균임금보다 1.5배나 더 많은 수당을 주는 포퓰리즘 정책을 펴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망한 나라에서 모든 피해는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탈출구는 바로 밀롱가를 찾는 것이었다. 말롱가에 오는 노동자에 맞춰 탱고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탱고를 클래식이나 재즈에 버금가는 음악 장르로 수준을 올려 놓은 사람이 바로 피아졸라이다.
이날 연주는 피아졸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4계’ 피아노 3중주로 시작했다. 이 곡은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기 다른 시점에 만들어졌으나 나중에 4계로 묶었다. 인터미션 후에는 피아졸라의 명곡 ‘Tangata’, ‘Milonga Del Angel’, ‘Oblivion’, ‘Libertango’가 연주되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특히 ‘자유의 탱고’라는 ‘Libertango’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외에도 드럼, 다양한 아르헨티나 타악기가 합주되면서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연주에서 미국의 팝 클래식 대가 폴 쉔필드의 ‘Cafe Music for Piano Trio’도 눈길을 끌었다.
여권이 몇 개나 된다. 예전에는 5년마다 새로 갱신을 해야 했다. 이제는 두툼해진 10년짜리 여권이 몇십 년은 쓸 것 같다. 미국에 입국하려면 반드시 비자가 필요했다. 더구나 그곳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분 유지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10년짜리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는 언제나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필자는 미리 받은 비자가 있어 미국을 수시로 드나들 수가 있었고, 큰딸아이도 카이스트 학생 신분으로 무난히 비자를 받아냈다. 문제는 막 초등학교를 마친 작은 아이가 비자가 없으니 골치가 아팠다.
IMF가 터지고 남편은 이미 미국으로 출국했고, 필자 혼자 미성년자의 도도한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필자의 교수 신분으로 어렵사리 만들 수가 있었다. 필자 가족은 여행을 위한 6개월 여행비자로 무작정 미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서부터 미국 이민을 위한 확실한 신분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여행비자는 6개월간 유효하고, 한 번 더 6개월 연장이 가능했다. 문제는 그 후부터가 된다. 미국에서 살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신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운전면허는 없어도 불편하지만 살 수가 있으나, 비자가 없는 신분은 곧 서류 미비자인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여 범법자가 된다. 수많은 인종이 모여드는 이민의 나라인 만큼, 신분을 위한 비자 종류나 취득방법은 아주 다양했다.
필자는 입국하고, 제일 먼저 이민 변호사를 만났다. 신분 없이 이민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의 첫 공식 행사이다. 저마다 처지가 다르니 개개인에 따라 비자 방향도 달라진다. 여행객 신분에서 3개월 지난 후에야 비로소 E2비자를 신청하기로 했다. E2란 비즈니스(사업) 비자다. 세탁소를 하기 위해서는 빨리 필요했지만, 오자마자 너무 일찍 서두르면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
미국으로 잠시 여행을 왔다가 사업을 하고 싶어졌다는 타당성을 만들어, 합리적으로만 허락을 받기로 했다. 미국인들은 이치에 맞는 합리성을 대단히 중시한다. 반드시 입국 기간도 2개월 이상은 되어야 했다. 2~3개월이 지난 후에 마땅한 비즈니스를 물색해서 일정한 금액 투자를 하면 비로소 거주와 사업권을 얻어내는 투자 사업비자가 나온다. 투자 이민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얻기 쉬운 것은 여행비자로 들어가 미국 내에서 취득하는 F1(학생) 비자가 있다. 무조건 들어가서 미국 내에서 학생비자를 만드는 것이다. 제일 빠르고 무난하게, 학교만 선정하면 비자는 쉽게 해결된다. 한인타운에는 직접 알아서 해주는 학교들도 많다. 이 또한 여러 꼼수가 있으나 사기성이 다분히 있고, 단점은 공항 출입국을 못하니 한국을 왕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꼼짝없이 공부 끝날 때까지는 미국 내에서만 있어야 하니, 숨통이 막힌다.
어쩌다 생각 없이, 한국이 그리워 무작정 나오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같은 미국 땅이라도 여권이 필수인 공항 통과는 두렵기만 해서 타 주 여행도 아예 금기시 되어 있다. 아무리 멋진 유학 생활이라도 오도 가도 못하는 생활은 꽁꽁 묶인 열린 감옥살이 삶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달러를 적게 들이고 가장 쉽게 한다는 생각으로 당장은 국내 학생비자를 선호했다.
말이 그렇지, 비싼 학비와 출석률 관리가 보통 일이 아니다. 죽으라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은 그렇다 해도, 임시방편의 거주 목적으로 학생비자를 취득한 일반인들에게는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어 서류 미비자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한인타운, 즉 LA 코리아타운에는 한인 서류 미비자가 전체 한인 중에 약 50%나 된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물론 돈이 많아, 한국에서 미리 유학생 비자를 받으면 문제는 덜하다. 한국 왕래도 자유롭고 공부하는 동안 비자 유지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마다 입학 전 거액의 보증금이 필요하고 사립학교 학비가 하늘을 찌른다. 공립학교도 그 지역 주민이 아니면 약 3배 정도, 유학생은 대략 10배가 된다. 자본주의가 막강한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꿈도 꿀 수가 없다.
E2(사업) 비자도 처음부터 한국에서 얻어오면 영주권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아닌 국외에서 얻는 비자는 언제고 출입국이 자유롭다. 그러나 투자 금액이 미국 내에서보다 세 배 이상은 많아야 한다. 국내에서 10만 달러(약 1억1334만 원) 이면 한국에서는 보통 35만 달러 이상이라야 한다. 더구나 어떤 사업에 어떻게 투자를 하는지 몰라 사기 맞기가 일쑤다. 한국에서 E2비자 취득이란 쉽지도 않지만, 절대 만만치가 않았다.
의심이 많은 한국인에게 선호 대상은 그나마 확실한 미국 내 사업비자였다. 조금 살아보면서 취득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래도 사기를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운이 좋으면 투자금액이 아주 작은 5만 달러에도 E2비자를 받아 낼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 왕래가 제한되고, 2년마다 갱신을 해야 하므로 연장을 위해서는 착실한 영업관리가 요구된다. 또한 조건이 있다. 2명의 영주권자 종업원을 써서 고용 창출을 하고 엄청난 세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매출 관리도 아주 까다롭다.
필자도 현금 15만 달러를 여기저기 힘겹게 마련해, 세탁소를 인수했다. E2비자를 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멋모르고 와서, 세탁소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은 엄청 복잡했고, 비자를 얻기 위한 절차도 산 넘어 산이었다. 하루하루가 불안함으로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흘렀다. 더구나 내 나라 한국을 왔다 갔다 못 하고 꼼짝없이 미국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필자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
어느 날, 한국을 왕래할 방법이 있다는 희소식이 날라왔다. 서둘러 한국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코리아타운으로 달려나갔다. 편법으로 행하는 ‘제3국 비자’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제목이었지만, 미국도 다 살기 마련이었다. 그 낯선 땅에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돈만 있으면 방법을 찾아 교묘하게 해결할 길이 또 있었다.
비자와 신분의 세상, 지쳐만 가던 필자에게도 그때부터 서서히 꿈과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