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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지처럼 살면서
-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어려운 것이 자녀들에게 모국어 사용능력을 교육하는 문제다. 외국인을 생활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문 시대, 동네마다 있는 중국집은 중국인들이 운영하였는데 중국화교 아이들은 반드시 중국어를 사용하였다. 어른들은 중국인의 그런 모국어교육열에 대하여 많이 칭찬하였다 중화문화, 중국인의 단결력, 애국심이 이 모국어 사용에서 나온다는 말도 했다 그런 말들은 필자가 직접 확인하기도 하였으니 살아있는 교육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모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애국심과도 연결된다는 것은 한국 내에 거주한 화교의 예에서 필자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당연히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내 안에 각인 되어있었다. 경제적 기반은 그 곳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성역이다. 그 일에 열중하다보면 이중 언어 사용이란 쉽지 않은 작업을 잘 해낼 수가 없다. 이민1세는 영어를 익혀야 하고 아이들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결코 쉬운 목표는 아니다, 대체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최선의 노력은 한다. 이런 힘겨운 노력으로 2세들은 한국어 조금은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한국어는 두 번째 언어라 어색하거나 스핑크스 같은 괴이한 말을 사용하게 된다. 한국어 구사력의 다름은 종종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오해가 발생 한다. 엇나간 대화 미국의 친구가 “딸과 말다툼 좀 했다”면서 어처구니없음을 한참 이야기한다. 딸이 늦둥이로 셋째 아이를 출산하였다. 식구가 늘었으니 변두리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집을 늘렸다. 대학 졸업 후 금방 직장을 잡아 자립 잘 한 딸이 대견하여 이번 두 번째 집 살 때는 몫 돈 보태주었단다 친구 딸은 생각하지도 않은 도움이 반갑고 놀라운 모양이었다. 잠깐 사양하더니 행복으로 받았다. “엄마는 거지처럼 살면서 이런 큰돈을 만들었네! 라는 딸의 감사의 말에 친구는 “거지처럼”이란 말에 눈이 홱 돌아갔단다. “왜 내가 거지처럼 사니?”라고 화를 내었더니 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더란다. 딸의 거지처럼은 ‘알뜰하게 검소하게’란 의미인데 엄마는 ‘품위 없는, 문화를 모르는, 구두쇠’로 알아들어 화가 났던 거다. 화를 낸 후에 생각하니 미국서 태어난 딸의 한국어 수준을 오해한 엄마가 속 좁다 싶어 또 화가 났다. 내가 뉴욕에서 만난 중국인 2세들 중에는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쉬운 한자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성인이 된 필자 아이들이 쓰는 한글은 너무 치졸하여 몸에 맞지 않은 옷 걸친 것처럼 글자 따로 사람 따로다 어제 우리 집 정원 일 한 중국교포는 이북 사투리의 한국말이 유창하다. 중국에서는 이북에서 온 한국인이 개척 한 마을에서는 이북 사투리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 주축인 마을에서는 남한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말을 했다. 필자는 한 번 생각해보았다. 중국에서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외모에서 정체성을 가릴 수 없으니 언어로 정체성을 웅변한다. 미국에서는 언어가 아니더라도 신체적인 증거와 사고, 습관 문화로 한국인의 정체로 산다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그건 중국인에게도 같을 것이다. 모국어를 강조하지 않아도 2세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엄청난 통증을 동반한 열병을 꼭 앓게 된다. 한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조국사랑은 그 기간에 충분히 형성되지 않을까 한다.
- 2016-09-2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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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22)소셜 넘버 따기
-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2016-09-2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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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23) 미국 은행 이야기
-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은행거래는 필수였다. 한국과는 비슷한 것들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다른 체계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처음으로 미국계은행을 들어갔다. 가게 앞 길 건너에 마침 은행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창구 앞에는 모두가 두꺼운 투명 유리로 가려져있어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워낙 총기사건이 빈번하니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밑부분으로 둥그렇게 손만 들어갈 수 있는 반원의 구멍이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면 작은 구멍이 뽕뽕 뚫린 곳으로 입을 대고 말을 해야만 한다. 발음이 다른 필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간혹 그들은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물론 은행 입구에는 자동기계가 있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겁이 났다. 모든 것들이 영어로 되어있으니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은행은 통장이 없다. 또한 현금보다는 주로 체크라는 종이 수표가 모든 이들에게 애용이 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대체로 현금을 소지하지 않는다. 신용카드나 체크만 있으면 모든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다만 체크를 사용하는 데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상용되는 체크의 부도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부도라는 것은 은행 구좌에 돈은 없는데 공 체크를 마구 발행하여 마이너스를 초래하는 것이다. 물론 신용이 쌓여 오래된 고객에게는 어느 정도의 혜택을 주어 일단은 결재를 해주고, 부도 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공짜가 아니라 그 수수료가 엄청나다. 신용이 없는 사람들은 체크가 들어왔을 때, 구좌에 잔고가 없으면 무조건 상대방에게 돌려보낸다. 그리고는 또 비싼 수수료를 붙인다. 그쪽도 물리고 이쪽도 붙는다. 그 값이 건당으로 치므로 만만치가 않다. 물론 여윳돈이 많아 은행구좌에 달러가 넉넉하게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체크 관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통장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일이 자기가 하나하나 관리하며 수첩에 쓰지 않으면, 순식간에 부도가 나서 엄청난 수수료를 감당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반드시 사용하는 그때마다 일일이 적어 내려가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다. 필자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 어렵게 세탁소를 구입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 달 운영비가 넉넉지가 않았다. 약간의 운영 금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가게를 처음 운영하려니 이것저것 구입할 것이 아주 많았다. 더구나 체크에 날짜를 미리 적어서 그 날짜를 지켜달라고 결재를 해줬지만 어느 때는 소용이 없었다. 수금을 해간 사람들은 때로는 돈이 급했는지 일단 자기 구좌에 입금부터 하고 보는 이도 간간이 있었다. 그 날짜를 꼭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날짜 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정확하게 표시를 해놔야만 입금이 안 되는 것이라고,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월말 가까이 오면, 한 달 동안 사용하며 주고받은 체크의 내용이, 은행으로부터 스테이트먼트라는 내역서에 자세히 쓰여져 날라온다. 꼼꼼하지 않은 남편이 필자가 없는 사이에 몇 가지 결재를 해주었다. 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내역서를 받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쓸데없는 부도 수수료가 500불이나 된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정확하게 달러의 숫자가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은행은 그날그날 들어온 체크 중에 가장 큰 것부터 결재를 먼저 한다. 그리고 남은 돈에서 작은 것들을 결재하다 보면 부족한 것들은 여러 개가 될 수가 있다. 수수료는 건마다 부과를 하니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순식간에 되어버린다. 한 건마다 무려 35달러를 부과한다. 예를 들면 5달러짜리 수표가 들어와서 돈이 부족하면 일단은 물어주고 그 피를 무조건 물린다. 당연히 처음에는 잘 모르니, 호되게 겪어보고서야 터득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지독한 법칙이 수두룩했다. 눈뜨고 코 베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에서 용기만 갖고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은 그 대가를 단단히 맛보아야만 했다. 적어도 수개월은 실수를 거듭하고, 수천 불을 고스란히 날리고 나서야 단단히 똑똑해질 수가 있었다. 당연히 부부싸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몸은 노동으로 고통스러운데 거기에 돈까지 쓸데없는 것으로 날리니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했다. 미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돈을 날려야 하고, 사기도 몇 번을 당해야만 그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그것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삭막하기 짝이 없고 정나미가 떨어졌다. 어쩌다 미국까지 와서 고생바가지를 하는지 도대체가 몰랐다. 가게 앞, 산타모니카 바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태평양 바다 지평선을 넘어 한국을 바라보며 펑펑 울었다. 삶에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넘어가는 석양 아래로 바다 갈매기들만이 꺼억 꺼억 함께 울어주었다.
- 2016-09-2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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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2)소셜 넘버 따기
-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2016-09-2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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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내가 보낸 편지
- 지구촌이란 말은 지역적이고 구분되는 모든 것이 일원화 되어가고 있다고 시사한다. 교통 통신 정보의 속도는 너와 나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이미 오래 된 이야기다. 그런 말에 힘입은 탓인지 우리는 미국이민에 대하여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 우리가 미국이민에 대한 안일한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우리민족의 성격에도 기인한다. 금의환향에 대한 강박감으로 그 곳에서 버티기가 가능만하면 이미 고국에서는 대성한 사람으로 소문이 퍼졌다, 미국 이민하여 실패한 경우를 보기도 듣기도 힘들었으니 미국이민에의 꿈은 한 순간에라도 터질 만큼 팽창되어 있었다. 내가 이민한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조금씩 이민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70년대의 대거이민군 중에서는 예상치 못한 악재에 부딪힌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필자는 80년대가 시작하는 시간에 이민했다 알찬이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바보 같은 자신감도 있었건만 내가 가진 정보도 장님 코끼리 만지기란 것은 현지에서 깨달았다. 필자가 가진 정보 중 유효한 것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던 직업의 귀천이나 호불호를 따지지 않고 달러를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건 제일 알맹이 정보이긴 하다. 미국 땅 밟고 동서남북 구분도 하기 전에 세탁소를 매입 할 수 있었던 것까지는 현장감 있는 정보의 혜택이라 말 할 수 있겠으나 일에는 텅텅 멍텅구리이니 그 고생도 쉽게 넘길 수 있는 고생은 아니다. 눈물 찔끔 콧물 찔끔 흘리며 익히는 기능인데 필자에게는 천만다행이고 미국이민의 최고의 매력인 고객들이 수더분하여 필자의 어수룩한 기술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다. 한국인 손님은 무섭다 필자는 가게에 한국 손님이 오면 제일 무섭다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솜씨를 잘 안다 자기들이 잘 할 수 있으니까 타인에게도 잘 한 일을 응당 기대한다. 필자는 미국손님으로부터 불평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한국 손님으로부터는 모두에게서 불평을 들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었다 향수를 달랠 수도 있고 편지 쓰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다 내 글을 품에 안은 것 같은 따스함도 느낀다. 간곡히 부탁한 말은,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마라. 세탁비 깎지 마라. 이용하는 영세 상인들에게 관대해라. 영세 상인들이 베푸는 특별 서비스를 알뜰히 사용하지마라. 그들에게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 고혈이다. 이런 내용들이다. 그 곳 생활의 신산함을 에둘러 표현했음이다. 지금은 제주도에 앉아서 백만이 된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걱정한다. 외국인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산업체를 가진 친척에게 그들을 위한 추석선물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 2016-09-1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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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많은 책 정리하는 나만의 방법] 책, 분위기가 최우선
- 책 속에서 사람이 난다는 말도 있다. 책과 함께하는 습관은 남달라 보이기도 하고, 한 권의 책이 사람들의 인생을 우지 좌지 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젊은이들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본다. 예전처럼 독서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다. 음악이 살아있고 비싼 커피와 분위기가 있어야 더 머릿속에 잘 들어가는 모양이다. 하기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타벅스나 카페 빈 같은 카페에는 누구나 노트북을 지니고 홈 워크(숙제)를 하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널려진 책들의 현주소 어느 집이나 책들과의 전쟁이다. 이사할 때마다 소동이 벌어진다. 어느 것을 버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부부싸움이 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 박스 속으로 다소곳이 들어간다. 당연히 책이 들어간 박스가 가장 무겁다. 책에 대한 넘치는 욕심이었지만 결코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위안을 갖기도 한다. 필자에게도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한 권 두 권 쌓이는 책들이 수없이 짐이 되어갔다. 사전에서부터 학습서, 각종의 어학 책, 문학 책들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종류의 다양한 책들이 여기저기 공간을 차지했다. 물론 서재 방을 만들어 한 곳으로 몰아 놓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필자는 사방이 책으로 가득한 서재와, 음악과 커다란 스크린이 함께하는 감상실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책은 늘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니 가난이 무섭지 않았고, 음악은 듣고 있으면 마음을 치유해주니 더 없는 삶의 약이었다. 또 하나, 그 안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소중한 바람이었다. 이사를 다니고 결국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그동안 간직해온 수많은 책들을 시댁에 맡기고 떠났다. 거기에는 고급 오디오 세트와 그 옛날의 레코드 원판, 엘피 판 그리고 백판 등 몇 트렁크를 고이 모셔놓았다. 필자의 남편도 음악에는 조회가 깊어 취미가 같았고, 집에만 들어오면 음악을 틀어 감상하는 것이 생활의 시작이며 공동의 관심사였다. *북 카페로 변신을 오랜 세월 후 고국으로 돌아와보니 모든 것들이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필자가 직접 관리를 못했으니 어디 하소연을 할 데도 없다. 미국에서도 이삿짐을 싸면서 미국에서 사온 오디오 세트와 가장 먼저 귀한 책들을 챙겨왔다. 지금은 나름대로 간직한 책들과 구형 오디오, 흘러간 메모리 음악이 담긴 CD들이 필자의 소중한 재산이다. 아이들이 남겨놓은 책들과 필자의 책들이 정신없이 널려져 있다. 거실의 한쪽에 다행히도 공간이 있었다. 필자는 오디오가 자리 잡고 있는 거실 옆으로 빈 공간에 책방을 만들었다. 음악과 책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카페를 만들기로 했다. 언제라도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름하여 멋진 북 카페를 만드는 것이다.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남편과 함께 한쪽 벽면에 선반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장르별로 책들을 분리하며 정리를 했다. 예를 들면 여행에 관한 책들은 한 곳으로 몰아놓아 언제라도 꺼내어 볼 수 있는 간편함이 있도록 했다. 그 옆에는 여행을 하면서 수집해온 소품으로 군데군데 디스플레이를 해놓았다. 창가에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도록 넓은 소파도 마련해놓았다. 영락없는 카페가 되었다. 언제든지 책과 함께하는 분위기가 넘치는 북 카페가 만들어졌다. 이제 모든 것들은 분위기가 좌우하는 세상이고, 무엇보다 책을 읽고 싶은 충동적 분위기가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하면, 그곳이 가장 먼저 발길을 유혹하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꾸며 놓은 책들과 소품들이 마치 훌륭한 카페 같다며, 이 책 저 책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모두가 최고라고 했다. 분위기가 흐르는 필자의 북 카페에서는 오늘도 은은한 음악과 함께 마음의 글을 써 내려간다.
- 2016-09-0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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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가 막힌 나만의 아지트 대공개] 호숫가 작은 나의 다락방
- 강원 속초시 하면 누구나 바다와 산을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는 속초시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조용한 호수다. 그곳에 나의 작은 아지트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무작정 속초시로 여행 가서 영랑호를 찾았었다. 천천히 한적한 호숫가를 걷는데 예쁜 집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짙은 회색 지붕의 모던하면서 아담한 집 두 채가 나란히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가정집인 줄 알고 집을 구경하는데 의외로 1층에 커피숍이 있었다. 손님이 1명도 없는 한적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수하고 사람 좋게 생긴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옆 비슷한 집 한 채는 게스트하우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처에 커피숍이나 다른 숙소도 전혀 없었고, 집 자체가 상업적인 장소라는 느낌도 전혀 없어 게스트하우스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 집주인 부부는 캐나다에 이민했었는데 속초시에 놀러 왔다가 영랑호에 반해서 정착하게 되었단다. 젊은 집주인 부부에게 집 구경을 부탁하였더니 처음 본 낯선 손님에게 흔쾌히 여기저기 구석구석 설명해주고 안내해 주었다. 집 한 채는 아내가 1층에서 직접 커피를 볶고 내리는 과정을 모두 홀로 하고 그 옆의 집 한 채는 남편이 홀로 운영하고 관리했다. 이렇게 모든 걸 부부가 손수 해나가는 소박하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집안은 주인이 화가여서 곳곳에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고 작은 소품 하나 마치 내 집 같은 편안함을 줬다. 방마다 호수 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3층 다락방. 하늘을 볼 수 있게 창을 내어 밤에 누우면 별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집 구경을 하는 내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제부터 이곳이 아지트야. 그 이후 필자는 시간 나는 대로 그곳을 찾았다.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필자는 그곳에서 조용한 호숫가를 천천히 걷거나 때론 자전거로 호숫가를 한 바퀴 돌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서 창을 통해 호수 너머 지는 노을 보는 것도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작은 해변으로 가서 일출을 보며 아침 산책을 했다. 할 일 없이 다락방에서 뒹굴뒹굴할 때도 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주인이 키우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책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다 보면 내 마음의 모든 독소가 다 빠져나가는 듯하다. ◇아지트를 잃을 위기 처음 그곳을 알게 되었을 때 만 해도 여행객은 거의 없고 간혹 산책하는 사람도 다 그 지역 사람뿐 이었다. 그랬던 곳이 갈 때마다 조금씩 복잡해지고 있다. 호수 주변에 카페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해마다 한적한 호숫가 분위기가 사라져갔다. 조용한 아지트를 잃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필자로선 몹시 탐탁지 않은 변화다. 그러나 필자는 개의치 않고 그곳을 찾았다. 예약 같은 건 하지도 않는 채 말이다. 방이 없으면 커피숍에서 조용히 커피 한잔하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책을 읽고 호숫가를 바라보고 머물다 와도 괜찮았다. 실제로 몇 번은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갔다가 그냥 커피만 마시고 머물다 온 적도 몇 번 있다. 아직은 주말만 피한다면 여전히 유유자적 아지트가 되어 주는 곳이다.
- 2016-09-0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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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1) 코리안 바비큐
- 파티를 즐기는 것이 또 미국 문화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모여 크고 작은 파티가 열린다. 차와 간단한 다과를 하는 것도 그들은 티 파티라고 했다. 집집마다 주말이면 파티가 성행한다. 한 주 내내 열심히 일을 하고 금요일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파티가 시작된다. 그것이 미국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특별히 멕시칸들이 사는 지역은 바비큐 냄새가 진동하고, 그 경쾌하고 묘한 음악소리가 이 집 저 집에서 크게 울려 퍼져 공해가 되기도 했다. 미국 손님들이 가끔씩 자기들 집으로 필자 부부를 초대해주었다. 필자는 초대를 받으면 무조건 응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가 궁금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마다 정성껏 코리안 바비큐를 준비했다. 제일 한국적인 선물로, 직접 마켓에서 질 좋은 초이스 고기를 사다가 정성껏 양념을 해서 준비를 하면 대인기를 독차지했다. 우선 코스코에서 가장 좋은 갈빗살을 적당히 준비한다. 때때로 질 좋은 LA 갈비도 선호한다. 준비한 싱싱한 고기를 찬물에 얼마간 담가놓았다가, 깨끗하게 빨아서 핏물을 제거한 후에 꼭 짜놓는다. 갖은 양념을 준비한다. 달콤하고 아주 맛난 싱싱한 배와 양파 그리고 마늘 생강 등을 믹서에 곱게 갈아놓는다. 달달 한 진간장에 약간의 죽염 소금과 각종 양념을 잘 섞어 준비하고, 짜놓은 고기에 가볍게 설탕을 약간 뿌려 간이 배도록 한다. 고기가 조금 연해지는 것 같다. 다시 모든 양념을 섞어 남편의 넓적한 손으로 정성껏 주무른다. 장갑을 끼고 하라고 해도 남편은 손맛이라며 기어코 두툼한 맨손으로 주물러댄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한두 점 프라이팬에 구어 살짝 양념을 맛본다. 그리고는 하루쯤 냉장고에 숙성을 시킨다. 그 후에 몇 시간 냉동을 시켜놓고 있다가 당일 아침에 꺼내어 다시 냉장실에 보관한다. 가기 전에 바로 반드시 숯불에 구워 정성껏 초대한 집으로 선물로 가지고 간다. 코넬리 부부인 정겨운 손님들이 산타모니카에서 롱 비치로 이사를 갔다. 롱 비치도 해변도시로 필자는 처음으로 가보는 곳이었다. 마침 금요일 저녁에 초대를 받았다. 세탁소 일을 서둘러 마치고 롱 비치로 향했다. 미국도 불타는 금요일이었다. 온통 도로가 트래픽(교통체증)으로 꽉 막혀있었다. 1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도착을 했다. 집안 입구에서부터 멋들어진 캔들 향이 코를 찔러왔다. 미국인들은 무척 초를 좋아한다. 현관에서부터 화장실, 부엌 등등 어느 곳에나 색색의 촛불들이 화려하게 수를 놓으며 불타오른다. 코넬리 부인의 고향인 남미 브라질의 향기도 약간은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 사람들의 향내가 흘러나왔다. 이곳저곳에는 두 부부의 사랑스러운 사진이 장식되어있다. 아름다운 서구식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코넬리 부인이 한때는 브라질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구석구석에 그녀의 자태가 커다랗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걸려있었다. 젊은 날의 앳되고 날씬하며 활기찬 모습들이었다.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의 미국 음식들이 진열되어있었다. 더러는 브라질 음식도 섞여있다.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파티였으므로 미국식 바비큐는 없었다. 필자 부부는 숯불에 미리 구워온 한국식 바비큐를 식탁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미국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한 점씩 가져가기를 시작했다. 먹어보고는 또 가져간다.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은 묘한 맛이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커다란 접시, 하나 가득한 것이 다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최고라며 입맛을 다신다. 소스의 맛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모두들 소스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대체로 미국은 생고기 위에다 단순하게 소금이나 바비큐 가루를 뿌려먹는 것이 일수였기 때문이다. 다음 파티에도 또 해줬으면 하는 무언의 부탁을 받았다. 남편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이 아주 좋은듯했다. 이번에도 한국인의 선물이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은 더 해주었고 필자의 집 앞마당으로도 미국인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아주 행복하다며 코리안 바비큐가 역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한국 사람들의 입맛은 아마도 세계를 제패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16-08-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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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0) 코넬리의 하소연
-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미국인들에게도 희로애락이 함께 공존했다. 겉으로 봐서는 냉정하며 대화가 차단될 것만 같은 코가 높은 사람들에게도 눈물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서로가 소통이 되지 않을 뿐, 어느 정도 사이가 통하면 깊숙한 대화가 오고 가기 시작한다. 더구나 미국인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하루의 일과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강아지의 생활사까지도 털어놓는다. 어느 날인가, 젊은 백인 한 사람이 새 손님으로 가게를 찾아왔다. 키가 훌쩍 크고 코가 높다란 전형적인 미국인, 라스트 네임(성)이 코넬리라는 사람이었다. 훠스트네임(자기이름)은 데이비드라는 이름으로 필자의 남편(데이비드)과 이름이 같았다. 첫 만남 이후부터 그는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한지 필자 부부를 만날 때마다 얼굴에 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넬리는 자기의 직업이 돌 수입업자라고 진지하게 소개를 했다. 그전에는 음악을 아주 즐기는 뮤지션이었다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다양하게 늘어놓았다. 한 6개월 이상을 단골로 열심히 필자의 세탁소를 드나들었다. 어느 날, 그가 불쑥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얼굴이 까맣고 키는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그녀가 자기 와이프라며 극진한 소개를 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은 되어 보였다. 와이프라는 까무잡잡한 여자는 누가 봐도 귀엽고, 이목구비가 아주 아름답게 생겨 남자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미국인들은 때로는 자그마하고 예쁜 동양인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다가 어떻게 만났느냐고 문득 물어보았다. 그녀는 브라질 여성이었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편인, 코넬리가 돌 사업으로 브라질을 갔다가, 그곳에서 만나서 그녀를 미국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척 사이가 좋은 신혼부부가 깨가 좌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필자 부부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랑 행위가 절절 넘쳐흘렀다. 일 년쯤이 지나, 하루는 코넬리가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채로 힘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필자 남편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이혼을 원하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다. 더구나 오랜만에 겨우 임신을 했는데 막무가내라며, 뜻이 안 맞아 부부싸움을 왕창했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 부부는 무어라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참고 기다리라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파랗고 맑은 그의 눈에 진심 어린 눈물이 고여 왔다. 필자의 남편이 두 손을 잡고 안심을 시키며 함께 걱정을 해주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 그가 심각한 얼굴로 또 찾아왔다. 결국 와이프가 집을 나갔다고 울먹거리며 깊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필자 부부는 직접 브라질로 가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저 넋두리를 들어주는 것도 큰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단지 받아주고 몇 마디 해 준 것 밖에는 없었다. 그 후로 한 달쯤이나 지나 코넬리는 그녀를 브라질에서 직접 데리고 돌아왔다. 어느새 피부가 더 새까매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져있었다. 코넬리의 얼굴에서도 다시 환한 모습이 보여왔다. 배가 남산만 한 그녀는 배를 까뒤집어 보이며 자랑을 서슴지 않았다. 아기가 들어있는 바가지 모양의 둥그런 배 위에 사인을 하라고도 했다. 그들의 묘한 문화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미국 남녀의 관계였지만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들도 필자 부부를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반가움에 서로 허그를 하며 함박 웃음꽃을 피웠다. 코넬리는 아기를 낳기 전에 필자 부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노라고 했다. 쾌히 승낙을 하며 필자 부부는 선물로 코리안 바비큐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은 코리안 바비큐를 무척 좋아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며 서로 헤어졌다. 얼굴이 까맣고 자그마한 그녀는 배가 불쑥 나왔지만 엉덩이를 씰룩대고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나갔다. 촐랑대는 어리고 까만 남미 임산부의 모습이었지만 두 부부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고 흐뭇했다. 결국 코넬리 눈물의 하소연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이 때로는 하소연을 국경 넘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약이 되는 것만 같았다.
- 2016-08-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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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19)집으로 가는 길
- 드디어 꿈같은 비자를 받아냈다. 그것은 얻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눈물 나게 힘든 과정이었다. 일단 5년 동안은 한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끝내, 목적은 달성했지만 험난한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함께한 일행들은 긴장이 풀리기는 했지만, 또 남의 나라에서 당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똘똘 뭉친 단체의 강력한 힘들은 그 어려운 상황을 하나 하 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값비싼 미국 비자는 일단 손에 쥐었다. 험난한 과정을 겪어 온몸으로 어렵사리 얻어냈다. 그러나 또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은 그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 만 하는 것 같았다.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오전에 들어온 그 길은 검문검색이 매우 심하다고 했다. 이제 막 얻은 비자로는 그곳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멕시코인 들의 국경을 넘는 야밤 밀입국이 잠시 끊기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계 검문소는 몇 군데에 더 심하게 걸쳐있고 아주 살벌하다고 했다. 멕시코 브로커와 변호사는 식사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며,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멕시코 브로커는 일단 자기가 잘 아는 산길로 가자고 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매우 안전하다고 했다. 모두가 불안하기는 했지만 일행들은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그 길은 산 넘어 산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삭막한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아무리 넘고 넘어 도 적막한 산들로만 가득하고, 오늘 안에 과연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눈앞이 캄캄해왔다. 멕시코 기사는 열심히 달려가더니 갑자기 차를 멈추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그 길에는 요즈음에 산 도적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멕시코 사람들도 살기가 힘이 드니 산에 도적들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잘 못 걸리면 힘들게 얻은 비자는 물론이고 모든 것들은 다 빼앗기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난감한 일인가 싶었다. 도리가 없었다. 두어 시간 달려온 산길을 다시 돌아 내려와야만 했다. 아뿔싸! 차를 돌리다가 차바퀴가 진 흙에 빠졌다고 했다. 기가 막힌다. 모든 일행들은 차에서 다 내려 있는 힘을 다해 차를 밀었다. 가까스로 차를 돌려 다시 온 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차가 꿀렁거린다. 자동차 바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별수 없이 시내로 나가 바퀴를 갈아야 했다. 일행들은 차에서 내려, 잠시 찻집 비슷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지저분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쾌쾌한 냄새와 끈적한 더위는 아주 역겹기만 했다. 어느덧 어둑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비자를 얻어, 날아갈 듯한 기쁨은 어느새 사라지고, 일행 모두는 서서히 파 김치가 되어갔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바퀴를 바꾸고 나서야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오늘 안으로 집에 가려면, 다시 오전에 온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 브로커는 여지 저기 연락을 취하며 안절부절 난리가 아니었다. 드디어 국경 가까이로 왔다. 일행들은 몸은 피곤해졌으나 불안한 마음을 조아리며 눈이 초롱 초롱 해진다. 창밖으로는 오토바이를 탄 검은색의 멕시코인들이 요란한 질주를 하며 길거리에 하나 가득하다. 모두가 집을 향해, 하루의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는 시간이었다. 검문소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멕시코 브로커가 내려 한참 동안 힘든 수습을 하는 것 같았다. 웬일인가. 별문제 없이 통과를 시켜주는 것이다. 모두가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얼마를 또 달려갔다. 이번에는 미국의 검문소가 차를 멈추라고 했다. 변호사는 걱정하지 말라며 일행에게 안심을 시켰다. 변호사가 내려가 무어라 설명을 하며 패스포트를 보여주고 있다. 같은 미국인이고 변호사라는 것이 효능이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한 백인 경관이 한 바퀴를 맥없이 돌고 나갔다. 그 후로, 아마도 한 군데는 더 검문소를 거친 것 같았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많은 검문소가 있어 검사가 철저했다. 미국인들은 멕시코에서 무작정 넘어오는 그들로 인해 골치가 아팠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사실상 가난한 멕시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 반수 이상이 불법체류자라고 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 어둠을 가르며 드디어 집으로 향했다. 남편은 늦은 밤이었지만 당연히 마중을 나왔고, 필자와 남편은 끌어안고 깊은 포옹을 했다. 마치 몇 년 만에 만나는 것만 같았다. 누렇게 뜬 필자에게 남편은 수고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제야 가족을 만난 기쁨에 눈물이 핑 돌았다. 미국은 겪어야 할, 참으로 힘든 일이 많았지만, 잊지 못할 체험의 세계는 또 깊은 추억이 되었다.
- 2016-08-23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