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곳, 그곳이 선진국 땅이었다. 하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최고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거기에도 따라야 할 혹독한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9.11테러가 일어나고 미국 내에 모든 일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곳저곳 규제가 심해졌고 당연히 이민정책에도 심각한 정체가 일어났다. 더구나 테러범들이 학생비자로 넘어와 수 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사회는 어두운 혼란 속으로 치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서둘러 변호사를 만났다. 비자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또 다른 편법이 있다고 했다. 변호사는 돈만 들이면 얼마든지 수는 있다고 했다. 물론 미국 내에서 E2비자를 밟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세탁소를 미리 구입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사실에 입각해서 진행하는 것으로 시간만 기다리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무엇보다 큰딸이 남아있는 한국을 왔다 갔다 하려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받는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제3국비자’이다. 그것도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적어도 일반 변호사 수수료의 두 배가 넘었다.
남편과 함께 밤새 고민 끝에, 위험은 따랐지만 필자 혼자라도 제3국을 가기로 했다. 비싼 변호사 비용은 두 번에 나누어 지불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단단히 하고 변호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갔다. 제3국으로 가는 만큼 반드시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치한이 위험한 멕시코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행하는 편법적인 일들이니 마음이 몹시 떨려왔다. 그나마 변호사가 함께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만남의 장소에는 이미 도착한, 다른 시티에 사는 두 팀의 일행이 있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모두가 공항으로 갔다. 비자가 없는 일행들은 멕시코로 직접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 같이 멕시코 국경 앞까지만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자그마한 국내 경비행기가 어찌나 요란한 소음을 내는지 고막이 터질 것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귀를 막고 끌려서, 얼마 안 가니 또 내리라고 한다. 아직은 미국 땅이라고는 했지만 허허벌판이다. 그곳에는 바람 한점 불지 않고, 무지하게 뜨거우며 삭막하고 지저분했다.
변호사는 멀리 바라다보이는 조그마한 건물이 멕시코 국경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이고, 반드시 일행들이 넘어가야만 하는 곳이라고 설명을 했다. 필자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고 무슨 서부극에 나오는 장면 같은 생각으로 긴장감만 들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내색을 안 했지만 모두가 떨고 있는듯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가 가족들이었다. 변호사는 한꺼번에 온 가족이 함께 동일 비자를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러므로 가족 모두가 출동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가족들 보다 미국으로 늦게 와 비자가 서로 달랐고, 그날은 당연히 혼자 일수 밖에 없으니 더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얼마 후에 15인승 벤 하나가 도착을 했다. 당연히 운전수는 멕시코 사람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도 멕시코인으로 아마도 브로커였다. 멕시코로 가기 위해 검문소를 무난히 통과를 하고, 또 그곳 영사관으로 가서 중계업무를 하려면 그들이 무조건 필요한 모양이었다. 변호사들은 멕시코인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며 성공을 기원하고 있는듯했다.
인종은 달랐지만, 같은 목적을 가득 실은 하얀 벤이 속도를 내며 마구 달려갔다. 허허벌판의 미국 마지막 마른 땅에는 먼지가 펄펄 날려왔다. 사람들로 가득 찬,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기를, 아니 비자를 꼭 취득하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들을 했다. 물론 모든 것들이 꼬여서 실패할 확률도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드디어 국경 앞에 차가 멈추었다. 변호사는 긴장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이윽고 시커멓게 생긴 키가 크고 뚱뚱하며, 부리부리한 멕시코 경관이 총을 찬 무장으로 올라와 한 바퀴를 씩 돌아본다. 그때, 어찌나 벌벌 떨리고 겁이 났는지 참느라고 힘이 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순간들을 떠올려 생각하면 가슴이 조여온다.
멕시코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그 경관과 무어라고 한참을 떠들어댄다. 승객들은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 드디어 얼마 만에 통과하라며 손을 저어댔다. 두 손 가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은 이윽고 환희의 박수를 쳐댔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에요’ 라며 변호사는 조용히 하라고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사관으로 가서 비자를 받는 것이 아주 심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면 이문을 또 통과해야 한다며 공포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다시 맥이 떨어져 힘없이 조용해졌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필자는 깜짝 놀랐다. 비록 미국과는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땅이었지만, 주위 환경이 너무도 달랐다.
아무리 못 사는 멕시코 국경 근처였지만,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과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빨래들의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국의 그 옛날, 60년대의 청계천 뒷골목을 방불케 했다. 얼마 후, 드디어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멕시코 영사관, 작고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을 했다. 내리는 순간 이상한 기분 나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를 찔러왔다.
돈을 쳐 들여 모험을 단행했지만, 비자를 받기까지는 산 넘어 산이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또 기다리며 그 순간을 기대해야만 드디어 소유의 환희를 맛볼 수가 있었다.
도대체 그놈의 ‘제3국 비자’가 뭐길 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