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5시 여의도 신한금융투자빌딩 웨이홀에서 척추건강과 치매를 주제로 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가 열린다.
㈜이투데이PNC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척추와 치매 관련 강연과 더불어 관객과 함께 이야기하는 소통의 장으로 꾸며진다. 가천대 뇌건강센터장과 인천시 치매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는 가천대 길병원 연병길 교수와 우신향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민형식 부원장이 강연자로 나섰다. 연병길 센터장은 ‘치매와 마주보기’를, 민형식 부원장은 ‘척추 알면 10년 젊어진다’를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
아울러 개그맨 권영찬의 진행으로 펼쳐지는 의학 토크쇼와 관객과 함께하는 일문일답 코너를 마련해 시니어들의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의학 관련 프로그램 외에 김범룡, 여행스케치 등 가수들의 흥겨운 공연 무대까지 즐길 수 있다.
참가 신청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기획팀(02-799-6730)을 통해 무료로 가능하며, 선착순 마감한다.
4월 14일 동년기자단 2기 발단식이 열렸다. 지난 1년간 감동과 연륜이 묻어나는 글로 두각을 나타냈던 1기 동년기자 26명을 포함한 총 48명의 2기 동년기자단이 꾸려졌다. 각자의 인생과 삶의 철학은 다르지만, ‘동년(同年)’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게 될 그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온라인 지원과 서류 심사를 거쳐 선발된 48명의 동년기자가 설렘을 안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발단식 이후,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각자의 역량에 따라 활발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2기 동년기자들은 1942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평균나이 61세로 1기 동년기자단(평균나이 54세)보다 연령대는 높지만, 저마다의 깊은 연륜과 강한 열정으로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불어넣고 있다.
공감과 감동이 있는 기사 기대돼
이날 행사는 명함 및 기자수첩 수여, 윤리강령 채택, 동년기자단 1기 활동 보고, 개인 프로필 및 단체사진 촬영, 자기소개 등으로 이뤄졌다. 발단식에 참석한 길정우 이투데이 총괄대표이사는 “동년기자들의 눈높이로 일상의 행복한 일, 감동을 주는 이야기 등을 기사로 쓴다면 중장년 독자와의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좋은 글을 많이 써서 우리 주변에 행복과 기쁨을 나눠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혁 이투데이PNC 대표이사는 “매호 동년기자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고 있다. 1기 동년기자단의 활동 덕분에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며 2기 동년기자단의 활약을 기대했다.
보람만큼 책임감 더한 기사로 발전하길
동년기자단 1기를 이끌었던 강신영 단장은 “처음에는 얼떨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모두 액티브 시니어로 활동하는 분들이라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며 지난 활동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아울러 “블로그나 SNS 등에만 쓰던 내 글이 잡지와 온라인 사이트에도 실리는 것에 무척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게 되는 만큼 글과 사진의 수준을 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동년기자단’을 작명한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이사는 “동년이란, 같은 나이라는 뜻도 있지만, 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이들을 일컫기도 한다. 서로 나이는 차이 나지만, 친구로 동무로 어울리며 망년지교(忘年之交)하길 바란다. 열심히 글을 쓰고 보람찬 활동을 하면 좋겠다”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남자 25명, 여자 23명 / 50대 20명, 60대 23명, 70대 5명 / 평균나이 61세
가나다순 48명
가재산(63·남), 강신영(65·남), 김수영(64·여), 김영선(65·여), 김종범(61·남), 김종억(64·남), 김진주(57·여), 김태형(57·남), 박기원(51·남), 박미령(63·여), 박수남(54·여), 박애란(66·여), 박정하(51·여), 박종섭(62·남), 박혜경(65·여), 배인휴(65·남), 백외섭(66·남), 변용도(67·남), 성경애(60·여), 성미향(54·여), 손웅익(59·남), 신용재(68·남), 안영란(55·여), 안영희(70·여), 양복희(60·여), 옥선희(59·여), 육영애(71·여), 윤영애(56·여), 윤재훈(58·남), 윤정자(75·여), 윤종국(70·남), 이경숙(65·여), 이두백(67·남), 이미숙(56·여), 이석현(56·남), 이찬만(58·남), 이현숙(59·여), 장영희(61·여), 전용욱(59·남), 정성희(57·여), 정원일(60·남), 조왕래(66·남), 주상태(51·남), 최원국(61·남), 최은주(54·여), 최현식(64·남), 한정수(71·남), 홍재기(57·남)
지난 4월 14일 이투데이 신문사에서 자매지 제2기 동년기자단 발단식이 있었다. 1기 때보다 더 체계적이고 철저한 준비로 보다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 이 자리에는 지난해 4월 선발되어 활동해온 1기 기자들과 2기로 선발된 40여 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투데이 총괄 대표 및 이투데이PNC 대표, 브라보 편집국과 임직원 모두는 따뜻하고 친절하게 동년기자들을 맞이해주어 분위기가 훈훈했다. 지난해와 달리 의자 배열도 회의식으로 배치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 화기애애한 시간을 만들어줬다.
총괄 대표님께서는 축사를 시작으로 글쓰기에 관해 조언을 해주셨다. 글쓰기는 특별히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시는 말씀에 많은 공감이 됐다. 특히 대표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즈음 나이 드신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순간 필자의 귀가 쫑끗 서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표님이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삶을 알아가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음성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필자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애써 어머니의 음성을 기억해보았지만, 들려오기는커녕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아스라한 느낌만 몰려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아침 새벽에서부터 저녁까지 일만 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통보를 받았다. 때마침 비자 문제로 한국을 드나들 수도 없을 때였다. 딸이 비보를 전해줬다. "엄마! 놀라지 말아요. 진짜 놀라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요. 외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두 다리의 힘이 풀렸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달려갈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4일 내내 필자는 전화통만 붙잡고 있었다. 국제전화로 생중계 듣듯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전해 들어야 했다. 이제 영영 헤어져 뵙지 못할 어머니께 인사도 못 드린 불효자가 되어 몇 날 며칠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저 혼자 무례하게도 흘러갔다.
필자의 어머니는 팔십 평생을 병원에서 사셨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독한 정신적 충격으로 사시는 내내 고달픔의 연속이셨을 것이다. 우리 집 다섯 자식, 작은집 네 자식을 어머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야만 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요양원에서 생활하셨고 우리 집 5남매는 그곳에서만 엄마를 만나야 했다.
돌아가시기 5년 전, 한국에 잠깐 방문했던 필자는 엄마에게 거의 매일 찾아갔다. 어머니는 실내에서만 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얼굴은 하얬고 약물에 중독되어 퉁퉁 부어 계셨다. 몸은 날로 여위어갔지만 만날 때마다 둘째 딸인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자식들 걱정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고는 마지막에는 꼭 " 나 좀 살려다오! 나 좀 데려가줘!" 하셨다. 그 말씀은 가슴에 꽂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필이면 기억하는 게 어머님의 슬픈 음성뿐이다.
필자는 마음이 아팠지만 고개를 숙인 채 엄마를 자리로 조용히 안내하고는 살금살금 도망치듯 요양원을 빠져나왔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창문 너머로 엄마의 모습을 훔쳐봤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필자가 사다 드린 새 옷을 갈아입고 챙 달린 흰 모자를 쓰신 채 자리에 누워계셨다. 몸이 불편하신지 얼굴을 찡그리신 채 인상을 쓰고 두 눈만 껌뻑거리고 계셨던 어머니. 필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독하게 돌아섰는데 그때 그 모습이 영영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죄책감을 안고 필자의 고향인 충남 부여, 엄마를 모신 곳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다정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워 계셔서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눈물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때만 해도 엄마의 여린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괜찮다. 나는 이제 편안해. 걱정 말아라. 아버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니까."
대표님의 말씀을 듣다가 왜 필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어머님의 음성을 녹음해둘걸 후회가 되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를 잊고 산 세월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이제라도 가끔씩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하늘 어딘가에서 필자에게 건넬 착한 우리 어머니의 음성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지만 동년기자단 발단식에 참석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기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난 1년 동안 서로의 글을 보며 삶을 공유하고 정을 쌓아온 1기 기자들과도 얼굴을 마주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필자의 감성을 일깨워주신 총괄 대표님의 감동적인 말씀에 감사드린다. 임직원분들의 친절함에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저 하늘에서도 영원히 내 삶의 주춧돌이 되어주실 우리 엄마를 기리며….
2월의 막바지인 지난 주말 새봄을 기다리며 '따뜻한 콘서트'가 열렸다.
경제신문 '이투데이'가 2013년 이후 5년째 개최하고 있는 음악회라고 한다.
오전부터 하루 종일 눈보라가 흩날려 저녁 나들이가 좀 걱정스러웠지만 출연하는 어떤 가수 때문에 필자는 꼭 참석하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KBS 콘서트홀에 가니 오랜만에 보는 동년 기자님들이 많이 계셨다.
글로만 대하던 동년 기자님들과의 반가운 인사가 이어졌는데 부부가 동행하신 기자님도 여러분이셔서 보기에 참 좋았다.
우리 동년 기자의 좌석은 2층으로 자리에 앉으니 벌써 무대는 화려한 조명으로 예쁘게 반짝여 신나는 공연을 기대하는 설렘으로 마음이 들떴다.
출연 가수를 보니 어린 걸그룹 '모모랜드'의 귀여운 아이들과 중견 여가수 '린' 그리고 독보적 존재를 자랑하는 '전인권' 씨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김장훈' 씨가 있다.
김장훈 씨가 출연한다고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고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는데 김장훈 씨와는 몇 년 전 작은 에피소드가 있는 사이이다.
노래도 잘하지만, 기부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는 멋진 사람이라 필자는 그의 왕 팬이 되었다.
오늘 약간 실망스러운 건 좌석이 2층이라 가수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김장훈 씨는 공연 중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하는 유명한 가수이다.
앞자리였다면 언젠가처럼 좀 더 즐거운 관람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몇 년 전 강남 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김장훈 콘서트가 있었다. 제법 큰 무대를 춤과 노래로 종횡무진 휘저으며 신나는 공연을 펼치던 중 갑자기 김장훈 씨가 어시스턴트가 필요한데 누가 도와주겠느냐고 물었다.
같이 간 친구 삼총사가 내게 손들라고 부추겼고 나는 용감하게 조용한 침묵을 깨고 “저요!”하고 소리를 치고 말았다.
누가 나오시겠느냐고 했지만 점잖은 관객들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아줌마 기질을 발휘한 필자가 큰 소리로 답을 한 것이다.
좀 더 젊었을 때라면 부끄러워서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나이가 들으니 너무 용감해지는 것 같아서 우습기도 했다.
용감하게 소리친 덕분에 무대에 올라가 김장훈씨 옆에 서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본 김장훈 씨는 매스컴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고 훤칠했다.
잠시 자기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고 필자가 도와야 하는 일을 말해 주었다.
무슨 큰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고 김장훈 씨가 하모니카를 불 때 필자는 마이크를 그 앞에 잘 대어주는 일을 맡았다.
별일이 아니었으므로 관객석에서 폭소가 터졌고 무대도 매우 화기애애해졌다.
하모니카 연주가 끝난 후 감사하다며 불었던 하모니카를 선물로 주었는데 꽤 값이 나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필자는 그 작고 앙증맞은 하모니카를 가보로 간직하겠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고 신나는 공연을 즐겼다.
그렇게 김장훈 씨는 공연 도중 관객과의 소통을 꼭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래층의 어떤 여성관객이 전의 나처럼 큰소리로 답을 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만약 필자의 좌석이 가까웠다면 필자가 소리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어린 아이돌의 무대도 깜찍했고 ‘린’의 노래도 좋았지만, 김장훈 씨와 전인권 씨의 영혼을 울리는 듯한 노래에 감동적이었다.
신나는 콘서트의 여운으로 돌아오는 길의 차가운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투데이에서 매년 주최한다니 다음에도 초대되어 꼭 콘서트를 보러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동년기자로 활동한 지도 어느덧 만 1년이 돼가고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태(懶怠)에 빠져 글쓰기를 망각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내가 정말 글다운 글을 썼을까?” 하고 뒤돌아보며 반성을 하게 된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지난 1년 동안 한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기자생활 1년 동안 덤으로 얻은 행운도 많았다. 대학로에서 두 번씩이나 연극을 관람했고 올 초에는 압구정동에서 이라는 뮤지컬도 관람했다. 젊어서는 살기 바빠 문화생활을 못했고 나이 들어서는 관심이 떨어져 고작해야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는데, 지난 1년 동안 동년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화생활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다.
지난 2월 22일에도 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여의도 KBS홀 본관에서 공연된 이투데이 신춘음악회 에 초대된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자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필자가 사는 인천공항 근처에는 진눈깨비와 비가 섞여 내리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퇴근시간에 맞춰 막내아들에게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공연장까지 가는 방법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쉽게 가는 노선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결론은 회사 통근버스로 김포공항까지 이동한 다음 공항전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로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었다. 가다 보니 허기는 또 얼마나 몰려오든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해 일단 표를 받아놓고 시간을 보니 공연시작 20분 전이었다. 빠듯하긴 했지만 저녁을 굶고 관람할 수는 없어 근처 김밥 집으로 달려갔다. 모처럼 아들과 둘이 마주 앉아 김밥과 라면을 시켜 먹으면서 오랜만에 서로의 관심사를 물으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부리나케 공연장으로 돌아오니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겨우 안내를 받아 착석하고 관람을 했다.
오프닝 무대로 타악그룹 RUN의 ‘두드림’은 힘차고 역동적으로 리듬을 타고 있어 오랜만에 필자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었다. 겨울 끝자락에서 만난 ‘마음이 따뜻해지는 콘서트’는 오는 봄을 맞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필자의 마음을 녹여줬다. 아들은 가수 린의 인기 드라마 OST곡을 제일 좋아했다. 자신의 세대와 공감이 되고 감성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깜찍한 걸그룹 ‘모모랜드’의 공연은 싱그러워 젊은 층의 관람자들은 물론이고 시니어들도 한마음으로 공감하고 어우러진 멋진 공연이었다.
중견가수 김장훈의 넘치는 끼와 재치는 마력이 있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문화는 대중과 함께 호흡을 해야 그 힘이 발휘된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메인무대를 장식한 가수는 등장하기 전부터 한껏 기대를 갖게 한 대형 록 가수 전인권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울림통, ‘전인권 밴드’의 현란한 연주,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과 포스가 한껏 발휘된 무대였다. 공연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시간에 갈 길이 먼 필자와 아들은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야 했다.
아들은 공연장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러 가는 내내 공연의 잔상(殘像)에서 벗어나지지 않는지 따뜻하고 멋진 공연이었다고 끊임없이 조잘댔다. 황급히 돌아오면서 9호선 국회의사당역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맨 필자와 아들은 영락없는 촌뜨기 신세였다. 겨우 지하철을 타고 두어 정거장쯤 갔을 때 무심코 안내방송으로 다음 정차할 역이 노량진이라는 멘트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만 것이다. 일찍 집에 도착하려고 공연 엔딩도 보지 않은 채 조금 일찍 빠져나왔는데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다니! 필자와 아들은 마주보면서 멋쩍은 웃음을 나누고 노량진역에서 내려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탔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전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 잡기가 힘들었다. 승강장을 보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30여 미터나 늘어서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다가 택시가 보이면 타자. 그게 더 빠르겠다.”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눈길을 걸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고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걸었지만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걸어가는 길이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 걷는, 눈 내린 밤길은 따뜻한 콘서트만큼이나 훈훈했다.
KBS홀에서 이투데이 초대 신춘음악회 '따뜻한 콘서트'가 있다는 연락을 SNS로 받았다. 곧바로 댓글이 달리고 여러 사람들이 신청했다. 그러나 신청을 해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인지, 신청을 안해야 도와주는 것인지 헷갈렸다. 한정된 좌석일 경우 안 가는 게 도와주는 일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면 다른 커뮤니티에도 소개해서 여러 사람이 가게 하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다. 그렇다고 자리 확보를 했다가 안 나타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 사람을 당혹하게 했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정겨운 지인들의 명단이 보이기에 혼자 신청해서 합류했다. 혼자 가는 사람보다 여러 사람 분을 신청한 것으로 보아 당일 사정상 못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그래서 당일 걷기 모임이 있는데 혹시 자리가 비면 채울 생각을 했다. 걷기 모임에는 미리 자리가 나면 다행이고 안 나면 그만이라고 공지를 했다. 그런데 다행히 두 사람 분의 자리가 생겨 걷기 모임에서 두 사람과 함께 갈 수 있었다.
공연이 7시 반부터이므로 6시쯤 방송국 앞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7시까지 가면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같이 가는 사람들과 방송국 앞 음식점들을 둘러보니 생선구이집이 새로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KBS에는 자주 갔었으나 그 근방에는 만두집 하나 밖에 없어 매번 그 집 신세를 졌었다. 생선구이집은 다소 가격이 비싸기는 했으나 먹을 만 했다.
시간 맞춰 KBS홀에 도착하니 정겨운 얼굴들이 많았다. 관계자분들과 인사 나누고, 티켓을 수령하고,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니 인사 나누고 좋은 시간이었다.
KBS홀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열린음악회’를 비롯해서 대형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인데 늘 TV로만 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거기 가서 방청을 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었다. 우선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컸다. 방송 녹화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늘 쪽방 같은 스튜디오였지 그렇게 큰 공연장일지 몰랐다. 1,2층 합해서 1,6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 더구나 지하는 7층까지 있다니 대단한 규모이다.
프로그램은 박경림 진행으로 'RUN'의 타악으로 시작했다. 필자가 잘 아는 커뮤니티 중에 퍼커션 클럽이 있는데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타악은 심장을 뛰게 만든다. 앞의 두 여성이 온몸을 움직이며 열성적으로 북을 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순서는 린의 무대였다. 드라마 OST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청아한 고음과 바이브레이션이 특색인 가수로 발라드에 잘 어울린다. 공연 중 가사를 일시 까먹은 것을 솔직히 자백하는 겸손함이 인간적이라 더 좋았다. 부른 노래가 많아 일일이 가사와 멜로디를 기억 못하는 것도 솔직해서 좋았다. 드라마를 안 보기 때문에 처음 듣는 곡도 있었지만 ‘별에서 온 그대’는 봤다. 그래서 그 노래의 주인공이 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자 30분을 소화했다.
세 번째 무대는 모모랜드가 나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선발된 7명이라 했다. 상큼한 외모에 귀여운 율동이 돋보였다.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한 사람도 있는 것은 국내뿐 아니라 외국도 의식해서 그렇게 뽑은 것 같다.
네 번째 무대는 김장훈이 나왔다. ‘독도는 우리 땅’으로 유명해졌는데 정작 그의 무대를 본 것은 처음이다. 평생을 음악인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는 것만 안다. 정작 부른 노래는 몇 곡 안 되는 곡이었지만, 2천여 회의 라이브 콘서트 공연을 했다는 콘서트장의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마지막 무대는 전인권과 그의 밴드가 나왔다. 외모부터 독특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록 세계를 잘 나타내는 음악인이다. 모처럼 귀를 울리는 록 밴드 연주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두성으로 부르는 고음 창법도 인상적이었다. 밤새 듣고 싶은 연주였으나 시간은 벌써 밤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이투데이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인간은 언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해온 것일까요? 나라는 존재는 상대가 없으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개념인지도 모릅니다. 그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함으로써 나의 독자성, 개별성을 알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시조에 재미있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지은지 몰라 무명씨 작으로 돼 있습니다. “내라 내라 하니, 내라 하니 내 뉘런고/내 내면 낸 줄을 내 모르랴/내라서 낸 줄을 내 모르니 낸동 만동 하여라.”
이 시조에는 ‘내’가 아홉 번, ‘낸’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언어유희 같기도 한 말을 통해 자아에 대한 탐구의 진지성을 알게 해줍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이 의문이 무명씨의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 옛시조에 이렇게 자아를 탐구한 작품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수직적 질서와 순종적 윤리 덕목에 의해 유지되던 왕조시대에는 나에 대한 자각, 개인의 자유와 독자성에 대한 인식이 계발될 수 없었습니다. 두드러지는 개별적 자아는 장려되기는커녕 오히려 모진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69세 때 자화상(1782년)에는 이런 화제(畵題)가 씌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네. 이것으로 알 수 있지.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스스로 낙을 찾아 즐길 따름일 뿐.”
표암의 모습은 갓 쓰고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이닝복 차림에 베레모를 쓴 격입니다. 자화상이 이렇게 특이한 이유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산림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는 집안이 몰락해 초야에 묻혀 살면서 서화로 이름을 날리다 60세가 넘어 영조의 배려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명문가 출신이 벼슬 욕심이 없을 리 없었지만 막상 벼슬살이를 해보니 다시 산림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한 화면을 통해 드러난 두 마음은 이율배반이나 이중성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인간감정의 발로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1910~1937)의 시 ‘거울’은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다, 거울 속의 나는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지만 또 꽤 닮았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 등의 말이 이어집니다.
이런 현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옛글에서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쉬 볼 수 있습니다. 자화상에 마음을 부치기도 하고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삶을 차분히 정리하기도 합니다. 참된 나를 찾는 모습은 자만(自挽) 자명(自銘) 자전(自傳) 자지(自誌) 자찬(自讚) 등 다양한 문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살다 간 선비 홍길주(1786~1841)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런 글입니다. “나는 자네와 일심동체일세”라고 말을 걸기 시작한 이 글은 자신의 독서 경향을 질타하고 경계하면서 반성을 촉구하더니 “내가 자네와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다면 아주 큰 행운이겠네”라고 말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청언소품(淸言小品), 즉 짧고 감성적인 에세이만 즐겨 읽으려 하는 자신에게 “그러지 말고 사서삼경 등 고전으로 돌아가라”고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교훈적이고 딱딱한 고전만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밥도 먹고 군것질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지요.
그런데 홍길주가 살던 시대는 청언소품이 크게 유행해 글쓰기 방식마저 달라지는 바람에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지식인들을 윽박지르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분열과 갈등의 문장, 남들에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밝히는 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다기보다 딱하고 안타까운 글입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김광규의 시 ‘나’의 전문을 읽어봅니다.
“살펴보면 나는/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나의 아들의 아버지고/나의 형의 동생이고/나의 동생의 형이고/나의 아내의 남편이고/나의 누이의 오빠고/나의 아저씨의 조카고/나의 조카의 아저씨고/나의 선생의 제자고/나의 제자의 선생이고/나의 나라의 납세자고/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나의 친구의 친구고/나의 적의 적이고/나의 의사의 환자고/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나의 개의 주인이고/나의 집의 가장이다.//그렇다면 나는/아들이고/아버지고/동생이고/형이고/남편이고/오빠고/조카고/아저씨고/제자고/선생이고/납세자고/예비군이고/친구고/적이고/환자고/손님이고/주인이고/가장이지/오직 하나뿐인/나는 아니다//과연/아무도 모르고 있는/나는/무엇인가/그리고/지금 여기 있는/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는 무수히 많고, 모순되기도 하고, 다 아는 것 같아도 아무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더욱이 이걸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인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며 삽니다. “차가운 진실보다는 따뜻한 기만이 낫다”는 말도 갈등을 느끼게 합니다. 제도와 규율 때문이든 체면과 위신 때문이든 자신을 절대적으로 속이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나의 화해 또는 통일이며 나와 남의 조화입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군자는 남과 함께 어울리되 같지 않지만 소인은 남과 같은데 어울리지 못한다”는 논어의 말도 이런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이 나와 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겉과 속이 함께 빛나야 군자”는 나 자신의 조화와 균형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나는 남이 아는 나와 다르고, 내가 아는 남은 남이 아는 남과도 다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는 참 어렵습니다. 자기보다 큰 적은 없다고 합니다. 중국 송 나라 때의 보제(普濟)선사는 “나 말고 누가 나를 괴롭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 나를 망치는 것도 나입니다. 그러니 자기부터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논어에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나옵니다. 노자 도덕경 3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 데 불과하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남을 아는 것은 상대적 분별이지만 스스로를 아는 것은 절대적 자각입니다. 바로 이 절대적 자각을 탐색하고 궁구하는 것이 인류역사이며 사상사의 발전이 아니겠습니까?
한 해가 바뀌는 시점에는 누구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나온 일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삶을 위한 다짐에는 ‘자지자명(自知者明)’의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그런 자지자명의 반성으로 이제 ‘BML 칼럼’을 접으려 합니다. 2년 동안 서투르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날 인생 1막에서 인생 2막으로의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용도변경’이라는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통해 활기찬 후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용도변경’은 필자의 이름 ‘변용도’를 원용해 만든 단어다.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도(用途)와 한글 표기는 같다. 필자는 이 단어로 가족을 위한 그동안의 헌신적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또 생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두었던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47세의 조기퇴직, 금융위기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사진작가, 강사로 거듭나 현재는 인생이모작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손해보험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는 이후에도 보험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지금은 평생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오늘 들려드리려고 한다.
47세에 용도 폐기되다
필자는 대학교 졸업 직전 고려화재해상보험에 입사해 20년을 다녔고 촉망받는 직장인이었다. 20년 전에는 임원으로서 부산·경남 본부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말에 해임되었다.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 즉 용도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름에 빗대어 ‘용도폐기’되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금융위기(IMF)까지 닥쳐 재취업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밥벌이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다. 만화방으로 시작해 부대찌개 음식점까지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월 40만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 조경관리사로 취업해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회사 마당을 쓰는 마당쇠 역할도 했다. 일당을 벌으려 MBC 드라마 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퇴직 후 10년간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용도변경된 삶을 살기로 하다
필자의 나이 57세 때 두 친구를 갑자기 잃었다. 모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느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퇴직 후 잡다한 일을 하며 보낸 10년을 되돌아보았다. 분명 열심히 살았으나 세월만 쏜살같이 지나가고 내로라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두 친구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100세 장수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람 있는 후반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40,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후의 긴 시간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삶이었고, 타인을 위한 용도, 즉 타(他) 용도로 사는 삶이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인공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필자는 먹고사느라 오래전에 접어둔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꿈을 실현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사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언덕배기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꿈과 유사한 사진으로 바꾸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인생 2막의 길이었다.
60세에 늦깎이 사진작가가 되다
필자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웠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채화를 자주 그렸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직장에서 홍보 업무와 사보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흥미를 키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6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진을 배울 용기를 가졌던 것 같다. 2010년 7월, 필자는 고양시 무료사진 교실에 참여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초보자 솜씨에 카메라 장비 또한 콤팩트 카메라가 전부였다. 함께 공부한 다른 수강생의 고가 카메라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과 형편을 인정하고 사진 실력 향상에만 몰입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부터 공인 사진작가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인 사진작가 인증을 받으려면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이나 입상으로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이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 년에 스물여덟 번 응모해 절반을 낙선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1년 9월에 드디어 인증을 받아 공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해 국전에 입선했고 부산일보가 주최한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작품 ‘닭장’이 좋은 심사평으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사진 부문에서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으로 뽑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40만장을 찍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6년 4개월을 매일같이 사진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는 무려 40만장에 이른다. 역산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200여 장을 찍어야 나오는 숫자다. 어느 날은 파파라치로 오인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좌절과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몰입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4일에는 KBS 1TV 에 사진작가로 출연함으로써 삶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은퇴연금협회와 머니투데이 방송이 주최한 ‘The Senior 2016’에 사진 전시 초대를 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을 주제로 사진을 전시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는데 작품 모두가 팔려나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진을 바탕으로 명강사에 도전장을 내밀다
카메라를 들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짧기만 하다. 이제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카메라는 필자의 또 다른 친구다. 100세 장수시대가 두렵지 않다. 은퇴 전의 직업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결과가 됐다. 이후 필자는 사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영역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통한 여가관리의 모범적 사례가 되면서 그 경험을 배우려는 퇴직 예정자와 은퇴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62세에 또 다른 분야인 강사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여가설계, 변화관리 강사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보다 강사로서의 활동이 더 많아져 기업체와 국가 산하 인력개발원,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사회종합복지관 등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 SBS라디오 러브에프엠의 프로그램에 3년간 고정 출연, 토마토TV와 머니투데이 방송에서 특강, 한국직업방송 로 출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을 기회로 전환하는 ‘용도변경’의 삶이 성공의 핵심
필자는 사진작가, 강사로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제2직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전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과거를 내려놓고 현실을 인정하며 몸집 줄이기(다운사이징)로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 ‘용도변경’의 생활 방식이 성공의 핵심 역할을 해줬다. 뱀이 고통을 참으면서 허물을 벗어야 살아갈 수 있듯 환경 변화에 대한 꾸준한 자기 변신, 즉 용도변경을 통한 2차 성장은 인생 2막의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라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다.
베풀고 나누면서 다 쓰고 가리라
필자의 오늘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은혜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은혜에 보은할 할 때라 여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베풀고 나누는 사회공헌을 위해 또 다른 용도변경, 즉 ‘공(公)용도’를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의 하나로 두 권의 책, 와 를 출간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음을 느낀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필자의 소소한 경험담이 같은 길을 가려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저출산과 수명연장, 베이비부머의 은퇴로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 중인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은퇴는 한국 사회만의 특수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과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 9월 27일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열린 창조경제연구회(KCERN) 제29회 정기포럼 ‘고령화와 4차 산업혁명’에 참여한 각계 분야 패널들의 조언을 담아봤다.
첫 주자로 나선 이남식 계원예술대학교 총장은 ‘고령화 위기 진단’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며 이번 포럼이 지니는 의미를 강조했다. 이 총장은 “디자인 분야에 있는 사람은 사용자(실제 고객)와의 공감을 중요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니어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며 “실질적이면서 훨씬 더 폼 나고 위엄 있게 노후를 디자인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토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시니어 분야의 리더십을 발휘해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이번 포럼의 주최 측인 창조경제연구회의 이민화 이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이사장은 “지구온난화보다 더 심각한 것이 고령화”라고 언급하며 “속도는 빠르게, 질은 나쁘게 늙어가는 게 한국의 문제”라고 화두를 던졌다. 그는 KSM(KCERN Silver Model)을 제시해 고령화 현상 및 정책을 분석하며, 고령화 문제는 4차 산업혁명이 선행돼야 해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공유경제와 긱(Gig) 이코노미의 등장도 눈여겨봐야 한다. 긱은 일종의 소규모 밴드로 인력 매칭 직업의 종말과 프리에이전트의 등장을 의미한다”며 “미국의 긱 플랫폼, 일본의 클라우드웍스 등 사례를 참고해 한국도 시니어 프리랜서와 사내 기업가 양성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그는 끝으로 “초고령화 국가가 되기까지 10년 남았다. 만약 고령화가 선행된다면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O2O(Online to Offline)제도와 기술혁신 등으로 4차산업 완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두 발표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김일섭 aSSIT 총장의 진행으로 패널 토론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강시우 창업진흥원 원장은 “현실적으로 재취업이 어려운 은퇴자들은 대개 치킨집이나 편의점 등의 창업에 도전한다. 창업 경쟁이 과열되면 성공할 확률이 낮은데, 그보다는 기술창업 쪽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개인과 사회에 이롭다”고 제안했다. 그는 “현재 전국에 시니어창업기술센터가 23곳, 여기에 투입된 기업만 430여 개다. 이곳에서 중·장년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사업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하고 있다. 예산은 정부 보조금과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해 마련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시니어가 경제활동에 기여하고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소기업의 창업지원을 돕고 있는 박광회 르호봇 대표는 “시니어 세대와 주니어 세대의 협력을 통해 청년과 고령자 취업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협업 모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멘토 모델이다. 은퇴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청년 세대와 공유하고,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배워나가는 등 세대 간 융합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민간의 지혜와 집단의 지성이 존중되는 형태로 그들을 돕기 위한 정책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삼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대책 기획단 단장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며 은퇴자와 청년 세대 간 일자리 경쟁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단장은 “그동안 노인은 부양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지만, 고령화 사회에서는 경제의 주체가 돼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령자의 노동력을 저평가하는 연령 차별주의가 사라져야 하며, 시니어 스스로도 일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노후의 경제력 문제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유익한 삶에 대한 고민도 빼놓지 않았다. 노호성 웰니스IT협회&협동조합 부회장은 ‘맞춤형 행복 플레이팅 서비스’ 시장을 개척하고자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노 부회장은 “시니어 인력 활용에 대해 논의할 때 그들의 건강과 체력은 기본”이라며 “시니어의 체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젊은 세대와 차별화해야 한다. 가령 윗몸일으키기나 달리기 등은 그들의 신체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없다. 자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 기준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시니어의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제도와 서비스를 찾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해 각자의 형편에 맞게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재 이투데이 대표 겸 한국SR전략연구소 소장은 고령화 문제를 바라보는 언론인의 관점을 언급했다. 이 대표는 “저출산 고령화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컨트롤타워가 분명하지 않아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오갈 뿐”이라며 “고령화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책임감 있게 해결해나갈 주체가 필요하다. 연구소나 언론 등 객체의 역할도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보람찬 노후를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지, 사회의 큰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함께 고민해나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하이쿠(俳句)의 시성’으로 유명한 일본의 시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17자(5·7·5)로 세상과 인간을 노래하는 하이쿠를 바쇼는 언어유희에서 예술 차원으로 끌어올려 완성했습니다.
그는 삶의 자세에 대해 “자신의 길에서 죽는 것은 사는 것이고, 타인의 길에서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하이쿠라는 시는 사계절의 변화를 벗으로 삼는 것이다. 보이는 것 모두 꽃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 아닌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소나무에 대해 배우려면 소나무에게 가고, 대나무에 대해 배우려면 대나무에게 가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가 사는 방법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一所不在]는 방랑이었고, 그리 길지 않았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개별자 단독자의 고독으로 점철돼 있었습니다. 그가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듯 인간은 모두 단독자이면서 개별자입니다. 신 앞에서 단독자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유일하고 독립적인 개별자입니다. 개별자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독립체로, 보편자와는 정반대인 개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 죽음 이후를 모르는 채 혼자 죽어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덜기 위해 남들과 어울리고 공동체를 만들고 부부의 인연을 맺어 함께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 부부로부터 집안이 만들어지고 가족과 자녀가 형성돼 인간세상이 인멸되지 않고 전승돼온 게 아니겠습니까?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틀과 얼개를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평균적이고 대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자 개별자의 삶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남들과 맺어온 관계를 스스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단절한 채 혼자만의 삶을 이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상하고 묵은 관계의 지층 위에 새로운 관계를 쌓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말의 ‘홀’과 ‘홑’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아주 다른 말입니다. 홀의 반대는 짝이고, 홑의 반대는 겹입니다. 홀은 홀가분하다, 홀로서기처럼 여유롭고 당당한 뜻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홀아비 홀어미, 홀알(무정란), 홀앗이(모든 살림살이를 혼자서 맡아 처리하는 처지)처럼 외롭고 쓸쓸한 개념이 먼저입니다. 홀아비 홀어미는 홑힘(남의 도움이 없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홀아비 홀어미의 반대말은 핫아비 핫어미랍니다. 핫바지 핫저고리처럼 솜을 두어 만든 것이라는 뜻과 함께 배우자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결혼에 실패하거나 사별해서 홀아비 홀어미가 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른바 싱글이나 돌싱족이 점차 늘어나고 1인가구가 이미 500만 가구를 넘었습니다. 혼자 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관심, 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혼자 사는 자유로움과 홀가분함을 누리는 사람들보다는 고통과 고독 속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 데는 남녀간의 차이가 큽니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고 홀어미는 은이 서 말이다”라는 우리 속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늙어서 아내 잃은 남편은 어찌 살아가야 할지를 모릅니다. 친구도 없고 새로운 사람을 잘 사귀지도 못합니다. 이와 달리 여자들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으면 더욱더 편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 늙어서 남편이 없는 과부, 부모가 없는 고아,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이른바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해서는 일찍이 맹자가 말한 대로 나라와 정치지도자가 특별히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짝 없는 남자가 없는’ 이른바 내무원녀 외무광부(內無怨女 外無曠夫)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제왕과 통치자의 할 일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보복지 증대, 사회안전망 구축의 정치이겠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나라가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혼자 사는 삶을 잘 꾸려가도록 각 개인이 노력하고, 지역이나 사회공동체가 서로 돌봐야 합니다. 그 대상은 앞에서 이야기한 환과고독이 제일 먼저일 것입니다.
사람은 왜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일까? 성경의 예전 번역을 그대로 옮기면 창세기 2장 18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짝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독처(獨處)는 독거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왜 독처하면 좋지 않은 것일까? 짝 없이 혼자 사는 게 생리적 신체적 생활적으로 힘들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일이든 합심협력을 할 사람이 있어 함께 삶을 꾸려가는 것과, 북한 말로 혼자씨름(자기 혼자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재어 보는 일)을 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형영상조(形影相弔) 형영상련(形影相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척영(隻影)도 짝이 없는 오직 혼자인 사람을 일컫습니다. 의지할 데 없어 혼자 매우 외로운 사람은 그림자도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헨릭 입센은 희곡 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 속에서 홀로 선 인간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런 그럴듯한 문학적 수사와 철학적 사유와 달리 현실은 냉엄하고 각박합니다. “외로움이란/내가 그대에게/그대가 나에게/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시인 이형기(1933~2005)의 ‘그대’라는 시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마쓰오 바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마쓰오 바쇼로 글을 맺겠습니다. 병으로 쓰러진 그가 마지막으로 일어나 앉아서 쓴 하이쿠는 최고의 명편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가을 깊은데 이웃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 이걸 일본 발음으로 읽어봅니다. 아키후카키 토나리와 나니오스루 히토조. 쓸쓸한 가을의 정서가 입을 거쳐 몸 안으로 들어오는 듯합니다.
가을은 겨울로 가는 계절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는 것은 침잠과 저장 동면의 시기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온기가 그립고 이웃의 관심과 정이 절실해지는 계절이지요. 바쇼는 생이 이우는 마지막 가을에 이렇게 이웃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하고 떠났습니다.
이웃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무도 그렇게 주장한 바 없지만 이웃의 ‘이’에는 이승이라는 말처럼 지금 여기, 이곳이라는 뜻이 있는 것이라고 우겨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반대인 저웃도 있나? 그런 말은 있지 않습니다. 이웃이라는 글자 ‘隣(린)’은 가엾게 여긴다는 ‘憐(련)’과 사촌간입니다. 혼자 사는 삶과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