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명문장가로 이름 높던 이태준(李泰俊·1904~?)의 산문 중에 ‘책과 冊’이 있습니다.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로 시작되는 글입니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冊답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읽고 보고 어루만지는 사물이며 존재인 冊은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제왕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대에는 대나무를 잘라 다듬어 글씨를 썼습니다. 불로 쪼여 수분을 빼고 푸른색을 없앤 대나무에 글씨를 쓴 다음 끈으로 꿰어 차례를 맞춘 것이 冊입니다. 하나씩 알맞게 묶음을 만드는 작업을 編(편), 그 묶음의 구분을 篇(편), 이를 말아서[捲] 보관하는 것을 卷(권)이라 했습니다. 책보다 冊이 좋다는 말은 책을 만드는 과정의 정성과, 책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인간과 책의 관계. 책의 효용성과 가치를 일깨워주는 명언입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지만, ‘이’가 ‘은’보다 말의 취지를 더 잘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을 펼치면 이롭다”[開卷有益] “남자는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男兒須讀五車書] 등 독서를 권장하고 책을 소중히 여기라는 금언 격언은 수없이 많습니다. 독서를 통한 보상과 출세에 관한 말도 참 많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책에 대해 중국인들은 ‘세 가지 바보’[三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책을 빌려달라는 것도 바보, 빌려주는 것도 바보, 빌린 책을 되돌려주는 것도 바보”라는 거지요. 고대 중국에서는 책을 빌리거나 되돌려줄 때 ‘쌍치’라는 가죽자루에 술을 담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빌릴 때 한 번, 돌려줄 때 한 번, 그래서 ‘쌍’입니다. ‘세 바보’라는 말을 생각하면 책을 돌려받은 사람이 오히려 고맙다고 술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격언에는 “돈은 빌려주지 않아도 되지만 책은 빌려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빌려주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간의 문제보다는 지식의 공유, 사회 전체 공공의 이익을 더 중시해서 그런 거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소중한 책을 언제까지나 소유 보유할 수 없는 게 고민입니다. 개인이든 기관이든 더 이상 책을 둘 공간이 없는데 ‘이 책 다 어찌하나’ 하는 것이지요. 토머스 제퍼슨은 “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방에 책이 없는 것은 몸에 영혼이 없는 것”이라고 했던 키케로는 “가진 걸 다 버려야 살 수 있다면 차라리 책더미 속에서 죽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퍼슨이나 키케로인들 책을 전혀 버리지 않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버린다는 말은 아예 재활용되지 않게 쓰레기로 만든다는 뜻도 있지만 남에게 주는 것도 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는다는 희사(喜捨)라는 말에 버린다는 ‘捨’가 들어 있습니다. 捨는 舍라는 글자와 통용되고 서로 넘나드는데, 舍는 집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이므로 무엇을 버리는 것은 집에서 내보낸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은 일생을 사는 동안에 많은 책을 읽게 됩니다. 삶의 단계마다 읽어야 할 책이 있고, 해야 할 공부가 있습니다. 그 말은 단계별로 정리하고 익힌 다음 버려야 할 책이 있고, 졸업해야 할 공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나 그때 읽은 동화 만화는 추억의 자료이긴 하지만 책으로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그런 걸 용케 잘 보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학교교육이나 학령에 관계된 책은 그렇다 치고 다른 책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10대 시절에 만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새롭고 그때의 그 책이 새로운 말을 들려주는데, 손때가 묻은 소중한 재산인데, 갈수록 새 책은 늘어나고 헌 책은 둘 곳이 없고... 그래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커지게 됩니다.
평생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살아온 교수들은 정년 무렵이 되면 책 때문에 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무나 가져가라고 연구실 밖에 내놓아도 글자가 작고 세로짜기로 된 책은 인기가 없습니다. 낡은 책을 탐내는 학생들은 없습니다. 자식에게 물려주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공공기관에 기증하려고 전화를 하면 귀찮아하거나 차로 실어다 달라고 해 그것도 어렵습니다. 마지못해 받아준 곳도 나중에 가보니 책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근으로 달아 폐지로 팔았는지 알 수 없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 작가 박경리의 유고시집 제목은 입니다. 그러나 버리는 일은 그리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정리하는 일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디지털 공간에 저장하고 책을 버린다는 사람도 있고, 표지만 사진으로 찍어 보관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겠지만 앞서 말한 이태준 식 사고로는 책이라는 사물을 그렇게 보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버리는 걸 ‘다시 채우기 위한 버리기’라고 말합니다. 낡은 책을 버리고 새 책을 들이기 위해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그것은 젊은 독서인들의 이야기이지 이제는 쌓고 더하기보다 덜어내고 헐어내야 하는 시니어들의 책 정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기준으로 책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1)내용이 좋은가 2)시대를 뛰어넘는가 3)다시 읽을 것인가 4)표지만 보고 있어도 좋은가, 이런 것입니다. 이 중 시대를 뛰어넘느냐의 문제는 그때도 옳았고 지금도 옳은 내용인가, 앞으로는 어떨까를 따져본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 네 가지를 세상살이와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남에게 1)좋은 사람인가 2)시기와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사람인가 아닌가 3)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인가 4)직접 대화하지 않고 카톡이나 전화번호부의 이름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나는 바로 책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 대상이라는 점을 책 버리는 일을 계기로 생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게 역시 책입니다. 진정한 장서가들과 비교하면 턱도 없이 적지만, 그래도 이사할 때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책의 분량과 무게입니다. 그래서 앞에 인용한 사람처럼 책마다 네 가지 기준을 들이대며 한창 일부러 꼬나보고 있는 중입니다.
책을 버리는 사람도 책을 빌려주거나 돌려주는 사람처럼 바보일까요? 버릴 책을 고르는 일은 삶과 숨을 가다듬는 ‘생각 고르기’와 마찬가지라고 믿고 싶습니다. 책 속에도 길이 있지만 책 밖에도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虎死遺皮人死遺名(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을 소중하게 여겼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다. 인간의 수명이 크게 늘고 있다. 건강 수명도 그렇다. 100세 장수 시대에서 건강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세계인구의 평균 수명이 120세가 될 날도 머지않았다 예측한다. 노후에 주어질 한가한 시간, 여가가 많이 늘어난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노후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후 여가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한 준비의 필요성이 화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변화를 싫어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작심삼일이 그 반증이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이유다. 그렇지만, 은퇴 후 4~50년의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기에 여가관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안이다.
과거의 갑옷을 벗지 않고
준비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재무준비에 치중했다. 은퇴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 마련이 그 중심이었다. 경제적 준비도 선결 과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나긴 노후의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느냐이다. 필자(66세)와 5575세대는 삶의 우선순위가 자식을 키우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 세대가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답습해왔다. 자신의 삶은 늘 뒷전이었다. 자식에게 보상받기를 원해서가 아니고 당연한 부모의 책임으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았다. 자식의 성공은 곧 자신의 즐거움이었고 영광이었다. 자식 농사라고 하였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 삶을 살았다. 정년까지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리 많지 않은 노후 시간을 보내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년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수명이 늘어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급격한 노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경제부분과 마찬가지로 노후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여가생활 준비 역시 대부분 하지 못하였다. 직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었다. 이웃을 살펴보아도 은퇴를 한 사람의 대부분이 하릴없이 하루를 지루하게 보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도 하고 영광스러웠던 과거에 사로잡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글쓰기는 시간 관리에 좋고 삶의 흔적을 남겨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니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원제도가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 눈만 돌리면 나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수없이 많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다. 필자가 현재 사는 곳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아파트 이웃에 살던 94세 할아버지는 아파트 정원의 공간을 이용하여 텃밭을 가꾸며 노후를 즐겁고도 건강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런 작은 일도 여가를 잘 보내는 방법의 하나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고 도전하지 못할 나이가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필자는 그런 노후생활 준비의 하나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투데이’ 경제신문의 자매지 ‘브라보마이라이프’의 기자로 활동 중이다. 유어스테이지라는 포털사이트에 9년 전부터 블로그를 개설하여 거의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고 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우수 블로그에 선정되기도 하여 두서너 군데 홈페이지의 기자로도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적은 금액이지만 원고료도 받는다. 취미 활동이 용돈도 버는 소일거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써 놓은 글을 정리하여 수필집 두 권을 출간하였다.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와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것이다. 노후 생활과 사진 촬영에 관해 써 놓은 글을 정리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글쓰기는 여가를 무료하지 않고 보람 있게 보내는 방법의 하나고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의미 있는 일이다.
올해 8월은 참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불타는 해가 쇠를 녹인다’는 글귀가 실감될 만큼 폭염이 혹심했고, 밤에는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리우올림픽까지 열려 12시간 차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잠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계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9월, 글 읽기 좋고 잠자기 좋은 계절입니다. 원래 글과 잠은 상극인데,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자연질서와 그 변화가 오묘합니다. 졸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까지 흐르도록’ 열심히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성취하려 하거나 남보다 앞서고 싶은 사람은 잠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잠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거나 발명왕 에디슨은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잤다는 이야기는 효율적인 잠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남들보다 덜 자고 남들보다 더 일한 아침형 인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잠꾸러기의 날’인 7월 27일,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다나 호수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풍습은 잠과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하루를 함께 시작하자는 독려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 안면(安眠) 정면(靜眠) 쾌면(快眠)이며 게으르게 잠만 자는 타면(惰眠), 노곤해서 잠을 많이 자거나 계속 조는 기면(嗜眠), 잠이 잘 오지 않는 실면(失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不眠)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꾼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취면(醉眠) 습관도 경계해야겠지요. 흔히 “잠이 보약”이라거나 “잠이 약보다 낫다”(Sleep is better than medicine.)고 말합니다. 건강 장수에 중요한 것 세 가지로 쾌식 쾌변과 함께 쾌면을 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1931~2015)의 ‘잠을 기리는 노래’는 5개 연으로 이루어진 제법 긴 시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라 잠이여, 목숨의 자양이여, 한껏 부드러이/씨거운 살의 목마름을 풀어주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감로수./너를 마셔야 피가 잘 돌아/슬픈 연인들이 얼싸안은 팔다리엔/진한 모란의 향기가 흐르고,/아기들은 자라나니 너의 품 속에서,/밤에 자라나는 식물들처럼./또 새우등의 늙은이에겐/백발을 하나 더 늘게도 하나,/미래를 점치는 슬기의 꿈을 베풀기도 하는 너,/잠이여 오라.’
잠은 휴식이면서 평화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1897)에는 사막에 누워 잠든 집시여인과, 여인이 죽었는지 자는지 살피는 사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의 부제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고 썼습니다.
누구든지 잠자는 모습은 평화롭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파 방정환은 잠자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의 ‘어린이 예찬’을 읽어 봅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중략)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중략)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에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잠은 망각이기도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해 질 무렵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이 든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파우스트는 이 잠을 통해 제1부에서 저지른 잘못과 양심의 가책을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잠은 망각을 통한 치유와 갱생의 잠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가 신생을 맞는 계기로 잠과 망각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설정했습니다. 치유와 갱생을 얻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영면(永眠)은 곧 죽음입니다.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은 20년 동안 잠을 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시절 사냥하러 산에 갔던 사람이 이상한 경험을 한 후 낮잠을 한숨 자고 마을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세상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통령의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제국주의 영국의 몰락을 뜻한다는데, 어쨌든 립 반 윙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크게 뒤떨어진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우리 속담에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게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웅소설 <소대성전(蘇大成傳)>에 자신을 알아주던 승상이 죽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모든 일을 폐하고 잠만 자는 데서 파생된 말입니다. 소대성은 시련을 딛고 도술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잠은 립 반 윙클의 잠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예비하면서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수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모신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낮잠은 유비의 인물 됨됨이와 자신에 대한 성의를 재보기 위해 미리 계획된 행위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떻게 잠을 자고 무슨 꿈을 꿀 것인가. 청년에게는 청년의 왕성한 잠과 화려한 꿈이 있고 시니어들에게는 또 그들과 다른 잠과 꿈이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건강과 휴식입니다. 중요한 만큼 더욱 더 잘 계획되고 정리돼야 합니다. 짧고 깊게, 혹시 길더라도 깊게 자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해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끝납니다. 불의에 항거하면서 위선 앞에서 당당하고 진리와 진실을 덮는 권력에 떳떳한 인간의 절대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읽고자 합니다. 유치환의 ‘바위’는 시니어들의 삶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짧고 깊게, 꿈꾸더라도 노래하지 않고 평안하게 새로운 계절 가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이투데이 뉴스 화면에 관심 가는 기사가 떴다. 바로 우리 동네 경전철 이야기이다.
‘난항 겪는 서울 경전철, 우리 동네 경전철 어디까지 왔나?’라는 제목으로 위치를 보니 필자가 사는 동네를 지나는 우이~신설동 노선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북한산 국립공원이 있는, 서울에서도 개발이 덜 되고 자연적 환경이 좋은 곳이다. 이곳은 풍치지구로 지정되어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주변 환경보호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개발이 안 되니 아마 강남의 어떤 곳처럼 집값이 폭등하는 일은 절대 없을 동네이다.
몇 년 전 온 동네가 들썩이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 동네 코앞에 경전철이 생긴다는 뉴스였다. 우리 동네는 강남 어느 곳에 비해 집값 땅값이 매우 저렴한 곳인데 당시 이 일로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 아들의 결혼을 대비해 집을 구하는 중이었는데 경전철 소식으로 필자는 막차를 타서 평소보다 매우 비싸게 아파트를 장만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경전철 앞에 위치하진 않지만, 경전철로 인해 편리해질 교통으로 역세권에 든 이곳에 집값 상승이 있었던 것이다.
경전철이 지나는 역이 될 장소엔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커피집이 생기고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좁은 도로에 공사가 시작되어 매우 혼잡하고 시끄러웠는데도 아마 공사 후의 상권을 생각하고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예정대로 공사가 끝나지 않으니 커피숍은 문을 닫았고 지금은 프랜차이즈 돈가스 집과 유명브랜드 치킨집이 깔끔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이 가게들도 경전철 개통 후의 프리미엄을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을 출발해 수유동~미아동~정릉~돈암동~보문동을 거쳐 신설동에 이르는 10.7㎞ 구간의 경전철은 소형 객차를 2~3량만 이어 운행하는 일종의 '미니 전철'이다. 대형 객차를 6~10량 연결해 운행하는 기존 지하철보다 건설비와 운영비가 적게 들어서 교통 병목 지역이나 특수 목적의 산업. 주거 단지 등 수송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전철이 꼭 필요한 구간에 주로 설치된다고 한다.
서울시에서는 지하철이 멀고 도로가 좁아서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취약지구로 꼽히는 이 일대에 신교통수단인 지하 경전철을 도입해 교통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우이~신설 경전철은 서울시 최초의 경전철로서 완성되면 우이동 지역에서 도심까지의 접근이 편리해짐은 물론 소요시간도 많이 단축될 것으로 예상한다. 서울시는 기존 4호선 성신여대 입구 역, 6호선 보문역, 1호선과 2호선 신설동역에서 환승이 가능하여 기존 지하철의 이용 효율성을 더욱 높일 것이고, 수요의 분산으로 출퇴근 시 혼잡한 지하철 4호선의 이용 불편도 많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도 경전철 개통 후의 기대감으로 복잡한 공사현장을 몇 년째 참는 중인데 도무지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몇 번의 공사 중단 끝에 올 9월엔 개통식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도 들렸었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끝났어야 하는 공사가 서울시와 사업자 간에 이견이 있어 자꾸만 늦춰진다고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잘 마무리되어 빨리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역 주변은 산뜻하게 변모할 테니 우리 동네가 한층 깔끔하게 발전할 것이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홍재기 동년 기자가 ‘40대, 판을 바꾼다’는바꾼다’는 책을 냈다.
책의 핵심 메시지는 ‘‘40대 인생 기디자인(re-design)이리디자인(re-design)이 왜 필요한가'다. 40대가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10년 후 삶이 윤택해질 수윤택해 질 수 있도록 ‘변화있도록 ’변화, 선투자˅ ‘를선투자’를 제안하고 있다.
먼저 시중에 나와 있는 40대 자기계발서, 실용서는 감성적 조언이나 추상적 성공담이 대부분인데, 실제 마음 깊이 와 닫지 않는다는않는 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40대 내면의 에너지를 끄집어내는 서적을 찾기가 힘든 상황이고, 공감할 수 있는 40대만의 서적은 더더욱더 더욱 그렇다. 가슴 속 깊이 숨겨 있던 자신의 목표를 발견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책을 기다려 왔다면 이제 ‘40대, 판을 바꾼다’가 상당히 공감을 얻을 것이라 본다.
실질적인 것과 현실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평범한 저자 자신의 삶을 접목하여 독자의 눈높이에 다가갔다. 책 제목도 40대가 지어 주었다. 어떻게 스스로 변화를 주도할까? 어떻게 나답게 살까? 어떻게 똑똑하게스마트하게 변할까? 누가 먼저 그런 길을 가고 있을까?
이런 갈증을 해소하고, 40대가 미래를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기계발서가 시대적으로 절실히 요구됐고,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은 기존 책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이투데이 신난다 내 삶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 기자로동년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사, 칼럼을컬럼을 통해 40대를통해 40대를 위한 핵심 콘텐츠를 발굴하였다. 물론 동년˅ 기자들의동년기자들의 협력, 격려가 없었으면 이 책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필자 사진 작품이 전시된다. 머니투데이 방송과 (사)은퇴연금협회가 주관하고 서울시와 서울50플러스재단이 후원하는 'The senior 2016'와 함께 열리는 '시니어만남전'에 초대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이라는 주제로 필자의 사진 작품 10점이 행사장에 전시된다. 수채화 풍의 사진 10점을 가로 세로 크기 13 x 10, 10 x 10 인치 정도의 사진을 넣어 MDF액자로 만들었다. 이 행사는 2016년 7월 25일 오후 1시 30분부터 4시까지 서울시청 8층 대형 다목적 홀에서 진행되며 사진, 그림, 시니어용품, 재활용품 전시 등의 관람은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리고 강연이 끝나는 시각부터 할 수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The senior 2016”은 선진국의 시니어 생활의 흐름을 알아보고 시니어 친화산업의 선진화 내용과 서울시 시니어 정책 및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50+세대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개최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축사와 최남수 머니투데이방송 사장의 인시말로 행사를 시작하게 된다. 경희대학교 정기택 교수의 “50+세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니어 친화산업의 선진화” 발제와 제품 분야와 서비스 분야의 선진 사례발표도 있습니다. 사례발표로는 50플러스코리안의 건강한 삶을 위한 고령친화제품, 서비스 분야에선 성균관 대학교 손정현 교수의에 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울러 서울 50+재단 홍선 실장의 “서울시 시니어 정책 및 제도” 등의 발제로 2시간 동안 열린다.
부대 행사로 시니어만남전이 곁들여지는데 후반생에 자아실현을 통하여 인생이막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는 시니어 사진작가 포토스토리텔러 변용도의 사진전, 갤럭시 화가 정병길의 디지털 그림전, 50플러스코리안의 시니어 관련용품과 렛츠의 업싸이클링(재활용) 용품이 전시된다. 현장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 이 행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당일 오후 1시부터 입장할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2호선 시청역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수채화 같은 사진을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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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와 카페 운영과 각종 SNS 활동에 집중하는 평화사랑 성경애의 ‘‘미니 자서전’’을 적어본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건강 때문에 일찍 퇴직하면서 시작한 사업에 실패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일찍 철이 들어 동네 아이들 과외선생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게 됐고 대학 시절까지 모두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다 해결한 의지의 한국인이 필자다.
처음에 블로그 만들 때 블로그 이름이 ‘평화사랑 전 과목 블로그’’였다. 초중등학생 전 과목 과외 선생 노릇을 했던 것을 기억해 그렇게 지었다.
그 와중에도 노래는 좋아하여 숭의여고 시절 합창단 활동을 하였다. 아침에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가고 점심은 미리 알아서 먹고 점심시간 시작 5분안에 음악실로 모여서 연습했던 갓이 여고 시절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다시 짓기 전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합창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준 공연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때는 얼마나 귀한 시간, 아름다운 시절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안타깝다.
졸업 후 학자금 모아서 숭의여전 보육과와 경기대행정학과를 나오고 나니 이미 나이가 들어서 결혼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실 서울예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성삼문 집안에 딴따라가 웬 말이냐고 반대하여 포기했다. 난 연예인 끼가 있다. 그때 우기고 갈 것을 하는 맘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마추어 영화 전문가분들과 모이고 있고,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동네 통장 10년을 하고 아파트부녀회장도 지내는 등 주변을 돌아보는 봉사활동 열심히 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기업체 주부모니터를 하게 되었다. 기업체는 기혼 여성직원이 있지만 그들에게서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의견도 있어 일반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물건에 대한 의견을 모니터링 하는 데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미니 자서전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기업체에서 발대식하고 위촉장을 받은 것만 33개 정도 되었다. 임기가 1년에서 짧아도 참여한 세월이 있어 위촉장이 꽤 쌓인 것이다. 거기에다 활동우수상, 수상표창장까지 상당히 많아서 거실 가득히 깔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는 맘이 든다.
필자는 열성적으로 살아왔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달에는 뭔가 무료교육을 받는 것 좋아하고 비용이 들어가도 발전적인 항목이 있으면 배우기를 즐긴다. 네이버 밴드와 네이버 카페, 각종 카톡방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까지 이웃이나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분들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1 년 이상 네이버 자회사 시니어 기업인 에버영코리아라는 곳에서 밤 근무한 경험도 있다. 밤에 근무하던 어느 날 칸칸이 처진 내 모니터와 키보드와 마우스밖에 없는 그곳에서 필자는 빅뱅의 ‘루저’를 들으면서 눈물이 쭈르륵 흘렀다. 루저의 뜻은 loser와 user의 합성어. 무엇을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즉, 어찌할 바를 모르는 초보자 내지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루저’의 가사는 이렇다. ‘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솔직히 세상과 난/어울린 적 없어/홀로였던 내겐/사랑 따윈 벌써/잊혀진 지 오래/저 시간 속에/더 이상은 못 듣겠어/희망찬 사랑 노래/너나 나나/그저 길들여진 대로/각본 속에 놀아나는/슬픈 삐에로/난 멀리 와버렸어/I’M COMING HOME/이제 다시 돌아갈래/어릴 적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하늘보다 땅을/더 바라보게 돼/숨쉬기조차 힘겨워/손을 뻗지만/그 누구도/날 잡아 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반복되는/여자들과의 내 실수/하룻밤을 사랑하고/해 뜨면 싫증/책임지지 못할/나의 이기적인 기쁨/하나 땜에 모든 것이/망가져 버린 지금/멈출 줄 모르던/나의 위험한 질주//이젠 아무런 감흥도/재미도 없는 기분/나 벼랑 끝에/혼자 있네/I’M GOING HOME/나 다시 돌아갈래/예전의 제자리로/언제부턴가 난/사람들의 시선을/두려워만 해/우는 것조차 지겨워/웃어보지만/그 아무도 날/알아주질 않네 /I’M A/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저 하늘을/원망하지 난/가끔 내려놓고 싶어져/WANT TO SAY GOOD BYE/이 길의 끝에/방황이 끝나면/부디 후회 없는 채로/두 눈 감을 수 있길/LOSER 외톨이/센 척하는 겁쟁이/못된 양아치/거울 속에 넌/JUST A LOSER/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더러운 쓰레기/거울 속에 난 I’M A/LOSER/I’M A LOSER/I’M A LOSER/I’M A LOSER
다시 젊은 시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할 집안 형편이 아니어서 대충 포기한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지 모른다.
요즘은 동영상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접목하기 위해 배우러 다니고 있다. 노력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는 필자는 자신도 궁금하고 기대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칠 때도 있다. 그러나 우울하게 다운되면 한도 없는 게 인생이다. 키도 작고 몸무게는 표준보다 많이 나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인데 루저가 안되려고 노력하다 여기까지 왔다.
자식이 낳아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어떤 제츠추어로도 표한 적이 없는데 필자 부부 맘대로 낳았기에 그 아이들에게 힘이 못될망정 짐은 되기 싫다. 그래서 열심히 산다. 이유는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오늘을 더 열성적으로 살아가려고 다시 마음을 다져 잡는다. 그러니 다가올 인생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플랜트커피에서 커핑수업
M.I커피: 라떼아트
2급바리스타: J클래스학원
1급바리스타: 훈스랩아카데미
커피지도사2급+홈카페마스타 (브루잉마스타2급) : CBS문화센터
커피지도사1급 : 서울바리스타학원
강사/커피지도사 워크숍 수료
그외 루소랩이나 어라운지, 커피미업 김동완씨에 수업받은 경력이 있고 계속 커피를 배우는 중이다. 언제가 장점을 따서 커피아카데미카페를 만들고 싶다.
한국커피협회 1,2급 커피지도사/바리스타1,2급 취득
유럽 바리스타
SCAE(Speciality Coffee Association of Europe)자격증
SCAE Foundation /SCAEIntermediate/SCAE Professional
아이로봇 룸바 서포터즈(로봇청소기),
CJ홈쇼핑심미안(생활팀 2회, 디지털팀1회, 뷰티팀 1회)
: 참고로 한 번 활동하기도 매우 어려운 전설의 모니터 활동
중앙일보 리포터 3번 연임 후 명예리포터 활동, 중앙일보 명예통신원 회장
AVING코리아 객원기자, 구로소식지 기자 , 구로구인터넷방송 명예기자
uasis웹진기고, 아줌마닷컴 1기 기자단장 및 기사제공이나 아이디어 제공
다양한 기업 및 관공서의 패널, 서포터즈, 모니터, 주부모니터와 리포터:한국전력 패널, 국민보건보험공단, 서울시 모니터, 서울시 블로거, 도시철도공사 등
대한민국영화대상 일반심사위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 파트너즈 시니어 리더 4기
은퇴 후 생산적인 인터넷활용 강사: 블로그와 SNS
네이버 자회사 에버영코리아 업무 경험, 2014 2015년 서울 카페쇼 홍보대사
LG 서포터즈, 삼성 카메라 WB5000 체험단, 삼성하우젠 제로에어컨 체험단
프레소 스마트로스터기 체험단, 가찌야클래식 커피머신 체험단,어라운지서포터즈
세일즈커피 서포터즈, 마일커피로스터스 온라인 서포터즈,
웰크론 온리빙 마케팅팀서 활동
이투데이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단
홈앤톤즈(삼화페인트 프리미엄급 페인트) 마케팅팀
프레소 서포터즈1기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모니터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인생이막에서 자주 등장하는 핵심단어는 ‘자아실현’이 아닐까? 나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투데이 월간 자매지 “제2인생의 동반자 BRAVO my life”란 이름 속의 “my life’도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지 싶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주인공은 나지만, 대체로 전반생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중심에 두고 살아왔다. 물론 그 타인 속에는 가족이 크게 차지한다. 가족을 위하여 살아왔음이다. 인생일막의 삶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것이 곧 자기의 행복 기준점이었다. 정년을 맞거나 은퇴하게 되면 삶의 방향을 타인을 위한 삶에서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선회하려고 한다. 생업으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꿈이나 하고 싶은 일을 이루는 시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자아실현이다. 매슬로의 다섯 가지 욕구 중에서 최상위에 자리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 공감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순이다. 하위 욕구들이 충족되고 개인적으로 안정하게 되면 더 나은 나를 위하여 자신의 적성에 맞는 취미나 특기를 개발하려 한다. 그것이 곧 자아실현인 셈이다.
인생이막의 첫 번째 희망으로 자아실현 욕구가 다가선다. 후반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주제로 이야기하게 되면 대체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자아실현이다. 먼저 살다간 많은 분도 그런 측면에서 후회하곤 했다. 일본의 호스피스 한 분이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죽음을 앞에 둔 환자 1,000명도 그랬다. 임종을 맞으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했다. 눈에 크게 띄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던 일”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이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후반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지혜이지 싶다.
그래서 인생이막은 나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무게가 실린다. 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삶일까? 이런 분이 실제 있었다. 인생일막을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주변의 박수를 받으며 정년 퇴직하였다.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뒷전에 미뤄두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려고 별도의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집에서 나왔다. 이곳에서 숙식도 하며 혼자서 지냈다.
집에는 필요한 때에 간혹 들렸다. 서예도 배우고 색소폰도 불고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이것저것 마음껏 하였다. 집안일은 아예 신경을 끊었다. 집에 있는 안사람이 강력하게 항의하여도 들은 체 만체했다. 아내는 단단히 화가 났다. 두고 보자며 벼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 동안 가족을 위해서 헌신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라며 버티고 있다. 과연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일까?
나 자신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과연 나 혼자를 의미하는 것일까? 후반생에 있어서 “나”라는 의미 속에는 배우자가 포함되어 있다. 고리타분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부부를 동심 일체라 한다. 나를 위한다는 의미에는 당연히 배우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생각이지 싶다. 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부부가 함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인다. 함께한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전반생에 가족을 위하여 헌신해 왔지만, 따져 보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은 사실 많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지금처럼 친구 만나는 시간, 잠자는 시간, 텔레비전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인생이막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일의 중심에는 끝까지 함께해야 할 배우자가 있음을 지나쳐선 아니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