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인 순간에, 위기의 순간에 듣는 힘이 되는 조언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이런 상담자의 역할을 과거에는 형제나 가족, 이웃 등이 맡아왔지만, 핵가족화와 이웃 간의 교류 단절 등 달라진 환경으로 대체할 대상이 필요해졌다. 이 역할을 최근에는 상담사, 카운슬러, 상담심리사 등으로 불리는 인력들이 담당하고 있다. 기업의 생산현장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산업카운슬러는 최근 시니어의 새로운 직업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1월 산업카운슬러를 신중년 적합직무로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이 분야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업카운슬러라는 직종을 낯설어하는 이도 많겠지만, 이 직업이 생긴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업계에선 산업카운슬러의 기원을 1924년 미국에서 진행된 호손실험에서 찾는다. 하버드대학교 연구진에 의해 노동자에 대한 물질적 보상 방법 변화가 생산성을 증진시키는지 알아보기 위해 진행된 이 연구는 노동자의 심리상태나 인관관계의 중요성을 깨닫는 단초가 됐으며, 산업 현장에 카운슬러가 배치되는 계기가 됐다. 이때 활동한 카운슬러가 최초의 산업카운슬러(Industrial counselor)로 평가받는다.
국내 노동운동 늘면서 도입돼
산업카운슬러가 활성화한 대표 국가로 일본이 있다. 일본은 195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의 관리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각 기업에서 카운슬링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재 활동 중인 산업카운슬러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 산업카운슬러 도입이 시도된 것은 노조설립 등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1980년대부터다. 노동운동 발생 이유나 노동자의 요구사항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이뤄진 것이 계기가 돼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어 1988년 1월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가 설립됐다.
산업카운슬러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산업 현장에서 활동하는 근로자가 겪는 심리적 갈등이나 고충,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상담가다.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는 이러한 역할을 크게 3가지 프로그램으로 세분화해 정의한다.
첫 번째는 근로자 상담지원 프로그램이다. 근로자가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직무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가정불화 등 개인적인 문제까지 상담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톱는 역할이다. 두 번째는 커리어 개발지원 프로그램이다. 근로자의 경력과 적성, 재능을 고려해 능력개발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마지막 조직문화 개선 프로그램은 사내 직원 간 인간관계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해주는 상담이다.
현재 정부는 근로복지기본법 제83조를 통해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전문가 상담 등 일련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근로자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주로 상담과 교육 두 가지 역할이 핵심이다. 상담의 경우 기업 내 초년생의 적응을 돕고 업무에 대한 동기부여를 유도한다. 적응한 인력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상담을 해주거나 세대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기업에서의 상담은 철저하게 익명으로 진행된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상대의 지위나 이름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된다. 근로자들이 상담 내용이 알려지는 것에 예민해하기 때문이다. 기업카운슬러들은 근로자들이 직장 내 인간관계나 업무상 고충보다는 부부관계나 자녀 등 가정사에 대한 상담을 주로 요청해온다고 이야기한다.
시니어 제2인생에 딱맞아
산업카운슬러가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상담을 하려면 회사 조직이나 업무 프로세스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개인적인 고민까지 들어주고 지원해줘야 하므로 인생의 경험도 지식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양순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 원장은 “시니어는 신체적으로는 노화를 겪고 있지만 경험과 경력, 지혜를 갖추고 있어 근로자의 정신적 건강을 담당하는 산업카운슬러로서 적합하다”고 설명하면서 “최근 정부에서도 신중년 적합직무로 고시하고 고용장려금을 지원할 정도로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업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는 6월에 노사발전재단과 MOU를 통해 신중년 평생현역활동을 위한 생애경력설계와 일자리 발굴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학력 등 자격 취득 문턱은 높은 편
그렇다면 산업카운슬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를 통해 민간 자격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협회 자격은 1급과 2급으로 나뉘는데 1급은 석사 이상 혹은 그에 준하는 경력자로 6개월간 180시간 이상의 교육과 임상전문실습을 거쳐야 심사에 지원할 수 있다. 2급은 학사 이상으로 6개월 120시간의 교육과 임상일반실습을 거쳐야 취득할 수 있다. 일반적인 민간 자격에 비해 꽤 까다로운 수준이며 실제로 국내 1급 자격 보유자는 8월 현재 350명에 불과하다. 매년 배출되는 인원은 10여 명에 불과하다. 2급 취득자는 총 2850명.
협회 관계자는 “2급은 현직 회사원으로 재직하며 사내에서 카운슬러로 활동하기 위해 취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1급은 기업 임원이나 전문직 출신자들이 전문 카운슬러로 활동하기 위해 취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1급 자격 보유자는 시장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 대부분 현역으로 활동 중이라고.
물론 기업에서 산업카운슬러로 활동할 때 이 자격이 필수조건은 아니다. 한국상담심리학회가 부여하는 상담심리사 자격증이나 한국상담학회 등의 자격을 통해 관련 경력을 쌓아도 기업의 의뢰를 받는 경우가 있다.
업계 관계자들이 관련 협회를 통한 자격 취득을 권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에서 산업카운슬러를 채용할 때 협회를 통해 추천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인 국가자격이 없는 상황 하에 업계에서 인정받는 자격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사전 조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용은 일반적으로 계약직 채용으로 이뤄진다. 근무일이나 근무시간은 천차만별. 회사에 따라 5~6시간에서 더 짧게 일하는 경우도 있다. 근무일도 주 1~2일에서 5일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고용 조건이 파트타임 근무를 선호하는 시니어에게 적합하다고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다.
임금은 시간당 3만~5만 원 수준이다. 경력에 따라 더 높아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채용이 협회나 학회를 통해 이뤄지다 보니 회사에서 지급하는 금액에서 수수료를 떼어줘야 한다. 폐쇄적인 시장 특성 때문이다. 현직 산업컨설턴트 중에선 “비용이 아깝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심리검사 비용, 보수교육 등 기관을 통해 지원받는 부분도 있어 큰 손해는 아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한 산업카운슬러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평생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고, 상담이나 교육 증 선택해 전문화한다면 상근직뿐만 아니라 프리랜서로도 활동 가능하기 때문에 시니어가 노려볼 만하다”고 평가했다.
옷값이 싸다 보니 옷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멀쩡한 옷도 집안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내다 버린다. 그런데 옷 만드는 과정을 보면 옷을 허투루 대할 수 없다.
옷은 먼저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 디자인에 맞는 옷감도 골라야 한다. 원단 직조, 염색, 디자인 과정을 거친 후 패턴을 뜬다. 본을 뜬다고도 한다. 그 패턴대로 옷감을 자른다. 재단된 옷감은 재봉틀로 봉제한다. 그다음 주머니, 단추, 지퍼 등을 달아준다. 마지막으로 다리미질을 하면 옷이 완성된다.
지금은 봉제 산업도 많이 기계화되었다. 재단도 컴퓨터가 하고 복잡한 장식품은 컴퓨터가 알아서 자수를 놔준다. 그래도 봉제 산업은 대표적인 노동 집약적 산업이다.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업종인 것이다. 그렇게 많은 수공을 거쳐 만든다. 임금이 싼 나라에서 옷을 만들어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옷값이 싼 것이다. 그렇다고 옷을 허투루 대하는 것은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한때 ‘섬유 왕국’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수출산업으로 주목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창신동 봉제 골목에 가 보니 이제는 봉제 산업도 대가 끊어지는 듯했다. 이미 나이든 작업자와 외국인 근로자들에 의해 명맥을 간신히 잇고 있다.
88 서울올림픽 시절이었던 1980년도, 그때만 해도 해외 공장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손으로 옷이나 장갑 등 봉제품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 것이다.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 각 공정을 꼼꼼하게 관리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일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숙련공이 되려면 보조공부터 시작해서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애써서 만든 제품을 볼 때마다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겨울철이면 전철 안에서 불법으로 상인들이 장갑을 1,000원~2,000원에 팔곤 했다. 필자가 직접 장갑을 만들어 보니 재료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가격에 팔 수 있을까?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소요량을 더 받아 재료비가 제로가 되거나 정책적으로 지원을 받아야 재료비가 내려간다. 그리고 대량 생산이다. 원가는 재료비 50% 인건비 20~30%, 나머지가 관리비와 이익이다.
요즘 전철 역사에 많이 보이는 빈티지 의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5,000원부터 10,000원이 가장 많고 비싸 봐야 20,000원 정도이다. 이런 상인들은 옷을 주로 일본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이월상품이나 재고, 중고의류 등이다. 무게로 옷값을 치르고 가져와서는 세탁, 다리미질해서 판다. 찜찜해서 남이 입던 옷을 어떻게 입느냐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 숙련공이 되어 눈을 비비며 애써서 만든 제품이다. 만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면 값이 싸더라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이탈리아 ‘볼자노’라고 북부 알프스산맥이 보이는 휴양 도시에 출장 간 일이 있다. 여분의 양말을 챙기지 못한 것을 뒤늦게 알고 어지간하면 현지에서 사서 신으려고 했다. 그러나 명품 양말만 팔고 있었다. 가격이 최하 8만 원이었다. 한국에서는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양말인데 아무리 명품이라지만 제정신에 살 수는 없었다. 매일 밤 양말을 빨아 신어야 했다. 한국은 아직도 섬유 왕국인 셈이다.
76세에 새로 취업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최근 일본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시니어 대상의 취업 지원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시니어잡은 지난 2월 76세의 고령자를 취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26세의 젊은 사장이 설립한 이 회사는 50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취업 지원 컨설팅을 하고 있는데, 지난해에 비해 매출이 360% 이상 상승할 정도로 시장에서의 반응이 좋다고 밝혔다. 일본 시니어 구직시장의 발전은 단순히 고령화에 따른 수요 증가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평생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의 비결은 무엇일까.
최근 일본 구직시장에서 시니어만을 대상으로 한 회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기존의 인력파견 기업이 시니어 구직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자회사를 설립하는 경우도 있다. 파소나그룹은 지난 4월 중년 이상의 구직자를 위한 파소나 시니어의 창립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핵심 키워드는 ‘평생 현역 사회’. 시니어 인재들이 그간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능력을 활용해 나이를 불문하고 활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들은 일손이 부족한 기업에 적합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중년을 파견하거나 고용을 추천하고, 주요 기업의 정년 퇴직자를 확보해 일종의 인력은행처럼 운영을 하고, 시니어 구직자들이 경력을 살릴 수 있도록 연수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고령에도 근로 원하는 비중 높아
실제 일본 고령자의 근로에 대한 의식은 어떨까. 일본의 기술인력 전문지인 ‘fabcross for 엔지니어’가 지난해 65세 이상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중 44.4%가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남성의 경우에는 일자리를 원하는 비중이 52.6%로 더 높았다. 노동을 원하는 이유는 수입을 원한다는 복수응답이 71.2%로 가장 높았고, 일이 즐겁기 때문에(40.8%),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싶어서(40.6%), 사회와의 접점을 원해서(40.0%) 등의 순서로 응답이 집계됐다.
일본의 평생 현역 사회에 대한 이런 분위기는 정부의 정책도 한몫했다. 현재 일본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25%가 넘었다. 4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인 셈이다. 일본 정부는 현재 60세인 중앙·지방 공무원의 정년을 2033년까지 65세로 늦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와 함께 일반 기업들에게도 정년 연장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법안이 통과됐지만, 2025년 이후에나 의무사항이 된다.
일각에선 ‘정년 폐지’에 대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NTT 데이터 경영 연구소는 한 매체를 통해 “일본 내 남녀 수명 모두 70세를 넘고 있어 70대까지 일하는 사회를 대비해야 하며, 정년 폐지에 대한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이면에는 일본의 고령자 대상의 공적연금 기금에 대한 고민이 있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기초노령연금의 수급개시 연령을 현 65세에서 68세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손 없어 “시니어 모시자” 풍토 바뀌어
고령자 노동시장에 순풍이 불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닥까지 내려간 일본 내 실업률이다. 올 1월 일본의 실업률이다. 24년 9개월 만에 기록한 최저치다. 이러한 배경에는 8분기 연속 성장한 일본 경제의 호황이 있다. 실제로 일본 내 구직시장에선 버블시대 이후 종적을 감추었던 ‘취준생 모셔가기’ 경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내 베이비부머 세대인 단카이 세대의 은퇴로 일손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매년 은퇴하는 단카이 세대는 80만 명 수준이지만, 연간 대졸자 수는 50만 명에 불과하다. 근로자 수요는 늘고 있는데 ‘노동 공백’이 발생한 셈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75세 정년시대’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사회적 정서나 경제 상황 모두 평생 현역으로 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고령자 빈곤율 50%, 65세 이상 임금 근로자 중 35% 이상이 일용직과 임시직에서 일하는 한국 상황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노후의 삶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장수리스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준비 없이 맞이하는 긴 노년은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따라서 나이에 맞는 ‘생애자산관리’가 뒤따라야 하며, 은퇴 직전인 50대뿐만 아니라 30~40대부터 노후필요자산에 대한 적정성 점검과 자산 극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은퇴 이후에는 노후 기간을 세분화하여 자산의 적정한 인출과 소득의 보완에 신경 써야 한다. 금융업계 전문가들이 꼽은 시니어가 알아야 할 재무 설계 키워드를 은퇴 전·후로 나눠 정리해봤다.
도움말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PART1. 은퇴 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 By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김동엽 상무·은퇴교육센터장
#1 '5565'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 5년부터 퇴직한 뒤 5년에 해당하는 55세부터 65세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직장생활을 잘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로 매우 분주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인간관계 중심이 회사에서 가정으로 바뀌므로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형 인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울러 노후자금 관리도 돈을 모으는 ‘적립’에서 ‘인출’ 중심으로 변화한다.
#2 임금피크 ≠ 인생피크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면서 55세 전후로 임금피크를 실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근무연한이 늘어나면 임금도 상승하는 연공서열방식 임금제도와 달리,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특정 연령부터 임금이 줄어든다. 임금이 줄어들면 덩달아 퇴직급여도 줄기 때문에 대응을 잘해야 한다. 기업에 따라 임금피크에 해당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전은퇴 교육을 시행하는 곳도 있으니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노후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임금피크 전후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인생 후반전이 달라진다. 자칫 이 시기를 무의미하게 보내면 임금피크가 인생피크가 될 수도 있다.
#3 이중부양
은퇴를 앞둔 50대는 자녀부양과 부모봉양이라는 두 가지 짐을 짊어진 경우가 많다. 그나마 현재 50대는 경제가 고도성장할 때 직장에 다니며 부를 축적하고 노후준비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부모 세대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했다. 게다가 고도성장의 열기가 식으면서 그들의 자녀 세대 또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계를 꾸려가기 힘든 상황이다. 부모봉양과 자녀부양이라는 이중의 짐이 50대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자신의 노후준비까지 하려면 연금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공적연금과 퇴직연금을 통해 기초생활비를 만들고, 여기에 개인연금과 주택연금을 더해 기본 생활비를 마련하자.
◇ By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조명기 수석연구원
#4 퇴직금을 지켜라
우리나라 남성 근로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6.7년으로 OECD 주요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근속연수가 짧으면 이직 때마다 노후자금의 주요 축인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찾아 다른 용도로 활용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후자금 축적에 큰 위협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이직 시 IRP(개인형 퇴직연금, individual retirement pension) 계좌에 이관된 퇴직금은 절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고, 55세 이후 5년 이상 연금으로 받는 것이 좋다. 이 경우, 퇴직금을 노후자금의 목적대로 보존할 수 있으며 퇴직소득세 감면 효과(30%)까지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자.
#5 자녀 리스크 회피
자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부모 세대는 오랜 기간 자녀 리스크에 노출된다. 사교육비부터 결혼자금 지원까지, 생애 지출의 상당 부분이 자녀를 위해 쓰인다. 즉 소중한 자녀가 노후준비의 걸림돌이 되는 것. 2016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5년 내 자녀를 출가시킨 부모의 3분의 1은 결혼자금 지원을 위해 노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산(부채, 퇴직금, 개인연금 등)을 활용했다.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보다는 자녀에게 부담 주지 않는 독립적인 노후를 보내는 것이 결국 자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임을 명심하자.
#6 연금라이프 점검
평균수명 증가로 은퇴기가 길어지면서 필요한 노후생활 자금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소득이 사라지는 은퇴기에도 삶의 질 하락 없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생활비’를 확보해두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필수생활비는 살아있는 한 꾸준한 소득흐름을 보장하는 연금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본적인 국민연금 이외에 종신연금처럼 죽을 때까지 소득흐름을 보장하는 연금상품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지 확인해, 필수생활비를 연금으로 충당하는 연금라이프를 누릴 수 있을지 점검해보자.
◇ By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 진 소장
#7 집, 소유 말고 사용하자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산을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부동산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선진국의 경우 가계의 부동산 비중이 약 50%이지만, 우리나라는 70%가 넘는다. 집은 소유하는 개념이 아닌 사용하는 개념으로 바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집을 사용하는 것으로 여기면 무리하게 투자해 집을 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억짜리 집을 사기 위해 3억을 대출받는 것보다, 5억짜리 집에 살면서 2억을 연금보장형 상품 등으로 넣어두는 편이 낫다. 10억짜리 집을 사면 이자를 내야 하지만, 5억짜리 집에 살면 이자를 받는 셈인데, 이는 매우 큰 차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자를 노후자산에 톡톡히 활용할 수 있다.
#8 자산관리 분배 원칙 '5533'
5: 총자산의 50%를 금융자산으로! 가계의 총자산 내에서 26% 수준에 불과한 금융자산의 비중을 큰 폭으로 늘리자. 노후에 필요한 것은 정기적인 현금흐름이고, 이를 만들어내는 금융자산을 최소 50% 수준까지 확대하는 것이 좋다.
5: 금융자산의 50%를 투자형 자산으로! 저금리 시대를 맞아 금리연동형의 안전형 상품으로는 자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40%를 훌쩍 넘는 예금자산을 줄이고, 20% 수준에 불과한 투자형 자산의 비중을 늘려보자.
3: 투자형 자산의 30% 이상은 해외자산으로! 투자형 자산에 투자할 때는 해외자산의 비중을 늘려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우리나라 증시는 전 세계 주식시장의 2%도 안 된다. 국내 종목에만 집중투자하기보다는 글로벌 분산투자의 개념에서 해외 종목을 30% 이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3: 연금자산은 총자산의 30% 이상으로! 100세 시대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자산은 결국 연금자산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야 8% 수준에 불과한 연금자산을 최소 총자산의 30%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 By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황원경 센터장
#9 장기보장자산 마련
장기보장자산 마련을 위한 재무 설계는, 늘어난 노년기에 경제적으로 독립된 노후생활을 고려하는 상황에서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장기보장자산 마련을 위해서는 일정 소득을 제공하는 노후자금기본형성 계획과 인플레이션을 따라가면서 ‘인플레이션+α’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자산 확대 계획이 필요하다. 노후자금기본형성을 위해 개인형 IRP, 연금보험 등에 대한 이슈가 중요하며, 노후자금자산 확대를 위해 일정 부분 위험을 감수하는 자산관리 전략의 혼용이 필요하다.
*경제활동기 이후 노후생활기 증가: 1985년 13.4년, 2016년 26.8세.
단순히 ‘노후자산관리’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엔 은퇴 이후, 즉
#10 '1세대가구형' 생존전략
가구에 대한 개념 변화와 기대수명의 연장, 부모에 대한 부양의식의 약화, 에이징인플레이스(Aging in Place)의 개념 등으로 은퇴 후 1인가구나 부부가구 증가가 예상된다. 전통적 방식의 2세대 이상 가구 유형(부모-자녀 세대)은 감소할 것이다. 특히 재무 설계의 목적을 설정할 때 1인 또는 부부가구 중심의 노후자금준비 목적이 이뤄지도록 반영해야 한다. 이는 1세대가구 생존을 위한 노후자금준비 목표에 대한 재점검과 자산관리 재조정으로 이어진다.
* 부양의식의 변화: 부모부양 부담에 대해 가족의 책임 2002년 70.7%, 2016년 30.6%.
* Aging in Place: 연령, 소득, 능력 수준에 관계없이 자신이 살던 집과 공동체에서 안전하고 자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
PART2. 은퇴 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 By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김동엽 상무·은퇴교육센터장
#1 일병식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수명이 늘어났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일본은 75세 이상 고령자 중 30% 이상이 와병 상태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나이가 들면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늘어난 수명을 병상에서 보내지 않으려면 건강관리에 매진해야 한다. 보통은 아무런 질병이 없을 때 건강을 돌본다는 의미로 ‘무병식재(無病息災)’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이때는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별다른 준비를 안 하고 무리하게 된다. 건강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는 은퇴하고 나서 체력이 떨어지고 가벼운 질병을 하나 정도 갖게 됐을 때다. 이때부터라도 건강관리에 힘쓰면 장수할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일병식재(一病息災)’라 한다.
#2 평생월급
은퇴 후 삶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눠 정년퇴직 후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평생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야 한다. 1단계는 정년퇴직 이후부터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수령할 때까지다. 월급이 끊긴 뒤 공적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소득공백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퇴직금과 모아둔 금융자산으로 매달 얼마의 소득을 낼 수 있는지 점검해본다. 2단계는 공적연금수령 기간이다. 부부가 받는 공적연금으로 기본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부족하다면 주택연금을 받는 방법도 고려한다. 3단계는 독거생활 기간이다. 본인이 먼저 사망했을 때와 그 반대의 경우 소득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본다. 이런 점검을 통해 퇴직 후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소득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며 평생소득을 만들어가야 한다.
#3 딴 지붕 한 가족
자녀들도 나이 든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지만, 부모도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방금 끓인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에 떨어져 살면서, 프라이버시는 지키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부모·자식 관계가 일상화되고 있다. 한 지붕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지붕 아래 살면서 보고 싶을 때만 보는 ‘딴 지붕 한 가족’이 보편화되고 있다.
◇ By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조명기 수석연구원
#4 '100세' 보장
민간 건강보험으로 탄탄한 의료비 보장을 해놓은 이가 많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연장돼 100세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며 과거에 해둔 보장이 불충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비 보장이 80세까지만 되어 있는 경우다. 특히 고령화 후기로 접어들면 간병비도 늘어난다. 이에 100세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 의료비와 간병비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5 '4% 인출' 법칙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그동안 저축한 은퇴자산에서 자금을 찾아 써야 하는 은퇴자가 많아지고 있다. 은퇴자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평생토록 소득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한정된 은퇴자산에서 매년 생활비로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을 알려주는 법칙이 있다. 일명 ‘4% 법칙’이라고 하는데, 은퇴 직전 자산의 4%를 기준으로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금액을 더해 인출하면 평생토록 소득이 고갈될 우려가 없다는 법칙이다. 인출하고 남은 은퇴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소 달라지겠지만 은퇴자의 생활비 인출 범위를 대략적으로 가늠하는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다.
#6 버킷 전략
시니어도 젊은 시절에는 자산운용에 할애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은퇴 이후엔 투자 실패 시 만회할 시간이 부족해 적극적 자산관리를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자산관리를 소홀히 했다가는 보유한 자산이 생전에 고갈되는 장수 리스크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은퇴자산을 인출 시기별로 나누어 각각 달리 관리하는 이른바 ‘버킷 전략’을 활용할 수 있다. 올해 당장 써야 할 자금은 현금성 자산으로, 앞으로 10년 이내에 꺼내 쓸 자금은 각각의 인출 시기까지 운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보유한다. 나머지 자산은 향후 10년 이상 운용 가능하게 되어 더 적극적인 투자관리를 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버킷 전략이라 하는데 최근 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 By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 진 소장
#7 장수리스크, ‘일’로 대비하자
오래 살게 되는 상황에 대한 리스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반드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관계와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일’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전 세계 1위이고, 이 중 47%, 즉 둘 중 한 명은 절대빈곤을 겪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재능기부 등의 일이라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가계에 도움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8 발품을 팔아야 한다
대부분 금융기관에서는 매월 시장의 동향과 좋은 투자 상품 등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한다. 퇴직 후 시간이 여유로운 시니어는 이런 프로그램을 직접 찾아다니며 들어보고,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담당 직원에게 관심을 가져볼 만한 상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고 정보를 얻어 활용해야 한다. 이때 투자 결정을 할 때는 한 사람에게 들은 정보만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정보를 같은 기관의 다른 직원이나 타 기관 직원에게 반드시 크로스체크하자.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투자 종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담당 직원에게 “왜 올랐나요?”, “왜 떨어졌죠?” 등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다음에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By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황원경 센터장
#9 합리적 인출전략
기대수명 연장으로 늘어난 노후생활기, 에이징인플레이스의 확산 등에 따른 새로운 영역의 필요노후자금 등이 발생하면서 합리적 노후자금 인출전략 수립이 중요해졌다. 새로운 자산 증가나 소득 창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보유한 자산으로 여생을 살아가기 위한 인출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인출전략 수립에 앞서 보유자산 진단, 예상되는 자산 유출 진단, 노후 라이프스타일 결정 등의 과제가 선행되어야 인출전략 수립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10 은퇴 후 기간 세분화
100세 시대라 할 정도로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노후생활기도 늘어나고 있다. 시니어 재무 설계에 대한 접근이 바뀌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지금까지는 은퇴 후 기간을 하나의 통으로 보고 재무 설계를 추진해왔으나, 이제는 개인의 자산 현황, 활동성 정도, 인생계획 등이 반영된 기간 세분화가 필요하다. 재무 설계는 이러한 분석 아래 시도해야 하며, 아울러 노후자금 인출전략을 세울 때도 주요 자료로 참고해야 한다.
#11 현금 가능한 고정수입 유동화
은퇴는 고정수입 창출에 큰 변화를 발생시킨다. 근로자의 경우 근로소득이, 사업자의 경우 사업소득이 발생하다가, 은퇴 후에는 초기 연금이나 금융자산의 이자소득 등으로 수입이 창출된다. 이후에는 금융자산, 부동산자산 순으로 유동화하여 수입을 창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가구주 연령 60세 이상 가구에서 부동산자산 비중은 80%에 이른다(2016년 3월 통계청 기준). 이를 노후자금으로 유동화하는 과정은 대부분의 가구가 거치게 될 것이다. 자산 감소와 유동화 시기 점검으로 재무 설계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여고 시절 제2 외국어를 선택할 때 영어 선생님께서 문학이나 웅변을 하려면 독일어를 택하고, 사랑을 하려면 불어를 택하고, 돈을 벌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 하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친정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정치를 부업으로 하셨다. 비록 정치에 실패를 하셔서 많은 돈을 날리셨지만, 본업인 의사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집 6남매 중 아들 셋 중 둘은 의사로 하나는 약사로, 딸도 셋 중 둘은 간호학과를 입학 시켜서 작은 병원을 하나 운영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우스개 소리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친정 6남매 중 필자만 유일하게 문과인 영문과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사실은 필자까지도 아버지가 의대를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가 대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입학하자 마자 교수님들이 소개로 소위 재벌 가 자제의 영어 과외를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 대기업 사원보다 수입이 많아, 일반 사립대보다 훨씬 싼 서울대 학비는 벌고도 남았다.
등록금을 내고도 남은 돈으로는 우리 집 가전제품도 새로 구입하고 또 동생 두명의 취미 생활에 필요한 것도 사줄 수 있었다. 당시에 텔레리비젼이 처음으로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지금의 일가구일주택 정책처럼 한 가족당 한 대만 살 수 있었다.
동생들의 취미를 위해서는 스케이트나 정구 라켓은 물론 Made in Italy 자전거까지 남동생에게 사 주었다. 그 때 산 배드민턴 장비도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아무나 못 사고 또 뭔지도 몰라서 동네 길 바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놀면 친구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대학을 졸업 후 홍콩에서 외국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를 했는데, 봉급이 여자로서는 다른 직종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 때는 워낙 우리나라가 못 살던 1970년도 시절이라, 항공사에서 함께 일하던 ‘홍콩 차이니즈’라 불리는 중국 아이들도 우리가 영어를 못한다고 깔보고 뒤에서 수군거리곤 했다.
그 때 중국 애들은 얼굴은 중국인이지만 당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여권을 갖고 다니며 우리 나라를 우습게 보았다. 또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화폐 가치가 형편 없고 너무 낮아서 월급으로 받은 달러를 서울의 부모님에게 보내면 남대문 시장에서 야미(?)로 바꾸면 은행의 거의 두배가 되어서, 홍콩의 비싼 주거비와 생활비를 제외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졸 임금의 두배 가량을 저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출신의 동남아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을 어려워하듯이, 필자도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서 생활 해야했기 때문에 외로움과 또 낯 선 외국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일 년 반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도망치듯이 귀국하여, 그 후로 결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도 남들과 달리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 것은 현지에서 배운 영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영어는 기본이고 제2.3 외국어까지 잘하는 젊은 사람이 많아도 직업 선택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망망대해에 고깃배 한 척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떠 있다. 주변에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바다에 튕겨 하늘로 솟아오르는 빛의 잔치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배를 때리는 파도소리만이 심해와 같은 적막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바다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온 고깃배가 자동항법장치와 통신장비의 고장으로 항구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닻을 내리고 구조되는 행운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할 수도 있지만 연료가 소진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정답이 아님을 선원들은 잘 알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실린 음식물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가입자들도 좌표를 잃으면 망망대해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의 선원들처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린 퇴직연금 적립금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전년 말보다 16.3% 늘어난 147조원이다. 이 중 약 131조원, 즉 전체 적립금의 89%가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려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되어 있는 적립금은 10조원 정도로 전체 적립금의 6.8%에 불과하다. 나머지 4.2%는 운용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성 자금이다. 대기성 자금은 운용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원리금보장 상품에 보관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보장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5.8%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경우 사실상 자산배분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산배분은 위험과 수익구조가 상이한 상품에 분산투자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개의 원리금보장 상품에 적립금을 나누는 것은 자산배분이라 할 수 없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집중된 결과 2016년 총비용 차감 후 퇴직연금 적립금 수익률은 1.58%에 머물러 있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수익률인 셈이다.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은 1.72%,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은 -0.13%이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안전지향적 적립금 운용 형태는 적어도 2016년만 보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장기수익률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2016년 기준으로 5년 연환산 수익률과 8년 연환산 수익률은 2.83%와 3.68%로 1년 수익률보다 각각 1.25%p와 2.10%p 높다. 이는 과거의 원리금보장 상품 금리가 지금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8년 수익률만 놓고 보면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5.61%)이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3.05%)보다 2.56%p나 높다. 수익은 위험의 대가라는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역사적 저금리 기조와 길어진 수명에 대한 인식이 많이 제고된 그간의 상황을 감안하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도되어 있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행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닻을 내리고 구조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는 고깃배 선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원인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퇴직연금시장의 적립금 운용 관련 행태와 인간의 의사결정을 지배하는 뇌 구조라는 양 측면에서 살펴보자.
목표가 없는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먼저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가입자의 적립금 운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형에 가입한 근로자는 사용자가 납부한 부담금을 어떤 방식으로 굴릴지 결정을 해야 한다. 이를 운용 지시라고 부른다. 앞에서 살펴본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이 바로 운용 지시의 결과물이다. 감독기관의 통계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집계해 발표되지만 원리금보장 상품에도, 실적배당형 상품에도 수많은 상품들이 존재한다. 개별 가입 근로자가 수많은 상품을 일일이 비교해 자신에게 적합한 상품을 고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운용관리기관이라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선별해 제시하도록 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상품을 제시할 때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을 함께 제공한다. 이를 상품 라인업이라고 하는데, 가입 근로자는 라인업된 상품 중에서 자신의 적립금을 굴릴 상품을 선택한다. 모든 사업자는 두 부류의 상품을 함께 제시하며 자산배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배분이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바로 자산배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적립금의 일부라도 배정하면 자산배분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자산배분은 목표수익률을 정하고 가입자가 감내할 수 있는 위험수준 내에서 목표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립금을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산배분의 핵심은 목표수익률을 정하는 것인데, 희망하는 목표수익률을 묻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의 현주소다.
정확한 목표수익률을 정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별로 노후 준비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몫을 계산하고 현재의 퇴직연금 부담금 규모와 앞으로의 전망치, 예상되는 가입기간, 금융시장 상황 등을 종합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근로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인 퇴직연금사업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퇴직연금사업자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거나 모른 체하며 “저금리 시대엔 실적배당형 상품을 편입해야 합니다! 중위험·중수익 투자가 필요합니다!” 등의 쉬운 방법을 동원한다. 이 정도 방법과 노력으로 ‘퇴직금은 손해보면 안 된다!’는 강고한 유산을 깨트릴 수 없음은 원리금보장 상품에 극도로 치우쳐 있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근로자별로 목표수익률을 쉽게 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개발 및 운영 인력 등 투자가 필요하다.
동물적 특징에 지배당하고 자극하는 현실
인간의 역사는 선택의 역사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있다. 또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선택도 있다. 어쨌든 수많은 선택들은 인간의 뇌에서 이뤄지는 신경학적 반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뇌에서 선택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전두엽(frontal lobe)과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다. 전두엽은 대뇌반구 앞에 있는 부분으로 이마엽이라고도 한다. 전두엽은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5만 년 전에 발달한 뇌의 한 부분으로서 합리적 판단과 장기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뇌변연계는 대뇌반구 내측 벽의 대뇌피질 아래에 고리처럼 감겨 있는 부분으로, 인간의 감정적·본능적 반응을 담당한다. 대뇌변연계는 작은 위험신호라도 감지되면 즉각적인 36계를 종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을 담당해온 중요한 부분이다. 즉 전두엽은 우리에게 장기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뇌변연계는 즉각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요구한다. 퇴직연금처럼 장기간 운용해야 하는 자금은 전두엽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지만 대뇌변연계가 자꾸 훼방을 놓는다.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은 이란 책에서 “인간은 주로 대뇌변연계에 따라 움직이며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다. 삶이 험악하고 야만스럽고 짧은 경우에는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기대여명이 길어지고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려면 합리적인 전두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퇴직연금은 장기자산이니 자산배분을 통해 적절히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높은 기대수익을 추구하는 게 맞다고 전두엽은 말하지만, 대뇌변연계는 퇴직연금은 안전하게 굴러야 하니 원리금보장 상품에 넣어두라고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은연중에 대뇌변연계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개미투자자들의 실패한 투자 경험도 한몫한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이런 성향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금리가 1bp(0.01%)라도 높은 원리금보장 상품을 제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퇴직연금 가입자의 속성과 영업실적에 대한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퇴직연금사업자의 속성이 맞물려 나온 결과가 원리금보장 상품 일변도의 적립금 운용행태인 셈이다.
퇴직연금 잘 굴리려면?
‘100세 인생’이 약방의 감초처럼 일상 대화에 등장하는 요즘 퇴직연금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과 같은 저출산, 수명연장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후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공적연금 확대는 기대하기 어렵다.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자조노력 연금시대도 거스르기 힘든 대세다. 노후의 재정적 안정은 퇴직연금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은 뻔하다. 공부를 해야 한다. 좋은 고과를 얻기 위해, 승진을 위해 내가 맡은 일과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듯 금융과 연금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금융 지식이 해박한 투자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같은 수준의 리스크를 감내하면서도 연간 수익률이 1.3%p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주 큰 차이다. 만약 10만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할 경우 금융 지식이 많은 투자자들은 1만6000달러를 더 번다. 2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4만2000달러를 더 벌고, 3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14만5000달러를 더 번다는 결과가 나온다.
문제는 금융 지식이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에 금융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의 수수료율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수수료율이 높다고 그 상품이 좋은 상품이고 수익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금융 회사들이 제시하는 표면적인 금리수준이나 기대수익률 또는 과거의 성과만을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수수료율을 체크포인트의 하나로 꼭 첨가하자. 개별 금융상품의 수수료 관련 정보는 고용노동부 퇴직연금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확인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은 금융 지식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는 좋은 방법임을 잊지 말고 실천하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을 법정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은 법적으로 보장된 가입자의 권리다. 이 권리를 내팽개치지 말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금융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고 자산배분에 도전해보자. 자산배분을 했다면 그것에 안주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산배분 비율을 조정하는 리밸런싱을 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자산배분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거나 원리금보장 상품에 묻어놓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들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잘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가입자들이 목표수익률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리밸런싱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상생의 길이다.
무관심 속에 성장하는 퇴직연금
사회보장제도의 마지막 퍼즐이었던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다. 1988년에 국민연금이 도입되었고, 연금저축으로 일컬어지는 세제적격 개인연금이 도입된 것은 1994년이다. 퇴직연금은 이보다 11년이나 늦은 2005년 12월에야 도입되었다. 퇴직연금 도입까지 걸린 시간이 길어진 것은 퇴직연금 관련 이해관계자들의 이해 조정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이 각자의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겼고, 그만큼 법안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제도 도입 초기의 치열한 관심과 달리 퇴직연금이라는 열차가 괘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열의는 식기 시작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전면 개정안이 통과되는 데 3년이나 걸렸고, 2차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통과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해관계자들의 관심과 열의가 식지 않았다면 과연 개정안이 국회에서 그토록 오랜 낮잠을 즐길 수 있을까? 아직도 퇴직연금의 기본개념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으면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저출산 고령화의 큰 파고 앞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100세 시대의 노후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노후준비가 국민적 스트레스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후준비 핵심 축의 하나인 퇴직연금이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은 아이러니를 넘어 배임행위라 여겨질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퇴직연금시장은 높은 성장세를 구현해왔다. 2016년 3분기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130조원으로 전년 동기(111조원) 대비 17.1% 증가했다. 전년 동기 대비 기준으로 2012~2015년의 성장률은 20%를 훌쩍 넘어선다([표1] 참조). 극심한 경기침체 상황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성장률이 아닐 수 없다. ‘관심의 불황과 시장의 급성장!’ 불황형 흑자를 떠올리게 한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문제는 성장률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관심의 불황과 시장의 정체’라는 불황형 적자의 시대가 올까봐 걱정스럽다.
퇴직연금, 쉽고 효율적인 노후준비 방법!
기업·근로자·금융기관 등 퇴직연금 핵심 이해관계자들의 열의가 식는다고 해서 개인 및 사회에 대한 퇴직연금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제반 상황을 감안하면 퇴직연금의 영향력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늘어날수록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와 늘어만 가는 후반 인생을 생각하면 근로자에 대한 퇴직연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땅한 신수종 사업이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퇴직연금은 금융기관에게 아주 매력적인 시장이다.
무엇보다도 퇴직연금은 가장 쉽고 효율적인 노후준비 방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가 노후자금을 마련하려면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별도의 자금을 염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다르다. 퇴직연금에 적립되는 부담금을 기업이 내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쌓기 위해 자신의 주머니에 손댈 필요가 없는 셈이다. 빠듯한 가계 상황을 걱정하지 않고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쉽고 좋은가! 또한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적립금 운용수익에 대한 세금이 인출하는 시점까지 이연되는 등 많은 세제혜택을 누릴 수 있다. 세금으로 내야 하는 돈이 다음 해 원금에 추가되니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가 극대화된다. “그까짓 이자가 얼마나 된다고?” 하며 얕보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 한두 해 일하고 그만둘 것은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보험료를 내고도 운용 과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각자의 상황에 맞는 운용 방법을 유연하게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거의 무료로 받을 수 있으니 노후자금을 불리는 방법으로 이만큼 효율적인 수단은 찾기 힘들다.
근로자들이 이런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쇼윈도 안의 마네킹이 입고 있으면 별무소용이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벗겨 내 손에 넣어야 비로소 내 옷이 되는 법이다. 퇴직연금도 마찬가지다. 제도적으로 아무리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근로자들이 이를 활용하지 않으면 진열장에 전시된 제품에 불과하다. 아이쇼핑은 심리적 만족감을 주지만, 활용하지 않는 제도적 장점은 공약(空約)의 씁쓸함을 가져다줄 뿐이다. ‘톡!’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씨앗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잘 익은 봉숭아처럼 전국 방방곡곡 모든 계층의 근로자들이 혜택을 받아 노후준비를 제고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과 열의에 불을 지펴야 한다.
퇴직연금에 대한 근로자의 관심과 열의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기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기본을 다지는 출발점은 퇴직연금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퇴직연금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이해하기 쉽게 전파한다면 식어버린 관심과 열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퇴직연금의 본질을 살펴보자.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퇴직연금의 법적 성질과 관련한 학설로는 노후보장·공로보상설·임금후불설 등이 있다. 노후보장설은 퇴직연금을 사용자가 선의로 근로자의 노후보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 보며, 공로보상설은 그동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퇴직연금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본다. 임금후불설은 매달 임금으로 지불해야 할 것의 일부를 나중에 퇴직할 때 지불하는 것이 퇴직연금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정설은 임금후불설이다. 퇴직연금의 법적 성질을 임금후불설로 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글로벌 퇴직연금시장에서 세계적 표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의 퇴직연금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비약적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다. 전시통제정책의 하나였던 임금통제정책 때문이다. 원활한 전시물자 보급을 위해 취한 임금통제정책으로 기업들은 근로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상황에서 물건 만들 인력이 부족하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겠는가.
기업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성을 일터로 끌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가급여(fringe benefits)로서 퇴직연금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성인 여성들은 전업주부로서 주로 가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터로 나간 젊은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 대거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불러온 예상치 못한 사회 변화였다. 퇴직연금과 같은 부가급여는 전시임금통제정책의 대상이 아니었다. 임금을 올려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장년 남성 인력은 물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임금을 올려줄 수 없으니 나중에 올려주겠다는 당근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퇴직연금이었다. 즉 임금으로 줘야 할 것 중 일부를 퇴직연금이라는 형태로 해당 근로자가 퇴직할 때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연금회계기준서에는 퇴직연금을 임금후불이라고 못을 박아놓았다.
이처럼 퇴직연금은 단순한 인센티브가 아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어떤 배경으로 인해 지급을 뒤로 미룬 임금의 일부인 것이다. 퇴직연금을 제2의 임금이라 부르는 이유다. 모든 근로자들은 임금협상철만 되면 신경이 곤두선다. 과연 올해는 임금이 얼마나 오를까? 최소한 물가인상률만큼은 올라야 할 텐데… 임금이 오르면 가계의 재정상태도 좀 나아지겠지. 이런 기대를 하며 임금투쟁에 적극 나선다. 기대에 어긋나면 파업까지 불사한다.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 중 하나다.
그런데 제2의 임금이라는 퇴직연금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도입 당시 타오르던 관심이 금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당장 내 호주머니에 들어오지 않는 돈이라고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난 퇴직연금은 주인을 잘못 만난 화초처럼 생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내 퇴직연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내가 가입한 퇴직연금이 어떤 종류인지, 어느 퇴직연금사업자에 내 적립금 운용을 맡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내 퇴직연금이 안녕한지 그렇지 못한지 알고 있는 사람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임금에 이처럼 무관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음지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퇴직연금을 양지로 끌어내야 한다. 퇴직연금의 본질은 3층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로서 노후준비의 한 수단이 아니라 제2의 임금이다.
노후준비 수단은 임금을 활용하는 한 형태일 따름이다. 최소한 1년에 한 번만이라도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이고 점검하자. 그 결과 변화가 필요하다면 사업자를 바꾸거나 상품을 바꾸거나 자산배분을 바꿔보자. 시들해진 퇴직연금이 되살아날 것이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잠재적 액티브 시니어
퇴직연금의 본질과 관련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는 퇴직연금 가입자에 대한 것이다. 바로 퇴직연금 가입 근로자는 모두 잠재적 액티브 시니어라는 점이다. 누구나 은퇴 후 활기차고 행복한 노후를 꿈꾼다. 이 점에서 퇴직연금 가입자는 특히 더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퇴직연금을 도입할 때 근로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도입에 동의할 때 동의를 해달라니 마지못해 동의할까, 아니면 노후에 대한 희망을 안고 동의할까? 비록 지금은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도입 당시 각자 나름의 꿈과 희망을 퇴직연금에 담았을 것이다.
퇴직연금은 액티브 시니어가 되기 위한 중요한 물적 기반이다. 이전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액티브 시니어란 육체적·정신적 건강함을 기반으로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연장자’를 뜻한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정신적 건강함과 함께 재무적 탄탄함을 필요로 한다. ‘가난한 강남 부자’라는 말이 암시하듯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금흐름이 말라버리면 사회적 활동은커녕 움직이기조차 힘들다. 퇴직연금은 재산이 적더라도 현금흐름이 풍부한 시민이 되기 위한 초석이다. 많은 근로자들은 이런 심정으로 퇴직연금 도입에 동의하고, 퇴직연금사업자를 선정하고, 적립금 운용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퇴직연금을 잘 가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한바탕 바람이 일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오면 꿈은 사라지고 일상의 권태와 피로에 지배당하고 만다. 이 권태와 피로를 잊게 하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꿈임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 이성을 일깨우는 데에는 게으르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셈이다.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임을 회상하며 다시 꿈을 일깨우자. 근로자 입장에서 퇴직연금은 은퇴 이후에 받는 또 다른 임금이다.
임금 인상 여부에 일희일비하던 기억을 퇴직연금에 접목해보자. 그러면 꿈은 되살아나고 삶에 대한 구체적 그림이 보일 것이다. 그 구체적 그림 속에서 퇴직연금의 역할을 부여해보자. 그러면 현재 나의 퇴직연금은 안녕한지 불편한 상태인지 보일 것이다. 안녕한 상태라면 잘 유지하고, 불편한 상태라면 상품·사업자·자산배분 등을 조정해 더 나은 상태로 바꿀 필요가 있다.
필자가 일하는 건설현장 머리위에는 고가 크레인이 빙빙 돌아가고 발아래는 흉기 같은 철근이 널려 있다. 온통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위험물 천지다. 근로자의 안전을 지켜주는 비계(건물을 지을 때 디디고 서도록 철 파이프나 나무 따위를 종횡으로 엮어 다리처럼 걸쳐 놓은 설치물)에 머리고 몸통이고 부닥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 나이 먹은 필자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친구들도 있지만 과연 제대로 일을 할까하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보다 한평생을 손에 물 안 묻히는 화이트칼라로 살다가 온 몸을 연장삼아 일해야 하는 블루칼라 일을 한다는 것에 의심 반 부러움 반의 주위 시선들을 느낀다. 필자는 공과 대학을 나오고 기술사라는 최고의 국가 자격을 갖고 있다. 회사에서도 일찍 간부가 되어 현장일은 제대로 배우거나 하지도 못하고 부하직원을 통솔하는 일만 한평생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일을 입과 머리로만 했지 손과 발은 제대로 쓰지 못했다. 자동차공장에 다니면서 실제 자동차는 만들어보지 못한 꼴이었다. 머리는 많이 써서 유효기간을 지나 노후 되었지만 손발은 아직 신품에 가깝다고 자위하며 혼자 웃는다.
이런 마음가짐이 필자를 스스로 쇠뇌 시켜 현장 일을 해도 남들보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하고 무모한 자신감은 예전부터 늘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만약 퇴직하고 제2의 일을 한다면 머리만 쓰는 관리자 일보다는 두뇌로 계산하고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노동에 가까운 현장 일이 좋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 왔다. 수명100세 시대에 길게 현역에 남아있으려면 노동자의 다른 이름인 불루칼라가 딱! 이다. 노동자는 몸이 생명이므로 무엇보다 건강해야 한다. 노동자 출신이 회사에서 노동자 몫의 임원을 역임한 후 임기가 끝나자 다시 노동현장으로 복귀하는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받은 적도 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불루칼라의 대부분 업종이 3D 업종이라 하여 열악한 직업이다.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일이다. 다른 쪽은 몰라도 필자가 잘 아는 건설현장에서 보면 우리나라 젊은 노동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해외 노동력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조선족이거나 동남아 인력이 없으면 현장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변했고 점점 더 그렇게 변하고 있다. 취업난이라 하면서도 노동현장에 오지 않으려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무조건 탓할 수만 없는 것이 열악한 환경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낮다는 현실에 있다. 소득 3만 불 시대에 대학을 나온 잘 교육된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불확실한 육체노동의 이런 일을 강요하기에는 솔직히 미안하다.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면 당연히 돈이라도 많이 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녀양육에서 해방되고 좀 경제적 여유가 있고 신체 건강한 시니어가 3D 업종에 종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퇴직자들이 강사나 컨설턴트를 희망하고 잘 모르는 창업에 뛰어들어 그나마 갖고 있던 돈을 날린다. 노동은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된 자리다. 나이 들어 육체노동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이름의 진짜 엑티브 시니어다.
하는 일의 중요도에 따라 급여가 달라져야 정의로운 사회지만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켜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그만한 보수를 줘야한다.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자리를 젊은이들에게 줘야 할 의무는 국가와 사회에 있음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회사에 입사하여 연수가 늘고 숙련도에 따른 생산성 증가로 점차 급여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만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생산성과 역행하여 오히려 급여가 줄어드는 임금피크제라는 제도를 적용하는 것이 소득재분배 차원에서 공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퇴직 후 제2의 직업에서는 수입이 적은 것이 당연시 돼야 한다.
요즘의 노동현장은 무조건 힘만 쓰는 동물의 세계가 아니다. 힘든 일은 잘 발달된 기계가 한다. 기계가 하기 어려운 틈새의 힘이 필요한 기술적인 일이 요즘의 노동현장이다. 찾아보면 자신의 체력에 맞는 그렇게 힘들지 않는 노동현장도 많이 있다. 노동현장에서 바짝 엎드려 일을 하다 보니 몸은 피곤해도 우선 마음은 편하다. 입사동기간에 서로 빨리 진급하려고 양 눈에 쌍심지 불을 켜고 경쟁하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웃음 짓는다. 살아보니 그렇게 경쟁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과장되고 부장되는 진급의 싸움에서 한발 물러서 있으니 여유롭다. 건강은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고 욕심을 줄인 자리에 만족을 끼워 넣으면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글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어느 택시기사에게서 엿본 50대의 자화상
온 나라가 최순실 게이트로 들끓던 어느 날 택시를 탔다. 갑자기 불편해진 다리와 피곤한 몸에 잠깐이나마 휴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푹신한 의자에 등과 목을 기대고 편히 쉬고 있는데 기사분이 말을 걸어왔다. 눈을 감고 건성으로 대답해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데다 슬슬 짜증지수가 올라왔지만 어느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연은 이렇다.
“제가 퇴직을 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택시를 몰고 있는데, 하루 12시간 일해도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3년 무사고면 개인택시를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걸 기다리며 참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만만찮아요.”
동병상련인가. 기사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초보 택시기사라 해도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힘들다니…. 일주일에 12시간 강의하고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버는 나는 그에 비하면 호사스런 퇴직자가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 운전하세요?”
“대략 23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교통지옥 같은 서울 시내에서 하루 230킬로미터씩 운전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말 힘든 노동이다. 3년 무사고가 만만찮다는 것을 처음엔 수긍하지 못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힘든데 누구는 한 방에 10억, 20억, 100억을 해먹었다니 박탈감이 너무 커요.”
최순실 일당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았다. 3년 뒤 개인택시 신청할 날을 기다리며 힘든 나날을 참고 견뎌나가는 초보 택시기사에게 최순실 일당은 정말 못할 짓을 했구나. 저 마음의 상처는 누가 보듬어줘야 하나.
택시에서 내려 걷는 동안에도 초보 택시기사가 한 말이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무거운 발걸음 위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고군분투하는 50대들의 자화상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지금 50대는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창 공부할 자녀도 있는데,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자신들의 노후 준비도 불확실하고, 고령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급한 마음에 자영업에 뛰어들어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100세 시대에 50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연령대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노후는 크게 달라진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낸 사람은 국민연금을 기본으로 하고 부족분을 사적연금이나 다른 자산으로 보완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동안 쌓아온 노후 자산에 손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길에 내몰린 50대!
연금해지의 경제학
요즘 연금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순실 일당에겐 연금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겠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연금은 금과옥조 그 자체다. 기나긴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내느냐, 불안에 떨며 보내느냐는 연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과옥조 같은 연금을 깨트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50대들이 많다. 필자의 이야기부터 해본다.
어느덧 1년 전의 이야기다. 갑작스레 닥친 퇴직은 나름 평온했던 필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엄청난 대지진이었다. 이로 인해 지상의 평화로운 날들은 순식간에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필자의 일상도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정신은 혼미해졌고, 가슴은 불구덩이로 활활 타올랐고, 두 발은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금이었다. 연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유지해야 하나, 해지해야 하나. 한 달 보름 정도의 고민 끝에 아내를 대동하고 해지의 길에 올랐다.
해지의 길에서 자괴감이 몰려왔다. “당신은 연금 전문가라면서 이렇게 해지를 해도 돼요?” 아내의 말에 뜨끔했다. “나만 믿어.” 그 당시 뭘 믿고 아내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쳤을까? 당시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배수의 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배수의 진’을 친 장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다면 행동이 굼떠 적의 포로가 되거나 몇 발짝 나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빠지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내 형편은 엄청난 무게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무거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안게 된 수억의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빚을 안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 몸을 꽉 쪼이며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 족쇄를 떼어내지 못하면 사즉생(死則生)의 ‘배수의 진’도 별무소용일 터! 그래서 선택한 길이 ‘연금을 죽임으로써 연금을 얻는 방법’이었다. 연금을 해지해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든 후 난관을 돌파하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수확물로 즉시연금을 구입한 셈이다. 나는 해지가 불가능한 국민연금을 제외한 모든 연금을 해지해버렸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다. 올 상반기에만 보험 해약 환급금이 사상 최대인 14.7조원을 넘어섰고, 작년 한 해의 연금저축 해지 금액은 2.5조원에 달한다. 대부분 손해를 감수하며 해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필자처럼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적연금을 해지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부만 해지하면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합쳐 사적연금이라고 부른다. 개인연금에는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연금저축이 있고, 이런 혜택은 없지만 10년 이상 유지할 경우 발생한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연금보험이 있다. 연금저축의 경우 5년 이상 유지하고 만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3.3~5.5%의 연금소득세만 부담하면 되지만, 중도에 해지하면 16.5%의 기타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따라서 연금저축을 중도에 해지하면 납입 원금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연금보험은 다소 복잡하다. 연금보험을 중도에 해지하면 세제상 불이익을 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해지 환급금이 납입 원금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납입 원금 대비 해지 환급금의 비율을 의미하는 해지 환급률은 어느 보험사 상품이냐, 적용 이율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의 해지 환급률이 납입 원금의 100%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이 대략 7년, 최저이율보증형 연금보험이 10년 정도다.
퇴직연금은 근무기간과 최종 3개월간의 평균 임금에 의해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급여형,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기여형, 이직할 때 적립금을 계속 쌓아가는 계정인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나뉜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연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나이에 따라 3~5%의 연금소득세를 적용받지만,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은 퇴직소득세를, 근로자 자신의 불입금이나 운용 수익에 해당하는 금액은 기타소득세(16.5%)를 적용받는다. 연분연승법이 적용되는 퇴직소득세는 계산이 복잡하지만 가입해 있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문의하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연금은 세제가 다르고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다르다. 따라서 개인 사정으로 연금 해지를 고려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하자. 일분일초가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해지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연금은 한 번 해지하면 해지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둘째, 해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납입액이 부담스러워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해지보다는 납입 중단을, 자금이 필요해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이나 담보대출 등의 방법을 먼저 생각해보자.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은 연금보험 가입자가 자금 필요시 해약 환급금 범위 내에서 중도인출하고 나중에 추가납입으로 인출액을 보충할 수 있는 제도를, 담보대출은 퇴직연금 적립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셋째, 해지를 해야 할 경우에는 손해율을 따져보고 손해율이 적은 것부터 해지하자. 개인이 손해율을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가입해 있는 금융회사에 문의하면 된다.
가교연금 만들기
지금까지 빚 때문에 고민이 많은 50대의 연금술에 대해 살펴봤다. 이른바 연금해지의 경제학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50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50대 10년의 강’을 무사히 잘 건너는 사람은 안정적인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50대에 연금을 무턱대고 해지해버리면 노후에 가택연금당하기 십상이다. 50대 연금술의 핵심은 죽을 때까지 연금에서 소득이 창출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빚 규모가 미미하거나 없는 50대 중에 퇴직으로 인해 생활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자녀교육과 내 집 마련, 부모님 봉양 등으로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는 50대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이 나올 때까지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득이 적더라도 제2의 일자리를 찾고 가교연금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교연금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먼저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를 확인하고, 지금부터 그 나이까지 안정적인 소득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가입해 있는 개인연금이 있다면 수령 방법으로 수급기간이 정해져 있는 확정연금형을 선택하면 된다. 이 방법으로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힘들다면 퇴직할 때 받은 퇴직 급여를 활용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할 수 있도록 확정연금형 즉시연금이나 인출형 예금상품, 월지급식 펀드 등에 가입한다.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즉시연금과 인출형 예금상품과 달리 월지급식 펀드는 수입이 일정하지 못하거나 예상보다 일찍 수입이 중단되는 일이 생길수도 있지만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높은 수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각자의 위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적합한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
가교연금을 구축하고도 남은 퇴직 급여가 있다면 국민연금 수급 연령에 도달했을 때 종신지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해 부족한 국민연금 급여 수준을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에는 개인형 퇴직연금에 넣어두고 계속 운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낮은 수준의 이율에 만족하지 말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퇴직 급여를 가교연금 만들기에 다 써버린 50대라고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집이 있다면 60세 이후에 주택연금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신연금 만들기
50대 중에는 생활비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50대 후반의 A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다 지금은 가교직업(bridge job) 형태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A씨의 고민은 자녀의 결혼이다. 최근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A씨의 재산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눈치를 살피기에, 결국 A씨는 두 자녀에게 결혼자금으로 거액을 떼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A씨 부부의 노후생활 자금이 빠듯해질 것 같더란다. 더 이상의 재산을 자식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결심한 A씨는 비상자금을 제외한 금융자산은 모두 즉시연금으로, 집은 주택연금으로 활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올 2분기 60대 이상 취업자 수가 처음으로 20대 취업자 수를 앞질렀다.
23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분기 60세 이상 취업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6%(19만2000명) 늘어난 364만3000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0.5%(1만7000명) 증가한 361만4000명으로 집계된 20대보다 2만9000명 많은 것이다.
환갑을 넘긴 취업자가 20대보다 많아진 것은 고용동향조사를 시작한 1963년 이래 처음이다.
지난 1분기 50대 취업자는 568만4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32만3000명) 불어나며, 567만2000명으로 0.1%(6000명) 감소한 30대보다 많아졌고 2분기에는 격차를 키웠다.
이런 흐름은 2012년에 처음으로 남자에서 60세 이상 취업자가 20대를 앞지르고 여자에서 50대가 30대보다 많아진 데 이어 남녀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이에 따라 50세 이상 취업자 수는 20~30대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2분기 50세 이상 취업자는 952만1000명으로 20~30대의 933만5000명을 웃돈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저출산에 따라 젊은층 인구가 대체로 감소세인 반면 50세 이상 인구는 늘어난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15세 이상 인구 중 연령대별 비중은 1983년만 해도 20대(26.75%)가 연도별 고점을 찍으면서 30대(19.87%), 40대(16.81%), 50대(11.23%), 60세 이상(11.14%) 순이었지만 지난해에는 60세 이상(20.37%)이 처음으로 20%를 넘어서며 가장 많아지고 40대(20.12%), 30대(18.62%), 50대(18.21%), 20대(14.93%) 순으로 변화했다.
올해 2분기에는 그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50대(18.50%)가 30대(18.23%)보다 많아졌다.
베이비 붐 세대(1955~1963년생)들이 고도성장기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경제활동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이유도 50세 이상의 고용률 상승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베이비 붐 세대에서 고학력자, 임금근로자, 숙련노동자가 많은 특징도 있다.
이밖에도 당장은 교육비 부담 탓에, 앞으로는 기대여명 상승에 따른 노후 준비 때문에 은퇴를 늦추고 돈벌이를 이어가야 하는 사정도 50대 이상에서 경제활동이 증가하는 배경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