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곱게 늙은 여배우 다이안 레인,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 여행길에서 남편 아닌 남자에게 느낀 40여 시간의 미묘한 이성적 감정 등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영화 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딸도 2017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코폴라 감독의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가 80세에 만든 첫 장편 상업영화다. 일단 코폴라라는 이름만으로 믿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80세의 나이에서 오는 솔직함이랄까, 남편이 아닌 남자와 40시간 동안의 자동차 여행은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화였는데, 감추기 어려운 감정들을 오히려 남편이 도와줘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앤(다이안 레인 분)은 남편(알렉 볼드윈 분)과 전세 비행기로 칸에서 부다페스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앤이 귀가 아파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아르노 비아르 분)가 자기 차로 파리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한다. 7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자크는 군데군데 들르며 시간을 지체한다. 앤은 빨리 파리로 가자며 재촉하면서도 자크의 낭만적인 매력에 점차 빠져든다. 자크는 앤에게 파리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며 능청을 떤다. 남편은 바람기 많은 프랑스 남자를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자크는 여행 중에 틈틈이 늑대로 변할 소지가 있었지만, 파리까지 앤을 잘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 파리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앤은 자크와의 재회를 암시하는 여운을 남긴다. 자크는 앤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행복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남편과 살 만큼 산 유부녀의 틈새를 노린 질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지루함을 찌른 바람둥이 프랑스 남자의 수작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영화제로 유명한 칸에서부터 프랑스 남동부를 영화로 돌아보는 것이다. 실제로 관광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액상 프로방스, 로마의 유적 가르 수도교,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과 뤼미에르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포도주와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토리상으로는 안 넣어도 되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풍광을 담으려고 여기저기 들른 것으로 보인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안 레인의 매력이다. 1965년생으로 170cm의 늘씬한 여배우다.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소피 마르소처럼 책받침 미녀로 유명했다지만, 오십 고개를 넘다 보니 많이 늙기는 했다. 그러나 곱게 잘 늙었다.
지금까지 문화공간 취재를 다니면서 한 번쯤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8월호의 문화공간을 성수동 카페거리로 선정하면서 이곳과 인연이 깊다는 분과 함께했다. 최근에 등단한 신인 수필가이자 전 아쿠아리움 부사장 손웅익 동년기자다. 화학냄새 진동하던 공장지대에서 카페거리로 탈바꿈한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카페거리. 멋진 남자와 함께한 커피 향 가득한 거리 데이트에는 옛 추억도 함께 있었다.
성수동 거리를 걷다
성수동이 일반인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수제화 장인들의 구두를 판매하는 성수수제화타운(SSST)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다. 지하철과 버스 등 광고판을 통해 성수동이 어떤 곳인가를 인식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제화산업은 1950~1960년대 서울역 근처 염천교(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에서 시작했다. 1970~1980년대 일명 ‘싸롱화’ 전성기였던 명동시대를 거쳐 1990년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싸롱화 수요가 줄면서 서울 안에서 비교적 땅값이 낮았던 성수동으로 구두 관련 공장들이 이동했다. 그리고 버려졌던 옛 공장과 창고가 새로운 문화 공간과 카페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향기를 나누는, 문화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서울의 두물머리, 성수동 옛이야기
한양대 건축과 77학번 출신인 손웅익씨에게 성수동은 각별하다. 한양대 시절 화양동과 성수동을 지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발전상을 보며 살았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줄곧 공장지대였던 성수동. 이곳에는 건축과 시절 학내 모임인 공간연구회가 있었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다.
“바로 위 선배 학번에 부자가 많아서 아파트에 전세 얻어서 작업실로 썼어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건축작업보다는 선배들이 카드게임하시면 라면 끓이고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그리고 성수동이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쳐지는 양주의 두물머리 같은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성수동은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사이 지역과 건대, 세종대, 한양대 지역을 감싸고 있다. 한강 개발 이전에는 장마철 이 지역의 둑이 범람하느냐 마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
“둑이 터지기 직전에 비가 그치곤 했지만 거기 문제가 뭐냐면 중랑천 변에 판자촌이 있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거기서 살았어요. 집들이 마치 해변에다가 지어놓은 것 같았어요. 비가 오면 집들이 해변에 있는 것처럼 잠겼었죠. 집이 떠내려가면 하룻밤에 집을 한 채씩 지었어요. 블록을 쌓고 서까래는 허접한 나무를 쓰고 기름종이를 붙이고 말이죠. 조세희의 에 나오는 집이 바로 그런 집들입니다. 제가 당시 산 증인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온 만큼 집이 떠내려갔다. 그러면 전기도 없던 시절 횃불을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중랑천 상류인 의정부 지역에서 돼지, 닭과 함께 오물이 쓸려 내려오기도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방에 누워서 밖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여요. 블록 사이사이 구멍이 뚫려 있었거든요. 그러면 겨울에는 얼마나 또 추웠겠어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모두의 거리’란 이름의 성수동 수제화 거리 인터넷 사이트는 구두거리와 관련한 정보를 비롯해 맛집과 카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seongsushoes.modoo.at
■청계천과 피맛골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 독자여러분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습니다.
이메일로 신청 부탁드립니다. bravo@etoday.co.kr
형수님은 형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롭게 혼자 사신다. 형님이 없으니 시댁과는 관계가 끝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해 필자의 동생까지 한 동네에 살다 보니 종종 같이 만나 어울린다. 그럴 때면 무릎이 불편해 어디 다니지도 못하는데 불러줘 고맙다고 한다. 그날은 공식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같이 음주 가무를 할 수 있는 날이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삼촌들이 불러내는 날은 아들도 어쩔 수 없다.
이날도 필자가 저녁식사나 대접하려고 형수님 스케줄을 문의했다. 근처에서 가구를 보고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자기가 횡재한 날이니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내막을 들어 보니 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외에 새로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아들이 새 아파트로 이사 가서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내용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더란다. 새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전세나 월세로 세를 내어줄 수 있는데 자신이 거기 들어가 살면 전세금도 월세도 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살던 집 도배나 새로 하고 살겠다고 하자 아들이 도배는 물론 가구와 침대까지 완전 리모델링해주겠다고 했단다. 그러니 횡재한 것이란다.
리모델링은 방 하나씩 공사하며 살림살이를 옆에 잠깐 치워두는 것이 아니라 컨테이너 창고를 빌려 살림을 모조리 빼내야 한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아들 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며느리가 요즘 트렌드는 집 안을 되도록 심플하게 해놓고 사는 것이라며 지금 쓰는 가구 등을 다 버리고 새로 장만하라고 했단다. 그동안 정든 멀쩡한 가구며 가전제품까지 몽땅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효심 깊은 조카가 부럽기도 했다. 형수님은 연금 수입도 있는데 아들이 다달이 용돈까지 넉넉히 줘서 부족함이 없지만 다리 때문에 외출하기가 어려워 마땅히 쓸 데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제 리모델링까지 하니 그 집에서 여생을 보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필자의 아들딸과 비교해서 생각해봤다. 둘 다 사회에 정착하느라 아직 힘겨워하는데 형수님 횡재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괜히 부담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조카처럼 필자에게 살림살이 새로 장만하라고 하면 오히려 마음의 짐이 될 것 같다. 현재 사는 집에서 여생을 마칠지는 모르겠으나 조건이 좋아지면 이사할 생각도 있다. 짐 정리는 그때 하면 된다.
자신의 무게, 즉 자아라는 의식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보다 무겁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결혼한 지 40년째에 접어드는 지금도 아내가 생각하는 가장의 책임과 무게는 남편이 생각하는 책임과 무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가끔 가장의 권위를 존중해 달라고 하면 지금 같은 시대에 무슨 권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아내에게 농담으로 “당신과 결혼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사글세나 전세 한 번 살게 한 적 없었소!” 하면 아내는 “고마워요” 하기는커녕 “난 결혼 전에도 사글세나 전세로 살아본 적 없어요. 늘 우리 소유 집에서 살아왔어요” 한다. 8촌 이내 친척 모임에서 누나들 소개로 아내와 맞선을 봤다. 그 뒤 아버지께서 집안을 알아보시고 좋다고 하셔서 7남매 장남 역할을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 필자는 결혼 전에 이미 방 두 개짜리 13평 아파트를, 당시 현금 20만원과 19년 분할상환 융자조건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아내가 첫딸을 출산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울산에서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쇠를 다뤄 화물선 만드는 조선회사에 8시까지 출근했고, 퇴근은 해가 진 후 한참 지나서 했다. 매일 매일이 피곤했다. 그날 저녁에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한밤중에 딸아이가 계속 울어댔다.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대며 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여보, 아이가 계속 울어대니 좀 달래시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딸아이가 울어대는 통에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 보니 아내는 일어나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돌아누워 쿨쿨 자고 있었다. 순간 무시당했다는 감정이 일어나면서 화가 솟구쳤다. 피곤한 가장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내가 미워 상당히 아프게 얼굴을 때려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벌떡 일어나 자는 사람에게 왜 그러느냐고 대들었고 밤새 언쟁을 했다. 그 후 아내는 필요할 때마다 그날의 일로 두고두고 공격을 해오곤 했다. 산후 몇 달간 쏟아지는 잠을 야속하게도 몰라줬다는 것이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가 태어날 때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여러 보험을 들어줬다. 또 7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동생들 학비에 결혼식 등 돈 쓸 일이 끊이지 않아 목표한 저축과 목돈 모으기가 어려워 아내가 힘들어했다. 어느 날인가 여동생 결혼식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집으로 가다가 가전제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가 세탁기를 즉흥적으로 샀다. ‘이렇게 열심히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과연 남는 게 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까지 아내는 손빨래를 했던 것이다. 갑자기 배달된 세탁기에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갑자기 무슨 세탁기예요?” 하며 놀랬다.
결혼 10년째가 되니 아이들 나이가 10세, 8세, 5세가 됐다. 당시 회사가 특별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책상을 치우고 교육을 시켰다. 150여 명이 제자리에 못 돌아올 위기에 처했을 때 필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고독과 아픔을 느꼈다. 마치 홀로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처럼 가장으로서 무거운 마음뿐이었다. 나라는 존재 가치와 능력에 대해 자괴감이 몰려왔고 아내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필자를 오랫동안 포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더 강해졌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아내와 하고 싶은 것들을 과감하게 실천하기 시작했다. 결혼 25주년 때 하와이를 가자고 하자 아내가 킬리만자로를 등정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5000미터 높이 이상의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 정상까지 가고 싶다고 해서 3주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겸 떠났다. 그리고 아마추어로서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킬리만자로 산의 두 봉우리(해발 5685미터 길만스포인트와 5895미터 우후르피크)도 등반했다.
지금은 정년퇴직한 지 9년째다. 6시 반에 출근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조찬회의를 하던 생활을 10년도 더 넘게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느긋하게 늦잠을 자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도 다시 누워 휴대용 라디오를 들으면서 유유자적하는 게 좋다.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즐기려고 한다.
아내와는 가끔 언쟁도 하는데, 아내는 필자가 권위적이라며 불평을 하고 필자는 가장의 권위를 좀 존중해 달라고 한다. 아내와 감정 대립을 할 때면 필자는 침묵 상태로 들어간다. 일상생활은 하면서 상당 기간 아내와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필자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려 하거나 이기려 하면 감정의 회오리와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반복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묵언수행 또는 침묵피정 같은 행위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침묵으로 부족하니 스킨십이 많아지고 급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서로 참지 못한다. “내 스킨십에 눈물 좀 찔끔 흘려줘야 하는 거 아냐?” 하면 아내는 “아직도 너무 권위적이십니다요!” 한다.
연필화를 수년간 그려온 아내는 최근 수채화를 배운다. 어느 날은 아내가 표본 책을 가지고 오더니 “선생님에게 큰 스케치북에 표본 그림을 모두 그려보겠다고 했어요” 한다. 필자는 “잘했소! 하다가 못하면 가장인 내가 다 해줄게요” 했다. 그러자 아내는 “어휴! 또 도졌네요, 그 병이!” 한다.
발트 관광을 할 때, 전세 버스 계단을 올라서면서 모두들 하는 말이다. 현지인 기사가 “아이고, 죽겠다!”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직역을 하자니 말이 안 되고 노인들이 몸이 힘들거나 피곤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평소 많이 걷지 않던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구경을 하고 쇼핑을 하느라 걸어 다니다가 버스에 오르면 긴장이 풀리고 피로감에 저절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노인들의 단체관광은 특징이 있다. 바로 ‘로코모티브 신드롬Locomotive Syndrome, 운동기능저하증후군’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몸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거동장애다. 다리 근육이 약해지면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로해진다. 균형 감각도 떨어져 지팡이나 난간을 붙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요실금 증세가 있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창가 쪽은 나올 때 불편하니 복도 쪽 좌석을 달라고 요청한다. 버스로 이동할 때도 장시간 운전을 하면 안 되고 화장실이 있는 곳마다 내려달라고 한다. 유럽도 여자화장실이 남자화장실과 같은 비율로 있어 여자화장실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래서 남자들이 용무를 끝나면 체면불고하고 남자화장실을 같이 이용하게 한다.
유럽의 보도블록은 옛날 마차가 다니던 길 그대로인 곳들이 많다. 작은 돌들로 불규칙하게 울퉁불퉁 만든 길에서 모처럼 멋을 낸다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다가 발목을 삐는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네일아트라 하여 인공손톱을 붙이는 여성이 많다. 가만히 두면 별일 없지만, 머리를 감을 때는 손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럴 때 인공손톱이 떨어져나가는 사고가 생긴다.
여성들은 대체로 가방이 크다. 수시로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는다. 그래서 혼자 짐 보따리를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퀴가 있으니 혼자서 어찌어찌 해보려다가 손목 근육을 다치기도 한다. 남편이 동행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같이 간 남자들이 도와줘야 한다.
식당에서 뷔페식 아침을 먹을 때 계란과 오렌지를 가져가긴 했는데 껍질이 안보여, 한국인들은 계란과 오렌지를 껍질째 먹느냐는 핀잔을 받은 적도 있단다. 쉴 새 없이 먹으니 화장실에도 자주 가야 하고 살도 찐다.
금방 산 목걸이를 걸고 나오다가 분실하기도 하고 모자, 선글라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가방이 여러 개인 경우는 깜빡 잊고 숙소에 두고 나오기 쉬워 위험하다.
유럽의 여름은 백야의 계절이라 자정까지도 어둑하지 않다. 그래서 밤늦도록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때가 많은데 노인들은 저녁식사를 마치면 그대로 숙소로 들어가버린다. 그렇다고 시차가 있으니 바로 잠 드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나이 들면 가까운 곳으로 가라고 하는 모양이다.
주민센터에 갔다.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기 위해서였다. 다른 동네에서는 한 달 전에 일부러 연락을 해줬다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시간을 내어 찾아갔다. 물론 생일이 되려면 아직 일주일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 카드는 65세 생일 때부터 사용할 수 있다. 담당 여직원이 간단한 설명을 해줬다. 집에 와서 읽어보니 ‘수도권’이라고 되어 있어 수도권 어디를 말하는지 알아보니 서울에서 출발하는 모든 전철을 의미했다. 서울-춘천, 서울-온양, 서울-인천이 모두 가능한 것이다.
어르신 교통카드의 의미는 크다. ‘공인된 노인’임을 입증해주는 카드다. 시니어들이 고궁이나 박물관 등에 입장할 때 어르신 카드가 있으면 무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어르신 카드가 없을 때는 전철을 탔을 때 경로석에 앉기가 어색했다. 노약자용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모로만 보면 노인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보이는 시니어들이 있다. 자격이 있는데도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르신 카드가 있으니 경로 대우를 받아도 떳떳하다.
무임승차하는 인원이 많아 전철 운영이 적자라는 얘기가 있다. 현재 약 20% 정도 적자라는데 65세 이상 고령자가 급격하게 늘면 2030년에는 30%, 2050년에는 50% 정도가 무임승차 비율이 된다고 한다. 이미 온양온천역은 50%가 고령자 무임승차란다. 서울에서는 제기동의 무임승차가 50%가 넘고 가좌, 동묘 앞 등은 40%나 된다. 물론 무임승차는 노인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어린이나 장애인 등도 포함된다. 그래서 노인 연령을 70세로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당장 무임승차를 없애면 연간 3000억원 이상을 수입으로 잡을 수 있다는데 이는 단순 계산이다. 전철은 어차피 그 시간에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출발한다. 또 무임승차를 할 수 있기에 온양온천이나 춘천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거기까지 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단 노인들이 움직이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 또 노인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필자의 경우는 정기권을 이용했으므로 한 달 전철 비용이 5만5000원 가량 들었다. 물론 버스도 타고 서울을 벗어날 때는 정기권 통용이 안 되므로 별도로 티머니 카드를 썼다. 정기권은 한 달 60회를 초과한 경우도 있어 새로 30일을 찍어야 하니 한 달의 개념이 앞당겨지기도 했다. 이 비용도 무시하지 못한다. 앞으로 어르신 카드를 이용하면 1년에 66만원이 절약되는 것이다. 영화관에서도 어르신 카드로 할인이 되니 앞으로 영화관에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정상 가격은 9000원, 경로우대 가격은 6000원이다.
주민센터에 간 김에 기초연금 대상자 여부도 알아봤다. 1인 기준 한 달 소득이 119만원 이하여야 하는데 국민연금은 그 이하이지만, 부동산 전세금을 수입으로 잡아 계산하니 훌쩍 넘어 버렸다. 저축액도 법정 이자율 수입으로 계산하는 모양이다. 물론 해당이 안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가평군 청평면에 있는 쁘띠프랑스는 지난번 청평에 갔을 때는 못 보고 그냥 지나쳤었다. 폐점시간이 오후 6시라 5시까지만 입장이 허용되는데다 주말에 가야 인형극 등을 볼 수 있다고 해서였다. 입장료도 성인 8000원으로 비싼 편이라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경로 우대가 6000원인데 일행이 있을 경우 전체 입장료는 몇 만원이 되니 무시 못 할 부담이었다.
이번에는 마음먹고 쁘띠 프랑스에 갔다. 청평역에서 약 10km 강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인도가 따로 있지 않고 차도 갓길로 걸어야 하는데 위험하다. 차도가 굽은 길이 너무 많아 자동차들이 너무 속도를 내서 시야 확보가 어려우므로 걷기는 위험하다. 자전거족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무리로 다니니 그나마 눈에 띌 뿐이다. 버스도 지나다니기는 하지만, 배차 간격이 멀어 기다리기 지루하다. 교통이 상당히 불편한 동네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가기는 지인의 차를 빌어 타고 갔다. 중국 관광단 전세버스가 몇 대 있었고 아이들을 데려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담양에 있는 프로방스 마을을 보고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담양 프로방스는 입장료가 없고 온 동네가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아름다웠다. 집도 모두 모양이 달라 아기자기 했다. 특히 동네 가운데 큰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쁘띠프랑스는 그에 비하면 집들의 모양이 비슷하고 황토색이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강 건너 용문천 마을에서 본 쁘띠프랑스는 산 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동네였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다닥다닥 붙은 건물에 건물마다 특색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유럽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으나 그 중에서도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테마로 한 공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생택쥐베리 기념관이 인상에 남는다. ‘어린왕자’를 썼고 비행기 조종사로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추 당해 죽었다. 그 시절에 비행기 조종을 좋아했고 비행기 타다가 죽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그의 소설들을 볼 때 별난 인생을 산 사람인 것 같다. ‘어린왕자’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고 어른이 되어서도 몇 번 읽었으나 그리 감동이 오지 않았다. 다만 순진하게 보이는 캐릭터만 친근하게 느껴질 뿐이다.
전체적으로 30여개의 건물이 있다. 오르골 시연 및 설명을 하는 메종 드 오르골, 유럽 동화 인형극을 하는 떼아뜨로 별 극장, 마리오 네트 퍼포먼스를 하는 야외극장에는 시간 대별로 공연을 한다. 유럽과 정서가 달라서인지 인형극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인형극을 성인들도 즐겼다고 하는데 솔직히 필자는 와 닿지 않는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가장 단순한 것이고, 진정한 재산은 남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린왕자를 통해 나타냈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에 이해하기는 어렵고 성인이 되어서도 역시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다. 전 세계 1억 부 이상이 팔린 책이라는데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다.
그 외에 도자기 전시관, 유럽풍 거실, 침실, 갤러리, 놀이방, 아트 체험실, 인형의 집 등이 있다. 벼룩시장도 살만한 물건도 없고 파는 사람도 없어서 물건을 사고 팔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은 지 꼭 10년째 되는데 아직 인근 주변 정리도 안 끝나 벌거숭이 노지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2시간가량이면 다 본다. 아이들 입장료도 5000원이라 만만치 않다. 어른 둘에 아이 하나만 데려 가도 입장료만 2만 1000원인 셈이다. 입장료를 절반가량으로 낮춰야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인연도 있고 더 오래 만나지 못해 그립고 아쉬운 인연도 있다. 인간관계를 의지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리라. 인연은 구름처럼 마음 한구석을 지나간 그림자요, 물 위에 떠가는 꽃 이파리다. 만나고 싶어도 이승에서는 못 만나는 친구도 있고 인연이 되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인도 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Y는 미소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에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외모는 거의 스타급이었다. 필자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말도 못하고 그저 주위를 맴돌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졸업 후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다른 친구를 통해 종종 소식만 듣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 모두가 남미 우루과이로 이민을 갔다. 이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환송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갔는데 그 친구는 벌써 떠나버리고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남미로 여행이라도 가면 수소문해서 만나보고 싶은 친구다.
고등학교 친구 J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IMF 전후에 만나 어려운 시기를 같이 보냈다. 취업 기간을 빼고는 거의 매일 만났다. 사무실을 차려 전업 투자자로도 같이 활동했다. 그러나 주식투자는 수익의 변동이 크고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J는 할 수 없이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옮겨 살다가 나중에는 봉천동에서 월세로 살았다. 자존심이 강한 J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절대 없었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자가 취직을 하게 되어 좀 도와주려고 하던 차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망연자실했다. 좀 더 헤아렸어야 했는데 후회가 컸다. 내세에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P는 자격증 시험공부를 공부하다 만난 지인이다. 수년을 함께 공부하고 낙방도 함께 경험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필자는 다른 일을 하느라 중도에 포기했지만 P는 계속 공부를 해 10년 만에 자격증을 땄고 현재 관련 업계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서로가 하는 일이 달라지니 만나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필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동종 업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면 관계가 더 긴밀해졌을 것이다. 아쉽다.
부친이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다. 밖에서는 무골호인이었지만 집에서는 너무 엄격하신 아버지였다. 일방적으로 강하게 요구하시는 것들이 많아 필자가 가끔씩 반발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유를 주셨더라면 필자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반발하는 마음에 아버지가 권하고 강요하시면 무조건 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부친의 바람과는 달리 전공, 종교, 직업 등에서 매번 다른 길을 택하곤 했다.
아버지는 교장으로 정년퇴직하기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17년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병으로 고생하실 때는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지셨다. 아무리 잘해도 한 번도 칭찬을 받은 적이 없어 어느 날 넌지시 왜 그러셨냐고 여쭈어보았다. 교만해질까봐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자식을 깊이 사랑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나마 살고 있는 것은 다 아버지의 역량 덕분이라고 여겨진다. 기대에 못 미친 불효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신 차려 잘해드리려고 하니 안 계신다.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해요. 다시 만나면 잘해드릴게요. 아버님 사랑합니다.
후회와 그리운 마음에 때늦은 사부곡을 불러본다.
처음엔 진지하고 무게 잡아 딱딱하던 종편 채널 정치 평론가들이 많이 달라졌다. 아마 방송국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요즘은 마치 ‘준 연예인’이라도 된 듯하다. 어느새 인기 패널도 생겼단다. 그래서인지 시종 소란스러운 정치판을 다루는데도 여성 팬이 많아졌다는 소식이다. 필자도 어느새 시간에 맞추어 고정적으로 그들의 입담을 즐기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도 어김없이 즐기는 채널을 틀었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는 참담했다. 5개월여를 숨 가쁘게 달려오던 정치 미니시리즈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는 극적인 장면이다.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이었다. 화면은 구속되는 대통령을 반복해 내보내고 있었다. 우아하던 올림머리는 풀이 죽고 얼굴도 초췌했다. 비록 한심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박 전 대통령의 당선은 매우 역사적인 일이었다. 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박근혜가 아직도 여성으로 보이냐?” 라는 괴담도 있기는 하지만, 그의 등장이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두 번 다시 여성 대통령이 나오지 못하게 대못을 박아 버렸다.
그동안 유행하던 페미니즘이 정치 바람에 오염되어 퇴색하기는 했어도 그런 유행 덕분에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아직도 공직이나 대기업에서 여성의 지위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남녀평등의 대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우려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박근혜만 잘했어도 하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여성에게 우호적인 최재천 교수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남성의 시대는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가 등장하고 25만 년 동안,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었던 시대를 계산해 보면 1만 년 정도에 불과하다.”며 위로한다. 곧 여성의 시대가 다시 온다는 말이다. 사실 지금이 근육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어린 세대에서는 이미 전세가 역전된 것인지 모른다. 어느 남녀공학 고등학교 교장의 토로가 흥미롭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면 예전에는 여학생들이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요즘엔 거꾸로 남학생이 옷을 싸 들고 화장실로 간다며 웃었다. 여학생들이 교실에서 거침없이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세대 빼고는 이미 변화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얘기다.
가정에서도 그런 세상의 변화는 감지된다. 변화에 적응하는 남성들은 살아남는 반면 아직도 환상 속에 사는 남성들은 버림받기 십상이다. 우리 세대에나 아직 세상물정 모르고 버티는 남자들이 천연기념물로 존재하지만, 젊은 층에서는 가사 노동하고 화장하는 남자들이 사랑받는 실정이다. 요즘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돌들은 한결같이 어여쁘지 않은가.
그동안 20세기 산업사회에서 남성들이 만든 경쟁 중심 사회 구도를 벗어나 21세기 지식산업 시대에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조화와 공존의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비록 박근혜는 실패했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 공감과 소통이라는 여성성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임이 확인되었다. 어느새 화면에 여성 정치 패널이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