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순옥(제1회 브라보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여기 이 쇼핑 봉투에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보나마나 작아. 이건 너무 크고, 어쩐다?”
아이가 건네준 서너 개의 쇼핑 봉투는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차례로 옆으로 놓였다. 내 앞에는 아이가 가져갈 옷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담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양이 어중간해서 쇼핑 봉투로 한 번에 담으려는 손길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가야 하는 길을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기에는 번거로워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순간 무언가 떠올라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갑 속에서 두둑한 상자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꺼낸 것이 바로 보자기였다. 크고 작은 색색의 조각보로 만든 보자기들, 그중에서 제법 넉넉한 크기로 골라 짐을 싸니 한 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때? 좋다. 손에 들기도 편하고 예뻐서 보기에도 좋고.”
“응? …으응.”
아이의 얼굴에는 마뜩치 않은 웃음이 흘렀다.
“됐어. 어차피 내가 들고 갈 텐데.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제 짐을 쌌으니
나갈 준비해야겠다.”
하긴 나도 보자기를 서슴없이 손에 들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직 공부 중인 아이에게는 영 어색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자기는 쇼핑 봉투가 나오기 전에는 짐을 옮기는 일을 전담했고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썼다. 내 기억 속에도 생전에 엄마가 볕 좋은 날 툇마루에 앉아 보를 만드는 모습이 있다. 주로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크기에 따라 자르고 이어 붙여가며 만들었는데 특히 한복은 화사함이 좋아 조각보로 이어 붙이며 상보나 베갯잇. 보자기 등으로 탄생하곤 했다.
조각보는 크고 작은 조각들을 손으로 바느질해야 하고, 홑겹이기 때문에 시접을 서로 맞물려 고정시켜 나가는 쌈솔로 해야 한다. 그 과정이 한 번에 ‘뚝딱’이 아닌.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어 붙여가는 부분은 홑겹이 두 겹으로, 바탕보다 진한 부분으로 드러나고, 그렇게 도드라진 선은 다시 이어지며 완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자칫 설렁설렁 바느질을 했다가는 모양이 엉성해지는 것은 물론 이음 부분이 벌어져 제 기능을 못하고 전체적인 균형도 일그러지고 만다.
삯바느질로 자식 넷을 키워낸 엄마는 시내에서 꽤 이름 있는 한복집에서 일을 맡아 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무척이나 바지런했던 것처럼 바느질 솜씨도 좋아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에 단골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늘 화사한 한복과 함께하고 계셨다. 그런 엄마 곁에서 어쩌다가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세모난 눈길로 바늘을 놓게 했다.
“엄마는 한복을 만들지만 너는 한복을 맞춰 입어야 헌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바느질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특히 한복을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나도 참여할 수 있어 좋았고 조각보로 이어감으로써 점점 커져가는 시간은 뿌듯함마저 갖게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보자기에 짐을 싸면 특별함이 더해져 참 좋았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부드러운 질감도.
지금 돌아보면 조각보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탕이 되는 기본 조각보에 덧대어지는 크고 작은 조각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로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했던 서러움으로 채워진 조각보 하나,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덤벼들 기세로 마음의 날을 세웠던 조각보 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 힘을 얻었던 조각보 셋….
처음에는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 솜씨가 서툴러 이리 삐죽, 저리 툭, 이음 부분이 삐져나오고 시접 부분이 불거져 풀고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조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 힘듦으로 이어진 조각보는 내 삶의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고 은근한 배짱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많기를 바라는 내 삶은 수많은 조각들로 이어져 왔고 또 다른 조각들로 이어질 것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을 보내면서 얻게 되는 일상의 소소함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마음이 풀어내는 것들로 조각보는 이어져가고,
한 숨 쉬어갈 때쯤이면 상보가 되고, 보자기가 되어
내 삶의 반짝이는 순간이 되어준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앙증맞은 소반 위에 차려진 밥상 위에 놓인 상보가 전해주던 맛있는 즐거움으로. 자식의 나이에서 벗어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준비할 때 손수 지어주신 한복을 싸주던 보자기가 품어주던 설렘으로, 엄마의 사랑으로.
“엄마, 이제 나가야 해요. 버스 도착 10분 전이에요.”
“그래. 가자.”
나는 아이의 짐을 싼 보자기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질감이 기분 좋음으로 전해져 왔다. 삶의 너울로 울퉁불퉁한
내 삶을 한 번에 안아주는 든든함으로.
조각보자기를 통해 내 삶을 마주한다. 빳빳한 쇼핑백보다는 조각보자기가 더 좋은 만큼 그 어떤 감정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 듦의 여유로움을, 색도 크기도 다른 조각보 속에 담겨 있는 내 삶이 소중함을, 조각보를 바느질하며 남아 있는 내 삶을 담아가는 주름진 손에 힘을 쥐어본다.
바다와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서면 그립다. 인천의 바다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낮은 곳이거나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바라보아도 자신을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다. 인천을 거쳐간 근대 역사를 더듬어가며 그리운 바다를 가슴에 품고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거리를 걸으면 하루짜리 최고의 힐링 여행이 완성된다. 천천히 걸어도 반나절이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개항기 역동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이국적 풍광의 인천개항누리길을 걸어보자.
코로나 시대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여행 기분은 제주를 가더라도 비행기도 타고 면세점도 들러야 제맛이다. 전철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인천을 가는 여행은 비행기 타지 않고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겨울 오후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인천역은 서울시청역에서 1시간 9분이면 도착한다. 금방이라도 서해가 펼쳐질 것 같지만 지하철 1호선 종착역에서 내리니 차이나타운임을 알리는 황금빛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서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화교뿐만 아니라 여러 바다를 거쳐 건너온 사람들도 있다. 인천항은 조선시대에 근대 문물을 처음 받아들인 항구였다.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연한 건축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특유의 현란한 붉은색 간판이 거리를 원색으로 물들인다. 반면 일본인 거리는 단색의 정돈된 이미지가 완연하다.
자장면 맛은 변함이 없지만
계단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가면 좌우의 석등이 다른 생김새로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 양식을 보여준다. 계단 끝부분에는 공자 상이 자리 잡고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유로운 이동이 방해받는 시대, 서해의 겨울바다를 보려면 차이나타운을 천천히 30여 분 정도 걸어 다니다가 자유공원으로 올라야 한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던 이 지구는 지금 조용하다. 간간이 마스크를 끼고 방한 장비로 중무장한 산책자들만 보일 뿐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간신히 눈만 빼꼼하다.
평소에는 식사시간이 되면 긴 줄이 이어졌다는 유명한 중화요릿집도 점심시간인데 홀이 한산하다. 자장면의 맛은 변함이 없지만, 풍경은 어쩐지 낯설다. 과장해서 말하면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다. 차이나타운 상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의 개점휴업이다. 코로나 사태뿐만 아니라 영하 11℃의 한파도 한몫한 듯하다. 이 모든 현상은 전 지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서 비롯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문제가 발생하면 답을 구해 슬기롭게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인천은 최초에 대한 기록이 꽤 있다. 1882년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체결지, 이듬해 해관 설치, 1884년 청관(淸館)의 기원과 자장면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교회, 호텔, 공원, 전환국, 철도, 우체국 등 한국 근대사의 여명을 장식한 도시다.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인터넷과 디지털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근대의 전 지구적 접속은 항구가 중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이 선구적 위치를 점했다. 이동, 변화, 융합, 그리고 창조가 가능했던 국제도시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 지금은 항구보다 세계적 허브공항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바다를 통해 문화는 교류되었고 이 도시는 교류 초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항도시 인천이다. 개항 이후 세계와 처음 만난 도시가 인천이고 이후 천지개벽의 역사가 펼쳐졌다.
운요호사건으로 일본과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1883년에는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을 개항하기에 이른다. 속속 외세가 당도한다. 한국 화교의 태동은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시작됐다. 화교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청나라는 3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4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 남방 출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청국 조계지는 상징적인 조세는 냈으나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경찰서, 감옥, 신문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중국이었다.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의미를 지닌 사당 의선당(義善堂)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항해의 수호 여신으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과 같은 마조신을 모시고 있다. 화교들이 터를 잡으면서 중국 문화가 인천으로 유입되었고 그렇게 자장면과 같은 중국적인 것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북적이며 향불이 끊임없이 타올랐던 의선당의 향불도 코로나 시대인 현재는 꺼져 있다.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
일본은 자본의 침탈을 개시한다. 일본의 조계지였던 개항장 일대는 현재 역사 문화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적산가옥이 즐비한 일본풍 거리다.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는 1882년에 건립된 일본 영사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위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장소였다. 해가 잘 들고 산을 배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선점했다.
구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1888년에 건립되었다. 인천의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해운업을 독점했고 쌀과 잡화를 실어 나르는 기선을 운영했다. 인천은 대외 항구뿐만 아니라 강화를 거쳐 노량진에 이르는 국내 운송까지 겸하는 요충지였다. 일본 해운회사의 본점 또는 지점이 설립되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개항 초기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출장소로 출발했고 1883년에는 인천지점으로 승격해 본격적인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주로 사금과 금괴의 업무를 봤다. 이후 해관세에 대한 업무도 개시했다. 화폐로 사용했던 은폐에 대한 업무도 진행했다. 개항 전에 상평통보나 당오전을 사용했던 조선은 개항 후 돈의 가치가 하락하자 일본의 자금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인천과 경성에 전환국을 설치해 일본과 같은 신식 화폐도 발행한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 은행이 제58은행이다. 이후에는 1은행과 18은행에서도 업무를 같이 수행한다. 근대식 금융권이 최초로 인천에 밀집돼 있었다는 것,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근대가 태동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인천은 자본가, 은행가 상인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무역은 일본이 앞섰고 정치 외교에서는 청나라가 우세한 분위기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앞서기 시작한다. 외국 자본의 횡포로 조선의 소가죽, 호피, 쌀 등이 헐값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개항 이전의 인천은 200여 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황무지에 불과했다. 이곳에 일본 세력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의 쇄도가 이어지며 외국인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조합을 만들어 협약을 맺고 건축을 했다. 차별을 두는 지배자들의 속성을 잘 보여줬다.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도 변화를 맞는다. 은행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초기 일본은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우선 경제적 이익에 집중했다. 따라서 은행의 침투가 활발했다. 건축상의 변화는 벽돌을 쌓는 신기술에 있었다. 인천 개항장에 벽돌 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의 은행 건물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졌는데 멀리서 보면 돌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일본도 기술 초기 단계여서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화되기 이전이었다. 나무로 전환된 신고전주의 양식이 인천에 많이 나타났다.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하부 2m 정도는 화강석이고 상부는 벽돌, 출입구는 석재로 축조해 건물을 지탱하도록 했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청일 조계지로 형성되었던 지역은 1910년 일본 상인의 거주지로 바뀌었다. 일본은 인천 일본인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해 홍예문까지 뚫는다. 1906부터 1908년까지 3년간 이어진 공사였다. 돌산을 폭파하느라 많은 희생을 내고 준공도 늦어졌다. 일본 명칭은 아나몬[穴門]인데 조선에게는 혈문(血門)이다.
서양인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는 각국 외국인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된 시설이었다.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이다. 전망이 빼어난 곳에 서향으로 지었다. 인천 앞바다로 열려 있는 구조다. 개항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영사관, 무역회사 등 서양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머무는 등 일제강점기 전의 개항 시기에는 외국인으로 북적댔다. 조계지가 철폐될 때까지 중요한 외교 장소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조수간만의 차로 무역항으로서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를 건설한다. 조선과 세계를 잇는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조수간만의 차를 이겨냈다. 백범 선생도 이때의 작업에 강제동원됐다고 백범일지에서 고백했다.
개항장에는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이 있다. 역사적 상처도 있다. 이국적 공간이자 부인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긴 안목으로 반면교사로 삼아 효율적 공간으로 꾸려야 할 일이다. 문호개방으로 인천은 신문물을 처음 접했고 근대과학 산업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새로운 문명을 만나 근대도시가 된 인천에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아픔과 슬픔 속에서 140년 전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국제도시다. 스스로 변하지 못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개화시기보다 더 변화가 심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성탄절 분위기로 거리가 술렁거릴 때면, 오래전 세모의 귀성열차가 떠오른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12월 31일, 내가 타고 온 열차는 6·25 피란열차 같다 했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지붕 위까지 사람과 짐으로 빼곡한 사진들을 보면, 거기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객차 안은 사람이 지나다닐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입석 승객이 꽉 들어찼다. 객석에는 예외 없이 세 사람씩 앉았고, 무릎에 어린아이를 앉힌 사람도 많았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짐을 올려두는 선반까지 차지하고 누웠다. 연말 귀성 인파였다.
그런 혼잡 속에 화장실 가는 사람, 사이다 맥주 파는 홍익회 판매원, 역마다 밀고 들어오는 승객들, 검표원, 차장 등이 수시로 인파를 헤치고 다녔다. 비켜 달라, 발 밟지 마라, 사이다 한 병 달라, 조용히 해라…. 말과 말이 부딪치고, 억양에 감정이 묻어나고, 더러는 상소리도 오갔다. 추운 날인데도 사람의 체열과 난방 열기로 객차 안은 후덥지근하여 창을 열어야 할 정도였다.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는 쾅쾅쾅 마치 총소리 같은 경음이 귀청을 때렸다. 일제히 차창을 내리는 소리였다. 창을 닫지 않으면 기관차 연기가 객실로 쏟아져 들어와 기침들을 해댔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있다가, 내리치는 창틀에 맞아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고….
정오 무렵 제천 역을 떠난 열차는 그런 혼잡과 소음을 싣고 청량리역에 닿았다. 저녁 8시, 정선 화암면을 떠난 시간이 새벽 4시였으니 서울까지 16시간 넘게 걸린 셈이었다.
역사를 빠져나오는 내 귀청에 울린 멜로디가 묘한 감흥을 일깨웠다. 가수 손시향의 히트곡 ‘이별의 종착역’이었다. 처음 타보는 전차 차창 밖 종로 거리 풍경은 놀라움과 경탄의 연속이었다. 세상에! 책방이 저렇게나 많다니… 저렇게 밤거리가 밝다니… 사람들은 왜 저리 많지? 그렇게 나를 달뜨게 했던 1960년은 저물었고, 중학교 시절도 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꿈에도 그리던 서울 학생이 되어서는 신기한 것, 갖고픈 것이 너무 많았다. 제일 신기했던 건 스케이트였다. 날렵한 가죽 신발에 반짝이는 스케이트 날은 겨우내 마음속에만 있었다. 그 비싼 걸 사 달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원효로 전차 종점 마을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것을 빌려 처음 타본 날의 기분은 지금도 어제 일 같다.
펄펄 날아갈 것 같았다. 무거운 통나무 스케이트에 비하면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안정적이고, 얼마나 빠른가! 원효로 앞 한강 스케이트장이 좁은 게 한이었다. 인도교를 지나 광나루까지 씽씽 달려가고 싶었다.
이토록 스케이트에 혹한 것은 시골에서 내가 타던 것과 너무 달라서였다. 현대 문물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산골 소년들은 통나무를 갈라 만든 대장간 스케이트를 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앉아서 썰매를 지치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통나무 스케이트를 장만해 서서 타야만 체면이 섰다.
나는 동네 형에게 ‘겨우내 누룽지 제공’을 약속하고 스케이트를 장만했다. 발 넓이에 맞는 통나무를 반원형으로 가르고, 양옆에 못을 촘촘히 박아 노끈을 매도록 하는 데까지는 내 손으로 했다. 문제는 스케이트 날인데, 그건 내 능력 밖이었다. 대장간에서 철판을 스케이트 날처럼 벼리고 날을 갈아서, 통나무 밑에 튼튼히 박아 넣어야 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그걸 타는 재미에 푹 빠졌다. 겨울방학이 늘 즐거웠다. 노끈으로 발을 칭칭 동여매면 발이 아프고 시렸지만, 달리는 재미로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신발 위로 묶으면 헐거워 양말만 신은 맨발에 묶었다. 안정감은 좋았지만 대신 발이 아팠다. 고통을 참고 땀이 나도록 얼음을 지치고 나면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강가에 피워놓은 모닥불에 발을 녹이고 나서 또 달리러 나갔다. 허기가 질 때까지 그렇게 즐기다가 집에 들어가면 야단을 맞았다. 볼이 빨갛게 얼고 코를 훌쩍이며 들어서니 얼마나 애처로웠을까. 그렇게 스케이트와 친해진 덕에, 나는 퇴직 후 10년 동안 인라인 스케이트 가방을 메고 한강공원으로 출퇴근했다.
지금 내 오른손 중지 마디에는 구덕살이 박혀 있다. 신문사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 선배들이 전화로 불러주는 기사를 많이 받아 적은 탓이다. 컴퓨터도 팩스도 없었던 1970년대 초반의 글쓰기는 모두 볼펜 육필이었다. 출입처 기자실이나 현장에 나간 선배들의 송고 수단은 언제나 전화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받아쓰기가 일이었다. 속필로 쓰려고 볼펜을 꽉 쥐고 그 일을 하고 나면, 귀가 멍멍하고 손가락이 저렸다.
전화 송고에 얽힌 이야기의 백미는 연재소설 받아쓰기다. 작가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되면 독자들 항의전화가 빗발친다. 간혹 자유분방한 작가들이 그런 사고를 치곤 했다. 내가 몸담았던 신문사에서는 작가가 전화로 불러주는 소설 원고를 받아쓰는 일이 잦았다.
지방에 체류 중인 작가들은 대개 우편이나 고속버스 편으로 며칠 분의 원고를 보내오곤 했는데, 더러 그걸 빼먹는 작가가 있었다. 전화로 독촉하면 작가는 전화로 소설 원고를 불러줬다. 잘못 받아 적으면 작가와 기자 간에 책임 소재로 다투는 일도 일어났다.
기자들의 송고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대하소설감이다. 누구에게나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깃거리가 있다. 나도 다급한 송고난을 여러 번 겪었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취재를 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취재도 어려웠지만, 제일 고생스러웠던 것은 송고였다. 특급 호텔에 묵었는데도 해외 전화선이 두 회선뿐이라, 송고 중 자주 전화가 끊겼다. 한 사람이 통화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배운 ‘궁즉통’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치사한 방법이지만 소임을 다하려면 도리가 없었다. 호텔 아케이드에서 여성 스타킹을 사 들고 전화 교환실 문을 두드렸다. 내 사정을 말하고 방 번호를 일러줬다.
즉각 효험이 났다. 아무리 오래 전화기를 잡고 있어도 끊어지지 않았다. 뉴스 기사와 해설까지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을 송고하려면 최소한 30분 이상, 한 시간도 걸렸다. 텔렉스는 있었지만 우리말 로마나이즈(로마자 표기)가 까다로워 다들 꺼렸다.
취재의 어려움도 덜하지 않았다. 호메이니 독재 시절이어서 해외 언론에 대한 이란 정부 서비스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써 찾아가봐야 발품만 아까웠다. 제휴 언론사인 일본 신문 특파원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도 라디오로 BBC 방송을 듣고, 미국과 유럽 신문을 참고한다고 했다.
1990년대 초, 도쿄 특파원 시절 선배 특파원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했다. 늘 오전 일찍 하네다 공항발 대한항공 비행기를 이용해왔는데, 하루는 전철을 놓쳐 택시를 탔다. 공항으로 가다가 고가도로 위에서 트래픽 잼에 걸렸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다 보니 비행기 출항 시간이 촉박해 택시에서 내려 뛰었다. 넥타이를 펄럭이며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신사의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진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렸더니, 소나기 맞은 사람 같더라나….
도쿄 시절 일본 총리 수행 취재를 갔다가 프레스룸에 우리 신문 전용 송고 부스도 있어, 느긋하게 기사를 보낸 일이 있었다. 나중에 사무실로 날아온 전화료 청구서 액수를 보고 크게 놀랐다. 부스까지 설치해줘 서비스인 줄 알았더니….
그때 내 사무실에는 팩스와 사진 전송기까지 있었지만, 막 부임한 모스크바 특파원에겐 그게 없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어 기사가 폭주하는데 송고 수단이 없다고 그는 늘 나에게 원고 팩스를 보내왔다. 아직 서울과 팩스 송수신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송고 중개업’도 해봤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철길이 강원도 강릉 정동진이라고 했다. 달맞이고개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봤을 때 이 철길은 바다와 두 번째로 가까울 거라로 생각했다. 빨간 무궁화열차가 바다에 닿을락 말락 실랑이하듯 달렸다. 그 낭만적인 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 다음 열차를 한참 기다렸던 적이 있다. 이제 그 철길에 새 해변열차가 달린다.
동해남부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옛 동해남부선의 역사가 파란만장하다. 부산~포항을 오갔던 동해남부선 열차는 1935년 일제가 개통했다. 자원을 수탈하고, 일본인이 해운대를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무궁화호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오가며 오랫동안 서민의 발이 돼주었다. 2013년 동해남부선을 이설해 복선 전철화했다. 기존 철로를 복선화하려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설된 동해남부선은 2016년부터 영덕까지 가는 동해선으로 편입됐다. 동해남부선은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
동해남부선 노선 중 해운대 미포~청사포~송정 구간은 바다와 가까워 아름다운 철길로 꼽혔던 곳이다. 이 구간을 재활용할 방안을 두고 관련 기관과 전문가들이 고심했다. 레일바이크, 산책로, 자전거길, 노면전차 등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최종적으로 해변열차, 스카이캡슐, 산책로, 쉼터가 어우러진 철길 공원 ‘블루라인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
2015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드디어 올해 10월 해변열차를 개통했다. 철로 옆에는 덱 보행로인 그린레일웨이를 놓았다. 미포~청사포 구간에는 공중 레일을 설치해 스카이캡슐을 운행한다. 11월 말 개통할 예정이다.
영화 ‘해운대’와 미포의 추억
약 6년 동안 열차가 다니지 않던 철길에 다시 열차가 다닌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미포로 향했다. 미포는 해운대해수욕장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포구다. 미포의 ‘미’는 꼬리 ‘尾’ 자를 쓴다. 아름다울 ‘美’ 자를 써도 억지스럽지 않은 바닷가다. 미포에서 초승달처럼 해안선이 고운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광안대교,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포가 유명해진 계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해운대’(2009) 덕이 크다. 피서객 수백만 명이 모인 해운대해수욕장에 초대형 쓰나미가 시속 800km로 밀려와, 미포 횟집 거리와 미포 건널목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뛰어난 CG 기술로 참혹한 재해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한 장면이 생생하다.
미포 건널목의 실제 풍경은 고요했다. 건널목이 있는 언덕길의 끝은 바다였고, 바다 한가운데 오륙도가 떠 있었다. ‘땡땡땡’ 다급한 종소리가 언덕에 울려 퍼지면 차와 오토바이들이 건널목 앞에 섰다. 차단봉이 내려오고, 잠시 뒤 무궁화열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열차 너머로 미포 앞바다가 반짝였다.
바다와 해송과 사람을 만나는 해변열차
지금 미포 건널목은 흔적만 남았다. 옛 건널목에서 청사포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해변열차 출도착역인 미포정거장이 나온다. 이국적인 모양의 해변열차가 기다린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 넉 대의 열차가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해변열차의 객차는 2량이며, 좌석이 창을 향해 두 줄로 배열돼 있다. 객차 앞뒤에는 독립된 4인 좌석이 있다. 줄을 빨리 서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해변열차는 미포정거장을 출발해 달맞이터널,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구덕포를 지나 송정정거장까지 약 5.4km 구간을 달린다. 시속 20km 내외로 천천히 달리므로 풍경을 여유롭게 즐긴다. 철로 옆 보행로를 걷는 사람들이 열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든다. 열차 탑승객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열차 안에서 바다, 솔숲, 어촌마을 구경하는 것 못지않게 사람 구경도 흥미롭다. ‘도심 속 해변열차’ 콘셉트가 해변열차의 매력 포인트인 것 같다. 보행로와 철로 사이에는 펜스가 설치돼 있고, 건널목 구간에는 안전요원이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열차가 달맞이터널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나온다. “해운대 달맞이고개 해월정 앞바다는 동해와 남해의 경계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11시 방향으로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부산 앞바다는 동해일까, 남해일까 묻는 퀴즈에 이제는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등대가 아름다운 청사포와 다릿돌전망대
해변열차 자유이용권을 사면 맘에 드는 정거장마다 내려 관광하고 다시 탈 수 있다. 청사포정거장에 내려 청사포를 천천히 둘러본다. 청사포는 일출과 초저녁 달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포구 너머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연인처럼 서 있는 풍경도 그림 같다. 바닷가에는 오래된 조개구이집이 늘어서 있다. 이곳의 조개구이는 양념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가리비, 키조개 같은 큰 조개에 모차렐라와 양파를 듬뿍 넣은 고추장 양념을 얹어 굽는다.
청사포정거장에서 다릿돌전망대정거장까지는 가까워 걸어갈 만하다. 다릿돌전망대는 청사포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푸른 용을 형상화해 유선형으로 만들었다. 높이가 20m, 길이는 72.5m에 달한다. 전망대를 상공에서 보면 용이 꿈틀대며 바다로 들어가는 것 같다. 전망대 끝자락에는 반달 모양의 강화유리를 설치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다릿돌이란 이름은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암초들이 징검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다릿돌전망대를 지나면 기암괴석이 많기로 소문난 구덕포가 나온다. 철길가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카페, 숙박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도착점인 송정은 부산의 3대 해수욕장이라 불린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서핑 성지로 인기 있다. 추운 겨울에도 서퍼들을 볼 수 있다. 바닷가 주변이 해운대보다 한적해 송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바다에서 보는 부산 야경
송정에서 다시 미포로 돌아오니 해 질 녘이다. 부산은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므로 야경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6시 10분 배가 첫 야경 유람선이다. 겨울에는 오후 6시 전에 해가 지므로 야경 보기에 좋은 시간이다. 승객이 혼자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손님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운대 바닷가에 늘어선 고층 빌딩과 호텔, 동백섬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 신도시 마린시티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그 빛이 수면에 비쳐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야경에 방점을 찍은 것은 광안대교다. 해상에 건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2층 현수교로 높이 비상하는 갈매기를 형상화했다. 국내 기술진이 만든 다리여서 의미가 크다. 밤이 되면 10만 가지 이상의 색상을 표현하는 조명이 광안리 바다를 보랏빛으로 수놓는다.
뒤에 앉은 청년들이 “와 광안대교 야경 진짜 쩐다. 유람선 탄 건 신의 한 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런 멋진 야경은 처음 본다는 뜻이리라. 젊은 나이에 유람선에서 부산 야경을 봤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유람선이 광안대교 밑을 통과해 다시 미포로 돌아온다. 승선 시간 5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최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가 장기간 이어지리라는 진단이 의료계에서 거듭 나오고 있는 지금, 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이루려면 기존과는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한 상황. 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한국형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지역에 안착해 주민들이 좋은 일자리를 체감하는 게 정부의 목표이자 지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는 양천구를 책임지고 있는 김수영 양천구청장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직접 일자리와 양천구 개발의 미래상을 들어봤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지난해 7월 대통령 직속 일자리 위원회에서 지방정부를 대표하는 지역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목소리를 대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각 지방정부에서 시행되고 있는 우수한 일자리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중앙-지방정부 간, 지방-지방정부 간 협업을 강화하는 소통의 창구 역할이다. 양천구는 2019년 119개 사업에 7231개 일자리 창출 목표를 수립해 119개 사업, 68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일자리는 더 이상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닌,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적인 복지 영역입니다. ‘일자리가 곧 복지’인 거죠. 질 좋은 일자리 창출에 힘써 다양한 계층이 체감하는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는 모두의 바람이자 희망입니다.”
중장년층 일자리 확보를 위한 다양한 노력
김 구청장은 50대 이후의 중장년층을 위한 양천구만의 일자리 지원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양천구의 어르신복지과 ‘인생 이모작 팀’이 중장년층을 위한 여러 솔루션들을 기획 중이다. 그리고 50대 독거남들이 사회에 다시 진출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나비남 프로젝트’,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의사, 간호사, 영양사 등 전담 팀이 직접 방문해 건강관리를 해주는 ‘백세건강 돌봄 사업’ 등 세대별 맞춤형 복지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외 양천시니어클럽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장년층이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게끔 다양한 정보 제공 및 취·창업 지원을 위한 양천50플러스센터를 2021년 7월 개관할 예정이다. 또한 ICT 기술을 독거노인 및 취약 계층에 도입해 디지털 취약 계층과의 정보 격차를 줄이고 고독사를 예방하는 신중년 일자리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예를 들어 ‘ICT 기반 돌봄 서비스’는 신중년 ICT 케어 매니저들이 AI 스피커를 활용해 독거 어르신의 고독사 예방 및 신속한 위기 대응 등의 돌봄 서비스를 수행하는 일이다. 더불어 조리사 자격을 갖춘 신중년들이 어린이집의 대체조리사로 활동해 급식 공백을 최소화하는 서비스인 ‘대체조리사 지원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 지정
양천구가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됐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양천구가 선정된 배경에는 먼저 ‘연의목공방’이 서울시 자치구 목공방 중 규모가 제일 크며, 목재 관련 박사학위가 있는 외부 강사를 인력풀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목공지도사를 직원으로 채용해 직접 운영하는 것도 높이 평가받았다.
“양천구는 주거 지역이 전체 면적의 약 72%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베드타운으로 흔히 목동을 얘기하면 대입 전문학원이나 목동 아파트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입시학원 중심의 목동에서 평생학습 중심의 양천구를 만들기 위해 오목공원 내 창고로 방치돼 있던 공간을 목공예 체험장으로 조성한 것이 연의목공방의 시작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7월 산림청에서 전국적으로 공모한 ‘목재교육 전문가 양성기관’에 지원하였으며, 지정을 받았습니다. 전국 총 44개 기관에서 신청했는데 6개 기관만 선정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양천구죠. 앞으로 목재교육 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국가자격증반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개강은 곧 할 예정입니다.”
12월부터 개강할 목재교육전문가는 산림청에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한 기관만이 배출할 수 있다. 6개월 과정으로 운영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목재교육 분야의 전문지식·기술습득 및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면 목재문화체험장, 강사 활동, 학교 방과후 교사 및 마을 학교 강사, 소창업 등이 가능해진다. 양천구에 목공방 마을 1호가 머지않아 탄생될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마음 치유는 공원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는 일도 사람의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가혹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코로나19다. 김 구청장은 자칫 몸과 마음이 삭막해질 수 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삶의 질’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따라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여가를 보내는 대신, 쾌적하고 안전하게 ‘쉼’을 누릴 수 있는 공원을 추천했다. 양천구는 이러한 방향성에 맞춘 다수의 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양천구 면적은 17.4k㎡로 이 중 주거 지역이 71.8%인 12.5㎢입니다. 녹지는 23%인 4㎢로 그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며 전역에 크고 작은 공원 104개소가 조성되어 있어 힐링하기에 좋은 환경이죠. 특히 연의목공방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양천도시농업공원을 작년 4월에 개장했는데, 7000평 규모에 농업체험학습장, 친환경텃밭, 야생초화원, 생태연못 등이 마련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삭막한 도시 환경을 개선함은 물론 마을공동체 사업과도 연계해 건강, 교육, 공동체 개선 등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끌고 있는 중입니다.”
양천도시농업공원에서 수확한 채소는 각 동의 취약 계층과 어르신 사랑방에 기부하거나 양천푸드마켓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된다. 작년 한 해 동안 기부된 채소들은 300kg이 넘는다. 공원을 가꾸는 재미가 정서적 위안과 함께 공동체 정신을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2022년까지 연의목공방 맞은편에 제2의 도시농업공원을 하나 더 개장해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균형 발전을 위한 대규모 사업들
“양천구는 강남권과 비강남권을 말하는 서울시의 축소판처럼 목동과 비목동 간의 지역 격차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균형 발전에 대한 밑그림을 구상했고 민선 7기를 열면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이 균형 발전을 위해 구상한 ‘H-Plan’은, 양천구의 큰 개발 계획을 통해 동쪽(목동)과 서쪽(비목동)이 균형 발전을 이루고 상생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정책 사업이다. 미래 양천의 30년 발전을 위해 주민들과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우선 동쪽에는 중소기업 혁신 성장 밸리를 조성하고 서쪽에는 서부트럭터미널을 개발해 도시 첨단 물류단지를 추진할 계획이다. 남쪽은 신정차량기지를 이전 및 개발해 문화 상업 복합 시설을 유치하며 북쪽으로는 국회대로와 차도를 지하화해 지상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신정3동의 서부트럭터미널 개발은 운영사인 서부T&D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해 그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경전철 목동선도 서울시와 정부에서 재정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발표한 이후, 국토교통부 국가교통위원회의 심의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승인이 끝나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 다음 절차가 진행될 것입니다. 워낙 큰 사업들이라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먹거리 사업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추진해나가려고 합니다.”
자발적인 착한 소비 운동에 감동
김 구청장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후 양천구민들에게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 구청에서는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어려워지자 힘들어하는 소상공인을 응원하기 위해 ‘착한 소비’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네 단골집에 미리 ‘착한 선결제’를 한다거나 포장 주문을 하거나, 1+1 구매를 해서 주변 이웃과 나누자는 ‘착한 소비자’ 운동이 그 내용이다.
“현장에 나가 보면 손님이 너무 없어 힘들다는 사장님이 많은데 ‘주민들이 이렇게 착한 소비 운동을 해주시니 그래도 버틸 힘이 난다’고들 하셨습니다. 그중 한 식당 사장님은 주민들이 방문 포장도 하고 선결제도 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자신도 단골 미용실에서 선결제를 하는 착한 소비자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정부에서 재난지원금, 새희망자금, 소상공인 신용보증 융자 지원 등 여러 가지 정책들을 통해 소상공인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시적인 지원보다 단골손님들의 응원과 소비가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사실 ‘착한 소비’ 캠페인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사업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우리 이웃을 위해 함께 이겨내자, 힘내자’ 하면서 서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동참해주시는 주민들을 보면참 감사한 마음도 들고,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주민들에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니어 구민을 위한 행정
최근 김 구청장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시니어 구민을 위한 디지털 격차 해소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국민 10명 중 8명이 유튜브를 이용하고, 한 달 평균 30시간이나 시청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뉴스가 가장 많은 채널을 묻는 질문에 50대와 60대의 절반 이상이 유튜브를 지목할 만큼 가짜 뉴스에 노출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에서 진짜를 가려낼 수 있도록, 중장년 어르신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해줄 ‘디지털 문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은 로봇과 시니어를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다. 관내 어르신들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용 로봇 사업을 도입한 것이다.
“어르신 복지관 3개소에 얼굴과 음성 인식이 가능한 카카오톡 교육 로봇인 ‘리쿠’를 40대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손님들이 비대면 주문을 선호하고, 사업주의 인건비 부담도 적어 매장마다 늘어나고 있는 무인단말기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패스트푸드점 주문, 기차표 발매, 영화관 티켓 발매, 무인발급기 이용 방법 등을 알려주는 교육용 키오스크를 복지관에 설치하고 관련 강좌를 개설할 예정입니다.”
김 구청장은 또한 ‘스마트폰 사용 기초 과정’을 시작으로 유튜버로 활동할 수 있는 ‘1인 크리에이터 교육’, ‘시니어를 위한 빅데이터 교육’ 등을 실시해 다가오는 스마트 미래 시대에 신중년들이 당당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진행형의 인생 2막
“보통 정년이라고 해서 퇴직하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직업에서는 은퇴 후를 ‘인생 2막’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계속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일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김 구청장은 양천의 미래 30년을 위한 굵직한 사업을 많이 추진하고 있다. 그런 사업들을 꼼꼼히 챙기면서 양천구민들을 위해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밝혔다. 50대 중반의 신중년인 김 구청장이 생각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은 뭘까. 그녀는 나무와 같다는 말로 비유했다.
“울창한 산길을 걷다 보면 주위에 나무가 참 많은데, 이 나무들의 나이를 겉만 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무는 우리처럼 나이를, 이마나 눈가에 주름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나무 속에 나이테로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봄이 되면 모든 나무가 푸른 잎을 꺼내는 것은 똑같죠.”
김 구청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성해지는 나무처럼 나이 들수록 더욱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가 되어, 누군가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런 포용력과 배려심을 키우는 게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큰 나무처럼 양천의 미래를 책임지며 자신의 나이테를 깊이 새기고자 하는 그녀의 소망이 어떤 봄을 맞이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다. 찾아가는 길은 서울, 성남, 하남, 광주로 넓게 퍼져 있다. 현재 위치에 따라 전철도 가능하고 승용차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는 등 접근성이 아주 편리하다. 산세도 험하지 않아 남녀노소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의 온조가 처음 쌓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통일신라 때 당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주장성이라고도 한다. 성다운 성은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했는데, 성의 규모는 전체 둘레가 11.76km(본성 9.05km, 외성 2.71km)다.
수많은 등산객이 남한산성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치에 취해 우리 민족의 수치인 병자호란을 잊을까 두렵다. 병자호란은 조정이 외교정책에 실패해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전쟁이다. 일국의 주권국가인 왕이 신하의 예를 보여주기 위해 곤룡포를 벗고 검은 호복을 입은 채 차가운 돌계단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삼전도의 수치를 잊으면 안 된다.
불과 3개월의 침략 기간이었지만 포악한 청나라 군대에 수많은 백성이 죽었다. 나는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한숨짓고 눈물을 흘렸다.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으며 당시의 조정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남한산성을 오르는 수많은 등산객은 곱씹어봐야 한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정책으로 평화를 누렸으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조정세력은 명나라와만 친하게 지내 후금의 불만을 초래했다. 첫 번째 전란인 정묘호란은 인조 5년(1627년)에 있었다. 군사력이 약한 조선은 후금을 형으로 모신다는 선에서 화해를 했다. 그 후 세력이 더 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고 고치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조선을 속국으로 삼는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죽으면 죽었지 청의 속국은 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인조 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 청군과 싸워보려 했지만 섬으로 가는 길목을 청군이 먼저 점령해버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장기전을 계획하려 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 10만여 명이 쳐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산성 안의 조선 군대는 1만3000명이었고, 식량은 절약해도 50일 정도 버틸 양에 불과했다. 말 먹이가 부족해 초가지붕의 짚까지 걷어내야 했고 추위에 군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부어올랐다. 부녀자는 겁탈을 당했고 수많은 백성이 청나라 군사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굶어죽는 백성 또한 부지기수였다. 장기전은 명분이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때 목숨을 내놓고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과 협상을 해서 나라와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인조를 설득한 주화파 최명길이 있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더 많은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인조는 국왕이라는 명분보다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이라는 수모를 받아들여야 했다. 마침내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을 나와 삼전도까지 산길을 걸어내려 갔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청 황제를 기다렸다. 울고 있는 신하들을 차마 보지 못해 외면하면서 늦게 도착한 청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땅에 대고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하는 3배 9고두례(三拜九敲頭禮,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는 행위를 세 번 반복하는 방식)를 행하면서 인조의 이마는 피멍이 들었다고 역사는 기술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4대 수치를 꼽으라면, 첫 번째가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 병자호란의 삼전도 수치이고, 두 번째가 왕이 백성을 버려두고 도망을 간 임진왜란, 세 번째는 조정의 무능으로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 넘긴 한일합방, 네 번째는 동족끼리의 전쟁인 6.25전쟁을 든다. 모두가 백성의 잘못이 아니라 위정자들의 무능에서 파생된 비극이다.
힘이 없으면 외교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실리 없는 명분 싸움으로 허송세월할 때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뿐이다. KBS 방송국에서 추석 특집으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방송을 했다. 나훈아는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한 사람들은 위정자들이 아니고 평범한 보통의 국민이라 했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왔다. 역사는 돌고 돈다.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남한산성을 오르며 위정자들이 심기일전해서 밖으로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을 힘을 기르고 안으로는 국민들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길 염원한다.
누구에게나 운전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차에 기름을 넣을 때, 거의 가득 넣는 습관이 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마치 창고에 식량을 쌓아둔 것처럼 든든하다. 계기판 바늘이 반 이하로 떨어진 듯하면 주유소에 들러 채우곤 한다. 이런 습관이 든 이유는 초보운전할 때의 사건 때문이었다.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 한 대를 샀다. 운전이 숙달되면 새 차를 살 계획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적한 집 주변을 돌며 조금씩 범위를 넓혀갔다.
운전대를 잡으니 평소 친절한 경찰 아저씨들이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호루라기를 ‘삐~익’ 불며 쫓아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조심조심 운전하던 어느 날, 갑자기 길을 잘못 들었다. 하필 차량이 쏟아져 나오는 대로 한복판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좌우 앞뒤에서 차량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어쩌랴! 어차피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진땀이 흘렀다.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운전대를 꽉 잡았다. 결국 혼잡한 대로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야호!’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뿌듯해졌다. 며칠 뒤, 출근길을 정복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했다.
차량이 적은 새벽, 회사까지 갔다 오는 연습이었다. 신루트를 개척하는 기분으로 출발했다. 가락동 집에서 서초동 회사까지는 약 40분 거리였다. 왕복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연습을 마칠 수 있었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심정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길 한가운데서 갑자기 차가 멈춰버린 것이다. 액셀을 밟아도 차는 꼼짝하지 않았다. 비상등을 켜고 내려 차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봐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시동이 걸리지도 않았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난감했다. 차 안팎을 살펴보니 그제야 보이는 게 있었다. 계기판 경고등이 빨갛게 켜져 있었다. 연습하는 재미에 기름이 바닥난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주위의 도움을 받아 차를 우선 갓길로 밀어 세웠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근처 주유소에 들러 잠자는 종업원을 깨웠다. 큰 페트병에 기름을 받아와 유류통에 붓고 시동을 거니 그제야 ‘부릉!’ 하며 시동이 걸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겨우 차를 몰아 집에 세워놓고 바삐 출근을 했다.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지금도 계기판이 반 이하로 내려오기 무섭게 기름을 넣는다.
반면 아내는 다르다. 기름을 항상 50%만 넣는다. TV 알뜰 정보를 보니 “차에 기름을 많이 넣고 다니면 기름을 많이 먹는다”고 했단다. 그래서 거의 눈금 하나 남을 때 반만 채운다. 그러다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에 나는 전철을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경기도 동탄에서 강의할 일이 있어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느니 차를 가지고 나갔다. 기름 표시등을 보니 거의 한 눈금 정도 남아 있었다. 시간이 급해서 타고 가는 중에 넣자 하곤 출발을 했다. 그런데 동탄에 거의 다 갔을 때 빨간불이 들어왔다. 강의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주유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아파트 공사로 그 넓은 곳을 파헤쳐놓아 내비게이션도 길을 못 찾고 뺑뺑 돌기를 반복했다. 멀리 있는 주유소에 갔다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대로 차를 버리고 싶었다. 수십 명의 교육생이 기다리고 있는 강의시간에 늦을 게 뻔했다. 할 수 없이 근처 공공시설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를 탔지만 기사가 아파트 공사로 길을 하도 많이 바꿔놓아 헛갈린다면서 회사에 수소문해 다른 기사를 소개해 겨우 강의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으로 나는 기름이 부족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계기판 바늘이 반 이하로 내려오면 항상 기름을 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운전습관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기름을 반만 넣는 사람 가득 채우는 사람, 진로 변경 시 방향지시등도 안 켜고 끼어들기 하는 사람. 빈틈만 있으면 차선을 변경해 끼어드는 사람. 습관적으로 정지선을 넘어 보행자 통행권을 침해하는 사람. 운전 중 음악을 음악다방처럼 크게 트는 사람, 피우던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지는 사람. 운전 중 휴대전화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 순서도 안 지키고 끼어드는 얌체 운전자. 차량이 밀리든 말든 1차선만 고집하는 사람, 초보운전자 뒤에 바짝 붙어 겁주는 사람 등 다양하다. 이 중 당신의 운전습관은 어느 쪽인가요?
전원생활을 하면서 아파트와 같은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주거 단지. 심지어 다양한 생활편의시설과 인접해 있고, 서울로의 접근성까지 뛰어난 데다 가격까지 합리적이라면? 이 모든 걸 만족시키는 타운하우스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경기도 ‘용인 위드포레’를 방문했다.
그동안 부담스러운 금액 때문에 전원생활의 로망을 포기했던 시니어에게는 단연 희소식이 될 것이다. 경기도 용인 위드포레는 총 4만 ㎡ 대지의 4개 단지에 120세대가 주거하는 타운하우스다. 실사용 면적 109~125㎡의 8개 타입 주택이 있으며 분양가는 3억7000만~6억 원 수준이다.
용인 위드포레는 경전철 에버라인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시로의 접근성이 뛰어나다. 경전철 연장계획으로 신분당선, GTX, 인덕원선, 분당선 등 다양한 노선으로의 환승이 용이해질 전망이라, 앞으로 훨씬 더 편리하고 빠른 교통망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 자가용 이용 시에는 서울 양재까지 30분 정도 소요된다.
생활편의시설들은 대부분 차량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5분 거리에 에버랜드가 있어 손주들이 왔을 때 함께 놀러 갈 수 있다. 10분 거리에는 용인시청과 이마트, CGV 등이 있다. 또 인근에 까치봉 산책길이 있고, 경안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자전거도로와 운동시설도 마련돼 있다.
이제부터 엄선된 자재와 노하우가 집약된 타운하우스 ‘용인 위드포레’로 들어가 보자.
◇위드포레 견본주택 둘러보니
2~3층 구조인 용인 위드포레에는 집집마다 잔디마당이 있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서는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근처에서 텃밭을 가꿀 수도 있다. 은퇴 후 아늑한 자연 속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향긋한 나무 냄새가 기자를 맞이했다. 용인 위드포레는 목조주택이다. 이날 동행한 이민우 위드포레 팀장은 “일반 목재보다 강도와 내구성이 높은 굵은 편백나무를 버팀대로 사용했다”며 “외벽에는 항상 공기가 흐르는 환기층을 설치해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바닥재는 강마루 대신 강화마루를 사용했다. 새집증후군을 없애기 위해서다. 강마루를 깔려면 본드를 사용해야 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는 예민한 사람들은 건강 문제를 겪기도 한다는 것. 때문에 위드포레는 끼워 맞출 수 있는 강화마루를 선택했다. 먼저 기초 바닥 위에 콘크리트 독을 막아주는 비닐을 깔고, 접착제 없이 강화마루를 끼워 맞추는 식이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이 있다. 거실에서는 한쪽 벽면 전체가 커다란 창문으로 돼 있어 바깥 풍광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반대쪽은 주방이 보이는 구조다. 주방에서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싱크대가 눈길을 끈다. 시중에서 원목 싱크대를 구입하려면 가격이 상당할 텐데, 위드포레는 자체적으로 만들어 비용을 절감했다. 싱크대뿐만 아니라 수납장도 모두 원목으로 만들었다.
2층은 침실과 서재, 드레스룸, 화장실로 꾸며져 있다. 먼저 침실을 둘러봤다. 방에는 합지로 된 벽지를 사용했다. 보통 실크벽지를 바르는데, 목조주택에선 나무가 숨을 쉴 수 없어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2층 화장실은 가족용이라 1층과 달리 욕조가 설치됐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문이 두 개다. 한 곳은 드레스룸과 연결됐고, 다른 문은 서재 쪽을 향해 있다. 화장실로 가는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다. 서재는 필요에 따라 다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3층에는 침실과 홈시어터룸, 화장실이 있다. 침실 구조는 2층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홈시어터룸은 임의로 꾸민 것이라고 했다. 침실이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집 안에 작은 영화관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은 1층과 같은 개인용이다. 1층에서 3층까지 오르는 계단에는 나무로 된 핸드레일이 설치돼 있다. 덕분에 고령자도 힘들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민우 팀장은 “그동안 도심 속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층간소음이나 협소한 주차공간 때문에 이웃 간 크고 작은 언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면 용인 위드포레는 이런 문제를 말끔히 해소해준다”고 말했다.
◇위드포레가 목조건물인 까닭
용인 위드포레가 목조주택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목조건물은 불과 바람에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화기에 강한 두꺼운 목재를 사용해 불이 내부로 미치는 것을 막아주고, 강풍으로 지붕이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서까래를 쿠라철물로 보강했다.
목조주택은 실내온도도 적절하게 맞춰준다. 습도가 높아지면 수분을 흡수하고 건조하면 수분을 방출하는 기능도 한다. 산림욕에서 얻을 수 있는 피톤치드 효과도 선물한다. 나무가 방출하는 특유 성분인 피톤치드는 심신을 정화하며 체내 면역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줘 숙면에도 좋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안심구조 시스템도 특징이다. 굵은 편백나무 버팀대를 사용해 내진성을 높였고, 중목구조로 건물을 지어 원목 인테리어 효과를 냈다. 중목구조는 두꺼운 원목을 사용하는 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데, 용인 위드포레는 대규모 단지라 대량 발주를 통해 단가를 낮췄다.
용인 위드포레는 도심 속 생활과 확연하게 다른, 전원생활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생활을 선물한다. 이와 함께 100년, 200년이 지나도, 그 이상 주택을 존속시킬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만드는 게 용인 위드포레가 추구하는 타운하우스의 가치다.
[Mini Interview] 조재원 위드포레 총괄분양본부장
◇중소형 평형대로 조성된 이유는
타운하우스는 원래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급 빌라로 공급됐다. 당시 여유 있는 은퇴자들이 선호하다 보니 대형 평형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합리적인 가격의 중소형 평형대가 인기를 끌고 있다. 환금성 부분에서도 긍정적이다. 중소형 평형대는 상대적으로 대형 평형대보다 매매가 쉽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단지 내에 관리실을 따로 뒀다는데
직접 마당의 잔디를 깎고, 수도 배관을 고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가장 큰 단점은 보안이다. 하지만 타운하우스가 업그레이드됐다. 관리실을 두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적지 않은 관리비가 문제였지만, 용인 위드포레 같은 대규모 단지는 세대당 내는 비용 부담을 덜 수 있다. 이곳 관리비는 한 달에 8만 원 정도다.
◇타운하우스는 보안에 취약하다는데
일반 타운하우스는 밤이 되면 모든 빛이 사라진다. 길에 가로등을 설치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용인 위드포레는 곳곳에 가로등과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입주자의 안전을 챙겼다. 이 역시 대규모 단지라 가능한 일. 이외에 외부인의 출입을 단속할 수 있는 차단기 시스템도 조만간 구축할 예정이다.
◇어르신들을 위한 시설이 있는지
용인 위드포레에 입주한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당도 운영할 계획이다. 단지가 넓기 때문에 경로당까지 걸어가기 어려운 어르신이 계실 것이다. 직접 자가용을 몰고 경로당에 가는 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셔틀버스는 경로당뿐만 아니라 인근 생활편의시설까지 운행한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요즘 언론보도 기사를 읽다 보면 하품이 나거나 기가 막힌다. 7월 8일(온라인 기준) 모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8일 ‘다시는 아파트 양도차익으로 터무니없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의식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중략) 이 대표는 ‘당에서 대책을 만들고 있는데 가능한 7월에 할 수 있는 조치를 이번 국회에서 하고(하략)’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나? 다시는 사라지게 하겠다? 가능한도 가능한 한이라고 써야 맞다. 이 대표가 원래 이렇게 말을 한 걸까? 아니면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고 욕할 걸 미리 알고 미워서 망신 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쓴 걸까? 호감이 가는 취재원의 말은 전달도 잘해주던데.
더 기가 막히는 기사도 있다. 8월 12일(이것도 온라인 기준) 모 일보의 기사에 이런 제목이 있었다. . 육아를 키워? 눈이 의심스러워 죽 읽어보니 기사는 “남편 없이 육아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후 1개월 된 딸을 살해한 뒤 3년간 오피스텔에 방치한 4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로 시작된다. 육아를 키운다는 말은 취재기자가 쓴 게 아니라 제목을 잘못 붙인 거였다.
育(기를 육)兒(아이 아)라는 한자를 몰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렇게 써도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너무 바빠서 무심결에? 잘못된 건 사후에라도 부장 이상 데스크들이 고쳐야 할 텐데 왜 그대로 두고 있을까? 그들도 너무 바빠서 데스크도 보지 않고 기자에게 기사를 내보내게 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의미상 중복되는 말, 앞뒤가 바뀐 말이 의외로 많이 쓰이는 걸 알게 됐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잘못된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경우, 혀가 꼬이거나 음운상 착각으로 인해 웃기는 말이 만들어지는 경우 등이다. 단어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고 혀끝에서 뱅뱅 도는 설단현상(舌端現象) 때문에 엉뚱한 말을 만들어내는 것과 어구전철(語句轉綴), 이른바 애너그램(Anagram)과 관계있는 말장난이다. 이 중 어구전철은 1)장난→난장, 모로코→코모로, 방배역→배방역, 문전박대→대박전문 식의 음절 단위, 2)상주→장수, 김치→기침, 소년→손녀, 출동→충돌 식의 음운 단위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중복 사례부터 살펴보자. 독자들을 위해 억지로 글을 하나 만들었다. “나는 아들 출산 낳고 나서 육아를 키우느라 무지 고생했어. 남편은 1도 도와주지 않았어. 초등학교 입학 넣기 전부터 조기교육 가르치느라 돈도 많이 들었지. 태권도 차고, 체르니 치고, 바둑도 놓고 했던 아이는 초등학교 등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공부 배우고, 필기 쓰고, 작문 짓고, 더러는 백일장도 쓰고, 암산 외우고, 미술 그리고, 음악은 부르고 불고 치고 타고 켜고, 방과 후엔 서예도 쓰고 그러느라 힘들어 했지. 나는 나름대로 식사 먹기, 청소 쓸기, 복장 입기, 인사 숙이기, 용변 누기 이런 예절을 일일이 가르쳤어. 근데 이 녀석이 지 애비 닮아서 공부는 뒷전이고 축구 차고 농구 넣고 야구 때리고 그러는 것만 좋아하는 거야. 유도 메치고 복싱 싸우고 펜싱 찌르고 검도 휘두르고 아이스하키 치는 것까지 하러들면 어쩔 뻔했어? 다치기 쉽고 돈도 많이 들잖아. 역도 드는 건 다행히 지가 안 하겠다고 하데. 고등학교 졸업 나온 뒤에는 이발도 이상하게 깎고 친구들과 음주 마시고 가무 추고 걸핏하면 외박 자고 하더니 면허도 없는 놈이 아버지 차를 몰래 운전 몰다가 가로수 충돌 받는 사고를 냈지 뭐야. 그날도 음주 마셔서 도주 놓다가 경찰에 잡히자 폭행 때리기까지 했어. 이야기 더 하까? 이쯤만 해도 알 만하지?”
이번엔 어구전철 차례. 나는 걸핏하면 물서가 진란하다는 말을 한다. 요즘 나라의 물서가 진란하고, 여당과 국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부동산정책도 엉망인데 도대체 이렇게 물서가 진란해서야 되겠느냐고 목청을 높이면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공감해준다. 한자로 바꿔봐도 말이 된다. 물서(物序)가 진란(盡亂)하다… 어디가 어때?
어떤 젊은이가 SNS에 이런 글을 썼다. “삶은 달걀 글자가 너무 이상해서 닮은 살걀이 맞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이게 다 멸린 말치랑 짚고 긴한 커피 때문임.”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응수했다. 며칠 동안 연구했는지 몰라도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 거의 천재다. “노인코래방, 번둥천개, 껍던 씸, 알르레기, 노란계른자, 동사봉아리, 치자피즈, 곱은 졸목, 통치꽁조림, 야치참채죽, 수없는 씨박, 치킨타올, 모자리나, 우뎅오동, 메장외모리, 중고딘 알라서점, 기능재부, 맥걸리와 막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유세할 때 충남 보령 대천을 보천 대령이라고 한 적 있는데, 나도 그런 거 좀 추가해볼까. 키친마니아, 오장향육, 사우나차이나 모닝토스트(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해문한석사전, 고와 개양이, 소 치는 양년, 소 치는 북년, 잔후소리원, 발따보, 하장외드, 역사의 아이노리, 친공정소기, 닥터와 왈츠만, 민가긴가, 덤벙엄벙, 남씨사정기, 임산배수, 출신임산, 케이데어, 갤프골러리….
그런데, 이렇게 헷갈리게 만들어도 사람들은 금세 알아듣는다. 인간은 모든 글자를 하나씩 읽는 게 아니라 단어 하나를 한눈에 전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래 글은 오래전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예문인데, 정작 케임브리지대에서는 이런 연구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여간 읽어보자.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지는는 중하요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이 중하다요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라을지도 당신은 아무 문제없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하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그러니 어쩌라구? 설마 엉터리 말이나 문장을 만들어 퍼뜨려도 괜찮다는 건 아니겠지? 문학 작품이든 보도 문장이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기 글이 어법에 맞는지, 중복은 없는지, 적확한 단어를 쓴 건지 늘 따져보고 점검해야 한다. 갈수록 이상한 말이 늘어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대중의 올바른 어문생활에 기여한다는 힘과 꾸망을 가져야지. 아닌가. 훔과 끠망을 가져야 되나? 아무래도 힘과 꾸망이 더 낫겠다. 이쪽이 더 알아듣기 쉬우니까.
그런데 늉눔은 무슨 말이지? 난 서울 중부경찰서 출입기자이던 1981년 여름 기자실 칠판에 이렇게 써놓고 목욕탕에 가곤 했다. 어구전철 중에는 이렇게 글자를 뒤집어 전혀 다른 말로 만드는 것도 있다. 곰을 뒤집으면 문(문재인 대통령을 말하는 게 아님)이 되고, 논문을 뒤집으면 곰국이 된다. 말장난이 심해서 죄송합니다.
아내랑 말다툼을 했다. 문을 꽝 소리 나게 닫고 내 방으로 와 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싸움의 원인은 별것 아니었다. 잠시 마음의 안정을 도모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분이 나쁘면 TV를 켜거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 기분도 더더욱 아니다. 이럴 때 나만의 비법이 있다. 인터넷으로 바둑 게임을 한다. 바둑을 두는 시간만큼은 몰입이 되어 잡념은 포맷되고 머리는 리셋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직장에 다니던 형님으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당시 형님 실력은 8급 정도 됐던 것 같은데 나는 4점을 놓고 뒀다. 둘 다 걸음마 단계의 초보 기력으로 꼼수도 두고 잡히면 물려달라고 떼도 썼다. 어떤 때는 대범하게 “바둑돌 죽지 사람 죽나!” 하면서 큰소리치기도 하고 상대 바둑돌 잡는 재미를 즐기며 서로 배웠다. 그 시절이 벌써 40여 년 전이다. 군대생활을 할 때는 바둑 좀 둘 줄 안다고 하늘같은 상관인 대대장과도 수담을 했고 직장생활을 할 때는 바둑을 매개로 폭넓은 교류를 맺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바둑 좀 둔다 하면 좋은 바둑판과 바둑돌을 세트로 준비해놓고 집으로 손님들을 초청했다. 동네 기원도 늘 벅적였다. 바둑 관련 추억의 하이라이트는 회사 점심시간이었다. 구내식당에서 남들보다 밥을 빨리 먹고 바둑판이 비치된 휴게실로 달려갔다. 도착하는 순서로 상대를 찾고, 한발 늦으면 구경꾼이 되어야 했다. 구경꾼들이 훈수를 두면 동네 바둑판이 되어 멀쩡히 살아 있는 돌이 죽기도 하고 죽은 돌이 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훈수 덕택에 묘수가 만발했다. 직장에는 바둑동호회가 있었고 정기대회 때는 푸짐한 상품이 걸리기도 했다. 전철을 타면 바둑 책 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과거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직접 만나 바둑판을 앞에 놓고 바둑을 뒀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으로 인해 바둑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인터넷으로 바둑을 둘 때는 바둑돌과 바둑판이 필요 없다. 대적할 상대를 찾는 방법도 간단하다. 온라인으로 접속하면 같은 급수의 명찰을 단 선수들이 즐비하다. 살고 있는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접속을 해온다. 밤낮이 없다. 새벽 1시에 접속해도 상대를 찾을 수 있다. 다들 환호하며 맞아준다. 휴일도 없다. 365일 언제나 접속이 가능하다.
나이 들어갈수록 바둑을 잘 배워뒀다는 생각을 한다. 바둑은 머릿속으로 변화의 수를 읽으며 최선의 수를 찾는 게임이다. 치매 예방에 딱 좋다. 골치 아픈 일에서 잠시 해방되고 싶을 때나 할 일이 별로 없는 시간부자들에게도 맞춤 취미다. 조치훈 프로기사는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했지만 아마추어인 일반인들은 그냥 재미로 두면 된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도 여럿 있다. 다양한 구색을 갖추고 있어 배우기도 쉽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어 좀 일찍 배워두면 더 좋다. 잠시 넋을 놓고 바둑의 세계에 풍덩 빠져보는 것도 시니어의 또 다른 낭만이다. 하지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너무 빠지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