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뜻은 ‘불도를 구하는 마음을 처음으로 일으킴’이라는 뜻이다. 쉽게 얘기하면 ‘처음처럼’이다. 소주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온 것이다.
가장 쉬운 예가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것일 것이다. 화장실 갈 때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며 절박한 심정으로 갔는데 급한 볼일을 다 보고 나니 마음이 뻔뻔하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로 남에게 돈을 빌릴 때는 온갖 약속을 다 해가며 빌렸는데 막상 갚으려니 갚기 싫은 것이다. 이런 경우 돈을 빌려준 사람이 오히려 처지가 난처해진다. 돈을 갚으라고 하자니 말이 안 나오고, 말을 꺼냈는데 거절하거나 이유를 대며 연기하면 실망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너무 독촉하다 보면 돈을 갚지 않기 위해서 끔찍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 돈 잃고 사람 잃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험해지는 것이다.
남녀 문제도 그렇다. 처음엔 상대방의 마음에 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일단 사귀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진다. 호르몬 작용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초발심을 잃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해마다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이유도 그 당시 초발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드라마에서도 어려운 시절 여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정작 출세하고 나서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스토리가 많다. 출세하고 나니 옛 여인은 귀찮은 존재가 되고 새 여인에 정신이 팔리는 것이다. 욕심이 싹 트면서 초발심을 잊는 것이다. 이런 남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때에 따라 감정 변화가 심해 친소관계가 달라지면 어떻게 진전될지 불안해진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정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친척이나 오래된 친구가 오래간만에 봐도 편하고 친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심리학 박사 이민규 씨의 신간 ‘지치지 않는 힘’에 보면 “목표가 있는 사람은 휘둘리지 않는다”, “길게 보는 사람은 서두르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초발심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심지가 굳어야 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종로 3가 전철역 12번 출구 옆에 ‘그래도 한 우물을 파라, 결국 이긴다’라는 글귀가 유리에 캘리그래피로 쓰여 있다. 필자가 캘리그래피를 배울 때 각자의 좌우명을 제출하라고 해서 써낸 것이 채택된 것이다. 초발심을 그대로 유지하다 보면 결국 목표를 달성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는 편이 편하다. 잔머리를 안 굴려도 되기 때문이다. 단점은 ‘고집이 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5월에 계속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을 찾아갔다. 예정에 전혀 없던 춘천행이었다. 사실은 이날 여럿이 모여 야외운동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에 세찬 비가 내리자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2주 전에 한 약속이라 아쉬웠다. 그렇다고 날씨 탓만 하며 그냥 집에 있기에는 새벽부터 서두른 시간이 아까웠다. 다른 계획이라도 세워야 했다.
일단 운동 도구를 빼놓고 카메라와 가방을 들고 나섰다. 걸으며 순간 생각난 곳이 바로 김유정을 만날 수 있는 실레마을이다. 그곳은 몇 번 가봤기에 두렵지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어디를 가든 그곳을 빠짐없이 살펴보려면 여럿보다는 혼자가 훨씬 도움이 된다. 그전에 두 번이나 갔지만, 일행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깊이 있게 반복해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경춘선을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대중교통으로는 처음이었지만, 안내판이 잘 되어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에서 목적지까지 도보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 12월 1일 김유정역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한국철도 역사상 최초로 사람 이름을 사용한 역이다. 걸어가며 보니 전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보이는 모든 곳이 김유정에 관한 지역이었다. 상점이나 식당이나 온통 김유정 작품의 제목을 따서 점순네 닭갈비, 중화요리 만무방, 봄봄 닭갈비, 카페 산골나그네 등이다. 마치 마을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느낌이라 새로웠다.
비록 날씨는 언짢았지만, 그가 나고 자란 생가와 ‘김유정기념전시관’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천재작가의 안타까운 생애와 작품에 관한 것에 대해 샅샅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여러 작품의 산실이었던 실레마을로 향했다.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걷는 기분을 아마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봄봄’의 점순이가 된 듯 설레기도 하면서도 김유정의 허망한 생을 생각하면 슬퍼졌다. 한국 문학사에 토속적인 언어와 자신의 고향을 바탕으로 길지 않았던 작품 활동 기간에 금쪽보다 더 귀한 작품들을 남긴 그를 떠올리며 마음이 벅차오른 날이었다.
김유정, 실레마을 곳곳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다
실레마을, 김유정 작가의 고향이며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와 인물들이 허구가 아닌 실제했다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봄봄’의 점순 아버지 봉필영감이 마을 가운데 잣나무 숲에서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주인공 나(머슴)와 점순이의 혼인 약속은 지키지 않으며 일만 부려먹던 봉필영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백꽃’의 배경은 금병산자락 아래 잣나무 숲 뒤쪽이다. 기념관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세운 ‘금병의숙’ 터가 있다. 움막을 짓고 마을 아이들에게 열정을 다해 야학을 가르친 곳이었다. 그 옆에는 김유정이 심은 느티나무가 지금도 있다. 마을지도를 보니 유정이 술을 마시던 주막 한들의 팔미천에는 ‘산골나그네’(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두었던 물레방앗간 자리가 있다.
이와 같이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 12편이 실레마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점순이,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 등 인물들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레마을이다. 29세 짧은 생 동안 자신의 고향을 통틀어 작품 속에 등장시킨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참 행복한 실레마을이다.
김유정은 1936년 잡지 ‘조광’ 5월호에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를 기고했다. 글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3호선 전철 안. 빈자리는 없고 서 있는 사람이 공간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붐빌 때와는 달리 적당한 거리가 훨씬 쾌적한 느낌이었다.
양재역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탔고 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앞 의자에는 40대로 보이는 인상 좋은 여성 둘이 친구처럼 다정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작은 소리로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득 무엇인가를 알아챈 듯 잠시 움찔거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그중 하나가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 난 아직 남자여.”
그는 손짓으로 일어나려는 여성을 제지했다. 순간 돌아보았다. 정말 듣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했다.
그는 가는 허리와 다리를 헐렁한 옷으로 가리고 지팡이를 든, 누가 봐도 할아버지였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야윈 몸을 감싼 양복에는 나름대로 한껏 멋을 부린 흔적이 역력했다. 색깔 맞춰 입은 콤비 양복은 좀 허름해 보였다. 그러나 주름진 얼굴에서는 윤기가 났고 움푹 파인 눈이었지만 초롱초롱 빛나기까지 했다. 그를 향해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멋지세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게 말을 걸었다. “늙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계속 손사래를 치면서도 지팡이를 꼭 짚고 있는 것이 걸렸는지 앞자리의 여자 둘이 또 일어나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제지했다. 그러자 여성 둘이 일어나며 말했다.
“저희 내려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앉았고 나도 불러서 옆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여성 둘은 내리지 않고 구석으로 가서 양보한 것을 감추려고 했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덩치 좋은 남자들이 전철에서 억지로 구겨 앉으며 여성을 배려하지 않으면 보기 좋지 않았다. 남자라고 언제나 힘이 남아돌지는 않겠지만 보기는 좋지 않았다.
경로석에서는 할머니들이 타도 할아버지들이 꿋꿋이 앉아가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
대접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때는 갑질이다. 갑이 아닌데도 갑질을 하면 작은 사람이다. 갑인데도 갑질하지 않으면 보기 좋다. 그럴 때 큰 사람같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배려가 주위를 얼마나 환하게 기분 좋은 기운으로 밝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초라한 옷차림이 그의 인품을 가리지 못했 듯, 화려한 차림도 인품을 빛나게 하지는 못한다. 덕분에 기분 좋은 귀가를 했다.
열다섯 살 소녀는 키가 멀대같이 컸다. 친구들이 꺽다리라고 놀려댔다. 선생님은 운동을 권했지만 소녀의 눈에는 모델과 영화배우의 화려한 옷들만 아른거렸다. 아버지가 가끔 사오는 잡지를 들춰보며 무대에 오르는 꿈도 꿨다. 패션계를 주름잡던 모델 루비나를 흠모하고 카르멘 델로피체처럼 되고 싶었던 소녀는 자주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그리고 어느새 75세가 되어버린 은발의 소녀는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았다.
발가락 다섯 개만 겨우 집어넣은 하이힐을 신고 그녀가 무대 위에 오르자 관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숨이 막혀왔다. 등짝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조명 속에서 쾅쾅 울려대는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런웨이를 돌아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캣워크를 무던히도 연습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등 뒤에서 누가 자꾸 쫓아오는 것만 같아 도망치듯 걸었다.
‘2018 F/W 헤라서울패션위크’에서 ‘키미제이’ 메인 모델로 런웨이에 오른 최화자 씨는 아직도 설레는지 두 볼이 발그레했다.
“너무 떨렸어요. 높은 구두를 신고 걸어가다 잘못해서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요. 시니어 모델이 국내 최대 패션쇼 메인 모델로 발탁된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키미제이 대표 김희진 디자이너가 함께 모델 공부를 하는 김칠두 선생이랑 저를 부르시더니 무대에서 선보일 옷을 입혀보고 워킹도 해보라 하셨어요. 부족한 게 많았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를 과감히 메인 모델로 세우셨어요. 김칠두 선생은 오프닝, 저는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죠.”
20대 젊은이들을 위한 패션쇼에 “웬 시니어 모델?” 하며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카메라 감독들도 이 낯설고 도발적(?)인 무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셔터를 눌러댔다.
“런웨이에 오르기 전, 실수만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걱정했던 것보다 무대 분위기가 괜찮았나봐요. ‘신선하다, 젊은 모델과 견줘도 손색없다, 멋지시다’ 하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주시는 카메라 감독도 있었어요. 꿈만 같았죠.”
은발의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칠십 넘어 시작한 모델 공부
최화자 씨가 본격적으로 모델 공부를 시작한 것은 71세 때인 2014년. 강남에 모델 교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당장 달려가 등록을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너무 늦은 출발이었다. 대부분은 허리가 굽고 다리가 휘어질 나이였다. 친구들은 봉사나 하러 다니면서 손주들이나 돌볼 일이지 그 나이에 유난스럽게 별 걸 다 배운다며 한마디씩 했다.
“우리 집 애들도 ‘운동 삼아 다니시겠지’ 했대요. 엄마 나이에 모델? 전혀 상상이 안 됐던 거죠. 지금은 ‘우리 엄마 점점 더 멋져지시네!’ 하면서 좋아해요. 손주들도 ‘우리 할머니 짱!’이라고 해주고요.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내 품에 손주들을 안겨줬을 때도 기뻤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말하라면 바로 지금이에요.”
그래도 칠십이 넘은 나이에 하는 공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는 것부터 연습했어요. 기본 워킹에 표정 연기, 포즈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어요. 처음엔 일자로 걷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비뚤어진 체형 바로 잡는다 생각하고 틈날 때마다 거울 보며 연습했어요. 또 장 보러 갈 때도, 친구 만나러 갈 때도, 전철 타러 갈 때도 일자걸음으로 걸으려 애썼죠. 그러기를 벌써 5년이 됐네요. 그런데 왜 표정 연기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걸까요?(웃음)”
중학교 때 소녀의 키는 168cm나 됐다. 선생님은 키가 크니 운동선수를 해보라 권했다. 그러나 소녀는 운동이 싫었다. 온통 예쁜 옷에만 관심이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상상도 자주 했다.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잡지 속 여인들처럼 예쁜 얼굴이 아니라서 주눅이 들곤 했다.
“‘나는 못생겨서 모델을 할 수 없을 거야’ 하면서도 자꾸 그쪽을 돌아봤어요. 한동안은 패션계를 주름잡던 모델 ‘루비나’에 푹 빠져 지냈어요. 제 롤모델이었지요. 움푹 들어간 눈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던 그 여인,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카르멘 델로피체는 또 어떻고요. 부러움과 질투심을 동시에 일으키게 하는 여인이잖아요. 올해 87세인데도 무대를 누비고 다닌답니다. 그녀의 표정과 몸매를 보셔요. 전율이 느껴지지 않나요?”
열다섯 살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꿈꾸는 소녀처럼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휴대폰에는 델로피체의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파도가 몰아치던 시절
한 됫박의 물음표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인생일까. 누구든 파도가 치는 시절을 겪는다. 40대 때 그녀의 삶도 물음투성이였다. 하루 종일 눈물이 흐르는 시간을 살던 어느 날 무작정 교회를 찾았다. 기도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로 휘청일 때 종교는 위안이 됐다. 아직 먼 곳을 바라볼 힘은 없었지만 그날그날 이겨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조금씩 생겨났다.
“경제적으로 크게 무너지니까 회복이 잘 안 되더라고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그러나 주부로만 살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더군요. 하루는 막막한 심정으로 벼룩시장 광고지를 들여다보는데 간병인을 모집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우리나라가 서독으로 간호사를 파견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1970년대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 전 저도 독일에나 가볼까 하고 간호 보조 교육을 받았어요. 결국은 못 갔지만 간호 업무를 배워둔 덕에 한전 부속병원 소아과에 취직도 할 수 있었죠.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병원일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아니어서 용기가 났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17년 동안 간병일을 했어요. 아직도 함께 일했던 몇몇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데 급한 상황이 생기면 가끔씩 도와 달라고 전화가 옵니다. 예전에는 돈 때문에 일했지만 지금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갑니다.”
간병일을 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젊은 사람에게 병원은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곳이지만 노인에게 병원은 저 세상으로 가기 전 들르는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가진 게 많든 적든 떠나는 길은 다 똑같았다. 모두들 후회하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건강을 챙기고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모델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뒷방 노인네처럼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뒤늦게라도 시작한 공부가 삶의 원동력이 되었어요. 알게 모르게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받는지 대사증후군도 없고 당뇨, 고혈압도 없어요. 뱃살 하나 없이 몸무게도 일정해요. 의사 선생님도 깜짝 놀란답니다.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재미있고요. 10년, 20년 아래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감각도 생각도 젊어지는 것 같아요.”
쇼호스트에도 도전
그녀는 현재 ‘더쇼프로젝트 모델컴퍼니’에서 공부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 워킹과 표정, 포즈를 연구하고 연습한다. 이곳을 운영하는 정영주 대표는 청계천수상패션쇼, 광명동굴패션쇼 등 다양한 공연을 통해 시니어 모델 참여를 기획하고 도왔다. 정 대표 덕분에 그동안 10여 차례 패션쇼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최근 메인 모델로 무대에 오르는 데도 큰 힘이 되어줬다. 소중한 인연이다.
그녀의 첫 무대는 무사했을까.
“당연히 진땀 흘렸죠. 무대에 오를 때는 대본을 먼저 짜요. 어디까지 걷고 어떤 포즈를 하고 어떻게 들어와라 하는 내용이죠. 첫 무대에 올랐을 때 얼마나 떨렸겠어요. 잔뜩 긴장해서 걷고 있는데 한 분이 ‘그쪽으로 가면 안 돼’ 하고 지적을 해서 순간 아찔했어요. 지금 같으면 표 나지 않게 수습했겠지만 그때는 무대 경험이 전무했던 터라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그래서 ‘어머나! 어떡하지? 내가 실수했나봐’ 하고 뒤로 돌아선 거예요. 뒤따라오는 사람 얼굴과 떡 마주쳤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잘못 알고 지적을 했더라고요. 교수님은 누가 실수를 해도 지적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어요. 당황해서 더 큰 실수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우왕좌왕 허둥댔던 그날이 어느새 추억이 됐네요.(웃음)”
최근에 쇼호스트 공부도 시작했다는 그녀. 건강할 때까지 계속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단다. 시니어가 자신을 보며 ‘이 나이에 이런 사람도 있네’ 하면서 자극을 받아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불태우면 좋겠다는 바람도 슬쩍 귀띔한다.
영원히 박제될 뻔했던 꿈, 다시 꺼내어 펼쳤으니 그녀만의 무대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옛날 영화관 앞. 영화표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기다리다 바로 앞에서 매진되는 일도 있었다. 인기가 있거나 작품성이 있는 영화는 일찌감치 암표상들이 표를 선점하고 나와 “암표 있어요”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색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아가는 꿀 재미도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어떤가. 한 장소에 상영관은 많지만 볼 영화가 없다. 치고, 박고, 잔인한 장면이 화면 가득이다. 극장 문턱은 높기만 하다. 어디 없을까? 편안하고 온전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곳 말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오라!
한눈판 사이에 보고 싶었던 영화가 내려갔다거나 도무지 볼 수 없는 시간에 상영되고 있다면 이곳의 문을 두드려보라. 인천 남구 주안동, 메인플라자 7층에 ‘영화공간주안’이 있다.
극장으로 이어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눈앞에는 할리우드 키드의 시네마천국이 펼쳐진다. 작품성이 뛰어난 크고 작은 영화부터, 대형 영화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세계 각국 영화가 상영된다. 대형 영화 홍수에 밀려 보이지 않았던 작품들이 선명하게 보이니 영화 볼 맛 난다. 상영관 중 3관과 4관, 컬처팩토리는 저렴한 가격에 대관이 가능하다고. 대관을 원하면 ‘영화공간주안’ 사이트에서 신청하면 된다.
시니어 시네마 키드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취재 당일은 특별히 올봄 취임한 이안 신임 관장이 주안 내부 안내를 도왔다. 이주민영화제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을 두루 섭렵한 영화제 프로그래머이자 영화평론가인 이안 관장의 깜짝 인사에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취임 한 달 반 남짓 신임 관장이지만 지금까지 영화계에서 쌓아온 관록을 총동원해 ‘영화공간주안’을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화공간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기운을 쏟는 중이었다.
영화공간주안은 자금이 생기면 가능한 한 시설 투자에 집중한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지정된 극장은 여러 가지 여건을 지켜 상영하면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데 이 자금은 극장 내부 시설비용으로 쓴다고 했다. 보고 듣는 시청각 서비스에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정작 11년 전 인수했던 극장의 로고가 찍힌 좌석을 사용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청소업체를 불러 공기를 정화시키고 세척까지 해서 그런지 여전히 새것 같아 바꿀 수도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부분을 개선하고 난 다음 생각할 문제라는 것이 이안 관장의 설명이다.
취재를 갔던 화요일 오후에는 ‘시네마차이나 인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주한중국문화원에서 제공한 중국 영화를 무료 상영하는데 이 또한 공익 프로그램이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인천 지역 영화관과 꽤 잘 어울리는 상영회. 낮 시간대에 영화 상영이 다 보니 시니어의 이용이 눈에 띄게 많다. 영화공간주안도 다른 영화관처럼 멤버십 제도가 있다. 회원 수만 1만5000명 가까이 되는데 이 중 17% 정도가 50대 이상 시니어 회원이다. 멤버십 회원이면 살 수 있는 10회 상영권은 장당 5000원인데 커피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시니어층 이용이 두드러지는 이유다.
젊은 시절 영화 관람이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던 시니어에게 극장은 그 어느 곳보다 친숙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안 관장은 말했다.
“지금 어른들은 제일 좋은 게 영화인 거예요. 영화공간주안에 꾸준히 오시는 관객분들은 그 정서를 아신다는 거죠.”
이안 관장이 영화공간주안 이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접근성이라고 했다.
“요즘은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특급하고 급행이 있는데 특급 전철을 타면 한 30분 정도, 급행선을 타면 40분 정도면 영화공간주안에 도착합니다. 인천지하철 2호선이 생겨서 인천 안에서도 접근성이 굉장히 좋아졌더라고요. 그러니 멀다 생각하지 마시고 많이들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홍일선 님이 1970년대 대표 작가 송영(1940~2016) 선생님께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봄… 봄이라고 가만히 써봅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 넘어
밭둑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흰 조팝나무꽃을 바라보며
송영 꽃… 송영 선생님이라고 가만히 이름 불러보는 밤입니다.
송영 선생님
한밤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아 설핏 꿈결인 듯 몽유인 듯 일어나야 했습니다. 어제는 종일 텃밭에 나가 아내와 함께 감자를 심었기에 초저녁잠이 깊었으련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많이 간곡했던 것 같았습니다.
강물이 무엇인가 다급하여 상수리나무들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고 지금 한창 꽃봉오리가 절정인 조팝나무가 헤어져야 할 벗들에게 들려주는 속삭임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이름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러시아 변방 가브리노 산골짜기에서 들려온 아득한 울림이었습니다. 아, 니나… 선생님이 러시아 순례에서 만난 유일한 지음(知音) 니나 그리고르브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니나가 내 눈 속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온화한 얼굴이 다가왔고 밤하늘엔 북두칠성 국자 형상이 오롯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니나, 니나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젊은 날이나 만년이나 한결같이 단 한 사람 스승이 톨스토이였지요. 순례길에서 벗을 만난다는 것은 생의 도반을 만났다는 것 아니겠는지요. 톨스토이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성자의 표상을 선생님은 구릿빛 얼굴을 한 온유한 농부 니나 그리고르브나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초면의 니나는 선생님이 원하는 만큼의 땅을 선뜻 주겠다고 했다지요.
당대 톨스토이는 ‘사람에겐 몇 평의 땅이 필요한가’라고 수없이 물었고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130년 뒤 오늘도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에 못이 박힌 자는 식탁에 앉을 수 있지만 못이 박히지 않은 자는 식탁에 앉을 수 없다’는 바보 이반의 말을 그날 니나의 모습에서 빙의로 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바보 이반은 성자였지요. 이반은 소위 ‘국가는 전쟁 없이 돈 없이 학문 없이 사고하는 것 없이’ 스스로 자라는 나무들을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바보였고 늘 무시당했고 글을 몰랐기에 이반은 ‘신(神) 가까이’ 늘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196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니 원고지를 펜으로 한 자 한 자 메운 일이야말로 ‘손에 못이 박힌’ 고단한 농부의 삶이었습니다. 온몸을 흙의 마음으로 물들인 니나가 바이칼에서도 더 아득한 남쪽 코리아에서 온 소설가의 진의를 대번에 알아본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원하는 만큼의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니… 니나는 선생님의 지음이 분명합니다.
조팝나무꽃 그늘에 앉아 있다가 한 권의 책을 받았지요. 작가의 말이 생략된 작품집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였습니다. 저자의 부재 속에서 나온 책, 쓰라린 책,심지가 없는데도 불타오르는 책… 활짝 피어난 꽃들이 싫었습니다.
이 땅의 꽃들은 크나큰 상심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숨죽여 읽어야 했습니다.
송영 꽃 송영 숲의 문장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존재의 시간을 넘나드는 꽃이었습니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핀 꽃이었습니다. 나는 이 꽃 이름을 감히 송영 꽃이라고 명명합니다. 작가는 세계를 수없이 떠돌며 완고한 중심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의로 일탈함으로써 비로소 한 세계를 꿈꾼다지요. 선생님, 지금 어디를 순례하고 계신지요. 그래 니나는 만나셨는지요. 니나에게 톨스토이의 온화한 미소를 이심전심으로 전해드렸는지요.
송영 선생님. 초월(草月)역 기억하시는지요. 여주까지 가는 전철 개통을 우리는 많이 기다렸지요. 그토록 기다리던 전철은 선생님이 분당 어느 병상에 누워 계실 때 개통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날 병상에서 수화를 나누듯 침묵의 소리로 세계를 묵상했지요. 선생님은 초월역 벤치가 잘 놓여 있더냐고 물었지요. 초월역 앞에는 무슨 꽃이 피어 있느냐고 물었지요.
선생님은 또 말씀하셨지요. 병원에서 곧 나갈 테니 초월의 그 꽃들 함께 보자고, 찬찬히 느리게 보자고….
선생님은 또 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초월에서 만날 때는 완성본이 아니더라도 작품 한 편씩 갖고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홍 시인 생업이 농사이니 아무래도 내가 초월역에 먼저 나와 앞산을 보게 될 것 같다고 혼잣말처럼 하셨는데 선생님… 지금 그곳도 꽃들이 한창인가요. 머나먼 북방 툴스카야역 노천카페 의자에 홀로 앉아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 6번’을 듣고 계신가요? 음악의 궁극을, 첼로의 선율을 문학보다도 더 편애했던 소설가, 세속의 온갖 억압과 불의를 음악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었던 예술인.
송영 선생님
언제인가 금강산 가는 길목에서 ‘저 경계선 너머에는 실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가상의 반쪽짜리 조국이 있다’며 우리의 반쪽을 오래오래 응시했다고,
그리하여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고 하셨지요.
선생님께선 어느 날 아주 긴 전화로 침묵의 울음을 아냐고 저에게 물은 적 있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못했지요. 살아 있으되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들의 아픔, 그 침묵의 공간을 침묵으로 뚫고 나오는 것이 문학이라고 선생님은 나직이 말씀하신 적 있지요.
어제는 선생님 등단작 ‘투계’를 읽었습니다. “나는 램프의 심지를 아주 커다랗게 돋워버렸다. 갑자기 부풀어 오른 불빛이 눈부시도록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밀폐 고립된 상황 속에서 램프 심지를 올리는 일만이 억압과 소외의 시간을 유예하는 유일한 길임을 터득했던 소년 송영을 만나는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남도 염산이라는 궁핍한 마을, 외딴집에서 지속되는 투계(鬪鷄)는 세계가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로 분류됨으로써 한 세계가 유지됨을 암시하고 있지요. 비루하고 암울한 세계가 마치 신세계처럼 느릿느릿 펼쳐지고 있지요. 한 작가가 예술적 상상력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비극적 상상력의 소산으로 문학예술이 태어나는 시대, 그 시대는 분명 유쾌한 역사는 아닙니다. 암울한 역사 복판에 송영 문학이 아프게 오랜 시간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부재하는 동안 좋은 일도 많았습니다. 촛불이 이윽한 광장에서 아드님 송시원 군을 만나 함께 어둠을 밝힌 시간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귀한 일은 아기 지안(知岸)이 태어난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가 송영 말고도 지안이 할아버지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겼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좋은 일이 많은데 초월역에서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것인지요. 봄날이 가기 전에 못난 시 한 편 품고 초월역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송영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홍일선(洪一善) 시인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흙의 경전’ 등이 있고 현재 여주 남한강가에서 농부로 생업 중.
서울시는 전철·버스·택시 대중교통요금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전철무임이 퍼주기 복지라며 여느 때처럼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어르신은 전철무임은커녕 오히려 요금폭탄을 맞고 있다. 국가는 2배로 전철무임을 보상해 국민혈세를 낭비하고, 어르신은 버스요금을 일반인보다 2배로 부담한다. 문제는 전철·버스요금 환승할인제를 도입하면서 어르신의 교통요금에 환승할인을 적용하지 않는 교통당국의 ‘정책오판’에서 비롯됐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대중교통은 전철·버스요금 환승할인을 시행하면서 국민복지의 꽃을 피웠다. 서울시민이 전철과 버스를 1구간 1회 환승할 경우를 보자. 전철에서 버스로 환승하면 전철 1250원, 버스 ‘0’이 찍히고, 버스에서 전철로 바꿔 타면 버스 1200원, 전철 50원이었다. 전철요금 638원, 버스요금 612원 식으로 환승할인한 1250원이 교통요금 총액이었다. 행복했던 어르신의 어제다.
65세가 되면 전철무임 ‘어르신교통카드’를 발급받는다. 교통요금이 절반 수준으로 당연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전철요금은 ‘0’으로 버스요금은 1200원으로 찍혔다. 교통요금청구서를 받아서 자세히 살폈다. 교통요금 총액이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버스요금이 과거보다 2배 수준이었다. 전철요금만큼 버스요금으로 자리만 바꿨다. ‘전철무임 하나마나’다. 어르신들의 서글픈 오늘이다.
청구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612원이었던 버스요금이 일반인 승차 때보다 588원 더 많은 1200원 청구됐다. 전철무임보상액 1250원을 합하면 2450원이다. 교통요금이 일반인 2배다. 전철무임은커녕 요금폭탄이다. 어르신 교통요금을 절반 수준으로 감액한다고 했던 계획은 흔적도 없다. 밤잠을 설쳤다. ‘이게 국민복지냐?’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전철요금이 궁금해 교통당국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2011년부터 7년간 일반인의 전철요금 638원보다 2배 많은 1250원을 국가예산으로 철도사업자에게 6510여 억 원 보상했다. 전철요금을 일반인처럼 638원꼴로 계산했다면 절반 수준인 3200여 억 원의 혈세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나라가 노인복지예산을 엉뚱한 곳에 ‘퍼주기’ 하는 현장이다. 이런 속도 모르고 시민은 ‘노인 전철무임 폐지하자’고 한다. ‘우리 전철 공짜 아냐’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슬픔을 참을 수 없다.
노인복지법은 어르신의 전철 전액무임을 규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근거도 없는 1200원을 버스요금이라며 먼저 징수한다. 달랑 50원 4%가 실질적 무임이다. 교통당국의 주장대로 전철·버스요금을 각각 1250원, 1200원으로 인정해보자. 현행 교통요금 1250원에서 전철 요금을 먼저 공제해야 100% 전철무임이 된다. 버스요금을 한 푼이라도 징수하면 노인복지법 위반이다. 자가당착이다. 어르신의 버스요금을 1200원이라 주장할 수 없는 이유다.
국가가 10년이 넘도록 어르신들을 차별하고 있다. 현행 불법 어르신 교통요금제를 폐지하고, 일반인과 동일한 전철·버스 환승할인을 적용하면 모든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된다.
교통요금 인상하기 전에 이 문제를 한시바삐 개선해야 한다.
혼자 살다 보니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우리 집은 늘 부재중이다. 우편배달부나 택배 기사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집이다. 현관문에 등기 우편이나 택배는 인근 세탁소에 맡겨두라는 쪽지를 써 붙여 놓기는 했지만, 일단 전화가 온다.
한 번은 등기 우편이 왔다며 택배기사가 전화를 했다. “301호 맞느냐?”는 것이었다. “!”맞다고 했더니 “어디다 두고 가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우편함에 놓아두고 가라”고 했더니 등기라서 규정 상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가져 갈 테니 사흘 이내로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사흘 이내에 안 오면 반송한다는 것이었다. 전철로 두 정거장을 가야 하는 우체국에 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현관 앞에 소화전 함이 있다. 거기 넣어두라고 하면 그나마 말을 듣는다. 저녁에 귀가해서 소화전 함을 열어 보니 전에 살던 사람 앞으로 온 등기우편이었다. 지금 어디 사는지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갖고 다니다가 다른 동네에 갔는데 마침 우체국이 보여 반송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거주지 우체국에 가서 반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편배달부가 집주소로만 맞느냐고 물어서 맞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반드시 수신인 성명도 맞는지 확인해 볼 일이다
또 한 번은 지방의 어느 농산물 협동조합에서 보낸 택배였다. 사과상자만한 크기였다. 필자가 요청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열어 보니 건강보조식품인데 샘플을 시식하면 상품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 것이므로 현금 25만원을 보내라는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전화번호를 찾아 항의했더니 반송하라고 했다. 다시 우체국까지 그 무거운 것을 들고 가서 반송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원래는 택배나 등기 우편이 오면 옆집 할머니가 대신 받아 주었다.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눠먹던 사이이다. 그런데 그 노부부가 이사 가고 젊은 부부가 이사 왔다. 새로 이사 온 그 집 새댁이 우리 집 현관 앞에 붙여 놓은 ‘옆집에 놓고 가라’는 메모지를 뜯어 버렸다.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우리 집 일로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한 번은 택배 기사가 “동네 세탁소에 맡겨두겠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별로 이용하지도 않는 세탁소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부재중인 집 동네 택배는 거기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과연 세탁소에 가니 택배 등기 우편들을 입구에 모아두고 있었다. 다만 본인 여부 학인을 안 하니 불안하기는 했다. 그 뒤로 세탁소에 일부러 세탁물을 맡기게 되었다.
사실은 더 가까운 곳은 길 건너 부동산 중개소이다. 집 문제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런데 택배 기사들은 길을 건너면 동네지명이 달라 규정상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마다 쌀 20kg을 택배로 보내오는 회사가 있다. 너무 무거워서 세탁소까지 갖다 두라면 화를 낸다. 세탁소에서 찾아오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냥 집 앞에 두고 가라고 하면 분실로 책임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다며 고집을 피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방화문이 있다. 평소 열어두기 때문에 그 뒤가 눈에 잘 안 띈다. 거기 두고 가는 것이 절충안이다.
어떤 사람은 택배가 오면 기대도 되고 기다려진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리 반갑지 않다. 연락도 없이 택배가 왔다고 연락 오면, 누가 보냈는지, 수신인 이름이 맞는지, 두고 갈 장소 등으로 또 한참 시비를 해야 한다. “누가 보냈느냐?”고 물으면 발신자 택이 취급 과정에서 닳아서 글자가 잘 안 보이는 경우도 있고 영어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안 보인다며 짜증을 낸다. 이래저래 신경 쓰인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나 명승고적지를 가면 가파른 바위에 이름을 페인트로 쓰거나 심하게는 큰 바위에 이름이나 글자를 파서 새긴다. ‘000을 사랑해!’, ‘우리사랑 영원히’ 라는 글이다. 이런 글자를 본 애인이 감동해주길 바란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는 용감하고 멋있는 사람으로 알아주길 바란다. 여러 사람들에게 이름을 공개해 변하지 않을 대못을 박고 싶은 심정에서 한 행동임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방문객의 대부분이 얼마나 사랑했으면 또는 얼마나 사랑이 변치말기를 기원했으면 바위에 이름까지 새길까!,하고 부러워하고 축하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문화재를 훼손했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자칫하면 자연 훼손 범으로 법정에 서야 한다.
우리 아이의 출생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첫 돌날 찾아준 하객들에게 아이이름을 새긴 작은 선물을 돌린다. 부모님의 회갑 날에도 수건에 부모님 이름을 인쇄해서 나누어 준다. 기업체를 방문해도 간단한 물건에 회사이름을 새긴 방문기념 선물을 주는 곳도 많다. 크게는 대통령이름이 새겨진 시계선물도 있다. 모두가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사랑의 자물쇠라 하여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의 마음을 담은 후 자물쇠로 잠그고 다시는 열수 없도록 열쇠를 멀리 던져버리는 퍼포먼스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멋있게 표현하고 싶고 그 사랑을 영원히 변치말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강서둘래길’에서 이런 멋진 모습을 봤다. 강서둘래길은 전철5호선 개화산역이 있는 개화산둘레가 주 무대다 총연장이 11.4km로 대략 3시간이 소요되는 걷기 좋은 길이다. 지역주민은 물로 멀리서도 이름을 듣고 찾아온다. 중간지점에 봉화정(烽火庭)이라는 쉼터인 정자가 있는데 거기서 아름다운 기증을 한 멋진 시계를 봤다.
잠시 정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똑딱이는 시계소리가 들린다. 눈을 들어 위를 보니 결혼부부의 사진이 박힌 시계가 걸려있다. 초침이 똑딱똑딱하고 가고 있고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다. 걸어만 놓고 내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전자시계이니 몇 달에 한 번씩 건전지를 교체해야 한다. 시간도 오차가 있으니 아주 가끔은 시간조정도 해야 정확한 시간이 제공된다. 시계가 잘 관리되는 것으로 보아 기증자는 가끔씩 올라와서 먼지도 털어내고 시간도 맞추고 건전지도 교체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웃고 있는 사진이 시계의 시간 품질보증서와 같다. 젊은 부부의 결혼식 사진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결혼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도 한다. 기증자는 하루에 한사람이라도 자신들의 신혼사진을 보고 파경의 문턱까지 간 부부가 화해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普施)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혼을 기념하는 벽시계를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에 걸어 놓을 마음씀씀이가 아름답다. 시계관리를 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더 깊어질 것이다. 작은 기증이지만 아이디어도 멋지고 참 실용적이다. 이런 작은 기증들이 세상을 더욱 살맛나게 한다. 기증문화 기부문화가 들불 번지듯 퍼져나가게 이른 미담은 널리 알려야 한다.
저녁 6시쯤 당구 천적들끼리 모인다. 간단하게 술안주 몇 점 먹다 보면 저녁 식사 겸 허기가 해결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이길 거라는 포부를 안고 당구장으로 향한다.
보통 3~4명이 3쿠션을 치게 되면 한 시간 가량 걸린다. 한 시간 반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면 다시 출출해진다. 다시 술집으로 간다. 막걸리 몇 순배 더 돌다 보면 앞에 친 결과를 놓고 다시 승부욕을 불태운다. 술도 얼얼해서 이번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치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2차로 당구장으로 향한다. 여기서 집이 먼 사람은 작별인사를 해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귀가할 수 있다. 그런데 집이 가까운 사람끼리만 한 판 더 치려 하는데 자기도 낀다며 집이 먼 사람까지 원래 멤버대로 다시 2회전이 시작된다. 집이 먼 사람은 끝나고 택시 타고 혼자 간다고 했다.
그래서 2회전이 끝난다. 그러고 나면 대중교통은 집이 가까운 사람이든 먼 사람이든 모두 끊어지고 다시 술집으로 향한다. 이젠 집에 가는 것은 모두 포기했으니 술을 마시며 3차전에 전의를 불태운다. 그래서 3차로 당구장으로 향한다.
3차전이 끝나면 대개 새벽 4시쯤 된다. 아직 전철 첫차가 다니려면 한 시간 가량 남았으므로 한판을 더 치든지 배가 고프니 다시 음식점을 찾아 아침 해장국을 먹는다. 그러면 아침 7시쯤 된다. 밤을 꼬박 샌 것이다.
3차전은 체력 싸움이다. 이때쯤 되면 술도 오르고 다리에 힘도 빠진다. 그래서 자기 순서에서 치고 나면 의자에 털썩 앉기 시작한다. 잠을 쫓는다고 커피를 연신 마셔댄다.
전철 핑계로 당구장에서 시간을 더 보냈는데 정작 전철이 이미 첫차부터 다니고 있을 시간인데도, 택시를 타고 귀가한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는 오전 내내 잠을 자면 잠은 어느 정도 보충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잠 한 숨 안 자고 버틸지는 모르는 일이다. 분명히 후유증은 있다. 자고 나도 몸이 피곤한 것이다. 젊은 시절처럼 몸이 금방 회복되지도 않는다.
이렇게 밤샘 당구를 치는 것은 서로의 승부욕이 가장 우선되는 이유일 것이다. 져서 억울하고 이겨서 기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진 사람은 게임비를 내고, 이긴 사람은 술값을 내게 된다. 술이 취했으니 술을 깨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술이 좀 오르고 나면 공격적으로 당구를 치는 경향도 있다. 이렇게 몇 번 밤을 같이 새고 나면 정이 많이 든다. 밤샘 당구의 매력이다.
이렇게 무리하다 보면 건강에 좋을 리가 없다. 밤 샘 당구를 쳤다고 하면 주변에서 “미쳤다!”고 한다.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며 경고를 날린다. 우리도 잘 안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해 놓고는 모이면 또 밤샘 혈투의 칼날을 간다. “오늘은 딱 한판만 치자!”고 해놓고는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