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장갑을 제조 수출하던 회사에 근무할 때 바이어로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노크했을 때 반겨주고 첫 주문까지 해줬던 고마운 친구이다. 내가 직장을 퇴사하고 개인 사업을 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근년에는 아예 일 년의 절반은 생산지 근처인 상해에 머물면서 한국에도 봄·가을로 한번 씩 온다.
하던 사업을 접은 지 꽤 오래됐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접대해야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꾸준히 연락했다. 몇 해는 그런대로 만났으나 그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하고…, 솔직히 경비가 부담됐다.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해야 했고 2차 장소로 옮기다 보면 만만치 않게 돈을 써야했다. 초기에는 친구 혼자 들어 왔지만 점점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늘었다. 작년에는 그의 중국인 여자친구, 대만 공급업자와 그의 가족까지 대 부대를 이끌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 결국 이메일로 솔직한 내 입장을 밝혔다. 만나는 것은 좋으나 너무 많은 비용 지출이 있으니 이제는 본인이 부담하라고 했다. 그는 회사 경비를 여행비로 쓸 수 있는 입장이고 회사에서 나오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 나는 힘들다고 솔직 고백을 했다. 답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 폴 포트 공연을 꼭 보고 싶고 바빠서 못 만나겠다고 다음을 기약하고 피했다. 그대로 그와의 인연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와 만날 때 경비와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동대문에 있는 몇몇 스포츠 용품회사에 해외 영업 관련 부분을 자문하고 있는데 내 상황에 대해 털어놓으니 앞으로는 걱정 말라며 그 중 한 업체 대표가 법인카드를 손에 쥐어줬다. 사업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30년이나 된 친구가 연락을 하는데 어떻게 연락을 안 받을 수 있느냐고 했다.
이번에도 그 친구가 한국 방문을 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동대문 업자가 준 카드를 가지고 그가 30년간 늘 묵던 남산에 있는 한 호텔로 시간 맞춰 갔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프론트 데스크에 물어보니 그런 손님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다시 보니 같은 체인의 강남 쪽에 있는 숙소였다. 친구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일단 그 친구가 묵은 호텔 프론트에 메시지를 남기도 택시를 잡아탔다. 금요일 저녁이라 길이 막혀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중간에 내려 전철을 몇 차례 갈아타고서야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객실에 없었다. 인근 음식점들을 몇 군데 들어가 둘러보다가 못 찾고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려던 순간, 프론트에서 연락이 왔다. 그와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한국인 업자 부부까지 일행이 6명이었다. 비싼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 숯불구이로 메뉴 수준을 낮췄고 한국인 업자 부부가 밥값을 지불했다. 2차도 비싼 호텔 바 대신 근처 치킨 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그간의 오해는 풀고 부담 없이 계속 만나자고 했다. “30년이나 만난 사이인데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보겠느냐”며 “이미 주변에서 고인도 많이 생기고 남은 우리라도 이렇게 만나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자”고 했다. 동대문 업자가 쥐어 준 카드는 쓰지도 못했으나 돌아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굴업도는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로 발표했다가 유명해진 섬이다. 필자는 제주도 외에는 배 타고 외지에 나간 일이 없다. 굴업도는 인천에서 배 타고 덕적도까지 1시간, 그리고 다시 작은 배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는 먼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리포에 갔다가 배 타고 오던 길에 뱃멀미를 심하게 한 트라우마 때문에 배 타는 것은 꺼렸다. 혼자 가려면 배편이며 민박 예약 등 번거로운 절차가 까다로워 엄두도 못 내던 중 단체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인천 역에서 아침 7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서 나와 가장 일찍 출발하는 5시 40분 발 전철을 탄다 해도 2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10분이 모자랐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면서 그동안 서쪽에 위치해서 서로 자주 못 보던 지인들이나 만나 그 동네에서 자고 아침에 인천 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밤늦게 술을 마실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뱃멀미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마침 마곡나루 근처에서 열린음악회 공연이 있다 해서 서쪽 지인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공연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혼자 계양역까지 가고, 인천1전철로 갈아타고 부평역까지, 그리고 1호선 전철을 타고 인천 역까지 갔다. 밤 10시였다. 인천 역 앞은 불은 다 꺼지고 깜깜했다. 인천 역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니 당연히 찜질방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있을 때 동네 노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으니 다시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으로 가라고 했다. 거기가 인천역보다 번화하니 찜질방이 있을 거라고 했다. 마침 인천에 산다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몇 정거장 더 거꾸로 와 주안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찜질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초행길에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버스까지 갈아타고 가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동인천역에서 내렸다. 과연 역사에서 바깥을 보니 찜질방 간판이 보였다. 잠을 잘 수 있는 24시 찜질방이어야 하는데 그건 가봐야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찜질방은 24시 운영 체제였다. 입장료 8000원에 찜질복 1000원인데 경로라고 1000원 할인받았다. 들어가 보니 주인인 듯한 남자와 손님으로 보이는 2명만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몇 가지 물어 오는데도 퉁명스럽게 대해 일단 몸을 씻고 잠자리를 찾았다. 변두리이니 그러려니 하고 몇 시간 동안 눈만 붙이자는 것이었다. 어두운 2층 마루로 된 침실에 들어가 누웠는데 다른 손님 한 명이 부스럭거리며 들어 왔다. 너무 추워서 열린음악회에서 지급해준 담요 한 장에 의지하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6시에 일어나 다시 씻고 둘러보니 커튼 뒤로 가족 찜질방이 따로 있었다. 커튼 사이로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여 가지도 않았는데 거기가 이 찜질방의 중심지였다. 밤새 떨었던 몸을 찜질방에 들어가 녹이고 바로 나왔다.
전철을 타기 전에 아침 식사로 요기를 하려던 차에 보니 ‘24시 무인 라면 판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2000원이면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식사까지 느긋하게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인천역에 도착했다. 필자와 몇 정거장 앞 인근에 사는데도 첫차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첫차 타는 것을 수차례 고민했으나 전철 소요시간이 10분 모자라니 오면서 생 땀 흘리느니 느긋하게 미리 전날 인천에서 자고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배가 8시 30분에 출항이라 조금만 여유를 더 줬어도 필자도 당연히 집에서 자고 첫차로 출발했을 것이다.
인천 역에서 택시를 타고 15분 만에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미리 직접 온 동행인들까지 12명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승차권을 받았다. 덕적도까지 경로 할인받아 1만9550원이었다. '코리아나'라는 배는 제법 큰 편이었고 일등석을 끊었는데 다른 좌석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한 시간을 달려 덕적도까지 갔다. 파도가 잔잔해서 뱃멀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내려 다시 2시간 여유가 있었다. 나래호라는 다른 배를 타고 2시간을 달리는데 중간에 문갑도-지도-율도-백아도에 잠시 들렀다가 목적지인 굴업도에 도착했다. 나래호는 경로 할인받아 6600원인데 작은 배지만 지정 좌석이 없고 바닥에 누워서 갈 수 있었다. 엔진 소리와 진동을 자장가 삼아, 등판 마사지 삼아 잠시 눈을 붙이니 2시간도 금방 지났다.
굴업도에 도착하자 민박 주인이 1.3톤 트럭을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화물칸에 타고 10여 분 달렸다. 방을 배정받고 가져온 점심을 먹고 하기를 달랬다, 바로 트래킹 코스로 나섰다. 덕물산이었다. 굴업도는 굴이 많은 섬이라 그렇게 부른 줄 알았는데 사람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덕물산은 왼쪽 다리이고 연평산이 오른쪽 다리에 해당한다. 섬 중심부가 큰 마을이고 머리 부분이 개머리 언덕이다. 덕물산은 가다 보니 욕심이 나서 정상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대단히 위험한 코스였다, 중간에 나무뿌리를 붙잡아야 올라갈 수 있는 코스가 있고 나무를 붙잡아야 하는데 고사목이 많아 자칫하면 나무가 부러질 수 있었다, 바닥도 바위가 늙어 부서진 마사토라서 등산화가 아니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꼭 등산화를 신어야 하는 코스이다. 해발 183m지만, 경사도가 높아 가파른 산이고 코스가 대중적이지 않아 보호 시설도 없다. 그렇게 험한 코스인 줄 알았다면 말리고 싶은 코스였다.
하산해서 민박집에 왔는데 서해 최서단이라 일몰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물어보니 빨리 가면 일몰을 볼 수 있다 하여 마을 뒤 SK 타워까지 20분 걸려 올라갔다. 해가 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순식간에 해가 없어진 것이다. 어쨌든 일몰 광경은 봤다. 저녁 식사 후 별이 쏟아진다 하여 밖으로 나갔으나 가로등 불빛이 여기저기 있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안 되었다. 여기저기 사슴이 놀라 서 있다가 도망치는 모습을 본 것이 소득이었다.
다음 날 아침 부지런한 일행들은 일출 광경을 보러 나갔다. 섬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이 볼만했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개머리 언덕 쪽으로 향했다. 능선에 올라가니 섬 양쪽이 다 보이는 절경이었다. 가을 바닷바람이 제법 신선하게 불어 왔다. 산의 관목들이 바닷바람을 견디며 이만큼 자라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나무는 줄기가 하나인데 여기 관목들은 여러 줄기가 동시에 같이 자라 나온다. 키도 그리 사람 키 약간 넘을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군집을 이뤄 바람을 막는 모양이다. 개머리 언덕은 몇 해 전 등반객 화재 사고로 풀만 나 있어 걷기에 쉬웠다. 멀리 툭 터진 바다를 보는 멋이 있었다. 야영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있는데도 몇몇 야영객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화기를 이용한 취사도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재가 염려되기도 했다.
다시 개머리 언덕을 내려와 토끼섬 앞까지 걸었다. 썰물 때라 긴 백사장에 갯강구가 부지런히 다니고 바위 위에는 굴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연장이 없어 시식은 못 했다. 좀 더 기다리면 토끼섬 가는 길목에 물이 빠져들어 갈 수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바닷물에 침식된 절벽인 해식와는 감상할 수 있었다.
코끼리 바위는 연평산 쪽이라 포기하려 했는데 민박집 주인이 입구까지 태워다 준 덕분에 가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바다에 면해 있어 일부러 찾아가기 전에는 보기 어려운 해안 쪽이었는데 다행히 썰물 때라 볼 수 있었다.
2시 10분 나래호 배를 타고 굴업도를 떠났다. 덕적도에 들어 바로 코리아나 호로 옮겨 타고 2시간을 달려오니 인천항에 5시 반 이었다. 근처 유명한 중국집이 있다 하여 가서 자장면을 먹었는데 조미료 범벅이라 입안이 말라 혼났다. 인천 역에서 동인천역까지 와서 급행으로 노량진역까지, 그리고 다시 9호선 종합 운동장 역까지 오고 집 앞에서 내리는 버스를 타고 내리니 9시였다. 막걸리 한 병으로 타는 갈증을 달래고 2박 3일의 여정을 마쳤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등 극찬의 글은 많이 올라와 있으나 필자에게는 섬은 그냥 섬이었다. 오래된 화산섬으로 마치 공사장 돌 쓰레기가 한데 엉겨 붙은 것처럼 보이는 단층이나 가지각색의 단층이 특이하기는 했다. 우럭 낚시가 너무 쉽게 잘 된다는 낚시꾼 얘기도 듣기는 했다. 민박집 반찬이 서울의 어느 음식점보다 맛있었다는 것만 기억된다.
운전 중 전화가 오면 운전은 계속하면서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눈은 내비게이션까지 보고 있다면 동시에 3가지를 하는 셈이다. 음악이나 뉴스까지 듣는다면 동시에 4가지를 하는 셈이다. 젊었을 때는 그래도 별문제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순발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러다가 사고가 날 수 있다. 꼭 받아야 하는 전화라면 차를 정차시켜 놓고 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작년 이맘때 참가했던 국제평화 마라톤 때 지인은 팔목에 시각장애인과 끈을 메고 같이 뛰었다. 그런데 어느 언론사에서 인터뷰한다며 말을 거는 바람에 몇 마디 해주다가 시각장애인과 발이 엉켜 넘어졌다. 결과는 쇄골 골절이었다. 6주 동안 깁스를 하고 다녀야 했다. 왜 인터뷰를 마라톤 끝나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언론사에서 동영상을 함께 찍는데 실감 나려면 뛰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별생각 없이 응했다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동시에 두 가지를 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라며 후회했다. 이미 뛰는 것과 시각장애인 리드까지 두 가지 몫을 하고 있는데 인터뷰까지는 무리였다는 회고이다.
필자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보니 마라톤을 뛰면서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발은 저절로 간다고 보고 셀카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순발력이 좋은 젊은 나이라면 그럴 수 있다. 여차하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닥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사람이 한데 몰리는데 아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뛸 때는 오로지 뛰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옳다.
또 다른 지인은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고 나오면서 미사 중간에 온 문자들을 보며 나오다가 넘어졌다. 결과는 발목 골절이었다. 걸으면서 문자를 보고 답을 보내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일단 어디 자리를 잡고 나서 해도 될 일인데 동시에 처리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 봐야 몇 초 늦어질 뿐이다. 긴 미사 시간과 비교하면 짧은 시간이고 그 정도는 양해가 충분히 된다.
필자도 전철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역사에서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어느새 눈길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적이 많았다. 계단이 대부분 일률적인 높이이다 보니 다리가 알아서 그만큼의 보폭과 리듬으로 반복적으로 움직인다는 가정하에 딴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큰일 날 수도 있는 아찔한 일이다. 계단에서 실족하면 혼자도 다치기 쉽지만, 옆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
커피를 포장구매로 사 들고 걸어가면서 얘기하는 것도 금물이다. 한 손에 뜨거운 커피를 들고 있으면 집중력이 손으로 간다. 걷는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데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일행과 얘기까지 하면서 가면 더욱 위험한 행위이다. 한 번에 3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은 원래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는 편이다. 여자들은 커피숍에 앉아서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옆 테이블 손님들 얘기도 다 들을 수 있다. 남자들은 다른 사람들은 누가 앉았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길을 건널 때는 씹던 껌도 잠시 멈춘다고 한다. 한 번에 한 가지라도 잘하면 된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이것저것 동시에 주문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문화센터를 지나다 보니 수강생이 유난히 많아 문을 열어 놓고 강습을 하는 반이 있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바른 자세 걷기 강좌’였다. 바른 자세 걷기 하나로 몇 시간 강의 시간을 배정하고 발걸음 하나하나 내 딛는 방법부터 실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른 자세 걷기의 방식이 왈츠, 폭스트로트 등 모던댄스에서 요구하는 풋워크 방식과 비슷했다.
뒤꿈치부터 땅에 닿게 하라
발을 내 딛을 때 뒤꿈치부터 땅에 닿게 걷는 것이다. 발이 먼저 가고 체중이 나중에 따라가는 방식이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내딛을 돌이 고정되어 있는지 흔들리는지 살짝 내딛어 보고 괜찮다 싶으면 체중을 나중에 옮기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일반인은 그 반대 방식으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그렇다. 앞으로 내딛는 발에 체중이 동시에 간다. 걷기 운동을 여러 사람과 같이 해보면 걷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펄펄 나는데 어떤 사람은 다리를 질질 끌고 온다. 근력 차이도 있지만, 체중이 실리는 다리를 밀어서 다른 쪽 다리로 가게 하는지, 앞다리에 체중을 옮겨 놓고 뒷다리를 따라 오게 하는지 차이다. 이렇게 걸으면 특히 내리막에서 무릎 관절에 주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신사의 품격을 생각하라
걸을 때마다 상체가 좌우로 흔들리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조폭 타입이다. 양 다리로 상체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상체가 흔들리는 것을 다리가 버텨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은 좋게 보면 소탈한 것처럼 볼 수도 있지만, 품격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상체가 좌우로 흔들리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앞에서 오던 사람은 헷갈린다. 그래서 정작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서로 당황하며 급하게 몸을 피하게 된다. 앞에서 오던 사람과 이런 현상을 자주 겪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걷는 자세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지병이 있거나 다리 근육이 약한 사람들은 앞으로 내 딛는 발이 많이 전진하지 못하고 옆으로 내딛는다. 걷는 것이 힘들어 겨우 걷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걸어가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내리고 타는 전철역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흐름에 방해가 된다.
허리 굽혀 걷지 말자
고개를 앞으로 숙이거나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걷는 시니어들도 많다. 그러나 이 자세는 하루 종일 뚜렷이 한 것도 없는데 많이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사람의 머리는 일반적으로 볼링 공 하나의 무게인 5kg 정도로 꽤 무겁다. 그 무게를 감당하려면 목 근육도 모자라 어깨근육과 등 근육을 동원해야 한다. 한 것도 없는데 어깨가 뻐근하다는 호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자세를 자주 하는 사람은 나중에 거북목이 된다. 어깨와 등까지 앞으로 굽는다.
걷는 자세는 시니어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낙상사고와도 관계 깊다. 체중과 앞발이 동시에 먼저 닿는 방식은 불규칙한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체중이 전부 앞으로 실려 있으므로 관성으로 체중은 더 앞으로 가려하고 발은 걸려서 넘어지는 것이다. 이때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면 얼굴이 바로 땅에 부딪히는 대형사고가 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손은 주머니에서 빼고 걸어야 한다. 여차하면 앞으로 땅을 짚어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쌀쌀해지면 장갑을 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전 면허증 갱신 통보서가 집으로 배달됐다. 지금부터 연말까지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내 운전면허증의 유효기간은 올해 말까지다. 10년 전 운전 면허증 갱신할 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쯤 차도 팔았고 나이가 들어가니 운전은 더 못할 것 같았다. 운전 면허증 갱신을 그냥 포기할까? 40년 전 어렵게 따낸 운전면허라 그대로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파견을 앞두고 회사에서는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라고 했다. 회사에서 총 30시간 운전 실습 쿠폰을 지급했다. 실습을 일곱 번쯤 한 뒤 시험 삼아 실기 시험을 시험 삼아 보라고 회사에서 권유했다. 실기 시험에서 많이들 떨어지니 여러 번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실기 시험을 본 55명이 나 혼자만 합격해 돌아왔다. 일곱 시간 실습 실력으로 말이다. 운전면허 시험에 붙고 나니 회사에서는 쿠폰을 반납하라고 했다. 계속 시험에 떨어져 30시간으로도 모자라는 사람들을 위한 것. 일단 그렇게 빛나는 면허증을 들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 막상 도로 주행도 전에 겁부터 났다. 온통 공사판이라 집채만 한 화물 트럭이 쉴 새 없이 질주하니 운전할 엄두를 못 냈다. 여러 번 실기에서 떨어져 충분히 실습하고 늦게 면허를 딴 이들이 더 도로 주행을 무난하게 해냈다. 한적한 현장 내에서는 꽤 운전했다. 사무실과 식당까지 차로 이동을 할 때면 내가 차를 몰았다. 귀국 후 서울 시내 도로 주행 연습을 위해 친구를 태우고 시내 한 바퀴를 돌았다. 운전 요령 및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했는데 자기보다 운전을 더 잘한다며 왜 함께 탔는지 아리송하다고 했다. 그렇게 내 차를 사서 운전을 하면서 많이 돌아다녔다.
1988년 중소기업 임원이 되니 회사에서 차가 나왔다. 직원들로부터 가끔 차를 빌려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거부해서 욕을 먹기도 했다. 그때는 무면허 운전자도 있었고, 기계라는 것이 민감해서 다른 사람 손을 타면 어딘가 후유증도 생겼다. 대학교 때 사진동호회를 하면서 다른 건 다 빌려줘도 카메라만은 빌려주면 안 된다는 철학이 있었다.
내 차가 있을 때 특히 주차 문제가 큰 골칫거리였다. 차 쓸 일도 별로 없지만, 술을 좋아해서 대리운전을 자주 했다. 늦은 밤에 집에 돌아오면 주차할 장소를 찾기 힘들었다. 애물단지이던 차를 처분하고 나니 앓던 이 빠진 느낌이었다. 다행히 서울은 대중교통 발달한 도시이지 않은가. 전철로 어지간한 곳은 다 갈 수 있다. 이번 운전 면허증 갱신은 혹시 운전해야 하는 위급 상황을 대비해서 했다. 이제 내 운전 면허증 유효기간은 2028년까지다. 마지막 갱신이지 않을까. 갱신 신청하고 나서 보름 후에 찾으러 가야 하는데 며칠 미루고 있었더니 갱신된 면허증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지만, 죽음과 관련해 늘 최초란 수식어가 붙는 사내가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유품정리인으로 활동했고, 최초의 유품정리 회사를 창업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유품정리라는 생소한 분야의 정보 중 상당수는 그의 입과 글을 통해 나왔다. 김석중(金石中·49) 키퍼스코리아 대표의 이야기다. 그가 창업 8년 만에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라는 책을 펴냈다.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유품정리 개념이 도입된 이후 우리 사회 문화는 많이 달라졌는지 김석중 대표에게 물었다.
“멍밖에 안 들었어요.” 기대 밖의 대답. 유품정리라는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 대표는 누구나 아는 그 인물이 아닌가? 관련 기사만 검색해도 방송과 신문, 잡지를 막론하고 그와 회사 이름이 오르내린다.
“국내의 유품정리 분야는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유품정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유품정리인은 보았다’라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했을 때였어요. 당시 이 책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요. 하지만 미디어의 관심은 고독사 같은 자극적인 주제에만 집중됐어요. 왜 우리가 유품정리를 해야 하는지, 죽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없더라고요. 그 후 국내 유품정리 산업은 ‘청소’의 한 분야가 되어가고 있어요. 유품정리를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죠.”
제일 좋은 것은 직접 하는 것
유품정리는 고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김 대표는 정의한다. 유품은 망자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소유이기 때문에 타인이 정리할 수 없고, 사망 후에는 상속 권한을 가진 유족만이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법적 배경을 갖고 있다.
아울러 유품은 한 사람의 삶이 담긴 기념물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는 고인의 유품을 추억이 담긴 기념품으로 소중히 여기고, 이를 친척이나 친지에게 나눠주는 카타미와케(かたみわけ)라는 문화가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 유품정리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유품정리는 결국 유족들이 고인의 물건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보니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활동인 종활(終活)의 하나로 생전정리를 일상화하고 있어요. 이에 반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접하는 것을 너무나 금기시해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면 다들 찜찜해 하잖아요. 빨리 치워버리려 하고요. 그러면서도 유명인의 유품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죠.”
실제로 국내의 유품정리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 상당수는 중고품 판매업자나 폐기물업자가 많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평당 단가를 매겨 고인의 짐을 쓸어간다. 이후 값나가는 물건을 찾는 ‘보물찾기’를 거친 후 돈 안 되는 것은 모두 버린다. 환가(換價)할 수 없는 것들은 거기 담겨 있는 것이 추억이든, 학술·예술적 가치이든, 중요한 정보이든 상관없이 처분한다.
그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직접 해보라”며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나 생전정리는 필요해요.평소엔 관심조차 없었던 생전정리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버릴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정리하다 보면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 알게 되죠. 유족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물건을 남기고 버릴지 직접 고민하는 과정에서 고인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깨닫게 되지요. 남은 가족을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되고요.”
일본에선 스스로 조금씩 정리를 하다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느끼면 유품정리 회사에 예약하는 경우도 많다. 자식이 있어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 키퍼스코리아에서도 이런 예약을 받는다. 김 대표는 “때가 되면 와 달라는 약속의 의미이지 구체적인 계약의 개념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할수록 돈 까먹는 일
김 대표가 유품정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회사 직원이 사고로 세상을 떠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의 유품정리회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일본인 지인을 통해 다큐멘터리 주인공이자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회사 키퍼스를 설립한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사장을 만나 의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김 대표의 진심을 알게 된 요시다 사장은 지금까지 후견인을 자처하며, 한국 직원의 일본 연수, 소모품 지원과 같은 사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후원했다.
하지만 2010년 시작한 김 대표의 유품정리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현실은 냉정했다.
“제대로 유품정리를 하려면 현장에 직접 가서 견적을 내야 해요. 하지만 현장에 가서 견적을 내면 비싸고 번거롭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한 상조회사와 MOU를 맺고 유족의 의뢰를 받았는데, 6년간 실제로 성사된 건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사업을 할수록 손해만 봤어요. 결국 견적을 내기 위해 교통비만 허공에 날린 셈이 됐죠.”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유품정리 과정은 매우 철저하다. 유족에게 의뢰를 받으면 기본적으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판단하는 시간이 걸린다. 유언장이나 권리관계 계약서, 귀중품 등뿐만 아니라 후대에 남길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추억이 담긴 물건까지 골라낸다. 이 과정에서 유족과 상담이 이뤄지고 필요할 경우 법적 절차나 세무 처리가 진행되도록 돕는다. 이러다 보니 비용도 올라간다. 일반 이사 비용의 2배 정도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아 내용물을 빨리 비워내고, 신속하게 처분하길 원하는 유족이라면 이러한 과정이 맘에 들 리 없다. 그의 유품정리 사업이 국내에서 번창하지 못한 이유다. 그나마 일이 들어와도 현장에서 천대받기 일쑤다. 자살한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가 건물주에게 “죽어 나간 집이라고 소문내는 거냐”며 손가락질에 야유까지 받는 상황은 예사다.
관련 사업 중 그가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치매 등으로 인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떠난 부모의 짐을 치워 달라는 의뢰다.
“집을 팔아 상속세를 아껴보려는 분들이 연락을 합니다. 이런 경우 성년 후견인 지정이 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작정 맡기려는 분들이 있죠. 법적 절차 없이 물품을 처분하면 불법입니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유품정리 알리는 일, 계속할 것
결국 2010년 창업 후 키퍼스코리아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용 차량도 있었고 일본에서 연수까지 마친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익 창출이 잘되지 않았다. 차량은 매각됐고,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가슴에 멍만 들었다.
김 대표는 키퍼스코리아를 창립하기 전부터 해왔던 항공사용 기내 서비스 물품이나 기업체 식·소모품 등을 납품하는 회사를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수입은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 10년 전쯤엔 사업을 꽤 크게 벌였지만, 유품정리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이 사업마저도 상당히 축소된 실정이다.
“키퍼스코리아는 1인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의뢰가 들어오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 과거에 함께 일본 연수를 받았던 경험자를 불러 함께 처리하는 방식이죠. 이제는 견적 의뢰가 오면 먼저 설문 문항을 보내드려요. 직접 가지 않고 비용을 산정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항목이 24개나 되다 보니 설문만 보고 포기하는 유족도 있답니다.(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유품정리에 대해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를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어요. 10년 이상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잖아요. 누군가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밟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생전정리에 대한 마음도 바꿨어요. 업계에 회사들 많은데 꼭 내가 직접 생전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나? 다른 회사들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유품정리인이자 전문유족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서 책도 썼고 앞으로는 죽음 연계 교육도 해보려고 해요. 몇 분이라도 모아놓고 자서전 쓰기 활동과 더불어 자기성찰을 돕는 키퍼스 노트의 국내 소개도 계획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공간의 이용에 있어서 남을 배려하지 않고 투명인간처럼 행동한다는 ‘투명인간 증후군’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공감한다는 댓글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현상들이 더 눈에 보였다. 전철 역사에 가서 10분만 앉아 있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지하에 내려갔으니 바깥처럼 건물 등 랜드 마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숫자와 안내 표지판에 의지해야 하니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여지는 것이다. 적응이 좀 둔한 사람은 당황해 하고 순발력 좋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나가는 다른 사람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이때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손톱에 얼굴이라도 찔릴까 봐 깜짝 놀란다.
투명인간 증후군의 또 다른 모습은 소리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전철 안에서나 당구장, 음식점 내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자기네들이 전세 낸 양 마구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투명인간이거나, 다른 사람들을 투명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영화 모임에서 영화 감상 후 식사 겸 간단한 감상평을 돌아가며 얘기하려고 근처 유명 음식점에 갔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한 쪽에는 회사 단체 회식 팀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줌마들 계모임인지 동창회 모임인지 모여 있었는데 너무 시끄러워 도무지 대화가 불가능해서 너무 시끄러워 그냥 나왔다.
특히 전철 옆자리에서 껌을 ‘딱딱’ 소리 내며 씹는 사람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소리가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으며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이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늦은 저녁 시간에 당구장에 가보면 술 한 잔 걸치고 당구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술 한 잔 걸쳤으니 목소리가 크다. 자기네들끼리 스토로크 하나하나에 괴성이 나온다. 노래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합창으로 응수하기도 한다. 여러 명이 함께 왔으니 패거리의 용기도 가세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참고 있기에는 살인 충동이 일 정도로 밉다. 그래서 어떤 당구장은 ‘음주자 출입 금지’라고 써 놓았다. 어떤 당구장은 한 테이블에서 5명 이상이 같이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당구장 입장에서는 어차피 시간당 계산이라 마찬가지일 듯 싶은데 괴성과 소음이 싫은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남발하는 노인들도 같은 증상이다. 화장 실 내에서 문 닫고 은밀히 해결해야할 일들을 공공장소에서 생리현상이라며 부끄럼 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남들에게는 안 보이고 남들이 투명인간처럼 안 보이는 모양이다. 방귀 소리까지는 참아 넘어갈 수 있지만, 지저분한 냄새는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자동차 경적 소리도 민폐이다. 특히 대형 화물차나 버스의 경적소리는 매우 크다. 운전하는데 방해가 되는 앞차나 앞에 사람이 있는 경우에 경적을 울리는데 온 사방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는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다. 자신이나 남을 투명 인간 취급하면 불편하다. 남에게 주는 피해는 안 보이겠지만, 반대로 당하고 나면 화가 난다. 그러면서 “선진국 되려면 아직 멀었다”며 폄하한다.
최근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교회에 갈 일이 있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지인이 저녁 식사도 대접하고 상영 중인 영화도 무료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무료 때문만은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같이 가자니 가 본 것이다. 금싸라기 땅에 자리 잡은 넓은 주차장에 놀라고 거기 주차장에 수많은 고급 차에 놀랐다. 둘러보니 이 교회는 교육관, 선교관 등 아예 도시처럼 그 동네를 넓게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에 들어가 보니 마침 식사를 하러 온 교인들로 꽉 차 있었다. 모두 필자 또래의 시니어들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인근 영화관에 가니 300명 선착순으로 입장하는데 역시 시니어들이었다. 시간상으로 직장인들도 퇴근하고 올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시니어들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인근 음식점들은 이 시니어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회자되는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라는 말이 생각났다. 노인을 의미하는 ‘그레이(Grey)’와 전성기,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의 합성어이다.
서울 시내 또는 서울 근교의 유명 음식점은 여자들 세상이라더니 남녀의 구분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나이의 구분으로 볼 때 시니어들 세상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이들이 몰려다니는 세상이다. 뒷방에 처박혀 있지 않고 이렇게 활발하게 삶을 즐기고 있으니 동시에 당연히 지갑을 열면서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업계에서는 요즘 시니어들이 나이는 많지만, 주요 소비층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퇴직은 했지만, 그동안 열심히 모은 덕분에 재산이 꽤 되고 자녀들에게는 굳이 재산을 물려줄 생각도 안 한다는 사람이 많다. 자신들을 위해서 소비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65세 이상 인구가 14%를 넘은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은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따르면 지난해 20~30세대 소비가 미국 전체 소비의 13%에 그친 것에 비하면 43%가 베이비붐 세대 지갑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 일본은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는 28%에 달한다고 한다. 나이는 많지만, 몸은 아직 건강하니 이들 시니어가 뜻밖에도 성인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층이 찾는 매춘 산업보다는 점잖은 장르이긴 하다. 명품 모델로 노인들이 등장하는 것도 요즘 트렌드라고 한다. 좋은 시니어 모델은 시니어들에도 좋은 인상을 주지만, 젊은 층에도 신뢰감을 주면서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화장품 역시 그전에는 젊은 층 위주였지만, 지금은 노인 냄새 제거 등 시니어 대상의 마케팅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확실히 요즘은 시니어들의 세상이다. 전성기를 맞은 것 같다. 요즘 시니어들은 돈 있고 시간 많고 아직은 건강하다. 전철을 타 봐도 경로석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 일반석에서 자리를 찾아봐야 할 지경이다. 물론 필자가 시니어라서 시니어들이 선호하는 곳에 가는 탓도 있지만, 어딜 가나 시니어들이 북적인다. 필자 개인으로 봐도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인 것 같다. 생업에 대한 걱정 없고, 식구들에 대한 부담도 없다. 젊을 때는 시간 없고 돈도 없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고, 돈은 많지는 않지만, 쓸 만큼은 있다.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운 시기이다. 건강만 잘 유지한다면 그야말로 인생의 최고 전성기이다.
퇴직 후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조촐한 사업단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최근 하반기 예산 부족으로 인원을 줄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원을 줄일 수 밖에 없으니 혹 사정이 나은 사람이 있으면 몇 개월 쉬었다 다시 만나자고 전체 회의에서 부탁했으나 자원자가 없었다. 넉넉한 연금을 받는 퇴직 교원도 있고 공무원 부인도 있으나 밥그릇을 양보하려 하지 않아 러시안룰렛, 제비뽑기로 선택을 했다. 재수 없게 선택된 사람은 40대 미혼남이었다. 그는 홀아버지를 부양하고 있고 어려운 가정 형편을 구구절절 눈물까지 보이며 애원했으나 서울시 핑계만 대며 냉정하게 이별을 고했다.
20여 년 전, 중소기업에 근무할 당시 해외 공장 이전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다니던 회사도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러나 현지 공장이 안정화되기도 전에 IMF의 쓰나미를 만났다. 회사의 구조 조정 칼춤에 간부 사원들부터 적절한 보장과 대안 없이 그냥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해고 통보를 받는 날, 너무 당황하고 낙담하여 수십 번 드나들어 익숙한 대표이사실의 출입문 손잡이를 찾지 못해 허둥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복도를 걸어가는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구토가 나기까지 했었다. 천지가 무너진 느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다음 날 아침은 평상시와 똑같이 정장을 입고 집을 나왔다. 갈 곳이 없어 2호선 전철로 도심을 순환하고 남는 시간을 사우나 수면실에서 잠으로 보내다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 생활을 1주일 했다. 가장(假裝)직장인인 생활은 1주일이 한계였다. 너무나 많이 남는 시간과 무기력한 일상을 감당할 수 없어 가족에게 고해성사하고 긴 절망과 어둠의 터널을 함께 건널 수 있었다.
2000년 초 회사를 창업하여 월급을 받는 처지에서 월급을 주는 처지가 된 적이 있었다. 초창기는 회사가 잘 굴러가 직원도 많이 뽑고 사업장도 늘리고 배포 크게 다른 회사도 인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인수 회사의 심각한 부채가 발목을 잡았다. 승자의 저주, 매몰 비용의 오류에 빠져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마음이 급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직원정리부터 시작했다. 연봉을 많이 받는 힘 좋은 간부 사원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가장 힘없고 연약한 직원부터 칼을 대기 시작했다. 모두 험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눈치라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직원을 불러 상황을 에둘러 설명하고 해고 통보를 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담긴 얼굴로 인사를 한 뒤 휘청거리며 출입구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20여 년 전 내 모습이 보였다.
한때는 해고자, 실업자라는 주흥 글씨 때문에 참담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을 가슴 시리게 느껴 본 적이 있었음에도 타인에게 그 살인을 죄책감 없이 너무 쉽게 자행했다. 참으로 못난 경영자임을 자책하며 그날 몰래 서럽게 많이 울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은 개인의 장구한 서사를 만들고 생존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음을 요즘에서야 조금 알 수 있다. 한때는 노동이 개인의 시간과 영혼을 구속한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은 비전과 가치를 실현하는 가슴 저린 화학적 변화의 실천은 아니더라도 단순한 밥벌이를 넘어 생존을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임을 철들어 알게 되었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나이가 되었다.
정식 용어는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투명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본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이쪽에서 걸어가는 사람과 부딪칠 정도로 직진해 온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어느 한쪽이 비켜 갈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국, 약한 사람이 비켜 간다. 앞에서 오는 사람이 덩치가 큰 경우는 위협적이기도 하다. 걸을 때 좌우로 기우뚱거리면서 오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려는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자신만 직진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경우이다.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서거나 뒤 돌아서는 경우도 그렇다, 뒤에서 오던 사람은 관성이 생겨서 그대로 직진하려다가 충돌하게 된다.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차도에서 자동차가 그러다가는 추돌 사고가 일어난다. 그런 경우는 ‘안전거리 미확보’라며 뒤 차가 책임질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 지점에 도달했는데 앞사람이 걸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뒷사람은 밀치고 가거나 부딪쳐야 한다. 전철을 가까스로 탔을 때 입구에 서버리는 사람도 있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서 그렇다고 본다.
비 오는 날 우산 때문에 생기는 투명인간 증후군도 있다. 우산을 펴는데 우산이 펴지면 어느 정도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펴고 보는 것이다. 우산이 탄성으로 펴지는 과정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젖은 우산은 물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는 일도 있다. 우산을 접고 걸어갈 때도 우산을 앞뒤로 내저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계단을 올라갈 때 그러면 뾰족한 우산 꼭지로 뒤따라 올라가는 사람의 얼굴에 상해를 입힐 수도 있는 일이다. 전철에서 서 있는 사람이 우산을 들고 있으면 흔들릴 때마다 위협을 느낀다.
배낭의 위험도는 이미 홍보가 되어 있다. 본인은 편하지만, 남들은 경계의 대상이다. 배낭을 메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서면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치거나 배낭의 플라스틱 고리나 지퍼 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피부를 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공간이 없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사람 중에는 물기를 바닥에 내젓는 사람이 많다. 막 들어오다가 그 물기가 자신의 팔이나 손에 뿌려지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바깥으로 밀어서 여는 문을 사용할 때도 문을 갑자기 밀치고 나가면 마침 그때 밖에 있던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안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조심스럽게 문을 밀치고 나가야 한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뜨거운 커피 한잔 뽑아 화장실도 가려다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경우를 몇 번 보았다.
사람은 움직이는 유기물이다. 그러므로 진로에 방해가 되거나 충돌할 경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배낭의 경우처럼 다른 경우에도 이런 점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례하다기보다는 모르고 있거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