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유독 ‘고독’의 정취가 느껴지는 계절이다. 왕왕거리던 여름을 지나, 낙엽 같은 트렌치코트를 휘감고 조용히 무드를 즐기고만 싶다. 이때 한껏 분위기를 내려면 와인 한 잔 정도는 즐겨야 하지 않겠나. 여기에 고급스러운 재료로 풍미를 살린 생면 파스타는 또 어떤가? 분위기, 와인, 맛, 이 세 가지를 만족스럽게 채워줄 맛집 ‘와인 북 카페’를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와인 그리고 책이 어우러진 풍경
‘와인 북 카페(wine book cafe)’는 와인과 북(책)이 들어간 레스토랑의 이름처럼, 740여 종의 와인과 300여 권의 와인 서적을 갖추고 있다. 2007년 문을 연 이래로 그동안 수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며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올해
7월에는 보유 중인 우수한 와인 리스트를 인정받아 세계적인 와인 전문 매거진 가 주최한 레스토랑 어워즈에서 ‘Two Glass’를 획득하며 ‘BEST OF AWARD OF EXCELLENCE’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국내에서는 7곳뿐이라고). ‘와인 좀 안다’고 자부하는 이라면, 꼭 한번 들러 이곳의 내공을 체감해보길 바란다.
와인과 함께 익어가는 빈티지 인테리어
가게를 둘러보면 오래된 레코드판, 축음기, 진공관TV, 턴테이블 등 빈티지한 소품들이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중앙에 매달린 양면시계는 실제 파리 전철역에 걸려 있던 시계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와인처럼, 구석구석 빛바랜 물건들이 이곳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또 책장에 무심하게 꽂혀 있는 책들은 여느 레스토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오묘한 편안함을 준다. 침침한 조명, 어두운 나무 테이블과 바닥 그 안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은 투명한 와인 잔들.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과 음식,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더없이 좋은 분위기다. 음식만 즐기러 갔더라도 어쩐지 와인 한잔 따르고 싶어지는 묵직한 정취가 느껴진다. 혹시 와인에 대해 잘 모르거나 고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이곳 소믈리에의 조언을 받아보자. 평소 취향이나 입맛, 곁들이는 메뉴 등을 고려해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줄 것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생면 파스타 요리
이곳의 이름을 다시 정한다면 ‘와인 북 그리고 파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준급 생면 파스타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재료나 소스 등도 특별하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건면이 아닌 생면을 사용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파스타 면은 매장에서 직접 반죽해 만들고 있다. 전진하 셰프는 “생면 파스타 반죽은 밀가루와 달걀노른자로 만든다. 그 외에 물, 달걀흰자 심지어 소금도 넣지 않는다. 이렇게 만든 파스타는 일반 건면 파스타와 식감이 다르고, 또 다른 생면 파스타에 비해 단단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잘 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날 전 셰프는 레드와인과 어울리는 메뉴로 이탈리아산 제철 생송로버섯이 가득한 피에몬테식 타야린 생파스타를, 화이트와인과 어울리는 메뉴로 마스카르포네 감자퓌레로 속을 채워 바질페스토에 버무린 라비올리를 추천했다. 사실 단골들은 메뉴북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계절마다 제철 재료에 따라 메뉴가 리뉴얼되기도 하고, 또 그날그날에 따라 와인과 메뉴를 제안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특별히 꽂히는 게 없는 날엔 이곳 셰프와 소믈리에의 안목을 믿고 과감히 테이블을 맡겨보는 것도 괜찮겠다.
주소 강남구 논현로 149길 5 배전빌딩 1층(학동역 7번 출구와 압구정역 4번 출구 사이, 을지병원 사거리 SK주유소 옆) 운영 시간 오후 5시 30분~새벽 1시 30분(일요일 휴무) 예약 문의 02-549-0490
최근 자연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이나 그 효과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밥을 상추와 깻잎 몇 장에 싸먹는 것만으로 자연식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반드시 병이 낫는 효과를 얻어야 자연식일까. 이런 의문과 함께 약초 전문가가 바라보는 자연식은 무엇인지 그 답을 얻기 위해 한국본초임상연구소 안덕균(安德均·76) 소장을 만났다.
“우리가 맹신하는 의 처방대로 약을 만들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할 거예요.”
약초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막 시작할 때 안 소장에게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 한의학에서 한 획을 그은 노 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싶을 정도의 으름장이다. 한의학의 주요 기반 중 하나는 이 아닌가.
“동의보감은 400년 전 이야기니까요. 그 긴 세월 동안 사람도 자연도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커지고 서양식 식생활을 하고 있어요.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온난화에 따라 약초들의 식생도 달라졌어요. 외래종도 하나둘 들어오고 있고요. 인삼만 봐도 그래요. 에서 말하는 인삼은 수년 동안 땅의 기운을 품은 ‘자연산’이죠.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인삼은 3년산 미만의 것이 많아요. 심지어 수경재배를 통해 1년짜리들도 유통되고 있어요. 이러니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는 한의학 연구를 통해 변화하는 처방과 과학적으로 입증된 한의학에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한다. 고서릍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체계적인 연구의 결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약초의 좋은 섭취 방법 ‘생식’
최근 건강한 몸을 위해 다양한 생식이 소개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과거 약재들의 뿌리를 말렸다가 썼던 것은 보관과 유통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흔히 아는 당귀도 뿌리가 아닌 이파리를 먹어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죠. 또 생으로 먹으면 말리는(찌는) 과정에서 열에 의해 파괴되는 성분들도 그대로 섭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요. 생으로 먹거나 즙을 내어 먹으면 그 음식에 들어 있는 좋은 성분을 더 많이 섭취할 수 있어 좋습니다.”
실제로 중의학(中醫學)에서는 약초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약재로 쓰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그 결과를 집대성한 와 같은 책들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안 소장은 자연을 그대로 먹는 것도 준비와 적절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온라인에 넘치는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믿고 따라 하다가는 큰일을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돌팔이가 많아요. 많은 사람이 전문가라며 무책임하게 이야기하고 다녀요. 산에서 야생화를 찍던 사람이 자신을 약초 전문가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봤죠. 그런데 약초학은 그렇게 만만한 학문이 아니에요. 당귀만 해도 한·중·일의 당귀는 각각 다른 종(種)이에요. 효과도 조금씩 다르고. 하지만 눈으로 보고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게다가 개당귀라고 불리는 지리강활은 먹으면 마비가 오고 죽을 수도 있어요.”
그가 강단에서 내려온 후 각 지자체나 약초교실 등을 통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약초 강의에 열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차를 마시더라도 각자의 체질에 맞게 마셔야 하며 제철음식을 먹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철음식의 효능 믿어보세요
“제철음식에는 그 시기에 필요한 효능이 담겨져 있어요. 예를 들어 여름 상추는 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을 주고, 겨울에는 깻잎이 좋아요. 어떻게 먹는가도 중요하지만, 생산되는 시기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요.”
그가 시니어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바로 은행잎. 한국의 은행잎에 들어 있는 징코 빌로바(Ginkgo Biloba) 성분은 뇌 활성에 도움을 줘 치매와 같은 뇌 질환을 예방하는 데 효과가 적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25년 전에 미국에 들렀다 우연히 은행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유럽과 미국에선 이미 은행잎의 효과에 주목하고 있었죠. 저도 관심을 갖고 실험해봤는데, 세계의 은행잎 중 우리의 것이 가장 효능이 높았어요. 마른 은행잎은 시장에서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으니 더 좋죠. 은행잎을 원지, 당귀 등과 함께 두 시간 정도 차처럼 끓여 마시면 됩니다. 널리 권하고 싶어요.”
[안덕균(安德均) 한국본초임상연구소 소장]
경희대학교 한의대 한의학박사. 국내 약초학의 대가 중 한 명으로 모교에서 한의학을 강의하다 은퇴. 대한본초학회 회장, 한의학회 이사장, 자생생명공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생약학회와 한국식물분류학회 등에서도 활약했으며, 중국 학계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중국 흑룡강대학, 제1군의대학 명예교수. , , 등 한의학에서 주요하게 평가받는 서적을 다수 출간했다.
강화도는 서울 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가용이 있던 시절에 몇 번 가보고 그 후로는 오랫동안 외면하던 곳이다. 초지진, 광성보 등 해안에 초라한 진지가 남아 있을 뿐 별로 기억에 남는 것들이 없다. 마니산은 올라가는 계단만 보고 왔고 전등사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절이었다. 어느 식당에 갔다가 음식이 너무 맛이 없어 일행들이 젓가락만 돌리고 있어 뒷산에 있는 고들빼기를 좀 뜯어와 겨우 한 끼를 먹은 적도 있다. 폭우를 만나 하마터면 급류에 휩쓸려 일가족이 몰사할 뻔하기도 했다. 석모도에 갔을 때는 불친절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왔다. 강화도의 밴댕이회가 유명하다지만 생선회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다.
얼마 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회원 40명이 대중교통으로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동 쪽에서 전철로 송정역까지 2시간 걸렸고, 송정역에서 다시 3000번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리고 나서야 강화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는 장마 때문인지 날씨는 푹푹 찌고 불쾌지수가 높았다.
이번에는 시내 쪽으로 가봤다. 횡단보도 신호등을 대여섯 개 지나자 남문이 나왔다. 남문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니 서문이 보였다. 서문 안쪽으로 다시 시내 도로로 되돌아 나오는 길에 용흥궁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도로 안쪽에 작은 표지판이 있어 미리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가면 지나치기 쉽다.
용흥궁은 철종이 19세 때까지 살던 사저였는데 그 후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 성공회성당이 높은 자리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하마터면 못 보고 갈 뻔했다. 이 광장이 이번 관광의 하이라이트였다. 심도 직물이라는 큰 직물회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한쪽으로는 강화 문학관이 있고 마침 조경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나칠 뻔 했던 곳이 고려 궁지도 관람할 수 있었다. 강화 성당을 보고 언덕을 올라갔는데 초라한 한식 대문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고려 궁지’였다. 입장료는 900원, 경로우대는 무료였다. 서울 선정릉의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인데 이곳이 바로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당시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왕이 있었던 곳이다. 1232년부터 39년간이었다. 그 당시에도 불에 탔고 개화기에도 프랑스 선원들이 불에 태워 다시 지었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외규장각이 있다. 전철 한 칸의 3분의 1 정도 되는 작은 건물이다. 조선의궤를 따로 보관하던 곳인데 프랑스 선원들이 훔쳐갔던 의궤를 얼마 전 프랑스에서 영구 반환받아 조명을 받았던 곳이다.
고려 궁지 성벽을 따라 북문 쪽으로 올라갔다. 아름드리 벚꽃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제철에 오면 볼 만할 것 같았다. 강화도에도 둘레길이 있다. ‘강화 나들길’이라 하여 6시간짜리 코스가 20개나 있다. 지금 이웃 교동도에는 연육교가 있어 강화도와 연결되고 석모도도 곧 다리가 완성될 예정이다. 자동차가 있으면 하루 일정으로 교동도까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없으며 1박 정도 예상해야 한다. 오가는데 너무 멀어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 그래도 강화도는 서울의 관문으로 외세 침략을 일선에서 막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1970년대 서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앞으로 역사와 관광의 이점을 잘 살린다면 가볼 만한 장소가 될 것 같다.
한 분야의 장인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이번에 만난 이도 마찬가지였다. 철강 산업 분야에 반평생을 몸담은 만큼 국내 철강 역사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묻지도 않은 이야깃거리도 저절로 나온다. 평범한 사람은 물을 수도 없는 스토리다. 평생을 철강 업계에서 보내던 그가 이제는 다소 독특한 철강 칼럼니스트란 직종을 창직(創職)해 활동 중이다. 바로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金鍾大·63)씨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그러더라고요 책 한번 내볼 생각이 없냐고.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동안 회사와 업계의 대표선수 중 한 명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내 이름으로 출간한 제대로 된 책 한 권 없었던 것이죠.”
그가 칼럼니스트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 순간의 이야기다.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사사(社史)를 준비하던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에게 받았던 그 질문은 그의 두 번째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퇴직 전까지 그는 동국제강 홍보를 담당하는 상무로 활약했다.
새로운 직업을 찾다
철강 칼럼니스트.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칼럼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는 많다. 최근에 각광받는 음식 칼럼니스트들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도 꽤 많고 정치나 음악, 대중문화에 대한 칼럼니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철강이라니 다소 생소하다.
“처음부터 철강 칼럼니스트를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30년 가까운 인생을 보낸 철강 분야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자고 마음먹고 조금씩 준비를 해왔죠. 먼저 주변에서 칼럼 청탁이 들어오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예 연재를 하면서 글을 하나하나 모아가면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는 데 수월할 거라 생각했죠.”
그에게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홍보 일을 하면서 각종 연설문이나 축사 등을 자주 썼고 매체에 기고하는 일은 업무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철이 미래다’라는 주제와 부정 철강제품 추방에 대한 글을 1년 동안 쓸 계획에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글들은 한국철강협회 간행물과 동국제강 블로그, 그리고 업계 전문지에 게재되고 있다.
원고 청탁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철강 칼럼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은퇴 후 그는 자연인이 된 자신을 소개할 때 철강 칼럼니스트라고 말한다.
정권에 의해 운명이 바뀐 두 번의 변곡점
그가 철강업계에 몸담게 된 사연은 좀 기구하다.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홍보를 전공했다. 첫 직업은 신문사 편집기자였다. 현장을 뛰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꽤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꾀를 부렸죠. 선배들이 신문의 면을 구성하는 것을 어깨너머 배우기 위해 소조(小組)들을 집에 챙겨왔어요. 소조는 면 구성을 메모해놓은 종이인데, 기사의 분량이나 제목, 속보 등에 따라 최종결정이 나기까지 여러 차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선배들이 버린 소조들을 사환을 시켜 확보해놨다가 하숙집 천장에 잔뜩 붙여놓고 편집 공부를 했죠. 선배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몰래 모으느라 애먹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노력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신문사는 1980년 언론통폐합을 통해 경향신문에 흡수 합병된 신아일보였다. 갓 입사한 신입기자였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익혀뒀던 기술은 후에 빛을 발했다. 당시는 인쇄, 편집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아 수요가 많았는데,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학교 학보나 회사 사보 편집을 대행해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알아본 관계자의 추천으로 국제상사 홍보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사보 의 편집장이 되면서 홍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니까요. 그래도 언론통폐합 한 번으로 변곡점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국제상사는 1985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되는 고초를 겪죠. 저 역시 그 과정에서 국제상사에서 연합철강으로 적을 옮기게 됐고,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갔어요. 그때부터 동국제강 사람이 됐죠.”
편집기자에서 철강 홍보맨으로
‘철강맨’이 된 그는 동국제강이라는 회사의 소식을 외부에 전하는 ‘입’이 되었다.
“사실 철강회사 홍보팀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어요. 철강산업 자체가 대중을 소비자로 상대하는 곳이 아니고, 철강 소비자들은 모두 기업이니까요. 게다가 초창기 철강산업은 제품만 만들면 팔리는 잘나가던 사업이었어요. 경제성장기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주지 못해 너도나도 먼저 제품을 사가겠다고 줄을 서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그는 때로는 회사를 상대로 때로는 언론을 상대로 때로는 경쟁업체와 기관을 상대로 치열한 길을 걸었다. 한때는 ‘물을 먹였다(특종을 놓치게 했다)’는 이유로 한 매체가 부정적 기사를 연이어 게재하는 바람에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기자를 찾아가 단판을 짓기도 했다. 기업 홍보실 책임자의 비애였다.
철강업계에 그가 남긴 족적은 또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6월 9일 ‘철의 날’이다.
“협회에서 홍보 담당자들끼리 회의를 하는데 우리도 기념일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업계가 다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처음엔 다들 시큰둥해하더라고요. 하지만 꾸준히 제안해 6년 만에 철의 날이 제정되었어요. 그게 2000년 6월의 일이에요.”
한국철강협회의 철의 날이 6월 9일로 지정된 것은, 국내 철강 역사상 처음으로 고로가 가동된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국내 최초로 쇳물을 생산한 날짜는 1973년 6월 9일이었다. 또 국내 사진계에서 손꼽히는 행사로 인정받는 철강사진전과 마라톤대회의 창설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은퇴 후 직업을 위한 일상의 원칙들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점은 남들과 다르게 은퇴를 미리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것. 그는 2012년 말 첫 번째 은퇴를 한다. 사규에 따른 것으로서 정상적이었다면 회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회사에 오너리스크가 발생하자 그만 한 적임자가 없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회사로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얻는다.
“제겐 행운이나 다름없었죠. 2년 6개월의 은퇴를 미리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예상했던 퇴직과 실제로 경험했던 삶은 완전히 달랐어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주변 선배들의 얘기가 실감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맘먹었죠.”
그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서재다. 은퇴 후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려면 은퇴 전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추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짧은 은퇴 경험을 하면서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장가 간 아들 방이 비어 있어 그 방을 서재로 쓰겠다고 했죠. 아내도 제 설명을 듣고 이해해줬어요. 덕분에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하며 글의 윤곽을 대강 구상하고, 낮에는 글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요.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밤을 새서 다듬기를 반복하면서 탈고 과정을 거쳐요. 처음에는 글이 제대로 써지질 않아 애를 먹었어요.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더라고요.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갔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리는 계기로도 삼았다. 자신에게는 자극이 되는 과정이었다.
“은퇴 후 제대로 글을 써보겠다 생각하고 공부한 철강 분야에 대한 학습량은 30년 회사생활 동안 한 공부보다 더 많을 거예요. 막상 글을 쓰려니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국가기록원 등 철강산업의 발전과 관련한 곳들을 모두 찾아다녔어요. 다행히 오래 접했던 분야라 그런지 흥미로웠어요.”
그가 회사생활을 하며 꾸준하게 모았던 다이어리, 스크랩들도 집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고경영진과의 대화와 메모, 그리고 경영상의 위기나 불황을 겪으면서 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자료를 보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鐵’이 보인다
김종대씨는 이제 여행을 다닐 때도 ‘鐵’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직업병 때문인지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철강문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관광 명소로 생각하는 에펠탑도 그에게는 철의 문화이자 역사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가 철강 칼럼니스트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금 남아 있는 철강산업의 역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만 집중되어 있어요. 물론 포항제철이 국내 철강산업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맞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의 철강산업 역사는 이어져왔어요. 이 시기에 대한 자료나 학문적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현실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의 또 다른 바람은 철강산업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철강산업은 굴뚝산업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데 철강산업도 예외는 아니에요. 최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 소재 개발은 기본 중에 기본이죠. 국내 철강산업은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종사자들이 좀 더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지난해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 음식 명장’을 수여받은 선재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식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현재에 던지는 화두처럼 들려온다. 셰프가 TV 스타가 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요리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해진 요즘 과연 우리가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일까? ‘우리는 음식을 왜 먹는가?’ 사찰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에게 그 답을 들어봤다.
힘이 넘친다. 조계종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찰음식 명장 선재 스님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넘쳤다. 사찰음식에 담긴 조화의 힘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불경에는 놀랍게도 음식에 관한 가르침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철학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조리법, 음식 손질과 보관법, 주방 설치법, 먹는 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특히 에 나오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경구는 부처님이 음식을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루셨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불경에서부터 귀하게 다루었던 식문화를 확인한 선재 스님은 문헌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994년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발표한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은 그동안 스님들에게만 전수되던 사찰음식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기록됐다.
음식으로 다시 생명을 얻다
그러나 사찰음식 연구는 선재 스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다. 연구를 하면서도 화성 신흥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이들의 수련교육을 맡았는데 교육의 좋은 결과에 반한 기관과 학교들에서 수련교육 요청이 빗발쳤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고 음식의 질도 신경 쓰지 않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이 거듭됐다. 그러자 기운이 없어졌고 어느 날 주저앉아버렸다. 병원에 가자 의사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난데없이 시한부 인생이 된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득 제가 쓴 ‘사찰음식문화연구’ 논문이 생각났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논문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논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쓰고도 정작 나는 글대로 살지 못했구나,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해 아픈 거구나,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그토록 연구했음에도 자신은 정작 실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스님은 남은 시간을 부처님의 법대로 철저하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 제철 음식, 때에 맞는 음식, 깨끗한 음식으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로 채워진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의 습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에너지 넘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에 항체가 생기는 기적과 함께 시작됐다.
꿈꾸는 삶, 사찰음식에 다 있다
선재 스님의 두 번째 삶에는 사찰음식의 전파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스님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고 프랑스 파리 오이시디 주재 한국대표부에서 행사를 가졌다. 최근 세계 3대 요리의 나라 프랑스는 물론 독일, 미국, 베트남 등 전 세계에서 선재 스님을 찾고 있다. 사찰음식이 갖고 있는 현대 식문화에 관한 대안적 성격을 요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해외에 초대받아 갈 때 저는 음식만 가는 게 아니라 문화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외국에서 사찰음식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으면 음식에 대한 얘기와 함께 불교가 갖고 있는 사상에 관한 강연도 함께 하죠. 예를 들면 대웅전의 꽃문살 사진 전시회와 함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사찰음식에 관한 칼럼을 써서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한테 미리 공부해서 오시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이 반응이 좋아서 그해 있었던 그 지역의 해외 행사들 중 가장 훌륭한 행사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스님이 전파하는 불교 사상의 핵심은 땅, 물, 바람, 동물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자연 존중에 있다. 사찰음식이라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를 알려주려는 스님의 노력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작금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 정신,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쳐요. 몸과 마음도 연결돼 있지요.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거든요. 내가 만든 음식에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사찰음식을 찾는 이유일 거예요.”.
변질된 사찰음식은 사찰음식이 아니다
“사찰음식 문화의 범주를 의식주에서 찾으면 안 돼요. 약에서 찾아야 해요.”
음식을 약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선재 스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체험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스님은 제대로 된 사찰음식은 누구에게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 몸에는 좋은 음식이라서 사찰음식이 입에 안 맞더라도 그 사람 몸에 좋다면, 그 사람 생각을 바꿔서라도 먹도록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한다.
“지금 바깥의 사찰음식을 보면 뭔가 빨리, 뭔가 맛을 내기 위해서 쓰는 것들이 보여요. 그런 건 사찰음식이 아니에요.”
스님은 요즘 사찰음식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상당수의 사찰음식이 사찰음식 본연의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엄격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찰음식을 강의하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처음 만든 음식이 야채 샤브샤브였어요. 우리 땅에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우리 언어를 써야 맞지 샤브샤브가 뭐냐 싶어서 그 사람에게 직언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기분이 안 좋았겠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해요. 자연음식가라면서 야채 샤브샤브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도 되는지 안타까웠어요.”
스님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급식’ 개념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야채는 친환경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장은 첨가제가 들어가는데 친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환경 급식의 맹점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첨가제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
“음식에 따라 사람의 성정이 달라집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짜게 먹으니 마음이 급하고 충청도는 심심하게 먹으니 사람이 순하죠. 육류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고 두부는 정적인 에너지를 줍니다. 차를 불가의 대표적 음식이라 하는데,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말이 있죠.”
불교에서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기 시작한 것은 모든 생명에 자비심을 가지는 수행자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조계종이 사찰음식 명장 1호로 선정한 선재 스님의 음식 철학도 “사찰음식에서 육식을 하느냐의 여부보다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에까지 뻗쳐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살고 있는지 살피며 바른 음식을 먹고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답니다.” 스님이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식의 그런 막중한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육류와 파, 마늘은 수행자가 피곤할 때는 허락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가공식품은 약이 아니라 독이에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만들 때 음료수를 넣어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죠. 하지만 자연적이라고는 볼 수 없죠. 설탕은 빠르게 흡수되면서 열을 발산하니까요. 저는 일체 안 먹어요. 차라리 깨끗한 생선은 부처님이 허락했지만 이런 건 안 된다고 봐요.”
스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스님은 뭔가를 먹으려 하지 말고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단언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첨가제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김치와 장이 수행자의 맛
자연에는 온통 먹을 게 천지에 널려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선호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그리고 장. 그게 기본이죠. 나는 김치 속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넣어요. 김치에 발효음식을 넣는 거죠. 그래서 과거 스님들이 장을 다섯 말을 담갔다면 나를 만나면서 두 말을 더 담그게 됐어요(웃음).”
스님은 변질되지 않은 사찰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음식의 재료는 또 다른 생명이에요. 그 생명을 내 몸에서 잘 흡수되게 만들려면 중간 역할이 필요하죠. 그것을 장과 발효가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요즘은 배추에 농약을 많이 쳐서 쓴맛이 나요. 진짜 유기농은 처음도 달고 끝도 달아요. 김치를 담그고 그 쓴맛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데, 이는 발효를 통해 중금속이 중화됐기 때문이죠.”
스님은 밥 중에서는 쌀밥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식은 밥이 아니라 바로 한 밥만을 먹는다고 한다. 바로 한 밥은 3분의 1만 먹어도 에너지가 생기지만 식은 밥은 두세 공기를 먹어도 몸에 흡수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제야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같다’는 스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음식의 효능과 조화를 따지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사의 모습을 본다. 음력 4월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에게 한 가지 밥과 반찬을 공양하라 하면 선재 스님은 어떤 음식을 만들까?
“우선 참죽나물로 만든 밥이 좋겠어요. 그 이파리를 말려 볶아 으깨서 넣은 밥. 원래 참죽나물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먹는다 하여 ‘참중나물’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단백질이 많고 열이 많은 나물이죠. 모든 야채가 냉한데 이건 뜨거워요. 이 밥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올리면 좋겠어요.”
사찰음식을 만드는 수행자들은 음식이 몸과 마음을 합일(合一)시켜준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음식을 통해서도 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명제가 있다. 선재 스님이 만들어준 오색화전과 상추떡을 먹고 나니 왠지 맑은 심성을 되찾아 착한 사람이 된 듯했다. 그리고 평소의 오만함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하시는 거 보니 사찰음식 너무 쉬워 보이는데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기양양한 기자를 보며 선재 스님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또 한 번 미소를 내어주셨다. 그 사이 봄날 보리사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醬) 내음은 홍매화 향기 못지않게 코끝을 간질였다.
선재 스님이 가르쳐준 사찰음식
취나물전병, 진달래전병
새알 빚어 꼭꼭 눌러 기름 둘러 지져낸 희고 둥근 반죽 위에 진달래를 꽃피우게 해서 둘둘 말아 김밥처럼 썰면 진달래전병이 되고, 취나물 잎을 얹어 둘둘 말면 취나물전병이 만들어진다.
오색화전
찹쌀가루에 단호박, 비트즙, 쑥즙, 백년초 가루를 각각 섞어 다섯 가지 색을 낸 반죽을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운 뒤 진달래꽃, 제비꽃, 냉이꽃, 민들레꽃 등을 전에 얹으면 오색화전이 만들어진다.
상추전, 취나물전
상추전은 감자를 갈아서 부쳐내고 취나물전은 갈아놓은 호박과 함께 부친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선진리(船津里) 왜성을 다시 찾은 것은 꼭 13년 만이었다. 남해안 꽃마중 길에 벚꽃 명소라는 소문에 이끌려 찾아간 것이 2004년 4월이었다.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사천만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한적한 어촌 마을 야산을 뒤덮은 벚꽃이 제철이었다. 그곳이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땅인 사쓰마(薩摩) 영주였다.
그 벚나무들이 일제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세월의 나이테를 헤아려보았다. 성의 주인이었던 시마즈 후손들 입김으로 조선총독부는 그곳에 공원을 꾸미고 벚나무를 심었다 한다. 더러는 그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고목도 있었다. 벚나무들은 봄마다 무심한 꽃잎을 쏟아낸다. 올 4월에도 벚꽃 축제가 또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첫 방문 이후 13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부터 시작된 성터 발굴사업에서 의미 있는 출토품이 나왔다는 사실은 몰랐다. 고려시대의 자기류 같은 출토품은 왜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왜구의 분탕질에 대비해 고려수군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옛 모습의 편린을 짐작케 하는 성터가 복원된 사실도 알 턱이 없었다.
첫 버스로 진주에 도착해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선진리 정류장에서 내려 3km를 걸어서 갔다. 1598년 가을 사천벌을 붉은 피로 물들인 치욕적인 패전의 흔적은 남았을 리 없겠지만 분위기만은 느껴보고 싶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들판 여기저기서 봄 기지개가 한창이었다. 농수로마다 물이 흘러넘치고, 농사 준비에 바쁜 농부들 모습이 정겨웠다. 논두렁, 밭두렁 너머 울타리마다 피어나는 매화도 반가웠다. 420년 전 초토에도 봄은 왔다.
싸움에 패해 달아나다가 왜군의 소총에 맞아 죽고, 칼과 창에 찔려 죽은 수많은 조·명 연합군 병사들의 비참한 최후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일 뿐이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턱이 없는 시대다.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
선진리 왜성도 순천과 울산처럼 바다와 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순천과 울산 육전(陸戰)에서는 명군이 적장의 뇌물을 받거나 몸을 사려 비겁하게 물러난 데 비해, 선진리 전투는 어이없는 패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병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조·명 연합군의 선진리 패퇴는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됐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과를 크게 부풀려 3대첩의 하나로 자랑했으랴!
서전은 연합군의 승승장구였다. 중로(中路)군 장수였던 명군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명군 3만7000명과 정기룡(鄭起龍) 장군 휘하의 조선군 3000명은 1598년 9월 20일 진주성을 차지했던 왜군을 쉽게 물리쳤다. 이어 남강 변 망진산 왜성까지 함락시켜 왜군을 바닷가로 내몰았다. 진주성과 망진산을 거점으로 연합군에 저항하던 왜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위축되어 사천 읍성과 선진리 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사천읍도 쉽게 탈환됐다. 정기룡이 읍성을 포위하고 야간 기습공격을 가해 가볍게 수복한 것이다. 시마즈군은 7km 서남쪽 선진리 성으로 철수하면서, 수백 명의 병력을 남겨 수성하도록 했다. 그 병력으로 4만 대병을 막으라는 것은 연합군 남진의 속도를 늦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선진리 전투는 10월 1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30일이었으니 4만 연합군과 1만 안팎의 시마즈군이 가을 들판에서 벌인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을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적인 치욕을 당했다. 사천만 바닷가 고지대에 견고한 성을 쌓고 농성하던 시마즈군은 독 안에 든 쥐 형국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그 쥐에게 급소를 물린 꼴이 됐다.
성내를 향해 포화를 집중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돌격대를 투입했다. 성문만 열리면 전투는 끝이었다. 왜군은 유리한 지형을 등에 지고 결사항전으로 나왔다. 주변에 미리 지뢰를 매설하고 조총을 총동원해 연합군의 행동반경을 묶었다. 전투 중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가 연합군 식량 창고를 불화살로 공격해 군량미가 소실됐다. 군량이 사라진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합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까지 일어났다. 사고였는지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군 화약고가 폭발해 큰 혼란이 일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왜군의 불화살로 일어난 일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명군의 실수로 돼 있다.
아비규환의 사천벌
연합군 진영이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왜군은 일제공격으로 돌변했다. 불끄기에 동원된 병사들이 미처 무기를 챙겨 들 사이도 없이 밀려든 왜적의 공격에 연합군 전선은 허무하게 와해됐다. 진중은 너나없이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도리 없이 동일원은 남은 군사를 진주성으로 철수시켰다.
왜군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둘렀다. 사천벌은 순식간에 단말마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피로 물들었다. 연합군이 철수해 달아난 진주까지 핏자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는 제각각이다. 뜻하지 않은 전과를 크게 자랑하고 싶었던 일본 측 기록에는 2만~3만으로 나오는 데 비해, 에는 7000~8000명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크게 늘리고 조선이 크게 줄였다고 가정한다면, 1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그 후의 일이다. 시마즈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전사자 시체에서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냈다. 전공을 증명할 수급 대신 잘라 보낸 코와 귀는 지금 교토의 유명한 사적지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에 묻혀 있다.
그곳에 묻힌 원혼은 이 전투의 희생자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 코도 베어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12만 명이 넘었다. 그 한을 풀기 위해 1992년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이 원혼이 깃든 교토 이총의 흙을 떠다가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선진리 전투 패전 보고를 받은 명나라 만력 황제는 크게 노하면서 즉시 진군해 성을 빼앗고 왜장을 징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겁에 질린 동일원이 남은 병력을 추슬러 11월 17일 다시 왜성 공격에 나섰으나, 시마즈는 이미 성을 버리고 귀국한 뒤였다.
그 치욕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왜군이 만행을 저지르고 쫓겨 간 뒤 현지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조명군총이다. 여기저기서 썩어가는 악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코와 귀가 잘린 수급을 모아 성 옆에 묻었다. 명군 수가 훨씬 많아 ‘당병무덤’ 또는 ‘뎅강무데기’라 불렸다. 뎅강무데기란 말이 섬뜩했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무덤은 원형대로 보전되다가 1983년 사천문화원과 민간이 협력해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3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혼들에게 한 가닥 위안이라도 하려는 건지 왕릉 규모 못지않은 거대한 무덤 주위에 올해도 매화와 동백이 피었다.
선진리 왜성은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쑥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2005년 발굴사업에 이어 복원 공사와 공원화 공사가 끝난 탓이다. 동쪽에 있던 성문 터에는 육중한 문루도 복원됐다. 전형적인 일본 성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천수대 자리에 우뚝 선 6·25 전몰 공군 장병 위령탑은 엉뚱해보였지만, 허물어졌던 성곽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해줬다.
성 마루에서 바라본 사천만 바다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가 옛날 그 자리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임진년 해전에 처음 출전한 거북선 용머리가 포효하며 왜선들을 수장시켰던 성난 바다의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치욕적인 육전과는 반대로 7년 전의 임진년 해전은 통쾌한 승첩이었다. 세계 해전 역사에 그 명성을 떨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처음으로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사천만 해전은 유명하다.
사천해전은 1592년 5월 하순에 일어났던 전투다. 첫 승첩인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직후 전라좌수영(여수)으로 돌아간 이순신이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서 다급한 지원 요청이 왔다. “왜군 전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바다를 침범해 노량에 대피했으니 빨리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곧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로 달려갔다.
거북선의 첫 승리
삼천포 해안에서 멀리 내륙으로 파고 들어간 사천 바다로 가니 선진포구에 왜선들이 오색 깃발을 날리며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순신은 처음 거느리고 온 거북선 성능을 실험해볼 겸 적선을 너른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은 그 계책에 넘어가 따라나섰다. 두려운 척 물러가던 이순신 함대는 수심이 깊은 바다에 이르러, 돌연 뱃머리를 돌려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거북선 용구(龍口)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포들이 불을 뿜고, 여러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화살과 총통공격을 퍼붓자 적선들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엎어지고 깨지고 가라앉았다. 불이 난 선상의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고,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병사들은 산으로 도망치며 통곡을 쏟아냈다. 삽시간에 왜선 10여 척을 분멸시키고 당파한 쾌거였다.
이 해전의 의미는 단연코 거북선의 성능에 귀일한다. 무시무시한 용머리를 앞에 달고 무서울 것 없다는 듯 달려드는 괴물 같은 전함에 왜적은 크게 당황했다. 선재도 두꺼운 적송으로 돼 있어 가볍고 날렵하기만 한 왜선들은 부딪히는 대로 깨졌다.
이순신은 뒤이은 당포해전이 끝난 뒤 임금에게 전투보고서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을 올렸는데 전투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산 위와 배를 지키는 곳에서 왜적들이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 있어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겼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한 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자, 지자 대포들과 장편전, 화전 등을 쏘아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선들은 처음에는 거북선의 무서운 외양에 겁을 먹었으나 판옥선보다 크지 않은 몸집에 자신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일단의 왜병들은 2층 층루에서 사다리를 걸고 거북선 위로 뛰어내렸다. 육박전에 도가 튼 그들은 단병전에 승부를 걸 요량이었겠지만, 뛰어내린 적병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거북선 등을 덮은 가마니 거적 속에 촘촘히 박힌 철추에 팔다리와 배가 찔린 것이다.
사천해전 승전의 중요한 의미
첫 해전이 끝난 뒤 이순신은 신병기 거북선 보안을 위해 삼천포 대방진 굴항에 깊숙이 정박시켰다. 이순신 선단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모자랑포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거북선만은 안전하게 멀리 숨겨둔 것이다. 이 굴항(窟港)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군선을 안전하게 정박시키려고 만든 시설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그 뒤로도 이 굴항은 조선수군의 주요 시설로 보전돼왔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큰 전상을 입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하 장수의 상처를 돌봐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에 따르면, 이순신은 신변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줄곧 대장선 꼭대기에 선 채 전투를 지휘하다가 어깨에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등까지 흘러내렸는데도 활을 놓지 않고 지휘를 마쳤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상처를 내보인 그는 생살을 두 치(6cm)나 째고 철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태연하게 웃으며 부하들과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1년이 넘도록 낫지 않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상처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뽕나무 잿물로도 바닷물로도 씻어보지만 차도가 없어 민망할 따름”이라며 고통을 실토했다.
이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왜군의 호남 진출 거점인 선진리를 잃어 임진왜란 초기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사천해전 직후 당포해전에서도 승리한 이순신의 장계에는 “사천선창에서 바라보니 험준한 산 위에 400여 명의 왜적들이 긴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의 진[長蛇結陣]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왜성을 쌓는 모습이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사천해전에 패했다면 그 축성 공사는 바로 완공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순신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과 뒷날 한산도 통제영까지 감제하는 요지가 그들에게 제공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사천해전 승첩은 전쟁 초기 제해권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기였다.
선진리 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10월 왜군 장수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에 의해 축성됐다. 공사가 불과 2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곡창 호남을 도모하려는 작전 계획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 곳에 갇혔던 왜장을 징치하지 못한 선진리 전투 현장을 답사하면서, 나의 전쟁과 남의 전쟁, 나의 염원과 남의 인식 간의 상관관계를 골똘히 천착하게 됐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로 , , , 등이 있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 곳곳마다 피어난 꽃구경에 눈이 호강하는 달이다. 이맘때쯤이면 주꾸미도 제철을 맞는다. 한껏 물오른 주꾸미를 더욱 특별하게 선보이는 곳이 있다. 올망졸망 기지개를 켠 꽃송이만큼이나 앙증맞게 짧은 다리를 활짝 편 주꾸미의 조화가 예사롭지 않은 이곳, ‘우미대가왕쭈꾸미’를 찾아갔다.
이 조합이 가능해? 한식과 양식이 한곳에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 198호로 지정된 명소다. 다섯 능을 돌아보며 걷기에 부담 없어 봄나들이 코스로도 제격이다.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나면 서오릉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벌고개 인근 식당가를 찾게 된다. 식당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서 쓱 훑어보면 ‘우미대가왕쭈꾸미’ 건물이 눈에 띈다. 개나리처럼 노란 외벽에 갈색 지붕, 파란 창문이 인상적이다. 외관상으로는 카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주꾸미집이라고 하니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주꾸미 집으로 알고 들어서면 또 한 번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의 메뉴 구성이다. 주꾸미와 피자, 불고기와 파스타, 김치말이국수와 꽃 샐러드 등 색다른 조합이 가능하다.
국가대표 셰프가 만드는 요리 앙상블
한식과 양식의 독특한 만남은 총괄 셰프인 조우현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요리 대표팀 ‘수라’의 팀장이자 감독을 맡았던 그는 2009 아시아컬리너리컵 대상, 2014 룩셈부르크요리월드컵 은상·동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세계요리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조 대표는 “아무리 톱 셰프일지라도 고객이 만족하는 음식을 만들 수 없다면 최고라 할 수 없다”는 철칙으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고자 했다.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통해 탄생한 것이 지금의 메뉴들이다. “주꾸미 집에서 파는 피자가 맛이 좋겠어?”라고 시큰둥하다가도 막상 먹어보면 여느 피자 전문점 못지않은 맛에 감탄하게 된다. 오히려 그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피자 반죽만 해도, 취나물을 갈아 넣어 숙성한 도우를 사용한다. 일반 밀가루 도우보다 영양분은 물론, 더 쫄깃하고 담백한 식감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사시사철 만끽하는 봄기운 한 상
이곳 메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재료가 있다. 바로 ‘식용 꽃’이다. 팬지, 카네이션, 패랭이, 국화, 장미 등 알록달록 꽃들이 피자와 샐러드 등에 올라간다. 크게 맛을 좌우하는 재료는 아니지만, 시각적으로도 예쁘고 기분도 산뜻해지는 요소가 된다. 단골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성은 불주꾸미와 꽃 피자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세트 메뉴다.
외식을 하면서 이 세 메뉴를 한 상에서 만나볼 일은 극히 드물 것이다. 생소한 조합이지만 예상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매콤하고 쫄깃한 주꾸미볶음을 먹고 얼얼해진 입안을 폭신하고 고소한 피자가 달래준다. 반대로 치즈가 들어간 피자를 먹다가 느끼하다 싶을 때 칼칼한 주꾸미를 먹으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특별한 경험의 연속인 이곳에서는 물 한 잔도 평범하지 않다. 생수나 보리차 등 일반 식당에서 내오는 식수가 아닌, 로즈메리 허브차를 제공한다. 찻주전자를 고체 연료 위에 올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차가 따끈하게 유지된다. 티타임을 더 즐기고 싶다면 야외 정원 카페를 이용해보자. 투명한 벽면으로 된 카페에서는 아름다운 봄 풍경이 그대로 한눈에 담긴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순천 왜성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바다가 변해 공단이 됐으니, 상전이 바다가 된 것보다 어찌 작은 변화라 하리오! 지금 우리 땅 어디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420년 세월의 두께가 이렇게 두터울 줄 몰랐다. 성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았다 해서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는 옛 이름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택시를 타고 성터 앞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거대한 제철소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옛 격전지에 웬 공장인가 싶었지만 그건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성터에 올라서 조망한 모습은 너무 놀라웠다.
광양만 물결이 출렁거릴 것이라는 기대와 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현대제철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 무수한 공장 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공단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저 넓은 공단이 얼마 전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 상세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여수반도 동안을 메우다시피 한 율촌 산업단지였다.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격전지 노루섬[獐島]도 뭍으로 변했다. 더 멀리 광양항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바닷가라고는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거대한 기린이 줄지어 선 듯, 오렌지색 크레인 무리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는 광양제철소 공장 건물군, 그 너머로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 대교 트러스가 희미했다. 아,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살아나셨구나 싶어 겨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성터는 말끔해 보였다. 마른 수풀 너머 나지막한 구릉 자락에 문루 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제1문지(門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제1성문 자리인데 문루는 사라지고 돌로 쌓은 기단만 남았다. 그것도 허물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쌓은 것이다. 색깔이 어두운 돌은 옛것이고, 밝은 것은 다시 깎은 것이리라. 옛것과 새것의 부조화가 엇박자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2문지가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오르니 병사(兵舍)들이 줄지어 있었을 병영 구역이다. 역시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복원 성곽 지대다. 거기서 한 구비 더 오르니 지휘부 건물들이 있었을 혼마루[本丸] 구역이 펼쳐졌다. 학교 운동장만 한 공터 저편 끝에 천수대(天守臺) 자리가 우뚝했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 안내판에는 ‘천수대 위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가 있었다’라고 씌어 있다. 명나라 종군 화수(畵手)가 그렸다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에 나오는 조감도가 복사돼 있었는데, 그림 속 건물은 교회 첨탑을 닮은 목조 오층 누각이다.
천수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어 망해루라 한 것이리라. 바다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높이 지어 올렸으니, 실은 적정을 살피는 장대 역할을 한 건물이었다. 그 밑은 바로 바다. 가파른 비탈 아래 접안 시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
물론 망해루 건물은 지금 없고 기단만 남았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도망치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8년 11월 하순에 소실됐을 것이다. 천수대 기단의 크기가 옛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가로 18m, 세로 14m라니 그리 크지는 않다.
성 돌은 대개가 자연석이다.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엇갈려 쌓은 기법은 옛 축성법 그대로라고 하지만, 모서리는 바윗돌을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했다. 쐐기질로 깎았다는 설명으로 보아 큰 돌을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쪼갠 것이리라. 그 많은 돌을 깎고 자르고 운반하고 쌓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인가!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가 없었을 시대, 왜병들의 채찍 아래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고역이 다 인근에서 포로로 붙잡힌 백성들 몫이었을 것 아닌가. 백성들 피해가 어찌 그 노역뿐이었으랴!
성의 규모는 외성 3첩에 내성 3첩이다. 방대한 구조물이 다 돌과 흙과 목재로 이루어졌으니 노역의 고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천수대 주변 땅속에서는 지금도 색깔이 서로 다른 와편이 출토된다고 한다. 왜병들이 근처 절집이나 민가 관공서 건물 기와를 걷어다 천수각 지붕에 올린 것이다. 여러 지붕에서 걷어낸 것이니 재질과 색깔이 제각각일 터다.
엄청난 성의 규모
축성에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행장(行長) 등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해 왜교에 결진,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정유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축성은 1597년 9월에 시작됐다. 그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보낸 축성 보고 서장에 따르면, 그 달에 축성이 끝났다고 돼 있다.
정왜기공도는 1598년 9월 조명연합군의 육상공격전 상황으로 보인다. 왜성 북쪽 검단산성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이 기병을 앞세우고 외성을 향해 들이닥치자 왜병들이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됐다. 성 아래 당도한 보병들이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성루 안쪽에 점점이 뚫린 총안에 총신을 걸고 길게 늘어선 소총수들이 결사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묘사됐고, 그 아래서는 판벽에 몸을 숨긴 왜병들이 반격하는 모습도 보인다.
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만4000명의 병력을 너끈히 품었음직하다. 높이 40m쯤 돼 보이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세 겹으로 배치됐다. 성 한가운데 물길을 내고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밤이면 다리가 걷혀 내성과 외성이 물길로 갈리었다. 그래서 왜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밤에 다리를 끌어당겨 물길을 텄다고 해서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렸다.
물길은 외부 공격을 막는 해자 역할을 했다. 다리를 끌어들이면 내성 지역은 섬이 됐다. 그 물길은 지금 흔적만 남았다. 성 입구의 주차 구역에서 보면 갈대가 무성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유키나가가 구사일생으로 순천 왜성을 탈출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철병이 얼마나 다급하고 치욕스런 것이었는지를 증언한다. 또 이순신 장군에게까지 뇌물공세를 취한 사실이 얼마나 화급했던 지를 말해준다. 화가 난 이순신은 “우리의 보화는 너희 대장 머리뿐”이라고 말하며 사자를 쫓아 보냈다.
유키나가는 사천시 선진리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쓴 뇌물 덕에 명군이 철수하고, 지원군이 오는 길목인 노량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총력전을 펴는 틈을 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
1598년 8월 18일, 침략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 전 진영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곱게 돌아가도록 놓아둘 조선이 아니었다. 성안에 갇혀 농성 중인 왜병들을 수륙 협공으로 섬멸하자는 작전 계획이 수립됐다. 육지에서는 조선군까지 거느린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명 수로군 대장 진린(陳璘)이 동시에 협공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군은 내 전투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정은 처음에는 기세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군을 포함해 2만이 훨씬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량을 맡았던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공격하자고 하면 성만 냈다고 한다.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의 장계를 근거로 한 기사에는 그 위인이 이렇게 적혀 있다.
“유정은 한결같이 교만하고 경솔하며 여자를 좋아할 뿐입니다. 늘 적을 뒤에 두고 진군하기 불편하다고 합니다. 남원에서 거느리던 기생을 진중으로 데려 왔습니다.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투어 여자를 데리고 다녀 진중이 문란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울산 왜성을 포위했던 마귀(麻貴)가 그랬듯이, 그는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세월만 보냈다. 아직 병기가 오지 않았다, 공격의 적기가 아니다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군량만 축내다가 유키나가의 강화 제안과 뇌물에 눈이 멀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는 “성을 비워줄 때 군량과 약탈 재물을 그대로 넘겨주고 1000수급(首級)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다.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유정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던 떡이었다.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에게 그 정도 조건으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겠는가. 뒷날을 기하겠다면서 유정이 순천으로 회군한 길가에 군량 쌀이 허옇게 흘려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검단산성 주둔 중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수륙 협공 계획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진린 제독의 함대와 함께 강진 고금도 기지를 떠난 것은 1598년 9월 15일이었다. 조명수군연합 함대가 왜교성 공격을 시작한 것은 9월 20일. 광양만은 바다가 얕아 썰물 때는 배가 다니기 불편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치고 들어갔다가 빠지는 전법으로 10여 일을 보내는 사이 육지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은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10월 6일 철군하고 없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큰 전과를 올렸다. 왜선 격침 30척, 나포 11척이었다. 노루섬 왜군 군량 창고를 털고 불태우는가 하면, 얕은 수로에 좌초된 진린 함대를 지원해 진 제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진린은 유정의 행로를 답습했다. 퇴로를 얻기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
일본 작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에 따르면, 11월 14일 밤 붉은 깃발을 올린 왜선 2척이 명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진린은 통역을 대동하고 나와 배를 맞았다. 왜군은 돼지 두 마리를 그에게 바쳤다. 그날 이후 양 진영에 사자(使者)의 왕래가 있었는데, 16일 진린이 순천에 보낸 사자에게 일본 측은 창칼 등 무기류 3척분을 바쳤다.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1월 14일 밤 왜 소장이 7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진린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와 술을 바치고 돌아갔다. 15일에도 왜 사자가 또 도독부로 갔고, 16일에는 도독이 부하 장수 진문동(陳文同)을 적 진영으로 보냈다. 조금 있다가 왜적 오도주(五島主)라는 자가 배 3척에 말과 창과 칼 등을 싣고 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그 뒤로 왜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주도록 부탁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에도 기록돼 있다. 14일자 일기에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해 붉은 기와 환도 등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바치고 갔다’는 게 그것이다.
16일자 일기에는 ‘도독이 진문동을 왜영으로 들여보내니,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칼 등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진린은 뇌물을 받은 16일 밤 왜교성에서 나온 왜선 1척의 광양만 통과를 허락했다. 그 배는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주둔한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진린은 왜교성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남해에서 농성 중인 왜군을 먼저 토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니 급할 것 없다”는 이순신의 만류에도 “이미 적에 붙었으니 적과 마찬가지”라면서 함대를 인솔해 떠나갔다.
같은 날 저녁, 왜교성에서 한 줄기 봉화가 올랐다. 사천, 곤양, 남해 등에 주둔한 왜군 진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였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은 원군이 오기 전에 맞아 싸우지 않으면 다 놓치겠다는 판단으로 왜교성 앞바다를 떠났다. 17일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쳤다. 남해에 있던 진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지원군 왜선 500척과, 조명 연합수군 500척의 대회전이었다. 노량 앞바다가 포성과 불길과 피로 물든 틈을 타 왜교성을 탈출한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리 돌아 쥐새끼처럼 도망쳐갔다.
귀로에 ‘소서행장 전승비’를 찾아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순천터미널 관광안내소에서 신성리 왜성 가는 길을 물을 때 친절한 안내원은 “성터만 보지 말고 충무사에 복원해놓은 비석도 보고 오시지요” 했다. 1930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천수대 꼭대기에 세웠다는 비석은 광복 후 지역 주민들 손에 철거되어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복 후에는 면사무소 창고에서 발견돼 2013년 충무사 관리인 숙소 앞마당에 다시 세워졌다. 전면에는 ‘小西行長之城’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뒷면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야시 센주로는 중장 시절인 1930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본국 허가도 없이 휘하 부대를 만주에 파견한 일로 일본 정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자다. 만주국 창설에 세운 공으로 승승장구, 1937년 제33대 일본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하여 이 비석은 소서행장 전승비로 불렸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쓰고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극우주의, 국수주의에 물든 군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 , , , 등.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떡국은 설이나 결혼식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명절마다 먹는 음식이 정해져 있어 그날이 되면 색다른 음식을 먹은 이야기가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언제라도 명절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제철 아닌 과일도 늘 맛볼 수 있다. 기다리는 기쁨을 빼앗긴 기분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장보기와 음식 장만하기가 김장을 하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행사여서 재래시장이 북적이고 정다운 덕담들이 오가곤 했다. 친척들은 돌아가며 청주나 과일을 들고 인사를 왔고 또 싸서 보낼 것을 대비해서 음식 장만이 만만치 않았다.
추운 겨울 새벽에 엄마가 흔들어 깨우면 언니와 필자는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불린 쌀을 나누어 이고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엔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도 그 줄에 서서 기다렸다. 털신을 신고 있어도 발이 엄청 시렸고 볼은 추위에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면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뜨거운 떡시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으로 온통 뿌옜다. 쌀을 빻고 떡으로 찐 뒤 가래떡 기계에 넣으면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가래떡이 두 줄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방앗간 아저씨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 서로 붙지 않게 물에 담갔다가 우리가 준비해간 함지박에 나란히 줄을 세워 담아주었는데 마지막에는 자투리가 두 줄로 끊어지곤 했다.
자투리는 언니와 필자의 몫이었다. 그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가래떡에서는 구수한 쌀 냄새가 확 풍겼다. 뜨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신났다. 언니와 필자는 균형을 잘못 잡아 휘청거리며 걷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함지박이 떨어질까봐 긴장하며 꼬옥 잡고 걸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엄마가 함지박을 반갑게 받고 나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가래떡을 조청과 간장에 찍어 맛을 보았다. 그 쫄깃하고 폭신폭신한 맛은 방앗간에서 바로 빠져나온 떡이 아니면 맛볼 수 없다.
이후 떡을 가지런히 펴서 밖에 내놓고 적당히 굳어지면 모두 둘러앉아 떡을 칼로 썰었다. 가마솥에선 육수를 내는 구수한 냄새가 밤새도록 났고 엄마는 부엌 불을 밝히고 밤새 음식을 만드셨다. 필자가 잘 때도 일어났을 때도 엄마는 부엌에 계셨다. 도마소리와 기름에 음식 지지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대구나 조기, 생태를 사다 눈과 바람에 말렸고 그것을 찜으로 상에 올리시곤 했다.
설날 아침에 상을 차리고 음식이 한둘씩 오르기 시작하면 신이 나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움집에 묻어놓은 김치는 미리 꺼내오면 맛이 없다고 상차리기 바로 전에 꺼내곤 했는데 주로 막내인 필자가 그 일을 담당했다. 김칫독은 필자의 키와 거의 비슷해서 어떤 때는 물구나무서듯해서 꺼내야 할 때도 있었다. 또 김치를 손에 잡기는 했는데 절반쯤 빠져 있는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해 낑낑댈 때도 있었다. 독 속에서 엄마를 부르면 오빠나 언니가 달려와서 필자 다리를 끌어당겼다. 그 시절 “엄마~” 하고 불렀던 소리가 아직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한데 이제 엄마는 떠나시고 나만 남았다. 모든 생명은 끝이 있지만 그리움의 끝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필자도 아이들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