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나이기준이 65세다. 유엔이 정했다고 하지만 왜 하필 65세인가?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가 독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민들을 노동현장으로 내몰면서 지금 열심히 일하면 65세 이후부터는 국가가 연금으로 놀고먹도록 해주겠다고 설득한 나이가 노년의 기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부국강병정책을 써서 1871년 독일 통일을 완성한 사람이다. 노인이 되면 국가가 책임진다면 구미가 당기는 말이지만 그 당시 독일의 평균수명이 40대라고 하니 비스마르크 입장에서는 책임지지 못할 거짓말을 했다고 믿기도 어렵다. 아니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명100세 시대에 아무리 젊어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도 35년을 국가가 국민 전부를 책임져주기는 어렵다.
법이 정하는 노인의 나이가 되면 노인복지 차원에서 혜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공도사'라는 별명이 있는 지하철 무임승차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발급받아 전국의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특별히 마련된 경로석에 앉을 권리가 있다. 서울처럼 지하철 노선이 잘 발달된 지역에서는 교통비 걱정에서 거의 해방된다. 이 카드를 활용하여 노인들의 지하철 택배 직업이 생겨나기도 하고 전철을 타고 춘천에서 막국수도 먹고 온양에서 온천욕도 즐기는데 들어가는 교통비가 없다.
다음으로 국공립의 능원, 고궁박물관이 무료입장이 가능하고 영화관에서도 활인요금이 적용 된다. 항공요금도 20%나 활인이 되고 이발소나 목욕탕에서 자율적으로 활인해 주는 곳이 있다. 추석이나 설날 등 특별한 날에 경로행사의 음식을 대접 받기도 하고 효행 음식점에서 할인된 가격의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도 많다. 대표적으로 취업에서 대부분 배제되어 강제로 정년퇴직을 당해야 한다. 심지어 아파트 경비나 청소부도 개인면접이라는 좁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건강하다는 것이 보증되어야 취업이 가능하다.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국가나 지방단체에서 지원하는 무료 교육이나 재취업, 창업 교육에 대부분 참가자격이 박탈된다. 공공 근로에 있어서도 체력이나 인지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듣기 좋은 말로 ‘시간부자’라고 하지만 지루한 날의 연속이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다. 65세의 노인의 나이가 되면 신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오는가? 실제로 직접 겪어보니 65세가 되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몸의 변화가 확 일어나는 것은 없다. 사람의 노화가 완만하게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을 유지하다가 계단식으로 주춤주춤 진행된다. 즉 어제와 오늘은 같지만 3년 전과 오늘은 다르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건강차이는 늙어갈수록 갭이 점점 더 벌어지는데 최고의 건강관리는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이나 주위의 노인들을 보면 일이 있는 사람은 노화의 속도가 느리지만 모든 역할에서 배제되어 할 일 없이 공원을 산책하듯 배회하는 노인의 노화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노인에게도 감당할 일거리를 주는 것이 직접적으로 건강보험공단의 재정을 튼튼히 한다. 건강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노인에게도 65세 노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경로석으로 모시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노인의 일감을 개발하여 개인으로는 소득을 창출토록 하여 소비대열에 서게 하고 국가적으로는 놀고먹는 사람을 줄여서 생산성을 높이는 대열에 건강한 노인을 편입시켜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노년의 기준 65세 그냥 기준에 불과하다.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천장이 높고 어두운 극장 안은 어린 배우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겁고 답답했다. 찾아다닌 끝에 밖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여니 주황빛 석양이 스며들다 온몸을 감싼다. 문밖에는 까치머리에 안경을 쓴 사내가 태양과 마주하고 앉아 있다. 그는 미래의 마임이스트 유진규(柳鎭奎·64)다. 내면의 대화와 몸짓 언어를 택한 그는 오늘도 소통의 벽에 길을 내며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장난장, 오랜만에 몸 좀 풀까?
“어디서 만날까요?”
서울시청 앞 광장 한복판에서 만났다. 인터뷰 약속을 잡은 날, 마임이스트 유진규는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로 세 번째인 김장문화제의 축제 프로그램 ‘김장난장’ 예술감독을 맡은 것. 그는 마임이스트이기도 하면서 관록의 축제 장인(匠人)이기도 하다. 축제 불모지였던 춘천에서 국제마임축제를 만들어 25년간 예술감독을 해왔다. 그의 손을 거치면 일상으로부터 탈출이 가능했고, 남녀노소가 한바탕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거듭났다. 유진규는 이날 새로운 도전, 시민들과 함께하는 김장 퍼포먼스 생각에 한껏 신나 있었다.
“김장문화제 주최 측에서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제안을 해왔어요. 잠깐 고민을 했죠. 지금까지 공연예술축제를 해왔는데 김장이라니? 그럼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지? 그때 머리에 그린 그림이 춘천국제마임축제 때 하던 아수라장과 도깨비난장이었어요. 축제다운 난장을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만든 것이 ‘김장난장’이에요. 저는 축제 난장 전문가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허설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도 헤아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11월 5일 진행된 ‘김장난장’은 젊은 세대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말 그대로 한판 난장이었다. 몸빼 바지에 고무장갑을 낀 시민들은 스스로 절여지고 다듬어지는 배추 역할로 참여했다. ‘김장난장’이 끝난 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진규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재밌어했다. 색가루(인체 무해한 전분가루를 사용했다)를 뿌려대서 시민들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울려 한껏 즐기는 모습을 봤다. 잘 노는 민족임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축제의 달인(?) 손에서 또 한 번 위트 넘치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마임 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
자, 그럼 이제부터는 마임이스트 유진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근황을 쏟아냈다. 그런데 도통 이 글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라며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 친절한 설명 들어간다. 유진규는 마임하는 예술가, 즉 마임이스트다. 그렇다면 ‘마임’이란 무엇인가. 들어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예술, 직접 물었다. 마임이 무엇입니까?
“마임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찰리 채플린이나 어릿광대들이 보여주는 판토마임을 생각할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말은 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몸짓과 재주를 통해서 자기를 보여주고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판토마임과 마임은 달라요. 희극배우들이 하는 판토마임이 대중적 형태라면, 마임은 다분히 예술적이고 개인적인 세계가 개입됩니다.”
지금까지 ‘마임 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으로 인식됐다. 축제의 장인보다는 ‘한국 마임의 아버지’라는 이름표가 그를 따라다닌다. 45년간 이어진 몸짓에서는 독보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양한 변화와 시도를 통해 담백하고 깊은 숨을 마임에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다.
물끄러미 앉아 있기를 좋아한 소년, 마임에 빠지다
유진규가 마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운명이었다. 말 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타고난 것일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사실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말 없는 세계이거든요.”
어렸을 적 그의 꿈은 수의사.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 자주 드나들면서 동물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렸다. 건국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잠시나마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시대였다.
“제가 70학번이에요. 유신시대 직전이었죠. 대학생이 고등학생보다 더 자유롭지 못했어요. 나는 대학교 들어가면 자유를 맘껏 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방황하다 만난 것이 연극이었어요. 1년은 휴학하고 1년은 방황했어요. 삶에서 중요한 시점이었죠.”
결국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길을 버리고 연극을 택해 극단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극단 안에서도 유진규는 모순점을 발견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극단 역시 철저한 조직사회였어요. 한 사람이라도 어긋나면 안 되는 조직화, 분업화된 곳. 한쪽으로는 재밌었는데 다른 한쪽으로는 억압을 느꼈어요. 그럴 때 마임을 알게 됐습니다. 마임은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써서 내 몸으로 표현하면 되는 거였어요.”
극단을 나온 그는 독립적인 마임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1981년 춘천으로 내려간 그는 소를 키우며 살았다. 건강문제로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흘러 그 또한 빛바랜 과거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길 위의 공연자, 나를 부르는 그곳이 무대
유진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이라는 타이틀이다. 스스로도 한 몸과 같다고 말해왔던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직에서 그는 2013년 물러났다. 흔히들 말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갑작스럽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도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2년 동안은 혼돈 상태였어요. 마음 정리를 하면서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나가야 하나 나 자신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결국 나는 공연하는 사람, 예술가였습니다.”
찾아주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무대에 오르리라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2014년 진주골목길아트페스티벌에서 길거리 공연이 가능한지에 대한 타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규는 자신이 무대가 있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제 자신에게 물었죠. 넌 배우잖아. 거리에서 널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극장에서만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거리와 극장은 뭐가 다르냐. 극장은 모든 것이 보장된 곳이고 거리는 던져진 공간이죠. 거리에서는 보고 싶으면 보고, 안 보고 싶으면 안 보는 게 가능해요. 보다가 가도 괜찮고, 중간에 봐도 괜찮고 보면서 떠들어도 괜찮고 보면서 먹어도 되죠. 네가 배우라고? 그렇다면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거리에서 공연을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게다가 마임축제를 할 때는 매년 거리공연을 하는 200여 명의 사람을 일일이 보고 선택했다. 공연 장소를 지정해주고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평가하던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평가하던 사람이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된 것.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반쪽자리 공연자밖에 안 되는 거죠. 기왕 깨진 몸 부딪혀보자. 극장에서도 공연할 수 있지만 거리 무대에도 서보자. 그것이 완전한 공연자라고 생각했어요.”
일주일이 지난 뒤 주최 측에 다시 전화를 걸어 공연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거리공연에 모험을 걸었다. 다행히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못 가게 해야 하잖아요. 가는 사람이 보이면 마음이 흔들려. 막 불안하고(웃음). 관객들은 재미없으면 무조건 가버려요. 볼 이유가 없잖아요. 그다음에는 대학로에서 했습니다. 첫날은 관객이 많았는데 둘째 날은 다르더라고요. 가는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관객과 함께 살아남는 배우가 진짜 배우라는 생각을 거리공연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됐어요.”
자연 속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는 기타, 바이올린, 타악기 등 모든 것이 더 생생하게 어울렸고 분위기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공연을 했다.
“연주자와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달라져요. 현실로부터 떨어져서 공연하면 사람도 자연의 흐름에 맡기게 됩니다. 비도 올 수 있고 바람도 불 수 있고요. 알게 뭐야 어떤 일이 생길지(웃음).”
디어 마이 손주, 할아버지는 사양할게
유진규는 4년 전 할아버지 대열에 합류했다. 마임축제 일로 힘든 와중에 웃음을 안겨준 고마운 손주다. 그리고 2년 만에 또 외손주를 봤다. 지금은 두 아이의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라니, 처음에는 좀 거부감이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 꺾여버리더라고. 할아버지니까 이러면 안 되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할아버지로 내면 정리가 되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거부! 할아버지 아니야! 초반에는 그랬어요.”
물론 손자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좋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자칫 진짜 할아버지로 가는 길이 될까봐 슬쩍 경계한다.
“주위에도 손주가 생기면 사람들이 정신이 없어요. 술 마시다가도 손주 보러 간다면서 가버려요. 일단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꺾이고 구부러지면 안 되거든요. 특히 내가 하는 일은 어디서나 당당하게 맞서고 깨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언제나 외손주하고 맞짱을 떠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야 해요. 할아버지와 손주 관계로 가버리면 자꾸 아이들의 작전에 말립니다. 안아주기도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아요(웃음). 맞짱뜨는 게 늘 중요해. 관계가 정립되고 어느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소통은 끝나거든요.”
나? 무대에서 안 내려갈 거야!
춘천국제마임축제와 헤어진 것이 두고두고 아쉽겠지만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왕성한 활동을 하는 중이다. 자연 속, 무대 위, 광장. 어디든 그의 발길이 닿고 필요한 곳이면 찾아가 공연을 펼친다. 전성기가 제대로 왔다는 느낌이다. 은퇴시기를 물어보니 절대 자신의 인생에는 접수되지 않을 단어가 바로 ‘은퇴’란다.
“일본 부토 무용의 대가 중에 100세가 돼서도 공연을 한 분이 계셔요.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큰 극장 무대에 배우인 아들이 아버지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고 무대 위를 걸어 나오더래요. 느릿하게. 그리고 무대 중앙에 멈춰선 아들은 휠체어를 객석 앞쪽으로 돌려놓았대요. 늙은 배우는 휠체어에 앉아 손을 들었고요. 그 순간 일본 사람이 좋아하는 빨간 장미 꽃잎을 수도 없이 날렸다는 거야. 나도 그렇게 될 때까지 공연할 겁니다.”
유진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끝까지 놓지 않고 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그는 오늘도 내일도 차가운 길, 붉은색 흙길 위 그리고 뜨거운 조명 아래서 깊은 몸짓으로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싱글 남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지난 8월 말부터 매주 금요일 모여 난타 연습과 스포츠 댄스를 배운다. 강남시니어플라자 대표 싱글 모임인 회원 중 8명. 11월 말에 있을 플라자 내 교육 프로그램 발표회에서 난타 공연을 할 예정이다. 싱글들의 모임이라 그럴까? 생기가 넘친다. 왠지 모를 자연스러움에 나이까지 잊게 만든다. 그렇지만 속내는 알 수 없다. 탐색을 하고 있는지, 정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말이다. 격 있는 싱글들이 모인 김에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들의 속내, 지금 연애가 하고 싶습니까?
난타와 댄스스포츠를 가르치는 이복자씨 속사정
난타 소모임의 반장격인 이복자씨를 제일 먼저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어봤다. 초등교사로 은퇴한 이복자씨는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무용을 공부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도 무용학교 입시 안무가로 젊은 시절 제법 잘나갔다. 스포츠 댄서로서도 한 획을 그었다고 자부하는 이복자씨. 그랬던 그녀는 재작년 황혼이혼을 했다. 작년 9월부터는 싱글의 몸으로 봄빛클럽 회원이 됐다. 지금은 나름의 재능을 살려 회원들에게 난타와 댄스스포츠를 가르친다.
이복자 황혼이혼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남편의 술버릇 때문이었죠. 젊을 때는 교사라서 못하고, 아들 결혼식에 빈자리를 만들기 싫었습니다. 결국 이혼했어요.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호주로 떠났는데 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혼자 있다 보니 외로웠어요. 자존심상 주위에 혼자된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다가 봄빛클럽을 알게 됐습니다. 법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상담도 받은 뒤 회원이 되면 싱글들끼리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건전하고 나 또한 싱글이니까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봄빛클럽 안에 최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말 그대로 탐색 중이다. 그녀에게는 분명한 것 하나가 있다.
이복자 남자 경제력은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연금으로도 두 명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마음이 맞고 편한 상대를 만나고 싶어요. 사실 제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분에게 당신이 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뭐 어때요? 여자라도 마음에 들면 말하는 게 맞죠. 말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웃음)?
하나, 둘 회원들이 모이고 왁자하게 웃음꽃이 폈다
난타 모임은 발표회를 위해 급조된 모임이다. 이곳에 모인 회원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매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진 촬영을 위해 테이블 주위에 회원들이 오순도순 모였다. 봄빛클럽 단장이었던 이활주씨와 난타를 가르치는 이복자씨, 이영조·최연서·현정원·김순섬씨. 그리고 이복자씨의 댄스스포츠 파트너인 박노용씨도 나오지 않은 회원을 대신에 자리를 채웠다. 이날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가정이 있는 남자다.
본격적으로 싱글 남녀와 대화를 열다
싱글이신데 젊었을 때와 지금 이성을 만나는 느낌은 어떻게 다른가요?
이영조젊을 때는 좀 화끈하잖아요.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의 만남은 하루하루 만나면서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거죠. 서로가 함께 있으면서 취미를 공유하고 같이 모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봐요.
이복자 모여서 떠들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외로움도 해소하는 거죠.
최연서 젊었을 때의 연애는 쓰나미 같은 것이고, 지금의 연애는 밀물 같아요. 이 나이에는 쓰나미처럼 사랑할 수 없어요.
Q.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최연서 우리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뀌어야 맞잖아요? 다른 사람 보면 또 바뀌고 그래야죠. 우린 싱글이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만 좋아할 수가 있어요(웃음)?
이복자 취미활동을 하다 보면 마음이 맞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만남을 갖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Q. 주로 어디서 만나시나요?
이영조사람이 그리울 때 저는 주로 저희 집으로 오라고 합니다. 집에 볼 만한 영화도 많고, 노래방 기계도 있어요. 그런데 전부 다 모여 먹고 마시다 보면 같이 영화 보고, 노래 부를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음에 영화 볼 때는 몇 사람만 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때 갑자기 최연서씨가 이영조씨와 이복자씨가 함께 영화 을 봤다는 얘기를 꺼낸다. 야한 장면이 나오는데 둘이 괜찮았냐며 소녀처럼 묻는다.
이복자 문제는 그런 거를 같이 봐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는 거 아냐? 이제 완전히 고목이 됐나봐. 지금 연서씨가 얘기하니까 그런 게 있었나보다 하지. 이제는 그런 장면을 봐도 감정이 막 생기고 그런 게 없더라고요.
Q.댄스스포츠 같은 거 하다 보면 찌릿한 느낌 없나요?
최연서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겠죠. 그런데 친구 사이로 생각하는데다가 배우는 데 집중해서 그런지 잘 몰라요, 그런 거.
이복자 지금은 댄스스포츠를 배우고들 있으니까 배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라도 더 배워서 안 잃어버리려고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잘하나 못하나 그거에만 신경을 쓰지 남녀라는 느낌이 없어요.
이영조 지금 자꾸 내용을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거 아닌가요?
수줍어서인지 즐거워서인지 다들 박장대소한다. 격조 있는 싱글들이 만났으니 뭔가 있을 거 같다고 느꼈다.
이활주 우리가 만나봐야 한 달에 번개까지 해서 한두 번 만나요. 좀 얘기하다가 식사하고 노래방 가고,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쁘니까 따로 시간 내서 한잔 더, 혹은 차라도 한잔 이런 걸 못 해요. 지금 그것을 파악하는 중이지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서로를 많이 알게 됐어요.
Q.솔직히 말해보셔요, 다들 연애는 하고 싶으세요?
최연서 좋은 친구는 만들고 싶죠.
김순섬 마음 통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Q. 얘기가 잘 통할 때 연애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으신가요?
이영조 희망사항이죠. 문제는 생각하는 이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서 혹시 남녀가 불이 붙으면 이 모임에 나올까요(웃음)? 관둡니다. 그건 분명해요.
이복자 자기들끼리 만나야 하니까.
이영조 맞아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둘이 만나니까 안 나오더라고요.
Q. 혹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헤어졌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김순섬 다시 들어오지는 않겠지. 자존심이 있는데 헤어졌다고 들어오나?
이활주 사실 예를 들어 “나 누구하고 만난다”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시치미 떼고 다시 오면 오는 거죠.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모임 회원 중 많게는 몇 사람 혹은 한두 사람은 서로 신상 탐색을 위해 밖에서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Q. 이 모임은 싱글 모임인데 다른 모임과 차이가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이복자 제 친구들 중에는 싱글이 많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하고 모임을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바삐 집으로 가요. 남편 밥 챙겨주러요. 집안일이 그렇게 딱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같은 싱글들은 집에 빨리 가야 하는 부담이 없어서 좋아요. 여기는 싱글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위화감은 없어요.
Q. 싱글 모임을 하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요?
김순섬 다른 내 친구들은 싱글이 아니니까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못 만나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전화하면 만날 수 있어요. 요즘 다른 친구들한테 자랑해요. 너희들 없어도 요새 나는 잘 놀고 있다고요(웃음).
Q. 같이 갔던 장소 중에 좋았거나 기억에 남는 곳이 있었나요?
현정원 춘천 갔을 때도 재밌었고, 대하도 먹으러 갔었어요. 11월에는 충남 태안에 천리포수목원으로 2박 3일 계획하고 있어요. 봄빛클럽에서 희망하는 사람들만 갑니다.
솔직하지 못한 싱글 남녀들의 머뭇거림에 이날 객원 멤버로 참여한 무용실 원장 박노용씨가 한마디한다.
박노용 너무 생각이 깊어요. 만나는 거 자체는 흥미롭고 좋은데 열지 못하는 거죠. 가정이 있는 제가 느끼기에도 몇 가지 장단점이 느껴집니다. 자유로운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좋아 보이기도 하네요. 각자에게 주는 감정이 참 세밀합니다. 그런데 젊음이 떠나서 그런가 들이대는 게 부족해요(웃음).
이활주 그 말이 맞을 거예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게 돼요. 가족의 눈 등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이요. 좋아하는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알아가면서 좋은 감정을 만들 수도 있으련만.
최연서 자신에게도 신중해야 하고 남들도 생각해야 하고 젊었을 때랑은 다를 수밖에 없죠.
이복자 나이 들어보니 감정은 뒷전이고 이성적으로 이것저것 가리게 되니까 빨리 뭐가 안 이뤄지는 거죠.
박노용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따뜻한 친구는 얻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싱글 모임이 좋은 거 같아요.
최연서 누군가 말하기를, 이성 친구는 딱 보고 1분 내로 결정하라더군요. 단 지성과 양심 중에 양심 쪽을 택하라고 하더군요.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은 만남이 달라요.
시니어 싱글 남녀. 이들도 결국은 진짜 사랑을 만나고 싶고, 지금까지의 삶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젊은 사람들처럼 사랑을 표현하고 내세울 수 없다. 삶에 대한 책임감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보다 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마음이 시니어들이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이 아닐까.
이번 달부터 새롭게 진행하는 ‘이봉규의 心冶데이트’는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공인들을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며 편하게 만나 은밀한 속내를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꾸밈없고 날카로운 ‘돌직구’를 던져 차마 예상치 못했던 야들야들한 답변을 끌어내는 사심이 묻어나는 ‘술술토크’를 열었습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윤영미(57) 아나운서와는 방송을 같이 한 적도 여러 번 있고 방송국 대기실에서 자주 마주치고 대화도 많이 나눴기에 편한 상대임에도 가 마련한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의 인터뷰를 위한 만남은 설랬다. 그녀는 1962년생으로 여자로서 밝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당당하다. 오죽하면 ‘여자 김구라’로 불린다고 스스로 털어 놓는다. 요즘 아무리 김구라가 인기가 좋다고는 하지만 ‘여자 김구라’로 불리고 싶을까? 일반적인 여성 방송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변태거나 ‘또라이’는 절대 아니고 지나치게 발랄하고 순수하고 다소 엉뚱스러운 여인이다.
윤영미 아나운서와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닭갈비집에서 만났다. 그녀는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춘천에서 1년간 기숙사 생활(성심여자대학교 국문과)을 했고 춘천 MBC에서 다년간 공채 아나운서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닭갈비를 좋아할 것으로 믿고 필자가 그리로 정했다. “닭갈비집으로 인터뷰 장소를 잡는 이봉규의 센스에 깜짝 놀랐다”고 말하면서 “역시 이봉규는 한량!”이라고 평가한다.
한량인 내가 타이밍을 놓칠 리가 없다. 바로 분위기를 업~ 시키려 둘은 막걸리 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그녀의 주량은 상당히 센 편이다. 맥주는 싱거워서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서 소맥을 즐긴다고 허풍쟁이 남자들처럼 주량 자랑이다. 술 먹다가 취해서 화장실 갔다가 자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매거나 필름이 끊긴 적도 여러 번 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대학 시절 명동의 유명한 나이트클럽인 ‘마이하우스’를 휩쓸었단다. 낮 2시부터 디스코텍을 다닐 정도로 세칭 ‘날라리’였다고 허풍을 떤다. “맥주는 5000cc까지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필자는 맥주를 따로 더 시켰다.
그녀가 막걸리보다는 맥주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혹시 막걸리를 먹어서 매우 취하면 인터뷰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도 살짝 작용했기에 필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그녀에게는 맥주를 권했다. 술병이 한 병 두 병 비워 지고 취기가 서서히 올랐기에 과감한 질문을 던졌다.
“가끔 바람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까?”라는 돌발 질문에 “멋진 뇌색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보면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는 못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정신적인 바람을 피우고는 싶지만 몸을 섞는 육체적 바람은 찜찜하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하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이혼 생각도 여러 번 했었지만 막상 이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고 한다. “막상 이혼을 하고 나면 다른 남자와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다시 말해 대안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취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아서 그렇지 결혼 20년차 이상 대부분의 중년 여성들은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하고 몇십 년이 지났고 아이들도 다 컸고 갱년기에 심리적인 흔들림도 생기기 마련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남에게는 남편밖에 모르는 현모양처로 이혼 생각은 전혀 해 본 적도 없다고 내숭을 떠는 여성들이 속으로는 곪아 터질 대로 터져서 남모르게 골프코치나 수영코치하고 바람피우거나 산악회에 가입해서 헌팅을 위해 이산저산 떠돌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번쯤 일탈은 설렐 것 같아요, 삶의 동기 부여도 될 것 같기도 하구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함을 느끼는 그녀의 표정은 실제로는 제대로 일탈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일탈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아쉬움을 그녀는 시인 문정희의 어록으로 대신한다. “죽으면 썩을 몸을 칭칭 감고 다녔다.” 이 말을 듣고 금방 이해가 갔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그녀는 문정희 시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문정희의 ‘남편’이라는 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을 낭독한다.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 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구절이 그녀의 마음과 똑같아서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일탈을 꿈꾸다가도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먼 남자인 남편의 존재 때문에 삭이고 사는 것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 배운다.
35세에 만난 남편 황능준씨는 지난 20년의 결혼생활 동안 사업 실패, 전업주부 생활, 목회자로의 전향 등 때문에 아내 윤영미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한 방송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과거 남의 말만 듣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며 본의 아니게 아내를 ‘생계형 방송인’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 남편하고 살면서 속도 하도 많이 썩어서 지긋지긋할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또 다른 방송에서는 “저는 속아서 결혼한 것 같다. 울분이 항상 쌓여 있어서 돌덩이(가슴에)가 있는 기분이다”라고 토로하면서 “결혼 전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호강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3년 정도 살았다. 당시 얼마 되지 않던 내 아나운서 월급으로만 먹고 살았다”고 하니 요즘의 그녀가 얼마나 씩씩해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웬수’ 같은 남편이지만 시인 문정희의 ‘남편’에 나오는 구절처럼 여기고 새기면서 살고 있을 것 같다. 놀랍게도 그녀의 첫 섹스 파트너는 35세 때 지금의 ‘웬수’ 같은 남편이었다. 그러니 그럴 법도 하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2차로 장소를 옮기자는 필자의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바로 옆에 필자가 자주 가는 라이브 바 ‘그루브’에선 스스럼없이 대화가 더 깊숙하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첫 키스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 같이 초등학교 때 홍천 계곡에서 환상처럼 이루어졌다고 한다. 상대는 당시 홍천초등학교 전교회장. 40여 년이 훌쩍 지나갔어도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멍하다고 말한다. “첫 키스 상대인 그때 그 사람이 그립습니까?”라고 묻자 “지나간 사랑은 기억일 뿐”이고 “여자는 한 남자를 두 번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윤영미 어록이 쏟아진다. 풋고추 같은 사랑이었고 가슴 아픈 첫 사랑은 따로 있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그녀의 대학 시절 강원대학교 건축과에 다니던 테리우스 같은 꽃미남을 ‘꼬시기’ 위해 그녀는 적극적으로 행동했었다. 성심여대에 다니던 윤영미는 강원대 앞 카페에서 우연히 본 테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강원대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혹시나 도서관에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교회 친구가 테리우스와 강원대 같은 과(건축학)의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영화 의 ‘윤영미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그와 사귀게 되었는데 으레 첫사랑이 그렇듯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스토리는 마치 영화와도 같았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중년이 된 나이에 그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딱 봐도 행색이 안 좋아 보일 정도로 예전의 꽃미남 테리우스는 온데간데없어서 슬펐다고 한다. 아련히 애틋했던 첫사랑은 그렇게 완전히 그녀의 맘속에서 비로소 지워지고 말았다.
그 후 웬수 같은 남편은 그녀에게는 중년의 테리우스같이 멋져 보였을 것 같다. 실제 그녀의 남편 황능준씨는 훈남의 외모를 자랑한다. 그녀는 남편의 첫인상이 ‘푸른 초장’ 같았다고 회고한다. 속을 전혀 썩일 것 같지 않고 순수한 남자일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살아 보니 속도 많이 썩었고 산전수전 겪다 보니 지금은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런대로 봐 줄 만하다고 은근 자랑이다.
그녀는 “남편이란 존재는 처음에는 연인이고 그 다음은 웬수처럼 느껴지다가 세월이 가면서 친구가 되어간다.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는 아마 인생의 간호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고 정의한다. 남편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인터뷰를 시작할 때와 인터뷰가 끝나 갈 무렵과는 사뭇 다르다. 솔직하고 쿨~한 윤영미의 복잡한 마음일까? 아니면 우리네 중년 여인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느끼는 것이 남편이란 존재일까?
한량인 이봉규는 아직 더 여인들의 심리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윤영미는 멋들어지게 노래를 뽑았다. “삶의 후회는 없고,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금방 포기한다”는 그녀의 가치관이 노래에 묻어 나온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장마는 사라지고 연일 태양이 작열한다. 열대야로 잠을 재대로 잘 수 없는 밤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뒤척일 수 있어 그런대로 길고 더운 여름밤을 버텨낼 수 있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지만 집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거실 구석에 하나 서 있고 안방 벽에 하나 걸려있지만 몇 년 째 가동한 적이 없다. 전기세가 문제가 아니라 여름엔 땀을 흘려야 된다는 논리로 가동을 못하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워낙 필자의 고집이 강경하므로 다들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이제 입추도 지났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니 모두 어이없어 한다.
어제 부모님 댁에 들어서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저층 연립주택에 사시는데 앞뒤 동 간격이 좁고 저층이라 집안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긴 했지만 엄청 더웠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두 분이 더위로 고생하시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더니 전혀 문제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침 드시고 나서 근처 중랑천 변 그늘로 가신다고 했다. 그곳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오전시간을 보내신 후 오후에는 복지관에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저녁까지 지내시다가 들어오신다고 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특별한 피서를 하고 계셨다. 그것은 ‘무료 전철피서’ 아주 긴 노선을 택해서 하루 종일 시원한 전철 여행을 하고 계셨다. 우선 아버지 혼자 하는 여행은 다음과 같다.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중랑역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 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 이상 걸려서 수원에 도착하면 인천 행으로 갈아타고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소래포구 시장 구경을 하고 인근 다리 밑 그늘에서 쉬고 도시락을 드신다. 다리 밑에는 의자를 많이 설치 해 두어서 편하고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가실 때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온양까지 가신다고 했다. 온양 온천에는 전국에서 모여 든 노인들이 점령했다고 한다. 온천 후 점심 드시고 시장 구경도 하시고 느긋하게 전철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 하루 여행으로는 제격이고 가고 오는 동안 시원한 전철에서 피서할 수 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가끔 복지관 친구 두 분과 전철여행을 하신다고 했다. 일산에 사시는 분이 계셔서 일단 종로3가에서 모인다. 오전 열시쯤 만나서 서울 역으로 이동한다. 서울 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인천 계양까지 가서 인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탄다. 원인재 역에서 오이도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다가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시장에서 우럭 두 마리를 구입해서 식당에 가져가면 매운탕을 끓여준다. 막걸리 한 병 놓고 식사하신 후 시장 구경하고 노선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1인당 회비는 이만 원인데 몇 천원이 남는다고 한다.
전철피서의 하이라이트는 춘천 행 열차를 타는 것. 춘천 역에 내리면 인근에 닭갈비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신다. 식사 후에는 닭갈비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승합차를 타고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유명한 박사동네, 소양강 처녀동상, 소양호를 두루 구경한다. 구경 후에는 춘천 역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다는데 이 모든 서비스가 공짜란다. 단, 일행이 여섯 명 이상이라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한다. 그래서 춘천에 가실 때는 여러 명이 모여서 간다고 하셨다.
65세 이상에게 제공되는 전철 무료서비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인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교통비 부담 없이 시원한 피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노인들의 정신과 육체건강에 상당히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고금석 연극연출가
허망한 소싯적 꿈~
나의 원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문학과로 대학 진학을 했던 것이고 1학년 때부터 경제원론이니 법학통론, 정치외교사 등을 두루 청강하였다. 5개 국어를 마스터할 계획도 세우고 첫 방학부터 중국어, 프랑스어 학원을 찾았다. 당시 독일문화원에는 독일 문학이나 시사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대학생 모임이 있었는데, 모든 의사소통을 독일어로 하였다. 그 모임의 성격이 나의 구미를 자극하였다. 그래서 독일어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2학년이 되자마자 그 모임을 찾았다. 이때가 1971년 4월!
잘못 찾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30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여학생도 많았는데 몇몇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뻤다. 웬 늙수그레한 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우리말로 발표를 했다. ‘너무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러나?’ 기나긴 발표가 끝난 후 웬 책자를 나누어 주더니 윤독을 하자고 했다. 제목을 보니 ‘당통의 죽음’. 연극 대본이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옆 사람에게 물으니 ‘프라이에 뷔네’(Freie Bühne-독일문화원에 소속된 연극단체로 독문학과 학생들이 주축을 이룸)란다.
대본이란 걸 처음 봐서 그런지, 내 차례만 되면 긴장되어 눈앞이 핑핑 돌고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혀는 꼬여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첫 연습을 마쳤고, 시(始)파티 자리까지 가서 막걸리를 진창 얻어 마셨다. 그러나 다시 그 연습장을 찾지는 않았다. 난 원래 연극은 꿈도 꾼 적이 없으니까~.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1주 후. 집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프라이에 뷔네’란다. 왜 그랬을까? 방을 잘못 찾던 날, 자기도 2학년이라고 유난히 친절하게 굴며 집 전화번호를 묻던 그놈,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가? 오늘이 캐스팅하는 날이라고, 연출자가 나를 꼭 보고 싶어 한다고. 왜 나갔을까? 캐스팅 자리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외교관의 꿈을 꿀 수 있었을 텐데…. 연출자는 꼭 보고 싶다던 나에게 대사 여덟 마디짜리 단역을 주었다. 그러나 여덟 마디도 버거울 정도로 난 연기에 문외한이었다. 읽기는 그럭저럭 견뎌냈는데, 블로킹(동작선 긋기 연습)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영광스럽게도 난 연극의 첫 장면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건 첫 장면 출연자를 빼고 나머지 45명의 배우가 한꺼번에 내 연기를 보는 끔찍한 사태를 의미했다.
여덟 마디였지만, 첫 대사는 엄청나게 길었다. 대본의 반쪽 페이지가 넘게 길게 이어졌다. 창녀들이 골목길에서 교미하는 개들을 보고 깔깔거리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었는데, 리딩할 때는 그럭저럭 잘나가던 대사가, 90개의 눈알이 주시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려니 맥락도 잡히질 않고, 얼굴 근육이 떨려 도무지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몇 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무래도 간덩이가 너무 작아 그러는 거 같으니, 연습 전에 술을 마시자.’ 당시엔 왕대포라고, 막걸리를 큰 대접으로도 팔았다. 이 방법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그렇게 난 매일 음주연습을 했다. 이 습관은 공연 당일까지 이어졌다. 공연장에서 막걸리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공연 당일, 분장하기 전에 구멍가게에서 미리 매실주 한 병을 구입했다. 병이 납작해서 윗저고리 속주머니에 들어가기 딱 좋았다. 그래도 도수도 높고 500㎖는 족히 되는 사이즈였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시간이 임박할수록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그때마다 몰래 한 모금씩 홀짝이다 결국 공연 직전엔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내 데뷔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선배 한 분이 무대에서 술냄새가 진동하더라며 음주공연한 사람을 색출하려 했다. 난 기겁하여 다음 날 공연 땐 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난 예의 창녀촌 장면 도중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대사! 5초가 지나 10초, 15초~ 결국 나는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객석에서 격려 박수 소리가 터지며 다음 배우가 등장하여 연극을 진행시켰다. 난 하릴없이 무대를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연기 데뷔 무대가 이리 허무하게 끝나다니~.
힘없이 무대를 나오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튀었다. 초장부터 연극을 망쳤다며, 누군가가 내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난 그 사람이 연출자인 줄 알았다. 최근 그 연출자에게 내 뺨을 후려친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자기 작품을 망친 배우를 응징하지 않는 연출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난 아직도 의문이다. 그렇게 2학년의 1학기를 온통 연극에 허비하는 바람에, 1학년 때 올 A에 평점 4를 넘던 학점이 그만 C·D투성이에 평점도 3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또 그랬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외교관의 꿈을 이루어줄 책들을 싸 메고 연극과 인연이 닿지 않는 외딴 세계로 기어 들어갔다. 고향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이었다. 고시생들에게 알려진 명문 절답게 옥천사에는 예닐곱 명의 고시생이 있었다. 나의 꿈 재도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가져간 책과 참고서적, 문제집 들을 죄다 독파하고 한 달 반 만에 의기양양 하산하였다.
그러나 개학을 열흘도 채 남기지 않은 날, 다시 그놈한테서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주인공 자리가 비어 있다고, 이번에는 독일어 원어극이라고, 발음은 독일 사람이 봐준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독일어로 공연 한 번 하면 회화는 저절로 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원어민이 가르쳐 주면 독일어 발음이 얼마나 정확하고 좋아지겠는가?
왜 또 그랬을까? 난 또 반갑게 독일문화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판단 미스였다. 발음은 좀 나아졌는지 몰라도, 난 지금까지 독일어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2학년 말, 극단을 빠져나오려고, 연극을 접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내 동기와 선배들이 모두 군대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 버린 후였다. 극단엔 1학년 신입생과 예쁜 여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를 즈음해 외교관의 꿈은 완전히 접혔다.
관객모독
엇나가긴 했지만, 이후 나의 연극인생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계속 배우로 활동했으면 내 인생은 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배들이 없는 상황에서 난 연출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1977년, 난 독일의 걸출한 작가, 페터 한트케를 만나 연출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나중에 기국서라는 연출가가 재공연을 해서 더욱 유명해진 . 관객들은 욕먹고 수모를 당하고 모독당하기 위해 줄지어 세실극장을 찾았다. 모독을 당하다 겁을 집어먹고 실신한 나머지 극장 밖으로 실려나간 관객도 있었다.
공연을 마친 다음 날, 단원들이 예매처를 돌며 수금을 해왔다. 여관방에 모여 결산을 하는데 모두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꾸역꾸역 기어냈다. 연극을 해서 처음으로 돈 버는 경험을 했다. 연극에 입문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카스파
난 계속 페터 한트케에 매달렸다. 1978년엔 를 선보였다. 16년 동안 갇혀 살다 세상에 나온 소년이 언어를 배우며 겪는 고통을 언어고문극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는 1983년에 재공연되어 극비평가그룹으로부터 작품상을 받고, 1996년에 앙코르 공연을 가지면서 500회 가까운 공연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엔 고려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을 연출하여 전국대학연극축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그해 국립극단에 입단하였다. 엇나간 꿈은 힘을 받아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광대학교
나의 대표작으로는, 1987년 ‘우리극장’이 만든 를 들 수 있겠다. 아마추어 극단을 고수하던 프라이에 뷔네는 1979년 전문 직업극단으로 탈바꿈, ‘우리극장’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는 배우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훈장과 학생들이 벌이는 코미디극인데, 고리타분한 훈장이 자유분방한 학생들한테 백전백패를 당한다.
는 춘천으로 살러 가 만든 극단 ‘춘천앙상블’의 창단공연으로도 제작되었으며, 1992년 재공연된 후 현대백화점, 서울우유 등 기업체와 학교 순회공연을 다녔다. 1994년에는 LA교민 위문공연을 다녀오고, 2000년엔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로 부임하면서 다시 업그레이드되었다. 는 전주 동네 구석구석에 초청 공연된 후 중국 수저우(蘇州)까지 다녀오며, 1000회 이상의 공연 기록을 남겼다.
산너울패
2008년, 아내의 암 투병을 위해 충남 서천에 새 집을 짓고 아예 눌러 앉았다. 아내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바로 ‘산너울패’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2013년의 일이다. 산너울마을 동네 주민들로 이루어진 작은 극단이다. 동네 아이들 7~8명도 따로 모여 연극놀이를 하며 어울린다.
첫 작품으로 어른 팀은 를 공동 창작하였고, 어린이 팀은 고(故) 임길택 시인의 시를 모아 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 공연하였다.
창단 2년째에 산너울패는 의미 있는 행사를 가졌다. 송년공연으로 동네잔치 한마당을 벌인 것이다. 단원들은 낭독공연()을 하고, 초청가수들이 내려와 노래 불러주고, 국립창극단 박성환 배우가 판소리도 들려주고, 서천 토박이 박광배 시인이 자작시 낭송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막걸리를 사오고 삼겹살을 구웠다. 막판에는 초대가수와 춤꾼 구별 없이 노래 부르고 한데 어우러졌다.
이문재 시인이 옵서버로 이 구경을 하다가 곧장 경향신문 정동칼럼에 이 멋진 광경을 그대로 옮겼다. 시골 극단이 가야 할 길의 모범을 보인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고금석(高金錫)
1951년 광주 출생. 서울 배재고·고려대 독문과 졸. 극회 프라이에 뷔네 단원. 전국대학연극축전 최우수상. 국립극단 단원. 극단 우리극장 창단. 올해의 작품상(연극비평가그룹 제정) 수상.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전주대 영상학부 강사 역임. 서천극단 산너울패 창단.
인생 65세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어르신, 노인으로 호칭되는 ‘고령자’의 대열에 편입된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되고 ‘지공거사’가 된다. 하지만 전철무료 지공거사! 요금 면제커녕 폭탄을 맞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 와중에 출생신고가 몇 년 늦어 이제 65세가 되었다. 기초연금신고와 전철 무임승차권에 대한 안내문을 받았다. 고령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전철을 무임승차하면 어떨까?”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주민의 일상으로 찾아가는 복지행정!
얼마 전 관악구 미성동 복지담당 공무원과 보건소 간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봉지형 복지사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현장을 찾아가는 복지행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철무료승차권과 기초연금신청안내, 주택연금 활용방법 등 손에 잡히는 주제를 설명하였다. 김상희 간호사는 “사회은퇴 후 활동이 축소된 어르신의 건강이 문제된다.”고 하였다. 폐렴예방무료접종, 골밀도검사, 암 검진, 임플란트 치과지원도 설명하였다. 폐렴예방접종이 일생에 꼭 한번 해야 하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치매검사, 우울증검사는 이상 없이 통과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아 친절하게 설명해준 복지사와 간호사에게 감사한다.
환승기능 없는 전철무임승차권
전철 무임승차 시행초기 춘천막국수, 온양온천 등 원거리 무임승차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퍼주는 복지라고 야단났었다. 한편에서는 집안에 머무를 고령자를 밖으로 이끌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긍정론도 있었다. 즐거움은 여기까지였다.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받으면서 ‘지공거사’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문제는 시민이 통상 버스타고 전철을 바꿔 타는 ‘환승’에서 발생한다.
전철무임승차권에는 환승기능이 없다. 대중교통 환승제가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환승기능 없는 교통카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버스와 전철을 한번 환승하면 가까운 거리는 1250원 남짓이면 된다. 전철요금은 무료이나 버스요금은 내야한다. 전철요금은 면제로 알았으나 실제 면제요금은 50원, 한 달 왕복하더라도 3000원이다. “눈 가리고 아옹이지, 누가 전철요금 면제라고 하겠는가?”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공거사 오히려 요금폭탄!
시민은 보통 버스타고 전철로 환승하여 다시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대체로 요금이 1500원 안팎이었다. 그런데 지공거사가 부담하는 요금은 2400원이 된다. 면제요금 합한 총 요금은 2150원 1.43배 많은 3650원이 된다. 교통요금 면제커녕 오히려 폭탄이다. 이만큼 예산도 낭비하고 있다. 많은 시민이 실질적으로 전철요금 면제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장이다. 이 대목에서 무료승차권 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전철무임승차가 노인에게 오히려 부담을 늘리는 기막힌 현실이다.
무임승차권 환승기능 부여하라
왜, 전철요금 전액 부담자와 면제자의 요금계산이 달라야 하는가? 지공거사의 무임승차카드 환승기능부터 부여하여야 한다. 환승기능도 없는 무임승차 교통카드 발급을 특정은행에 전담시키는 것도 큰 문제다. 계좌이동제, 인터넷 전문은행 출현 등 은행 간 벽이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모든 은행에 개방하여 시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올 여름 초복인 오늘은 종일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네요. 한해의 중간에 있는 7월 중순이다 보니 무덥기도 하고 비가 자주 오는가 봅니다. 아부지 계신 곳 날씨는 어떠신지요? 많이 덥지는 않으신지요?
지난주에는 시골집 엄니께 들려서 주변 정리도 해 드리고 텃밭 마늘도 캐서 묶어 매달아 두었지요. 햇 옥수수도 첫 수확으로 따서 쪄 먹기도 했답니다. 엄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부지! 2주전엔 아부지 손자 ‘우태’가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로 이사 오려고 매매계약을 했어요. 돌아오는 10월 초엔 아부지 증손자가 태어날 건데 며늘아가가 맞벌이로 직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저희한테 아기를 맡기기로 하고 이리로 이사 오려 한거예요. 아부지는 알고 계셨는가 봐요? 그날 밤 제 꿈에 오셨었잖아요. 옆 동네 새로 짓고 있는 전원주택 옆을 지나가며 여러 가지 일러주시던 꿈속 기억이 생생하기만 한데 벌써 멀리 가 계시는군요.
아부지가 26살 되던 해, 제가 4살 때 큰집에서 분가하시며 지으셨던 고향의 옛집! 아부지는 그곳에서 23년을 사시다가 엄니와 우리 5남매 남겨두고 그 곳 멀리로 가셨던 거잖아요. 그 후로도 19년은 더 살다보니 엄니는 점점 늙어 가시는데 여러모로 불편해서, 텃밭을 정비해서 터를 다듬고 지금의 새집을 짓고 이사했던거지요. 그 후로 13년 동안 비워놓다 보니 많이 망가지고 보기도 흉해서 헐어 버리고, 메꾸어 밭으로 만들려고 흙을 받아 쌓아 놓은걸 보니 아부지께서 서운하셨던지 2주전 제 꿈속에 다니러 오신 거 같아요.
아부지 손길과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성리 136-2번지 옛 집터 이지요. 기역자로 지어진 초가집에 안방, 윗방, 건넌방에 부엌과 외양간, 뒷간.
처음엔 마루도 없이 문 앞 댓돌에 두툼한 발판을 놓고 드나들었던 기억이 제겐 아직 생생하거든요. 차차 바깥 행랑채를 들이시고 사랑방과 헛간도, 곡간도 늘리고 초가도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바꾸시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단단히 길들이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다듬으셨었죠.
뒤꼍에 펌프 물을 팠다가 가물면 물이 짧아, 다시 안마당에 깊숙이 파고 파이프를 박아 동네에서 제일 달고 시원한 맛있는 샘물 올리는 펌프를 장만 하셨었지요. 한여름 무더위에 논밭에서 땀에 젖어 돌아오시면 치컥치컥 펌프물 퍼올려 흙먼지도 털어내고 등목도 해드리고, 마루 위에서 함께 했던 보잘 것 없지만 푸짐했던 밥상이 목이 메이게 그립습니다.
강 건너 골짜기에 다락 논을 장만 하시고는 배타고 건너다니시며 논농사를 지으셨죠. 이른 봄 뒷간의 재거름을 배에 싣고 건거가 못자리를 만들고, 연장 질 할 큰 소들은 나룻배에 태우고 건너가 갈고 써래질 하여 모내기를 한 후로는, 이틀이 멀다 않고 돌아보며 어린자식들 이밥을 먹이려 애쓰셨던 거지요.
윗마을 너 댓 배미 논도 그 아래 경사진 돌밭도 보리밭으로 콩밭으로 바꾸어 가며 곡간의 항아리를 채우고, 검단 논과 밤나무골 다락 논은 우리 식구 귀중한 식량의 터전 이였지요. 그런 농토를 한 필지, 한 마지기 손수 늘려 가시며 그렇게 좋아하시고 뿌듯해 하셨다는 걸 나중에 엄니로부터 말씀 들어 알게 되었었구요.
아부지! 제가 중학교 시험을 쳐야 할 때나 고등학교 진학하고파 할 때엔 주렁주렁 5남매 자식들 걱정에 덥석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지 못하셨던 거 전 기억하고 있어요. 힘들게 어렵사리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저 혼자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에 올라가 애쓰다가, 예비고사에 떨어지고 난 한겨울에, 성남시 어느 버스종점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다가, 툭툭 털고 군대에 간 후로는 휴가, 외출, 외박, 면회도 없는 힘든 부대에 가서 33개월 넘게 아부지 엄니 속 애타게 만들기도 했었지요.
1979년 1월 군대 제대 하던 해 운 좋게 한국전력에 입사하였고, 입사한 후 아부지 친구 분들이나 이웃 분들의 소개를 받아 장가도 들이고 며느리도 보고 싶어 하셨는데, 그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제 생각대로 살다보니 입사 후 3년 만에 아부지는 제가 뵈러 갈 수 없는 먼 나라로 가신 거예요.
아부지! 49년 젊은 세월 접고 멀리 그 곳으로 가신지가 올해로 33년째 입니다. 이젠 거기서도 터 잡고 재밌게 사시나요? 가끔은 이 곳 생각도 하시는지요? 아부지가 갑작스레 허망하게 떠나가신 후 저는 엄니와 우리 5남매 열심히, 남들 손까락질 안 받고 살아보려고 애썼지요. 아부지가 뿌려 놓으신 삶의 터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반듯하게 살려고 했던 거예요.
그 후로 우리 5남매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낳아 키워가며 가끔씩 만나 옛 얘기도 해가며 ‘배나들이’ 혈육의 정 이어가고 있답니다. 재작년 12월엔 제 딸, 아부지 손녀딸을 시집 보냈구요, 지난해 봄 4월엔 제 아들, 아부지 손자 장가를 보내어 춘천 가까운 곳에 둥지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저희 끼리 잘 살아 갈 거예요. 두 녀석 다 직장에 다니며 나름 생활을 개척해 가고 있거든요
아부지! 이렇게 식구들의 모습이 변해 갈 때마다, 얼마나 아부지가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이정도 살아온 것도 다 아부지 덕분이고 가르치심 이었지만, 실은 저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맘 편히 의논드리고 도움 받아야할 아부지가 멀리 만날 수 없는 곳에 계시다는 게 얼마나 속상하고 야속 하던지요.
아부지의 땀 냄새가 그립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용마루로 타고 오르던 아부지의 담배연기가 보고 싶습니다. 데이터 무제한으로 영상통화도 하고 싶습니다. 패밀리레스토랑에 모시고 가서 한 번도 맛보신적 없는 스테이크도 잡숫기 좋게 잘라 드리고, 보랏빛 와인도 조심스레 따라 드려 보고도 싶습니다.
지난 1월에는 엄니 팔순 생신이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부지는 팔십 둘 되시네요. 우리 자식들하고 혈육 가까운 친척들 모여서 엄니 팔순생신 차려 드렸어요.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농사일에 진땀 흘리시던 아부지가 더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자주감자 깎아 썰어 넣은 수제비국으로 허기진 배 채우고 바깥마당에 멍석 펴고 누워 올려다보던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자주 편지 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초복 날 늦은 밤. 큰 아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