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이가 들고 보니 살아온 삶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볼까? 하지만 손에 들려진 펜은 곡선을 그리다 갈 길 몰라 방황한다. ‘그것참, 글 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하던 사람들이 모여 글쓰기에 도전했다. 생활의 활력이 생기더니 내가 변하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성장하는 감동 스토리도 하루하루 글로 쌓여갔다. 이웃들의 정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부천 글쓰기 모임’에 다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원미동으로 향했다. 마치 유니버설스튜디오나 방송사 드라마 세트장 방문만큼이나 기대됐다. 양귀자의 소설 의 배경이 된 이곳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천시 원미 2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반. ‘글쓰기 모임’ 강좌가 열린다. 강좌가 이어져온 지도 어언 6년. 수필집도 5권이나 출간했다. 등단한 회원, 부천 지역신문 시민기자가 된 회원, 이 강좌에서 공부한 것이 바탕이 돼 뒤늦게 대학 공부를 하는 회원도 생겨났다.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길을 찾고 발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다 빛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부천시 글쓰기 모임은 부천시 평생학습센터 특화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지원을 받는 강좌 중 하나다. 원미동 글쓰기 모임 외 시(市)의 지원을 받는 대부분의 강좌는 몸을 움직이고, 발산하는 활동 프로그램. 글쓰기 모임을 6년간 이끌고 있는 박창수(52) 작가는 이 모임이 꽤나 희귀하다고 설명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데 6년 동안 모임이 이어져오는 것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19명의 회원이 글쓰기 모임의 문을 활짝 열었다.
노년의 글쓰기는 힐링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등단보다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문학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는 데 의미를 둔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의 기본 바탕은 ‘힐링’이라며 방점을 찍는다.
“글쓰기는 힐링 단계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면서 풀어나가요. 그다음이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죠. 우리 수강생들 중에는 사실 상처받으신 분들도 많아요. 다 큰 자녀가 죽었다든가,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 정말 다양해요. 그런데 이곳에서 치유하고 가슴을 여는 것이죠.”
글쓰기를 하고 50세가 넘어서야 대학 공부에 도전한 회원도 여섯 명이나 된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 회원 개개인의 수필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등단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박창수 작가는 “열심히 글을 쓰고 또 부쩍 글쓰기 능력이 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며 “제대로 된 방법으로 회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ini interview
류인록(부천글쓰기모임회장·71) 글쓰기로 새로운 삶을 선물받다
이제 글 쓴 지 5년 됐습니다. 살면서 타자기 한번 못 만져봤습니다. 62세가 돼서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했습니다. 독수리 타법 면한 지는 오래됐어요. 그리고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과 파워포인트도 배웠어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오면 포토샵 스위시로 사진들을 꾸밉니다. 사별하고 저 혼자 산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 지루한 줄 몰라요. 지금은 우리 원미마을신문 기자로 활동해요. 글쓰기 교실도 다니고, 주병률 시인에게 시를 배우러 다닙니다. 취미생활이 또 하나 있어요. 여행을 다니는 겁니다. 작년에 홍도에 다녀왔고, 제주도, 안동 이육사 문학관, 영월에도 다녀왔어요.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글감이 나오더라고요. 기행문 쓰는 게 좋아요. 제 입장에서 쓰기가 좀 쉽더라고요. 그것도 갔다 와서 일주일 안에 써야지 지나가면 금세 잊어버려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안 좋아서 다른 건 별 흥미가 없었어요. 글쓰기를 선택했고 버틸 만했어요. 첫 글을 쓰고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6년 전 먼저 간 마누라에 대한 글이었거든요. 그 글이 실린 책은 우리 마누라 납골당에 넣어두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몇 편이라도 더 써서 수필집도 내고 싶고, 시집도 내고 싶어요. 시도 쓰는데 현재 68편을 썼어요. 시집도 하나 내고 싶습니다.
이양순(요양보호사·61) 올 가을에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옵니다
글은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기록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2005년도에 요양보호사가 된 뒤 만나게 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보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분이셨는데,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은 고스란히 안고 계셨어요. 제가 그 일에 대해 당시 글을 써놓았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수요집회를 TV로 접하다 제가 쓴 글이 생각나서 라디오 방송에 냈어요. 그런데 그게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2013년도였어요. 방송에 채택된 뒤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 쓰는 거 행복합니다. 제 재능에도 놀라고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데 글로 기록해놓으면 안 잃어버리니까 좋고요. 요즘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글감이 좀 많거든요. 아직 미흡해서 걱정입니다. 가을쯤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온다고 하는데 고민됩니다. 물론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광이지요. 부끄럽기도 하지만 기대도 됩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
인간과 인간이 만나 기품 있는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부부가 나누는 대화나 작은 감정표현에서도 우리는 기품을 느낀다. 괴테도 “결혼생활은 모든 문화의 시작이며 정상(頂上)이다. 그것은 난폭한 자를 온화하게 하고, 교양이 높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온정을 증명하는 최상의 기회다”라고 말했다. 이혼은 절대로 용납 못해 졸혼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이혼했지만 다시 만나 사는 부부도 있다. 부부란 참 신기한 관계인 것이다. 여기 부부의 삶을 기품 있게 잘 이어온, 나이가 들어도 아직 끌어안고 잔다는 이강추(82) 성정수(77) 부부가 있다. 이강추씨는 극구 고사해서 아내 성정수씨만 만났다. 사진 변용도 동년기자
50년이 다 되도록 금실 좋은 부부로 잘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처음부터 좋은 금실은 아니었고요. 초기에는 힘겨루기도 했지요. 그랬더니 나만 힘든 거예요. 남편은 끄떡도 않는데…. “문제가 뭐지?” 하며 공부를 했고 대화 방법을 알아갔어요. 차츰 서로의 강점과 취약점을 알게 되었죠. 그것도 구체적으로요. 그 점을 늘 염두에 두고 갈등이 있어도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도록 애썼지요. 주로 내가 먼저요. 그러면 남편도 어느새 스르르 풀렸고.
두 분 성격은 어떻게 다른가요?
남편은 흔히 말하는 모범생으로, 세상의 소금 같은 형이죠. 성실 근면하고 규범과 원칙을 중시해요. 그만큼 책임감은 높지만 새콤달콤 시원한 맛은 없어요. 무덤덤한 편입니다. 반면 나는 열정적이고 상황 적응력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요.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가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일들이 많아 늘 분주하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을 텐데 싸우지 않나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합니다. 각각 자기 할 일, 즉 컴퓨터, 독서, 글쓰기에 몰두하면서 두세 시간씩 보내기도 합니다. 마주하는 시간에는 교회활동이나 사회문제 등 각자가 보고 들은 것을 서로에게 얘기해주며 소감과 의견을 나눠요. 얘깃거리가 많아 싸울 시간이 별로 없어요.
자식농사 잘된 것, 누구의 공입니까?
우리 부부의 공동 합작입니다. 서로의 좋은 점을 닮았으면 했고, 서로가 완충지대 역할을 했어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모습은 남편의 영향이지만, 진로에 어려움이 있을 때 아들이 원하는 길을 과감하게 허용, 해결이 되도록 도운 것은 나의 자녀교육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요. 아들 둘이 남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요. 남편은 날 닮았다 하면서 늘 부러워하는 편이죠. 큰아들은 글로, 둘째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답니다.
50년씩이나 끌어안고 살 수 있는 진짜 힘은 무엇일까요?
남편이 소록도 병원 근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천주교 신자로서 교회활동뿐 아니라 남편의 직장 일에도 관심을 갖고 비서로 수렴청정(?)까지 했어요. 문제가 생기면 늘 같이 의논하고 해답을 찾았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만나면 대화를 하다 보니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요.
가정일은 손실과 실패가 있어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우리는 ME부부(Marriage Encounter, 부부일치운동) 회원으로서 ‘결정은 부부가 함께’를 실천해왔어요. 매일 밤 부부의 기도를 합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못 살 때나 잘 살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게 하라.” 성당에서 혼인할 때 한 서약 내용을 읊조리죠. 천주교의 신앙생활이 부부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래도 남편이 미울 때가 있죠?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때죠. 대개 가치지향적 문제에 견해가 엇갈릴 때예요. 그러나 그런 상황은 잠깐이고, 서로 팽팽히 맞서다가 우리와 직접 관계가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아요.
남편이 미울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나도 약점, 잘못한 것 있는데 ‘저 사람만 탓할 수 있나’ 양심에 호소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미운 감정이 눈 녹듯 녹습니다(웃음).
배우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언제 생기나요?
장례미사에서 떠나는 이를 보거나 내가 건강이 좋지 않을 때죠. 먼저 세상을 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혼자 남아 있을 남편이 걱정되고, 그 외로움이 헤아려져 측은한 마음이 들어요.
이혼을 생각한 적 있나요?
신혼 때였어요. 남편은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지만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아예 입을 닫아버려요. 내 말이 공격적이면 더 심해져요. 불통이 되는 거죠. 결혼 초에는 이렇게 말이 안 통해서 평생 어떻게 사나? 순간 이혼이란 말이 떠올랐어요. 고심 끝에 인간관계 공부를 시작했어요. 부부관계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더군요. 상담 공부를 하면서 직장, 교도소 등 인성교육 집단지도를 하러 다니게 되었어요. 부부관계의 유지는 사랑뿐 아니라 신뢰와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견뎌주고 헤아려주는 남편을 보면 겸손해지더군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에게 고마운 점은?
성당에 가는 발걸음이 한결같아요. 매일 새벽미사에 다니고 성당에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달려갑니다. 남편은 노(No)~ 하는 법이 없어요. 우리 부부는 서로 의논이 잘되는 편이에요. “그렇지, 옳지” 하면서 추임새로 긍정적인 응대를 해주고 내 요청을 웬만하면 다 들어줍니다.
시장에 장보러 같이 가고 병원, 약국도 같이 가요. 영화도 자주 보고요.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인데 내가 좋아한다고 함께 봐주다가 이제는 남편이 더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어요.
남편은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매일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합니다. 또 어떤 일이 있어도 국이 있는 아침밥을 먹어야 하는 남편의 밥상 차리기가 쉽지는 않아요, 남편은 특히 보건복지부 국장 시절에 발생한 사건 때문에 고통을 겪을 때 큰 힘이 되어주었다며 고마워했어요. 그렇게 고마워하니 저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부모에 대한 불평의 항목들을 설정해 자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단연코 1등은 부모의 잔소리가 될 것이다. 부모의 잔소리는 이미 아이들 대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속어가 됐다. 그러나 부모의 잔소리는 품위의 언어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교육도 있겠지만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교육은 더 크다. 양육과 교육은 부모의 성역이다. 임무이고 책임이고 권리이기도 하다. 작은 습관에서부터 행동 지침, 규율, 도덕 등 모든 것들이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육적인 말은 한 번으로 이행되지 않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무한한 것을 바란다. 어렸을 때는 부모를 무한한 능력자로 알고 기대고 명령에 복종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자의식이 생기면서 부모를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부모에게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훌륭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기준이 매우 단순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자녀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다.” 필자가 아직 부모 입장이 아니었을 때는 그 기준이 쉽게 보였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는 당연히 그 부모를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 아들들은 엄마에 대해 불평이 적지 않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칭찬인지 만족한다는 말인지 좋다는 말인지 모호하게 들린다. 사실 필자는 아이들에게 꼭 해줘야 할 교훈의 말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임무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죄책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아이들 붙잡고 잔소리를 좀 해야 하는데 사는 일 때문에 종종 그 시간을 놓치곤 했다. 그러고선 어느 날 와르르 한꺼번에 밀린 잔소리를 쏟아내곤 했다. 그렇게라도 따끔한 한마디를 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 빚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때마다 ‘어? 엄마가 모르고 계셨던 게 아니네?’ 하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반항하지도 않았고 어떤 부분은 인정도 했고 호기심으로 그랬다는 해명도 했다. 아이들은 필자가 자신들을 간섭하는 방식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외출했다가 신호등에 걸린 차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문을 파는 청년을 봤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공부할 때 중요한 시간을 놓치면 저렇게 평생 고달픈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단박에 반박을 했다.
“엄마, 저 사람이 가슴에 무슨 꿈을 품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지금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수 있잖아요. 엄마가 저 사람의 꿈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 저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한 예술가가 될지 과학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열세 살 중학생 아들에게 한 방 맞고 말았다. 맞으면서도 속으론 무척 기뻤다. 한 방 맞을 이유가 충분했다. 필자의 편견과 오만, 현재를 기본으로 내일을 예단하려는 의식이 제대로 들켜버린 날이었다.
한 의사의 말이 기억난다. 수술은 의사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환자에게는 평생 한 번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그 수술이 만약 내 혈육에게 장기를 받는 이식수술이라면 어떨까. 아마 더욱 잊을 수 없는 아픔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술이 두 번 반복된다면? 더욱이 그 대상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들이라면. 마치 통속적인 비극 드라마 같아 보이지만 현실이고, 비극도 아니다. 바로 경희의료원에서 만난 변은옥(邊銀玉·53)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경희의료원 신장내과 임천규(任天奎·63) 교수는 처음 변은옥씨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당시 그는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 중 한 명이었다. 그때는 눈앞의 환자가 어떤 일들을 겪을지, 30년간 자신이 계속 돌봐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변은옥씨가 처음 왔을 때는 스물한 살의 꽃다운 나이였죠. 젊은 미혼 여성인데도 비정상적으로 혈압이 높았던 것이 기억나요. 악성 고혈압이었어요. 검진을 해보니 이미 신장기능이 약 15%정도밖에 기능하지 않았어요. 신장염에 의한 만성콩팥병이었어요. 사구체신염으로 부르는 이 병은 젊은이들이 잘 걸리는 병이죠. 보통은 급성으로 나타났다가 낫는데, 만성으로 진행되면 골치 아파지죠.”
변씨가 경희대를 찾은 것은 1984년 9월이다. 사실 그녀는 다른 병원을 먼저 들렀다 왔다고 했다.
“서대문구청에 취업한 지 얼마 안 돼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혈압이 너무 높다고 이상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근처에 있는 큰 병원을 갔는데 신장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얼마 못 살 것 같다고 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는 것이 낫겠다 싶어 생각한 곳이 삼촌이 수술받았던 이곳이었어요. 임천규 교수님을 그때 처음 뵈었는데, 마음이 편안하도록 말씀도 잘해주시고, 용기를 낼 수 있게 응원해주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요.”
처음 병원을 다닐 때만 해도 변씨는 몸의 이상을 크게 자각하진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점점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이명이 들리는 등 상태가 나빠지면서 실감이 났다고. 당시에는 잘 알려진 병이 아니어서, 주위에선 어차피 살 가망이 적지 않겠냐며 수술을 말리는 사람도 있었단다.
꽃다운 처녀에게는 힘든 수술
이식수술이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다. 사실 효과로 따지면 신장이식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수술을 주저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임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수술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었어요. 몸에 칼을 대버리면 흉터도 남고, 혼삿길도 영영 막혀버린다는 인식이 있었죠. 게다가 기증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어요. 요즘은 그래도 뇌사자 장기기증이 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인식도 좋아져서 기증자를 찾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당시는 남에게 신장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약물치료를 시작했고, 그것이 큰 효과를 내지 못하자 투석을 시작했다. 하지만 투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변씨는 이야기했다.
“결핵이 있어서 그것을 치료해야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핵이 나을 때까지 6개월을 투석했는데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니었어요. 투석을 하고 나면 몸이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어요.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리죠.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어요.”
혈액 투석에 대해 임천규 교수는 “사실 혈액 투석은 정상적인 신장기능의 10~15% 정도만 대신할 수 있어요. 일주일에 세 번, 네 시간씩 꼬박꼬박 투석을 받는다 해도, 혈액 속 노폐물은 늘 80% 이상 쌓여 있다는 얘기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독만 제거하는 셈이에요. 신장이식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어 투석을 평생을 해야 하니 환자 입장에선 무척 번거롭고 힘들죠. 특히 젊은 여성에게는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내 딸 살리겠다는 어머니의 결심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너 죽는 꼴은 못 본다.”
변씨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건강한 신장이 두 개나 있는데, 당신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선언한 것. 그렇게 이식수술은 결정됐다. 1986년 6월 9일이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수선하던 시기. 그녀도 그녀 나름의 치열한 투쟁의 시기를 수술대 위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모두의 기대대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변씨는 당시를 “수술을 마치고 나서 눈이 떠지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었어요. 엄마의 것이 내 몸속에 있다는 느낌,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복잡한 감정이었죠”라고 회고했다.
사실 변씨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병을 심하게 앓았고, 몸에는 커다란 생채기까지 있었다.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감히 남편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하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엔 예외가 없는 것인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제 상태가 이 모양이니까 데릴사위라도 들일 생각까지 하셨어요. 그러다 남편을 만나 1년 연애를 했는데, 제 사정에 대해 모두 이해해줬어요. 애가 생기지 않아도 좋다고까지 얘기해줘서 결혼을 결심했죠.”
그리고 그 결실로 아들 김영수(金泳洙·26)씨를 얻는다.
30년 만에 다가온 또 다른 시련
평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볕이 좋은 날엔 빨래를 해서 널고, 점심 설거지를 끝내면 저녁 메뉴를 걱정했다. 모임에 나가 수다도 떨고, 특별히 기분 좋은 날엔 술도 약간 입에 댔다. 아들은 경찰을 꿈꿀 정도로 바르고 강직했으며 가족이 의지할 수 있는 집안의 기둥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또다시 탈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궁이 말썽이었다. 결국 5년 전 자궁을 적출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 출혈이 많았던 탓일까. 신장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임 교수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투석이었다.
“또다시 투석을 받아야 한다니 끔찍했죠. 하지만 다시 이식수술을 할 순 없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 1월에 투석을 위한 동정맥류수술을 하고 나서, 4월부터 투석을 시작했어요. 그래도 30년 전보다는 장비가 좋아져서 좀 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반대로 저혈압이 오고 몸이 빠르게 무너져버리더라고요.”
이 과정을 편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한 사람이 있다. 이젠 성인이 된 아들 영수씨다. 그는 어머니의 간호를 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의 인터뷰를 곁에서 말없이 바라만 보던 그에게 질문을 하자 다소 상기된다. 젊은 혈기와는 다른 뜨거운 무엇이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환자인 어머니의 모습이 익숙했어요. 계속 봐왔으니까요. 그때부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처럼 나도 어머니에게 신장을 드려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요. 다만 시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죠. 하지만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다짐이라 문제가 생기고 나서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전혀 고민도 없었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신장이식 기증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수술 후기도 보고, 이식수술에 대해 직접 공부하면서 전혀 겁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어머니랑 함께 찍은 사진이 별로 없더라고요. 어머니 건강이 회복되시면 봄에 제주도에 같이 다녀오려고요.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요.”
네 개의 신장이 준 꿈과 희망
신장이식은 고장 난 오일필터를 교체하는 자동차 정비와는 다르다. 수명을 다한 부품은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지만, 신장이식은 원래의 신장을 떼어버리지 않는다. 기증받은 신장을 몸에 더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임천규 교수는 변씨의 경우 어머니의 것을 받았다가 다시 아들의 신장을 받았으니 4개의 신장을 몸에 지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신장이식은 기본적으로 수명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변씨의 경우는 이식 환자들 중에서도 오래 사용한 편이에요. 게다가 나이든 어머니의 신장을 이식받은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죠. 두 번 신장이식을 받는 케이스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이식을 받고 싶어도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신장이식이 과거와 많이 달라진 부분은 이식의 거부반응을 줄이는 면역억제제가 좋아져서 꼭 기증자가 가족일 필요도 없고 혈액형이 같을 필요도 없어요. 심지어 수혈이 불가능한 혈액형끼리도 신장이식은 가능해요.”
현재 대한고혈압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임 교수는 고혈압 환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고혈압은 신장질환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고혈압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신장의 소금배설 기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혈압이 높은 편이라면 신장을 잘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식 환자들은 늘 불안하게 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무조건 재미있게 살고, 걱정하지 말고, 약만 제때 드신다면 몸은 나아질 겁니다.”
처음 신장이식을 받은 지 딱 30년이 되는 해인 2016년 9월 21일, 변씨는 두 번째 신장이식을 위해 수술대에 누웠다. 이번에는 아들과 함께였다. 결국 아들의 성화에 그리고 투석의 고단함이라는 현실을 이기지 못했다. 결정을 내린 뒤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변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사실 이 질문을 던지러 왔는데, 꺼내기가 쉽지 않다. 아들의 신장을 받은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 가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안한 마음이 제일 컸어요. 가족이라고 모두 신장을 선뜻 내어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투석실에 앉아 있으면 자식을 원망하는 부모들을 심심치 않게 보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먼저 수술을 하자고 적극적으로 권해줘서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어요. 수술을 여러 번 했는데도 별 탈 없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느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분을 위해서 좋을 일 많이 하고 살 겁니다.”
죽음을 준비해본 적이 있는가? 언뜻 생각하면 법적인 몇 가지 절차를 제외하면 구체적으로 생각나는 준비가 없다. 평생 모아온 재산만 잘 물려주면 그만인 걸까. 죽음은 경험자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최근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관심받는 분야는 바로 임종학(臨終學), 즉 싸나톨로지(Thanatology)다. 싸나톨로지는 주로 국내 대학의 평생교육원을 통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이들 대학 중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을 통해 싸나톨로지에 대해 알아봤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싸나톨로지 과목의 정식 명칭은 ‘죽음교육 전문가’다. 이 강의를 책임지고 있는 신경원(申瓊媛·54) 강사는 싸나톨로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싸나톨로지는 통섭학문(統攝學文)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심리학이나 인류학, 신학 등 모든 학문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일이지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이 통합된 학문입니다. 종교적 관점도 중요한데 특정 종교를 주제로 하진 않아요. 때문에 여러 종교에서 연구를 위해 오시고, 그 과정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을 알 수 있기도 하죠. 함께 의견을 나누고 연구하다가 각자의 종교로 돌아가서 그들만의 언어로 해석이 되는 셈이죠.”
싸나톨로지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죽음’을 강조했다.
“이끌려가는 죽음이 아니라, 내 죽음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에요. 물론 ‘주체적’이라는 뜻은 자살은 아니에요. 죽음을 거부하고 무서워해서 벌벌 떨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리면 내 삶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허겁지겁 아프기만 하다가 간다면 얼마나 많은 회한이 남겠어요.”
싸나톨로지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 많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의료인이나 종교인, 심리상담가, 시니어 대상의 교육자 등으로 죽음을 곁에서 자주 대하는 직업군들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호스피스와 다른 부분은 호스피스는 임종을 눈앞에 둔 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실천적 활동이라면, 싸나톨로지는 호스피스 영역을 포함한 이론적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적 이유로 이 학문을 공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신 강사는 교육 과정에서, 도외시하고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지고, 이러한 변화가 삶과 사람의 가치, 진정한 삶을 생각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것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싸나톨로지와 관련해선 미국의 교육단체 ADEC(Association for Death Education and Counseling)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싸나토로지협회가 민간자격제도를 운영 중이다. 또 대한웰다잉협회, 각당복지재단 등 웰다잉을 연구하는 다른 몇몇 단체들도 이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강의는 생애주기에 따른 사별이나 동양사상에서 본 죽음, 호스피스와 완화치료, 상실, 임종환자를 위한 음악·철학치료 등 다양하다. 2000년대 초반 웰빙 바람을 타고 유행됐다가, 그 시기에 입양된 동물들이 수명이 다할 시기가 돼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반려동물 상실도 다룬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은 무엇일까? 좋은 죽음과 그 대비법에 대해 신 강사는 이렇게 조언한다.
“주체적인 죽음을 위해서는 나의 의지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시기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경제력이나 신체적인 상황이 받쳐줄 때 가능한 것이죠. 그렇게 서서히 준비해가면서 내 인생에 몰입하며 즐기는 삶을 사세요. 보통은 자기 이름을 빨간 글씨로 쓰는 것조차 무서워할 정도로 죽음을 외면하려 하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영혼의 무게를 풍요롭게 해줄, 에필로그와 같은 마지막을 계획해보세요.”
미니 인터뷰 수강생 고원철(65)씨
“우울증 벗어날 수 있는 계기돼”
죽음교육 전문가 과정에서 만난 고원철씨는 사회복지활동을 하는 지인을 통해 이 교육을 알게 됐다고 했다. 원래 대학병원에 교재를 공급하는 사업을 했다는 그는 1986년 겪은 큰 사고가 죽음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어요. 꽤 큰 사고여서 여섯 시간 만에 겨우 깨어났어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죽음이란 것을 체감하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죽음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 우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반대라고 단언했다.
“원래 은퇴 후에 농사를 조금 지으면서 지냈는데, 그때 우울증이 왔어요. 그러다 이 수업을 듣게 됐고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임종을 맞게 된다면 어떨지 예측할 수 있게 되어 막연한 두려움도 사라졌죠.”
그는 매주 배우는 강의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정치 얘기나 비슷한 잡담만 하다가 시간을 허비하잖아요. 이 과정을 듣고 나서는 화제도 다양해지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어서 좋아요.”
마지막으로 고씨는 또래의 시니어들에게 싸나톨로지를 추천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 비슷한 입장일 거예요. 연로한 부모를 모시거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 혹은 자살을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분들이 감상적으로 젖어들지 말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런 교육이나 공부로 이겨내면 좋겠어요.”
은퇴하면서 비로소 종합건강검진 기회를 가졌는데, 암 검진에서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말수가 적은 의사는 “조기 발견으로 암세포를 제거해 천만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의사의 묵직한 한마디에 새 생명을 얻었음을 실감했다.
은퇴와 종합검진
필자는 5년 전 은퇴했다. 샛별 보면서 집을 나와 달빛을 벗 삼아 귀가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방학을 한 학생처럼 해방된 기분이었다. 은퇴 후의 장년은 건강관리가 제일 중요하다는데, 무엇부터 챙겨야 하나? 건강검진기록부터 살폈다.
국가검진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나이를 감안해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으라는 권유를 받긴 했지만 바쁘고 검사 과정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다. 은퇴 후 비로소 필자를 돌보는 황금 같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퇴임 전 종합검진 예약을 했다. 그리고 퇴임 며칠 후 암 검진을 받았다.
대장암 발견과 치유
대장내시경 검사 결과 용종 1개와 선종 3개가 발견되어 제거 시술을 했다. 2주 후 상쾌한 기분으로 검진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담당의사가 정색을 하면서 “선종 한 곳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귀를 의심했다. “아차!” 뭔가 심각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배가 아프거나 자각 증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더니 “암은 증상을 느끼면 이미 늦다. 조기 발견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암세포는 추가로 발견되지 않았고 시술 부작용도 없으니 안심하라. 치료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주기적인 추적 관찰만이 필요함을 친절히 설명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필자에게 유일한 위안의 말이었다.
‘암환자’라는 사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뱃속에 시한폭탄이 들어 있어 곧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병원에 가는 동안에는 뱃속이 뒤틀리고 쑤시다가, 별 이상이 없다는 검진 결과를 들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졌다. 대장암과 함께 위장·방광·당뇨·전립선과 갑상선도 암 전이 가능성 때문에 검진을 했지만 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스런 결과에 위안을 받으면서 암 극복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암세포 제거 시술 후 어느덧 5년이 다 되어간다.
봉사하면서 사는 새 삶
앞으로 살아갈 세월은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사회로부터 얻었던 소중한 은혜를 후세대에 되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회평생교육기관에서 시민강좌 강의와 청년창업 멘토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백 마디 말보다 작은 실천 하나가 진정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숭고한 정신으로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시청·구청과 사회평생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평생학습·교양강좌를 찾아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손주에게 들려 줄 새 이야기’도 배운다. 은퇴 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 꾸준하게 등산도 한다. 아무리 건강에 좋은 운동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등산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건강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준 은퇴에 감사한다.
‘수십 통의 전화도 이젠 스팸 문자 달랑 세 통. 식탁 내 자리는 아내가 차지했네. 아이고 내 신세. 장롱 속에 철 지난 옷들, 통 넓은 양복바지 저 주인이 누구였었나 이젠 짐 덩어리. 아~ 지나간 시간, 아~ 그리운 시간, 있을 때 잘할걸, 퇴근 후 2시간’ 정기룡(鄭基龍·59) 미래현장전략연구소 소장 겸 삼성에스원 충청 상임고문이 작사한 노래 ‘퇴근 후 2시간’의 가사다. 노래 속 그의 어깨는 처져 있지만, 이제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현역 때 못지않은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다. 지금의 행복한 시간이 있기까지, 그의 두 번째 인생 시계는 10여 년 전부터 돌아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0년 그가 대전 서부경찰서에서 수사과장으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전 보문산에 경찰 서류 800건이 버려져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 관내가 아니니 문제없다”고 보고했던 그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자신이 소속된 대전 서부경찰서의 수사과 서류였다. 한 직원이 사무 감사를 앞두고 업무에 부담을 느껴 서류들을 산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일로 담당 직원은 구속되고, 당시 서장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나가자 그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내가 걱정하면서 ‘중징계 먹으면 퇴직해서 다른 일을 알아보라’ 하더라고요. 정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막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거예요. 뭘 해야겠다는 답도 없고.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언젠가는 정년이 올 거라 생각하니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당시 그의 나이 마흔셋. 퇴직 후를 생각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금 떠올리면 그때 그런 마음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는 정 소장이다. 사건 이후, 그가 대전 정부청사 경비대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확실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후배 경위가 어딜 바쁘게 가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학원에 요리 배우러 간다더라고요. 언제까지 경찰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정년 이후를 생각해서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한다면서요. 후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동안 뭐하며 시간을 보냈나 싶었죠. 퇴근하고 나면 소주 한잔하고, 집에 가면 티브이 보고 쉬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찾아 시작하기로 했어요.”
제과·제빵, 떡, 두부 배우기에서 노무사 준비까지
그가 근무하던 대전에는 ‘성심당’이라는 유명한 빵집이 있다. 근처 성심당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한 그는 퇴직 후에 근사한 빵집 주인을 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1년 3개월을 투자해 자격증까지 따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렵게 자격증을 따고 학원 원장에게 ‘제가 빵집을 차리면 빵이 잘 팔릴까요?’라고 물어봤죠. 근데 ‘요즘은 프랜차이즈 빵집이 대세라 개인 빵집은 문을 닫는 추세다’라고 하는 거예요. 미리 알려줬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래도 한번 해보고 나니 다른 것도 해볼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떡집에 찾아가서 떡도 배우고, 손두부 가게에 가서 두부 만드는 법도 배웠죠. 콩 가는 기계도 사고 솥도 걸었는데 집에서 하려니 잘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니 지금까지 했던 것들로는 전혀 승산이 없겠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사’자가 들어간 직업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노무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말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에 다니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지만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는 영어 점수 때문에 결국 그만둬야 했다. 빵을 배우기 시작해 노무사 자격증을 내려놓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자격증을 따느라 들인 돈만 해도 수천만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격증만 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얼마고 쓴 돈이 얼마인데. 근데 그거보다 더 속상한 게 이런 고민을 같이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는 멘토가 없다는 거였어요. 그러다 아내가 데일카네기연구소에서 하는 리더십 강의를 받으라고 권유했죠. 3개월에 24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야 해서 망설였는데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도 투자 못 하느냐’고 해서 결국 마음먹고 등록했어요.”
3개월간의 리더십 과정을 이수하고, 4회 코치를 하고 나면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코치 마무리 과정까지 총 2년이라는 시간을 들이고도 강사 실습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 그때 나이 쉰,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 포기하는 순간 이혼이야. 지금 과정 수료 못 하면 당신 평생 후회할 거야!”라는 아내의 협박(?) 덕분에 강사 과정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년퇴직 후 ‘이제 강사로 활동하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공무원 교육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진행자가 저를 ‘프리랜서 정기룡씨’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이전에는 명함 한 장이면 나에 대한 소개가 끝났는데, 퇴직하고 나니 한 30분 정도 내가 무엇을 했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해야 했어요.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니 아내가 차라리 연구소를 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그렇게 ‘미래현장전략연구소’를 만들고 새 명함과 직책이 생겼어요. 소속감, 명함 등 현역에 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인데 퇴직하고 나니 그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아침마다 하던 ‘다녀올게’라는 평범한 인사도 그런 것 중 하나였죠.”
아내의 꿈을 키워주는 것도 은퇴 준비
정 소장은 퇴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가 앞으로 어떤 명함을 쓸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어떤 명함이 나의 얼굴이 될지 상상하면 마음이 그곳에 가기 때문에 은퇴 후 계획을 세우는 데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다고. 물론 그에게는 ‘아내의 강력한 조언’ 역시 동기부여 역할을 했다. 그렇게 인생 2막을 준비한 것은 정 소장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뭘 해도 같이 배우고 함께하자고 약속했어요. 아내는 결혼하고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제가 은퇴 준비를 하면서 한 가지를 하면 아내도 무엇이든 한 가지를 시작했죠. 분야는 다르지만 자격증 공부도 같이하고 석사, 박사 과정도 동시에 이수했어요.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됐죠. 최근에는 사회복지사를 준비했는데 부부가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계획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아내의 재능을 발견하고 역량을 키워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노후의 삶은 경제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주체가 자신이 아닌 아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꽃을 좋아한다면 꽃꽂이를 배우거나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서 꽃가게를 차리도록 도울 수도 있고, 요리를 좋아하면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강사로 활동하게끔 지원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보다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그만큼 성과도 빠르게 나타난다.
반대로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시간을 할애하는 게 벅찰 수 있다. 야근과 회식이 잦은 우리 직장인들에겐 더욱 엄두가 안 나는 일이기도 하다. 정 소장 역시 이러한 이유로 ‘퇴근 후 2시간’ 투자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은퇴 후 직업을 찾는다고 해서 현재의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죠. 맡은 바 업무를 다 하고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려면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해요. 나는 경찰서장이 되면 절대로 회식이나 무리한 야근으로 직원들의 저녁시간을 빼앗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축하할 일이 있거나 논의할 문제가 있으면 점심시간을 활용하고, 퇴근 후엔 각자 취미활동을 하라고 권했죠. 그렇게 11년을 생활했는데 오히려 직원들도 업무시간에 더 충실한 태도로 임하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수혜자는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나였죠.”
퇴직 후 20년 준비 완료, 이제는 나이 드는 준비 중
수많은 수험서와 빵 굽는 오븐, 두부 가마솥 등은 지난 꿈의 산물로 남아 있다. 은퇴 설계 전문 강사로 활동하는 그에게는 실패의 잔상과도 같지만, 그때의 경험은 그가 하는 강의의 좋은 재료로 쓰인다.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그이기에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도 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그가 고군분투하던 시절 필요로 했던 ‘멘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보람도 더욱 크다. 직장생활에 한계가 있듯, 지금의 삶 역시 유한할 터. 그는 이제 노인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혜롭고 너그러운 노인이 되기 위해 세 가지를 연습하고 있어요. 첫째는 내려놓는 것인데, 내가 가진 것이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거죠. 둘째는 의존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배우자 없이도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식 또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준비를 해야죠. 마지막으로는 신앙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두려워하죠. 이를 초월하고 소멸에 대한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하려면 무엇이든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강사로 활동하며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는 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내년 3월이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는 그는 이전부터 롤모델로 삼은 이찬수 목사의 설교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매일 연습한다고 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노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골고루 하고 있는 셈이다.
“은퇴 준비 하면서 피아노도 배웠거든요. 시골 교회에 가서 직접 반주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사회복지사랑 직업상담사 자격증도 땄으니 어려운 중·장년을 위해 직업상담을 하는 것도 좋겠고요. 사실 아들이 신학대학을 다닌다고 하니 아내가 ‘당신은 신학대학원이라도 다녀서 아들에게 도움을 줘야지’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아들이 진로를 바꾼다지 뭐예요. 그래도 덕분에 또 다른 꿈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날 인생 1막에서 인생 2막으로의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용도변경’이라는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통해 활기찬 후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용도변경’은 필자의 이름 ‘변용도’를 원용해 만든 단어다.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도(用途)와 한글 표기는 같다. 필자는 이 단어로 가족을 위한 그동안의 헌신적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또 생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두었던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47세의 조기퇴직, 금융위기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사진작가, 강사로 거듭나 현재는 인생이모작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손해보험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는 이후에도 보험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지금은 평생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오늘 들려드리려고 한다.
47세에 용도 폐기되다
필자는 대학교 졸업 직전 고려화재해상보험에 입사해 20년을 다녔고 촉망받는 직장인이었다. 20년 전에는 임원으로서 부산·경남 본부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말에 해임되었다.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 즉 용도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름에 빗대어 ‘용도폐기’되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금융위기(IMF)까지 닥쳐 재취업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밥벌이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다. 만화방으로 시작해 부대찌개 음식점까지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월 40만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 조경관리사로 취업해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회사 마당을 쓰는 마당쇠 역할도 했다. 일당을 벌으려 MBC 드라마 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퇴직 후 10년간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용도변경된 삶을 살기로 하다
필자의 나이 57세 때 두 친구를 갑자기 잃었다. 모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느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퇴직 후 잡다한 일을 하며 보낸 10년을 되돌아보았다. 분명 열심히 살았으나 세월만 쏜살같이 지나가고 내로라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두 친구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100세 장수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람 있는 후반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40,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후의 긴 시간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삶이었고, 타인을 위한 용도, 즉 타(他) 용도로 사는 삶이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인공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필자는 먹고사느라 오래전에 접어둔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꿈을 실현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사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언덕배기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꿈과 유사한 사진으로 바꾸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인생 2막의 길이었다.
60세에 늦깎이 사진작가가 되다
필자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웠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채화를 자주 그렸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직장에서 홍보 업무와 사보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흥미를 키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6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진을 배울 용기를 가졌던 것 같다. 2010년 7월, 필자는 고양시 무료사진 교실에 참여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초보자 솜씨에 카메라 장비 또한 콤팩트 카메라가 전부였다. 함께 공부한 다른 수강생의 고가 카메라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과 형편을 인정하고 사진 실력 향상에만 몰입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부터 공인 사진작가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인 사진작가 인증을 받으려면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이나 입상으로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이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 년에 스물여덟 번 응모해 절반을 낙선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1년 9월에 드디어 인증을 받아 공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해 국전에 입선했고 부산일보가 주최한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작품 ‘닭장’이 좋은 심사평으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사진 부문에서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으로 뽑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40만장을 찍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6년 4개월을 매일같이 사진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는 무려 40만장에 이른다. 역산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200여 장을 찍어야 나오는 숫자다. 어느 날은 파파라치로 오인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좌절과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몰입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4일에는 KBS 1TV 에 사진작가로 출연함으로써 삶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은퇴연금협회와 머니투데이 방송이 주최한 ‘The Senior 2016’에 사진 전시 초대를 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을 주제로 사진을 전시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는데 작품 모두가 팔려나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진을 바탕으로 명강사에 도전장을 내밀다
카메라를 들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짧기만 하다. 이제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카메라는 필자의 또 다른 친구다. 100세 장수시대가 두렵지 않다. 은퇴 전의 직업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결과가 됐다. 이후 필자는 사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영역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통한 여가관리의 모범적 사례가 되면서 그 경험을 배우려는 퇴직 예정자와 은퇴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62세에 또 다른 분야인 강사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여가설계, 변화관리 강사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보다 강사로서의 활동이 더 많아져 기업체와 국가 산하 인력개발원,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사회종합복지관 등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 SBS라디오 러브에프엠의 프로그램에 3년간 고정 출연, 토마토TV와 머니투데이 방송에서 특강, 한국직업방송 로 출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을 기회로 전환하는 ‘용도변경’의 삶이 성공의 핵심
필자는 사진작가, 강사로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제2직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전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과거를 내려놓고 현실을 인정하며 몸집 줄이기(다운사이징)로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 ‘용도변경’의 생활 방식이 성공의 핵심 역할을 해줬다. 뱀이 고통을 참으면서 허물을 벗어야 살아갈 수 있듯 환경 변화에 대한 꾸준한 자기 변신, 즉 용도변경을 통한 2차 성장은 인생 2막의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라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다.
베풀고 나누면서 다 쓰고 가리라
필자의 오늘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은혜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은혜에 보은할 할 때라 여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베풀고 나누는 사회공헌을 위해 또 다른 용도변경, 즉 ‘공(公)용도’를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의 하나로 두 권의 책, 와 를 출간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음을 느낀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필자의 소소한 경험담이 같은 길을 가려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