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제법 각오하고 공자의 를 뒤적였던 적이 있다. 지금은 거의 생각나는 구절이 없지만, 첫 문장은 기억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문장이다. 당시 해석에는 “배우고 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로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늘 배우고 익혔으나 재미는 별로 없다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선생님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며 “봐라! 공자님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셨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니?”라고 나무라시면 그저 우리가 잘못했으려니 하고 열심히 공부할 각오를 다지곤 했다. 말하자면 공자님도 우리처럼 입시 공부를 하셨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대학입시가 없었을 텐데 도대체 공자는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는 말인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필자가 나이 환갑을 넘기면서부터다. 공자님이 60세의 나이에 ‘이순(耳順)’이라는 의미를 붙이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헤아리다가 나온 위대한(?) 의문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공자님이 나이에 붙인 의미들이 논어 첫 구절의 내용과 은밀히 상통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공자님은 나이에 따른 학문의 과정을 언급하며 15세에 ‘지우학(志于學)’ 하고, 30세에 ‘이립(而立)’ 했으며, 40세가 되니 ‘불혹(不惑)’ 하게 되고, 50이 되니 ‘지천명(知天命)’ 했으며, 60세에는 ‘이순(耳順)’의 경지에 이르고, 70세가 되니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 不踰矩)’라고 일렀다.
어릴 땐 이런 의미들을 학문하는 사람의 십계명인 줄로 이해하고 한번 그대로 해보려고 달려들었다가 30세가 지나면서 대부분의 열정이 ‘이립’도 못하고 시들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니 ‘불혹’이니 ‘이순’이니 하는 말들이 제대로 다가올 리 없었다. 그저 40세가 되면 바람을 안 피우게 되나보다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기다렸을 뿐이다.
그런데 환갑을 지나면서 이런 의미들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다시 공자가 한 말뜻을 더듬어보니 사람이 살면서 깨달아가는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나이 60을 넘기면서 조금씩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옛날 같으면 발끈하게 만들었을 말도 조용히 듣게 되고 요즘 유행어로 “그럴 수 있지” 하며 넘기게 되더란 말이다. 이게 바로 ‘귀가 순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40이 되면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50세 정도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정도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다시 말하면 철이 든다는 뜻이겠지. 70세가 되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도덕 법칙에 맞는다는 말은 그 나이가 되면 지혜로운 경지에 올라 세상을 통찰하고 남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해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공자님 시대에 입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니 그의 공부 주제는 바로 ‘세상 공부’, ‘사람 공부’였던 셈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김형석 교수가 70이 넘으니 인생을 알게 되더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지금까지 우리는 평생 인간을 공부해온 것이며 이 공부가 경지에 오를 때 노년이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인생 후반전에서 만나는 취미활동은 이전의 취미들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유희를 통한 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공백을 대신하기 때문. 그래서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은퇴 후 갖게 된 취미를 ‘제2직업’처럼 소중히 여긴다. 또 자신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취미를 찾아낸 은퇴자들은 종종 취미를 ‘두 번째 인생의 반려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동안 가 만난 시니어들은 어떤 취미로 인생의 반전을 이끌었을까?
“옻칠 공방으로 창업해요” 이수매(李秀梅·63)씨
이수매씨가 옻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남부기술교육원의 옻칠나전학과를 통해서다. 옛 문화재를 보며 전통공예의 매력에 빠졌다는 이씨는 규방공예를 거쳐 옻칠까지 배우게 됐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는 이수매씨는 “외국인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그간 우리가 겪었던 희로애락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무언가 배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좋겠어요”라고 당부했다.
“그림으로 외롭게 사는 방법 배웠죠” 윤성호(尹性浩·65)씨
그가 송파의 한 화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었다. 하지만 열정은 욕심을 만들어냈고, 욕심은 많은 연습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은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도 됐다.
“붓을 잡고 세 번째 인생 살아요” 하효순(河孝順·67)씨
하효순씨의 그림 사랑은 수집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뉴욕의 갤러리에서 종일 멍하니 그림만 보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도통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선물받은 컬러링북에 색칠을 반복하다 직접 그려보겠다는 용기를 갖고 근처 화실을 찾게 됐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겪은 변화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지금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취미로 유년 시절의 꿈 이뤘죠” 윤민용(尹民鎔·80)씨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유년 시절 어린 마음에 이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교육을 통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 것. 물론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의 해설은 이제 칠장사(七長寺)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朴文秀)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와 함께 명물이 되었다.
“수영은 이제 삶의 일부죠” 서은희(徐銀姬·58)씨
그녀의 수영 경력은 올해로 25년. 과장해서 표현하면 사반세기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적으로 접어들 무렵 동네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아직도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고 있다. 오랜 기간 수영을 해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취미 덕분에 교우의 폭 넓어졌죠” 김호영(金好榮·72)씨
평생 교직에서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김호영씨. 그는 교직에서 은퇴하기 직전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갑작스런 건강의 이상 증세와 은퇴는 그를 바로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취미를 찾다 어릴 적부터 관심 있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문화센터에 교육과정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시작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 불타올랐던 교직생활처럼 그의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지금은 문화센터 기타반 반장까지 맡게 됐다. 그가 꼽는 취미로서의 연주가 갖는 최고의 미덕은 봉사활동이다.
“치매센터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연주를 통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보람을 찾게 됐어요.”
“평발 이겨내고 마라톤에 중독됐죠” 김학윤(金學倫·58) 원장
42.195km의 마라톤 완주만 어림잡아 90회 이상.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하루에 뛰는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 코스는 네 번이나 달렸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선배 덕분이다.
“어느 날 의사 등산모임에서 훨씬 나이 많은 선배에게 뒤처지는 거예요. 비결을 물었더니 마라톤이라더군요. 그래서 바로 시작했죠.”
평발인 그에게 고통은 따라다녔지만, 조금씩 참고 극복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다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그의 관심은 마라톤에서 수영, 자전거로 옮겨가며 ‘아이언맨’이 되었다.
50세가 넘으면 몸 이곳저곳이 고장 나고 아프기 시작한다. 배불뚝이에다 운동 부족으로 계단을 오를라치면 금방 숨이 차오른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나이를 의식하게 되고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다. 대안으로 헬스장을 찾기도 하고 등산도 해본다. 더러는 탁구나 배드민턴 같은 운동에 얼굴을 내밀어보는 등 마음이 급해진다.
그러나 신체의 지구력이나 민첩성은 젊을 때와 다르다. ‘왕년에는 내가’ 하는 의욕만으로 덤비다가는 운동 효과를 보기 전에 몸부터 다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몸도 정신을 받쳐줘야 한다. 안 그러면 작심삼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건강을 챙기는 운동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이든 운동이든 뭐든 일찍 시작해서 나쁠 것 없다. 20대부터 자신의 신체와 적성에 맞는 운동을 한 가지씩은 챙겨 꾸준히 하면 평생 자신만의 특화된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 나이가 들어도 충분히 즐기며 건강을 챙길 수 있다.
서양 선진국 국민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만의 스포츠를 하나씩 선택해 평생을 즐긴다고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눈만 뜨면 순위 경쟁에 내몰리고 대학 입시에 올인하느라 미래의 건강을 걱정할 틈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체육부나 교육부에서는 엘리트 선수들을 위한 스포츠 못지않게 국민들의 건강을 도모하는 생활 스포츠에도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희망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 정책 탓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직장에 들어가고 생활이 안정되는 30대에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운동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필자는 운 좋게 30대에 직장 테니스 서클에 가입했다. 테니스를 평생 스포츠로 간직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고, 필자를 이끌어준 선배들이 늘 고맙다.
세상사 어떤 일이든 오래 지속적으로 하려면 적성에 맞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흥미롭고 즐거워야 한다. 운동을 할 때는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승부에 집착하면 몸과 마음을 다친다. 필자와 젊은 시절 테니스를 함께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나갔다. 승리게임보다 패배게임이 많아질수록 스스로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다 떠나갔다.
운동은 오래하려면 마음을 비우고 지는 것에 이골이 나야 한다. 필자보다 운동신경이 좋고 선천적인 신체조건과 자질이 있는 사람들은 늦게 입문해도 필자를 뛰어넘어 고수의 길로 갔다. 지고 나서 기분 좋은 사람은 없지만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승부의 세계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건강으로 하는 스포츠라면 지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한때 밀림을 호령하던 사자도 이빨이 빠지고 늙어지면 하이에나에게도 내쫓김을 당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필자는 스포츠에는 워낙 둔재여서 시합에서 지는 것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받아들인다. 이러한 여유가 필자를 아직 운동장에 남아 있도록 해준 것 같아 가끔 너털웃음을 짓는다.
프로선수들이 경기 중 큰 점수로 앞서가면서도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때 강하게 어필하는 모습을 볼 때 다 이기고 있는 승부에서 한두 게임 져줘도 될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할까 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프로는 목숨을 걸 정도로 악바리 승부근성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이 들어 건강을 위해서 하는 운동은 승패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오래할 수 있다. 승부에 대한 집착은 마음을 다치게 하고 결국 운동에 싫증을 내게 만든다. 나이 들수록 운동을 통해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해지면 만족해야 한다. 이기려고 무리하다가 몸이라도 다치면 큰일이다.
건강하게 운동을 오래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자기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선택하고 승부에 연연해하지 않고 지는 것에 관대해져야 한다. 특히 동호회 회원들에게 나이를 앞세워 군림하면 안 된다. 한발 뒤에 서 있겠다는 양보정신이 있어야 오래도록 즐겁게 건강운동을 할 수 있다.
마치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그 강은 사람들이 쉬이 찾지 않는 산속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길을 내어 고고히 흘러가는 강이다. 한 시간 동안 윤석화와 인터뷰를 끝내고 든 느낌이다. 42년간 활동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배우로서,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늦깎이 엄마로서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그런 엄격함이 빚은 솔직한 결론들을 청명한 울림으로 던져줬다. 배우와 모성에 대해 그리고 고난을 감히 축복이라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윤석화는 인터뷰하는 동안 쑥스럽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리고 아직 사진 찍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의외다.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인을 꼽으라면 항상 첫 손가락에 들어갈 그녀가 사진에 익숙하지 않다니?
“연극배우란 것이 늘 배역에 대해 면밀히 연구한 후 제 마음속에서 새로이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 저한테 그 인물을 오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어찌 보면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 제가 처음부터 꿈이 모델이었다거나 어찌어찌하다 모델이 됐다면 이렇게 쑥스러울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미련한 작업에 익숙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게 굉장히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웃음), 아주 쑥스러워요 정말.”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소녀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 윤석화의 어린 시절 꿈은 다름 아닌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꿈도 어느 정도 이룬 그녀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지 올해 42년. 불꽃같은 ‘돌꽃’ 윤석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론 저에겐 소망이 있죠. ‘무대에서 참 아름다운 배우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저 자신은 속이기 힘들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작품을 선택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왔어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늘 똑같아요. 어떤 때는 제가 참 괜찮은 배우 같고, 어떤 때는 이렇게 해도 되나 싶고.”
그녀의 토로에는 살아온 시간에서 증명되는 모종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여전히 현장에서 뛰는 배우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녀는 ‘속도야 달라지겠지만 은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배우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나 좋을 수는 없고 언제나 나쁘지도 않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아직도 배우 윤석화에게 하고 싶은 역할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제는 한계가 있는 것도 인정을 해야겠죠. 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에요.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저의 식지 않은 열정을 얘기하죠. 예전에는 어떤 작품을 꿈꾸게 되면, 예를 들어 열 작품을 꿈꾸면 최소한 다섯은 현실로 이뤄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신감이 예전 같지 않아요.”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배우가 가진 고민은 허심탄회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와 그 한계를 순순히 인정했다.
“연극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졌지만 연극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예전에 비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환경과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죠. 십 년 전만 해도 작품을 할 때 ‘거침없이 하이킥’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 조금 겁도 나고 두렵고…. 나이가 드니 계획을 세우면 젊었을 때는 이삼 일 정도면 실행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이 되어야 움직이는 것 같아요(웃음). 이러다 혹시라도 직무유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죠. 제가 생각하는 최선에 이르지 못했을 때 다음 스텝에 많은 걸림돌이 될 테고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삶의 가치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윤석화는 맺고 끊음이 분명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삶에 대한 깔끔한 태도는 나이가 주는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나이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지혜가 발휘되는 거겠지요. 내 앞의 현실을 수용해야지, ‘이래도 할 수 있어’라고 우기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추해보일 수도 있고, 교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에요.”
나이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수용을 추구하는 본인의 기준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을 고집한다. 그녀의 꿈은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고, 지금 기자 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충실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보톡스를 안 맞는 거죠. 배우는 자기를 관리하는 게 의무입니다. 그런데 너무 인위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면 안 예뻐 보이더라고요. 예전부터 하는 얘기지만 나이든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책임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 굉장히 두렵죠. 저도 그것에 대해선 자신 없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냥 잘하려고 노력해요. 가능하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뻐하고 내게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라는 거죠. 그렇게 나이 들다 보면 향기가 나지 않을까요(웃음)?”
배우로서 사랑받는다는 의미를 깨닫다
윤석화는 연극배우로서 살아왔고 연극배우로서 세상을 익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연극이다.
“제가 연극배우로서 삶을 배우고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 관점이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TV나 영화나 음반 제의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유명해지는 게 싫어서 연극을 했어요. 연극을 해보니까 이건 유명해지지도 않고,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 같았죠.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연극이 무엇인지 깨달을 무렵 내가 평생을 걸어도 좋을 나의 업이다 싶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국을 갔죠.”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언론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꾸밈조차 싫었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가 없었다면 좀 더 자유롭게 큰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을지도 몰라요. 늘 주목을 받는다는 게 제게는 자유를 뺏기는 기분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도 넘고 저 강도 건너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스타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백 명이 날 좋아한다고 쳐요. 그중 구십 명은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이고 열 명은 정말 윤석화를 사랑하는 팬으로 남을 수 있겠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찌됐든 인기가 있다는 것, 윤석화를 보러 그 연극을 보러 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거예요. 인기가 있었으니 그만큼 연기를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감사해요.”
연극에 뼈를 묻고 살아온 윤석화가 변신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최근 SBS 드라마 에 출연했다.
“드라마를 무조건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좋은 드라마가 있으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워낙 안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됐죠. 물론 제 본분은 연극이니 선배로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고집들에서 좀 자유로워졌어요. 뭐든 때가 있는 거겠죠(웃음).”
어머니는 위대하다
연극인으로서의 삶만큼이나 윤석화의 삶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늦깎이 엄마로서의 삶이다. ‘가슴으로 낳은’ 수민(아들 14세), 수화(딸 10세)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 걸까?
“어머니는 정말 희생이에요. 육아를 해보니 힘들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된다면 어떤 이유라 해도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꿈꾸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정말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아는 게 중요하죠.”
‘제일 부러운 사람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있어서 급할 때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그간 겪었던 육아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저의 경우 가장 힘든 것은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죠. 공부를 하라고 해야 하는지 놀라고 해야 하는지, 야단을 쳐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정말 ‘뇌가 흘러내린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그녀는 어머니가 가정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단적으로 말했다. 가정은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내심도 많아야 하고 포용력도 있어야 되고 단호함도 있어야 해요. 그게 여자예요. 남자는 그게 안 돼요.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결과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요.”
국내 입양 위한 일곱 번째 자선 콘서트
아이에게서 너무 멀찌감치 떨어져 생각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윤석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 그렇게 예뻤던 애가 지금은 내 아들이 맞나 싶고…. 한편으론 애가 컸구나 싶어 뿌듯하지만 ‘잘못 크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돼요. 말하는 것만 봐도 ‘으유~!’ 이러고 싶을 때 있죠. 그러나 ‘엄마 말 들어봐~’하며 인내심으로 달랩니다. 이론은 쉽죠. 저는 말하는 게 굉장히 직설적인데 아이한테는 그럴 수 없어요.”
아이를 키우기로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과감한 결정을 한 것은 열악한 국내 입양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그녀는 국내 입양을 위한 자선 콘서트와 바자회를 지금까지 여섯 차례 열었다. 2015년에는 이틀 동안 가수 이문세, 배우 황정민과 박건형, 기타리스트 함춘호 등 그녀와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이 무대에 나와 그녀를 도와줬다. 올해는 하루 더 늘려서 5월 5, 6, 7일 3일 동안 동숭동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일곱 번째 콘서트와 자선 바자회를 연다. 그녀는 2003년부터 국내 입양기관과 미혼모 자립을 위해 자선 콘서트를 계속 열어왔으며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도 모두 기부하고 있다.
의연하게, 담대하게, 온유하게
“제가 오늘 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에요. 기쁘게 죽을 거예요. 저 자신을 위해선 할 만큼 했고 누릴 만큼 누렸어요. 누군가는 가소롭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그릇이 그러니까요. 물론 제 신념은 ‘죽을 때까지 결코 죽지 않겠다’예요. 미리 죽지 않고 그래서 그냥 인생을 다 사는 여자(웃음).”
시원시원한 목소리 톤만큼이나 인생을 논하는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에게도 아직 해보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왜 없겠어요, 많죠. 하지만 사람이 자기가 해보고 싶은 거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뭘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것 자체가 살아있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걸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길을 가야겠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저는 저답게 살기를 바라요”라는 말에는 윤석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침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사람이 말할 수 있는 확신에 찬 결론이기도 했다.
“누구처럼 멋있게, 누구처럼 돈 많게, 누구처럼 가난하게도 아니고 저다운 저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저답게 살고 싶었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 넘게 살면서 약간의 후회는 있죠. 부족하고 거칠었던 철없던 날들이었지만 다시 다잡고 살았어요. 그래도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의연하고 담대하고 온유하게 산 것이 바로 저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조금 더 깊어지면 예쁜 할머니가 되겠죠(웃음).”
중년은 인생의 황금기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기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시간과 금전 때문에 미뤘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 전문가로 우뚝 서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서기도 한다. 중년이 만족스러워 중년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의 절정기여서 유혹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누가 기반을 잡지 못한 청년 혹은 활력이 떨어지는 노인을 유혹하겠는가? 성공한 사람은 권력, 명예, 재물, 이성의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이성의 유혹이다. 가정 파괴와 가족 구성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외도는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의 이성과 깊은 관계에 빠지는 것이다. 중년에 이성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뭘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 이제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며 허무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유혹은 이러한 틈새를 타고 시작된다. 외도를 해도 평생 들키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대가를 치른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부모님의 이혼으로 학창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안 올랐고 외톨이처럼 우울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수십 년이 지난 뒤 알게 됐다.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한 뒤 재혼을 해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친구는 상당 기간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첫째, 유혹에 빠질 환경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다.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다. 은밀한 만남은 피해야 한다. 유혹을 받을 경우가 생기면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게 현명한 일이다. 둘째,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지만 반드시 그 값을 치른다. 조금만 즐겨보자고 시작한 관계는 결국 인생을 망친다. 마약환자, 도박중독자도 다 그렇게 시작한다. 자신에게 그러한 결단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빠져보고 그만두자는 생각은 위험하다. 순간의 유혹에 빠질 때는 달콤하지만 그 결과는 가혹하다. 유혹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절세미인 황진이의 유혹을 견딘 서경덕은 얼마나 대단한가. 셋째,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나태해질 때야말로 유혹에 빠지기 쉽다. 다윗 왕이 부하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륜에 빠진 것도 전쟁터가 아닌 한가하게 낮잠 잘 때 발생했다. 넷째,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최고의 이상형을 만난 것처럼 느껴져도 살다 보면 단점이 발견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상형을 택한 사람은 그래서 대부분 후회한다.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짧은 인생 한 사람만 죽도록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 최고의 이상형과 사랑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필자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같이 살기로 약속했으니 그럴 기회가 없지만 말이다.
중년에 어렵게 얻은 가치들을 외도로 날려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순간의 유혹들이 있어도 그때마다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유혹을 이겨낸 인생이야말로 멋진 인생이다. 자만심이나 공허감을 극복하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우리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또 좀 더 성숙된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골프는 나이 들어서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다만 나이에 맞게 할 필요가 있다. 젊은 시절처럼 하면 몸에 무리가 생겨 더는 즐길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등산을 좋아하던 사람들 중에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봤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은 사람처럼 산을 오르내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골프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은 경기를 시작하면 텔레비전에서 봤던 프로처럼 전력을 다해 풀 스윙을 하곤 한다. 더 나은 점수를 내고 싶거나 동반자를 이기고 싶은 욕심이 은근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이루었던 최고 점수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듯 현장에 서면 자기도 모르게 꿈틀거리며 욕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날의 골프 타수는 늘어나게 마련이다. 반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하면 오히려 점수가 좋아지는 경험이 있다.
오랜만에 골프 예약이 있는 날이면 전날에 시간을 내어 열심히 연습한다. 연습까지 했으니 골프 결과가 좋아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다. 그동안 쓰지 않던 근육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랄 것 없이 욕심을 있다. 자신의 현실을 종종 잊는다. 현실을 인정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골프를 즐겁게 칠 수 있는 전제다.
나이가 들면 경험에 의한 요령이 는다. 그러나 이 요령도 몸이 잘 따라주지 못해 실전에 적용하는 데는 실패한다. 골프를 시작하는 일반인들의 연령대는 40대가 많다고 한다.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는 시기다. 반면 선수들은 10대에 시작해서 대부분 20대에 프로생활을 한다. 세계를 누비는 한국의 남녀 프로선수들을 봐도 그렇다. 이 연령대를 벗어나면 순위에서 밀려나게 되고 은퇴를 한다. 일반인들은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보면서 그들처럼 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20대를 지나면 신체는 자연스럽게 노화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시의 근육 상태에 맞는 자연스러운 스윙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골프 기술에 완성이라는 말은 없다. 유명한 선수들이 쉬지 않고 연습하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전거는 한 번만 배우면 평생을 잊지 않고 탈 수 있다. 그러나 골프는 연습이나 실전을 하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스윙이 흐트러진다. 몸 근육이 스윙 궤도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은 골퍼는 주변 연습장을 자주 찾지만 직장인들은 주말을 이용해 연습하는 게 고작이다. 또 혼자서 책이나 비디오, 골프방송을 보면서 공부를 한다. 하지만 막상 필드에서 혼자 익혔던 기술이 실행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그럴수록 골프 타수는 늘어나기만 한다.
필자의 친구 중 한 사람은 골프 경력이 아주 오래되었고 평소 파 플레이 이상을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100타를 쳤다고 한다. 1년 동안 독일 어학연수를 하느라 골프채를 손에 잡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력과 실력이 좋은 사람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 유지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물며 근육의 노화가 일어나는 나이 든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골프 실력을 향상하려는 마음보다 어떻게 골프를 즐길까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어느 나이 든 분이 공이 그린에 올라가면 홀 아웃 하며 경기를 즐기는 광경을 보았다. 이런 방법도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한 남학생이 쏜살같이 내달려왔다. 아무래도 부딪힐 거 같은 불안함으로 살짝 비켜서는데 어느새 필자의 오른쪽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필자는 당황해하면서 멈춰 섰고, 뒤를 돌아보자 남학생은 뒷모습을 보이며 벌써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발에 뭔가 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려다보니 오른발 옆에 편지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혹시 아버지가?’ 하면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이젠 남학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던 필자는 순간 화장실에 들어가 편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냅다 집으로 뛰어갔다.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보려는데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느껴지던지 방에 있는 엄마와 동생들이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화장실에서도 편지를 열어보지 못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 없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서관 가는 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큰 나무 밑에 편지를 던지고 간 남학생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필자는 쏜살같이 남학생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남학생 등 위로 열어보려다 만 편지를 휙 집어던지고는 돌아서서 도망치듯 달아났다. “저기요!” 하며 다급하게 필자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차서 씩씩거리며 겨우 멈춰 선 곳은 집 근처 숲 속, 필자가 자주 찾아가던 비밀 아지트였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혼자 엉엉 울다가 눈물을 닦고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필자를 안방으로 불렀다. 어떤 남학생이 불쑥 찾아와 엄마한테 필자를 동생 삼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면서 아는 사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엄마는 “이 편지도 주더라?” 하며 필자에게 돌려주었다.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읽어보니 “여동생이 되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평소에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잠시 혹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엄마가 낳은 오빠가 아니라서 바로 단념했다. 필자는 평생 단 한 번도 ‘오빠’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 그때 생각을 바꿨다면 필자에게도 오빠가 한 명 생겼을지도 모른다. 오호 통재라!! 어쩌면 예쁘고 아름다운 첫사랑으로 엮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왜 오빠들이 못살게 군다는 친구들 말만 떠올랐는지…. 그렇게 용기 있던 남학생의 시도는 불발탄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남학생은 동네방네 소문이 날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원하는 대학에는 못 들어갔다고 한다. 대학도 낙방하고, 거기에 내 반응도 그랬으니 상심이 컸으리라. 혹시라도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직도 여동생이 필요하냐는 농담 같은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빌려간 사람?”
국어 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 묻자 시끌벅적하던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누가 손을 들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 책 빌리러 도서관에 갔더니 어느 학생이 빌려갔는지 대출 중이더라. 그 학생이 누군지 알게 되면 칭찬 해주려고 했는데 이 반 학생은 아니었구나”
필자는 부끄러운 생각에 손을 들지 못하고 얼굴만 빨개졌다.
필자가 책을 좋아하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윤리를 담당하던 선생님 덕분이었다. 두꺼운 검은테 안경을 쓰고 늘 진지한 태도로 수업을 하셨다. 재미없는 선생님 중 한 분으로 꼽혔지만,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재미난 책을 종종 소개해 주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피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 였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책도 있구나 하며 순식간에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을 읽은 후 필자는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됐다.텅 빈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밤늦도록 읽느라 불 끄고 그만 좀 자자는 동생의 원성도 들어야 했지만 그 조차 즐거웠다.
당시 필자는 좁은문이나 마담 보봐리, 주홍글씨와 같은 고전들을 주로 읽었다. 때로는 니체나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골라들고 끙끙거렸지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읽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좌와 벌을 읽은 후엔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료돼 도서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빌렸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 복잡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선생님의 칭찬이 너무 부끄러웠다. 선뜻 손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날 필자가 느낀 부끄러움은, 남다른 구석 없이 평범하고 공부도 잘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드디어 선생님의 시선과 관심을 끌었다는 사실과, 책을 읽는다는 것이 고결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걸 확인한 데서 오는 희열 같은 거였다. 그 날 들었던 선생님의 한 마디는 마음 속에 자랑스럽게 각인되었다. 그후 필자는 ‘도서관에 들어온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나간다’는 앤드류 카네기의 말을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다.